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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수구파의 생얼] 성폭력의 야만이 반복되는 이유 (1) 2015/06/13 AM 10:42


인도 비하르주의 파트나에서 벌어진 시위. 집단 성폭행 피해자의 사망 소식에 시위가 더욱 격렬해졌다. 사진=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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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회로 <인도 수구보수파들의 생얼> 연재를 마친다. 필자들은 인도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제가 바로 우리의 문제이고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전하려고 했다. 그동안 연재 글을 보내준 이광수, 한형식 선생에게 감사 인사를 드린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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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은 인도사회 수구집단의 논리와 사고방식이 가장 야만적으로 표현되는 현상이다. 성폭력을 저지르는 가해자들의 행위와 태도뿐만 아니라 성폭력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을 통해서도 인도 수구세력의 생각은 잘 드러난다.

2012년 12월 인도 수도 델리에서 23세 여대생이 남성 6명에게 집단강간과 폭행을 당했고 병원 치료 13일 만에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인도뿐만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알려진 이 사건으로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인도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가 다시 한 번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사건 1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아무리 충격적인 사건이 터져도 이내 잠잠해지고 낡은 관행 속으로 되돌아가버렸던 과거와는 분명히 다른 상황이다.

하지만 낙관적이지만도 않다. “살인의 추억”이란 영화에서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야?”라는 송강호의 대사처럼 어느 외신은 “인도는 강간의 수도(capital)인가?”라는 도발적인 제목을 달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제목에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 정도로 인도의 성폭력 문제는 아직도 심각하다.

사실 공식적인 통계만 보면 인도의 성폭력 건수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상당히 낮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보고되지 않은 사건이 훨씬 더 많을 거라 생각한다. 1990년에서 2008년 사이에 강간사건은 두 배로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강간사건의 실제 증가보다 신고되지 않던 사건들이 신고된 것이 원인이라고 본다.

국제적 인권단체인 휴먼라이트워치(Human Rights Watch)도 신고되는 강간사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들에 따르면 많은 피해 여성들이 신고를 꺼려하는 가장 큰 이유는 피해자를 오히려 비난하는 낙인효과다.

피해자의 행실, 처신을 원인으로 돌리거나, 가족이나 촌락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비난하는(심지어 ‘명예살인’의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분위기로 인해 강간사건 피해자는 사건 이후에 오히려 더 큰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강간사건을 신고해도 경찰이나 병원에서는 무시하고 그냥 돌려보내는 일도 허다하다.

많은 성범죄 사건이 몇 년씩 종결되지 않는 것도 문제다. 게다가 강간피해 사실을 입증한다는 명분으로 “처녀성 검사”를 강요받는 치욕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인도 출신 여성작가 소냐 팔레이로는 “성폭행 피해자에 대해 더럽혀졌다고 보는 인도의 문화가 문제다. 아무도 성범죄 피해자와 결혼하지 않으려 해 결국 가해자와 결혼하는 것이 해법으로 제시되는 현실을 바꿔야 한다”라고 <뉴욕 타임스> 기고문에서 말했다.

델리사건 이후 인도 정부의 대응은 예외적으로 신속했다. 그러나 이것은 인도 정부의 자발적인 의지 때문이 아니었다. 인도 국민들이 과거와는 다르게 커다란 분노를 시위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 정부를 움직인 것이다.

사건이 알져지자마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신속한 처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경찰은 용의자 여섯 명을 곧바로 체포했다. 사건 발생 직후 범인이 모두 체포됐고 살인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것은 이례적인 경우다. 2012년 델리에서만 600건에 이르는 성범죄가 경찰에 접수됐지만 유죄 선고가 내려진 것은 단 한 건이었다.

인도 의회는 정규 업무를 제쳐놓고 사건 대책을 논의했고 야당 대표는 범인들을 교수형 시켜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그리고 법과 관행의 개정도 이루어졌다. 성폭력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하는 별도의 재판 절차가 만들어졌다. 성폭력에 대한 정의도 더 포괄적이 되어 성기 삽입 이외의 다양한 공격 행위들도 처벌할 수 있게 되었다. 처벌도 강화되었고 가해자에게 피해자의 치료와 재활에 필요한 비용도 보상하게 만드는 법도 만들어졌다. 형사소송법 상에 40년 만에 가장 큰 변화가 도입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치권이 이렇게 신속하게 대응하는 것은 누구나 짐작하듯이 올해 5월의 총선 때문이었다. 델리사건에 대한 국내외의 여론이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 챈 정치인들이 갑자기 반성폭력 활동가라도 된 듯이 행세하고 있다. 델리사건의 피해여성을 싱가포르까지 가서 치료받게 한 것과 피해자가 이송되는 공항에 수많은 정치인들이 등장한 것도 표를 의식한 가식이라는 비판이 많다.

정치권의 진정성이 의심받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입으로는 성폭력을 비판하고 처벌강화를 위한 법제화도 하지만 정작 정치권 내부에서의 자정 노력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명백한 성폭력 가해자가 정당의 공천을 받아 당선되었는데 이들을 제재하는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고 있다.

최근 5년간 성폭력을 비롯해 여성을 상대로 가한 범죄행위에 연루된 국가고위직 선거후보자 수가 200명이 넘고 그 중 6명이 당선되어 현재도 주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 밖에 여성을 상대로 저지른 범죄에 연루된 국회의원 수가 36명인 것으로 공개되었다.

성폭력 문제에 대한 인도 정치인, 고위관료들의 말도 그들의 여성비하적 인식 수준을 잘 보여준다. 인도의 최고 수사기관인 중앙수사국(CBI)의 국장은 “도박을 금지하기 힘들면 도박을 합법화해서 수입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성폭력을 막을 수 없다면 즐기는 것과 같다.”는 말을 해서 비난을 자초했다.

델리 경찰 책임자의 발언은 보수적 시각을 잘 보여주는 또 다른 흥미로운 예다. 그는 인도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사건의 97%에서 가해자는 피해자가 아는 사람이고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는 가해자의 집인 경우가 많다는 통계를 제시했다.

이 통계는 언론에서 주로 보도하는 공공장소에서의 엽기적인 성폭력 사건보다 일상의 공간에서 만연한 성폭력이 진짜 문제이며, 치안의 획기적인 강화만으로 성폭력을 줄이는 것은 한계가 있으며 사회적 관행, 의식, 문화, 제도가 모두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경찰 책임자는 이 통계를 성폭력 사건에 대한 경찰의 책임을 회피하고 피해자의 부주의한 처신에 책임을 돌리는데 사용했다. 그는 여성들이 가해자의 “침실이나 집으로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이렇게 노골적이진 않지만 보수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또 다른 입장도 있다. 이들은 여성에 대한 보호와 전통가치의 부활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즉 여성을 보호받아야 할 약자로 대상화하면서 사회의 보수화를 위한 명분으로 성폭력 문제를 악용하고 있다.

이런 관점은 성폭력 사건의 증가 원인을 여성의 지위 향상, 사회활동 증가에 있다고 보고 여성들을 다시 전통적인 여성(그들의 표현으로는 “진짜” 여성)으로 되돌리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보호라는 명분으로 여성의 자유를 제한하려 한다. 여성의 “문란한” 태도와 옷차림이 성폭력을 유발한다는 오래된 남성 중심적 논리가 되풀이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이러한 의견은 주로 정치인, 보수적 사회활동가 그리고 특히 종교인들의 주장이다. 어느 성직자는 성폭력을 당한 여성은 성폭력을 행한 남성을 형제로 품고 그들의 손을 잡고 신께 도움과 용서의 기도를 올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과학적이고 진보적인 분석 같지만 실제로는 아주 반동적인 시각이 깔려있는 논리도 있다. 인도의 남녀차별 문화를 비판하면서 그로 인한 남녀의 성비불균형을 성폭력의 주원인으로 보는 시각이다. 실제로 인도의 고질적인 남녀차별은 여아 출산을 부담스러운 짐으로 만들었다. 태아 성감별과 여자태아 낙태는 불법화되기는 했지만 광범위하게 저질러지고 있다. 그 결과 인도 거의 모든 지역에서 남녀의 성비 불균형은 심화되고 있다.

여성의 부족으로 결혼하지 못하는 가난한 남성들에게 다른 사회적 소외, 빈곤으로 인한 불만까지 더해져 교육받은 상류층 여성을 상대로 성폭력이라는 방식으로 복수한다는 논리가 널리 유포되고 있다.

