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와 정치
1. 법칙
세계는 자연의 법칙을 아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입자, 원자, 분자. 지구, 태양, 우주. 미시 세계와 거시 세계는 자연의 법칙을 알면 이해할 수 있다.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게 있다면 그에 관한 법칙이 없거나 법칙에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 자연의 법칙은 수많은 조건에서 관찰, 실험, 증명을 거쳐 모순이 없는 상태지만, 인류가 세계 전부를 이해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순이 없어 보여도 있을 수 있을 거라 전제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생물 사회도 자연의 법칙을 알면 이해할 수 있다.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중력을 이해하고 열역학 법칙으로 열에 대해 이해한 것과 같이 생물 사회의 법칙이 있으면 생물 사회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물 사회의 법칙에 대한 이해는 지구를 무대로 하는 외교와 정치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필요한 사전 정의부터 시작해 생물 사회의 법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법칙: 3. 모든 사물과 현상의 원인과 결과 사이에 내재하는 보편적 · 필연적인 불변의 관계.]
[관계: 1. 둘 이상의 사람, 사물, 현상 따위가 서로 관련을 맺거나 관련이 있음. 또는 그런 관련.]
[자연의 법칙: 1. 자연계의 모든 사물과 현상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일정한 법칙. 인과 관계를 기초로 한 존재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생물: 1. 생명을 가지고 스스로 생활 현상을 유지하여 나가는 물체. 영양 · 운동 ·생장 ·증식을 하며, 동물 · 식물 · 미생물로 나뉜다.]
[사회: 3.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형태의 인간 집단. 가족, 마을, 조합, 교회, 계급, 국가, 정당, 회사 따위가 그 주요 행태이다.]
[일정하다: 3. 전체적으로 흐름이나 절차가 규칙적이다.]
[힘: 10. 자연 현상이 일어나는 작용의 세기나 그것이 다른 사물에 영향을 미치는 작용.]
[작용: 1. 어떠한 현상을 일으키거나 영향을 미침.]
[질서: 1. 혼란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게 하는 사물의 순서나 차례.]
우선 필요한 의미를 정리하겠다. 자연의 법칙은 자연계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일정한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생물 사회는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형태의 스스로 움직이는 물체의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사회의 사전적 정의는 사회를 인간 집단이라 규정했으나, 사회를 이루는 생물은 다양하므로 생물 사회의 법칙을 알려면 생물 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생물 사회는 크게 곤충, 포유류, 인간으로 나눠보겠다.
생물 사회의 법칙은 다른 자연 현상과 달리 법칙화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다른 물체와 달리 내부에서 에너지가 방출되어 움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간은 예측 밖의 행동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인과에 대해 알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은 주식으로 재산을 잃은 후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인간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 불가한 물체가 집단을 이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특정한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정한 힘이 작용하여 생물 관계에 질서가 생기면 사회가 성립된다. 이것이 일반 사회의 법칙이다. 모든 생물 사회는 이 법칙으로 존재한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인간의 경우 예측 밖의 행동으로 일정한 힘이 작용하지 못할 수 있다. 인간이 예측 밖의 행동을 하는 것은 인간의 자아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각 개체가 판단을 하면서 일정하지 않은 힘이 작용하면서 인과를 알기 어려웠다. 달리 말해 그 말은 판단을 못하게 하면 일정한 힘이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이다.
곤충류(개미, 벌) 사회는 지능이 매우 낮아 자아가 거의 판단을 할 수 없다. 곤충 사회는 곤충의 자아가 판단할 수 없어 유전자가 지정한대로 행동하면서 일반 사회의 법칙이 성립한다. 그렇기에 곤충은 특별한 조건 필요 없다. 곤충 사회에서 계급, 화합, 폭력 등 어떤 현상이 나타나든 유전자가 지정한 것일 뿐이다. 곤충 사회는 집단 지능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개체 별 자아가 판단을 거의 못하니까 유전자대로 행동하면서 집단 지능처럼 보이는 것이다.
포유류(늑대) 사회는 지능이 낮으나 자아가 단순한 판단은 할 수 있다. 늑대 사회는 늑대의 자아가 단순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유전자가 지정한 것 외의 행동이 가능하면서 사회의 법칙이 성립되지 못할 수가 있다. 그렇기에 늑대는 추가적인 조건이 필요하다. 바로 폭력이다. 늑대 사회에서 일정하지 않은 힘이 작용하면, 폭력으로 제재하여 다시 힘이 일정하게 작용하도록 만든다. 대상을 폭력으로 판단하지 못하게 한 뒤에 지정된 행동을 하도록 만든다. 그것으로 일반 사회의 법칙이 성립시킨다.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폭력을 가해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을 하게 한다. 지능이 있으므로 학습, 훈련 등도 가능하나 일반적으로는 유전자와 폭력으로 늑대 사회는 계급 사회가 되게 된다.
인류 사회는 지능이 높고 학문이 있어 자아가 복잡한 판단을 할 수 있다. 인간 사회는 인간의 자아가 복잡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유전자가 지정한 것 외의 행동이 가능하면서 사회의 법칙이 성립되지 못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인간도 추가적인 조건이 필요하다. 바로 폭력과 도덕이다. 인간 사회에서 일정하지 않은 힘이 작용하면, 폭력으로 제재하여 다시 힘이 일정하게 작용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늑대와 달리 인간은 지능이 높아 단순한 폭력만으로는 힘이 일정하게 작용하도록 만들지 못할 수 있다. 앞에서 폭력에 굴복하며 따르는 것처럼 보여도 뒤에서 머리를 써서 보복할 수가 있다. 연약한 10살도 건장한 30살을 잠자는 동안 죽일 수 있다. 인간 사회는 폭력만으로는 사회 법칙이 성립할 수 없다.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절대적 가치인 도덕이다. 특정 가치는 절대적으로 옳다고 가르쳐 그 가치에 한에서는 판단하지 못하고 지정된 행동을 하도록 만든다. 왕에 대한 충성이나 신에 대한 신앙을 절대적으로 옳다 가르쳐서 연약한 인간이 혈통이나 신앙만으로 사회를 지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약 늑대 사회였다면 그런 약자는 쉽게 제거되었겠지만, 인간 사회에서는 도덕에 의해 그런 일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도덕을 학문화하면 윤리다. 윤리가 사회를 지배할수록 그런 일이 줄어들게 되었다. 개인에게 특정 가치를 절대적으로 여기고 따르게 하여 지배를 수용하게 만든 것으로 그런 것이 가능했다. 도덕과 윤리와 같은 지배 수용 코드가 심어진 인간은 가치를 판단하지 못하면서 쉽사리 타인에게 지배될 확률이 높다. 그것으로 일반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켰다.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폭력만이 아닌 도덕으로도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을 하게 한다. 유전자와 다양한 힘과 윤리로 인간 사회는 계급 사회가 되게 된다.
일반 사회의 법칙이 일정한 힘이 작용하여 생물 관계에 질서가 생기는 것이라면 짐승 사회의 법칙은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하는 것으로 일정한 힘을 작용하게 하여 생물 관계에 질서가 생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곤충은 애초에 자아가 거의 판단을 못해서 유전자대로 움직이면서 자연스럽게 법칙이 성립했고, 늑대는 법칙을 성립시키기 위해 폭력이란 추가 수단을 썼고, 인간은 법칙을 성립시키기 위해 폭력과 도덕이라는 추가 수단을 썼다. 간단히 말해 짐승 사회의 법칙을 지능이 높은 인간에게 맞추기 위해 특정 가치에 한에서는 인간의 지능을 짐승 수준으로 만들어서 짐승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킨 것이다. 인간이 일반 사회의 법칙을 파악하고 그에 맞게 새로운 인간 사회의 법칙을 만든 것이 아니라 짐승 사회의 법칙을 쓴 것은, 짐승 사회에서 인간 사회로 진화하며 발전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짐승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들어간 추가 조건이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절대적 가치인 도덕과 윤리였기 때문에, 법칙에 대해 판단하지 못하면서 다른 자연의 법칙과 달리 사회의 법칙은 알지 못했었다고 본다.
원시 종교와 고대 종교의 도덕과 윤리 등 다양한 판단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는 전부 짐승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키기 위해 들어간 조건이었다. 금욕이나 이타가 고대 종교에서 보편적 도덕과 윤리였던 것은, 도덕과 윤리의 지배에 필요한 가치였기 때문이다. 권선징악, 천국과 지옥, 업보와 윤회 등은 공포에 의한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을 행하게 하기 위한 개념들이다. 이러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회는 사회라는 자연 현상을 만드는 자연의 법칙이 성립되지 못하면서 멸망하게 된다. 적자 생존의 법칙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사회 현상을 성립시키는 조건을 갖춘 사회만 생존한다. 그래서 어쩌면 도덕과 윤리를 맹신했을지도 모르겠다. 절대적인 생존 조건이라 인식했을 수 있으니까. 달리 말해 그런 것이 갖춰지면 아무리 엉망인 사회라도 유지될 수 있다.
다양한 조건으로 나라가 망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회의 법칙이 유지되면 망할 수가 없다. 판단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만 하는데 어떻게 망하겠는가. 지배자가 어떤 실정을 해도 실정 자체로 망하는 게 아니라, 실정으로 더 이상 판단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니까 법칙이 작동하지 않으면서 망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조선은 유교로 500년 이상 지배했고 북한도 3대째 망하지 않는 것이다. 사회 또한 자연의 법칙으로 조건만 갖춰지면 현상이 지속되게 된다. 아마 조선도 외부 압력이 없었다면 조선 왕조가 지금까지 지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윤리가 특정 가치에 한해서는 지능을 짐승 수준으로 만들어 짐승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다방면에 윤리가 강조될수록 관련 가치에 관해서는 레벨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윤리는 판단하지 못하는 절대적 가치기 때문에, 그 가치에 한에서는 전체주의적인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전체주의는 개개인이 판단하지 못하고 집단 내 특정 의견을 맹목적으로 추종할 때를 의미한다. 파시즘이나 나치즘이 그런 식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추종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인류 문명의 기본 법칙은 짐승 사회의 법칙이다. 그 법칙을 성립시키는 개념이 원시 시대의 도덕과 고대 시대의 윤리다. 원시 시대의 도덕으로 만들어진 자유롭지만 잔인한 약육강식과 같은 질서에서 반발하여 나온 것이 고대 시대의 윤리다. 고대 시대의 윤리는 금욕주의와 이타주의를 기본으로 하여 사랑과 평화 같은 인간에게 이로운 것을 많이 주장했으나, 절대적 가치로 판단하지 못하면서 특정 조건에는 맞지만 그 외 조건에는 맞지 않는 것도 절대적으로 지키는 바람에 인간의 자유가 지나치게 억압되게 되었다. 사랑이나 평화를 외친다 하더라도,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을 통한 지배는 원시 시대와 고대 시대가 동일하다. 짐승 사회의 법칙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인간의 폭력 의한 지배나 종교의 윤리에 의한 지배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더구나 사랑과 평화 같은 일견 좋은 가치라 하더라도 모든 조건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지는 않는다. 그걸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인간은 그 가치에 한해 판단을 못하니까 사랑이나 평화를 이용해먹는 인간에게 이용당하는 일이 많은 상태다.
왕정과 종교가 고대 시대의 윤리로 인간을 지배하며 지나치게 억압하면서 인간의 자유를 외치며 일어난 혁명이 자유 혁명이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이념으로 삼았으나, 사회의 법칙이 짐승 사회의 법칙이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서는 안되었다. 짐승 사회의 법칙은 특정 가치에 한에서는 판단하지 못하고 지정된 행동을 해야만 법칙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지배와 피지배가 생기게 되었다. 자유 혁명 당시에는 재력의 지배가 일어나게 되었다. 자유를 외치며 왕정과 종교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자본가가 노동자를 돈으로 지배하는 시대가 오게 되었다. 그럼에도 사회의 법칙이란 자연의 법칙을 몰랐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할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것에 반발한 인간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주장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외쳤다. 그러나 그 이념은 지극히 윤리적이었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해 평화로운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자. 전형적인 종교 평등주의다. 사회의 법칙을 몰랐기에 사회의 법칙을 자유에 맞게 바꾼게 아니라, 당시 짐승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킨 윤리에 맞는 이념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면서 다시 윤리가 인간을 지배하던 고대 시대로 돌아가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윤리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주장한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비판해놓고 종교 가치 실현을 유토피아라 떠든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해 달라진 것은 지배의 수단뿐이다. 재력의 지배에서 윤리의 지배로.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던 공산당은 윤리로 지배하던 종교의 위치를 대신한 것뿐이다. 이런 것은 진보가 아닌 퇴보다. 정교분리로 자유 이념을 추구하면서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갔는데, 다시 종교 가치를 절대적으로 지키면서 근대에서 중세로 되돌아갔다. 어떤 형태로든 짐승 사회의 법칙을 바꾸지 않는 한 지배 체제는 바뀌지 않는다.
