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영웅은 힘으로 검은 각반을 제압합니다. 하지만 검은 각반의 리더 역시 노련합니다. 그는 오히려 첫 번째 영웅을 설득해 자기편으로 끌어들입니다.
이처럼 이문열 씨는 첫 번째 시뮬레이션을 통해 힘으로는 전두환 세력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런 이문열 씨가 7년 후의 작품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는 엄석대의 독재가 오직 더 큰 힘에 의해 무너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주인공도 징수를 당하게 되는데, 여기서 그가 린치를 당할 뻔하자 홍동덕이 나서서 도와줍니다. 주인공은 처음에는 홍동덕이 자신의 창백한 표정을 보고 착각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홍동덕은 자신의 고뇌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곧 그가 주인공의 생각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음이 드러나고, 주인공은 다시 한 번 불쾌해 합니다.
이처럼 주인공은 검은 각반 때문에 부끄러워지고, 홍동덕 때문에 분노하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그러면서 주인공의 내적 갈등이 심화됩니다.
홍동덕의 존재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이 소설이 '광주민주화운동'보다는 작가 자신의 '부끄러움'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즉, 광주민주화운동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끄러움을 이야기하기 위해 광주민주화운동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이는 '홍동덕'의 유일한 역할이 주인공의 분노와 부끄러움을 키우는 것이란 점에서 알 수 있습니다. 깨끗한 것을 배운 자신과 더러운 것을 배운 홍동덕이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 주인공에게는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주인공은 검은 각반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홍동덕에게만은 강한 모습을 보입니다. (심지어 그가 방금 주인공을 도와줬는데도 말이죠.) 아무래도 주인공은 홍동덕에게는 아무렇게나 대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는 이내 그런 자신에게 다시 부끄러움을 느끼며 현실에서 도망치려 합니다. 그런데 곧 두 번째 영웅이 등장하여 그의 주목을 끕니다.
이 두 번째 영웅은 '법과 원칙'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작가는 이번에는 전두환 세력에게 법과 원칙을 내세워 설득하는 것은 가능할 것인지 시뮬레이션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두 번째 영웅은 여러 명의 영웅들 중에서 주인공과 가장 닮은 인물입니다. 하지만 주인공보다는 학력과 체격, 모든 면에서 부족합니다.
그런데도 주인공은 차마 무서워서 하지 못했던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세 번째 영웅의 출현에 주인공은 가장 부끄러움을 느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