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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세가지 구원 (0) 2017/09/28 PM 02:17

구원이란 무엇일까?


여러 종교나 사상가마다 견해가 다르다.
구원의 사전적 의미는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에서 벗어남으로 정의된다.
여기에 여러 종교들과 사상가들이 새로운 해석을 덧붙인다.


내가 알게된 구원에는 세가지 형태가 있다.
이 세가지가 각각인지, 하나인데 세가지로 보이는지
정해진 순서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세가지로 보일 뿐이다.


첫번째 구원은 '환경에 저항함'의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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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이 있다면 그 어려움에, 원수가 있다면 그 원수와의 관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저항하는 것이다.
그것이 도망이 될 수도 있고, 싸움이 될 수도 있다.

흔히 받아들임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이 받아들임이란 것이 앉아서 당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링 위에 올라간 복서를 예를 들어보자.
상대의 주먹을 가만히 맞아주는 것은 받아들임이 아니다.
최선을 다해 상대와 싸우는 것이 받아들임이다.

또 무조건 싸우는 것만이 저항이 아니다.
때로는 손해와 굴욕을 감수하고 물러서는 것도 저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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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지만,
오른뺨을 맞았을때 그냥 맞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왼뺨을 내미는 것도 저항의 하나이다.

비폭력 무저항이 아니라 비폭력 저항이다.
http://starvewolf.egloos.com/7316736



두번째 구원은 '자아로부터의 해방됨'의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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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나 철학을 따라가다보면 자신의 약함 혹은 자신의 추악함을 보게 된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그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환경에 저항함이 첫번째 구원이라면, 두번째 구원은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저항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알고 나를 더 나은 경지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방향이 중요하다.

더 나은 내가 어떤 세속적인 부나 명예 등에 머무르면 안된다.
그렇다고 부나 명예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살다보니 결과적으로 부나 명예가 생기는 것과
부나 명예를 목적으로 사는 것이 다를 뿐이다.


자신을 알아가다보면 내 속에 비뚤어진 욕망이나 두려움을 직면한다.
비뚤어진 욕망과 두려움을 극복하면 새로운 자신이 되는 것이다.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고 자신을 알려는 것부터 큰 관문이 있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착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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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행동은 간단하게 둘로 나뉜다.
쾌락 혹은 즐거움을 추구하거나,
고통 혹은 괴로움을 피하려는 것이다.

생체적인 이유 -호르몬 분비-도 있고,
심리적인 이유 -콤플렉스-도 있다.

내가 왜 이러고 싶은가 혹은 내가 왜 이러고 있는가를 해석하면
정말 어이없는 이유가 나온다.

자기(The Self)와 자아(The Ego)를 구분한다면 
전혀 다른 세상이 시작된다.

습관을 바꾸면 인생이 바뀌는 이유가 이것이다. 

자기 부정? 자아 부정!!
http://starvewolf.egloos.com/7241379




세번째 구원은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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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 성실할 수가 없다.
신은 우리가 신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와 함께하는 신은 우리를 버리는 신이다.
신이라는 작업가설 없이 우리를 세상 속에 살게 하는 신은 우리가 항상 그 앞에 서 있는 신이다.

신 앞에서 신과 함께, 우리들은 신 없이 산다.

[디트리히 본훼퍼 - 옥중서간 中]



환경에 저항함도, 자아에서의 해방도 
어찌보면 '신의 자비와 구원'과는 먼 개념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신과의 괴리를 받아들이는 것일지 모른다.
신이 나를 버렸다는 사실을 ...

기독교 신앙은 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보다 나를 버렸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일 수 있다.
'신은 당신을 사랑합니다.'의 동의어는 '신은 당신의 원수를 사랑합니다.' 일 수 있다.


신을 전지전능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인간이 만나는 신은 무능하고 무책임하다.


신이 있다면 죽은 뒤에 그 존재의 실체를 만날 수 있을테고,
그것이 바로 본질적인 구원일지 모른다.

물론 어떤 인생이든 동일한 가치의 죽음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매국노와 독립운동가의 삶이 동일한 가치라면 좀 억울하지 않을까?


물론 전혀 다른 개념의 기준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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