짐승 사회의 법칙을 바꿔야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다. 그리고 짐승 사회의 법칙은 절대적이지 않다. 일반 사회의 법칙을 지키면 딱히 짐승 사회의 법칙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 짐승 사회의 법칙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법칙이지 절대적인 법칙은 아니다. 인간의 문명은 이 세상에 수많은 자연스러운 현상을 기초적인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인공적으로 조작하는 것으로 발전해왔다. 그렇게 해서 날지 못하는 인간이 날 수 있게 되고, 깊게 잠수할 수 없는 인간이 잠수할 수 있게 되며, 우주로 갈 수 없는 인간이 우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일반 사회의 법칙을 이용해 인간 사회의 법칙을 새로 만들면 된다. 인간이 자유롭게 판단하면서도 일정한 힘이 작용하여 인간 관계에 질서가 생기는 것으로 사회가 성립하면 된다.
다른 짐승은 지능이 낮고 학문이 없어 판단을 못하게 해야만 일정한 힘이 작용하게 할 수 있는데, 인간은 지능이 높고 학문이 있기 때문에 판단을 하는 것으로 일정한 힘이 작용하게 할 수 있다.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에서 판단 후 계약 행동을 하게 하면 된다. 판단하지 못하고 지정된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판단하고 계약하여 행동을 한다. 그것으로 일반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키는 것은 지능이 높은 존재 말고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윤리에 속한 가치를 전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사랑이든 평화든 그것을 절대적인 게 아닌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판단하지 못하는 지성에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가? 종교 또한 마찬가지다. 공산주의처럼 종교를 배제하지 않는다. 단지 어떤 종교의 가치든 그것은 사회에서 절대적인 게 아닌 상대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모든 가치가 상대적 가치가 되어야 판단할 수 있게 되면서 그것에 대한 타협이 가능해진다. 모든 인간이 판단하여 타협할 수 있는 자유로운 하나의 룰과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사회.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로 실현할 수 있다.
전 세계 민주 국가에서 정치 세력의 정치 이념이나 성향과 무관하게 집권하면 패배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수천 년간 결과가 나오지 않는 고대 종교, 수백 년간 진보하지 못한 근대 이념, 수십 년간 사회 문제 해결 못한 현대 인문.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쌓이고 쌓인 끝에 누구도 고질적 사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으로 어떤 정치 세력도 집권하면 패배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현재 우파와 좌파는 보수와 진보라 부르기 어렵지만, 일단 그것을 기준으로 설명하겠다. 우파가 장기 집권했던 영국이나 일본은 좌파가 승리하고 있고, 좌파가 장기 집권했던 EU에서는 우파가 승리하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고질적 문제는 해결되지 못 한 채 정권만 계속 바뀌고 있다.
고질적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법칙부터 알아야 한다. 그러면 해결되지 못한 많은 사회 문제가 윤리에 의함임을 알 수가 있다. 윤리는 판단하지 못하는 절대적 가치로 윤리로 일어난 현상에 대해 원인을 파악할 때에는 애초에 윤리를 원인 선상에 놓지를 않게 되면서 원인조차 모르게 된다. 현재 수많은 사회 현상이 윤리에 의함인 것조차 모른다. 사회에서 인간이 윤리를 판단하지 못하고 지정된 행동을 하면서 형태는 달라져도 본질이 같은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자유주의 체제에서도 여성 정조관념이 윤리면 기독교 성 엄숙주의나 여성주의의 성 상품화 반대와 같이 형태가 어떻든 여성의 성을 억압하는 환경이 조성된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유교의 상명하복 위계질서가 윤리면 제왕적 대통령제나 귀족적 의회제처럼 형태가 어떻든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왕과 귀족처럼 여기는 경향이 나타난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도 집단주의나 조직주의가 윤리면 기업의 담합이나 노조의 파업같이 형태가 어떻든 전체주의적인 현상이 나타난다. 사회 체제와 무관하게 짐승 사회의 법칙과 그걸 성립시키는 조건에 의한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현상이 윤리에 의함인 것조차 판단하지 못하면서 알 수가 없다. 윤리를 지키는 이상 윤리에 의한 문제는 형태가 달라져도 본질은 같다. 이것은 인과가 분명하고 반복되는 현상으로 법칙이나 다름이 없다.
전 세계 청년들이 과거와 달리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않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현 시대는 학자들조차 헤매고 있다. 젊은이들이 열정을 갖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려면, 알기 쉬운 개념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과거 한국에서는 독립 운동, 산업화, 민주화 같이 젊은이들도 알기 쉬운 길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는 그런 알기 쉬운 길이 많지 않다. 있더라도 그게 모순이 있어 논파되고 있다. 과거에는 이러한 논파가 쉽게 알려지지 않아 모순이 있더라도 적극적인 참여가 있을 수 있었으나, 현재는 디지털화에 의해 이러한 논파를 쉽게 공유할 수 있어 모순이 있으면 참여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어떤 적극적인 활동이 있어도 과거보다는 인구가 적은 까닭이 바로 그 활동의 모순을 알기가 쉽기 때문이다. 특히 윤리적인 활동은 판단을 못하면서 관점만 바꾸면 모순이 많이 보인다. 윤리는 절대적 가치로 절대적으로 지켜야만 한다면서 사회에 속한 인간들에게 강제하고 있는데, 모순 투성이니 반발이 심할 수밖에 없다. 정치 세력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집권하면 패배하고 있고, 절대적으로 옳다 주장하던 것은 모순이 많고, 사회 현상에 대한 원인조차 모르는 상태. 도대체 청년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뭘 하려고 해도 뭐가 뭔지를 모르는데.
청년들의 수동성은 경제가 발전할수록 윤리가 강조되는 현상에 의해 더 강화된다. 경제가 발전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자, 옳다고 생각했던 윤리를 더욱 강조했다. 그러면서 윤리에 의한 판단 불가 영역이 늘어나는 것으로 과거 왕정이나 신정이 지배하기 적합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수동적이고 의욕이 없다. 과거에는 그렇게 만들어서 지배하고 명령하면서 사회가 돌아갔는데, 현재는 자유롭기 때문에 그 수동성과 의욕 상실은 사회 정체를 부르게 된다. EU가 괜히 정체된게 아니다. EU의 정체에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는데, 사회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교육받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필연이다. 윤리가 강조되면서 과거 중세 시대 인간처럼 되면서도 강제할 수 없으니까 사회가 정체되는 것이다.
윤리의 본질은 판단하지 못하게 하여 지정한 행동을 따르게 만드는 것. 그것으로 특정 가치에 한해서는 짐승 레벨의 지능을 갖게 해 짐승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킨다. 간단히 말해 멍청하게 만들어서 지배한다. 윤리를 강조하면 인간이 판단하지 못하고 질서를 따르면서 다소 범죄율 감소가 될 수 있는데, 멍청해지면서 타인에게 이용당하는 것으로 강력 범죄가 늘어나고, 금욕과 이타로 원하는 욕망을 이기적으로 추구할 수가 없어 수동적인 인간이 되는 것으로 사회 활동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게 된다. 열정과 광기로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도전하는 것으로 위대한 것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살며 사료를 받아먹는 존재처럼 되게 된다. 그야말로 왕정이나 신정이 지배하기 딱 좋은 인간이 된다.
고대 시대의 윤리는 인간을 지배하고, 자유주의 체제의 이념은 인간의 자유를 추구한다. 이 둘은 반드시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윤리에 의한 온갖 사회 문제가 나타나는데, 윤리에 의해 판단하지 못하면서 원인조차 모르게 된다. 그걸 전 세계가 경험하고 있다. 분명 전 세계는 체제가 같지 않다. 이념이 다르다를 넘어 시대조차 같지 않을 수 있다. 원시 부족으로 남아있는 곳이 있거나, 중세 시대에 머물러 있는 곳이 있거나, 근대 이념에서 정체된 곳이 있다. 그럼에도 세계화와 디지털화에 의해 개인의 권리에 대한 정보가 공유되면서 개인의 권리가 강조되는 것으로 전 세계에서 자유주의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면서 사회 체제와 무관하게 윤리와 자유의 충돌이 나타나게 된다.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저출산 문제는 그런 것에 의한 현상 중 하나일 뿐이다. 본질적인 문제는 윤리와 자유, 그 이전에 짐승 사회의 법칙과 자유의 모순이다. 자유주의화에 의해 짐승 사회의 법칙이 성립되지 못하면서 점점 사회라는 현상이 사라짐에 따라 각 사회들이 멸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개인을 억압하여 멍청하게 만들어 개인을 짐승 사회의 법칙에 맞게끔 하거나, 자유로운 개인을 위해 인간 사회의 법칙으로 바꿔야 한다. 새로운 인간 사회의 법칙이냐, 아니면 다시 짐승 사회의 법칙이냐 골라야 한다. 짐승으로 사느냐, 인간으로 사느냐 결정해야 한다.
전 세계가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를 도입하면 전쟁을 멈출 수가 있다. 인류 역사상 전쟁이 사라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전쟁이 멈출 수 있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의 본질을 알면 멈출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전쟁의 본질은 룰의 차이에 의한 다툼이다. 한자어로는 규칙, 규범, 규약, 규율 등 다양하므로 관련 개념을 룰로 통일하겠다. 룰의 차이에 의한 다툼이으로 룰의 차이가 없게 만들면 전쟁은 없어진다.
전쟁의 본질은 관계로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 관계에서 룰이 다르면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교와 민주주의 룰이 다르다고 하자. 유교는 연령, 학문 등에 의한 권력이 차등이 룰이고, 민주주의는 정부 권력의 평등이 룰이기에 서로가 모순으로 충돌하면서 내적 갈등이나 인간 관계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유교는 판단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 민주주의는 판단할 수 있는 상대적 가치기에 보통 연령에 따른 반말, 존댓말이 우선되곤 한다.
사회 관계에서 룰이 다르면 범죄가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개인의 가족주의와 사회의 공정 경쟁의 룰이 충돌한다고 하자. 가족주의는 개인보다 가족을 우선하면서 가족의 행복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고, 공정 경쟁은 공정한 경쟁을 위해 가족을 위해 비리를 저지르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에 서로가 모순으로 충돌하면서 범죄가 발생할 수 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개인이 비리를 저지르는 희생을 하는 것으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 입시나 취업 비리는 대부분 이러한 윤리에 의한 것이다.
사회와 사회의 관계에서 룰이 다르면 분쟁이나 전쟁이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종교가 다르면 십자군 전쟁마냥 전쟁이 발생할 수 있다. 오늘날 전쟁이나 전쟁 위험도 전부 룰이 다르기에 발생한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하마스의 이스라엘 테러, 중국의 대만 도발 등이 그러하다. 한국은 룰의 차이로 전쟁이 발생하고 오랜 기간 휴전 상태기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 한국을 도발하는 것도 룰이 다르기 때문이다.
전쟁을 어렵게 생각할 수 있는데, 국내에서 룰의 차이로 분쟁이 발생한 것을 제압하는 것이 경찰의 치안 활동이고, 국외에서 룰의 차이로 분쟁이나 전쟁이 발생한 것을 대응하는 것이 군대의 전쟁 활동이다. 내외의 차이이지 본질은 다르지 않다. 오늘날 세계화 시대에 세계와 관계를 단절할 것이 아니라면 국제 룰을 통한 다른 사회 개입은 그것이 정당하냐 부당하냐의 차이지 자연스러운 일이다.
전쟁의 화려함, 잔인함, 끔찍함 등에 눈이 가다 보니 왜 전쟁을 하는지 잊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형태의 다툼은 룰의 차이에 의한 것이다. 정복 전쟁이 룰의 차이에 의한 것이라 말하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그것이 정당하든 부당하든 어느 한쪽이 룰에 속하기로 결정하면 전쟁은 성립할 수 없다. 일방적으로 항복 선언하고 다 내주면 전쟁이 일어날 이유가 없다. 한국은 이미 역사로 그걸 알고 있다. 한일합병조약. 조선 왕조가 500여년간 유교로 조선을 지배하다 운영 실패하고는 일제와 조선 정치가의 압력으로 나라를 일제에 파는 손절을 한 뒤 일제 귀족이 된 사례가 있다. 그 과정에서 일제와 조선 정치가의 다방면에서의 압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선 왕조가 영토와 백성을 일제에 팔았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토지 매매와 인신매매였다. 정녕 조선 왕조가 당시 백성들을 인간으로 여겼다면, 국가의 매매 과정에서 백성의 주권을 보장하는 것과 같은 계약이 있었어야 했다. 그런 것이 없었으므로 한일합병조약은 조선 백성에게 있어 단순히 주인이 바뀐 것일 뿐이다. 같은 민족이든 다른 민족이든 지배자 개념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부당하더라도 한쪽 룰에 속하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전쟁은 룰의 차이에 의해 발생한다. 그렇다면 전쟁은 룰의 차이가 없도록 모두가 하나의 룰을 따르면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인류는 역사를 통해 룰이 하나라 하더라도 분열되어 전쟁이 다시 발생한 사례를 많이 알고 있다. 왜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가? 그것은 짐승 사회의 법칙에 의한 지배 체계에 의해 국가의 룰과 개인의 룰이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지배와 피지배가 존재하는 룰에서는 피지배자가 손해를 보기 때문에, 그 룰을 따르지 않고 다른 룰을 주장하는 것으로 룰의 차이가 발생하면서 전쟁이 나타날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개인이 손해보지 않는 이기적인 하나의 룰이 있어야 전쟁이 사라질 수 있다.
