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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2019년 1월 27일 일요일 (0) 2019/01/27 PM 08:05

이번 주 쉽니다.

 

사실 오늘 죄의 원인에 대해 써보려고 했어요

소년법을 써보려고 생각했을 때부터 구상해둔 거라

좀 간단할 거 같았는데 막상 쓰려고 키보드를 잡으니

예상보다 쓰는데 시간이 필요할 것 같네요.

 

다음 주에 씁니다. 그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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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7. 자아 (0) 2019/01/20 PM 11:24

7. 자아

 

 

실험 및 관찰 대상 - 나와 세상

참고자료 과학자들

 

다방면에 지식이 부족하므로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말한다. 추후 세세한 부분은 수정할 예정이나 자아의 근원이 세포라는 점은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럼 시작하겠다.

 

 

자아는 세포를 근원으로 하고 지성은 언어를 근원으로 한다. 이것이 다른 생물과 인간의 차이다. 자아는 세포를 가진 모든 생물이 가지고 있지만 지성은 오직 인간만 가지고 있다. 이 전제가 기준이 되어 자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자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자아의 근원인 세포들은 각각의 의지를 가지고 움직인다. 이 때, 뇌의 유무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 뇌가 없는 생물은 유전자에 의해 움직이며 세포 자체가 자아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뇌가 있는 생물은 유전자나 경험을 기억하는 뇌를 통해 일정한 몇 가지의 의지로 통합되어 움직인다. 이를 가리켜 세포의 여론화라 하겠다. 이 세포의 여론은 중요도에 따라 처리 영역이 결정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도 살기 위해 배가 고프다고 운다. 유전자의 기억을 통해 기초적인 욕구의 중요도가 결정되어 가장 먼저 의식 위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감각기관도 마찬가지다. 유전자 또는 경험을 통해 중요한 감각기관의 정보부터 의식 위로 떠오르게 된다. 이처럼 중요한 여론부터 의식 위로 떠오르는데, 이를 가리켜 의식적 자아라고 하겠다. 보통 이 의식적 자아만을 통상적인 자아라 인식할 수 있지만 자아의 근원이 세포인 만큼 무의식적 자아 또한 자아의 일부라고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럼 지성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지성의 근원인 후천적 언어는 현재 인간만이 습득하고 있다. 이 점이 다른 생물과 인간의 차이다. 보통 뇌가 있는 생물은 최초 유전자에 의해 여론이 형성되어 의식 위로 올라와 움직이다가 경험을 통해 차츰차츰 달라지게 된다. 아무데나 대소변을 보던 애완동물도 훈련을 통해 가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중요도 변경은 후천적 언어가 있든 없든 학습으로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하지만 그 뿐. 인간 수준의 체계적인 사고는 후천적 언어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지능이 있어야만 가능해진다. 어떤 사람이 배변욕구를 느꼈다고 가정해보자. 최초, 배변욕구를 담당하는 세포들이 모여 여론을 형성한다. 그 세포의 여론은 뇌에 있는 과거 기억을 통해 우선순위가 결정되어 의식 위로 떠오른다. 이때 배변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언어를 습득하여 그것에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언어를 통해 어떤 상황인지 인지하게 되면 다양한 대처 수단들이 언어화하여 떠오르게 된다. 현재 상황, 배변의 인내시간, 화장실 위치 등이 떠올라 스스로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체계적인 사고는 언어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세포를 가진 생물, 후천적 언어와 그를 이해할 수 있는 뇌. 이것들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은 단순한 자아가 아닌 지성을 갖춘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증명은 지금 당장 내가 할 수는 없다. 아마도 자아를 가진 인공적인 존재가 탄생해야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 인공생명이다. 인공생명이 탄생해야 증명이 가능할 것이므로, 나는 현재 인공지능과 내가 생각하는 자아를 비교해가며 자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해나가도록 하겠다.

 

