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에 만들어진 '아마데우스'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두번 - 이번에 글을 쓰기 위해 한번 더 봤으니 이제 세번이네요 - 보았는데, 처음은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였으니 초등학생 무렵이었고, 두번째는 대학 5학년 때였을 겁니다. 처음 보았을 때에는 살리에리에게 살해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모짜르트가 불쌍해서 눈물을 펑펑 쏟았었던 기억이 나고, 두번째 보았을 때에는 돈 조반니를 상영 금지 시켜놓고 정작 자기는 매번 몰래 관람했다는 살리에리의 회고장면에서 눈물을 쏟았었습니다. 자.. 여기까지만 읽으셨어도 이 영화를 보신 분이라면 제가 무슨 글을 쓰려고 하는지 눈치채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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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역사에 길이 남을 슬램덩크를 보면 여러명의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나옵니다. 주인공 강백호, 원래는 주인공으로 기획되었다가 라이벌로 중간에 설정이 바뀐 서태웅, 우직한 리더 채치수, 최고의 재능을 지녔지만 2년의 허송세월이 약점이 되어버린 정대만 등이 그들입니다.
그중에서 사람들에 의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대사들을 ? 왼손은 거들뿐 빼고 - 남긴 것은 아무래도 불꽃남자 정대만일 겁니다. 그 대사 하나하나가 명품이기도 하거니와, 그 대사를 말하는 사람인 정대만의 인생 역정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감하게 만들기 때문일 겁니다.
훌륭한 재능, 극복이 불가능했던 역경, 젊은 시절의 방황, 다시금 불태우는 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지 않는 전성기의 기량 (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뛰어나지만) 등등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지요.
근데… 냉정하게 말해서, 사람들이 정대만에게 교감하고 ‘그래 내가 이렇지’ 라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말이 안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극복 불가능할 만큼의 역경을 겪지도 않고, 방황은 그냥 지가 하고 싶어서 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의지를 다시 불태우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교감하는 캐릭터는 그래서 그 만화에 아주 잠시 나오는 ‘장권혁’ 이었습니다. 중학 시절에 정대만에게 패배하고 절치부심 3년의 시간을 보낸 뒤 마침내 정대만을 다시 만나죠. 그는 그 길었던 3년간 쌓아올린 실력으로 마침내 정대만을 패배 직전으로 몰아넣은 뒤, ‘넌 날 이길 수 없어. 고교 농구를 우습게 보지 마라’ 라고 한마디 던집니다. 하지만 이후 잠자고 있던 재능이 폭발한 정대만에게 5분만에 다섯개의 삼점슛을 내어주고는 팀 패배의 결정적 역할을 한 셈이 되어버립니다.
제가 저 사람에게 강한 교감을 (사실 전 거기서 거의 눈물이 날 뻔 했었는데) 느꼈던 이유는, 사실은 저 모습이 우리들 대부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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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때 어떤 분야에 대해 재능을 보이고 그 분야가 크게 싫지 않다면, 인생이 편합니다. 그 재능이 내가 할 일을 결정해주기 때문이죠.
근데 문제는, 그 재능을 발현하면서 해당 분야의 사회로 진출할 수록 그 사회에는 그 재능이 강한 사람이 모여있다는 점입니다. 인문계에 진학하면 평균 학업능력이 높아지고, 좋은 대학교로 올라가면 다시 주변 사람들의 능력이 훨씬 좋아지고, 음악 좋아하던 사람이 예고라도 간다 치면 더이상 내 재능은 주위사람들과 비교해볼 때 전혀 특별하지 않습니다.
이런 벽에 부딪히는 경험을 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소위 ‘천재’ 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죠. 물론 이런 사람들이 단순히 IQ 260 으로 태어났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신경학을 10년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서 누구나 정신분석학을 창시하진 못하고, 어른이 된 다음에 무용을 시작했다면 대부분은 마사 그레이엄같은 무용수가 되진 못합니다. ( 천재에 대해 아주 재미있는 책이 하나 있습니다. 천재적 창조성을 발휘한 6명의 사람을 분석한 ‘열정과 기질’ 이라는 책인데요, 지은이인 하워드 박사는 원래는 ‘다중지능’ 이론으로 유명한 사람이지만 해당 분야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어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만한 책입니다. )
보통사람들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나름 잘났던 자신이 평범해지는 이런 변화는 제법 받아들이기 힘든 변화입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택하는 전략은
1. 과거로 회귀해서 ‘내가 소싯적에는 어쩌고 저쩌고’ 라고 말하며 주변의 인정을 바라거나,
2. 그 집단이 평균적으로 잘 하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주제로 ‘단순한 니들과는 달리 나는 문학에 대해 깊은 소양이 있는데 어쩌고 저쩌고’ 라는 식으로 자신을 특화하려 합니다.
두가지 모두에 대해 주변의 반응은 동일합니다. 니가 소싯적에 공부(내지는 철학/문학/오덕 게임) 좀 했다 치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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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세번째 길도 있습니다.
3. 패배가 예정된 길을 일부러 택한 뒤, 자신의 패배는 운명이 정해준 것이라 외친다.
Underdog 스타일의 사람은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승리라는 자체에는 흥미가 없어보일 정도로 불리한 상황에 대한 중독이 심합니다. 이런 부류의 인간은 유리한 상황에서 이기는 것에는 애초에 관심도 없습니다.
근데 이런 인간의 속마음 깊은 곳에는 사실은 패배주의가 내재하고 있습니다. ‘난 불리한 상황에서 싸웠어. 고로 이기면 내가 대단한 것이고, 지면 뭐 그건 운명이 나를 패배시키는 것이니 어쩔 수 없는거지.’ 이런 마음을 말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언더독 스타일의 사람이 그럼 유리한 상황에서는 분명히 승리했을 것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리한 상황에서 플레이하기를 두려워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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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길도 있습니다. 장권혁이 택했고,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리가 택했던 길입니다.