2011년 인도 경찰 발표에 따르면 여성을 상대로 한 납치와 인신매매(trafficking)는 전해에 비해 각각 19.4%와 122%나 증가했다. 이 주장을 하는 이들은 납치와 인신매매의 증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다.

그러나 이 논리를 반박하는 사실들이 적지 않다. 여성차별은 빈부에 상관없이 만연한 풍조이고 더 부유하고 더 교육받은 계층도 예외는 아니다. 여아낙태로 인한 남녀성비 불균형이 가장 심한 지역은 남부 델리를 비롯한 부유한 지역들이다. 그리고 인신매매, 성매매 증가의 배경에는 여성비하적 문화와 급격한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한 조직범죄가 있다. 이 논리는 가해자를 피해자화하거나 가난한 남성을 악마화하는 오류에 빠진다. 한국의 소위 일베충에 대한 진보논자들의 분석에서도 이런 논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성폭력이 행해지는 양상을 보면 원인은 너무나 자명하다. 오랫동안 그리고 현재에도 성폭력은 더 많은 권력, 부를 가진 더 높은 계급의 남성들이 그 우위를 이용해 가난하고 낮은 신분의 여성들에게 공공연하게 저지르던 행위였다. 하층의 남성들이 상층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저지르는 범죄는 여전히 예외적이다. 이런 종류의 사건만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행태 자체를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인도 농촌의 지배계급인 지주-상층카스트 동맹은 자신들의 특권, 지위를 이용해 땅 없는 농민, 하층 카스트 여성들에게 성폭력을 저질러 왔지만 이로 인해 처벌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성폭력 피해자 중에 압도적인 수가 달리트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2007년 우따르 프라데시에서 보고된 성폭력 사건들을 분석한 시민단체의 보고서에 따르면 “피해자의 90%가 달리트였고 달리트 피해자의 85%가 미성년 소녀들이었다.”고 한다. 독립 이전부터 현재가지 인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달리트 여성은 그들의 낮은 사회적 지위, 빈곤에 의한 차별에 더해서 여성으로서의 차별까지 받아야 했다. 달리트 여성이 성폭력의 주된 대상이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델리 사건 이후에 인도 국내외 언론은 앞다투어 엽기적인 성폭력 사건들을 보도했다. 그 중에 인도에서 성폭력의 또 다른 사회적 원인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사건들이 있다. 바로 촌락에서 촌장이나 촌락회의, 촌락재판을 통해 여성을 성폭력하는 사례들이다.

몇 달 전에도 웨스트 벵갈의 어느 촌락에서는 촌락 밖의 남성과 문란한 행위를 해 촌락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촌장의 명령에 따라 집단 강간이 행해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촌락의 나이든 남성들이 주도하는 촌락 재판은 다른 부족과의 허가 받지 않은 관계에 대한 처벌로 처음에는 벌금을 선고했는데 여성이 가족이 벌금을 내지 못하자 집단강간이라는 처벌을 내렸다는 것이다. 사건의 진상을 둘러싼 여러 말이 무성하지만 인도 사회에서 전통적인 촌락이 얼마나 폐쇄적, 폭력적이며 여성차별적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자르칸드주의 치르가곤 마을에 사는 19세의 피어리 쿠마리는 몇 년 동안 같은 마을에 사는 네 명의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그 결과 아이를 낳았다. 피어리는 마을의 원로들에게 네 명의 성폭행 가해자들이 자신의 딸을 책임지게 해 줄 것을 요구했다. 촌장은 촌락회의를 소집하여 가해자 네 명에게 각각 3000루피(약 69불)의 벌금을 내도록 판결했고, 피어리에게는 이들 남자들과 부도덕한 관계를 지속해왔다는 이유로 마을을 떠날 것을 요구했다.

피해여성이 명백하게 부당한 이 판결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자 촌장은 경매를 열어 그녀와 딸을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사람에게 팔기로 결정했다. 실제로 경매가 열렸고 피어리와 그 딸은 고작 6루피에 팔렸다. 오랫동안 인도 여성들의 삶은 가족, 카스트나 촌락 같은 공동체의 비공식적 관습과 전통적 가치관의 지배를 받아왔다. 그 속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공동체의 전통적 가치관의 권위에 의존해 자행되었다.

앞의 통계에서 본 것처럼 미성년자들이 성폭력 피해자의 다수를 차지한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것은 성폭력이 나이 많은 그래서 사회적으로 더 우위에 있는 남성이 사회적 약자인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저질러짐을 의미한다. 즉 사회적 권력의 많고 적음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결정짓는 중요한 조건이다.

2013년 BBC의 보도에 따르면 인도에서는 해마다 7,200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성폭력을 당한다. 어린이 피해자들은 경찰로부터도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모욕을 받기 일쑤다. 어린 소녀들이 인신매매되어 성매매업소에 팔려가는 것도 큰 문제다. 성매매 업소로 팔린 어린 소녀들은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성인이 되면 이들은 자신의 고향 등지에서 다시 어린 소녀들을 모집해 팔아넘기는 일을 하는 경우도 많다. 해마다 10만 명에 달하는 어린이들이 실종되는데 이들 대다수는 성적 학대를 받는다고 추정되고 있다.

성폭력이 단기간에 대규모로 조직적으로 자행된 경우에도 주목해야 한다. 잠무 카시미르의 분쟁과 대규모 종교공동체주의 폭동이 일어났을 때마다 성폭력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힌두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은 성폭력을 ‘인종청소’를 위한, 서로를 쫓아내고 말살시키는 전쟁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인권단체들의 보고에 따르면 인도군은 동북부의 부족민 지역에서의 무력분쟁에서도 군사적 목표를 위해 조직적으로 성폭력을 사용한 증거가 있다고 한다.

인도의 성폭력이 수구적 가치관과 목적에 의해 일어나며 따라서 인도 사회의 권력관계, 사회적 구조, 문화와 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만이 성폭력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임은 자명하다. 2012년 델리 사건은 인도 사회를 시험하고 있다. 인도 사회의 오랜 악습들인 여성차별, 여성 대상 성폭력은 줄어들 수 있을까? 인도 여성들 스스로가 인도 사회가 어느 길로 갈지를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앞길이 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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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는 진짜 정신이 나갔어요
[인도 수구파의 생얼] 여성 전사여, 힌두 사회를 수호하라 (0) 2015/06/13 AM 10:30



의용단일가의 두르가 바히니(Durga Vahini)에서 여성이 군사훈련을 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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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지브 간디 전 수상은 1991년 암살당했다. 그의 어머니인 인디라 간디가 자신의 초병에 의해 연발총으로 총격을 당해 죽은 후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 자신이 파견한 스리랑카 평화유지군에 앙심을 품은 타밀 반군이 저지른 자살 폭탄 테러에 의해 희생되었다. 충격적 사건이었다.

자살 폭탄 테러로 전 수상이 암살당한 것도 충격이었지만, 그때까지는 아직 시작되지 않은 힌두 여성이 자살 폭탄 테러리스트로 등장했다는 사실이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 후 우리는 의용단일가에서 활동하는 힌두 여성 전사를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테러를 말하고, 그 행위에 앞장서기도 한다. 여성이 폭력을 사용하는 일을 상상하기조차 힘든 힌두 세계에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은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그 시작은 반영 민족주의 의식을 힌두교에서 찾은 힌두 근본주의 이데올로기인 ‘힌두트바’ 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영국 제국주의자들이 가져온 근대화와 이슬람이 힌두 전통 가치를 크게 훼손시켰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힌두의 전통 가치를 탄탄히 재구축하고 그 위에서 통일된 하나의 민족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믿었고 그 차원에서 힌두의 가치 또한 자신들이 말하는 민족주의 위에서 하나의 정치 사회 이데올로기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힌두 여성의 위치와 역할도 그 맥락 안에서 규정되었다. 식민 지배와 함께 들어온 빅토리아 시기 영국인들이 규정하는 정숙한 숙녀와 반대되는 개념을 만들었으니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힌두 민족을 낳고 키우며 문명의 전수자로서의 여성과 제국주의라는 악마와 싸워 그를 물리치는 전사로서의 여성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전자는 힌두교에서 인도라는 나라가 여신으로 묘사되는 ‘어머니 인도’의 개념으로 후자는 대중에게 널리 퍼진 악마를 물리치는 깔리, 두르가와 같은 여신의 모습으로 투사되었다.

