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흑역사.
보도연맹 학살사건과 더불어 한국전쟁의 최대의 병크 중 하나이자 대형참사. 적군도 아니고, 아군 내부의 부정부패와 인명경시로 인해 100여일 사이에 총도 못 쏴본 아군을 수천에서 수만 명까지 죽게 만든 희대의 병크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으로 눈물의 장관 독립유공자인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물러났다. 국민방위군 사건이 진상규명되는 과정에서 국방장관 신성모를 비롯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진상규명이 방해받는것을 지켜보았던 부통령 이시영(李始榮)은 제1공화국 정부에 크게 실망감을 느껴 이에 반발하여 부통령직을 사표 제출하는등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목차
1 첫 부대 소집
2 죽음의 행렬
3 예산 유용
4 사망자 수
5 사건에 대한 책임처벌과 정치적 영향
6 이야기거리
1 첫 부대 소집 ¶
1950년, 한국군과 유엔군은 중국군의 개입에 의해 다시 남쪽으로 후퇴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 요인들은 그 동안 인민군 치하에 있었던 남쪽의 장정들을 인적자원 차원에서 중국군에 의해 빼앗기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같은 해 12월 15일에 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살 이상 40살 이하의 장정을 제2국민병에 편입한 뒤 제2국민병 중 학생이 아닌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수십만의 장정을 동원하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예산계획을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통과시켰을 정도로 준비가 매우 허술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12월 21일에 첫 부대 1만여 명이 창덕궁에 소집돼 행렬에 나섰다. 사실 중국군의 진격이 너무 빨라 그로부터 겨우 2주 뒤에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서두른 게 이해는 가지만, 아직 행정체계고 뭐고 제대로 갖춰지기도 전에 전토의 90%를 상실했다 수복했다 다시 상실하는 상황에서 이런 대규모 인원이송을 기획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재앙을 예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2 죽음의 행렬 ¶
당시 작전처장 증언에 따르면 1만명 가까운 병력을 후송하는데 쌀, 군복 하나 안 주고 언제까지 집결하라는 것도 없이 '착지(着地) 부산 구포'라는 작전명령을 육군본부로부터 하달받았고, 행군 중 대열 책임자가 경유지의 시장이나 군수에게 하달받은 양곡권을 보이고 급식을 해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국방부와 내무부가 서로 양곡지급권을 갖겠다고 다투느라[1] 양곡권 지급이 제대로 안 되었고 내무부는 각 시장 군수에게 양곡 지급을 중단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들 끼니는 제대로 해결 될리가 없었으며, 심지어 인민군 치하에 의용군 대접만도 못할 정도였다. 의용군에서 탈출해 국민방위군에 자원입대했던 분의 경우 "의용군 시절에는 주먹밥이나마 하루 세끼를 거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국민방위군으로 남하할 때는 병자나 아사자가 속출해도 돌봐주는 이 없는 거지 중의 상거지였다"라고 회고할 정도.
게다가 때가 12월이고 그것도 당시까지 유례없는 혹한이었는데, 소집된 장정들은 정부의 책임하에 소집되었으니 정부가 먹여주고 입혀주지 않겠느냐 생각하고 홑바지와 저고리 차림에 길을 나섰는데, 정작 정부는 이들을 위한 옷값도 배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현금을 주더라도 방한복 50만벌을 구할 길이 없는데 예산은 배정해서 무엇하냐는 것이었다. 이뭐병. 따라서 장정들은 서로의 체온과 2명당 1장씩 지급된 가마니로 동사를 면해야했으며, 교실 하나에 수백명이 모여 서로 몸을 맞대고 자야 했고, 그런 상황에서 질병이 창궐하여 몸이 약해진 사람들이 열병으로 수도 없이 죽었다. 말 그대로 죽음의 행군이었는데, 문제는 이 행군이 끝난 것으로 국민방위군의 재난이 다 끝난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3 예산 유용 ¶
법안에 따르면 정부는 국민방위대가 약 50만 병력임을 가정, 후방에 50여개의 교육대를 설치해 1개 교육대 당 1만여명을 수용할 것을 명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교육대의 기간요원들은 병력이 오더라도 이들을 받아들일 능력도 의사도 없었다. 게다가 병력 운용을 실질적으로 담당하였던 간부, 장병들의 월급마저 계산해두지 않고 알아서 해쳐먹으라는 식으로 건을 던져주었다. 거기에 교육대 간부 및 장병들은 이승만 정부 산하의 극우 테러 단체였던 서북청년회 소속이 합류한 대한청년단 간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군행정에 대한 지식이나 책임감, 직업 윤리의식이 부족하며 당장 자기보전과 부의 축적부터가 우선인 친정부 민간단체 인력을 간부로 충원한 것.
따라서 이러한 간섭은 군부 쪽의 반감을 사게 되며, 교육대 간부와 장병들은 병력이 죽음의 행군에 필적하는 고생 끝에 도착하면, 자기들에겐 수용능력이 없으니 다른 교육대를 알아보라는 식으로 계속 뺑뺑이를 돌리면서 이들을 수용한 것 처럼 서류를 날조해 예산을 빼돌렸다. 이런 식으로 빼돌린 예산이 수사당국의 발표로는 24억원, 국회조사단의 주장으로는 50억원 내지 60억원에 달했다.[2] 국민방위군 재정을 실질적으로 총괄한 부사령관 윤익헌은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기생들에게 돈을 뿌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를 수사한 인사가 훗날 "윤익헌이 돈을 쓰듯이 물을 써봤으면 했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물쓰듯이 돈을 쓰는" 게 아니라...(당시엔 피난민이 몰려 물이 무척 귀했다.)