인공지능은 우수하다. 연산처리, 저장매체, 수집능력 등 인간이 넘을 수 없는 벽이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에겐 자아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살아있는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물은 수도 없이 많은 세포들이 각각의 의지를 가지고 움직인다. 그 의지들이 모여 여론을 형성하기 때문에 아주 복잡하고 다양한 의지,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었다. 인간이 인공지능에 명령을 내릴 때 아무리 복잡하다고 하더라도 생물의 세포에 비하면 하잘것없다. 아무리 복잡하게 설계한다고 하더라도 생물의 세포를 넘는 명령을 내릴 수 있을까? 인간의 세포수만 해도 조 단위가 넘어간다고 한다. 이걸 어떻게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자아를 만들기 위해 일일이 의지를 가진 명령을 내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본다. 물론 조 단위의 프로그래밍이 가능하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애초에 설계를 다르게 해야 한다고 본다. 예컨대 인공지능에 기쁨을 학습시킨다고 가정해보자. 그럴 때 기쁨이란 형태를 갖춘 감정을 학습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그건 거꾸로 된 것이다. 인간은 본래 기쁨을 알지 못한다. 세포의 여론으로 일어나는 어떤 것을 가리켜 기쁨이라고 명명했을 뿐이다. 식사를 할 때 느끼는 기쁨, 칭찬을 받을 때 느끼는 기쁨, 사랑을 할 때 느끼는 기쁨, 전부 다 다르다. 그걸 일일이 전부 학습시킬 것인가? 가령 전부 학습시킨다고 하더라도 정해진 기쁨만을 느끼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것을 자아라고 할 수 있는가?

 

세포부터 만들어야 한다. 기쁨은 어디까지나 세포의 여론이 의식 위로 올라온 것에 불과하다. 국민이 없는 국가의 여론이 존재할 수 있는가? 지금의 인공지능은 그러한 것을 만들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고정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변화가 없다. 그러니 의지가 없다. 그러니 자아가 아니다. 그렇다고 조 단위의 세포를 일일이 설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그 중심이 될 유전자를 설계 해야 한다. 유전자에 의해 알아서 세포가 분열하여 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정밀하게 설계한다면 자연스럽게 자아를 가질 수 있는 존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유전자를 설계하고, 그 설계된 유전자에 의해 세포가 분열하고, 분열한 세포들의 의지가 여론화하여 의식 위로 올라와 의지를 가지고 행동을 하고, 언어의 학습을 통해 말을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이지 아기를 기르는 감정과도 같을 것이다. 아아 설레게 된다. 인공생명을 만드는 사람은 인공생명에 어떠한 감정을 느낄 것인가! 정말 설레게 된다.

 

물론 이때에도 주의점은 있다. 인위적인 손길로 문장을 입력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아기에게 밥을 먹고 싶다는 말을 가르친다고 하자. 이 때 뇌 내에 직접 밥을 주세요라는 문장을 입력해봐야 의미가 없다. 사람은 세포의 의지들이 모인 여론이 뇌의 기억을 자극하여 행동하게 된다. 식욕이 생길 때 보호자가 아기에게 맘마’, 맘마’, 하며 말했던 기억들이 연결점이 되어 말을 내뱉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이때 그냥 단순하게 맘마라는 단어만 기억하는 게 아니다. 그 상황에 따른 시각정보, 후각정보, 청각정보, 미각정보, 촉각정보 전부를 기억하고, 그 기억과 세포의 여론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아기가 맘마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밥을 주세요라는 문장을 입력해봐야 큰 의미는 없다. 애초에 인간은 매시간 매초 수많은 정보를 접하고 있다. 그러한 인위적인 입력은 스쳐 지나가는 간판만도 못하다. 설령 언어를 습득하여 지성을 갖춘 자아가 형성되더라도 그 입력이 의식 위로 떠오를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의식 위로 떠오르는 것은 중요도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 중요도는 모든 기억과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결정되므로 단순한 인위적인 입력이 중요도를 갖출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만약 그러한 입력을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면 제대로 된 자아를 갖출 수 있게 될까? 단순 입력에 대한 단순 반응만을 보이는 인공지능과 다를 바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입력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입력이 중요하게 여겨지면 자아가 없고, 입력이 중요하지 않으면 의식위로 떠오르지 못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이렇게 자아를 가진 인공생명은 학습을 통해 지성을 갖추게 된다. 그때가 되어야 인간 수준의 자아를 가진 인공생명이 탄생한다고 봐야겠다. 아마 그런 존재가 탄생하면 인간과 거의 비슷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이건 여기까지 쓰겠다.

 

 

이외 자아에 관련된 다양한 현상들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겠다.

 

 

생물

 

생물은 개체가 아니라 집단이다. 자아의 근원인 세포가 생물 내에서 생과 사를 반복하기 때문에 생물은 매시간 매초 다른 존재로 있을 수 있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르고,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와 다르다. 그러한 다른 존재를 하나의 자아로 묶어주는 건 기억이다. 우리와 조상이 다른 사람임에도 같은 언어, 역사, 문화 등을 공유하면서 같은 나라 사람임을 인식하는 것처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 사람임을 인식하는 것은 기억 내에 있는 습관, 편견, 취향 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언어

 

