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 혼인하여 남자의 짝이 된 여자
1.
나에게 청명한 세상을 안겨준 첫 번째 아내에게,
너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보면 참 나는 무덤덤했어. 그렇게 이쁘지도 귀엽지도 않아서였나?
세 번째 만났을 때, 갑자기 울기 시작하더니 나랑 더 있고 싶어서 집에 가기 싫다고 안겼던 너의 모습에 너무 당황스러웠어.
솔직히 만난 지 얼마 안돼서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웃기게도 그때부터 너를 좋아하기 시작한 거 같아.
너를 만나면서 집에만 쳐박혀있던 내가 여러 경험을 했었어. 잿빛 세상이 선명하고 푸르게 보인 건 너를 만난 이후부터였어.
어디 돌아다니기 싫어하는 내가 너로 인해서 여기저기 많이 다니기도 했었어. 그리고 평생 겪지 못할 경험도 많이 했어.
찜질방에서 자고 있을 때 우리 핸드폰 훔쳐간 도둑들 잡아서 경찰차도 타보고, 배탈이 나서 쓰러진 너 때문에 구급차도 타보고.
그리고 그때 대학생이 무슨 돈이 있었겠어, 너랑 만나려고 한 푼, 두 푼 모아서 떡볶이, 햄버거 같이 군것질거리 사 먹는 게 다였던 우리는 그래도 참 행복했었던 거 같아. 그렇게 2년 정도를 너와 함께 만나면서 이 사람이면 나와 함께 가정을 꾸리고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었어.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막연함 속에 아주 선명하게 학교 수업을 마칠 때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너와 내 아이의 이미지가 있었어.
그 막연함이 신에게 닿아서였을까?
아직 21살이었던 우리에게 아이가 찾아왔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불과 2주 만에 알았고 어쩌면 이 상황을 낙태라는 수단을 통해 되돌리기 쉬웠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우리는 낳기로 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무슨 용기가 나서 그런 결정을 했는지 모르겠어. 그 사실을 부모님께 알리기 전, 8개월까지 우리는 그렇게 마음을 졸이고 고민하지도 않았어. 당연히 낳아야겠다고 생각했었어. 나중에 부모님에게 알리고 나서 양쪽 집안이 뒤집어지긴 했지만 우리는 긴 설득끝에 첫째 아이를 낳기로 허락 받았어.
첫째 아이를 낳던 날, 불과 21살이었던 우리가 뭘 안다고 서명을 하고 했겠어. 무통 주사 동의서에는 온갖 부작용으로 인한 책임은 본인들이 진다는 내용들밖에 없어서 서명을 못하겠더라. 너가 어떻게 될까봐. 그 이후에 너가 아프다고, 아프다고 병원에서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퇴근하던 마취담당 선생님을 돌아오게 해서 맞았지. 10시간의 진통에 지친 내가 잠시 밥을 먹으러 나갔을 때 아이가 나온다는 전화가 와서 급하게 뛰어가서 탯줄을 잘랐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해. 너는 그 이후에도 어떻게 아이 낳는데 밥을 먹을 수 있냐며 서운하다고 했었어. 너는 풀스윙으로 뺨 때렸다. 진짜 너랑 만나고 나서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스펙타클한지 모르겠다. 장모님한테도 헤드락을 걸질 않나.
첫째 아이를 낳고서 6개월 있다가 나는 군대를 가야 했어. 이것도 남들에 비하면 늦은 편이라 서둘렀었어. 입대 전에 회사에 나간 너 대신 아이를 보다 잠깐 안 본 사이에 침대에서 떨어져서 잘못될까봐 엄청 걱정했었어. 훈련소 들어가자마자 부모님 생신 때 전화를 할 수 있는 제도가 있어서, 아내 생일도 관계 없냐는 나의 물음으로 우리 소대 담당 조교한테 내가 결혼한 사실을 어필 할 기회가 있어서 했어. 그러다가 내 사정이 궁금했는지 훈련 중간 쉬는 시간에 나를 불렀지.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애기는 몇 살이냐고 묻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어. 애기들 높은 데서 떨어지면 크게 다칠 수도 있다고 해서 너무 걱정됐었어. 그리고 그 핏덩이와 너를 두고 여기 있는 내가 너무 서럽더라. 막 우는 나를 안쓰럽게 보던 조교는 내 사정이 딱했는지 배려해줘서 훈련이 끝난 뒤, 전화통화를 할 수 있게 해줬어. 전화통화 후, 첫째 아이가 괜찮다는 말을 듣고 훈련을 잘 받을 수 있었어. 그 조교한테 항상 고맙다는 생각을 해.
