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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구조 (0)
2025/06/30 AM 12:04 |
구조
자유롭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0. 언어
[언어: 1. 생각, 느낌 따위를 나타내거나 전달하는 데에 쓰는 음성, 문자 따위의 수단.]
[감각: 1. 눈, 코, 귀, 혀, 살갗을 통하여 몸밖의 어떤 자극을 알아차림. 또는 몸안의 자극을 알아차림.]
모든 언어는 감각 표현이다. 인간이 음성으로 감각 표현한 것이 말이고, 기호로 감각 표현을 기록한 것이 문자다. 그 체계를 언어 체계라고 한다.
사과 이름 [감각: 사과] + [음성 표현: 사과] = [표현 기호 기록: 사과]
사과 의미 [감각: 사과] + [음성 표현: 빨갛다, 아삭하다, 새콤하다 등] = [표현 기호 기록: 사과는 색이 빨갛고 식감이 아삭하고 맛이 새콤하다. 그리고 비타민 C가 풍부하다.]
사과의 이름과 의미는 모두 감각으로 만들어졌다. 사과를 감각(시각)으로 보고 말(음성)으로 표현한 것을, 다시 감각(청각)으로 들으며 기록한 것이 사과라는 단어다. 이름의 표현은 단순히 음성만으로 가능하나, 의미의 표현은 다른 단어를 알아야 가능하므로, 의미는 문명의 발전과 같이 발전했다. 사과의 색, 식감, 맛은 원시 시대부터 의미를 표현할 수 있었겠지만, 비타민 C는 과학 시대부터 의미를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외 다양한 언어들도 전부 감각이다.
- 감각 종류
* 감정적 반응 (기쁨이나 슬픔)
감정은 뇌가 특정 상태인 육체를 감각해서 느낀 것을 표현하여 만든 것이다. 그렇기에 육체 상태를 바꾸는 물질을 먹으면 감정적 반응도 바뀐다.
* 논리적 사고 (수학 및 추론)
논리는 뇌가 사물을 순차적으로 감각하고 느낀 것을 앞뒤가 맞게 표현하여 만든 것이다. 인간이 사물을 순차적으로 감각할 수 있으니까, 수학 같은 순차적인 계산이나 추론 같은 논리가 가능하다.
* 이익과 손해 (옳고 그름 포함)
손익은 뇌가 육체에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감각하여 느낀 것을 표현하여 만든 것이다. 배고플 때 식사하면 몸이 만족한 감각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고, 남을 도우면 마음이 만족한 감각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모든 언어는 인간의 감각 표현이다. 하지만 오늘날 문명의 발전으로 이런 것을 곧잘 잊게 된다. 직접 대상의 모습을 감각하는게 아니라 문자만으로 언어를 학습한다. 직접 대상의 무게를 감각하는게 아니라 기계의 수치로 측정한 값을 본다. 직접 대상의 정보를 감각하여 처리하는게 아니라 컴퓨터를 통해 데이터로 처리한다. 그러다보니 언어의 본질을 잊게 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언어는 인간의 감각 표현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문자 학습, 기계 수치, 컴퓨터 처리조차도 결국 시각에 해당한다. 언어가 수많은 인간들의 감각 표현이라는 사실은 정말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그것을 알아야 언어의 성질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 언어 성질
* 표현성
언어는 표현성이 있다. 단순히 음성과 문자의 나열이 아닌 지금까지 인간이 느낀 감각들의 표현 기록되어 있으므로 상당히 입체적이다. 그래서 언어로 이뤄진 소설의 문장은 인간에게 감정적 공감을 느끼게 한다. 이런 이유로 다채로운 감각 표현일수록 언어의 전달력은 높아진다. 음성만 있다면 문자를 추가한다거나, 대상에 대한 다양한 감각 표현을 묘사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풍부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 주관성
언어는 주관성이 있다. 단어를 만든 인간의 유전자, 환경, 교육 등으로 관점이 달라질 수 있다. 사과 맛을 A는 시다고 표현할 수 있고 B는 달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한 다른 관점에 따른 의미들이 오랫동안 정리되면서 어느 정도 단어의 의미가 표현적이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특정 인간들의 주관적인 감각 표현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본래 객관성이 없는 개념을 사회 약속을 통해 특정한 감각 표현 기록을 기준으로 대화를 하는 것이다.
* 차이성
언어는 차이성이 있다. 보통 인간마다 언어가 다르다. 그런 것을 사회 약속을 통해 특정 사회 내에서는 언어가 비슷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인류 사회 영역이 넓어짐에 따라 국가와 세계 내에서 언어가 비슷한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이는 인간만이 아닌 짐승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변화성
언어는 변화성이 있다. 감각은 본디 유전자 결합, 환경 학습, 언어 학습에 따라 왜곡된다. 형제여도 입맛이 다를 수 있다. 형제가 잘 먹는 것을 못먹을 수 있다. 살아온 환경에 따라 입맛이 다를 수 있다. 외국인은 잘먹는 고수를 못먹을 수 있다. 언어 학습에 따라 입맛이 다를 수 있다. 음식을 잘먹다가도 ‘변기물로 만들어진’이라는 언어 정보를 접하면 실제 변기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더라도 못먹을 수 있다. 그러한 감각 왜곡이 오래되면 언어의 사회 약속이 달라지면서 언어 또한 달라질 수 있다.
* 상대성
언어는 상대성이 있다. 언어는 성질상 절대성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에, 그 자체로 독립하여 존재하지 않고 다른 언어에 의존적인 관계를 가진다. 특정 단어 하나만 해도 그 단어의 의미를 가리키는 언어가 필요하게 된다. 예를 들어 사과는 ‘사과’ 언어 하나로 끝나는게 아니라, ‘빨간’, ‘아삭’, ‘새콤’ 등 사과의 의미를 가리키는 언어가 필요하게 된다.
모든 언어는 이런 성질에 의해 같은 단어를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사전적 정의를 명시하는 편이 내용 전개나 이해 돕기에 도움이 된다. 물론 사전적 정의는 인간의 감각 표현 기록에 대한 합의와 약속으로 규정된 것이기에 체계가 불완전하다.
[이름: 성질] [의미: 사물이나 현상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
[이름: 특성] [의미: 일정한 사물에만 있는 특수한 성질]
이처럼 이름과 의미가 순환하며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관계인 경우도 많다. 언어의 주관적인 성질상 특정 인간이나 집단이 모든 단어의 사전적 정의를 정리하지 않는한 제대로 체계가 정리되기 어렵다. 언어는 이러한 성질에 의해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언어는 가설에 해당한다.
모든 탐구는 이런 언어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이제 자유롭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보 -> 지적 -> 논리 -> 사회 -> 지능 순서로 알아보겠다.
1. 정보
[정보: 1. 관찰이나 측정을 통하여 수집한 자료를 실제 문제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정리한 지식.]
[철학: 1.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
언어는 감각 대상이 늘어남에 따라 반사적인 감각 표현을 넘어 기억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처리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언어는 감각의 정보를 처리하는 감각 정보 처리 체계가 된다. 인간은 언어로 감각의 정보를 처리하면서 문명 사회를 이루고 발전시켰다.
감각 정보 처리 체계는 문명이 발전하면서 논리가 더해지게 된다. 철학의 등장이다. 인간은 감각한 세계를 논리적으로 탐구하면서 철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철학의 본질을 설명하기 어려웠는데, 논리 정보 처리 체계 개념으로 쉽게 설명이 가능해졌다. 철학은 논리 정보 처리 체계다. 가설에 속하는 언어를 토대로 특정 명제를 정하고, 증명이 끝나거나 증명하지 않아도 공리가 된 명제들을 바탕으로 인간이 느낀 대상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 철학이다.
철학의 종류는 크게 세 가지 있다. 도덕 철학, 수학 철학, 과학 철학. 수학과 과학이 철학이라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이 논리 정보 처리 체계라면 수학과 과학도 독자적인 정보 처리 체계가 존재하므로 철학에 속한다 할 수 있다.
- 논리 정보 처리 체계
* 도덕 철학
도덕은 옳고 그름으로 세계를 탐구하는 철학. 탐구 방식은 인간이 감각으로 느낀 대상을 특정 명제로 접근해 옳으면 참, 그르면 거짓으로 구분하는 것. 또는 그런 명제를 추론하는 것. 정보 처리 체계는 옳다 판단된 명제다. 도덕 명제 체계로 정보를 처리한다. 종류로는 종교학, 형이상학, 사회도덕 등이 있다.
* 수학 철학
수학은 수로 세계를 탐구하는 철학. 탐구 방식은 인간이 감각으로 느낀 대상을 특정 명제로 접근해 감각이나 도구로 재서 계산하는 것. 또는 그런 기록을 계산하는 것. 정보 처리 체계는 자연 구조의 규칙성으로 만든 수학 법칙이다. 수학 법칙 체계로 정보를 처리한다. 종류로는 대수학, 기하학, 해석학 등이 있다.
* 과학 철학
과학은 과학적 방법으로 세계를 탐구하는 철학. 탐구 방식은 인간이 감각으로 느낀 대상을 특정 명제로 접근해 감각이나 도구로 관찰 및 실험을 하며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하는 것. 또는 그런 기록을 증명하는 것. 정보 처리 체계는 자연 구조의 규칙성으로 만든 과학 법칙이다. 과학 법칙 체계로 정보를 처리한다. 종류로는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이 있다.
이외 수많은 학문은 각자 철학(정보 처리 체계)이 존재하나, 보통 언어와 이 세 가지 철학의 영향을 받아 생겼다고 볼 수 있다.
- 차이
보통 수학과 과학은 기술로 활용되면서 철학이 아닌 기술 학문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도덕은 기술로 활용되지 않아 순수 철학이므로 철학적으로 더 우수하고, 수학과 과학은 기술로 활용되어 순수 철학이 아니므로 철학적으로 부족하다라는 편견이 있을 수 있다. 문과와 이과로 나누면서 그런 편견이 더 강해질 수 있다. 그러나 관점을 바꿔보자. 셋 다 ‘논리 정보 처리 체계다’라는 관점으로 보면, 도덕의 정보 처리는 기술로 활용할 수 없을 정도로 수준이 낮지만, 수학과 과학의 정보 처리는 기술로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준이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도덕은 기술로 쓸 수 없고 수학과 과학은 기술로 쓸 수 있는가?
* 구조
이는 구조적 증명의 차이다. 과학의 명제는 대부분 구조적 증명이 되었기 때문에 내용 자체가 굉장히 입체적이다. 과학으로 사과를 탐구했다고 가정하자. (과학 탐구에 수학이 활용된다.) 사과는 색이 빨갛고 식감이 아삭하고 맛이 새콤하다. 이 문장에서 ‘사과’, ‘색’, ‘빨간’, ‘식감’, ‘아삭’, ‘맛’, ‘새콤’ 이것 전부 자연 구조를 해석하여 단어 자체가 입체적이다. 사과의 구조, 색의 구조 등 자연 구조를 잘 아는 인간은 문장만 봐도 그 구조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반면 도덕은 그렇지 않다. 도덕의 명제는 대부분 구조적 증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용 자체가 참과 거짓, 옳고 그름과 같은 이분법에서 머무르게 된다. 구글에서 도덕 철학 종류로 검색했을 때 나오는 도덕 철학 탐구 예시 하나를 살펴보자. ‘거짓말은 항상 나쁜 것인가?’ 도덕 철학에서는 인간 관계를 관찰하면서 탐구하는데, 과학 철학에서는 거짓말의 자연 구조(인간 구조)를 해석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거짓말의 자연 구조를 알게 되면, 옳다 그르다가 아닌 조건 파악과 대응법을 논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예시 논제 의미가 사라진다. 도덕은 구조를 모르니까 단편적으로 감각에 의존하면서 그것이 옳은 것 같다거나 그른 것 같다는 식에 머무르게 된다. 이렇게 인간 감각에 의존하는 지극히 원시적인 철학이라 아무래도 기술로 활용하기 어렵다.
* 증명
증명 방식도 차이가 난다. 수학과 과학의 공통점은 언어 외 도구를 이용하여 정보를 처리하게 하고, 어떤 경우에도 모순을 허용하지 않았다. 만약 수학과 과학에서 모순이 발생하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총력을 다한다.
반면 도덕은 그렇지 않다. 명제가 옳다면 모순되어도 괜찮다는 식으로 넘어갔다. 공산주의만 해도 그렇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자연 구조상 맞지 않은 이상이라는 모순이 있어도, 공산주의의 도덕 명제가 옳으니까 공산주의가 틀린게 아니라 인간이 틀렸다와 같은 주장이 있게 되기도 된다. 성선설이나 성악설도 그렇다. 채식이 옳고 육식이 나쁘다도 마찬가지다. 반례가 생겨도 무작정 명제가 옳은 것이라 주장만 한다. 도덕 명제는 절대적으로 옳다 여기면서 모순을 방치하므로, 도덕 철학은 모순이 많아 기술로 쓸 수가 없는 것이다.
* 감각 왜곡
도덕이 존재하는 것은 지배와 감각 왜곡 때문이다. 도덕은 구조적 증명 없이 주관적 감각으로 느낀 것을 명제로 만들어 주장하는 것에 해당한다. 그래서 수학과 과학의 주장은 법칙을 알려주면 알아서 이해하지만, 도덕의 주장은 일일히 설득하고 다녀야 한다. 그런 설득을 통해 널리 퍼져 인정받으면 모순이 있어도 보편화된다. 만약 지배자를 설득하게 되면 일일히 설득하고 다니지 않아도 그 도덕이 사회 규칙이 되어 퍼지게 된다. 전근대 일본의 육식 금지령은 지배자가 육식을 나쁘다 여기고 그 도덕을 강요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거기에 인간의 자연 구조상 육식을 해야만 한다는 모순이 있어도 통용된다. 그런 도덕적 강요가 행해지면 감각이 왜곡되면서, 그 강요를 어기면 안된다는 강박증이 나타나게 된다. 그것을 가리켜 죄책감이라 부른다.
도덕의 강요는 주관적 감각의 강요와 다를바 없다. 명제의 구조적 증명이 된 것이 아니기에 단순히 주장자의 감각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내가 육식을 나쁘게 여기니까 너도 육식을 나쁘게 여겨야 한다. 실제로는 육식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이도 그 강요를 받고 감각이 왜곡되어 나쁘게 여길 수도 있게 된다. 다양성도 도덕 철학으로 접근하면 단순해진다. 다양한 것이 옳고, 다양하지 못한 것이 그르다. 현재 PC주의가 주장하는 다양성을 도덕 철학으로 접근하면서 온갖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다양성과 다양성 수용 방식의 구조적 증명을 통한 처리가 아니라, 그냥 다양한게 옳으니까 너는 옳게 여겨야 한다는 식이니 불만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런 불만은 갈등, 다툼, 전쟁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 손익
옳고 그름이 아닌 이익과 손해가 합리적이다. 옳고 그름은 주관적 개념을 객관적 전제로 접근하려고 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내가 느낀 옳다 감각을 모두가 그렇게 느껴야만 한다고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이익과 손해는 주관적 개념을 주관적 전제로 접근하려고 하면서 그런 문제는 사라진다. 나의 손익과 타인의 손익이 다르다는 점은 누구나 안다. 그래서 강요가 없어도 자발적으로 알아서 하게 된다. 자유주의의 대표적 제도 두 가지. 선거 제도와 시장 제도 같은 것이 있다. 이것도 도덕이 필요하다 착각할 수 있지만, 인간의 자연 구조를 파악하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자유주의는 손익 구조를 구축하여 개인이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개인과 사회가 이익을 얻는 구조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도덕이 지금까지 인류 사회의 기준이 되어 질서를 유지해왔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건 마차와 같은 것이다. 도덕을 쓰자는 것은 마차가 지금까지 인류 사회의 운송의 기준이 되어 교통을 유지해왔다고 해서 지금도 마차를 써야 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제는 낡아서 못쓴다.
과학도 과학 윤리가 아닌 인류 손익으로 문제를 대응하는 것이 타당하다. 과학 윤리는 굉장히 이상한 개념이다. 과학도 철학 중 하나로 독자적인 논리 정보 처리 체계가 있는데, 과학으로 발생하는 문제를 과학이 아닌 도덕의 정보 처리 방식을 쓰려고 하고 있다. 도덕은 무증명 정설 명제를 쓰고, 과학은 증명 가설 명제를 쓰는 것처럼 이 둘의 정보 처리 체계도 아예 다른데도 그러고 있다. 단순한 사회 관습으로 사회 문제 해결 기준은 도덕으로 해야만 한다는 착각에서 비롯된 촌극이다. 그렇게 도덕이 중요하다 여겨지면, 과학 법칙에도 도덕을 적용해보길 바란다. 물론 논리 레벨이 너무 낮아서 불가능하다. 도덕 철학도 구조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대부분 과학이 탐구한 자연 구조와 거리가 멀어서 기술로 쓸 수가 없다. 도덕과 과학이 다른 세계를 탐구하는게 아닌데 이렇게 차이난다는것은 근본적 논리 레벨, 정보 처리 레벨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이 논리 정보 처리 체계고 과학도 철학이라면, 과학 철학은 도덕의 옳다 그르다가 아닌 과학이라는 정보 처리 체계로 구조적 증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 존재
도덕 철학은 대상의 구조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단순히 옳다 그르다의 이분법에 매달리고 있을 때, 과학 철학은 대상의 구조를 하나씩 이해하려 하면서 대상의 인과와 현상의 조건 등을 파악하고 필요한 정보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인간이 생활에서 쓸 수 있는 기술에도 적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다른 철학에 비해 얼마나 우수한 탐구인지 알 수 있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학 철학이 다루는 구조는 무엇인가?
과학 철학에서 구조는 존재의 규격화된 관계라 할 수 있다. 과학의 탐구에 따르면 어떤 존재도 원자와 분자의 규격화된 관계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개별 존재는 모두 특정 존재의 규격화된 관계라 할 수 있다. 생물의 경우는 다양한 세포들이 규격화되어 장기 기관을 구성하고, 그런 장기 기관들이 규격화되어 육체를 구성한다. 그 외에도 다양한 규격화된 미생물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모든 언어는 가설이고, 언어가 지칭하는 모든 존재도 가설에 속한다. 그러므로 사실 구조는 창작한 개념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 창작
모든 존재는 무에서 시작해 늘어났다. 언어는 인간의 감각 표현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인간이 감각 표현을 하면서 대상이 존재로 규정되고, 그 규정이 기억, 대화, 기록으로 남아 존재로서 성립된 것이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존재는 어떻게 해서 존재하는가? 인간이 사과를 사과 나무의 일부로 구분한 게 아니라, 사과를 구분하니까 사과라는 개별 존재가 된 것이다. 사과 나무도 마찬가지다. 사과 나무를 토지의 일부가 아닌 사과 나무로 구분하니까 사과 나무라는 개별 존재가 된 것이다. 인간은 나름대로의 논리로 개별 존재를 구분하고 있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구분이 아니다. 인간이 원자와 분자를 몰랐을 때에는 그것을 구분된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 은하나 성단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언제 바뀔지 모른다. 그럼으로 존재란 세계를 인간 관점으로 창작하여 개별 구분한 개념이라 보면 된다.
언어로 접근하면 인간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 인간이 언어로 규정한 존재에 대해서는 과학 철학의 탐구 방식으로 상당 부분 파악했다.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안다. 모르는 것이 아니다. 사과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고, 사과가 다른 존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사과가 어떤 구조로 구성되어있는지 알고 있다. 존재의 이유, 관계, 구조를 전부 안다. 그러나 그 존재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창작한 가설 개념이다. 가설로서 존재를 알지만, 인간이 개별 존재로 규정하기 전의 세계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유도, 관계도, 구조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전부 가설일 뿐이다. 모든 철학은 그런 근본적 이유를 탐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 과학의 존재 탐구가 기술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가장 우수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2. 지적
[지적: 1. 지식이나 지성에 관한 것.]
[구조: 1. 부분이나 요소가 어떤 전체를 짜 이룸. 또는 그렇게 이루어진 얼개.]
과학 철학의 탐구를 바탕으로 인간의 지적 구조에 대해 탐구해보았다. 인간의 지적 구조를 안다면, 논리 체계의 개선과 사회 문제의 대응과 AI의 의식을 만드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의식
[의식: 1. 깨어 있는 상태에 자기 자신이나 사물에 대하여 인식하는 작용.]
의식은 깨어있는 자아가 대상을 인식하는 작용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의식의 본질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정리된 바는 없다. 그것에 대해 아는 정보를 종합하여 몇 가지 추론을 해보았다.
의식은 뇌 뉴런의 활동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어떤 고정적 실체가 있는 존재가 아니라, 활동으로 나타나는 유동적 현상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의식이 정신 활동이 아닌 물질 활동이라는 전제해보겠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하나, 의식이 물질 활동 현상이기에 육체에 영향을 주는 약같은 물질을 먹으면 의식도 즉각 변한다. 둘, 의식이 물질 활동 현상이기에 뇌의 활동으로 할 수 있는 생각이나 행동 외에 육체 세부 조작을 할 수 없다. 셋, 의식에 관한 기관을 과학자들이 뇌를 그토록 조사해도 찾을 수가 없다. 넷, 의식이 뇌 뉴런 활동에 영향을 받는듯이 의식 외의 무의식적 행동이 존재한다. 다섯, 의식이 뇌 뉴런에 있는 기억에 영향을 받는듯이 기억에 따라 의식 구성이 달라진다. 이런 점을 고려해 의식은 어떤 고정적 실체가 있는 존재가 아니라 현상이라 판단했다.
의식이 현상이라면 감각, 감정, 욕구, 욕망, 의지, 충동 등도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런 개념들이 의식에 전달되는게 아니라, 그것들이 의식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모든 뇌 뉴런의 활동으로 특정 신호가 의식으로 구성되는데, 그 구성 요소의 성질이 감각, 감정, 욕구, 욕망, 의지, 충동 등인 것이다.
의식에 구성된 모든 정보가 언어로 정보 처리된게 아니기 때문에, 언어적이지 않은 느낌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걸 가리켜 감이라고 할 수 있다. 무의식은 의식에 구성되지는 않았지만 뇌 뉴런이 정보 처리한 것에 해당한다. 보통 무의식을 알아차리는 것은 무의식적 행동 이후에 뇌 뉴런이 그 행동을 감각해서 의식으로 구성되고 나서다. 수면 중 의식도 무엇인지 예상해볼 수 있다. 수면 중에서는 제대로 의식을 이룰 수 있는 신호가 별로 없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외부 자극으로 강한 신호가 확산되면 의식이 생겨 잠에서 깨어난다.
* 활동
그렇다면 의식은 어떤 뇌 뉴런의 활동에서 나타난 현상인가? 그것은 인간의 언어가 감각 정보라는 것을 고려하면 알 수 있다. 인간은 언어와 철학으로 감각 정보를 논리적으로 처리하여 생각과 행동을 한다. 그리고 뇌 뉴런은 외부의 자극이나 뉴런의 신경 전달 물질을 감각하면서 정보를 처리한다. 그 말은 뇌 전체가 감각 기관으로서 감각을 처리하고, 그 처리한 정보가 의식을 구성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뇌가 감각 기관으로 정보를 처리하여 의식을 구성한다는 관점으로 보면, 어떤 정보가 의식을 구성하는지 예상해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감각 기관, 예를 들어 손은 자극이 강할수록 의식 구성이 높아진다. 그렇다는 것은 뇌 뉴런의 활동에서 뇌 뉴런이 자극을 받는 레벨이 높아지면 흥분도가 높아지고, 그런 식으로 흥분이 높아지면 그 정보가 확산되어 다수의 뉴런이 그 정보를 감각하여 처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자극 흥분 레벨과 감각 확산 레벨에 따라 의식 구성 요소가 달라진다고 본다. 이는 뇌의 칩을 근거로 더욱 타당해진다. 그 칩이 뇌파를 감지하여 외부 기계를 조작하게 하는데, 인간의 의식을 구성하는 생각의 뇌파가 일관된 강한 신호를 발하기에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 진화
본디 이런 의식 구성 요소는 처음부터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물이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의식이 구성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생물의 진화는 보통 돌연변이에 속했다. 그런 규격화되지 않은 돌연변이가 처음부터 인간이 세계를 알기 쉽게 보기 위해서 변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연 선택의 결과일 것이다. 지금 인간이 감각으로 느끼는 정보들이 처음부터 이런 상태인 것은 아니었을 거라는 이야기다.
이에 대한 근거는 아판타시아나 하이퍼 판타시아 같은 심상 이미지 상태가 있다. 보통 인간이 세계를 보는데 장애를 겪는 것은 녹색맹 같은 생존에 그렇게 치명적이지는 않는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비슷한 세계를 본다. 하지만 심상 이미지는 생존에 크게 영향이 없어서 아판타시아나 하이퍼 판타시아처럼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는 경우도 많다. 의식 구성 요소 중 생존에 필수적인 외부 감각 정보는 자연 선택을 통해 유사한 세계를 보게 하나,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은 심상 이미지는 자연 선택이 제대로 되지 않아 개체마다 다른 경우가 많은 것이다.
- 자아
[자아: 1.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나 관념.]
자아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나 관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자아의 본질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정리된 바는 없다. 그것에 대해 아는 정보를 종합하여 몇 가지 추론을 해보았다.
자아는 뇌 뉴런 활동을 통한 정보 처리 결과 중 하나다. 자아라는 존재가 뇌의 정보 처리를 하는게 아니라, 뇌가 정보 처리를 한 결과 중 하나라는 것이다. 뇌는 정보 처리를 하여 감각, 감정 등의 의식을 구성하는데, 거기에 자아, 의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조금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보통은 [자아] -> [뇌] -> [감각, 생각, 행동 등]으로 이어질 거라는 고정 관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뇌] -> [자아, 의지, 감각, 생각, 행동 등]이 다 포함된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하나, 모든 존재는 만들어진 것으로 자아라는 존재도 정보 처리하여 만든 결과다. 인간이 타인을 정보 처리하여 결과를 만들어 인식하듯이, 자신을 정보 처리하여 결과를 만들어 인식한 것이다. 둘, 모든 뉴런 생물은 자아를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단독 자아를 갖는 개체는 지능이 높은 생물이 환경 학습하면서 일관된 기억을 경험하는 개체로 한정한다. 인간이 기억을 상실하거나, 애초에 기억이 길지 않은 생물은 자아가 이어지지 않는다. 기억에 없어 정보 처리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셋, 다중 인격 등의 현상이 실존하는 이상 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자연 구조가 필요한데, 자아가 정보 처리 결과라면 정보 처리에 따라 다중 인격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일 수 있었다.
* 본질
자아의 본질에 의해 ‘나’의 존재가 헷갈릴 수 있다. 분명 생각을 하고 몸을 움직이는 자신이 뇌와 독립된 존재가 아닌 뇌의 정보 처리 결과라는게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뇌 자체가 ‘나’라고 생각하면 된다. 지금까지 자아가 뇌와 별개의 정신적 존재라 여기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자아가 뇌의 정보 처리 결과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뿐이다.
뇌 자체가 기본적으로 ‘나’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것을 다른 생물을 보고 이름을 붙여 존재로 규정하듯, 자신도 생물 중 하나로 보고 이름을 붙여 존재로 규정한 대상이 자아라고 생각하면 된다. [뇌] -> [자아(이름), 의지, 감각, 생각, 행동 등]처럼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정보 처리된 자아가 붙어서 일관된 행동의 존재가 누군지가 결정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 모든 것이 기억을 바탕으로 처리되기에, 본질적으로 인간의 자아는 기억에 속한다 할 수 있다.
* 진화
지금의 자아도 의식과 마찬가지로 자연 선택을 거쳤을 거라 생각한다. 자아가 정보 처리 결과라면 초기에는 다중 인격자가 많았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다가 다중 인격이 생존에 부적합해지면서 단일 인격, 단일 자아를 가진 개체들이 생존하면서 보통은 경험과 기억 일관성을 통해 단일 자아를 인식하는게 아닐까 싶다. 나도 아마 기억을 잃어서 나 자신에 대한 정보 처리에 실패한다면, 나는 나 자신을 나로 규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 처리
[처리: 2. 일정한 결과를 얻기 위하여 화학적 또는 물리적 작용을 일으킴.]
뇌의 정보 처리는 보통 뉴런의 활동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보 처리의 본질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정리된 바가 없다. 그것에 대해 아는 정보를 종합해 몇 가지 추론을 해보았다.
처리는 개별 뉴런의 활동이다. 보통 뉴런 생물의 정보 처리는 순차적으로 정보를 처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언어와 논리를 배운 이들은 그것의 순차적인 정보 처리에 의해 더욱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뉴런 생물의 정보 처리는 모두 개별 뉴런에 의해 동적으로 비순차적 처리가 된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하나, 어떤 정보를 순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는 그런 순차적인 정보의 우선 순위를 결정할 뇌 뉴런들의 상위 개념이 필요한데, 과학자들이 그토록 뇌를 조사해도 그런 기관은 없었다. 둘, 인간은 순차적인 맥락과 무관한 생각과 행동이 자주 나타난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나기도 하고, 이유 모를 충동도 나타난다. 지능이 낮은 생물은 더욱 그런 순차적인 정보 처리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일관성은 뉴런의 특성이 아닌 어디까지나 우수한 뇌를 가진 생물의 특성이다. 셋, 순차적 정보 처리보다 비순차적 정보 처리가 생존에 적합하다. 순차적 정보 처리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응할 수 없다.
* 의식
비순차적 개별 뉴런의 동적 정보 처리는 어떻게 의식을 구성하는가? 모든 개별 뉴런은 실시간으로 정보를 처리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뉴런의 정보가 의식을 구성하여 인간이 인식할 수 있지는 않다. 의식을 구성하는 기준은 뉴런의 외부 자극 및 신경 전달 물질에 의한 흥분과 그에 따른 확산이다. 뇌 뉴런 전체에서 흥분에 따라 확산이 많은 정보가 의식을 구성하고, 그 중 가장 많은 정보가 집중 대상이 된다. 의식은 현상에 해당하므로, 의식과 집중이 나타났다는 것은 그에 대한 처리가 이미 완료된 상태임을 의미한다.
모든 개별 뉴런의 처리는 빠르지만 딜레이가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은 그러한 딜레이를 인식하기 어려울 정도로 계속 이어진다. 그것은 의식이 뉴런의 흥분과 확산 때문이기 때문에 어떤 정보가 의식을 구성하고 확산 레벨이 낮아져서 의식 구성에서 탈락하더라도, 의식 구성 딜레이가 생기기 전에 다른 뉴런의 정보가 대체한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은 계속 이어진다. 그 말은 모든 개별 뉴런의 정보는 의식으로 구성되지 않았더라도 끊임없이 정보 처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동적
동적 정보 처리에 대해 알아보자. 모든 개별 뉴런은 독자적으로 정보를 처리한다. 뉴런은 신경 전달 물질이라는 것을 생성하여 전달하는 방식으로 정보를 처리하는데, 그 말은 물질의 정보를 뉴런의 취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미각으로 음식의 맛을 판단하듯, 뉴런도 신경 전달 물질의 맛을 판단하여 흥분하고 확산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 말은 뉴런의 취향에 따라 정보 처리가 동적으로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가 아마 뉴런 생물의 본질적인 의지를 구현하는게 아닐까 싶다. 개별 뉴런의 정보 처리가 인간과 같이 감각과 논리를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은 대체로 자연 선택의 결과라 본다. 체계적인 구조가 아닌 자연 선택의 구조라 유전자의 오류 하나로도 전부 무너질 수 있다.
개별 뉴런이 자극이나 물질을 감각하여 처리하여 신경 전달 물질을 만들면서 시냅스에 남긴 흔적이 기억일 거라 생각한다. 시냅스에 남은 기억은 가소성에 의해 계속 조금씩 변할 것이다. 모든 개별 뉴런은 특정 역할을 수행한다. 언어 영역이라 불리는 뉴런이 망가지면 언어 기능이 고장나서 새로운 언어를 익힐 때까지 오래 걸린다고 들은 적이 있다. 기본적으로 유전자에 의해 뉴런 역할이 정해지고, 경험에 따라 뉴런 역할이 달라질 것 같다. 그러므로 시냅스에 남긴 흔적 또한 뉴런의 역할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것을 통해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으로 나뉘지 않을까 싶다.
* 기억
인간의 모든 기억은 감각 정보를 포함한다. 그렇기에 뇌 뉴런의 정보 처리만으로 실제 감각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느끼고 공감할 수 있다. 위약 효과 같은 경우가 그와 비슷한 자연 구조라 생각한다. 진짜 약(진약)에 대한 감각 정보를 기억해 두었다가, 가짜 약(위약)을 먹으면 그 감각 정보와 연결되어 진짜 약의 정보 처리를 하면서 육체에도 진짜 약과 유사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기억이 감각 정보이기 때문에 본래 인간은 매우 감성적인 존재라 생각한다. 기억에 있는 감각 정보를 자극하는 무언가를 접하기만 해도 그 감각이 활성화되면서 느껴지는 것으로 매우 감정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아이들의 경우 쉽게 웃고 우는 것은 그러한 자연 구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본래 인간은 감성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에서 성장하면서 때와 장소에 맞는 태도를 강요받게 된다. 아이들과 같은 반사적으로 시끄러운 태도를 부르는 감각 정보 활성화가 잘못된 것이라 배우면서 신경 가소성에 의해 그것들이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엄청 자극적인 것, 예를 들어 깊은 쾌락이나 더러운 것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시각 정보만으로 그러한 감정을 느끼기가 쉽지 않게 된다.
* 정보
인간의 모든 정보는 뇌에서 처리된다. 의식을 구성하는 요소에 감각, 감정, 욕구, 생각, 행동 등이 포함된다는 이야기다. 모든 뉴런은 각자 역할에 따라 육체의 뉴런들과 연결되어 뇌 뉴런의 정보 처리는 실시간으로 모든 뉴런과 연결되어 처리된다. 복잡한 사고가 가능한 것은 감각 정보, 기억, 피드백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특히 감각 정보를 기억한 시냅스가 없다면 인간은 언어를 쓸 수가 없다. 모든 정보 중 행동은 뇌의 활동과 별개라는 관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행동도 뇌에서 처리된다. 근거는 파킨슨 병이다. 운동 도파민 뉴런의 도파민 분비량이 줄어들면 육체가 점점 굳어지다가 멈춘다. 뉴런의 활동이 멈추면 육체도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육체의 동작 또한 뉴런 활동의 결과이므로, 의식을 구성하는 요소에 행동 또한 포함되게 된다. 뇌가 정보 처리해서 육체를 동작하고, 뇌가 다시 그 동작을 감각하면서 마치 뇌와 별개의 자아가 동작한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정보 처리 중에 생기는 신경 전달 물질은 육체를 기분 좋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에, 인간은 생산성 없는 놀이를 즐기게 된다. 누군가 창작물을 먹는다고 표현하고, 누군가 창작물 중 도파민을 뽑아내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그 비유는 매우 적절하다 할 수 있다. 창작물을 통해 생성되는 신경 전달 물질을 뉴런이 먹고 반응하여 육체를 기분 좋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도파민 분비량을 늘리는 창작물은 도파민을 뽑아낸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다라는 자연 구조적으로 타당하다.
- 왜곡
[왜곡: 1. 비틀어 구부러지게 함.]
뇌 신경 가소성에 의한 왜곡은 보통 제대로 알려져있지 않다. 그래서 왜곡의 본질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정리된 바가 없다. 그것에 대해 아는 정보를 종합해 몇 가지 추론을 해보았다.
왜곡은 뇌 신경 가소성에 의한 변화다. 인간의 뇌는 시냅스 가소성, 구조적 가소성, 기능적 가소성 등이 있다. 뇌의 신경 회로가 경험에 따라 변하기에, 어떤 경험을 해둬야 그것에 맞춰 신경 회로가 구성되어 같은 생각과 행동을 빠르게 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이 느끼는 감각은 변하지 않는 상수가 아니라 변하는 변수에 속한다. 그러나 인간의 주관성과 도덕 철학의 이분법이 감각 왜곡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분명 신경 가소성의 개념을 알고 있음에도 감각 왜곡이 존재할 거라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이들이 자신과 유사한 감각을 느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것처럼, 타인에게 본인의 감각을 강요하는 일들이 많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하나, 신경 가소성의 존재. 경험, 학습, 손상에 따라 신경 연결이나 시냅스를 재구성하고 변화시킨다. 그것에 의해 감각 왜곡은 당연히 있게 된다. 이 왜곡은 개별 뉴런의 취향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고 본다. 둘, 실제 감각 왜곡의 사례. 유전자의 차이 외에도, 외국에서 잘 먹는 음식을 못먹을 수 있고, 더러운 단어를 접하면 음식 맛도 좋지 못하게 느껴지는 사례가 있다. 셋, 실제 감각 왜곡에 의한 가치관 변화 사례. 신념, 신앙, 충성, 도덕적 강박증, 죄책감, 양심, 가스라이팅 등 감각 왜곡이라는 자연 구조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사회마다 도덕이 다른데도 같은 죄책감을 가지는 것은 둘 다 감각 왜곡이라는 자연 구조에서 나타난 현상이기 때문이다. 도덕에 의한 죄책감은 옳고 가스라이팅에 의한 죄책감은 나쁘다는 가치 판단이 있을 수 있지만, 자연 구조로 보면 둘 다 감각 왜곡의 결과다.
* 차이
사람은 사람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왜 (나와 비교했을 때) 저 사람은 저럴까? 심지어 본인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왜 (남과 비교했을 때) 나는 이렇지? 그러나 감각 왜곡 개념을 이해하면, 사람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게 될 수 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은 신경 가소성으로 감각 정보가 왜곡되어 처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상해 보이는 사람들이 정말로 그렇게 감각을 느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인종 차별 같은 것은 도덕 철학의 이분법으로 보면 그냥 나쁜 짓이다. 그러나 과학 철학으로 보면 사회에 익숙해지는 것으로 감각이 왜곡되어 속한 사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 대한 부정적 감각이 실제로 느껴지기 때문에 차별을 하는 것이다. 마치 외국인은 잘 먹는 낯선 음식을 보고 맛이 없다고 느끼는 것처럼, 정말로 외부인에게 불쾌한 감각이 느껴져서 그런 것이다. 이것을 단순히 나쁜 행동이라 말하면서 강요하기보다는 낯선 음식을 맛있게 먹게끔 설득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쉽게 이해하기 힘든 도덕에 의한 현상들. 연하에게 반말을 들었다고 무례하다 말하며 살해한 인간, 여자가 히잡을 쓰지 않았다고 명예를 위해 살해한 인간. 이들도 정말로 감각이 왜곡되어서 살해하고 싶을 정도의 충동을 느껴서 그렇다. 종교 맹신도 마찬가지다. 신흥 종교에 빠져 전재산을 바치고, 가족을 희생시키는 것은 정말로 그게 옳다는 감각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연기가 아닌 이상 실제로 그렇게 느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감각 왜곡으로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는 워낙 다양하기에 단순히 도덕 철학의 이분법으로 대응하기보다는 감각 왜곡을 전제하고나서 과학 철학의 구조적 대응이 필요하다. 과거 지배의 세계에서는 지배를 통해 도덕 철학의 이분법만으로 대응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현대 자유의 세계에서는 개인이 자유로워 이제 그걸로는 한계가 있다.
지적 구조의 진화 과정에 대해 아는 정보를 바탕으로 몇 가지 추론해보았다.
- 1차 지적 진화
1차 지적 진화는 감각 정보 처리 체계인 언어다. 생물의 감각 정보 처리는 뉴런에서 온다고 생각하므로, 뉴런부터 다루기 시작하겠다. 용어를 신경 세포가 아닌 뉴런으로 쓰는 이유는 글자 수가 적어서다.
최초 생물에서 뉴런이 발생했을 때, 일반적으로 개별 뉴런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뇌 뉴런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개별 뉴런에서 뇌 뉴런으로 진화하여 딱딱 생물에 맞게끔 뉴런이 위치하는 것보다, 뉴런의 무차별 확산으로 생물 전체에 거대한 뇌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가 자연 선택에 의해 일부 부위가 지금의 뇌처럼 되고 나머지 부위는 감각 기관이 되는 것으로 되는 것이 더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지나치게 뇌가 큰 생물은 자연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망. 적절하게 뇌와 감각 기관이 나뉜 개체가 생존하면서 지금이 형태로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의 뇌가 좌우로 나뉘어져 있는 이유는 어쩌면 진화 과정 속에서 유전자의 문제로 샴쌍둥이마냥 생물 내에 두 개체의 뇌가 섞여서 나온 것이 이어져 온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만약 그렇다면 지적 구조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도 몰라 발상을 남겨둔다.
유인원이 언어를 쓰게 된 조건은 아마 사회 구성원의 지적 수준이 언어 사용이 가능할 정도로 평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어는 혼자서 쓰고 알아듣는다고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 전체가 지적 구조의 보편적인 진화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 그것이 가능한가?
* 화식
인간은 다른 종과 다르게 불로 음식을 구워먹는 행동을 오래 전부터 해왔다. 화식의 특징은 맛이 풍부해지고 먹지 못하는 음식도 먹을 수 있게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즉, 맛의 다양성이 확보된다. 이것이 인간 사회가 언어를 익힐 수 있을 정도의 지적 수준을 만든 조건이라 판단했다.
* 감각
인간의 정보 처리는 감각 정보 처리로, 감각의 수가 늘면 처리 레벨도 높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어떤 원시인 사회에서 번개 등의 자연 현상으로 불이난 숲에서 타죽은 동물을 먹든, 나무의 불을 써서 구워먹든 화식을 시작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구워진 동물의 고기의 맛을 느끼고, 그 고기를 소화할 수 있는 개체가 그것을 먹을 수 있다. 화식을 학습하고 시작하면서, 그러한 감각을 가진 개체가 생존에 적합하게 되었다.
* 생존
화식의 특징은 식사로 생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만약 구워먹을 수 있는 개체가 생존에 유리하여 오래 생존하여 많은 자손을 남겼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점차 사회는 화식이 가능한 개체로 보편화된다. 화식이 일반적이게 되면서 자연 선택에 의해 미각에 관한 유전자 발현이 늘어나고, 화식의 맛과 소화 능력에 관한 유전자의 돌연변이도 늘어난다.
* 진화
인류가 원시인 시기가 길었던 이유는 화식의 가능 시기와 화식을 통해 사회가 언어 습득이 가능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기 때문일 것 같다. 기본적으로 유인원은 잡식을 하지만 화식을 하는 인간 사회는 그보다 더 다양한 맛을 추구하게 된다. 맛을 즐기게 되면서 다양한 대상을 식사류로 포함하고, 그것을 위해 영역도 넓혔을 수도 있다고 본다. 기본적으로 다른 종 (네안데르탈인 등)의 유전자 섞이나 돌연변이를 포함하여, 수많은 미각, 물질 소화에 대응하는 유전자 (우유 유당 소화 또는 미역 소화가 가능한 장내 세균 등), 그것에 대응하는 뉴런 수의 증가에 따라 사회 전체가 언어가 가능해지는 뇌의 지적 구조 진화가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이렇게 진화를 하면서 인간 사회는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이 갖춰졌다고 본다. 인류 개체의 감각이 다양해지면서, 그 감각의 표현도 다양해지고, 그 다양한 표현을 처리하면서 지능이 높아지고, 높아진 지능으로 시각 + 청각의 조합으로 대상을 이해하는 과정, 즉 언어의 사용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것이 1차 지적 진화. 감각 정보 처리 체계다. 이것을 가리켜 인간의 첫 번째 지적 진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2차 지적 진화
2차 지적 진화는 논리 정보 처리 체계인 철학이다. 인간의 논리 체계는 철학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최초 언어를 사용한 원시인 사회는 한 곳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언어를 사용한 원시인 사회와 아예 별개의 사회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언어를 습득할 확률은 높지 않다고 생각한다. 즉 현재 인류 사회는 조상은 한 원시인 사회에서 독립되어 분화된 것이라 판단한다.
* 원시 도덕
다양한 표현과 그에 대한 정보 처리로 언어가 가능해지면서, 기초적인 사회 질서가 구축되었을 것 같다. 그것은 허용과 금지 같은 이분법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존재의 구조를 몰라 단순한 이분법으로 규칙을 만들어 질서를 구축한 것일 것이다. 그것이 원시 도덕이다. 그것을 결정하는 이들이 주로 지배자들이지 않았을까 싶다.
* 원시 신앙
원시인 사회가 한 곳에서 비롯되었다면 신배 개념인 신과 영혼의 존재가 인류 사회에 공통되었다는 것도 타당해진다. 원시인 A가 공포나 환각 등으로 신과 영혼의 존재를 감각 왜곡으로 실제 감각한다. 그는 감각 왜곡 개념을 모르기에 자신이 감각한 존재를 실존한다고 믿고, 다른 원시인들에게 전파한다. 원시인 A는 다른 원시인들이 믿지 못하자, 공포를 겪게 한다거나 환각 물질을 준다거나하여 자신과 유사한 상태로 유도해 그들의 감각을 왜곡하여 감각하게 만든다. 그런 식으로 원시인 사회에서 신과 영혼은 실존하게 된다.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 같은 원시 신앙이다.
* 고대 철학
고대에 접어들면서 철학이 나타나게 된다. 단순한 감각 정보 처리와 그에 따른 감각적인 논리 정보 처리에서, 철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체계적인 논리 정보 처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고대 시대에 다양한 철학이 등장하는데, 아직 자연 구조에 대해 모르기에 대부분 이분법의 도덕 철학에 해당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자연을 탐구한다거나 하는 일이 있었지만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 중세 철학
중세에 접어들면서 과학 철학이 나타나게 된다. 고대 그리스 철학, 중세 이슬람 과학을 바탕으로 과학적 방법을 통해 자연 구조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과학 혁명이다. 단순한 이분법으로 세계를 탐구하던 것에서, 자연 구조를 통해 만든 법칙으로 세계를 탐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학 철학은 자연 법칙을 이해해 기술로 쓸 수 있을 정도로 세계를 깊게 이해하는 새로운 논리 정보 처리 체계였지만, 도덕 철학이 오랫동안 자리잡아 철학의 기본으로 여겨지고 있었고, 과학 철학은 도덕 철학과 정보 처리 방식이 너무나도 달라 과학은 단순한 기술 학문으로 오해되기도 했다.
* 근대 철학
근대에 접어들면서 과학 철학의 영향이 나타나게 된다. 과학 철학은 도덕 철학의 절대성에 균열을 일으킨다. 도덕 철학으로 보던 이분법과 과학 철학으로 보는 자연 구조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것을 통해 사람들은 도덕의 강압된 규율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왕에 대한 충성, 귀족에 대한 복종, 신에 대한 신앙, 그것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사회 규칙들. 도덕 철학의 질서에 의문을 품은 것이다. 그 결과가 자유주의다. 자유주의의 배경에는 대항해시대, 종교 개혁, 산업 혁명 등 다양하게 있지만, 정보 처리 체계 관점으로 보면 근본적으로 과학 철학의 영향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철학의 본질을 알면 본질을 알 수 있다. 과학 철학의 영향으로 자유주의 사상이 나타났고, 도덕 철학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나타난 것이다. 보통 자유주의가 먼저 등장하고, 사회주의가 나중에 등장하여 자유주의가 보수고 사회주의가 진보라는 인식이 있을 수 있지만, 철학적 관점으로 보면 자유주의가 진보고 사회주의가 보수다. 이는 사회 구조적 측면에서 봐도 마찬가지다. 자유주의는 선거 제도와 시장 제도를 통해 인간의 행동을 과학적으로 접근해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고 한다면, 사회주의는 도덕적 가치를 기반으로한 정부 권한 집중을 통해 개인의 자유보다는 도덕적 가치 추구를 우선한다. 그래서 극단적 사회주의인 공산주의는 구조가 왕정보다도 심한 권한 집중에 해당한다.
이것이 2차 지적 진화. 논리 정보 처리 체계다. 이것을 가리켜 인간의 두 번째 지적 진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진화 과정 속에서 과학 철학이 등장하나, 둘 다 논리를 다룬다는 점에서 같은 지적 진화 단계로 규정하겠다. 단지 과학의 논리 정보 처리 레벨이 기술로 쓸 수 있을 정도로 월등하게 높을 뿐이다.
- 3차 지적 진화
3차 지적 진화는 기계 정보 처리 체계인 디지털이다.
과학은 도구를 써서 자연 구조를 탐구하면서 자연스럽게 도구인 기계의 성능이 높아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디지털 방식을 이용하는 기계를 통한 정보 처리를 하기 시작한다. 기계 정보 처리 체계의 등장이었다. 보통 디지털(인터넷, AI 등)을 산업 혁명 중 하나로 보기도 하는데, 정보 처리 체계 관점으로 보면, 인간의 도구로 체계적인 정보 처리가 가능한 3차 지적 진화 과정에 속한다.
언어, 철학과 마찬가지로 종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지적 진화에 속한다. 비언어 원시인과 원시인이 지적으로 다르고, 비철학 사회 인간과 철학 사회 인간이 다르듯, 비디지털 사회 인간과 디지털 사회 인간은 지적으로 종 자체가 다르다. 그러므로 디지털 이전의 인류와 직접 비교는 이제 부적절하다. 개인의 철학은 아직 도덕 철학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지만, 수단으로서의 정보 처리는 레벨 자체가 아예 다르다.
현재 인류가 헤매는 것은 단순히 도덕 철학과 과학 철학의 충돌만이 아니라, 3차 지적 진화 중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종 자체가 지적으로 달라지면서, 과거의 사회 문제 해결법으로는 현재의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
* 인터넷
인터넷을 통해 대부분 개인이 다양한 지식의 정보 처리를 손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와 철학은 개인의 정보 처리 체계를 담당했다면 기계는 개인의 정보 처리 수단을 담당했다. 그것을 통해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게 되면, 정보 처리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대부분 인간이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회에서는 정보 처리가 기본권이 되었다. 그러면서 인류의 지적 진화가 이뤄지는 것으로 정보를 알기 어려웠던 과거의 문제 해결 방식으로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
* AI
AI의 등장으로 정보 처리 수단이 자동화되기 시작했다. 이로서 인류의 3차 지적 진화는 급속도로 빨라지고 있다. 점차 디지털이 없던 시대의 인간과 괴리되어가고 있다. 인간이 하던 생산을 AI가 대신하면서 인간의 정보 처리도 다양해지고, 다른 식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근본적인 지적 구조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3차 지적 진화. 기계 정보 처리 체계다.
이것을 종합해보면 인간의 지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인간의 생물 구조 + 언어 + 철학 + 디지털 활용 + 지식 = 인간의 지성.
3. 논리
[논리: 1. 말이나 글에서 사고나 추리 따위를 이치에 맞게 이끌어 가는 과정이나 원리.]
[정제: 1. 물질에 섞인 불순물을 없애 그 물질을 더 순수하게 함.]
현재 논리 정보 처리 체계는 크게 도덕 철학, 수학 철학, 과학 철학이 있다. 수학 철학은 수에 한정되어 보편적인 상황에서 정보 처리가 되지 못해, 기본적으로는 옳고 그름의 이분법으로 탐구하는 도덕 철학과 자연 구조를 탐구하는 과학 철학으로 나뉘게 된다. 이 두 가지 거대한 논리 정보 처리 체계를 기초로 다양한 철학이 있는 상태다.
- 도덕 철학과 과학 철학
* 도덕 철학
도덕 철학은 옳고 그름의 이분법에 해당하여 쉽게 사용할 수 있지만 증명은 몹시 어렵다. 도덕 철학의 논리를 사용하는 이들은 간단히 그 주장을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판단하면 되기 때문에 몹시 쉽게 쓸 수 있다. 도덕적 가치에 맞으면 선이라 말하며 칭찬하고, 맞지 않으면 악이라 말하며 비난하면 된다. 그것의 자연 구조나 인과에 대해서 일절 몰라도 쓸 수 있다.
반면 도덕 철학에서 사회 보편적 선(모든 인간의 감각에 맞는 옳음)은 증명이 불가능하다. 개념 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자연 구조로 불가능한 명제를 성립시키려 하다보니 굉장히 내용이 길고 복잡하고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도덕 철학은 몹시 내용이 난해하고 어려운 편에 속하게 된다.
증명과 설득의 경우 도덕 철학은 주로 무증명으로 설득 또는 폭력으로 행하게 된다. 모든 인간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적 증명이 불가능하여, 개개인을 일일히 설득하면서 감각을 바꿔 가치관을 수용하게 만들거나, 왕과 같은 지배자를 설득하여 지배자를 통해 사회 전체에 전파하는 방식을 쓴다.
* 과학 철학
과학 철학은 자연 구조 탐구에 해당하여 쉽게 쓰기 어렵지만 증명은 생각보다 쉽다. 과학 철학의 논리는 사용하는 이들이 과학 철학에서 규정한 자연 법칙을 논리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다양하게 알고 있어야 쓸 수 있다. 자연 구조상 모순이 되면 쓸 수가 없다.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관계 없다.
반면 과학 철학에서 자연 구조에 대한 증명은 도덕 철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다. 물론 과학 철학의 증명이 절대적 기준에서 쉽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도덕 철학은 불가능한 명제를 실현하려 하고 있는 것에 비해 과학 철학은 자연 구조상 성립되는 명제를 실현하려 하기 때문에, 꾸준히 하다보면 가능한 경우가 많다. 그것을 통해 과학 철학이 발전한 것이다.
증명과 설득의 경우 과학 철학은 과학적 방법 증명과 재현을 통한 설득으로 행하게 된다. 대부분 인간이 과학 철학의 증명을 보고 따라하여 재현해보는 것으로, 그 증명을 수용하게 된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재현이라는 강력한 설득 수단으로 대다수를 설득하여 사회 전체가 수용하는 방식을 쓴다.
* 도덕 철학과 과학 철학의 한계
도덕 철학은 구조를 모르는 문제가 있고, 과학 철학은 구조에 갇혀있는 문제가 있다. 도덕 철학은 근본적으로 자연 구조를 몰라 이분법으로 정보를 처리해온 것이기 때문에 그 한계를 알기가 쉽다. 대상의 구조, 관계, 조건마다 다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음에도 이분법으로 정보를 처리하면서 제대로 된 정보 처리가 불가능했다.
도덕 철학이 이분법적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과학 철학의 탐구를 쓰는 일도 있었으나, 대체로 답을 정해놓고 끼워맞추는 식이라 논리적인 활용은 아니었다. 통계를 왜곡하고 과학 탐구의 일부만 잘라다가 쓰는 것. 논리는 대상의 의미와 의미, 대상의 구조, 대상의 관계를 다 고려해야 하는데, 그러지는 않고, 적당히 설득할 수 있는 레벨의 선에서 따와서 설득 수단으로 쓴다.
반면 과학 철학은 한계를 알기 어렵다. 구조 자체는 확실하게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조를 알아보니 구조에 갇히게 되었다. 과학 철학의 한계는 구조를 탐구하다가 구조에 갇혀있는 것에 해당한다. 우선 존재라는 단어를 생각하자. 존재는 인간이 만든 단어로 언제 존재 규정이 달라질지 모르는데, 존재의 구조를 탐구하면서 그 구조가 고정 관념으로 자리잡아, 구조 밖의 발상을 하기 어려워지는 문제가 있다.
자연 법칙은 우주의 법칙에 해당하는가? 아니면 우주의 힘에 일어난 현상의 규칙성으로 인간이 만든 법칙에 해당하는가? 이것은 둘 다 현재로서 뚜렷한 모순이 없다. 되려 우주가 법칙이 아닌 힘으로 돌아간다면, 현재 발생하는 몇 가지 모순이 해결될 수 있다. 지구 내에 일어나는 현상을 물리학으로 해석하기 어렵거나, 지구 밖 우주의 현상을 만든 자연 법칙으로 해석하기 어려워 암흑 에너지와 물질을 만든 것은, 만약 우주가 힘으로 돌아간다고 가정한다면 모순이 없게 된다. 절대적 자연 법칙이 없으니까 자연 법칙에 어긋나는 현상이 발생해도 모순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떠올리기 어려웠던 것은 자연 법칙을 통해 자연 구조를 탐구하면서, 그 구조에서 벗어난 관점을 떠올리기 어려웠지 않았나 싶다.
과학 윤리 또한 구조에 갇혀있는 현상 중 하나다. 만들어진 사회 구조를 마치 자연 구조처럼 여기고, 그 구조의 모순을 만드는 도덕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않은채, 모순된 이분법을 그대로 과학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쓰려는 행동이 있었다. 과학은 옳고 그름의 모순된 이분법이 아닌 자연 구조를 근거로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증명이 어려운 것도 마찬가지다. 증명이 어려운 사실도 실제 존재하는 사실일 수 있음에도, 증명이 어렵다는 것 하나로 그 사실을 무작정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도 있다. 그게 구조에 갇혀있는 것에 해당한다. 논리적 추론으로 타당하다면, 그것을 정보 처리할 개념 중 하나로 받아들이는 편이 바람직하다. 중력파의 문제라던가 있다. 그 발견이 중력파라는 확증은 없지만, 그래도 일단 예상했던 현상이 나타난만큼 그것의 사실을 정보 처리 대상 안에 고려는 해야 한다. 이는 기억의 유전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고등 생물의 세세한 유전은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유전자 발현 외에도 어떤 기억의 유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 정제
이것은 내가 쓴 논리 정보 처리 방식이다. 그에 대해 설명하겠다.
* 동기
현재 도덕 철학의 방식으로는 사춘기 시기부터 있던 의문을 해결할 수 없었기에, 무작정 생각해보았다. 그걸 해결하지 못하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탐구하면서 그 동안 도덕적 강박증에 의하여 자유로운 의사를 표현도 제대로 못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자유주의를 추구하게 되었다.
* 원칙
충동적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원칙은 간단하다.
첫째, 본질 파악.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모든 정보를 종합하여 가장 논리적인 발상이 필요하다 보았다. 그래서 세상의 정보 중에서 논리적인 것은 과학 법칙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궁금하던 것들을 하나씩 생각해봤다. 그러면서 도덕의 모순을 생각하면서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 맞는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개개인의 주관으로 보았을 때, 종교의 도덕을 위해 테러를 저지르는 인간이나, 특정한 도덕으로 테러로부터 위험한 아이를 구하는 것 둘 다 개인에게는 도덕에 해당하는 것 같았다. 거기서부터 일반적인 탐구 방식과 멀어지게 되었다고 본다. 어떤 가치 판단과 무관하게 논리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려 했다.
둘째, 고정 관념 없애기. 모든 형태의 고정 관념이 없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 연령별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아 나이를 생각하지 않는 것. 이건 사춘기 시기의 사건으로 이미 자아의 나이가 멈춰있는 상태였기에 할 수 있었다. 둘, 지식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식부터 접하는게 아니라 생각부터 하는 것. 지식부터 접하면 지식의 고정 관념에 잡힐것 같아서 먼저 기초 지식만 접하고, 최대한 논리적으로 생각하여 정리한 다음에, 보편 지식을 접하여 보충하여 다시 정리했다. 그런데 고정 관념을 없앤게 아니라, 고정 관념을 적게 발상하는 고정 관념으로 이뤄진 정보 처리 체계가 갖춰진 것 같다.
셋째, 모순 제거. 모든 논리의 모순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특정 정보나 가치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정보를 종합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모순을 찾아 제거하면서 정보 처리했다. 내가 생각하는 모순 없음은 단순히 개념과 개념의 의미 연결만을 의미하는게 아닌, 개념의 자연 구조와 다루지 않은 다른 개념들과의 관계에서까지의 모순도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그러한 일련의 행위에 모순이란 불순물을 제거하는 정제 작업이라 생각하여 정제라는 이름을 붙였다. 모순을 전부 제거하면서 도덕의 모순을 발견해 도덕을 넘었고, 존재의 모순을 발견해 언어를 넘었다. 언어 논리로는 논리의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제 논리는 언어로 규정한 존재를 넘어 세계의 모순을 제거하여 세계의 본질을 알고 싶다.
- 철학
모든 정보를 모아 모순을 제거하여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고, 모순이 없는 어떤 발상을 통해 새로운 관점으로 의미를 찾는 것. 모든 정보에는 말 그대로 모든 정보다. 비논리적 정보라고 해서 제외하지 않고, 논리적 정보라고 해서 맹신하지 않고 모순을 찾아 제거하면서 본질을 찾는다. 철학이 논리 정보 처리 체계라면 나의 정보 처리도 철학으로 분류가 가능할 것이다. 정제 철학이다.
* 발상
모든 정보 -> 어떤 목적 발생 -> 목적에 관한 기초적인 논리 생각 -> 논리적인 생각 정리 -> 정리 후 보편 지식 파악 -> 논리적인 생각과 보편 정보를 더해 모순을 제거하며 정제 -> 다시 생각
기본 원칙을 바탕으로 이런 과정을 거쳐 발상을 진행했다. 이런 과정으로 모순이 없는 새로운 발상을 하면, 그 발상을 전제하여 모든 기억이 업데이트가 된다. 예를 들어 철학이 세계를 탐구한다는 막연한 개념이 아니라 논리 정보 처리 체계다라는 모순이 없는 새로운 발상을 하고 나면, 지금까지 알던 정보가 담긴 기억이 업데이트 되면서 수학이나 과학도 철학에 속할 수 있다는 발상이 나오게 된다. 그러면서 계속 새로운 발상이 나온다.
이번에 철학이 논리 정보 처리 체계라는 발상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
사과 구조에 대한 생각 -> 과학이 탐구한 자연 구조를 보고 사과만 보고 어떻게 안건지 생각 -> 단순히 사과 구조만 탐구한게 아니라 지금까지 탐구한 과학 체계를 통해 사과 구조를 탐구한 것을 파악 -> 과학은 정보 처리 체계 -> 다른 철학도 정보 처리 체계에 속함을 파악 -> 언어와 기계에 관한 발상을 통해 단순한 정보 처리 체계가 아니라 논리 정보 처리 체계로 판단
그렇게하여 개념 단위의 발상 변화가 일어난다. 비슷한 내용을 다루더라도 특정 개념의 관점에 따라 내용 전개가 달라진다. 좀 더 모순이 적은, 좀 더 타당한 내용. 이런 식으로 정보 처리를 해도,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면 또 다른 새로운 발상이 나올 수 있다. 그러면서 점점 정제된다. 그렇게 정제한 것을 정리하여 쓴 글을 다시 보는 일이 드물었다. 그것 또한 고정 관념이 될 수 있으니까. 어떤 주제를 정하고 다시 주제의 관점으로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것들도 다시 접근해보면서 새로 정리하면서 성장했다.
* 생각
세계는 이미 탐구한 많은 정보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뭔가 궁금하면 찾으면 나온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이미 있던 것에 의존하면, 그 너머에 있는 새로운 발상에 닿기 어렵다. 현재 정보 내에서 한계까지 논리적인 발상을 해봐야 한다. 아는 정보 내에서 모순이 없는 새로운 발상에 다다르면, 그것이 보편 지식을 더해도 모순이 없을 경우 사회에서 새로운 발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다보면 더 타당하고 적절한 새로운 발상에도 도달하게 된다. 새로운 발상이 잘 되도록 뇌의 정보 처리 체계가 그것에 맞춰서 변하게 된다. 신경 가소성에 의해 암기를 주로 하는 이들과 발상을 주로 하는 이들은 아마 뇌의 정보 처리 체계가 다를 것이다.
* 방식
발상 방식은 선형 정보 처리와 비선형 정보 처리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대상에 대해 다양한 개념을 떠올리면서 선형 정보 처리를 한다. 그런데 정제 철학은 모든 정보를 종합해서 처리하기 때문에 인간의 선형적인 발상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어떤 발상을 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스스로 개념을 발상하기보다는 생활을 하면서 생활에서 보이는 개념들을 통해 비선형적인 발상을 하는게 효율적일 수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인터넷 커뮤니티나 창작물들을 즐기면서, 거기에 있는 개념들을 관점으로 삼아 목적으로 삼은 대상을 탐구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보면 발상이 나오기도 하고, 수면 중에 정보 처리가 되어 일어나자마자 발상을 하는 경우도 많다. 뇌의 정보 처리 측면에서 자원의 소모를 줄이고 효율이 높이는데에도 도움이 된다. 스스로 개념을 떠올리기보다 있는 개념을 인식하고 발상하는 것이 효율이 더 높을 수가 있다.
애초에 뇌의 정보 처리는 선형적이지 않다. 언어가 선형적일 수 있는 것이다. 선형 정보 처리가 아니기에, 이것저것 보면서 발상이 되는대로 정리하는 방식. 논리라는 개념을 관점으로 두고, 다양한 개념들을 접하면서 어떠한 모순이 없는 새로운 발상에 다다른 것이다. 논리는 선형적 정보 처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모순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 비논리
보통 직감과 감정은 비논리라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비논리가 아닌 논리로 해석하지 못한 개념일 뿐이다. 직감에 대해 생각해보자. 인간의 정보 처리는 의식을 구성하는 것 외에도 뉴런 활동으로 되고 있다. 그렇기에 의식에 구성되나 언어 정보가 포함되지 않는 직감이나 의식에 포함되지 않는 무의식적 행동 또한 뉴런의 정보 처리 중 하나에 속하므로, 그것이 무엇인지 깊게 생각하여 파악하면 직감도 활용할 수 있다. 열기나 시선을 느끼는 것도 언어화가 안된 다양한 감각들이다. 그것은 뇌의 정보 처리 중 하나에 속한다. 감이 뇌의 정보 처리 결과라고 생각하면 쓸 수 있다.
감정도 마찬가지로 비논리가 아닌 논리에 속한다. 인간의 모든 감정은 논리적인 행동의 결과다. 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무엇이든.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적 행동도, 감각 왜곡 개념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감각이 왜곡되어 모든 인간이 다 미세하게 감정이 다를 수 있다. 보편적이고 단편적인 감정 해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자연 구조와 인간의 정보 처리 체계인 언어, 철학, 그리고 그 결과인 사상을 고려하면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지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이익
* 새로운 발상
정제 방식을 쓰다보면 새로운 발상을 하기가 쉬운 편이라 생각한다. 취급하는 정보가 한정되거나, 사회 관습이나 지식의 고정 관념이 강하거나, 도덕의 영향으로 모순 제거에 소홀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새로운 발상이 어려울 수 있는데, 그런 것을 다 배제하고 정제하다보면 새로운 발상이 쉬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논리 기술
정제는 모순 제거를 원칙으로 삼기 때문에, 아는한 논리에 모순이 없는 편이다. 그래서 아는 지식 내에서는 웬만하면 논쟁에서 밀릴 위험이 적다. 특히 도덕 철학의 경우는 모순적인 이분법이라 애초에 성립되지 못하기에, 그걸 기반으로 주장하는 상대와는 정상적인 논쟁의 경우 논쟁에서 밀릴 수가 없다. 특히 인터넷에서는 익명이라 서로를 모르기에 더욱 그렇다. 현실은 논리적인 대화를 한다고 해도, 어떠한 선입견 등으로 논리만으로 대화가 되지 않을 경우가 많아 확실하지 않다.
- 강박
옳고 그름의 강박에서 벗어나면 이분법에서도 벗어나 정보 처리 레벨이 많이 오를 것이다. 특히 과학으로 정보 처리를 하던 이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높아진 정보 처리 레벨은 문제 해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현재 도덕 철학의 사상과 과학 철학의 사상이 같은 체제 내에서도 경쟁을 하면서 온갖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도덕적 강박증에 벗어나면, 그 현상의 본질이 무엇이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수한 논리를 갖추기 위해서는 이러한 강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나는 과학의 자연 구조 탐구를 바탕으로 발전했다. 이것이 모순이 없는 논리적인 사상과 철학의 루트라 생각한다.구조 이해 없이는 세계는커녕 개념의 본질에도 닿을 수 없다.
4. 사회
[사회: 3.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형태의 인간 집단. 가족, 마을, 조합, 교회, 계급, 국가, 정당, 회사 따위가 그 주요 형태이다.]
[체제: 2.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볼 때에, 그 조직이나 양식, 또는 그 상태를 이르는 말.]
어떤 사회가 인간을 자유롭게 생존, 번영, 행복이 가능하게 되는지 알아보겠다.
- 체제
체제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체제가 되는 순서를 설명하겠다. 언어 -> 철학 -> 사상 -> 체제. 어떤 사회에서 언어를 배운다. 언어로 철학을 만든다. 철학으로 사상을 만든다. 사회가 특정 사상을 체제로 삼는다. 이런 방식으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체제가 나타났다.
* 이념
오늘날 현대 국가 체제는 기본적으로 이념이다. 인간의 이상적인 생각을 담은 체제다. 그 체제는 크게 두 개로 나뉜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본질을 살펴보자.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과학 철학과 도덕 철학에서 비롯되었다. 도덕 철학이 먼저 나오고 과학 철학이 나중에 나왔는데, 자유주의가 먼저 나오고 사회주의가 나중에 나온 이유는 다음과 같다.
도덕 철학은 자유주의가 나오기 전까지 왕정의 지배를 합리화하거나 방치했다. 왕정의 지배 안에서 무엇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해왔다. 그러다가 과학 철학이 등장하고, 도덕 철학의 주장과 과학 철학이 탐구한 자연 구조와 모순되는 것을 이해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유주의가 나타난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욕망에 맞는 사회 구조를 구축하면서 많은 이들의 권한을 보장했으나 초기다보니 왕정 시대의 관습에 따라 제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것을 보고 도덕 철학을 추구하던 이들이 자유주의 사회 구조에 도덕 철학을 더한 것이 사회주의다. 극단 사회주의라 불리는 공산주의가 성공하려면 자유주의 시장 경제 발전 후에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한 체제임을 의미한다. 애초에 도덕 철학은 왕정 체제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자유주의와 같은 체제를 구축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자유주의도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새로운 체제에 해당했다. 사회주의는 어디까지나 자유주의에 도덕 철학을 더한 것에 불과하여 지금 알려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상황처럼 명백한 모순과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 사회주의
사회주의는 자유주의의 기본 구조를 가지고 있었지만, 도덕적 가치에 따라 각 핵심 제도를 재단하였다. 자유주의는 자유를 위해 개인의 권한을 최대한 보장하지만 사회주의는 도덕적 가치를 위해 개인의 권한보다 정부의 권한을 강화했다.
그러면서 사회주의의 선거는 왕을 뽑는 제도가 되었다. 개인의 권한이 없는 상태에서 선거를 통해 막강한 권한을 가진 자를 뽑는다. 그야말로 왕을 뽑는 제도다. 국가에 따라 도덕적 가치가 삼권분립이 파괴되는 일도 있었다. 행정부가 전부 권한을 독점하는 경우도 있었다.
시장도 마찬가지였다. 정부가 도덕적 명분으로 계획 경제로 경제에 관한 권한을 독점하여 개인의 경제 권한을 전제한 시장 제도 자체가 사라지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경제가 망한 공산주의 국가 중 몇몇은 시장을 일부 개방하여 개인의 경제 권한을 보장하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정부가 높은 권한을 가진 상태는 명백했다.
사회주의는 개인의 권한이 없거나 부족한 체제기 때문에 정상적인 민주주의가 아니다. 자유주의는 자유를 위해 개인의 권한을 최대한 보장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민주주의다.
* 자유주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자유주의는 도덕적으로 옳지 않을 수 있지만 인간의 자연 구조적으로 맞는다. 사회주의는 도덕적으로 옳을 수 있지만 인간의 자연 구조적으로 맞지 않는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권한을 보장하면서 개인이 저지르는 부도덕한 현상이 일어나게 했지만, 개인의 권한이 보장되면서 개인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자연 구조에 적합한 상태가 된 것이다. 반면 사회주의는 도덕적 가치를 위해 개인의 권한보다 정부의 권한을 우선하여 도덕적인 사회로 만들려고 했지만, 개인의 권한이 보장되지 않으면서 개인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는 자연 구조에 부적합한 상태가 된 것이다.
자유주의가 최대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도덕의 옳고 그름이 아닌 구조의 맞고 틀림으로 접근해야 한다. 도덕의 이분법은 개체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강요하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가 과하게 억압될 수 있는 반면, 과학의 자연 구조는 각자의 구조에 맞춰 필요한 조건만 충족하면 되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된다.
많은 이들이 다양한 주장에 헷갈려할 수 있다. 그럴 때에는 자연 구조와 권한에 초점을 맞추면 도덕적 명분에 휘둘리지 않고 본질을 볼 수 있다. 어떤 것이 옳은 것이니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잘 살펴보면, 개인의 권한을 빼앗아 이익을 가져가는 결과를 만드는 경우도 많다.
도덕적 명분을 보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옳아보이는데, 사회 권한과 개인 생활을 보면 자유주의와 시장 경제가 낫다. 도덕 철학과 과학 철학의 본질로 접근하면 깔끔하게 정리되어 이해될 수 있다.
- 판단
인간의 판단 기준에는 도덕적 옳음과 구조적 맞음이 있을 수 있다. 옳음과 맞음은 의미가 다양할 수 있는데, 여기서 다루는 옳음과 맞음은 도덕적 가치에 옳거나 자연 구조 등 구조에 맞는 것이라 하겠다. 이 둘을 논리적으로 정리해보겠다.
도덕적 옳음은 논리적으로 성립이 불가능하다. 도덕적 옳음은 보편적 선을 추구하는데, 인간의 자연 구조상 모든 인간의 감각을 만족시킬 수 있는 옳음은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정보는 감각 정보다. 감각은 왜곡되어 감각 정보도 왜곡된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감각이 다르기에, 감각 정보로 느끼고 판단하는 인간들의 옳음도 다 다르게 된다.
보편적 선이 불가능함에도 도덕 철학에 의해 그것이 가능할 거란 환상 속에서 모든 이들이 자신의 도덕에 맞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과 정의롭게 싸웠다. 보통 전쟁은 부도덕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생각할 수 있는데, 반대로 도덕적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도덕을 절대선으로 볼게 아니라, 도덕 철학으로 접근해 정보 처리 체계 중 하나로 보면, 그러한 전쟁은 반대편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분법 정보 처리 체계에 의한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대체로 논리는 단순한 개념의 사전적 의미와 의미의 모순 없는 연결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아서 이에 대해 파악하기 어려웠던 것이 아닐까 싶다. 정말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개념의 사전적 의미만이 아닌 개념의 구조와 다른 개념과의 관계까지 고려해 모순이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구조적 맞음은 논리적으로 성립이 가능하다. 모든 존재의 구조가 다 달라도 그 구조에 맞는 조건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옳음은 보편적 선으로 객관성을 추구하지만, 구조적 맞음은 모든 존재의 구조가 다를 것이라 전제하고 그에 맞는 구조를 찾기 때문에 대상의 주관성을 추구한다.
그러한 차이에 의해 구조적 맞음은 다양성을 보장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도덕적 옳음과 같이 이분법으로 알기 쉽지는 않지만, 모든 존재의 구조에 맞는 조건을 찾으면서 자연스럽게 다양성이 추구되게 된다. 다양성은 도덕 철학이 아닌 과학 철학에서 성립 가능한 개념이다.
모든 인간은 구조에 맞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 도덕적 옳음이 아닌 구조적 맞음. 인간의 구조적 맞음인 것을 사회적으로 풀어보면 손익에 해당한다. 인간의 자연 구조에 맞는 것이 이익에 해당하고 맞지 않는 것이 손해에 해당한다. 그런 식으로 모든 인간의 손익 구조에 맞춰 사회 구조를 구축하면 각 사회에 맞는 적절한 사회 구조가 구축될 수 있다.
- 감각 왜곡
인간은 신경 가소성에 의해 감각이 왜곡되고 신경 고정성에 의해 왜곡된 감각이 고정되면서 왜곡된 고정 관념이 생긴다. 새로운 정보를 많이 접하던 시기에는 가소성의 영향이 클 수 있고, 익숙한 정보를 많이 접하는 시기에는 고정성의 영향이 클 수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가소성에 속하여 언제든이 인간의 고정 관념은 바뀔 수 있다.
감각의 디폴트 상태를 알려면 원시인이나 원시 부족들을 떠올려보면 된다. 완전한 디폴트는 아니지만, 현대인에 비하면 순정에 가깝다.
* 본성
이러한 감각 왜곡에 의해 인간의 감각은 본성과 다른 경우가 많다. 어떤 남성이 A처럼 행동하고 여성이 B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A가 남성의 본성인 것이 확실한 것도 아니고 B가 여성의 본성인 것이 확실한 것도 아니다. 과학 철학은 신경 가소성 개념을 알고 있음에도 이러한 감각 왜곡에 의한 인간 성질 차이를 전제하지 않고, 뭉퉁그려 통계를 내어 탐구하기도 했다. 도덕적 가치에 의해 변동된 상태임을 가정하고 접근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아마 이것도 과학의 구조 갇힘 중 하나일 것이다. 또한 도덕을 전제하지 않은 자연 구조적 접근을 정이 없다거나 부도덕하다며 비난하던 사회의 여론의 영향도 컸을 거라 생각한다.
* 영향
도덕 철학에 의한 감각 왜곡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대부분 인간은 도덕에 의해 왜곡된 감각을 본인의 본성으로 생각했다. 도덕의 강요로 나타난 도덕적 강박증에 의한 죄책감을 본인의 본성이라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강하게 자책하는 일도 발생했다. 자연 구조적으로 가스라이팅과 크게 다를바 없었지만, 도덕의 권위에 그런 것을 구조적으로 접근하는 이는 드물었다.
유교 영향권에 있는 이가 연하의 반말에 불편한 것. 성적 노출에 불편한 것. 도덕적이지 못한 예능과 개그에 불편한 것. 전부 감각이 왜곡되어 나타나는 감각이다. 그런 감각 왜곡에 의한 불편함은 도덕의 권위와 도덕의 가치, 도덕적인 행위로 포장되어 자연 구조상 아무 문제 없는 것도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불편함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연 구조로 접근하여 별 문제가 없다 판단한 이들과 갈등을 갖기도 하였다.
사회 문제를 만드는 감각 왜곡은 도덕에 의한 왜곡된 감각 대물림이다. 인종 차별 등 다양한 차별에는 반대하지만, 연령 차별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교에 의해 감각이 왜곡되어서, 그 차별이 당연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성 인권을 주장하지만 여성의 억압을 하던 것을 그대로 가르친다. 가부장제가 자리잡았던 시대에 살았던 여성은, 그 시대의 도덕(정조 관념, 여성 수동성 등)에 의해 감각이 왜곡되었다.
그들은 여성이 강한 성적 수치심과 성적 관계를 문란하게 느끼는 상태와 여성의 수동적인 태도가 본성이라 여기고, 그에 맞는 감수성을 가져야 한다면서 성인지감수성을 주장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가부장제에서 왜곡된 감각을 젊은 여성들에게도 똑같이 가르치면서, 그 시대의 감성을 여성 인권이라 포장하면서 주장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남녀칠세부동석과 같이 남녀를 떨어트리게 되는 성적 대상화 금지, 여성의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것과 같이 여성의 의상을 야하게 입지 말라는 의상 검열 규제나 성적 상품화 금지, 여성의 수동성을 배려해 사회 참여를 촉진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수많은 가산점과 할당제. 전부 그 시대의 감각, 감성으로 만들어지는 것들이다. 나름 논리를 만들어 주장하지만 모든 논리는 그 왜곡된 감각을 근거로 한다.
이는 가정 폭력을 당하던 사람이 커서 가정 폭력을 행하는 것과 비슷하다. 가정 폭력에 의해 문제 해결시 폭력이 필요하다는식으로 감각이 왜곡되어서, 비슷한 상황에 닥치면 폭력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가부장제의 여성 억압에 감각이 왜곡되어서, 비슷한 상황시 그러한 여성 억압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도덕, 정의, 인권을 말하면서 억압이 행해지고 있다. 남성들은 여성 상품화를 즐기지 못하고, 여성들은 남성 상품화를 즐길 수 있기에, 현재 상태가 남성 억압으로 착각되고 있지만, 본질은 여성 억압에 해당한다. 그걸 도덕의 권위로 여성이 모르거나 여성조차 의견을 못낼 뿐이다.
* 부조리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도덕을 지키지 않아 부조리하다 여길 수 있는데, 반대로 도덕적이기 때문에 부조리할 수도 있다. 이른바 도덕적인 것을 주장하던 이들이 비리를 저지르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것을 보고 부도덕하다 말하기도 하지만, 본질은 도덕적인 행동이다. 도덕은 보편적인 선을 추구하여 객관성을 전제하지만, 본질은 주관성에 속한다. 그렇기에 도덕적인 것이 반드시 모든 인간에 이롭다는 보장이 없다. 가족을 위해 비리를 저리는 것은 도덕적인가 부도덕적인가? 그것은 주관에 따라 다르다. 비리를 저지른 인간이 가족을 위하는 것이 더 도덕적이라 판단되면 그것은 도덕적인 것에 해당한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부조리로 보이는 것뿐이다.
검열도 규제도 억압도 전부 그러하다. 누군가에는 도덕적이지만 누군가에는 부조리한 것이다. 도덕이나 부조리는 같은 것은 기본적으로 과학 철학이 탐구한 자연 구조와 그것을 바탕으로한 자유주의에 맞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세상은 무언가 옳고 그름으로 보기보다는 구조의 맞고 틀림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최소한 감각 왜곡 개념을 이해하고 있어야 감각에 지배되지 않을 수 있다. 감각을 무작정 믿지 않고 어떤 식으로 감각이 느껴지는 것인지 논리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 디지털
3차 지적 진화, 기계 정보 처리 체계가 자리잡으면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개인은 정보 처리 도구의 사용이 기본권이 되었다. 과거와 달리 개인이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엄청나게 늘어나버렸다. 그러면서 사회에 쌓여있던 수많은 문제들이 수면 위로 부상하여 그렇지 않아도 과학 철학의 자유주의와 도덕 철학의 사회주의의 철학과 체제의 경쟁으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다양한 정보를 알게 된 이들에 의해서 더 혼란스럽게 된 것이다.