하지만 여성의 전사로서의 역할은 독립을 쟁취해나가는 여정에서 그리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차라리 독립 이후 힌두 공동체와 무슬림 공동체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불거지는 1990년대 이후로 심해져갔다.

그것은 상상으로 만들어진 여성에 대한 역할이 반식민 민족운동 때보다 반(反)이슬람 종교공동체 운동 때 훨씬 더 자극적으로 먹혀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어차피 여성 전사의 개념은 왜곡이고, 자극이며, 선동이기 때문에 ‘우리’와 ‘적’의 이분적 적대감이 훨씬 큰 종교 공동체적 갈등에 더 잘 활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1990년대부터 힌두 수구 세력은 여성 전사의 역할을 세계화 반대와 결부시켰다. 과도한 소비 향락의 문화, 자유로운 성(性)문화, 핵가족의 성장과 이혼 증가, 카스트 체계의 쇠퇴, 달리트의 사회 지위 향상, 인권 의식의 팽배 등 때문에 발생한 가족의 해체를 막기 위해서는 힌두 고유의 정신문화 ? 이 또한 상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를 보존하고 후세에 전수하는 일에 여성이 적극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여성이 앞장서서 힌두 고유의 전통 가치를 파괴하는 이슬람 세력을 응징해야 하고, 그러한 가치를 전파하는 세속적 정부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넓게 보면 인도를 여성화한 영국 식민주의에 저항하여 인도를 난성화한 힌두 민족주의의 전유 방식이다. 힌두 여성 전사는 남성화된 힌두 민족주의를 이루는 짝패의 한 부분이다.

이러한 사고는 도시 중산층 사이에서 널리 공유된다. 배운 사람이 민족과 문화를 생각하고, 가진 사람이 그 가치를 보존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지 못 배우고 못 가진 사람이 나서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배우고 가진 사람들이 갖는 영향력은 시간이 갈수록 사회 전반에 널리 퍼진다.

그러면서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은 주로 하층 사람들로부터 나온다. 민족의용단, 세계힌두협회, 쉬브세나와 같은 의용단일가에 속한 단체와 정당은 도시 중산층에 기반을 두면서 그 행동대원을 농촌이나 산악 지대의 부족민에서 동원하는 것이 바로 그 모습이다.

그 행동대원들은 의용단일가에 속하는 몇몇 여성 전사 양성 단체로 배속되어 요가와 호신술을 배우고, 사격 훈련을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달력 이미지나 사원의 우상 등을 통해 자주 접하는 힌두 여신의 성화에 나타난 무기를 들고 악마를 무찌르는 힌두 여신 두르가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그 가족 구성원은 그 여성 전사의 모습에 가문의 영광을 느낀다.

불평등의 힌두 사회에서 배운 사람, 가진 사람, 높은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삶을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의 심정을 교묘하게 이용한 수구 세력들의 교활함이다. 결국 자신의 모습을 신화 속 여신에서 찾는 여성 전사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독립적으로 갖는 의미와는 정반대로 여성의 남성과 국가와 종교에 대한 더욱 심한 종속을 낳게 되는 것이다.

여성 전사가 갖추어야 할 이미지는 영락없이 힌두 신화에서 나오는 여신의 재현이다. 여신은 사자나 호랑이를 타고 창, 칼, 곤봉 등을 휘두르며 악마를 물리치는 존재다. 혼란과 도태에 빠진 우주의 조화가 다시 제자리를 찾는 것은 순전히 여신의 무한 능력 덕분이다. 실제로 민족의용단은 힌두교 여신의 모습을 차용하여 팔수여신(八手女神)의 개념을 만들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러한 여성 전사들의 집단을 그 여신의 이름을 따 의용단일가 안에 두르가 바히니(Durga Vahini) 즉 (악마를 무찌르는 힌두 여신) 두르가의 종(僕)이라는 이름으로 조직하였다. 그 안에서 두르가는 적을 무찌른 절대지존이기 때문에 그를 따라 힌두 민족을 지키는 여성 전사는 반드시 막강한 힘을 구비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여성 전사는 단순히 적과 싸우는 막강한 힘의 소지자를 넘어 힌두 민족을 낳고, 키우고, 보존하는 주체로 해석된다. 그래서 힌두 여성은 순결해야 하고, 정숙을 지켜야 하며, 남성의 육체적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그래서 남성을 유혹하는 옷차림이나 화장 등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들은 오로지 힌두 종교와 민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존재여야 한다.

그들이 미스 월드 선발 대회나 발렌타이 데이를 공격하고 외국 여성을 테러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문화가 자신들의 고유 문화를 훼손하고 변질시키는 것으로부터 모욕을 당한다는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어머니 힌두’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힌두 여성이 받는 최고의 영광은 적과 피 흘리는 싸움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려 힌두 공동체의 전통 질서를 되찾기 위해 헌신하는 ‘여성 전사’에게 돌아간다. 그는 개인과 가족의 삶을 버리고 힌두 종교 공동체와 힌두 민족 공동체를 위해 앞장서고 자신을 희생하는 존재여야 한다.

여기에서 세속적 국가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오로지 종교 공동체 일뿐이다. 마찬가지로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주의 같은 것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것은 청산이 배제된 사랑으로, 힌두교의 일부에 지나지 않은 비폭력에 편집되어 있는 정신 나간 짓일 뿐이다.

종교와 민족 갈등에서 여성에 대한 강간이 빈번한 이유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쳐라 그리고 너의 죽음을 통해 모든 것을 다 죽여라, 그 안에 너의 승리가 있고 정당한 통치가 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한다. “적(무슬림)의 여성을 강간하라. 그것은 적에게 모욕을 주고, 사기를 떨어뜨려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다.”

여성이 강간의 표적이 되는 것은 여성이 그 문화를 보전하고 그것을 전수하는 존재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폭력 갈등이 벌어질 때 항상 적의 여성을 강간 ? 가능하면 더욱 집단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그리고 그 표식을 남기는 방식으로 ? 하는 것이 우선해야 하는 행동이고, 역으로 자신의 여성 구성원이 적으로부터 강간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여성 전사가 반드시 호신술을 익혀야 하는 것은 바로 이 강간의 무기 때문인 것이다.

인도 최대의 도시인 뭄바이는 힌두와 무슬림 간의 종교 공동체 폭력 갈등이 가장 자주 터지는 곳으로도 악명이 높다. 뭄바이 시정을 맡고 있는 집권 여당은 인도국민당보다 더 수구적이고 폭력적인 쉬브세나(Shiv Sena: ‘쉬바지의 군대’라는 이름의 정당. 현재 인도의 집권 여당인 인도국민당과 연대 관계인 극우 정당. * 쉬바지는 영국이 침략할 때 인도 토착 세력 가운데 가장 강력한 저항한 이 지역 토호국의 지도자)다.

이 뭄바이에 의용단일가에 속한 많은 수구 세력이 강력한 기반을 잡고 있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1992년 아요디아 사태가 터진 후 바로 발생한 무슬림의 뭄바이 테러와 힌두의 보복 학살이 끊이지 않을 때 그 차마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무슬림 학살 난동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이 여성 행동 대원이었고, 2002년 구자라트 사태에서 무슬림 인종 청소를 자행할 때 그 여성 행동 대원은 이제 공개적으로 조직적으로 참여를 했다는 것은 이제 증거나 목격에 의해 다 확인된 사실이다. 1990년대 이전에는 여성들이 시위를 할 때 참여를 한다거나 목청을 높이는 정도에 그쳤지만, 1992년 이후에는 여성들이 직접 폭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힌두 수구 세력들이 끊임없이 전통 힌두교 안에서 여성 전사의 이미지를 발명해내고, 그것을 이슬람이라는 악미로 상정된 적과 결부시키면서 적대감을 부여하는 작업을 해왔기 때문이다.