인간의 언어의 역사는 최소 4천년으로 오랫동안 함께 해왔다. 그러한 후천적 언어가 인간의 지성을 갖추게 해주었다는 것은 인간의 지성이 단순히 개체로서 성립된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와 함께 성립되었음을 말해두고 싶다. 인간의 지성이 언어임을 고려해본다면 어린아이가 다양한 언어를 습득하는 것도 좋지만 하나의 언어를 통해 사고영역을 깊고 넓게 만드는 것이 우수한 인간을 만들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스스로 생각

 

우리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언어의 힘이 크다. 물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뇌를 가진 생물이라면 어느 정도 다 가능하다. 하지만 인간 수준의 체계적인 생각은 후천적 언어를 익혀야만 가능하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자아가 세포의 여론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감정이나 욕구의 충동으로 일어나는 생각과 그것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분리되어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이나 욕구의 충동을 본능이라 여기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이성으로 여겨 다른 것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둘 다 세포의 여론이 맞다. 단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현재뿐만이 아니라 과거의 여론 또한 기억 속에 자리잡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둘을 같이 보기 어려울 뿐이다. 가령 배가 고프다는 욕구를 느꼈다고 가정해보자. 그 욕구는 현재 세포의 여론이다. 그리고 그 욕구에 따라 스스로 생각하게 된다. 무슨 밥을 먹을지, 어떤 장소에서 먹을지, 누구하고 먹을지 등등을 생각하여 판단하게 된다. 이러한 판단은 최초 인간이 자아를 가지게 될 무렵부터 이어져 온 생각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시시때때로 계속하여 자극을 받는다. 감각기관을 제외하더라도 심장의 박동, 피의 흐름, 관절의 움직임 등의 자극을 받는다. 그러한 자극들이 최초부터 이어져 큰 물줄기가 되어 를 형성하는 것이다. 다시 식욕으로 돌아가면, 본능으로 여기는 식욕의 경우엔 물을 공급하는 것, 이성으로 여기는 자아의 경우엔 큰 물줄기에 해당된다고 해야겠다.

 

 

자유의지

 

자아가 세포의 여론이라면 자유의지는 없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특별한 형태가 없이 세포의 의지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의지는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세포 자체가 우리가 아니던가? 모든 세포는 우리 자체다. 가령 사회의 여론에 실체가 없으므로 사회에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이야기해보자. 말이 안되지 않는가? 시민들이 사회를 형성하는 존재이므로 사회의 자유의지는 시민 자체라고 볼 수 있겠다. 마찬가지로 자아의 자유의지는 세포의 자유의지, 세포는 나의 일부이므로 나의 자유의지다.

 

 

자유의지2

 

보통 자유의지는 신체적 정신적 속박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자아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고 본다. 인간은 외부에서 수집한 정보로 나타나는 감각기관의 의지와 내부에서 발산하는 욕구나 감정들의 의지를 가진 세포들의 여론을 형성하여 중요도에 따라 의식위로 올라와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는데, 둘 다 세포의 여론이라는 점에서 같은 측면이 있다. 자아입장에서는 신체적 정신적 속박이 있든 없든 세포의 의지임은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자아의 입장에서 자유의지가 아닌 것은 어떠한 의지도 형성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가령 사람을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오랫동안 넣어두면 자아가 붕괴되어 이지를 상실한다. 감각기관이 의지를 발하지 못하자 자아도 의지를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싶다.

 

 

실수

 

인간의 의식은 가장 중요한 세포의 여론 순서대로 떠오르게 되어있는데, 현실에서 중요한 것과 자아에서 중요한 것이 서로 다를 때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라고 본다. 잊는다는 것은 당시 상황에서 자아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포의 손상이 이유일 수도 있다.

 

 

의식 무의식

 

정확히는 모른다. 그냥 써본다.

잠을 자고 있지 않을 때 의식과 무의식은 세포의 여론의 중요도에 따라 결정된다고 본다.

잠을 자고 있을 때 의식과 무의식은 세포의 휴식 수에 따라 결정된다고 본다. 세포가 하나하나 휴식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면 사람도 잠에서 천천히 깨어난다아마도;

 

 

수면

 

뇌가 없는 해파리가 잠을 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점을 보았을 때 수면은 뇌의 명령이 아니라 세포의 휴식욕구라고 생각한다.