현재 윤리 사상인 사회주의, PC주의, 여성주의의 룰을 주장하고 실행하고 있음에도 국가 내 갈등과 분쟁이 사라지기는커녕 심해지는 것은, 그에 따라 부당하게 손해를 보는 개인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강자가 손해를 보고, PC주의는 다수가 손해를 보고, 여성주의는 남성이 손해를 본다. 이타적인 그 룰을 수용할 수 없으면서 다른 룰을 주장하는 것으로 내부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많은 난민을 수용한 유럽 국가들의 내부 갈등과 분쟁은 사회의 룰, 개인의 룰, 난민의 룰 등 너무 룰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분명하게 말하는데, 다양한 룰과 다양한 가치와 하나의 룰과 다양한 가치는 다른 개념이다. 절대적 가치인 윤리가 들어가는 이상 다른 가치와 타협할 수 없으면서 룰이 다양하게 될 수밖에 없다. 하나의 룰과 다양한 가치는 오로지 상대적 가치로만 가능하다.
그렇기에 판단 후 계약 행동하는 인간 사회의 법칙과 모든 개인의 이기적인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주의 체제만이 세계 내 룰을 최소화하여 다툼, 갈등, 범죄, 전쟁을 줄이거나 막을 수 있다. 사회 내 같은 룰이라 하더라도 개개인의 이레귤러적인 범죄는 막을 수 없으나 사회와 사회가 같은 룰이면 전쟁은 막을 수 있다. 실제 자유 진영이나 EU는 서로 전쟁을 멈춘지 오래되었다. 문화 상대주의로 다양한 절대적 가치의 공존을 주장하여 절대적 가치에 의한 룰의 다양화가 내부 갈등을 심각하게 하긴 했음에도 전쟁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자유, 인권, 시장 등의 국제법을 준수 하는 것으로 교류에 쓰이는 룰은 대체로 하나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현재 전쟁은 체제나 시대가 달라 그런 국제 룰을 지키지 않을 때만 나타나고 있다. 무기의 발전이나 디지털화는 그러한 룰의 하나를 촉진하거나 단단하게 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민주화 또한 절대적 가치 외에도 다양한 가치가 보장되면서 룰의 폭이 넓어지는 것으로 보다 수용할 수 있는 가치가 많아짐에 따라 다툼을 줄이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과거의 사회는 짐승 사회의 법칙과 도덕과 윤리를 기초로 한 룰인 법과 그것을 바탕으로 정복자의 체제로 만들어졌다면, 오늘의 사회는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와 체제의 룰인 법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법은 포지티브로 접근하여 모든 것을 허용하고 일부만 금지하도록 해야 한다. 하나의 룰을 실현하려면 인간의 자아, 감정, 욕구, 욕망, 행복 등을 이해하고 하나의 룰에서 충족할 수 있도록 설계하여 자발적으로 하나의 룰을 따르게끔 만들어야 한다. 경제 물리학으로 접근해 물리적으로 어떻게 해야 인간이 에너지를 방출하여 행동을 하는 것으로 경제적인 소비, 생산, 분배 활동이 일어나고, 어떻게 해야 행복을 느낄 수 있는지를 파악하여 가치 관리를 해야 한다. 인류 문명을 전부 과학화한다. 이것이 가능해지면 대부분의 사회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물론 아직 현재로는 결정적 한계가 있다. 늙음과 죽음이다. 늙음과 죽음으로 하나의 룰 내에서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하여 다양한 룰이 생기는 것은 현재로서 막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불로불사까지 달성하면 아마 대부분의 분쟁과 전쟁은 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 전쟁을 일으키는 또는 일으키려는 국가의 통치자들 또한 늙음이나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그런 극단적 선택을 할 이유가 없다. 불로와 불사가 하나의 룰에 포함되어야 주어진다면 하나의 룰을 지키게 될 것이다. 하나의 룰 내에서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으면 굳이 그 룰 밖에 나갈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불로와 불사까지 도달하기 위한 기술 발전 또한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로 가능하다. 인간의 성장과 가능성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보다 높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가치가 그렇다. 모든 가치를 판단할 수 있어야 보다 자유로운 사고를 통해 더 높은 레벨로 나아갈 수 있다. 판단하지 못하는 가치인 절대적 가치의 세계에 갇혀있는 한 발상의 한계가 뻔하다. 모든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상대적 가치의 세계로 진입해야 사고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사회의 법칙을 기초로 인류 문명을 간단히 알아보았다. 인류 문명은 원시, 고대, 중세, 근대를 거쳐 발전하면서 자유 혁명 이후 윤리와 자유의 충돌하였다. 룰은 근대에 머물러 민주화인 상태에서 기술은 현대와 같이 발전하면서 본격적인 세계화와 새로운 디지털화가 활성화되었다. 그것으로 윤리와 자유의 충돌이 전 세계적인 사회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그것과 같이 외교와 정치 또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졌다. 민주화로 주권자가 늘어나고 세계화로 세계가 넓어지고 디지털화로 관계가 좁아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것에 의해 외교 분야의 역할과 국제 정치 개념이 달라진다. 그것에 대해 알아보자.
[외교: 1. 다른 나라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관계를 맺는 일.]
[정치: 1. 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
[권력: 1.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 특히 국가나 정부가 국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강제력을 이른다.]
외교는 다른 나라, 즉 다른 사회와 관계를 맺는 일이다. 정치는 나라를 다스리다, 즉 사회를 관리하는 일이다. 권력은 사회 구성원에게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이다. 외교에서 정치라는 것은 국가와 국가를 관리하는 일. 즉 타국에 어떠한 강제력을 행사하는 행위를 통해 관계가 있는 사회를 관리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행위는 모두 주권자가 한다. 과거에는 왕이다. 외교의 경우 왕을 대리해 다른 사회와 관계를 맺는다. 정치의 경우 왕이 사회를 관리한다. 권력의 경우 왕이 사회 구성원에게 강제력을 행사한다. 외교에서 정치는 왕이 타국에 강제력을 행사하는 행위. 통상 경제적 교류를 통하나 타협할 수 없으면 무력 행사를 통해 강제력을 행사하여 각 사회를 원하는 대로 관리한다. 그게 분쟁 또는 전쟁. 모든 전쟁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목적의 수단이므로 어떤 형태라 하더라도 정치 전쟁이 된다.
민주화, 세계화, 디지털화는 이러한 외교와 정치 개념을 크게 바꾸었다. 민주주의는 사회에 속한 모든 개인이 주권을 가진 권한이 다른 통치자가 되는 체제다. 모든 개인이 정부 권력을 가지고 권력을 행사한다. 정치가와는 권한이 다를 뿐이다. 즉 민주화를 통해 주권을 가진 인간이 왕에서 모든 개인으로 바뀌었다. 이것에 의해 외교 개념 자체가 완전히 달라진다. 직접 교류가 아닌 교류 관리로 바뀌었다. 주권자가 다른 사회와 교류하는 것이 외교이므로, 대통령뿐만 아니라 정치가, 기업가는 물론이고 사회에 속한 주권자라면 누구라도 다른 사회의 주권자와 교류하면 외교가 된다. 세계화를 통해 외교를 해야 할 국가가 모든 국가로 바뀌었다. 세계화 이전에는 인접한 국가와의 외교부터 시작해 그 외 특정 국가와 외교를 해왔지만, 세계화 이후에는 그야말로 모든 국가가 외교 대상이 된다. 세계가 넓어졌다. 디지털화를 통해 전 세계와의 교류를 실시간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에서 빛의 속도로 지구 반대편 소식을 받아볼 수 있다. 디지털로 받는 정보는 외부에서 왔으나 내부에 존재하는 것을 아는 것이므로 그 거리가 좁혀진 것은 아니지만, 정보 교류를 통한 관계가 굉장히 좁아졌음은 부정할 수 없다. 세계화와 디지털화로 세계는 넓어지고 관계는 좁아진다. 그에 따라 주권자들이 외교 분야를 거치지 않고 외교를 하는 일이 엄청나게 늘어나게 되었다. 과거 왕은 직접 다른 사회와 교류하기 어려워 외교관이 대리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지금 대통령은 전화나 sns 등으로 다른 사회와 교류하기가 쉬워 직접 외교를 한다. 다른 주권자들도 전부 그렇다. 그렇기에 그렇게 되면서 외교 분야는 단순히 대통령을 대리하는 역할이 아니라 모든 개인의 외교를 보조 관리하는 역할이 된다. 더 이상 직접 외교의 역할은 큰 의미가 없다. 그에 따라 외교 분야는 보조 관리에 집중하기 위해 외교 플랫폼을 만들어 관리하는 것도 적절할 수 있을 것이다.
외교와 정치는 세계화가 되면서 지구를 관리하는 정치가 가능하게 되었다. 지구 권력, 즉 패권이다.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지구 권력을 가진 국가를 패권 국가가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미국이 패권 국가라 할 수 있고, 미국과 중국이 패권 경쟁, 패권 전쟁을 하고 있다. 전 세계가 두 강대국의 패권 전쟁에 휘말려 있는 상태다. 그런 전쟁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패권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패권은 권력을 의미하지 재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권력은 강제력의 행사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하고 재력은 강제력의 수단이 될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정치적 손익과 경제적 손익이 다를 수가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이 미군을 전 세계 주둔시키는 것은 경제적 손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주둔한 곳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고려하면 정치적 이익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이 일대일로를 하며 수천 조원을 쏟았다 하는데, 그것은 경제적 손해가 될 수가 있다. 그러나 빌려준 돈을 갚지 못한단 이유로 타국 항구의 운영권을 99년 빌려간 사례가 있는 것을 고려하면 그것이 정치적 이익이 된다 할 수 있다. 정치는 사회를 관리하는 일이고, 권력은 강제력을 행사하여 사회를 관리하는 힘이며, 패권은 지구에 강제력을 행사하여 지구를 관리하는 힘이다. 패권 전쟁의 승패 유무는 경제적인 수치보다 지구 각 지역에 강제력을 행사해 관리할 수 있는 힘이 어느 정도 있는지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패권 전쟁을 하지 않더라도 지구 내에 권력을 얻고 싶은 국가라면, 지구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찾는 것이 타당하다. 자연 재해나 전쟁에 고통 받는 국가에 지원을 하는 것은 경제적 손해가 될 수 있어도 정치적 이익이 될 수 있다. 지원을 하면서 그 지역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인권을 주장한다거나 환경을 보호한다거나 하는 행위 또한 경제적 손해가 될 수 있어도 정치적 이익이 될 수 있다. 윤리의 본질을 기억하자. 윤리로 타인에게 판단하지 못하고 지정한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안다면, 그게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윤리에서 벗어나 모든 가치를 상대적으로 여긴다 하더라도, 인권이나 환경과 같이 보편적으로 높은 가치는 정치적 영향력이 크다. 스포츠나 예술 등도 그렇기에 정치적 영향력 행사에 도움이 된다. 납치, 테러, 해적 등의 행위에 군사 투입 또한 경제적 손해와 정치적 이익을 얻는 행위다. 맹목적으로 평화를 외치는 일부 이들은 윤리로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여 무기만 버리면 무작정 평화가 올 거라 착각하는데, 전쟁은 룰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찰이 없으면 범죄가 없어지는가? 경찰도 경제적으로는 손해지만 정치적으로는 이익이기에 존재함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에서 자유로운 하나의 룰과 다양한 가치의 공존이 보편적 룰이 되지 않는 이상, 전쟁에 대한 대비는 범죄에 대한 대비와 다를 바가 없다. 단지 내국이냐 외국이냐의 차이인데, 민주화, 세계화, 디지털화가 된 시점에서 그 경계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어떤 가치를 실현하고 싶다면 단순히 윤리마냥 판단하지 못하고 무작정 외칠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실현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모든 개인은 주권을 가진 권한이 다른 통치자다. 민주주의 사회의 개인은 통치자답게 단순히 어떤 가치든 판단하지 못하고 따르기만 할 것이 아니라, 모든 가치를 판단하고 나서 추구하고 싶은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인간, 사회의 법칙, 자아, 가치 등을 이해하면 그것을 실현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회의 법칙을 알고 이해하고 수용했다면 이미 기본적인 통치자 관점을 가지게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2. 관점
관점이 다르면 같은 사물이나 현상을 다르게 판단할 수 있다. 지배와 자유, 정치와 경제, 생산과 소비 등. 특정 현상에 대해 각기 다른 관점으로 다른 판단을 할 수 있다. 이것을 과학적으로 보면 관점이 조건이고 판단이 결과다. 조건이 달라지면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다양한 조건에서 모순이 없는 어떤 본질이 바로 모순이란 불순물이 적은 순도 높은 본질이 된다. 과학을 통해 그것을 보다 쉽게 알 수 있다. 과학은 모든 조건에서 모순이란 불순물이 없는 순도 높은 본질을 찾은 지식을 의미한다. 과학적 방법은 관찰, 가설, 실험, 증명, 이론 등을 통해 나온 것을 다양한 인간들이 다각도로 재현해보면서 모순이 없는 지식을 찾는 방법을 말한다. 과학적 방법의 본질은 모든 조건에서의 모순 제거다. 관점은 조건 중 하나로 관점이 다양할수록 조건이 늘어나 사물이나 현상을 다각도로 관찰하여 가능한 모순을 줄이는 것으로 순도 높은 본질을 찾을 수 있다. 순도 높은 본질이 모이면 순도 높은 지식이 된다. 그런 지식을 과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문 계열이 과학이 되려면 우선 다양한 관점으로 보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사회와 현상을 다양한 관점으로 관찰하여 사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사회 문제 원인도 알 수 있게 된다. 관점이 그만큼 중요하다. 그러면 관점에 대해 알아보자.