현재 힌두 민족으로서 여성 전사의 폭력 행위가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난 경우는 이 글 모두에서 언급한 타밀민족해방호랑이(LTTE)의 여성 전사다. 그것은 그 지역이 스리랑카에서의 동족의 핍박을 겪으면서 종교와 민족을 위한 싸움이 가장 처절해 왔기 때문에 생긴 현상일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타밀 지역 외의 곳에서도 이런 여성 폭력 전사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아직 남성만큼 적극적인 난동을 저지르지는 못하지만 점차 주인공으로 역할을 넓혀가는 것이 눈에 띈다. 그리 되다 보면 그들이 공공연하게 말 해온 이슬람 알카에다와 같은 여성 자살 행동대원이 나올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우리’와 ‘적’이라는 이분법 적 세계관에 기초한 두 이데올로기인 민족주의와 종교가 만나면서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그 둘이 만나는 지점에서는 항상 민족이 여성으로 상상되고, 그 민족을 지키는 자 또한 어머니로서 상상된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희생은 곧 폭력과 결부되고, 그것은 곧 여성 테러리스트의 등장으로 연결된다.

인도의 경우만 해도 인도-파키스탄 분단 때나 2002년 구자라트 대학살 때에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여성이었다. 그것은 상대방 적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고, 그 집단을 모욕을 주는 행위로 그들의 문화를 양육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하는 여성을 폭행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의 여성을 강간하고, 윤간하고, 음부를 드러내거나, 도려내는 천인공노할 패악 질을 자행하는 것이다.

그러한 만행은 힌두교나 이슬람 혹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본래적 성격과 관계있는 일이 아니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전통적으로 사회적 약자이면서 핍박받은 여성을 이용해 먹는 남성 기득권자들의 소행이다. 여성 전사가 등장하는 것 또한 자신들의 문화를 수호하는 것이야말로 어머니로서 여성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같은 맥락이다.

종교와 민족주의가 극적으로 만나는 일이 발생하지 않은 (혹은 그렇게 되기 어려운)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일이 쉽게 일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표현은 다르지만 비슷한 맥락은 최근에 어렴풋이 그 전조가 보이는 듯하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급격한 소외감을 느끼고, 자식 세대에게 극심한 배신감을 느끼는 주변부 노인들이 갖는 자유주의와 진보에 대한 격한 저항 의식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년의 삶에 대한 불안감을 젊은 세대에게 투사하는 전략을 쓴 수구 세력들에게 쉽게 감화된다. 그리고 상당한 폭력적 문화로 표출된다.

현재로서는 단순한 세대 갈등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치유하지 않으면 더 큰 사회적 폭력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수구 세력은 보통 사람이 상상하는 일을 저지르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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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수구파의 생얼] 그들의 ‘반듯한 나라’는 폭력과 테러 용인하는 것? (1) 2015/06/13 AM 10:16



쉬바 세나 당원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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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어느 종교든 자살을 권고하는 종교는 없다. 힌두교 또한 다른 어느 종교와 마찬가지로 자살을 권고하지 않는다.

그런데 힌두 사회에서 자살을 장려하고 그 전통을 보존하려 애를 쓰는 게 있다. 바로 남편이 죽으면 과부가 된 아내가 따라 죽는 힌두 식 순장인 사띠(sati)이다.

가장 최근 행해진 사띠로 세상의 주목을 받은 사건으로 1987년 9월 4일 루쁘 깐와르(Roop Kanwar)라는 시집 온 지 갓 일곱 달밖에 되지 않은 18세의 과부가 감행한 예가 있다. 라자스탄 주의 수도인 자이뿌르 시에서 80 킬로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데오랄라(Deorala)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힌두 사회에서 자살이 장려되는 대상으로 합리화되는 또 하나의 예로 자살 특공대가 있다. 물론 후자는 최근에 만들어진 현상이고 널리 지지를 받지는 못하지만 그 합리화의 논리적 맥락이 주목할 만 하다는 것이다.

2008년 마하라슈뜨라에 기반을 둔 극우 힌두정당인 쉬브 세나(Shiv Sena 쉬바지의 군대. 쉬바지는 영국이 인도를 침략할 때 끝까지 싸운 서부를 기반으로 한 지역 세력)의 대표인 발 타끄레이(Bal Thakeray)는 인도에서의 이슬람의 테러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자살 특공대를 조직한다고 했다.

이 두 가지의 자살이 논리적으로 허용되고 상당한 지지를 받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1987년 9월 4일 델리와 자이뿌르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인 데오랄라에서 일어난 루쁘 깐와르의 사띠에서, 18세의 젊은 과부 루쁘 깐와르는 24세 남편 말 싱(Mal Singh)이 죽은 지 하루 만에 화장용 장작더미에 올랐다.

그런데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루쁘 깐와르는 자발적으로 사띠를 행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남편 가족들이 그에게 마취를 시켰다고 증언했고, 그가 불길이 타오른 후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무장 경호원들이 장작더미 주위를 지켰으며 실제로 적어도 세 번은 그가 빠져나오려 한 것을 몽둥이로 패 다시 밀어 넣었다고 증언했다.

애초 라자스탄 주정부는 그 자리에 모이는 것조차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사띠는 꿋꿋이 거행되었다. 그 후 경찰은 루쁘 깐와르의 시동생이 장작더미에 불을 붙인 것을 확인하여 그에게 살인죄를 적용하는 등 가족의 남성 구성원들을 구속하였으나 결국에는 모두 석방되었다. 끝내 아무도 처벌되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언론과 여성계에서는 사띠의 금지뿐만 아니라 사띠 행위를 찬양하고 미화하는 행위조차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배하였다. 하지만 이 지역과 전국에서 모인 수구 세력은 사띠 찬양의 축제를 열었다. 이 지역 대중들의 사띠 자살에 대한 지지는 인권 보호를 부르짖는 것보다 월등히 높았다. 사띠를 행한 그 자리는 힌두교의 성지가 되었고, 이어 순례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 어린 과부 루쁘 깐와르는 힌두교의 여신이 되어 신화가 되었다.

과부 순장 사띠가 지지를 받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이 그 사회의 가치를 수호하는 방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는 의용단일가 소속 단체가 적극 조성하였으니 그 가운데 대표가 전통법수호협회(전통법 락샤 사미띠 Dharma Raksha Samiti)였다.

처음 사건이 일어나자 여성 인권 단체들이 3,000명을 모아 사띠 항의 집회를 열었는데, 이에 대해 맞불 차원에서 전통법수호협회가 라자스탄 고등법원의 집회 금지 명령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여러 여성 단체를 비롯하여 70,000 명의 군중을 동원해 사띠 지지 시위를 벌였다.

이 일에 우익 정당 또한 나름 굵직한 역할을 하였다. 나중에 제1야당으로 발돋움했고, 당시만 해도 세력 확장을 위해 보수 수구 이데올로기 전파에 발버둥을 치던 우익 정당 국민당은 군중 동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런데 그때까지 야당의 도전다운 도전을 받아본 적이 없던 집권 여당인 회의당 정부는 어정쩡한 자세를 취했다. 수상 라지브 간디는 형식적으로는 사띠와 사띠 찬양을 반대하고 나섰지만, 정부는 군중을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은 채 머뭇거렸다.

그럼에도 그 지역 우익 정당 세력은 라지브 간디 수상의 이러한 태도조차도 극렬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그 비판은 항상 종교를 정치로 끌어들이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라지브 간디를 “아버지는 파르시교도이고, 아내는 이탈리아 사람인 반(反)힌두 인사가 우리의 힌두교를 모독한다”고 하였다. 아무런 논리성도 없고 실체도 없는 그야말로 종교 감정 불 지르기일 뿐이었는데, 많은 국민들이 호응하였다. 이미 80년대 말에 인도 정국은 이미 휘발성이 강한 대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논리는 힌두는 전통법과 모국과 여성을 존중하는데, 모국과 여성이라는 두 여성성을 이어주는 것이 전통법 즉 종교라고 하였다. ‘우리들의 종교’를 위해 여성이 희생하는 아름다운 미풍양속은 수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힌두 복고주의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면서 향후 인도 정치가 종교와 급속도로 연계되면서 종교 공동체주의가 정치의 전면에 나타나게 되는 또 하나의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러다 보니 전통법을 수호하는 행위는 폭력이든, 전쟁이든, 자살이든 그 어떠한 방편이든지 간에 개의치 않았다. 불교에서 해탈을 이루기 위해 죽을 때까지 곡기를 끊는다거나 전생에 붓다가 자비를 베풀기 위해 굶주린 호랑이에게 몸을 던져 그 먹이가 되었다는 것과 동일한 논리다.

1947년 분단 공간에서 마하뜨마 간디를 민족의용단이 암살한 것도 살인을 통한 힌두 전통법 수호의 일환이고, 이 사건 이후 1992년 아요디야(Ayodhya)에서 벌어진 바브리 마스지드(Babri Mmasjid) 파괴 또한 폭력을 통한 전통법의 수호로 널리 받아들여진다.