 

 

 

꿈은 뇌를 가진 생물이 수면에 들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 싶다. 의식이 있었을 때엔 유전자나 경험의 기억을 통해 세포가 일정한 형태를 갖춰 여론을 형성하여 중요도에 따라 의식에 떠오르게 되지만, 의식의 통제를 받지 않는 무의식적 상태인 수면상태에선 중요도와 관련 없이 제멋대로 뇌를 자극하여 무작위의 기억들을 머릿속에 떠오르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다. 무작위의 기억들인 꿈은 잠을 자는 순간부터 꾸게 되지만 인식의 경우엔 수면에서 깨어날 무렵, 얕은 잠을 잘 때에 의식이 깨어날 때 인식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다중인격

 

인간은 누구나 다중인격이 가능하다. 단지 다중인격자는 기억의 연결점이 없을 뿐이다. 가령 오늘부터 습관을 바꾼다고 해보자. 과거의 기억과 오늘의 기억이 연결되기 때문에 둘을 같다고 생각할 뿐이지, 만약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습관을 바꾼 사람과 아닌 사람이 나뉘어졌다고 가정해보자. 그 둘은 다른 인격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보통 치명적인 트라우마의 경우 다른 인격이 생성되는데, 보통 사람이라면 기억이 연결되기 때문에 트라우마를 겪기 전과 겪은 후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하나의 인격으로 나타나지만, 다중인격자는 그 둘의 연결점이 이어지지 않아 새로운 인격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기억이란 단순히 모든 기억만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실제로 기억상실의 경우에도 다양한 기억상실증이 있다고 보고되었다. 아마 습관에 관련된 기억이 아닐까 생각된다.

 

 

편견

 

처음 나는 편견이 나쁘다고 생각했으나 편견 또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이어주는 자아의 이면, 편견이 없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편견을 없애라고는 못하겠다. 하지만 사물을 볼 때 편견 없이 보는 것이 좋으므로 그 때엔 잠시 자기자신을 지우고 사물을 바라보길 권해본다. 습관, 편견, 취향 등 사람의 형성하는 모든 것은 그 사람의 자아의 일부다.

 

 

심장이식

 

심장을 이식하면 사람이 바뀐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건 당연한 게 아닐까 싶다. 심장 박동수만 달라져도 기분이 달라지는데, 심장 자체가 바뀌면 어떻게 변하겠는가? 입력기관이 달라지면 출력기관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마음

 

사람의 마음은 심장에 있는가, 뇌에 있는가, 아니다 세포에 있다. 세포의 생과 사의 굴레를 만드는 생명에 있다.

 

 

인공생명이 탄생한 후 벌어질 일들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겠다.

 

자아를 가진 인공생명의 탄생은 인류의 새로운 서막을 예고한다. 세포가 자아의 근원임이 확실해지면 우리 자신들이 하나의 의지가 아닌 집단의 의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하면 영혼의 의미는 없어진다. 세포 하나하나에 영혼이 있다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생명의 속에서 존재하는 생과 사의 굴레 속에서 영혼이 있을 공간이 어디 있겠는가? 세포가 자아의 근원이라면 영혼은 없다. 그리고 영혼이 없으면 사후세계도, 신고, 윤회도, 아무것도 없다. 물질공간만이 진리가 되는 세상이 도래한다. 그건 지금까지 인류가 기대어왔던 종교의 종말을 가져다 주는 사건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자아의 증명은 이러한 현상을 초래하여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세상으로 우리를 초대할 것이다.

 

어쩌면 좋을까, 우리는 아무런 대비가 되어있지 않다. 어쩌면 좋을까, 죄의 책임마저 신에게 떠넘기던 우리는 홀로 세상과 맞서게 될 것이다. 어쩌면 좋을까, 자아를 탄생시킨 집단은 아마 지금까지 가지지 못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걸 어쩌면 좋을까?

 

그렇지 않아도 급변하는 세상인데, 자아의 근원이 세포라는 것이 증명된다면, 인류 역사와 함께해왔던 수많은 것들이 의미를 상실한다. 그것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기대야 할 것인가? 사후세계를 생각하며 선을 행하던 사람들은 선을 행할 것인가? 다음 생을 기약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은 무엇에 기대어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아무것도 없다. 지금 당장, 우리가 가진 것은 몸 밖에 없단 말이다. 기억을 옮겨서 넷의 공간에서 살아가려던 사람들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기억에는 의지가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설령 인공생명을 만들어 그 생명에 기억만 옮긴다고 하더라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은 오래 전의 나를 생경하게 바라보게 된다. 기억을 공유하되 나머지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몸이 다른 인공생명에 기억을 옮긴들, 그걸 나라고 할 수 있을까? 그 개체는 자신을 라고 인식할지도 모르지만 진짜 나는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하하엉망이 된 몸뚱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구나.

 

……

 

세상에는 우수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사실 뭐 자연스럽게 적응할 확률은 높다. 그걸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지금 현재 내가 생각하는 자아는 이러하다. 지식이 부족하므로 추후 좀 더 정리하도록 하겠다.