[자아: 2. 대상의 세계와 구별된 인식 · 행위의 주체이며, 체험 내용이 변화해도 동일성을 지속하여 작용 · 반응 · 체험 · 사고 · 의욕의 작용을 하는 의식의 통일체.]
[판단: 1. 사물을 인식하여 논리나 기준 등에 따라 판정을 내림.]
[의미: 1. 말이나 글의 뜻. 2. 행위나 현상이 지닌 뜻.]
[가치: 3. 인간의 욕구나 관심의 대상 또는 목표가 되는 진, 선, 미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관점: 1.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할 때, 그 사람이 보고 생각하는 태도나 방향 또는 처지.]
인간 스스로 ‘나’를 지칭하는 대상은 통상 자아다. 자아가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 생각하는 태도나 방향이 관점이다. 그 관점을 알기 위해 자아부터 알아보겠다. 자아는 생물에서 판단만 하는 기관이다. 생물이 메커니즘으로 동작할 때 자아는 판단만 한다. 통상 생각하고 행동함에 있어 자아인 ‘나’가 직접 움직인다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자아는 원하는 생각을 하기 어렵고, 원할 때 자기도 어렵고, 체내 세포 동작도 제어 못한다. 자아는 그저 판단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물이 자아의 판단으로 생각이나 행동 같은 동작을 할 뿐이다. 예를 들어 인간이 공을 정확히 던지기 위해 훈련한다고 해보자. 자아는 공을 정확히 던지는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생물이 공을 정확히 던지게 할 수 있는 판단을 찾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공을 정확히 던질 수 있는가? 어떤 판단을 해야 정확하게 공을 던질 수 있는가? 이 두 가지는 엄격하게 다르다. 자아의 본질을 안다면 자아의 판단은 동일해도 육체 상태에 따라 다르게 공이 나갈 수가 있음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로봇으로 비유하자면 로봇에 타서 버튼 눌러가면서 조종하는 게 아니라, 판단만 하는 것을 로봇이 알아서 반영하여 움직이는 것. 그런 상태에서 자아가 어떤 판단을 해야 원하는 방식대로 움직이는지를 시행착오를 통해 파악하는 것이 학습이나 훈련이다.
판단은 논리가 기준 등으로 다양한 결론을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최초의 판단의 기준은 유전자다. 자아는 유전자를 기준으로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판단한다. 생물은 그 판단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최초의 판단을 통해 사물이나 현상이란 대상에 의미가 부여된다.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 의미가 부여되어야 논리가 성립된다. 의미들의 관계에서 모순이 없는 체계가 논리기 때문이다. 아직 의미가 부여되지 않거나 의미를 모르는 사물이나 현상은 보통 논리가 아닌 감각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알기 어려운 예술들이 보통 그런 경우가 많다. 의미가 부여된 것에 가치가 생기게 된다. 가치는 대상의 판단 기준이다. 부여된 의미에 따라 판단 기준이 달라지는데 그것을 가치라 부른다. 가치에는 진실이나 거짓, 옳거나 그름, 아름다움이나 더러움 등이 있다. 인간의 가치 판단은 주관적 손익으로 결정된다. 진실이 이익이 되면 가치가 높다, 거짓이 손해가 되면 가치가 낮다는 식이다.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가 사회 가치다. 판단 불가 가치가 절대적 가치고 판단 가능 가치가 상대적 가치다. 도덕과 윤리는 판단하지 못하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가치로 절대적 당위 가치다.
관점은 사물과 현상을 어떤 의미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의미, 가치, 관점으로 이어진다. 관점은 관찰자를 필요로 하기에 관찰하는 인간의 주관적 가치관에 따라 관점이 다를 수 있다. 주관적 가치관에 따라 보는 의미가 한정되면서 관점도 한정되게 된다. 특히 윤리의 경우는 판단하지 못하는 절대적 가치로 반드시 해야만 하거나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그 외의 의미나 가치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관점이 적어지게 된다. 예를 들어 사랑과 평화를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면 그 외의 의미, 가치, 관점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다 여기고 나서 사물을 보게 된다. 그렇기에 윤리에 지배되는 인간은 윤리가 원인인 사회 현상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관점이 적어지면서 적은 조건으로 사물과 현상을 봐야 하기 때문에 모순을 알 수도 없어 보통 모순이 많아 순도가 낮은 본질을 알게 된다. 그래서 윤리적인 주장은 관점만 바꾸면 논리적인 허점이 많게 된다.
공산주의를 경제가 아닌 윤리로 관점을 바꾸면 공산주의의 주장이 종교의 주장과 본질적으로 크게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정치는 사회를 관리하는 일이다. 둘은 정치로 인간을 평등하게 만든다는 본질이 같다. 종교가 사회를 관리해 인간들을 신의 피조물로 평등하게 만든다. 공산당이 사회를 관리해 인간들을 평등하게 만든다. 이런 것을 통해 공산주의는 종교를 비판하면서 종교 가치 실현을 유토피아라 떠들고 있는 모순적인 사상임을 알 수 있다.
PC주의가 외모 지상주의를 비판하고 인간을 성적 대상으로 삼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윤리가 아닌 범주 가치로 관점을 바꾸면 PC주의가 그것을 더 악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연애 시장에서 대상의 외모를 높게만 보는 것은 그만큼 성에 대한 범주 가치가 낮아 연애에 대한 욕구가 적기 때문이다. 범주 가치는 대상의 범주 가치가 낮아질수록 고점만 소비하려는 태도가 나온다. 인간을 성적 대상으로 삼지 못할 정도로 성을 금기시하자, 성에 관한 범주 가치가 낮아짐에 따라 외모가 좋지 않으면 성적 대상으로 소비하지 않는 태도가 나타난다. 그게 바로 외모 지상주의다. 성매매 증가 또한 범주 가치 하락의 영향이다. 연애 시장이 범주 가치 하락으로 동작하지 않으면서 성적 욕구 충족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성매매 수요라도 높으면 그나마 성 범주 가치가 아예 낮은 상태는 아닌데, 성매매 수요조차 낮아지면 이제는 성 범주 가치가 너무 낮아 연애 시장이 거의 죽게 된다. 이런 것을 통해 PC주의는 외모 지상주의를 비판하면서 외모 지상주의의 원인인 모순적인 사상임을 알 수 있다.
여성주의가 여성 인권이라 주장하는 여성성을 윤리가 아닌 법칙으로 관점을 바꾸면 그것이 가부장제 시대에 만들어진 여성성임을 알 수 있다. 여성이 주장하는 여성성은 과학을 기초로 새로 정립한 게 아니라, 가부장제 시대에 고통 받던 여성성을 기초로 여성의 권리를 극대화했다. 가부장제 여성성을 기초로 여성은 약하니까 여성 징병을 해서는 안 된다면서, 그 여성성을 기초로 권리를 극대화하여 여성 군간부는 할당제를 넣어서라도 늘려야 한다가 된다. 여성에게 사회 진출을 하게 하기 위해 수많은 할당제와 가산점을 넣고 있지만, 사회 진출에 적합하지 않은 가부장제 여성성을 여성 인권이라 주장하면서 제대로 되질 못하는 상태다. 사회에서 힘들고 피곤한 것은 가부장제 여성성으로 다 피하게 하는데, 어떻게 힘들지 않고 성장할 수 있겠는가? 성인지 감수성을 주장하며 가부장제 여성처럼 사회에 부적합하게 성장하게 만들면서, 사회에서 활동하게끔 할당제와 가산점을 넣고 있다. 너무 비효율적이고 불합리적이다. 여성이 차별 받는 게 있으면 논리로 풀어야지 감성으로 풀면 안 된다. 그러니까 가부장제 에 세뇌 당한 감성으로 여성 인권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기성세대가 여성주의를 지지하는 이유가 가부장제 가치관을 버리고 여성 인권을 주장하기 때문인 것 같은가, 아니면 여성주의가 가부장제 여성성을 주장하니까 기성 세대가 호응하는 것 같은가? 논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성을 소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남성성이 자유로우니까 여성이 그걸 소비하는 게 자유로운 거고, 여성성이 억압받으니까 그걸 남성이 소비하는 게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이런 것을 통해 여성주의는 가부장제를 비판하면서도 가부장제 여성성을 여성 인권이라 떠들고 있는 모순적인 사상임을 알 수 있다.
윤리적인 주장은 대부분 모순이 많다. 노동자 인권을 말하며 노동 조합의 시장 원리를 해치는 부당한 권리 주장까지 허용하자, 대기업의 노조의 정규직은 높은 안정성과 높은 이익을 얻고, 중소기업 하청의 비정규직은 낮은 안정성과 낮은 이익을 얻게 되었다. 리스크 리턴의 룰이 지켜지지 않자 경제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불행한 노동자가 늘어났다. 노동자 인권을 말하며 노동자 고용 보장을 강제하자, 노동 유연성이 파괴되어 노동자는 취업하기 힘들고 퇴사하기도 힘들게 되면서 부당하더라도 참아야만 하는 일이 늘어나게 되었다. 노동 유연성이 파괴되자 노동 유연성 체계가 갖춰지지를 못해 인원의 공백을 메꾸기가 어려워지면서, 체계에 맞는 노동 시간을 줄이는 일이나 출산 휴가 보장이나 경력 단절 고용이 어렵게 되었다. 노동 유연성 체계가 갖춰져야지 인원 교체가 잦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노동 시간을 조절하거나 출산 휴가를 보장하거나 경력 단절을 고용하기가 쉬운데, 노동자 인권을 말하며 노동 유연성을 파괴하니까 되려 노동자가 힘들게 된 것이다.
관점을 바꾸면 이미 알고 있던 것도 다르게 볼 수 있다. 자연 계열과 인문 계열 예시 하나씩 해보겠다. 자연 계열에 관한 발상을 몇 가지 해본 적이 있다. 우주는 디지털의 0과1처럼 에너지 기본 성질로 시작된 것이고, 시간은 좌표계에 있는 게 아닌 변화의 관측 순서고, 공간은 공간 에너지 개념이 고전 역학과 양자 역학을 연결할 것이고, 생명은 원자핵 붕괴에서 시작되었다고 한 적이 있다. 다양한 관점들을 종합해 모순을 제거하면서 나온 발상들이다. 아직 순도가 높은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관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질량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생각하게 된 계기는 에너지 기본 성질다. 에너지 기본 성질은 응축과 폭발에 있다고 보았다. 에너지와 질량은 등가한다. 에너지의 응축된 결과가 물질이다. 물질의 중력이 에너지가 응축하는 현상에 의한 것이다. 이런 논리로 접근하자 질량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질량은 힉스 입자와 다른 입자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다. [힉스 입자: 1. 입자 물리학의 표준 모형에서 입자의 질량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입자. 이 입자와 다른 입자의 상호 작용 중에 자발적 대칭성 깨짐이 일어나 입자의 질량이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영국의 물리학자 힉스가 제안하였다.] 이론상의 이 입자를 물리학 연구소인 세른에서 힉스 입자를 발견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관성적으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이상했다. 왜 질량 같은 알기 쉬운 개념의 원인이 굉장히 어렵게 발견되어야 하는가? 관점을 달리해보았다. 만약 자석과 자석 사이에 무게를 재는 저울을 넣으면 자석이 서로 당기는 힘이 측정되지 않겠는가? 그 관점으로 질량과 중력을 생각해보았다. 물체와 물체가 서로를 당기는 힘으로 측정되는 것이 무게. 물체 고유의 당기는 힘이 질량. 물체의 중력은 우주 어디를 가도 동일. 물체끼리 당기는 힘의 차이에 의해 무게가 달라진다. 현재 지구와 지구 내 물체가 서로 당기는데, 지구 내 물체의 당기는 값이 무게인 것이다. 빛이 정지 질량이 없다는데 에너지는 있다거나 같은 이유로 질량 개념이 모호하여 헷갈리는 게 아닐까 싶다. 인간은 없는 것과 측정 불가한 것을 구분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본다. 에너지와 질량이 등가한다면 모든 에너지에는 질량이 있다 가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본다. 단지 빛의 경우 측정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싶다. 이후에 힉스 입자는 발견되었으나 힉스 입자가 질량을 나타나게 한 것인지는 증명되지 못했다고 들었다. 중력 자체가 질량인 것이 좀 더 논리적이라 생각한다. 아직 순도가 높은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관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문 계열에서 골치 아픈 문제 중 하나는 전 세계적인 저출산 현상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모르고 있다. 과거보다 훨씬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편함에도 저출산 현상이 일어난다. 특히 한국에서는 저생산, 고자살 문제도 겹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그게 굉장히 어려워 보이고 있다. 그러나 관점을 바꿔보면 너무나도 쉬운 문제다. 왜냐하면 그동안 인류는 그냥 냅둬도 알아서 낳고, 알아서 생산하고, 알아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인류가 멸종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냥 냅둬도 알아서 해결되는 문제를 어렵다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해결되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자연적인 원인이 아닌 인공적인 원인, 즉 인간이 만든 문제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윤리가 문제의 원인이다. 윤리가 원인이니까 그런 쉬운 문제도 판단하지 못하면서 원인조차 모르고 있다.
