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각반이 등장합니다. 이처럼 서울의 봄을 깨고 다시 군사독재로 되돌아가려는 이들은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이 소설의 외적 갈등이 시작됩니다.
처음에 이들은 술값을 보태달라고 정중하게 제대병들에게 부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곧 강요와 폭력으로 바뀝니다. 이러한 제대병들의 폭력은 이문열 씨의 인터뷰에서 드러나듯 광주민주화운동을 상징합니다.
이문열 씨는 1980년 5월 대한민국의 상황을 한 군용열차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소설가로서 이문열 씨를 높게 평가하는 점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그는 복잡한 현실의 양상을 소설 속에서 단순하고 명쾌하게 재설정하는 데 매우 뛰어난 작가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주인공의 부끄러움, 즉 내적 갈등도 시작됩니다.
그는 이 열차에서 최고의 학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따라서 지식인인 자신이 대중을 이끌고 폭력에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반면에 홍동덕은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그는 그런 사회적 책임을 요구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이문열 씨의 위상이 이런 사회적 역할을 요구 받을 정도였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7년 후에 쓰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상업적 성공과 함께 대중적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고, 80년의 이문열 씨는 문단 내에서 주목 받는 수준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이문열 씨 개인은 자신이 이런 시기에 지식인으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했고, 거기에 큰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 부끄러움은 민주주의가 '선'이고 군사독재가 '악'이라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16페이지에서 주인공이 헌병이나 공안원이 나타나 주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17페이지에서 홍동덕 역시 주인공과 똑같은 생각을 합니다.
그는 처음에는 놀라다가 이내 홍동덕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잠시 그가 홍동덕을 미워하는 이유를 분석해 보죠.
주인공은 이 열차에서 최고의 학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반면에 홍동덕은 최저의 학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또한 주인공은 엘리트 의식에 가득 찬 인물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하는 생각은 지식인들만 할 수 있는 철학적 고민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홍동덕도 같은 생각을 한다면, 자신의 특별함을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홍동덕으로 인해 그의 좌절감과 부끄러움은 심화되어 갑니다. (이것은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필론의 에피소드에서도 반복됩니다.)
19페이지에서 첫 번째 영웅이 등장합니다. 그는 힘을 상징합니다.
이문열 씨는 이 소설 속에서 전두환 세력에 맞설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고 있는데, 첫 번째로 힘으로 전두환 세력을 꺾을 수 있을 것인지 시도해 보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는 다음 화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