공군이 시험을 봐서 자대 배치받으니까 서울 근처로 가려고 얼마나 공부를 했었는지. 진짜 남들 잘 때 공부하고 외우고, 평소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던 내가 가점받으려고 생활관 방송 담당 같은 것도 했어. 하면서 목소리 좋다는 소리를 들어서 나름 보람이 있었어. 그렇게 열심히 한 덕분인지 서울 가까이에 자대를 배치받았어.
그렇게 자대배치를 받고 매주 면회를 오던 너한테 고맙다는 말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어. 오히려 힘들다, 못 살겠다 하기만 했었지. 너도 육아에 시집살이에 직장생활에. 나보다 어쩌면 더 지옥 같은 하루를 살았을 너인데 나는 푸념과 잔소리만 늘어놓고 참 못났었던 거 같아. 제대하고도 잘해주겠다는 내 약속도 잠시였고 또 공부한다고 너한테 신경을 못 썼어. 안 썼다는 게 맞겠다. 진짜 못된 남편이었어.
이렇게 편지를 적다 보니 너한테 미안하고 고마운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주말에 화장실 청소한다고 나한테 애들을 맡기고는 한 시간쯤 뒤에 땀을 흘리면서 화장실 청소를 끝냈던 너,
친구 결혼식에 가는데 입을 옷이 없어서 가는 길에 펑펑 울어버렸던 너,
한 번만 나랑 칵테일 같이 마시고 싶다고 했었던 너,
시아버지 눈치 보느라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밥상도 없이 방바닥에 웅크려서 식은 밥을 먹던 너,
학생으로 경제력이 없던 나 때문에 힘든 몸을 이끌고 우리 가정을 책임졌던 너,
내가 너무 무심하고, 능력이 없어서 그때는 못 해주고 지나가 버린 일이 너무 많아.
내색은 안 했지만 항상 고맙고 미안했어. 내가 남들 앞에서는 너를 함부로 대했지만, 너없는 자리에서는 너무 자랑스러워했어.
내 옆에 서서 나와 함께, 아이들과 함께 걸어가는 너를 보면 존경하고 복받쳤어.
내가 결혼식 후 뒤풀이 자리에서 말했었지?
친구들이 너를 왜 좋아했냐고 했을 때 시골 여자 같아서 좋다는 내 대답에 모두가 웃었지만, 나는 한마디 덧붙였어.
"요즘 여자 같지 않아서"
그래 나는 그런 너를 사랑해.
후줄근한 옷을 입고 있어도, 화장기 없는 꾸밈없는 모습으로 밥을 우걱우걱 먹는 너를 사랑해.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세 아이 낳아주고 키워줘서 고맙고, 열심히 살아줘서 존경해.
수업을 마칠 때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너와 내 아이를 두 손으로 안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막연하고 잿빛이 만연했던 나의 삶에 선명하고 푸른,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힘이 되어준 너에게 너무 고마워.
2.
나의 삶을 잿빛으로 태워버린 두 번째 아내에게,
너한테는 어떤 욕을 해도 모자랄 것 같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저지른 건지 나는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아직도 그 날이 상처처럼 새겨져서 생생해. 지옥이 있다면, 그 때가 지옥이었어.
내가 지방에서 최종면접을 보고 올라가는 기차를 기다리던 날, 엄마한테 전화가 오더라.
"걔, 딴 남자랑 살림 차렸다더라."
그 날 마침 엄마가 생일이었던 너에게 미역국을 가져다주려고 장모님한테 연락했고 장모님이 얘기해주셨지.
6개월 전쯤 싸우고 애들 데리고 나가서 나는 장모님 댁에 잘 있는 줄 알았어.
그런데 애들 데리고 그놈 집에서 장장 6개월을 지냈다는 사실을 알고 화가 났어.
너가 그딴 짓을 했다는 것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 새끼들이 그렇게 있었다는 게 치가 떨렸어.
죽이고 싶었어.
면접을 잘보고 뭐고 나는 분하고 어이가 없어서 올라가는 열차에서 부들부들 떨었어.
올라가자마자 장모님 댁에 무작정 찾아갔어. 아무도 없어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한참을 앉아있었어.
1시간 정도 지났을 때, 이제는 장인이라고 하기도 싫은 사람이 왔지.
