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처녀 테스는 존 더버필드의 장녀이다. 어느 날 자신의 가문이 명문가인 더버빌 가의 후손임을 알게 된 아버지에 의해 더버빌 가로 보내진다. 부유한 더버빌 가에 금전적 도움을 청해보려 하지만, 더버빌 가는 알렉 더버빌의 아버지 시대에 족보를 산 것에 불과하고, 바람둥이인 사촌오빠 알렉 더버빌은 테스에게 첫 눈에 반하게 되어 테스를 하녀로 일하게 한다. 어느 날, 체이즈 숲에서 알렉 더버빌은 테스를 겁탈하고, 그녀에게 정부가 될 것을 제안한다. 테스는 그 날 알렉 더버빌의 아이를 임신하고, 그녀는 더버빌 가를 떠나 집으로 돌아온다. 태어난 아이는 병으로 일찍 죽고 만다.
이 일을 계기로 테스는 먼 지역의 목장으로 떠나 소젖 짜는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농장을 차리기 위해 견학차 와 있던 청년 엔젤을 만나서 사랑에 빠진다. 그 역시 테스에게 반해 그녀에게 청혼을 하게 되고, 결혼 첫날 밤 엔젤이 젊은 날의 치기를 고백하자, 그녀 역시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엔젤은 그녀에게 실망하여 떠나고 둘은 별거한다.
테스가 엔젤에게 마음을 주는 것은 필연적인 일일 것이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농부로의 길을 택하겠다는 것, 오래된 가문은 싫다며 사회적 관습에서의 탈피를 꿈꾸는 청년에게서 그 시절 없었으나, 여성으로 그렸을 이상향의 모습을 보았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 역시 사회가 빚어낸 통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기에, 테스는 더 큰 고통에 빠지게 된다.
그 후, 경제사정에 의해 다시 알렉 더버빌과 함께 할 수 밖에 없었던 테스에게 엔젤이 지난 날의 잘못을 후회하며 돌아온다. 이미 알렉의 아내가 되어버린 테스는 절망하여 알렉을 살해해 버리고, 엔젤과 함께 도망치지만 스톤헨지에서 경찰에게 잡혀 교수형 당하고 만다.
영화는 길 저편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음악과 함께 걸어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대부분은 흰 옷을 입고 있는 이 무리는 길을 따라 화면의 가장 먼 쪽에서 스크린을 향해 다가온다. 카메라는 한 지점에 멈춰 서서 그녀가 속한 행렬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그녀가 도착하자 자연스럽게 그녀를 따라간다. 한 사람의 인생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길은 가장 좋은 은유일 것이다. 우리는 한 지점에 서 있다가 영상으로 표현된 그녀의 삶을 따라가 보는 것이다. 길의 이미지는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반복된다. 그리고 카메라는 마지막 스톤헨지에서 테스가 잡혀갈 때 다시 자리에 멈춰 서서 그녀가 안개 낀 길 저 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대구를 이룬다.
의도적으로 드라마를 배제하여 만들어진 이 영화는 사건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 감정을 격렬하게 표현하는 것을 최대한 지양한다. 격렬한 감정이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체이즈 숲에서의 겁탈 장면은 안개를 사용한 후 빠르게 장면을 전환하며, 엔젤이 그녀가 비밀을 고백한 편지를 읽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 장면, 그 비통한 감정이 드러났어야 할 장면에서는 빛으로 테스의 얼굴을 가려버린다. 또한 알렉 더버빌을 살해하는 장면은 아예 보여주지 않고 흘러내린 피로 대신할 뿐이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드라마를 배제함으로써 로만 폴란스키는 관객을 거대한 화랑(畵廊)의 입구로 인도한다. 거기에 더해 종종 화면의 주변으로 등장인물을 밀어내고, 최대한 정적으로 인물의 행동을 제한함으로써, 풍경에 더 많은 포커스를 향하게 하여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이미지를 강화해낸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만들어낸 이미지, 각각의 풍경이 테스의 상황과 감정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화면의 배경을 이루는 안개와 빛, 구름은 그녀의 감정과 완전히 조응한다.
(최대한 자연광을 이용한 것처럼 보이는 이 조명과 구도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을 명화를 떠올리게 한다. 대부분의 이미지는 만종이나, 이삭 줍는 사람들과 같은 장 프랑소와 밀레의 그림에서 가져온 것이다.)
의상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초반 흰색 계통으로 그녀의 순수함을 강조해냈던 의상은 아이가 죽고, 엔젤에게 버림 받는 등 슬픈 일이 생길 때마다 어두운 계통으로 변한다. 그녀가 순수를 상징하는 흰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영화 초반 아무 것도 모르던 순수한 여인이었을 때와, 사생아를 낳은 것을 알고 있는 마을을 떠나 아무도 자신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목장으로 떠나 사회의 폭력에서 자유로워진 시간이다. 그리고 끝내 알렉 더버빌을 살해한 후에는 피에 물든 듯 붉게 변하고 만다. (장 자크 아노가 감독한 양가휘, 제인 마치 주연의 영화 연인에서 이런 감정과 상태의 변화를 잘 활용한다. 특히 제인 마치가 운동장에서 다른 학생들과 다르게 혼자 붉은 색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아주 극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런 의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는 로만 폴란스키의 삶과 묘하게 교차한다. 사회와 종교적 관습, 그 지독한 폭력의 희생양이 되어 버린 테스는 물리적인 형태로 드러나 버린 사회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사건에 의해 희생된 샤론 테이트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이 영화를 샤론 테이트에게 헌정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사회가 보여주는 보수성과 폭력에 대한 알레고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