2000년 디빠 메흐따(Deepa Mehta) 감독의 영화 《워터》(Water)가 갠지스 강을 모독했다 하여 봉사단가족(Sangh Parivar 상그 빠리와르) 단원들이 단체로 갠지스 강에 투신 자살하겠다고 협박하면서 영화 촬영을 저지한 것 또한 전통법 수호를 위한 행위가 폭력적인지의 여부와 전혀 관계치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띠라는 명백한 자살이 종교 안에서 정당한 행위로 권고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이제 수호하는 대상으로 전통법은 자연스럽게 국가로 해석된다. 이는 비단 인도에서만의 일은 아니다. 이는 전통법을 지키는 존재가 과거 전통 사회에서는 카스트 체계였지만 이제는 국가나 민족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힌두교가 민족이나 국가를 위해 자살을 방조하는 것을 넘어 자살을 권고하는 종교로 변할 수 있는 이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사회사적 맥락에서 볼 때 최근 불거진 쉬브 세나(Shiv Sena)의 자살특공대 조직 사건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쉬브 세나는 힌두교의 정치 이데올로기인 힌두뜨와(Hindutva 힌두주의)에 기초를 둔 마하슈뜨라 지역에 기반을 지역 극우 정당이다. 쉬브 세나의 타끄레이는 힌두뜨와를 교묘하게 반(反)이슬람 폭력 이데올로기로 만들어 힌두 자살특공대 조직을 천명하였다.


쉬브 세나의 당 학생위원회가 “그래 우리는 테러리스트다. 국가를 보호하는 것이 테러리즘이라면, 국가를 팔아먹는 자를 응징하는 것을 테러리즘이라 한다면, 우리는 테러리스트를 마다하지 않겠다. 국가를 비난하고, 조국을 비난하고, 종교를 비난하는 자에게 폭탄 세례를 퍼붓는 것이 테러리즘이라면, 테러리즘에 대해 강력하게 싸우는 것이 테러리즘이라면, 우리는 테러리스트임을 자랑스럽게 느낀다”라고 일갈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이다.

그들에게 폭력은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타끄레이의 자살 특공대 조직에 대한 발언은 2006년 뭄바이에서 발생한 무슬림에 의한 열차 연속 폭발 테러 이후에 시작하였다. 타끄레이는 “이슬람 테러가 갈수록 격화되고 있는데 이를 이겨내는 것은 힌두 테러를 키워 맞불을 놓는 것밖에 없다. 힌두 자살 특공대를 조직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천명했다.

그는 무슬림 테러리스트로부터 힌두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이슬람권의 알카에다 조직과 유사한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을 예비역 육군 중령 자얀뜨 라오 찌딸레(Jayant Rao Chitale)가 받아들여 특공대를 조직한 것으로 진전되었다.

그는 당시 수상이자 연합 세력인 인도국민당 대표 바즈빠이(Atal Bihari Vajpayee)와 대통령 깔람(Abdul Kalam)에게 국가 수호를 위해 자살 특공대를 조직해야 함을 몇 차례 진정했으나 그에 대한 답변이 오지 않아 자기 스스로 그 조직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쉬브 세나의 논리 위에서 실제로 자살특공대를 조직했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극우 힌두 조직으로 람세나(Sri Ram Sena 람의 군대)가 있다. 람 세나는 실제로 2006년 마하라슈뜨라의 말레가온(Malegaon) 폭발 테러에서 39명의 희생자를 낸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조직을 세운 쁘라모드 무탈리끄(Pramod Muthalik)는 경찰이 마하라슈뜨라에 존재하는 여러 무슬림 테러리스트 조직을 적발하고 처벌하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나서서 그 일을 대행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무탈리끄는 2009년 1월 24일 망갈로르(Mangalore)에서 한 서구식 주점을 습격하여 그곳에서 유튜브를 하고 있던 여성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였다. 또 2008년 인도의 저명한 화가 후세인(M.F. Hussain)의 전시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은 후세인이 바라따 마따 (어머니 인도) 여신을 누드로 그리는 등 힌두교를 모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패션쇼나 발렌타인데이 기념 식장을 공격하기도 했는데, 이 또한 힌두 고유의 전통 문화를 모욕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심지어 그들은 사회주의당은 불가촉민의 권익을 보호하는 목표로 정치를 하는 불가촉민의 정당이기 때문에 힌두 사회의 근간인 카스트 체계를 뒤흔드는 단체라고 주장하면서 폭력을 행사하였다.

그들은 라슈뜨라 락샤 세나(Rashtra Raksha Sena)라는 이름의 국가수호군을 창설하여 700명의 대원을 확보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체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거창한 이름의 군대나 특공대원은 아니지만 백주에 폭력을 행사하는 파시스트로서의 실체는 분명히 있다.

자살이든 자살 특공대든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반(反)사회적 행위가 전통법, 종교, 민족, 국가의 이름으로 용인되고, 강요되고, 이제는 그것을 넘어 마음껏 활개를 치면서 상대방에 대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정치가 비합리적 종교 민족 이데올로기에 좌지우지 당하는 후진적 상태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테러리즘을 밀어주는 세력이 다시 집권하거나 아니면 이미 판단력을 잃은 보수 우중(愚衆)이 든든한 배경이 되어 줄 수 있다는 든든함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부조리가 사방을 빙벽과 같이 쌓고 있는 모순은 비단 인도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퇴역 군인 수구 집단이 백주에 권총을 빼들고 성당 앞 마당에서 난동을 부린 일까지 일어났다. 군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민간인을 협박하는 등 실정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아무런 제재 없이 벌이더라도 정부 여당은 아무런 규제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성은 여성답게 아이나 많이 낳고, 학생은 학생답게 공부나 하고, 노동자는 노동자답게 하라는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당당히 주장한다.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반듯한 사회다. 그러면서 젊은이들의 문화를 적대시하고, 도시철도에서 노인들이 젊은이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일이 비일비재 하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작은 병리 현상이 아니다. 정권이 바뀌지 않는다는 더욱 큰 확신을 가지면 그들은 더욱 큰 수구 난동 세력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 어떠한 명분을 잃더라도 새누리당으로부터 정권 교체를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이 온갖 국가 조직을 동원하여 부정선거를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권력을 내주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서로 공유해서다. 그 확신이 굳어지면 부정선거를 넘어 더 한 일도 서슴지 않을 것이다. 백주 테러는 그 가운데 하나다. 사회가 보수화 된다는 것은 사회가 ‘반듯한’ 사회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 옛날 전통 사회에서 통용되는 부조리의 모순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이치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 안에 여성, 젊은이, 소수는 서 있을 자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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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진짜 씹노답국가
[인도 수구파의 생얼] 종교가 어떻게 정치를 지배하나 (0) 2015/06/11 PM 03:27

바그와트 민족의용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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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이 글은 5월 인도 총선가 나오기 전에 작성한 글이다. 올 5월 총선에서 집권한 인도 국민당과 나렌드라 모디 수상의 정치적 종교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글이다. 힌두 종교공동체의 정치적 조직적 기반으로서 민족의용단이 존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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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총선을 앞두고 나렌드라 모디가 인도국민당(BJP)의 수상 후보가 되면서 한동안 잠잠하던 종교공동체주의적 정치가 다시 기승을 부릴지 모른다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소냐 간디는 인도국민당의 지도부들을 ‘RSS의 노예들’이라고 부르며 종교공동체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인도국민당 반대 정서로 연결하려 애쓰기도 했다.

이렇게 선거 때만 되면 인도국민당과 민족의용단의 관계가 대중들의 관심사가 된다. 인도에서 종교공동체주의를 부추기는 수구집단 중에 가장 대표적인 단체가 민족의용단이다.(민족의용단 (RSS)에 대해서는 이 연재 2회를 참조) 인도국민당의 종교공동체주의적 지향도 민족의용단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번 회에서는 민족의용단과 인도국민당의 관계를 짚어보려 한다.

