내일 모레 3분의 1 지점 부르고스에서 쭉 휴식을 취하기 위해 오늘 부르고스 근처까지만 걸어가기로 하고 길을 나선다. 이상하게 푹 잠들지 못해서 비몽사몽간에 짐 챙겨서 걷기 시작.
시작부터 즐거운(?) 등산. 의외로 올라가는 길이 짧아서 이런 경치도 감상 할 수 있었다.
새벽이나 아침 일찍 산 올라가면 풀냄새가 난다.
오늘의 목적지는 이정표에 없다.
산 후안 데 오르테가와 부르고스 사이 작은 마을이 목적지.
어느새 산티아고 콤프스텔라까진 526km가 남았다고 한다.
내일이 지나면 400km대로 내려가겠지.
비포장길이 자갈길로, 자갈길 위에 시야가 탁 트이는 순간 눈에 들어오는 스페인 내전 희생자 추모비.
산 중간에 있어서 사람이 오기 어려운 지역 같은데 생화가 있다.
비석이나 주변 상태를 보면 누군가 관리하는 사람이 있는것 같다.
전쟁으로 죽는 사람은 억울할 것이고 그 가족은 후유증을 가지고 살아갈것이다.
희생자 비석을 지나면 다시 비포장길.
개발을 하려는 듯 나무가 베어져 있고 굴삭기, 트럭 바퀴 자국이 많이 나있다.
중간중간 물 웅덩이랑 진흙지대도 넓게 펼쳐져 있어서 짜증도 증가.
당연히 그늘은 없다.
길었던 산길이 끝날 때 산 후안 데 오르테가 입구가 보인다.
여기 성당도 유서깊은 성당이라고는 하는데 보수공사가 한참 진행중이었다.
곧 있을 부활절에 맞춰 끝낼 거라고 한다.
성당 한가운데 성모상이 있는게 특이했다.
이 성당은 조명이 따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오래된) 성당들에 비해 엄청 환했는데
이렇게 사방에 빛이 들어오는데 저 빛들이 중앙에 성모상을 비추고 성당 중앙에 빛이 모이는 구조라 해가 지기 전에는 따로 조명이 필요 없을 정도라고 한다. (그럼 저녁 미사는?...)
반나절 동안 산행을 하느라 지쳤기도 하고 오늘은 갈 길이 그렇게 멀지가 않아서 점심먹고 밍기적 거리다가 천천히 걷기 시작. 중간에 루트를 변형시켜서 길 위에는 나 혼자밖에 없다.
원래 예정대로면 산 후안데 오르테가, 혹은 다음 마을 아혜스에서 오늘 일정을 마쳐야 하는데 시간대도 애매하고 길 위에 사람이 있을리가 없다.
친절하게도 나무에 페인트칠을 해놨다.
여기서 길을 잃을리는 없겠지만 너무 탁 트인 와중에 방향 표시가 없으면 불안할테니까 그려놓은 누군가의 배려겠지.
나무를 지나서 얼마 되지 않아 아혜스 도착. 시간은 13시 10분.
산티아고까지 518km.
루트를 변형하는 바람에 여긴 지나쳤지만 다음에 또 카미노를 걷는다면 여기서 하루 쉬어보고 싶은 마을이다.
동네 자체가 아기자기하고 알베르게 세 곳 주인 모두가 출처를 알 수 없는 한국말을 구사하며 다른 동네에 비해 많이 유쾌하시다.
동네 자체의 유쾌함에 끌려서 여기서 오늘은 끝내볼까? 생각도 했지만 부르고스를 좀 이른 시간에 들어가서 동네 구경을 해보고 싶어서 계속 걷기로 한다.
아혜스에서 아타푸에르카는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
아타푸에르카 고원을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 초코바하고 물을 다시 샀다.
오후 2시 가까운 시간에 고원 등반은 부담스럽긴 하지만 못 할 정도는 아니다.
고원을 올라가기 시작한다.
왼쪽에는 지뢰밭, 오른쪽은 포도밭. 오늘 걸어가는 구역은 스페인 내전 당시 격전지였던 것 같다.
푼토 데 비스타. 십자가. 해발 1070m.
이 위에서는 부르고스가 보인다.
부르고스까지 가는 길에 지나갈 마을까지 한눈에 들어오고 철조망이 처진 방송탑, 넝마처럼 파헤쳐진 광산이 보인다.
조금 더 앞으로 가보면 누군가 돌로 이렇게 만들어놨다
여기가 현생인류 출현단계 쯤? 에서 거주구역이였나 암튼 엄청난 유적지라고 한다.
그리고 고원이라 그런지 바람이 엄청나게 분다.
물론 뭐라고 써놨는지 알 수가 없다. -_-;;
여기서 알아듣는 단어는 부르게테, 몬테스 데 나바라, 에스파냐 비스타 정도. 뭐라고 써놓은걸까.
나중에 한국와서 보니까 역광.
오늘 걸어온 길은 물론 앞으로 갈 길까지 다 보이는 곳이라 이정표가 3방향으로 서있다.
이정표는 역시 노란 화살표가 정감있고 좋다.
이제는 눈에도 잘 들어온다.
올라왔으니 이제 내려 갈 일이 남았다.
눈에 보인다고 가까운게 아니다. 그리고 여기 올라오면서 묘하게 십자가의 길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기분탓이겠지.
고원을 내려와서 두번째에 있는 마을 우물.
이거 로마시대부터 있었던건데 2천년동안 물이 마르지 않고 나온다고 한다.
카르데뉴엘라로 가는길에 있는 알베르게 홍보 버스화(?) ㅋㅋ
태극기가 반가웠다.
카르데뉴엘라 도착.
마을 주점 벽에 그려진 벽화가 인상적이다.
모든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는 집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오늘은 혼자 잘 거 같다. 동네 위치가 애매하니까 혼자 알베르게를 쓰게 됐다. 1인실이라니 좋군.
샤워를 하고 밥 먹으러 가면서 성당 구경...을 하려고 했으나 너무 오래되어 보수중이라 내부는 못 들어가고 외부만 구경. 어지간히 오래되긴 했나보다.
한국에서 겨울 끝자락에 출발했고 스페인에서도 겨울이었는데 어느새 봄.
나만 혼자 다른 세상에서 있는 줄 알았는데 정신차려 보니까 계절이 바뀌어 있다.
오늘의 순례자 메뉴. 저 위에 닭죽 생긴건 별론데 먹어보면 엄청 맛있다.
닭고기를 잘게 찢어서 와인을 넣어서 어떻게 끓인거라고 하는데 어떻게 저렇게 만든건지 신기.
아래 저 고기는 토끼고기. 약간 질기긴 하지만 평소에 자주 먹는 소, 닭, 돼지와는 다른 쫄깃한 식감이 있다.
느끼한건 함정.
내일은 부르고스에 들어간다.
15km 정도 걸을 거 같은데 하루 푹 쉬고 남은 거리, 날짜 배분을 다시 해봐야겠다.
피니스테레를 갈 생각이 없었는데 여기까지 온 거 내가 언제 대서양 끝 바다를 가보겠냐는 생각이 들어서 아무래도 전체 일정 수정을 한번 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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