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라는 영화는 로맨스 영화의 형태를 띄지만, 아날로그와 디지털, 원본과 복제가 뒤섞여 있는 세계에서 어떻게 감정을 교류하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그 경계선에 걸쳐 있는 인물이죠.
이혼을 앞두고 아내와 별거 중인 테오도르는 대필작가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기념일에 쓰일 편지를 대신 써주는데 묘하게도 컴퓨터의 화면 안에서 써내려가지는 편지는 우리가 늘 프린터에서 뽑아내는, 같은 폰트로 정리된 문서의 형태가 아니라 손글씨처럼 보입니다. 이건 실제 손으로 쓰인 것도 아니고, 언제고 프린트 키만 누르면 다시 뽑을 수 있는 복제에 가깝지만 아날로그 형태의 원본처럼 보입니다. 편지에 깃든 감정도 마찬가지로 실제가 아니라 전달 받은 것, 복제된 것입니다. 편지를 받을 대상이 될 사람에게 가야할 '진짜 감정'(원본)은 어디로 날아가버렸거나 다른 형태로 존재하겠죠. 테오도르는 언제나 복제된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그의 상태는 영화의 대사에서도 드러나는데 폴에게 "그건 그냥 편지야."라고 말하는 것 같은 것이겠죠.
그의 정체성은 아마 이 편지들과 같을 겁니다. 그는 진짜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믿고 있고, 그 이유는 전처와의 이별입니다. 그가 이별에서 잃어버린 것은 그의 원본성입니다. 진짜 자신은 과거에 두고 왔고, 현재의 자신은 하루하루 그저 과거에 두고 온 감정을 그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복제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아날로그의 형태를 띄고 있으면서 원본은 아닌, 그의 편지들과 같으며 그래서 현실 세계의 인간들과 교류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게 사만다입니다. 사만다는 디지털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실체가 있는 세계(현실 세계)를 갈망합니다. 현실 세계에서 도피하고픈, 이미 도피하고 있는 테오도르와는 대척점에 있습니다. 둘은 서로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끌립니다. 테오도르는 그녀가 디지털 그리고 복제이기 때문에 자신의 현재 상태와 같다고 느끼고 그래서 현실 세계의 인간들보다 더 쉬운 방식으로 그녀를 대할 수 있습니다. 둘 사이에 섹스가 가능한 것도 두 사람 모두가, 아니 한 사람과 하나의 OS가 결국엔 경계선(같은 공간) 안에 있기 때문일 겁니다. 둘은 결국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 것이 이 영화의 목표라고 할 수 있겠죠. 실제로 영화에서는 서로가 그 경계선에서 벗어날 때 갈등이 일어납니다.
처음은 테오도르가 전 부인을 만나고 돌아와 자신이 아날로그 즉 원본의 인간이며, 실체가 있는 세계에 속해야 함을 강하게 깨닫는 장면이고, 두 번째는 사만다가 다른 여인을 통해서 실체의 세계로 넘어들어오려고 하는 장면입니다. 세번째를 꼽는다면 사만다가 철학자와 대화를 하고 있는 장면이겠죠. 그 장면은 이번엔 테오도르가 아닌 사만다가 자신이 디지털의 세계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장면일겁니다.
즉, 이별은 예비되어 있습니다.
테오도르가 자신을 깨닫는다 - 경계선을 넘으려 한다(실패) - 사만다가 자신을 깨닫는다 - 세계의 분리, 예비된 이별
사만다가 "당신은 아날로그적인걸 아직 좋아하잖아."라면서 그의 책을 출판하도록 돕는 것. 테오도르가 그녀가 복제된 것(OS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에게만 속하지 않는다는 현실에 분노하는 것은 그가 그녀로 인해 점점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며, 또 돌아갔음을 보여주는 것이겠죠. 테오도르의 입장에서 그녀는 섹시한 목소리를 가진 최고의 상처치료제입니다. 다시 원본인 자신이 되자 현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과거와도 작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전에 현실세계에서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게 되겠지만, 언제고 세상이 더 진화하면 테오도르도 경계를 넘어 사만다가 사는 세계에 도달할지도 모르는 일이겠지요.
음악도 그렇고 감각적인 화면 구성과 연출이 환상적입니다. 영화 전체를 이루고 있는 붉은 색의 색감도 아주 좋았고요.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폰을 꺼내놓는 세상에서 가끔은 실제로 만나고 있는 사람들과도 제대로 감정의 교류를 하고 있는 것인가 고민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SNS를 통해 얻는 친분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연구결과를 어디서 봤었는데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나가야할지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또, 테오도르처럼 상실감에 빠져있던 시기에, 사만다가 아니라 다른 이름이 붙어있던 많은 사람들이 내가 과거에 거짓없는 행복을 빌어주는 사람으로 다시 탄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치료제 역할을 해주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었네요.
개인적으로는 연인이 보기보다는 이별 후 혼자 과거에 살고 있는 남자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습니다.
영화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전부 올라갈 때까지 저와 함께 남아 있던 세 분의 혼자 오신 남성분들도 저와 비슷한 마음으로 가슴 한 켠이 먹먹해졌겠죠.
영화를 다 보고는 다른 로맨스 영화들보다 매트릭스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시뮬라시옹을 다시 읽고 영화평을 써보려고 했는데, 도서관에 상호대차 신청한 책이 안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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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치 못한 수작을 만나게되어 좋더군요.
영화의 색감이며 스토리텔링이며 인물들의 연기까지.
추천하고픈 영화였습니다.
개인적으론 엑스맨보다 더 재미있게 봤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