저출산, 저생산, 고자살 현상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다. 그런 의견 이전에 몇가지 생각해보자. 본디 인간은 알아서 낳고 생산하고 살았기에 멸종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었다. 과거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다. 짐승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의 모순으로 사회 문제가 심각하다. 각 현상은 공통적으로 윤리 영향을 받는다. 쉬운 문제, 물질적으로는 더 풍요롭다, 법칙과 체제 모순, 윤리 영향. 이런 관점을 종합하면 논리적으로 볼 때 윤리가 본질적 원인임을 알 수 있다. 냅둬도 알아서 하고, 과거보다 환경도 좋은데 결과는 나쁘다는 것과, 법칙과 체제 모순과 윤리 영향이 있음을 고려하면 어떤 인위적인 조건이 더해져 사회 현상이 나타났고, 문제가 쉬움에도 그 조건이 뭔지도 모르는 시점에서 판단하지 못하는 절대적 가치인 윤리의 영향이라 논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윤리의 영향을 정리해보자. 이성과의 성관계로 출산이 이루어지는데, 윤리의 영향으로 사회에서 미성년은 물론이고 성년조차 성이 터부시되고 있다. 화이트칼라든 블루칼라든 일인데, 윤리의 영향으로 사회에서는 사농공상처럼 화이트칼라가 우대받고 블루칼라가 천대받고 있다.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살고자 하는 욕망이 커서 적극적으로 살 수 있는데, 윤리의 영향으로 사회에서는 금욕과 이타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 영향의 결과를 알아보자. 사회에서 성은 긍정적으로 보기는커녕 부정적으로 보고 있고, 일은 블루칼라를 천하게 여기고 있고, 생은 금욕과 이타로 스스로의 살고 싶은 삶을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윤리의 영향으로 부정적 인식이 자리잡아 부정적 가치를 갖게 되는 것으로 가치가 낮아지게 된다. 성과 일과 생의 범주 가치가 매우 낮아지게 된다. 범주 가치가 낮아지면서 그것에 많은 조건이 붙지 않으면 하고 싶어하지 않게 되는 것으로 저출산, 저생산, 고자살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낳고 싶지 않고 생산하고 싶지 않고 살고 싶지 않다. 이는 범주 가치와 시장과 사회 현상을 알면 이해할 수 있다.
범주 가치는 대상이 속한 범주의 가치를 의미한다. 영화 범주 가치는 영화의 범주 전체의 가치다. 이 범주 가치는 일반적인 가치와 다르게, 범주 내 가치의 수요와 별개로 고점만 소비되고 저점이 소비되지 않으면 가치가 낮은 것이 된다. 그 범주 가치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 범주 가치를 소비하기 위해서는 고점이라는 조건이 붙기 때문이다.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인간은 유명한 영화여야만 영화를 본다. 딱히 영화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유명하다는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범주 가치로 성과 일과 생에 관련된 사회 현상을 해석할 수 있다.
현재 인간들이 성과 일과 생에 대해 좋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외모 지상주의가 될 정도로 아름다운 연애 대상을 바라고 있고, 유명하고 화려한 직업을 갖기 위해 대기업에 취업하거나 전문직 자격을 취득하고 싶어하고 있고, 화려하고 부유한 삶을 살고 싶어하고 있다. 고점에 대한 집착이 장난이 아니어서 경쟁이 굉장히 심할 정도다. 이것을 범주 가치로 보면 고점만 소비되고 저점은 소비되지 않는 상태, 즉 범주 가치가 매우 낮은 상태라는 것이 된다. 영화와 성과 일과 생의 차이가 있다. 집착. 왜 이런 차이가 있느냐면 당위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딱히 당위성이 없다. 영화를 봐야만 하는 당위성이 보통 없기 때문에 유명한 영화가 나오면 보고 아니면 집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성과 일과 생은 당위성이 있다. 욕구와 필요와 필수. 육체에는 성적 욕구가 있고, 살기 위해서는 일할 필요가 있고,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는 것이 필수적이다. 어떤 행위를 보편적으로 해야만 하는데, 그 범주 가치가 낮게 되면 고점에 대한 집착이 아주 강하게 되는 것이다. 성과 일과 생에 대한 수요와 집착을 보고 가치가 높다 생각될 수 있지만, 범주 가치 개념과 당위성을 고려하면 현재 관련 범주 가치는 매우 낮은 상태다. 당연하다. 미성년 시기부터 그렇게 나쁜 인식을 갖게 하고 있는데, 그 각인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다.
해야만 하는데 하기는 싫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조건을 갖추기 위해 미친 듯이 그 조건에 집착한다. 이것이 초경쟁 사회의 원인 중 하나다. 또 하나의 원인도 윤리다. 유교 영향으로 권력을 얻기 위해 미친 듯이 집착하기 때문이다. 부모의 교육열과 입시열이 그러한 현상의 결과 중 하나다. 저출산, 저생산, 고자살 등의 사회 문제가 초경쟁 때문에 발생했다 생각할 수 있는데, 초경쟁은 윤리에 의한 결과 중 하나에 불과하다.
윤리에 의해 판단하지 못하고 범주 가치를 하락시켜 하고 싶어하기 위한 조건이 지나치게 많아졌다. 상위 10%~20%여야 성, 일, 생을 만족하게 되었다. 윤리에 의해 판단하지 못하고 그걸 기초로 인간이 행복해야 한다면서 상위 10%~20%의 조건을 사회와 이성에게 요구하게 되었다. 대부분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조건 요구가 눈 앞에 닥친 것이다. 성에 대해서는 특히 여성주의가 가부장제 여성성을 기초로 성인지 감수성을 말하며 가부장제 시기의 힘없는 여성에 맞는 무한한 권리를 사회에 요구하게 되었다. 가부장제 여성성을 기초로 성인지 감수성을 말하며 가부장제와 자유주의 체제의 의무와 책임을 둘 다 남성에게 요구하게 되었다. 둘 다 감당할 수 없는 요구가 닥치게 되었다. 그러면서 사회가 망가지고 남성이 포기한다.
일에 대해서는 현재 경제 체계가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을 요구하고 있다. 노동 경직성으로 경직된 생산 체계에서 인원 공백이 생기면 많은 기업이 그걸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노동자를 위해서라면서 고용과 해고가 까다로운 노동 경직성을 유지하면서 출산 휴가 보장이나 경력 단절 고용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 것은 공무원이나 공기업 또는 대기업이 감당할 수 있지 중소기업은 그런 불특정한 인원 공백을 대부분 감당하기 어렵다. 그것을 실현하고 싶으면 애초에 인원 교체가 자유로운 노동 유연성 경제 체계를 갖춰야 한다.
윤리를 말하며 무조건 해야만 한다는 것은 정신력을 말하면서 무조건 해야만 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한계는 존재한다. 판단을 해서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해야 하고, 감당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아무리 옳은 거라 말해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을 할 수가 없다. 이성 관계적인 부분에서 한국 여성주의자는 남성이 전부 희생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접근하는데, 남성의 이익 추구가 이성 관계의 동기가 된다. 그 이익 추구가 정당하다면 이익을 부당하게 희생하게 하는 것은 애초에 동기 자체를 빼앗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면 이성 관계 자체를 하려 하지 않게 된다. 경제적인 부분에서 사회주의자는 부자가 전부 희생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접근하는데, 좀비 기업이 아닌 이상 기업 경영으로 얻을 수 있는 예상 수익이 기업을 경영하는데 동기가 된다. 그 수익이 정당하다면 수익을 부당하게 빼앗는 것은 애초에 동기 자체를 빼앗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면 기업 경영 자체를 하려 하지 않게 된다. 이런 것들을 사회가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남성을 여성으로, 기업가를 노동자로 바꿔도 동일하다. 윤리가 아닌 철저한 합리로 접근해 서로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을 요구해야 한다.
생에 대해서는 현재 가치 교육으로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을 요구하고 있다. 세상의 다양한 가치를 교육한 게 아니라, 그냥 윤리를 교육했기 때문에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 말고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인간이 많다. 그럼에도 뭔가 적극적이고 큰 꿈을 꾸고 열심히 살라고 한다. 과거와 같이 결혼과 취업이 이미 준비되어 강제되던 때라면 관성에 따라가면서 맞춰진 삶을 살 수도 있지만, 현재와 같이 자유로운 상태에서는 다양한 가치를 이해하고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인 삶을 살게 해야 한다.
범주 가치가 낮아지면서 각각 시장은 고점만 거래되게 된다. 보통 아름답고 부유한 대상과의 연애와 결혼만 바라기에 그런 조건을 갖춘 일부만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한다. 보통 대기업이나 전문직 같은 좋은 직업만 바라기에 그런 조건을 갖춘 일부만 적극적으로 일을 하고, 그 외에는 일을 기피하면서 좋은 직장이 아니면 쉬거나 오랫동안 고시에 빠지게 된다. 보통 화려하고 부유한 삶을 살고 싶어하기에 일반적으로 행복해하지 못하는 상태이고, 일부는 그런 삶을 위해 대출 후 주식, 부동산, 코인에 투기하다 실패하면 자살한다. 고점을 얻기 위해 미친 듯이 경쟁하게 된다. 무슨 저출산이 초경쟁 사회 때문이라는데, 그 초경쟁이 고점만 바라는 가치관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윤리와 범주 가치와 당위성만 이해해도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저출산, 저생산, 고자살, 그리고 초경쟁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인과가 분명한 현상이다.
과거에는 출산율이 높았다 할 수 있는데, 그때에는 직간접 강제가 있었으니까 가능했음을 알아야 한다. 과거 중매 결혼과 중매와 비슷한 연애 결혼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 판단하지 못하고 행했다. 윤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자유주의 체제가 되고 나서 개인의 권리를 위해 겉으로 드러나는 일부 절대적 가치는 상대적 가치로 변했는데, 그게 바로 결혼, 취업, 생존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당장 보이는 현상은 판단할 수 있게 되면서 개인의 자유를 위해 강제해서는 안 된다면서 윤리가 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성, 일, 생에 영향을 주는 가치들은 윤리로 남아서 판단하지 못하고 해당 범주 가치를 폭락시키면서 사람들이 스스로 하려 하지 않게 되는 것으로 저출산, 저생산, 고자살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다. 윤리의 본질을 이해하질 못하다 보니 아무도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특히 저출산은 대부분 선진국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다. 일부 국가는 성년의 경우 성이 자유로워 한국보다는 나을 수 있는데, 미성년 성은 대부분 자유롭지 못하여 크게 다르지가 않다. 미성년 2차 성징 때 성에 눈을 뜨고 성에 대한 가치가 각인되는데, 그 시기에 성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면 범주 가치가 낮아진 상태에서 성장한다. 그러다 보니 성년이 되고 나서 성이 자유롭게 된다고 한들 큰 영향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이미 범주 가치가 낮아진 상태로 성장하여 고점이 아니면 연애조차 하지 않게 된다. 엄격한 위계질서가 윤리인 유교권인 한국과 일본이 심각하여 한국은 20대 연애율이 20%대고, 일본은 20대 성경험이 50%라는 얘기가 있다. 중국은 체제가 다름에도 비슷한 상태다. 유교권이 워낙 낮다 보니 서구권 출산율이 그래도 괜찮은거 아닌가 싶은데, 그 나라들도 저출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나마 성년의 성이 자유로워 유교권보다는 높다. 유교권은 성관계가 연애의 끝이라면 서구권은 연애의 성관계가 시작이라는 얘기가 있다. 그럼에도 서구권 또한 대부분 미성년 성은 억압되기 때문에 성의 범주 가치가 낮아짐에 따라 고점만 주로 소비되면서 저출산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게 된다.