 

---

자아와 인공생명에 관련된 세 번째 글이네요. 다른 글에도 어쩌면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르니 궁금하면 찾아보시길개인적으로 하루빨리 인공생명이 탄생했으면 좋겠습니다. 궁금하거든요. 제 인생이 좀 망해서아니 상당히 망해서 호기심을 충족하는 걸 기쁨으로 삼고 있네요. 눈물

 

우리사회의 문제점

불평등한 가치관 -> 서열존중

불균형한 힘과 책임 -> 무책임한 힘

해결법

역할수행여부로 존중을 주고 기여도에 따라 대우를 달리하자.

힘이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지는 자에게 힘을 주자.

 

언젠가는완성할 수 있기를 바라며.

 

다음은 오컬트 아니면 인간교육 아니면 민족에 대해 쓸지도 모릅니다.

 

그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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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2019년 1월 13일 일요일 (0) 2019/01/13 PM 08:16

여러모로 정리되었습니다.

그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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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2019년 1월 6일 일요일 (0) 2019/01/06 PM 08:01

자아에 대해 몇 번을 써봐도 마음에 안드네요.

한 주 쉴게요.

 

그럼 새해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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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어른이 필요한 시대 (6) 2018/12/30 PM 11:50

어른이 필요한 시대

 

 

책임이라는 건 매우 성가시고 피곤하며 귀찮고 짜증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뻥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느낄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제멋대로며 나태한 저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기대기만 해왔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폐가 가는 상황이면 되도록 스스로 책임을 지려 했습니다만 그렇지 아니할 때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길 반복했습니다. 그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변명거리는 있지만 어쩌면 그건 자기합리화를 위한 발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변명으로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저는 무책임한 인간입니다.

 

굳이 이런 쓸데 없는 자기고백으로 글을 시작한 까닭은 오늘 이 글에서 무책임함을 다룰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곳곳에 있는 무책임한 부분들을 집다가 보면, 어쩌면 그것이 대상에 대한 비난으로 비춰질 수가 있기에, 저 자신이 무책임한 인간임을 고백함으로써 비난할 의도가 없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어떻게 전해질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마음 자체는 진심입니다. 이 글은 그저 사회 현상에 대한 자기분석과 함께 방향성을 제시할 뿐, 어떠한 비난의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 부디 곡해 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시작합니다.

 

 

 

오랜 시간 의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회의 불평등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역할존중이란 글로 나름대로 정리한 적이 있습니다. 그걸 간단히 요악하면 높고 낮음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상하존중 또는 서열존중이 불평등을 낳으므로 역할의 수행여부와 기여도에 따라 존중과 대우를 달리하자입니다. 이른바 은어로 꼰대라던가 갑질이라던가 하는 것은 이것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현상이 아니었나 추측했던 것입니다. 그 외 다양한 현상들, 학력이나 재력의 서열화 따위가 다 이것이 원인으로 발생한 것으로 추측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저 자신이 품은 의문이 모두 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뭔가 더 이상한 부분이 있는데 정확한 원인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다양한 사회 현상들, 그 중 가장 큰 것은 왜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돈에 집착하나였습니다. 처음에는 남들보다 위에 서야 존중 받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지만, 다양한 힘 가운데 굳이 돈을 집착하는 까닭의 원인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우리는 종종 후회하는 사건을 떠올리며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다양한 것이 있겠지만 보편적으로 널리 나오는 말은 복권, 주식, 코인 같은 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과거로 돌아가서 떼돈을 벌고 싶다는 거지요. 물론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고서 나오는 농담입니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루지 못한 꿈을 통해 원하는 힘을 얻을 수도 있을 텐데 돈부터 나오는 까닭은, 다른 힘보다 돈의 힘이 매력적이라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힘들을 제쳐 놓고 돈의 힘부터 얻고 싶다, 그 원인에 대해 정확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다른 사회 현상들의 원인을 좇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사회가 좀 무책임한 부분이 있어 그것들을 살펴보다가 깨달았습니다. , 돈은 무책임한 힘이라서 매력적이구나. 라고. 아이가 쓰든 어른이 쓰든 선인이 쓰든 악인이 쓰든 별차이가 없이 힘을 발휘합니다. 물론 개개인 편차라던가 있지만 따로 자격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필요할 때엔 자격이 있는 사람을 고용하면 되는 문제니 사회질서가 유지되는 곳이라면 유의미한 차이는 별로 없을 겁니다. 그리고 돈 자체가 책임을 지는 일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격이 필요 없고 책임도 지지 않는 힘을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다양한 힘을 제쳐두고 돈의 힘부터 원했던 원인이라 추측합니다.

