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이란 무엇일까?
여러 종교나 사상가마다 견해가 다르다.
구원의 사전적 의미는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에서 벗어남으로 정의된다.
여기에 여러 종교들과 사상가들이 새로운 해석을 덧붙인다.
내가 알게된 구원에는 세가지 형태가 있다.
어려움이 있다면 그 어려움에, 원수가 있다면 그 원수와의 관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저항하는 것이다.
그것이 도망이 될 수도 있고, 싸움이 될 수도 있다.
흔히 받아들임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이 받아들임이란 것이 앉아서 당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링 위에 올라간 복서를 예를 들어보자.
상대의 주먹을 가만히 맞아주는 것은 받아들임이 아니다.
최선을 다해 상대와 싸우는 것이 받아들임이다.
또 무조건 싸우는 것만이 저항이 아니다.
때로는 손해와 굴욕을 감수하고 물러서는 것도 저항이다.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저항하는 것이다.
그것이 도망이 될 수도 있고, 싸움이 될 수도 있다.
흔히 받아들임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이 받아들임이란 것이 앉아서 당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링 위에 올라간 복서를 예를 들어보자.
상대의 주먹을 가만히 맞아주는 것은 받아들임이 아니다.
최선을 다해 상대와 싸우는 것이 받아들임이다.
또 무조건 싸우는 것만이 저항이 아니다.
때로는 손해와 굴욕을 감수하고 물러서는 것도 저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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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지만,
오른뺨을 맞았을때 그냥 맞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왼뺨을 내미는 것도 저항의 하나이다.
비폭력 무저항이 아니라 비폭력 저항이다.
http://starvewolf.egloos.com/7316736
종교나 철학을 따라가다보면 자신의 약함 혹은 자신의 추악함을 보게 된다.
인간의 행동은 간단하게 둘로 나뉜다.
쾌락 혹은 즐거움을 추구하거나,
고통 혹은 괴로움을 피하려는 것이다.
생체적인 이유 -호르몬 분비-도 있고,
심리적인 이유 -콤플렉스-도 있다.
내가 왜 이러고 싶은가 혹은 내가 왜 이러고 있는가를 해석하면
정말 어이없는 이유가 나온다.
자기(The Self)와 자아(The Ego)를 구분한다면
전혀 다른 세상이 시작된다.
습관을 바꾸면 인생이 바뀌는 이유가 이것이다.
자기 부정? 자아 부정!!
http://starvewolf.egloos.com/7241379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그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환경에 저항함이 첫번째 구원이라면, 두번째 구원은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저항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알고 나를 더 나은 경지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방향이 중요하다.
더 나은 내가 어떤 세속적인 부나 명예 등에 머무르면 안된다.
그렇다고 부나 명예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살다보니 결과적으로 부나 명예가 생기는 것과
부나 명예를 목적으로 사는 것이 다를 뿐이다.
자신을 알아가다보면 내 속에 비뚤어진 욕망이나 두려움을 직면한다.
비뚤어진 욕망과 두려움을 극복하면 새로운 자신이 되는 것이다.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고 자신을 알려는 것부터 큰 관문이 있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착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환경에 저항함이 첫번째 구원이라면, 두번째 구원은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저항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알고 나를 더 나은 경지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방향이 중요하다.
더 나은 내가 어떤 세속적인 부나 명예 등에 머무르면 안된다.
그렇다고 부나 명예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살다보니 결과적으로 부나 명예가 생기는 것과
부나 명예를 목적으로 사는 것이 다를 뿐이다.
자신을 알아가다보면 내 속에 비뚤어진 욕망이나 두려움을 직면한다.
비뚤어진 욕망과 두려움을 극복하면 새로운 자신이 되는 것이다.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고 자신을 알려는 것부터 큰 관문이 있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착각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간단하게 둘로 나뉜다.
쾌락 혹은 즐거움을 추구하거나,
고통 혹은 괴로움을 피하려는 것이다.
생체적인 이유 -호르몬 분비-도 있고,
심리적인 이유 -콤플렉스-도 있다.
내가 왜 이러고 싶은가 혹은 내가 왜 이러고 있는가를 해석하면
정말 어이없는 이유가 나온다.
자기(The Self)와 자아(The Ego)를 구분한다면
전혀 다른 세상이 시작된다.
습관을 바꾸면 인생이 바뀌는 이유가 이것이다.
자기 부정? 자아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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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구원은 '죽음'이다.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 성실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 성실할 수가 없다.
신은 우리가 신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와 함께하는 신은 우리를 버리는 신이다.
신이라는 작업가설 없이 우리를 세상 속에 살게 하는 신은 우리가 항상 그 앞에 서 있는 신이다.
신 앞에서 신과 함께, 우리들은 신 없이 산다.
[디트리히 본훼퍼 - 옥중서간 中]
환경에 저항함도, 자아에서의 해방도
어찌보면 '신의 자비와 구원'과는 먼 개념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신과의 괴리를 받아들이는 것일지 모른다.
신이 나를 버렸다는 사실을 ...
기독교 신앙은 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보다 나를 버렸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일 수 있다.
'신은 당신을 사랑합니다.'의 동의어는 '신은 당신의 원수를 사랑합니다.' 일 수 있다.
어찌보면 '신의 자비와 구원'과는 먼 개념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신과의 괴리를 받아들이는 것일지 모른다.
신이 나를 버렸다는 사실을 ...
기독교 신앙은 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보다 나를 버렸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일 수 있다.
'신은 당신을 사랑합니다.'의 동의어는 '신은 당신의 원수를 사랑합니다.' 일 수 있다.
신을 전지전능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인간이 만나는 신은 무능하고 무책임하다.
인간이 만나는 신은 무능하고 무책임하다.
신이 있다면 죽은 뒤에 그 존재의 실체를 만날 수 있을테고,
그것이 바로 본질적인 구원일지 모른다.
물론 어떤 인생이든 동일한 가치의 죽음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매국노와 독립운동가의 삶이 동일한 가치라면 좀 억울하지 않을까?
물론 전혀 다른 개념의 기준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본질적인 구원일지 모른다.
물론 어떤 인생이든 동일한 가치의 죽음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매국노와 독립운동가의 삶이 동일한 가치라면 좀 억울하지 않을까?
물론 전혀 다른 개념의 기준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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