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경제학으로 노벨상을 받은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저서 [생각에 관한 생각](Thinking, Fast and Slow)에서, 큰 결정을 내리기 전, 사전검시(死前檢屍, pre-mortem)를 해보라고 조언합니다.
즉, “결단을 내린 지 1년 후 이 결단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왜, 어떤 경과로 실패했는지 구체적으로 적으시오”라는 예시를 풀어, 미리 실패하는 상상을 해보는 것이죠. 인간은 희망적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큽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실패하는 그림을 그려보지 않으면 위험과 보상을 현실적으로 반영하는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기 힘듭니다.
미국에 살다 보니 이민을 생각하시는 분들의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카너먼이 들려준 조언은 이민같이 인생 전체를 뒤바꾸는 큰 결정에 특히 적합해 보입니다. 하지만 아직 걸어보지 않은 길이 어떻게 꼬이는지 구체적으로 상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먼저 이민생활을 해왔고, 또 주변에 많은 이민자를 봐온 경험을 통해 미국 이민이 망하는 구체적인 모양새를 몇 가지 그려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체류 신분 때문에 망합니다
놀라울 정도로 허술한 법적 절차를 통해 미국에 이민을 오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단기 취업비자로 가족을 전부 데리고 오신 후에 막연히 ‘어떻게 연결이 되겠지’ 하시다가 순식간에 불법체류자가 된다거나, 학생비자로 일단 건너온 다음에 최대한 연장해서 계시다 결국 반강제로 귀국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하다못해 ‘참 확실하다’ 보이는 이민도 사기인 것이 들통 나 체류신분이 불분명해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상황은 법적으로도 매우 위험하고, 이민목적 달성도 순식간에 파탄 나는 최악의 결과입니다. 체류 신분을 확실하게 하는 것은 이민의 기본 중 기본입니다. 법적인 분야에서는 절대 돈을 아끼려고 하시면 안 됩니다. 확실한 평판이 있는 이민 변호사를 고용하고, 모든 과정은 기록해놓고, 또 앞서 이민 오신 분들께 이렇게 이민 온 전례가 있는가 확인해야 합니다.
둘째: 돈 때문에 망합니다
아주 시골로 가지 않는 이상 미국 물가는 한국보다 비쌉니다. 소위 ‘억대 연봉’도 미국에선 고작 1년에 9만 달러를 버는 보통 중산층에 불과합니다. 미국의 한인 사회는 아주 작아서, 한인 사회만을 상대로 하는 사업의 확장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주류 미국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능력과 영어 실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미국에서 먹고 살 거리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사업하다 망할 확률은, 한국에서 편의점이나 치킨집을 냈다가 망할 확률과 별반 다를 게 없고, 그 결과가 참혹한 것도 똑같습니다. 게다가 이민자의 비즈니스란 대개 주인의 노동력을 땔감 삼아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본인뿐 아니라 배우자, 자녀들까지 나서서 계산대를 붙들고, 식탁을 치우고, 짐을 나르고, 손님과 실랑이를 해야 합니다. 운 좋게 사업이 성공하더라도 고된 삶은 거의 불가피합니다.
이 때문에 한국을 떠나시기 전, 무엇으로 먹고살 것이고, 벌이는 얼마나 될 것이며, 이것을 얼마나 지속할 것이고, 주요 지출을 얼마나 할 것이며, 얼마간 육체노동을 견딜 수 있는가 등에 대한 청사진을 구체적으로 구상하시고 오셔야 합니다.
셋째: 미국 사회 자체의 모순 때문에 망합니다
인간 사회 어디나 마찬가지로 미국은 장단점이 혼재하며, 미국사회의 단점은 어마어마합니다. 양극화가 심화하여 중산층은 붕괴하여가고, 공교육은 파멸한 지 오래이며, 빈약한 총기규제 때문에 강력범죄가 만연하고, 사회보장 서비스는 거의 없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도 ‘이 나라에 희망은 있는가’라는, 한국인들이 흔히 하는 질문을 자문하는 중입니다. 이민자들에게 미국사회의 이러한 단점은 가일층 증폭된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면, 한국의 교육에 실망이 너무 큰 나머지 미국 공교육이 얼마나 바닥을 쳤는가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균 미국 고등학생은 한국의 중2 과정도 소화하지 못하며, 대다수의 미국 대학은 신입생들에게 고등학교 과정을 재수강시킬 정도입니다. 게다가 대학 등록금은 눈물이 쑥 빠지도록 비싸며, 대학 혹은 심지어 대학원을 나와도 최근에 경제위기를 겪은 미국에서 취직은 쉽지 않아, 엄청난 학자금 대부를 끌어안고 전전해야 합니다.
이민 오시기 전, 이러한 미국사회의 크나큰 단점들을 하나씩 생생하게 직시하셔야 합니다. 미국이란 사회는 어떤 곳이며, 본인 같은 사람은 그 사회의 어떠한 계층에 들어가는가, 그 계층은 미국의 단점에 어떻게 노출되어 있으며, 앞으로 전망은 어떠한가에 대한 고찰이 있어야합니다.