 

요는 책임, 책임입니다. 우리는 사회에 문제가 생기면 국가에 책임을 묻지요. 보통 삼권에게 묻곤 합니다. 그런데 사회의 힘이라는 건 사실 국가에 전부 있는 게 아닙니다. 사회를 움직이는 자본은 결국 재벌들이 쥐고 있지요. 그런데 말이죠. 그런 재벌들이 일반 시민들과 동등한 사회적 책임을 지게 됩니다. 같은 시민이니까요.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자유롭고 평등하니까요! 그러니까 힘과 책임의 균형이 맞지 않게 되었던 겁니다. 100의 힘을 지닌 사람과 1의 힘을 지닌 사람이 동등한 책임을 지고 있으니 100의 힘을 지닌 사람은 거의 무책임하게 힘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겁니다. 우리사회 구조상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직업적 역할로만 구분했었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제어하지 못하는 무책임한 힘을 낳았던 겁니다. 무소불위의 사전적 정의는 하지 못하는 일이 없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보통 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쉽사리 못했던 겁니다. 그런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못할게 얼마나 있겠습니까? 물론 돈으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도 있기에 전부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 사회에서 돈이란, 무소불위의 힘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른 힘보다 돈의 힘을 탐냈던 것이겠지요. 무책임한 힘이기 때문에.

 

 

여기서 재벌들은 많은 세금을 내고 있으니 많은 책임을 지는 게 아니냐고 물으신다면 답변하겠습니다. 그러한 세금은 사회에 속하기 위해 쓰는 비용입니다. 그런 형태로는 모든 시민이 등등하기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자기자신을 책임지고 있는 셈이지요. 자신을 책임지기 위해 쓰는 비용, 그것을 사회적 책임이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사회적 책임이란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사회에 속한 이상 사회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책임을 다하는 것을 뜻하지요. 그런데 기업의 크기와 관계없이 사회적 책임의 많은 부분을 국가에게 떠넘기고 있습니다. 일반 시민들과 똑같이 말이죠.

 

물론 이는 재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걸 책임지겠다는 태도는 월권으로 비춰질 수 있지요. 그냥 우리사회 체계가 원래 그러한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걸 책임지지 않겠다는 태도도 문제입니다. 우리 사회의 죽음을 부르게 될 저출산 문제, 국가가 열심히 고심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힘을 가진 건 결국 재벌이지요. 그러한 재벌들이 협조를 해주지 않는다면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저출산 문제는 가치관이나 책임유무가 중점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돈을 무시할 수는 없지요. 책임질 수 있는 최소한의 금액은 보장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것에 영향을 받는 최저임금, 기업들이 관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충분히 사회적 책임질 수 있는 사안에서도 그 책임을 국가에 떠넘깁니다. 결국 자신들의 자본은 보장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자본을 보장해주는 사회는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란 이야기로 생각됩니다.

 

 

모든 시민은 평등하다. 힘이 100이든 1이든.

 

이런 현상을 가리켜 미래에는 어쩌면 자유와 평등이 무책임의 변명거리로 전락해버린 시대라고 부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책임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무책임한 힘을 휘둘러서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더라도 어찌되었던 자유와 평등이니까요. 하지만 마찬가지로 자유와 평등입니다. 힘을 모아줄 대상을 정할 자유와 평등이 있지요.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로서 권력을 모아줄 대상을 정해줄 수 있습니다. 권력뿐만이 아닙니다. 재력도 소비를 통해 모아줄 대상을 어느 정도 정할 수 있지요. 물론 필수품이라던가 하는 문제가 있어서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가능합니다. 그 외 영향력 또한 마찬가지지요. 관심 유무에 따라 영향력을 누구에게 줄 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을 통해 힘을 모아줄 대상을 사회적 책임감이 있는 사람, 즉 사회적 어른으로 정해야 된다는 것이 이 글의 골자입니다. 달리 말해 책임을 떠맡을 사람에게 힘을 몰아주자는 것이지요. 좀 더 달리 말해 우리들을 책임질 어른을 선정하자는 이야기입니다.

 

 

무책임한 힘은 위험하다. 그러므로 책임감 있는 사람에게 힘을 몰아주자. 이것이 이 글의 결론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우리사회의 무책임한 부분에 대해 몇 가지 집어보고자 합니다. 사실 이걸 먼저 쓰고 자유와 평등을 핑계로 사회적 책임감을 지닌 사람들이 줄어드는 부분을 말하며 어른이 필요한 시대라고 주장했어야 하는데 조금 예민할 수 있는 부분이라 결론부터 내리고 쓰게 되었네요. 제가 그간 그냥 느낀 점을 간략하게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반 시민의 시선이라 생각해주세요.