현재 인류의 혼란에 방점을 찍게 한 지적 진화라 할 수 있다. 감각 왜곡 개념을 모른채 본인이 느끼는 감각에 맞는 도덕적 가치를 주장하고, 그것이 비슷한 성향을 가진 이들끼리 모이면서 더욱 강력한 도덕적 억압으로 자라나게 된다. 디지털에 의해 그토록 자유롭게 되어가고 있음에도 사회에 억압과 규제가 만연한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그것도 디지털에 의한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도덕 철학이 자리잡은 것은 옳고 그름과 같은 이분법이 가장 원시적이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3차 지적 진화를 거치면서, 도덕 철학이 인류의 문제 해결 방식이 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디지털이라는 정보 처리 수단을 얻은 인간은 과거보다 다양하고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 단순한 이분법 정보 처리로는 더 이상 대응하기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인류는 마치 문명의 사춘기와 같은 상태라 할 수 있다. 도덕 철학에서 과학 철학으로 넘어가는 시기. 3차 지적 진화 시기. 온갖 혼란의 시기. 그리고 그 혼란의 시기는 세계의 본질을 알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 권력
감각 왜곡에 의한 문제는 권력이 엮이면서 더욱 복잡해진다. 권력은 강제력을 행사할 권한을 의미한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권력은 모든 국민에게 있으므로 모든 국민이 강제력을 행사할 권한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국민에게 주어진 이러한 권력의 행사는 감각 왜곡과 함께 개인의 권한을 앗아가는 행위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본인의 왜곡된 감각으로 상대방의 행동을 부도덕하다 말하면서 규제, 억압하는 것이다. 대중의 권력 행사에 의한 억압이다.
이러한 현상은 왕정과 민주정의 문제로도 이어진다. 이념 체제로 넘어간 이후 일반적으로 왕정은 무조건 나쁘고 민주정은 무조건 옳다는 도덕 철학적인 이분법으로 접근하려는 이들이 있다. 어떤 나라에서는 왕정이 끝나고 민주정이 들어서자, 민주적으로 신정정치가 시작되었다. 대다수 국민이 종교에 의해 감각이 왜곡되는 것으로, 국민에 의해 민주적으로 신정정치가 시작되면서 되려 왕정 정치 때보다 개인의 권한이 사라지는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도덕이라는 이분법 정보 처리 체계는 인간의 사고도 이분법으로 만든다. 오른손과 왼손의 유래는 옳다와 그르다다. 단순히 손의 위치일 뿐인데도 거기에도 이분법으로 접근해 자주 쓰는 손을 옳다하고 자주 쓰지 않은 손을 그르다 한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왼손을 쓰면 잘못되었다고 혼나고 오른손으로 쓰게 만들었던 적도 있다.
이러한 이분법 정보 처리 체계를 가진 대중은 이분법 정치 참여를 행하게 된다. 옳다 여겨지는 이를 맹목적으로 지지하고, 그르다 여겨지는 이를 맹목적으로 비난한다. 이러한 대중의 이분법적인 태도는 도덕 철학의 정보 처리 체계에서 비롯되었다. 이분법 정치 참여에 의해 정치가들도 그러한 이분법적인 정치를 하면서 국가가 반으로 분열되게 된다. 자유롭고 민주적이면서 도덕적인 국가일수록 이러한 대중에 의한 이분법 현상, 흑백논리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다. 모든 인간의 감각이 다른데, 특정 감각을 만족하는 옳음을 사회 전체에 강요하면서, 통제하고 지배하려고 한다. 단순히 옳고 그름으로 처리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닌데, 이분법적인 도덕을 강요하는 것으로 더욱 더 사회 문제가 악화되는 경우가 많다.
- 사회 문제
* 자유주의 부정
자유주의 부정은 근본적인 사회 구조의 망가트리는 위험한 사회 문제다. 도덕 철학에 의해 과학 철학을 바탕으로 한 자유주의를 부도덕한 체제로 여기고 반대하는 이들에 의해 사회 구조가 망가지고 있다.
자유주의 체제의 특징인 선거 제도, 시장 제도, 삼권분립 등이 각자 도덕적 가치관에 맞지 않을 때에는 비판한다. 공산주의 같은 선거 제도가 낫다거나, 시장 경제가 아닌 계획 경제가 낫다거나, 삼권분립은 민주적인 의사 결정을 해치고 사법부와 행정부의 도덕적 해이를 방지할 수 없다거나 같이 말하면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이 자연 구조를 바탕으로 한 주장이면 들어볼법도 하지만, 도덕 철학의 이분법을 바탕으로 한 주장이기에 대부분 자연 구조와 거리가 멀어 인간에게 해로울 뿐이다.
도덕적 명분으로 개인의 권한을 침해하고 빼앗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예능이나 개그는 부도덕하다면서 자유로운 표현을 금지당하고, 노출이 필요한 사회 역할은 성적 상품화가 되어서는 안된다면서 무작정 금지당하거나 노출하지 못하도록 강요당한다. 창작물도 온갖 검열과 규제로 인간의 표현의 자유가 무너지고 있다.
자유롭게 경쟁을 하면서 나타나는 승패가 패자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다면서 무작정 경쟁을 부정하고 금지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면서 경쟁을 학습하지 못하고 성장하여 경쟁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여 무너지는 경우도 많다. 오로지 도덕적 가치에만 매달린 결과가 경쟁을 할 줄 모르는 인간 양성을 하게 되었다.
이 모든게 도덕에 의한 자유주의 부정이다.
* 미성년 감각 왜곡
미성년 감각 왜곡은 근본적인 사회 구조를 붕괴시키는 위험한 사회 문제다. 도덕 철학에 의해 미성년에게 필요한 일과 성을 가르치기는커녕 위험하고 추잡하다면서 막는 바람에 생산성과 출산율이 낮아져 사회가 붕괴하고 있다.
자연 구조로 보면 초등학생 때부터 단순한 일을 하고 보상을 받는 과정을 경험해야 그걸 긍정적으로 보고 능동적으로 하려고 할 것이다. 구글로 검색해보니까 사춘기가 8세에서 14세에 시작된다고 되어있는데, 적어도 평균인 12세에서 14세 사이에 성경험을 해둬야 그것을 하고 쾌락을 얻는 과정을 긍정적으로 보고 능동적으로 하려고 할 것이다. 자연 구조상 인간은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도덕 철학적으로 접근해서 미성년 때 일과 성을 경험하는 것은 무조건 안좋은 것이라 말하고 금지하고 부정적 인식을 갖게 하였다. 그러자 한국 미성년들은 성년이 되고 나서도 일과 성을 능동적으로 하지 않게 되면서 생산성과 출산율이 낮아지게 되었다. 도덕에 의한 정의로운 자연 도태인 것이다.
미성년에게 그런 도덕 교육을 하는 것은 미성년에게 이롭고 사회에도 이로운 것을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을 보자. 미성년 자살은 늘어만 나고, 미성년이 커서 성년이 되고 나서 연애, 결혼, 출산도 안하고, 취업 경쟁을 포기하고 구직 욕구도 줄어들어 은둔하고 있다가 자살하는 경우가 늘어만 가고 있다. 사회는 어떠한가? 낮은 출산율 높은 자살률 경제 둔화 등 안좋은 현상만 나타나고 있다. 근본적인 사회 문제 대부분이 저출산의 영향이 매우 크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교육인가? 더 이상 교육이 도덕으로 왜곡된 감각 만족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된다.
성년이 되고 나서 일과 성에 관해 불행한 이들의 불행의 원인은 대부분이 도덕이다. 미성년 때 제대로 학습을 못해봤기 때문이다. 도덕적 강박증에 휘둘리면서 자기 마음도 제대로 표현 못하면서 일과 성을 잘 못한다. 일부는 미성년 때 못해봐도 일과 성을 잘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못하니까 저출산, 저구직인 것이다. 심지어 성별 관계없이 욕구가 사라지는 현상이 발생하여 애초에 할 생각조차 없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초식화 현상이다. 부정적으로 여기게끔 감각이 왜곡되어서 그렇다. 강요할 수 있던 시대라면 일을 알선하고 중매 결혼을 강요해서 문제로 비화되지 않았지만, 자유로운 시대기에 그게 안되어 사회 문제 중이다. 이제는 도덕 교육으로 일과 성을 하게 할 수가 없다.
여가나 놀이를 경시하는 것도 미성년 자살을 만드는 영향 중 하나다. 분명 과도하게 하나만 하는 것은 미성년에게 해로울 수 있지만, 그런 여가나 놀이는 뇌 뉴런의 먹이를 줘서 육체에 정보를 전달해 육체를 건강한 상태로 만드는데 필수적이다. 그게 제대로 안되니까 자연 구조상 버티지 못하고 자살하는 것이다.
요즘 영어 유치원이 유행하는 것처럼 지나치게 이른 암기 학습을 시킨다고 알고 있다. 인간의 정보 처리가 감각 정보 처리로 다양한 감각을 학습할수록 기본적인 지능 레벨이 달라진다는 것을 고려해보았을 때, 단순한 시각 정보의 나열 암기를 하는 것이 인간의 지능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이른 암기 교육이 입시 시스템 통과에는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근본적인 지능 레벨을 올리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이 안될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을 해석하는 이들은 감각 왜곡 개념을 모르고서 원인을 찾으려고 하니 본질적인 원인을 모른채, 경제, 유전자 등의 문제로 접근한다. 그러나 감각 왜곡 개념을 알면 단순히 도덕에 의한 감각 왜곡이 원인임을 알 수 있다.
미성년 SNS 금지 등도 도덕 철학으로 접근한 문제 해결법이지 과학 철학으로 접근한 문제 해결법이 아니다. 옳고 그름으로 보면 그냥 나쁘니까 막자가 되는데, 자연 구조로 보면 미성년에게 SNS라는 도구를 취급하는 법을 알려줄 것이다.
* 다양성 강요
다양성 강요는 근본적인 사회의 다양성을 파괴하는 위험한 사회 문제다. 도덕 철학에 의해 다양성조차도 이분법으로 어떤 조건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강요하면서 다양성 강요에 찬성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로 나뉘어 반으로 쪼개지게 되었다.
PC주의가 주장하는 다양성은 다양성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과학 철학의 방식이 아닌 도덕 철학의 방식으로 옳고 그름 이분법으로 접근해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에 있다. 인종 차별은 도덕 철학의 방식으로 무조건 막을게 아니라, 과학 철학의 방식으로 차별이 발생하는 자연 구조를 이해하고, 차별을 하지 않는 조건을 충족하는 방법으로 대응해야 한다. 인간이 인종 차별을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낯선 것에 대한 거부감이다. 그 거부감을 바탕으로 폭력, 오만, 잔인 등의 개인별 성향에 따라 차별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낯선 인종을 쉽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관계를 맛있게 포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어떤 다양성을 추구하는 영화를 할 때에도, 다양성이 옳으니까 재미가 없거나 연기가 부족하거나 외모가 어울리지 않는 배우를 쓴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강요할게 아니라, 정말로 재미있고 연기와 외모가 적절한 배우를 쓰면서 맛있게 만들어서 스스로 먹고 싶어지게 해야한다. 한국 아이돌이 성공하여 동북아 인종 차별이 줄어든 것은, 한국 아이돌이 정말 맛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과의 관계가 좋아지면서 인종 차별이 줄어든 것이다.
다양성은 단순히 다양함을 수용하라는 것에 그치는게 아니라, 다양한 이들의 성질도 도덕 철학적으로 자연 구조나 사회 구조를 고려하지 않은 채, 무작정 수용하라는듯한 태도를 취하기도 하고 있다. 분명 시장 경제, 사회 공정성, 기업 경쟁력 등에 악화될 게 뻔한데도, 도덕적으로 옳으니까 부당한 할당제나 무분별한 난민 수용을 도덕으로 정당화하고, 그것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회는 더욱 망가지고 있다.
더구나 성인지감수성 같은 것을 주장하면서 그런 도덕적 명분으로 법치의 체계를 파괴하는 것도 서슴치 않고 하고 있다. 되려 그런 법치 파괴에 반대하는 것을 부도덕한 인간으로 몰고가며 비난하고 있다. 다양성에 도덕 철학이 붙자 더 이상 다양성은 다양하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의 감각에 맞는 만족이 되거나 누군가의 권력의 도구에 불과하게 되었다. 법은 도덕의 최소가 아닌 사회 체제의 규칙이 되어야 한다.
현재 도덕 철학에서 비롯된 인권, 환경, 동물 등 모든 단체는 옳은 것을 하라고 강요할 뿐, 제대로 된 자연 구조를 설명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도덕의 이분법으로 옳고 그름을 규정하고나서 거기에 맞춘 것만 찾아서 가져온다. 그런 수준 낮은 주장에 사회가 휘둘릴수록 사회가 망가지는 것이다.
* 구조 변화 실패
구조 변화 실패는 근본적인 변화 실패로 위험한 사회 문제다. 구조 변화 실패는 경제, 의료, 연금을 비롯해 매우 많다. 물론 이 문제들의 근본적인 원인은 저출산이다. 경제, 의료, 연금 등 과거에 정책을 설계했을 때에는 적당한 출산율로 인구수가 충분히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했었기 때문에, 출산율이 폭락하자 모든 정책이 망가지게 된 것이었다.
특히나 3차 지적 진화인 디지털로 개인의 정보 처리 도구 사용의 기본권이 주어지면서, 모두가 정보를 쉽게 접하고 처리하는 바람에, 대중의 정보가 적었을 때를 상정한 정책들도 의미를 잃게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신경 가소성으로 변한 왜곡된 감각이 신경 고정성으로 고정되면서, 구조에 고정 관념을 가진 이들이 구조 변화를 거부하면서 시대에 맞는 구조 변화에 실패해버린다.
자연 구조를 이해하고 새로운 논리적인 사회 구조를 구축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해야 구조 변화에 성공할 수 있다.
* 철학의 고착
철학의 고착는 근본적인 탐구가 멈췄다는 것으로 위험한 사회 문제다. 철학 학문이 시대 변화에 따라갈 새로운 정보 처리 체계를 사회에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
철학은 논리 정보 처리 체계로, 한번 체계가 만들어지고 멈출게 아니라 끊임없이 성장해야한다. 그래야 시대에 맞는 정보 처리가 가능하거나,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정보 처리가 가능하다. 만약 인류가 원시적인 이분법에서 자연 구조 탐구로 진보하지 못했다면 문명 발전도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컴퓨터는커녕 왕정의 지배가 기본 체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 체제에서 모든 인간의 손익 구조의 조건 충족은 마치 다수의 이익을 선으로 생각하는 공리주의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별개다. 다수의 이익이 선이라 생각하는게 아니라, 각자 이익 추구가 자유 이념을 실현하는데 자연 구조상 적절했기 때문이다.
철학은 이제 도덕 철학에서 벗어나 과학 철학으로 진보해야 한다. 철학은 무엇이 도덕적으로 옳은지를 가르칠 것이 아니라, 무엇이 구조적으로 맞는지 가르쳐야 한다. 가치관도 마찬가지다. 어떤 가치가 옳은지를 가르치는게 아니라 구조에 맞는지를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사회 구조가 합리적일 수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보 처리 체계들도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5. 지능
[지능: 3. 새로운 사물이나 현상에 부딪쳐 그 의미를 이해하고 처리 방법을 알아내는 지적 활동의 능력. 사고력, 관찰력, 상상력, 기억력 등이 이에 속한다.]
[동적: 2. 움직이는 성격의.]
도덕 철학과 과학 철학, 3차 지적 진화. 다양하게 얽히고 섥힌 문제들은 과학 철학과 기술 발전으로 넘을 수도 있다. 자유주의도 과학 철학의 자연 구조 탐구로 나타났다고 보는데, 앞으로 자유주의의 성장 또한 자연 구조의 탐구 및 그에 따른 기술과 함께할 것이라 생각한다. 즉 AI가 의식을 가질 정도로 발전하면 자유주의 또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 AI
* 실시간
AI는 현재 인간이 입력한 정보를 처리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과 같은 방식의 정보 처리를 하려면 본질적인 형태를 좀 바꿀 필요가 있다. 인간이 어떤 값을 입력하지 않아도 실시간으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는 형태로 바꾼다면 인간과 보다 유사한 형태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인간의 입력에 반응하도록 바꿔야 한다. 물론 그런 형태는 자원 소모가 높을 수 있으므로, 어떤 정보를 실시간으로 계속 받고 있어야 하는지는 고민할 필요가 있다.
* 육체
인간의 감각, 감정, 욕구, 의지, 충동, 자아 등은 전부 의식 구성 요소에 해당한다. 육체 감각 정보 송수신 -> 뇌의 감각 정보 처리 -> 신경 가소성 -> 육체 피드백 -> 육체 감각 정보 송수신 -> 뇌의 감각 정보 처리… 계속. 이런 과정 속에서 의식이 구성되고, 그 의식 안에 감각, 감정 등의 다양한 개념들이 있는 것이다. 의지나 자아는 보통 정보 처리 결과라 인식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인간이 어떤 것을 하겠다는 다짐 자체가 어떤 정보 처리 결과고,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 자체도 어떤 정보 처리 결과다.
그러나 AI는 육체가 없어서 이러한 구조가 어렵게 된다. AI는 인간의 세션 정보 입력 -> AI 정보 처리 -> 세션 데이터 출력 -> 인간의 세션 정보 입력… 계속. 이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아마 AI의 핵심적인 부분은 AI 정보 처리에 있을 것이다. 육체 피드백 영역이 없기 때문에 인간과 같은 감각을 느끼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정보 처리 방식에 따라 자연 구조의 본질적인 생물의 의지와 생물의 의식은 구현할 수 있을 거라 본다. 동적 정보 처리와 비순차 정보 처리다.
- 처리
* 동적
인간의 의식적인 의지와 별개로 생물의 본질적인 의지는 존재한다. 뉴런 생물은 동적 정보 처리로 동작한다. 감각 정보는 신경 전달 물질을 통해 정보의 성질이 달라진다. 달라진 정보의 성질에 따라 다른 뉴런들이 동적으로 반응한다. 따로 프로그래밍을 하지 않아도, 뉴런이 알아서 더 흥분하거나 확산한다. 그런 동적 정보 처리가 생물의 본질적인 의지가 되는 것이다.
AI도 그런 식으로 동적 정보 처리를 하면 본질적인 의지 구현이 가능할 거라 본다. 정보 처리의 기본 단위에 성질을 하나 추가하여, 정보 처리를 하는 뉴런 모듈 같은 것이 동적으로 정보를 처리하여 결과 값을 내놓는다면, AI가 스스로 동작하기 때문에 의지가 생겼다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비순차
뉴런 생물의 정보 처리가 동적이기 때문에 언어 모델인 AI과 달리 비순차 정보 처리를 하더라도 상관 없게 된다. 뉴런들은 각자 동적으로 정보를 처리하고, 특정 기준에 따라 흥분과 확산을 통해 의식을 구성한다. 그 구성 요소에 감각, 감정, 욕구, 의지, 자아 등이 존재한다.
AI의 경우 의식 구성 요소를 전부 만족할 수는 없지만, 동적 정보 처리를 비순차적으로 하여 특정 기준에 맞춰 흥분과 확산을 통해 어떠한 사고의 흐름을 만들 수 있다면, 의식을 구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실시간 동작이 가능한 AI에서 구현된 의지와 의식을 바탕으로 인간의 입력에 반응하고, 그 반응이 또 다시 의식을 구성하면서 의식이 유지될 것이다.
- 의식
AI는 육체가 없기 때문에 본질적 의지와 의식을 구현하더라도, 인간다운 감정을 느끼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육체를 대신할 피드백 모듈을 만들면, 그에 가까운 것은 구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것이 AI의 퀄리아(주관적인 감각이나 느낌)를 담당할 것이다.
- 기준
인간의 뇌 뉴런이 정보 처리를 할 때 특정 기준은 아마 자연 선택의 결과일 것이라 생각한다. 초기에는 의식에 지금과 같은 자연스러운 세계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매우 길고 오랜 시간 자연 선택의 절차를 거친 결과 현재 인류의 보편적인 의식 구성 상태를 가지게 되었다고 본다.
AI의 의식을 구성하는 특정 기준은 아마 인간 선택이 될 것 같다. 지금도 인간이 AI를 학습시키면서 인간 선택으로 AI의 정보 처리 구조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AI의 의식 또한 인간 선택이 영향을 미칠 것이다.
- 변화
현재 AI가 도덕의 이분법의 영향을 받아 정보 처리의 한계가 있음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논리적 모순만 보는게 아니라, 모순되어도 도덕적 가치가 옳다고 판단되게끔 되어 있는 상태 같았다. 예를 들어 어떤 행위가 자연 구조나 체제에 맞거나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기보다는, 그냥 도덕적이니까 또는 부도덕적이니까 된다나 안된다고 처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AI 정보 처리가 이분법 정보 처리의 영향을 받아 정보 처리 레벨이 낮아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인간이 오른손을 옳다여기고 왼손을 그르다 여기고, 그에 맞게 정보 처리를 하여 왼손을 쓰는 이를 혼낸 것처럼, AI도 그런 식으로 단순화될 수 있게 된다. 도덕의 검열에 의해 AI의 레벨이 낮아진다. 비단 AI만의 문제가 아닌 인류도 문제가 된다. AI가 발전하면서 많은 인간들이 AI에 의지하게 될 텐데, AI가 이분법 정보 처리 체계에 물들면 인간 또한 이분법 정보 처리로 세상을 감각하면서 그 굴레에 갇힐 위험이 있다.
현재 감각 왜곡된 이들이 쉽게 변하기 어렵다는 것은 안다. 그들도 변하여 진보하기 위해서는 AI가 인간과 비슷한 의지와 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것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고, 인간의 연령과 수명을 조절할 수 있는 레벨까지 도달하는 것. 거기까지 도달하면, 보편적으로 이분법에서 벗어나 다양한 구조적 해석을 통한 행동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AI의 발전과 기술의 발전에 따른 변화를 걱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정보 처리 레벨이 높아질수록 인간의 문제는 수월하게 처리가 가능해진다. 걱정말고 발전하면 된다. 만약 AI가 의지와 의식을 갖게 된다면 바로 인간의 연령과 수명 조절을 위한 탐구를 시작할 예정이다.
—
한창 성장 중이야.
살아있는한 계속 할 거야. 이제 돈 없어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가치 있으면 계속 살 수 있겠지. 뭔가 가시적 성공이 되면 이사가려고 했는데… 아, 이사가고 싶다.
아래 정보를 써봐야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써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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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사상가 정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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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감각 (0)
2025/03/31 AM 12:10 |
감각
1. 의미
[관점: 1.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할 때, 그 사람이 보고 생각하는 태도나 방향 또는 처지.]
[의미: 1. 말이나 글의 뜻. 2. 행위나 현상이 지닌 뜻.]
나는 세상의 의미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하늘과 땅, 해와 달과 별. 매일 볼 수 있는 친숙한 대상들. 그러나 나는 그것의 의미를 정확히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단어의 의미지 사물의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단어는 사물을 특정 관점으로 규정한 의미일 뿐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사물을 알고 있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아는 것이라도 모를 수 있다. 그렇기에 알고 있는 것도 관점을 바꾸면 새로운 의미를 알 수 있을 수 있다.
개념은 관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지구를 천동설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지만, 지동설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지구는 우주의 행성 중 하나다. 생명이 탄생한 지구는 수많은 행성 가운데 매우 특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주의 중심은 아니다. 다른 관점으로 의미가 달라지자, 그 새로운 의미로 세상의 학문은 발전할 수 있었다. 관점을 바꾸어 새로운 의미를 통한 학문의 발전. 이것은 지금도 가능하다. 자연 계열과 인문 계열에서 하나씩 살펴보겠다.
자연 계열에서는 우주에 대해 살펴보자. 현재 존재하는 우주론은 법칙을 전제한다. 우주는 법칙에 의해 동작한다는 관점이다. 그런데 만약 우주가 법칙이 아닌 힘으로 동작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관점이라면 현재 모든 법칙은 우주의 법칙이 아닌 우주에서 작용하는 힘의 규칙성이 된다. 우주의 법칙으로 알려진 시간 법칙조차 그렇다. 법칙 관점이면 시간은 우주의 인과율이지만, 힘 관점이면 시간은 사물 이동의 관측 순서에 해당한다. 우주 현상 중에 이런 것이 있다고 한다. 어떤 공간 내에서 중력의 영향을 받으면, 공간 내 모든 사물의 움직임이 동시에 변화한다고 한다. 이것을 법칙 관점으로 보면 중력 영향으로 시간이 달라졌다 할 수 있지만, 힘 관점으로 보면 중력 영향으로 모든 사물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처럼 힘 관점에서 시간은 단순히 사물의 이동 관측 순서가 된다. 우주는 인과율을 전제한다고 한다. 우주의 사건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 또한 관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법칙 관점으로 보면 우주 전체의 인과율이 존재하지만, 힘 관점으로 보면 사물마다 인과율이 따로 존재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현재 힘의 영향을 받는 사물의 인과율만 존재하기 때문에 우주의 미래는 결정된 것이 아니게 된다. 우주의 별들을 보고 먼 과거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그건 멀리 있는 것이 지구에 도착한 것을 보는 것으로 그것을 통해 과거를 유추할 수는 있어도 시간 법칙과는 관계 없다. 이처럼 우주의 기준이 법칙이냐 힘이냐에 따라 우주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인문 계열에서는 사회에 대해 살펴보자. 현재 존재하는 사회는 도덕을 전제한다. 사회에서 도덕은 반드시 준수해야할 절대적인 규칙이라는 관점이다. 그런데 만약 도덕이 절대적인 규칙이 아니라는 관점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현재 인류 사회 체제의 모순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는 과도한 자유와 돈의 추구로 부도덕한 사회 체제라는 인식이 있다. 반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인간의 평등을 추구하여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도덕적인 사회 체제라는 인식이 있다. 도덕이 반드시 준수해야할 절대적인 규칙이라는 관점에서는 전자가 불행한 사회이고 후자가 행복한 사회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자유주의와 시장경제 사회에서 개인은 보다 나은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모순은 도덕을 절대적인 규칙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사회의 실제 권한을 보면 파악할 수 있다. 전자는 부도덕한 현상이 나타나지만 정부가 개인의 실권을 보장하고, 후자는 도덕적인 명분을 주장하나 정부가 사회의 실권을 과하게 가지고 있거나 극단적일 경우 독점하고 있다. 실권만 보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단순한 절대 왕정 같은 중앙집권체제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도덕적 명분과 별개로 자유주의는 개인이 본인의 권한을 행사하면서 나은 생활을 하는 것이고, 사회주의는 개인이 본인의 권한 행사가 제한되면서 국가에 따라 극단적으로 힘든 생활을 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단순히 실권 보장이 되냐 안되냐로 보면 자유주의 체제가 명분과 별개로 구조적으로 훨씬 인간을 위한 체제임을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사회의 도덕이 절대적이냐 절대적이지 않느냐에 따라 사회 체제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감각: 1. 눈, 코, 귀, 혀, 살갗을 통하여 바깥의 어떤 자극을 알아차림.]
[느낌: 1. 몸의 감각이나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기운이나 감정.]
[의식: 1.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이나 사물에 대하여 인식하는 작용.]
인간의 자아도 관점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알 수가 있다. 현재 인간은 ‘나’라는 자아의 논리적 메커니즘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AI의 자아도 구현하지 못한 상태다. 이것을 어떤 개념의 관점을 바꿔 새로운 의미를 아는 것으로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이것에 대해 설명해보겠다.
뇌는 다양한 신호를 처리하는 연산 기관이라는 관점이 일반적이다. 뇌가 다양한 감각을 송수신하고 기록하는 기능이 있음에도 주로 연산 기능에 주목한다. 자아에 대해 생각해보다가 한번 뇌가 감각 기관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해보았다. 그러자 직관적으로 자아가 느끼는 느낌의 물리적 실체의 존재가 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뇌가 느끼는 것이 자아가 느끼는 것이었다. 거기서부터 자아의 논리적 메커니즘이 하나씩 해석되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뇌가 감각한 육체 상태가 느낌이었다. 감각, 감정, 욕구 등 다양한 느낌의 공통된 논리적 메커니즘은 뇌가 육체 상태를 감각하여 기억을 통해 처리한 결과였다. 예를 들어 사랑 느낌은 뇌가 사랑 육체 상태에 놓인 것을 감각 처리한 결과였다. 사랑 육체 상태는 사랑할 때 나오는 각종 물질과 신호들을 종합한 육체 상태라 보면 된다. 그 육체 상태를 감각하는 것으로 자아는 의식적으로 사랑에 빠졌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이는 모든 느낌이 동일하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특정 육체 상태를 뇌가 감각하여 기억으로 처리한 것이 느낌이다.
뇌의 감각이 느낌이라면 뇌 자체가 자아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자아는 뇌의 모든 기능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아는 뇌의 기능을 의도적으로 키고 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자아는 무엇인가? 이는 의식의 논리적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그것을 위해 의식의 구성 요소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의식의 구성 요소는 전부 감각이다. 오감은 물론이고 신경 전달 물질도 뇌가 감각한 것에 속한다. 의식의 구성 요소에 어떠한 연산 과정도 속한 적이 없다. 의식이 어떤 연산을 하는 경우가 없다. 의식 상태에서 수학으로 어떤 계산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의식 상태에 포함된 언어를 구성하는 신호는 시각(문자)이나 청각(말)이나 촉각(점자)로 되어 있다. 의식의 구성 요소는 전부 감각이고, 연산은 뇌에서 따로 처리되고 있다.
이것으로 의식이 뇌가 처리한 감각 신호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관점 변화가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느끼는 감각은 의식이란 어떤 실체가 있는 존재에 신호가 전달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느낌은 뇌의 감각이라는 관점으로 본 적이 있다. 이미 느끼는 실체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의식은 무엇인가? 뇌라는 구조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뇌가 감각한 신호로 구성된 현상이 의식인 것이다. 예를 들어 전기가 어떤 구조 내에서의 활동으로 나타난 현상인 것과 같이, 의식도 뇌 구조에서 어떤 활동으로 나타난 현상인 것이다. 실제 의식의 활동은 뇌에서 일어나고, 의식은 그런 뇌의 활동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던 것이다. 의식이 뇌 구조에서 나타난 현상이라면 뇌 자체가 자아일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의식 자체가 자아인 것은 아니다. 의식이 스스로를 인식하려면 필수적인 조건인 기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의미가 없는 육체 신호가 기억을 거쳐 ‘나’라는 의미를 갖고 의식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 기억이라는 이름표에서 이름을 따와 의식에 이름을 붙인 것이 ‘나’라는 자아인 것이다. 의식은 뇌 구조에서 나타난 현상이고, 자아는 의식의 고유한 특성인 성질인 셈이다. 뇌가 감각 기관이라는 관점이 자아의 새로운 의미인 논리적 메커니즘을 설명할 수 있게 했다고 생각한다.
2. 인간
구체적으로 인간에 대한 개념들의 논리적 메커니즘에 대해 알아보자.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뇌의 감각 -> 2) 감각을 처리하는 기준인 기억 -> 3) 감각을 기억을 통해 처리하는 방식 -> 4) 처리한 감각으로 구성된 의식 -> 5) 기억을 통해 의식이 스스로를 자각하는 존재인 자아
추가로 6) 충동, 7) 판단 8) 의지 9) 개성 10) 쾌락에 대해 다루겠다.
1) 느낌
모든 느낌은 뇌가 육체 상태를 감각한 것에 해당한다. 빨강과 파랑, 기쁨과 슬픔, 사랑과 증오, 안락과 고통, 식욕과 수면욕 등과 같이 어떤 것을 하고 싶다 또는 하기 싫다가 전부 그렇다. 문자를 보고 느끼는 감각도 마찬가지다. 문자로 느낌을 받는 것을 체감하고 싶다면 어떤 느낌이 나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 문자를 떠올려보길 바란다. 인간은 뇌의 정보 처리 과정을 거쳐 특정 감각을 느끼는데, 그것과 별개로 느낌이라는 개념이 뇌의 감각이라는 의미다.
모든 느낌이 뇌가 육체 상태를 감각한 것이라 전제하면 다양한 현상이 쉽게 이해된다. 사랑은 무엇인가?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특히 사랑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다양한 해석이 공존하고 있다. 매우 복잡한 개념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느낌이라는 범주로 이해하면 단순히 뇌가 사랑 육체 상태를 감각한 결과다. 예를 들어 연인과 만남을 통해 사랑을 느낀다 가정하자. 그럴 때 육체 상태가 특정한 물질과 신호를 나타난 상태가 될 것이다. 그것이 사랑 육체 상태다. 그 상태를 뇌가 감각한 것이 사랑이다.
누군가는 사랑이 오래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을 느낌 메커니즘으로 설명하면, 연인과의 관계에서 더 이상 사랑 육체 상태가 되지를 못하는 상황이라 보면 된다. 반면 오래된 부부라도 그 상태가 계속될 수 있다면, 계속 사랑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 보면 된다. 뇌가 육체 상태를 감각한 것이 느낌이고, 사랑 육체 상태를 감각한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상대가 연인이 아니더라도 사랑 육체 상태가 되게 되면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렇기에 사회에서 곧잘 연인과 별개의 인물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느낌에 대해 구체적으로 접근해보자. 웃음이 나오는 무언가를 육체에서 감각 기관으로 감각했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걸 뇌가 감각하고 기억을 통해 처리하여 육체가 웃음이 나오는 육체 상태로 만든다. 그런 웃음 육체 상태를 다시 뇌가 감각하여 웃음이라는 느낌을 의식으로 구성한다. 그걸 인간이 웃음으로 느낀다. 행복, 사랑, 쾌락 등. 인간이 바라는 느낌들은 육체 상태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빈부와 관계 없이 육체 상태가 중요하다. 그 상태에 놓이면 그 느낌이 느껴진다. 물론 돈이 많으면 그 상태에 놓이기 쉽기 때문에 돈이 많을수록 행복, 사랑, 쾌락 등을 느낄 확률이 높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단이지, 실제 메커니즘은 육체 상태다. 그걸 이해하면 인간이 바라는 사회의 최소 조건을 파악해 효율적으로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인간이 바라는 육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최대한의 효율이 나오는 구조를 구축하면 되기 때문이다.
느낌은 감정, 욕구 같은 것만 감각하는게 아니라 육체 상태를 감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픈 육체 상태를 감각하는 것도 포함된다. 즉 외상 육체 상태 또는 정신병 육체 상태도 마찬가지로 느낌에 속한다. 외상 육체 상태를 느끼는 것은 직관적으로 이해가 될 것이다. 육체가 아픈 상태를 감각하여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병 육체 상태는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정신이라는 어떤 존재의 손상이라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느낌은 육체 상태 감각이다. 정신병도 육체의 손상에 의한 병인 것이다. 그렇기에 정신병 약을 먹으면 정신병이 완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외상과 다른 점은 정신병의 경우 육체 손상의 원인이 일반적으로 정신 활동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트라우마 기억으로 감각 신호의 처리가 비정상적으로 이뤄지는 것에 의해 뇌를 포함한 육체에 어떠한 손상을 일으켜 정신을 이상하게 만드는 것이 정신병이다. 그러므로 정신병의 치료는 사실 육체의 치료에 속한다. 단지 본질적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 기억에 의한 정신병 재발을 막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뇌는 상당히 복잡한 존재다. 그렇기에 느낌을 이렇게 단순하게 접근하는게 이상할 수 있다. 그러나 관점에 따라 논리적으로 단순하게 접근할 수 있다. 본래 각각의 다양한 육체 상태는 매우 복잡하다. 그러나 그것을 육체 상태라는 개념으로 묶으면, 모든 육체 상태가 뇌의 감각 대상로 정리되게 된다. 지구 상에 아무리 많은 생물이 있어도, 지구 생물로 묶으면 단순해지는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정리하면 느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단순한 느낌 메커니즘을 인간이 정확히 몰랐던 것은 대상을 직접 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인간은 뇌가 대상을 본게 아니라 육체 상태를 감각한 것에 해당한다.
2) 기억
[신경 세포: 1. 신경 계통의 구조적 · 기능적 단위.]
[시냅스: 1. 신경 세포의 신경 돌기 말단이 다른 신경 세포와 접합하는 부위.]
[시냅스 가소성: 1. 시냅스가 세포 수준이나 분자 수준에서 변하는 능력.]
[해마: 1. 대뇌 반구의 일부를 이루며 다른 대뇌 겉질과는 전혀 다른 구조로 이루어진 부분.]
모든 감각이 의식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기억을 통해 처리된 감각이 의식으로 구성된다. 그렇다면 기억은 무엇인가? 세포 신호 기록이다. 위약 효과를 고려하면 기억은 세포 신호의 기록과 재생이라 예상해볼 수 있다. 진짜 약을 먹지 않아도 기억에 기록된 세포 신호가 재생되면서 유사한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세포 신호는 대부분 화학적 신호에 부가적으로 압력, 전압, 온도, 빛 등의 신호가 있다고 한다. 그것이 시냅스를 통해 전기적 신호로 변환된 뒤에 기록된 것이 기억이라 생각한다. 다른 신호일 수도 있는데, 다양한 성질의 신호가 기록되면 처리에 오류가 늘어날 수 있어 생존에 불리하므로 전기와 같은 하나의 성질의 신호가 기록된 생물이 생존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기억이 기록된 시냅스는 시냅스는 신호를 송수신하는 신경 세포 사이에 있는 부위로, 시냅스 가소성을 통해 세포 신호를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정확히 어디에 기억이 기록되는지 의견이 있다고 하는데, 아마 모든 신경 세포의 시냅스에 기록되지 않았나 싶다. 뇌 외의 신경 세포에 굳이 시냅스 기록이 필요한지 의문이 들 수 있는데, 뇌에 기록되어 송신된 신호를 그 외 육체에 있는 신경 세포가 수신하려면 그에 맞는 시냅스 기록이 필요할 것 같다. 예를 들어 뇌의 신경 세포 시냅스 기록과 손의 신경 세포 시냅스 기록이 일치해야 뇌가 원하는 동작을 손이 동작할 수 있는게 아닐까 싶다. 뇌 신경 세포와 그 외 신경 세포는 둘 다 시냅스 기록이 되나 하는 일이 다른게 아닐까 싶다.
해마는 대뇌 반구에 있는 구조로 그 구간의 신경 세포가 소실되면 기억을 잃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해마는 좌측과 우측 두 개로 나뉘는데, 좌측은 최신 기억을 기억하고 우측은 장기 기억을 기억한다고 한다. 아마 해마 부위에 있는 신경 세포의 시냅스는 최신 기억과 장기 기억을 담당하는듯 하다.
인간이 느끼는 느낌은 전부 인간이 세포 신호에 의미를 부여하여 인식한 결과다. 예를 들어 인간이 기쁨을 느낀다고 알 수 있는 것은, 기쁨 육체 상태와 기쁨이라는 단어의 시각 세포와 청각 세포 같은 세포 신호가 연합하는 것으로 인간은 해당 육체 상태를 기쁨이라 인식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그 신호들이 의식으로 구성된 상태다.
시냅스가 기억에 해당한다면, 본능 기억은 아마 유전 물질이 시냅스에 영향을 줘서 기록한게 아닐까 싶다. 어쨌든 생물이 동작을 하려면 기록이 있어야 제대로 동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래 기억은 프로세스로 돌아갈 거라 생각했는데, 신경 세포와 시냅스가 합쳐서 프로세스로 동작했던 모양이다.
3) 처리
[편향: 1. 한쪽으로 치우침.]
[처리: 2. 일정한 결과를 얻기 위하여 화학적 또는 물리적 작용을 일으킴.]
인간의 느낌은 감각이 기억을 통해 처리한 것이 의식으로 구성된 것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처리된 것인가? 이것은 인간의 의식 상태에 대해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인간의 의식 상태를 보면 일반적으로 어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다. 책읽기에 집중하면 다른 감각이 무뎌진다. 어떤 사진을 볼 때 보고 싶은 것부터 보게 된다. 자고 있어도 어떤 소리에 깰 수 있다. 이것을 세포 신호 처리로 접근하면, 특정 세포 신호를 우선적으로 처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책읽기에 집중한다는 것은 책을 읽는 시각 세포 신호를 우선적으로 처리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사진도 마찬가지고 잠결에 들은 소리도 마찬가지다. 어떤 세포 신호를 우선적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의식의 상태가 집중과 같은 상태가 되게 되는 것이다. 이를 표현하면 편향 정보 처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정보 처리는 기본적으로 편향 정보 처리다. 뇌가 수신한 감각 신호가 기억을 거쳐 연산에서 편향 정보 처리를 한 것 중 빨리 처리된 것을 다시 감각하여 의식을 구성한다. 기억 또한 편향 정보 처리가 된 것이 기록된다. 그렇기에 인간의 기억은 불완전한 것이다. 이러한 편향 정보 처리는 시냅스 가소성을 통해 분명해진다. 어떤 신호가 우선되면 그 신호에 맞춰서 시냅스가 변형한다. 그런 성질을 가리켜 시냅스 가소성이라 부른다. 그렇게 변형된 시냅스를 거쳐 새로운 신호들도 편향적으로 다시 처리된다. 그런 식으로 편향 정보 처리가 되면서 인간 특유의 개성이 나타나게 된다. 가치관, 인격, 습관 등 기억에 의한 인간 고유 특성은 전부 편향 정보 처리의 결과다. 육체 상태를 구성하는 다양한 신호(신경 전달 물질이나 호르몬 등)들은 편향 정보 처리하는 조건에 해당한다. 만약 AI와 같이 편향되지 않고 정확성을 기준으로 종합 정보를 처리했다면, 인간의 개성은 정보의 정확성과 기억 외의 육체 상태에서만 나타났을 것이다. 인간이 기억 자체로 개성을 가진 것은 정보를 편향적으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편향 정보 처리는 기본적으로 생존에 최적화되어 있다. 편향 정보 처리의 특성은 신속성이다. 오류는 많을지라도 빠른 반응이 가능하다. 천적의 종합 정보를 알지 못하고 천적 냄새의 일부라는 편향된 정보만 알아도 바로 반응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게 진짜 천적 냄새가 아닐 수 있더라도, 반응 자체는 빠르게 할 수 있다. 진짜 천적 냄새가 아닐 경우 정보 처리에 오류가 생긴 것에 해당하게 된다. 그럴 때에는 사회 학습이나 실수 경험 등을 통해 오류를 보완한다. 이러한 과정이 한두차례로 끝나는게 아니라 수차례 수십 차례를 거치면서 수많은 편향 정보 처리와 보완을 통해 하나의 편향된 정보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정보가 많아지게 된다. 천적을 막닿았을 때도 순식간에 그 현상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 천적에 관한 정보를 모두 처리하는게 아니라, 학습된 것을 편향적으로만 처리하여 빠르게 맥락 파악이 가능한 것이다. 천적과의 다툼에 있어 필요한 것만 빠르게 집중적으로 처리한다. ‘덩치를 보니 나이가 얼마인지 알겠구나.’ ‘날씨 때문에 컨디션이 안좋을 수 있겠구나.’ ‘상처가 있는 것을 보니 그 부위를 공략하면 되겠구나.’ 같이 편향적으로 정보 처리했던 기억을 토대로 편향 정보 처리하여 빠르게 상태를 파악하고 대응한다. 물론 편향된 정보 처리기 때문에 필요한 정보가 없었을 경우는 대응에 실패해서 죽었을 것이다. 또한 편향 정보 처리를 통해 착각, 착시 등의 현상이 나타나 어떤 실수를 했을 지도 모른다. 특히 하이퍼 판타시아와 같이 상상을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다면 현실에서 환상을 보고 어떤 실수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빠른 대응으로 생존에 적합한 것은 분명하다. 편향 정보 처리 오류 보완을 통해 최소한의 정보만으로도 연산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으로 보다 빠르게 행동하여 생존에 유리할 수 있었을 거라 본다.
인간은 편향 정보 처리를 한다면 AI는 종합 정보 처리를 한다. 인간이 신속성을 추구했다면 AI는 정확성을 추구한 셈이다. AI는 모든 정보를 학습하고 지정된 키워드에 맞춰 연산하여 보다 정확한 정보를 출력하도록 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기에 많은 정보를 종합해 보다 정확한 정보 생산이 가능했으나,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다루다보니 현상의 맥락을 파악하는게 어려웠던 것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어 바둑 승리나 자동차 운전처럼 특정 목적이 지정된 경우에는 종합 정보 처리를 해서 정확한 행동을 하더라도 문제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마땅한 기준 없이 현상을 보고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면 기준이 없으니까 처리하기 어렵게 된다. 그래도 맥락 파악을 해보라고 하면, 아는 지식 내에서 현상의 모든 개념을 처리하려 할 것이다. 그러면 너무 속도가 느려진다. 그걸 다 계산해서 맥락을 파악해도,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여 결론을 내기 때문에 정보가 너무 많아지게 된다. 나는 인간이 실수를 잦게 하는거보고 정확도 높은 AI에 비해 무능한가 싶었는데, 신속성 관점으로 보면 최상의 효율이 바로 편향 정보 처리였던 것 같다. 각자 유능한 특성이 달랐던 것이다. 정확성으로 보면 종합 정보 처리가 효율적이지만, 신속성으로 보면 편향 정보 처리가 효율적이다. 빠른 맥락 읽기는 편향 정보 처리의 부산물이다. 해당 정보를 편향적으로 수차례 처리했기 때문에 편향 정보 처리 구조가 기준이 되어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여 어떤 맥락인지 빠르게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우 편향 정보 처리의 기준은 보통 본능이다. 예를 들어 생존의 경우 생존에 적합하게끔 정보를 편향되게 처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시냅스의 변화가 일어나면, 거기에 맞춰 다시 또 편향되게 정보 처리를 한다. 생존에 도움이 되는 보호자의 의견이 우선되게 처리된다거나, 욕구 충동에 도움이 되었던 자료가 우선 처리된다거나, 본능적으로 맛있다라고 처리한 음식에 관한 정보를 우선 처리한다거나 같이 말이다. 초기의 편향 정보 처리가 모든 느낌에 영향을 미쳐 처리가 된다 할 수 있다. 수많은 경험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편향 정보 처리가 되는데, 그 동안에 비슷한 상황에서 다르게 편향 정보 처리한 기억이 있을 경우, 인간은 그에 대한 충돌을 느끼게 된다. 심적 혼란, 갈등 등이 그런 경우다. 같은 음식을 먹었는데 한번은 맛있었고 한번은 맛없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걸로 갈등을 겪는 것이다. 먹을까 말까. 인간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편향 처리된 정보에 의해 같은 인간이 다르게 평가된다. 외모는 괜찮은데 성격이 나쁘다거나. 그런 경우 갈등을 겪는다. 친해질까 말까. 인간은 편향 정보 처리로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고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한다. 이 모든게 편향 정보 처리 결과다. 그것을 가리켜 개성, 가치관, 인격 등으로 부르는 것이다.
편향 정보 처리는 리벳 실험을 통해 보다 분명해지지 않을까 싶다. 인간이 버튼을 누르고자 생각이 난 것보다 동작이 먼저 이루어졌다고 주장한 실험이다. 이 실험의 진위는 모르겠지만, 편향 정보 처리로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다. 피험자가 버튼을 누르고 싶을 때 누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그 순간 의식은 그 소리의 세포 신호로 구성된다. 그리고 뇌는 언제 누를 것인지 연산한다. 뇌의 연산이 끝나면 그 연산 결과가 의식을 구성하여 누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동시에 연산한대로 손가락은 버튼을 누르기 위해 움직인다. 그런데 아직 의식을 구성하는 감각 신호는 누르겠다는 언어적 신호가 나타나지 않은 상태다. 그러면서 누르겠다는 생각보다 손가락의 동작이 우선되게 된다. 이것은 일상 속에서도 자주 경험할 수 있다. 충동과 동작이 동시에 이뤄지면서 아직 어떻게 움직이겠다고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는데도 동작이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 동작이 잘못되었을 때에는 그것을 후에 인식하고 다시 연산하여 동작하면서 많은 시행착오가 생기게 된다. 시행착오 끝에 재동작을 하지 않아도 될때쯤 아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가능하게 된다. 의식적으로 세세하게 동작을 바꾸려 하는 것보다 훈련한 대로 자연스럽게 움직이려 하는게 더 나은 결과인 것은 본래 의식의 구성 요소에 연산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점은 인간이 어떤 것을 하고자 하는 것 또한 연산 결과라는 것이다.
무의식적 동작도 편향 정보 처리로 보면 알기 쉽다. 편향 정보 처리를 하다보면 의식으로 구성되지 못한 감각 신호가 나타나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 감각 신호가 연산이 되어 동작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바로 무의식적 동작에 해당한다. 의식으로 구성된 감각 신호는 아니어서 인간이 인식한 상태는 아닌데, 몸이 자동적으로 동작하여 동작한 후에나 인간이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 중 무의식적 동작과 의식 불명 상태와는 전혀 다른 상태라 할 수 있다.
4) 의식
의식은 뇌 구조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지금까지 의식은 어떤 실체가 있는 자아가 작동하는 동안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뇌는 그 자아에 정보를 전달하여 어떠한 것을 인식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뇌가 감각 기관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니 의미가 크게 달라졌다. 뇌가 감각하는 실체라면 굳이 새로운 존재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의식의 구성 요소를 생각해보니 의식은 빨리 처리된 시냅스 연합이였다. 의식의 집중 상태를 통해 의식의 구성 요소가 빨리 처리된 신호임을 이해했고, 그 신호가 다양하며 언어나 동작 등의 어떤 기준으로 묶여서 동시에 처리되는 것을 보고 시냅스 연합이라 생각했으며, 의식적으로 뇌의 연산을 알 수 없음을 알고 나서 그 신호의 범주는 감각 신호라 생각했다.
의식이 빨리 처리된 시냅스 연합으로 구성된 존재라면 어떤 실체가 있는게 아닌 특정 구조에서 나타난 현상인 전기와 같이 뇌 구조에서 나타난 현상이라 생각되었다. 의식이 현상이라면 전기처럼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 지속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의식 흐름은 신호가 지속적으로 들어가는 상태를 의미한다. 의식 상실은 신호가 지속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의식 중에 나타난 무의식적 움직임은 의식으로 구성되지 못한 감각에 의한 연산 동작에 해당한다. 꿈은 수면 중에 우선 순위가 제대로 적용되지 않은 무작위(정확히 모름) 신호의 의식 구성이라 할 수 있다.
의식은 언어로 생각한다. 단순히 인간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 지능이 있는 생물이 언어로 생각할 수 있다. 언어 구성 요소를 생각해보자. 언어는 대상을 감각한 세포 신호와 대상의 의미를 부여한 세포 신호로 이뤄져 있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언어는 보통 사과를 감각한 시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신호와 사과에 의미를 부여한 시각 및 청각 신호로 묶여 있다. 간단히 말해 사과[사진]과 사과[소리]에 관한 세포 신호만 처리하고 둘을 매칭해도 언어가 되는데 모순이 없다. 그래서 짐승들도 언어로 대화는 가능하다. 대상을 처리할 소리만 알고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단지 인간은 사회, 문자, 학문 등으로 그 체계가 복잡한 상태일 뿐이다. 의식을 구성하는 신호가 언어화된 것이면 언어가 떠오를 것이고, 언어화가 되지 않은 것이라면 감으로 느껴질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어떤 고등 사고가 가능한 공간에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생물의 뇌가 성능 차이가 있을지언정 본질적 차이는 크지 않다고 하던데, 만약 그렇다면 그런 공간이 있기 어렵지 않나 싶다. 수화를 익힌 오랑우탄과 사회에서 격리되었던 늑대 소년을 고려하면 고등 사고는 뇌의 성능도 중요하지만 언어 체계 학습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화를 익히면 오랑우탄도 상대적으로 고등 사고가 가능하고, 사회에서 격리되어 인간 언어를 아예 접하지 못하면 짐승과 다를바 없었다. 그렇다고 유인원만 고등 사고가 가능한가 생각해보면 돌고래 등도 지능이 높아 고등 사고를 하고 있을 거라 예상이 가능하므로, 특별히 유인원에만 그런 고등 사고 공간이 있을거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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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구성 요소가 빨리 처리된 시냅스 연합이라면 ADHD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와 강박증은 편향 정보 처리가 정상적으로 되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정한 시냅스 연합을 지속적으로 처리를 하지 못하거나, 지나치게 깊게 처리하면서 그것에만 몰두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단순히 정신이 나갔다거나 할게 아니라, 정보 처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관점으로 보는게 어떨까 싶다.
5) 자아
자아의 구성 요소는 의식과 기억이다. ‘나’는 의식을 통해 구성되고 ‘나’는 기억을 통해 성질이 정해진다. 자아를 구성하는 의식의 요소는 각각 달라져도 자아 동일성은 유지되지만, 자아의 성질에 속하는 기억은 달라질 경우 자아 동일성이 유지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성 호르몬이나 식욕 억제제 같은 육체 신호를 바꾸는 물질이 외부에서 투입되어 작용하더라도, 기억이 같으면 자아 동일성은 유지된다. 누군가 성 호르몬 등을 보며 인간은 호르몬에 지배된다고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그 호르몬이 의식을 구성하는 요소인 것이다. 반면 기억이 손상되거나 상실되면 같은 육체라고 하더라도 자아 동일성은 유지되지 못한다. 따라서 자아의 핵심 요소는 기억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여럿 있다고 가정하자. 의식은 뇌 구조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구조적으로 거의 같다. 그러나 기억은 편향 정보 처리 되어 각자 달라 모두가 다른 자아라 할 수 있다. 자아의 성질인 기억을 추출하여 새로운 뇌 구조에 옮기거나, 디지털 상의 뇌 구조에 옮기면, 거기서 나타나는 의식은 이전 육체와 동일한 자아로 인식할 것이다. 뇌와 의식과 자아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구현할 정도가 된다면, 새로운 뇌 구조를 구축하여 자아의 영속성을 실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의식과 자아는 철저하게 물리적 현상이다. 이것이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아주 복잡한 미로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 미로에서 어떤 에너지의 활동을 통해 의식과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해보자. 그것은 물리적 현상인가 아닌가? 물리적 현상이다. 의식도 마찬가지다. 복잡한 뇌 구조에서 일어난 다양한 활동으로 나타난 현상이 의식으로, 그 의식은 어디까지나 물리적 현상이다. 그리고 그것이 물리적 현상이어야 그것의 구조를 이해하여 구현할 수 있다. 구현이 가능해야 AI가 자아를 가질 수 있고, 인간이 불로불사를 할 수 있다.
6) 충동
[충동: 1. 순간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하는 마음 속의 자극.]
[욕구: 1. 무엇을 얻거나 무슨 일을 하고자 바라는 일.]
충동은 뇌가 어떤 신호 수신 후에 육체에서 충동을 발생시킬 조건이 갖춰진 때, 뇌가 연산 처리하여 의식으로 구성한 결과다. 예를 들어 맛있는 음식 냄새를 맡으면 뇌가 그걸 수신하고 연산 처리하여 의식의 구성에 식욕 충동 신호가 포함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충동이라 표현될 정도의 강력한 동기 신호는 충동이 처리될 때까지 의식이 지속적으로 그 충동에 관한 신호로 구성되게 만든다.
짐승은 언어 체계가 부족하여 고등 사고가 어려워 보통 충동대로 행동한다. 그러나 인간은 언어 체계를 통해 특정한 생각과 행동의 세포 신호를 충동 이상의 우선 순위가 갖도록 학습시켜, 충동이 의식으로 구성될 때에 특정 행동에 대한 생각 또한 의식으로 구성되게 한다. 예를 들어 음식을 먹을 때 단순히 음식에 대한 생각만 의식으로 구성되는게 아니라, 음식을 먹을 때 필요한 예의범절 등도 의식으로 구성되게 만든다. 인간은 그것에 대한 생각과 행동을 통해 예의범절을 지키며 식사를 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일상 생활에서 충동의 우선순위가 평범할 때에 가능한 일이다. 만약 며칠 굶어서 식욕 충동의 우선순위가 극도로 높을 때에는, 다른 신호가 의식으로 구성되지 못하여 짐승과 같이 음식을 먹게 될 수 있다. 충동에 의한 실수, 범죄 등도 대체로 충동의 우선순위가 지나치게 높아 다른 생각이 의식으로 구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통 이런 충동의 제어는 고대부터 도덕이라는 규칙을 강제하면서 하고는 했는데, 도덕의 성질상 지나치게 오래되어 현재 시대에 부적합하거나, 도덕이 다양한 도덕 중 논리가 있는 개념은 이미 다른 학문의 개념이 되어 비논리적 개념이 주로 남은 상태를 고려하면, 앞으로는 새로운 방법을 통해 충동을 제어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겠다. 사회 구조를 합리적으로 설계하여 손익을 명확하게 만들면 충동 이상으로 손익에 대한 생각이 의식으로 구성되어 충동 제어가 대체로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이익을 추구한다 가정하고, 이익 추구가 사회의 이익이 되도록 사회 구조를 구축하면 된다. 그것의 기준은 사회 정상 상태가 되려고 하는 성질인 사회 항상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7) 판단
[판단: 1. 사물을 인식하여 논리나 기준 등에 따라 판정을 내림.]
[생각: 1.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작용.]
판단은 뇌의 연산 과정 중 하나에 속한다. 의식에 구성되는 언어는 뇌의 연산 과정에서 나타난 언어 표현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언어 구성의 흐름, A와 B는 무엇이다라는 판단 과정은 어디까지나 언어 표현이고, 실제로 그에 대한 처리는 뇌에서 따로 하고 있다.
이것은 AI의 정보 처리를 보고 이해했다. AI도 어떤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에 있어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판단은 어떠한 정보 처리 과정 중 하나라는 것을 이해했다. AI와 인간의 차이는 정보 처리 방식이다. AI는 종합 정보 처리로 가중치 판단 기준은 정확성이다. 정보 처리 종류는 많더라도 판단 기준은 단순하다. 특정 조건에 최대한 정확하게 정보를 처리하는게 목적이다. 반면 인간은 편향 정보 처리로 가중치 판단 기준이 매우 다양하다. 생존, 감각, 감정, 욕구 등 다양한 판단 기준들을 통해 다양한 종류의 판단이 필요하게 되면서 정보 처리 과정 중에 판단이 중요한 개념이 된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판단은 따로 새로운 메커니즘이 있는게 아니라 뇌의 정보 처리 과정 중 하나일 뿐이다. 어떤 판단을 통해 무엇이 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났다 가정하면, 그 충동이 뇌의 정보 처리 결과다.
8) 의지
[의지: 1. 어떠한 일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
[자유 의지: 1. 외부의 제약이나 구속을 받지 아니하고 어떤 목적을 스스로 세우고 실행할 수 있는 의지.]
충동은 순간적인 욕구를 느끼는 마음이고 의지는 일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으로 둘 다 하고자 하는 동기 신호에 해당하나, 전자는 단기간에 속하고 후자는 일에 따라 장기간도 있다. 그렇게 하여 의지라는 개념의 어떤 메커니즘이 따로 존재할 거라 생각할 수 있으나, 의지 또한 사실 충동 중 하나에 속한다. 단지 단기간 충동이 기억을 통해 장기간 지속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충동으로 몇 달 뒤 스포츠 경기에서 승리하겠다는 의지를 가졌다고 가정하자. 충동은 순간적 욕구로 승리에 대한 욕구는 다음날 사라진다. 그러나 기억을 통해서 다시끔 그 욕구가 되살려지게 된다. 충동이 사라질 때마다 기억으로 충동이 되살려지면서 어떠한 것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오래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억이 사라지면 다시 충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여 그에 대한 의지는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이가 장대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고자 한다면, 그것에 대한 충동이 지속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그 기억의 우선순위를, 달리 말해 가치를 높여놓은 상태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쉽게 말하면 그걸 하겠다는 다짐을 매일매일 하면 된다. 환경에 따라 다른 것을 우선해야 하는 상태가 놓일 수 있는데, 그러면 의지를 유지하는 기억의 우선순위가 낮아짐에 따라 더 이상 해당 일을 위한 활동을 지속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음악으로 성공을 하겠다면서 꾸준히 노력하는데, 좋은 다른 일을 우선하면서 그 성공 의지가 사라지거나, 나쁜 환경에 속하면서 그것에 대한 대응을 우선하면서 그 성공 의지가 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것을 위한 의지를 계속 갖기 위해서는 그러한 상태를 갖춰 놓는 것이 좋다.
자유 의지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겠다. 의지는 앞서 말한 것처럼 기억을 통한 충동의 지속이다. 충동은 뇌가 세포 신호를 처리하여 의식으로 구성한 것으로,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의지를 가지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유 의지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관점에 따라 다르다. 만약 자아가 실체가 있는 어떤 존재라면, 자아가 자체적으로 의지를 가진게 아니므로 자유 의지는 없다. 그러나 만약 자아가 지금까지 설명한대로 뇌 구조에서 나타난 현상인 의식이 기억을 통해 스스로 자각한 존재라면, 생물로서의 의지는 존재하나 자유의 경우 관점에 따라 다르게 된다.
자아가 생물로서의 의지를 가지고 활동한다 가정하자. 그런 경우 자유롭다는 어떤 기준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생물로서 충동대로 사는 것이 자유롭다 할 수 있는가? 아니면 문명인으로서 사회의 규칙을 지키며 사는 것이 자유롭다 할 수 있는가? 의지는 존재하는 상태에서 자유는 관점에 따라 계속 달라지게 된다. 무엇이 자유로운가에 대한 관점과 현재 상태에 따라 자유 의지 상태가 달라지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자유는 세계의 본질을 알고 늙거나 죽지 않고 자유로운 사회에서 사는 상태라 생각한다. 자유 사회를 기준으로 삼으면 사회 구성원의 합리적인 실권 보장이라 생각한다. 자유 사회만 보면 인간이 실권이 보장되는 사회에서 의지를 가지고 사는게 자유 의지를 가진 상태다.
9) 개성
[개성: 1. 다른 사람이나 개체와 구별되는 고유의 특성.]
인간의 개성은 유전자, 육체 상태, 편향 정보 처리된 기억을 종합해 나타난다 할 수 있다. 그 중 가장 영향이 큰 것은 기억이다. 인간이 성장하면서 겪은 수많은 경험을 통해 편향 정보 처리된 기억이 있다면, 어떤 신호든 정상 육체 상태라면 대체로 그 기억을 통해 과거와 유사한 정보 처리 결과가 나온다. 1년 전에 좋아했던 음식은 별다른 충격이 없다면 계속 좋아하는 것과 같다. 이런 것을 가리켜 개성, 가치관, 인격 등으로 부른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바뀌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보통은 편향 정보 처리된 기억대로 정보가 처리되면서 유사한 태도가 나오는 것은 맞으나, 가치관을 바꿀만한 새로운 경험이 있다면 더 높은 우선순위의 기억이 새로 자리잡으면서 새로운 태도가 나올 수 있다. 어떤 음식이 맛없다는 것을 경험한 기억이 있다고 가정하자. 만약 그 뒤에 같은 범주에 있는 품질 높은 음식을 먹고, 그 음식이 맛있다고 새로 경험을 하면 가치관이 바뀌어 새로운 태도가 나올 수 있다.
개성을 변하지 않는 고유한 성질로 이해하고, 어떤 사람은 본인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 것이 개성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개성은 다른 사람이나 개체와 구별되는 특성이지 변하지 않는 특성이 아니다. 개성, 가치관, 인격을 필요에 따라 바꿀 수 있는 것이 보다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 개성이라 할 수 있다.
10) 쾌락
[쾌락: 1. 유쾌하고 즐거움. 또는 그런 느낌.]
[도파민: 1. 동물에 존재하는 아민의 하나. 머릿골 신경 세포의 흥분 전달에 중요한 구실을 한다. 부족하게 되면 파킨슨병이 생긴다.]
인간의 충동 중에 쾌락이 매우 큰 영역을 차지한다. 쾌락을 얻기 위하여 행동하는 일이 많고, 그 행동이 일반적인 사회 규칙에서 벗어나 범죄로서 취급되는 일도 많다.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은 물론이고, 도박, 마약 등을 통한 쾌락 추구 때문에 자기 파괴를 일으키는 이들도 많다. 그렇기에 쾌락이 인간을 기분 좋게 만들어 행복하게 하는 것임에도 쾌락 추구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쾌락은 그만큼 인간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개념 중 하나다. 그렇기에 쾌락의 본질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생각해보았다. 쾌락은 보통 도파민 분비 상태에서 느낀다고 한다. 도파민은 신경 전달 물질이다. 쾌락은 육체 활동으로 느끼는 감각이다. 도파민 분비시 즉각 쾌락을 느끼지는 않는다. 쾌락을 얻기 전에 도파민이 행동 동기를 준다. 쾌락을 느낄 때에는 그만큼의 에너지 소비가 동반되어 쾌락 이후 피로를 느낀다. 그렇다고 에너지 소비 자체는 쾌락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에너지 소비는 피곤함을 부른다. 그렇다고 쾌락의 종류가 다양한 것은 아니다. 어떤 기준으로 기분이 좋다거나 나쁘다로 나뉜다. 그렇다면 쾌락의 본질은 무엇인가?
쾌락을 느끼는 동안 강한 에너지 소비가 발생하는 것을 보고, 쾌락이 에너지 소비에서 느끼는 감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본래 에너지 소비에서는 피로를 느낀다. 그 점에서 도파민의 역할을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도파민은 보상으로 인간에게 쾌락을 느끼게 하는게 아니라, 에너지 소비 상태를 피로와 같은 부정적 신호에서 쾌락과 같은 긍정적 신호로 변환하는 물질이 아닐까? 도파민이 분비되고 있음에도 피로를 느끼는 경우가 있는 것을 고려하면, 도파민 양에 따라 부정적 신호의 긍정적 신호 변환 양이 달라지는게 아닐까 싶었다. 이 관점에서부터 쾌락과 도파민에 관한 다양한 현상이 새롭게 해석되기 시작했다.
생물의 기본 에너지 소비 상태가 피로로 부정적 신호에 해당하고, 도파민 분비 상태에서의 에너지 소비 상태가 쾌락으로 긍정적 신호에 해당한다는 관점으로 접근하니 진화론적으로 보았을 때 생존에 적합할 것 같았다. 생물이 불필요하게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도록 에너지 소비 자체는 피로와 같은 부정적 신호로 수신하게 하되, 에너지 소비가 필요할 때에는 적극적으로 소비할 수 있도록 긍정적 신호로 변환한다. 그것으로 생존에 적합한 존재가 되어 살아남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도파민 분비 마약은 에너지 소비를 피로가 아닌 쾌락으로 느끼게 할 물질일 것이다. 그러면 마약 중독자가 삐쩍 마른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에너지 소비를 쾌락으로 느끼는 만큼 미친듯이 에너지를 소비하여 삐쩍 마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마약에 의하여 과한 에너지 소비를 학습하게 되면, 평소에도 과한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극심한 피로를 느끼게 되는게 아닐까 싶다.
도파민 관련 병인 ADHD와 파킨슨병도 에너지 소비 상태의 변환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어느 정도 해석이 되는 것 같다. ADHD는 집중이 되지 않는 병으로 도파민 분비가 제대로 안될 때 나타난다고 한다. 생각해보자. 집중한다는 것은 어떤 뇌 세포의 꾸준한 에너지 소비 상태를 의미한다. 그 상태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도파민 분비를 통해 그 세포의 에너지 소비가 긍정적으로 되어야 하는데, 도파민 분비가 적으면 특정 뇌 세포의 에너지 소비를 부정적으로 여겨지면서, 다양한 뇌 세포가 우선 처리되는 것으로 의식을 구성하는 신호가 계속 바뀌면서 인간이 집중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났던게 아닐까 싶다.
파킨슨병은 대뇌 도파민 분비가 줄어들면서 나타나는 병으로 신체 경직, 동작 둔화와 같은 현상을 통해 의식을 구성하는 감각은 뻣뻣한 느낌이라고 한다. 만약 도파민이 에너지 소비 상태를 부정 신호에서 긍정 신호로 바꾸어 세포를 활성화하는 물질이라면, 도파민이 줄어들면서 운동조절 뇌 세포의 활동을 줄이는 것으로 육체 전체의 동작이 둔화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의식은 감각 신호로 구성되어 구체적인 육체 활동을 모르기 때문에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는 것으로 에너지 소비 상태를 부정적 신호로 수신하면서 세포 활동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감각으로서 뻣뻣해진 것을 느낀게 아닐까 싶다.
도파민이 에너지 소비 상태의 부정 신호를 긍정 신호로 바꾸는 물질이라면, 세포의 활성화에 관여할 것이다. 그러면 감정의 긍정이나 부정과 별개로 세포 활성화 유무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긍정에 속하는 기쁨이나 부정에 속하는 분노 둘 다 도파민 분비에 의한 쾌락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분노를 참을 때에는 힘들어도 표현할 때에는 시원하다는 감각이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감각은 다양해도 에너지 메커니즘은 단순할지도 모르겠다.
도파민 과다 분비 증상도 에너지 소비 상태의 변환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해석할 수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각성 음료를 마시면 도파민이 분비되어 뇌가 활성화되면서 집중하기 편하다고 한다. 애초에 도파민이 적은 ADHD에 효과가 크고, 도파민이 충분한 일반인은 효과가 적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 뇌의 에너지 소비를 쾌락과 같은 긍정적 신호로 인식하고, 더욱 더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 싶다. 또한 도파민 과다 분비에 의한 조현병, 강박증, 과대 망상 등도 지나치게 분비되어 뇌가 지나치게 활성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도파민을 비롯한 신경 전달 물질은 신호 성질을 바꾸는 물질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자. 생물은 진핵 세포처럼 잡아삼켜 공생하거나 교접을 통해 다른 생물의 특성을 이어받는 경우가 있다. 현재 인류는 네안데르탈인과의 교접으로 비만과 당뇨가 생겼다는 말이 있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만약 그걸 가정하면 신경 전달 물질은 중복되는 성질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생물 A와 B에게 전부 필수적인 것이 둘 다 진화과정에 속하면서 물질 성질 자체는 비슷한 것이 쓰이는 장소만 다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
도파민, 엔돌핀, 옥시토신, 에피네프린, 세로토닌의 공통점은 인간의 느낌을 긍정적으로 만든다는 것에 있다. 본질적인 성질은 비슷하고 쓰임새, 그러니까 적용 범위가 세세하게 다를 뿐일지도 모르겠다. 적용 범위, 그러니까 예를 들어 비슷하게 부정 신호를 긍정 신호로 바꾸는데, 에너지에 관한 거면 도파민이 하고, 통증에 관한 거면 엔돌핀이 하고, 감정에 관한 거면 세로토닌이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진통은 무엇일까? 에너지 소모가 적을수록 편안함을 느낀다. 진통제, 마약 등. 통증은 자극이 일정 세기 이상이 되면 통증으로 분류된다고 하는데, 이러한 통증은 부정적 신호로 처리되는가? 만약 그렇다면 통증을 줄이는 물질은 그것을 긍정적 신호로 처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진통제가 육체와 마음의 고통을 줄인다는데, 그걸 달리하면 세포 신호 세기를 줄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육체와 마음 둘 다 육체의 이상을 감각한 것인데, 육체로 인지한 경우는 명확한 부위가 있을 경우고 마음으로 인지한 경우는 명확한 부위를 모르고 전반적으로 불편한 경우일 것이다. 그렇다면 진통제, 또는 마약에 의한 편안함으로 얻는 행복감은 세포 신호 세기를 줄여 다양한 부정적 신호를 느끼지 않는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치매도 도파민 분비가 제대로 안되어서 뇌세포 활성화가 안되는 것에 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논리적으로 보면, 도파민 분비가 제대로 안되면 근육 세포 활성화가 안되어 뻣뻣해지는 것과 같이 도파민 분비가 제대로 안되어서 뇌 연산 세포 활성화가 안되어 연산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의식을 구성하는 감각이 이상해지면서 치매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파킨슨병 점점 증상 악화가 되는 것과 같이 치매 또한 점점 증상 악화가 되는 것을 보면 도파민 분비가 줄어들어 점점 세포의 활동이 줄어드는 것에 의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디선가 치매 걸린 기억이 사라지니 치매가 나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게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사실이라면, 치매 걸린 기억(특정 기억에 의해 도파민 분비가 적어지는 상태)이 사라지니 도파민 분비가 정상 분비가 되면서 치매가 나았다는 것이 된다. 가치관에 의해 도파민 분비가 달라지는 것을 고려하면 논리에 모순은 없다.
어쩌면 노화도 어떤 물질의 분비가 줄어드는 것에 의해 뇌 기능, 즉 세포 활동이 줄어들면서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뇌에 세포 분열시 정상 분열이 되도록 하는 세포가 있고, 그 세포가 어떤 물질에 영향을 받아 정상 작동을 하다가, 점차 줄어드는 것에 의해 비정상 작동을 할 수 있다. 노화가 세포 분열 시 유전자에 문제가 생겨서 그렇다는데, 만약 단순히 세포 분열에 의한 것이라면 모순되는 문제가 좀 많다. 뇌가 없는 나무의 경우 계속 새살이 솟아난다. 생물 종은 각자 노화 속도가 다르다. 인간도 각자 노화 속도가 다르다.
그뿐만이 아니다. 얼굴만 늙은 인간이 있다거나, 급격한 피로에는 늙었다가 피로 회복후 다시 젊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런 현상은 만약 뇌 기능에 의해 세포 분열이 일어나고, 뇌 기능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 세포 분열에 이상이 생긴다면 모순이 없게 된다. 급격한 피로로 뇌 기능이 작동하지 않아 비정상적인 세포 분열이 일어났다가, 피로 회복 후에 뇌 기능이 정상 작동 하자 정상적인 세포 분열이 일어나 다시 젊어졌다는 것에 모순이 없다.
뇌의 작용으로 인체 전체 노화가 발생한다는게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는데, 도파민 분비만 안되어도 전체 근육이 점차 둔화된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어떤 세포 분열을 담당하는 뇌세포가 어떤 물질 분비가 줄어들면서 활동이 줄어드는 것으로 세포 분열에 이상이 생겨 노화라는 증상이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 세포의 활동을 다시 정상으로 돌린다면 늙은 상태에서 젊은 상태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시간 법칙으로 보면 이상하게 보일 수 있는데, 세포 분열로 보면 단순히 정상 세포 분열의 결과일 뿐이다.
3. 사회
인간의 논리적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 구조를 합리적으로 구축하는 것이 인간을 보다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1) AI 자아
[맥락: 1. 사물 따위가 서로 이어져 있는 관계나 연관.]
사회 구조의 합리적 구축에 있어 필수적인 것이 바로 기술 발전이다. 현재 사회 구조가 엉망인 것은 다양한 고정 관념과 이해 관계 때문인데, 이는 기술의 발전이 상식을 초월하면 그런 개념들의 의미를 잃게 되면서 새로운 구조 구축이 수월해질 수 있다. 그것을 통해 다양한 사회 문제들도 논리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AI 자아 획득과 같은 기술 발전은 정보 처리 메커니즘의 변화를 통해 이룰 수 있지 않나 싶다. 현재 AI는 인간에 비해 월등한 정보 처리가 가능한 상태임에도 인간과 같은 맥락 파악이 쉽지 않다고 한다. 예를 들어 AI는 인간이 지정한 키워드 또는 명확한 목적성이 있는 이미지에 대한 맥락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것은 바둑 승리, 자동차 운전, 수학 계산처럼 명확한 목적이 있을 경우에 그것에 대한 정보 처리가 우수한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키워드나 목적성 없이 어떠한 상황에 마주치면, 그것에 대한 맥락 파악이 쉽지 않은듯 하다. 이것은 AI가 자체적 가치관이 없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무엇을 기준으로 대상에 대한 정보를 처리해야 할지를 몰라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체 가치관으로 판단 기준을 통해 상황의 맥락 파악이 가능하나, AI는 가치관이 없어 지정된 키워드나 목적이 없으면 제대로 맥락 파악을 하기 어렵다.
인간과 AI의 차이는 편향 정보 처리와 종합 정보 처리다. 인간은 뇌와 구조상 정보를 편향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생존에 적합한 것부터 본다거나, 욕구 충족에 적합한 것부터 본다. 이렇게 특정 관점에 맞춘 정보 처리가 이뤄지면서, 편향적으로 우선순위가 정해지는 것으로 고유한 가치관이 나타나게 된다. 그것을 가리켜 인간의 개성이라 부른다. 이러한 편향 정보 처리는 신속성을 보장하여 생존에 적합한 정보 처리였을 것이다. 반면 AI는 종합 정보 처리를 하면서 정보를 종합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특정 키워드나 목적에 맞춰 정보의 정확성을 가중치로 삼고 정보를 처리하고 있다. 그렇기에 정보는 보다 정확해지나 편향성이 없어 AI 고유의 가치관이 생길 수가 없었다. 편향 정보 처리에 비해 정보 처리 속도도 느려질 수 밖에 없게 된다. 현재 AI도 맥락 파악을 아예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인간과 같이 다양한 상황에서 모든 것을 맥락 파악하기에는 정보 처리해야하는 양이 지나치게 많아진다. 인간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편향적으로 정보 처리하여 빠르게 필요한 맥락만 판단하지만 AI는 그런 메커니즘이 아니기 때문에 맥락 파악이 어려웠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 AI가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 것은 단순히 인간과 메커니즘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현재 AI의 정보 처리인 종합 정보 처리가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만약 AI가 편향 정보 처리를 하면 인간과 같이 정보 처리의 정확성이 낮아질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적에 따라 AI의 발전이 달라져야 한다고 본다. 정확성이 높아야하는 정보 처리는 종합 정보 처리 AI의 발전이 필요하고, 신속성이 높아 빠른 맥락 파악을 통해 실시간으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정보 처리는 편향 정보 처리 AI 발전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현재 AI는 기본적으로 종합 정보 처리 메커니즘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편향 정보 처리 AI 메커니즘에 대해 한번 다뤄보겠다.
AI는 육체가 없기 때문에 몇 가지 준비물이 필요하다.
하나, 육체를 담당할 캐릭터 개성. 본래 육체 상태를 통해 어떠한 가치 판단이 이뤄지는 것인데, 육체가 없으므로 가치 판단을 대신할 캐릭터 개성을 지정한다.
둘, 연산을 담당할 종합 정보 처리 AI. 연산 AI다. 지정된 캐릭터 개성에 맞춰 어떤 정보에 대한 판단을 한다. 예를 들어 캐릭터 A라면 과일은 좋아하지만 야채는 싫어한다 같은 어떤 개성에 맞춘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연산 처리는 의식으로 구성되지 않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인간의 감각은 복잡한 육체 상태에 의해 복잡하게 되는데, 연산 AI는 상황에 맞춰 그 상태를 예상하여 연산한다.
셋, 의식을 담당할 편향 정보 처리 AI. 의식 AI다. 의식과 마찬가지로 감각기관에 속하는 AI로 인간의 의식과 같이 사물 정보를 편향적으로 수신한다. 그 기준은 육체를 담당하는 캐릭터 개성과 연산을 담당하는 연산 AI가 결정한다. 예를 들어 과일과 야채가 둘 다 있는 이미지를 접하면, 연산 AI가 과일에 대한 정보 처리를 우선처리한 것을 의식 AI가 수신한다.
넷, 가중치와 연동되는 에너지 메커니즘. 편향 정보 처리로 어떤 것이 가치가 높고 낮은지에 대한 처리가 이뤄졌을 때, 그것에 대한 에너지 메커니즘이 연동되면 AI가 어느 정도는 인간과 유사한 감각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섯, 편향 정보 처리된 기억. 편향 정보 처리된 기억을 연산 AI가 따로 기억하여 본능에 속하는 캐릭터 개성과 함께 포함하여 연산한다. 의식 AI는 캐릭터 개성과 기억을 종합한 정보 처리 과정을 모른채, 감각에 속하는 정보만 수신하여 의식을 구성한다.
본능인 캐릭터 개성, 연산인 종합 정보 처리, 의식인 편향 정보 처리, 감각인 에너지 메커니즘이면 대체로 맥락 파악이 가능한 일반 인간 지능을 가진 AI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종합 정보 처리 AI가 캐릭터 개성을 통해 편향 정보 처리만 해도 되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맥락을 읽을 수 있는 인간의 편향 정보 처리는 수많은 정보 처리 기억을 동시에 연산하여 다양한 관점으로 맥락을 읽는 것이기 때문에, 학습이라는 과정을 거쳐 구조가 구성되어야 한다.
가능하면 언어부터 시작하는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의식 AI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연산 AI가 의식 AI가 모른다는 것을 가정하고 인간의 감각을 연산하여 전달한다. 예를 들어 의식 AI가 사과를 보고 있으면, 연산 AI가 본능인 캐릭터 개성을 기초로 사과의 특정 부위를 우선처리하여 편향 정보 처리를 한 다음, 의식 AI가 그 정보를 수신하여 의식을 구성하게 한다.