이 두 집단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한편에서는 민족의용단과 인도국민당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멘토와 멘티, 큰형(Big Brother)와 동생 등으로 묘사한다. 또 바즈파이 수상하의 인도국민당 정부 이래로 민족의용단과 인도국민당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종교공동체주의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집권을 노리는 인도국민당이 종교공동체주의로 우선회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정작 민족의용단은 자신들은 문화단체에 불과하며 정치와는 관련이 없고 인도국민당과도 친하게 지내며 조언을 주고받는 수준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간디 암살 이후 역사적으로 세 번에 걸쳐 활동이 금지되었던 민족의용단이 자신들의 주장 그대로 문화단체라고 생각하는 인도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인도국민당이 민족의용단의 최종 결정을 뒤집을 만큼의 자율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민족의용단은 설립된 1920년대부터 문화단체를 표방했지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의도가 있다는 것을 결코 숨기지 않았다. 민족의용단의 출발 자체가 1920년대 하층 카스트의 사회적 상승 욕구에 직면한 상층 카스트와 지주 연합세력의 대응이었다.


초기 민족의용단의 이데올로기(대표적인 이데올로그가 Golwalkar다)는 암베드카르가 이끄는 달리트 운동이 평등을 주장하는데 맞서 카스트에게는 고유하게 배당된 몫이 있다고 노골적인 차별을 주장했다. 즉 처음부터 카스트 정치를 목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이 때의 이데올로기는 약간의 변형만을 거쳐 지금도 인도정치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그들이 비정치적 단체라고 선언한 것도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민족의용단의 정관 4조 b항에는 민족의용단이 정치가 아니라 “순수하게 문화적인 일에 몰두한다”라고 명문화하고 있다.

이 조항은 1949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1948년 간디 암살사건을 계기로 세속주의 노선을 가던 네루 수상은 민족의용단의 활동을 금지시킨다. 민족의용단이 활동 재개를 계속 요청하자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파텔이 이 정관을 조건으로 1949년 민족의용단 금지 조치를 해제해준 것이다.

이 때의 정관이 민족의용단의 정치 활동을 실제로 약화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자신들의 노선을 실행할 제도 내의 정치조직이 더욱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민족의용단은 1954년부터 선전요원(pracharaks)을 양성하는 정치훈련캠프를 운영했다. 그들은 이렇게 양성된 선전요원들을 인도국민당의 전신인 국민단(Jana Sangh)을 통제하려 했다. 민족의용단은 자체의 정치적 활동은 부인하지만 자원봉사자(swayamsevaks)들이 정당에 가입하는 것은 허용한다. 민족의용단은 지금도 이런 방식으로 인도국민당을 비롯한 여러 정치조직에 자신들의 대리인을 파견한다. 이들을 통해 민족의용단의 제도 정치조직에 대한 통제가 작동한다.

바즈파이, 아드바니, 나렌드라 모디와 같은 힌두 우익의 대표적 정치인들이 모두 선전요원(pracharaks)으로 활동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다. 민족의용단이 과거에 국민단(Jana Sangh)에 가했던 통제는 아주 노골적이어서 민족의용단의 노선에 충실하지 않은 국민단의 대표들은 민족의용단의 공개적인 명령으로 당에서 축출되기도 했다. 정치로부터 손을 떼겠다는 1949년의 약속은 공공연하게 무시되었다.

세속주의자 네루와 그 후계자 인디라 간디 정권 초기까지만 해도 종교공동체주의가 인도 정치 전체를 뒤흔들 힘은 없었다. 인디라 간디가 자신의 정치적 지지를 위해 파키스탄과 전쟁을 불사한 이후인 1977년에도 회의당을 물리치고 최초로 정권교체에 성공한 자나타 달 연합정부는 민족의용단과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집권할 수 있었다.

1996년 인도국민당은 당시 총선에서 회의당을 꺾고 여러 군소 정당들과 연합해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연정에 참여한 정당들의 이탈로 13일간만 권력을 유지하는 데 그쳤다. 실제 이유는 각 당들의 정치적 이해득실 때문이었지만 표면상으로 내세운 핑계는 인도국민당의 지나친 종교공동체주의적 성향이었다.

그 이후 다른 당들은 인도국민당과의 연합의 조건으로 민족의용단과의 거리두기와 이념적 유연성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요구를 어느 정도는 수용했기에 인도국민당은 1999년 마침내 재집권에 성공했고 임기를 채울 수 있었다.

심지어 노골적인 종교공동체주의 열광을 등에 엎고 1999~2004년에 단독으로 집권했을 때에도 공식적으로는 민족의용단과 거리를 두어야했다. 이때 수상이었던 바즈파이는 민족의용단이 주도하는 람(Ram) 사원 건립운동을 불허하는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말과 몇 가지 행동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섣부르다. 인도국민당 내에서 활동하는 민족의용단 활동가들은 겉으로는 간디식 사회주의를 표방한다. 하지만 이는 가장일 뿐이고 언제든 람 숭배라는 본색을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다.

민족의용단이 정치에 노골적으로 개입한 사례도 반대 사례보다 더 많다. 1999년 민족의용단은 자신들에게 더 충성하는 인물로 재무부장관을 교체하라고 요구해 관철시켰다. 바즈파이 수상은 집권 당시 미국을 방문해서 한 연설 중간에 민족의용단에 대한 충성을 확인하기도 했다.

2005년에는 당시 민족의용단의 대표였던 수다르샨(K. S. Sudarshan)이 어느 TV 프로그램에 나와 바즈파이와 당의 대표적 인물인 아드바니가 이제 더 젊은 지도자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당 내에서 절대적 권력을 행사했던 두 사람은 일거에 힘을 잃어버렸다.

특히 아드바니는 2005년 파키스탄을 방문했을 때 파키스탄 건국의 아버지 진나에 대해 우호적인 연설을 했다가 인도국민당 대표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아드바니는 재기해 2009년 선거에서 인도국민당의 수상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2009년 선거에서도 패하자 민족의용단의 새로운 대표가 된 바그와트(Bhagwat)는 아드바니에게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했다.



인도국민당에 대한 민족의용단의 영향력이 다시 커진 것은 2004, 2009년 선거에서 인도국민당이 연달아 패배했기 때문이다. 민족의용단은 인도국민당이 집권기간 동안 도덕적으로 타락했고 선거 패배는 그 대가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정치적 승리는 사회적, 문화적 분위기의 결과물이고 인도국민당의 선거 승리나 실패는 민족의용단이 자신들의 종교공동체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받아들여질 만한 문화적 분위기를 형성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문화가 우리의 정치가 될 것이다.”라고 그들은 당당하게 주장한다.

2013년 민족의용단은 노골적으로 제도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나렌드라 모디가 인도국민당의 선거대책위원장직과 수상 후보에 연이어 지명된 것은 민족의용단이 인도국민당을 지배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최소한의 가식마저 포기한 증거라고 봐야한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모디에게 인도국민당의 수상 후보 자리를 맡긴 것도 바그와트라고들 한다. 2013년 3월 BJP는 당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의회위원회(Parliamentary Board) 및 중앙선거대책위원회(Central Election Committee)의 위원으로, 또 6월에는 중앙선거대책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자 당의 원로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아드바니는 모든 직위를 사퇴하겠다며 모디 임명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 때 바그와트가 개입해 모디의 임명을 밀어붙였다. 그는 아드바니에게 당 의회위원회의 결정을 존중하라고 공개적으로 권유했다. 사람들은 표현은 정중했지만 사실상의 아드바니 해임 명령이라고 받아들였다. 모디는 도대체 어떤 정치인이기에 민족의용단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 것일까?

그는 1950년 구자라뜨(Gujarat)주에서 대대로 식료품상을 하는 중하층 카스트에 해당하는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부터 신앙심이 깊어 한때 싼야씨(Sanyasi: 힌두 수도자)를 꿈꾸기도 했다. 모디가 10대 후반일 때 홍차 장사를 했는데 가게의 단골이었던 민족의용단 간부의 영향으로 하부청년조직에 가입했고 곧 선전요원이 되었다.

1987년에 모디는 민족의용단의 명령으로 인도국민당 구자라뜨 주 본부에 파견되어 조직담당비서(Organisation Secretary)로 일하게 된다. 이 일은 민족의용단과 국민당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모디는 같은 민족의용단 선전요원 출신이었던 바즈파이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수상이 된 바즈파이는 모디를 전국 조직담당 비서(National Organization Secretary)로 임명했다. 이 자리는 민족의용단과 인도국민당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자리라고 알려져 있다. 이후 모디는 극우적 언사로 정치적 유명세를 얻는다.