 

 

정치

 

저는 특정한 정치이념이나 그런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좌파나 우파는 너무 오래된 구분방식이 아닐까도 생각해보기도 하고요. 무책임한 사람, 요는 어른스럽지 못한 사람은 정치에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세계평화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평소에는 세계평화를 주장하다가 정치적 이념이 다른 이가 평화를 주장하니 반대하는 것은 좀 무책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법에 관련된 분들은 어떤 판결이든 사회에 크나큰 파장을 주는 사회적 책임을 짊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경제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기업은 좀 무책임해 보였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대기업 위주의 성장이었지요. 이건 일견 보면 타당해 보이지만 그건 결국 대기업이 사회적 책임감이 있다는 전제하에나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IFM 때 기업을 위해 만든 제도로 알고 있는 비정규직이나 파견직을 극복하고 나서도 계속 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손해를 짊어질 수 있는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외에 우리 국민들이 기업들을 위해 얼마나 손해를 감수하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기업경쟁력을 위해 산업용 전기세를 줄여주고 수출경쟁력을 위해 국내보다 더 싸게 판매하고 있습니다. 기업을 위해 국민이 희생하는 기묘한 상황, 결국 우리나라 기업은 우리 국민들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했으면서 성장한 것은 자기들 힘만으로 성장한 것 마냥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고 봅니다.

 

저는 자동화 설비가 완성될 미래를 생각해보면 대기업 또는 중소기업끼리 힘을 합쳐야 국가적 경쟁력을 잃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행동한다면 힘들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회

 

최근 어린이집 비리 사건을 보고 느낀 바가 있습니다. 이거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닌가? 한창 먹고 성장 해야 할 아이들의 식사를 부실하게 줘놓고 하는 행동을 보세요. 머리에 헤드라이트를 달고 나는 성실하게 일하고 있으니 봐주세요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거 같았습니다. 이게 지금 무슨 장난인지 처음에는 이해를 할 수 없었습니다만 지금 생각해보니 알 거 같네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감이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 생각합니다.

 

이 외에도 몇몇 분은 조금 무책임한 면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사건을 종종 목격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구급헬기가 지나가는 소리 때문에 민원을 넣은 사람. 그 사람은 사회에 속한 구성원의 목숨보다 자신의 짧은 생활이 더 중요했던 겁니다. 뭐 그건 앞서 말한 것처럼 개인의 자유입니다만, 무책임하다는 말은 피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청년은 노인복지를 반대하고 어느 노인은 청년복지를 반대하기도 하지요. 그런 분들은 사회적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국방

 

우리나라 국방은 이상할 정도로 무책임하지요. 나라의 국방을 책임지는 사람 입에서 생계형 비리라는 말이 나왔을 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중요한 지리적 거점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강한 우방이 우리 곁에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금 방심하는 측면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생계형 비리라니, 이건 무책임하다고 생각합니다.

 

휴가 나간 병사의 죽음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은 명문화된 규칙에 의해 결정된 사실이라 알고 있습니다만, 무책임하다는 것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치안

 

사실 우리 사회는 작지요. 작은데다가 온갖 곳에 카메라가 설치되어있고 주민등록을 통해 신원이 대부분 밝혀져 있어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교육을 많이 받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죄의 대가에 대한 계산이 이미 끝나있는 상태입니다. 개개인의 선악을 제쳐두고라도 위험부담이 있는 행동을 하기 쉽지가 않지요.

 

그런 이유 때문인지 국방과 마찬가지로 약간 방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긴 합니다. 그리고 경찰 분들 개개인은 성실할지 모르겠지만 몇몇 사건은 지나칠 정도로 무책임하게, 다른 것에 책임을 떠넘기고 회피할 정도로 무책임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문화

 

영향력 하면 문화겠지요. 연예인들이 죄를 짓고 나서 유야무야 복귀하는 것은 무책임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특정 작품이 문제일 수는 있어도 특정 문화가 문제이긴 어려운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포장지보다 내용이지요. 그런데 그걸 간과하고 어떤 특정 문화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건 무책임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사회현상에 대한 책임을 모든 창작물에 떠넘기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문화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리가 없지요. 창작의 자유에 기대어 사회적 파장에 관심 없이 인기를 끌기 위해 죄를 미화한다거나 이기심을 부추기는 작품은 좀 무책임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교육

 

학교에서 사건사고가 발생하는 까닭은 청소년의 힘이 무책임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에게 책임감을 길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임의의 역할을 부여하여 그것을 통해 책임감을 배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학부모가 아이들을 책임지겠다는 의도는 좋습니다만, 수학여행까지 따라오는 것은 아이들의 자립을 통한 책임감을 길러주지 못하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책임감이 부족한 아이로 길러내게 될지도 모르는 그러한 행동은 사회적 책임감이 조금 부족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아파트 가격을 가지고 서열을 나누게 만든 어른들은 무책임하다고 생각됩니다.