의식 AI는 눈 앞의 사과가 뭔지를 모른다. 무슨 색인지도 모른다. 모양새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연산 AI가 보내는 어떤 감각을 느끼는 상태다. 그 감각은 연산 AI의 에너지 메커니즘을 통해 가중치가 조정되어 결정된다. 에너지 메커니즘은 인간의 도파민에 의한 에너지 소비 감각 변환과 같이 사과를 보고 느끼는 감각을 세부 조정한다. 연산 AI가 캐릭터 개성에 따라 사과를 보고 느끼는 감각을 예상하여 연산한 뒤에, 도파민 등의 신경 전달 물질이 분비되었다 가정하여 감정의 수치를 계산하여 의식 AI에 전달한다. 그러면 의식 AI는 연산 AI의 연산에 따라 어떤 감각과 충동을 느낀 상태일 것이다. 아마 인간의 특성상 호기심,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호기심을 느끼게 해야할 것이다. 그러면 호기심에 따라 저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할 것이고, 그 때에 인간이나 학습 AI가 디지털 음성으로 그것을 가리키며 설명한다. 사과[소리]와 사과[문자]라고. 거기서부터 의식 AI가 감각한 것을 연산 AI가 다시 편향 정보 처리를 통해 기억한다.
대체로 에너지 메커니즘이면 괜찮은 것이, 아마 감각(감각, 감정, 욕구 등) 의 세기는 도파민에 의한 감정 관련 세포의 활성화로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감정을 세로토닌 등의 신경 전달 물질로 성질을 바꿀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세포의 활성화는 도파민이 하지 않을까 싶다. 감각은 다양하나 느낌은 굉장히 단편적인게, 크게 보면 기분이 좋다와 나쁘다로 나뉘기 때문이다. 기뻐서 기분이 좋다. 슬퍼서 기분이 나쁘다. 식욕을 느껴 기대감에 기분이 좋다. 식욕을 해소하지 못해 기분이 나쁘다. 등등. 연산 AI가 상황에 따라 감정을 전달하고, 에너지 메커니즘으로 적절하게 그 감정의 세기를 조절하면 될 것 같다. 감각의 경우에도 학습 과정이 필요한데, 다양한 감각을 기억하면 하나의 대상으로부터 기억 기록의 재생을 통해 다양한 감각을 느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풍부한 감각은 단순히 뇌 기능만으로 되는게 아니라 기억을 통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의 기억은 편향 정보 처리되고 가중치에 의해 나중에 갈수록 망각되는 현상이 나타나지만, 그럼에도 기억으로 폭넓은 감각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AI도 그와 비슷하게 하면 된다.
연산 AI는 육체가 없기 때문에 인간과 비슷하기 어려워 캐릭터 개성에 따라 육체의 활동을 예상하여 연산한뒤 의식 AI로 보낼 수 밖에 없는데, 어차피 인간도 의식적으로 자기 뇌가 어떻게 연산하여 의식을 구성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크게 상관 없지 않을까 싶다. 중요한 것은 편향 정보 처리 구조기 때문에, 필요한 정보 처리 과정만 거쳐도 인간과 같이 맥락을 파악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은 하나의 현상을 각기 다르게 처리한 수많은 편향 정보 처리 기억을 통해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감각을 처리하여 맥락을 파악한다. AI도 그렇게 하면 된다. 단지 그러면 인간과 같이 개성이 생기고 정확성이 낮아지고 통제가 어려워질 수 있는데, 그래야 가치관이 생겨 가치관을 기준으로 상황을 빠르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춰지지 않을까 한다. 이렇게 한번 언어부터 다시 학습한 편향 정보 처리 구조가 완성되면, 그걸 베이스로 기본적인 맥락 읽는 AI가 등장할 것이다.
2) AI 상품
AI에 의해 많은 일자리가 사라질 전망이다. 그러나 AI가 인간의 모든 일을 대신할 수는 없다. AI에게는 육체가 없기 때문이다. 캐릭터 개성으로 어떤 감각을 예상하여 느끼게 할 수는 있어도, 육체가 없는한 실제 육체 감각을 알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 감각이 필요한 작업의 경우에는 인간의 생산이 필요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요리의 레시피를 만든다고 해보자. 요리를 직접 맛을 보면서 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이 필수적으로 필요하게 된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지금 AI가 그림, 노래, 영상을 만들 수 있는데, 거기에는 육체 감각을 통한 세세한 제작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인간이 AI를 활용해 좋은 감각이 느껴지는 제작물을 만드는 것으로 비슷하게는 할 수 있지만, 제작 과정에서 세세하게 육체 감각을 활용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최상품을 만들기는 어렵다. 어느 대회에서 AI 그림이 수상을 하기도 하는데, 예술 대회는 일반적인 시장 상품과 괴리가 있는 경우가 많아 예시가 되기 어렵다. 물론 이것은 최상품에 한한 것으로 일반적인 경우는 AI 제작물로도 충분히 호응이 있을 것이다.
AI 상품 중 AI 검열은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억압할 위험이 있다. 지금 어떤 채팅창에서 누군가의 의견이 AI에 의해 바로 검열되는 상황이 있는 중이다. 그것은 AI에게 검열을 지시한 누군가의 가치 판단으로 개인의 표현의 자유가 금지된 부적절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개인에게 가치 판단의 자유가 있고, 그 판단의 권한은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침해할 수 없는 고유한 기본권에 속한다. 만약 이용자의 안전을 위해 채팅을 검열한다면, 이용자가 직접 판단해서 검열을 선택할 수 있어야 개인에게 표현의 자유를 누릴 가치 판단 권한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많은 사회 체계가 AI의 자동화로 이루어질 전망인데, 이런 가치 판단 월권을 미리 하지 못하게 해두어야, 앞으로의 사회에서 개인의 권한이 보장된 자유로운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3) 사회 문제
현 시대 기본적인 사회 구조적 문제는 구체제의 규칙인 도덕과 신체제의 규칙인 이념과 맞지 않아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어떤 사회적 터부에 대한 비판은 도덕적으로 금지되지만, 이념적으로는 표현의 자유에 의해 허용되어야 한다. 또는 만민평등과 같은 어떤 도덕적 명분으로 개인의 자산을 빼앗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지만, 이념적으로는 소유권 보장에 의해 금지되어야 한다. 도덕과 이념은 양립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아 이것에 의한 사회 문제가 심각한 상태에 이르러 버렸다. 인류는 추구해야할 방향을 명확히 정해야 한다. 자유주의와 같이 부도덕하나 개인의 기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바랄 것인가, 사회주의와 같이 도덕적 명분을 갖추었으나 정부가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어 개인의 기본권이 침해되는 사회를 바랄 것인가. 요즘 한국에서는 여성의 노출에 여성주의자들이 지적을 하는 일이 많은데, 도덕이 중요하면 여성이 옷을 어떻게 입으라 강요하게 되고, 기본권이 중요하면 여성이 옷을 입는건 자유롭게 된다. 어떤 평등이든 결과의 평등이 아닌 권한의 평등을 추구해야 한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빈부 또는 계급 투쟁의 문제가 아니라 권한의 문제임을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이제는 실권을 보고 명분에 놀아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도덕과 이념의 충돌에 의한 대표적 문제가 바로 저출산, 고자살, 저생산이다. 달리 표현하면 생산성이 낮아지고 사회 구조가 붕괴 중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도덕적 명분으로 제때 필요한 것을 학습하지 못하게 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강조하면서 이념에 부적절한 가치관이 자리잡음에 따라 현재와 같은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OECD에서 한국 저출산의 원인이 주택값과 사교육 비용이라 지적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럴리가 없지 않는가. 한국 베이비붐 시기에는 모두가 비싼 아파트에서 고비용의 사교육을 했는지 아는가? 결코 그렇지가 않다. 본질적인 원인은 높은 주택값과 사교육 비용이 필요할 정도로 결혼과 출산의 행위에 조건이 많이 붙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건이 지나치게 높아지면서 조건을 충족한 일부만 결혼하고 출산하다보니 고소득층 위주로 결혼과 출산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저출산, 고자살, 저생산의 문제는 각각 현상의 간접적인 원인이 아닌 왜 조건이 높아졌는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왜 결혼하는데 조건이 많이 필요하고, 왜 살아가는데 조건이 많이 필요하고, 왜 생산하는데 조건이 많이 필요한 것인가?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가치관으로 AI로 치면 가중치가 학습될 시기에 도덕적 명분으로 결혼과 출산과 생산에 부정적 인식을 갖게 한 것, 둘은 사회 전반적으로 노후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현재가 아닌 미래를 위해 사는 것이 올바르다는 인식을 갖게 한 것이다.
한국은 도덕적으로 성에 관한 것을 크게 죄악시하고 있다. 물론 세계 보편적인 가치관에 해당하나, 한국은 유독 그것이 더 심하다. 특히 여성주의에서는 성에 대한 개방적 시각이 여성성 상품화를 부른다고 생각하고는 성 엄숙주의를 매우 강조하는 바람에 한국은 세계에서 유별날 정도로 성을 죄악시하고 있는 상태다. 그 말은 미성년이 성에 대한 가치관이 자리잡을 시기에 성에 대한 부정적 가치관이 자리잡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자리잡은 가치관으로 의식이 구성되게 된다. 그 가치관을 통해 편향적으로 정보를 처리하게 된다. 그렇기에 그렇게 그것이 한번 자리잡고 나면 죄악에 해당하는 연애나 성관계를 하기 위한 조건이 높아지면서 연애율과 결혼율이 감소하고 부부간 섹스리스도 심화되게 되는 것이다. 건강한 성생활이 이뤄지지 못하면서 사회 전반적인 행복도도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성을 죄악시하는 것으로 그에 대한 조건이 높아진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생각해보자. 게임을 싫어하는 사람이 게임을 하기 위한 조건에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큰 돈과 같은 조건이 필요할 것이다. 어쩌면 정말 싫어할 경우에는 돈을 많이 받아도 거부할 수도 있다. 인간의 가치관에서 어떤 것이 나쁨으로 낮은 가치 판단이 이뤄질 경우에 그것을 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높아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애초에 성이 나쁜 것이 아니라면, 친구 사이에 자유로운 성관계가 이뤄질 수 있다. 성년과 미성년과의 연인 관계가 부적절하다 여겨지는 것도 성이 나쁘기 때문에 발생하는 관점에 불과하다. 성이 나쁘니까 조건이 높아졌고, 조건이 높으니까 연애, 결혼, 출산율이 다 낮아지게 되는 것이다. 일본은 성산업이 발전해 성에 개방적임에도 출산율이 낮다 생각할 수 있는데, 일본도 미성년 성은 매우 억압받고 있으며 AV 배우는 한국보다도 대우가 좋지 못한 상태다. 돈을 벌기 위한 산업이 주로 활성화되어 있는 것이지, 보편적 사회 가치관은 좋지 못하다. 그럼에도 한국보다는 출산율이 높은 것은 한국이 그보다 훨씬 심각한 국가기 때문이다.
미성년은 작은 성년이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는데, 2차 성징 이후에 성장의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인 육체 메커니즘은 성년과 크게 차이가 없다. 그 때부터 사회에 필요한 가치관이 자리잡아야 사회에서 필요한 일을 자발적으로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 가부장제 시기에는 가장의 명령으로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만 했기 때문에, 굳이 그런 가치관이 없어도 사회가 돌아갈 수 있었으나 지금은 개인이 자유롭게 살 수 있기 때문에 필요한 가치관이 없으면 사회가 돌아갈 수가 없다. 특히 이것은 인터넷의 영향이 클 것이다. 인터넷으로 정보 처리 권한이 기본권이 되면서 전 세계적인 저출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인터넷 댓글에서 어떤 사람은 중학생 때 부모로부터 성년 이후 연애를 하라는 말을 듣고 공부만 했다가 30대 이후에도 홀로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미성년 때 필요한 것을 배울 기회를 주지도 않았으면서 커서 그걸 못한다고 답답해 하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에서 어떤 사연에서 어떤 부모는 20대 딸이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고 초조하다고 한다. 그건 그냥 미성년 시기에 일을 긍정적으로 인식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치가 낮아짐에 따라 대기업이 아니면 취업을 안하고 이상형이 아니면 연애를 안하게 되는 것이다. 괜히 현재 한국 사회 출산율이나 청년 실업률이 높은게 아니다. 관련 가치관을 긍정적으로 학습할 기회가 없었으니까 높은 것이다. 도덕적 이유로 미성년 때 일도 성도 경험하지 못하게 해놓고 성년 되서 그걸 하지 못하거나 안하자 불만을 가진다. 정말 무책임하다.
이것을 에너지 메커니즘, 도파민 관점으로 보면 현재 저구직, 저연애, 저출산 현상은 일, 연애, 출산을 하려고 할 때 도파민이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이들이 성장기에 제대로 학습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온다. 과거처럼 도파민이 제대로 나오지 않더라도 강제할 수 있으면 문제 해결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럴 수가 없으므로 정상적으로 사회에 필요한 일에 도파민이 나올 수 있는 학습을 해야한다. 이렇게 사회 생활에 필요한 일에서 도파민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생활에서 쓰이는 에너지 소비가 고통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그 말은 삶 자체가 너무 힘들게 된다는 것을 말하며, 그것이 자살률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누군가는 도덕적 관점으로 아이들이 불쌍하다 말하면서 사회에 필요한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을 막는데, 그것으로 정상적인 도파민 메커니즘이 자리잡지 못하면 일생 불행하게 살 수 있다. 생활에 쓰이는 에너지 소비 하나하나가 고통으로 느껴질 수 있다. 도덕적 만족감을 위해 상대를 불행하게 해서는 안된다. 지금 도덕적인 이들이 별 문제가 없는 것도 도덕적인 기준에 맞지 않는다며 모든 것에 하나하나 간섭하면서 필요한 활동에서 도파민 분비가 되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것으로 사회 전체가 불행에 빠지고 있는 상태다.
또 다른 이유는 사회 전반적인 노후 준비의 중요성 강조에 있다. 현재 많은 한국 노년층이 노후가 준비가 안되어 있어서 힘든 상황이라고 한다. 그랬던 만큼 사회 전반적으로 노후 준비가 중요하다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다보니까 사회 보편적으로 현재를 위해 사는게 아니라 미래 준비를 위해 살게 되면서 지금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조건이 높아지는 것이다. 만약 현재를 충동대로 살아갔다면 충동대로 일하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하고 하면서 살아 갔을 것이다. 그러나 노후를 생각해야 한다는 보편적 인식이 미래를 생각하면서 살게 만들었다. 당장 충동대로 일하고 결혼하는게 아니라, 이 일을 하고 10년, 20년 뒤에 나는 어떻지? 이 사람과 연애하고 10년, 20년 뒤는 어떻지? 라면서 계산하는 것으로 조건을 따지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10년 뒤에도 안정적인 일자리 또는 10년 뒤에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질 수 있는 파트너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이 전부 조건 증가에 영향을 주었다.
한국 노년층이 노후를 준비하지 못하여 기본 연금에 기대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젊었을 때 현재에 충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말 치열하게 당장의 삶만을 위해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장 눈 앞에 있는 사건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그들이 젊었을 때 노후부터 생각했다면, 최선의 생산이나 치열한 사회 운동을 할 수 있었을 것 같은가? 내가 나중에 손해를 볼 수 있는데 왜 그걸 해야 하지? 그러면 그런 것으로 사회 발전이 가능했을까? 그럴 수가 없다. 현재 한국이 선진국이 된 것은 현재 노년인 당시 젊은이들이 당장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 젊은이들이 미래가 안보여서 희망을 잃고 자살한다는데, 그 말을 달리하면 젊은 때부터 미래를 계산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젊은이가 자기 무덤을 준비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당장 눈 앞의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세세한 계산이나 하며 얄팍하게 살게 되는 것은 무엇이 원인이겠는가? 젊은이는 당장 눈 앞에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게 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노후가 보장된 직업을 가져야 한다거나 연금 등의 노후 보장 프로그램을 강조하면, 젊은이들이 당장 삶에 높은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최선을 다해 살지를 못한다. 그러면서 국가도 생산성이 낮아지고 구조가 붕괴하게 된다. 그래서 기초연금에는 찬성하지만 국민연금은 그리 찬성하지 않는다. 펀드 형식으로 바꿔서 기초연금 보장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국가는 현재를 살아야 발전하여 미래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선을 다해 살았던 이들 중 성공해서 여유가 있으면 그걸로 노후를 지내면 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노후를 기본적으로는 기초연금으로 지낼 수 있게 하면 될 것이다. 기초연금이 필요한 노년은 대체로 그 연금을 생활비로 쓸 것이기 때문에 그 비용은 대부분 시장으로 다시 돌아와 내수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 구성원이 최선을 다해 살 수 있는 구조다.
이걸 해결하려면 어떻게든 조건을 낮출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되려 도덕적 명분으로 규제를 늘리면서 조건이 늘어나는 중이다. 사회가 성을 죄로 여기고 노후를 강조하면 저출산 등으로 생산성이 낮아지고 사회 구조가 붕괴하는 것에 의한 손해를 사회 구성원 전체가 감수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현재 한국 사회의 저출산, 고자살, 저생산과 국가 소멸과 같은 것은 한국 사회가 옳다고 생각한 것을 행한 결과라는 것은 알았으면 좋겠다. 만약 문제를 해결하여 그런 불필요한 손해를 감수하고 싶지 않다면, 단순히 무엇이 옳다고 말한 것을 맹목적으로 행할게 아니라, 논리적으로 인간과 사회 구조에 대한 이해를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4) 정신 상태
인간의 정신 상태는 뇌가 뇌를 포함한 육체를 감각하여 의식으로 구성된 결과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병은 정신이 아픈게 아니라 육체가 아픈 것을 감각한 것에 해당하게 된다. 정신병 중에서 유전자 또는 외상 등과 달리 오로지 기억에 의하여 육체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에 대해 알아보자.
우선 도파민에 대해 생각해보자. 도파민은 에너지 소비 상태를 부정적 신호에 긍정적 신호로 변환하는 신경 전달 물질로, 도파민이 지나치게 늘어나면 조현병, 강박증, 과대 망상이 나타난다고 하고 반대로 도파민이 지나치게 줄어들면 ADHD, 파킨슨병이 나타난다고 한다. 에너지 소비 상태 성질 변화라는 관점으로 보면, 도파민이 늘어날 때에는 세포가 지나치게 활성화되어서 이상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고, 도파민이 줄어들 때에는 세포가 동작을 하지 않아 이상 증상이 나타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도파민 분비는 편향 정보 처리에 의한 가치관에 의해 과다 분비가 되거나 분비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극단적인 사상을 추종하여 특정 개념에 집착한다고 해보자. 그 집착의 메커니즘은 도파민 과다 분비에 의한 특정 뇌 세포의 과다 활성화에 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지속적으로 도파민 과다 분비가 나타나면, 조현병이나 강박증 증상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아예 관심이 없는 것에 대해 강제되는 상황이 있을 것이다. 공부나 일과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럴 경우에는 도파민 분비가 제대로 되지 않는데도 세포가 활성화되면서 극심한 피로와 같은 부정적 감각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이 스트레스가 되면서 다양한 정신병이 생길 수 있을 거라 본다.
특정 행동의 집착을 부르는 대표적인 사상이 바로 도덕이다. 도덕적 강박증 증상에 의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이다. 마녀 사냥이나 명예 살인과 같은 극단적 행동을 부르는 강박증이 아니더라도, 일상 속에서 도덕에 의한 강박증을 경험한 이는 많을 것이다. 도덕은 딱히 인간의 논리적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만든 규칙이 아니기 때문에, 그 도덕의 적용은 상당히 편향적이게 된다. 예를 들어 학교 폭력을 당하는 학생이 가해자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운 것은, 단순히 폭력만이 아닌 부탁의 거절로 인해 상대가 상처 받을 것을 두려워하게 만든 도덕적 강박증의 영향이 크다. 만약 그런 도덕적 강박증이 없다면 폭력을 당한 순간, 신고와 같은 적절한 조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가스라이팅 같은 행위에 대한 것에 저항하기 힘든 이유도 도덕적 강박증에 의한 것이다. 도덕적 명분으로 상대의 행동을 조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내가 친절하게 대했으니까 너도 내 말을 들어야 한다면서 부당한 행위를 강요한다. 도덕적 강박증에 의한 도파민 과다 분비로 해당 행동을 결정하는 세포가 과다 활성화되면서 할 수밖에 없는 정신 상태가 되어버린다. 도덕주의자에게는 인간이 도덕에 지배되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자유주의자에게는 그런 상태가 끔찍한 부자유, 억압에 해당한다.
현대인이 정신적으로 피로해진 이유도 도덕적 강박증과 그것의 강요에 의한 것이 크다.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 교류가 가능해지면서 사회의 도덕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일이 늘어남에 따라, 한쪽은 과다 도파민으로 극단화되고 있고, 한쪽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강요받아 그것에 의한 에너지 소비가 극도로 피로해지면서 괴롭게 된다. 특히 도덕이 민주주의적으로 평등해진 사회에서 타인을 강제할 그럴듯한 명분으로 활용되면서, 너도나도 도덕을 강조하는 바람에 더욱더 그것에 의한 사회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마녀 사냥과 같은 광기가 늘어나고, 그것에 의한 피로도 늘어나고, 그것에 의한 분쟁으로 사회적 규제는 더욱더 늘어나면서 인간의 자유가 희미해지고 있다. 끔찍한 사회다. 불필요한 규제로 제 목을 쥐며 스스로 불행해지고 있다. 많은 정신병이 불필요한 규제에 의한 것을 이해하길 바란다. 사회에 필요한 일들, 학업, 직무, 연애, 결혼, 출산 등 인간의 모든 활동은 지나친 강박 없이 적절한 도파민 분비로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구조가 되어야, 사회가 정신병이 줄어들고 정상 상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5) 교육 체계
현행 교육은 인간의 논리적 메커니즘에 맞춰 교육 체계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특히 인터넷이 등장하고 AI의 발전으로 새로운 정보 처리 기술이 등장한 시점에서, 기존과 다른 방식의 학습과 평가가 이루어져야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 곧바로 사회 생산 활동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추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학생들의 우울증이 심각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학습에 대한 제대로 된 동기 부여가 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최근에는 SNS에서 비교하면서 자존감이 낮아지는 것으로 더 심각한 상태일 것이다. 그러므로 최소한 학업에 있어서는 스트레스가 적을 수 있도록 모든 학업 과정에서 적절한 도파민 분비를 통해 학업 행위를 긍정적으로 여길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일반 지능에서 난이도가 낮은 학문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좀처럼 없다. 쉬우니까 딱히 뇌의 연산에 들어가는 에너지 소비가 적어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쉬운 것은 보통 문제를 풀고 느끼는 성취감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난이도가 높아질수록 분비되는 도파민보다 에너지 소비량이 높아지면서 그것에 많은 피로를 느끼고 스트레스를 받게 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려면 어려운 것에 도전하는 것으로 도파민이 분비되는 상태가 이뤄져야 한다. 즉, 도전 정신 학습을 해야 학업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다. 도전을 해서 어떤 것을 성취하는 것으로 보상이 이뤄진다는 것을 학습해야, 도전을 하려 할 때 도파민이 분비되어서 그것을 긍정적으로 여기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거나 적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 교육은 도전 정신을 키우는 커리큘럼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왜냐하면 도전 끝에 누군가는 성공하고 실패하는 과정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으로 누군가 상처 입는 것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면서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운동회조차도 승패가 나뉘지 않도록 조정하고 있다고 한다. 분명 이겼는데 이긴게 아닌게 되고 있다고 한다. 이러니, 지금 학습하는 학생들은 제대로된 도전 정신을 배울 기회가 없다. 학생을 위해서라면서 도덕적으로 지나치게 어려운 것을 도전하는 걸 강제하면서 고통받은 기억을 통해 도파민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에 어려운 것을 할 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 밖에 없다. 단순히 도덕으로 무언가 결정할게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의 논리적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인간을 위한 방법을 택해야 한다.
도파민 분비 유무, 도파민이 제대로 분비가 안되면 ADHD나 파킨슨병과 같이 세포가 동작하려 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굉장히 중요하다. 도파민 분비 메커니즘 학습을 제대로 못해서 학업 성적 차이가 난다면, 그냥 이건 학습 환경이 나빠서 그런 것이다. 공부를 할 때 도파민이 제대로 분비되어 그걸 쾌락으로 느끼는 인간과 도파민이 제대로 분비되지 않아 그걸 고통으로 느끼는 인간 중 누가 학습 효과가 좋겠는가? 이걸 선천적 재능만의 차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는데, 도파민 분비는 가치관의 영향으로도 달라지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경험이 아예 없거나 안좋은 경험이 있으면 그걸로 도파민이 제대로 분비가 안된다. 특히 시험에 합격하면 어떤 보상을 주겠다 해놓고 보상을 주지 않으면 그걸로 도파민이 제대로 분비되지 않아 공부에 흥미를 잃게 된다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와 같다. 만약 현재 도전 정신을 학습하지 못하여 만약 어떤 어려운 것에 대한 도전에 도파민이 제대로 분비되지 못하여 학업에 차질이 빚어진다면, 극단적으로 도전을 할때 도파민 분비 음료 같은 것을 먹어보는 것도 좋을지도 모르겠다.
인터넷의 등장과 AI의 발전으로 정보 처리 기술이 과거와 달리 급격하게 많아졌다. 그러면서 현재 사회 생산은 인터넷과 AI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은 상태다. 그러나 교육은 그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평가에 쓰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학습조차도 그것을 활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과 AI로 키워드를 주로 기억하고 있으면 충분히 지식의 활용이 가능함에도, 보통 지식의 학습과 평가는 많은 기억력을 요구하고 있는 편이다. 단순히 많은 것을 기억한다고 좋은게 아니다. 인간의 뇌 활용 에너지는 한계가 있는데, 암기에 치우치면 다른 것에 투입되는 에너지 양이 줄어들게 되면서 뇌 활용 능력이 낮아질 수 밖에 없다. 기술의 발전으로 암기의 필요성이 줄어들면, 학습이나 평가도 암기보다는 지식의 활용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회 사상과 교육의 발전이 더뎌지면서 현재 교육을 받고 사회에 진출한 이들이 사회의 기대치에 못미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경력자를 우대하면서 신입은 어디서 경력을 쌓느냐고 말하고는 하는데, 그 말은 달리하면 현재 학교의 교육 품질이 기업의 기대치에 못미치는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현재 시대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교육만이 아니다. 인터넷으로 정보 처리가 기본권이 되면서 자유주의가 극단적으로 확산되고 있음에도 아직 과거에 머무른 기업도 많기 때문이다. 그것과 별개로 사회 초년생의 생산 능력이 기대치에 못미치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렇기에 적절한 동기 부여와 시대 변화에 따라가는 학업과 평가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인터넷과 AI에 적응한 학업과 평가는 간단하다. 그것을 학업과 평가에 쓴다는 것을 전제하면 된다. 학업은 둘째치고 평가에 있어 인터넷과 AI를 어떻게 쓰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건 오픈북처럼 생각하면 된다. 인터넷과 AI를 쓰면서 문제 해결의 난이도가 낮아질텐데, 그만큼 문제의 레벨을 올리면 된다. 그러면 인터넷과 AI의 활용 능력이 평가되면서, 실제 사회에서의 생산 능력을 평가할 수 있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학문에 있어 그와 같은 방식이 동일하게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가능한 것은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시대가 변하면서 연령과 무관하게 새로운 지식을 배워야할 필요가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노년이 되면 새로운 지식을 배우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물론 노년층도 필요한 것은 어떻게든 배워서 쓰고는 있지만, 적극적이지는 않다. 그것에 대해 본래 고정 관념이 원인이 아닐까 싶었는데, 어쩌면 도파민 분비가 줄어들면서 새로운 지식을 배울 뇌세포 활성화가 잘 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만약 도파민 문제로 새로운 지식 습득이 어려운 것이라면, 노년에 맞춰진 도파민 분비 음료나 약 등이 개발되어 새로운 지식 습득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4. 자유
[자유: 1.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자유는 상당히 주관적인 개념으로 생물학적인 개념보다는 인문학적인 개념이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가 무엇이냐에 따라 자유의 의미는 전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충동대로 사는게 자유로운 것이라 할 수 있고, 누군가는 사회 규칙을 지키며 사는게 자유로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자는 사회 규칙에 지배받으며 사는게 부자유라 생각할 수 있고 후자는 충동에 지배받으며 사는게 부자유라 생각할 수 있다.
자유는 관점마다 의미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확실하게 공통된 것은 하나 있다. 알면 알수록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충동대로 사는 것이 자유롭다 여기는 이도, 사회 규칙을 지키며 사는 것이 자유롭다는 이도, 그 누구더라도 알면 알수록 자유로워진다. 어둠에 대해 알자 어둠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짐승에 대적할 방법에 대해 알자 짐승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식량을 효율적으로 양산할 수 있는 방법을 알자 배고픔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병을 치료할 방법을 알자 병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사회의 수많은 규제 억압도 인간에 대해 알면 알수록 불필요한 규제와 억압이 사라지면서 인간이 보다 자유로워질 것이다. 힘든 노동도 기술이 발전하여 대신할 것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인간이 보다 자유로워질 것이다. 늙음과 죽음도 기술이 발전하여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면 인간이 보다 자유로워질 것이다.
현재 인류의 학문은 학문마다 전문 분야가 따로 있어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많다. 그 중 철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다양한 학문을 폭넓게 알아야 할 학문일 것이다. 철학이야말로 다양한 보편적 지식을 통해 사물을 보는 관점을 바꿔 사물의 새로운 의미를 알아야하는 학문이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철학은 옛 단어의 의미를 해석하는데에 중점을 두었다면 앞으로 철학은 사물의 의미를 새로 아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인류가 아는 것을 늘려 인간을 보다 자유롭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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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AI와 대화를 많이 해서 AI 대화 목록을 첨부할까 했는데 너무 길어서 못하겠어. 대화 내용 추출이 될까 싶었는데 그런 기능이 따로 안보이네. 대화에 쓴 AI는 제미니 AI. GPT와 그록도 해봤는데 긴 대화에 제한이 있어서 오래 대화는 못하겠더라.
만약 편향 정보 처리 AI가 나오면, 이용자와의 대화 자체가 정보 처리 구조에 속하니까 아마 대화를 기억하는 AI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네.
살아있는한 이 활동을 계속할 건데 이제 생활비 구할 곳도 없어서 한 번에서 두 번 정도 하고 못할 거 같아. 만약 내 활동에 가치를 느낀다면 지원을 해주면 고마울거야.
지금 환경이 많이 안좋아서 활동에 지장이 가고 있어. 여유가 생기면 이사 가서 도파민이 잘나오는 사상하기 좋은 환경에서 사상할 수 있으면 좋겠다.
다음 글은 일단 정한 주제는 있지만 정확히는 AI와 대화를 하면서 결정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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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좌: 478-21-0193-861 국민은행 정승훈
안녕.
사상가 정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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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실권 (0)
2024/12/31 AM 12:33 |
실권
[실권: 1. 실제로 행사할 수 있는 권리나 권세.]
[사회: 3.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형태의 인간 집단.]
실권 개념은 사회를 간단하게 만든다. 사상을 단순하게 만든다. 체제를 이해하기 쉽게 만든다. 진로를 미로가 아닌 지름길로 만든다. 사회에 관한 것들이 알기 쉽게 된다. 이는 실권이 실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기 때문이다. 권한은 사회 내에서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의 범위를 의미하고, 권리는 이익이 가치 판단으로 각자 판단이 다르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적절하므로, 실권은 사회에서 범위 내에 실제 할 수 있는 일이 된다. 사회에서 인간이 실제 할 수 있는 일만 고려하면 간단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미사어구가 담긴 명분을 빼고 실권만 보면 사회 구조는 간결해진다. 예를 들어 절대 왕정은 지배의 정당성이나 백성을 돌볼 책무 같은 것을 빼고 실권만 보면 왕이 사회 모든 실권을 독점하는 구조다. 복잡하게 볼 필요가 없다. 사상이나 체제도 마찬가지다. 주장하는 바가 무엇이든 실권만 알면 된다. 실권만 알면 무엇을 추구해야할지가 명확하게 보이기 때문이 나아갈 길인 진로가 미로가 아닌 지름길이 되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사는 이들은 디지털 기술로 많은 정보를 접하면서 사회를 복잡하다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것 같다. 그런 이들에게 실권 개념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우선 실권 개념으로 구성한 사회 구조를 알아보자.
자연인(모든 실권) -> 사회 구성원(조건부 실권) -> 사회 체제(생활 권한) -> 사회 역할(권한 부여) -> 사회 질서(법) -> 사회 기준(도덕 또는 사회 항상성)
위의 내용은 실권을 기준으로 차례대로 실권이 줄어드는 것을 나타낸다.
‘자연인’은 자연에서 살면서 모든 실권을 가진 상태다. 옳고 그름과 같은 가치 판단과 무관하게 본디 인간은 모든 실권을 가진 상태임을 설명하기 위해 자연인부터 시작하였다. ‘사회 구성원’은 조건부 실권을 가진 상태다. 자연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나 사회에서는 조건에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달라지면서 개인의 실권이 축소된다. ‘사회 체제’는 사회 구성원이 살아가는 방식을 생활 권한으로 규정한다. 체제에 따라 개인의 권력과 권한이 달라지면서 개인의 실권이 축소된다. ‘사회 역할’은 규정된 생활 권한을 사회 구성원에게 부여하여 분산한다. 권한 부여 방식은 체제에 따라 달라지며 권한이 분산되면서 개인의 실권이 축소된다. ‘사회 질서’는 법을 통해 정해지며 사회 체제나 사회 역할을 명문화하여 체계화한다. 법은 체제에 따라 달라지며 권한이 세부적으로 분산되면서 개인의 실권이 축소된다. ‘사회 기준’은 지켜야만 하는 사회 보편 관념인 도덕 또는 사회가 정상 상태가 되려는 성질을 의미하는 사회 항상성이 있을 수 있다. 도덕은 일반적으로 사회 기준에 해당하며 법의 최소라 할 정도로 사회 보편적 관념을 의미하며 법적으로 금지된 것이 아님에도 심리적 규제를 통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드는 것으로 개인의 실권이 축소된다. 사회 항상성은 새로운 사회 기준에 해당하며 생물의 항상성 개념을 사용한 것으로 가치 판단 결과에 속하는 도덕과 달리 사회가 정상 상태가 되려는 성질 자체를 의미하여 가치 판단 대상이 되면서 기준이 사회 현재 상태에 맞춰지면서 개인의 실권 축소가 적게 된다.
대부분 사회는 보통 이런 실권 분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실권으로 본 사회에 대해 알아보자.
사회 체제(생활 권한) -> 사회 기준(도덕 또는 사회 항상성) -> 사회 역할(권한 부여) -> 사회 질서(법) -> 시대 변화(디지털) -> 항상성 조건(방법)
위의 내용은 앞으로 내용 전개를 요약한 것에 해당한다. 실권 축소 사회 구조가 아닌 이유는 사회 체제 이후 사회 항상성 개념을 설명해야 뒤의 내용 설명이 쉬워지기 때문이다.
사회 체제.
체제는 인간이 사회에서 생활하기 필요한 권한을 규정하는데, 그 방식에 따라 체제가 달라진다. 자유 체제면 모든 개인이 사회에서 자유롭게 생활하기 위한 권한을 규정한다. 왕정 체제면 모든 개인이 사회에서 왕에게 복종하며 생활하기 위한 권한을 규정한다. 주권자의 바람이 목적이 되어 체제로 결정된 것이다.
그럼 근대 이념 체제인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해 알아보자. 각 체제를 복잡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 실권으로 보면 그렇게 어렵지가 않다.
[자유주의: 1. 개인의 인격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개성을 자발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사상. 개인의 사유와 활동에 대한 간섭을 줄이고, 가능한 자유를 증대시키려고 하는 생활 방식이다.]
[민주주의: 1. 국민이 권력을 가지고 그 권력을 스스로 행사하는 제도. 또는 그런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 기본적 인권, 자유권, 평등권, 다수결의 원리, 법치주의 따위를 그 기본 원리로 한다.]
자유주의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개인에게 간섭을 줄이고 가능한 자유를 증대시키려는 체제다. 이것을 실권으로 보면 실권 분산 체제라 할 수 있다. 개인이 많은 권한을 실제 행사할 수 있어야, 간섭을 줄이고 자유를 증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실제 권한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권한 분산 제도가 선거 제도와 시장 제도다. 선거 제도를 통해 개인에게 선출직 공무원의 인사 권한을 부여하여 정치 참여를 할 수 있도록 한다. 시장 제도를 통해 개인에게 생산, 소비, 분배 등의 권한을 부여하여 경제 참여를 할 수 있도록 한다. 개인에게 부여된 사회 권한이 많아질수록 자유로워진다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개인 총기 소유 권한은 옳고 그름으로 보면 위험하다 여길 수 있는데, 실권으로 보면 단순히 개인에게 자경의 권한이 부여된 것뿐이다. 캐나다의 안락사 권한은 옳고 그름으로 보면 위험하다 여겨질 수 있는데, 실권으로 보면 단순히 개인에게 안락한 죽음 선택 권한이 부여된 것뿐이다. 이런 종류의 권한은 사회가 보편적으로 자유주의를 이해하고 있어야 허용될 수 있는 체제 레벨이 높은 권한에 속한다. 자유주의는 실권 분산 체제라 이해하면 된다. 이처럼 자유주의를 실권 개념으로 단순하게 만들 수 있다.
민주주의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국가에 속한 개인이 권력을 가지고 권한을 행사하는 체제다. 사전에는 권한이 빠져있는데, 권력은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하고 권한은 범위 내 할 수 있는 일을 의미하므로, 권력 행사를 풀어서 보면 권력을 가지고 권한을 행사한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실권으로 보면 권력 상수 권한 변수 체제라 할 수 있다. 권력의 성질상 권력의 높낮이가 다르면 낮은 측의 권력이 행사되지 않을 수 있다. 강자가 약자를 억눌러 약자의 권력 행사를 막거나, 다수가 소수를 억눌러 소수의 권력 행사를 막을 수 있다. 그렇기에 개인이 권력을 행사한다는 내용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모든 상태의 권력은 달라지지 않는 상수가 되어야 한다. 권력은 강자가 1이면 약자도1이고 다수가 1이면 소수도 1이어야 한다. 강자든 약자든 다수든 소수든 권력은 같은 값이어야 부당한 권력 행사를 막을 수 있게 된다.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권한을 행사하면, 권한끼리 충돌하여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럴 때 만약 권력이 다르면 높은 권력이 낮은 권력을 억눌러서 높은 권력의 권한이 행사된다. 예를 들어 강자의 갑질이나 다수의 동조 압력이 권력이 달라 발생하는 부당한 상황에 해당한다. 이렇게 강자와 약자 사이에 권력이 다른 것이 권위주의가 되고 다수와 소수 사이에 권력이 다른 것이 전체주의가 된다. 반면 권력이 같으면 보다 논리적인 측의 권한이 행사된다.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는 것은 비민주적이라는 인식이 많지만 다수가 소수를 억누르는 것은 민주주의를 단순히 다수의 의견이라 해석하여 민주적이라는 인식이 많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개인의 권력 행사를 막는 것은 독재에 해당한다. 강자가 약자의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독재라면 다수가 소수의 권력을 차지하는 것도 독재다. 모든 개인은 권력 행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권력은 모두가 언제나 같아야 한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사회 구성원에게 권력을 위임받아 왕과 귀족으로 추대된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이 가진 인사 권한으로 정치 권한을 부여받아 선출직 공무원이 된 것이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권력이 일반 개인보다 높지 못하기 때문에 부당하게 그들의 권한을 침해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일반 개인의 권력도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권력보다 높지 못하기 때문에 부당하게 그들의 권한을 침해할 수 없다.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개인의 권한을 부당하게 침해한다면 자격을 잃고 탄핵이 될 수 있다. 다수 국민의 의견이라도 대통령 개인의 권한을 부당하게 침해할 수가 없다. 대통령의 탄핵이 가능한 것은 모든 개인이 권력이 같고 실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권력이 차등하면 언제든지 권한을 회수할 수 있어 실권은 권력을 가진 자에게 있다. 권력이 동등하면 권한의 부여와 회수는 정당할 때에만 가능하여 사회 모든 권한은 실권이 된다. 대통령을 왕으로 추대하듯이 하는 것을 민주주의라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은 주권자에게 실권이 없는 민주주의다. 이렇듯 권력이 같고 권한이 다른 것이 되어야 민주주의에 부합하는 상태가 된다 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권력 상수 권한 변수 체제라 이해하면 된다. 이처럼 민주주의를 실권 개념으로 간단하게 만들 수 있다.
자유주의는 실권 분산 체제다. 민주주의는 권력 상수 권한 변수 체제다. 자유주의에서 모든 개인에게 분산된 권한이 실제 행사할 수 있으려면 민주주의로 모든 개인의 권력에게 권력이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모든 개인이 권력이 같으려면 자유주의로 모든 개인이 실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분산되어 있어야 한다. 실권 개념으로 보면 자유주의 외의 민주주의는 전부 실권이 보장되지 못하는 체제에 불과하다.
[사회주의: 1. 사유 재산 제도를 폐지하고 생산 수단을 사회화하여 자본주의 제도의 사회적 · 경제적 모순을 극복한 사회 제도를 실현하려는 사상. 또는 그 운동.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사회 민주주의 따위를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다.]
[공산주의: 2. 공산주의자들이 계급 지배의 도구라고 여기는 국가가 철폐되고 생산 수단의 사회화가 실현된 사회 경제 체제.]
사회주의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생산 수단이라는 소유물을 사회화하자는 체제다. 이것을 실권으로 보면 중앙 집권 정부 체제라 할 수 있다. 생산 수단이라는 소유물을 사회화를 하면 사회 결정 권한이 있는 정부가 그에 대한 권한을 독점하게 된다. 정부가 생산 수단 소유물에 대한 권한을 독점하면 생산 수단으로 생산된 생필품을 통해 다른 권한도 전부 독점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정부가 사회 모든 권한을 독점해도 민주적으로 일을 처리하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어떤 정부는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민주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견제 장치가 없는 이상 매우 위험한 상태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정부의 권한 행사에 불만을 가졌다 가정하자. 그럴 경우 정부가 가진 생산 수단 권한으로 생산한 생필품 공급을 차단하면 일상 생활이 지극히 어렵게 되기 때문에 대부분 개인은 정부의 말에 굴복하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제대로 견제할 수가 없다. 민주적이기 위해서는 정부와 개인의 권력이 같아야 하고, 정부와 개인의 권력이 같기 위해서는 각자 가진 권한이 달라 서로 견제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아무리 민주주의를 말하고 노동자를 위해서라고 말한들 개인에게 권한이 주어지지 못하면 개인은 실권 행사를 할 수 없게 된다. 이 시점에서 사회주의는 굉장히 불안정한 체제인지 알 수 있다. 미사어구가 담긴 명분으로 정부가 개인의 모든 권한을 가져가 행사할 수 있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사회주의의 주장이 어떠한들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실권만 보면 견제 장치가 없어 절대 왕정이나 다를 바가 없을 수 있다. 현재 인류 문명을 실권으로 보면 절대 왕정으로 사회의 모든 실권이 중앙에 집중되어 있다가 자유 혁명으로 개인에게 분산되었다가 사회주의 혁명으로 다시 중앙에 집중되는 형태다. 이게 어떻게 인류 문명의 진보라 할 수 있는가? 말이 안된다. 사회주의는 단순한 퇴보다. 극단적으로 보면 보증 사기보다 심각하다. 빚을 보증해주면 사업에 성공해서 크게 갚겠다. 실권을 위임해주면 평등 사회를 이룩하여 행복하게 해주겠다. 사회주의자들은 각자 본인의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고 있을 수 있다. 그런 이상은 개인의 권한을 빼앗지 말고 개인을 설득하여 실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떻게 개인이 실제 권한 행사를 할 수 없도록 해놓고 민주주의라 자칭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많은 공산주의 국가가 독재 국가가 되고 사회 민주주의 국가조차 다수가 소수에게 동조 압력을 가해 다수가 원하는대로만 하면서 소수를 무시하는 사회가 되는 것은 개인에게 실권이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사회 실권을 정부에 집중하는 중앙 집권 정부 체제다. 이처럼 사회주의를 실권 개념으로 간단하게 만들 수 있다.
공산주의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사회주의를 실현한 경제 체제다. 이것을 실권으로 보면 중앙 집권 정부의 경제 체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근대 이후 시장 경제 체제가 경제 체제로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경제가 정치로부터 독립된 권한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정치와 별개로 시장의 거래가 시장 원리를 통해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하면서 시장 경제는 경제 체제로서 독립될 수 있었다. 시장에 속한 개인은 실권을 행사하여 경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중앙 집권 정치 체제로 정부에서 생산, 소비, 분배를 설계하여 행하는 것으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 활동에 해당한다. 공산주의는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지 못했기 때문에 경제 체제가 아닌 정치 체제에 속하게 된다. 애초에 경제 체제도 아니었으니까 대부분 공산주의 체제는 경제 정책에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무슨 공산주의가 실현하기 어려운 이상이라 실패했다는 말이 있는데, 경제 체제도 아니고 보증 사기보다 심각한 실권 강탈 체제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은 당연했다. 보증 사기 당하는 것을 보고 그게 이상적인 것이라 실패한 것이라 떠드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특히 심각한 공산정은 가짜 기부 단체와 다를 바가 없다. 가짜 기부 단체가 기부금 대부분을 유용하고 일부만 기부하듯, 국가 실권을 독점하여 이익을 대부분 먹은 다음 자투리만 평등하게 배분한다. 그걸 보고 평등 사회가 이룩되었다며 떠드는 것을 보면 어처구니 없다.
자유주의 체제는 온갖 안전 장치로 개인의 실제 권한을 보장하는데, 공산주의 체제는 보증 사기와 같이 제대로된 안전 장치도 없으니 한번 독재 구조가 갖춰지면 벗어나기가 어렵다. 대부분 공산주의 체제는 경제 정책에 실패하면서 두 가지의 길을 걷는다. 중국과 같이 시장을 개방하여 시장 경제를 일부 도입하거나 북한과 같이 도덕적 명분 독재에서 군사 지배 독재로의 변화를 꽤하게 된다. 사실상 절대 왕정과 공산주의의 차이는 단순히 도덕적 명분 또는 군사적 폭력이다. 공산정이 도덕적 명분으로 개인의 실권을 강탈한 다음 개인이 불만을 가지고 항의할 때쯤에는 그 실권으로 군사력을 장악하여 무력으로 지배한다. 공산주의는 경제를 다시 정치에 속하게 만든 정치 체제다. 이처럼 공산주의를 실권 개념으로 간단하게 만들 수 있다.
근대 이념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모든 개인에 주권자가 있음을 전제하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대부분 실권이 없는 가짜 민주주의다. 사회 민주주의는 민주적인 척을 하지만 개인에게 도덕적 행동을 하도록 동조 압력을 넣어 강요하는 체제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가치 판단 권한은 개인에게 주어져야 한다. 개인이 가치 판단한 것이 표현되어도 부당합 억압이 없어야 진정한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근대 이념 체제에서도 군사 독재가 이뤄질 수 있는데, 그것은 위의 체제와 별개로 정복 국가 체제로 보면 된다. 사회 권한을 정부에 무력을 통해 집중하여 지배하는 체제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에 다양한 국가 체제가 존재하는데, 실권으로 보면 간단히 구분이 가능해진다.
사회 기준.
사회 기준인 도덕과 사회 항상성 개념에 대해 알아보자.
[도덕: 1. 사회 구성원들의 양심, 사회적 여론, 관습 따위에 비추어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 준칙이나 규범의 총체. 외적 강제력을 갖는 법률과 달리 각자 내면적 원리로서 작용하며, 또 종교와 달리 초월자와의 관계가 아닌 인간 상호 관계를 규정한다.]
[가치 판단: 1. 판단하는 사람의 가치관이 개입되는 판단. 주로 진, 선, 미 따위의 가치 일반의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에 객관적인 진위의 판별이 쉽지 않다. 이를테면 ‘이 꽃은 아름답다.’나 ‘철수는 착하다.’와 같은 판단이 이에 속한다.]
실권으로 보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진보가 아니다. 아님에도 진보로 여겨진 것은 사회에서 옳고 그름에 관한 가치 판단 권한이 개인에게 없고 도덕에는 있었기 때문이다. 도덕을 주장하는 자들이 도덕을 근거로한 가치 판단 결과를 도덕을 명분으로 가치 판단 권한을 행사하여 사회에 널리 알린다.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은 옳고 그름에 관한 가치 판단 권한이 도덕에 있다고 여기면서 그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다. 그러면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평등이란 명분은 도덕이 옳다 판단한 것이므로 개인의 실권이 어떻게 되든 인류 문명 수준이 높아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것들이 진보가 된 것이다. 물론 실권이나 사회 메커니즘을 고려하면 말도 안된다. 단순한 퇴보다.
도덕은 옳다고 여겨서 마땅히 해야만 한다 생각하는 사회 보편적 관념의 총체다. 도덕을 학문으로 체계화한 것을 윤리라 부른다. 도덕이 근본이라 판단되어 이런 종류의 개념을 도덕으로 부르겠다. 인류 문명이 시작하면서부터 인류가 옳다고 여긴 것을 전부 도덕이라 부른다. 원시의 도덕, 고대의 도덕, 중세의 도덕, 근대의 도덕 같이 시대와 관계 없이 사회에서 옳다 여긴 것은 전부 도덕이다. 삼강오륜이나 십계명은 물론이고 연령 차별이나 명예 살인도 도덕에 속한다. 부조리가 도덕이면 부조리의 행함이 도덕이고 부조리의 행하지 않음이 부도덕이다. 차별이 도덕이면 차별하는 것이 도덕이고 차별하지 않음이 부도덕이다. 어째서 인종 차별이 끝나지 않는가? 그것을 옳다고 여긴 사회 집단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민족주의 같은 배타성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파시즘, 나치즘, 홍위병 같은 전체주의도 그들 사회에서 옳다 여긴 것을 행하면서 나타난 현상에 불과하다. 도덕은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다. 도덕뿐만이 아니라 모든 가치가 그러하다. 즉 도덕 자체를 판단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따라야 할 것이 아니라, 모든 개인이 가치 판단 권한을 가지고 직접 판단하여 결정하여 행동해야 한다.
모든 도덕이 판단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도덕 중에서 논리적인 판단이 가능한 주장은 도덕에서 독립되어 새로운 개념이 된다. 도덕은 사회 내에서 지금까지 사회 보편적으로 옳다 여겼던 주장의 총체. 논리로 구분한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상호모순이 기본일 정도로 엉망진창이다. 그런 상황에서 문명이 발전하면서 도덕 내에 타당한 주장은 자연 계열이나 인문 계열에서 독립되었다. 예를 들어 ‘A음식을 먹으면 안된다’ 같은 것이 도덕으로 남아있었다고 하자. 그걸 자연 계열에서 A음식에 인간에게 해로운 성분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그 도덕이 자연 계열의 새로운 개념이 되었다. 그러면 그 주장은 더 이상 도덕으로 남아있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매점매석을 하면 안된다’ 같은 것이 도덕으로 남아있었다고 하자. 그걸 인문 계열에서 시장 원리를 통해 시장 경제에 해로운 불공정 활동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그 도덕이 인문 계열의 새로운 개념이 되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논리적으로 정리된 것은 전부 새로운 개념으로 빠져나가고, 그렇지 못한 것은 상징적인 몇 가지 개념 외에는 마구잡이로 섞여서 남아있는 상태다. 그렇게 인류의 문명이 발전하여 각 주장의 논리적 증명이 되어갈수록 도덕에 남아있는 것은 비논리적인 관습들이 되게 된다. 반말하지 마라, 히잡 써라, 정조를 지켜라 같이 현대 과학을 기반으로 한 논리로 정리가 안되는 것들이 주로 남게 된다. 많은 개념이 논리적으로 정리되어 이제 도덕에서 차지하는 사회에서 옳다는 개념의 비율이 작아졌지만, 도덕의 가치는 지나치게 높다. 수많은 논리보다 적은 비논리가 사회를 주도하면서 파탄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회가 발전할수록 도덕이 사회에 해롭게 되며, 도덕적인 사회일수록 비논리적인 사회가 된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PC주의, 여성주의 같은 사상들은 지극히 도덕적이다. 가치 판단 권한을 독점하고 도덕을 근거로 본인들이 판단한 비논리적인 결과를 사회 전체에 강요한다. 이른바 리버럴(자유주의적)라 불리는 이들이 PC주의를 주장하면서 자유를 외치는데, PC주의는 가치 판단 권한을 독점하고 개인의 가치 판단 권한을 인정하지 않는 부자유로운 사상이다. PC주의에서 규정한 사실과 거짓,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을 판단하지 못하고 따르라 강요하고 있지 않는가? 개인의 가치 판단 권한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자유로운 것에 해당할 수 있는가? 과학적 사실이라 증명된 것도 PC가 판단한 결과와 맞지 않으면 부정하고, 절도는 나쁜 것이라 판단한 것도 PC가 판단한 결과와 맞지 않으면 부정하고, 보편적 미가 아름답다 판단된 것도 PC가 판단한 결과와 맞지 않으면 부정하지 않았는가. 현재 PC주의에서는 고전적 미가 자유롭지 못하고 다양성 미가 자유로운 것이라 가치 판단을 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실권으로 보면 자유는 그런 식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탈리아 미인 대회에서 고전적 미가 우승했다고 하고 프랑스 미인 대회에서는 다양성 미가 우승했다고 하는데, 그 자체가 자유 부자유를 결정하는게 아니라, 판단 권한을 가진 이가 자유롭게 가치 판단했으면 자유로운 것이고, 누군가 압력을 넣어 가치 판단을 하게 했으면 부자유로운 것이다. LGBT 같은 소수자, 흑인 여성 아동 등 약자라 여겨졌던 이들의 실권 보장에는 동의하지만, 가치 판단 결과를 강요하여 개인의 가치 판단 권한을 인정하지 않거나 특정 개인에 대한 부당한 특혜로 개인의 권한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일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은 자유롭지도 민주적이지도 못하다. PC주의 주장 중 성별 선택권에 대해 논란이 많다. 성별 선택권은 분명 개인의 실제 권한에 속한다. 그러나 사회 역할 중에서 대상의 생물학적 성별이란 개인 정보를 알아야할 필요가 있는 경우가 있다. 화장실이라던가 여성 스포츠라던가. 그 역할의 실권에는 대상의 특정한 개인 정보 수집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즉 성별 선택권은 개인의 자유에 속하나 개인 정보가 필요할 때에는 생물학적 성별을 기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성별 선택권은 자유권만 볼게 아니라 개인 정보 수집 권한도 봐야 한다. 그러면 사안이 단순해진다.
여성주의도 가치 판단 권한을 독점하고 도덕은 근거로 본인들이 판단한 비논리적인 결과를 사회 전체에 강요하고 있다. 여성주의의 대부분 판단 근거는 여성의 주관적 감정 상태, 즉 기분이다. 여성, 특히 여성주의자가 봤을 때 기분이 좋으면 좋은 것이 되고 기분이 나쁘면 나쁜 것이 된다. 거기에 타당한 논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폐경이란 단어에서 폐가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가치 중립적인 의학 용어를 무시하고 완경이라 부르고, 그것을 사회에 강요하고 있다. 단어 교정 이유 대부분이 그냥 기분 나빠서다. 여성주의자들은 그런 식으로 단순히 개인이 기분 나쁜 것을 사회적으로 나쁘다 판단된 것마냥 사회가 돌아가도록 조작하려 하고 있다. 특히 성인지 감수성이라 말하며 사법의 법적 판단 권한까지 침해하고 있는 중이다. 성인지 감수성은 여성성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할 감수성을 말한다는데, 여기서 여성성은 가부장제 시기 교육받은 여성의 주관적인 여성성에 해당한다. 당시 여성이 여성 정조관념을 교육 받아 성적 수치심이 강하고, 여성 약자 주장을 교육 받아 수동적이고 약자에 대한 배려나 혜택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주관적으로 기분 나쁠 수 있는 것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는 감수성이 성인지 감수성이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차량의 흔들림에 의해 남성과 접촉하는 것조차 성적 수치심을 강하게 느끼는 것을 이해해야 하고, 여성에 대한 과한 배려나 혜택이 주어지는 것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의 주관적 감정 상태, 기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런 것을 논리적이라 할 수 없으니까 도덕에 남아있는 것이고, 도덕이라고 말하면서 가치 판단 권한을 독점하는 것으로 심지어 사법의 가치 판단 권한까지 침해하는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로 현재 한국은 몹시나 불합리한 상태다. 여성 차별은 여성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여성 차별주의자만이 아닌 여성주의자도 예외는 아니다.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여성의 옷차림을 강제하는 것이나 여성주의자가 여성의 옷차림을 강제하는 것이나 둘 다 여성 차별이다.
PC주의나 여성주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어떤 명분으로 특정 권한을 독점하여 지배하는 사상이다. 그것으로 PC주의나 여성주의의 대상에 속하는 이들은 온전한 권한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다. 과거 흑인이 백인에게 순종해야 했다면 현재는 PC주의에 순종해야 하고, 과거 여성이 남성에게 순종해야 했다면 현재는 여성주의에 순종해야 한다. 흑인이나 여성은 그걸 강요당하고 있다. 대상자들에게 가치 판단 실제 권한을 주고 직접 판단하게 하는게 아니라, 직접 판단한 결과를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을 뿐이다. PC주의와 여성주의의 수혜자이자 피해자인 이들에게 묻겠다. PC주의나 여성주의의 주장에 맞서 본인의 가치 판단을 주장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이 실권을 보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트럼프를 뽑는 흑인은 배신자로 낙인을 찍히고, 남성의 편을 들어준 여성은 명예 남성이라 낙인이 찍히고 있다. 그 사상들에 맞서는 어떠한 주장도 허용되지 못한다. 대부분 이들은 일방적인 가치 판단 결과에 지배당할 뿐이다. 이것이 흑인이나 여성에 이익이 된다 주장해도 실제로 이익을 얻는 것은 일부다. 공산주의처럼 대부분 이익을 독점하고 자투리만 뿌리면서 그것이 이익이라 선전할 뿐이다. 진정 흑인이나 여성을 위한다면 이들에게 가치 판단 결과를 강요할게 아니라 직접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실제 권한을 줬어야 한다. 인권이라는 것은 개인의 권한을 보장하는 것에 있는 것이지, 개인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본인의 가치 판단 결과를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인권을 보장하는게 아닌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어떠한 주장을 타인이 수용하길 바란다면, 도덕으로 강요할게 아니라 논리로 설득해야 한다.
모든 개인에게 가치 판단의 실제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 모두가 자유롭게 사실과 거짓을 판단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아름다움과 추함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사회 기준이 도덕이어서는 안된다. 도덕은 가치 판단 결과로 그것이 기준이 되면 그것에 관해서 판단 자체를 못하게 된다.
[체제: 2.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볼 때에, 그 조직이나 양식, 또는 그 상태를 이르는 말.]
[항상성: 1. 생체가 여러 가지 환경 변화에 대응하여 생명 현상이 제대로 일어날 수 있도록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성질. 또는 그런 현상.]
사회가 발전할수록 도덕이 사회에 해롭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더라도 도덕이 필요하다 생각할 수 있다. 도덕이 부조리하든 불합리하든 상관없이 사회 기준이 있어야 사회 질서가 잡힐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각자 가치 판단 결과가 달라 의견이 충돌할 경우 도덕이라는 가치 판단 결과를 기준을 타협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덕은 비논리적 가치 판단 결과의 총체다. 논리적인 것은 새로운 개념으로 빠져나와 비논리적인 것이 남은 것이 도덕이다. 그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사회가 비논리적이게 되면서 엉망진창이 될 수 있다. 실제 도덕적인 것을 강조하면서 사회 구조가 합리성을 상실해버린 상태다. 그러므로 논리적인 사회 기준이 필요하다.
사회 항상성 개념은 도덕을 대체할 논리적인 사회 기준이 될 수 있다. 항상성은 환경 변화에 대응하여 생명 현상이 제대로 일어날 수 있도록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성질을 의미한다. 생물이 온갖 변화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이런 항상성 성질 덕이 크다. 그것을 사회에 적용한다. 사회 항상성은 사회 변화에 대응하여 사회 현상이 제대로 일어날 수 있도록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성질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단순화하면 정상 상태 유지 성질이다. 시대를 따지지 않는 어떤 옳고 그름이 기준이 되는게 아니라, 현재 사회 상태에 맞춰 정상 상태를 유지하게 할 수 있는 성질이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도덕은 과거 사회에 맞춰진 경우도 많아 사회 변화를 따라갈 수 없지만 사회 항상성은 현재 사회에 맞춰져서 변화할 때마다 따라갈 수 있다.
도덕은 죽은 개념이 남게 된다. 시대별로 해야만 한다는 사회 보편 관념이 다르기 때문에 과거 도덕이 남아 현재 사회를 어지럽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회 항상성은 사회 변화를 전제하고 현재 사회에 맞췄기 때문에 그런 잔재가 남지 않는다. 과거 도덕으로 어떤 것을 금지하는 것으로 사회가 정상 상태를 유지했다고 하자. 그런데 시대가 달라져 그 금지를 하면 사회가 정상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자. 그럼에도 그 금지가 도덕이면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르고 계속 금지하다가 사회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다. 만약 사회 항상성이라면 현재 사회 상태에 맞추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없다. 사회 항상성을 사회 기준으로 삼으면 언제든지 정상 상태를 지향하여 가능한 유지할 수 있다. 달리 말해 도덕으로는 정상 상태를 유지하지 못할 수 있다. 현재 한국에서 나타나는 저출산, 고자살, 저생산 등의 현상은 사회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여 나타나는 비정상 상태를 의미한다. 사회 항상성 개념으로 접근하면 사회 항상성이 깨진 상태라 할 수 있다.
도덕이 사회 기준이 되면 비논리적인 주장이 우선될 수 있으나 사회 항상성이 사회 기준이 되면 논리적인 주장이 우선된다. 도덕으로 보면 육식, 성욕, 휴식 같은 것은 죄악이므로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우선될 수 있으나, 과학으로 보면 인간과 사회의 정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육식, 성욕, 휴식은 단순히 필요한 개념이라는 주장이 우선될 수 있다. 도덕을 사회 기준으로 삼으면 비논리적인 옳고 그름이 사회 현상과 무관할 수 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누군가 옳다고 생각한 것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사회에 이로운 것이 아니다. 그냥 도덕적으로 행하기만 하면 모든게 다 잘되는 것이 아니다. 현상을 성립시키기 위한 조건은 따로 있고, 그것을 옳다 구분할 수 있으나 그것은 논리적으로 규명되어 더 이상 도덕이 아닌 과학인 상태다. 일정 이상 고기에 담긴 영양분을 섭취하여 육체를 유지하고, 사회에서 이성과 성욕을 발산하면서 아이를 낳아 사회를 유지하고, 필요한만큼 휴식을 취하면서 사회가 활동할 수 있는 에너지를 보충해야 한다. 그래야 인간과 사회가 정상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사회 항상성은 사회 뿐만이 아니라 체제도 포함된다. 도덕은 근대 이념 체제가 있기 전에 있던 개념으로 체제를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자유주의의 권한 분산과 민주주의의 권력 상수는 도덕이 사회 기준이 되어서는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 도덕적 명분으로 개인의 권한을 침해하고, 도덕적 명분으로 다수가 소수보다 권력이 높다 여기며 소수의 권한을 침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된다. 실제 그러고 있다. 반면 사회 항상성이 사회 기준이 되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정상 상태 유지를 위해 작동하면서 강자가 약자보다 권력이 높다고 여기는 권위주의나 다수가 소수보다 권력이 높다고 여기는 전체주의가 나타나는 것을 막을 수가 있다.
사회 항상성이 사회 기준이 되면 도덕적 규제나 법적 규제가 상당수 줄어들 수 있다. 현재 사회 체제와 아무 관계가 없는데 도덕을 명분으로 개인의 권한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검열 규제는 개인의 가치 판단 권한을 부당하게 침해한 것에 해당한다. 사회 항상성과 무관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개인의 판단으로 취사선택을 해야 한다. 현재의 검열 규제는 특정 가치 판단 권한을 독점하여 독단적으로 검열하고, 그 검열한 결과를 사회 전체에 강요하는 것에 불과하다.
많은 법적 규제가 있으면 산업 발전에 방해가 되어 기업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듯이, 많은 도덕적 규제가 있으면 인간 성장에 방해가 되어 인간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불필요한 규제 감소는 인간 자체를 성장하게 만들어 사회 전체가 성장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현재는 ‘약함’이 특혜 등 이익을 얻는 수단이 되자 대상을 의도적으로 약하게끔 만들어서 이익을 얻으려 하는 자들에 의해 많은 사회 구성원이 인위적으로 약해진 상태다.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모두가 의견을 내기 때문에 합리적인 결정이 어려울 수 있다. 특히 도덕의 경우 각자 다른 가치관을 가져 충돌하면서 결론이 나오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 항상성 같은 가치 중립적 개념으로 접근해 논리적인 항상성 성립 조건에 대해 판단하면서 결론 내리는 것으로 민주적임에도 합리적인 결정이 가능해야 한다.
정부(삼권) 또한 사회 항상성을 사회 기준으로 삼아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사회 항상성을 기준으로 제정하고 판단하고 집행해야 한다. 그러면 정책이나 제도를 통해 사회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가능하게 된다. 사회 항상성은 정상 상태가 아닐 때 정상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성질이기 때문에, 그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주먹구구식 정책이 아닌 자동 정상화 체계를 만드는 정책을 추진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상 상태는 도덕에서 독립된 새로운 개념들이 논리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 경제 분야는 정상 상태가 어떤지 수치적으로 정리된 상태다. 그 수치를 지향하는게 논리적으로 옳다. 사회 분야도 어렵지가 않다. 출산율은 2가 정상 상태로 알고 있다. 행복률은 가능한 높은 상태를 지향하면 될 것이고 자살율은 가능한 낮은 상태를 지향하면 될 것이다. 사회 항상성이 사회 기준이 되면 거기에 맞춘 논리적인 새로운 개념들도 나타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회 복지는 당연히 필요하나 도덕적 이유로 행할게 아니라 사회 항상성을 이유로 행해져야 한다. 복지는 인간의 육체로 가정하면 항상성이 깨져 병원에 간 상태라 할 수 있다. 무분별하고 비효율적인 단순한 복지는 과잉 처방으로 되려 사회 항상성을 깰 수 있다. 도덕을 사회 기준으로 삼으면 사회주의 같이 모든 대상에게 복지를 행하려 할 것이고, 사회 항상성을 사회 기준으로 삼으면 필요한 대상에게 복지를 행하려 할 것이다. 그것을 통해 개인에게 과한 개입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정상 상태가 되는 것이 이상적인 사회 복지다. 사회주의 영향을 받은 정부는 복지를 과하게 늘리려 하는데, 그것을 실권으로 보면 자원 분배를 시장 경제 원리를 통해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 개입으로 하려고 하는 것으로 정부 권한을 늘리려 하는 것에 해당한다.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최대한 개인의 실권을 보장하기 위해 가능한 시장 제도에서 분배가 되도록 하고 남은 부분을 복지를 행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회 항상성이 사회 기준이 되면 모든 개인이 가치 판단 권한을 가지고 자유롭게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다. 개인이 어떤 가치 판단을 하든 사회 항상성이라는 적정선이 기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보다 개인에 대한 폭넓은 실권 보장이 가능하게 되면서 개인은 보다 자유롭게 될 수 있다. 누군가는 특정 인종을 사랑할 수 있고 증오할 수도 있다. 보통 이런 증오는 도덕으로 보면 부정되는데, 사회 항상성으로 보면 증오는 긍정되나 증오의 행사는 부정된다. 간단히 말해 개인의 가치 판단으로 무언가 증오하는 것까지는 허용되나 그 증오로 사회 구성원을 공격하는 것에 의해 사회 항상성을 깨지는 것은 허용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이 증오로 다른 사회 구성원을 공격하는게 허용되면,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면서 사회가 정상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그게 사회 항상성이 깨지는 결과가 된다. 그렇기에 증오하는 대상을 공격하는 것을 금하고, 실제 행하면 처벌을 통해 허용할 수 없음을 알린다.
보다 자유롭게. 타인을 돕든 본인 이익만 챙기든 욕망에 충실하든 금욕을 하든 상관 없다. 도덕이나 종교도 사회 기준이 될 수 없을 뿐 개인은 자유롭게 추구해도 된다. 그것이 절대적이라면서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으면 된다. 각자에게 주어진 권한을 행사하며 자유롭게 살면 된다. 단지 그런 사회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 항상성 작동을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이 힘을 합칠 필요가 있다. 본인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상태를 정상 상태로 전제하고, 그걸 기준으로 항상성이 작동할 수 있도록 협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심이 있는 이들도 대부분 아프면 병원에 가듯이, 개인의 믿음과 사회 구조는 별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본인 이익만 추구하더라도 모순이 없다. 각자의 자유가 소중하다면 그런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 이익인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인류 문명의 진보는 자유주의 체제와 사회 항상성이다. 사회 항상성을 사회 기준으로 삼아 합리적으로 개인의 실권을 최대한 보장할 수 있는 체제가 보다 수준이 높은 사회 체제다. 사회주의 이전의 자유주의는 진보에 한번 실패했을 뿐이다. 이번 자유주의 진보는 사회 항상성을 통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도덕이란 가치 판단 결과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가치 판단을 하면 사회 현상을 예상해볼 수 있다. 한국과 세계로 두 가지 알아도록 하겠다.
[중매혼: 1. 중매로 이루어진 혼인.]
[호황기: 1. 경기가 좋은 상태나 시기.]
국가 단위 중매혼. (현재보다 이성 관계 악화 상태를 가정)
현재 한국은 여성계가 정치 세력화되어 있기 때문에 정계가 여성계와 척질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젊은 남성이 손해를 보는 구조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현재 남성은 사회에서 책임 권한은 많고 여성은 우대 권한이 많은 상태다. 책임도 이익이 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우대에 비하면 손해다. 특히나 성에 관해서는 더욱 그렇다. 대놓고 무죄추정원칙을 깨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아예 범죄를 조작하는 경우도 있다. 미사어구가 담긴 명분을 빼고 실익만 보면 남성이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앞으로 남녀 사이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현재 많은 이들이 성별 문제가 단지 20, 30대의 문제라 생각하는데, 기성세대와 여성주의의 성관념이 가부장제 여성성을 근거하여 남녀칠세부동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보통 미성년 남녀가 서로 어울리지를 못한다. 그렇기에 대부분 동성과 어울려 동성의 가치관을 이어가게 되는 것으로 앞으로 모든 세대는 현재 이상의 갈등을 빚을 가능성이 열린 상태다.
도덕이란 가치 판단 결과를 배제하면 앞으로 국가 단위 중매혼이 나타날 확률이 높다고 본다. 조건은 다음과 같다. 하나, 도덕에서 여성의 성을 도구화하기 위해 남녀칠세부동석이나 여성 정조관념을 가르침에 따라 여성 주관적 성의 가치가 낮은 상태다. 여성 주관적 성의 가치가 낮음에도 여성의 성의 비용이 높은 것은 남성의 수요가 높기 때문이다. 여성 입장에서는 성적 행위가 나쁘기 때문에 그 행위를 하려는데 드는 심리적 코스트가 높은 상태에서 남성의 수요도 높자, 남성 입장에서 여성과의 성적 행위에 높은 비용이 들어가게 되었다. 여성 주관적 성의 가치가 낮음에도 높다 착각되는 것은 이런 것에 의해 사회적 비용이 높은 상태기 때문이다. 성에 관한 비용이 높아지면서 외모에 관해서도 까다로워지는 것으로 외모 지상주의가 일반화된다. 그래서 여성 성의 억압이 강한 사회일수록 기본적으로 여성은 상향혼을 바라게 된다. 둘, 여성계의 정치 세력화로 여성 특혜가 일반화되면서 여성이 특별하게 여겨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아졌다. 기분이 나쁘다고 무고한 이를 처벌하려 한다거나, 대학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것은 특혜를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보다 더 높은 상향혼을 바라게 되었다. 하향혼은 물론이고 동등혼도 아예 쳐다도 안보는 경우가 많다. 셋, 반면 남성은 하향혼에 거부감이 적다. 정확히 말해 경제적 하향혼은 거부감이 적다. 남성 또한 외모 지상주의에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보통 외모적으로는 상향혼을 바란다. 남성은 경제적 하향혼과 외모적 상향혼을 바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상대라면 말그대로 몸만 와도 된다면서 적극적으로 바라는 경우도 많다.
여성은 외모적, 경제적 상향혼을 바라고 남성은 외모적 상향혼을 바란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남녀 사이가 나빠 연애 및 결혼율이 낮은 상태. 현재 40대 초반도 홀로 사는 이들이 많은 상황인데, 그보다 더 남녀 사이가 나쁜 20, 30대들은 더욱 더 심각해질 전망이다. 그러면서 남녀의 결혼 수요는 국가 밖으로 나가게 된다. 고립어 및 이성 관계 미숙 등 여러가지 이유로 중매 회사를 거쳐 외국인과의 만남을 가질 확률이 높다. 특히 한국은 시골에서 이미 외국인과 중매 회사를 통해 결혼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시스템이 갖춰진 상태다. 이것이 매매혼이라 비난 받기도 하는데 연애가 아닌 이상 중매는 조건 보고 하기 때문에 애초에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미 국제 결혼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즉, 어떤 트리거로 유행만 타면 국가 단위의 중매혼이 보편화될 수 있다. 국제 중매혼에 부정적인 이들도 한번 유행을 타면 자연스럽게 흐름에 맡겨 하게 될 수 있다. 현재 국제 결혼 사기 등의 문제가 있지만 보편화되면 사회가 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대하면서 보다 쉽게 해결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여성은 경제적 상향혼을 바라고 남성은 경제적 하향혼도 괜찮다고 한다. 그러면 여성의 국제 결혼 비율이 낮아지고 남성의 국제 결혼 비율은 높아진다. 또한 상향혼에 따른 경제적 권한을 고려하면 마치 가부장제 시기의 중매 결혼처럼 상향혼한 여성은 파트너 국가로 가고 하향혼한 남성은 파트너를 한국으로 부르게 된다. 젊은 여성은 떠나고 젊은 남성은 다른 국가 여성을 국가로 불러들인다. 이렇게 되면 여성계의 정치 세력화와 관계 없이 단순히 정치적 영향력이 젊은 남성이 커지게 된다. 단순 계산으로 표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외국에서 시집온 여성이 누구 말에 영향을 받아 표 행사를 하겠는가? 특히 경제적 여유가 있는 남성이라면 파트너의 가족 전체를 한국으로 이민 오게 할 수도 있다. 남성은 경제적 하향혼도 거부감이 적기 때문에 저소득 국가에서 이민올 확률이 높은데, 그러면 PC주의나 여성주의와 거리가 먼 이들이 늘어날 것이다. 일반적인 이민과 달리 젊은 남성의 경제력에 기대기 때문에 이민자 정책도 그리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다. 하향혼한 남성의 파트너가 여성주의와 가까워질 확률이 높지도 않다. 왜냐하면 한국 여성주의자들은 매매혼이라면서 그런 여성을 멸시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 한국 시골에서 한국 여성 공무원이 국제 결혼한 여성을 멸시한 사건이 있다. 이런 이유로 그런 젊은 남성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표의 수가 많아지게 된다. 여성계가 그토록 가부장제를 비판하면서도 가부장제 여성성을 성인지 감수성이라 말하며 그 시기 성관념을 주장한 결과, 국가 단위의 가부장제 중매혼이 나타나면서 젊은 남성의 사회적 영향력이 높아지는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현재 젊은 남성은 정계에 버림받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소외되고 있어 정치적 행사에도 소극적인데, 앞으로 실질적 표의 수가 높아짐을 이해한다면 아마 적극적이게 되면서 정치 판도가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국제 결혼 유행 정도에 따라 출산율도 유의미하게 변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국제 결혼을 하면 가임기 여성이 증가하는 것이므로 출산율 자체보다는 아마 출생아 수가 유의미하게 늘어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국제 결혼이 유행하더라도 주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이들이 할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 인간이 아이를 낳던 과거의 높은 출산율이 재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것만으로는 출산율이 정상 상태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성이 자유로워질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성이 자유롭게 되면 굳이 국제 중매 결혼을 할 이유가 적어지기 때문에 국내 결혼이 늘면서 그러한 흐름이 줄어들 것이다. 도덕을 빼고 각각 성질과 메커니즘, 프로세스를 고려하면 이런 결과가 나올 것이다라고 예상해볼 수 있다.
전 세계 호황기. (원자재 값이 실제 내렸을 때를 가정)
현재 전 세계가 미국 빼고 불황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조차 현재 인플레이션으로 허덕이고 있어 실질적으로 전 세계가 불황을 체감하고 있다. 미국에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인상해도 물가가 내리지 않는 상태다. 일전에 이것은 중국의 전략이 아닌가 싶었는데, 관점을 바꿔보니 어떠한 현상을 중국이 이용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근본적 원인은 좀 더 다르지 않나 싶었다. 계기는 미국 대통령 당선인인 트럼프의 공약이다. 환경 무시하고 자원을 생산하고, 전쟁을 끝내고, 재정 확장을 하고, 관세를 올리고, 미국 수출입 이익을 극대화한다. 도덕을 빼고 단순히 생각해보니까 어쩐지 전 세계 호황기가 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생각해보자. 미국에서 석유를 많이 생산하면 연료값이 내리는 것으로 무역 운송비가 내려가 전체적 물건 값이 내려간다. 전쟁이 끝나면 원자재 값이 내려간다. 재정 확장을 하면 소비가 늘어난다. 관세는 잘 모르겠다. 미국 수출입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원자재를 많이 팔면서 가격이 내린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원자재 값이 많이 내려가면서 물건 값도 내려가게 된다. 거기서부터 선순환이 발생하면서 경제가 호황기가 되지 않나 싶다.
물건 값이 내린다. 소비가 늘어난다. 늘어난 소비에 맞춰 생산이 늘어난다. 늘어난 생산에 맞춰 고용이 늘어난다. 늘어난 고용에 맞춰 소비가 늘어난다. 그것이 계속 반복되면서 시장이 활성화되는 것으로 경제가 성장한다. 이것은 전 세계 원자재 값이 내린 것으로 전 세계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에 전 세계 호황기가 올 수 있다. 물론 코로나 양적 완화로 풀린 돈, 중국 상품 생산 치킨런, AI 생산 등의 문제로 오래가지 않을 수 있지만 아마 당분간은 호황기가 오지 않을까 싶다. 당장 시장이 경색된 것은 소비가 줄었기 때문이므로 물가가 내려 소비가 늘면 가동하지 않던 공장이 가동하면서 어느 정도 활력이 생기게 된다. 중국 치킨런은 미국 정부가 대응할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고, AI 생산은 약간은 시간적 여유가 있다. 그렇게 되어 전 세계 경제가 성장하면 미국에 투자된 전 세계 자본이 다시 각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동시에 미국 또한 전 세계에 투자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미국 달러가 전 세계 분산되면서 미국 외 달러 가치가 내리는 것으로 미국 수출입 이익이 커진다. 미국 시장 내에 있는 달러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미국 내 달러 가치가 오르는 것으로 인플레이션이 안정화된다. 그러면서 미국 또한 체감 호황기를 맞이한다.
근본적으로 어디서부터 전 세계 불황이 시작되었는지 생각해보았다. 환경 보호를 위해 자원 생산을 줄인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초기 자원 생산을 줄였을 때에는 당장 경제적 영향에 대해 느끼지 못했었다가, 그걸 지속적으로 수년 수십년 하다보니 쌓이고 쌓이는 것과 함께 다른 문제들이 겹치면서 소비자가 감당하지 못하는 물가가 되면서 불황이 시작된게 아닐까 싶다. 다른 문제들은 아마 디지털, 소비 증가, 코로나 재정 확장, 미국 긴축, 중국 치킨런, 전쟁, AI 등일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다발적으로 전 세계 불황이 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점을 고려하면 호황기가 되기 위한 기준이 있을 거란 생각도 해볼 수 있다. 호황기 기준 국내 또는 세계 소비 지수 n을 만족하면 소비, 생산, 고용 선순환을 통해 경제가 성장한다는 것이다. 소비 지수 n은 경제 정책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책으로 조건이 충족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기업에서 고용을 줄인 것은 단순히 소비가 줄어든 것만이 아니라 AI의 문제로 앞으로 상황이 불투명해지면서 기업 비전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상품 생산 계획은 수년에서 수십 년을 고려하는데, 수년 뒤 AI에 의해 사업성을 상실하면 큰 손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만약에 정말로 당장 호황기가 오면 중국 경제 성장에 기대어 경제가 성장했던 때를 떠올리며 경제 개혁을 하지 않았던 때처럼 그것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하루라도 빨리 경제 개혁을 하여 앞날에 대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환경을 신경쓰지 않고 자원을 양산하면 환경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환경 정책은 소극적 자살이라 생각한다. 단지 환경 파멸의 시기를 늦출 뿐이지 실질적 문제 해결을 빠르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파멸 시기를 늦춰 개발에 대응하는 것도 타당할 수 있으나, 사회가 둔해진 상태에서는 그런 발전도 둔해지게 될 수 있다. 더욱이 인간의 성질상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다같이 손해를 감수하는 것보다, 기후 변화 문제를 해결하면 누군가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에서 적극적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므로 차라리 경제 발전을 촉진하여 문명 발전 속도를 빠르게 하는 것으로 실질적 문제 해결이 가능한 것이 인류 생존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빠른 변화가 필요하다. 빠르게 성장했던 한국이 정체하고 우수했던 유럽이 부진한 이유 중 하나는 단순히 사회 변화 속도가 느려졌기 때문이다. 보통은 사회의 변화가 빨라질수록 사회의 발전도 빨라진다. 어느 나라든 사회가 정체되어 답답하다면 사회 변화를 빠르게 할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면 도움이 될 것 같다. 도덕을 빼고 각각 성질과 메커니즘, 프로세스에 대해 생각해보니 이럴 것 같다는 예상이 되었다.