나는 인사를 했는데, 돌아오는 말이 가관이더라.
왜 여기 있냐고, 너네 끝난 거 아니냐고, 남의 집에 막 이렇게 들어와 있어도 되냐고?
남의 집? 내가 그 말 듣고 울화가 치미는 거 억지로 누르고 눌러 물어봤어.
딴 사람이랑 살고 있는 거 맞냐고.
그렇대, 근데 너가 회사 그만두고 능력 없어서 그 놈한테 간 거래, 있을 때 잘하지 그랬냐고.
내가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있다가 나를 벌써 남이라고 생각하는 그 작자 집에서 나왔어.
내가 왜 그딴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가더라.
항상 오전에 도서관에 가서 밤 10시까지 취업준비를 하고 들어와서 컴퓨터를 하는 나한테 너는 항상 뭐라고 했었지.
그 동안 너는 다른 남자 만날 궁리를 했으면서, 돈 못버는 나를 얼마나 속으로 비교했을까?
돈이 없어 삼각김밥으로 배를 채우던 나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 내가 그렇게 하루를 버텼다는 걸 알기나 했을까?
나는 너가 딴 살림 차린줄도 모르고 전화 잘 안받는 상황을 너가 바빠서 그렇겠지라고 내 스스로를 납득시켰고,
빨리 취업해서 못해준 거 다 해줘야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살았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산산히 부서진 순간,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가는 내내 울었어, 병신같이.
그래도 장모님은 나를 생각해주셨는지 너랑 한번 만나게 해주셨었어.
만나서 울면서 얘기했어. 내가 지금 분하고 화나는 거, 너가 6개월 동안 했던 모든 행동 다 용서해준다고.
그런데 돌아오는 말은 마음 떠났고, 그 사람 사랑한다고 나랑은 같이 살 생각 없다는 말 뿐이었어.
사람들 많은 곳에서 무릎 꿇고 내 뺨을 때리면서 빌었어.
다시 한 번 생각하라고, 내가 다 잘못했다고, 잘해주겠다고, 애들 생각하라고.
역시 똑같은 대답이었지.
결정적으로 부부간의 신의를 저버린 너한테 나는 왜 내가 잘못했다고 울고 불며 매달려야 했을까?
아이들 때문이었어.
사정하고 애원하기를 수백번, 어느 순간 냉정해지더라.
생각해보면 이상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어. 너 사업 시작한다고 차를 사줬을 때부터였을 꺼야.
자동차 동호회를 나가면서 연락도 안 되고 밤늦게 들어오는 일이 잦아졌어, 그 때 사달이 난거겠지.
애초에 장모님 댁에 있지도 않고 그 놈 집에서 내 자식들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정말 소름이 끼쳤다.
그렇게 생각을 하다하다 아이들 생각을 하니까 정이 확 떨어지더라.
그 날 깨져버린 마음을 하나하나 줍고 주워 붙이고 나서도 계속 떨어져나가는 조각나는 마음을 부여잡고 부여잡다가,
잠은 안 오고 말을 해야겠더라 누구한테.
그래서 영희형한테 전화해서 머뭇거리다가 말했어.
솔직히 생각은 어느 정도 정리됐지만 내가 정말 이 거지 같은 상황에 처해있는게 맞나 싶을 정도로 믿기질 않았어.
형한테 말하면서도 울었고, 내 옆에서 자는 딸아이옆에서 나는 소리도 못내고 몇 시간을 펑펑 울었어.
근데 웃긴 건 왜 나만 슬퍼하고 가슴 찢어지고 해야 했던 건데...
너는 앞으로 너의 인생에서 나만 없어지면 행복할 것처럼 대답했어.
그 날 이후로 너가 사줬었던 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그 날의 월과 일이 되어 멈춰있어.
나는 죽어도 그 날을 잊지 않을 거야.
너의 행복을 위해서 나의 마음을 서슴없이 깨뜨려버리고 불태워 잿빛으로 만들어버린 그 날을 잊지 않아.
그리고 아이들에게 엄마라는 존재의 부재와 슬픔을 안겨줄 너를 평생 저주한다.
3.
나한테 첫 번째, 두 번째 아내는 없다. 그럴만큼 잘난 놈이 아니다. 한 명의 아내가 있었을 뿐이지.
어느 날을 기점으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되버린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직도 나는 이해 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나는 한사람을 둘로 나눠 각각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다.