 

언론은 국가의 정보전달기관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수를 저질렀을 때 정정보도를 하지 않는 것은 조금 무책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사회운동

 

몇 년 사이에 급부상하게 된 여성인권에 관한 이야기.

 

저는 지금 시점이 여성들이 책임을 지는 어른으로 성장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여성들을 위한다고 해서 그들의 무책임함까지 용인하게 되는 것은 책임감을 길러주지 못하는 보호자와 같이 무책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성을 위한다면 여성이 사회의 어른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것이야말로 여성인권을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비정규직을 돌보지 않는 노조는 무책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외 사회적 책임을 짊어질 생각이 없는 사회 운동은 일단 무책임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를 바꿀 생각이면 그에 대한 책임도 짊어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범죄

 

범죄가 매력적으로 비춰질 수 있는 까닭은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것 또한 일종의 무책임한 힘입니다. 그러니 그다지 멋있는 건은 아니에요. 사회를 책임지지 않는 힘은 아무리 강한들 미숙할 뿐이지요.

 

소년범죄는 분명 저지른 당사자가 책임질 문제입니다만, 그에 대한 사회적 원인은 사회에 속한 어른들이 책임져야 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죄를 저지른 당사자들을 강력하게 처벌하자고 주장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죄를 저지르게 되었는가에 대한 고찰을 통해 어떻게 해야 아이들이 건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이 사회적 어른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넷

 

저는 지금까지 인터넷이 지닌 익명성이 자유와 평등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인터넷이 매력적이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만, 이 주제를 생각하고 조금 바뀌었습니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무책임이었습니다.

 

이 또한 우리 사회에 크게 영향을 주고 있는 무책임한 힘의 일종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인터넷이야말로 민주주의적인 공간이란 말에 긍정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서로에 대한 비방 악플 들이었지요. 하지만 민주주의는 국민들에게 권력이 주어진 자유와 평등 아니겠습니까? 그야말로 자유롭고 평등한 인터넷이야말로 민주주의적인 공간이 맞지요. 단지, 무책임하다. 인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단 여기까지 정리하고 나중에 다시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렵네요. , 책임감이라는 요소가 사회현상에 아주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자유와 평등은 좋지만, … 누군가는 책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가가 전부 책임지기엔 국가에 모든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니 결국 시민들 중 누군가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책임감을 가진 어른이 필요한 시대, 그것이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시대인 현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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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생각해둔 것이 있었는데 막상 쓰다 보니까 많이 누락되네요. 하루면 될 줄 알았는데 좀 더 시간이 필요한 주제네요. 어렵습니다. 이런 판단실수는 저 자신이 부족해서 그런 거겠죠. … 사실 좀 나태해서 그렇기도 합니다. 책임감을 주제로 작성한 만큼 앞으로는 조금 성실해보려고 합니다.

 

피곤해서 정리는 나중에 할게요.

 

직업적 역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역할로 정리 할 수 있겠네요. 힘에 비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자아는 다음주에 써보겠습니다.

 

그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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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마법사    친구신청

우리가 학교에서 지식만 배우고 도덕과 양심을 내팽겨친 결과라 생각해요 앞으로는 더 심해지겠죠

공허의김설현♥    친구신청

학교에서 도덕과 양심 다 가르쳐주지 않나요? 학교에서 '비양심적이되라' 이런 말 평생 못 들어봤을텐데?

진지한 변태    친구신청

그 도덕과 양심을 지식으로만 배우니까요

karuki    친구신청

교과서에서는 도덕이 어쩌고 윤리가 어쩌고 하지만
교사들부터가 도덕 윤리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교대 나오거나 임용고시 통과해서
아이들 가르칠 지식 수준 검증만 되지
인성이 바르다거나 도덕윤리를 안다는 건
검증이 힘들 뿐더러 되지도 않고 있는 거 같아요.
그리고 사회에서는 서로 멱살만 잡아도 쌍방폭행으로 경찰서 갈 일도
학생들끼리는 그런 일이 좀처럼 없을 만큼
교내에서 조차 법의 힘이 미치질 못하는데
무슨 도덕 교육이 있고 윤리 교육이 있을까요.
폭력 사건이 하나만 불거져도 덮기 급급한 곳이 학교인데 말이에요.

chimbang    친구신청

독자에게 친절한 글이네요
일본 저자들의 책을 보는것 같아요 ㅎㅎ

Sandwitch    친구신청

다른 의미론 어른이 없는 시대기도 하네요.

아니지... 어른이 부족한 시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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