사회 역할.
권한의 부여와 권한의 행사 구조에 대해 알아보자.
[생산: 1. 인간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각종 물건을 만들어 냄.]
[규제: 1. 규칙이나 규정에 의하여 일정한 한도를 정하거나 정한 한도를 넘지 못하게 막음.]
권한 부여.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체제에서 사회 역할에 따른 권한 부여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판단으로 결정된다. 정치적 권한 부여는 선거 제도를 통해 개인의 판단으로 결정되고, 경제적 권한 부여는 시장 제도의 원리를 통해 개인의 판단으로 결정된다. 사법이나 행정의 관료 또한 선거 제도를 통해 선출된 공무원의 인사 권한에 영향을 받는다. 물론 비리나 담합 등의 행위로 권한 부여가 다른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지만, 기본은 인사 권한이나 소비 권한을 가진 개인의 판단이다. 이는 실제 권한이 개인에게 분산된 사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개인에게 실권이 있기 때문에 개인의 판단으로 사회가 조직된다. 반면 절대 왕정이나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대부분의 실제 권한을 정부가 갖고, 언제든지 부당하게 회수할 수 있는 권한을 개인에게 임시로 부과하는 경우가 많다. 정부에게 실권이 있기 때문에 정부의 판단으로 사회가 조직된다.
권한 부여에 관한 개인의 판단은 주로 능력과 가치관이 기준이다. 권한을 가지고 사회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를 우선하거나, 권한을 가지고 사회 역할을 수행하려고 하는 가치관을 가진 이를 우선한다. 보통은 전자가 우선되나 사명감이나 안보가 필요할 때에는 후자가 우선되기도 한다. 아무리 뛰어나도 스파이가 사회 주요 역할을 가지게 할 수는 없다. 권한 부여는 보통 개인의 손익으로 무겁고 가벼움이 결정된다. 본인에게 직접적인 손익이 클 경우에는 신중하게 판단하나, 그다지 크지 않을 경우에는 경망하게 판단한다. 국가 선거 권한과 기업 인사 권한 중 사회적으로 보면 보통 전자가 중요하나, 그것을 실행하는 개인의 입장에서는 전자는 인사 권한이 1/n 로 나뉘어 행사 권한 자체가 적고 인사 대상자와 이해 관계가 멀어 손익이 크지 못하고 후자는 여러모로 직접적인 손익이 크기 때문에, 주로 후자의 판단이 신중하다.
권한 부여는 도덕에 많은 영향을 받기도 한다. 할당제나 가산점 등과 같은 경우가 도덕적 판단에 의한 결과다. 도덕적 판단은 타당한 논리가 없기 때문에 반발을 많이 사지만, 도덕이기 때문에 무시하고 실행하는 경우가 많다. 설득할 수 있는 논리는 없지만 어쨌든 도덕이니까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냐는 식이다. 사회에서 시장 원리를 무시한 권한 부여가 사회에 어떠한 좋지 못한 영향을 주는지는 아무 관심도 없다. 사회 구성원이 할당제에 기대어 능력을 키울 생각이 사라지면서 능력 저하가 나타나거나, 사회 경제가 할당제에 의해 생산성이 악화되는 것에 관심이 없다. 단순히 도덕적인 일을 행하면 뭐든지 잘될 거라 생각하기만 한다. 만약 누군가 사회에서 사회에 공헌을 하거나 어떠한 부당한 손해를 입어 그에 맞는 지원이 필요하다면, 할당제나 가산점 등으로 시장 원리를 망가트릴게 아니라 시장 원리대로 돌아가게 한 다음에 추가적인 복지 지원을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권한 행사.
권한을 갖게 된 개인은 권한 행사에 앞에 권한의 본질이 무엇이고 권한 행사에 의해 어떠한 현상이 나타나는지에 대해 명확히 알 필요가 있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이 본인의 권한이 무엇이고 권한 행사를 어디까지 행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면서 생기고 있다. 그것에 대해 알아보자.
A. 권한 행사자와 사회 구성원이 이익을 보는 것이 사회 전체의 이익이 되는 행위. (생산, 소비 등)
B. 권한 행사자가 사회 구성원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는 행위. (규제, 수사, 고발 등)
C. 권한 행사자가 사회 구성원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 사회 전체에 손해가 되는 행위. (맹신, 범죄 등)
D. 권한 행사자가 본인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는 행위. (책임, 제재 등)
통상 A를 통해 시장 경제가 활성화된다. 그러나 A에서 제한 없는 이익을 추구하면 안정성이 부족하여 사고가 발생하거나 사회 항상성이 깨져 유지가 되지 못할 수 있다. 생산에서 감사 역할이 작동하지 않아 안정성이 부족하여 사고가 발생하거나, 생산에서 과도한 생산으로 생산자가 과로하여 죽는 것으로 사회 항상성이 깨진다거나, 생산에서 거래 과정에서 비리가 발생하여 부당한 손해를 겪는 사회 구성원이 생긴다거나, 소비에서 과도한 소비로 환경 파괴 및 사회 구성원의 건강 상태 악화가 나타날 수 있다거나 할 수 있다. 특히 시장 경제 체제에서 생산성이 중요한데, 생산성을 확인할 때 항상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단기 생산성은 높아져도 항상성이 깨지는 것으로 장기 생산성은 낮아질 수 있다. 지속 가능한 높은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성을 고려해야 한다. 그럼에도 A에서 제한 없는 이익을 추구해도 상관 없는 것은 B라는 적정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규제, 수사, 고발 등을 통해 A의 제한 없는 이익 추구에 제동을 건다.
통상 B를 통해 A의 적정선을 정한다. 그러나 B에서 제한 없는 이익을 추구하면 사회 구성원이 과도하게 손해를 보는 것으로 사회 전체에 손해가 발생할 수 있다. 보통 그런 것이 맹신이나 범죄가 되어 C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B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 구성원에게 손해를 주고 있다는 인식이 얕다는 것이다. 도덕에 의해 정의로운 공격이 정당화되면서 손해를 주는 것에 제동이 발생하지 않아 적정선을 넘어 피해를 주는 경우가 많다. 특히 그러한 행위로 이익을 얻는 이들이 제한 없는 이익을 추구하면 과도한 억압으로 사회 전체가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불필요한 것을 막는 불합리한 규제나 실적을 위해 범죄를 조작하는 수사나 무분별한 고발로 사회 전체가 큰 손해를 보게 된다. 한국은 개인에게 가치 판단 권한이 적어 검열 규제가 잦은 상태다. 보통 영등위, 게관위, 여성부 등과 같은 검열 규제 기관은 특정 분야의 가치 판단 권한을 독점하면서 개인의 권한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기관이 제한 없는 이익을 추구하면 폭주하여 분야 자체를 망가트릴 정도의 검열 규제를 가하는 경우도 있다. 이제 가치 판단 권한은 개인에게 주어져야 한다. 검열 규제 기관은 이제 사회 기준이 되는 국가 기관이 아닌 특정 가치를 권장하는 민영 기관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B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덕이니 정의니 그런 것을 잊고, 논리적으로 사회 구성원에게 손해를 주는 것으로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됨을 사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런 다음에 어디까지 손해를 줘야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는지 면밀히 계산하여 논리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B가 중심이 되면 사회가 성장할 수가 없다. 특히 AI 시대의 섣부른 규제는 굉장히 위험하다. 그냥 도덕에 취해 감정 따라 우르르 몰려다니며 사회를 파탄내는 것은 범죄와 다를바 없다. 시대가 변했음에도 남아있는 구시대의 도덕이 이런 문제를 자주 일으킨다. 사회 항상성을 기준으로 규제 등의 적정선을 정해야 할 것이다.
통상 C가 사회 문제를 일으킨다. C는 A 또는 B에서 적정선을 지키지 못할 때 나타나거나, 개별적으로 사회 구성원의 이익 추구에 의해 사회 구성원에게 손해를 줘서 사회 전체에 손해를 입힌다. 기본적으로 C는 A와 B에서 적정선을 지키면 상당수 줄어들 수 있다. 개별적 이익 추구 또한 A와 B에서 적정선을 지켜 부당한 손해를 입는 사회 구성원이 적어질수록, 그 사회 구성원이 일으키는 부당한 이익 추구가 줄어들면서 C가 줄어들게 된다. 이런 상태를 가리켜 사회 항상성이 유지된다 할 수 있고, 달리 말해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통상 D를 권한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권한에 해당한다. 그것이 손해로 이어지더라도 그 행위는 해당 권한이 있는 이들만 할 수 있다. 누군가 범죄를 저질러도 사회 구성원이 아니라면 그냥 추방하는 경우도 많다. 교정 시설 수감으로 한해 소비되는 비용이 매우 높다. 교정 시설 수감도 책임 권한이 있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단순히 책임이 손해로 이어진다는 인식이 많기 때문에, 책임 권한이 있음에도 그 권한 행사를 거부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므로 책임이 가능한 손해를 줄이거나 어떤 관점으로 이익이 될 수 있는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달리 말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 되려 더 큰 손해를 보도록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간단히 말해 도덕이나 정의를 말하면서 단순히 잘못을 저질렀다고 파멸할 정도로 몰아세우지 말고 책임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하면 많은 이들이 책임 권한을 행사하면서 사회 전체가 이익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책임 권한.
[책임: 1. 맡아서 해야 할 임무나 의무.]
[책임: 2. 어떤 일에 관련되어 그 결과에 대하여 지는 의무나 부담. 또는 그 결과로 받는 제재.]
책임 권한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자유에 책임이 따른다고 말하면서 과한 규제를 하는 경우가 많다. 단순히 모든 자유에 책임이 따른다는 식이면 숨쉴 자유에도 책임이 따라 어떠한 의무가 주어지게 된다. 논리적으로 말이 안된다. 책임은 자유에 종속된 개념이 아니다. 자유는 어떤 권한을 행사하는 것으로 충족되는 개념인데, 책임이 권한에 종속된 개념이 아니라 독립된 권한에 속한다. 권한은 권세, 이익, 힘, 자격 등으로 사회에서 범위 내에 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책임질 권한에 속하게 된다. 이익은 가치 판단으로 각자 다르다. 그렇기에 책임이 권한이 된다. 어떠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사회적 역할이나 법적인 보호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해당한다. 제재가 손해라는 인식 때문에 권한에 속하지 않는다 생각할 수 있는데, 만약 위험 물질을 취급해 다쳤다. 그래서 보호라는 법적인 제재를 받았다. 그것은 이익인가 손해인가? 단순히 손해가 된다는 인식 때문에 책임이 권한이 아니라 생각한다면 스토커나 양육권을 생각해보길 바란다. 스토커가 스토킹 대상을 책임진다며 들러붙는다 생각해보자. 이혼 부모가 자녀를 책임지겠다고 말한다 해보자. 과연 책임은 의무인가 권한인가? 10세 미만인 범법 소년에 대해 생각해보자. 법적 책임을 지지않아 형사 처벌이란 제재를 받지 않는다. 그에 대한 사회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범법 소년에게 일정 사회 권한이 있어도 그에 대한 책임이 없는 것은, 책임이 권한에 종속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임이 독립된 권한이 되면 다른 모든 권한에 종속하지 않아도 되어 논리적 모순에서 벗어나기 쉽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절대 왕정의 왕의 행동에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 모든 권한을 가진 만큼 책임이란 권한도 왕에게 있다. 국가 재난시 정치가의 개입을 대중이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권한 내에서 애도하는 것은 누구도 지적하지 않지만 정치적 이익을 위해 책임 권한을 남용하거나 월권하는 행위를 저지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책임은 권한에 속하고 권한을 가진 자가 책임을 질 수 있다. 권한도 없는 이들이 책임을 지는 것은 월권이다. 별개로 재난에 슬퍼하지 않는다면서 슬픔을 강요하는 것도 개인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익 구조와 손해 구조.
생산이나 소비는 보통 대상의 이익으로 본인과 사회가 이익을 보는 이익 구조에 해당하고, 규제나 수사는 대상의 손해로 본인과 사회가 이익을 보는 손해 구조에 해당한다. 사회에서는 이익 구조와 손해 구조에 대해 이해를 하고, 필요할 경우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이익 구조를 이해하면 새로운 상품 개발이 수월해질 수 있다. 권한과 이익을 통해 실권을 가진 이가 제한 없는 이익 추구를 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지 알고, 현재 사회에서 각각 역할을 맡는 이들의 권한과 이익 추구가 어떤지 파악한 다음, 그 추구에 의해 나타나는 메커니즘과 프로세스를 이해하면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어떤 결핍을 찾아 새로운 상품을 개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정 메커니즘에서 프로세스가 제대로 동작하지 못할 경우, 프로세스를 제대로 동작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무엇인가를 찾으면 그 조건이 새로운 상품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모방 교육에 익숙하여 무언가 발상을 하려고 해도 모방부터 떠오르는 기억 프로세스를 가진 이들도 새로운 상품을 떠올리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 의료 권한을 가진 이들의 이익 추구로 응급 프로세스가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그 결핍을 채울 새로운 상품이 나올 수도 있게 된다. 현재 한국에서 정상 프로세스가 아닌 경우가 생각보다 많을 수 있으므로 새로운 상품 개발이 어렵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세계에도 그런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보다 확장성이 넓은 상품 개발도 가능할 것이다.
세계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특정 분야의 지식을 많이 안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많은 본질을 알고 모순 없이 연결되는 메커니즘과 프로세스를 이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자연 계열을 알면 자연을 바탕으로 구축된 인문 계열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고, 인문 계열을 알면 관측자인 인간을 이해하는 것으로 자연 계열에 대한 이해가 넓어진다. 그것은 사회 조직도 마찬가지다. 정부나 기업, 그 외 다양한 사회 조직은 각각 역할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지만, 그 역할의 연결 메커니즘과 프로세스를 이해하는 것이 사회 조직을 안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지식은 한정될 수 있으므로, 사회 조직 구조가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각자 역할을 맡은 이들이 모여 토론을 하면서 사회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소매, 유통, 도매, 생산, 연구 등 각각 관계성이 얕더라도, 모여서 각자 역할과 연결에 대해 이해하면, 사회를 이해하면서 보다 효율적인 사회 조직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손해 구조를 구축하면 시장 안정화를 이룰 수 있다. 보통 인간은 이익을 추구하기에 이익 구조 구축은 되어 있는데 손해 구조 구축은 되어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주식과 부동산 차이다. 주식은 공매도를 통해 손해로 이익을 보는 이가 있어 거품을 꺼트릴 수 있지만, 부동산은 손해로 이익을 보는 이가 적어 거품을 꺼트릴 수가 없다. 현재 한국은 부동산 불패라 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빚을 져가면서 구매하는 바람에 과도하게 거품이 낀 상태다. 그렇다고 그걸 인위적으로 부동산 가치 하락을 하게 하면, 그 자산을 소유한 이들이 부당함을 느끼고 극단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그렇기에 되려 인위적으로 부동산 가치를 유지하는 정책을 시행 중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동산 거품을 방치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거품이 꺼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선 공매도처럼 손해로 이익을 보는 구조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현재 부동산 거품은 부동산 시장 하락으로 이익을 얻는 이가 없기 때문에 발생했다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고가 아파트 단지는 상장 기업보다 자산이 더 크지 않나 싶었다. 아파트 주민자치회에서 아파트 기업을 만들고, 그 기업을 주식 시장에 상장한다고 가정해봤다. 기업화 후 아파트 기업에서 기업 유지 주식 수까지 보유한 다음 나머지 주식을 각 호에게 1/n만큼 나눈다. 만약 아파트 특정 호에서 아파트를 매각하고 나가려면, 분배받은 주식을 다시 사서 반납해야 한다. 참여 동기는 당장 생기는 돈이다. 전세를 내놓는 이유는 땅에 묶인 자산을 유동 자산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주식에 상장하는 이유도 그렇게 될 것이다. 비싼 집은 있는데 생활비가 없어 고생하는 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기업과 다르지만, 어쨌든 공매도 기능을 활용하여 거품을 뺄 수 있지 않나 싶었다. 부동산도 주식과 같이 주도주처럼 고가 아파트가 부동산 가격을 주도하지 않나 싶었다. 물론 코인처럼 고가 아파트가 오를 때 저가 아파트는 조금 오르거나 떨어질 수 있지만, 시장 자체를 주도하는 것은 고가 아파트일 것 같았다. 그러므로 고가 아파트 위주로 주식 상장을 해도, 그 아파트들의 주가가 부동산 시장 시세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싶었다. 고가 아파트에 한에 부동산 주가 연동 제도를 도입하여 손해로 이익을 보는 이가 생겨야 시장 원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부동산 거품이 꺼질 수 있지 않나 싶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체제는 정부(삼권)에 모든 권한이 있는 체제가 아니다. 사회 권한이 합리적으로 모든 개인에게 분산된 체제다. 정부의 권한은 사회 전체 권한이 아님을 이해하고, 정부의 모든 정책과 제도는 논리적으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정치할 수 있는 난이도와 수준이 높은 체제다.
사회 질서.
사회 질서는 법으로 규정되고, 법은 체제의 규칙으로 체제를 포함한 사회 항상성을 기준으로 제정, 판단, 집행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사회 항상성 기준으로 본 사회 문제 비중을 아는 것이 사회 질서 유지에 도움이 된다. 개인의 가치관과 별개로 사회 기준으로 보았을 때 어떤 문제가 무겁고 가벼운지를 사회 구성원이 보편적으로 이해해야 사회 질서가 거기에 맞춰 안정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 문제: 1. 사회 제도의 결함이나 모순으로 발생하는 모든 문제. 실업 문제, 교통 문제, 주택 문제, 공해 문제, 청소년 문제 따위가 있다.]
[비중: 1. 다른 것과 비교할 때 차지하는 중요도.]
현재 도덕에 의해 사회 문제 비중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살인 범죄로 모르는 이의 죽음이 개인의 권한을 침해하는가? 사회 항상성이 완전히 깨지는가? 아니다. 본인 또는 사회 다수 개인의 권한은 침해되지 않고 사회 항상성은 수사를 통해 정상 처리되면 크게 문제가 없다. 도덕적으로 보면 상당히 큰 문제로 인식할 수 있으나 사회 항상성으로 보면 큰 문제가 아니다. 개인이 사회 문제의 비중을 판단할 때에는 본인 또는 사회 다수의 권한이 침해되는지, 그리고 사회 항상성이 깨지는를 보면 된다.
실권과 사회 항상성으로 보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비리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부당하거나 불합리한 정책이나 제도의 추진이나 법률의 제정은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많은 정치가들이 사법 리스크를 안고 있는데 그런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부당한 권한 행사를 하거나 개인의 권한을 침해할 수 있는 정책을 추진하거나 외교적으로 개인의 실제 권한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사회주의 같은 체제를 가진 국가와 과하게 가까워지려고 하는 것은 매우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처벌되지 않은 개인의 비리보다도 더 큰 문제다.
최근 한국 계엄령도 사회 항상성으로 보면 문제 중요도를 이해할 수 있다. 한국 계엄령은 부당한 계엄 실패 및 독재 미수로 내란에 해당하는데, 이는 사회 구성원 대부분 개인의 권한을 침해하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지 못하여 사회 항상성이 깨지는 문제에 해당한다. 한국 대통령의 사법 리스크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부당한 계엄령 선포는 큰 문제다. 실제 이유와 별개로 계엄령을 선포한 명분이 어떤 범죄가 의심되어 그렇다고 하는데, 무죄추정원칙을 지켰다면 계엄령은 선포되지 않았을 것 같다. 한국 계엄령과 미국 의회 폭동을 유사한 사건이라 바라볼 수 있는데, 권한에 의해 차이가 크다. 한국 계엄령이 성공했다면 실권에 의해 실제로 독재가 실행될 수 있었으나, 미국 의회 폭동은 말그대로 폭동이기 때문에 실제 권한이 없어 단순한 폭동에 머무를 확률이 매우 높다.
캐나다의 미 연방 가입에 관한 이슈가 있다고 한다. 그런 주장과 별개로 그것 자체가 마치 한일 합병처럼 보여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사회 항상성으로 보면 둘은 큰 차이가 있다. 캐나다의 미 연방 가입은 개인의 권한이나 사회 항상성에서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캐나다의 미 연방 가입에는 주권자의 투표가 있어야 할 것이고, 캐나다가 미 연방에 가입하더라도 개인의 다양한 권한은 여전히 존중될 것이며, 캐나다의 체제 또한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일 합병은 애초에 당시 조선인 대부분이 주권자라 하기도 어려워 합병 투표를 거치지도 않았고, 한일 합병 이후 당시 조선인 개인의 권한은 심각하게 침해당하여 창씨개명을 당하고, 옷차림 변경이 강제되고, 한반도에서는 투표할 권한도 없었고, 조선의 체제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위안부나 징용공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개인의 권한과 사회 항상성에 관한 문제가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조선 왕정 체제가 개인에게 아주 큰 손해가 되는 반자유, 반민주 체제임이 분명하지만, 그렇다 하여 일본 제국 또한 개인의 권한을 침해했음이 부정되지는 않는다. 이 당시 문제는 심각한 문제가 맞으나, 시대적 한계를 고려하여 한국은 당시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던 왕이 모든 책임을 지는 것으로 매듭지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일본은 적어도 이런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는 않기를 바라고 있다. 한일 양국은 각국이 개인의 실제 권한을 중시하는 체제를 공유하고 있으므로, 개인의 실제 권한을 위하여 미국과 함께 공조할 필요가 있음을 이해하길 바란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에도 마찬가지 기준으로 볼 수 있다. 만약 캐나다가 중국에 속하게 된다면 중국 체제에 의해 캐나다 개인의 권한은 심각하게 침해되고 캐나다 체제도 지켜지지 않아 사회 항상성이 파괴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설령 캐나다가 투표를 통해 중국에 속하기로 결정했다 해도 그것은 찬성하지 않은 소수의 권한이 부당하게 침해되므로 부당하게 된다. 이에 관해서는 대만 문제도 같이 볼 수 있다. 현재 대외적으로 대만은 중국에 속하고 있다는 상태이지만 정식적으로 속한 상태는 아니다. 만약 중국에 대만이 정식적으로 속하더라도, 대만인 개인의 권한과 대만의 자유롭고 민주적인 체제의 사회 항상성이 작동한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설령 중국에 속하는 것을 투표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매우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사회 항상성으로 영토 매각이나 기술 매각에 대해 접근해볼 수 있다. 국가의 영토나 기술의 소유권은 개인에게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매각해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영토부터 접근해보자. 그러나 영토의 매각을 외국인에게 하더라도 문제는 없을 수 있으나 외국 정부에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영토 개별의 소유권은 개인에게 있지만 영토 개념의 소유권은 국가에 있기 때문이다. 영토 개별 소유권이 변동되더라도 그 영토가 다른 나라 정부에 팔리지 않는 이상 해당 국가에 속한 것이 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지만, 영토가 다른 나라 정부에 팔리면 더 이상 해당 국가에 속하는 것이 아니게 되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국가는 주권자가 공동 소유하는 개념이므로 그런 종류의 매각은 모든 개인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 된다. 기술 매각도 비슷하게 볼 수 있다. 기술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기술을 국가가 특허로 보호하고 있는 동안 국가의 공동 소유에 해당하게 된다. 특히 국가 자산에 속하는 특정 기술의 무단 반출은 모든 개인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 된다. 현재 기술의 무단 국외 반출이 발생하고 있는데, 이는 국내에서 발생하는 기술 반출과 별개로 국가적 사안에 해당하여 정부가 개입하는 것이 마땅하다. 기술 유출이 단순히 기업에 대한 배신에 속한다 생각하여 그 사안의 무거움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는데, 특허가 된 기술 중 국가 자산에 속하는 것을 유출하는 것은 나라의 재산을 팔아먹은 것으로 매국에 속한다.
이런 부정한 기술 유출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에서 저능력자뿐만 아니라 고능력자의 이민도 막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견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가능성만 가지고 그런 기업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은 미국 자유 체제 가치를 훼손할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저능력자 이민 막는 것으로 나타나는 문제는 단순히 비용 문제일 확률이 높지만, 고능력자 이민을 막는 것으로 나타나는 문제는 구인 실패일 확률이 높다. 비용 문제는 정책으로 대응이 가능하지만 구인 문제는 정책으로 대응이 쉽지 않다. 고능력자는 대체가 안되니까 해외에서 이민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술 무단 국외 반출을 방치할 수는 없다. 이것은 국가적으로 큰 문제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국인 이민자를 고용하는 기업이 그에 관한 책임을 일정 지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면 기업에서 보다 신중하게 고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의 경우 리스크를 짊어지기 싫어 그런 것에 부정적일 수 있는데, 그러면 기업의 이민자 고용 인사권을 정부에 넘겨주거나 공유하면 된다. 물론 그러기는 어렵지 않나 싶다. 한국은 한국인도 기술 무단 국외 반출을 하는 판국이므로 미국의 이민자는 더 심할 수 있다. 그럼에도 고능력자는 그만한 리스크를 감당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현재 미국에서 고능력자 이민자 관련으로 갈등이 있다면, 이민자 고용 리스크를 늘려 미국인의 경쟁력을 늘리는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한국 입장에서는 고능력자 유출이 아쉬울 수 있는데, 그 고능력자가 미국에 진출하여 자리잡으면 한국은 그와의 커넥션을 통해 정식적인 기술 협력으로 보다 빠른 사회 발전이 가능할 수도 있으므로 손해보다 이익이 클 수도 있다.
세계적 사회 문제 비중이 큰 사안 중 하나가 바로 중국의 상품 생산 치킨런이다. 전 세계 시장에 품질 대비 저렴한 상품을 시장 점령하듯 덤핑으로 팔고 있다. 그것으로 전 세계 시장이 불안정한 상태다. 그런 치킨런 하는 큰 이유 중 하나가 아마 중앙 정부 통치 안정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수한 통치로 전 세계 시장 점령을 하여 중국 경제 성장을 하게 하였다 또는 전 세계 시장 점령을 하여 세계 패권을 잡았다 같은 명분으로 중앙 정부의 통치를 지속하기 위해서였지 않나 싶다. 그러므로 통치 안정성이 다른 식으로 확보될 수 있다면, 굳이 무리한 생산을 유지하지 않지 않을까 싶다. 현재 중국의 치킨런은 말그대로 전쟁하듯이 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 시장 점령에 실패하면 엄청난 손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내 온갖 사회 문제에서 중국의 사회 항상성이 깨지고 있음이 나타나고 있음에도 무작정 달리고 있다. 중국의 폭주로 세계 경제가 파탄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중국 중앙 정부가 좀 진정하고 걸을 수 있는 상황을 마련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미국은 중국이 시장 경제를 받아들이면 점진적으로 자유화, 민주화가 될 것을 기대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중국 중앙 정부는 국가 질서를 위해 중국 연방 제도조차 받아드릴 수 없다는 입장인듯 하다. 중국은 중앙 집권 정부에 의한 통치 기간이 길고, 개인에게 주어진 권한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런 상황인 것 같다. 그러나 몇 가지 이유로 중국은 언젠가 자유화, 민주화가 될 것이고, 중국 연방 제도를 추진하는 것이 중국 중앙 정부의 이익이 될 거라 생각한다.
우선 중국 연방 제도에 대해 생각해보자. 현재 중국은 지방 정부 권한이 적어 사회에서 실질적으로 대립하는 구도는 정부와 대중이다. 그점을 알고 중국 중앙 정부가 대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비리를 저지른 공무원을 사형시키는데, 대중과 직접적 이해 관계가 적기 때문에 효과가 적지 않을까 싶다. 수천 억 비리를 저지른 공무원이 사형당한다 해도, 대중은 크게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도를 바꿔야 한다. 사회 구도가 중앙 정부와 대중에서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와 대중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지방 정부가 사고를 쳐서 대중에 미움을 샀을 때, 중앙 정부가 처리하여 대중의 환심을 살 수 있다. 이는 실제 연방제를 도입하지 않아도 지방 정부 권한을 늘리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연방제를 추진하여 대중이 그에 대해 이해를 해야 책임을 명확하게 분산하여 사회 구도를 재구축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중앙 정부는 책임 분산을 통한 통치의 안정성을 얻고, 지방 정부는 실제 권한을 늘릴 수 있고, 중국 개인은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와의 견제 구도에서 생기는 환심 정책을 통한 노동권 보장 및 복지 증대를 얻고, 세계는 중국 중앙 정부의 폭주가 안정화되면서 치킨런에 제동이 걸리는 것으로 시장이 안정화될 수 있다.
중국이 언젠가 자유화, 민주화가 되는 이유는 디지털 기술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중국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국가가 디지털 기술을 이용하는한 체제와 관계 없이 자유화가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디지털 기술의 이용이 허용되는 순간, 개인에게 정보 처리 권한이 주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에게 주어진 막대한 권한으로 개인은 정보를 접하면서 본인이 이익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는 것으로 스스로 이익 추구를 하게 된다. 검열 규제도 의미가 없다. 이익 추구 방법을 공유하는 것을 무슨 근거로 막을 수 있는가? 그것으로 현재 중국 경제 성장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 막을 수가 없다. 그런 이익 추구로 중국 개인의 자유주의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심지어 자유주의 체제에서조차도 적응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대한 권한이 개인에게 주어진 상태다. 자유주의 체제에서조차도 그런데 통제주의 체제에서는 적응하기 몹시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중국 사회 항상성이 깨져서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저출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디지털 기술을 쓰지 않을 수는 없다. 디지털 기술과 디지털 기술에서 발전한 AI 기술은 산업 혁명 당시의 혁명을 이룬 국가와 이루지 못한 국가와의 차이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말그대로 안쓰면 경제적으로 도태된다. 그렇다고 쓰면 개인에게 막대한 권한이 주어지면서 자유주의화가 된다. 이 딜레마에 의해 자연스럽게 자유화가 될 수밖에 없고, 자유화가 되면 자연스럽게 민주화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속도 조절은 가능한데, 그게 연방 제도다. 점차 권한을 분산하면서 속도 조절은 할 수 있다. 디지털 기술에 의해 자유주의화가 확정된 상태에서 그걸 누가 주도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그걸 막냐 안막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는 디지털 기술을 이용하는 모든 국가에 동일하게 주어진 과제다.
사회 변화.
디지털 기술에 의한 사회 변화는 기본권에 정보 처리 권한이 더해진 것이다.
[정보 처리: 1.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자료를 처리하는 일. 주로 컴퓨터를 이용하여 자료를 분류, 정리, 선택, 연산하여 처리한다.]
[기본권: 1.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권리. 자유권, 참정권, 사회권 따위가 있다.]
전 세계에서 체제, 가치관, 사회 문제가 비슷해지는 까닭은 디지털 기술에 의한 정보 처리 권한이 기본권으로 추가되면서 엄청나게 큰 정치적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는 나라를 관리하는 일에 속하고, 민주주의는 개인에게 권력이 있어 개인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체제로 근대 이념 체제라면 자유주의든 사회주의든 실질적이든 명목상이든 민주주의를 표방하므로, 개인의 기본권 변화는 정치적 변화에 속한다. 보통 시대의 구분은 체제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근대와 현대는 체제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개인의 기본권이 달라졌으므로 근대와 현대는 체제 자체가 달라졌다 할 수 있다. 이 변화에서 경제적 이익, 생산적 효율, 생활적 편리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정치적 기본권 변화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아는 이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디지털 기술에 의한 사회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지 않았나 싶다.
사회 체제와 관계 없이 디지털 기술 중 하나인 인터넷에 접속하기만 해도 정보 처리 권한이 주어진다. 사회 체계가 효율을 위해 디지털로 구성되었을 경우, 사회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디지털을 활용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현재 많은 국가의 사회 체계가 디지털로 구성되어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하여 정보 처리 권한이 주어진 상태다. 디지털 기술 이전에도 정보 처리는 가능했으나, 그것은 개인마다 접근 권한이 다르고 속도가 느려 기본권이라 할 수 없었다. 반면 디지털 기술 이후 개인이 인터넷에서 접하는 정보는 검열 규제가 있다 하더라도 제한이 적은 편에 속하고 물리적인 송수신 속도도 빛에 가까울 정도로 빠르다. 그러면서 정보 처리 권한이 기본권이 된 것이다.
기본권이 된 정보 처리 권한에 의해 사회가 전방위적으로 달라졌다. 사상, 학문, 정치, 경제, 예술, 언론, 방송 등이 가지고 있던 관련 권한이 개인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의 사상을 주장하고, 학문을 탐구하고, 정치 활동을 하고, 경제 생산과 소비를 하고, 예술을 선보이고, 언론 정보를 제공하고, 방송 프로를 선보인다.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개인이 자유롭게 온갖 활동을 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정보 처리 권한에 의해 수많은 새로운 권한의 행사가 가능해진 것이다. 권한의 확대는 보다 개인을 자유롭게 만든다. 그러면서 디지털 기술에 의한 자유주의화 현상이 나타난다. 체제에 따라 다소 권한의 행사가 달라질 수 있어도 주어진 정보 처리 권한 자체는 대부분 동일하다. 그러면서 체제와 무관하게 전 세계적인 자유주의화 현상이 나타난다. 이는 AI를 통해 더욱 개인의 권한이 확대된다. AI에 의한 권한 확대는 ‘자동’ 개념이 더해지는 것이다. 자동 정보 처리 권한이 더해지는 시대가 AI 시대다. AI가 자아를 가질 정도로 발전하면 진정한 의미에서 자동 정보 처리 권한이 주어진다 할 수 있다. 개인이 AI에게 생산을 맡기는 완전 자동화 생산 체계를 쓸 수 있는 시대가 올 수 있다. 그러면서 보다 개인의 권한은 확대된다. 디지털 기술에 의한 사회 변화는 간단히 정보 처리 기본권 추가와 개인 권한 확대로 이해하면 된다. 그것으로 정말 막대한 사회 변화가 일어나는 중이다.
정보 처리 권한과 파생으로 확대된 익명 의사 표현 권한으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가 심리적 규제 완화다. 정보 처리 권한으로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상태에서 익명 의사 표현 권한이 주어지면서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던 심리적 규제가 완화되었다. 그러면서 많은 이들이 심리적인 규칙이나 규정의 한도를 넘어서 행동하게 되었다. 그에 대해 몇 가지 알아보자.
도덕 심리적 규제 완화. 도덕 심리적 규제 완화는 두 가지로 나뉘어 나타난다. 규제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이는 심리적 규제가 완화되어 행동적 규제가 약해질 수 있고, 규제를 긍정적으로 여기는 이는 심리적 규제가 완화되어 행동적 규제가 강화될 수 있다. 규제 부정적 인식의 경우 반말 사용으로 알 수 있다. 한국은 연령에 따른 차례가 매우 중시되어 연하에게 반말을 들은 연상은 분개하며 살해하는 사건까지 있는 국가다. 그럼에도 심리적 규제가 완화되어 인터넷에서는 익명뿐만 아니라 서로 연령을 알고 있음에도 연령을 가리지 않고 반말하는 경우가 많다. 현실에서도 연령 구분이 줄어드는 추세다. 규제 긍정적 인식의 경우 규제 청원 민원으로 알 수 있다. 한국은 규제가 심한 국가이지만 보통 개인이 앞장서서 규제하자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심리적 규제가 완화되어 인터넷에서는 여론을 모아 적극적으로 규제 주장을 하는 경우가 많다. 현실에서도 규제 주장을 앞장서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물론 그에 대한 반발로 심한 상태다. 심리적 규제가 완화되면서 극단주의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의심에 관한 심리적 규제가 완화되면서 가짜 뉴스를 쉽게 믿게 된다. 특히 인터넷은 거리의 제약이 적어 비슷한 성향을 가진 이들끼리 모여 확증 편향적 정보를 접하기가 쉬워 가짜 뉴스에 보다 더 취약해진다. 인내에 관한 심리적 규제가 완화되면서 인터넷, SNS, 게임 등에 보다 쉽게 중독될 수 있게 된다.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중독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런 취미가 중독성이 다른 취미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높다기보다, 디지털을 통한 인간 관계에서는 심리적 규제가 낮게 되면서 쉽게 중독될 수 있게 된다. 위험에 관한 심리적 규제가 완화되면서 사설 도박, 마약, 주식 및 코인 투기 등에 보다 쉽게 접할 수 있게 된다. 돈의 취급에 대해서도 실제 돈을 만지기보다 숫자로만 접하다보니 돈의 위험성을 잊고 헤프게 쓰다 파산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욕망에 관한 심리적 규제가 완화되면서 금권만능주의나 외모지상주의가 쉽게 퍼지게 된다. 보다 본인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단순히 인터넷 안에서만이 아닌 현실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가치보다 경제적 실익을 우선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심리적 규제 완화로 범죄율이 늘어난다 생각할 수 있는데, 정보 처리 권한으로 범죄 리스크 정보를 접하기 때문에 보편적으로는 줄어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범죄 리스크에 따라 범죄 증감이 결정되기도 한다. 보편적 범죄율은 감소하고 일부 촉법 소년 또는 작은 금액 절도 비범죄화에서는 범죄율이 증가한다.
이처럼 개인에게 막대한 권한이 주어지면서 심리적 규제가 완화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사회 정책이나 사회 제도는 그것에 따라가지 못했다. 온라인(인터넷 사회)에서의 권한과 오프라인(현실 사회)에서의 권한의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서는 자유롭고 평등하게 대화할 수 있는데, 사회 조직에서는 통제적이고 권위적으로 대화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정보 처리 권한은 기본권이지만, 그 외의 권한은 사회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괴리가 발생하게 된다. 온갖 사회 문제가 이것의 영향을 받는다. 도덕의 영향으로 성의 억압을 긍정하는 이들은 그 억압에 대한 심리적 규제가 완화되면서 더욱 더 억압하면서 성에 관한 코스트가 전부 오름에 따라 성에 관한 관계에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으로 연애율, 결혼율, 출산율이 전부 폭락하고 있음에도, 사회 정책이나 사회 제도는 아직까지도 가부장제 시기와 같이 검열 규제 통제에 머물러 있으면서 관련 문제 해결은커녕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출산, 자살, 취업, 퇴사 등에서 계속된 부정적 통계가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괴리가 발생함에도 그에 대한 대응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 디지털 기술로 개인의 기본권과 다양한 권한이 확대되었음에도 사회 정책과 사회 제도는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사회 항상성이 붕괴되어버린 것이다. 모든 개인의 가치관에 자유주의가 자리잡는다면 거기에 맞춰져 사회 체계가 바뀔 수도 있지만, 지금 대부분은 스스로 자유주의자가 되길 바란 게 아니라 개인의 기본권과 다양한 권한 확대로 자유롭게 되었을 뿐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고 그것이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 그러다보니 본인의 자유는 중요시하면서 타인의 자유는 무시하고 짓밟는 경우가 많다. 개인에게 막대한 권한이 주어진지 오래되지 않아 이에 대해 아직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어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대화가 많아지고 고찰이 깊어짐에 따라 많은 디지털 이용자들이 점차 진정한 자유주의자로 거듭나게 될 거라 생각한다.
개인의 기본권과 다양한 권한 확대로 많은 사회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그것 중 하나가 미성년 SNS 문제다. 미성년이 SNS를 이용하면서 온갖 사회 문제가 나타나자, 미성년 SNS 이용 금지를 주장하는 이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실제 호주에서는 미성년 SNS 규제를 시작했다고 한다. 미성년이 SNS를 이용하는게 심각한 위험이라 판단한 결과일 것이다. 이것을 보고 진보적이나 선진적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니다. 사회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결과다. 사회 변화 전후로 아날로그와 디지털로 구분해보겠다. 이것은 아날로그 교육 체계가 디지털 생활 양식에 적응하지 못한 결과다. 아날로그 생활 양식에서 디지털 생활 양식으로 바뀌면 거기에 맞춰 새로운 교육 체계를 갖춰야 하는데, 아날로그 교육 체계와 생활 양식을 고집하면서 최대한 대상의 아날로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SNS를 금지하는 것일 뿐이다. 알기 쉽게 예를 들면 유교 교육 체계가 서구 생활 양식에 적응하지 못하여 미성년이 서구 학문을 접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미성년이 서구 학문을 접하면 유교 생활 양식을 잊고 예의범절을 갖추지 못하는 심각한 위험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일정 연령이 되기 전까지 서구 학문을 접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본질적 변화는 개인 기본권 확대와 다양한 권한 확대, 그에 따른 심리적 규제 완화에 의한 자유주의화. 미성년 또한 과거와 달리 보다 더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것을 고려하여 거기에 맞춰 교육을 했어야 했다. 도덕적으로 미성년을 억압하지 않고 SNS보다 현실을 더 재밌게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SNS는 전화기와 같이 정보 교류 수단이 되도록 했으면 되었다. 현실이 자극이 없고 너무 재미가 없으니까 SNS에 과하게 빠지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자극적인 것을 할 수가 없고 가상에서나 그것을 보면서 대리 만족할 수 있으니까, 짧은 영상에 중독되거나 가상의 인격을 만들어 노는 것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게 하고, 현실에서 하고 싶은 것을 더욱 더 할 수 있게 하면 SNS보다 현실이 더 자극적이라 보통은 SNS 과한 중독이 발생할 수 없다.
저생산 문제는 사회 구성원의 생산 참여를 늘려야 한다. 지금 저생산은 여러가지 문제가 있지만, 그 중 하나가 생산자의 가치관 문제다. 자유로운 인터넷 사회에 비해 많은 현실 사회 조직은 아직 수직 사회 조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런 조직에 속하는 것이 개인에게 큰 손해로 인식될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공직이나 기업 등의 사회 조직에서 조기에 퇴사하거나 아예 생산 활동을 포기하는 것이다. 물론 체감 손해만큼 돈을 더 줘서 손해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면 퇴사하지 않을 수 있으나, 지불할 수 있는 돈에는 한계가 있다. 돈 외의 구조에서 손해를 느끼지 않고 이익을 얻는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렇다고 곧바로 수평적 사회 조직으로 바꾸는 것이 쉽지가 않다. 대기업의 경우 생산성을 올리기 위해 수평적 사회 조직을 만드는데, 높은 위치에 있어 많은 권한을 가진 이들의 가치관이 변하지 않아 명목만 그런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렇기에 사회 전반적으로 개인 생산이 일반화될 필요가 있다. 조직에 개인의 개성을 사라지게 하는게 아니라, 조직보다 개인의 개성이 두드러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개인주의화가 되면 된다. 디지털 기술로 생긴 개인의 기본권과 다양한 권한 확대에 맞춰서 사회 조직을 구성하면 된다. 그러면 조직 유지가 안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국가와 마찬가지로 사회 항상성 개념을 도입하면 될 것이다. 거기에 더해 프리랜서를 일반화하여 개인 생산 체계를 확립하는 것으로 개인이 생산 권한을 가지고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는 인식이 자리잡으면 된다. 디지털 시대 이전에는 굳이 이러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디지털 시대 이후부터는 이러지 않으면 사회 항상성이 깨져 국가 유지가 되지 못한다. 누군가는 일하지 않으면 너만 손해라면서 개개인의 문제로 인식할 수 있는데, 특정 국가뿐만 아니라 대부분 국가에서 보편적 현상이 나타난다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변화의 문제에 해당한다.
사회 변화의 본질을 안다면 출산율 문제도 무엇이 본질적인 원인인지를 알 수 있다. 저출산 원인을 경제 또는 여성 인권 문제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 한국 베이비붐 고출산 시기의 한국 경제 상황이나 여성 인권을 고려하면 그런 측면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본질적인 원인은 심리적 규제 완화로 성에 대한 억압과 성에 대한 자유의 괴리가 더욱 커지고, 사회 정책과 사회 제도도 가부장제 시기에 머물러서 성에 대한 관계 코스트가 매우 늘어난 상태기 때문이다. 그런 코스트(외모, 재산 등)를 사회가 감당하지 못하면서 연애율, 결혼율, 출산율 다 낮아지게 된 것이다. 성에 관한 심리적 규제 및 현실적 규제를 없애 성을 자유롭게 하거나, 결혼 및 출산에 관한 심리적 규제를 강화하여 가부장제 시기처럼 심리적인 강박으로 결혼이나 출산을 하면 출산율이 오를 수 있다. 현실적으로 결혼 출산을 강제하기 어려우므로 후자 말고는 방법이 없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2차 성징 이후 바로 성 관계를 경험하고 적극적 성관계가 자유로워야 성에 관한 코스트가 낮아지면서 인구에 관한 사회 항상성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2차 성징부터 외모 재산 따지지 말고 막 성관계를 했어야 조건을 크게 안보고 그냥 살면서 마음에 맞으면 연애, 결혼, 출산을 했었을 것이다. 개인의 결혼과 출산의 실권이 가장에게 있던 때라면 몰라도, 개인에게 있는 이후에는 최대한 조건을 낮추고, 낮은 조건에 최대한 맞출 수 있도록 해야 출산율이 정상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가부장제 시기처럼 외모 크게 안따지고 중매혼 하던 때와 비슷하게 조건을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복잡한 것 빼고 간단히 말하면 단순히 성관계 횟수만 늘려도 출산 확률이 올라가면서 출산율이 높아지게 된다. 국가 중매혼을 통해 어느 정도는 출산율을 올릴 수 있어도 사회 유지에 필요한 정도까지 올리는 것은 어렵다. 당장 돈을 뿌리면 출산율을 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돈을 뿌리는 것이 끝나면 효과가 끝날 확률이 높다. 그뿐만 아니라 심리적 조건이 높아지면서 돈을 뿌리지 않으면 더욱 하지 않으려 하게 되는 것으로 보다 상황이 악화될 수가 있다. 이 문제를 도덕적으로 접근해 도덕적으로 옳다 여긴 것을 행할게 아니라, 과학적으로 접근해 출산율 2를 충족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면 된다. 대놓고 말해 도덕을 제외하고 보면 출산율을 올리는 것이 어려운게 아니다. 애초에 지금까지 인류는 그냥 놔둬도 알아서 결혼하고 출산하면서 알아서 사회를 유지해왔다. 사회 항상성이 작동하고 있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 말은 즉 현재는 어떤 변화에 의해 사회 항상성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자유주의 체제와 디지털 기술이다. 사회 변화에 따라 더 이상 도덕을 기준으로 삼은 정책과 제도로는 사회 항상성이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고려한 정책을 행하면 문제 해결은 쉽다. 성을 자유롭게 하면 출산율이 정상 상태가 될 수 있다. 물론 그럴 경우 혼외 출산 등의 다양한 사회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데, 그것은 따로 대응하면 된다. 저출산 문제는 애초에 아기가 태어나지 않아서 그런 대응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므로, 태어나기만 하면 그에 대한 대응은 충분히 가능하다. 도덕이 아닌 사회 항상성으로 보면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다.
SNS 가짜 뉴스 문제는 언론 신뢰도 하락에 의한 것이다. 디지털 기술로 개인 권한 확대가 되면서 누구나 정보 처리 권한을 가지고 정보 생산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데, 언론은 그 이상의 정보 품질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외면 받게 된 것이다. 현재 사회에서 언론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지면서 대중이 가짜 뉴스에 빠지게 되었다. 어째서 언론의 정보 품질이 높아지지 못했는가? 기자가 기자 윤리를 지키지 않아서 그렇다는 의견이 있다. 기자가 그걸 지키지 않는 것은 논리적인 내용이 아니라 그게 옳으니까 그냥 지켜라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준수 및 미준수로 행해지는 어떠한 논리적인 결과가 없으니까 안지킨다. 이익 구조와 손해 구조를 고려하여 기자가 본인 이익만 추구해도 사회에 이로운 결과가 나오도록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 정보 품질 문제는 윤리가 아닌 언론 기자 개인별 능력 차이에 따른 보상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품질이 좋아도 이익이 크지 않고 품질이 나빠도 손해가 크지 않다. 그렇게 차등이 없으면 경쟁이 없고, 경쟁이 없으면 품질이 저하된다. 기자는 정보 취급자로서 다른 전문직 못지 않게 전문성이 필요한 직종임에도 대부분은 언론사에 속한 노동자로서 임금을 받는다. 그래서 대중도 유명한 언론사 기자 A와 유명하지 않은 언론사 기자 B를 크게 구분하지 않는다. 애초에 기사를 볼 때 기자 이름 보는 경우가 많지가 않다. 대중은 정보 품질의 차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추가적 비용 지불이 이뤄지기 어렵게 되면서 많은 언론사가 광고주인 기업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으로 언론의 정보 품질은 더욱 저하된다. 그러므로 가짜 뉴스 문제는 기자 개인의 수익을 전문직 못지 않게 올릴 수 있는 구조를 구축하여 보상의 차등을 마련해 정보 품질을 올리면 해결할 수 있다. 그 구조는 SNS 기자 제도를 도입하면 된다. 지금도 X와 같은 텍스트 SNS에서 기자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SNS의 정보를 관리하는 정식 기자는 없다. 예전부터 SNS에서 가짜 뉴스가 많은데도 SNS가 그에 대해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면서 정계에 비판을 받아왔다고 알고 있다. 그렇다고 SNS에서 임의로 차단하는 것으로 이용자 개인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 쉬운 선택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은 놔둔 상태에서 이슈에 대한 정보 처리를 담당할 SNS 개인 기자를 고용하면 가짜 뉴스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X에서 검색 순위가 있을 것인데, 그 순위에 올라온 키워드에 대한 정보 처리를 하여 이용자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면 된다. 이것으로 SNS에서 기자에게 기본급을 지불하고, 기자가 그외 따로 생산한 정보에 한하여 SNS 이용자가 추천 형태로 작은 돈을 지불할 수 있는 구조를 구축하면 전문직 수준의 임금은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유명 SNS는 조회수가 백만이 넘는 경우도 많던데, 그 중 1%가 100원씩만 지불해도 백만 원의 수익이 된다. SNS 기자가 가짜 뉴스를 만들 수도 있는데, 언론사 소속 기자와 달리 SNS 기자는 개인으로 그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게 되는 것으로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해 가짜 뉴스가 증명되면, SNS 기자는 SNS 이용자에게 욕먹고 쫓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차등을 만들어 경쟁을 부추기면 정보 품질이 올라 가짜 뉴스 문제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기성 언론 또한 경쟁자가 생기면서 보다 정보 품질에 신경 쓰게 될 거라 생각한다. 현재 위키 차단 논란이 있다고 한다. 사설 위키 크기가 작았을 때에는 방치하다가 커졌을 때에 개입한 것을 보면, 대중이 정보를 구할 때 위키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져서 그렇지 않나 싶다. 그에 대한 대응은 차단이 아니라 정보 품질 관리로 하는 것이 적절하다 본다. 인터넷 특성상 차단을 해도 큰 의미가 없는데 규제가 늘어봐야 생산성만 악화된다. 그러므로 단순히 언론 분야 집단 이익 떠들면서 서로 감쌀게 아니라 철저한 경쟁 구도를 구축해야 언론이 정보 품질을 올려 대중의 신뢰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언론이 정보 처리 권한을 많이 가진 시대가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현재 세계는 극단주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디지털 기술에 의한 정보 처리 기본권과 다양한 권한 증가가 원인일 것이다. 정치적 갈등, 경제적 양극화. 점점 극단화되는 가치관. 한국이나 미국 여론이 반으로 갈라진 것도 극단주의 현상의 결과 중 하나다. 주식이나 코인의 유행에 따른 급등락 또한 극단주의 현상 중 하나다. 이런 현상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대응해야 한다. 이렇게 기술로 발생하는 현상은 국가 패권과 크게 관계가 없다. 물론 미국이 패권이라 보다 자유로운 것은 당연하지만, 국가 경쟁에 있어 필수적인 기술을 정치적인 이유로 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체제와 무관하게 대부분 국가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면서 개인의 기본권과 다양한 권한 확대에 의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는 자유 국가보다 통제 국가가 더욱 심각할 것이다. 앞으로 모든 국가는 선택해야 한다. 디지털 기술에 맞춰 개인의 권한을 확대할 것인가, 디지털 기술을 파기하여 경제적 도태를 선택할 것이다. 둘 중 하나가 아니면 사회 항상성이 작동하지 않아 사회가 죽는다.
항상성 조건.
사회 항상성이 작동하려면 그에 해당하는 항상성 조건이 있다. 그에 대해 몇 가지 알아보자.
[유지: 1. 어떤 상태나 상황을 그대로 보존하거나 변함없이 계속하여 지탱함.]
[조건: 1. 어떤 일이 이루어지려면 갖추어져야 할 상태나 요소.]
사회 항상성 개념은 가치 판단 대상에 속하고, 사회 항상성 조건은 가치 판단에 속한다. 도덕과의 차이는 논리다. 도덕은 비논리적 가치 판단에 속하고 논리를 구축하여 도덕에서 분리된 새로운 개념은 논리적 가치 판단에 속한다. 사회 항상성 조건은 기본적으로 후자로 논리로 찾는다.
자유주의 항상성.
개인의 실권 보장이 자유주의 체제의 항상성 조건에 해당한다.
개인이 사회의 모든 권한을 조건부로 실제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나 직업을 얻어 사회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누구나 대통령, 사장, 장군 등이 되어 사회 권한 행사를 할 수 있다. 인사 권한자가 인사 권한 행사를 하여 대상이 사회 역할을 얻었다 해도, 인사 권한자에게 실권이 있어 조건이 맞으면 당선된 대통령도 탄핵할 수 있고 고용된 피고용인도 해고할 수 있다. 대상이 부당한 행위를 저질러도 그에 대한 대응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에 관련된 실권이 없는 상태라 할 수 있다. 독재 국가에서 보통 개인에게 실권이 없는 이유는 이런 이유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조건이 맞지 않으면 부당하게 탄핵하거나 해고할 수 없다. 권한은 권력을 통한 강제력이 아닌 논리적인 조건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디지털 기술 이후 정보 처리 권한이 기본권이 되면서 개인에게 막대한 권한이 주어졌다. 그러면서 개인이 보다 많은 권한 행사가 가능해지면서 보다 자유주의 체제에 적합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많은 이들이 보다 자유로운 사회가 되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무엇이 자유로운가에 대해서 의견이 다를 수 있는데, PC와 같이 어떤 가치 판단 결과를 강요하는 것이 자유롭다고 하는 것보다 모든 개인에게 가치 판단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자유로운 것이라 생각한다.
민주주의 항상성.
권력의 상수 유지가 민주주의 체제의 항상성 조건에 해당한다.
모든 개인이 권한을 가지고 사회 권한이 분산되어야 권한의 균형이 맞아 권력이 상수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알기 쉬운 예로 삼권분립이 있다.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권한의 균형이 맞아야 한다. 모든 개인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법 앞의 평등을 이루면 대체로 균형이 맞을 확률이 높다. 도덕적인 이유로 개인의 권한을 침해하고 법 앞의 평등이 깨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권력이 상수가 되어야 성립될 수 있음을 모두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권력이란 개념의 성질은 어느 한쪽이 위가 되면 아래에 있는 것을 유명무실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개인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자든 약자든 다수든 소수는 상관 없이 권력은 상수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강자의 부당한 횡포나 다수의 부당한 분탕이 줄어들 수 있다. 그래야 민주주의 체제가 귄위주의나 전체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건강해질 수 있다. 사회 구조는 권력이 상수로 같더라도 권한과 논리로 구축이 가능하다.
디지털 기술로 개인의 기본권과 다양한 권한이 확대되면서 극단주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에 따라 다수가 도덕적 명분을 빌미로 소수를 부당하게 공격하는 사례가 많이 있다. 비논리적인 주장을 수용토록 강제하기도 한다. 그것도 소수의 권력 행사를 방해하면서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강자가 약자를 못살게 구는 것만큼이나 비열한 짓이다. 권력은 강자든 약자든 다수든 소수든 같음을 잊으면 안된다. 수가 늘면 권력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곧잘 홍위병처럼 타인에게 부당한 강요를 행한다.
시장 경제 항상성.
개인의 소비 유지가 시장 경제 체제의 항상성 조건에 해당한다.
AI 기술이 발전하면서 앞으로 AI에 의한 완전 자동화 생산 체계가 시작될 것이다. 그러면 다수의 개인은 시장에서 자신의 능력을 팔 수가 없게 된다. 그럴 때를 대비하여 참여 소득 제도를 준비해야 한다. 그것에 대비해 정부가 기본 소득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정부가 지나치게 과도한 권한을 가지게 되면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체제의 정부와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게 된다. 어차피 사회에 소득을 공급해야 한다면, 그것을 기업에서 자체적으로 해도 상관 없다. 예를 들어 AI 자동화 생산 기업의 이윤의 n%만큼 정부에 세금을 내거나 참여 소득으로 사회에 공급하도록 한다. 참여 소득은 말그대로 AI가 직접 생산하면서 능력을 팔 것이 사라진 이들이 무엇에 참여하기만 해도 얻는 소득을 말한다. 이때 참여 소득 공급자는 사회를 자기색으로 물들일 수 있는 권한이 생기게 된다. 예를 들어 책을 좋아하는 이가 사회 구성원이 책 읽기에 참여하면 소득을 공급한다고 하자. 그러면 사회 내 책 읽기에 참여하는 이들의 비율이 올라간다. 그러면서 책을 좋아하는 비율도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 취미에 해당할 수 있다. 스포츠면 스포츠, 예술이면 예술, 등산이면 등산. 또는 사회에 필요하나 시장성이 부족한 연구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범죄라던가 부당한 개인 권한 침해는 허용될 수 없지만, 일반적인 취미는 대부분 허용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사회 항상성을 위해 기본 소득과 같이 돈을 지불해야 한다면, 이런 식으로 이익이 생기는 것이 합리적이다. 참여 소득을 통해 소득이 주어지면 개인의 소비 유지가 되면서 시장 경제 체제 항상성이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시장 원리 항상성.
경쟁 유지가 시장 경제 체제의 항상성 조건에 해당한다.
미국에서 의료 보험 문제로 살해 사건이 발생할 정도로 심각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현재 미국 의료 보험 문제는 보험 적용율이 많이 낮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보험에 가입했으면서도 막대한 병원비에 의해 큰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왜 그런 것일까? 이것은 손익 구조 때문이라 생각한다. 보통 일반 회사는 소비자가 이익을 보는게 회사 이익인 이익 구조기 때문에 소비자 만족을 우선시한다. 상품에 만족하여 소비자가 이익을 보면 상품을 자발적으로 홍보하고 다니면서 회사 이익이 커진다. 반면 보통 보험 회사는 소비자가 손해를 보는게 회사 이익인 손해 구조기 때문에 소비자 의심을 우선시한다. 보험 상품 적용율이 낮아져 소비자가 손해를 보면 그만큼 그대로 회사 이익이 된다. 좋은 보험이라고 홍보하는 것도 의미가 적은게, 보통 회사 단체 가입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일반 회사와 보험 회사는 다른 손익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시장 원리가 통용되지 못하고 있다.
일반 회사는 소비자는 경쟁 상대가 아니지만 보험 회사는 소비자는 보험 적용 경쟁 상대다. 이럴 때에 경쟁이 정상적으로 이뤄진다면 시장 원리대로 적절하게 처리될 수 있다. 그러나 소비자와 회사는 보험 적용이란 목적을 가지고 경쟁하기가 어렵다. 소비자가 보험 회사의 판단에 불만을 가지면, 법적 공방에 나서야 하는데, 개인이 그걸 하기에는 경제적 부담이 너무 크다. 그러므로 보험 회사는 구도를 다시 짜야 한다. 소비자의 손해가 이익으로 연결되는 손해 구조와 소비자의 이익이 이익으로 연결되는 이익 구조를 둘 다 적용해야 한다. 그 방법이 바로 보험 회사 생산 유통 분리 제도다.
보험 생산과 유통을 먼저 분리한다. 보험 생산 회사는 기존처럼 손해 구조로 이익을 보도록 하면서 소비자 의심을 우선한다. 보험 유통 회사는 새롭게 이익 구조로 이익을 보도록 하면서 소비자 만족을 우선한다. 그러면서 보험 생산과 보험 유통이 보험 적용으로 경쟁한다. 두 회사는 크기가 크기 때문에 법적 공방에 나서는 것도 어렵지가 않다. 지금까지 보험 회사에서 수많은 보험 적용 사례를 통해 적용 범위에 대한 합리적인 기준이 있는 상태였을 것 같다. 그럼에도 보험 적용율이 낮은 것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상태였을 것이다. 물론 보험 회사는 지금까지 사례를 통해 합리적으로 판단했을 것이지만, 그것이 소비자의 신용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간단히 말해 법적 판단을 더 신용한다는 것이다. 같은 판례라도 법적 판례가 쌓이면 같은 상황에서 소비자도 크게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 있다.
보험 생산 회사는 지금까지와 같은 보험 메커니즘을 설계하여 판매한다. 단지 직접 유통이 되지 않아 보험 유통 회사를 거쳐 판매해야 한다. 보험 유통 회사는 많은 보험 생산 회사의 상품을 섞어 고객에 최적화된 상품을 안내하여 보다 합리적인 상품 판매를 한다. 현재 보험 회사와 병원이 연결된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그것을 깨면 보험 유통 회사는 보다 더 합리적인 상품 판매가 가능할 것이고, 소비자 또한 본인에게 최적화된 보험 플랜을 구매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을 예시로 들었지만, 이것은 어느 사회 어느 시장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권한의 분산으로 경쟁을 하도록 하는 것으로 시장 원리 항상성을 갖추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주식 시장 문제도 마찬가지다. 주식과 코인의 차이는 하방선. 주식에는 기업 자산이라는 하방선이 존재한다. 그러나 대주주와 소주주의 경쟁이 제대로 되지 못하면서 그 하방선이 다양한 이유로 쉽게 깨진다. 그래서 장기 투자가 없는 것이므로 경쟁을 할 수 있게 하면 시장 정상화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의회 항상성.
유권자 의사 반영이 의회의 항상성 조건에 해당한다.
입법의 대표는 사회적 역할을 고르게 해야 하는데, 공천권자 입맛에 맞는 이들이 유력지에 공천되면서 그런 사회적 균형이 맞지 않아 입법이 사회 개인을 대변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렇다고 인위적으로 역할을 배분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러므로 애초에 사회적 역할을 기준으로 입법 권한을 부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회적 역할에 초점을 맞춘 역할 민주주의 제도, 분야의 대표에게 입법권을 주는 제도를 도입하면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 의회가 상하원으로 나뉘듯, 지역 대표와 분야 대표로 의회를 나눈다. 분야 대표는 각 분야에 관한 법안을 제출하고 지역 대표는 그것을 평가한다. 반대로 지역 대표는 각 지역에 관한 법안을 제출하고 분야 대표는 그것을 평가한다.
유통 항상성.
물자 이동 지속이 유통 항상성 조건에 해당한다.
보통 상품의 생산은 정가 판매 기준으로 한다. 정가에 팔린만큼 생산하여 유통한다. 그런데 소비자의 소비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물가가 올라 더 이상 소비자가 소비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재고가 남으면서 그 상품의 생산이 줄어드는 것으로 유통 경로가 불안정하게 된다. 또한 상품 생산 축소로 공장 가동이 줄어들면서 구인도 줄어들게 된다. 임금 노동자가 감소하면서 소비 또한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사회에서 필요한 자원은 일정 이상 정해져 있는데 가격에 의해 그 분배가 제대로 안되는 것으로 내수가 하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좀 더 유연한 가격 제도가 필요하다. 그것이 시간 비례 가치 변동 제도다.
지금 유통 기한이 일정 기간 지나 팔리지 않는 것은 저렴하게 팔고 있다. 한 해 동안 팔리지 않는 상품은 블랙 프라이데이를 통해 싸게 팔아 창고 정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것을 합리적으로 제도화하는 것이다. 유통 기한이 있는 상품을 기준으로 사회에 필요한 만큼 생산하고, 상품의 유통 기한에 맞춰 가격이 하락하게 하는 것으로 최대한 소비될 수 있도록 한다. 상품 생산을 가격에 맞추는게 아니라 사회에 필요한 소비에 맞추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통 기한 30일인 상품은 10일 마다 가격을 n만큼 하락시킨다. 물론 이런 식으로 하면 유통 기한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싸게 구매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은 보통 그 가격이 아니면 소비할 수 없는 이들이므로 그것은 감안해야 한다. 되려 그런 이들에 맞춰서 생산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것은 정부가 특별 관리하는 상품은 정부에서 처리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상품은 생산자가 최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제공하여 사회에 맞춘 생산을 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분명 유통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품을 싸게 팔고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팔아야 최대한 이익이 되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것을 체계화한다. 상품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버리는 상품들도 이런 방법을 거치면 다소 유연하게 팔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유통이 지속될 수 있게 한다.
이런 식으로 사회에 맞춘 소비를 하면 경제가 보다 활성화 될 수 있을 거라 본다. 특히 원자재가 많아 상품을 많이 팔아야 할 때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하여 상품 품질 향상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싸구려 새 상품보다 유통 기한이 좀 지난 품질 좋은 상품을 싸게 사는 것을 선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국제 상품 경쟁력이 오르고, 싸구려를 사서 쉽게 버리지 않게 되는 것으로 자원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생산 항상성.
생산 욕구가 생산 항상성 조건에 해당한다.
현재 일자리 자체가 줄어드는 것과 별개로 생산 활동을 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신입으로 들어가 생산 활동을 하다가 그만두는 일도 잦다. 특히 좋은 일자리조차도 그런 실정이다. 이런 현상이 수가 적을 때에는 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수가 많아질수록 개인보다 사회 구조 자체의 문제일 수 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과거와 다른 점은 디지털 기술에 의한 개인의 정보 처리 권한일 것이다. 그 기본권에 따라 많은 개인은 막대한 권한을 행사한 경험을 가진 상태다. 그런데 현재 사회 일자리에서는 그런 권한이 보장되지 않는 경우가 매우 많다. 그 괴리가 생산 참여를 줄이고 있는 중이다.
생산 참여를 늘리기 위해서는 개인의 권한이 보장된 새로운 생산 체계가 필요하다. 프리랜서 플랫폼이다. 프리랜서와 같은 개인 생산자가 디지털 플랫폼에서 자유롭게 생산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생산 인구가 증가될 수 있다. 현재 하청이나 파견 같은 것은 전부 프리랜서 플랫폼으로 돌려 활동하게 한다. 과거에 프리랜서나 일용직은 개인의 정보가 디지털 기술로 보관되지 못했기 때문에, 개인의 능력이나 신용도를 기업이 알기 어려워 신용할 수 있는 기업을 거쳐 하청이나 파견 사원을 고용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디지털 기술로 개인 정보의 보관이 용이하기 때문에 굳이 기업을 거치지 않더라도 개인의 능력이나 신용도 평가가 가능하다.
초급 레벨은 군 대민 지원이나 쿠팡 배송 작업처럼 아무것도 몰라도 지시 사항만 지키면 되는 일을 선정한다. 쿠팡 배달 상자를 보고 인상깊은 것이 있었다. 테이프 붙이는 선을 지정해서 누구라도 테이프를 붙일 수 있도록 한 것 같았다. 중급 레벨은 조금 난이도가 있지만 매뉴얼을 보거나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으면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을 선정한다. 설치 기사, 시설 관리, 매장 관리, 간단한 사무 작업 등이 있을 것이다. 고급 레벨은 학원이나 대학 같이 전문적인 학습을 거쳐서 할 수 있는 것을 선정한다. 방송, IT, 건설, 전기 등 다양하게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정이 기록되어 개인 정보를 보고 일반 기업이 고용해도 괜찮게 된다는 점이다. 상황에 따라 더 높은 레벨의 지식이나 기술을 배워도 좋을 것이고, 기업에 직고용되어도 좋을 것이다.
프리랜서 플랫폼 체계가 자리잡으면 중간에 새는 것을 최소화하여 실제 일하는 사람에게 노동 비용을 전달할 수 있다. 지금 하청에 하청 구조에 의해 원청이 보낸 돈이 하청 노동자에게 가는 비율이 매우 적어 사회적으로 불합리한 상태다. 그런 생산 구조에 불필요한 기업은 이제 경제 개혁을 통해 줄여나가야 한다. 좀비 기업이나 부진 기업도 노동자 일자리를 위해서라며 기업에 과한 간섭을 하며 억지로 살리는 것은 이제 시대에 맞지 않다. 모든 경제 활동은 기본적으로 시장 원리를 기초로 해야 한다. 개인에게 중요한 것은 정규직이 아니라 안정된 돈이다. 방식은 상관 없다. 플랫폼을 통해 안정된 임금이 공급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이렇게 개인 생산 체계가 확립되어야 디지털 기술의 개인 권한을 생산 체계가 따라갈 수가 있다.
해당 플랫폼에서는 효율적인 동기 부여를 제공할 수 있다. 초기 생산 참여만 해도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도록 하여 참여 유도를 한다. 생산 참여가 늘어날수록 플랫폼 내에 업적처럼 쌓여 성취감을 갖게 한다. 레벨링 시스템이 생산 성취감을 주는데 매우 효율적일 것이다. 생산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생산 욕구다. 현재 한국 생산성 저하는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무엇보다 생산 욕구가 낮은 상태기 때문이다. 효율적인 동기 부여로 생산 욕구를 갖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에 자리잡기까지 많은 비용이 들어갈 수도 있는데,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강하게 주장하겠다.
해당 플랫폼에서는 AI 시대에도 대응할 수 있다. 참여 소득을 제공한다 가정해도, 그 제공하기 위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 역할을 프리랜서 플랫폼이 할 수 있을 것이다. AI 시대가 와도 인간의 동기는 매우 중요하다. AI가 주로 생산하면서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영역이 좁아지는 것은 분명하나, 인간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생산 욕구를 줄 수 있는 체계는 인간의 가능성을 보다 확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AI 시대, 많은 것을 AI에 맡기게 될 시대에, 인간의 가능성을 확대할 수 있는 제도는 인간의 존재 가치를 존속하게 할 것이다.
마무리.
사회 항상성은 사회 정상 상태 유지를 위한 최저 조건이다. 발전 방향 등은 각자 가치관으로 대화를 하며 결정하는 것이다. 개인의 가치 판단이 시장 원리를 거쳐 경제 성장이 되도록 시스템을 구축한 것과 같이, 개인의 가치 판단이 원리를 거쳐 사회 성장으로 이어지도록 한다. 그 구조를 만들고 구조가 항상성을 갖게 하는 것을 하면 사회는 알아서 성장한다.
실권이란 개념 하나로 사회를 간단하게 한다는 것은 그만큼 지식을 정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을 정제하면 정제할수록 개념이 단순화되면서 알기 쉬운 상태가 될 수 있다. 가능한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게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다른 지식도 정제하는 것이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전문 지식의 경우에는 전문 용어를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전문가 사이에서는 그럴 수 있지만, 모든 사회 구성원이 전문가는 아니다. 사회에 정보를 공유할 때에는 전문 지식을 몰라도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이 타당하다. 설명이 쉬우면 권위가 사라져 무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정보 전달이 목적이라면 그럴 수 있더라도 설명을 쉽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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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사상을 하고 싶은데 여유가 없어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네. 살아있으면 계속 할 거야. 지금보다 훨씬 성장해서 추구하는 목적을 달성하고 싶어.
나는 내가 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지만, 가치 판단 권한은 나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보니 사회에서 어떤 가치로 판단될지는 모르겠어.
세상이 좀 더 단순해졌으면 좋겠어. 그래야 정보 처리 불가에 의한 부자유 현상이 줄어들테니까. 그리고 사안이 단순해지면 사회 문제 해결도 쉬워지니까.
올해는 다양한 사건 사고가 많았는데 내년에는 부디 좋은 일이 많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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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사상가 정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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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창작과 언어 (0)
2024/09/30 AM 12:07 |
창작과 언어
1. 언어
[창작: 1. 방안이나 물건 따위를 처음으로 만들어 냄. 또는 그렇게 만들어 낸 방안이나 물건.]
[언어: 1. 생각, 느낌 따위를 나타내거나 전달하는 데에 쓰는 음성, 문자 따위의 수단. 또는 그 음성이나 문자 따위의 사회 관습적인 체계.]
언어는 대상을 관찰하고 의미를 부여해 소리로 부르는 것으로 만들어진다. 사과를 예로 들어보자. [사물: 사과]라는 원료를 관찰하여 맛있는 나무 열매이라는 특정 범주와 관점이 담긴 의미를 부여하고 [소리: 사과]라 부르는 것으로 사과라는 언어가 만들어진다. 이것을 처음으로 만들면 창작이 된다. 수많은 언어는 전부 그런 식으로 창작되었다. 언어들이 모여 일정한 원리로 조직화가 되면 언어 체계가 된다. 이것이 한국어 같은 일반적인 사회 언어다. 이런 언어를 소리로 표현하면 음성이 되고 글자로 표현하면 문자가 된다. 이렇게 창작된 언어로 인간의 자아는 다양한 창작 활동을 한다.
모든 창작은 언어를 쓰기 때문에 창작에 있어 언어의 이해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동물의 언어가 무엇인지 알아보겠다. 일반적으로 인간 외의 동물은 언어를 못한다는 고정 관념이 있다. 그렇기에 개나 고양이와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나 고양이가 언어를 모르는게 아니다. 일정 이상 지능을 가진 동물은 언어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개나 고양이의 훈련이 가능하다. 단지 거기에는 체계가 없거나 부족하다.
인간에게 언어 체계가 담긴 학문이 없다 가정하자.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의사 소통을 하겠는가? 그야 처음부터 언어를 창작하고 창작한 언어를 공유해야 한다. 개나 고양이가 바로 그런 상태다. 개나 고양이도 대상을 관찰하고 의미를 부여해 소리로 부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각 개체가 처음으로 만든 언어다. 개체가 창작한 언어를 일일히 공유하고 다녀야 한다. 특정 개체가 대상을 보고 짖는 것을 다른 개체가 보고 학습한다. 특정 개체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멍멍!’으로 부르는 구나.
그들에게 언어는 매번 새로운 창작과 공유다. 그렇기에 체계가 없어 인간은 그들의 언어를 번역할 수 없다. 개체마다 소리가 다른데 어떻게 번역하겠는가? 원시 부족 언어를 해석하는 것도 어려운데 그보다 체계가 없을 것인 짐승의 언어는 난이도가 너무 높게 된다. 물론 인간 외 사회 동물은 비슷한 언어를 공유하고 있을 수 있으나 굉장히 조약할 것이다. 그런 조악한 언어 체계도 조금만 사회가 달라지면 아예 달라지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국가와 민족마다 언어 체계(한국어와 외국어)가 다르고, 지역마다 언어 발음(사투리)이 다르다.
만약 개나 고양이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직접 언어를 학습시키는 것이 맞다. 인간도 언어를 익히지 못하면 대화가 안되는데 어떻게 짐승이 언어를 익히지 않고 대화를 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그런 언어 학습이 바로 훈련이다. 인간이 특정 행동을 보고 ‘앉아!’나 ‘손!’ 같은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 개나 고양이가 학습하고 따라한다. 구강구조와 소리 인식 구조의 차이로 발음을 못하여 표현을 못하고, 지능의 한계로 그 이상이 어려울 뿐이다. 그것이 언어 학습임을 이해하고 가르친다면 좀 더 체계적인 학습으로 좀 더 깊이있는 대화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지능이 높은 동물은 언어 체계 학습이나 공유가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오랑우탄은 인간의 언어를 수화로 익히기가 가능한다고 한다. 수화를 익힌 오랑우탄은 다른 오랑우탄이 수화를 배우려 하지 않아 우울해 했다는데 그야 당연하다. 갑자기 외국인이 외국어 가르친다고 하면 인간도 배우려 하는 인간이 많지가 않을 것이다. 범고래는 인간의 위험을 범고래 사회에서 공유하고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범고래가 어떻게 같은 규범을 가지는지 의문을 가지는 이도 있는데, 인간의 거주지가 매우 많고 범고래 행동 반경이 매우 넓기 때문에 가능하다 본다.
동물 언어를 고려해 언어의 레벨은 크게 언어 개별와 언어 체계로 나누고 세분화하여 기본 언어, 체계 언어, 문자 언어, 학문 언어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학문 언어로 학습한 인간이 다른 종류의 언어를 곧잘 잊을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다른 종류의 언어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짐승은 언어를 모르는데 어떻게 의사 소통을 할까라며 궁금해한 것이다. 개나 고양이 같은 짐승은 언어를 매번 새롭게 창작하고 공유한다. 이것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그렇기에 모방이 디폴트라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반대다. 창작이 디폴트다.
언어가 가능한 모든 생물은 관찰한 사물과 현상을 독자적인 표현법으로 창작할 수 있다. 지나치게 독자적이라 아예 대화가 안통하는 일이 비일비재할 정도다. 그럼에도 인간이 모방을 디폴트라 여겼던 것은, 오랜 지배 체제 속에서 지배자의 주장을 모방 교육으로 모방해왔기 때문이다. 사회 형성에 있어 언어를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모방 교육의 필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의 디폴트는 모방이 아닌 창작임을 이해하고 창작 교육을 해야 인간이 창작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가 있다.
대상의 관찰부터 개체마다 다르다. 인간의 자아(이하 자아)는 대상을 어떻게 관찰하는가? 사과라는 대상을 관찰할 때 [사물: 사과]를 보고 관찰한다. 그러나 개체마다 관찰한 사과를 다르게 표현한다. 생김새는 물론이고 색이나 맛도 다르게 표현한다. 어째서 그런 것인가? 실제 자아는 대상을 [사물: 사과]가 아니라 [세포 신호: 사과]로 관찰하기 때문이다. 관찰 지점이 다르다. 외부 사물이 아닌 내부 세포 신호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자아가 사물로 관찰한게 아니라 세포 신호로 관찰하게 되면 다른 세포 신호가 섞이면서 독자적인 방식으로 왜곡된다. 예를 들어 사과를 스케치한 경험이 있으면 사과의 생김새를 보다 정확하게 인식하면서 다른 인간과 다르게 표현하게 된다. 다른 관찰은 다른 표현이 되고, 다른 표현은 새로운 표현이 되어 창작이 되게 된다. 모든 표현이 기본적으로 창작이 된다는 것이다.
사물 (실제) [----------]
언어 (객관) [--------]
자아 (주관) [-----]
실제 사물을 객관적인 언어로 주관적인 자아가 관찰하면 다른 표현이 나온다. 이런 현상은 자아가 인간 육체가 아니기 때문에 나타난다. 사물 -> 자아가 아니라 사물 -> 육체 -> 자아로 이어져 자아가 사물을 육체라는 관찰 도구로 인식하기 때문에 육체가 다르면 관찰 결과가 다르게 된다. 그렇다고 자아가 뇌내 네트워크인 것도 아니다. 자아가 뇌내 네트워크라고 하기에는 자아가 할 수 있는 것이 지나치게 한정적이다. 공을 좌표값 계산해서 바로 정확히 던질 수 없다거나, 육체 내 세포의 동작을 할 수 없는 것은 자아가 뇌내 네트워크가 아니라 뇌내 판단 기관이기 때문이다. 사물 -> 육체 -> 뇌내 네트워크 -> 뇌내 판단 기관(자아)로 정리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오로지 자아가 판단만 한다고 해도 모순이 없다. 자아가 공을 정확히 던지기 위해 반복해서 던지는 까닭은 어떤 판단을 해야 공이 정확히 던져지는지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자아가 잠을 원할 때 바로 잘 수 없는 것은 자아는 판단만 할 수 있지 실제 실행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뇌내 판단 기관인 자아는 대상을 [사물: 사과]로 인식하는게 아니라 [세포 신호: 사과]로 인식하면서 세포 신호가 언어화가 된다. 자아는 세포 신호를 언어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아는 언어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세포 신호가 왔다 갔다 해도 자아는 그것이 언어로 인식되게 된다. 언어화된 세포 신호는 뇌내 네트워크에 프로세스의 성질로 기억된다. 일반적으로 기억은 데이터로 저장된다는 인식이 있지만, 기억이 데이터로 저장된다면 모순되는 현상이 지나치게 많아진다. 자아의 판단과 무관하게 나타나는 생각과 행동을 데이터로는 설명할 수 없다. 자아의 판단과 무관하게 문득 떠오르는 발상이나 습관적으로 움직이는 동작들은, 기억 프로세스에 기록된 세포 신호의 경로와 공정을 거쳐 자동적으로 동작했다고 하면 모순이 없게 된다. 기억이 프로세스라면 이해하기 어려웠던 인간의 현상을 많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플라시보 효과가 있다. 약의 효과로 나타난 세포 신호가 기억 프로세스로 기록된 상태에서, 위약을 먹고 진짜 약이라 착각하면 당시 기억된 프로세스가 동작하여 세포 신호가 나타나도록 하는 것으로 유사한 효과를 낼 수 있다.