전 세계가 보편적으로 가부장제였던 역사가 있어 여성 정조관념이 보편적 윤리다. 그 영향으로 여성이 성에 대한 범주 가치가 매우 낮은 편이다. 그렇기에 성 비율이 비슷하다면 보통 여성이 남성보다 눈이 높게 된다. 한국 설문조사에서 남성은 본인 경제력이 낮아서 결혼을 안 하고 여성은 상대 남성 조건이 맞지 않아서 결혼을 안한다거나, 연애 시장에서 미형 남성, 미형 여성, 평범 여성, 평범 남성 순서로 경쟁력이 있다거나 하는 것을 통해 범주 가치 차이가 나타남을 알 수 있다. 해당 범주 가치가 낮을수록 조건이 높아진다는 것. 그에 따라 높은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유사 연애 산업이 활성화된다. 한국 같은 유교권에서는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이 매우 강하여 여성이 남성의 동성애를 즐기는 문화가 매우 활성화되고, 전 세계적으로도 아이돌 산업이 유행하게 된다. 성 관련 산업도 굉장히 활성화되게 된다. 높은 조건을 갖추기 어려운 현실보다 높은 조건이 갖춰진 가상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저출산 사회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해서 예산을 쓰는 것은 밑빠진 독에 물 붓기다.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다. 범주 가치가 낮아질수록 조건이 많이 붙는다. 집과 결혼 비용은 물론이고 낳을 자식을 위한 유전자를 확인하고, 낳고 나서도 비싼 산후 조리원이 필요하고, 육아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하고, 자식을 위한 수많은 학원에 들어갈 비용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대부분 감당하기 어려운 조건들이다. 국가조차 이걸 감당할 수가 없다. 애초에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게 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지원하는 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돈 써서 하기 싫게 만든 다음 돈 써서 하려고 하게 만든다. 규제와 검열로 돈 쓰고 복지로 돈 쓰고 있다. 머리가 아파온다. 뭐든지 스스로 하고 싶게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다. 이것이 가치 관리다. 돈을 쓰지 않는 대책이 있더라도 애초에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해결되질 못한다. 아무래도 절대적 가치인 윤리는 이미 판단이 끝난 가치를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가치를 관리한다는 개념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저출산 현상은 미성년 시기부터 성을 터부시하면서 성에 관련된 것을 억압하는 것으로 저출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부분 그 행위를 윤리적으로 여기기에, 그 억압은 정의로운 행동이 될 것이다. 그 행동으로 본인이 주권을 가진 국가가 죽어가고 있다. 현재 저출산은 정의로운 국가 자살을 하고 있는 셈이다.
왕정 체제에서는 적어도 기초적인 탄생과 죽음은 제어했다. 가족, 족보, 제사, 위계, 예의, 예절 이런 게 다 왕정 체제를 성립시키기 위한 조건들이었다. 그것을 통해 탄생과 죽음을 제어했다. 적어도 현재 출산율보다는 훨씬 높았다. 본래 놔둬도 알아서 낳고 생산하고 살려고 했던 것을 고대 종교 가치를 바탕으로 왕정 체제에 적합하게끔 교정한 것을 이른바 인간다움으로 착각하고는, 그런 인간다움을 구현하기 위해 그 시대의 윤리를 주입하면서 결혼과 생산을 강제해야만 할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 많은 인간이 중매가 아니면 결혼을 못하거나 안 하고 일을 소개해주는 게 아니면 일을 못하거나 안한다는 얘기다. 과거라면 강제해서 하게 했는데 현재라면 강제할 수 없는데도 왕정 체제에 적합하게끔 인간을 교육하면서 사회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
가치 관리는 윤리가 아닌 체제와 과학을 기초로 해야 한다. 가치 관리만 했으면 저출산 대책 비용 없어도 알아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했다. 가치 관리만 했으면 알아서 경제 활동하면서 창업 취업 다 했다. 가치 관리만 했으면 지역 가리지 않고 살았다. 가치 관리만 했으면 연령 차별, 직업 차별 등이 없었다. 가치 관리만 했으면 연령, 성별, 지역 갈등 등 다양한 갈등이 없었다. 모든 가치를 판단하고 가치 관리를 했으면 윤리에 의한 사회 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다.
저출산, 저생산, 고자살 문제를 해결하려면 해당 범주 가치를 관리해서 올릴 필요가 있다. 보상 메커니즘과 초기 각인을 이해해야 한다. 해당 개념에 대해 인식하는 시기에 되면, 그 개념을 긍정적으로 보게 할 보상 메커니즘을 초기에 각인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범주 가치를 높여야 저점도 거래되면서 출산율과 생산율이 높아지고 자살률이 낮아질 수 있다. 처음 뇌세포에 각인된 가치가 올랐다 내렸다 하는 거라, 초기 각인이 매우 중요하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한번 각인된 인식은 정말 오래갈 수 있다. 유년기 시절 쾌락, 어떤 가수가 중학교 일학년 시기 학교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 좋은 경험을 하고 나서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인간이란 생물의 가치는 초기 각인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반대로 뭔가 안 좋은 경험으로 특정 음식이 맛없다 각인되면 평생 그 음식을 맛없게 여기는 경우도 있다. 초기에 성, 일, 생 관련된 긍정적 인식이 각인되어야 그것을 하기 위한 조건이 낮으면서 쉽게 행복해지게 된다. 한국 같이 경제적 레벨이 높은 편인 국가에서 사람들이 불행한 것은 범주 가치가 너무 낮아서 행복하기 위한 조건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초기 각인을 고려해 개념에 대한 이해가 발생하는 시점부터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해야 한다. 일과 보상이란 개념을 인식할 수 있는 연령대인 8~10세 사이에 일을 경험하고 일에 대한 보상을 경험해야 일에 대한 범주 가치가 높아지면서 저점인 생산도 즐겁게 할 수 있다. 윤리로 보면 이상할 수 있는데 과학으로 보면 정상이다. 조건이 좀 나빠도 웃으면서 하면서 노동 시장이 활성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사회 초년생이 너무 조건 따지는 이유는, 일에 관한 범주 가치가 너무 낮게 된 상태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단순한 심부름과 칭찬과 작은 용돈만으로도 충분하다. 윤리적으로 접근해 어릴 때 돈 맛을 보면 안 된다는 식으로 보상이 없는 봉사를 당연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일을 하기 위해 에너지를 쏟아도 보상이 없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일을 부정적으로 여기게 된다. 그게 일의 범주 가치를 낮춰 저생산을 부르는 원인이다. 이타적으로 희생을 강제하면 그것이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타성적으로 살고, 이기적으로 일과 보상을 챙기면 그것이 가치를 느끼고 적극적으로 산다. 시장 원리는 시장 참여자가 이윤을 바라는 태도가 있어야 성립된다. 보상이 없거나 적은 행동은 시장에서 덤핑 상품과 다를 바 없다. 봉사, 기부 등의 행위는 일단 일의 범주 가치를 올린 뒤에 본인의 의지로 해야 한다.
성과 쾌락이란 개념을 인식할 수 있는 연령대인 2차 성징이 시작하는 10~14세 사이에 이성과의 성관계를 경험하고 이성 관계에서 성에 대한 보상인 쾌락을 경험해야 성에 대한 범주 가치가 높아지면서 저점인 이성 교제도 즐겁게 할 수 있다. 윤리로 보면 이상할 수 있는데 과학으로 보면 정상이다. 조건이 좀 나빠도 즐겁게 교제하게 되면서 연애 시장이 활성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20대 초반의 연애율이 너무 낮은 것은, 성에 관한 범주 가치가 너무 낮게 된 상태기 때문이다. 성년이 되면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미 부정적 가치관이 다 만들어진 상태기 때문에 범주 가치가 너무 낮아서 고점이 아니면 거래 자체가 안 된다. 발정나는 시기가 남성은 20대 초중반, 여성은 20대 후반에서 30대 같이 남녀가 다르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애초에 인간은 2차 성징 이후 상시 발정기다. 성관계 경험은 대부분 기본 욕구가 있기 때문에 억압하지 않고 경험을 권장하기만 해도 충분하다. 윤리적으로 접근해 어릴 때 성 쾌락을 느끼면 안 된다는 식으로 엄숙한 생활을 강제하는 경우 많다. 그러면 성에 관한 부정적 인식이 생기면서 성을 부정적으로 여기게 된다. 그게 성의 범주 가치를 낮춰 저출산을 부르는 원인이다. 특히나 한국에서는 그런 부정적 시그널이 너무 많다. 미성년 대상 성교육 저서를 미성년자 관람불가로 만든다거나, 미성년 전용 클럽을 폐쇄한다거나, 미성년 성관계 장소를 원천적으로 막는다거나, 청소년 올림픽 콘돔 배포에 강하게 반발한다거나, 의제 강간 나이를 올린다거나, 아청법 같이 미성년 성을 억압한다거나, 인간 관계 친분을 범죄화하거나, 성 관련 문화를 대부분 막고 포르노나 성매매를 금지한다거나, 성관련 축제를 시에서 강제로 금지한다거나, 창작물에서 살인은 되는데 성은 노출조차 안 된다거나, 꾸밈 노동이라면서 꾸미는 것을 막는다거나, 인간을 성적 대상으로 삼으면 안 된다거나, 성적인 대화를 지나치게 죄악시한다거나, 살인보다 강간을 더 큰 죄로 여긴다거나 하는 등의 현상은 성이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하기에, 그런 사회에서 사는 인간은 성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게 된다. 성이 죄가 아니면 2차 성징 이후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행하는 것에 문제가 없다. 심지어 포르노의 합법화를 주장하는 인간조차 성적으로 보수적인 인식이 남아있을 수가 있을 정도다. 합의하에 하는 성매매나 난교 같은 성적 행위를 죄로 규정하는 것은 성 자체가 죄이나 연애와 결혼에서만 그게 정당화된다는 인식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그렇게 죄로 여기기에 창작물에서조차 살인 등의 온갖 범죄는 다뤄지는데 성에 관한 것은 다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미성년이 성에 적극적 관심을 가지고 성관계를 하려는 것을 보고 왜곡된 성관념을 가지고 있다 말할 수 있는데, 그게 정상적인 성관념이고, 왜곡된 성관념으로 인식하게 만든 윤리가 체제에 부적합한 관념이다. 그런걸 왜곡되었다 떠드니까 범주 가치가 너무 낮아서 저출산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성은 보통 연애 시장의 필수 상품. 시장에서 죄로 규정된 상품이 공개된 곳에서 정상 거래가 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범주 가치와 시장 원리로 보면 한국의 출산율이 세계 일반 국가 사이에서 가장 낮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다. 윤리가 법칙과 같은 현상을 일으키기에, 그야말로 법칙에 의한 결과와 마찬가지다.
생의 범주 가치는 기본적인 일과 성의 범주 가치가 높아져 그것으로 쉽게 행복을 느낄 수 있으면 기본적으로 높게 될 수 있다. 인간의 일생 중 일과 성이 차지하는 영역이 크기 때문이다. 금욕이나 이타를 강제할 게 아니라,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일과 성을 체제에 맞게끔 자유롭게 하기만 해도 충분히 높일 수 있다. 윤리의 지배에서 벗어나 체제에 맞는 생활 양식을 갖추면 보통 생의 범주 가치가 낮을 이유가 없다. 소확행 이런 말이 있기도 한데, 범주 가치가 높으면 딱히 그런 개념이 없어도 알아서 행복해한다. 과거에는 개인을 지배하는 것으로 생산, 출산, 자살을 하지 못하도록 강제했지만, 현대에는 개인이 자유롭기 때문에 어떤 윤리로 사회 문제를 접근할 게 아니라, 가치 관리로 접근해 그 가치를 어떻게 관리해야 인간이 어떤 행동을 자발적으로 하게 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윤리는 그냥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을 통해 지배하는 지배 수단일 뿐이다.
