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려는 검은 각반들 앞을 한 제대병이 막아섭니다. 그리고 그가 흘린 피가 다른 제대병들의 광기에 불을 지릅니다. 제대병들은 쓰러진 검은 각반이 일어나면 걷어차고, 유리로 찌르고, 심지어는 담뱃불로 지지기까지 합니다.
잠시 눈을 감고 이 장면을 상상해 볼까요?
군화발로 짖밟는 소리, 비명소리, 뼈가 부러지는 소리, 피비린내, 생살이 타는 냄새, 죽여버리라고 고함치는 소리,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소리... 어딘가에 지옥이 있다면 아마 이런 모습일 겁니다.
이처럼 작가는 제대병들이 검은 각반을 제압한 상황, 즉 민주화가 된다면 대한민국은 지옥으로 변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도 한병태는 엄석대가 무너지고 새로운 급장을 뽑는 선거를 지켜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뒤 한동안 우리 반을 혼란스럽게 했던 선거 만능 풍조의 시작이었다.'
이문열 씨는 독재가 무너지면 파괴와 살육이 올 것이므로, 강력한 힘으로 국민들의 광기와 폭력을 억눌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제대병들의 잔인한 폭력은 주인공이 군사독재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됩니다. 즉,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광기와 폭력을 억눌러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긍정적인 역할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질서를 유지하는 댓가로 동전 몇 개 빼앗기는 것은 너무나도 저렴한 비용이었던 것이죠. 아마 주인공은 가능하다면 다시 검은 각반이 지배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을 겁니다.
제대병들의 폭력이 도를 넘어서자 이제 네 번째 영웅이 등장합니다.
그는 주인공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다른 제대병들의 폭력을 말립니다.
하지만 그의 이성적인 목소리는 이미 폭력의 맛을 본 제대병들에게 닿지 않습니다.
여기서 주인공은 이런 언급을 합니다.
'만약 이들을 진실로 죽여야 할 대의가 있다면, 그에게도 동료 제대병들과 함께 살인죄를 나눌 양심과 용기는 있었다.'
전 이 말이 거짓이라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검은 각반이 동전을 빼앗던 때에도 그에겐 저항할 대의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폭력이 무서워 침묵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지금에 와서 '대의만 있다면 살인죄라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와서 왜 이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걸까요?
이 말은 이렇게도 바꿀 수 있습니다.
'만약 군사독재에 맞서야 할 대의가 있다면, 나도 광주 시민들과 함께 싸울 양심과 용기는 있었다.'
이렇게 작가는 자신의 침묵했던 이유가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광주민주화운동에 대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포장합니다. 결국 이문열 씨는 타당하지 않은 가정을 바탕으로 현실을 왜곡한 끝에서야 마침내 부끄러움을 극복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