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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책(그냥 책읽다가)] 그냥 책읽다가. (2) 2019/12/15 AM 02:14

아버지는 한 평생 노동자로 살았다. 한국전쟁 중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아버지의 첫 노동은 쥐약을 먹고 죽은 개의 사체를 찾아 동네 어른들에게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죽은 개를 손질해 내장은 버리고 살코지를 몇번이고 물에 싰어 삶아 먹었다. 들짐승도 없고 그렇다고 가축을 잘 키우지 않는 사대문 안 동네에서 가난한 이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큰 개의 사체를 찾은 날이면 아버지는 평소보다 몇 푼의 돈을 더 받아 쥐었다.

또 아버지는 동대문이나 청량리, 멀리는 창동까지 동네 아이들과 함께 고물을 주우러 다녔다. 나대지 같은 곳에서 일렬로 나아가며 쇠붙이며 유리 같은 것을 줍는 것인데 힘이 센 순서로 대열을 정했던 터라,앞에 선 아이가 큰 고물을 줍는 반면 뒤편의 아이들은 잔챙이를 줍거나 그마저도 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1965년 아버지는 메리야스 공장에 취직을 해 10년 넘게 일한다.평시에는 2교대로 근무하고 일감이 떨어지는 단오부터 가을까지는 무급휴가를 주는 곳이었다.전태일 열사가 인근 평화시장에 찾아든 것이 그 이듬해이니 꼭 아버지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나는 당시 그곳의 노동 환경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서른 무렵부터 구청 기능직 공무원으로 일하던 아버지의 삶은 조금 깊이 말하고 싶다. 아버지는 환경미화원들이 동네 골목을 돌며 리어카로 수거해온 생활쓰레기를 트럭에 싣고 난지도 매립지를 오갔다. 그때는 나도 종종 따라나선 적이 있다.

어린 눈으로 보았던 난지도는 사막 같았다. 커다란 쓰레기 더미들이 사구처럼 하루에도 몇 개 씩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광활하고 삭막한 난지도의 풍경보다 더 선명한 기억으로 남은 것은 그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던 넝마주이들이었다.

넝마주이들은 난지도 입구에서 호객을 하듯 아버지의 트럭을 불러 세웠다. 이미 큰 산이 되어버린 그곳을 걷지 않고 올라가기 위해서였다. 해가 질 무렵 그들은 다시 아버지의 트럭을 얻어 타고 경사진 길을 내려왔다.

내가 아버지를 따라나선 날이면 넝마주이들은 낮 동안 쓰레기 더미에서 찾아낸 로봇 장난감 같은 것을 내 손에 쥐여주곤 했다. 하나같이 팔이나 다리 한쪽이 떨어져나간 것들이었다. 언제 한번은 한쪽 눈이 없는 봉제 인형을 건네받은 적도 있었다. 그것을 본 아버지는 작은 단추로 없었던 인형의 한쪽 눈을 만들어주셨다.

2002년이 되자 나는 대학생이 되었고 난지도는 생태공원이 되었으며 넝마주이들이 살던 상암동에는 월드컵경기장이 지어졌다. 그리고 여전히 아버지는 노동을 하고 있었다. 그즈음 나는 어린 시절 보았던 난지도의 풍경을 찾아보려 관련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1978년 생겨난 난지도 매립장은 1992년 영구 폐쇄되었다. 90만 평의 부지 중 실제로 쓰레기를 매립'매축할 수 있는 면적은 55만 평 정도였다. 다시 이것은 서울 시내 각 구청들이 쓰레기를 버리는 20만 평의 땅과 청소대행업 차량들이 쓰레기를 버리는 35만 평으로 분할되었다. 재건대원이라 불리기도 하던 넝마주이들은 약 3천여 명까지 불어났다. 여러 이권들이 개입하면서 고물을 줍는 것에도 권리금이 생겨났는데 강남구, 종로구같이 상류층이 주로 거주하는 동네가 두 배 정도 값이 더 나갔다고 한다.

고등학교 3학년, 수학능력시험을 하루 앞둔 날 아버지는 평소 잘 들어오지 않는 내 방에 들어왔다. 그러고는 나에게 시험을 치르지 말라고 했다. 내일 시험을 보면 대학에 갈 것이고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을 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을 공산이 큰데 얼핏 생각하면 그렇게 사는 것이 정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너무 불행하고 고된 일이라고 했다. 더욱이 가족이 생기면 그 불행이 개인을 넘어 사랑하는 사람에게까지 번져가므로 여기에서 그 불행의 끈을 자르자고 했다. 절을 알아봐줄 테니 출가를 하는 것도 생각해보라고도 덧붙였다. 당시 나는 그길로 신경질을 내며 아버지에게 나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노동과 삶에 지친 날이면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에서 설핏 가난을 느낄때면 나는 그때 아버지의 말을 생각한다.

근대 이후 인간이 해야하는 노동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관련적으로는 꽤나 신성한 가치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특히 누가 해도 비슷한 수준의 결과를 내는 노동의 직종들을 한없이 천대받기 시작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노동은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소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시를 쓰며 나는 여러 번 아버지의 노동을 작품 속에 등장시켰다. 시에서 아버지는 진폐증으로 죽은 태백의 광부로 등장하기도 하고 마을버스와 덤프트럭을 몰기도 하며 연탄을 나르거나 실직 후 파주에서 혼자 살고 있는 알코올 중독자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어떤 것은 사실이고 어떤 것은 사실이 아니다.

...

 

요즘 다시 읽고 있던 책에서 흥미로웠던 내용을 텍스트로 옮겨적었네요.

흥미로웠던 내용이 아버지가 살아왔던 삶을 얘기하고 이후에 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시인의 아버지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던 부분이네요. 아마 그 시대의 아버지들이 살아왔던 삶이 형식은 다르지만 본질은 비슷하게 자식이 되풀이 될까봐 저런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더해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에서 설핏 가난을 느낄때면 아버지의 말을 생각한다고 했는데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해봐서 이 부분은 더욱 공감이 되었습니다. 

사랑이 모든걸 해결할수 있다라고 생각이 들지만 시간이 조금씩 흐르니 사랑이 해결할수 있는 영역과 그렇지 못하는 영역이 구분이 되기도 합니다. 뭐 이부분은 명확해지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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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감이 뚝뚝 묻어나네요.
책 이름좀 알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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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시인의 독자분이 자신의 아버지가 광부였다면서 시인에게 편지를 쓴 내용이 저 챕터에 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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