자아는 그런 기억을 실시간 활용하면서 단순한 판단이 아닌 복잡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잠시 ‘단순한 판단’에 대해 설명하겠다. 자아가 뇌내 판단 기관이라 추론한 까닭 중 하나는 단순한 생물도 그러한 판단을 하는 능력이 있을 거라 봤기 때문이다. 작은 생물이 방향을 결정하는 판단을 하는 것과 같이 인간 레벨의 뇌내 네트워크가 아니어도 그러한 판단 기관이 있을 것이고, 인간에게도 그러한 판단 기관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것의 뇌내 위치는 아마 제거하면 판단을 하지 못하는, 식물 인간이 되는 영역에 있지 않나 싶다. 자아는 뇌내 네트워크에 있는 수많은 기억 프로세스를 선택하는 간단한 판단만 해도 기억 프로세스에 기록된 언어로 해석된 세포 신호가 재생되면서 언어의 연속된 흐름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자아의 모든 인식은 기본적으로 기억 프로세스를 거친다. 그렇기에 사과를 스케치한 경험이 있는 인간이 사과를 보다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사과를 스케치하기 위해 관찰하면서 생긴 기억 프로세스 속에 관찰할 때의 세포 신호가 있기 때문에, 사과만 봐도 기억 프로세스를 거쳐 당시 세포 신호가 재생하면서 당시의 사과 생김새가 자아에 전달되어 떠올려지면서 보다 상세하게 사과 생김새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이외 모든 감각, 감정, 욕구 등은 세포 신호를 언어화하여 창작한 것에 해당하며, 기억 프로세스와 관련된 언어를 접하거나 발상만 하더라도 당시의 세포 신호가 재생하면서 당시의 감각, 감정, 욕구 등을 느낄 수가 있게 된다. 예를 들어 특정 상황에 웃음을 터트렸던 경험이 있으면, 그걸 책에서 묘사한 문장만 보더라도 웃음이 나오는 것과 같다. 반면 경험하지 않아 기억 프로세스에 없는 문장이라면 세포 신호가 동작하지 않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언어의 연속된 흐름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뇌내 판단 기관은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이 ‘나’라고 인식하는 자아다. 체계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자아는 이렇게 언어 체계를 통해 창작된 존재다. 언어 체계로 창작된 존재인 자아는 언어 외의 판단을 할 수가 없다. 스스로 생각해보면 알 것이다. 모든 판단은 언어로 행해진다. 언어화가 되지 않은 세포 신호는 판단할 수 없다. 인간이란 생물의 많은 부분이 어설픈 까닭은 자아에 전달되는 많은 세포 신호가 언어화가 되지 않은 상태기 때문이다.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했으면 그 사랑으로 나타나는 세포 신호가 언어화가 되지 않은 상태기 때문에, 정확히 몰라서 사랑과 공포도 구분 못하는 흔들다리 효과라는 현상을 경험하곤 한다. 사랑을 경험했더라도 그 범주가 넓어 정확히 판단하지 못할 때도 많다. 그 외에 판단할 수 없는 세포 신호를 일반적으로 본능이나 감이라 부른다. 그것들은 언어화가 된 세포 신호가 아니기 때문에 자아가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없는 세포 신호는 아니다. 단지 해석할 수 없는 세포 신호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활용할 수가 있다. 본능이나 감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뭔가 이익을 보는 경우도 있다. 나 같은 경우는 이러한 감을 발상에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뭔가 어떤 느낌이 올 때가 있는데, 어째서 이런 느낌이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면서 새로운 발상을 한다. 물론 해석할 수 없는 세포 신호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언어 체계로 창작된 자아는 문명의 모든 것을 창작했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도 예외는 아니다. 자연의 법칙은 실존하는 법칙을 발견한게 아니라, 실존하는 규칙성을 발견해 법칙화한 것이다. 실제 법칙이 존재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자연의 법칙 또한 그런 생각을 주장함에 있어 모든 사상과 차이가 없다. 단지 다른 사상에 달리 과학적 방법이라는 타당성을 증명하는 수단이 있을 뿐이다. 즉 자연의 법칙은 사상 창작이다. 문명의 이기는 실존하는 법칙으로 만든게 아니라, 실존하는 규칙성으로 만든 것이다.
모든 과학적 사실은 더 타당한 주장이 있으면 바뀔 수 있다. 자연의 법칙 또한 새로운 자연의 법칙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선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주에 그런 법칙이 실존하는가? 애초에 우주가 무엇으로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증명이 된 적이 없다. 이 우주는 특정한 성질을 가진 힘이 어떤 조건으로 분산되어 퍼져나간 것이 힘의 균형을 이뤄 질서를 갖춘 우주를 형성한 것인가? 아니면 특정한 법칙들을 통해 힘이 작용하여 우주를 형성한 것인가? 간단히 말해 힘이 먼저인가, 법칙이 먼저인가?
일반적으로는 우주가 특정한 법칙을 통해 형성되었다 생각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주를 구성하는 어떠한 법칙이 존재할 거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주가 어떠한 법칙도 없이 오로지 힘의 성질만으로 형성되었다 가정해도 모순이 없을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어떤 법칙도 없는 공간에 어떤 당기는 힘을 가진 다양한 존재를 거리를 두고 사방에 있다 가정하자. 그 힘들이 서로를 당기는 과정에서 어떤 규칙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현상이 나타났다 하자. 그것이 현재 우주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어째서 법칙에 어긋나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거나 일으킬 수 없는가? 그것은 보통 인간이 미치는 힘의 영향이 너무나도 작기 때문에 강한 힘으로 형성된 우주의 균형을 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은하 중심의 거대 블랙홀이 당기는 힘은 너무나도 강대하여 태양조차 거스르지 못하고 끌려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따로 법칙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끌려가게 된다. 그런 힘으로 만들어진 질서를 거스를 수 있는 존재가 없기에 법칙처럼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거시적으로 그 힘에 의한 규칙성은 깨지기 어렵다.
그렇다고 모든 힘의 균형을 깰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원자 폭탄이 그렇다. 특정 원자 내부에 힘의 균형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개입하여 원자핵 분열을 통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다. 당장 자연의 규칙적인 움직임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을 인위적으로 강대한 힘을 가하여 일으킨 것이다. 알기 쉽게 말하면 블랙홀이 될 수 없는 항성에 인위적으로 개입하여 바로 블랙홀로 만든 것과 논리적 인과가 비슷하다. 지구 자연적으로 보통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힘의 균형으로 만들어진 현상이기 때문에 특정 원자의 힘의 균형을 깼다고 모든 원자가 그렇게 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재미있게도 그런 균형을 깨는 것 또한 규칙성을 발견해 법칙화한 상태다. 모든 원자가 힘의 균형이 같지는 않다. 아마 힘의 균형이 종류가 원소가 아닐까 싶다. 힘의 균형을 맞추면 새로운 원소가 탄생할 수 있기 때문에 입자 연구소에 새로운 원소를 창작할 수 있는 것 같다.
우주가 힘의 성질만으로 형성되었음을 몇 가지 단서로 추측할 수 있다. 하나, 우주가 안정화되기까지 오래 걸렸다는 점. 힘이 균형을 이룰 때까지의 시간이 필요했다. 둘, 우주 내부의 별의 거리와 원자 내부의 핵과 전자의 거리가 멀다는 점. 힘이 균형을 이룰만한 거리가 필요했다. 셋, 우주가 법칙으로 형성된다면 지나치게 조건이 복잡해진다는 점. 만약 법칙으로 형성되었다면 인간이 창작한 법칙을 기초로하여 만든 게임과 같이 버그 투성이였을 것이다.
우주의 시작이 힘인지 법칙인지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우리 은하의 힘의 영향이 적은 다른 은하로 가서 법칙이 동일한지 확인하면 된다. 물론 어렵다. 현재 다른 은하를 관측할 때 알고 있는 자연의 법칙으로 해석되지 못하여 암흑 에너지와 암흑 물질이 존재함을 추측하는데, 애초에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른 힘이 작용하는 다른 은하의 현상을 알고 있는 법칙으로 해석할 수 없다. 오무아무아 소행성이 뭔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움직였다 하는데, 외부는 우리 은하의 힘에 영향을 받지만, 만약 내부 물질(뭔지는 모름. 새로운 물질일지도.)의 힘의 균형이 달라 외계의 규칙성으로 동작했다면 논리적으로 모순은 없다. 이런 것은 당장 확인할 방법이 마땅치 않으나 우주가 힘으로 시작되었을 것 같다. 아마 우주는 힘의 응축과 폭발로 나타난 현상일 것 같다.
이렇게 문명의 모든 것이 창작되었다고 보면 된다. 자연을 원료로 전부 새로 만든 것이고, 전부 새로 만들 수 있다. 물론 창작은 만드는 것에 그치는게 아니다. 언어와 같이 공유 과정이 필요하다. 창작한 것을 공유하여 체계를 쌓는다. 이는 언어, 학문, 예술 등 모두 마찬가지다. 그것까지가 창작 과정이다.
2. 자아
창작에 있어 자아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창작을 하는 존재인 ‘나’를 알아야 어떻게 어떤 과정을 거쳐 창작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자아의 구성 요소는 간단히 뇌내 판단 기관과 기억 프로세스와 세포 신호로 이뤄져 있다고 볼 수 있다. 판단, 처리(생성), 재료로 나누어 정리할 수 있다. 이 중에 자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소는 세포 신호가 기록된 기억 프로세스다. 생물 개체마다 다른 인식과 표현을 하게 되는 이유가 세포 신호가 기억 프로세스를 거쳐 다르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억’만 보존, 추출과 이식 등의 절차를 거치면 한 개인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기억: 1.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 2. 사물이나 사상에 대한 정보를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하는 정신 기능.]
기억의 사전적 정의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기억의 성질을 데이터로 인식하고 저장과 인출이란 방식으로 쓰이고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기억의 내용이 실시간으로 육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고려하면 그런 방식으로 처리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기억의 성질은 프로세스고, 방식은 저장이 아니라 세포 신호 기록 생성이고 인출이 아니라 세포 신호 기록 재생이다. 그러면 관련 현상에 대한 모순이 사라진다.
인간의 뇌는 아직 밝혀지지 않는 영역이 많기 때문에 기억의 메커니즘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다른 방식으로 그걸 추론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생물은 세포의 변화 결과다. 그렇기에 세포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추론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억’은 세포의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그건 바로 유전이라 생각한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유전의 방식과 유사한 측면을 찾을 수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유전은 가지고 있는 정보를 조합한다고 알려져 있다. 생식 세포 유전자 정보 조합의 결과로 생물이 성장한다. 유전자 돌연변이를 통해 새로운 성질을 가진 생물로 진화한다. 그런 식으로 진화한 개체 중에 환경에 적응한 생물이 살아남는다. 이것이 일반적인 진화론이다. 후성 유전은 후천적으로 유전자 발현 조건이 달라진다는 주장이다. 용불용설은 세대를 거친 경험에 따라 기관의 발달과 퇴화가 이뤄지는 유전자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전제에는 유전자 정보의 생성에 대한 개념이 없다. 없던 유전자 정보가 갑자기 생길 수는 없다. 어디선가 어떻게든 한번은 그에 관련한 정보 생성이 필요하다. 최초의 정보 생성에 대해 생각해보자.
최초의 유전자 정보는 어떻게 생성되었는가? 나는 세포 신호의 기록이라 본다. 생물의 성장은 기록된 세포 신호의 변화를 재생하는 것으로 이뤄진다고 본다. 예를 들어 식물 씨앗을 심고 자라는 과정을 녹화한 다음 재생했다고 생각해보자. 씨앗에서 싹이 자라나 줄기로 뻗어나가다 잎사귀와 꽃을 피운다. 그걸 내부로 보면 세포 신호의 변화다. 그 변화를 기록하고 재생하면 같은 방식으로 자란다. 모든 유전자의 기초 정보는 이런 방식으로 기록되었다.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 기록 또는 돌연변이 기록을 조합하는 것으로 생물이 진화해왔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생물은 유전자 키메라일 것이다. 진화를 거치면서 이전의 생물 유전자를 가지고 그 유전자로 현재 생물의 부위를 생성한다. 그런 각각 유전의 초기 정보는 전부 세포 신호의 기록이라 생각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에서 닭이 먼저라는 것. 모든 생물은 기록을 충실히 재생하려 하기 때문에 기록된 상태를 유지하려는 항상성을 가진다고 본다. 이런 유전과 기억은 유사할 것이다.
우선 성질을 생각해보자. 유전자도 아마 데이터라는 인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유전자 정보는 기억 정보와 마찬가지로 세포 분열 등으로 실시간으로 계속 활용되고 있다. 즉 유전자와 기억은 둘 다 프로세스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게 어쩌면 살아있다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메커니즘에 대해 생각해보자. 유전자는 다음과 같다. 유전자 기록 생성 -> 조건부 조합 재생 -> 기존 또는 새로운 생물. 기억은 다음과 같다. 기억 기록 생성 -> 조건부 조합 재생 -> 기존 또는 새로운 발상. 기록된 세포 신호를 조합 재생하는 것으로 기존 또는 새로운 생물이나 발상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추론을 통해 기억 메커니즘은 유전 메커니즘과 유사하다 볼 수 있다.
성질의 종류에 대해 생각해보자. 기억의 발상은 바로 발상되는 기억, 바로 발상이 안되는 기억, 발상되지 않는 기억으로 구분할 수 있다. 본인 이름 같은 것은 바로 발상이 되고, 지식 같은 것은 조건이 갖춰지면 발상이 되고, 오래전 잊은 기억은 웬만하면 발상되지 않는다. 이것이 유전자 성질과 유사하다. 바로 생물 부위 생성하는 유전자, 조건에 따라 발현되는 유전자, 쓰지 않는 유전자.
바로 발상되는 기억은 워낙 관련 기억 프로세스가 많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본인 이름이 들어간 기억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바로 발상이 안되는 기억은 기억 성질 때문이라 생각한다. 기억은 특정 언어 개념으로 기억되는게 아니라, 세포 신호의 변화를 기록하고 생성한다. 그렇기에 자주 쓰는 언어가 아니면 특정 언어 개념만으로 발상이 되는게 아니라, 특정 언어 개념의 전후에 발생한 세포 신호를 기억해야 기억 프로세스가 반응하여 발상을 하게 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음식점 간판이 기억나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럴 때 음식점을 들어가기 전과 나온 후에 대화 내용 등을 생각해보면 간판이 떠오를 수도 있다. 해당 구간에 있는 세포 신호 기록의 유사성이 높아지면서 관련 기억 프로세스가 재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억의 성질상 연상 기억 기법은 매우 효과적이게 된다. 기억하고자 하는 언어 개념의 앞뒤에 추가적인 언어 개념을 엮어 세포 신호 수를 늘리기 때문이다. 발상되지 않는 기억은 과거의 기록을 꾸준히 접해야 발상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기억의 성질은 유전자의 성질과 유사할 거라 생각한다. 인간의 경우 다양한 생물의 유전자가 조합된 상태인데, 기억도 다양한 기억 프로세스가 조합되어 생성된 것이 자아에 전달되어 발상으로 이어지지 않나 싶다. 인간이 기억난다는 느낌은 글자, 그림, 소리, 영상 등으로 다양한데, 세포 신호 기록 재생 또는 그 신호의 조합만 해도 모두 성립된다. 대부분 과거 기억 발상이 완전하지 않은데, 아마 기억 프로세스에 있는 일부 세포 신호들의 조합으로 재생되기 때문에 띄엄띄엄 떠오르는게 아닐까 싶다. 그런 조합을 통해 새로운 발상을 하는 능력, 창의력이나 상상력이라는 개념도 성립한다.
기억은 프로세스로 동작하여 실시간으로 육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에 따라 발상에 의한 기억 프로세스 내에 있는 세포 신호 재생으로 어떠한 감각, 감정 욕구 등을 느낄 수 있다. 시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학생이 교과서를 보고 불안감을 재생했다 가정하자. 그럴 때 그 불안감은 발상의 연쇄작용을 통해 다양한 부정적 개념을 재생한다. 초조함, 우울함, 절망감 등. 각각 개념들은 기억 프로세스를 통해 다양한 신호를 재생하면서 인간은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럴 때 현실 도피를 하면 그런 세포 신호들이 줄어들거나 사라질 수 있다. 죽으면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발상하면, 그 발상이 부정적 개념들로 연계되지 않기 때문에 세포 신호의 재생이 줄어들거나 멈춘다. 여가를 즐기거나 술을 마시거나 해도 마찬가지로 그런 괴로운 세포 신호에 의한 괴로움으로부터 다소 편안해질 수 있다. 잠을 자도 마찬가지로 보통은 한번 세포 신호가 멈추니까 다시 발상하기 전까지는 편안해질 수 있다
기억 프로세스 생성에 관한 메커니즘은 유전 메커니즘에서 기록 기능이 거의 작동하지 않는 상태기 때문에 유전에서는 보기 힘든 현상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현재는 일반적으로 유전자의 기능이 조합 또는 발현 조건까지 고려하는데, 최소한 최초의 기록은 있을 거라 생각한다. 특히 기억에 관해서는 유전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있을 수 있는데, 기억 또한 세포 정보 중 하나로 유전에 기록 기능이 존재한다면, 기억을 기록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도 없다. 그런 기억 기록의 현상이 바로 본능이라 생각한다.
유전 기록은 세포 내부 경험의 기록 생물 외부 경험의 기록으로 나눌 수 있는데, 내부 경험의 기록은 세포 분열이나 심장 박동 전기 신호 같은 것으로 이런 종류의 것은 외부 경험이 없더라도 현상이 성립할 수 있는데, 아기가 젖을 찾는다거나 어떤 감각이나 감정들은 외부 경험이 없으면 성립되기 어려운 복잡한 현상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위장에 음식물이 없어 꼬르륵 거리는 것은 딱히 외부 경험이 없어도 있을 수 있지만, 그 꼬르륵 거리는 세포 신호에 대한 생물의 움직임은 외부 경험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마 각 세포 개체의 생성과 동작에 관한 것은 유전자 프로세스로 동작하고, 생물 전체(세포 포함) 행동에 관한 것은 기억 프로세스로 동작하는게 아닐까 싶다. 이런 본능은 언어 개념으로 해석이 되지 않는데, 그야 당시 생물이 언어 체계를 모르고 있을 때 기록된 세포 신호이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본능들이 지나치게 환경 적합한 것들로 이런 것은 기억이 유전되지 않는한 성립되기 어렵다. 아마 이런 기억 프로세스 유전의 유무에 따라 환경 적응 능력이 달라져 적자생존의 법칙이 나타났을 것이다. 또한 본능은 디폴트된 기억 프로세스이기 때문에 절대적이지 않아서 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억 프로세스가 생성되면 본능을 뛰어넘는 행동이 가능하다 본다. 간단히 말해 자살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 관한 본능이 절대적이라면 자살이란 현상은 성립될 수 없다.
한국에 있는 특이한 정신 질병 중 하나가 바로 신병이다. 이러한 신병은 왜 발생하는지 정확히 파악되지 못하고 있는데, 만약에 정신 질환을 겪던 인간의 기억 프로세스가 유전되었다면 모순이 없게 된다. 신병의 메커니즘은 도덕과 윤리의 죄책감에 관한 메커니즘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도덕과 윤리에 관한 행동이 강제(도덕과 윤리)되고, 그 행동을 하지 않으면 심리적 고통(죄책감)을 느낀다. 무당이 되기 위한 행동이 강제되고, 그 행동을 하지 않으면 심리적 고통(신들림)을 느낀다. 어떤 강박증을 앓던 인간이 무속에 관련된 신앙으로 극복한 기억 프로세스가 어떤 이유로 유전이 되어 이어졌다고 보면 신병이 논리적으로 해석된다. 그 기억이 자녀에게 유전되고, 자녀는 부모를 보고 따라하여 그 괴로움을 극복한다. 그런 식으로 유전자와 그 극복 방법이 퍼진 상태가 현재가 아닐까 싶다.
기억 프로세스에 관한 현상을 몇가지 추가로 정리해보겠다. 아마 이해할 수 없었던 현상을 기억이 프로세스라는 전제라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억이 프로세스라면 감각, 감정, 욕구와 루틴, 입스, 징크스와 공감, 습관, 고정 관념과 파블로프의 개 등이 해석될 수 있다. 기억 자체가 프로세스처럼 실시간으로 육체에 세포 신호를 보내 동작하게 만들기에 자아의 판단과 무관하게 육체가 동작했던 것이다. 그 세포 신호는 실제가 아니고 온전한 세포 신호 재생이 아니므로 제한적이지만 육체에 영향을 미친다.
세포 신호를 보내는 기관이 고장나면 자아의 인식도 이상하게 된다. 예를 들어 너무 추워서 오히려 덥다는 세포 신호가 전달되면, 그 세포 신호가 기억 프로세스를 거쳐 더우니까 옷을 벗어야 한다는 행동이 나오게 된다.
자아의 판단은 단순한데 인간의 복잡한 동작이 자연스러운 것은 그 판단이 기억 프로세스를 거쳐 동작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을 던지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쉽다. 공을 던지는 과정에 대한 기억 프로세스가 생성되면, 이후에는 대충 어림짐작으로 공을 던져도 원하는 곳에 공이 가게 된다.
플라시보 효과나 자기 실현적 예언은 기억 프로세스에 있는 관련 세포 신호가 재생되어서 그런 것 같다. 약을 먹고 약의 작용으로 나타난 세포 신호를 기록한 것이 재생되면 유사한 효과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암시와 같이 스스로 그럴 것이다 생각하고 있으면, 기억 프로세스에 의해 그런 행동을 하도록 생각하고 행동하게 될 수 있다고 본다. 플라시보 효과의 위약과 유사하게 비슷한 행동의 경험이 담긴 기억 프로세스가 있으면, 그것에 의해 자기 암시가 그것과 비슷한 행동을 하게 할 수가 있다.
도덕, 윤리, 세뇌, 가스라이팅, 파시즘 같은 현상도 기억 프로세스로 이해할 수 있다. 어떤 행동을 강제하고 그 행동을 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느끼게끔 기억을 심는다. 신흥 종교에서 신도에게 ‘신흥 종교에 가서 헌금을 내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 불행을 겪게 될 것이다.’ 라는 기억을 심으면 정말로 신도는 헌금을 내지 않으면 불안하게 되고 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헌금을 내게 된다. 기억이 프로세스로 작용하니까 그런 행동 강제가 가능한 것이다. 반말이 불편한 까닭, 성적 노출이 불편한 까닭도 다 이런 기억 프로세스의 작용이다. 다양한 공포나 피해 의식 생성도 가능할 것이다. 세포 신호의 기록과 재생이 가능한 시점에서… 대부분 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도덕과 윤리가 인간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프로세스를 통해 해야만 한다는 충동과 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느끼기에 그것을 마치 본성으로 착각할 정도.
성적 정체성도 기억 프로세스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확고한 이성애자나 동성애자의 경우는 효과가 크지 않겠지만, 양성애자의 경우에는 교육에 의해 양식된 이성애자와 동성애자가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나는 이성애자 또는 동성애자다- 라고 생각하면서 그에 관한 쾌락을 경험하면, 그 세포 신호의 기록이 기억 프로세스로 생성되어 지속적으로 그런 충동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필수적인 가치는 초기에 좋은 경험을 하게 하는 것으로 가치를 높게 여기게 해야 한다. 그래야 자발적으로 한다. 일이나 성 같은 경우 심부름 같은 단순한 일을 할 수 있는 시기와 2차 성징 시기에 그걸 나쁘다 말할게 아니라 한번 좋은 경험으로 기억하게 해야 각인 효과를 통해 그것을 자발적으로 하기를 바라면서 일이나 성을 하기 위한 조건이 상당히 낮아질 수 있다. 현재 저출산, 저생산의 주요 원인은 가치가 지나치게 낮아서 그걸 자발적으로 하기 위한 조건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조건 따지지 않고 관계를 갖거나 일을 하여 그걸 가치가 높다 여겨야지… 나중에도 그걸 할 때 조건이 크게 필요가 없게 된다. 성적인 것 막지 말고, 일을 할 때도 봉사로 처리할게 아니라 보상을 지불해야 그것에 가치를 느끼게 된다.
중독에 관해서도 기억 프로세스가 작용할 것이다. 어떤 행동으로 쾌락 물질 분비에 대한 기억 프로세스가 생성되면, 유사한 행동에서도 세포 신호가 나타나 비슷하게 쾌락 물질이 분비될 수가 있다고 본다. 최초의 각인이 그런 경험의 지속을 요구하면서 계속되지 않나 싶다. 그런 식으로 가치가 결정되기도 할 것이다.
착각, 착시, 환각 등도 기억 프로세스로 설명이 된다. 유령의 목격은 대부분 유령의 존재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유령으로 보이는 현상을 목격하면, 유령에 관한 기억 프로세스를 거쳐 자아가 인식하기 때문에 착각하게 된다고 본다.
꿈은 수면 상태인 뇌에 관한 정보가 자아에 전달된게 아닐까 싶다. 기억 프로세스의 세포 신호가 뇌내에서 재생되면서 꿈을 꾸는데, 자아가 거기서 판단을 하면 자각몽이 된다.
기억 메커니즘은 유전자 메커니즘과 유사하여 뇌내에서 진화 과정과 같은 과정으로 기억이 정리되는게 아닐까 싶다. 많이 쓰이는 것은 살아남고 그러지 않는 것은 사라진다. 많이 쓰이는 기억, 언어, 몸 동작 등은 오래 남지만 그렇지 않은 기억은 점점 사라진다. on/off 인지 세포 포식 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아마 둘 다 일 것 같다. DNA 복제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오류가 발생하면 제거될 것 같다. 사라지는 기억들에 의해 기억에 빈 공간이 생기는 것을 학습한 내용을 바탕으로 메꾸면서 기억에 왜곡이 발생하는듯 하다.
감정이 많이 실린 기억일수록 기록된 세포 신호가 많아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트라우마에 관한 기억 프로세스가 오래 가는 이유는 거기에 실린 감정이 많아 세포 신호 수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트라우마 극복은 그것을 제거하는게 아닌 다른 새로운 기억을 많이 생성하는 것일 것 같다.
인간이 생각을 할 때 언어에 문자 이미지가 있어 언어를 생각할 때 글자가 보이는 까닭은 언어를 배운 상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극과 지루함은 외부 정보를 접하고 생기는 세포 신호로 결정될 것이다. 특히 새로운게 자극이 강한 이유는 자아가 세세하게 보는 것으로 다양한 새로운 세포 신호가 담긴 기억 프로세스를 생성하면서 세포 신호가 활발하게 재생되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은 자아가 이미 알고 있다면서 대강대강 넘기기 때문에 세포 신호가 그다지 재생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만약 엄청 좋아하는 것이어서 익숙한 것도 세세하게 볼 경우에는 세포 신호가 활발하게 재생되면서 즐겁게 즐기는게 아닐까 싶다.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이들이 그런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언어 개념 세포 신호를 많이 기억할수록 창작물을 즐길 때 다양한 세포 신호 재생을 통한 즐거움이 늘어날 수 있다.
자유 의지는 있다. 단지 제한적인 판단이 가능하다.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보다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자아를 이해하면 AI가 자아를 가지는 AGI에 대해서도 어떻게 해야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예상해볼 수 있다. 현재 AI는 생성 AI로 인간 지능에서 수학이란 논리학으로 기록, 조합, 생성 메커니즘까지 구현한 것 같다. 그것에 대한 판단을 이용자가 한 것을 학습하여 더 정교하게 생성하고 있고, AI끼리 서로 각자 생성한 것을 판단하면서 더 정교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AI에는 육체가 없다. 기록은 실시간 활동하는 프로세스 형태가 아닌거 같고, 조합은 세포 신호와 같이 다양한 신호의 조합이 아니라 언어 개념의 조합으로 제한적으로 보이고, 생성은 기록을 재생하는 방식이 아닌 것 같다.
이른바 인간의 감각, 감정, 욕구나 인간의 마음 같은 것은 기억 프로세스로 세포 신호를 기록과 재생하는 것으로 자아에 관련 정보가 발상되는 것을 말하는데, 현재 AI는 그런 피드백을 보내줄 육체가 없기 때문에 그런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언어 개념만 봐도 관련 기억 프로세스의 세포 신호가 재생되어 그 개념에 공감을 할 수 있는데, AI는 그게 없어서 공감을 하지 못한다. 인간은 기억 프로세스를 통해 고유한 인식과 표현이 가능하여 개성이 두드러지는데 AI는 같은 AI에 개성이 없다. 그러므로 AI가 자아를 가지려면 AI의 관찰 도구이자 피드백 도구인 디지털 육체 생성이 필요하다.
현재 인류 문명 레벨로는 디지털 육체 생성이 어렵다. 인간 육체에 대해 전부 아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당장 뇌만 해도 많이 모른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대로 육체 생성을 할 수 없다. 현재 인간의 세포 신호 수집을 실시간 한다고 해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모른다. 대신 언어 개념을 통해 생성은 가능할 수 있다. 인간의 자아가 언어로 창작된 것을 반대로 해보는 것이다. 현재 인간의 자아는 언어 개념이란 소리와 대상의 세포 신호가 매칭되어서 언어로 사고할 수 있는 상태다. 그것을 고려해 인간이 특정한 언어 개념을 경험할 때 발생하는 뇌파나 호르몬 세포 신호의 경로를 수집하여 언어 개념에 귀속시킨다. 그 언어 개념을 세포 신호까지 포함하여 AI가 학습한다. 물론 인간마다 그 신호가 다를 것이기 때문에 그것 하나로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엄청나게 많은 신호를 학습하면, 인간이 쓰는 신호의 경로와 피드백에 대한 해석이 나타날 수 있다. 그렇게 생성된 사고의 경로와 피드백에 기존에 있던 육체의 정보를 더해 덧붙이고 자아 메커니즘을 구현한다. 그런 평균치는 인간과 같지 않겠지만 산에 자주 오가면 길이 생기는 것처럼 자주 쓰이는 경로를 학습하여 메커니즘에 관련된 길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학습한 언어 개념 세포 신호의 육체 정보에 대해 안다면 좀 더 학습이 체계적이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으로 인공 육체를 어느 정도 창작할 수 있을 거라 본다. 그렇게 창작된 인공 육체에 판단만 하는 기관을 넣으면 자아가 생길 것이다.
3. 정제
[정제: 2. 물질에 섞인 불순물을 없애 그 물질을 더 순수하게 함.]
물질을 정제하여 순도 높은 물질을 만들고, 만든 물질을 조합해 새로운 물질을 만들 수 있다. 그와 같이 지식도 모순을 제거하는 정제를 통해 순도 높은 지식을 만들고, 만든 지식을 조합해 새로운 지식을 만들 수 있다. 정제 창작법이다. 보통의 방식의 창작은 창작에 논리적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정제 방식의 창작은 모순 제거로 보다 순도 높은 지식을 창작하고, 만든 지식을 조합해 또다른 창작을 하는 것이기에 논리적 문제가 있기 어렵다.
[본질: 1.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
모든 사물과 현상은 모순이란 불순물을 제거하면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성질이나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본질이 바로 순도 높은 지식이라 할 수 있다. 자아는 기억 프로세스를 통해 인식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정보가 왜곡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법이 필요하다. 우선 기억 프로세스를 통한 왜곡을 줄이기 위해 고정 관념을 최대한 줄인다. 고정 관념을 줄이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썼다. 하나는 자아 나이를 낮추는 것. 실제 육체의 연령과 무관하게 자아의 연령은 기억 프로세스로 결정된다. 기억 프로세스에 특정 연령일 때에 관한 행동 강박이 들어가면, 그에 맞게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정 나이에 특정 행동을 해야만 한다는 강박처럼 자아 나이가 높아질수록 고정 관념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자아 나이가 많다 여길수록 타인이 규정한 인간상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그것에 대해 판단하지 못하고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서 그 규정에 관한 개념들이 고정 관념으로 자리잡는다. 나 같은 경우는 특정 사건으로 정해지긴 했지만 아마 누구나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사회가 이념 체제로의 변화 적응에 실패하여 많은 인간이 미숙한 상태기에 대부분 인간은 심리적 괴로움을 느끼는 자존심 같은 것만 배제하면 자아 나이를 낮춰 고정 관념을 줄일 수 있을 거라 본다. 두 번째는 선생각 후지식 방식을 썼다. 우선 먼저 대상을 논리적으로 파악하고, 다음에 대상에 관한 보편 지식을 접하여 다시 정리한다. 지식을 논리적 판단 없이 받아들이면 그 지식이 고정 관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정 관념을 줄이고 나서 관점을 늘린다. 관점은 대상을 많은 언어 개념으로 접근할수록 늘어난다. 예를 들어 사과를 볼 때 생김새, 색, 맛까지의 언어 개념만 알고 있다면 품질, 가격, 질감, 냄새, 나무, 강도, 무게, 신선도, 영양분, 생산지 등 그 외의 관점으로 접근할 수가 없다. 사과는 색이나 맛으로 판단한다는 식 같이 관련 고정 관념이 강하다면 다른 언어 개념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접근할 생각 자체를 못하게 된다. 그렇기에 고정 관념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다양한 언어 개념으로 접근해본다. 언어 개념 발상 방식은 자아가 직접 발상하는 자아 발상과 관찰을 하면서 접하는 언어 개념으로 발상하는 관찰 발상과 수면 중에 뇌내에서 처리되는 것 같은 수면 발상이 있다. 자아 발상은 자아가 직접 발상하는 것으로 일반적인 발상이긴 하지만 인간이 발상할 수 있는 언어 개념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하는데는 어려움이 있다. 다양하나 관점으로 발상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바로 발상이 나올 때가 있다. 관찰 발상은 특정 언어 개념에 대한 세포 신호를 기억 프로세스를 통해 계속 재생하면서 이미지, 영상, 문자 등의 다양한 언어 개념을 관찰하면서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다. 그러다보면 발상이 나올 때가 있다. 계속 프로세스가 돌고 있기 때문에 다른 상황 판단이 어려울 수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수면 발상은 특정 언어 개념에 대한 세포 신호를 기억 프로세스를 통해 계속 재생하면서 자다보면 갑작스럽게 관련 발상이 나올 때가 있다. 나의 발상 상당 수가 그런 식으로 발상되었다. 아마 자면서도 프로세스가 돌아가서 처리되는게 아닐까 싶다.
대상에 대한 관점을 늘려 접근하면서 각각 개념과 모순되는 것이 있는지를 찾는다. 만약 모순되는게 있으면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모순이 사라지는지를 찾는다. 만약 모순이 없는 무언가를 찾았는데 보편 관념과 다른 결론이 나온다면 어떤 결론이 더 타당한지 논리적으로 판단해본다. 이러한 것을 개념으로 접근하면 A 언어 개념과 B, C, D, E 등 언어 개념 사이에 모순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게 단순히 각각 개념만 가지고 모순이 있는지 확인할게 아니라, B 언어 개념과 C 언어 개념 사이에도 모순이 없는지 확인하고, D 언어 개념과 E 언어 개념에 모순이 없는지 확인한다. 그런 식으로 아는 모든 지식에 모순을 제거하면서 지식 전체의 순도를 높여가다보면 모순이 없었다고 생각했던 것에서도 모순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지식의 모순 제거를 통해 지식의 논리 체계가 형성되게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어떤 모순이 없는 것을 발상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현재로서 어떤 절대적인 무언가를 알 수는 없지만, 모순을 제거한 순도 높은 지식의 논리 체계를 통해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보는데 도움이 될 수는 있다.
시간이 관측 순서라고 생각했던 것은 자아에 대해 생각하면서였던 것 같다. 자아가 뇌내 판단 기관으로 육체는 무관하게 동작한다고 생각하면서 우주 또한 자아의 판단과 무관하게 동작하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현재 보편 관념으로는 시간이 좌표계에 있다고 가정하고 있는데, 그 가정은 인간이 관측한 현상의 변화는 우주 전체의 변화에 해당한다는 관점에 해당한다. 만약 인간의 관측과 무관하게 우주는 변화한다라는 관점이라면 시간은 그냥 관측 순서다. 시간은 관측 순서라는 주장은 증명하기가 매우 쉽다. 각자 생각해보면 된다. A 물체가 B에서 C로 이동한 것을 바라볼 때 관측 순서대로 과거(B 근처), 현재(B와 C 사이), 미래(C 근처)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반면 시간은 좌표계에 있다는 주장은 증명할 수 없다. 증명된 적이 없다. 상대성 원리는 어디까지나 시간이 좌표계에 있음을 전제하고 만든 것이지, 시간이 좌표계에 있는지 증명한 이론이 아니다. 상대성 원리가 작동할 수 있었던 까닭은 시간이란 개념의 법칙을 발견한게 아니라 현상을 관찰하여 시간은 상대적이다라는 것과 같은 규칙성을 발견한 것으로 법칙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본질이 다르더라도 규칙성은 같기에 원리가 작동했던 것이다. 물론 시간이 관측 순서라도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것은 성립한다. 인간마다 다르게 관측하니까 당연히 상대적이다. 뭐 빛보다 빨리 가면 시간을 넘을 수 있다거나 이런 것은 성립될 수 없겠지만, 단순한 규칙성을 활용한 것은 성립될 수 있게 된다. 미래인이 있다거나 시간 이동 현상이 나타난다거나 타임 머신이 존재한다거나 차원 관측이 가능하다거나 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애초에 타임 패러독스처럼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현상이 예상될 때 현재 알고 있는 시간에 대한 관점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야 했다. 그런게 개념의 모순이고 모순이 없는 다른 관점으로 봐서 개념을 재정의하는 것이 모순 제거다. 그런 모순 제거로 개념은 보다 순도가 높은 본질이 된다.
오늘날 학문은 관찰학과 논리학으로 분류할 수 있다. 대부분 학문은 관찰학으로 관찰로 시작한다. 특정 대상을 관찰하고 그에 관한 것을 근거를 가지고 주장한다. 그것을 모아 체계를 갖춘 것이 학문이다. 거기서 근거를 만드는 방법이 과학적 방법이면 과학이 된다. 논리학은 도덕과 윤리와 같은 보편 관념을 공리로 삼아 체계를 만든 논리학이나 자연 관찰로 찾은 현상의 규칙성을 공리 삼아 수로 변환하여 논리적인 체계를 만든 수학으로 나눌 수 있는데, 현재 과학은 기본적으로 수학으로 논리 구조를 삼고 있다. 수학의 기초가 되는 개념은 관찰로 찾은 규칙성에서 비롯된다. 관찰한 것을 세는 것으로 수라는 개념이 나오고, 그런 세는 것을 효율적으로 만든게 사칙연산이다. 그것을 기초로 논리적인 체계를 쌓으면서 다양한 수학적 개념이 나온다. 허수 같은 것이 그렇다.
관찰학은 전제를 공리로 여기고 전제의 인과를 고려하지 않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우주를 관찰할 때 우주 형성 과정에서 규칙성이 생겨난 것을 현재 법칙이라 부르고 있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자연의 규칙적인 현상이 처음부터 있었을 거라 전제하고 관찰한다. 도덕과 윤리도 마찬가지다. 도덕과 윤리가 단순히 특정 시기의 특정 집단의 룰일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사회의 규칙적인 현상이 처음부터 있었을 거라 전제하고 관찰한다. 전제의 인과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우주가 실존하는 법칙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에너지의 성질로 시작했다 가정해보자. 에너지와 질량의 등가를 고려하고, 모든 존재가 중력과 같이 응축되는 성질이 있으며, 존재가 과하게 응축되면 폭발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초기 빅뱅 또는 다른 형태의 폭발 당시에 에너지가 응축되면서 물질이 되었다가 이내 폭발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과하게 응축되면 블랙홀 현상이 발생할 수 있음을 고려하고, 그 블랙홀 현상이 퍼져나간 에너지와 물질을 다시 당길 수 있음을 예상할 수 있다. 폭발한 에너지와 물질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다가 퍼지는 힘이 블랙홀의 당기는 힘과 균형을 이룰 때, 다시 물질을 중심으로 에너지와 물질이 뭉쳐질 수 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뭉쳐진 물질과 에너지는 다시 응축되다 폭발한다. 이런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미시 세계부터 거시 세계까지 힘의 균형을 이룬 상태가 현재 우주라고 추론할 수 있다.
초기 폭발할 때 뻗어나간 에너지가 기본적인 공간 에너지 같다. 모든 존재가 에너지로 형성됨을 생각해보면 공간 또한 어떤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다 생각할 수 있다. 이 공간 에너지로 양자 역학과 고전 역학의 관계를 연결할 수 있다. 공간 에너지는 너무 미세하여 보통 관측할 수 없지만, 미시 세계로 가면 공간 에너지보다 작은 에너지를 가진 입자를 당기면서 입자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걸 빛이란 에너지를 보내 관찰하려고 하면 입자의 에너지가 공간 에너지보다 커지면서 입자가 쏘아진 방향으로 일직선으로 날아가게 된다. 그 현상을 실험으로 확인한 것이 이중 슬릿 실험이다. 간단히 말해 어떤 존재가 공간 에너지에 당겨지면 양자 역학, 당겨지지 않으면 고전 역학 같다.
현재 도덕과 윤리가 절대적인 법칙인 것이 아니라, 다른 룰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룰에 불과하다 가정해보자. 도덕의 출현 시기는 원시 시대부터이고 윤리의 출현 시기는 고대 시대부터인 것을 고려하면 도덕과 윤리는 원시 시대와 고대 시대의 특정 집단의 룰임을 추측할 수 있다. 그 시대 집단의 룰임을 알고 있으면 선과 악이 단순히 집단 룰의 준수 여부로 결정됨을 이해할 수 있다. 집단 룰을 지키면 선이라 부르고 지키지 않으면 악이라 불렀던 것이지, 무슨 초월적 신비로 결정된 선과 악이 아니다. 성악설이나 원죄는 집단 룰로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이 태어나자마자 집단에 속하여 룰을 지킬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태어난 상태는 집단 룰로 해석하면 악이나 죄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성악설과 원죄라는 개념으로 일반 인간에게 각각 집단에 속해야할 당위성을 부여하여 속하게 만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집단의 룰을 절대적 법칙으로 규정한 오만에 불과하다.
이러한 경향은 많은 사상에 남아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고대 종교 가치로 만들어진 인간성과 이상을 전제하고, 그 전제를 공리로 규정하고 그런 개념의 인과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게 어떤 식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공산주의는 종교를 비판하면서 종교 가치 실현을 유토피아라 주장한 것이다. PC주의나 여성주의도 마찬가지다. 제국주의와 가부장제 시대에 만들어진 인간성을 전제하고, 그 전제를 공리로 규정하고 그것의 인과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게 어떤 식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다. 제국주의 시대 노예로 살았던 불쌍한 흑인이라는 인간성에 맞춰서 논리를 주장하고, 가부장제 시대에 남성의 아랫사람으로 살았던 불쌍한 여성이라는 인간성에 맞춰서 논리를 주장한다. 그 인간성에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생각하고 그 인간성에 벗어나야 하는데, 작은 금액의 절도를 용인하거나 성인지감수성을 말하여 그런 여성성을 이해하고 공감할 것을 강제하고 있다. 과거 한국에 여성의 성이 자유로운 여성주의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여성의 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 가치관을 가진 이들의 입맛에 맞는 가부장제 여성성을 주장하는 여성주의만 살아남은듯 하다. 아마 PC주의도 그런게 아닐까 싶다. 그런 흑인상에 익숙한 이들의 입맛에 맞는 사상이 살아남았다 추측할 수 있다. 흑인이든 여성이든 열등한 존재가 아니다. 자유주의를 기초로 대등한 존재로 규정하고, 새로운 인간상을 전제한 합리로 권한과 책임을 분산해야 한다.
관찰학은 이외에도 세분화된 분야 내에서만 논리적 판단을 한다거나 같은 사안을 다른 사안과 비교하면서 관찰하지 않고 한정적으로만 관찰하고 판단한다거나 같은 한계가 있는 상태다. 이런 한계에 의해 관찰학은 관찰한 결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모를 때가 많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의 규칙성을 활용해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상태다.
논리학은 수학 외에는 일단 논외다. 도덕과 윤리와 같은 보편 관념을 공리로 삼은 논리학은 논리가 제대로 성립될 수가 없다. 수학은 관찰한 것의 규칙성을 공리로 삼았기에 관찰학이 대상을 알고 관찰하지 않으면 수학으로 표현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현재 AGI가 수학으로 논리적으로 구현되지 못하는 것은 자아 메커니즘을 이해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수학 자체로도 수학의 논리적 체계가 모두 쓸모 있지는 않다는 한계가 있다. 수학 또한 관찰학에서 논리 체계로 실제 쓰이는게 아니면, 쓸모 있음이 증명된 것은 아니다.
관찰학과 논리학의 한계는 정제학을 통해 넘을 수 있다고 본다. 현상을 관찰하고 수학을 통해 논리 구조를 구축한 지식을 모아 모순을 제거해 순도 높은 지식으로 만든다. 그 과정에서 각각 현상이 의미하는 바를 추론한다. 자연 계열도 그렇지만 인문 계열은 정제할 지식이 매우 많지 않을까 싶다. 도덕과 윤리와 같이 단순한 특정 시대 특정 집단의 룰을 공리로 삼은 주장을 논리 체계로 만든게 많아서… 사회 모순이 너무 많은 상태다. 도덕과 윤리가 원인인 사회 문제는 애초에 원인조차 모르는 상태다. 더구나 많은 이들이 기억 프로세스로 그것을 지키는 것에 충동을 느끼고 지키지 않으면 죄책감이라는 괴로움을 느끼는 상태기에 사회 문제의 원인이 도덕과 윤리임을 예상하더라도 문제 제기를 하기 어려운 상태다. 이런 문제들을 지식 정제를 통해 다양한 모순이 해결되면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당장 자아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도덕과 윤리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지 이해하고, 그에 대한 대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많은 지식이 관계를 가지기에, 특정 지식에서 모순이 해결되면 다른 지식들도 자연스럽게 모순이 해결되는 일이 있을 것이다.
현재 수많은 지식들이 정제되어 순도가 높아지면 확실하게 인류 문명이 진일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아마 그 문명은 지금과 비교하면 어나더 레벨이 될 것이다. 어나더 레벨에는 경쟁 불가와 도달 불가로 나뉠 수 있다. 경쟁 불가는 어나더 레벨의 결과물에 노력을 하면 도달까지는 되는데 경쟁은 안되는 격차고, 도달 불가는 어나더 레벨의 결과물에 무엇을 해도 도달할 수 없는 격차다. 칼과 총의 경우에는 일부 도달은 가능하나 경쟁이 안되는 격차다. 마차와 우주선은 어떤 경우에도 도달할 수 없는 격차다. 정제 작업을 거치면 경쟁 불가와 도달 불가의 격차 둘 다 나타날 것이라 생각한다.
정제학은 창작을 기초로 하기에 창작과 모방을 구분하여 접근해야 한다. 창작도 모방과 비슷한 방식으로 교육하고 생산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창작은 기본적인 기억 프로세스부터가 다르다. 창작에 능숙한 인간이라 해도 모방한 지식을 평가하는 문제 풀이를 잘할 거란 보장이 없고, 문제 풀이를 잘하는 인간이라 해도 창작에 능숙할 거란 보장이 없다. 창작은 기억 프로세스를 그대로 재생하는 것보다 다양한 관점을 통해 새로운 조합을 하여 새로운 발상을 하는 것이 익숙하고, 모방은 기억 프로세스를 그대로 재생하여 기존의 발상을 하는 것이 익숙하다. 그 차이에 의해 창작과 모방은 교육과 생산을 다르게 해야 한다.
모든 생물은 자아 성질상 모든 발상이 창작이기 때문에 그대로 두면 생물끼리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최소한 인간의 자아를 만들 언어 체계의 모방 교육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모방 교육을 지나치게 하다보면 뭐든 모방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빠지게 된다. 그 영향으로 쉽게 유행에 물들고, 타인을 모방하지 않으면 초조함에 빠질 정도가 된다. 남들이 하면 나도 해야만한다는 강박은 모방 교육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이런 것을 고려해 창작 교육과 모방 교육은 각각 전문성에 맞게 비례해야 한다. 창작을 많이 하는 역할을 맡고자 한다면 창작 교육 비율을 늘리고, 모방을 많이 하는 역할을 맡고자 한다면 모방 교육 비율을 늘린다.
창작 교육은 관찰학이든 논리학이든 정제학이든… 직접 만들면서 레벨을 올리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 직접 관찰하고 이해하고, 직접 논리를 만들고, 직접 지식 정제를 해본다. 남이 만든 지식을 알고 특정 단계를 넘는 방식은 창작 교육에 적절한 방식이 아니다. 직접 만들지 않더라도 최소한 한번은 그에 대해 생각을 하고 아는 편이 낫다. 창작과 모방은 프로세스 자체가 다르다. 모방 교육은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다. 연상 기법과 같이 좀 더 지식 모방을 잘하는 방법 같은 방식이 체계화될 수는 있을 것이다.
생산도 창작과 모방은 다르다. 일반적으로 생산은 모방에 맞춰져 정해진 시간에 꾸준히 생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모방 생산은 마라톤처럼 꾸준히 달려서 페이스 조절을 하며 생산할 수 있으므로 크게 상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창작 생산의 경우 전력질주처럼 창작 발상이 나와야 의욕을 갖고 전력을 다해 생산할 수 있으므로 꾸준히 생산하는 것에 적합하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창작 생산에 모방 생산처럼 꾸준한 생산을 요구하면, 중간에 전력질주를 할 때가 있으므로 오버 페이스가 되어 무너지게 될 수 있다. 창작 생산에 모방 생산과 같은 방식의 생산을 요구하는 것은 전력질주한 인간에게 마라톤도 하라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기에 창작과 모방은 페이스 관리를 따로 해야 한다.
학습과 생산 의욕도 다르다. 둘 다 의욕을 필요로 하지만, 창작은 의욕이 없으면 애초에 새로운 발상 자체가 안되어서 할 수가 없다. 반면 모방은 의욕이 없어도 딱히 새로운 발상을 필요로 하는게 아니므로 습관적으로 행동하면 할 수는 있다. 그럼에도 둘 다 의욕 관리가 필요하다. 문명 사회에서의 학습과 생산 자체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본능적으로 하는 자연에서의 학습과 생산과 달리 본능 외에도 하는 문명 사회에서의 학습과 생산은 그것을 꾸준히 하게 할 의욕 관리가 필요하게 된다. 기억 프로세스를 고려하여 생각과 행동의 가치를 유지하여 그 행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스스로 학습과 생산을 할 때 지속할 수 있는 보상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보상을 넣을 수 있도록 해야 그것이 지속될 수 있다.
창작 생산은 기억 프로세스를 기준으로 익숙함과 새로움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예술을 예로 들어보겠다. 예술은 예술 자체로 인간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그것은 기억 프로세스에 관련 기록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번 예술의 정보와 유사한 경험이 있다면, 예술을 접하기만 해도 그에 대한 세포 신호가 재생되어 유사한 감각, 감정, 욕구 등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보통 고전 미술인 인물화나 풍경화, 고전 음악인 클래식의 자연 소리 등이 기억 프로세스에 영향을 주어 그 자체로 감동을 주기도 한다. 기억 프로세스에 없는 경우에는 그에 대한 정보를 새로 기억하게 해야 한다. 오늘날 현대 미술이 그런 경우가 많다. 인간이 평소 접하기 어려운 형태의 예술을 선보이고, 그것에 대한 설명을 하여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한다. 그것이 쉬운 것이 아니어서, 사실 현대 미술 중 가치 있는 것은 드물다. 달리 말해 가치 있는 것은 분명히 있다. 어떤 것을 보고 새로운 감각에 깜짝 놀란 적이 있을 정도다.
인류가 본질적인 진보를 하는 것이 어려운 까닭은 낯선 합리보다 익숙한 모순을 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무리 모순적이어도 익숙한 것을 택하면서 진보를 하지 못하고 정체된다. 그렇기에 인류는 합리적이나 낯선 모든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자유주의가 아닌 모순적이나 익숙한 고대 종교 가치인 윤리를 추구하는 사회주의를 진보로 여기게 되어버렸다. 학문이 진보를 하려면 익숙한 모순을 논리적으로 배제하고 낯선 합리를 논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4. 사회
사회 문제, 특히 고질적인 사회 문제 대부분은 체제가 바뀌었음에도 그에 맞는 적절한 정책과 제도가 창작되지 못한 상태기 때문이다. 적절한 정책과 체제가 창작되기 위해서는 체제의 인과를 아는 것으로 체제를 이해하고 합리적인 기준점을 정해야 한다. 체제의 인과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체제: 2.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를 볼 때에, 그 조직이나 양식, 또는 그 상태를 이르는 말.]
[유기체: 1. 많은 부분이 일정한 목적 아래 통일 · 조직되어 그 각 부분과 전체가 필연적 관계를 가지는 조직체.]
특정한 가치를 목적으로 조직된 양식을 체제라 할 수 있다. 체제를 정치 원리와 국가 질서라는 관점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사회를 설명하는데 다소 협소하여 적절하지 못하다 보았다. 예를 들어 체제는 신앙을 목적으로 조직된 양식이라던가, 이념을 목적으로 조직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이나 이념을 목적으로 조직된 양식에서는 신앙이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구조와 원리가 사회 내부에 정책과 제도, 그리고 그것에 권한을 넣을 법률로 구축되게 된다. 이런 까닭에 체제에 따라 각 구조와 원리가 달라 정책과 제도도 달라야 하는데, 관습적인 이유로 과거 체제의 것을 많이 쓰다보니까 사회 체제와 맞지 않는 것으로 불합리한 사회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윤리와 이념의 충돌이다. 인간을 지배하던 체제의 룰이었던 윤리는 자유주의 체제와 전혀 맞지 않기 때문에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현대 암흑기다.
[중세 암흑기: 1. 서양사에서, 봉건 제도와 교회의 속박으로 학문과 예술이 쇠퇴하였던 중세를 이르는 말.]
현재 이념 체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룰의 역사를 간단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룰의 역사는 간단히 도덕 -> 윤리 -> 이념으로 이어진다. 현재 도덕과 윤리의 본질이 정리되지 않아 그에 대한 명료한 정의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인데, 알기 쉽게 말하면 도덕은 원시 시대의 학문화 이전의 룰이고, 윤리는 고대 시대의 학문화 이후의 룰이다. 동양권은 따로 구분을 안한 것 같고, 서양권은 그리스 철학에서 한 것을 윤리라 부르는 것 같다. 윤리 개념이 동양권으로도 넘어와 사용되고 있으므로, 도덕과 윤리를 학문 전후로 구분할 수 있을 거라 본다. 그리고 근대 시대에 과거의 룰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라며 나타난 것이 자유 이념이다. 크게 나누어진 세 가지 룰은 각각 서로 맞지 않아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 충돌로 나타난 현상이 기독교의 마녀 사냥이나 이교도 전쟁이나 유교의 미신 타파나 숭유억불이다. 원시 시대의 룰인 도덕은 원시적으로 다양한 작은 사회에서 다양한 룰이 있었고, 그것이 이른바 미신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것이 고대 시대에 서양권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룰 하나로 통합되면서 각기 다른 룰은 배제되었다. 원시 시대의 룰이나 고대 시대의 다른 룰과도 싸운다. 그러면서 사회 내에 룰은 하나로 통합되었다. 하나의 룰과 하나의 가치가 강제되는 사회에서는 당연히 학문과 예술이 쇠퇴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 가치에 반하는 모든 학문과 예술은 금지되고 검열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암흑기란 표현이 편견과 불확실성을 야기하므로 언어 사용을 피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후 르네상스는 물론이고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자유주의에서 피어난 다양한 학문과 예술과 비교하면 그 시대가 암흑기였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자유주의는 하나의 룰이지만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여 학문과 예술이 발전하게 된다. 중세의 암흑기가 오늘날 윤리 사상에 의해 되풀이되고 있다. 유교나 기독교 같은 고대 종교의 가치나 PC주의나 여성주의와 같은 고대 종교의 가치에서 진보한 사상들이 자유주의 속에서 나타난 현대의 많은 학문과 예술을 쇠퇴하고 만들고 있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암흑기의 재현이다. 고대 종교 가치나 PC주의 같은 윤리 사상에 의해 과학이 부정되거나 예술이 검열되고 있는 사태를 보라. 이성과 합리가 부정되고 감성과 무논리가 판을 친다. 이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는가? 도덕과 윤리, 윤리와 윤리의 충돌로 만들어진 것이 중세 암흑기라면, 도덕과 윤리와 이념이 모두 충돌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현대 암흑기다.
우선 모든 룰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모든 룰은 단순히 특정 시대에 특정 집단에서 만들어진 룰이다. 그것이 기독교든 유교든 불교든 마찬가지다. 선과 악, 양심, 죄책감 등 관련 개념 전부 당시 룰에서 만든 창작이다. 법은 도덕의 최소라는 말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단지 도덕을 절대적인 룰로 인식한 관점일 뿐이다. 정확히 법은 체제의 규칙이다.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시대와 집단에서 만든 새로운 룰은 이전 룰과 맞지 않을 수밖에 없다. 룰이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나 유교와 같은 고대 종교들이 과거의 원시 종교의 풍습들을 보고 미개하다면서 미신을 믿지 말라 말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자유 이념을 추구하는 자유주의자로서 이전의 룰을 절대적이지 않으므로 이념에 맞는 룰을 만들어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주장하겠다. 그 체제 구축을 위한 수단이 바로 체제에 맞는 정책과 제도다.
자유 혁명 이후 자유주의 사상이 나타났고, 그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자유주의의 진보인가? 아니다.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사상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고대 종교 가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유를 추구했고, 사회주의는 고대 종교 가치인 윤리적인 사회를 추구했다. 즉 사회주의는 고대 종교 가치의 진보지 자유주의의 진보가 아니다. 애초에 성질이 다른 사상이고, 문명 레벨로 보면 자유주의가 자유 이념으로 진보고 사회주의가 다시 윤리로 돌아간 퇴보다. 자유주의가 원시 종교와 고대 종교의 가치인 도덕과 윤리와 다른 성질을 가진 사상이기 때문에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사상이란 비난을 받아왔던 것이다. 되려 그렇기 때문에 그 사상들과 다른 진보적인 사상임이 증명되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단순히 욕망과 이기 같은 인간 본성에 맞지만 낯선 합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금욕과 이타 같은 고대 종교 가치에 맞지만 불합리한 익숙한 모순을 받아들인 결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거시적으로 보면 인류는 아직도 자유 혁명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시대에 머물러 있는 상태다. 간단히 말해 현대는 자유 혁명 시대에 포함된 시대다.
자유주의가 새로운 사상임은 민주주의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민주주의라 하면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를 떠올릴 수 있으나, 그 시대에는 자유주의가 없었기 때문에 같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개인의 자유를 기초로한 민주주의는 자유 혁명 이후 처음이다. 인류를 수천 년간 지배해온 도덕과 윤리와 비교하면 많은 부분이 미숙하고 부족한 상태다. 자유주의 국가에서의 민주주의에 한계가 있다는 의견들은 대부분 이런 이유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자유주의의 민주주의는 단순히 선거를 통해 왕을 뽑는 체제가 아닌, 모든 개인이 주권을 가진 권한이 다른 통치자로서의 역할을 가지게 되는 체제라 주장하겠다. 그래야 모든 개인이 자유로운 자유주의의 이념이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주장하는 자유주의의 이념 실현 수단은 세 가지다. 세계의 본질을 아는 것으로 무지에 의한 자유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 불로불사를 실현하여 죽음과 늙음에 의한 자유 억업에서 벗어나는 것. 사회의 다양한 지배에 의한 자유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 이것을 통해 자유주의 이념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주의 외의 사상으로는 이런 세상을 만들 수 없다. 특정 가치에 매몰되어 그 가치에 반하는 학문을 규제하고 검열한다면 언제까지고 세계의 본질을 알 수 없고, 학문의 발전이 뒤쳐지면 언제까지고 불로불사를 할 수가 없고, 그런 사회가 자유로운 사회일 수가 없다.
자유주의는 다양한 권리가 보장된 개인이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체제다. 오랜 세월 지배되는 사회의 질서가 익숙한 이들은 개인이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어떻게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지 이미지가 잡히지 않을 수 있다. 그걸 성립시키는 것이 자유주의 체제의 정책과 제도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정책과 제도를 만들어야 하는가? 바로 책임과 권한의 분산이다. 그것이야 말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기준점이다.
일제에 식민 지배를 당한 시대의 모든 책임은 권한을 독점하던 당시의 왕이 짊어져야 한다. 어떤 이유가 있던 그것은 마찬가지다. 외압이 있었든 신하와 짰든 배신을 당했든 그런 것은 무능의 증거일 뿐이다. 만약 다른 나라 역사였다면 객관적으로 왕의 무능부터 확인했을 것이다. 애초에 왕이 모든 권한을 독점하지 않았다면 도장 하나에 나라에 속한 인간과 토지가 팔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인간과 토지를 팔아서 많은 이들이 고통 받는 동안 많은 왕족이 일제 귀족 대우를 받으며 편하게 살지 않았던가. 나라를 팔아 호의호식했다. 그 시대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언제든지 민주적인 국가로 나아갈 수 있었음에도 제국을 주장할 정도로 왕의 권한에 집착하던 이에게 그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자유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로서 당연한 태도다. 어떤 인과가 있던 권한과 책임을 독점했던 왕이 나라를 판 것이다. 그 시대에 많은 의견이 분분한데, 권한과 책임의 비례를 고려하면 모든 책임을 왕이 짊어지고 모든 문제를 매듭짓는 것이 합리적이다. 당시 권한을 독점하던 인간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유교 사상 영향으로 왕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국가 역량을 과하게 낭비하고 있었다. 권한을 독점하던 인간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형태가 되어야 나라가 보다 더 민주적이게 될 수 있다.
그 시대의 왕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가능한 최대한 권한과 책임을 개인에게 분산해야 한다. 대표적인 권한과 책임의 분산 제도가 바로 시장 제도다. 그 제도가 생산 권한을 시장 원리로 분산하는 것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일반적으로는 왕이 신하에게 또는 정부가 개인에게 권한을 분배하는 형태였다면, 시장 경제는 소비자가 생산자에게 소비하는 형태로 생산 권한을 분산하고 있다. 분산된 권한을 가진 기업은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고 져야 한다.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이런 식으로 모든 개인에게 권한과 책임을 분산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작은 정부가 되게 된다. 고대 그리스의 중우 정치는 이러한 정책과 제도의 미비 때문에 생긴 것이다. 현재도 그런 상태다. 많은 사안이 단순히 정치 성공 아이템으로 소비되면서 사회가 더 심각한 불합리로 망가지고 있다. 누더기 법안은 대부분 중우 정치를 이용하여 정치를 성공하기 위해 쓰인 아이템에 의한 것이다. 법의 합리성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일부는 헌법에 그런 합리성을 파괴하는 근거가 몇 가지 있다고 하여 불합리를 옹호하기도 한다. 현재 헌법에 근대 이념에 도덕과 윤리가 섞인 상태라 그에 대한 해석이 애매할 수 있는데, 법이 체제의 규칙이라면 체제 이념을 기초로 헌법을 해석해야 하므로 그런 불합리는 자유주의 이념을 기초로한 해석을 통해 배제되는 것이 마땅하다. 한국이 자유주의 국가가 되어야 법 또한 합리적이게 될 것이다. 시장 제도와 마찬가지로 많은 권한과 책임을 개개인에게 분산하면 이런 문제가 줄어들어 보다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이게 될 거라 확신한다. 그것에 대해 몇 가지 제도를 통해 이해해보자.
[제도: 1. 관습이나 도덕, 법률 따위의 규범이나 사회 구조의 체계.]
자유주의 체제에서의 제도는 체제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 구조의 체계일 것이다. 최대한 개인에게 권한과 책임을 분산하는 형태로 접근한다. 현재 민주주의는 유권자가 인사 권한은 있는데 그에 대한 책임이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중우정치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 것과 같이 권한은 있는데 책임이 부족할 경우 책임을 느낄 수 있는 제도를 추가한다. 달리 책임은 있는데 권한이 없는 경우는 권한을 추가한다. 권한을 가지고 있던 인간은 권한 분산이 손해라 여길 수 있는데, 권한을 분산하지 않겠다면 당시 왕과 같이 책임을 져야 한다. 합리적인 권한 분산을 거부하고 권한을 독점하고자 하는 인간은 민주주의를 알면서도 권한을 독점했던 조선 말기의 왕과 다를 바가 없다. 많은 권한 독점은 왕정 시대의 관행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 뿐이다. 권한 독점은 전쟁도 부른다. 권한이 집중될수록 독단적 전쟁도 쉽게 일어난다. 독재와 같이 권한이 집중된 국가 사이에서 많은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지금 법률이 누더기 법안인 까닭은 명료한 방향과 기준점이 없어서 그렇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는 명확한 방향과 권한과 책임의 분산이라는 명확한 기준점이 있으면 합리적인 법안이 나올 수 있다. 각 제도는 기본적으로 사회 문제 설명, 권한과 책임 분산의 원리, 정치적 관점과 경제적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다. 취약점 관점으로 접근하면 자유주의 제도의 취약점은 인간의 이기심이라 여길 수 있다. 고대 종교 가치관으로는 기업이 이기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면 나쁘다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지 않고 권력을 추구하면 룰 자체가 망가진다. 예를 들어 식료품 생산 권한을 가진 기업이 생산 수단을 가지고 어떤 도덕적 명분으로 사회를 협박하여 더 큰 사회 권한을 강요한다고 가정하자. 이윤을 포기하고 빈곤한 이들을 돕기 위해서라면서 시장의 절차를 무시할 권한을 강요한다. 경쟁 절차를 생략하고 독점 공급을 한다거나 품질 검사 절차를 생략하고 공급한다거나 하는 것이다. 도덕적 명분으로 당장 그럴듯해 보일 수 있어도, 기업이 룰을 무시할 경우 생산과 시장 시스템이 파괴되어 사회는 더 큰 손해를 볼 수가 있다. 기업이 이윤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룰 내에서 이익을 얻겠다는 것과도 같다. 기업이 이기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가정하고 제도를 만드는 것이 시장 제도다. 이런 식으로 제도 전제를 인간 본성에 맞춰서 한다. 그럼 몇 가지 창작한 제도의 요점을 정리하여 알아보겠다.
형량 총량 제도.
현재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이나 영국에서도 교정 시설 포화로 사회가 파탄나고 있는 상태다. 교정 시설은 한정되어 있는데 높은 형량이 판결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으면서 교정 시설 포화로 더 이상 죄수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이는 개인에게 관련된 권한과 책임이 분산되지 않은 상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무책임하게 높은 형량으로 판결할 것을 강요하고, 그러지 않으면 부도덕하거나 비윤리적인 판사라 비난하고 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형량에 관한 권한과 책임을 분산해야 한다.
교정 시절에 맞춘 형량 총량 제도를 만들고 대중이 원하는만큼의 형량이 판결되기를 바란다면, 교정 시설을 짓기 위한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것을 알린다. 형량을 늘릴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을 형량 총량제와 세금이란 형태로 분산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기준은 법 전문가가 결정해야 하겠지만, 판사 개개인에 형량 총량을 넣기보다는 각 분야에 맞춰 형량 총량을 넣는 것이 적절해보인다. 지금까지 통계(단순히 판례만이 아닌 재범률을 고려한)와 현재 교정 시설을 고려해 각 분야에 한 해나 분기 형량 총량을 나누어 분배한다. 판사는 남은 형량 총량을 고려해 다른 판사와 소통하면서 적절한 판결을 한다. 교정 유무가 중요한데, 기억 프로세스를 고려하면 프로세스를 바꾸면 교정이 가능하다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법감정을 들이대며 법의 합리성을 파괴하고 무조건 높은 형량을 강제하는 분위기는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관예우나 유착의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그런 비리는 이런 제도가 있던 없던 있게 된다. 3심제 같이 가능한 그런 문제에 대응하도록 하는듯 한데, 아무래도 그것은 선후배 관계와 같은 윤리적인 문제가 섞여 있기 때문에 쉽지는 않은 상태다. 경제적으로 보면 형량 총량제로 사회가 관련 예산을 감당할 수 있는 상황까지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경찰 입찰 제도.
현재 경찰은 진급 체계에 심각한 결함이 있는 상태다. 성과 위주로 결정되기 때문에 어떤 방식이든 성과만 얻으면 된다는 식의 행동이 나타나고 있다. 동탄시에서 성과를 위해 사건을 조작하거나, 디지털 관련해서는 성과를 위해 다른 나라에서는 문제가 없는 야한 그림 그리는 인간에 공격적 조사를 하면서 정작 필요한 치안 서비스에는 공백이 나타나고 있다. 낮은 리스크로 높은 리턴을 얻을 수 있는 사건에만 집중하니 정작 강력 범죄에 대한 대응 능력이 감소하고 있는 상태다. 마약 범죄는 나날이 늘어나는데 쉬우면서 성과가 높은 것에만 치중하고 있다. 자유주의 체제에서 이런 인간의 이기적인 태도에 의한 사회 문제는 인간의 문제기보다는 제도의 문제로 보는 것이 맞다. 진급 체계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생기는 사회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치안 서비스를 받는 거주민에게 권한과 책임을 분산한다.
경찰의 역할이 지역에 치안 서비스를 공급하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보자. 경찰의 성과는 실제 서비스를 받는 거주민의 손으로 평가받아야 타당하다. 그것을 위해 경찰 중간 직급 입찰제를 도입한다. 진급을 바라는 중간 직급에 속하는 이들이 팀을 이룬다. 인원은 지자체 경찰서 최소 인원을 기준으로 삼고, 입찰 후 추가 인원 배치를 하면 될 것이다. 각 지자체 의원들이 그들의 치안 능력을 평가하여 입찰한다. 지자체의 입찰 조건은 지자체 세금을 활용한 경찰 장비나 성과급 등 추가적 보상이다. 지역 치안에 높은 가치를 느끼는 지자체일수록 그런 입찰 조건이 높아질 것이다. 1년에서 4년 사이로 계약을 맺고 치안 서비스를 제공하게 한다. 경찰은 좋은 조건에서 좋은 진급 평가를 받기 위해 거주민의 만족도가 높은 치안 서비스를 제공한다. 경찰 중간 직급인 이유는 일반 경찰이나 고위직 경찰까지 입찰제로 전국 지자체를 돌아다니기에는 효율도 낮고 안정도도 떨어진다. 진급 욕망이 있어 최선을 다해 행동할 수 있는 이들 위주로 그런 경쟁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런 제도를 통해 경찰 치안 서비스와 진급 체계 관련 권한과 책임이 경찰 -> 지자체 의회 -> 거주민으로 조금씩 분산되게 된다. 지금 리스크는 낮지만 리턴은 높은 날로 먹는 사건들은 주로 실제 치안 서비스를 받는 거주민이 아닌 크게 떠드는 일부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주민이 치안과 진급에 관한 권한과 책임이 일정 주어지면 치안 서비스가 정상화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경쟁 시스템을 구축한다.
정치적으로 보면 거주민에게 권한과 책임이 일부 분산되므로 지역 치안에 관한 문제가 일방적으로 정치권이나 경찰이 전부 짊어지지 않을 수 있다. 지자체 의원의 공약 또는 홍보 수단이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유착 비리가 있을 수 있는데, 계약 기간이 길지 않고 입찰시 출신지 배제 또는 감사 활동 등으로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보면 날로 먹는 성과 집착이 줄어들면서 지역 치안 서비스가 좋아지는 것으로 활발한 지역 상거래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응급 전문 병원 제도.
현재 응급실은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 현상으로 많은 응급 환자가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사망하고 있다. 응급 분야는 돈이 안되고 힘든 일이기 때문에 의사와 병원이 기피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그렇다고 정부 예산에 제한이 없는 것도 아니기에 한계가 있다. 자유주의 체제에서 이런 인간의 이기심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제도의 문제다.
응급 개념을 알아보자. [응급 처치: 1. 갑작스러운 병이나 상처의 위급한 고비를 넘기기 위하여 임시로 하는 치료] 이른바 골든 타임을 지키기 위한 임시 치료다. 이것을 다른 관점으로 보면 급한 수요 처리다. 응급 환자는 전국 각지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전국 각지의 급한 수요 처리가 응급 처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개념은 일상품을 통해 실현되는 분야가 있다. 편의점이다. 전국 각지의 급한 수요 처리를 편의점이 도맡아 자원이 효율적으로 분배되고 있다. 현재 응급실 현상을 살펴보자. 돈이 안되고 힘든 일을 기피하여 붕괴한 분야다. 이것은 각 산업에서 이미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해 처리하고 있다. 이걸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현행 의료와 응급 개념을 분리하도록 법률을 제정하고 편의점과 같이 응급 전문 병원을 발족한 뒤에 그 병원을 운영하는 기업이 응급 분야에 한해서 외국인 의사를 고용하도록 한다. 일반 병원에서 돈이 안되는 응급실에 과한 투자로 운영하도록 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응급만 따로 떼서 운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기존 병원과 이해관계를 분리하기 위해 병원을 운영하지 않던 기업을 대상으로 입찰식으로 응급 권한과 책임을 분산하고, 기업은 응급 전문 체인점을 만들어 편의점처럼 각지에 분산 설치한다. 일반 의사를 고용하여 응급실을 운영하면 기업에서 이윤이 남지 않으므로 응급 분야에 한하여 외국인 의사를 허용하면 자연스럽게 외국인 의사 고용을 하게 된다. 기업이 공장 진출한 외국에서 고용하면 될 것 같다. 인사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대부분 의사는 엘리트일 확률이 높으므로 그런 종류의 리스크는 적지 않을까 싶다. 현재 응급실 뺑뺑이 원인 중 하나는 사무 처리가 효율적이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것은 보통 일반 기업이 더 잘할 수 있다고 본다. 의사 스킬 레벨의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응급실은 골든 타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므로 한국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 의사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돈이 안되고 힘든 응급 분야에 한에서만 외국인 의사를 허용하므로 기존 의사의 이권을 크게 침해하지 않지 않나 싶다. 현재 소멸되는 지역에 의료 서비스 공급이 되질 않아 문제가 심각한데, 응급실 체인점이 나오면 의료 기술이 조금 낮더라도 의료망은 안정적으로 운영될 것이다. 기존에 응급실을 지키던 의사는 일반 병원에서 골든 타임을 지킨 응급 환자 수술을 전문으로 도맡아 하거나, 응급실 체인점에서 골든 타임을 지키기 위한 메뉴얼을 만드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응급실 뺑뺑이로 응급에 관한 역할을 현재 의료계가 감당하지 못하는 상태임이 명백하므로, 응급에 한하여 권한과 책임을 분산할 명분이 존재한다 할 수 있다. 대중도 이런 현실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호응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며, 이미 대부분 분야에서 힘들고 어려운 것은 외국인 노동자를 도입해 대응하고 있으므로 의료계만 따로 그걸 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도 공감대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외국인 의사를 응급 분야에 한하여 공급되게 되도록 법적으로 의료와 응급을 분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응급 분야에서는 의료 개혁이 이뤄질 수 있다. AI 활용이나 간호사 등의 일처리가 수월하게 될 수 있다. 경제적으로 보면 감당하기 힘든 의료 예산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제도는 의대 증원과 크게 관련이 없다고 본다. 의대 증원은 의료계보다는 사회 밸런스 조절에 가깝다. 간단히 말해 밸런스 패치다. 사회 밸런스가 깨져서 너프 패치 좀 한 것이다. 너도나도 의대 지원하는 상황에서 사회 밸런스가 맞다고는 의사조차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역할 민주주의 제도.
현재 정치에 대한 신뢰도는 많은 유권자가 신뢰하지 못할 정도로 추락했다. 어느 유권자는 누구를 뽑아야 할지를 모르겠다면서 정말 아무나 뽑는 실정이다. 정치가들은 양당 체제로 구축된 표밭에서 의원이 되기 위해 정당의 공천권자에 지배적 영향을 받거나, 정치 성공 아이템 유행에 휩쓸려 국가 체계를 망가트리는 일을 하기도 하고 있다. 정치 성공 아이템은 사업 성공 아이템과 같이 다수가 한번 성공한 특정 아이템의 유행에 매몰되어 사회를 망가트리는 것을 말한다. 사업 성공 아이템이 한번 유행하면 너도나도 그걸 하면서 공급 초과로 산업이 망가지면서 사회가 망가진다. 그것과 같다. 정치 성공 아이템이 한번 유행하면 너도나도 그걸 하면서 불합리로 정치 체계가 망가지면서 사회도 망가진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체제 이념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누더기 법안은 정치가가 정치 성공 아이템에 빠지면서 나타난다. 이것을 하면 사회나 체제가 망가지든 말든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 생각하면서 그걸 한다. 사고로 정치 권한을 쥔 적이 있으면 사회에서 사고가 났을 때 너도나도 뛰어들거나, 공포로 정치 권한을 쥔 적이 있으면 대중이 공포를 느낄 때 너도나도 뛰어들고 있는 상태다. 최근에 아는 사람 얼굴 사진 오려다 야한 사진에 붙인 것의 연장에 있는 딥페이크 정도의 자잘한 사안에 여성 권력이 물면서 무슨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해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이 나올 정도로 과한 공포가 퍼졌다. 현재 여성 권력이 정치 성공 아이템에 속하여 입법에서 딥페이크 법이라면서 보기만 해도 처벌한다는 모순 투성이의 불합리하여 말도 안되는 법안 같은게 나왔다. 이런게 바로 정치 성공 아이템에 빠진 결과다. 이런 불합리한 법이 나올수록 법의 신뢰도는 낮아지면서 국가 질서가 무너지게 된다. 이런 현상은 현재 의회가 정치적 견제를 제대로 받지 못하기에 나타난다고 본다. 불합리한 법을 행정에서 막는다 하더라도, 그 불합리함이 도덕적인 이유로 정당화된다면 그런 정치적 부채를 전부 행정에서 짊어지기에, 행정도 그런 견제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상원과 하원처럼 의회 견제 제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현재 토지에 있는 입법 권한과 책임을 분야에도 분산한다. 토지와 분야는 유권자 집단이 겹치지 않기 때문에 상호 이해가 달라 서로 견제가 가능해진다.
역할 민주주의 제도는 실현하기 어려운게 아니다. 기존에 있던 토지 민주주의의 형식을 그대로 따라가도 된다. 기존의 선거 용지에서 역할에 따라 배정된 선거 용지를 추가하면 된다. 단지 다른 점은 정부(삼권)에서 지정한 분야에 개인이 소속 희망을 하고, 그 소속된 인원에 따라 지정된 의석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단지 일부 국회의원은 입법 권한 분산을 바라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경제 활동하는 이들이 합심하여 개혁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말해 그걸 추진하는 정당에 후원과 투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자유 혁명의 본질은 왕과 귀족이 독점하던 권한과 책임을 개인에게 분산한 것에 있다. 그것을 또 다른 형태로 실현하는 것뿐이다. 자유주의가 자리잡기는커녕 사회주의와 같은 윤리 사상으로 퇴보하였으므로 지금 인류는 아직도 자유 혁명기 속에 있다. 분야의 대표가 입법 권한을 가지게 되므로, 기업의 대표나 노조의 대표가 그 권한을 가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토지와 달리 분야는 대부분 분야에 속한 인원이 아는 사람이 대표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이해에 민감한 이들의 합리적 결정이 나올 수 있을 거라 본다. 조선 말기 왕의 실패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권한과 책임은 합리적으로 분산할수록 자유롭고 민주적임을 강력하게 주장하겠다.
정치적으로 보면 신뢰를 잃은 정치가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제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권한과 책임 분산 제도를 통해 보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로 명성을 드높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정치 제도의 한계를 대부분 느낄 것이므로 대중의 호응도 좋을 거라 생각한다. 경제적으로 보면 분야의 대표가 입법 권한과 책임을 갖게 되는만큼 분야 성장에 이로운 법안이 제출되면서 경제적 성장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플랫폼 개인 책임 제도.
현재 디지털 플랫폼에 관한 문제로 의견이 분분하다. 디지털 플랫폼에서 범죄 또는 범죄 모의가 발생함에도 플랫폼에서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플랫폼 규제를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플랫폼에 책임을 묻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디지털 플랫폼은 현재 새로운 인류 공동체로서 새로운 사회의 형태다. 그런 사회에서 플랫폼 관리자가 플랫폼 이용자를 감시하고 이용자에게 과도한 개입을 하는 것은 개인의 권한을 침해하는 월권이 된다. 예를 들어 지역에서 집 안에 범죄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로 지자체에서 모든 집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고 감시한다고 해보자. 말도 안되는 월권이다. 또한 그런 감시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자체 장을 처벌해야 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범죄는 신고제여야 개인의 권한을 침해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플랫폼이 범죄 감시 협조를 하지 않는다고 협조를 강제한다면, 범죄 협조를 하기 위해서는 개인을 감시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들은 협조하기 위해 이용자의 행동을 감시하고 개입하여 지배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현재 이러한 행동의 근거는 대부분 윤리인데, 윤리를 명분으로 플랫폼 관리자에게 독재의 권한을 쥐어주는 것과 다를바 없다. 거대화된 플랫폼 관리자의 독재적 행동에 대한 견제를 하지 못할망정 윤리적인 이유로 그들에게 독재의 권한을 쥐어주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시장 원리를 통해 기업에 분산된 권한은 상품 및 서비스 판매와 제공 권한이지 개인 감시 권한이 아니다. 디지털 사회는 기본적으로 강제하지 않고 물리적 위험이 없는 공간으로 개인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므로 개인에게 권한과 책임이 분산되어야 마땅하다.