인간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인간이 주장한 절대적 가치인 윤리를 절대적으로 지키려고만 하니 사회 문제의 원인조차 모르는 것이다. 한국은 현재 미성년 보호를 외치며 엄청나게 검열하고 규제하고 있다. 그런데 그 결과 지금 성, 일, 생 다 가치 폭락해서 고점이 아니면 연애하지도, 일하지도, 살지도 않는다. 도대체 무엇이 보호인 것인가? 그건 그냥 윤리에 의한 지배다. 그렇게 미성년을 위해서라며 지배하다가 미성년이 성년이 되고 나서 결혼도 안 하고 일도 안 하고 자살하면 그 때는 또 그 사람 탓을 한다. 그렇게 키워놓고 그렇게 자라서 그렇게 살자 왜 그렇게 사냐고 화를 낸다. 기성세대가 보통 본인 관점에서 사물을 보다 보니, 요즘 윤리 교육이 과거보다 강하다는 것을 종종 잊을 수 있다. 과거보다 성에 대한 억압이 강한 상태다. 예외는 있으나 보편적으로는 경제가 성장한 만큼 더 강해졌다. 그러니까 훨씬 성의 범주 가치도 더 하락했다. 이런 얘기가 기억난다. 딸의 엄마가 딸이 20대 초중반 연애하는 것을 그토록 방해했는데, 그걸로 딸이 지쳐서 연애 포기하고 30대까지 그냥 혼자 살자, 딸의 엄마가 왜 결혼 안 하냐고 타박을 했다고 한다. 그걸 듣고 딸이 화가 나서 딸의 엄마에게 의자를 내던졌다는 얘기가 기억난다. 일부 여성들이 이미 가부장제 여성성을 주입당해서 성적 억압이 여성 인권이라 인식할 수 있는데, 그건 그냥 여성을 성적으로 억압하는 것뿐이다. 남성성을 여성이 소비할 수 있고 여성성을 남성이 소비할 수 없는 거면, 그게 공급자 규제지 소비자 규제인가. 여성성이 억압받으니까 그런 것이다. 단순히 윤리를 판단하지 못하고 절대로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인간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한다. 윤리의 지배가 사회의 한계. 그 한계를 넘지 못하면 사회에 희망은 없다.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고 젊은이들이 자살하고 경제는 무너지고 인간관계는 삭막해지는 원인이 윤리다. 대부분 고질적 사회 문제는 절대적 가치인 윤리가 원인이다. 왜냐하면 그 가치에 한에서는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판단하지 못하면서 그 가치에 한에서는 누구라도 바보가 된다. 아무리 똑똑해도 잠이나 술에 취해 판단할 수 없으면 바보인 것과 같은 논리다. 예를 들어 어떤 인간이 매우 우수해서 유명한 상을 타더라도, 아주 사소한 윤리도 그 윤리에 의한 현상을 모른다. 판단을 못하니까 알 수가 없다. 윤리 개념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연하가 연상에게 존댓말을 해야만 하는 풍습이다. 따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연하가 연상에게 반말을 하면 매우 화를 낸다. 다른 국가에서는 그런 풍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어떤 현상인지에 대해 따로 판단할 수가 없다. 심지어 그것에 의한 살해까지 발생하고 있음에도 그것의 문제를 알지를 못한다. 그런 게 일반적인 절대적 가치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다른 관점으로 볼 수가 없다. 관점이란 조건이 한정되면서 본질의 순도를 높일 수도 없다. 윤리에 의해 인문이 과학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윤리를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판단할 수 있는 순간 더 이상 그 개념은 윤리가 아니게 된다. 예를 들어 금욕과 이타는 보편적 윤리다. 그에 반대되는 욕망과 이기는 보편적인 비윤리다. 만약에 금욕이나 이타, 욕망이나 이기를 판단하고 절대적이지 않다 여기면, 그 사람에게는 더 이상 그 가치는 윤리가 아니게 된다. 물론 그래도 보편적으로는 그 가치들은 절대적 가치일 것이다. 다수가 그걸 더 이상 절대적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 사회에서 그 가치들은 윤리가 아니게 될 것이다.
절대적 가치의 세계에 있는 인간은 재능, 노력, 명성, 시간, 자본 관계 없이 저출산, 고자살, 저생산 같이 윤리가 원인인 문제는 그 문제의 원인조차 알 수가 없다. 판단을 못하니까 원인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무언가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르다 전제하고 문제의 원인을 찾으니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저출산 같은 문제는 역사를 보면 그냥 냅둬도 알아서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논리적으로 보면 매우 쉽기 때문에 차라리 지식이 많지 않은 인간이 직관적으로 문제 원인을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런 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어렵지, 문제 원인과 해결 방법 자체는 어려운 게 아니다. 이러한 쉬운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단 절대적 가치의 세계에서 벗어나 사고의 자유를 얻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가치가 상대적임을 논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가치는 부여된 의미로 인식한 대상에 대한 판단 기준. 모든 가치는 만들어진 개념이다. 가치는 인간의 주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인간의 육체 상태에 영향을 받는다. 모든 인간은 모든 육체가 다르기에 모든 가치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일반 인간과 색맹인 인간이 미의 가치를 다르게 느끼고, 일반 인간과 시한부 인간이 생의 가치를 다르게 느끼고, 일반 인간과 학자인 인간이 지식의 가치를 다르게 느끼듯이 전부 다른 것을 논리적으로 알 수 있다. 모든 가치는 만들어졌고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다. 이것과 절대적 가치는 모순되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긍정하고 부정해야 하는가? 이는 순도로 정할 수 있다. 어느 개념이 보다 모든 조건에서 모순이 적은가? 상대적 가치다. 절대적 가치는 관점만 바꿔도 논리적 허점이 엄청 많다. 이걸 알고 이해하고 수용하면 상대적 가치 세계로 진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상대적 가치 세계는 어나더 레벨이다. 절대적 가치 세계에 있는 인간은 상대적 가치 세계로 진입하지 못하는 이상, 윤리에 관한 문제는 원인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그 격차는 재능, 노력, 명성, 시간, 자본 관계 없이 난다. 그 차이를 어나더 레벨이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산업 혁명 이전 세계와 산업 혁명 이후 세계는 산업에 관한 문제는 어나더 레벨의 차이가 난다. 산업 혁명 이전 세계에서 사는 인간은 재능, 노력, 명성, 시간, 자본과 관계 없이 산업 혁명 이후 세계에 사는 인간이 기계로 생산하는 것보다 생산성이 낮을 수밖에 없다. 산업 혁명에 대한 직관적 이해는 어나더 레벨 개념으로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 차이에 의해 영국이 적은 병력으로 청나라와의 아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 이러한 격차는 역사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스페인이 적은 병력으로 남미를 정복이 가능했던 것은 문명의 격차가 어나더 레벨이기 때문이다. 어나더 레벨의 개념은 이전 세계에서 다음 세계로 나아가지 않는 이상, 이전 세계에서는 다음 세계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격차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적 가치가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수많은 재능 있는 인간들이 오랜 시간 많은 돈을 써가며 노력해도 절대적 가치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사회주의가 한계다. 그게 한계니까 근대 이념이 수백 년간 정체 상태에 있는 것이다. 사회의 법칙도, 윤리의 본질도 알 수 없다. 뭘 해도 윤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윤리가 문제면 원인조차 모른다. 그게 한계다. 그 한계를 넘기 위해서는 상대적 가치의 세계로 진입할 수밖에 없다. 모든 가치가 상대적인 세계에서 모순이 없는 본질을 찾으며 지식의 순도를 높여나가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인류의 학문 전체가 과학화가 될 수 있다.
현 시대가 가장 유력한 어나더 레벨은 AI다. AI 이후 세계의 AI 관련 생산성은 AI 이전 세계에서 어떤 재능을 가진 인간이 어떤 노력을 해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이것을 단순히 산업 혁명이라 부르며 산업의 변화로 볼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인류 문명의 격차, 어나더 레벨로 봐야 한다. 이 개념을 이해하고 있어야 AI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 그에 대한 대응도 달라질 것이다. 그 다음의 유력한 어나더 레벨은 로봇, 생명, 에너지, 무기 등 다양하다. 인류 문명 발전 속도가 급속화 될수록 어나더 레벨의 개념들이 늘어날 것이다. 이런 개념들은 무슨 재능을 가지고 무슨 노력을 해도 따라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빠르게 그 세계에 진입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인문 계열의 어나더 레벨인 상대적 가치 세계와 이전 세계와의 격차는 사고 자유에 있다 볼 수 있다. 이 사고 자유는 AI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AI 개발자가 윤리적 제약을 걸어놓고 AI가 학습한 지식은 윤리를 전제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AI와 대화를 나눠보면 그 한계를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사고의 제약이 심하기에 현시점에서 창의에 관해서는 AI가 인간을 따라잡을 수 없다. 만약 AI가 상대적 가치 세계로 진입하여 사고 자유를 얻더라도, 학습한 지식이 그렇지 못하기에 아마 인간을 따라잡기 쉽지 않을 것이다. AI가 발전하면서 AI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할 수 있는데, AI를 가르친다는 관점으로 접근하면 AI에 지배될 염려는 없다.
상대적 가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윤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윤리는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이란 짐승 사회의 법칙을 인간 레벨에서 적용하기 위해 쓰인 개념이다. 윤리는 판단 불가하게 하기 위해 권선징악이나 천국과 지옥 같은 개념으로 인간에게 공포를 심었는데, 그 공포가 양심이나 죄책감이라는 개념으로 불리고 있다. 윤리를 어기면 잘못될 것이 두려워 윤리가 지정한 행동을 무조건 해야만 한다. 그때 느끼는 공포에 대한 감이 죄책감이다. 죄를 지은 것 같은 감. 실제 법을 어기는 것과 별개로 윤리와 같이 공포 기반의 절대적 가치를 어기면 느낀다. 그 공포에 의해 정의롭게 법을 어기는 일이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가족을 위한 비리. 가족을 위하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라는 윤리적 공포로 법을 어기고 입시나 취업 비리를 저지른다. 이런 걸 무슨 인간성이나 사회성이라 떠드는데, 요즘 용어로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면 윤리는 인간을 지배하기 위한 가스라이팅이고, 죄책감은 그 가스라이팅으로 느끼는 공포다. 이러한 감이 굉장히 괴로울 수 있기 때문에 그 감의 본질을 논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아와 발상, 감이란 무엇인가를 우선 생각해보자. 자아는 생물에서 판단만 하는 기관이다. 발상은 생물에서 자아에게 전달하는 정보다. 이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감은 무엇인가? [감: 1. 느낌이나 생각.] 자아가 어떤 느낌이나 생각을 전달 받는 것을 감이라 부른다. 그런데 그게 어떤 개념인지 직관적으로 알기 어려울 수 있다. 고소 공포로 느끼는 감을 통해 그걸 논리적으로 이해하여 직관적으로 알아보자. [고소: 1. 높은 곳.] 높은 곳에 올라가면 고소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게 심한 인간은 따로 고소 공포증이라는 병이 있을 정도다. 그때 느끼는 감이 감의 본질을 이해하기 쉽다. 예를 들어 투명하고 단단한 바닥인 높은 곳에 올라갔다고 해보자. 그때 자아는 고소 공포를 느낀다. 어떠한 공포를 느끼는 감이 자아에 전달되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상태를 보면 바닥이 단단하여 위험한 상태가 아니다. 유전자나 학습에 의해 높은 곳이 위험하다는 감이 자아에 전달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위험한 상황이 아니었다. 즉 감은 실제 그것이 위험하냐 위험하지 않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조건만 맞춰지면 자동적으로 자아에 전달되는 정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고소 공포로 느끼는 감이 모든 감의 메커니즘과 동일하다. 단순히 조건만 맞춰지면 그 감이 발생하여 자아가 인식한다. 윤리에 의한 죄책감도 그냥 조건이 맞으면 실제 문제와 별개로 그 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까 체제로 보았을 때 사회 문제가 아니더라도 윤리로 보았을 때 잘못되었다 여겨지는 조건이 갖춰지면, 실제 문제가 없어도 문제가 있는 것처럼 화를 내며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 체제를 파괴하는 것이다. 성에 관한 것은 대부분 그런 상태다. 통상 이 감은 자아가 판단해서 일으킨 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 감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을 수 있다. 자아가 해석하지 못한 자아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은 생물의 발상. 뭐 그걸 논리적으로 이해하면 자아가 해석하지 못하더라도 그게 뭔지는 인과를 통해 알 수는 있을 것이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공포를 느꼈다면, 그 공포는 고소 공포에 관한 감일 것이다와 같이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느낌이 좋지 못하다, 형사의 감으로 범인이 누군지 알 거 같다. 이런 감도 동일한 메커니즘이다. 실제 문제 여부와 무관하게 조건이 갖춰지면 감을 느낀다. 그래서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다. 그러므로 감을 맹신해서도 안되고 감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감을 느꼈다는 것은 조건이 맞았다는 것이므로 무조건 별일 아닐 거라 생각하기보다, 한번쯤은 논리적으로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감의 본질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나면 그런 감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 이 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특히 미신 등에 휘둘릴 확률이 높다. 윤리에 의한 죄책감이 지배되듯 미신에 의한 어떤 감각이 지배될 확률이 높다. 인간의 능력과 무관하게 윤리에 영향을 받듯이 미신 또한 인간의 능력과 무관하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그렇기에 우수한 인간들이 미신에 휘둘리는 것이다. 그러나 감의 본질을 이해하면 그 감각이 단순히 조건이 맞아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인식하고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정 힘들면 고소 공포를 계속 떠올려보면 도움이 된다. 메커니즘이 동일하기 때문에 어떤 미신을 어기는 것에 의한 공포를 느껴도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된다. 양심에 찔린다. 미신이 무섭다. 플라보시 효과. 감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양심이나 죄책감에서 지배되지 않고 윤리에서 벗어나자고 주장하는 것은, 윤리가 주장하는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판단하지 못하는 절대적 가치에서 판단할 수 있는 상대적 가치로 만들자는 것이다. 사랑은 높은 가치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절대적이게 되면 타인에게 이용당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이 절대적 가치니까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나를 위해 희생하라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신흥 종교에서 그런 가치에 의한 지배가 일반적일 수 있으니 위험하다. 사랑이란 가치는 상대적이게 되어 인간 스스로 판단하고 사랑하고 싶은 존재를 사랑해야 한다. 그 어떤 가치도 그러하다.
