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3일 수요일 중앙일보 35면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의미심장하고 인상깊은 부분이 실려있어서 전문을 옮겨와봤습니다.
팍팍한 현실 외면한 엘리트 연합
조폭·검사가 응징하자 대중 열광
허구지만 위태로운 현실을 은유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닌데
살아 있는 권력을 감시 못하면
일상적 최선 다해도 면책 안 돼
영화 ‘내부자들’을 보았다. 대권에 도전하는 유력 정치인과 재벌 회장, 언론인의 끈적끈적한 유착관계를 리얼하게(?) 그렸다. 영화 속 ‘이강희 논설주간’은 정치권과 재벌을 조종하는 막후 실세였다. 나의 사회적 호칭이 ‘이 주간’인지라 “세긴 센가 봐요”라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쯤 되면 현실 속 논설주간의 실상을 공개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는 칼럼을 쓰는 일 말고도 매일 어떤 사안에 입장을 밝힐지를 정하고, 논설위원들이 쓴 사설의 내용을 수정하고 제목을 정한다. 내·외부 필자의 칼럼 내용을 검토해 필요하면 손질하고 때론 몰고한다. 이런저런 고민 속에 판단을 내리느라 하루가 짧다. 자기 칼럼만을 통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영화 속 논설주간보다는 일이 많다. 물론 약점이 있는 대권주자와 재벌 총수를 컨설팅해줄 정도로 한가하지도 않다.
영화 속 논설주간은 혼자서 끊임없이 누군가와 거래하고 작당한다. 반면에 나는 매일 스무 명 안팎의 논설위원들과 회의를 한다. 대개 부장이나 부국장·국장으로 산전수전의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 세상의 모든 사안을 놓고 격론을 벌인다. 신입 위원은 “이런 회의는 처음”이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모든 것은 투명하게, 민주적으로 결정된다. 결론은 주간의 몫이지만 이건 권한이라기보다는 리스크를 감당하는 책임에 가깝다. 많이 부족한 주간의 허술한 판단력을 메꿔 주는 것은 물샐틈없는 논리와 자료를 동원하는 위원들의 몫이다. 여기까지는 그럴듯한 나의 변명이다.
이렇게 일상적 최선을 다하면 대중의 비판으로부터 면책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대중들은 영화 속 3각 유착 구도가 과장된 것임을 대개 알고 있는 눈치다. 그럼에도 불온한 카르텔을 깨는 검사와 조폭의 정의감에 열광한다. 이 공동체를 책임져야 할 엘리트가 다수의 약자가 겪는 팍팍한 삶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대개 사람이 건방져 보이면 건방진 법이다. 대중이 정치권·재계·언론이 건강한 긴장관계에 있지 않다고 느끼면 실제로 그런 것이다. 언론이 살아 있는 권력과 자본을 목숨 걸고 감시하고 있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즉답을 주저할 것이다.
엘리트 집단의 타락을 복수심에 가득 찬 조폭과 공명심에 불타는 검사의 의기투합으로 응징한다는 초현실주의 판타지에 650만 명이 열광하는 현실은 공동체의 앞날이 희망적이지 않다는 징후다. 영화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민주적 정치 시스템, 사회적 약자가 흔쾌히 동의할 수 없는 불공평한 분배 방식, 살아 있는 권력에 약한 언론의 합작을 정조준하고 있다. 그래서 터무니없는 허구에 그치지 않고 2015년 대한민국의 위태로운 구조를 은유한 절망적 서사로 읽혀진다.
태평양 건너편에선 대기업과 권력이 일찌감치 언론의 혹독한 견제를 받으면서 건강해졌다. 1890년대 미국 석유 시장의 90% 이상을 지배한 공룡 스탠더드 오일은 잡지기자 아이다 M 타벨의 끈질긴 폭로로 해체됐다. 연방대법원은 1911년 반독점법을 적용해 이 회사를 34개로 분할했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록펠러가 정경유착으로 더럽게 번 돈을 죽기 살기로 고아원과 도서관을 짓는 데 쓰는 반전의 드라마는 없었을 것이다.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기자는 백악관이 ‘3류 좀도둑’의 소행으로 깔아뭉갠 사건을 끈질기게 추적해 워터게이트 도청의 진실을 알렸다. 1974년 미국은 대통령 닉슨을 잃었지만 대신 건강한 민주주의와 언론을 얻었다.
스탠더드 오일과 워터게이트 보도는 언론이 살아 있는 권력과 맞설 때 정의가 확립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죽은 권력에 칼질하는 것은 3류 깡패도 할 수 있다. 그건 정의가 아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권력과 맞서는 것은 스스로의 목숨을 거는 일이다. 1815년 3월 1일 프랑스 유력 일간지 ‘모니퇴르’는 엘바 섬을 탈출해 파리로 돌아오는 나폴레옹을 ‘살인마, 소굴에서 탈출하다’로 보도했다. 3주 동안 그의 호칭은 아귀, 괴수, 괴물, 폭군, 약탈자, 보나파르트, 황제로 바뀌었고 마침내 ‘황제 폐하 만세! 드디어 궁전에 입성하시다’라는 제목이 1면을 장식했다. 권력의 위력을 너무도 잘 알기에 비굴해지는 언론의 속성은 양(洋)의 동서를 가리지 않는 것일까.
한국 언론도 권력에 대해 가혹한 비판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권 차원의 스캔들은 예외 없이 집권 후반기 레임덕 시기나 정권이 바뀐 뒤에 보도됐다. 만일 제때에 살아 있는 권력과 재벌의 비리를 정공법으로 고발했으면 이렇게 언론이 조롱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부자들’은 시종 언론을 향해 과연 당신들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라고 묻고 있다. 관객이 떠난 컴컴한 극장에 홀로 앉아서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아우성을 들었다.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통과해야 나의 고민이 끝날 것인가.
[출처: 중앙일보] [이하경 칼럼] 영화 ‘내부자들’이 언론에 묻는 것
JTBC 손사장도 그 일환인것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