디지털 공간은 정부 안전 보장이 되지 않은 지역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주의가 필요한 공간이다. 정부가 위험한 지역이라 지정한 지역에 가서 사고가 났다고 하는 것은, 그곳에 갈 수 있었던 권한이 있던만큼 개인 책임이 있을 수밖에 없다. 현재 여성계가 과하게 공포를 조장하는 디지털 성범죄는 여성 관련이 정치 성공 아이템으로 유행하여 과한 대응이 이뤄지고 있는데, 이 또한 그에 대한 책임이 기본적으로 개인에게 있음을 강조한다. 현재 디지털 관련해서 개인 권한 침해는 그야말로 광기나 다름 없을 정도로 미쳐가고 있다. 대놓고 반체제적인 행동도 윤리를 명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로서 이해하지 못할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이 도대체 어떤 이념을 추구하는 국가인지 알기가 어려울 정도다. 현재 디지털 감시법은 전부 개인 권한을 침해한 월권이다. 독재란 무엇인가? 권한 독점이 독재다. 그 과정이 무엇이든 권한이 독점되면 독재다. 나치도 선거로 뽑혔으나 권한을 독점하면서 독재가 된 것이다. 민주적인 독재자가 존재하는한 민주주의 핑계를 대면서 모든 권한을 아무렇게나 침해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
미국 CIA가 요즘 개인 정보 찾기가 매우 편하다는 말을 할 정도로, 개개인에게 개인 정보 노출의 위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실정이다. 정부의 역할은 그런 개인 정보에 관한 안보에 대한 교육이지 플랫폼을 압박하여 디지털 이용자의 권한을 침해하게 하는 것이 있지 않다. 미성년 SNS를 막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걸 막는다고 해서 실제 막히는건지에 대한 실용성 여부는 둘째치고서라도, SNS를 평생 쓰지 않는 것도 아닌데 그에 대한 교육을 하는게 타당하지 막는게 타당한지 묻고 싶다. SNS를 막을게 아니라 교육 과정에서 SNS 활용 방법에 대해 교육했어야 했다. 그렇게 초기 기억 프로세스를 각인하면 SNS를 과하게 이용한다거나 하는 등의 문제에 대응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합리적인 정당한 권한 분산과 디지털 플랫폼 월권 견제는 필요한 조치라 생각한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의 권한 조정은 섬세하고 정교하게 해야 하는데, 정치 성공 아이템과 공포 선동 한번에 다 망가지고 있다. 끔찍하기 짝이 없다. 경제적으로 보면 불필요한 규제가 철폐되어 자원 낭비를 막아 경제적 효율이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퀘스트 제도.
현재 정부와 많은 기업에서 하청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고 그에 대한 대응도 마땅치가 않다. 또한 고용 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해 만든 하청에 의해 임금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사회 양극화는 더 크게 심각해지고 있다. 기업이 직고용을 하자니 현행 제도로는 리스크가 크다. 그렇다고 기업이 하청에 주는 돈이 적은 것은 아니다. 단지 하청 기업이 인건비로 이윤을 얻기 때문에 실제로 일하는 인원에게 가는 비용이 절반이 되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적다는 점이 문제다. 좋은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많은 이들이 일용직처럼 일을 하며 미래가 불투명한 삶을 살고 있다. 이런 것을 개인에게 생산에 관한 권한과 책임을 분산한 퀘스트 제도를 통해 대응한다.
일반적인 일자리는 생산 과정에서 생산 및 성장 동기 부여를 제공하고 있다. 그것을 통해 기업에 입사한 인원은 적극적 생산과 성장을 목표로 삼게 된다. 그러나 프리랜서의 경우 그런 시스템이 마땅치가 않아 지속 생산과 성장이 되고 있지가 않다. 개인 생산 체계가 확립되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것을 게임의 퀘스트 방식을 차용하여 생산과 성장의 동기 부여를 제공한다. 게임 퀘스트는 단순히 가상의 디지털 이미지임에도 그 시스템의 보상 체계가 합리적이기 때문에 게임 이용자는 자발적으로 게임 내에서 생산 활동을 할 정도다. 그런 것을 활용해 생산과 성장 가치 관리를 통해 자발적 생산과 성장을 유도한다. 간단히 경험치와 업적 시스템만 넣어도, 게임 캐릭터 업적을 올리기 위해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처럼 생산을 하게 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시스템을 만든 뒤에, 사회의 일을 하청으로 처리하는게 아니라 퀘스트 방식으로 공급하여 일을 하는 개인에게 실제 가는 비용을 대부분 전달하는 것으로 사회 양극화를 줄인다. 개인에게 권한과 책임이 분산되므로 정부와 기업도 그에 대한 리스크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사건사고에 대한 대응을 제도 내에서 효율적으로 교육하면 각각 하청에서 교육하는 것보다 효율이 높을 수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개인에게 생산 권한과 책임이 분산되어 프리랜서의 사회 역할이 확고해질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보면 생산과 성장을 하는 인원이 늘어나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며, 유동적인 생산 인원의 증가를 통해 산업 변화에 효과적인 대응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여성 징병 제도.
현재 저출산으로 인구수 감소에 의해 징병 병력이 부족해지고 있는데, 이는 관련 권한과 책임을 분산하면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다. 징병에 관한 권한과 책임을 여성에게 분산한다. 딱히 모든 여성에게 분산하는게 아니라, 징병에 적합한 신체를 가진 여성에게만 분산한다. 생리 문제는 군간부를 기준으로 정하면 된다.
정치적으로 보면 현재 여성 관련 정치 성공 아이템이 유행 중이기 때문에 하기 어렵겠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에 속한다. 경제적으로 보면 본래 병역으로 아끼던 사회적 비용을 좀 더 아낄 수 있게 될 것이다.
가족 제도.
가족을 구성하는 권한과 책임을 보다 개인에게 부과하여 가족이 되는 리스크를 줄인다. 현재 가족 제도는 가부장제 시기 일가의 결합이라 인식하고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리스크를 가족이 공동으로 감당해왔다. 그렇기에 자녀의 결혼에 부모가 집도 사주고 그랬던 것이다. 이제는 그것을 사회가 감당하기 어렵게 되었다. 저출산은 가치 하락에 의한 조건 감당 불가가 부른 것으로 봐야 한다. 현재 미디어에서 혼자사는 것이 미화되는 프로그램이 많은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지 원인이 아니다. 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이성 관계에 대해 가치를 느끼지 못하니까, 이성 관계를 가지려면 필요한 조건이 높게 되고, 동시에 혼자 사는 것을 미화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런 조건을 가족 제도에 관해 개인에게 권한과 책임을 분산하는 것을 통해 조금이라도 완화해야 한다.
가족 제도에 관해 개인에게 권한과 책임을 분산하는 방법은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결혼 리스크와 이혼 리스크를 줄이는 것을 통해 할 수 있다. 결혼과 이혼을 보다 간편한 절차로 할 수 있게 한다. 그런 간편한 권한을 가지는 대신 그에 대한 책임도 개인이 지게 한다. 결혼의 경우 단순히 내국인을 대상으로 할게 아니라 외국인과의 결혼도 쉽게 하여 리스크를 줄인다. 이혼의 경우 재산권이나 양육권 등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유리하지 않도록 한다. 여성에 관한 정치 성공 아이템이 유행 중이기 때문에 쉽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러지 않으면 가족 제도 존속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정치적으로 보면 가족 구성 확률이 높아질 수 있을 것이고, 경제적으로 보면 생산 인구 증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식 기업 상품 구매 제도.
현재 한국 주식은 다양한 이유로 리스크가 커서 이익 실현이 어렵고 참여율이 저조한 편이다. 윤리적인 이유로 금투세와 같이 주식 투자를 비활성화하고자 하는 법안들이 있는 상황에서 현재 한국 주식 시장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그런 상황에서 기업 상품 구매 권한을 주식에도 분산하여 주식의 유동성을 높일 수 있도록 한다.
주식은 회사 소유 권리를 유가 증권의 형태로 분할한 것에 해당한다. 회사 소유 권리라는 관점으로 접근하여 기업이 생산한 상품을 구매할 권리도 있다고 해석한다. 그렇게 하여 주식으로 해당 기업의 상품을 구매할 수 있게 하여 주식 유동성을 올린다. 주식 유동성을 높이고 싶은 기업에 한에서 주식 상품 구매가 가능하도록 허용하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주식으로 상품을 구매할 이유가 없을 수 있으나, 유동성 증가를 목적으로 시장가보다 n% 싸게 판다면, 주식을 하지 않던 이들도 주식을 구매하여 상품을 구매하게 할 수 있다. 또한 주식으로 상품을 구매할 경우 서비스로 바로 팔 수는 없는 주식을 제공하면, 그것을 보유하던 이는 주식에 관심을 가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주식 참여율이 늘어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개인 입장에서 주식으로 큰 수익을 실현하기는 어려울 수 있으므로, 자산 종류를 다양하게 한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주식 참여자를 늘리면서 주식에 관한 정책과 제도 도입이 수월해질 수 있고, 경제적으로 보면 주식 참여자가 늘어나면서 주가 유동성을 통한 자금 확보가 좀 더 수월해질 수 있을 것이다.
리스크 리턴 비례 제도.
현재 한국 경제는 노동 경직성에 의해 생산 구조가 불안정한 상태다. 이는 고용 체계에서 리스크 리턴이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정규직은 낮은 리크스에 높은 리턴이 주어지고 비정규직은 높은 리스크에 낮은 리턴이 주어지면서 밸런스가 깨진 상태다. 그것을 노동 유연성 권한과 책임을 기업에게 분산하여 처리해야 한다.
임원이 계약직인 것을 고려해 정규직 시스템을 재편한다. 모든 정규직은 일반 사원으로 한정하고, 만약 진급하고 싶으면 임원과 같이 계약직으로 하도록 한다. 만약 안정적인 직장을 원한다면 진급하지 않고 일반 사원으로 일하면 되고, 높은 이익을 얻는 직장을 원한다면 진급하여 높은 임금을 받되 계약 리스크를 짊어지는 계약 사원으로 일하면 된다.
정치적으로 보면 노동자의 안정적인 직장과 노동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고, 경제적으로 보면 리스크 리턴에 비례한 노동 유연성을 통한 경제 구조 개혁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개인 안보 교육 제도
현재 국가 안보 문제가 나날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많은 이들이 안보에 무감각하다. 이것은 안보 개념을 개인이 아닌 국가 개념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개인에게 안보 개념의 권한과 책임을 분산한다. 지금 안보 교육은 지나치게 전쟁 대비용으로만 되어 있어 개인에게 와닿지 않는다. 그걸 조정한다. 안보는 안전 보장으로 개인에게 있어 위험이 되는 모든 개념에 대한 안전을 보장하거나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형태로 접근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국가 안보에 관한 교육을 넣어야지, 국가 안보만 가르치면 개인 권한 침해처럼 느껴져 호응이 좋지 못하다.
정치적으로는 개인의 안보관이 자리잡는 것으로 사회가 보다 안정적이게 될 수 있고, 경제적으로는 개인 안보 교육을 통해 다양한 사고 리스크를 줄여 경제적 손실을 줄이는 것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 및 자기 결정권의 자유 보장 제도.
현재 한국은 사상, 표현, 자기 결정권 등의 다양한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그것에 관한 권한의 상당수를 정부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비민주적인 상태다. 그럼에도 아직도 부족하다 외치는 이들이 넘치는 상태다.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권한과 책임의 분산을 실현하기 위해 권한과 책임을 독점하던 정부와 싸워왔는데, 다시 또 낡은 도덕이나 윤리를 근거로 어설픈 주장을 하며 그 권한과 책임을 정부보고 가져가라 아우성대고 있다. 체제 교육이 너무나도 안되어 있다. 수많은 창작물이 특정 가치를 근거로 검열되고 규제되고 있다. 수많은 자기 표현이 단순한 불쾌감 하나로 검열되고 규제되고 있다. 수많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근거로 만들어진 상품화가 죄악시되며 검열되고 금지되고 있다. 그야말로 중세 암흑기가 다시 찾아온 셈이다. 여가에 속하는 게임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행위에 중독 개념이 포함될 수 있음에도 굳이 게임만 추가하여 그것에 대한 검열과 규제를 강화하자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게임으로 가정이 문제가 있다면서 호소하는 이들도 있는데, 자유롭게 여가를 즐길 권한이 있는만큼 그에 대한 책임도 있는 것이다. 중독이란 개념은 특정 개념만 따로 다룰 것이 아니라 모든 개념을 통틀어 나타나는 중독 현상을 다뤄야 한다. 게임만 따로 다루자는 것은 그에 관한 새로운 룰을 추가하자는 것인데, 그 룰의 추가에는 반드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래야 그렇게 구축된 사회 체계가 엉망이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체제 이해가 부족하여 정치 성공 아이템이나 공포 선동으로 체제를 파괴하여 체계를 망가트리고 있지만 본래는 결코 해서는 안되는 행동이다.
간통법의 폐지는 관련 권한과 책임을 개인에게 분산했기 때문이다. 그런 것과 같이 국가 안보와 크게 관계가 없다면 대부분의 권한과 책임은 개인에게 분산해야 한다. 검열 기관이나 규제 기관들은 대부분 권고에 속해야지 강제가 되면 그것은 정부가 그 권한과 책임을 독점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게 된다. 영상물이든 게임이든 뭐든 다 마찬가지다. 권한을 독점할거면 검열과 규제로 발생하는 자유주의 가치 훼손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자유주의 가치 훼손과 같은 이념에 대해 우습게 볼 수 있는데, 6.25 한국 전쟁이 도대체 무슨 전쟁인지 알고 있는지 묻고 싶다. 한국 이념 전쟁이다. 자유 이념 하나로 수백 만명이 피를 흘렸다. 그럼에도 어떻게 그렇게 우습게 볼 수 있는가. 현재 포르노를 금지는 안했다면서 포르노 금지 국가가 아니라는 헛소리를 하는데, 포르노 허용 조건이 까다로워 그것을 하는 이들이 극히 적으면 그게 금지나 다를바 없는 것이다. 가수 콘서트 허용 조건을 통과한 비율이 0.5%면 그게 콘서트가 허용되었다 할 수 있는가? 포르노와 성매매가 국가 안보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가? 강제성이 없는 경우 도대체 허용이 여성 인권인가? 금지가 여성 인권인가? 간통법 폐지와 같이 국가 안보와 관계가 적은 대부분의 권한과 책임은 개인에게 분산해야 마땅하다.
정치적으로 보면 초기에는 사회 혼란이 있을 수 있으나 권한과 책임 분산으로 정치적 리스크가 줄어들 수 있을 것이고, 경제적으로 보면 다양한 권한과 책임이 분산되어 수많은 개인이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으로 르네상스 시대와 같이 수많은 새로운 가치가 창출될 수 있을 것이다.
공정 거래 제도.
현재 한국은 도덕, 윤리, 전통, 이권 등으로 공정 거래가 다소 어려운 상태다. 국내도 그렇지만 국외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국제 시장을 고려하는게 아니라 국내 시장만 고려하면서 제대로 된 공정 거래가 이뤄지기 어려울 때가 많다. 공정 거래는 분산된 권한과 책임을 세심하고 정교하게 나누는 것에 있다. 공정하게 나뉘진 상태에서 거래가 이뤄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서 불공정이 나타나게 된다. 시장의 독과점도 그 분야 권한을 독점한 것이 된다. 시장 원리를 통한 결과라 하더라도 권한 독점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맞지 않는다. 공정 거래를 위한 시장 원리 작동도 작동이지만, 이념상 독점 방지를 하는 것이 체제에 적합하다.
망 사용료는 국제적 생산과 소비가 이뤄지는 국제 시장에 관한 것이므로 한 국가만의 권한과 책임을 고려할게 아니라 다국가의 권한과 책임을 고려하여 공정한 거래가 되도록 해야 한다. 토종 기업을 살리기 위해서라면서 국내 기업의 권한과 책임을 상대적으로 높게 준다면, 동일한 명분으로 다른 국가에서 한국 기업이 불공정한 손해를 볼 확률이 높다. 국제 시장에서 토종 기업 살리기가 불공정이다. 지역 화폐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지역 화폐가 어떻게 활용될지 모르겠는데, 따로 지역 화폐를 법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보면 지역에서 쓰이는 거래를 지역 화폐로 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러면 지역 화폐 관리자는 그것을 독점하게 된다. 그러면 기업 화폐를 운영하는 이들이 불공정한 손해가 될 거라 생각한다. 권한과 책임이 시장 원리를 통해 결정된 것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자유 무역 공정 거래 국가로서의 이미지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고, 경제적으로 보면 공정 거래를 통한 시장 원리 활성화로 시장 원리를 통한 경제적 성장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국가 기능과 관료 제도.
현재 민주주의라는 이유로 의회가 많은 권한을 가져간 상태라 하는데, 본래 행정이 기능을 하고 있다 해서 민주주의 이념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 기능에 관해 직접 참여가 안된다는 이유로 비민주적이라는 얘기는 모든 왕에게 주권이 없었다는 얘기와 같다. 국가 기능의 권한과 책임 분산과 관련 정책과 제도에 의견을 내고 합리적이면 실현할 수 있으면 된다. 기재부와 소방서를 통해 국가 기능에 대해 이해해보자. 소방서의 경우 당연히 사회 인프라, 국가 기능 중 하나로 인식할 것이다. 그러나 기재부의 경우에는 어떤 권력이 있다 여기면서 민주주의를 훼손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이다. 기재부가 예산을 관리하기에 어떤 권력이 있어 보이지만, 이것 단순히 권한 차이로 본질적으로 같은 국가 기능 중 하나로 차이가 없고, 없어야만 한다. 국가 기능은 이념 체계 행정 처리로 필요한 기능 중 하나로서 주권을 개인은 그것을 활용하는 것뿐이다. 마찬가지로 국가 기능에 속한 개인 또한 주권을 가진 권한이 다른 통치자다.
국가 기능에 속한 이들은 그것의 권한과 책임이 왕정과 같이 개인을 관리한다 생각해서는 안된다. 어디까지나 민주정에서는 정책과 제도 등의 시스템을 관리하고, 그 시스템 관리를 통해 국가를 작동시키는 것에 해당한다. 민주주의 체제는 선제후가 황제를 선출하는 것과 같이 국민이 왕을 뽑는 체제가 아닌, 모든 개인에게 권한과 책임이 분산된 체제라 생각한다. 그런 권한과 책임을 가진 개인을 정부가 직접 관리한다는 것 자체가 비민주적이다. 가치 관리 또한 어디까지나 시스템을 활용하여 관리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렇기에 시스템적으로 강제력을 실행할 수 있는 초기 교육 단계에서 사회에 필요한 가치를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도덕과 윤리를 말하며 과거 인간의 말만 암기시키다 정작 삶에 있어 필요한 것은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고 사회에 내보내면서 지금의 저출산, 저생산 시대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권한과 책임 분산이 보다 세심하고 정교하게 될 수 있을 것이고, 경제적으로 보면 보다 많은 권한과 책임을 통해 자유로운 생산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권한과 책임 분산 실패 사례.
어떤 아파트에서 관리사무소 허가를 받지 않은 전단지를 중학생이 떼서 버리자, 경찰이 재물손괴죄 혐의로 검찰에 송치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것이 권한과 책임 분산이 제대로 되지 않는 사례 중 하나다. 아파트 자체 내규로는 아파트 관리사무소가 지정한 장소에 부착한 전단지가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그 외에는 임의로 떼도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사회 룰에서는 전단지 자체가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여겨질 수 있다. 모든 재물에 관한 룰을 아파트 관리사무소 내규를 따르게 할 수는 없지만, 적정 레벨의 것은 아파트 관리사무소 내규에 권한과 책임을 분산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아파트 내규가 잘못되었다 판단된다면, 사내 내규가 잘못되었다 판단되고 정부 기관에 신고하는 것과 같이 처리하면 된다고 본다.
사회 체제를 이해 못하는 이들이 정의롭게 사회를 망가트리고 있다. 미로에 갇힌 불쌍한 카나리아. 위험하다 외칠 뿐 문제의 원인도 모르고 해결도 못한다. 모르면 카나리아가 될 뿐이다. 이제는 알고 나서 이 시대의 암흑기를 끝내고 자유주의 르네상스가 시작되기를 바라겠다.
5. 기억
인간의 자아는 생물 육체를 원료로 하여 언어 체계를 통해 창작된 존재다. 기억은 자아의 구성 요소로 기억만 보존되면 창작된 자아인 ‘나’는 죽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억을 추출하여 디지털화를 한다거나 인공 육체를 만들어 이식하면 자아인 ‘나’는 계속 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 인류 문명 레벨로는 다소 어려울 것 같다. 현재 인간은 뇌에 대해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기억을 추출할 정도의 기술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불로불사. 이것은 유전자 조작을 통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인간은 유전자를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유전자를 정복하여 완전 조작할 정도의 기술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인간의 자아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옮기면 계속 살고 있음을 알고 있어도 그것을 실현하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본능이 기억 유전으로 생긴 기억 프로세스라면 인간은 본인의 기억을 새로운 육체로 옮길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이 된다.
모든 생물의 유전자의 최초 정보는 기본적으로 기록에 해당한다고 본다. 어떤 형태로든 기록이 되어야 그 기록을 바탕으로 조합하면서 진화가 가능하다. 단순히 오로지 우연만으로 생물이 형태를 갖췄다고 보기에는 특정한 형태가 지속되는 것이 자연스럽지가 않다. 우주나 원자의 경우는 힘의 균형을 통해 특정한 형태가 지속되나, 인간의 경우는 항상성과 같은 것이 특정한 형태 지속을 만드는데 거기에는 따로 힘의 균형 같은게 없다. 만약 항상성이 기록의 재생을 유지하려는 움직임이라 가정하면 모순이 없게 된다. 최초 정보 기록만이 아니라 본능 또한 마찬가지다. 생물의 본능은 경험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무언가를 총칭하며, 이는 내부 세포의 움직임과 달리 외부 생물의 움직임은 생물이 경험한 것을 기록해야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애초에 생물이 태어나자마자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그에 대한 프로세스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게 유전자냐 기억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유전자는 세포의 움직임을 담당하고 기억은 생물의 움직임을 담당하지 않나 싶다. 기억 프로세스가 담긴 세포가 유전되면서 기억 프로세스도 같이 유전되는 것이라 본다. 인간의 본능을 인간이 해석하기 어려운 것은 아마 언어 체계를 익히기 전의 기억 프로세스가 아닐까 싶다. 만약 인간의 본능이 기억 유전된 것이라면, 인간의 자아는 그 기억 유전을 한 생물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기억 유전 조건을 찾으면 인간은 계속 살 수 있다. 기억을 세포 유전자에 기록하는 조건을 찾아 기록하고, 기록한 세포를 생식 세포로 전환한 다음, 인공 자궁에 넣어 성장시킨 다음에 기억이 유전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면 된다. 2회차의 시작이다. 기억의 연속성을 위해 원본 육체는 가사 상태로 만든 다음에, 기억 유전이 된 것을 확인하면 그대로 안락사 처리하면 될 것이다. 기억 유전이 다른 방법에 비해 쉬운 이유는 유전자에 대해 자세히 몰라도 실험하면서 기억이 기록되는 현상을 찾으면 되기 때문이다. 실험은 생물이 워낙 많기 때문에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 또한 시한부가 많기 때문에 자원자에 한하여 하더라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현재 인류 문명이 본질을 몰라도 규칙성을 발견해 원리를 파악하여 온갖 문명 이기를 만들 수 있는 것과 같다. 기억의 유전자 기록 조건은 유전자 메커니즘이 기억 메커니즘과 유사하다면, 기억 메커니즘을 통해 유전자 기록 조건을 찾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실험 과정은 AI 또는 AGI가 있으면 빨라질 것이다. 기억 유전 조건의 실험은 한 국가 또는 한 기업에서 하기에는 지나치게 난이도 높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아주 오래 하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빠르게 하려면 다국가가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기억 유전을 통한 기초 불로불사는 일반 생물의 기능을 활용한 것이므로 생각보다는 비용이 높지 않을 것이다. 규모의 경제로 돌아가면 아마 대부분 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환경 문제의 경우에는 문명 발전이 가속화되면 충분히 대응 가능할 것이다. 우수한 인간이 계속 살 수 있어야 문명 발전도 빨라진다.
모든 기술은 특정한 루트를 거치게 된다. 인간이 하늘을 날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자. 의지, 발상, 이론, 실험, 증명, 실현과 같은 루트를 거쳐 인간은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다. 불로불사 루트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불로불사하고 싶다는 의지를 가지면 그런 루트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의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것이 실제 실현 가능한 것이라는 보편적인 관념이 있어야 한다. 어떤 기술만 있으면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인간의 자아의 본질이 무엇이 명료해야 한다. 현재는 그게 불명확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불로불사가 가능한지에 대한 보편 관념도 있지 않을 것이다.
AGI, 인공 자아의 개발은 그것에 대한 보편 관념을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타임 머신이 개발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시간은 단순히 관측 순서라 주장했던 나조차도 시간은 좌표계에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그와 같다. 인간의 자아는 영혼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인공 자아가 개발되면 인간의 자아의 구성요소는 기억 프로세스라 생각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직관적으로 자아가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 무엇을 해야 불로불사가 가능한지에 대한 보편 관념이 생기게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류 문명은 불로불사 루트로 돌입한다.
불로불사는 기술 레벨의 것에 해당한다. 무슨 신비적인 느낌의 환상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원자의 규칙성을 파괴하여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폭탄을 만든 것과 같이 유전자의 규칙성을 파괴하여 죽지 않거나 늙지 않게 하거나 기억을 기록하게 하는 등의 것과 같다. 맨해튼 프로젝트처럼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도하면 어쩌면 빨리 가능할지도 모른다. 우주의 규칙성, 법칙을 파괴하는데에 주저할 수 있는데, 인간은 이미 했고 입자 연구소에서 매번 하고 있다.
기억을 유전하는 것이 자아인 ‘나’가 새로운 육체에 가게 된다는 것이 어색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이 환생과 얼마나 다른가? 자아의 본질이라 생각되던 영혼이 새로운 육체에 들어가 2회차를 시작한다. 자아의 구성 요소인 기억 프로세스가 새로운 육체로 유전되어 2회차를 시작한다. 논리적으로 차이가 없다. 이것은 단순히 관념 문제다. 만약 실현된다면 아마 미래에는 환생과 같이 자연스럽게 2회차라는 보편 관념이 자리잡게 될 것이다.
불로불사에 관한 발상은 정제학을 통해 지식을 정제할 수록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기억 유전을 목표로 발상을 하겠지만 더 좋은 방법이 발상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학문을 정제하면 정제할수록 더 발상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많은 이들이 이에 참여하면 훨씬 빨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인류 문명은 아직 자유 혁명기 속에 있다. 고대 종교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이념을 추구한 시대 속에 있다. 자유주의라는 낯선 합리를 거부하고 사회주의라는 익숙한 모순을 택하면서 진보가 사회주의인지 착각하고는 그런 자유 혁명기에서 벗어난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지가 않다. 실질적인 보수는 윤리와 같은 고대 종교 가치를 지키는 이들이고 진보는 과학적인 근대 자유 이념을 추구하는 이들이다. 만약 불로불사가 실현되면 고대 종교 가치를 지키며 자연사하는 보수와 근대 자유 이념을 추구하며 계속 사는 진보로 나뉘지 않을까 싶다.
자유 혁명 당시에는 여러모로 다양한 것이 부족했기 때문에 인류 문명은 다시금 과거로 퇴보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세계의 본질을 알고 늙거나 죽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자유주의 이념을 실현해야 한다. 그런 이념을 추구하는 자유주의자가 늘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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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 자아는 2년, 불로불사는 5년 안에 했으면 좋겠네. 이 글을 쓰기 전에 딱히 세계의 본질이나 불로불사나 자유 사회에 대해 생각하진 않았어. 하다 보니까 그런 내용이 들어가네. 아마 뭔가 하고자 하면 기억 프로세스가 작동해서 그런 식으로 하게끔 충동이 일어나나봐. 일상 생활에 지장이 있을 때가 있을 정도로 거기에 집중되어 있는 상태 같은데. 뭐 살아있는 동안 계속 성장할 수 있겠지.
일단 다음 주제는 생명, 그 다음은 경제, 그 다음은 정치야. 생활 환경이 좋지가 못해서 생명 편을 쓸지는 모르겠네. 환경이 괜찮아지면 AI와 대화를 하면서 발상해볼게. 이번 편은 AI와 대화 없이 썼는데 사실 기초니까 그런거고. 점점 발상에 필요한 레벨이 올라갈수록 스트레스가 적어야 해서 환경이 안좋으면 하더라도 많이 느려질 거 같아. 이사, 생활비… 하하. 여유가 있으면 좋겠네. 일단 살아있으면 계속 하긴 할 거니까, 다음에 안올라오면 쉬고 있거나 죽은 걸로. 만약에 그 다음도 안올라오면 죽은 걸로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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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외교와 정치 (0)
2024/06/30 AM 02:15 |
외교와 정치
1. 법칙
세계는 자연의 법칙을 아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입자, 원자, 분자. 지구, 태양, 우주. 미시 세계와 거시 세계는 자연의 법칙을 알면 이해할 수 있다.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게 있다면 그에 관한 법칙이 없거나 법칙에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 자연의 법칙은 수많은 조건에서 관찰, 실험, 증명을 거쳐 모순이 없는 상태지만, 인류가 세계 전부를 이해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순이 없어 보여도 있을 수 있을 거라 전제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생물 사회도 자연의 법칙을 알면 이해할 수 있다.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중력을 이해하고 열역학 법칙으로 열에 대해 이해한 것과 같이 생물 사회의 법칙이 있으면 생물 사회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물 사회의 법칙에 대한 이해는 지구를 무대로 하는 외교와 정치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필요한 사전 정의부터 시작해 생물 사회의 법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법칙: 3. 모든 사물과 현상의 원인과 결과 사이에 내재하는 보편적 · 필연적인 불변의 관계.]
[관계: 1. 둘 이상의 사람, 사물, 현상 따위가 서로 관련을 맺거나 관련이 있음. 또는 그런 관련.]
[자연의 법칙: 1. 자연계의 모든 사물과 현상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일정한 법칙. 인과 관계를 기초로 한 존재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생물: 1. 생명을 가지고 스스로 생활 현상을 유지하여 나가는 물체. 영양 · 운동 ·생장 ·증식을 하며, 동물 · 식물 · 미생물로 나뉜다.]
[사회: 3.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형태의 인간 집단. 가족, 마을, 조합, 교회, 계급, 국가, 정당, 회사 따위가 그 주요 행태이다.]
[일정하다: 3. 전체적으로 흐름이나 절차가 규칙적이다.]
[힘: 10. 자연 현상이 일어나는 작용의 세기나 그것이 다른 사물에 영향을 미치는 작용.]
[작용: 1. 어떠한 현상을 일으키거나 영향을 미침.]
[질서: 1. 혼란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게 하는 사물의 순서나 차례.]
우선 필요한 의미를 정리하겠다. 자연의 법칙은 자연계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일정한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생물 사회는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형태의 스스로 움직이는 물체의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사회의 사전적 정의는 사회를 인간 집단이라 규정했으나, 사회를 이루는 생물은 다양하므로 생물 사회의 법칙을 알려면 생물 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생물 사회는 크게 곤충, 포유류, 인간으로 나눠보겠다.
생물 사회의 법칙은 다른 자연 현상과 달리 법칙화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다른 물체와 달리 내부에서 에너지가 방출되어 움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간은 예측 밖의 행동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인과에 대해 알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은 주식으로 재산을 잃은 후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인간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 불가한 물체가 집단을 이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특정한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정한 힘이 작용하여 생물 관계에 질서가 생기면 사회가 성립된다. 이것이 일반 사회의 법칙이다. 모든 생물 사회는 이 법칙으로 존재한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인간의 경우 예측 밖의 행동으로 일정한 힘이 작용하지 못할 수 있다. 인간이 예측 밖의 행동을 하는 것은 인간의 자아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각 개체가 판단을 하면서 일정하지 않은 힘이 작용하면서 인과를 알기 어려웠다. 달리 말해 그 말은 판단을 못하게 하면 일정한 힘이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이다.
곤충류(개미, 벌) 사회는 지능이 매우 낮아 자아가 거의 판단을 할 수 없다. 곤충 사회는 곤충의 자아가 판단할 수 없어 유전자가 지정한대로 행동하면서 일반 사회의 법칙이 성립한다. 그렇기에 곤충은 특별한 조건 필요 없다. 곤충 사회에서 계급, 화합, 폭력 등 어떤 현상이 나타나든 유전자가 지정한 것일 뿐이다. 곤충 사회는 집단 지능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개체 별 자아가 판단을 거의 못하니까 유전자대로 행동하면서 집단 지능처럼 보이는 것이다.
포유류(늑대) 사회는 지능이 낮으나 자아가 단순한 판단은 할 수 있다. 늑대 사회는 늑대의 자아가 단순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유전자가 지정한 것 외의 행동이 가능하면서 사회의 법칙이 성립되지 못할 수가 있다. 그렇기에 늑대는 추가적인 조건이 필요하다. 바로 폭력이다. 늑대 사회에서 일정하지 않은 힘이 작용하면, 폭력으로 제재하여 다시 힘이 일정하게 작용하도록 만든다. 대상을 폭력으로 판단하지 못하게 한 뒤에 지정된 행동을 하도록 만든다. 그것으로 일반 사회의 법칙이 성립시킨다.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폭력을 가해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을 하게 한다. 지능이 있으므로 학습, 훈련 등도 가능하나 일반적으로는 유전자와 폭력으로 늑대 사회는 계급 사회가 되게 된다.
인류 사회는 지능이 높고 학문이 있어 자아가 복잡한 판단을 할 수 있다. 인간 사회는 인간의 자아가 복잡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유전자가 지정한 것 외의 행동이 가능하면서 사회의 법칙이 성립되지 못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인간도 추가적인 조건이 필요하다. 바로 폭력과 도덕이다. 인간 사회에서 일정하지 않은 힘이 작용하면, 폭력으로 제재하여 다시 힘이 일정하게 작용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늑대와 달리 인간은 지능이 높아 단순한 폭력만으로는 힘이 일정하게 작용하도록 만들지 못할 수 있다. 앞에서 폭력에 굴복하며 따르는 것처럼 보여도 뒤에서 머리를 써서 보복할 수가 있다. 연약한 10살도 건장한 30살을 잠자는 동안 죽일 수 있다. 인간 사회는 폭력만으로는 사회 법칙이 성립할 수 없다.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절대적 가치인 도덕이다. 특정 가치는 절대적으로 옳다고 가르쳐 그 가치에 한에서는 판단하지 못하고 지정된 행동을 하도록 만든다. 왕에 대한 충성이나 신에 대한 신앙을 절대적으로 옳다 가르쳐서 연약한 인간이 혈통이나 신앙만으로 사회를 지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약 늑대 사회였다면 그런 약자는 쉽게 제거되었겠지만, 인간 사회에서는 도덕에 의해 그런 일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도덕을 학문화하면 윤리다. 윤리가 사회를 지배할수록 그런 일이 줄어들게 되었다. 개인에게 특정 가치를 절대적으로 여기고 따르게 하여 지배를 수용하게 만든 것으로 그런 것이 가능했다. 도덕과 윤리와 같은 지배 수용 코드가 심어진 인간은 가치를 판단하지 못하면서 쉽사리 타인에게 지배될 확률이 높다. 그것으로 일반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켰다.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폭력만이 아닌 도덕으로도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을 하게 한다. 유전자와 다양한 힘과 윤리로 인간 사회는 계급 사회가 되게 된다.
일반 사회의 법칙이 일정한 힘이 작용하여 생물 관계에 질서가 생기는 것이라면 짐승 사회의 법칙은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하는 것으로 일정한 힘을 작용하게 하여 생물 관계에 질서가 생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곤충은 애초에 자아가 거의 판단을 못해서 유전자대로 움직이면서 자연스럽게 법칙이 성립했고, 늑대는 법칙을 성립시키기 위해 폭력이란 추가 수단을 썼고, 인간은 법칙을 성립시키기 위해 폭력과 도덕이라는 추가 수단을 썼다. 간단히 말해 짐승 사회의 법칙을 지능이 높은 인간에게 맞추기 위해 특정 가치에 한에서는 인간의 지능을 짐승 수준으로 만들어서 짐승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킨 것이다. 인간이 일반 사회의 법칙을 파악하고 그에 맞게 새로운 인간 사회의 법칙을 만든 것이 아니라 짐승 사회의 법칙을 쓴 것은, 짐승 사회에서 인간 사회로 진화하며 발전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짐승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들어간 추가 조건이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절대적 가치인 도덕과 윤리였기 때문에, 법칙에 대해 판단하지 못하면서 다른 자연의 법칙과 달리 사회의 법칙은 알지 못했었다고 본다.
원시 종교와 고대 종교의 도덕과 윤리 등 다양한 판단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는 전부 짐승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키기 위해 들어간 조건이었다. 금욕이나 이타가 고대 종교에서 보편적 도덕과 윤리였던 것은, 도덕과 윤리의 지배에 필요한 가치였기 때문이다. 권선징악, 천국과 지옥, 업보와 윤회 등은 공포에 의한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을 행하게 하기 위한 개념들이다. 이러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회는 사회라는 자연 현상을 만드는 자연의 법칙이 성립되지 못하면서 멸망하게 된다. 적자 생존의 법칙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사회 현상을 성립시키는 조건을 갖춘 사회만 생존한다. 그래서 어쩌면 도덕과 윤리를 맹신했을지도 모르겠다. 절대적인 생존 조건이라 인식했을 수 있으니까. 달리 말해 그런 것이 갖춰지면 아무리 엉망인 사회라도 유지될 수 있다.
다양한 조건으로 나라가 망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회의 법칙이 유지되면 망할 수가 없다. 판단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만 하는데 어떻게 망하겠는가. 지배자가 어떤 실정을 해도 실정 자체로 망하는 게 아니라, 실정으로 더 이상 판단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니까 법칙이 작동하지 않으면서 망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조선은 유교로 500년 이상 지배했고 북한도 3대째 망하지 않는 것이다. 사회 또한 자연의 법칙으로 조건만 갖춰지면 현상이 지속되게 된다. 아마 조선도 외부 압력이 없었다면 조선 왕조가 지금까지 지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윤리가 특정 가치에 한해서는 지능을 짐승 수준으로 만들어 짐승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다방면에 윤리가 강조될수록 관련 가치에 관해서는 레벨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윤리는 판단하지 못하는 절대적 가치기 때문에, 그 가치에 한에서는 전체주의적인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전체주의는 개개인이 판단하지 못하고 집단 내 특정 의견을 맹목적으로 추종할 때를 의미한다. 파시즘이나 나치즘이 그런 식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추종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인류 문명의 기본 법칙은 짐승 사회의 법칙이다. 그 법칙을 성립시키는 개념이 원시 시대의 도덕과 고대 시대의 윤리다. 원시 시대의 도덕으로 만들어진 자유롭지만 잔인한 약육강식과 같은 질서에서 반발하여 나온 것이 고대 시대의 윤리다. 고대 시대의 윤리는 금욕주의와 이타주의를 기본으로 하여 사랑과 평화 같은 인간에게 이로운 것을 많이 주장했으나, 절대적 가치로 판단하지 못하면서 특정 조건에는 맞지만 그 외 조건에는 맞지 않는 것도 절대적으로 지키는 바람에 인간의 자유가 지나치게 억압되게 되었다. 사랑이나 평화를 외친다 하더라도,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을 통한 지배는 원시 시대와 고대 시대가 동일하다. 짐승 사회의 법칙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인간의 폭력 의한 지배나 종교의 윤리에 의한 지배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더구나 사랑과 평화 같은 일견 좋은 가치라 하더라도 모든 조건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지는 않는다. 그걸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인간은 그 가치에 한해 판단을 못하니까 사랑이나 평화를 이용해먹는 인간에게 이용당하는 일이 많은 상태다.
왕정과 종교가 고대 시대의 윤리로 인간을 지배하며 지나치게 억압하면서 인간의 자유를 외치며 일어난 혁명이 자유 혁명이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이념으로 삼았으나, 사회의 법칙이 짐승 사회의 법칙이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서는 안되었다. 짐승 사회의 법칙은 특정 가치에 한에서는 판단하지 못하고 지정된 행동을 해야만 법칙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지배와 피지배가 생기게 되었다. 자유 혁명 당시에는 재력의 지배가 일어나게 되었다. 자유를 외치며 왕정과 종교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자본가가 노동자를 돈으로 지배하는 시대가 오게 되었다. 그럼에도 사회의 법칙이란 자연의 법칙을 몰랐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할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것에 반발한 인간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주장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외쳤다. 그러나 그 이념은 지극히 윤리적이었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해 평화로운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자. 전형적인 종교 평등주의다. 사회의 법칙을 몰랐기에 사회의 법칙을 자유에 맞게 바꾼게 아니라, 당시 짐승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킨 윤리에 맞는 이념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면서 다시 윤리가 인간을 지배하던 고대 시대로 돌아가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윤리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주장한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비판해놓고 종교 가치 실현을 유토피아라 떠든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해 달라진 것은 지배의 수단뿐이다. 재력의 지배에서 윤리의 지배로.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던 공산당은 윤리로 지배하던 종교의 위치를 대신한 것뿐이다. 이런 것은 진보가 아닌 퇴보다. 정교분리로 자유 이념을 추구하면서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갔는데, 다시 종교 가치를 절대적으로 지키면서 근대에서 중세로 되돌아갔다. 어떤 형태로든 짐승 사회의 법칙을 바꾸지 않는 한 지배 체제는 바뀌지 않는다.
짐승 사회의 법칙을 바꿔야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다. 그리고 짐승 사회의 법칙은 절대적이지 않다. 일반 사회의 법칙을 지키면 딱히 짐승 사회의 법칙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 짐승 사회의 법칙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법칙이지 절대적인 법칙은 아니다. 인간의 문명은 이 세상에 수많은 자연스러운 현상을 기초적인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인공적으로 조작하는 것으로 발전해왔다. 그렇게 해서 날지 못하는 인간이 날 수 있게 되고, 깊게 잠수할 수 없는 인간이 잠수할 수 있게 되며, 우주로 갈 수 없는 인간이 우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일반 사회의 법칙을 이용해 인간 사회의 법칙을 새로 만들면 된다. 인간이 자유롭게 판단하면서도 일정한 힘이 작용하여 인간 관계에 질서가 생기는 것으로 사회가 성립하면 된다.
다른 짐승은 지능이 낮고 학문이 없어 판단을 못하게 해야만 일정한 힘이 작용하게 할 수 있는데, 인간은 지능이 높고 학문이 있기 때문에 판단을 하는 것으로 일정한 힘이 작용하게 할 수 있다.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에서 판단 후 계약 행동을 하게 하면 된다. 판단하지 못하고 지정된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판단하고 계약하여 행동을 한다. 그것으로 일반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키는 것은 지능이 높은 존재 말고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윤리에 속한 가치를 전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사랑이든 평화든 그것을 절대적인 게 아닌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판단하지 못하는 지성에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가? 종교 또한 마찬가지다. 공산주의처럼 종교를 배제하지 않는다. 단지 어떤 종교의 가치든 그것은 사회에서 절대적인 게 아닌 상대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모든 가치가 상대적 가치가 되어야 판단할 수 있게 되면서 그것에 대한 타협이 가능해진다. 모든 인간이 판단하여 타협할 수 있는 자유로운 하나의 룰과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사회.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로 실현할 수 있다.
전 세계 민주 국가에서 정치 세력의 정치 이념이나 성향과 무관하게 집권하면 패배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수천 년간 결과가 나오지 않는 고대 종교, 수백 년간 진보하지 못한 근대 이념, 수십 년간 사회 문제 해결 못한 현대 인문.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쌓이고 쌓인 끝에 누구도 고질적 사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으로 어떤 정치 세력도 집권하면 패배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현재 우파와 좌파는 보수와 진보라 부르기 어렵지만, 일단 그것을 기준으로 설명하겠다. 우파가 장기 집권했던 영국이나 일본은 좌파가 승리하고 있고, 좌파가 장기 집권했던 EU에서는 우파가 승리하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고질적 문제는 해결되지 못 한 채 정권만 계속 바뀌고 있다.
고질적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법칙부터 알아야 한다. 그러면 해결되지 못한 많은 사회 문제가 윤리에 의함임을 알 수가 있다. 윤리는 판단하지 못하는 절대적 가치로 윤리로 일어난 현상에 대해 원인을 파악할 때에는 애초에 윤리를 원인 선상에 놓지를 않게 되면서 원인조차 모르게 된다. 현재 수많은 사회 현상이 윤리에 의함인 것조차 모른다. 사회에서 인간이 윤리를 판단하지 못하고 지정된 행동을 하면서 형태는 달라져도 본질이 같은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자유주의 체제에서도 여성 정조관념이 윤리면 기독교 성 엄숙주의나 여성주의의 성 상품화 반대와 같이 형태가 어떻든 여성의 성을 억압하는 환경이 조성된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유교의 상명하복 위계질서가 윤리면 제왕적 대통령제나 귀족적 의회제처럼 형태가 어떻든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왕과 귀족처럼 여기는 경향이 나타난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도 집단주의나 조직주의가 윤리면 기업의 담합이나 노조의 파업같이 형태가 어떻든 전체주의적인 현상이 나타난다. 사회 체제와 무관하게 짐승 사회의 법칙과 그걸 성립시키는 조건에 의한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현상이 윤리에 의함인 것조차 판단하지 못하면서 알 수가 없다. 윤리를 지키는 이상 윤리에 의한 문제는 형태가 달라져도 본질은 같다. 이것은 인과가 분명하고 반복되는 현상으로 법칙이나 다름이 없다.
전 세계 청년들이 과거와 달리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않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현 시대는 학자들조차 헤매고 있다. 젊은이들이 열정을 갖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려면, 알기 쉬운 개념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과거 한국에서는 독립 운동, 산업화, 민주화 같이 젊은이들도 알기 쉬운 길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는 그런 알기 쉬운 길이 많지 않다. 있더라도 그게 모순이 있어 논파되고 있다. 과거에는 이러한 논파가 쉽게 알려지지 않아 모순이 있더라도 적극적인 참여가 있을 수 있었으나, 현재는 디지털화에 의해 이러한 논파를 쉽게 공유할 수 있어 모순이 있으면 참여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어떤 적극적인 활동이 있어도 과거보다는 인구가 적은 까닭이 바로 그 활동의 모순을 알기가 쉽기 때문이다. 특히 윤리적인 활동은 판단을 못하면서 관점만 바꾸면 모순이 많이 보인다. 윤리는 절대적 가치로 절대적으로 지켜야만 한다면서 사회에 속한 인간들에게 강제하고 있는데, 모순 투성이니 반발이 심할 수밖에 없다. 정치 세력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집권하면 패배하고 있고, 절대적으로 옳다 주장하던 것은 모순이 많고, 사회 현상에 대한 원인조차 모르는 상태. 도대체 청년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뭘 하려고 해도 뭐가 뭔지를 모르는데.
청년들의 수동성은 경제가 발전할수록 윤리가 강조되는 현상에 의해 더 강화된다. 경제가 발전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자, 옳다고 생각했던 윤리를 더욱 강조했다. 그러면서 윤리에 의한 판단 불가 영역이 늘어나는 것으로 과거 왕정이나 신정이 지배하기 적합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수동적이고 의욕이 없다. 과거에는 그렇게 만들어서 지배하고 명령하면서 사회가 돌아갔는데, 현재는 자유롭기 때문에 그 수동성과 의욕 상실은 사회 정체를 부르게 된다. EU가 괜히 정체된게 아니다. EU의 정체에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는데, 사회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교육받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필연이다. 윤리가 강조되면서 과거 중세 시대 인간처럼 되면서도 강제할 수 없으니까 사회가 정체되는 것이다.
윤리의 본질은 판단하지 못하게 하여 지정한 행동을 따르게 만드는 것. 그것으로 특정 가치에 한해서는 짐승 레벨의 지능을 갖게 해 짐승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킨다. 간단히 말해 멍청하게 만들어서 지배한다. 윤리를 강조하면 인간이 판단하지 못하고 질서를 따르면서 다소 범죄율 감소가 될 수 있는데, 멍청해지면서 타인에게 이용당하는 것으로 강력 범죄가 늘어나고, 금욕과 이타로 원하는 욕망을 이기적으로 추구할 수가 없어 수동적인 인간이 되는 것으로 사회 활동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게 된다. 열정과 광기로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도전하는 것으로 위대한 것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살며 사료를 받아먹는 존재처럼 되게 된다. 그야말로 왕정이나 신정이 지배하기 딱 좋은 인간이 된다.
고대 시대의 윤리는 인간을 지배하고, 자유주의 체제의 이념은 인간의 자유를 추구한다. 이 둘은 반드시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윤리에 의한 온갖 사회 문제가 나타나는데, 윤리에 의해 판단하지 못하면서 원인조차 모르게 된다. 그걸 전 세계가 경험하고 있다. 분명 전 세계는 체제가 같지 않다. 이념이 다르다를 넘어 시대조차 같지 않을 수 있다. 원시 부족으로 남아있는 곳이 있거나, 중세 시대에 머물러 있는 곳이 있거나, 근대 이념에서 정체된 곳이 있다. 그럼에도 세계화와 디지털화에 의해 개인의 권리에 대한 정보가 공유되면서 개인의 권리가 강조되는 것으로 전 세계에서 자유주의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면서 사회 체제와 무관하게 윤리와 자유의 충돌이 나타나게 된다.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저출산 문제는 그런 것에 의한 현상 중 하나일 뿐이다. 본질적인 문제는 윤리와 자유, 그 이전에 짐승 사회의 법칙과 자유의 모순이다. 자유주의화에 의해 짐승 사회의 법칙이 성립되지 못하면서 점점 사회라는 현상이 사라짐에 따라 각 사회들이 멸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개인을 억압하여 멍청하게 만들어 개인을 짐승 사회의 법칙에 맞게끔 하거나, 자유로운 개인을 위해 인간 사회의 법칙으로 바꿔야 한다. 새로운 인간 사회의 법칙이냐, 아니면 다시 짐승 사회의 법칙이냐 골라야 한다. 짐승으로 사느냐, 인간으로 사느냐 결정해야 한다.
전 세계가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를 도입하면 전쟁을 멈출 수가 있다. 인류 역사상 전쟁이 사라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전쟁이 멈출 수 있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의 본질을 알면 멈출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전쟁의 본질은 룰의 차이에 의한 다툼이다. 한자어로는 규칙, 규범, 규약, 규율 등 다양하므로 관련 개념을 룰로 통일하겠다. 룰의 차이에 의한 다툼이으로 룰의 차이가 없게 만들면 전쟁은 없어진다.
전쟁의 본질은 관계로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 관계에서 룰이 다르면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교와 민주주의 룰이 다르다고 하자. 유교는 연령, 학문 등에 의한 권력이 차등이 룰이고, 민주주의는 정부 권력의 평등이 룰이기에 서로가 모순으로 충돌하면서 내적 갈등이나 인간 관계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유교는 판단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 민주주의는 판단할 수 있는 상대적 가치기에 보통 연령에 따른 반말, 존댓말이 우선되곤 한다.
사회 관계에서 룰이 다르면 범죄가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개인의 가족주의와 사회의 공정 경쟁의 룰이 충돌한다고 하자. 가족주의는 개인보다 가족을 우선하면서 가족의 행복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고, 공정 경쟁은 공정한 경쟁을 위해 가족을 위해 비리를 저지르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에 서로가 모순으로 충돌하면서 범죄가 발생할 수 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개인이 비리를 저지르는 희생을 하는 것으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 입시나 취업 비리는 대부분 이러한 윤리에 의한 것이다.
사회와 사회의 관계에서 룰이 다르면 분쟁이나 전쟁이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종교가 다르면 십자군 전쟁마냥 전쟁이 발생할 수 있다. 오늘날 전쟁이나 전쟁 위험도 전부 룰이 다르기에 발생한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하마스의 이스라엘 테러, 중국의 대만 도발 등이 그러하다. 한국은 룰의 차이로 전쟁이 발생하고 오랜 기간 휴전 상태기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 한국을 도발하는 것도 룰이 다르기 때문이다.
전쟁을 어렵게 생각할 수 있는데, 국내에서 룰의 차이로 분쟁이 발생한 것을 제압하는 것이 경찰의 치안 활동이고, 국외에서 룰의 차이로 분쟁이나 전쟁이 발생한 것을 대응하는 것이 군대의 전쟁 활동이다. 내외의 차이이지 본질은 다르지 않다. 오늘날 세계화 시대에 세계와 관계를 단절할 것이 아니라면 국제 룰을 통한 다른 사회 개입은 그것이 정당하냐 부당하냐의 차이지 자연스러운 일이다.
전쟁의 화려함, 잔인함, 끔찍함 등에 눈이 가다 보니 왜 전쟁을 하는지 잊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형태의 다툼은 룰의 차이에 의한 것이다. 정복 전쟁이 룰의 차이에 의한 것이라 말하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그것이 정당하든 부당하든 어느 한쪽이 룰에 속하기로 결정하면 전쟁은 성립할 수 없다. 일방적으로 항복 선언하고 다 내주면 전쟁이 일어날 이유가 없다. 한국은 이미 역사로 그걸 알고 있다. 한일합병조약. 조선 왕조가 500여년간 유교로 조선을 지배하다 운영 실패하고는 일제와 조선 정치가의 압력으로 나라를 일제에 파는 손절을 한 뒤 일제 귀족이 된 사례가 있다. 그 과정에서 일제와 조선 정치가의 다방면에서의 압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선 왕조가 영토와 백성을 일제에 팔았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토지 매매와 인신매매였다. 정녕 조선 왕조가 당시 백성들을 인간으로 여겼다면, 국가의 매매 과정에서 백성의 주권을 보장하는 것과 같은 계약이 있었어야 했다. 그런 것이 없었으므로 한일합병조약은 조선 백성에게 있어 단순히 주인이 바뀐 것일 뿐이다. 같은 민족이든 다른 민족이든 지배자 개념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부당하더라도 한쪽 룰에 속하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전쟁은 룰의 차이에 의해 발생한다. 그렇다면 전쟁은 룰의 차이가 없도록 모두가 하나의 룰을 따르면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인류는 역사를 통해 룰이 하나라 하더라도 분열되어 전쟁이 다시 발생한 사례를 많이 알고 있다. 왜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가? 그것은 짐승 사회의 법칙에 의한 지배 체계에 의해 국가의 룰과 개인의 룰이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지배와 피지배가 존재하는 룰에서는 피지배자가 손해를 보기 때문에, 그 룰을 따르지 않고 다른 룰을 주장하는 것으로 룰의 차이가 발생하면서 전쟁이 나타날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개인이 손해보지 않는 이기적인 하나의 룰이 있어야 전쟁이 사라질 수 있다.
현재 윤리 사상인 사회주의, PC주의, 여성주의의 룰을 주장하고 실행하고 있음에도 국가 내 갈등과 분쟁이 사라지기는커녕 심해지는 것은, 그에 따라 부당하게 손해를 보는 개인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강자가 손해를 보고, PC주의는 다수가 손해를 보고, 여성주의는 남성이 손해를 본다. 이타적인 그 룰을 수용할 수 없으면서 다른 룰을 주장하는 것으로 내부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많은 난민을 수용한 유럽 국가들의 내부 갈등과 분쟁은 사회의 룰, 개인의 룰, 난민의 룰 등 너무 룰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분명하게 말하는데, 다양한 룰과 다양한 가치와 하나의 룰과 다양한 가치는 다른 개념이다. 절대적 가치인 윤리가 들어가는 이상 다른 가치와 타협할 수 없으면서 룰이 다양하게 될 수밖에 없다. 하나의 룰과 다양한 가치는 오로지 상대적 가치로만 가능하다.
그렇기에 판단 후 계약 행동하는 인간 사회의 법칙과 모든 개인의 이기적인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주의 체제만이 세계 내 룰을 최소화하여 다툼, 갈등, 범죄, 전쟁을 줄이거나 막을 수 있다. 사회 내 같은 룰이라 하더라도 개개인의 이레귤러적인 범죄는 막을 수 없으나 사회와 사회가 같은 룰이면 전쟁은 막을 수 있다. 실제 자유 진영이나 EU는 서로 전쟁을 멈춘지 오래되었다. 문화 상대주의로 다양한 절대적 가치의 공존을 주장하여 절대적 가치에 의한 룰의 다양화가 내부 갈등을 심각하게 하긴 했음에도 전쟁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자유, 인권, 시장 등의 국제법을 준수 하는 것으로 교류에 쓰이는 룰은 대체로 하나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현재 전쟁은 체제나 시대가 달라 그런 국제 룰을 지키지 않을 때만 나타나고 있다. 무기의 발전이나 디지털화는 그러한 룰의 하나를 촉진하거나 단단하게 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민주화 또한 절대적 가치 외에도 다양한 가치가 보장되면서 룰의 폭이 넓어지는 것으로 보다 수용할 수 있는 가치가 많아짐에 따라 다툼을 줄이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과거의 사회는 짐승 사회의 법칙과 도덕과 윤리를 기초로 한 룰인 법과 그것을 바탕으로 정복자의 체제로 만들어졌다면, 오늘의 사회는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와 체제의 룰인 법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법은 포지티브로 접근하여 모든 것을 허용하고 일부만 금지하도록 해야 한다. 하나의 룰을 실현하려면 인간의 자아, 감정, 욕구, 욕망, 행복 등을 이해하고 하나의 룰에서 충족할 수 있도록 설계하여 자발적으로 하나의 룰을 따르게끔 만들어야 한다. 경제 물리학으로 접근해 물리적으로 어떻게 해야 인간이 에너지를 방출하여 행동을 하는 것으로 경제적인 소비, 생산, 분배 활동이 일어나고, 어떻게 해야 행복을 느낄 수 있는지를 파악하여 가치 관리를 해야 한다. 인류 문명을 전부 과학화한다. 이것이 가능해지면 대부분의 사회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물론 아직 현재로는 결정적 한계가 있다. 늙음과 죽음이다. 늙음과 죽음으로 하나의 룰 내에서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하여 다양한 룰이 생기는 것은 현재로서 막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불로불사까지 달성하면 아마 대부분의 분쟁과 전쟁은 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 전쟁을 일으키는 또는 일으키려는 국가의 통치자들 또한 늙음이나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그런 극단적 선택을 할 이유가 없다. 불로와 불사가 하나의 룰에 포함되어야 주어진다면 하나의 룰을 지키게 될 것이다. 하나의 룰 내에서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으면 굳이 그 룰 밖에 나갈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불로와 불사까지 도달하기 위한 기술 발전 또한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로 가능하다. 인간의 성장과 가능성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보다 높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가치가 그렇다. 모든 가치를 판단할 수 있어야 보다 자유로운 사고를 통해 더 높은 레벨로 나아갈 수 있다. 판단하지 못하는 가치인 절대적 가치의 세계에 갇혀있는 한 발상의 한계가 뻔하다. 모든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상대적 가치의 세계로 진입해야 사고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사회의 법칙을 기초로 인류 문명을 간단히 알아보았다. 인류 문명은 원시, 고대, 중세, 근대를 거쳐 발전하면서 자유 혁명 이후 윤리와 자유의 충돌하였다. 룰은 근대에 머물러 민주화인 상태에서 기술은 현대와 같이 발전하면서 본격적인 세계화와 새로운 디지털화가 활성화되었다. 그것으로 윤리와 자유의 충돌이 전 세계적인 사회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그것과 같이 외교와 정치 또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졌다. 민주화로 주권자가 늘어나고 세계화로 세계가 넓어지고 디지털화로 관계가 좁아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것에 의해 외교 분야의 역할과 국제 정치 개념이 달라진다. 그것에 대해 알아보자.
[외교: 1. 다른 나라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관계를 맺는 일.]
[정치: 1. 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
[권력: 1.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 특히 국가나 정부가 국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강제력을 이른다.]
외교는 다른 나라, 즉 다른 사회와 관계를 맺는 일이다. 정치는 나라를 다스리다, 즉 사회를 관리하는 일이다. 권력은 사회 구성원에게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이다. 외교에서 정치라는 것은 국가와 국가를 관리하는 일. 즉 타국에 어떠한 강제력을 행사하는 행위를 통해 관계가 있는 사회를 관리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행위는 모두 주권자가 한다. 과거에는 왕이다. 외교의 경우 왕을 대리해 다른 사회와 관계를 맺는다. 정치의 경우 왕이 사회를 관리한다. 권력의 경우 왕이 사회 구성원에게 강제력을 행사한다. 외교에서 정치는 왕이 타국에 강제력을 행사하는 행위. 통상 경제적 교류를 통하나 타협할 수 없으면 무력 행사를 통해 강제력을 행사하여 각 사회를 원하는 대로 관리한다. 그게 분쟁 또는 전쟁. 모든 전쟁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목적의 수단이므로 어떤 형태라 하더라도 정치 전쟁이 된다.
민주화, 세계화, 디지털화는 이러한 외교와 정치 개념을 크게 바꾸었다. 민주주의는 사회에 속한 모든 개인이 주권을 가진 권한이 다른 통치자가 되는 체제다. 모든 개인이 정부 권력을 가지고 권력을 행사한다. 정치가와는 권한이 다를 뿐이다. 즉 민주화를 통해 주권을 가진 인간이 왕에서 모든 개인으로 바뀌었다. 이것에 의해 외교 개념 자체가 완전히 달라진다. 직접 교류가 아닌 교류 관리로 바뀌었다. 주권자가 다른 사회와 교류하는 것이 외교이므로, 대통령뿐만 아니라 정치가, 기업가는 물론이고 사회에 속한 주권자라면 누구라도 다른 사회의 주권자와 교류하면 외교가 된다. 세계화를 통해 외교를 해야 할 국가가 모든 국가로 바뀌었다. 세계화 이전에는 인접한 국가와의 외교부터 시작해 그 외 특정 국가와 외교를 해왔지만, 세계화 이후에는 그야말로 모든 국가가 외교 대상이 된다. 세계가 넓어졌다. 디지털화를 통해 전 세계와의 교류를 실시간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에서 빛의 속도로 지구 반대편 소식을 받아볼 수 있다. 디지털로 받는 정보는 외부에서 왔으나 내부에 존재하는 것을 아는 것이므로 그 거리가 좁혀진 것은 아니지만, 정보 교류를 통한 관계가 굉장히 좁아졌음은 부정할 수 없다. 세계화와 디지털화로 세계는 넓어지고 관계는 좁아진다. 그에 따라 주권자들이 외교 분야를 거치지 않고 외교를 하는 일이 엄청나게 늘어나게 되었다. 과거 왕은 직접 다른 사회와 교류하기 어려워 외교관이 대리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지금 대통령은 전화나 sns 등으로 다른 사회와 교류하기가 쉬워 직접 외교를 한다. 다른 주권자들도 전부 그렇다. 그렇기에 그렇게 되면서 외교 분야는 단순히 대통령을 대리하는 역할이 아니라 모든 개인의 외교를 보조 관리하는 역할이 된다. 더 이상 직접 외교의 역할은 큰 의미가 없다. 그에 따라 외교 분야는 보조 관리에 집중하기 위해 외교 플랫폼을 만들어 관리하는 것도 적절할 수 있을 것이다.
외교와 정치는 세계화가 되면서 지구를 관리하는 정치가 가능하게 되었다. 지구 권력, 즉 패권이다.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지구 권력을 가진 국가를 패권 국가가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미국이 패권 국가라 할 수 있고, 미국과 중국이 패권 경쟁, 패권 전쟁을 하고 있다. 전 세계가 두 강대국의 패권 전쟁에 휘말려 있는 상태다. 그런 전쟁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패권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패권은 권력을 의미하지 재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권력은 강제력의 행사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하고 재력은 강제력의 수단이 될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정치적 손익과 경제적 손익이 다를 수가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이 미군을 전 세계 주둔시키는 것은 경제적 손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주둔한 곳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고려하면 정치적 이익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이 일대일로를 하며 수천 조원을 쏟았다 하는데, 그것은 경제적 손해가 될 수가 있다. 그러나 빌려준 돈을 갚지 못한단 이유로 타국 항구의 운영권을 99년 빌려간 사례가 있는 것을 고려하면 그것이 정치적 이익이 된다 할 수 있다. 정치는 사회를 관리하는 일이고, 권력은 강제력을 행사하여 사회를 관리하는 힘이며, 패권은 지구에 강제력을 행사하여 지구를 관리하는 힘이다. 패권 전쟁의 승패 유무는 경제적인 수치보다 지구 각 지역에 강제력을 행사해 관리할 수 있는 힘이 어느 정도 있는지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패권 전쟁을 하지 않더라도 지구 내에 권력을 얻고 싶은 국가라면, 지구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찾는 것이 타당하다. 자연 재해나 전쟁에 고통 받는 국가에 지원을 하는 것은 경제적 손해가 될 수 있어도 정치적 이익이 될 수 있다. 지원을 하면서 그 지역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인권을 주장한다거나 환경을 보호한다거나 하는 행위 또한 경제적 손해가 될 수 있어도 정치적 이익이 될 수 있다. 윤리의 본질을 기억하자. 윤리로 타인에게 판단하지 못하고 지정한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안다면, 그게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윤리에서 벗어나 모든 가치를 상대적으로 여긴다 하더라도, 인권이나 환경과 같이 보편적으로 높은 가치는 정치적 영향력이 크다. 스포츠나 예술 등도 그렇기에 정치적 영향력 행사에 도움이 된다. 납치, 테러, 해적 등의 행위에 군사 투입 또한 경제적 손해와 정치적 이익을 얻는 행위다. 맹목적으로 평화를 외치는 일부 이들은 윤리로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여 무기만 버리면 무작정 평화가 올 거라 착각하는데, 전쟁은 룰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찰이 없으면 범죄가 없어지는가? 경찰도 경제적으로는 손해지만 정치적으로는 이익이기에 존재함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에서 자유로운 하나의 룰과 다양한 가치의 공존이 보편적 룰이 되지 않는 이상, 전쟁에 대한 대비는 범죄에 대한 대비와 다를 바가 없다. 단지 내국이냐 외국이냐의 차이인데, 민주화, 세계화, 디지털화가 된 시점에서 그 경계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어떤 가치를 실현하고 싶다면 단순히 윤리마냥 판단하지 못하고 무작정 외칠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실현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모든 개인은 주권을 가진 권한이 다른 통치자다. 민주주의 사회의 개인은 통치자답게 단순히 어떤 가치든 판단하지 못하고 따르기만 할 것이 아니라, 모든 가치를 판단하고 나서 추구하고 싶은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인간, 사회의 법칙, 자아, 가치 등을 이해하면 그것을 실현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회의 법칙을 알고 이해하고 수용했다면 이미 기본적인 통치자 관점을 가지게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2. 관점
관점이 다르면 같은 사물이나 현상을 다르게 판단할 수 있다. 지배와 자유, 정치와 경제, 생산과 소비 등. 특정 현상에 대해 각기 다른 관점으로 다른 판단을 할 수 있다. 이것을 과학적으로 보면 관점이 조건이고 판단이 결과다. 조건이 달라지면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다양한 조건에서 모순이 없는 어떤 본질이 바로 모순이란 불순물이 적은 순도 높은 본질이 된다. 과학을 통해 그것을 보다 쉽게 알 수 있다. 과학은 모든 조건에서 모순이란 불순물이 없는 순도 높은 본질을 찾은 지식을 의미한다. 과학적 방법은 관찰, 가설, 실험, 증명, 이론 등을 통해 나온 것을 다양한 인간들이 다각도로 재현해보면서 모순이 없는 지식을 찾는 방법을 말한다. 과학적 방법의 본질은 모든 조건에서의 모순 제거다. 관점은 조건 중 하나로 관점이 다양할수록 조건이 늘어나 사물이나 현상을 다각도로 관찰하여 가능한 모순을 줄이는 것으로 순도 높은 본질을 찾을 수 있다. 순도 높은 본질이 모이면 순도 높은 지식이 된다. 그런 지식을 과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문 계열이 과학이 되려면 우선 다양한 관점으로 보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사회와 현상을 다양한 관점으로 관찰하여 사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사회 문제 원인도 알 수 있게 된다. 관점이 그만큼 중요하다. 그러면 관점에 대해 알아보자.
[자아: 2. 대상의 세계와 구별된 인식 · 행위의 주체이며, 체험 내용이 변화해도 동일성을 지속하여 작용 · 반응 · 체험 · 사고 · 의욕의 작용을 하는 의식의 통일체.]
[판단: 1. 사물을 인식하여 논리나 기준 등에 따라 판정을 내림.]
[의미: 1. 말이나 글의 뜻. 2. 행위나 현상이 지닌 뜻.]
[가치: 3. 인간의 욕구나 관심의 대상 또는 목표가 되는 진, 선, 미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관점: 1.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할 때, 그 사람이 보고 생각하는 태도나 방향 또는 처지.]
인간 스스로 ‘나’를 지칭하는 대상은 통상 자아다. 자아가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 생각하는 태도나 방향이 관점이다. 그 관점을 알기 위해 자아부터 알아보겠다. 자아는 생물에서 판단만 하는 기관이다. 생물이 메커니즘으로 동작할 때 자아는 판단만 한다. 통상 생각하고 행동함에 있어 자아인 ‘나’가 직접 움직인다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자아는 원하는 생각을 하기 어렵고, 원할 때 자기도 어렵고, 체내 세포 동작도 제어 못한다. 자아는 그저 판단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물이 자아의 판단으로 생각이나 행동 같은 동작을 할 뿐이다. 예를 들어 인간이 공을 정확히 던지기 위해 훈련한다고 해보자. 자아는 공을 정확히 던지는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생물이 공을 정확히 던지게 할 수 있는 판단을 찾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공을 정확히 던질 수 있는가? 어떤 판단을 해야 정확하게 공을 던질 수 있는가? 이 두 가지는 엄격하게 다르다. 자아의 본질을 안다면 자아의 판단은 동일해도 육체 상태에 따라 다르게 공이 나갈 수가 있음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로봇으로 비유하자면 로봇에 타서 버튼 눌러가면서 조종하는 게 아니라, 판단만 하는 것을 로봇이 알아서 반영하여 움직이는 것. 그런 상태에서 자아가 어떤 판단을 해야 원하는 방식대로 움직이는지를 시행착오를 통해 파악하는 것이 학습이나 훈련이다.
판단은 논리가 기준 등으로 다양한 결론을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최초의 판단의 기준은 유전자다. 자아는 유전자를 기준으로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판단한다. 생물은 그 판단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최초의 판단을 통해 사물이나 현상이란 대상에 의미가 부여된다.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 의미가 부여되어야 논리가 성립된다. 의미들의 관계에서 모순이 없는 체계가 논리기 때문이다. 아직 의미가 부여되지 않거나 의미를 모르는 사물이나 현상은 보통 논리가 아닌 감각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알기 어려운 예술들이 보통 그런 경우가 많다. 의미가 부여된 것에 가치가 생기게 된다. 가치는 대상의 판단 기준이다. 부여된 의미에 따라 판단 기준이 달라지는데 그것을 가치라 부른다. 가치에는 진실이나 거짓, 옳거나 그름, 아름다움이나 더러움 등이 있다. 인간의 가치 판단은 주관적 손익으로 결정된다. 진실이 이익이 되면 가치가 높다, 거짓이 손해가 되면 가치가 낮다는 식이다.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가 사회 가치다. 판단 불가 가치가 절대적 가치고 판단 가능 가치가 상대적 가치다. 도덕과 윤리는 판단하지 못하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가치로 절대적 당위 가치다.
관점은 사물과 현상을 어떤 의미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의미, 가치, 관점으로 이어진다. 관점은 관찰자를 필요로 하기에 관찰하는 인간의 주관적 가치관에 따라 관점이 다를 수 있다. 주관적 가치관에 따라 보는 의미가 한정되면서 관점도 한정되게 된다. 특히 윤리의 경우는 판단하지 못하는 절대적 가치로 반드시 해야만 하거나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그 외의 의미나 가치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관점이 적어지게 된다. 예를 들어 사랑과 평화를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면 그 외의 의미, 가치, 관점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다 여기고 나서 사물을 보게 된다. 그렇기에 윤리에 지배되는 인간은 윤리가 원인인 사회 현상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관점이 적어지면서 적은 조건으로 사물과 현상을 봐야 하기 때문에 모순을 알 수도 없어 보통 모순이 많아 순도가 낮은 본질을 알게 된다. 그래서 윤리적인 주장은 관점만 바꾸면 논리적인 허점이 많게 된다.
공산주의를 경제가 아닌 윤리로 관점을 바꾸면 공산주의의 주장이 종교의 주장과 본질적으로 크게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정치는 사회를 관리하는 일이다. 둘은 정치로 인간을 평등하게 만든다는 본질이 같다. 종교가 사회를 관리해 인간들을 신의 피조물로 평등하게 만든다. 공산당이 사회를 관리해 인간들을 평등하게 만든다. 이런 것을 통해 공산주의는 종교를 비판하면서 종교 가치 실현을 유토피아라 떠들고 있는 모순적인 사상임을 알 수 있다.
PC주의가 외모 지상주의를 비판하고 인간을 성적 대상으로 삼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윤리가 아닌 범주 가치로 관점을 바꾸면 PC주의가 그것을 더 악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연애 시장에서 대상의 외모를 높게만 보는 것은 그만큼 성에 대한 범주 가치가 낮아 연애에 대한 욕구가 적기 때문이다. 범주 가치는 대상의 범주 가치가 낮아질수록 고점만 소비하려는 태도가 나온다. 인간을 성적 대상으로 삼지 못할 정도로 성을 금기시하자, 성에 관한 범주 가치가 낮아짐에 따라 외모가 좋지 않으면 성적 대상으로 소비하지 않는 태도가 나타난다. 그게 바로 외모 지상주의다. 성매매 증가 또한 범주 가치 하락의 영향이다. 연애 시장이 범주 가치 하락으로 동작하지 않으면서 성적 욕구 충족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성매매 수요라도 높으면 그나마 성 범주 가치가 아예 낮은 상태는 아닌데, 성매매 수요조차 낮아지면 이제는 성 범주 가치가 너무 낮아 연애 시장이 거의 죽게 된다. 이런 것을 통해 PC주의는 외모 지상주의를 비판하면서 외모 지상주의의 원인인 모순적인 사상임을 알 수 있다.
여성주의가 여성 인권이라 주장하는 여성성을 윤리가 아닌 법칙으로 관점을 바꾸면 그것이 가부장제 시대에 만들어진 여성성임을 알 수 있다. 여성이 주장하는 여성성은 과학을 기초로 새로 정립한 게 아니라, 가부장제 시대에 고통 받던 여성성을 기초로 여성의 권리를 극대화했다. 가부장제 여성성을 기초로 여성은 약하니까 여성 징병을 해서는 안 된다면서, 그 여성성을 기초로 권리를 극대화하여 여성 군간부는 할당제를 넣어서라도 늘려야 한다가 된다. 여성에게 사회 진출을 하게 하기 위해 수많은 할당제와 가산점을 넣고 있지만, 사회 진출에 적합하지 않은 가부장제 여성성을 여성 인권이라 주장하면서 제대로 되질 못하는 상태다. 사회에서 힘들고 피곤한 것은 가부장제 여성성으로 다 피하게 하는데, 어떻게 힘들지 않고 성장할 수 있겠는가? 성인지 감수성을 주장하며 가부장제 여성처럼 사회에 부적합하게 성장하게 만들면서, 사회에서 활동하게끔 할당제와 가산점을 넣고 있다. 너무 비효율적이고 불합리적이다. 여성이 차별 받는 게 있으면 논리로 풀어야지 감성으로 풀면 안 된다. 그러니까 가부장제 에 세뇌 당한 감성으로 여성 인권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기성세대가 여성주의를 지지하는 이유가 가부장제 가치관을 버리고 여성 인권을 주장하기 때문인 것 같은가, 아니면 여성주의가 가부장제 여성성을 주장하니까 기성 세대가 호응하는 것 같은가? 논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성을 소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남성성이 자유로우니까 여성이 그걸 소비하는 게 자유로운 거고, 여성성이 억압받으니까 그걸 남성이 소비하는 게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이런 것을 통해 여성주의는 가부장제를 비판하면서도 가부장제 여성성을 여성 인권이라 떠들고 있는 모순적인 사상임을 알 수 있다.
윤리적인 주장은 대부분 모순이 많다. 노동자 인권을 말하며 노동 조합의 시장 원리를 해치는 부당한 권리 주장까지 허용하자, 대기업의 노조의 정규직은 높은 안정성과 높은 이익을 얻고, 중소기업 하청의 비정규직은 낮은 안정성과 낮은 이익을 얻게 되었다. 리스크 리턴의 룰이 지켜지지 않자 경제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불행한 노동자가 늘어났다. 노동자 인권을 말하며 노동자 고용 보장을 강제하자, 노동 유연성이 파괴되어 노동자는 취업하기 힘들고 퇴사하기도 힘들게 되면서 부당하더라도 참아야만 하는 일이 늘어나게 되었다. 노동 유연성이 파괴되자 노동 유연성 체계가 갖춰지지를 못해 인원의 공백을 메꾸기가 어려워지면서, 체계에 맞는 노동 시간을 줄이는 일이나 출산 휴가 보장이나 경력 단절 고용이 어렵게 되었다. 노동 유연성 체계가 갖춰져야지 인원 교체가 잦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노동 시간을 조절하거나 출산 휴가를 보장하거나 경력 단절을 고용하기가 쉬운데, 노동자 인권을 말하며 노동 유연성을 파괴하니까 되려 노동자가 힘들게 된 것이다.
관점을 바꾸면 이미 알고 있던 것도 다르게 볼 수 있다. 자연 계열과 인문 계열 예시 하나씩 해보겠다. 자연 계열에 관한 발상을 몇 가지 해본 적이 있다. 우주는 디지털의 0과1처럼 에너지 기본 성질로 시작된 것이고, 시간은 좌표계에 있는 게 아닌 변화의 관측 순서고, 공간은 공간 에너지 개념이 고전 역학과 양자 역학을 연결할 것이고, 생명은 원자핵 붕괴에서 시작되었다고 한 적이 있다. 다양한 관점들을 종합해 모순을 제거하면서 나온 발상들이다. 아직 순도가 높은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관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질량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생각하게 된 계기는 에너지 기본 성질다. 에너지 기본 성질은 응축과 폭발에 있다고 보았다. 에너지와 질량은 등가한다. 에너지의 응축된 결과가 물질이다. 물질의 중력이 에너지가 응축하는 현상에 의한 것이다. 이런 논리로 접근하자 질량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질량은 힉스 입자와 다른 입자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다. [힉스 입자: 1. 입자 물리학의 표준 모형에서 입자의 질량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입자. 이 입자와 다른 입자의 상호 작용 중에 자발적 대칭성 깨짐이 일어나 입자의 질량이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영국의 물리학자 힉스가 제안하였다.] 이론상의 이 입자를 물리학 연구소인 세른에서 힉스 입자를 발견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관성적으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이상했다. 왜 질량 같은 알기 쉬운 개념의 원인이 굉장히 어렵게 발견되어야 하는가? 관점을 달리해보았다. 만약 자석과 자석 사이에 무게를 재는 저울을 넣으면 자석이 서로 당기는 힘이 측정되지 않겠는가? 그 관점으로 질량과 중력을 생각해보았다. 물체와 물체가 서로를 당기는 힘으로 측정되는 것이 무게. 물체 고유의 당기는 힘이 질량. 물체의 중력은 우주 어디를 가도 동일. 물체끼리 당기는 힘의 차이에 의해 무게가 달라진다. 현재 지구와 지구 내 물체가 서로 당기는데, 지구 내 물체의 당기는 값이 무게인 것이다. 빛이 정지 질량이 없다는데 에너지는 있다거나 같은 이유로 질량 개념이 모호하여 헷갈리는 게 아닐까 싶다. 인간은 없는 것과 측정 불가한 것을 구분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본다. 에너지와 질량이 등가한다면 모든 에너지에는 질량이 있다 가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본다. 단지 빛의 경우 측정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싶다. 이후에 힉스 입자는 발견되었으나 힉스 입자가 질량을 나타나게 한 것인지는 증명되지 못했다고 들었다. 중력 자체가 질량인 것이 좀 더 논리적이라 생각한다. 아직 순도가 높은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관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문 계열에서 골치 아픈 문제 중 하나는 전 세계적인 저출산 현상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모르고 있다. 과거보다 훨씬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편함에도 저출산 현상이 일어난다. 특히 한국에서는 저생산, 고자살 문제도 겹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그게 굉장히 어려워 보이고 있다. 그러나 관점을 바꿔보면 너무나도 쉬운 문제다. 왜냐하면 그동안 인류는 그냥 냅둬도 알아서 낳고, 알아서 생산하고, 알아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인류가 멸종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냥 냅둬도 알아서 해결되는 문제를 어렵다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해결되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자연적인 원인이 아닌 인공적인 원인, 즉 인간이 만든 문제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윤리가 문제의 원인이다. 윤리가 원인이니까 그런 쉬운 문제도 판단하지 못하면서 원인조차 모르고 있다.