넷째: 이민자라서 망합니다
세계 대부분 나라에 비하면 미국은 이민자를 환영하는 편이고, 차별도 적습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이야기입니다. 그 나라의 언어에 미숙하고 문화적으로 동화가 안 되는 사람의 사회적 위치가 어떤지는 자명합니다. 인종차별은 아직도 암암리에 현존하고, 이민자들은 언제나 각종 범죄의 대상이 되며, 법의 구제는 언어장벽이나 비싼 변호사 비용에 막혀버립니다. 대형 사기 한 번에 망할 수도 있고, 자잘한 차별 때문에 멀쩡히 풀려야 할 일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설령 성공적인 이민이라 해도 그 성공의 최대치는 높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민 1세대는 언어와 문화 장벽 때문에 아무리 잘 풀려도 소시민 이상을 넘볼 수 없습니다. 사업 혹은 직장에서 돈을 벌어 조금 더 널찍한 환경에서 조금 더 좋은 자동차를 굴리는 수준이 삶의 전부일 수 있습니다. 각종 사회단체 참여, 기고 혹은 시민 정치활동을 통해 본인이 사는 사회의 방향을 정하는데 참여할 방도는 많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면서 인생의 시야는 아주 좁아져, 직장과 교회만 왔다갔다하면서 자신이 사는 사회와는 정신적으로 유리됩니다. 자신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미국 소식을 보고 들을 능력은 없고, 이제 살고 있지도 않는 한국 소식만 붙들고 늘어지게 됩니다. 이런 삶도 괜찮은지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다섯째: 가정생활이 망합니다
위에 예시한 모든 문제는 크건 작건 모든 이민 가정이 한 번쯤은 겪는 일들입니다. 이런 문제는 한 번 터질 때마다 가족의 가장 약한 연결고리를 파고듭니다. 타지에 살면 속을 터놓을 만한 친지나 친구도 주변에 많지 않아, 한국에서라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었던 갈등도 곪아들다가 결국 터지기도 합니다.
부부가 매일 심하게 싸울 수도 있고, 자녀가 탈선할 수도 있습니다. 어지간히 결속력이 강한 가족도 이민생활의 스트레스를 갈등 없이 넘기는 경우는 없다시피 하고, 많은 수의 가정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립니다. 본인의 가정이 이런 풍파를 견딜 수 있는지, 가족 구성원 사이에 나중에 쪼개져 버릴 수 있는 작은 금이 가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셔야 합니다.
심지어 성공한 이민생활에서도 가정은 해체될 수 있습니다. 이민이란 다른 나라에서 다른 언어로 다른 문화에 동화되어 사는 것이란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민 1세대는 어느 정도 본국의 언어와 문화에 교감을 유지하지만, 2세대에서 그 교감은 아주 옅어지며 3세대 이후에는 거의 남지 않습니다. 2세대로만 내려가도, 설령 한인 교포 2세끼리 가정을 꾸린 경우에도 그들의 가정생활은 한국 음식을 자주 먹는 보통 미국 가정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녀들은 점점 부모들과 멀어집니다.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유년을 보낸 자녀들은 부모를 한국문화에 갇혀버린 고루한 사람들이라 치부할 수도 있고, 설령 부모와 속 깊은 얘기를 하려 해도 그만한 한국어 실력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미국은 땅덩이도 넓어서, 예를 들어 부모는 동부, 자식이 서부에 사는 경우 1년에 두 번 얼굴 보면 자주 보는 경우입니다. 교류가 뜸해지면서 자식과 남이 될 확률은 꽤 높고, 손주와 의사소통도 못 할 확률은 거의 100퍼센트입니다.
여기까지 읽으시면 좀 암울한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카너먼의 조언대로, 이민을 생각하셨다면 장밋빛 미래를 그리면서 시작하지, 망하는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시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민은 인생의 모든 것을 뒤바꾸는, 삶의 가장 큰 결정 중 하나입니다. 성공한 이민도 많지만, 망하는 이민도 많은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이 글이 그런 현실을 차분히 고려하시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필자 : 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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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민에 대환 환상만을 가진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점으로 자극하기엔 나쁘지는 않은 글인듯 합니다. (저는 1.5세대로서, 긍정적인 점과 부정적인 점 양면을 다 볼려고 하는 편입니다.)
요지는 세상 사는게 다 그렇지만, 무지갯빛만으로 펼쳐진 길은 없을 뿐입니다. 단지 문화적인 부분은 변수가 너무 많아서..
한 가지 확실한건, 언어 습득과 미국 주류 사회로의 진출과 관련해서는.. 언어가 좀 부족하다 싶으면 그걸 커버할 전문 지식, 기술, 자세를 갖추어야 인정 받는다는 정도? 단순히 서류상 스펙이나 경력에서의 차원이 아니라, 언어적인 부분이 좀 안되더라도 신뢰하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의미에서 말이죠..
뭐.. 많은 경우 이민을 고려하고 선택하는 경우가, 경제활동에 있어서 '원리와 원칙이 사회에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을 생각하고 나서일 겁니다.
"케바케"입니다. 부분적으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기대하지도, 아닌 경우에도 멘붕하지 말라고, 밖에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