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
그 한마디는 한없이 지속될 것 같았던 이 방의 정적을 깨기엔 너무나도 뜬금 없는 한마디였다. 나는 놀라서 그에게 되물었다.
"응?"
"냉면 먹으러 가지 않을래?"
그는 읽던 책에서 눈을 돌리지조차 않은채, 멀뚱거리고 있는 내게 말했다.
"상관없긴 한데, 아직 오후 세시야. 저녁먹기엔 이른시간인데. 점심먹은지도 두시간밖에 안지났고"
"그건 또 무슨 대답이야. 상관없긴 한데 상관있는 말들이 뒤에 나오다니"
그는 말의 꼬투리를 잡으며 내게 말했다.
"내 말은 말이지, 먹으러 가도 괜찮긴 한데 넌 괜찮겠냐는 의미지"
"괜찮으니까 물어본거 아니겠어?"
"아 그래"
피곤한 성격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랬고. 그와 나는 중학교 때부터의 동창으로, 3년 같은 중학교에, 그리고 지금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같은 고등학교다. 나의 고등학교는 조금 특수한 고등학교인데, 여타 다른 고등학교들 처럼 대학진학을 목표로 한다거나 그런게 아닌, 학생 자율에 거의 모든 것을 맡기는 방임주의가 모토인 고등학교다. 지금 그와 나도 본래 있는 수업을 빼먹고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서 아무래도 좋은 철학책을 읽는 중이었다. 그는 최근 아렌트를 읽기 시작했고, 나는 맑스를 읽기 시작한 참이었다. 하지만 둘 다, 그것이 제대로 뭔지는 알지 못했고, 단지 처음엔 겉멋만 들어서 읽고 있는 것 뿐이었다.
"어디에 가고싶은데?"
"시장까지 나가면 있어"
"그럼 가볼까"
읽던 책을 덮고서, 나는 일어섰다. 그도 기다렸다는 듯 읽던 책을 그대로 도서관 책상에 펼쳐둔 채로 같이 일어났다. 그는 책을 한번 빼놓으면, 다시 있던 자리에 돌려놓는다는 개념이 없는 듯 하다.
맑스를 되돌려놓고나서, 나와 그는 도서관을 나섰다. 그의 손에는 그가 얼마전 오락실에서 놀고 남은 코인이 들려있었다. 그는 코인을 퉁기면서 내게 말했다.
"살아간다는 건 괴로움의 연속이야"
네 성격이면 그럴 수도 있겠다, 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집어삼켰다. 그와 이 비슷한걸로 몇번이고 이미 논쟁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는 두 가지 선택권이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멋대로 내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하지만 난 내 이야기를 하는 것에 흥미가 없었기에 전자를 택했다. 우유부단한 인간의 특징이다.
"왜 괴로운건데?"
"목표란 저 멀리 있고, 눈은 그것을 보고 있는데, 내가 그곳까지 갈 수 있는 수단은 내 다리 뿐이니까"
"그나마 목표가 눈에 보인다는건 좋은 일이네"
"달이 눈에 보인다고 해서 다리로 걸어서만 갈 수 있진 않듯, 그 목표가 보인다고 해서 반드시 도달 가능하진 않지"
선문답을 하고싶은거야?, 하고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여기서 그렇게 말해봤자 그를 화나게 할 뿐이다. 예전에도 그렇게 말해서 그와 몇번쯤 논쟁한 적이 있다. 그다지, 기분좋은 논쟁은 아니었다.
"그 비유는 아폴로 이후로 이미 낡았어"
하지만 나의 반골기질은 어딜가지 않는다. 그를 놀려주고 싶은 마음에 그런 대답을 했다.
"아폴로는 조작이야"
그는 세간에서 말하는 음모론자의 일종임에 틀림없다. 평소같으면 "증거는?" 하고 되물었겠지만, 지금은 그다지 그럴 기력이 없다.
"네가 목표에 다다르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동안, 적어도 그들은 목표에 다다랐다는 꿈이라도 만들어 냈으니, 그들이 차라리 낫지 않나. 게다가 그들은 달에 간다는 구체적인 목표까지 있었잖아. 구체적인 목표 없이 단지 그 목표가 보인다고 말하는 너와는 천지차이지"
아아, 정말.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이런 잔소리 해봤자 그와 말싸움이 될 뿐인데
"아니야, 내 목표는 구체적이라고"
"무슨 목표인데?"