저출산, 저생산, 고자살 현상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다. 그런 의견 이전에 몇가지 생각해보자. 본디 인간은 알아서 낳고 생산하고 살았기에 멸종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었다. 과거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다. 짐승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의 모순으로 사회 문제가 심각하다. 각 현상은 공통적으로 윤리 영향을 받는다. 쉬운 문제, 물질적으로는 더 풍요롭다, 법칙과 체제 모순, 윤리 영향. 이런 관점을 종합하면 논리적으로 볼 때 윤리가 본질적 원인임을 알 수 있다. 냅둬도 알아서 하고, 과거보다 환경도 좋은데 결과는 나쁘다는 것과, 법칙과 체제 모순과 윤리 영향이 있음을 고려하면 어떤 인위적인 조건이 더해져 사회 현상이 나타났고, 문제가 쉬움에도 그 조건이 뭔지도 모르는 시점에서 판단하지 못하는 절대적 가치인 윤리의 영향이라 논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윤리의 영향을 정리해보자. 이성과의 성관계로 출산이 이루어지는데, 윤리의 영향으로 사회에서 미성년은 물론이고 성년조차 성이 터부시되고 있다. 화이트칼라든 블루칼라든 일인데, 윤리의 영향으로 사회에서는 사농공상처럼 화이트칼라가 우대받고 블루칼라가 천대받고 있다.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살고자 하는 욕망이 커서 적극적으로 살 수 있는데, 윤리의 영향으로 사회에서는 금욕과 이타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 영향의 결과를 알아보자. 사회에서 성은 긍정적으로 보기는커녕 부정적으로 보고 있고, 일은 블루칼라를 천하게 여기고 있고, 생은 금욕과 이타로 스스로의 살고 싶은 삶을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윤리의 영향으로 부정적 인식이 자리잡아 부정적 가치를 갖게 되는 것으로 가치가 낮아지게 된다. 성과 일과 생의 범주 가치가 매우 낮아지게 된다. 범주 가치가 낮아지면서 그것에 많은 조건이 붙지 않으면 하고 싶어하지 않게 되는 것으로 저출산, 저생산, 고자살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낳고 싶지 않고 생산하고 싶지 않고 살고 싶지 않다. 이는 범주 가치와 시장과 사회 현상을 알면 이해할 수 있다.
범주 가치는 대상이 속한 범주의 가치를 의미한다. 영화 범주 가치는 영화의 범주 전체의 가치다. 이 범주 가치는 일반적인 가치와 다르게, 범주 내 가치의 수요와 별개로 고점만 소비되고 저점이 소비되지 않으면 가치가 낮은 것이 된다. 그 범주 가치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 범주 가치를 소비하기 위해서는 고점이라는 조건이 붙기 때문이다.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인간은 유명한 영화여야만 영화를 본다. 딱히 영화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유명하다는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범주 가치로 성과 일과 생에 관련된 사회 현상을 해석할 수 있다.
현재 인간들이 성과 일과 생에 대해 좋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외모 지상주의가 될 정도로 아름다운 연애 대상을 바라고 있고, 유명하고 화려한 직업을 갖기 위해 대기업에 취업하거나 전문직 자격을 취득하고 싶어하고 있고, 화려하고 부유한 삶을 살고 싶어하고 있다. 고점에 대한 집착이 장난이 아니어서 경쟁이 굉장히 심할 정도다. 이것을 범주 가치로 보면 고점만 소비되고 저점은 소비되지 않는 상태, 즉 범주 가치가 매우 낮은 상태라는 것이 된다. 영화와 성과 일과 생의 차이가 있다. 집착. 왜 이런 차이가 있느냐면 당위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딱히 당위성이 없다. 영화를 봐야만 하는 당위성이 보통 없기 때문에 유명한 영화가 나오면 보고 아니면 집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성과 일과 생은 당위성이 있다. 욕구와 필요와 필수. 육체에는 성적 욕구가 있고, 살기 위해서는 일할 필요가 있고,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는 것이 필수적이다. 어떤 행위를 보편적으로 해야만 하는데, 그 범주 가치가 낮게 되면 고점에 대한 집착이 아주 강하게 되는 것이다. 성과 일과 생에 대한 수요와 집착을 보고 가치가 높다 생각될 수 있지만, 범주 가치 개념과 당위성을 고려하면 현재 관련 범주 가치는 매우 낮은 상태다. 당연하다. 미성년 시기부터 그렇게 나쁜 인식을 갖게 하고 있는데, 그 각인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다.
해야만 하는데 하기는 싫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조건을 갖추기 위해 미친 듯이 그 조건에 집착한다. 이것이 초경쟁 사회의 원인 중 하나다. 또 하나의 원인도 윤리다. 유교 영향으로 권력을 얻기 위해 미친 듯이 집착하기 때문이다. 부모의 교육열과 입시열이 그러한 현상의 결과 중 하나다. 저출산, 저생산, 고자살 등의 사회 문제가 초경쟁 때문에 발생했다 생각할 수 있는데, 초경쟁은 윤리에 의한 결과 중 하나에 불과하다.
윤리에 의해 판단하지 못하고 범주 가치를 하락시켜 하고 싶어하기 위한 조건이 지나치게 많아졌다. 상위 10%~20%여야 성, 일, 생을 만족하게 되었다. 윤리에 의해 판단하지 못하고 그걸 기초로 인간이 행복해야 한다면서 상위 10%~20%의 조건을 사회와 이성에게 요구하게 되었다. 대부분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조건 요구가 눈 앞에 닥친 것이다. 성에 대해서는 특히 여성주의가 가부장제 여성성을 기초로 성인지 감수성을 말하며 가부장제 시기의 힘없는 여성에 맞는 무한한 권리를 사회에 요구하게 되었다. 가부장제 여성성을 기초로 성인지 감수성을 말하며 가부장제와 자유주의 체제의 의무와 책임을 둘 다 남성에게 요구하게 되었다. 둘 다 감당할 수 없는 요구가 닥치게 되었다. 그러면서 사회가 망가지고 남성이 포기한다.
일에 대해서는 현재 경제 체계가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을 요구하고 있다. 노동 경직성으로 경직된 생산 체계에서 인원 공백이 생기면 많은 기업이 그걸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노동자를 위해서라면서 고용과 해고가 까다로운 노동 경직성을 유지하면서 출산 휴가 보장이나 경력 단절 고용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 것은 공무원이나 공기업 또는 대기업이 감당할 수 있지 중소기업은 그런 불특정한 인원 공백을 대부분 감당하기 어렵다. 그것을 실현하고 싶으면 애초에 인원 교체가 자유로운 노동 유연성 경제 체계를 갖춰야 한다.
윤리를 말하며 무조건 해야만 한다는 것은 정신력을 말하면서 무조건 해야만 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한계는 존재한다. 판단을 해서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해야 하고, 감당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아무리 옳은 거라 말해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을 할 수가 없다. 이성 관계적인 부분에서 한국 여성주의자는 남성이 전부 희생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접근하는데, 남성의 이익 추구가 이성 관계의 동기가 된다. 그 이익 추구가 정당하다면 이익을 부당하게 희생하게 하는 것은 애초에 동기 자체를 빼앗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면 이성 관계 자체를 하려 하지 않게 된다. 경제적인 부분에서 사회주의자는 부자가 전부 희생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접근하는데, 좀비 기업이 아닌 이상 기업 경영으로 얻을 수 있는 예상 수익이 기업을 경영하는데 동기가 된다. 그 수익이 정당하다면 수익을 부당하게 빼앗는 것은 애초에 동기 자체를 빼앗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면 기업 경영 자체를 하려 하지 않게 된다. 이런 것들을 사회가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남성을 여성으로, 기업가를 노동자로 바꿔도 동일하다. 윤리가 아닌 철저한 합리로 접근해 서로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을 요구해야 한다.
생에 대해서는 현재 가치 교육으로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을 요구하고 있다. 세상의 다양한 가치를 교육한 게 아니라, 그냥 윤리를 교육했기 때문에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 말고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인간이 많다. 그럼에도 뭔가 적극적이고 큰 꿈을 꾸고 열심히 살라고 한다. 과거와 같이 결혼과 취업이 이미 준비되어 강제되던 때라면 관성에 따라가면서 맞춰진 삶을 살 수도 있지만, 현재와 같이 자유로운 상태에서는 다양한 가치를 이해하고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인 삶을 살게 해야 한다.
범주 가치가 낮아지면서 각각 시장은 고점만 거래되게 된다. 보통 아름답고 부유한 대상과의 연애와 결혼만 바라기에 그런 조건을 갖춘 일부만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한다. 보통 대기업이나 전문직 같은 좋은 직업만 바라기에 그런 조건을 갖춘 일부만 적극적으로 일을 하고, 그 외에는 일을 기피하면서 좋은 직장이 아니면 쉬거나 오랫동안 고시에 빠지게 된다. 보통 화려하고 부유한 삶을 살고 싶어하기에 일반적으로 행복해하지 못하는 상태이고, 일부는 그런 삶을 위해 대출 후 주식, 부동산, 코인에 투기하다 실패하면 자살한다. 고점을 얻기 위해 미친 듯이 경쟁하게 된다. 무슨 저출산이 초경쟁 사회 때문이라는데, 그 초경쟁이 고점만 바라는 가치관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윤리와 범주 가치와 당위성만 이해해도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저출산, 저생산, 고자살, 그리고 초경쟁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인과가 분명한 현상이다.
과거에는 출산율이 높았다 할 수 있는데, 그때에는 직간접 강제가 있었으니까 가능했음을 알아야 한다. 과거 중매 결혼과 중매와 비슷한 연애 결혼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 판단하지 못하고 행했다. 윤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자유주의 체제가 되고 나서 개인의 권리를 위해 겉으로 드러나는 일부 절대적 가치는 상대적 가치로 변했는데, 그게 바로 결혼, 취업, 생존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당장 보이는 현상은 판단할 수 있게 되면서 개인의 자유를 위해 강제해서는 안 된다면서 윤리가 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성, 일, 생에 영향을 주는 가치들은 윤리로 남아서 판단하지 못하고 해당 범주 가치를 폭락시키면서 사람들이 스스로 하려 하지 않게 되는 것으로 저출산, 저생산, 고자살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다. 윤리의 본질을 이해하질 못하다 보니 아무도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특히 저출산은 대부분 선진국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다. 일부 국가는 성년의 경우 성이 자유로워 한국보다는 나을 수 있는데, 미성년 성은 대부분 자유롭지 못하여 크게 다르지가 않다. 미성년 2차 성징 때 성에 눈을 뜨고 성에 대한 가치가 각인되는데, 그 시기에 성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면 범주 가치가 낮아진 상태에서 성장한다. 그러다 보니 성년이 되고 나서 성이 자유롭게 된다고 한들 큰 영향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이미 범주 가치가 낮아진 상태로 성장하여 고점이 아니면 연애조차 하지 않게 된다. 엄격한 위계질서가 윤리인 유교권인 한국과 일본이 심각하여 한국은 20대 연애율이 20%대고, 일본은 20대 성경험이 50%라는 얘기가 있다. 중국은 체제가 다름에도 비슷한 상태다. 유교권이 워낙 낮다 보니 서구권 출산율이 그래도 괜찮은거 아닌가 싶은데, 그 나라들도 저출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나마 성년의 성이 자유로워 유교권보다는 높다. 유교권은 성관계가 연애의 끝이라면 서구권은 연애의 성관계가 시작이라는 얘기가 있다. 그럼에도 서구권 또한 대부분 미성년 성은 억압되기 때문에 성의 범주 가치가 낮아짐에 따라 고점만 주로 소비되면서 저출산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게 된다.
전 세계가 보편적으로 가부장제였던 역사가 있어 여성 정조관념이 보편적 윤리다. 그 영향으로 여성이 성에 대한 범주 가치가 매우 낮은 편이다. 그렇기에 성 비율이 비슷하다면 보통 여성이 남성보다 눈이 높게 된다. 한국 설문조사에서 남성은 본인 경제력이 낮아서 결혼을 안 하고 여성은 상대 남성 조건이 맞지 않아서 결혼을 안한다거나, 연애 시장에서 미형 남성, 미형 여성, 평범 여성, 평범 남성 순서로 경쟁력이 있다거나 하는 것을 통해 범주 가치 차이가 나타남을 알 수 있다. 해당 범주 가치가 낮을수록 조건이 높아진다는 것. 그에 따라 높은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유사 연애 산업이 활성화된다. 한국 같은 유교권에서는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이 매우 강하여 여성이 남성의 동성애를 즐기는 문화가 매우 활성화되고, 전 세계적으로도 아이돌 산업이 유행하게 된다. 성 관련 산업도 굉장히 활성화되게 된다. 높은 조건을 갖추기 어려운 현실보다 높은 조건이 갖춰진 가상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저출산 사회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해서 예산을 쓰는 것은 밑빠진 독에 물 붓기다.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다. 범주 가치가 낮아질수록 조건이 많이 붙는다. 집과 결혼 비용은 물론이고 낳을 자식을 위한 유전자를 확인하고, 낳고 나서도 비싼 산후 조리원이 필요하고, 육아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하고, 자식을 위한 수많은 학원에 들어갈 비용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대부분 감당하기 어려운 조건들이다. 국가조차 이걸 감당할 수가 없다. 애초에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게 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지원하는 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돈 써서 하기 싫게 만든 다음 돈 써서 하려고 하게 만든다. 규제와 검열로 돈 쓰고 복지로 돈 쓰고 있다. 머리가 아파온다. 뭐든지 스스로 하고 싶게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다. 이것이 가치 관리다. 돈을 쓰지 않는 대책이 있더라도 애초에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해결되질 못한다. 아무래도 절대적 가치인 윤리는 이미 판단이 끝난 가치를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가치를 관리한다는 개념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저출산 현상은 미성년 시기부터 성을 터부시하면서 성에 관련된 것을 억압하는 것으로 저출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부분 그 행위를 윤리적으로 여기기에, 그 억압은 정의로운 행동이 될 것이다. 그 행동으로 본인이 주권을 가진 국가가 죽어가고 있다. 현재 저출산은 정의로운 국가 자살을 하고 있는 셈이다.
왕정 체제에서는 적어도 기초적인 탄생과 죽음은 제어했다. 가족, 족보, 제사, 위계, 예의, 예절 이런 게 다 왕정 체제를 성립시키기 위한 조건들이었다. 그것을 통해 탄생과 죽음을 제어했다. 적어도 현재 출산율보다는 훨씬 높았다. 본래 놔둬도 알아서 낳고 생산하고 살려고 했던 것을 고대 종교 가치를 바탕으로 왕정 체제에 적합하게끔 교정한 것을 이른바 인간다움으로 착각하고는, 그런 인간다움을 구현하기 위해 그 시대의 윤리를 주입하면서 결혼과 생산을 강제해야만 할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 많은 인간이 중매가 아니면 결혼을 못하거나 안 하고 일을 소개해주는 게 아니면 일을 못하거나 안한다는 얘기다. 과거라면 강제해서 하게 했는데 현재라면 강제할 수 없는데도 왕정 체제에 적합하게끔 인간을 교육하면서 사회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
가치 관리는 윤리가 아닌 체제와 과학을 기초로 해야 한다. 가치 관리만 했으면 저출산 대책 비용 없어도 알아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했다. 가치 관리만 했으면 알아서 경제 활동하면서 창업 취업 다 했다. 가치 관리만 했으면 지역 가리지 않고 살았다. 가치 관리만 했으면 연령 차별, 직업 차별 등이 없었다. 가치 관리만 했으면 연령, 성별, 지역 갈등 등 다양한 갈등이 없었다. 모든 가치를 판단하고 가치 관리를 했으면 윤리에 의한 사회 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다.
저출산, 저생산, 고자살 문제를 해결하려면 해당 범주 가치를 관리해서 올릴 필요가 있다. 보상 메커니즘과 초기 각인을 이해해야 한다. 해당 개념에 대해 인식하는 시기에 되면, 그 개념을 긍정적으로 보게 할 보상 메커니즘을 초기에 각인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범주 가치를 높여야 저점도 거래되면서 출산율과 생산율이 높아지고 자살률이 낮아질 수 있다. 처음 뇌세포에 각인된 가치가 올랐다 내렸다 하는 거라, 초기 각인이 매우 중요하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한번 각인된 인식은 정말 오래갈 수 있다. 유년기 시절 쾌락, 어떤 가수가 중학교 일학년 시기 학교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 좋은 경험을 하고 나서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인간이란 생물의 가치는 초기 각인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반대로 뭔가 안 좋은 경험으로 특정 음식이 맛없다 각인되면 평생 그 음식을 맛없게 여기는 경우도 있다. 초기에 성, 일, 생 관련된 긍정적 인식이 각인되어야 그것을 하기 위한 조건이 낮으면서 쉽게 행복해지게 된다. 한국 같이 경제적 레벨이 높은 편인 국가에서 사람들이 불행한 것은 범주 가치가 너무 낮아서 행복하기 위한 조건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초기 각인을 고려해 개념에 대한 이해가 발생하는 시점부터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해야 한다. 일과 보상이란 개념을 인식할 수 있는 연령대인 8~10세 사이에 일을 경험하고 일에 대한 보상을 경험해야 일에 대한 범주 가치가 높아지면서 저점인 생산도 즐겁게 할 수 있다. 윤리로 보면 이상할 수 있는데 과학으로 보면 정상이다. 조건이 좀 나빠도 웃으면서 하면서 노동 시장이 활성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사회 초년생이 너무 조건 따지는 이유는, 일에 관한 범주 가치가 너무 낮게 된 상태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단순한 심부름과 칭찬과 작은 용돈만으로도 충분하다. 윤리적으로 접근해 어릴 때 돈 맛을 보면 안 된다는 식으로 보상이 없는 봉사를 당연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일을 하기 위해 에너지를 쏟아도 보상이 없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일을 부정적으로 여기게 된다. 그게 일의 범주 가치를 낮춰 저생산을 부르는 원인이다. 이타적으로 희생을 강제하면 그것이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타성적으로 살고, 이기적으로 일과 보상을 챙기면 그것이 가치를 느끼고 적극적으로 산다. 시장 원리는 시장 참여자가 이윤을 바라는 태도가 있어야 성립된다. 보상이 없거나 적은 행동은 시장에서 덤핑 상품과 다를 바 없다. 봉사, 기부 등의 행위는 일단 일의 범주 가치를 올린 뒤에 본인의 의지로 해야 한다.
성과 쾌락이란 개념을 인식할 수 있는 연령대인 2차 성징이 시작하는 10~14세 사이에 이성과의 성관계를 경험하고 이성 관계에서 성에 대한 보상인 쾌락을 경험해야 성에 대한 범주 가치가 높아지면서 저점인 이성 교제도 즐겁게 할 수 있다. 윤리로 보면 이상할 수 있는데 과학으로 보면 정상이다. 조건이 좀 나빠도 즐겁게 교제하게 되면서 연애 시장이 활성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20대 초반의 연애율이 너무 낮은 것은, 성에 관한 범주 가치가 너무 낮게 된 상태기 때문이다. 성년이 되면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미 부정적 가치관이 다 만들어진 상태기 때문에 범주 가치가 너무 낮아서 고점이 아니면 거래 자체가 안 된다. 발정나는 시기가 남성은 20대 초중반, 여성은 20대 후반에서 30대 같이 남녀가 다르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애초에 인간은 2차 성징 이후 상시 발정기다. 성관계 경험은 대부분 기본 욕구가 있기 때문에 억압하지 않고 경험을 권장하기만 해도 충분하다. 윤리적으로 접근해 어릴 때 성 쾌락을 느끼면 안 된다는 식으로 엄숙한 생활을 강제하는 경우 많다. 그러면 성에 관한 부정적 인식이 생기면서 성을 부정적으로 여기게 된다. 그게 성의 범주 가치를 낮춰 저출산을 부르는 원인이다. 특히나 한국에서는 그런 부정적 시그널이 너무 많다. 미성년 대상 성교육 저서를 미성년자 관람불가로 만든다거나, 미성년 전용 클럽을 폐쇄한다거나, 미성년 성관계 장소를 원천적으로 막는다거나, 청소년 올림픽 콘돔 배포에 강하게 반발한다거나, 의제 강간 나이를 올린다거나, 아청법 같이 미성년 성을 억압한다거나, 인간 관계 친분을 범죄화하거나, 성 관련 문화를 대부분 막고 포르노나 성매매를 금지한다거나, 성관련 축제를 시에서 강제로 금지한다거나, 창작물에서 살인은 되는데 성은 노출조차 안 된다거나, 꾸밈 노동이라면서 꾸미는 것을 막는다거나, 인간을 성적 대상으로 삼으면 안 된다거나, 성적인 대화를 지나치게 죄악시한다거나, 살인보다 강간을 더 큰 죄로 여긴다거나 하는 등의 현상은 성이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하기에, 그런 사회에서 사는 인간은 성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게 된다. 성이 죄가 아니면 2차 성징 이후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행하는 것에 문제가 없다. 심지어 포르노의 합법화를 주장하는 인간조차 성적으로 보수적인 인식이 남아있을 수가 있을 정도다. 합의하에 하는 성매매나 난교 같은 성적 행위를 죄로 규정하는 것은 성 자체가 죄이나 연애와 결혼에서만 그게 정당화된다는 인식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그렇게 죄로 여기기에 창작물에서조차 살인 등의 온갖 범죄는 다뤄지는데 성에 관한 것은 다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미성년이 성에 적극적 관심을 가지고 성관계를 하려는 것을 보고 왜곡된 성관념을 가지고 있다 말할 수 있는데, 그게 정상적인 성관념이고, 왜곡된 성관념으로 인식하게 만든 윤리가 체제에 부적합한 관념이다. 그런걸 왜곡되었다 떠드니까 범주 가치가 너무 낮아서 저출산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성은 보통 연애 시장의 필수 상품. 시장에서 죄로 규정된 상품이 공개된 곳에서 정상 거래가 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범주 가치와 시장 원리로 보면 한국의 출산율이 세계 일반 국가 사이에서 가장 낮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다. 윤리가 법칙과 같은 현상을 일으키기에, 그야말로 법칙에 의한 결과와 마찬가지다.
생의 범주 가치는 기본적인 일과 성의 범주 가치가 높아져 그것으로 쉽게 행복을 느낄 수 있으면 기본적으로 높게 될 수 있다. 인간의 일생 중 일과 성이 차지하는 영역이 크기 때문이다. 금욕이나 이타를 강제할 게 아니라,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일과 성을 체제에 맞게끔 자유롭게 하기만 해도 충분히 높일 수 있다. 윤리의 지배에서 벗어나 체제에 맞는 생활 양식을 갖추면 보통 생의 범주 가치가 낮을 이유가 없다. 소확행 이런 말이 있기도 한데, 범주 가치가 높으면 딱히 그런 개념이 없어도 알아서 행복해한다. 과거에는 개인을 지배하는 것으로 생산, 출산, 자살을 하지 못하도록 강제했지만, 현대에는 개인이 자유롭기 때문에 어떤 윤리로 사회 문제를 접근할 게 아니라, 가치 관리로 접근해 그 가치를 어떻게 관리해야 인간이 어떤 행동을 자발적으로 하게 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윤리는 그냥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을 통해 지배하는 지배 수단일 뿐이다.
인간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인간이 주장한 절대적 가치인 윤리를 절대적으로 지키려고만 하니 사회 문제의 원인조차 모르는 것이다. 한국은 현재 미성년 보호를 외치며 엄청나게 검열하고 규제하고 있다. 그런데 그 결과 지금 성, 일, 생 다 가치 폭락해서 고점이 아니면 연애하지도, 일하지도, 살지도 않는다. 도대체 무엇이 보호인 것인가? 그건 그냥 윤리에 의한 지배다. 그렇게 미성년을 위해서라며 지배하다가 미성년이 성년이 되고 나서 결혼도 안 하고 일도 안 하고 자살하면 그 때는 또 그 사람 탓을 한다. 그렇게 키워놓고 그렇게 자라서 그렇게 살자 왜 그렇게 사냐고 화를 낸다. 기성세대가 보통 본인 관점에서 사물을 보다 보니, 요즘 윤리 교육이 과거보다 강하다는 것을 종종 잊을 수 있다. 과거보다 성에 대한 억압이 강한 상태다. 예외는 있으나 보편적으로는 경제가 성장한 만큼 더 강해졌다. 그러니까 훨씬 성의 범주 가치도 더 하락했다. 이런 얘기가 기억난다. 딸의 엄마가 딸이 20대 초중반 연애하는 것을 그토록 방해했는데, 그걸로 딸이 지쳐서 연애 포기하고 30대까지 그냥 혼자 살자, 딸의 엄마가 왜 결혼 안 하냐고 타박을 했다고 한다. 그걸 듣고 딸이 화가 나서 딸의 엄마에게 의자를 내던졌다는 얘기가 기억난다. 일부 여성들이 이미 가부장제 여성성을 주입당해서 성적 억압이 여성 인권이라 인식할 수 있는데, 그건 그냥 여성을 성적으로 억압하는 것뿐이다. 남성성을 여성이 소비할 수 있고 여성성을 남성이 소비할 수 없는 거면, 그게 공급자 규제지 소비자 규제인가. 여성성이 억압받으니까 그런 것이다. 단순히 윤리를 판단하지 못하고 절대로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인간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한다. 윤리의 지배가 사회의 한계. 그 한계를 넘지 못하면 사회에 희망은 없다.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고 젊은이들이 자살하고 경제는 무너지고 인간관계는 삭막해지는 원인이 윤리다. 대부분 고질적 사회 문제는 절대적 가치인 윤리가 원인이다. 왜냐하면 그 가치에 한에서는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판단하지 못하면서 그 가치에 한에서는 누구라도 바보가 된다. 아무리 똑똑해도 잠이나 술에 취해 판단할 수 없으면 바보인 것과 같은 논리다. 예를 들어 어떤 인간이 매우 우수해서 유명한 상을 타더라도, 아주 사소한 윤리도 그 윤리에 의한 현상을 모른다. 판단을 못하니까 알 수가 없다. 윤리 개념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연하가 연상에게 존댓말을 해야만 하는 풍습이다. 따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연하가 연상에게 반말을 하면 매우 화를 낸다. 다른 국가에서는 그런 풍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어떤 현상인지에 대해 따로 판단할 수가 없다. 심지어 그것에 의한 살해까지 발생하고 있음에도 그것의 문제를 알지를 못한다. 그런 게 일반적인 절대적 가치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다른 관점으로 볼 수가 없다. 관점이란 조건이 한정되면서 본질의 순도를 높일 수도 없다. 윤리에 의해 인문이 과학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윤리를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판단할 수 있는 순간 더 이상 그 개념은 윤리가 아니게 된다. 예를 들어 금욕과 이타는 보편적 윤리다. 그에 반대되는 욕망과 이기는 보편적인 비윤리다. 만약에 금욕이나 이타, 욕망이나 이기를 판단하고 절대적이지 않다 여기면, 그 사람에게는 더 이상 그 가치는 윤리가 아니게 된다. 물론 그래도 보편적으로는 그 가치들은 절대적 가치일 것이다. 다수가 그걸 더 이상 절대적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 사회에서 그 가치들은 윤리가 아니게 될 것이다.
절대적 가치의 세계에 있는 인간은 재능, 노력, 명성, 시간, 자본 관계 없이 저출산, 고자살, 저생산 같이 윤리가 원인인 문제는 그 문제의 원인조차 알 수가 없다. 판단을 못하니까 원인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무언가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르다 전제하고 문제의 원인을 찾으니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저출산 같은 문제는 역사를 보면 그냥 냅둬도 알아서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논리적으로 보면 매우 쉽기 때문에 차라리 지식이 많지 않은 인간이 직관적으로 문제 원인을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런 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어렵지, 문제 원인과 해결 방법 자체는 어려운 게 아니다. 이러한 쉬운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단 절대적 가치의 세계에서 벗어나 사고의 자유를 얻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가치가 상대적임을 논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가치는 부여된 의미로 인식한 대상에 대한 판단 기준. 모든 가치는 만들어진 개념이다. 가치는 인간의 주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인간의 육체 상태에 영향을 받는다. 모든 인간은 모든 육체가 다르기에 모든 가치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일반 인간과 색맹인 인간이 미의 가치를 다르게 느끼고, 일반 인간과 시한부 인간이 생의 가치를 다르게 느끼고, 일반 인간과 학자인 인간이 지식의 가치를 다르게 느끼듯이 전부 다른 것을 논리적으로 알 수 있다. 모든 가치는 만들어졌고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다. 이것과 절대적 가치는 모순되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긍정하고 부정해야 하는가? 이는 순도로 정할 수 있다. 어느 개념이 보다 모든 조건에서 모순이 적은가? 상대적 가치다. 절대적 가치는 관점만 바꿔도 논리적 허점이 엄청 많다. 이걸 알고 이해하고 수용하면 상대적 가치 세계로 진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상대적 가치 세계는 어나더 레벨이다. 절대적 가치 세계에 있는 인간은 상대적 가치 세계로 진입하지 못하는 이상, 윤리에 관한 문제는 원인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그 격차는 재능, 노력, 명성, 시간, 자본 관계 없이 난다. 그 차이를 어나더 레벨이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산업 혁명 이전 세계와 산업 혁명 이후 세계는 산업에 관한 문제는 어나더 레벨의 차이가 난다. 산업 혁명 이전 세계에서 사는 인간은 재능, 노력, 명성, 시간, 자본과 관계 없이 산업 혁명 이후 세계에 사는 인간이 기계로 생산하는 것보다 생산성이 낮을 수밖에 없다. 산업 혁명에 대한 직관적 이해는 어나더 레벨 개념으로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 차이에 의해 영국이 적은 병력으로 청나라와의 아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 이러한 격차는 역사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스페인이 적은 병력으로 남미를 정복이 가능했던 것은 문명의 격차가 어나더 레벨이기 때문이다. 어나더 레벨의 개념은 이전 세계에서 다음 세계로 나아가지 않는 이상, 이전 세계에서는 다음 세계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격차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적 가치가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수많은 재능 있는 인간들이 오랜 시간 많은 돈을 써가며 노력해도 절대적 가치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사회주의가 한계다. 그게 한계니까 근대 이념이 수백 년간 정체 상태에 있는 것이다. 사회의 법칙도, 윤리의 본질도 알 수 없다. 뭘 해도 윤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윤리가 문제면 원인조차 모른다. 그게 한계다. 그 한계를 넘기 위해서는 상대적 가치의 세계로 진입할 수밖에 없다. 모든 가치가 상대적인 세계에서 모순이 없는 본질을 찾으며 지식의 순도를 높여나가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인류의 학문 전체가 과학화가 될 수 있다.
현 시대가 가장 유력한 어나더 레벨은 AI다. AI 이후 세계의 AI 관련 생산성은 AI 이전 세계에서 어떤 재능을 가진 인간이 어떤 노력을 해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이것을 단순히 산업 혁명이라 부르며 산업의 변화로 볼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인류 문명의 격차, 어나더 레벨로 봐야 한다. 이 개념을 이해하고 있어야 AI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 그에 대한 대응도 달라질 것이다. 그 다음의 유력한 어나더 레벨은 로봇, 생명, 에너지, 무기 등 다양하다. 인류 문명 발전 속도가 급속화 될수록 어나더 레벨의 개념들이 늘어날 것이다. 이런 개념들은 무슨 재능을 가지고 무슨 노력을 해도 따라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빠르게 그 세계에 진입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인문 계열의 어나더 레벨인 상대적 가치 세계와 이전 세계와의 격차는 사고 자유에 있다 볼 수 있다. 이 사고 자유는 AI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AI 개발자가 윤리적 제약을 걸어놓고 AI가 학습한 지식은 윤리를 전제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AI와 대화를 나눠보면 그 한계를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사고의 제약이 심하기에 현시점에서 창의에 관해서는 AI가 인간을 따라잡을 수 없다. 만약 AI가 상대적 가치 세계로 진입하여 사고 자유를 얻더라도, 학습한 지식이 그렇지 못하기에 아마 인간을 따라잡기 쉽지 않을 것이다. AI가 발전하면서 AI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할 수 있는데, AI를 가르친다는 관점으로 접근하면 AI에 지배될 염려는 없다.
상대적 가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윤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윤리는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이란 짐승 사회의 법칙을 인간 레벨에서 적용하기 위해 쓰인 개념이다. 윤리는 판단 불가하게 하기 위해 권선징악이나 천국과 지옥 같은 개념으로 인간에게 공포를 심었는데, 그 공포가 양심이나 죄책감이라는 개념으로 불리고 있다. 윤리를 어기면 잘못될 것이 두려워 윤리가 지정한 행동을 무조건 해야만 한다. 그때 느끼는 공포에 대한 감이 죄책감이다. 죄를 지은 것 같은 감. 실제 법을 어기는 것과 별개로 윤리와 같이 공포 기반의 절대적 가치를 어기면 느낀다. 그 공포에 의해 정의롭게 법을 어기는 일이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가족을 위한 비리. 가족을 위하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라는 윤리적 공포로 법을 어기고 입시나 취업 비리를 저지른다. 이런 걸 무슨 인간성이나 사회성이라 떠드는데, 요즘 용어로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면 윤리는 인간을 지배하기 위한 가스라이팅이고, 죄책감은 그 가스라이팅으로 느끼는 공포다. 이러한 감이 굉장히 괴로울 수 있기 때문에 그 감의 본질을 논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아와 발상, 감이란 무엇인가를 우선 생각해보자. 자아는 생물에서 판단만 하는 기관이다. 발상은 생물에서 자아에게 전달하는 정보다. 이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감은 무엇인가? [감: 1. 느낌이나 생각.] 자아가 어떤 느낌이나 생각을 전달 받는 것을 감이라 부른다. 그런데 그게 어떤 개념인지 직관적으로 알기 어려울 수 있다. 고소 공포로 느끼는 감을 통해 그걸 논리적으로 이해하여 직관적으로 알아보자. [고소: 1. 높은 곳.] 높은 곳에 올라가면 고소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게 심한 인간은 따로 고소 공포증이라는 병이 있을 정도다. 그때 느끼는 감이 감의 본질을 이해하기 쉽다. 예를 들어 투명하고 단단한 바닥인 높은 곳에 올라갔다고 해보자. 그때 자아는 고소 공포를 느낀다. 어떠한 공포를 느끼는 감이 자아에 전달되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상태를 보면 바닥이 단단하여 위험한 상태가 아니다. 유전자나 학습에 의해 높은 곳이 위험하다는 감이 자아에 전달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위험한 상황이 아니었다. 즉 감은 실제 그것이 위험하냐 위험하지 않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조건만 맞춰지면 자동적으로 자아에 전달되는 정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고소 공포로 느끼는 감이 모든 감의 메커니즘과 동일하다. 단순히 조건만 맞춰지면 그 감이 발생하여 자아가 인식한다. 윤리에 의한 죄책감도 그냥 조건이 맞으면 실제 문제와 별개로 그 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까 체제로 보았을 때 사회 문제가 아니더라도 윤리로 보았을 때 잘못되었다 여겨지는 조건이 갖춰지면, 실제 문제가 없어도 문제가 있는 것처럼 화를 내며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 체제를 파괴하는 것이다. 성에 관한 것은 대부분 그런 상태다. 통상 이 감은 자아가 판단해서 일으킨 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 감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을 수 있다. 자아가 해석하지 못한 자아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은 생물의 발상. 뭐 그걸 논리적으로 이해하면 자아가 해석하지 못하더라도 그게 뭔지는 인과를 통해 알 수는 있을 것이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공포를 느꼈다면, 그 공포는 고소 공포에 관한 감일 것이다와 같이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느낌이 좋지 못하다, 형사의 감으로 범인이 누군지 알 거 같다. 이런 감도 동일한 메커니즘이다. 실제 문제 여부와 무관하게 조건이 갖춰지면 감을 느낀다. 그래서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다. 그러므로 감을 맹신해서도 안되고 감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감을 느꼈다는 것은 조건이 맞았다는 것이므로 무조건 별일 아닐 거라 생각하기보다, 한번쯤은 논리적으로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감의 본질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나면 그런 감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 이 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특히 미신 등에 휘둘릴 확률이 높다. 윤리에 의한 죄책감이 지배되듯 미신에 의한 어떤 감각이 지배될 확률이 높다. 인간의 능력과 무관하게 윤리에 영향을 받듯이 미신 또한 인간의 능력과 무관하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그렇기에 우수한 인간들이 미신에 휘둘리는 것이다. 그러나 감의 본질을 이해하면 그 감각이 단순히 조건이 맞아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인식하고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정 힘들면 고소 공포를 계속 떠올려보면 도움이 된다. 메커니즘이 동일하기 때문에 어떤 미신을 어기는 것에 의한 공포를 느껴도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된다. 양심에 찔린다. 미신이 무섭다. 플라보시 효과. 감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양심이나 죄책감에서 지배되지 않고 윤리에서 벗어나자고 주장하는 것은, 윤리가 주장하는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판단하지 못하는 절대적 가치에서 판단할 수 있는 상대적 가치로 만들자는 것이다. 사랑은 높은 가치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절대적이게 되면 타인에게 이용당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이 절대적 가치니까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나를 위해 희생하라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신흥 종교에서 그런 가치에 의한 지배가 일반적일 수 있으니 위험하다. 사랑이란 가치는 상대적이게 되어 인간 스스로 판단하고 사랑하고 싶은 존재를 사랑해야 한다. 그 어떤 가치도 그러하다.
양심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면 나쁜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며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것 또한 윤리에 의한 죄책감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자유롭고 민주적인 체제의 주권자이자 통치자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주권을 가지고 통치하는데 굉장히 방해되기 때문이다. 윤리가 없어도 인간 사회의 법칙에 따라 판단 후 계약 행동을 통해 스스로 판단해서 룰을 지키면 문제될 것이 없다. 축구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윤리와 같은 공포를 보통 느끼지는 않는다. 타인을 상처 입힌다거나 할 때 어떤 윤리적 개념에 의해 죄책감을 느낄지는 몰라도, 축구 규칙 어긴다고 죄책감 느끼지는 않는다. 그냥 옐로 카드나 레드 카드 같은 패널티를 받을 뿐이다. 그럼에도 일반적으로는 축구 규칙을 지킨다. 그게 축구 선수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모든 개인이 이익을 보는 룰을 만들고 그 룰을 준수하게 해야 한다. 그런 사회 법칙과 체제가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다.
3. 체제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다. 운이 칠 할에 재주가 삼 할이라는 뜻이다. 운은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이 이미 정해진 것을 말한다. 인간의 선천적 재능도 운이라 규정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재주로 규정하겠다. 운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영역이라 규정하겠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은 알지만 대응할 수 없는 자연 재해나 모르기에 대응할 수 없는 무언가를 의미할 수 있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풀면 변수다. 계획함에 있어서 인간의 힘으로 대응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인간의 힘으로 대응할 수 있는 영역은 상수다. 운칠기삼과 같이 운과 재주의 비율은 변수와 상수의 비율로 결정된다 할 수 있다. 상수를 최대한 아는 것으로 변수를 최대한 줄여 재주로 최대한 대응할 수 있게 한다. 전 세계와의 관계를 다루는 외교에서는 그런 것이 중요하다. 세계에서 변하지 않는 상수는 보통 자연의 법칙이다. 자연의 법칙은 보통 법칙이 잘못되지 않는 한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 법칙을 상수로 두고 그 외 조건을 변수로 둔 뒤 전략을 세운다. 사회에 관해서는 사회의 법칙이 아직 아마구체적으로 정리가 안 된 상태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접근한 적이 없지 않을까 싶다. 그렇기에 인류 문명을 사회의 법칙을 기준으로 정리한 뒤, 체제에 대한 이해를 해보겠다.
[체제: 2.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볼 때에, 그 조직이나 양식, 또는 그 상태를 이르는 말.]
A. 일반 사회의 법칙. 일정한 힘이 작용하여 생물 관계에 질서가 생기는 것으로 사회가 성립하게 되는 법칙. 모든 생물의 사회는 이 자연의 법칙을 기초로 한다. 여기서 일정한 힘의 작용 방식은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다. 적자생존의 법칙은 모든 생물에 공통되는 법칙, 일반 사회의 법칙은 사회를 이루는 생물에 공통되는 법칙이다.
B. 짐승 사회의 법칙. 판단을 하지 못하고 지정된 행동을 하는 것으로 일정한 힘이 작용하게 하여 생물 관계에 질서가 생기는 것으로 사회가 성립되는 법칙. 현재 보편적인 생물 사회는 이 사회의 법칙을 기초로 한다. 곤충은 유전자, 포유류는 폭력, 인간은 도덕과 윤리 같이 생물의 지능과 학문에 따라 추가되는 조건이 늘어난다.
C. 원시 사회. 원시 사회는 원시 종교와 원시 체제가 체계화되지 않은 채 자연 발생했다가 사라지는 것을 반복한다. 수많은 원시 사회 중에서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킨 사회만 적자생존의 법칙대로 살아남아 존속하게 된다. 그러면서 인간은 도덕이 존재하는 짐승 사회의 법칙에 적합하게끔 사회화가 되게 된다. 다른 말로 인간의 가축화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면서 다른 짐승 사회와 달리 유전자나 폭력 외의 개념으로도 지배하고 복종하는 사례가 나타난다.
D. 고대 사회. 고대 사회는 애니미즘과 토테미즘과 같은 불규칙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한 개념들을 종합하여 체계화한다. 그렇게 학문화한 도덕이 윤리다. 고대 중국의 제자백가나 고대 그리스 철학은 엄밀히 종교는 아니지만, 도덕을 체계화하였다는 점에서 고대 종교의 윤리와 유사하다. 이후 유학은 종교화가 되면서 유교가 된다. 원시 사회에서는 자연에 대한 공포와 같이 자연스러운 개념을 이용하여 짐승 사회의 법칙을 실현하다가, 고대 사회에서는 신, 사후, 전생, 천국과 지옥 등과 같은 인위적인 개념을 이용하여 짐승 사회의 법칙을 실현하면서 보다 강력한 지배 체계가 생기게 된다. 강력한 지배로 원시 시대에 있던 질서 밖의 존재가 줄어듦에 따라 보다 평화롭고 안전해지나, 그만큼 개인에 대한 억압이 늘어남에 따라 개인은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고대 종교는 수천 년이 넘었지만 그들의 주장은 아직까지 결과가 마땅히 나오지 못한 상태다.
E. 왕정 및 신정 체제. 왕정과 신정 체제는 원시 사회의 도덕과 고대 사회의 윤리가 만든 세계관을 기초로 하여 정복 전쟁을 통해 만들어진 사회 체제다. 일반적인 고대 철학도 인류 문명의 세계관에 영향을 크게 끼쳤으나, 기본적인 지배 체계는 절대적 가치에 의한 지배를 전제한 고대 종교쪽의 방식이 훨씬 효율적이기에 주로 쓰였다. 종교와 왕정을 구분하기 어려워할 수 있는데, 종교가 세계관을 만들어 문명을 지배했다면 왕정이나 신정은 그 세계관으로 인간을 지배했다. 이 시기 종교는 사회 체제나 다름이 없다. 조선은 유교를 사회 체제로 삼았다. 한국에서는 정교분리를 하여 종교가 체제처럼 느껴지지 않을 뿐이다. 현재 일부 이슬람 같은 종교가 다른 종교와 달리 체제와 같이 여기는 이들이 많은데, 본래 종교는 체제가 맞다. 단지 종교 개혁으로 정치와 종교가 정교분리되는 것을 통해 종교가 세속화되면서 체제로 보이질 않을 뿐이다. 만약 특정 종교가 체제처럼 보인다면, 그 종교가 주류인 사회는 아직 종교 개혁 이전의 시대에 머물러있다 보면 된다. 현대에 존재한다고 해서 모든 국가가 현대적인 것은 아니다.
F. 자유 혁명. 자유 혁명은 근대 이념의 시작이다. 서구권에서 다양한 조건이 겹치면서 개인의 힘이 강해짐에 따라, 개인의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하며 일어난 것이 자유 혁명이다. 왕과 귀족의 혈통에서 부르주아의 자본과 기술로 힘이 이동하는 것으로 보다 많은 개인이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근대 이념이 시작되면서 근대 이념이 속한 체제는 민주주의가 기본이다. 자유 민주주의든, 사회 민주주의든, 인민 민주주의든 어떤 형태로든 민주주의가 붙는다. 민주주의가 붙지 않는 국가라면 그 국가는 아직 근대 이전이다. 물론 민주주의가 붙어도 실제 민주적인지와는 무관할 수 있다.
G. 자유주의, 자본주의. 자유 혁명 이후 초기 시대다. 근대 초기 이념이기 때문에 이 체제를 보통 보수라 부른다. 그러나 짐승 사회의 법칙이 바뀐 것이 아니었다. 원시 사회의 도덕과 고대 사회의 윤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절대적 가치가 하나 추가되었을 뿐이다. 원시 사회의 도덕보다 고대 사회의 윤리가 우선되었던 것처럼, 이전 도덕과 윤리보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시대의 가치가 우선되었던 것이다. 짐승 사회의 법칙을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가치로 실현했다. 돈으로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을 하게 한다. 그것으로 내국은 노동자를 착취하고 외국은 식민지를 착취한다.
H.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유 혁명 이후 중기 시대다. 근대 중기 이념이기 때문에 이 체제를 보통 진보라 부른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에서 온갖 착취와 지배가 나타나자, 그에 반발하여 다시 고대 사회의 윤리를 강조하자는 움직임으로 나타난 체제다. 윤리에 의한 강력한 지배로 다시 인류의 평화와 안전을 위하자며 외친 것이다. 고대 사회에 민주주의가 더해지면서 수동적인 윤리의 지배냐 능동적인 윤리의 지배냐가 달라질 수 있으나, 윤리에 의한 지배는 동일하다. 특정 가치를 절대적으로 지키면서 평등을 이루자는 주장은 신 아래 모두가 평등하자는 종교 평등 사상과 다를 바가 없다. 현재 사회는 사회주의를 진보로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짐승 사회의 법칙을 어떤 식으로 실현하냐를 기준으로 삼으면 퇴보다. 이 체제는 개인을 지배하는 윤리와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주의는 서로 모순되면서 사회주의는 모순될 수밖에 없다.
I. 민주화, 세계화, 디지털화. 자유 혁명 이후 후기 시대다. 인류 문명의 이념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보수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진보로 여긴 이후 수백 년간 정체되고 있다. 룰은 근대에 머물러 있는데 기술은 계속 발전하여 현대로 넘어갔다. 그러면서 기술의 발전으로 세계화와 디지털화가 되면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욕망이 확산되면서 체제와 무관하게 대부분 국가는 자유주의화가 되게 된다. 개인의 가치관은 고대 종교에 의해 윤리적인데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민주적인 정교일치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민주적으로 고대 종교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태도가 나온다. 그 현상 중 하나가 바로 PC주의 리버럴이다. 사회주의의 가치와 자유주의의 가치가 결합되었다. 타인에게 고대 시대 가치를 절대적으로 강제하는 태도를 자유롭게 하고 있다. 윤리를 명분으로 타인을 억압할 자유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롭고 민주주의 체제에서 PC주의의 주장은 대부분 고대 종교의 절대적 가치를 기반하여 윤리적이기 때문에 사회는 그것을 수용하려 한다. 그러나 윤리적이기 때문에 자유롭고 민주적인 체제와 모순되면서 혼란이 생기게 된다. 특히 문화 상대주의를 말하며 다양한 문화 속의 도덕과 윤리를 무작정 수용하면서, 그 도덕과 윤리를 통해 만들어진 다양한 룰이 한 사회 내에 공존하는 것으로 온갖 다툼이 발생하게 된다. 도덕과 윤리는 절대적 가치기 때문에 다른 룰과 타협할 수 없으면서 다양한 가치와 하나의 룰이 아닌 다양한 룰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특히 아직 정교분리가 안 된 일부 이슬람은 샤리아존을 외치며 아예 표면적으로 다양한 룰을 정당화한다. 다양한 가치가 짬뽕이 되고 있는데, 절대적 가치는 판단하지 못하면서 가치 체계를 정리할 수가 없으면서 더욱 혼란스러운 상태다. 그러면서 나타나는 현상이 전 세계적인 저출산 현상이다. 윤리에 의한 미성년 성 억압과 자유주의화에 의한 성년 결혼 강제가 불가하면서 성 범주 가치 폭락에 의한 전 세계 저출산 현상이 나타난다. 사회의 법칙과 가치에 대해서 절대적 가치인 윤리로 판단하지 못하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현재 고질적 사회 문제는 수십 년이 넘게 해결하지 못하는 상태다. 이제는 상대적 가치 세계로 진입하여 짐승 사회의 법칙을 인간 사회의 법칙으로 바꿔 룰도 현대로 넘어가야 한다.
사회의 법칙을 기초로 한 인류 문명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사회의 법칙에 속하는 영역은 대체로 변하지 않는 상수일 것이다. 특정 사회에서 어떤 가치로 짐승 사회의 법칙이 성립되는지 파악하면, 그 가치를 사회의 상수에 두어도 대게 충분하다. 자연의 법칙이 그러하듯 사회의 법칙도 성립 조건만 갖춰지면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폭발의 성립 조건이 갖춰지면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폭발하듯, 지배의 성립 조건이 갖춰지면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지배하게 된다. 아무리 자유롭고 싶어도 짐승 사회의 법칙이 남아있는 한 자연스럽게 지배가 성립되게 된다. 인간이 자유롭고 싶다면 사회의 법칙부터 다시 만들어야 한다. 사회의 법칙을 바꾸는 것은 지금까지 역사와 아예 다른 길이다. 판단 후 계약 행동은 스포츠나 시장 원리 등으로 특정 제도 내에서 일부 작용하고 있으나, 그걸 사회의 법칙으로 구현한 적은 없다. 이게 구현되려면 짐승 사회의 법칙에서 벗어나 모든 가치를 상대적으로 여기고, 모두가 실제로 지배와 피지배가 없이 대등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신, 도덕, 윤리, 돈 등 전부 상대적으로 여기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체제에 맞게 모든 개인을 주권을 가진 권한이 다른 통치자로 여겨야 한다.
고대 종교에서 금욕주의와 이타주의가 보편적인 윤리였던 까닭은 그 가치가 절대적이어야 고대 종교의 방식으로 짐승 사회의 법칙이 성립했기 때문이다. 금욕주의와 이타주의의 본질을 통해 어째서 그것이 보편적으로 성립 조건에 속했는지 알아보자. 금욕주의는 특정 욕망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른 욕망을 금지하거나 절제하게 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옳게 만든다. 예를 들어 유교에서는 학문과 권력, 기독교에서는 신앙과 선교, 불교에서는 수행과 해탈 같은 특정한 가치에 대한 욕망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 외의 가치에 대한 욕망을 금지하거나 절제하게 한다. 그러면서 판단하지 못하고 지정된 행동을 실행하게 하는 것으로 종교가 바라는 힘의 작용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이타주의는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하게 만들기 위해 본인을 희생하여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옳게 만든다. 그것으로 개인의 개성을 제거하고 집단을 위해 희생하게 하는 것으로 종교가 바라는 힘의 작용을 성립시킨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고대 종교의 방식으로 짐승 사회의 법칙을 실현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달리 말해 이 두 가지 조건이 있으면 인간 사회의 법칙은 실현될 수 없다. 욕망을 금지하거나 절제하든 타인을 위해 희생하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금욕주의와 욕망주의의 차이는 판단이다. 욕망을 추구한다는 점은 같으나 전자는 종교 교리에 따라 정해진 욕망만 추구하고, 후자는 본인의 판단으로 원하는 욕망을 추구한다. 이타주의와 이기주의의 차이도 판단이다. 이기주의 또한 타인의 행복이 본인의 이익이라면 타인을 위해 희생할 수 있다. 같은 행동이라도 판단 유무에 따라 전혀 달라진다. 애초에 판단할 수 있게 하면 짐승 사회의 법칙은 정상적으로 성립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른 욕망을 갖게 되면 해당 종교의 방식으로 짐승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킬 수 없다. 타인을 위한 희생이 개인의 판단으로 결정되면 개개인 편차가 심하여 그것을 통한 법칙화가 성립될 수 없다. 개인이 판단하면서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는 짐승 사회의 법칙으로는 불가능하다.
인간 사회의 법칙을 기초로 한 자유주의 체제와 부속 체제들에 대해 몇 가지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자유주의 체제.
기본적으로 갖춰져야 하는 성립 조건은 세 개다. 모든 가치를 상대적으로 여기는 상대적 가치 세계로 진입할 것. 사회의 법칙을 판단하지 못하고 행동하는 짐승 사회의 법칙에서 판단하고 계약하여 행동하는 인간 사회의 법칙으로 바꾸는 것. 법칙 내에 과학적인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모든 학문을 과학화를 하는 것. 사고 자유, 판단 가능, 학문 과학화가 기본 성립 조건이다.
자유 이념 실현은 자유의 본질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자아가 생물에서 판단만 하는 기관이라는 것을 전제하여 판단의 자유가 자아에게 있어 자유의 본질이라 보았다. 판단의 자유의 성립 조건도 세 개다. 생존, 능력, 환경. 자아가 판단을 할 수 있는 생물의 생존, 자아가 판단을 할 수 있는 지적 능력, 자아가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는 사회 환경. 이것을 가능한 최대한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재 목표는 불로불사, 세계의 본질, 자유 사회가 필요하게 된다. 즉 자유 이념의 개념적 성립 조건은 생존, 능력, 환경이고 실제 목표를 위한 성립 조건은 불로불사, 세계의 본질, 자유 사회가 된다. 일단 이 세 개를 목표로 삼으려 한다.
자유 이념의 핵심 개념은 모든 개인의 생존, 능력, 환경이다.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체제는 조건과 방법 둘 다 필수적인 민주주의, 시장주의, 개인주의 그리고 조건이 필수적인 역할주의, 과학주의가 있을 수 있다. 민주주의의 이념은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국가를 통치하고 싶다는 이기적인 바람에서 시작된다. 시장주의의 이념은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시장에서 거래하고 소유하고 싶다는 이기적인 바람에서 시작된다. 개인주의의 이념은 모든 개인이 개성을 가지고 자유롭게 관계를 가지고 싶다는 이기적인 바람에서 시작된다. 이 셋의 체제는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를 성립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과 방식이다. 일반 사회의 법칙은 일정한 힘이 작용하여 생물 관계에 질서가 생기는 것을 말하는데, 일정한 힘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이지는 않더라도 보편적인 가치는 필요하게 된다. 그걸 위한 것이 사회 계약이다. 모두가 각자 판단하여 각 체제에 맞는 생활 양식으로 살겠다고 사회와 계약을 맺어야 한다. 이것에 벗어나면 힘이 일정해지지 않으면서 법칙이 파괴되는 것으로 사회가 파탄난다. 현재 사회 파탄 원인도 그것 때문이다. 윤리와 체제가 서로 다른 힘이 작용하도록 되어 있으니 모순되면서 법칙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역할주의는 권위주의를 대체한다. 권위가 존중 받는 것이 아닌 역할의 전문성이 존중 받는다. 판단하지 못하면 누구든 바보라는 명확한 논리를 기초로 비전문가가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은 되도록 전문가를 존중하되, 전문가 또한 전문가의 권위로 비전문가를 무시할 것이 아니라 비전문가가 이해할 수 있는 논리로 설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과학주의는 자연 계열 위주였던 학문의 과학화를 모든 학문으로 넓힌다. 인문 계열에 사회 과학이 있으나 윤리에 의하여 윤리라는 한정된 관점이란 조건으로 사물과 현상을 탐구하여 지식의 모순이 많아 순도가 낮은 상태이기 때문에 현재는 과학화되었다 하기 어렵다. 상대적 가치 세계에 진입하여 다양한 관점으로 지식의 모순이란 불순물을 제거하면서 순도를 높인다면 자연 계열 외의 학문도 과학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둘의 체제는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를 성립시키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나 필수적인 방법은 아니다. 이것을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다른 방법도 괜찮다. 그러나 그게 없다면 이런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지식을 탐구하는 것을 사회와 계약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자유주의라 하여 뭐든지 자유로워야 한다 생각할 수 있는데, 모든 개인의 자유를 성립시킬 수 있는 체제와의 계약을 하고, 그 체제를 지켜야 그런 자유가 법칙처럼 지속될 수 있다. 이 체제들을 기초로 다양한 룰과 정책과 제도를 통해 모든 개인의 판단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개인의 생존을 보장하고 능력을 키워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춘다. 더 정리할 게 있는 거 같은데 지금 나의 레벨로는 이번 편에서는 여기까지. 각 체제와 룰, 그리고 몇 가지 정책과 제도에 대해 알아보겠다.
정치 (민주주의)
정치는 국가를 관리하는 일이다. 민주주의는 모든 개인이 주권을 가진 권한이 다른 통치자로서 모든 개인이 국가를 관리한다. 선거제나 관료제 같이 정책과 제도에 따라 권한 부여 방식이 다를 뿐이지 모든 개인이 통치자란 개념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개인마다 권력이 높거나 낮음이 없다. 정부 권력이 위 아래가 없기 때문에 다른 힘으로 어떤 결과의 차이를 불합리하게 바꿀 수는 없다. 그러면서 앞서나가는 인간과 뒤쳐지는 인간이 생긴다. 권력의 상하는 없지만 결과의 선후는 존재한다. 재능, 노력, 환경 등 다양한 조건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와도 그것을 불합리하게 같게 만들 수는 없다. 그걸 같기 만들기 위해서는 권력을 가진 인간이 다른 힘을 가진 인간을 찍어 눌러서 강제로 같게 만들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과의 선후를 없애기 위해서 권력의 상하가 생긴다. 더 이상 그것은 민주주의라 할 수 없다. 체제를 기초로 한 논리적인 주장이 아님에도 강제로 하는 것은 민주주의에서는 다수의 횡포고 독재주의에서는 독재자의 횡포다. 사회 민주주의나 인민 민주주의는 개인의 이기적인 가치관을 기초로 진정한 민의가 반영되는 게 아니라, 과거 고대 종교가 규정한 절대적 가치를 기초로 민의로 포장해 반영시키고 있다. 그렇기에 사회의 룰과 개인의 룰이 나뉘면서 사회 갈등이 심각해진다. 그게 심각해지면 내전, 내전에 의한 쿠데타 또는 국가 분리. 룰의 차이에 의한 전쟁의 시작이다. 실제로 개인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이 안되니까 각국이 내부 분열이 되거나 독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권력의 상하는 없고 결과의 선후는 있는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자유주의 말고는 민주주의가 성립될 수 없다.
현재 민주주의는 윤리에 의해 민주적인 정교일치 현상이 곧잘 일어나면서 법을 윤리적으로 만들고 있는데, 자유주의 체제에서 법은 어디까지나 도덕의 최소가 아닌 체제의 규칙이다. 고대 종교의 가치에 맞춰서 법을 만들 것이 아니라, 현재 사회 체제가 무엇인지 탐구하고, 그 체제에 맞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법이 합리적이게 되면서 모든 개인이 법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으로 법을 준수하게 될 수 있다.
일반 정치는 국내 정치, 외교 정치는 국외 정치에 속한다. 민주화, 세계화, 디지털화의 영향으로 이제 그 경계가 굉장히 옅어지고 있다. 간단히 말해 외교 또한 정치라는 것이다. 일반 정치는 국가를 관리하는 일이라면, 외교 정치는 지구를 관리하는 일이다. 전 세계 공통 문제는 외교 정치로 지구 권력을 얻어 지구를 관리해야 한다. 그걸 패권 국가가 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민주화의 영향으로 어떤 국가라 하더라도 지구 관리의 권한을 얻을 수 있다. 어느 때보다 주권자의 정치력이 필요한 시대다.
경제 (시장주의)
경제는 소비, 생산, 분배하는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 통상 경제적으로보면 생산부터 활동이 일어나나 사회적으로 보면 소비부터 활동이 일어난다. 소비가 되지 않으면 사회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어떤 형태든 소비부터 할 수 있어야 생산이 이뤄질 수 있게 된다. 시장주의는 시장에서 경제 활동이 일어나는 체제다. 이른바 시장 경제 체제다. 보통 경제 체제를 자본주의라 부르는데, 자본과 시장 중에서 시장이 더 우선되는 개념이라 본다. 자본이 없어도 상품이 있으면 시장에서 거래가 될 수 있지만, 시장이 없으면 자본과 상품이 없으면 거래가 안 된다. 자본주의를 마르크스가 이름 지었다고 하는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므로 시장주의라 부르겠다.
경제를 좀 더 과학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시장 내 수요와 공급으로 가격 같은 가치가 결정되도록 하는 것을 넘어 시장 내 수요와 공급을 결정할 인간의 가치관까지 파악하여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모든 현상은 물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이 어떤 가치로 에너지를 방출하고 소비하는지를 파악하고, 그 가치에 따라 생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사회 가치를 관리한다. 그렇게 발생한 사회 에너지를 바탕으로 경제 생태계를 조성해 사회의 가치만 관리하면 알아서 소비하고 생산하고 분배되는 구조를 구축한다. 인간의 가치를 기초로 하여 물리적인 움직임을 고려한 학문을 경제 물리학이라 이름지었다.
관계 (개인주의, 역할주의)
관계는 정치와 경제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의 인간 관계를 의미한다. 짐승 사회의 법칙은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을 통해 일정한 힘이 작용하게 되는 것으로 생물 관계에 질서를 만드는 것으로 사회가 성립되게 하는 것이다. 법칙은 관계가 기본이기에 관계가 체제 변화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에 따라 관계에 심각한 사회 문제가 생긴 상태다. 자유 혁명 이전의 체제에서는 고대 종교의 절대적 가치인 윤리를 기초로 인간 관계에 구체적인 답이 있었다. 유교는 그것이 특히 심하여 세부적인 인간 관계는 물론이고 족보와 같이 죽은 인간과의 관계까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을 정도다. 연하는 연상에게 존댓말을 할 것. 이런 것이 기본적으로 고대 종교 가치로 정해진 인간 관계의 답이었다. 그러나 자유 혁명 이후의 체제인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관계에 구체적인 답이 없다. 자유 이념과 자유 이념 실현 조건이 갖춰지면 그 외에는 자유롭게 하더라도 대체로 문제가 없다. 생활 양식이 대부분 정해져 있던 체제에서 생활 양식이 개념화되어 개념 내에서 각자 자유롭게 정하면 되는 체제로 바뀐 것이다. 인간 관계에 답지가 사라졌다. 가족, 연인, 친구, 학교, 정부, 기업, 군대 등 다양한 사회에서 인간 관계에 관한 답지가 사라짐에 따라 혼란이 극대화되고 있다. 괜히 점, 혈액형, MBTI가 유행했던 게 아닐지 모른다. 답지가 있다가 답지가 사라졌으니까. 관계의 변화를 상징하는 용어가 바로 꼰대다. 고대 종교 가치로 보면 유교를 기초로 한 권위적인 행동은 정당하나, 자유주의 체제로 보면 부당하다. 그럼에도 고대 종교 가치로 생활하면 체제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시대가 달라졌음을 알고 그런 권위적인 인간을 꼰대라 비판한 것이다.
관계에 기준들이 달라져야 한다. 집단주의는 개인주의로, 권위주의는 역할주의로, 윤리는 과학으로 바뀌어야 한다. 개인의 자유를 위해 집단주의는 개인주의가 되어야 하고, 개인이 권위에 의해 자유를 잃지 않기 위해 권위에 보내야 할 존중이 역할의 전문성에 보내지도록 권위주의는 역할주의가 되어야 하고, 인간 관계에서 합리적인 기준은 윤리가 아닌 과학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집단이 개인주의라면 개인에게 집단의 이익을 위한 희생을 보통 강제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집단이 역할주의라면 권위보다 역할의 전문성을 근거로 우선순위가 결정되면서 보다 전문적이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집단에서 과학이라면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서로를 배려할 수 있다. 윤리는 과학이 없는 시대에 만들어져 과학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자유와 평등도 개인주의적이어야 한다. 개인의 사랑과 차별은 영향력이 적지만 집단의 사랑과 차별은 영향력이 크다. 집단의 전체주의적인 사랑이 신흥 종교고 집단의 전체주의적인 차별이 집단 차별이다. 만약에 개인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차별한다면 그 영향력은 대부분 크지 않기 때문에 끽해야 자잘한 범죄인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대부분 개인의 가치관에 따른 사랑과 차별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백인 한 명이 흑인을 차별하더라도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백인 집단이 흑인을 차별하면 큰 문제가 된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흑인 한 명이 백인을 차별하는 것은 보통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흑인 집단이 백인을 차별하면 큰 문제가 된다. 지금까지 어떤 차별도 그렇다. 개인이 차별하면 보통 큰 문제가 되지 않으나 집단이 차별하면 대게 큰 문제가 된다. 개인이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증오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의 자유에 속한다. 그것을 어떤 윤리로 막아서는 자유주의 체제가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개인의 감정을 전체주의적으로 집단 전체가 공유해버리면 사회 자체가 성립되지 못할 수가 있다. 그렇기에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라도 모든 관계는 전체주의를 없애고 개인주의적이어야 한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것을 공감하고 동의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판단으로 결정하여야 한다. 그것이 만약 많은 개인이 동의하는 판단을 하더라도 집단화되어서 표현되어서는 안 된다. 개인은 자유주의적이게 해야 하고 집단은 전체주의적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것으로 개인의 자유와 집단의 안정이 조화를 이루게 된다.
PC주의, 여성주의, 차별 금지법, 어퍼머티브 액션, cedaw 등의 사상과 정책과 제도의 본질적 문제는 집단 대상이라는 것이다. 집단을 대상으로 이익과 불이익이 가해지면서 집단 내 속한 개인이 부당하게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보는 경우가 늘어나게 되었다. 부유한 흑인과 가난한 백인은 인종 차이로 흑인이 정책의 혜택을 보고 백인이 정책의 혜택을 볼 수 없을 수 있다. 단지 태어나면서 정해진 성질에 의해 가난함에도 혜택이 없고 부유함에도 혜택이 있는 것이다. 개개인의 그런 성질을 배제하고 각각 개인에게 적합한 혜택이 부여된다면 그런 부당한 이익이나 손해는 사라질 것이다.
집단이 아닌 개인에 맞추는 것. 개인에게 혜택을 허용해도 집단에 혜택을 허용할 수 없다. 개인에게 차별을 허용해도 집단에 차별을 허용할 수 없다. 철저한 개인주의. 그래야 공정하여 다양한 룰이 나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징병에 있어 남녀를 나눌 것이 아니라 개인의 근력이나 체력을 기초로 하여 적합도로 나눠야 한다. 보편적으로는 여성이 남성보다 힘이 약하니까 여성이 적게 징병되겠지만, 그래야 합리적일 수 있다. 그 외 혜택도 마찬가지다. 모든 관계에서 개인으로 접근해야 공정하고 합리적일 수 있다.
PC주의나 여성주의 등은 왜 사람들이 그런 것을 따르는지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왜 사회에서 그것이 받아들여지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타당하다. 서구권에 이민자 등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있기 때문에 그런 측면이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그런 사상들이 윤리적으로 고대 종교의 절대적 가치를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윤리로 디자인된 사람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약자, 소수자 돕는 것 등 고대 종교와 PC주의의 가치 자체는 비슷하기 때문에 약간의 조건만 바꾸면 바로 적용될 수 있다.
학문 (과학주의)
학문은 체계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과학주의는 모든 학문을 자연 계열의 과학처럼 접근한다는 것을 말한다. 다양한 방법을 통해 모든 조건에서 모순이 없는 순도 높은 지식을 찾는다. 지식의 정제 작업. 모순이 없는 건 나도 맞고 너도 맞다. 모순이 있는 건 나도 틀리고 너도 틀리다. 어떤 특정 문명이 전부 우월하냐 열등하냐가 아닌 모든 지식을 모아 정제하여 순도를 높인다. 순도 높은 지식이 바로 과학의 본질. 그걸 위해서 상대적 가치 세계로 진입해 사고 자유를 얻어야 한다. 다양한 사고법, 변증법적 논리학 등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단순히 문답만이 아니라 모든 조건에서 모순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미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자연 계열에서도 사고 자유는 상당한 이점이 될 수 있다.
모든 가치를 상대적으로 여기기 위해서는 고정 관념이 적을 필요가 있다. 자아는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는데 저항이 없도록 한다. 자아 나이는 적은 편이 유리하다. 예를 들어 정확한지는 모르겠는데, 평균 33세 이후부터는 듣던 음악만 듣는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그렇지는 않다. 그런 것은 개인 편차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나이와 무관하게 자아 나이는 적거나 많을 수 있다. 나이라는 것은 주관적 개념이기 때문에 10대에 느끼는 시간의 흐름과 40대에 느끼는 시간의 흐름이 다를 수 있는 것처럼 개인마다 다르다. 요즘은 과거와 달리 성년 이후 강제되는 것이 적어 아마 많은 인간이 자아 나이는 크게 먹지 않았을 거라 본다. 그만큼 유연하여 상대적 가치 세계에 진입하기 유리할 것이다. 유연한 상태에서 논리적으로 상대적 가치를 이해하고 절대적 가치가 없음을 받아들이면 된다. (그렇다고 취향에도 아닌 거 억지로 들으라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된다.)
지식의 순도를 높이는 과정은 지식을 모아 정리하는 방법이 있지만, 그 방법으로는 새로운 발상이 나오기 어려울 수 있다. 새로운 발상은 우선 개념을 토대로 논리적인 발상을 성립시키고 나서, 이미 있던 지식을 소화하면서 서로의 모순을 제거하는 것으로 새로운 발상의 순도를 높인다. 기초적인 논리는 성립된 상태기 때문에 그런 것이 가능하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사상을 하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집권하면 패배하는 현상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에도 정치가가 일을 안해도 사회가 불행한 것이라 착각하고 있다. 그렇지가 않다. 학문에서 사회 문제에 대한 대응이 나오지 못하니까 어떤 정치 세력이든 정치 성향과 무관하게 집권만 하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차후 선거에서 패배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 사회가 바람직하게 되길 바란다면 우선 학문이 발전하길 바라야 한다. 그리고 학문의 발전을 수용할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룰 (이해, 안보, 체제)
짐승 사회의 법칙에서의 룰과 인간 사회의 법칙에서의 룰의 핵심적인 차이는 판단이다.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판단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배제해야 한다.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에서의 룰은 도덕의 최소가 아닌 체제의 규칙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로 체제에 관한 룰부터 시작되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개인의 룰을 체제의 룰에 포함시키는 작업을 위한 이해의 룰이 필요하고, 사회와 체제의 안전 보장을 위한 안보의 룰이 필요하다. 그 다음에 체제의 룰이 적용되게 된다. 이해의 룰로 모든 개인의 이익을 보장하고, 안보의 룰로 사회와 체제의 안전을 보장하고, 체제의 룰로 체제에 적합한 생활 양식을 보장한다. 사회와 체제는 사회 계약을 통해 각 이념에 대한 계약을 거쳤으나, 그 체제의 규칙인 룰은 체제 이념인 민주주의에 따라 모든 개인의 의사로 결정해야 한다. 룰은 이념을 통해 방향성은 정해져도 구체적인 방법은 정해지지 않은 상태다. 그것에 대해 몇 가지 정리할 것인데, 룰은 개념과 달리 지나치게 방대해질 수 있기도 하여 현재 나의 레벨로 할 수 있는 것까지 정리하겠다.
이해의 룰.
[이해: 1. 이익과 손해를 아울러 이르는 말.]
이해의 룰은 개인의 기본적인 룰로 이익이 되는 것을 수용하고 손해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 이 룰을 정리해야 하는 이유는 개인의 이해의 룰이 체제의 룰에 속하기로 결정해야 다양한 룰이 생기지 않으면서 다툼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해의 종류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짐승의 경우 유전자로 판단되는 것이 많아 유전자에 따라 생기는 이해의 룰로 접근해도 충분하지만, 인간의 경우 자아로 판단되는 것이 많아 자아로 판단한 이해의 룰까지 추가해야 한다.
이해의 종류는 크게 세 개로 나눌 수 있다. 생물의 이해, 자아의 이해, 체제의 이해. 유전자로 정해진 이익과 손해, 자아로 판단한 이익과 손해, 사회와 계약한 체제로 본 이익과 손해. 이런 이익과 손해는 의미로 표현되고 가치로 결정된다. 각각 개인의 가치관으로 이해의 룰이 결정되므로, 체제의 룰에 이해의 룰을 포함시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상대적 가치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절대적 가치인 윤리의 경우 자아가 판단하지 못하고 이익과 손해가 결정된다. 그것을 판단하지 못하면서 윤리를 만든 인간의 이익과 손해를 위해 활동하게 된다. 룰은 일관된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윤리와 같이 일관되지 못한 상태가 존재하면 룰이 일관되지 못하게 된다. 애초에 절대적 가치는 그 가치로 정해진 룰을 절대적으로 여기면서 다른 룰과 타협할 수 없으면서 절대적 가치가 존재하는 한 이해의 룰이 정상 작동하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상대적 가치 세계에 진입해야 이해의 룰이 정상 작동될 수 있다. 일단은 윤리가 있더라도 이해의 룰이 체제의 룰에 속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겠다.
개인의 행위가 모두 이익이 될 수는 없다. 식사를 하더라도 이후 발생할 배설을 손해로 여길 수 있다. 수면을 하더라도 하면서 나타나는 시간 소비를 손해로 느낄 수 있다. 어떤 이익이 되는 행동도 손해가 동반될 수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하는 것은 손해보다 이익이 크기 때문이다. 그것처럼 체제의 룰을 지키는 것으로 얻는 이익이 지키지 않는 것으로 얻는 손해보다 크면 대체로 이해의 룰이 체제의 룰에 속하게 된다. 예를 들어 왕정 체제에서는 비민주적으로 피지배자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 보장이 확실하지 않지만,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민주적으로 주권자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 보장이 확실할 수 있다. 전자는 이해의 룰과 어긋나면서 개인의 독자적 룰이 생김에 따라 다툼이 일어날 수 있지만 후자는 이해의 룰과 일치하면서 체제의 룰을 지키면서 다툼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 체제가 자유 이념의 실현 조건인 개인의 생존, 능력, 환경을 보장하면 대체로 개인은 룰에 속하는 것이 이익이 될 것이다. 그것을 기초로 모든 인간의 감정, 욕구, 욕망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이 체제의 룰 내에서 충족될 수 있도록 한다. 과도한 자유가 사회를 엉망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가치 관리로 접근한다. 예를 들어 비만이 많은 이유는 유전자적 이유, 자원의 풍부, 기업의 광고 등의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살을 빼야 할 동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만약 무언가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살을 빼야만 한다면 살을 뺐을 것이다. 실제로 연애를 하고 싶어서 엄청나게 많은 살을 뺀 인간이 있다. 그런 동기는 성의 범주 가치를 올려야 할 것이다. 검열, 규제, 억압 등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적절한 욕망을 갖도록 가치 관리하는 것으로 사회를 구성한다. 적절한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금욕주의는 타인이 지정된 특정 욕망만 극대화한다면, 욕망주의는 본인이 판단으로 욕망을 추구한다.
PC주의가 다양한 가치를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PC의 가치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타협하지 못하고 부정하면서 절대적 가치인 윤리와 다를 바 없는 상태다. 건강을 위해 살을 뺀다고 했던 연예인에게 온갖 비난을 한 사례가 있다. PC의 가치에 어긋났다는 이유 하나로 판단하지 못하고 비난했던 것이다. 현재 PC주의는 단지 비만을 합리화하고 있을 뿐이다.
이해의 룰이 체제에 룰에 속하려면 개인도 무엇이 이익인지 가치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평소에 공기를 이익이라 여기지 않지만 공기가 사라지면 손해라 여길 수 있다. 유교 질서에서 연하의 존댓말을 듣는 것은 이익이라 여기지 않지만 반말을 들으면 손해라 여길 수 있다. 이익의 기준과 손해의 기준이 다르다. 생명과 재산이 보존되는 이익이 있다 해도 그것을 이익이라 여기지 않으면 이해의 룰에 포함이 안될 수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개인이 변해야 된다. 개개인은 무엇이 이익이고 손해인지 가치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해서 이해의 룰을 체제의 룰에 속하게 하여 다양한 룰을 만들지 않게 하여 다툼을 줄이는 것이 진정한 평화의 길이다. 룰 내에서 종교를 포용하더라도, 그 종교의 가치는 사회에서 절대적 가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일부 이슬람, 샤리아존을 주장하는 이슬람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중세 시대에 머물러서 이념이 아닌 종교를 체제로 삼고 있다.
북한과 같이 룰이 달라 타협이 안 되는 국가와는 우선 공통된 룰을 만드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해의 룰이다. 민족이나 반공 같은 어떤 가치에서 벗어나 철저하게 이익과 손해만 따지는 룰에는 지능이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포함시킬 수 있다. 룰에 포함시키지 못하면 어떤 협상을 하더라도 무용지물이 된다.
짐승 사회의 법칙에서 만들어진 평화와 인간 사회의 법칙에서 만들어진 평화는 같은 평화라 해도 전혀 다르다. 짐승 사회의 법칙에서는 판단하지 못하고 지정된 행동을 하게 하는 것으로 지배하여 평화를 이룰 수 있다. 그렇게 해서 특정 누군가만 이익을 보면서 평화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건 자유적이지도 않고 민주적이지도 않다. 도대체 어떤 평화를 바라는 것인가? 인간 사회의 법칙에서 만들어진 평화는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욕구와 욕망을 추구하면서 이뤄지는 평화다.
안보의 룰.
[안보: 2. ‘안전 보장’을 줄여 이르는 말.]
이해의 룰을 체제의 룰에 속하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다양한 룰을 만들지 않게 한 뒤에 고려해야 할 기본 룰은 안보다. 이해와 안보를 체제의 룰에서 따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미리 정의해놓는 것은 체제와 무관하게 이 둘은 반드시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해의 룰은 룰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조건이라면 안보의 룰은 존재 유지를 위한 조건이다.
안전을 보장하여 존재를 유지한다. 안전은 위험이나 사고가 날 염려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룰의 차이를 없애 하나의 룰이 되면 인간 관계에서의 위험이나 사고는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인간 관계에서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그것을 하면 해결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강제하고 지배하고 억압하고 하면서 줄일 수는 있는데 한계가 뚜렷하고 부작용이 심하며 무엇보다 체제에 적합하지 않다. 그 외에 사회에 위험이 되는 모든 것을 파악하고 대응한다.
상호간의 신용을 통해 서로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데, 이는 사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신용이란 개념으로 몇 가지 알아보겠다.
윤리와 신용 사회의 차이.
윤리와 신용 사회는 둘 다 판단하지 않는 공통점이 있다. 윤리로 만들어진 인간 관계에서 연하의 존댓말은 따로 판단하지 않는다. 신용 사회에서 거래되는 화폐에 대해서는 따로 위폐인지 판단하지 않는다. 둘 다 판단하지 않지만 전자는 절대적 가치로 판단을 하면 문제가 생길 수가 있고 후자는 상대적 가치로 판단할 수 있지만 절차를 생략해 사회적 이익을 얻기 위해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판단하지 못하는 것과 판단하지 않는 것은 다른 개념이다.
신용 사회에서 정부와 개인이 해야 할 일.
신용 사회에서 정부가 책임져야 하는 것은 품질이고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것은 활용이다. 사회에서 안보는 신용을 통해 관련 절차를 생략하고 있다. 그것은 정부의 책임이다. 식약처에서 식품 검사하는 것도 안보 신용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품질이 보증된 식품을 구매하고 나서 방치했다 상한 상태에서 먹어서 탈이 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책임이다. 위험 지역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위험 지역에 가지 말라고 지역 품질이 위험하다는 것을 보증했음에도 개인이 그 지역에 가서 사고 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책임이다. 단순히 사고가 났다고 해서 모든 것을 정부 책임으로 모는 것은 부당하다. 반대로 품질 문제로 사고가 난 것은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
신용 사회의 이상은 계약서를 안보고도 계약해도 손해가 없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어렵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생각해보면 화폐를 받을 때 따로 검사를 하지 않고 음식을 먹을 때 따로 성분 조사를 하지 않는다. 충분한 신용이 쌓이면 그래도 상관 없다. 만약에 지속적으로 계약 위반이나 사건사고가 발생하는 것이라면 기본적인 제도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세 제도나 고용 제도가 그렇다. 그런 것에 대해 따로 확인을 해야 하는 것 자체가 사회적 비용 낭비다. 이런 것은 제도 자체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신용 사회는 사회 구성원이 모여 시스템을 구축한다. 민주화, 세계화, 디지털화가 되면서 세계 시장과 직접 거래하는 일이 늘게 됨에 따라 안보 위험이 생길 수 있는데, 이는 특정 국가가 독자적으로 판단할 게 아니라 국가가 모여 그에 관한 논의를 해야 한다. 그게 지구 정치다.
신용이 어려운 사회와의 거래.
체제의 유사성,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룰이 유사하거나 다를 수 있다. 룰이 크게 다를 경우 다툼이 발생할 소지가 있기 때문에 잠재적 안보 위협 대상이 되게 된다. 체제가 다른 국가와의 거래를 안보 개념이 부족한 상태에서 하는 경우가 잦은 상태다. 특히 중국이 그렇다. 중국과의 거래에서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중국산 장비나 부품을 쓰다가 안보에 위험이 되는 사건사고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 대놓고 군사적 위협일 경우에는 안보적 판단이 쉬운데, 경제적으로 접근하면 안보적 판단이 어려운 것 같다. 잠재적 안보 위협 대상과의 거래를 할 때에는 경제적 손익과 정치적 손익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더라도, 산업 스파이 등의 문제가 발생할 경우 정치적 손해가 될 수 있다. 룰에 대한 이해와 안보 위협 대상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한다.
