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가능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퇴근 시간쯤에 도서관으로 피신했다가 오면 아버지가 술병 옆에서 잠들어 있었고, 그런 날은 맞지 않아도 되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물건을 부수거나 소년을 때렸다. 예전에는 엄마를 때렸었다. 하루는 아버지에게 맞아서 한쪽 눈이 퍼렇게 멍이 든 엄마가 소년을 붙잡고서 말했다.
"혼자 밥 차려 먹을 수 있으면 다 큰 거니까, 이제 네가 알아서 잘 살아."
그날 엄마는 말을 마치고 한숨을 길게 쉬었다. 며칠 뒤 시장에 다녀오겠다고 하고는 사라졌다. 엄마가 사라지자, 다음 차례는 아롱이였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소년을 위해 구해준 보더콜리랑 똥개 잡종이었는데, 검고 흰 털이 얼룩덜룩해서 젖소를 닮은 수캐였다. 새끼 때부터 똑똑해서 소년이 녀석에게 붙여준 이름을 금방 알아들었다. 집에 온 날 바로 배변을 가릴 줄도 알았다. 그렇게 똑똑해서 아버지에게 술 냄새가 나지 않을 때만 부르면 다가가서 꼬리를 쳤다.
소년은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놀지 않고 바로 집에 와서 아롱이 밥을 주고 산책도 시켰다.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반찬도 오후에 TV에서 나오는 요리 방송을 보고 알려주는 것들을 따라서 만들었다.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엄마의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채우려고 노력할수록 구멍만 더 커져서 소년은 그 구멍 한켠에 웅크리고서 엄마를 부르며 울다가 잠들었다. 소년이 울 때마다 아롱이가 옆에서 눈물을 핥아주었다.
어느 날 소년이 차린 저녁상을 먹던 아버지는 반찬이 짜다고 밥상을 엎어버렸다. 그러고는 문을 박차고 마당으로 나갔는데 열린 창문으로 담배 냄새랑 함께 깨갱하고 개가 우는 소리가 들어왔다. 대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린 후에야 조심히 나가보니 아롱이가 구석에서 낑낑거렸다. 소년이 다가가니 꼬리를 치면서 살살 다가오는데 한 쪽 다리를 절었다. 불쌍해서 쓰다듬어 주려고 손을 드니까 녀석이 비명을 지르며 절뚝절뚝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소년은 방으로 돌아가서 돼지 저금통을 열어보았다. 만 팔백 원이 보였다. 이걸로 아롱이를 동물 병원에 데려갈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아롱이에게 미안해졌다. 돈이 없는 것보다, 아롱이를 병원에 데려가면 아버지가 소년을 때릴 것 같아서였다.
며칠 동안 절뚝거리던 아롱이는 어느 날 소년이 학교에 다녀오자 사라졌다. 동네를 뛰어다니며 애타게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녀석이 집을 나간 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처럼 소년을 두고 집을 나갔어도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찾다가 지쳐서 집에 돌아와 방바닥을 물걸레로 닦다가, 괜히 옆 반의 상철이가 저희 아버지 따라가서 개고기 먹었다고 자랑하던 것이 떠올랐다. 그 개는 어디서 난 거였냐고 소년이 물었을 때 상철이는 자기도 모른다고 했다.
지금 소년은 도서관 구석에서 동화책을 읽고 있었다. 책 속에서는 회색 개 한 마리가 주인을 위해서 소원을 들어주는 황금사과를 구하는 대모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대목이 펼쳐지는 중이었다. 황금사과를 입에 물고 의기양양하게 꼬리치며 달려가는 그 회색 개의 코가 아롱이랑 닮았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그 검은 코가 너무 촉촉해 보여서 갑자기 소년의 볼에 눈물이 흘렀다. 오늘은 곁에서 눈물을 핥아줄 친구도 없는데 계속 그랬다.
훌쩍이던 소년이 소매로 눈물 콧물을 닦고서 일어나 도서관을 나서는데, 주변에는 어른들이 있었지만, 모두 저마다의 문제로 힘들었으므로, 그곳은 어린 발자국 소리와 코 먹는 소리를 빼면 조용하기만 했다.
어둑해진 하늘 아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소년은 어쩌면 아롱이가 황금사과를 물고 돌아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걸었다. 상상 속에서 재롱을 떠는 아롱이의 모습이 예뻤다. 그래도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때 어느 집의 열린 창문으로 밥 짓는 냄새가 났다. 반찬은 고기반찬인 것 같았다. 소년은 좀 전까지 슬펐는데, 이제는 배고프고 슬펐다. 그리고 곁에는 아롱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