그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구체적인것 치곤 꽤나 추상이 많이 들어가 있는 것이겠지. 그건 구체적이라고 하지 않는단다.
"자아로부터의 탈피"
"퍽이나 구체적이로군"
"구체적이잖아"
"그렇게 주장해도 말이지"
"아, 내 삶의 숭고함을 알아주는 자는 과연 없는건가"
"숭고함 이전에 수고스럽군"
나는 한숨 쉬며 말했다.
"뭐야, 이 회의주의자가"
"좋아, 그럼 우리 함께 스무고개라도 해볼까? 뭔가 구체화 하는데 이것만한게 없지"
"알았어, 그럼 물어봐"
냉면 먹다가 체하겠다...
"네 목표는 물질적인것? 아니면 관념적인것?"
그냥 봐서는 후자다만, 전자라고 말한다면 함정에 빠지게 되겠지. 물질적인 것에는 제한이 많이 붙거든.
"처음부터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로군"
"별로 어렵지 않잖아"
"아니야, 목표라는건 기본적으로 물질적 성질과 관념적 성질을 함께 가지니까"
"음-"
그는 스무고개라는 방법 그 자체에 도전하고 있었다. 아마 그는 분명히, 정치성향 테스트같은걸 하면 분명히 '어느쪽도 인정할 수 없다' 를 다 골라서 마지막에 얻는게 완전한 중도파 같은걸 얻겠지. 완전한 중도파란 실질적으로는 완전한 아나키스트에 가까운데도 말이다.
"좋아, 그럼 그 질문은 놔두고, 다른 질문을 하자고. 그럼 네 목표는 네 자신의 변혁에 있나, 아니면 세상의 변혁에 있나?"
결국은 해야하는 질문이지. 이것도 애매하다고 말한다면 아무 말도 못하지만.
"..."
"왜 갑자기 아무 말도 안하는건데"
"모르겠어"
"정말 목표가 있긴 한거야?"
"분명히 목표는 있어.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무엇의 변혁에 있는지 난 갈피가 잡히지 않아"
"... 아무래도 스무고개를 택한 내가 잘못한 것 같다. 네가 한없이 회색을 좋아했다는 걸 또 망각하고 있었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가가 가져야할 덕목으로 중도를 들었고, 그것이 표면적 의미로는 뭐든지 과하지도 않고 적당히,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결코 그것은 어떤 일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지 말고 우유부단하라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비극이다. 난 어떤 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 뿐일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렇군"
그 말을 하는 것 과 동시에 우리들은 냉면집 앞에 도착했다. 이 시간에 손님이 있을리는 만무했고,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 둘은 더욱 그러했다만, 개의치 않고 우리들은 들어가서 냉면을 시켰다. 시킨지 얼마지나지 않아, 냉면이 나오고, 우리들은 냉면을 먹으면서 아까 전의 대화를 다시 이어나갔다.
"아, 네가 괴로운 이유도 이제 알 것 같다"
나는 냉면을 먹다가 그에게 말했다.
"역시 넌 너무 숭고했던거다. 조금 더 이 세상의 오탁汚濁이 실은 자신의 탁함을 비추는 거울이었다고 인정하는건 어떠냐. 네 회색처럼"
"끔찍한 소리. 넌 흙탕물에 비친 네 모습이랑 흙탕물 속에 떠다니는 흙이랑 구분도 안가?"
"하지만 너도 그 속에서 태어났고, 널 키워준 것도 결국은 그 오탁인데도?"
"모든 관념적, 실질적 부모에게 있어서 최고의 감사란 그들과 달라지는 것이지. 그들과 같은 길을 가는게 아니야"
"언제쯤 강물이 맑아질거라 생각하는데"
"그것이 흐르기 시작할 때겠지"
냉면을 깨끗이 비운 그는 비장하게 있었다만, 실로 평범한 고등학생이었을 뿐이었다. 늦은 여름의 매미가 소란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