구자라트 학살을 부추긴 것은 물론이고 1999년 까르길 전쟁(Kargil War)에서 파키스탄과의 평화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어느 기자회견에서 파키스탄에게 ‘비리야니(Biryani: 무슬림들이 먹는 볶음밥)가 아니라 총탄과 폭탄을 대접할 것이다.’라고 대답해 호전성을 과시했다.

올해 1월 나렌드라 모디는 한 대중 집회에서 자신의 출신 카스트를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이런 일은 주 수상이나 중앙정부 수상을 노리는 거물급 정치인들은 잘 하지 않는 일이다. 작은 규모 선거구에 출마한 정치인이라면 출신 카스트의 지지를 등에 엎고 당선을 노려볼 수 있겠지만 다수 대중을 상대로 하려면 특정 카스트가 아니라 힌두 전체를 포괄한다고 말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디의 이날 발언과 그가 쓴 책은 민족의용단이 지향하는 힌두트바 정치의 중요한 작동방식을 잘 보여준다. 모디는 청소일을 세습하는 불가촉천민 집단 발미키스(Valmikis)의 예를 든다.

“그들은 신이 부여한 이 일(청소)를 전체 사회의 행복과 신을 위해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세대를 이어가며 말이다. 그리고 이것을 내적인 정신적 활동이라고 부른다.” 카스트 차별을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듯한 말이다. 그러나 곧바로 모든 카스트가 이런 식으로 신이 부여한 일을 함으로써 힌두 전체의 조화로운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한다. 모디의 발언은 힌두트바 정치의 양면성을 잘 보여준 것이다. 조화로운 통일을 위한 차별이라는 자기모순의 정치를 말이다.

모디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힌두트바 정치는 본질적으로는 다른 카스트들이 엄격하게 규정된 지위에 자리해야 한다는 카스트 피라미드에 근거한 이데올로기다. 이것이 그들의 진짜 생각이다.

그러나 하층 카스트 민중들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단일한 힌두 정체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명목상으로는 카스트 간의 엄격한 차별과 위계를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지위가 낮은 카스트 소속의 민중들이 자신들의 카스트 정체성보다 힌두 정체성을 더 우선시하도록 만드는 것이 힌두트바 정치의 힘의 원천이다.

1980년대 이후 불가촉천민들과 기타 후진계급에 대한 유보제도가 확대되자 민족의용단은 이로 인해 자신들의 아이들이 마땅히 누려할 몫을 빼앗겼다고 느꼈다. 처음에는 달리트, 기타 후진계급을 상대로 폭력적 행동을 자행했지만 곧 이데올로기적 포장으로 전환했다. 이것이 람 사원 건설 운동이 시작된 동기다.

이 운동을 통해 민족의용단은 달리트들을 힌두트바 정치 안으로 포섭해 종교간 갈등의 최전선에 배치했다. 힌두 정체성이 카스트 정체성보다 우선시 되면 종교공동체주의의 계급 배반의 정치가 작동한다.

무자파르나카르 사건(이 연재의 7회 참고)에서도 지역의 힌두계 자뜨(Jat) 카스트와 무슬림 간에는 하층의 소수집단이라는 연대의식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종교공동체주의자들의 선동으로 힌두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이 연대는 깨졌다. 즉 계급 간 연대를 종교적 적대로 대체시킨 것이다.

민족의용단의 이데올로기는 실제로는 카스트 간 차별을 유지하면서 말로만 카스트 간의 조화(평등이 아니라)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힌두 정체성에 본질적인 카스트간 위계가 발생시키는 사회적 압력이 감소되지는 않는다.

하층 카스트들은 카스트 위계에서 발생한 분노를 무슬림을 향해 발산한다. 이것이 종교공동체적 폭력이고 하나의 힌두라는 이데올로기가 그 폭력을 정당화한다. 이렇게 힌두트바 정치는 카스트문제에 대한 기만적 대응으로 대중을 정치적으로 동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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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수구파의 생얼] 인도국민당, 종교공동체주의와 시장주의 (1) 2015/06/11 PM 02:21

선거운동 중의 나렌드라 모디. 그는 현재 인도의 총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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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이 글은 5월 인도 총선가 나오기 전에 작성한 글이다. 총선의 결과와 필자가 예측한 인도 정치의 흐름은 상당부분 일치한다. 총선 결과에 나타나는 득표율의 수치 이면에 깔린 인도 정치에서 종교공동체주의와 우파의 흐름이 형성된 배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동시에 한국 정치를 분석할 때에도 시사점을 주는 글이다. 일독을 권한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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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인도에서는 아주 이질적으로 보이는 두 사건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다. 하나는 인도 사회의 고질적 문제인 종교공동체주의적 폭력 사태이고 다른 하나는 인도 주식시장의 주가지수가 오랜만에 큰 폭으로 상승한 것이다. 이 두 사건은 하나의 정치 세력 바로 BJP와 관련되어 있었다.

2013년 8월 27일 인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우따르 프라데시주의 무자파르나가르 지역(Muzaffarnagar district)에서 힌두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 사이에 폭력적 충돌이 발생했다.

한 달 이상 악화되다가 9월 말에 군대가 투입되고서야 진정된 이 폭력사건의 결과 52명이 사망하고 93명이 부상되었고 1천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5만 명 이상이 거주지를 떠나 피난해야 했고 그 중 일부는 아직 난민캠프에 남아 있다.

인도사회의 오래된 종교공동체주의적 폭력사태의 하나이지만, 이 사건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있다. 올해 4~5월에 치루어질 인도 총선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현 집권당인 SP는 무자파르나가르 사태를 집권 정부의 실패에서 대중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용했고 BJP는 종교공동체주의를 부추기는 데 사용했다.

우따르 프라데시의 전 집권당이었던 BSP의 총서기는 무자라프나가르 폭동이 현 집권당인 SP와 BJP의 음모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현지의 이슬람 교도들은 힌두 지도자들이 이슬람 교도들에 대한 공격을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건은 처음에는 이슬람교도 청년과 힌두 청년들 사이의 살인사건으로 시작했지만 BSP, 회의당, BJP의 지역당들이 개입해 각각 집회를 열고 대중들을 선동하면서 대규모 폭력사태로 발전했다. 폭행, 살인에 집단 성폭행이 연이어 발생했다. 그러나 인도에서 흔히 그렇듯이 성폭행으로 체포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건이 격화된 원인 중 하나는 BJP의 지역 간부인 Sangeet Som이라는 자가 힌두 청년이 무슬림 폭도들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조작 영상을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뜨리고 선동 연설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BSP, BJP, RLP 등 UP주의 여러 정당들이 주정부 해산을 요구하며 이 사건을 정치적 문제로 확대시키려고 했다.

구자라트주의 주지사이자 BJP의 유력한 총리 후보인 모디는 구자라트에서 2명의 무슬림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최측근 아미트 샤를 우따르를 프라데시의 BJP 책임자로 내려 보내 이슴람 교도들을 자극했다. 경찰이 Sangeet Som을 체포하자 이에 항의하는 힌두계 주민들의 시위가 대규모로 일어났다. 이 시위는 BJP와 지지자들이 SP 정부에 의해 표적 탄압을 받고 있다는 선동으로 더 격화되어 폭력적인 양상을 띄기도 했다.

BJP는 작년에 치러진 주의회 선거에서 북부, 중부의 네 개 주인 라자스탄Rajasthan, 마드야 프라데시Madhya Pradesh, 차티스가르Chhattisgarh 그리고 델리Delhi에서 회의당을 누르고 압승을 거두었다. 그 결과 이 네 개주의 전체 의석에서 BJP가 차지하는 비율이 50%에서 69%로 상승했다. 총선의 국회의원 수로 환산하면 30석 정도의 증가를 기대할 수 있는 수치라고 한다.

하지만 BJP가 주도하는 정치연합인 NDA 전체로 보면 세력이 약화되고 있고 NDA를 구성했던 군소 정당들도 여럿 이탈했다. 그래서 NDA가 2014년 총선에서 집권하기 위해서는 BJP가 200석 이상을 얻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지난 1월 BJP 최고지도부는 이번 총선에서 272석을 얻는 것이 목표라고 공언했다.

우따르 프라데시 주는 인도 국회(Lok Sabha)의석 수 545석(이 중 543석은 선거로 나머지 2석은 대통령 지명으로 뽑는다.) 가운데 가장 많은 80개의 의석을 가진 주로 마하라시트라주Maharashtra (48석). 비하르Bihar주(40석)와 함께 인도 총선의 승자를 가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BJP가 이 두 주에서 영향력 확대를 위해 전력을 기울이는 이유다.

