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습관대로 저녁 6시쯤에 달리기 가방에 핸드폰을 넣고 손목에 스마트 밴드를 찬다. 그리고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선다. 이 동네는 옛날에 산과 묘지뿐이었던 곳이어서 평지가 귀하다. 코로나 격리가 끝나서 다시 쓸 수 있게 된 근처 학교 운동장이 고마워진다. 여름이 지나가는 중이라 하늘은 벌써 어둡다. 운동장 한쪽에 우뚝 선 조명등이 운동하는 동네 주민들과 늦게까지 축구하는 아이들 그리고 훈련장에서 연습하는 양궁부를 비춘다. 여름에는 가을이 그리웠는데 막상 가을이 오니 밤을 밀어내는 여름의 빛이 그립다. 빛은 그리웠지만, 그 습기와 열기는 사양하고 싶다. 이기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들처럼.
신발 끈을 풀었다가 다시 묶고 무릎을 접었다 펴며 가벼운 준비 운동을 했다. 예전에 군대에서 다친 왼쪽 무릎은, 전역 후 의사에게서 앞으로 달리기는 하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다. 그 후, 일하다가 조금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급하게 뛰거나 하면 무릎이 시큰거렸다. 어떨 때는 심하게 일하고 나면 무릎이 깁스한 것처럼 굳어서 움직일 수 없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들 덕택에 달리기를 멀리한 세월이 벌써 몇 년이었는데, 요즘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운동장 모래 위에 서서 괜히 왼쪽 무릎을 주물러 봤다. 다행히 오늘도 아프지 않았다.
첫 번째 바퀴는 그냥 걷는다. 걸으면서 생각한다. 왜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끊었던 담배가 문뜩 생각나는 날처럼 다시 달리기가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담배는 끊은 지 10년이 가까웠지만, 달리기는 그러기가 이상하게 어렵다. 혹시 비정상일까? 그래도 술은 좋아하니 어느 정도 균형이 맞춰지는 게 아닌지, 그게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시 달리기 시작했을 때 다칠까 봐 겁나서 하루에 5분만 달렸고, 1분씩 늘려서 지금은 40분 정도 뛴다. 앞으로 조금씩 늘려서 60분을 달릴 수 있게 되는 것이 목표다.
두 번째 바퀴부터는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 10분은 집중하는 단계로, 이때는 주변의 사람들도 눈에 들어오고, 운동장의 소리나 근처 인가에서 들리는 TV 소리도 귀로 들어왔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달리다 보면, 숨이 찰랑찰랑한 상태가 되고, 숨소리랑 움직이는 다리만 남았다. 그러면 의식이 잔잔한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편안한 느낌이 됐다. 이때 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입이 아니라 코로 숨을 쉴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빠르기로 달리면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한동안 잊었었던 것들을 다시 만나니 참 반갑고 좋았다.
들이쉬고 내쉬는 숨소리, 땅을 찰 때마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반발감, 등에 흐르는 땀방울, 볼을 스치는 바람 등등. 예민해진 감각 덕분에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크게 느껴지고 그것이 묘하게 기분 좋다. 하지만 좋은 것만 크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불쑥 생각들이 떠오른다. 나이만 먹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나? 노후 대비가 안 된 부모님은 어쩌지? 아직도 남아있는 학자금 대출은? 하나둘 결혼한 친구들이 던진 따가운 농담도 다시 날아와 박히고, 싸우고 헤어진 연인에게 돌려받지 못한 30만 원 같은, 그런 자질구레한 것들이 어깨를 짓누른다. 그러면 다시 의식을 호흡에 집중한다.
호흡에 맞춰 천천히 생각들은 떠올랐을 때처럼 조용히 고요 속으로 가라앉고, 의식은 호흡이라는 잔잔한 파도 위에 누워서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마음이 편안해지니 어깨와 다리도 가벼워졌다. 조깅화가 운동장 모래를 밟는 소리가 기분 좋게 규칙적이었다. 축구 골대를 지나면서 앞으로 얼마나 더 달릴 수 있을지 생각했다. 아직은 무릎에 물이 차거나 굳어버리거나 하지 않으니, 달릴 수 있는 만큼 달려두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되어도 달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미래를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니, 조심스럽고 성실하게 무릎을 써야겠다. 아끼다 똥 된다는 말도 있으니까.
편안한 마음으로 달리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집 근처에 학교 운동장이 있어서 매일 달리기를 할 수 있고, 산동네여서 집 뒤에 나무로 우거진 적당한 높이의 산이 있어서 등산도 매일 할 수 있고, 걸어서 30분 거리에 번듯한 시립도서관도 있어서 매일 책을 읽을 수도 있다. 게다가 심각한 지병이 있는 것도 아니니, 좋은 소설을 쓰기에 이보다 좋은 조건이 없는 것 같다. 오늘날 이런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좋은 소설을 쓰라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너무 늦게 운명의 소리에 귀 기울인 걸까? 아니, 오늘이 바로 깨달음을 얻기 적당한 날이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든다.
