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도서관에 갔을 때의 일이다.
책을 빌릴 때면 나는 기왕이면 '균형있게' 책을 빌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내가 말하는 '균형있게 책을 빌린다'는 의미는 예를 들면 소설책을 세 권 빌렸을 때, 역사나 철학 같은 인문학에서 한 권,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에서 한 권을 빌려서 다섯 권을 만드는 식이다. 이렇게 책을 읽다보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과학 분야의 책을 마지막에 읽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전에 읽었던 소설이나 역사, 철학들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마치 온 세상이 과학적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 소설에도 역사에도 철학에도 스며있었음을 깨닫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후에 그 책을 다 읽는동안 찾아오는 건 내가 너무 무지하구나 하는 생각과 활자포비아, 두통이긴 하지만서도.
요새는 이 '균형있게 책 빌리기'를 할 일이 별로 없었다. 한 번에 여러권 책을 빌릴 일이 없었던데다가, 요새 나오는 소설책은 왠일인지 권수가 계속 늘어나서 다섯 권의 대출제한으로는 완결까지 한 흐름에 읽고 싶은 소설책을 빌리는 것만으로도 부족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소설책을 다 읽고, 다른 분야의 책들을 새로 빌려오면 되지 않느냐고 누구든 묻고 싶을텐데, 나는 그렇게는 책을 못 읽는다. 어떤 미묘한 느낌의 차이다.)
어쨌든 관악구의 도서관에 새로 회원으로 가입해서 오랜만에 한번에 다섯권의 책을 빌릴 일이 생겼다. 나는 이번에 '균형있게 책 빌리기'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작년에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살까 했다가 내려놓았던 '존은 끝에 가서 죽는다' 1, 2권을 골라 놓았고, 볼테르의 캉디드를 집었다. 이 세 권은 정말 너무 맘에 들었다. 일단 책이 내가 처음 읽는 것처럼 깨끗해서 좋았다. 읽고 싶던 책이라도 손때가 많이 묻어있으면 나는 갑자기 내려놓고 다른 책을 찾고 싶다. 손때는 사랑을 많이 받은 책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스러운 훈장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또 그 손때가 책 속에 담긴 위대한 지성을 전혀 더럽히지는 못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그 책은 읽고 싶지가 않다. 이 것도 나만의 미묘한 느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으로는 전부터 읽고 싶던 리처드 도킨스의 '눈 먼 시계공'을 골랐다.(도서검색을 하고 이 책을 나는 생각 없이 800번 대 서가에서 한참을 찾아 다녔는데, 동명의 한국소설이 있었다. 어쩐지 이상하긴 했는데) 마지막으로 900번대 서가에 와서 책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는데, 역사책은 생각해둔 것이 없어서 마음에 드는 책을 눈으로 찾았다. 기왕이면 깨끗하고 표지가 예쁜 책을 찾았을거다. 그러다가 '바다의 제국들'이라는 지중해 역사를 다룬 책이 눈에 띄었다. 표지는 내가 사랑하는 파란색이었고 돛대가 펴진 배 같은 것들이 그려져 있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 책을 폈고.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
내가 우연하게 편 페이지에는 커다란 코딱지가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건 우연이 아니었을거다. 코딱지의 두께만큼 유격이 생겼고 내가 그 부위를 잡고 책을 편 것이지. 그 책을 집은 그 때에 나는 그 것을 볼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 것을 여러번 보았다. 중학교 때 동네 책방에서 무협소설이나 판타지 소설을 빌려볼 때도 그랬다. 드래곤 라자의 몇 페이지 쯤에 있었고, 또 천사지인이나 영웅문 같은 소설의 몇 페이지 쯤에 있었다. 고등학교 때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책의 한 부분에 있었고 대학에 와서도 분명히 보았다. 대학에 와서 본 건 토익 책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마침내 공공도서관에서도 이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중 고등학교 때 그 것을 보았을 때는 얼굴이 찌푸려지고,(물론 지금 보아도 얼굴이 찌푸려진다) 아, 더러운 XX들 정도로 생각했다. 대학에 와서 보았을 때는 책에 그것을 묻히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변태적인 욕구가 있다고 생각했다. 공공 도서관에서까지 보게 되자, 이제는 둘 사이에 뭔가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를 들면 샤워기에서 물이 나오는 소리 때문에 샤워를 할 때 요의를 느끼는 뭐 그런 종류의 것 말이다. 책을 한 장 넘길 때마다 미세 먼지가 일어나서 코 속에 분비물을 더 많이 생성한다거나, 가로로 쓰여진 활자를 읽는 행위가 우리의 뇌주름을 자극해서 코를 팔 수 밖에 없게 만든다든지 아니면 방금 든 생각인데 !!!! 느낌표! 느낌표가 그렇게 만들 수도 있다. 느낌표는 어딘가 검지손가락을 닮았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같다.
그 것도 아니면 우리의 어딘가에 새하얗고 순수한 것들은 그저 더럽히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도 모른다. 더럽혀진 페이지에는 삽화가 있었다. 보이지 않게 하려면 삽화에 묻히는 방법도 있었다. 근데 왜 삽화 외에는 그저 백색의 하얀 종이 뿐인 것을 누군지 모르는 그 사람은 왜 더럽힌걸까. 나이도 성별도 학력수준도 또는 그 무엇이 더 다를지 알 수 없는 일련의 사람들은 왜 책에 그런 짓을 한 걸까.
코딱지 하나를 보고 와서는 나도 언젠가 그런 행동들을 했던 것을 떠올렸다. 책이 아닌 사람의 마음에, 얼굴이 찌푸려지는 상처를. 나도 단지 깨끗했기 때문에, 순수했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책은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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