뒤늦게 국민방위군에 할당된 예산에 따라 식량이 지급된다 하더라도 국민방위군 장정들은 하루에 4홉을 배급받게 돼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하루 5홉 5작을 받는 전쟁포로들보다 못한 것이었고, 빠듯한 예산에서 윗사람부터 사병까지 떼먹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국민방위군 사령부는 예산 횡령을 위한 한 방편으로 장부상으로 젤리공장 또는 엿공장을 짓는다고 써놓았다. 이렇게 무능한 정부에 의해 굶주린 장정들은 훈련을 빌미로 마을로 가서 먹을 것을 탈취하고 잔치집과 굿판을 습격하는 등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 빈속에 급하게 먹어서 토사곽란으로 죽은 장정들까지 발생하였다.
4 사망자 수 ¶
정부의 공식기록에는 천수백명 사망으로 돼 있지만 당시 소문으로는 5만명 내지 10만명이 죽었다고 하며. 중앙일보가 간행한 <민족의 증언>에는 50만명의 대원 중 2할가량이 병사나 아사했다고 돼 있고, 부산일보가 간행한 <임시수도 천일>에는 사망자가 5만여명으로 돼 있다. 아직까지도 구체적인 사망자 수는 계측 자체가 불가능하다.
5 사건에 대한 책임처벌과 정치적 영향 ¶
국민방위군의 참상이 곳곳에서 목격되면서 사회문제가 되자 사건 수사가 진행되었고 관련자들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하지만 재판으로 선고된 형량이 너무 낮자 사회적으로 비판 여론이 확산되었고 이승만은 신성모를 국방장관에서 물러나게 하고 이기붕을 장관에 임명했다. 사태의 수습을 위해 국방장관에 임명된 이기붕은 일사부재리의 원칙까지 어기고 재심을 명하여 국민방위군의 주요 간부 5명에게 사형을 선고, 정부에 대한 민중들의 불신풍조를 불식시키는 차원에서 본래 비공개인 군사재판을 공개로 돌리고 방청객을 위한 스피커까지 설치하여 재판의 공정성을 알리려 했다. 그리고 당시 사령관 김윤근을 이승만이 빼돌릴거라는 소문이 돌아 이들은 대구 근교야산에서 공개처형된다. 이렇게 이례적인 조치가 반복되었다는 점에서 그 자유당 정권에서조차 이 사건이 얼마나 심각하게 여겨졌는지 알 수 있다. 그 결과 이승만 다음 세력자였던 신성모가 세력을 잃고 사건 관련자들을 엄벌하여 인기가 급상승한 이기붕은 후계자로 부상했다.
국민방위군 사령관 외 5명 총살집행순간
6 이야기거리 ¶
한국전쟁 기간에 우리쪽 군인들이 추위 속에서 굶주리다 처참하게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면 거의 여기 끌려갔다고 보면된다. 당시 한국군의 병참이 형편없긴 했어도 국민방위군처럼 형편없지는 않았다.
이 사건을 보고 현 정권 수준에 크게 실망한 이시영은 부통령직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껍데기는 가라"로 유명한 시인 신동엽이 국민방위군으로 차출되었다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민물게를 잡아 생으로 먹었다가 이것이 간디스토마로 발병했다. 이것이 훗날 신동엽이 간암으로 요절하게 된 이유.
당시 한 의원이 실상 파악을 하러 갈 때 가마니를 뒤집어쓴 어느 거지 방위군이 어딘가로 가는 모습을 보고 어디로 가냐고 묻자 이 병사는 "김일성에게 간다 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국민방위군 자체가 북한의 공격을 막는다는 1차 목표 이외에도 서북청년단과 이승만 친위세력이 군과 별도 조직으로서의 무장을 하는 단체를 가진다는 목적으로 보기도 하나, 친위대를 만들겠다는 목적에 이렇게 예산배정과 보급을 개판으로 하는 건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별 설득력은 없어 보인다.
정진석 추기경이 이때 생존자이다. 그리고 그때의 참상으로 삶에 회의를 느껴 최종적으로는 신에게 귀의했다.
당시 통역장교인 리영희는 이때 참상을 목전에서 봤다. 그는 미군 고문단 장교와 함께 무리하게 보급품을 빼서 그들을 도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 뒤에 리영희는 대한민국 체제에 대해서 회의감을 가졌고, 이는 이후 그의 사상 체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최종 책임자는 당시 참모총장인 정일권인데 정일권의 한국전 회고록이나 이후 최종판 회고록이 대단히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수록한 반면에 이 사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다.
한 마디로 보도연맹 사건과 더불어 한국전쟁에서 있었던 병크 중의 병크 1, 2위를 다투는 수준이다. 아닌 말로 이건 구 일본군이나 소련군이 미군 또는 독일군 포로에게 했던 짓만도 못한 짓을 자국의 예비병력 대상으로 저지른 꼴이다. 보도연맹 사건이 잠재적인 적으로 생각되는 특정 계층의 국민을 상대로 제노사이드를 실행한 사건이라면, 이건 자국의 예비병력에 대한 관리 의무를 방기한 끝에 제노사이드에 필적하는 참사가 벌어진 셈인 것이다.
그외에도 울릉도에서는 국민방위군 간부가 월권행위를 해서 민폐를 끼쳤다. 여기서 기자와 담화하는 국민방위군의 박경구(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20_1951_03_20_0100)는 백의사의 간부이자,독립유공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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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엔하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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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보면 윗놈들이 문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