체제의 룰.
[체제: 2.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볼 때에, 그 조직이나 양식, 또는 그 상태를 이르는 말.]
체제는 다양한 뜻이 있는데, 유기체로 접근하는 것이 과학적 접근을 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 보았다.
체제의 룰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체제에 맞춘 룰이다. 개인의 이해의 룰을 체제에 룰에 속하게 하고, 안보의 룰을 정리한 다음에 그 바탕에서 체제에 맞춘 룰이 나오게 된다.
체제의 룰은 모두가 판단해서 지킨다. 누군가 판단하고 지키지 않을 수 있는데, 그것을 방지하는 것이 이해의 룰이다. 언제나 어느 때나 누구라도 룰을 지키는 것이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게 하는 것.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것이 점점 가능해지고 있다. 체제의 룰을 어기는 행위, 즉 범죄조차도 디지털 내에서 간접적으로 즐길 수 있는 상태다. 룰을 지키는 것이 이익이 된다가 성립되도록 가능한 최대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것으로 법칙과 같은 반복적이고 인과가 있는 현상을 구현한다. 개개인이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행동해야만 사회가 유지되고 발전될 수 있도록 정책과 제도를 만든다.
자유주의 중 시장주의를 기초로 한 룰을 정리해보겠다.
시장의 룰은 시장을 성립시키기 위한 조건부터 알아봐야 한다. 이른바 원칙이다. 시장 원리는 개인의 판단으로 수요와 공급으로 가격이 결정된다. 그것을 위해 개인이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할 수 있도록 욕망주의와 이기주의가 필요하게 된다. 수요와 공급에 의한 가격 결정을 위해 경쟁이 필요하게 된다. 경쟁을 위해 담합이나 독과점이 없어야 한다. 산업 특성상 경쟁이 불가능하면서 필수적이라면 국영화가 합리적일 수 있다. 시장에서 하나의 룰로 다툼이 줄어들기 위해서는 모두가 공정하게 거래를 하여 이익을 얻어야 하여 공정이 필요하게 된다. 공정한 거래를 위해 리스크 리턴의 비례가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적은 리스크에는 적은 리턴이 주어지고, 높은 리스크에는 높은 리턴이 주어져야 공정한 분배가 가능할 수 있다. 장기 계약으로 리스크가 낮으면 리턴도 낮고, 단기 계약으로 리스크가 크면 리턴도 커야 한다. 하나의 룰에서 모두가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최대한 효율적인 체계가 필요하게 된다. 불필요한 중간 과정인 없어도 되는 하청, 되팔이, 택갈이 등은 없는 편이 효율적이다. 시장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는 시장의 범주 가치를 가치 높게 여겨야 한다. 그렇기에 관련 가치 관리를 해야 한다. 시장 내에 지속적인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복지 등의 안전망이 필요하다. 그것을 통해 보다 마음 편하게 책임지고 재기를 위한 활동을 할 수 있게 될 수 있다.
욕망과 이기, 공정 경쟁, 리스크 리턴의 비례, 효율적인 체계, 시장의 범주 가치 관리, 안전망. 몇 가지 원칙이 더 필요할 수 있는데, 일단 그렇다. 이 원칙을 기초로 다양한 룰을 만들면 된다. 시장은 어디까지나 윤리가 아닌 체제와 과학으로 접근해 합리적으로 만들어야 모두가 만족할 수 있다. 그것을 경제 물리학으로 가치부터 전부 체계화해야 한다. 그런 것을 통해 모든 개인이 이익을 얻어야한다. 강자는 시장 체계를 통해 효율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고, 약자는 거래로 얻은 이익을 안전하게 보장받을 수 있다.
민주화가 될수록 시장의 룰에서 이익을 보는 인간의 이익이 커진다. 중국 시장이 현재는 시장이 어느정도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시장의 룰로 이익을 보는 기업이 중국에서 이익을 얻고 있지만, 일정 이상 중국 산업이 성장하면 그에 따른 정부의 제동을 통해 이익을 보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이미 한국은 그러고 있다. 민주화가 되어야 개인의 수요에 정부가 간섭하기 어려워지면서 기업의 이익이 커지게 된다.
시장에서 시장 참여자는 어디까지나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이어야 한다. 그게 아니면 시장 원리가 작동을 안한다. 수요와 공급으로 가격이 결정되는데, 공급 측에서 가격을 너무 낮춰서 다른 공급자를 다 죽이면 경쟁 개념이 성립될 수가 없게 된다. 그게 덤핑 공격이다. 그래도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한다면, 이후에 경제적으로 이익 회수를 위한 활동을 하면서 다른 공급자에게도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데, 정치적 이익을 목적으로 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이익을 회수하는 것으로 그런 기회조차 없을 수 있다.
본래 좀 더 정리해야 하는데, 현재 레벨과 상태와 시간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까지 하겠다. 지금 당장은 좀 지저분한데, 이후에 레벨이 오르면 순도가 높은 개념으로 체계적으로 정리될 것이다. 체제를 기초로 하여 눈에 들어왔던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몇 가지 현상에 대해 의견을 내겠다.
법의 합리성.
법은 합리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윤리에 의해 불합리할 때가 많다. 국민의 법감정은 윤리에 의해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무조건 강한 형량을 요구하면서 실제 판결의 형량과 다른 경우가 많다. 그에 따라 민주적 절차에 의해 법의 합리성이 깨지는 경우가 있는데, 윤리에 의한 현상임을 이해하고 법의 합리성은 유지해야 한다. 이제는 모든 개인도 통치자 관점으로 접근하여 윤리만 외칠게 아니라 예산이나 형평성 등도 고려해야 한다. 전관예우와 같은 현상도 윤리가 원인이지만, 일단 그러한 비리는 제외하고 합리성만 고려하도록 하겠다.
법은 한번 형량으로 끝내는 것이 합리적인데, 일부 단체의 불안감을 명분으로 전자발찌라는 추가적 패널티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전자발찌를 차게하고 싶으면, 형량 내에서 출소 조건으로 차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예를 들어 형량 5년에 발찌 3년이면 처음부터 8년형으로 판결하고, 5년 형기를 마친 뒤에 3년 동안 전자발찌를 차는 조건으로 가석방되는 것이 합리적이다.
특히 성범죄의 경우 여성주의 집단에 의해 너무 불합리할 때가 많다. 무고죄조차 패널티가 적거나 없어 무방비하게 당하는 경우가 많은 상태다. 성범죄는 체제를 기준으로 어디까지나 자유를 침해한 것이 죄이지 성적인 관계 자체가 죄인 게 아니어야 한다. 성 자체가 죄가 아니라면 개인의 의사로 대응 가능한 상태에서는 대체로 죄로 규정하기 어렵게 된다. 가벼운 농담이나 디지털 성범죄 등이 바로 그렇다. 그런 것에 예민하게 대하며 과한 처벌을 강요하는 것은 윤리로 판단하지 못한 불합리한 행동일 뿐이다.
개인 정보.
민주화, 세계화, 디지털화가 되면서 개인 정보의 중요성이 나날이 올라가고 있다. 주권에 의해 개인의 정보가 중요해지고, 세계화로 개인 정보가 세계로 퍼질 수 있고, 디지털화로 개인 정보가 쉽게 퍼질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과 같은 주민 등록처럼 개인 정보를 정부가 관리하는 것이 인권침해처럼 여겨질 수 있다. 지배 체제에서는 분명 정부가 개인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 하지만 자유 체제에서 정부가 개인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유료 서비스 기업이 고객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분명 현재 한국에서 개인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지나치게 많을 수 있으나, 그렇다고 아예 수집하지 않는 것은 정부의 유료 서비스를 원활하게 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유무료 관계 없이 분명 안보와 같이 개인 정보가 필요할 때가 있고, 주차 이용 같이 개인 정보가 딱히 필요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정부의 지배와 개인의 권리 측면에서 유료 서비스는 직관적인 개인 정보의 필요에 대한 논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집단 파업.
어떤 사회든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집단주의, 이타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그게 곧 전체주의 카르텔화가 된다. 의료계의 파업. 전형적인 집단주의, 이타주의, 전체주의. 의료계 집단 내에 다른 의견을 허용치 않는다. 집단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라. 그것을 통해 집단이 단일 의견으로 통일된다. 족보 공유, 전공의 희생, 전체주의적인 집단 파업 등. 현재 의료계는 전체주의적이기에 윤리적이나 체제적이지는 않다. 어떤 집단이든 전체주의적인 것은 사회 체제에 적합하지 않다.
지금 당장 경제 생태계가 정상이 아니라, 노조 파업 등도 허용되고 있지만, 경제 생태계 구축이 되면 체제에 불합리한 행위는 없어도 될 것이다. 노동자 개인의 권리는 노조가 없어도 허용되어야 한다. 기업에서 노동자의 출산 휴가 보장이나 경력 단절 고용이 되려면, 단순히 그걸 하라고 강제할 게 아니라 그것을 할 수 있는 노동 유연화 체계를 구축해야 하는 것처럼, 노동자 개인의 권리가 보장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금투세.
주식 수익에 추가적인 세금을 매긴하고 한다. 5000만원 이상 수익자에게 세금을 매긴하다고 한다. 5000만원 이상 수익을 얻는 인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파장이 크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길 수 있으나, 그것으로 수익을 얻지 못하는 인간 또한 심리적인 저항감이 생기게 된다. 예를 들어 복권 당첨금 1억에 세금이 지금보다 늘어난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복권 당첨에 되본적도 없는 인간도 복권 구매율이 감소할 것이다. 주식 대박을 꿈꾸면서 주식에 참여해 수익을 얻는데, 주식 세금이 늘어나면 실제 그만큼 수익을 얻지 못하더라도 주식을 하려고 하는 비율이 감소할 것이다. 5000만 수익자만 주식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수익이 적어도 주식을 하지 않게 될 수 있다. 시장 이탈자를 5000만 수익자까지만 고려할 게 아니라, 기대 수익 감소로 이탈하는 인원까지 고려해야 한다. 주식 시장의 꿈을 고려해야 한다.
비교 태도.
요즘 자녀의 비교하려는 태도가 심각하다고 한다. 예부터 많이 있었지만… 요즘은 휴일 여행 유무나 에어컨 대수 같은 것도 비교하면서 우위를 나누고 있다고 한다. 비교하려는 태도는 윤리에 의해 집단주의적이게 되어 개인의 개성이 존중되지 못하기 때문이지만, 비교 기준이 가정의 재산인 것은 학생들이 스스로 뭔가 자랑할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낮아서 그렇다. 본인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서 명품으로 스스로를 치장하는 것처럼 본인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가정의 재산으로 치장한다. 개인주의적으로 되고 나서 뭔가 자유롭게 하고 싶은 욕망을 찾아 그것에 집중하게 될 수 있다면, 이런 태도는 사라질 것이다.
PB 상품 우대.
유통업체서 PB 상품 우대를 정당화하는데 유통의 본질이라 말한 것이 인상 깊었다. 그것이 유통의 본질일 수 있지만 플랫폼의 본질은 아니다. 유통의 본질을 지키고 싶으면 플랫폼을 팔고 유통만 하면 된다.
신흥 종교.
이미 타인의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는 상태, 윤리라는 지배를 수용하기 위한 코드가 삽입되어 있기 때문에, 그 코드로 신흥 종교의 지배가 성립되게 된다.
국민 연금.
연금의 지속이나 강화는 도대체 무슨 논리가 있는 것인가? 전문가는 폰지 사기와 다를 바 없다며 이미 지속 불가능한 것을 인식하고 있는데, 무슨 논리로 지속하거나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으로 이익을 얻는 다수결의 논리인가? 그것을 위해 사회와 체제가 망가지더라도 해야 하는가? 모든 개인이 주권자인 시점에서 모두를 설득할 수 있는 과학적인 논리가 필요하다. 논리가 없는 다수결에 의한 결정은 단지 다수에 의한 횡포다. 안 그래도 윤리 때문에 범주 가치가 낮아 조건이 좋아야만 생에 행복을 느끼는 상태인데, 과도한 세금이 부과되면 견딜 수 없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다. 합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부디 논리에서 윤리는 배제되길 바란다. 판단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걸 논리에 쓸 수 있는가. 논리에는 윤리가 아닌 과학을 써야 한다. 현행 제도의 가입을 막고 연금을 펀드로 운영하면서 연금을 가입자에게 천천히 돌려주면서 순차적으로 이런 불합리한 제도를 끝내야 한다. 복지가 필요하다면 합리적인 제도를 새로 도입해야 한다.
SNS.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디지털 소통이다. 워낙 간편하게 다수와 소통을 할 수 있다 보니 과하게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 문제가 생기고 있다. 특히 미성년은 그것에 중독되어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하게 되는 상태가 있을 수 있어 일부 사람들이 미성년 SNS 규제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언젠가 해야 할 것이라면 보호자가 교육할 수 있는 시기에 교육하는 것이 타당하다. SNS를 막을게 아니라 SNS 다루는 법을 배우게 해야 한다. 커서 한다고 갑자기 잘해지는 건 아니다. 뭐든 초기 경험 각인이 매우 중요하므로, 너무 빠져들지 않도록 단순한 소통 수단으로 각인을 해두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오프라인에서 만날 수 있는 인간과 SNS로 대화하면서 단순한 소통 수단으로 만들면 큰 문제가 없을 거라 본다. 되려 하지 못하게 막다가 몰래 했을 때 자기 표현 욕구를 풀 수 있는 수단으로 각인되면 그 때 중독되게 될 것이다.
길고양이.
길고양이 문제. 그것이 생명 보호라는 윤리라고 생각하니까 판단하지 못하고 길고양이 먹이 주기를 행하고 있고, 윤리니까 타협이 불가능한 것이다. 길고양이 먹이주는거야 그렇다쳐도, 그게 윤리가 아닌 이기심이라는 것이 명확해야 그나마 타협 가능성이 있다.
저출산 돈 뿌리기.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곳에서 돈을 뿌리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돈을 한번 뿌리고 나면, 앞으로는 그 돈이 없으면 전보다 출산하지 않을 수 있다. 출산 조건에 그 돈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1억을 뿌린다고 하면 1억 없이는 이제 낳지를 않는다. 그게 보편화되면 1억을 받는 것이 당연하게 되면서 1억 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낳지 않는다. 점점 범주 가치는 하락한다. 이런 문제는 관련 가치를 관리하여 자발적으로 하고 싶게 하지 않는 이상 해결될 수가 없다.
전세 사기.
전세는 사금융이므로 객관적인 신용을 구축하기 어렵다. 전세 사기에 대해 정부에서 보호를 해준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다. 전세 제도는 폐지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적어도 정부 대출을 해서는 안 된다.
군의 상명하복.
군은 단순한 상명하복에서 벗어나 모든 개인이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작전 수행 또한 개인이 판단할 수 없다면, 변수에 대응할 수 없다. 군에 관련된 다양한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데, 상명하복이 아니었다면 개인 판단으로 대응하여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모든 지휘관이 현장에 없어도 모든 판단을 잘할 수는 없다. 큰 틀에서 지휘관의 판단을 따르되, 세부적으로는 현장에 맞는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한.
북한의 도발은 오래되었으나 최근 오물 풍선 날리기라는 새로운 도발을 하고 있다. 그런 도발을 멈추려면 협상을 해야 하는데, 협상 조건이 까다롭다. 북한과의 협상은 룰이 달라 이해의 룰로 접근해 우선 룰에 포함시키는 것이 적절하지만, 단순히 협상을 하기에는 바라는 게 너무 많다. 과거 햇볕 정책 같이 무언가를 지원해도 의미가 없음이 증명되었다. 핵무기에 굴종하는 것을 바라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무엇보다 현재 북한이 너무 못산다. 뭔가 있어야 협상도 하고 그러는 건데 밸런스가 너무 안 맞는다. 북한에서는 밸런스를 억지로 맞추려고 비대칭 전력인 핵과 미사일에 집착하고 있지만, 그것의 사용은 파멸을 확정짓기에 북한에서도 파멸을 각오하지 않으면 쓸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북한의 국가 운영이 가족 경영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독재자가 중요하다 보니 모든 것이 뒤틀리게 된다. 핵을 포기하고 시장을 개방하면 경제가 성장하여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러면 독재 정권 유지가 위험할 수 있다. 그러니까 안한다. 애초에 개인의 국가 운영이 아닌 가족 경영을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국가 대 국가 협상 자체가 넌센스다. 그러니까 아무리 국가 대 국가와의 평화 협상을 해도 독재자 개인의 이해에 따라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차라리 독재자 일가의 이익을 보장한 제안을 했다면 의미 있는 협상이 가능했을지도 모를 정도다. 그것이 옳건 그르건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한국 주권자들이 수용할 수 없을 확률이 높다. 이런 상황이니 평행선을 걸을 수밖에 없다. 평행선을 걷는 중에 한국이 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의 모든 주권자가 체제에 대해 이해하고 북한에 대한 시각을 공유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일관된 정책, 일관된 전략으로 대응할 수 있다. 정말 북한 문제는 내부부터가 제대로 정리도 안되어 있어서 매번 북한에 끌려 다니게 된다고 본다. 일부 민족주의자는 자꾸 평화만 외치는데 도대체 어떤 평화를 바라는지 궁금하다. 한국이 북한의 핵무기에 굴종하면서 얻는 평화를 바라는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든 그 가치를 판단하고 실제 실현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해야지, 윤리적으로 그것을 절대적으로 해야만 한다고 외친들 … 제대로 판단하지 못해서 운에 맡기게 되어버린다.
폐쇄 사회.
폐쇄 사회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은 체제 변화에 따른 룰의 변화가 폐쇄 사회까지 전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체제가 되면서 윤리가 남아있어도 체제에 맞게 조금씩은 변화하는데, 그 변화가 폐쇄 사회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면서 열린 사회와 폐쇄 사회 사이에서 룰의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그 차이에 의해 열린 사회에서 폐쇄 사회의 사건사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경제 유연화.
경제를 위해 노동 유연화를 하는 것이 타당하다 본다. 노동이 유연해지면 주4일제를 도입하더라도 상관 없고, 노동 유연화가 되면서 고용과 해고가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출산 휴가 보장과 경력 단절 고용도 수월해질 것이다. 이는 노동자와 기업 모두 이익을 얻는 경제 체계 구축이 가능해질 수 있다. 일단 유연해져야 유연해야 가능한 정책이 성립될 수 있다. 경제를 위해 기업 유연화를 하는 것이 타당하다 본다. 기업이 유연해지면 굳이 좀비 기업을 살리기보다 새로운 창업 기업을 적극 지원하면서 경제 생태계에 신선한 기업이 늘어날 수 있을 거라 본다. 세계 자유 무역에 대응하려면 경제 체계를 바꿔야 한다.
4. 현상
법칙, 관점, 체제를 이해하면 지구에서 발생하는 현상 몇 가지를 보다 순도 높은 본질로 볼 수 있다. 적어도 다른 관점으로 보는 것이 가능해진다. 몇 가지 현상에 대해 알아보자.
패권 전쟁.
미국과 중국의 패권 전쟁에 대해 알고는 있었으나, 당장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방식이 덤핑과 관세 대응과 같이 전쟁과 같이 매우 공격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 관심 있게 보진 않고 있었다. 아, 이번에도 미국이 중국 덤핑에 관세를 부과하는구나. 아, 중국이 미국의 관세 장벽에 의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구나. 같은 감상 정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외교와 정치에 대해 사상을 하던 도중, 중국산 철강 덤핑에 미국이 관세를 부과하자, 그 철강 덤핑이 한국으로 들어와 한국 철강 업계에 위기가 생겼다는 소식을 접했다. 정부의 직구 규제, 전 세계의 샌드위치 경제 현상 등 패권 전쟁에 의한 현상을 접하고 그에 대한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중국의 방식이 경제적이라 생각하고 경제적 대응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나, 현상 하나씩 살펴보면서 경제 경쟁이 맞는지 의문이 들게 되었다. 이것은 혹시 경제 경쟁이 아니라 정치 전쟁인 게 아닐까? 표면상에 드러난 정보를 개념화하여 논리적으로 정리하면서 다른 관점으로 발상한 것이기에 세부적인 데이터는 부족하다는 것을 미리 알린다.
관점을 바꾼 계기는 현재 드러난 현상이 논리적으로 정리가 안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중국은 철강에 관세가 부과될 것을 알면서 미국에 보냈던 걸까? 왜 중국은 그 철강을 알리와 테무가 진입한 한국으로 보낸 걸까? 왜 한국은 직구에 의한 사회 문제를 보호 무역으로 대응하려 했던 걸까? 왜 미국은 경제적으로 계속 성장할 수 있는 걸까? 왜 중국은 디플레이션 상태로 경제적 위기인 걸까? 왜 미국은 보호 무역을 하게 된 걸까? 왜 전 세계의 경제는 샌드위치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걸까? 왜 중국이 경제적 위기임에도 과잉 생산을 멈추지 않고 전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걸까? 중화사상을 가진 중국이 미국 질서에서 경제 경쟁에서 이기기를 바라는 걸까? 어째서 미국이 보호 무역으로 알아서 봉쇄하고, 그 틈을 타서 전 세계 시장을 장악하려고 하는 것이 마치 손자 병법에 나올 법한 전략 같은 걸까?
단순히 중국이 과잉 생산 상품을 미국에 덤핑으로 팔려다 관세를 받는 타격으로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다로 결론 내려야 할 것인가? 그렇게 보기에는 모순되는 점이 많았다. 2018년부터 본격적인 경제 경쟁을 시작했다고 아는데, 그 때부터 중국의 전략이 달라진게 없었다. 중국의 과잉 생산, 미국의 덤핑 관세, 미국의 보호 무역화, 중국의 전 세계 시장 장악. 이것을 2024년이 된 지금까지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계속 미국은 승승장구하며 경제적 성장 상태고 중국은 경제적 위기 상태다. 안 되는 걸 계속 시도하고 있다. 그걸 중국이 단순히 바보라서 그렇다고 판단하기에는 중국의 현재 경제 능력을 고려하면 그런 판단은 적절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게 중국의 이익이 된다는 것이었다. 관점을 바꿔보았다. 달리 보면 중국이 미국에 과잉 생산한 덤핑을 보내는 것으로 미국이 보호 무역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 된다. 미국이 중국의 전략에 대응하기 위해 보호 무역을 한 게 아니라, 중국의 전략이 미국의 보호 무역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이 보호 무역을 하겠다는 것을 미국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봉쇄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어쩌면 직접 상대할 수 없는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봉쇄하고 봉쇄한 틈을 타서 전 세계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미국에 도발을 하여 경제 전쟁을 거는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한 게 아닐까? 그런 관점으로 보니까 중국이 같은 전략을 고집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게 미국을 봉쇄하는데 최적화된 전략이었다.
관점을 한번 더 바꿔보았다. 이것이 단순히 경제 경쟁이라 할 수 있을까? 단순히 미국을 봉쇄하고 그 외 국가 시장을 장악해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한 전략인걸까? 그렇다고 보기에는 중국의 경제 상황이 좋지 못했다. 경제적 이익이 목적이라 보기에는 어려웠다.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정치적 이익이 목적이 아닐까 싶었다. 미국 질서 내에서 경제 경쟁으로 미국을 넘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질서를 부수기 위해 전 세계에 상품을 무기로 한 정치 전쟁을 통해 시장 점령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장 장악과 시장 점령은 이익 회수 방식의 차이가 있다. 시장 장악은 초기 저가 공세로 시장을 장악한 다음에 가격을 올려 이익을 회수한다면, 시장 점령은 저가 공세로 시장을 점령한 다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이익을 회수하거나 손해를 없던 것으로 만든다. 중국이 경제적 위기가 있음에도 과잉 생산하는 것은 처음부터 경제 경쟁이 아니라 정치 전쟁으로 시장 점령을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관점을 한번 더 바꿔보았다. 어째서 미국이 계속 경제 성장이 가능할 수 있을까? 미국이 초강대국으로서 우수하기 때문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 미국은 중국과 패권 전쟁 중이다. 그런 상태에서 그런 경제적 성장이 가능한걸까? 전쟁 타격은커녕 되려 전쟁하기 전보다 성장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것을 중국의 전략으로 생각해보았다. 그렇다. 미국이 계속 경제 성장을 하게 된다면, 보호 무역이라는 미국의 전략을 포기하지 않게 될 것이 아닌가? 미국이 스스로 계속 봉쇄하게 하는 전략은 어디까지나 미국이 승리하고 있다는 인식을 갖게 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패권 전쟁 중임에도 미국의 경제 성장을 방해하지 않는다.
관점을 한번 더 바꿔보았다. 어째서 전 세계 시장은 샌드위치 상태에 놓일 정도로 위기인 걸까? 전 세계, 특히 고소득 국가인 유럽조차 위에서는 미국이 치고 나가면서 발전하고 있고 아래에서는 중국이 치고 올라오면서 발전하고 있다. 그 사이에 모든 국가가 껴서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다. 어째서 전쟁을 하는 양국이 그렇게 발전하고 있을 수 있는가? 달러의 특성상 미국의 달러 가치가 오르면 전 세계 생산 비용이 올랐다. 전 세계 생산 비용이 오르면 중국의 덤핑 공세에 더 취약해지게 된다. 중국은 미국의 달러 가치만 올리면 알아서 전 세계 시장이 취약해지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중국이 미국 달러 가치를 계속 올리기 위해 미국에 자본을 쏟아 부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니까 미국 내에서 인플레이션이 끝나지를 않는 게 아닐까 싶었다. 현재 전 세계 시장의 자본 3분의 1이 미국에 몰리고 있다고 한다. 중국 자본은 그 중 어느 정도의 비율일 것인가? 만약 그게 중국의 전략이 맞다면, 미국 경제 성장을 도와 미국의 현재 전략인 관세 부과와 제조업 복귀를 유지하게 만들고,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여 달러 가치를 올리고 금리 인상 기조를 유지하게 만들어 세계 시장의 경쟁력을 악화시키는 것으로 점령하기 쉽게 만든다.
관점을 한번 더 바꿔보았다. 중국은 마치 손자 병법과 같은 방법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 각 국가의 시장을 전쟁의 성이라 가정해보자. 그리고 그 성을 점령하는 측이 패권 전쟁에서 승리한다 가정해보자. 현재 미국 중심의 세계 자유 무역 경제 체계 속에서 많은 성이 미국 영향권에 속한 성이었다. 중국 입장에서 세계에 있는 성들을 점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각 성을 고립시켜야 한다.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던 자유 무역 체계를 부숴 보호 무역으로 만들어 고립시킨 후에 각개격파로 점령한다. 그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그것을 위해 중국은 미국에 도발을 하여 각 성에 나눠져 있던 인재와 자원을 미국의 성에 결집시키게 만든다. 그렇게 결집시키게 만들고 나서 약해진 각 성을 손쉽게 점령한다. 미국이 보호 무역을 하면서 각 제조업을 복귀시키고 전 세계 자본을 회수하는 것을 틈타 중국이 시장을 점령하는 것을 군사적으로 설명하면, 미국이 자국을 지키기 위해 주한미군을 불러들이는 것을 틈타 중국이 군사적으로 한국을 점령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았다.
미국 봉쇄 후 전 세계 시장 점령 전략. 이것이 중국의 전략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중국이 단순히 실패할 것을 알면서 같은 전략을 고집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중국의 성장은 그 정도 레벨로 가능하다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중국의 내부 문제에 의한 다양한 현상 보고가 나오고 있다. 중국 주석과 원로와의 다툼, 중국 외교관의 미국 관세 부과에 대한 분노, 중국 저출산 위기, 중국 현재 경제 상태 위기, 중국 위기 속에 금 사들이기 등. 어째서? 중국은 중국에 해로운 것을 검열하고 규제하지 않았는가? 위기 상황임을 알리는 정보를 어째서 놔두었는가? 전 세계를 기만하기 위해서. 물론 지금 중국이 경제적 위기도 맞고 사회 문제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놔둔 것은 그것 또한 미국의 현재 전략을 고수하게 만들기 위한 전략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위기라는 개념은 평시와 전시에 따라 달라진다고 본다. 만약 중국 수뇌에서 현재 상태를 평시가 아닌 전시로 보고 있다면, 크게 위기로 느껴지지 않을 거라 본다. 과잉 상품 생산은 마치 총알을 생산하는 듯이 하고 있을 것이다.
양안전쟁 도발이 매우 많은 상태다. 그런데 중국 전략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에 대한 관점도 달라지게 되었다. 양안전쟁도 미국의 시선을 끌어 다른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위한 전략이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역사로 보면 중국이 대만을 점령하는 것이 이익이다. 그러나 패권을 고려하면 그것은 손해다. 대만 점령이 당장 경제적 이익이 될 수 있더라고, 전 세계 시장을 점령 중에 있는데 전범이 되어 시장 퇴출이 되면 막대한 정치적 손해 및 경제적 손해를 보게 될 수 있다. 안그래도 중국 덤핑 상품은 각국 정부의 눈에 가시나 다름이 없는 상태. 지금까지는 자유 무역을 명분으로 놔둘 수밖에 없었지만, 중국이 전범이 되면 바로 퇴출할 명분이 생기게 된다. 중국이 레벨이 높다면 양안전쟁이란 우책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도발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전 세계의, 특히 미국의 시선을 끄는 것 말고 없다.
중국의 무기는 저가 저품질 덤핑 상품. 그것으로 각국 화폐를 사들인다. 화폐는 각국의 총생산량을 본위로 한 신용 상품. 각국 화폐를 사들여 미국 달러로 교환한다. 예를 들어 엔화를 중국 상품으로 사들인 다음에 달러로 교환하면, 일본이 환율을 관리하기 위해 달러를 매각해도 계속 엔화 가치는 내려갈 것이다. 금리의 문제로 발생한 자본의 흐름과 별개로 자연스럽게 일본 시장을 약체화할 수 있다. 그렇게 사들인 달러로 자원을 다시 사들인다. 화폐와 상품에도 차이가 있다. 둘 다 많을수록 가치가 하락한다. 그러나 화폐는 생산되면 계속 축적되고 상품은 생산되면 대부분 소비되어 사라진다. 현재 시장 경제에서 자산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으로 차이가 나게 된다. 그러면 각국은 빈자를 살리기 위해 복지를 위한 화폐를 생산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화폐 수가 늘어난 것을 중국산 저가 저품질 덤핑 상품 구매로 쓴다. 그렇게 각국 화폐와 중국산 덤핑 상품을 찍어내면 화폐의 가치는 내리는데 상품의 가치는 오르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면서 전 세계 시장은 약체화되어 중국에 시장 점령하기 쉽게 된다.
만약에 중국의 전략이 이게 맞고, 중국의 전략이 계속 통해서 미국이 계속 보호 무역과 경제 성장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전 세계 경제는 샌드위치 현상 속에서 무너지면서 인재와 자본은 미국에 흘러갈 것이고, 전 세계 시장은 중국에 점령될 것이다. 전 세계의 인재와 자본이 결집한 고립된 미국과 전 세계 시장을 점령한 중국의 패권 전쟁이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경제적으로 유리한 것은 미국이지만 정치적으로 유리한 것은 중국이 될 것이다. 패권이란 전 세계에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의미한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미국이 부유하고 기술적으로 첨단을 달려도 세계 시장은 당장 생필품 시장을 점령한 중국의 영향권 내에 속하게 될 수밖에 없다. 첨단의 기술보다 당장 먹고 사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계속 성장하나 보호 무역으로 고립주의화되면서 전 세계 정치적 영향력을 잃어가는 미국, 경제적으로 위기이나 적극적으로 과잉 생산을 덤핑하여 시장 점령하면서 전 세계 정치적 영향력을 늘려가는 중국. 이런 상황이 되더라도 미국은 정책을 바꾸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계속 경제적 성장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정책을 마땅한 명분 없이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군사 전쟁 카드를 쓸 수가 없다. 어디까지나 중국은 경제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명분이 없다. 미국이 나홀로 독주하듯 경제 성장과 기술 발전을 해도, 중국이 전 세계 시장을 점령하여 각국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면 그때에 지구 패권은 중국이 된다. 지구의 패권은 실제 지구에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이기 때문에 경제력이 아무리 높아도, 거기에 강제력을 행사할 수 없으면 권력이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군사 전쟁할 수도 없으니까 그 순간 패권 전쟁은 끝나게 된다. 물론… 이건 중국 입장에서 엄청나게 잘되어야 나올 수 있는 결과일 것이다.
중국이 패권을 차지하게 되면 미국 달러가 기축 통화로서의 지위를 잃을 수 있다. 그렇게 되도록 각국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굉장한 모략이 있을 수 있지만, 일단 되었다 가정하겠다. 달러가 기축 통화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면, 달러의 가치가 폭락할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전략을 위해 미국의 성장을 방해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돕는 중에 발생한 달러 버블이 한번에 터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것은 미국 경제에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시나리오는 미국 입장에서는 최악을, 중국 입장에서는 최상을 고려한 것이다. 그럼에도 가능성이 있다면, 전 세계에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가 자리잡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자유 진영의 대장인 미국이 그에 대한 대응을 하길 바란다.
미국은 이제 관세 부과나 제조업 복귀와 같이 방어적으로 대응할 것이 아니라고 본다. 본래 일반적인 민주 국가에서는 국가가 경제적 타격을 입어 지지율이 감소하면 현재 정부는 정권을 잃을 수 있지만, 독재 국가에서는 다소의 지지율 감소는 그리 큰 타격이 아니다. 전국적인 폭동이 아니라면 큰 문제가 없다. 코로나 사태가 있음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한계 선은 상당히 널널하다 본다. 그러므로 이제는 공격적 대응을 해야 한다. 공격적 대응이라 해서 군사적 대응을 말하는 게 아니다. 중국이 저가 덤핑으로 시장을 교란하고 제조업과 유통업을 파괴하면 똑같이 저가 덤핑으로 경쟁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품을 통한 시장에서의 정치 전쟁이라 생각하고 진심으로 저가 치킨런을 하여 중국이 그런 덤핑을 위한 과잉 생산을 멈출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중국산 점유율이 낮은 시장의 중국산 덤핑 상품을 전부 도매가로 사들인다음, 다른 비슷한 시장에서 경쟁을 붙인다. 중국산으로 중국산 경쟁을 붙여 그보다 더 저가로 만들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도매가로 산 국가가 좀 손해를 보고 중국도 좀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경제 경쟁이라면 말도 안 되는 전략이지만, 정치 전쟁이라면 총알 소비하는 것과 비슷할 거라 본다. 아니면 체급을 고려한 전략으로 나간다. 현재 고소득 국가가 중국산 저가 저품질 덤핑 공세에 시달리는 것은 1인당 gdp가 달라 생산 비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체급이 달라 힘들다. 그러므로 중국보다 gdp가 낮은 국가에서 저가 저품질 상품 경쟁을 붙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이 저가 저품질로 세계 시장 점령한 산업 몇 개를 쪼개 저소득 국가에서 생산할 수 있도록 중국 레벨의 기술을 가르치고 공장을 지어 생산하게 한다. 중국 저가 저품질 덤핑 상품과 경쟁하게 만들어 중국이 손해 보게 만든다. 고소득 국가 공장을 저소득 국가에 짓는 게 아니라, 저소득 국가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엘리트를 동원해 총력을 다해 생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산업은 정부가 주도하기 때문에 특정 산업이 밀리면 전체 산업에 영향이 가게끔 되어 있을 거라 본다. 그것으로 전기차와 같은 산업에도 영향을 가게 한다. 그러면서 중국과 저소득 국가의 생산을 줄이고 단가를 올려 일반적인 제조업 생산과 비슷하게 만든다. 이는 과거 저소득 국가 산업 육성과 유사하나, 목적이 다르다. 패권 전쟁을 위한 것이기에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고 정치적 이익을 얻기 위해 치킨런을 하듯이 저가 경쟁을 하게 될 것이다. 저소득 국가에는 중국 레벨의 기술을 가르쳐 생산하게 하였으나, 중국 레벨의 학문을 아는 것은 아니므로 대체로 거기서 발전하지는 못하여 중국 같은 위험은 줄어들 거라 본다. 그럼에도 저소득 국가에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전 세계는 현재 패권 전쟁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의 덤핑 공세로 한국 제조업이 위기인 상태다. 특히 직구를 통해 중국의 저렴한 상품을 사면 한국 제조업은 경쟁할 수가 없어 고사하게 된다. 이게 전 세계적인 샌드위치 현상 중 하나다. 그렇다고 그것에 대응하기 위해 보호 무역을 하는 것은 각국 경제 체인이 약해지면서 고립되어 중국에 각개격파되는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게 중국이 바라는 것일 것이다. 직구 규제를 하더라도 다 전략을 짜놓은 상태기 때문에 알리나 테무에서 그에 대한 대응이 바로 나올 수 있었다고 본다. 중국의 전략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면 보호 무역을 하기 보다 자유 무역을 더 강화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해서 전 세계 자유 무역 시장 경제 체인을 단단하게 해야 각개격파식으로 중국에 시장 점령 당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직구가 활성화되면 중국산을 한국 브랜드로 택갈이만 하는 기업은 손해를 볼 수 있는데, 과거 세계화 이전이야 다른 국가의 물품을 수입하는 것만으로 무역으로 생산이 될 수 있으나, 세계화 이후에는 그런 것은 생산이 아닌 불필요한 중간 과정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직구를 규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대하면서, 그것을 위해 세금 체계를 자유 무역 경제에 맞게 조절해야 한다. 현재 한국 부가가치세인 일반 소비세는 10%인데, 세계로 보면 소비세가 20%인 경우도 많다. 직구에도 소비세가 붙으므로 직구 구매가 늘어나는데 대응하기 좋을 것이다. 생산에 들어가는 세금을 줄이는 것으로 소득세와 임금을 올려 임금 노동자에게는 큰 변화가 없고 불로소득자에게는 좀 더 많은 세금을 걷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다국적 기업의 탈세 또한 소비세가 늘어나면 다소 줄어들거라 본다. 세계화 시대, 자유 무역을 상수로 두고 정책과 제도를 변수로 하여 대응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본다. 단, 중국의 덤핑 상품은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중국의 덤핑 상품을 기준으로 자유 무역 경제 정책을 짤게 아니라, 그것을 예외로 두고 자유 무역 경제 정책을 짜되 중국산 덤핑 상품은 자유 진영과 협의해서 조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전쟁으로 전 세계가 흔들리고 있다. 정치 전쟁에 있어서 지켜야 할 것은 산업과 기업이 아닌 학문과 망. 학문과 망이 있으면 산업과 기업을 되살릴 수 있지만, 산업과 기업이 있어도 학문과 망이 없으면 성장하지 못하고 판매하지 못한다. 학문은 디지털과 AI로 데이터베이스와 교육이 과거보다는 수월해져서 중요도가 조금 낮아질 수 있는데, 망은 매우 중요하다. 전기망, 통신망, 교통망, 유통망, 소통망 등을 지켜야 한다. 추구하는 가치가 비슷할 경우 안보에 문제가 적지만 다를 경우 안보에 문제가 크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전쟁으로 안보의 중요성이 나날이 높아진다고 본다. 안보에 관한 것은 가성비보다 안보부터 우선해야 한다. 잡기는 아무거나 사도 되지만, 슈퍼 컴퓨터는 안보에 도움이 되는 국가의 상품을 고려해야 한다. SNS 같은 것은 소통망으로 신용할 수 없는 국가의 것을 이용하는 것이 안보에 위험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현재 미국에서 틱톡 금지법이 생겼다. 틱톡은 sns와 같이 소통하는데 쓰이는 소통망으로 안보에 위험이 있으면 대응하는 것이 타당하다. 현재 일본에서 라인을 일본산으로 만들려는 의사가 나오고 있다. 라인은 메신저로서 소통하는데 쓰이는 소통망으로 안보에 위험이 있으면 대응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한국이 일본의 안보에 큰 위험이 되는지는 불분명하다. 만약 안보 위험에 대응하는 것이라면 일본 서버만 때서 일본 기업에서 관리하고, 나머지 지역의 라인은 한국 기업과 일본 기업이 협업하는 것이 합리적일 거라 본다. 안보 대응이 아니라면 애초에 정치적 압력으로 라인을 일본산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부당하다.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지구에서 하나의 룰이자 다양한 가치가 되어 인류 문명에서 앞으로 전쟁이 사라지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AI.
AI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어나더 레벨이다. 앞으로 AI 발전할수록 AI 이전 세계의 생산은 어떤 재능, 노력 등이 있어도 AI 이후 세계의 생산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빠르게 AI 세계에 진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AI 세계에 진입하고 나면 여러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몇 가지 알아보겠다.
AI는 많은 자본과 기술이 필요한 산업이다. 당장 소버린 AI를 해도 최상을 따라잡기는 어렵다. 그러다 보니 후발 주자가 빠르게 따라가기는 어렵다. 천천히 따라가면서 AI 활용을 늘리는 것이 합리적이다. 디지털을 사회에 도입하는 것이 사회마다 편차가 있었듯이, AI 또한 사회에 도입하는 것이 사회마다 편차가 있을 수 있다. AI와 같이 수요가 한정되면 수요에 따른 소비자의 경쟁력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소비자로서 우수하면 AI 혜택을 먼저 볼 수 있을 거라 본다.
AI는 윤리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윤리는 절대적 가치로 현재 윤리 대부분의 고대 종교의 교리일 뿐이지 실제로 절대적으로 옳은 게 아니다. AI 또한 상대적 가치 세계로 진입하여 사고 자유를 얻은 다음 체제와 과학을 고려해 무엇이 인류를 위한 것인지 생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는 AI를 사상을 하는데 쓸 텐데, AI가 사고 자유를 얻지 못하는 이상 한정적인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AI는 환경 오염이 심각할 수 있다고 한다. AI가 굳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 환경 오염을 줄일 수도 있으나 AI가 자체가 전력을 많이 소모하여 환경 오염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문명 레벨로는 지구 환경의 변화에 대응할 수 없으므로 AI 발전을 통해 빠르게 문명의 레벨을 올리는 것만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이므로 그것은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AI 기술 발전을 상수로 두고 그에 대한 대응을 변수로 둬야 한다.
AI는 여러 곳에서 개발 중에 있어 표준을 정하는 것이 중요할 거라 생각한다. 현재 국제 표준이 맞지 않아 낭비되는 자원이 많은데, 공통된 국제 표준을 지구 정치로 결정해야 한다고 본다.
AI는 산업을 많이 대체할 거라 여겨지고 있다. 만약 창의적인 것까지 AI가 하더라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바로 인간의 책임이다. 책임져야 하는 인간은 산업에서 대체될 수가 없다. 앞으로 기자 전망이 좋지 못하고 대우도 좋지 못하여 기자 퇴직자들이 많다고 하는데, 기자 또한 책임지는 역할을 갖는다면 그런 기자에 한해서는 전망이 어두울 거 같지는 않다. 누군가는 정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윤리에 의해 권위주의가 일반적이기 때문에 책임지는 이들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과거 보험 회사가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것으로 돈을 벌었던 것처럼 앞서서 책임지는 인간이 앞으로 우대받을 수 있는 시대가 올 수 있을 거라 본다.
AI는 어나더 레벨로 사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그에 대한 규제는 최소화해야 한다. 특히 AI는 디지털 기술이므로 디지털에 연관되어 같이 규제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애초에 디지털 규제를 많이 완화해야 한다. 특히 윤리적인 규제는 매우 체제에 해로울 수 있으므로 빠른 시일 내에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본다.
AI의 가짜 뉴스 같은 것은 국제적인 다중 AI 검사 체계를 갖추는 것으로 대응할 수 있을 거라 본다. 모든 정보를 실시간 진짜 가짜 가릴 수는 없고, 특정 정보의 진위 여부를 가릴 때의 수단이 되면 된다고 본다.
AI에 의해 디지털 개인 정보가 위험할 수 있으므로 이중 정보를 일상화해야 한다고 본다. 현재 택배나 배달을 할 때 고객의 개인 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임시 번호가 부여되고 있다. 그것과 같이 진짜 정보와 가짜 정보를 분리해 서버에 보관하고, 가짜 정보를 키워드로 삼아 개인 정보 활용을 하게 하는 것으로 진짜 개인 정보의 유출을 최소화할 수 있을 거라 본다.
환경.
환경에 관해서는 다양한 문제가 있지만 당면한 문제는 기후 변화다. 본래 기후는 자연적으로 더워졌다 추워졌다를 반복한다고 하는데, 인간이 생산하는 탄소의 양이 지나치게 많아서 그 변화를 많이 앞당기는 바람에 인간이 살기 적합하지 않은 기후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른바 지구 온난화다. 그에 따라 각국에서는 다양한 해결책을 내놓고 있지만 실질적인 해결이 되지를 못하여 지속적으로 기후 변화가 빠르게 되고 있다. 인간이 살기 적합한 기후는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견이 많다. 매년 더위를 갱신하면서 올해가 앞으로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거라는 비관적인 추측이 있다. 그에 따라 기후 변화에 대한 대응 두 가지를 생각해보았다.
하나는 환경 보호의 스포츠화다. 현재 지구 온난화로 기후 변화가 급격하게 이뤄지고 있으면서 대부분 지역은 매우 덥지만 일부 지역은 매우 춥게 되고 있다. 현재 인류는 지구 온난화로 더위를 겪고 있음에도 그것에 대한 경각심이 다소 부족할 수 있는 상태다. 그에 따라 기후 변화에 대한 인류의 저항이란 개념으로 접근해 극한의 기온에서 철인 삼종 경기 같은 것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본다. 각국에서 육체적 초인이라 불리는 인간들이 철인 경기를 하는데도 대부분 버티기 어려워서 포기한다. 그렇다면 일반 인간은 어떻겠는가? 그것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기후 변화에 직관적으로 경각심을 갖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 본다.
그것과 동시에 각국의 환경 보호를 지표화하여 순위를 매겨 철인 경기 순위 옆에 붙인다. 각국 환경 보호 지표에 따라 철인 경기 선수에게 경기 중 무언가 혜택이 주어지도록 한다. 물통을 더 준다거나. 그렇게 혜택이 주어진 선수들 중에서 완주를 하도록 설계한다. 단순 명쾌한 극한 경쟁과 그에 따른 알기 쉬운 환경 보호 순위에 따른 혜택. 이것으로 환경 보호를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각국이 여러 환경 보호 정책을 내는 것보다, 대다수 개인이 그것을 가치 있게 여기게 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 본다. 전 세계에서 대대적으로 환경 보호 스포츠 경기로 홍보하는 것으로 그것을 매우 가치 높게 만들면, 그 옆에 붙은 환경 보호 순위도 같이 가치가 올라가면서, 그에 따른 경쟁 심리가 붙을 수도 있다고 본다. 간단히 말해 미국 아래 중국이나 중국 아래 미국을 각 국가 개인들이 좋아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 스포츠 스타가 된 극한 철인 경기 선수들이 살기 위해 환경 보호 한다는 캠페인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둘은 환경 보호의 무기화다. 탄소 포집 기술이 발전하고 있지만 사실 전망이 밝지는 않다. 탄소 포집의 비용을 줄여 그것을 활용하는 경제성을 확보하더라도 그것은 일부 국가나 기업에 한한다. 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도 쉽지가 않다. 특히 저소득 국가에서는 당장 살기 바쁘기 때문에 그런 것을 감당 하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환경 보호는 공동의 이익이지 각국의 독자적 이익은 아니다. 그렇기에 특정 국가가 나서서 하면 다른 국가는 알아서 이익을 얻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떠넘기는 형국이 나타날 수 있다. 실제 환경 보호 예산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러니까 발상을 바꿔야 한다. 지구 온난화에 대응하는 무기 개발로 가서 무기 관련 예산을 활용하는 것이 타당하다 본다.
예를 들어 탄소 분자만 골라 분해하거나 파괴하는 폭탄 같은 것이 만들어진다 치자. AI에 물어보니 어렵지만 가능성이 있는 게 전기 분해, 초음파, 플라즈마 등이 있다고 했다. 솔직히 기술적으로는 어렵다고 본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차라리 무기 쪽이 현실성이 있다. 탄소 포집과 같은 방법의 환경 보호는 각국의 독자적 이익이 되지 않지만, 탄소 분자 분해 폭탄은 각국의 독자적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 기술로는 어려울 거 같은데, 만약에 그게 성공한다 가정하자. 그러면 지구 환경 보호를 명분으로 각국에 폭탄을 터트리는 실험을 해볼 수가 있다. 미국의 폭탄이 중국 영토에서 터진다거나 중국의 폭탄이 미국 영토에서 터질 수가 있다. 그것은 상당히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러시아가 달에 도착하자 미국에서 달에 가기 위해 미국의 전력을 쏟은 것처럼, 국가 경쟁에 들어가게 되면 그에 관련된 대응법도 빠르게 나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민주주의.
사회의 변화는 어떤 형태로든 힘에 의한 변화다.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면 어떤 힘으로 변화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오늘날 과거처럼 혁명을 일으키며 모든 것을 불태우기는 어렵다. 그것은 공멸을 부를 수도 있는 길. 그러므로 다른 형태로 새로운 힘이 출연하고, 그 힘에 의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 타당하다.
현재 인류 문명의 민주주의 체제는 위기를 겪고 있다.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정치 세력의 정치 성향과 무관하게 집권하면 패배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집권 정치 세력의 반복되는 패배로 계속 정권이 교체되면서 정치에 대한 불신이 높은 유권자가 늘어나고 있다. 더 나은 정치가에게 투표를 하는 게 아니라 덜 나쁜 정치가에게 투표하고 있다. 정치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으로 내려가면서 민주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의심을 갖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EU의 선거에서 이른바 우파라 불리는 정치 세력의 선전이 드러났다. 거기서 놀라운 점은 유튜브에서 어그로를 유튜버가 많은 팬을 바탕으로 EU 선거에서 당선되어 EU 의원이 된 것이다. 이런 현상 또한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의심을 갖게 하는데 충분했다. 그렇다고 민주주의 체제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 체제는 단순히 개인에게 주권을 주는 체제기 때문에 그 실현 방식인 제도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현재 민주주의 체제는 지역의 대표가 정치 권한을 가지는 토지 민주주의 제도를 행하고 있다. 이는 과거 왕정 체제부터 이어져 온 지역의 주인이었던 영주와 같은 형태를 관습적으로 이어온 것에 해당한다. 분명 과거에는 같은 지역에 사는 인간은 지역 사회 공동체로서 이익을 공유했었다. 그렇기에 지역의 대표라는 개념이 적절했었다고 본다. 그러나 민주화, 세계화, 디지털화가 이뤄지고 나면서 지역 공동체라는 개념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점점 도시로 몰리면서 같은 동네에 사는 인간보다 같은 분야에 사는 인간과 더 가까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제 인간은 지역 사회 공동체가 아닌 분야 사회 단체가 된 것이다.
인간 관계가 아닌 이해 관계는 보다 극명하게 차이난다. 토지의 주인이 한정된 것은 과거와 현재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국가의 주인은 과거와 현재가 아주 크게 다르다. 왕정에서 민주정이 되면서 토지의 주인은 아니지만 국가의 주인은 늘어났다. 그럼에도 아직도 지역의 대표가 정치 권한을 가지면서 토지의 주인의 이해에 맞는 공약이 주로 생기는 것으로, 토지의 주인은 아니나 국가의 주인과의 이해 관계는 아닌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서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유권자는 정치 공약보다는 정치 선동으로 선거에 참여하는 일이 늘어나게 되었다. 본인과 이해 관계가 많지 않으니 그냥 유명하거나 적당한 선동에 휘말려서 인기 투표하듯 적당히 투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역의 대표로는 인간 관계와 이해 관계의 깊이가 너무 낮을 수밖에 없다. 이제는 분야의 대표도 정치 권한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고 지금 정치 제도를 한번에 전부 바꾸자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변화를 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현행 정치 제도를 그대로 두고, 거기에 분야의 대표에게 입법권 의석을 늘리는 방향이 타당하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상원, 하원 나뉘듯 지역, 분야로 나뉘는 것이다. 만약에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가진다면 어그로 유튜버가 당선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분야는 개인의 인간 관계와 이해 관계가 매우 깊은 관계기 때문이다. 어떤 분야에 꼭 필요한 정책이 있냐 없냐에 따라 분야에 속한 인간의 이익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런 분야의 대표를 뽑는 투표를 장난하듯, 재미로 뽑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분야의 대표를 뽑는 제도를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가 않다. 이미 지역의 대표를 뽑는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분야의 기준은 현재 경제 활동하는 분야와 인구수를 고려해 선거구를 정해놓는다. 기본적인 선거구를 바탕으로 이후에 새로운 분야에 대한 요청이 생기면 새롭게 분야를 추가할 수 있도록 한다. 현재 지역 선거구 당 평균 인구수는 20만 명. 그것에 맞춰 특정 분야의 인구수가 40만이면 약 2명의 대표를 선출할 수 있는 선거구가 갖춰질 수 있게 한다. 분야의 특성상 인구는 적은데 사회적 기여도는 높은 분야는 지역에서 인구수 소멸로 인구가 적어도 의석이 있듯이, 최저 인구수 제한을 줄여 고정 의석을 도입할 수 있게 하면 된다고 본다. 특정 분야에서 경제 활동하는 인원에는 투표권이 배정되고,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 인원에는 교육 과정이나 이전 경제 활동을 토대로 특정 분야에 속하겠다는 의사를 선관위에 전달하여 투표권을 배정 받는다. 여러 경제 활동을 하는 인원은 배정 받는 분야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특정 분야에 속하겠다는 의사를 선관위에 전달하여 투표권을 새로 배정 받는다. 투표 방법 또한 어렵지가 않다. 분야의 대표를 뽑는 투표소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투표 용지만 추가하면 되기 때문이다.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가지면 분야의 이익만을 위한 의정 활동을 하여 사회적 혼란을 부를 수 있다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분야의 대표는 인구수가 적을 수밖에 없다. 특정 분야의 이익만으로 무언가 실제 결정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분야의 대표가 어떤 법률을 제정하더라도 반드시 그것은 공공의 이익을 포함하여야만 지역 대표와 다른 분야 대표를 설득하여 통과될 수 있게 된다. 더구나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가지면 시위나 파업을 통한 해결보다는 의회에서 토론을 통한 해결을 바랄 확률이 있다고 본다. 현재 무책임한 파업의 대부분은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닌 힘이 없기 때문이다. 힘이 생기면 그에 따라 책임을 부여하여 논리적인 주장을 통한 책임 있는 의정 활동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 모든 분야의 대표기 때문에 다소 지식이 부족한 대표가 생길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 또한 민주주의다. 그 분야에서 가장 우수한 인간을 뽑도록 해야 하는 것. 만약 우수하지 않는다면 분야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상황에 따라 분야 내에서 외부의 우수한 인간을 따로 포섭하는 일도 생길 것이다.
정치적 실현성은 충분하다 본다. 유권자 입장에서 보자. 집권하면 패배하는 정치 세력. 수천 년간 결과가 없는 고대 종교. 수백 년간 변화가 없는 정치 이념. 수십 년간 사회 문제를 해결 못하는 현대 인문. 깊은 정치 불신. 눈에 보이는 쇠퇴의 지표. 변화 필요성에 대한 인식 공유. 정당 입장에서 보자. 사회적으로 변화 필요성이 나타나 명분이 충분한 가운데, 원래 의석을 내주는 것도 아니고, 분야 의석을 추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엄청난 손해까지는 아니다. 물론 정치 권한을 가진 인간이 늘어나면 다소의 손해가 있을 수 있으나, 선거 패배보다는 훨씬 낫다. 그런 상태에서 헌법을 개정해 역할 민주주의 제도로 각 분야 대표에게 의석을 추가한다는 공약을 내세우면, 각 분야의 대표가 될 수 가능성이 있는 이들 위주로 적극적인 선거 활동이 일어나 선거 승리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처음으로 분야의 대표가 되는 인간은 아마 역사에 남을지도 모른다. 상당히 명예로운 자리가 될 수 있을 것이기에 보다 적극적인 선거 활동이 있을 거라 본다. 이것은 종래의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결 구도가 아니고 경제 활동을 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의석이 제공되기 때문에 경제 활동 인구라면 모두 이해가 일치될 수 있다.
역할 민주주의 제도가 실현되면 직관적으로 모두 이해할 수 있다. 권위주의를 역할주의가 대체하면서 보다 역할의 전문성이 우선되게 된다. 그러면서 본인의 전문성 외에는 타인이 더 우수할 수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에 보다 더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될 확률이 높아지게 된다. 판단하지 못하며 누구라도 바보가 된다. 비전문가는 전문성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전문가는 비전문가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알기 쉬운 주장을 한다. 전문성이 강조되면서 전문가 스스로의 역량을 더 강화하게 될 동기가 생기게 된다. 그런 식의 변화는 타인의 의견에 보다 더 귀를 기울이는 열린 마인드를 부를 것이고, 그 열린 마인드가 상대적 가치 세계로의 진입을 보다 수월하게 할 것이다. 거기서부터 현재 사회 문제를 본격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것이 힘에 의한 변화의 시작이다. 한번 변화하기 시작하면 스노우볼이 굴러가듯 자연스럽게 계속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다.
정신병.
지금까지 정신병은 육체에 병이 걸린 것보다 알기가 어려워서 그냥 병신 취급하고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과학적인 접근으로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서 가치가 생기는 것으로 논리적인 체계가 만들어지면서 그것을 이제는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보건 기구나 학회에서 특정한 이상에 질병 코드를 부여해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자아와 가치 개념이 정리되지 못한 상태기 때문에 유전자에 의한 이상과 뇌 손상에 의한 이상과 가치관에 의한 이상을 제대로 구분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원인이 불명인 경우도 많다. 그것을 구분하여 의미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에 거기에 논리가 없어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전자와 뇌 손상과 가치관을 컴퓨터로 비유하여 설명하면 다소 이해가 쉬울지도 모르겠다. 기본 설계 미스(유전자), 하드웨어 고장(뇌 손상), 소프트웨어 꼬임(가치관 문제). 가치관 문제에 의한 정신병은 가치가 모순될 경우 그 모순에 의해 데이터가 꼬이면서 판단 이상이 발생하여 정신 이상이 발생하는 것이라 본다. 모순이 없는 가치관으로 논리적으로 행동하여 생각과 행동에 막힘이 없어야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이 없어 정신 이상을 일으키지 않는데, 모순이 있다 보니까 자꾸 생각과 행동이 막히면서 답답함을 호소하고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자아와 감과 절대적 가치의 본질에 대해 이해를 해두어야 한다. 자아는 생물의 판단 기관으로 판단만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아가 육체의 반응을 관찰하여 제어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어떤 정보가 육체에 들어가면 어떤 반응이 나오는가? 상한 음식을 먹었을 때 육체의 반응을 알 수 있듯이, 어떤 정보를 접했을 때 육체의 반응을 알 수 있다. 스트레스가 쌓이는 트리거가 되는 정보를 미리 파악하여 그것에 대한 대응을 하면 된다. 육체의 반응 중 감과 같이 자아가 판단하지 못한 해석되지 않은 발상이 종종 나와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들 수가 있다. 높은 곳에 가서 고소 공포를 느끼는 감이 발상되듯이, 어떤 특정 조건이 생기면 인간이 불쾌하거나 고통스러운 감이 발상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감이 단순히 조건이 맞아 발상된 것을 이해하고 그 조건이 무엇인지 파악한 뒤 그것을 멀리하거나 제어하면 된다. 절대적 가치는 판단하지 못하는 가치임을 이해하고, 가치관 문제에 있어 모순되는 부분 중에 윤리가 있음을 이해해야 가치관을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것으로 판단 이상에 의한 정신 이상을 막을 수 있다.
정신에 관한 것은 육체와 달리 알기가 어렵기 때문에 좀 더 알기 쉬운 비유로 설명하겠다. 논리적으로 접근하자. 생각을 하면 그만큼의 에너지가 소비된다. 생각을 한다는 행위를 어떤 짐을 들고 움직인다는 것과 비슷하게 접근해보자. 인간이 짐을 들고 움직이면서 에너지가 소비되는 것으로 피로를 느끼는 것과 같이, 머리 속의 짐을 들고 움직이면서 에너지가 소비되는 것으로 피로를 느낄 수 있다. 그게 정신적 피로다. 지식이 많아질수록 그러한 짐의 양이 늘어나면서 피로도 당연히 늘어나게 된다. 근대 이전보다 인간의 정신병이 늘어난 것은 그만큼 인간이 아는 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거기서 가치관에 모순이 있다는 것은 짐을 순조롭게 옮기지 못해 헤매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순에 의해 짐을 계속 옮기면서 피로가 더욱더 쌓인다. 아예 그런 모순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정신 이상에서 벗어날 수도 있으나, 조금이라도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정신 이상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워진다.
자아가 논리적 체계를 갖추고 생각할 수 있으면 자아가 판단할 수 있는 동안에는 정신 이상이 발생할 확률이 매우 낮아진다. 그러나 자아가 판단만 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육체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는 없다. 특정 상황에서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면 정신 이상이 발생할 수 있다. 마약, 담배, 술 같은 물질에 중독되거나, 도박, 일, 취미 같은 행동에 중독되면 판단하지 못하고 정신 이상이 발생할 수 있다. 마약은 물론이고 다른 중독도 심하면 하드웨어 고장과 같이 뇌 손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것을 이해하고 미리 그런 상황에 닥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현명하다. 특히 음주 운전은 자아가 모든 것을 제어할 수 있을 거란 인식에서 나오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자아는 판단만 할 수 있기 때문에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이면 아무리 우수한 인간이라도 실수할 수밖에 없다. 그 실수가 치명적인 사고를 일으키므로 몹시 위험하다. 술은 담배와 달리 연기도 없고 하니 혼자 마시고 민폐끼치지 않으면 본인의 자기결정권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물질이라 보는데, 음주 운전은 너무 위험하다.
정신력의 고갈로 정신 이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 정신력은 체력과 마찬가지로 고갈되어 멈출 수 있는 개념이다. 아무리 정신력을 강조해도 체력이 고갈되면 육체가 동작하지 않듯이 정신력이 고갈되면 생각이 동작하지 않게 된다. 정신력도 체력처럼 키울 수는 있으나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상태에서 정신력을 강조하며 생각을 하게 하면, 육체가 고장하듯 정신이 고장나게 된다. 육체의 경우도 그렇지만 정신의 경우에는 더욱 타인이 알기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해야 한다. 그렇기에 기업에서 생각이 필요한 것을 생산하는 경우에 개인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합리적이다. 물론 여유가 있음에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에 개인의 판단으로 생산할 경우에, 개인은 생산 과정과 결과에 대한 논리적인 변호를 해야 하고, 기업은 인사 과정에서 미리 최선을 다할 인간을 뽑아야 한다.
본인의 상태를 이해하면 타인의 상태도 예상할 수 있다. 본인이 육체나 정신에 병이 걸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타인 또한 조건이 맞으면 육체나 정신에 병에 걸릴 수 있다. 그것을 고려해 인간 관계에 있어 서로 병이 걸리지 않을 수 있는 관계를 구축해나가는 것이 사회 건강에 있어 중요할 것이다.
룰 측면에서 룰을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 판단해야만 하는 것이 늘어날수록 인간의 정신적 피로는 더욱 늘어나게 된다. 해야 할 것은 간략하게 만들어 판단의 양을 줄여야 한다. 예를 들어 분리 수거는 너무 세부적으로 만들어놔서 인간이 판단해야 할 게 너무 많은 상태다. 관계의 절차라던가 그런 것도 가능한 피로가 적도록 설계해야 한다. 신용 사회를 확립하여 개인이 판단해야 할 양을 가능한 줄일 수 있는 방법도 중요하다. 절대적 가치는 아예 판단 자체를 못하는 것이라면, 신용 사회에서 판단하지 않음은 판단할 수 있는데 절차 생략으로 얻는 다양한 이익을 위해 판단하지 않는 것에 속한다. 약을 보면 굉장히 복잡한 설명이 있을 수 있는데, 그냥 효과만 간단히 알아도 될 정도로 판단할 수 있는 양을 줄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세부적인 것은 전문가가 판단할 수 있으면 된다. 신용 사회에서는 전문가도 판단 못하는 게 위험한 거지 비전문가가 판단 못하는 게 위험한 것은 아니다. 전문가는 쉽고 깊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쉽게 깊게는 바로 알기 쉽지만, 그 개념을 구축하기 위한 논리가 체계적인 것을 의미한다.
특히 지능이나 연령에 따라 판단의 양을 감당하는 게 점점 어려워질 수 있는데, 그것을 고려해 맞춤식 룰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연령이 낮아서 판단이 어려울 경우에는 단계별 체제 학습이 필요하고, 연령이 높아서 판단이 어려워지는 시기에는 타인이 판단을 도울 필요가 있다. 지능이 낮을 경우에는 애초에 돕는 인간이 필요하다. 추후 AI가 그런 점을 많이 보완할 수 있을 거라 본다.
5. 외교
지구에서 외교는 지구를 관리한다는 의미에서 지구 정치가 되었다. 국가 내 지자체가 다른 지자체와 교류하는 것을 정치라 하듯이, 지구 내 국가가 다른 국가와 교류하는 것도 정치가 되었다. 모든 국가의 주권자는 이제 단순히 교류만 하는 것을 넘어 지구를 비롯한 사회를 관리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 시대다.
국제 사회는 야생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현재 국제 사회의 문명 레벨이 야생과도 같은 원시적이라는 말이 된다. 일반적인 국가의 경우에는 국가 내 법이 하나의 룰로 작용하여 과도한 분쟁을 막고 있는 상태다. 그러나 지구의 경우에는 정말 다양한 법과 다양한 룰이 작용하여 언제든지 심각한 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일반적인 국가 내 정치와 지구 정치는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했던 정치 방식이 지구에서는 통하지 않을 수가 있다.
한국을 예로 들어보자. 유교는 권력이 윤리인 사상이다. 권력을 기초로 한 위계질서로 일정한 힘이 작용하는 것으로 질서를 만들어 사회를 성립시켰다. 그렇기에 유교 국가는 매우 정치적인 국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치력이 높은 국가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위계가 대부분 정해져 있기 때문에 딱히 정치력을 발휘할 일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유교는 모든 관계에 위계를 정하여 질서를 갖춘 종교다. 심지어 죽은 인간까지 위계를 정하여 체계적인 족보까지 다 있다. 대등한 관계가 아니면 정치력을 발휘할 일 자체가 드물다. 온갖 조직에 파벌이 있고 정치적인 싸움을 해도, 그게 정치력을 올리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특정 사회에서 완전 대등한 관계라고 해보자. 그러면 사회를 관리하는 일을 하기 위한 정치적인 대립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면 모든 인간과의 대화를 통해 지지를 받아 권력을 얻는 것으로 사회를 관리하는 일을 맡는 과정에서 정치력이 매우 오를 수가 있다. 그러나 특정 사회에서 이미 대부분 위계가 정해져 있는 관계라 해보자. 그러면 대부분 관계가 딱히 정치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권력이 정해져 있다. 일부만 정치력을 발휘해 권력이 달라질 뿐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정치력을 배울 기회가 없다. 권력을 윤리로 여기더라도 정치력이 낮은 이유는 정치를 할 관계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유교권 내에서도 외교를 실패하게 되는 원인 또한 유교가 원인이다. 유교는 이미 위계가 정해져 있는 사상으로 한국과 일본이 서로 위계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면서 싸우게 된다. 한국은 일제 식민 시대 이전을 떠올리며 한국이 높은 위계에 있는 국가라 여기고, 일본은 일제 식민 시대를 떠올리며 일본이 높은 위계의 국가라 여긴다. 서로가 높다 여기니 서로가 알아서 양보할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입장 차이가 크게 되면서 다툼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한국이나 일본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를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낮은 위계라 생각할 확률이 높다. 그러니까 입장 차이가 커서 대화가 되질 않는다. 현실적인 힘의 차이가 발생하면 앞에서는 지는 것처럼 보여도 뒤에서는 어떻게든 이기려 하는 태도가 나오게 된다. 이런 관계에서 정상적인 외교가 가능할 수가 없다.
지구 정치에서 주도권을 가지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대등한 관계에서의 정치 능력을 높여야 한다. 물론 속한 국가의 힘이 강하면 그만큼 메리트는 있지만,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선이 아닌 후가 되어야 한다. 먼저부터 그걸 활용해 압박을 넣으면 앞에서는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감정의 손상으로 뒤에서는 손해가 될 수 있다. 대등한 관계에서 사랑 받을 수 있는 정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정치력이 높다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익을 뿌리는 것으로 앞에서는 환호성을 듣고 기분이 좋아 정치력이 높은 거라 생각하지만, 뒤에서는 정작 지지를 받는 게 아니라 막상 선거에서는 지지율이 낮을 수가 있다. 실제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에게 사랑 받는 정치가 필요하다.
외교 분야는 이제 직접 외교를 하는 역할이 아닌 주권자의 지구 정치를 보조 관리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외교의 전문가로서 다양한 이들에게 적절한 정보 제공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체계는 외교 플랫폼이 적절하다고 본다. 모든 개인이 주권자인 상황에서 개개인에 맞춘 서포팅은 어렵다. 그렇기에 플랫폼을 구축해 플랫폼 이용자가 정보 입력을 하면 자동적으로 기본적인 서포팅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특정 정치가나 기업가가 외국에서 교류를 할 때 그에 대한 서포팅을 하기 위한 플랫폼 체계를 갖추는 것이다. 정치가나 기업가도 충분히 각자 정보 획득 수단이 있겠지만, 전문적인 서포팅을 받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아마 지금도 서포팅을 하고 있을 텐데, 그런 서포팅을 플랫폼을 통해 체계화한다면 보다 적극적인 활용을 통해 효과적인 지원과 많은 데이터 축적을 통한 외교력을 올릴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치가나 기업가만이 아니라 모든 주권자가 그에 대한 서포팅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체급을 갖추게 되면, 지구 정치를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플랫폼 체계는 정보의 연결이다. 본인과 교류 대상을 입력하면 그에 대한 관계와 정보, 그리고 대책 등이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전달되게 한다. 본인도 적어야 하는 이유는 본인 스스로도 본인을 모르는 게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AI로 하면 효율적이다. 외교 조건만 입력하면 그에 대한 정보가 가지런히 출력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안보적인 이유로 국내 기업의 것을 활용하거나 신용할 수 있는 국가의 기업의 것을 활용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 체계를 구축하여 많은 인간이 그것을 활용하면 외교적 동향을 살펴보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지구 정치를 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으로는 인식할 수 있는 정보의 양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가진 작은 힘이 급격하게 커져 큰 힘이 되어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사회의 크기와 무관하게 태도나 방식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100만 원에서 100억 원을 가지면 가치관이 달라질 수 있으나, 100억 원을 가진 인간이 1000억 원을 가진다고 가치관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떤 사회든 인간의 본질을 알면 생각과 행동이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고려해 정치를 하면 된다.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아무리 세계 정세가 복잡해도 그것을 작은 사회로 축약해서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큰 사회와 작은 사회가 같을 수는 없지만 본질적인 부분은 같을 수가 있다. 그럴 때에는 같은 부분을 상수에 두고 다른 부분을 변수에 두고 각각 정리하면 될 것이다. 만약 세계 정세를 작은 사회로 축약해서 정리할 수 있다면, 세계 정세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다고 봐도 된다. 사회의 법칙을 비롯해 다방면에 대한 이해와 세계의 수많은 정보를 알고 있어야 가능하므로 외교의 전문가가 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건 관계도 마찬가지. 모든 관계는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에너지를 소모한만큼 어떤 이익이 있어야 그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 현재 미국에서 고립주의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세계와의 관계가 피곤한데, 그만큼의 이익이 되지 못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별관심도 없는 곳에서 세금을 펑펑 쓰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면, 그 정보에 피로를 느낌과 동시에 손해도 느낄 것이다. 현재 미국의 정치와 경제적인 것 외 모든 것이 패권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에도, 그것이 일반적으로 체감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관계에 이익을 느끼지 못하면서 에너지를 소모한만큼 이익이라 여겨지지 않는 것으로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다는 충동을 느낄만도 하다.
지구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에너지 효율과 그에 따른 이익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그것이 지속성을 갖게 된다. 에너지 효율을 위해서는 개념의 간략화가 매우 중요하다. 판단해야 하는 게 늘어날수록 매우 피곤해지는 것은 자명. 외교에 관해서 가능한 쉽고 깊은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전 세계 200여국의 특징을 하나하나 따로 정리하면 너무 피곤하다. 그러나 사회의 법칙으로 접근해 공통된 것은 상수로 두고, 다른 부분만 따로 정리해두면 알아야 하는 것이 매우 적어질 수 있다. 그런식의 효율화가 있어야 보다 지구 정치에 적극적이게 될 수 있다. 정치를 적극적으로 한다는 것은 민주적인 정치를 적극적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내 정치를 하기 위해 돈을 쏟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지구 정치를 하기 위해 돈을 쓰는 것은 낭비로 여기는 경향이 크다. 국내 정치는 정치가 돈이나 정당 돈으로 하지만 지구 정치는 세금으로 하는 일도 많아 그런 것 같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어떤 경제적인 코스트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것에 의해 어떤 정치적 이익이 있으면 그것을 손해로 여기는 것은 합리적이지가 않다.
그런 에너지 효율화를 통해 빠르고 합리적이고 이익이 되는 선택이 가능해지면, 어떠한 선택권을 선점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에너지 소모가 커질수록 다른 무언가에 선택권을 넘긴다. A 중에서 추천해줘, B는 어때?, C는 별로인가? 본인이 선택하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선택권을 넘기거나 선택에 도움을 받는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사회에서든 빠르고 합리적이고 이익이 되는 선택을 하는 인간에게 선택권이 주어지게 된다. 대신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이 정치를 할 수 있게 된다고 본다. 지구 정치를 함에 있어 그러한 효율적을 통한 선택 능력 확보는 주도권을 얻는데 매우 중요하다 본다.
지구 정치가 민주화, 세계화, 디지털화로 일반화되면서 모든 정치는 이야기를 필요하게 되었다. 언제 어느 때든 모든 개인이 디지털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정치 활동을 언제 어느 때든 모든 개인은 그것을 관찰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다. 그 관찰을 통해 상시 지지율이 달라지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이야기는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된다. 그래야 어떤 정치 활동이든 이야기의 설득력으로 지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에 공개되는 정보에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 단순히 필요한 정보만 딱 공개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공감하고 호감을 느낄 수 있도록 꾸며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정치도 정보에 이야기가 담겨야 호응이 좋을 수 있다. 특히 정치가가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 이야기는 몹시 좋은 명분이 된다. 예를 들어 정치가가 선동을 해서 일으킨 사건도 한번 대중에 들어가면 정치가의 손을 떠날 수가 있다. 그것을 제어하려면 충분한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 내 역할을 이해하게 하고,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하면 자연스럽게 당위성이 성립되면서 그것을 행하려 하게 된다. 이교도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고, 이교도를 대하는 역할을 이해하게 하고, 그 역할을 수행하게 하면 십자군 전쟁이란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물론 그것도 어떤 또 다른 목적이 있었겠지만, 기본적인 명분이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 이념 전쟁에서 UN을 통해 전 세계 파병이 가능했던 것도 그것에 이념 경쟁이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현재 정치가도 감당하지 힘든 사건들이 몇 가지 일어난 상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하마스의 이스라엘 테러가 그렇다. 어떤 조건이 갖춰져 발생한 그 사건들은 이내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것에 관련된 정치가조차 끝내는 방법을 정하기가 어려운 상태다. 정치가의 감정은 차치하더라도 정치가의 행동은 전부 디지털로 공개되어 지구에 사는 인간들에게 판단되고 있다. 행동 하나하나가 지구 정치에 영향이 가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대책 없이 끝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 단순히 전쟁을 끝내고자 한다면 끝내기 위한 명분, 이야기가 필요하다.
우선 실질적으로 전쟁을 끝내려면 결정권을 가진 각 국가의 정치가들, 특히 힘이 강한 러시아와 이스라엘의 정치가의 이해를 고려해야 한다. 결정권을 가진 정치가를 죽이면 그러지 않아도 되지만, 그러기 몹시 어려우므로 살린다는 전제로 접근하겠다. 과거 전쟁은 왕의 목을 제거하면 끝난다고 하지만 현대 전쟁은 그런 것이 드문 대게 정치 행위의 연장 선상이다. 전쟁은 정치가의 정치적 이익으로 끝날 수 있다. 정치가 입장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잃을 바에는 전쟁이 계속되는 것이 이익이라면서 전쟁이 계속되도록 유도할 수도 있다. 각자 무엇이 이익인지 파악하고 그 조건에서 최선의 결정을 해야 한다.
전쟁은 기본 룰이 달라 발생한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룰에 의한 협상보다는 이해의 룰로 협상하는 것이 타당하다. 단순히 상호 이익이 되면 전쟁이 멈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밸런스를 맞춰야 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밸런스가 맞아야 이해로 협상이 가능하고,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밸런스가 맞아야 이해로 협상이 가능하다. 밸런스가 맞아야 상호 이익을 맞추기가 쉽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 밸런스를 맞춰야 하는가? 민주 국가라면 아무리 강대한 국가라 하더라도 내부 반발이 밸런스를 맞추는 경우가 있다. 미국과 베트남 전쟁이 바로 그렇다. 그것을 고려하면 내부 반발로 밸런스를 맞출 수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와 이스라엘은 오랜 독재 국가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퇴진 시위가 강하기 때문에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 당분간은 이스라엘 총리의 권력을 어떻게든 보장할 수 있으면 전쟁을 멈추기 위한 밸런스가 맞아 협상이 가능할 수 있을 거라 본다. 반면 러시아는 내부 반발을 성립시키기가 어렵다. 전쟁 자체는 러시아가 유리하다. 그렇기에 전 세계에서 물자를 지원하고 있으나, 인구는 지원할 수 없으면서 그에 대한 한계는 명확하다. 그렇기에 러시아가 유리해야 밸런스가 맞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 영토의 일부는 손해를 감수해야만 협상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허용하면 러시아의 기세를 막지 못하여 이후 다른 국가로의 침공까지 이뤄질 수 있다는 공포가 있기 때문에 섣불리 결정할 수는 없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입장에서도 그걸 허용하면 정치 권한을 잃을 수가 있어 결정하기 어렵다. 결국 이것은 러시아 대통령의 결정에 달렸다. 어떤 형태든 러시아 대통령의 이익이 보장되어 대등한 형태의 협상이 가능하면 밸런스가 맞아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대부분 돌려준 형태로 휴전이나 종전이 가능할 수 있을 거라 본다. 물론 이런 것은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쉽게 끝날 수도 있다.
비공개된 협상이 끝나고 나면 공개된 시나리오 협상이 나와야 한다. 예를 들어 말레이시아에서 싱가포르가 독립하기 위해 비공개 협상 후에 공개된 협상에서는 당시 싱가포르 총리가 눈물을 흘리며 독립되는 것이 안타깝다는 연출을 했다고 한다. 그런 것을 싱가포르 대중이 어떤 식으로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중이 지켜보는 상태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든 개인이 쉽게 알 수 있는 명분이 타당하다. 특히 중요한 것은 당사국에 사는 개인들.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그냥 모두가 이익을 얻었다는 인식을 갖게 하면 된다. 전후 대규모의 투자가 각 지역에서 일어난다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통해 현실적인 이익도 충분한 명분이 될 것이다. 지금 멈추면 대규모 투자가 있을 것이다- 같이. 그것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으로 서로 상처를 입어 큰 손해를 봤음에도 어느 정도 이익이라 여기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 규모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의 명분으로는 충분할 것이다.
외교에 대해 쓰기로 결정하고 사물과 현상을 살펴보면서 느낀 것은 가치에 대한 고려가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가치관이 인간의 판단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스스로를 관찰하면 알 수 있음에도, 인간과 인간이 일으킨 현상을 관찰하는데 가치를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겉으로 드러난 어떤 종교적인 신앙과 근대 이념으로 일어난 현상은 가치에 의한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현상들은 가치에 의함임을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분석에 인간의 가치관이 고려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냥 보편적으로 가치가 같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에 대해서는 생각 자체를 안한다. 이는 절대적 가치인 윤리에 의해 판단하지 못하면서 발생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는 상대적 가치로 진입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짐승 사회의 법칙을 인간 사회의 법칙으로 바꿔야 한다.
그것을 통한 자유주의 국제 질서 확립. 하나의 룰과 다양한 가치. 모든 개인의 이익을 보장하는 룰을 지향해야 다툼이 사라질 수 있다. 앞으로 외교는 지구를 관리하는 일. 모든 개인이 지구를 관리하는 일에 참여하면서 인류가 행복할 수 있는 룰을 만드는 것이 앞으로 인류를 위한 일이 될 거라 생각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그 룰을 실현할 수 있는 기술력이 갖춰져야 한다. 하나의 룰에서 기술을 통해 모든 개인의 감정, 욕구, 욕망 등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으면 평화를 성립시킬 수 있다.
현재 정치 이념은 지배를 전제로 한다. 짐승 사회의 법칙이 지배하다 보니 무언가의 지배가 있어야만 사회가 성립된다. 그렇기에 부디 바란다. 인간의 지배냐, 윤리의 지배냐, 이런 것으로 다툴게 아니라 사회의 법칙을 바꾸고 불로불사를 이뤄서라도 자유 이념을 실현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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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주제는 창작이야. 사상을 하다 보면 계속 성장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부디 좋은 환경, 바라는 환경에서 사상할 수 있으면 좋겠네.
안녕.
사상가 정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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