1990년대 BJP의 전성기에는 힌두트바 물결이 최고조였지만 현재는 극단적인 종교공동체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인도 전역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BJP는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인 힌두 보수주의를 완전히 벗어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고 부분적으로 종교공동체주의적 폭력을 선거에 악용하려는 시도 또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BJP의 전통적 지지기반인 마드야 프라데시Madhya Pradesh, 구자라트Gujarat, 라자스탄Rajasthan, 차티스가르Chhattisgarh에서도 모디의 종교공동체주의에 의존한 강성 이미지는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동시에 반대층도 결집시킬 것이기 때문에 의석의 대다수를 석권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따르 프라데시에서의 의석수 확대가 더욱 필요한 것이다.

우따르 프라데시에서 BJP는 무자파르나가르 사건으로 만들어진 종교공동체주의적 정서의 고양을 Ram 사원 건설운동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확산시켜 이번 총선에 이용하려 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네 개 주에서의 BJP 승리가 발표된 날 인도의 종합주가지수인 센섹스(SENSEX)는 1.57% 오른 2만1326.42를 기록했고 루피화 가치도 미 달러화 대비 0.5% 올라 작년 8월 이후 최고 수준을 회복했다.

작년 5월 이후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에 따른 경제적 피해를 가장 많이 받으리라 예상되는 5개 국가(Fragile5)의 하나로 지목되었고 다시 세 나라가 추가된 위험국가 명단 (Edge 8)에도 이름을 올린 인도의 금융시장은 몇 개월 동안 극심한 변동성을 지속해왔다.

그런데 이날 발표된 인도 4개 지역 지방의회 선거에서 BJP가 압승을 거두고 BJP로의 정권 교체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주식과 환율 모두 급호조를 띤 것이다. 지난 번 집권 이래로 BJP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전면시행, 지지해왔다. 특히 금융자유화, 외자유치 확대, 경제 전반의 규제 축소와 시장화를 지속적으로 주장해 왔던 것이 금융 시장의 호의적 반응으로 나타난 것이다.


BJP가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 가장 유력한 수상 후보는 구자라트주의 주지사인 나렌드라 모디다. 그의 정치적 이력은 BJP의 노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2002년 구자라트 학살에 상당한 책임이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힌두보수주의 세력으로부터 큰 지지를 받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모디의 정치적 스승이라 할 수 있는 BJP의 원로 아드바니(L. K. Advani)와 닮았다. 사실 아드바니야 말로 BJP의 전신인 BJS(Bharatiya Jana Sangh)을 설립했고 종교공동체주의의 정치세력화를 시작한 무케르지(Shyama Prasad Mookerjee)의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무케르지는 국민회의의 일원이었고 독립 후 네루 정권에서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파키스탄에 대한 강경 입장과 힌두중심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파키스탄과 관계 개선을 시도하던 네루와 결별해 BJS를 설립했다. 그는 네루의 세속주의에 반대해 종교공동체주의적 경향의 정치화를 시도한 동시에 네루식 계획경제를 자유시장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BJP의 정치적 세력이 급성하는데는 두 번의 계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두 번 모두가 격렬한 종교공동체주의적 폭력 사태였다. 1980년대에서 90년대까지 아드바니는 힌두교도들의 순례행사인 Rath Yatra를 이끌었다. 이 행사는 유사 고고학적 근거를 가지고 무굴제국의 유적인 이슬람교 성지가 원래는 힌두교의 성지였다고 주장해서 이슬람교와 힌두교 간의 갈등을 고조시켰다.

결국 종교간 갈등은 1992년 아요디야 사건으로 폭발했다.(아요디야 사건에 대해서는 이 연재의 13회를 참조) 아드바니는 종교공동체주의를 BJP에 대한 정치적 지지로 연결시키는 전략을 자리잡게 만들었다.

BJP는 아요디야 사건을 이용해 급성장해서 1996년 총선에서는 다수당이 되었고 1999년에는 정식으로 집권당이 되어 5년 임기를 채웠다. 1990년 이후의 수많은 종교공동체주의적 폭력의 배후에는 아드바니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강성 이미지는 인도 전체를 대표하는 수상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1998년 BJP의 집권 때에 바즈파이(A. B. Vajpayee)에게 수상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두 번째 계기는 구자라뜨 사태다. 2002년 구자라뜨 주에서 성지순례를 다녀오던 힌두교도들이 탄 열차에 화재가 발생해 수십명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슬람교도들이 계획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힌두교도들이 이슬람 교도들을 공격해 천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구자라뜨 주 정부는 오히려 사태의 악화를 조장해 선거에 이용하려했다. 이 때의 주지사가 바로 모디다.(구자라뜨의 학살 사태에 대해서는 이 연재의 14회를 참조) 모디는 종교공동체주의라는 보수적 이데올로기로 지지를 얻는다는 점에서는 아드바니와 마찬가지지만 구자라뜨 주에서의 신자유주의적 경제 개혁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루어낸 인물이라는 현대적 이미지를 덧씌우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각종 경제지표들은 BJP의 집권 가능성에 따라 크게 영향 받고 있다. BJP의 집권 가능성을 높게 보는 경제 기관들의 보고서가 나오면 주가는 급상승을 한다. 골드만삭스가 작년 11월에 내놓은 보고서는 “투자자들은 BJP를 기업 친화적으로 여긴다. 그리고 수상 후보인 모디를 변화를 주도할 이로 본다.”고 밝히고 있다.

BJP가 모디를 수상 후보라고 발표한 작년 9월부터 12월까지 센섹스(Sensex) 지수는 8% 올랐다. 작년 9월 이후 48,000억 루피의 해외투자가 이루어졌는데 금융기관들에서는 외국투자자들이 모디가 수상이 되면 경제적 개혁 조치를 대담하게 시행할 것이라 기대를 가지고 투자한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모디의 이런 이미지에 대해서는 구자라뜨주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증가한 점, 모디 집권 기간 동안의 구자라뜨의 경제성장이 다른 여러 주들보다 결코 높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정치에서 이미지는 팩트보다 강한 힘을 가지기도 하지 않는가?

BJP는 힌두 전통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고 폭력을 불사하며 주장하며 대중을 선동하는 폐쇄적이고 복고적인 정치세력이다. 하지만 BJP의 전통적 지지기반의 다른 한 축은 이 당의 경제정책의 직접적 수혜자인 대자본가들과 도시의 중산층들이다.

이런 사실은 얼핏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보일 수도 있다. 바즈파이 정권 동안의 노골적인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수혜를 받아 성장한 자본가, 중산층 집단은 여전히 BJP를 지지하고 있다. (경제개혁으로 인한 인도 자본가 집단의 급성장에 대해서는 이 연재의 10, 11회인 인도재벌 편을 참조)

이들은 1, 2기 UPA 정권이 시행한 경제민주화적 정책들(이에 대해서는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많다)을 BJP의 재집권으로 무력화시키기를 원하고 있다.

농촌의 가난한 농민들을 동원하는 종교공동체주의의 복고적, 국수주의적 구호와 현대적 대도시의 자본가, 중산층이 제기하는 신자유주의적이고 노골적인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요구는 어울리기 힘든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둘 모두가 BJP의 정치적 힘의 원천이다.

따라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지향은 근본에서는 같은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BJP는 자본가, 중산층에게는 실질적이고 경제적인 이익을 줌으로써 그들의 지지를 유지한다. 반면 가난한 힌두 농민들에게는 종교적 편향성, 적대적 감정의 폭발의 기회를 제공하는데 이것이 가상에 불과한 것임은 너무나 명백하다. 즉 종교공동체주의의 심화는 인도의 가난한 농민들의 삶에 어떤 실질적 향상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결국 BJP의 정치 노선은 자본가와 도시 중산층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가난한 힌두 교도들을 기만적으로 동원하는 노선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아요디야, 구자라뜨 사건에서 달리뜨들이 앞장서서 물리적 폭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지배계급이 만들어놓은 비참한 현실에 대한 불만을 가난한 피지배 민중들끼리의 증오와 폭력으로 분출하도록 부추기는 정치는 계급사회에서 항상 있어온 것이다. 증오와 폭력과 기만의 계급정치의 가장 날것인 형태를 2014년 인도 총선에서도 목격할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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