4. 천재는 천재의 길이 있고, 나는 보통사람들의 챔피언이 될 것이야.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신 분들은 눈치채셨겠지만, 살리에리가 정신병원에서 남겼던 마지막 대사를 조금 바꿔봤습니다)
이 길은 정말로 가기 힘든 길입니다. 왜냐하면, 이 길의 끝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은 평범함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걷기 위해 투자해야 하는 노력과 의지는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견하거나 타이거 우즈가 PGA 우승하기 위해 들인 것에 비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 이 지점에서 의지와 노력에 대한 제 개인적인 생각을 하나 적어두어야 할 듯 합니다. 저는 불굴의 의지를 지닌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할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불굴의 의지를 발현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좀 궤변같죠.. 하지만 이런 면이 분명히 있어요.
잘난 사람은 패배에 대해 강한 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같은 이야기를 이렇게 볼 수도 있지요. 힐러리 경과 내가 에버레스트 산을 첫번째로 등정하기 위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가정하고, 제가 이번에 17번째로 등정에 실패했다고 칩시다. 아마도 저는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내가 이번에 에버레스트 산에 등정하는 것에 대해 또 실패했지만, 어차피 아직 힐러리도 올라가보지 못한 산이야. 고로 한번 더 해보자’ 라고요. 이런 '잘난 나 vs 잘난 다른 사람'의 경쟁이라는 상황은 패배를 극복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2007년에 에버레스트를 올라가려는 노력을 제가 했고 17번째로 실패하고 나면, 위에 적은 불굴의 의지를 발현하기가 훨씬 힘듭니다. 이건 잘난 나 vs 잘난 다른 사람 의 구도가 아니라 '평범한 나 vs 아웃오브안중' 의 구도이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이 말년에 통일장 이론을 평생 파다가 실패한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들은 '위대한 나 vs 신의 언어'라는 자기 최면이 가능하기에 평생도 쏟아부을 여력이 생깁니다. 하지만 인수분해가 이해가 잘 안가는 경우에는 그런게 아니죠. '인수분해도 못하는 나 vs 아웃오브안중' 의 구도가 됩니다. 결국 극복해봐야 보통, 못하면 못난놈이 되는 그런 셈이고, 이럴 때에 불굴의 의지를 발현하는 것은, 제가 단언하건데, 잘난 사람이 동일한 의지를 발현하는 것보다 훨씬*20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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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검심에 보면 ‘우스이’ 라는 장님 검사가 나옵니다. 극중 최악의 악당인 시시오 마코토와의 결투에서 눈을 잃은 뒤, ‘시시오 마코토를 암살할 기회를 노리기 위해’ 라고 떠벌이며 시시오 마코토의 부하로 활동하고 있는 검객이죠.
우스이는 극의 후반부에서 더티 히어로인 사이토와의 대결에서 목숨을 잃습니다만, 이 결투가 시작하기 전 사이토가 우스이에게 말했던 대사가 일품이었습니다.
‘네놈이 왜 시시오의 부하가 되었는지 대충은 알지. 넌 니가 시시오에게 영원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근데 패배를 인정하기는 싫었지. 그래서 말로만 그를 암살하기 위해 부하가 된다는 명분을 걸고 놈의 부하가 된거야. 그럼 적어도 남들은 네놈이 졌다는 것을 모를테니까. 어때? 정확하지는 않아도 크게 틀리진 않지? 싸워보지도 않고 꼬리를 내린 똥개 주제에’
이 말은…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취하게 되는 어떤 태도에 대해 너무나도 정확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나온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등이 되라고 가르치는 사회에서 진짜 일등을 뺀 나머지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들 패배자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수많은 거짓을 만들어내죠. '내가 원래는..', '내가 소싯적에는..', '쟤가 알고보면..'
우리는 우스이처럼 살다가 그렇게 죽고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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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에리가 며칠을 들여 작곡한 곡을 모짜르트가 한번 들어보더니 몇군데 고쳐서 훨씬 훌륭한 곡으로 바꿔주는 장면을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이건 평범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몇십 몇백번씩 겪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적어도 인간이라는 종이 한걸음 더 딛기 위해 범해야 하는 이만칠천육백이십오가지의 시행착오 중 하나를 내가 범함으로써, 6년 뒤에 나를 비웃으며 앞으로 나아가 모든 영광을 차지할 누군가의 시간을 5분정도 절약시켜줄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 월급도 타구요.
끗.
수정 :
고무신님의 댓글에 대한 답변의 성격이 되겠습니다만, 저는 '자.. 일은 이정도 해두고 인생을 즐기며 살자' 라는 입장이 절대로 틀렸다거나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선택의 문제이지 좋고 나쁘고가 아니죠.
다만, (조금 심한 단순화가 되겠습니다만) 인생에서 각 개인이 중시할만한 것들이, 자기 직업에서의 성취 vs 자기 개인 생활에서의 즐거움 으로 크게 분류된다고 할 때, 전자의 성취라는 것을 중시하는 분들은 대부분 제가 본문에서 언급한 벽을 언제고 한번쯤 느끼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취에서 자신의 가치를 느끼고 싶은 욕구는 남아있는데, 그 성취가 점차 요원해지면, 사람은 비겁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극복하거나 회피하는 여러가지 모습에 대해 이 글에서 이야기 해보고 싶었습니다.
애초에 저런 것들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 글 전체가 무의미한 것이 되겠죠. 그런 입장은 그 자체로 인생을 사는 하나의 훌륭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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