한 사람에게는 무한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한 사람에게는 한으로 얼룩진 말들을 내뱉고 싶었다.
이제는 둘인듯 하나인 그 사람에게 편지를 써보려한다.
한 때는 아내였던 너에게,
그렇게 된 후에 내가 언젠가 술 한잔하고 집에 가는 길에 전화 한 적 있었지?
나와 아이들을 두고 간 너한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평소에는 날 이렇게 만든 너한테 욕을 너무 퍼붓고 싶었어.
근데 왜 첫마디가 "잘지내니?" 였을까? 불행하길 바라던 내 입에서... 그리고 말을 이었어.
애들이랑 나 버리고 행복하느냐고 왜 그랬냐고 채근하던 나한테 돌아오는 말은 없었어. 대신 너의 흐느낌만 돌아왔지.
그 순간에 너가 나를 매정하게 버리는 장면보다 나 때문에 울고 고생하는 모습이 떠올라서 나도 무슨 말을 할 수 없었어.
욕도 저주도 퍼부을 수가 없었어. 그렇게 나를 버린 너도, 고생하고 인내했던 너도 너였으니까.
몇 분동안 흐느끼던 너가 말했어.
"미안해"
그리고 내가 말했어. 내 자신도 놀랄만큼 다정하게.
"미안할 짓은 왜 했어? 뭘 잘했다고 울어, 내가 울고 싶은데"
그리고 너가 말했어.
"애들은 잘 지내지?"
그리고 내가 말했어.
"잘지낸다. 엄마 없이도 기특하게."
그리고 너가 말했어.
"미안해."
그리고 내가 말했어.
"잘못해줘서 미안하다. 고생만 시키고. 너가 살려고 나갈만큼 갑갑한 집이었으니까, 나도 이해해. 그러니까 나랑 애들 버리고 간만큼 잘 살아."
그리고 너는 말이 없었어. 또 흐느끼기 시작했어.
그리고 내가 말했어. 마지막으로.
"정말 사랑했어. 이제 전화할 일 없을꺼야."
나는 솔직히 아직도 혼란스럽다. 예전 너의 모습을 생각하면 눈물 날 정도로 속상하고 아련한데, 그 시점 이후의 너의 모습을 생각하면 화가나.
측은하면서 미워.
하루는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어. 비가 갑작스럽게 오던 날, 아빠가 큰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갔었나봐.
너도 걱정이 됐는지 교문앞에 서서 기다리더라고... 그 모습을 아빠가 봤겠지.
엄마는 너한테 전화했고, 너는 그래도 엄마라고 기다렸는데 그렇게 못봐서 울면서 얘기했다고....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너무 가슴이 먹먹해졌어.
정말 많이 미워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불쌍해서 나도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어서.
두 이질적인 감정이 공존하는 나는 너를 어떻게 기억하고 마무리 지어야 하는 거니...
나한테 무엇보다도 소중한 아이들을 품에 안겨줬고, 나에게 살면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을 모두 주었으면서, 한편으로는 죽고 싶을 만큼 고통과 배신감, 비참함을 준 너를 어떻게 해야되는건지 모르겠어.
이 편지는 너한테 쓰는 편지지만, 갈 수는 없겠지.
그래도 첫 번째, 두 번째 편지의 마지막은 고치고 싶다.
그래 나는 그런 너를 사랑했어.
후줄근한 옷을 입고 있어도, 화장기 없는 꾸밈없는 모습으로 밥을 우걱우걱 먹어도 너를 사랑했어.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세 아이 낳아주고 키워줘서 고맙고, 열심히 살아줘서 존경했어.
수업을 마칠 때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너와 내 아이를 두 손으로 안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웠어.
막연하고 잿빛이 만연했던 나의 삶에 선명하고 푸른,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힘이 되어준 너에게 너무 고마워 지금도.
나는 죽어도 그 날을 잊지 않을 거야.
너의 행복을 위해서 나의 마음을 서슴없이 깨뜨려버리고 불태워 잿빛으로 만들어버린 그 날을 잊지 않아.
그리고 아이들에게 엄마라는 존재의 부재와 슬픔을 안겨줄 너를 평생 미워하겠지만, 저주하지 않아.
대신 내가 고생시킨 만큼, 나와 너의 아이들과 맞바꾼 삶인만큼 제발 잘 살아.
[아내]
: 마음을 산산히 부수어버린 여자이자, 부서져버린 그 마음의 형체를 유지할 수 있는 희망과 기억을 준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