자, 그러면 어떤 소설을 쓰는 게 좋을까? 장르는 코미디나 호러가 좋겠다. 빵 터질 듯 말 듯하게 웃기거나, 소름이 돋을 듯 말 듯하게 무서운, 그렇게 애매하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공부하기로는 소설은 쓰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써지는 것에 가까웠다. 뇌의 무의식 영역이 창작하면 의식적인 부분은 나중에 편집하는 그런 그림. 그러니까 무의식이 창작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게 중요했다. 예를 들면, 문학상 받은 작품들을 읽거나, 주성치 영화를 보거나, 예상 별점이 3점 이상인 공포영화를 보거나.
상상해 본다. 무의식이 신들린 듯이 소설을 쓰고, 의식은 성실한 편집자처럼 퇴고한다. 그러다가 하늘의 도움으로 걸작을 만들고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받은 상금으로 마당이 있는 이층집을 구한다. 그리고 골든 리트리버를 분양받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한다. 그때, 퍼뜩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재미있는 이야기의 본질이 무엇일까?’ 일단 바나나는 아닌 것 같다. 마찬가지로 골든 리트리버도 아닐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골든 리트리버는 복슬복슬하고 사랑스러우니까.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인터넷 검색창에 저먼 셰퍼드 잡종을 적는다. 골든 리트리버는 너무 착해서 도둑을 만나도 반길 정도라는 유튜브 개통령의 동영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땡~.”
발끝에 차인 돌멩이가 멀리 날아가 축구 골대 기둥을 쳐서 쇳소리가 종소리처럼 운동장을 울렸다. 앞에서 맨발 걷기 하던 할머니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잠시 쳐다봤다. 그리고 기다린 것처럼 가방 속 핸드폰에 맞춰둔 타이머가 울렸다. 호흡을 조절하면서 제자리에 서서 가볍게 마무리 동작을 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잦아들고 달콤한 꿈을 꾸다가 깨버린 것을 아쉬워하면서 운동장을 가로질러 체육관 벽 쪽으로 갔다. 체육관 외벽에 전화 부스 같은 모습의 공기분사기 4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2번째 기구 앞에 서서 호스를 당기고 네모난 버튼을 눌러 나오는 바람으로 몸에 묻은 먼지랑 흙을 털어냈다.
옛날에는 이런 거 없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좋은 세상에서 공부하는구나, 저출산 덕분인가? 내 어린 시절보다 나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다. 아닌가? 이제는 어린이가 아니어서 모르겠다. 터벅터벅 집에 돌아와 미지근한 물로 샤워하고, 식탁에 앉아서 문장이 아름답지만 이야기는 지루한 외국 소설을 읽으며 잠이 오길 기다린다. 열 쪽을 읽기 전에 기다리던 수마가 찾아와서 깔아둔 잠자리에 쏙 들어가 이불을 덮고 눈을 감는다. 달리기 덕분인지 꿈나라에 가는 게 편안하다. 그게 아니면 내일이 주말이라서 더 편안한 것이다.
주말 아침, 약속은 없고 그리하여 도서관에 왔다. 창가 자리에서 햇빛을 받으며 달리기와 반려동물 관련 서적을 읽었다. 문장을 훑던 손가락과 시선이 같이 멈췄다. 한 주에 150분 이상 달리면 오히려 건강에 나쁠 수 있다고 저자가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설명했기 때문이었다. 약력을 보니 외국의 어떤 대학의 교수 겸 의사라는데, 의사나 과학자가 하는 말이 항상 참인 것은 아니니 덮어 놓고 믿을 수는 없겠지만, 갑자기 어제 달리면서 노벨문학상 상상을 했던 것이 떠오르는 바람에, 달리기도 술처럼 취해버리면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나와 하늘을 보니 구름 없이 맑고 파랗다. 달리기 좋은 날씨라고 생각하면서, 달리지 않고 천천히 걷는다. 아까 읽은 책들이 신경 쓰인다. 괜히 걸음 수를 세면서 걷는다. 108번째 걸음을 디딜 때, 다음에 다시 태어날 때는 보더콜리로 태어나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면 원 없이 달리기할 수 있겠지. 아까 읽은 다른 책 제목이 ‘당신은 개를 기르면 안 된다.’였는데, 기를 수 없으면, 내가 개가 되어버리면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닌지? 아차, 딴 길로 새는 마음을 끌고 와서 다시 발걸음에 집중한다. 다시 처음부터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달리기도 노벨문학상도 개도 없었지만, 마음도 발걸음도 가벼웠고 무엇보다 휴일 오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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