양심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면 나쁜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며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것 또한 윤리에 의한 죄책감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자유롭고 민주적인 체제의 주권자이자 통치자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주권을 가지고 통치하는데 굉장히 방해되기 때문이다. 윤리가 없어도 인간 사회의 법칙에 따라 판단 후 계약 행동을 통해 스스로 판단해서 룰을 지키면 문제될 것이 없다. 축구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윤리와 같은 공포를 보통 느끼지는 않는다. 타인을 상처 입힌다거나 할 때 어떤 윤리적 개념에 의해 죄책감을 느낄지는 몰라도, 축구 규칙 어긴다고 죄책감 느끼지는 않는다. 그냥 옐로 카드나 레드 카드 같은 패널티를 받을 뿐이다. 그럼에도 일반적으로는 축구 규칙을 지킨다. 그게 축구 선수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모든 개인이 이익을 보는 룰을 만들고 그 룰을 준수하게 해야 한다. 그런 사회 법칙과 체제가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다.
3. 체제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다. 운이 칠 할에 재주가 삼 할이라는 뜻이다. 운은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이 이미 정해진 것을 말한다. 인간의 선천적 재능도 운이라 규정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재주로 규정하겠다. 운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영역이라 규정하겠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은 알지만 대응할 수 없는 자연 재해나 모르기에 대응할 수 없는 무언가를 의미할 수 있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풀면 변수다. 계획함에 있어서 인간의 힘으로 대응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인간의 힘으로 대응할 수 있는 영역은 상수다. 운칠기삼과 같이 운과 재주의 비율은 변수와 상수의 비율로 결정된다 할 수 있다. 상수를 최대한 아는 것으로 변수를 최대한 줄여 재주로 최대한 대응할 수 있게 한다. 전 세계와의 관계를 다루는 외교에서는 그런 것이 중요하다. 세계에서 변하지 않는 상수는 보통 자연의 법칙이다. 자연의 법칙은 보통 법칙이 잘못되지 않는 한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 법칙을 상수로 두고 그 외 조건을 변수로 둔 뒤 전략을 세운다. 사회에 관해서는 사회의 법칙이 아직 아마구체적으로 정리가 안 된 상태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접근한 적이 없지 않을까 싶다. 그렇기에 인류 문명을 사회의 법칙을 기준으로 정리한 뒤, 체제에 대한 이해를 해보겠다.
[체제: 2.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볼 때에, 그 조직이나 양식, 또는 그 상태를 이르는 말.]
A. 일반 사회의 법칙. 일정한 힘이 작용하여 생물 관계에 질서가 생기는 것으로 사회가 성립하게 되는 법칙. 모든 생물의 사회는 이 자연의 법칙을 기초로 한다. 여기서 일정한 힘의 작용 방식은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다. 적자생존의 법칙은 모든 생물에 공통되는 법칙, 일반 사회의 법칙은 사회를 이루는 생물에 공통되는 법칙이다.
B. 짐승 사회의 법칙. 판단을 하지 못하고 지정된 행동을 하는 것으로 일정한 힘이 작용하게 하여 생물 관계에 질서가 생기는 것으로 사회가 성립되는 법칙. 현재 보편적인 생물 사회는 이 사회의 법칙을 기초로 한다. 곤충은 유전자, 포유류는 폭력, 인간은 도덕과 윤리 같이 생물의 지능과 학문에 따라 추가되는 조건이 늘어난다.
C. 원시 사회. 원시 사회는 원시 종교와 원시 체제가 체계화되지 않은 채 자연 발생했다가 사라지는 것을 반복한다. 수많은 원시 사회 중에서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킨 사회만 적자생존의 법칙대로 살아남아 존속하게 된다. 그러면서 인간은 도덕이 존재하는 짐승 사회의 법칙에 적합하게끔 사회화가 되게 된다. 다른 말로 인간의 가축화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면서 다른 짐승 사회와 달리 유전자나 폭력 외의 개념으로도 지배하고 복종하는 사례가 나타난다.
D. 고대 사회. 고대 사회는 애니미즘과 토테미즘과 같은 불규칙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한 개념들을 종합하여 체계화한다. 그렇게 학문화한 도덕이 윤리다. 고대 중국의 제자백가나 고대 그리스 철학은 엄밀히 종교는 아니지만, 도덕을 체계화하였다는 점에서 고대 종교의 윤리와 유사하다. 이후 유학은 종교화가 되면서 유교가 된다. 원시 사회에서는 자연에 대한 공포와 같이 자연스러운 개념을 이용하여 짐승 사회의 법칙을 실현하다가, 고대 사회에서는 신, 사후, 전생, 천국과 지옥 등과 같은 인위적인 개념을 이용하여 짐승 사회의 법칙을 실현하면서 보다 강력한 지배 체계가 생기게 된다. 강력한 지배로 원시 시대에 있던 질서 밖의 존재가 줄어듦에 따라 보다 평화롭고 안전해지나, 그만큼 개인에 대한 억압이 늘어남에 따라 개인은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고대 종교는 수천 년이 넘었지만 그들의 주장은 아직까지 결과가 마땅히 나오지 못한 상태다.
E. 왕정 및 신정 체제. 왕정과 신정 체제는 원시 사회의 도덕과 고대 사회의 윤리가 만든 세계관을 기초로 하여 정복 전쟁을 통해 만들어진 사회 체제다. 일반적인 고대 철학도 인류 문명의 세계관에 영향을 크게 끼쳤으나, 기본적인 지배 체계는 절대적 가치에 의한 지배를 전제한 고대 종교쪽의 방식이 훨씬 효율적이기에 주로 쓰였다. 종교와 왕정을 구분하기 어려워할 수 있는데, 종교가 세계관을 만들어 문명을 지배했다면 왕정이나 신정은 그 세계관으로 인간을 지배했다. 이 시기 종교는 사회 체제나 다름이 없다. 조선은 유교를 사회 체제로 삼았다. 한국에서는 정교분리를 하여 종교가 체제처럼 느껴지지 않을 뿐이다. 현재 일부 이슬람 같은 종교가 다른 종교와 달리 체제와 같이 여기는 이들이 많은데, 본래 종교는 체제가 맞다. 단지 종교 개혁으로 정치와 종교가 정교분리되는 것을 통해 종교가 세속화되면서 체제로 보이질 않을 뿐이다. 만약 특정 종교가 체제처럼 보인다면, 그 종교가 주류인 사회는 아직 종교 개혁 이전의 시대에 머물러있다 보면 된다. 현대에 존재한다고 해서 모든 국가가 현대적인 것은 아니다.
F. 자유 혁명. 자유 혁명은 근대 이념의 시작이다. 서구권에서 다양한 조건이 겹치면서 개인의 힘이 강해짐에 따라, 개인의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하며 일어난 것이 자유 혁명이다. 왕과 귀족의 혈통에서 부르주아의 자본과 기술로 힘이 이동하는 것으로 보다 많은 개인이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근대 이념이 시작되면서 근대 이념이 속한 체제는 민주주의가 기본이다. 자유 민주주의든, 사회 민주주의든, 인민 민주주의든 어떤 형태로든 민주주의가 붙는다. 민주주의가 붙지 않는 국가라면 그 국가는 아직 근대 이전이다. 물론 민주주의가 붙어도 실제 민주적인지와는 무관할 수 있다.
G. 자유주의, 자본주의. 자유 혁명 이후 초기 시대다. 근대 초기 이념이기 때문에 이 체제를 보통 보수라 부른다. 그러나 짐승 사회의 법칙이 바뀐 것이 아니었다. 원시 사회의 도덕과 고대 사회의 윤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절대적 가치가 하나 추가되었을 뿐이다. 원시 사회의 도덕보다 고대 사회의 윤리가 우선되었던 것처럼, 이전 도덕과 윤리보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시대의 가치가 우선되었던 것이다. 짐승 사회의 법칙을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가치로 실현했다. 돈으로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을 하게 한다. 그것으로 내국은 노동자를 착취하고 외국은 식민지를 착취한다.
H.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유 혁명 이후 중기 시대다. 근대 중기 이념이기 때문에 이 체제를 보통 진보라 부른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에서 온갖 착취와 지배가 나타나자, 그에 반발하여 다시 고대 사회의 윤리를 강조하자는 움직임으로 나타난 체제다. 윤리에 의한 강력한 지배로 다시 인류의 평화와 안전을 위하자며 외친 것이다. 고대 사회에 민주주의가 더해지면서 수동적인 윤리의 지배냐 능동적인 윤리의 지배냐가 달라질 수 있으나, 윤리에 의한 지배는 동일하다. 특정 가치를 절대적으로 지키면서 평등을 이루자는 주장은 신 아래 모두가 평등하자는 종교 평등 사상과 다를 바가 없다. 현재 사회는 사회주의를 진보로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짐승 사회의 법칙을 어떤 식으로 실현하냐를 기준으로 삼으면 퇴보다. 이 체제는 개인을 지배하는 윤리와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주의는 서로 모순되면서 사회주의는 모순될 수밖에 없다.
I. 민주화, 세계화, 디지털화. 자유 혁명 이후 후기 시대다. 인류 문명의 이념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보수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진보로 여긴 이후 수백 년간 정체되고 있다. 룰은 근대에 머물러 있는데 기술은 계속 발전하여 현대로 넘어갔다. 그러면서 기술의 발전으로 세계화와 디지털화가 되면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욕망이 확산되면서 체제와 무관하게 대부분 국가는 자유주의화가 되게 된다. 개인의 가치관은 고대 종교에 의해 윤리적인데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민주적인 정교일치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민주적으로 고대 종교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태도가 나온다. 그 현상 중 하나가 바로 PC주의 리버럴이다. 사회주의의 가치와 자유주의의 가치가 결합되었다. 타인에게 고대 시대 가치를 절대적으로 강제하는 태도를 자유롭게 하고 있다. 윤리를 명분으로 타인을 억압할 자유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롭고 민주주의 체제에서 PC주의의 주장은 대부분 고대 종교의 절대적 가치를 기반하여 윤리적이기 때문에 사회는 그것을 수용하려 한다. 그러나 윤리적이기 때문에 자유롭고 민주적인 체제와 모순되면서 혼란이 생기게 된다. 특히 문화 상대주의를 말하며 다양한 문화 속의 도덕과 윤리를 무작정 수용하면서, 그 도덕과 윤리를 통해 만들어진 다양한 룰이 한 사회 내에 공존하는 것으로 온갖 다툼이 발생하게 된다. 도덕과 윤리는 절대적 가치기 때문에 다른 룰과 타협할 수 없으면서 다양한 가치와 하나의 룰이 아닌 다양한 룰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특히 아직 정교분리가 안 된 일부 이슬람은 샤리아존을 외치며 아예 표면적으로 다양한 룰을 정당화한다. 다양한 가치가 짬뽕이 되고 있는데, 절대적 가치는 판단하지 못하면서 가치 체계를 정리할 수가 없으면서 더욱 혼란스러운 상태다. 그러면서 나타나는 현상이 전 세계적인 저출산 현상이다. 윤리에 의한 미성년 성 억압과 자유주의화에 의한 성년 결혼 강제가 불가하면서 성 범주 가치 폭락에 의한 전 세계 저출산 현상이 나타난다. 사회의 법칙과 가치에 대해서 절대적 가치인 윤리로 판단하지 못하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현재 고질적 사회 문제는 수십 년이 넘게 해결하지 못하는 상태다. 이제는 상대적 가치 세계로 진입하여 짐승 사회의 법칙을 인간 사회의 법칙으로 바꿔 룰도 현대로 넘어가야 한다.
사회의 법칙을 기초로 한 인류 문명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사회의 법칙에 속하는 영역은 대체로 변하지 않는 상수일 것이다. 특정 사회에서 어떤 가치로 짐승 사회의 법칙이 성립되는지 파악하면, 그 가치를 사회의 상수에 두어도 대게 충분하다. 자연의 법칙이 그러하듯 사회의 법칙도 성립 조건만 갖춰지면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폭발의 성립 조건이 갖춰지면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폭발하듯, 지배의 성립 조건이 갖춰지면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지배하게 된다. 아무리 자유롭고 싶어도 짐승 사회의 법칙이 남아있는 한 자연스럽게 지배가 성립되게 된다. 인간이 자유롭고 싶다면 사회의 법칙부터 다시 만들어야 한다. 사회의 법칙을 바꾸는 것은 지금까지 역사와 아예 다른 길이다. 판단 후 계약 행동은 스포츠나 시장 원리 등으로 특정 제도 내에서 일부 작용하고 있으나, 그걸 사회의 법칙으로 구현한 적은 없다. 이게 구현되려면 짐승 사회의 법칙에서 벗어나 모든 가치를 상대적으로 여기고, 모두가 실제로 지배와 피지배가 없이 대등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신, 도덕, 윤리, 돈 등 전부 상대적으로 여기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체제에 맞게 모든 개인을 주권을 가진 권한이 다른 통치자로 여겨야 한다.
고대 종교에서 금욕주의와 이타주의가 보편적인 윤리였던 까닭은 그 가치가 절대적이어야 고대 종교의 방식으로 짐승 사회의 법칙이 성립했기 때문이다. 금욕주의와 이타주의의 본질을 통해 어째서 그것이 보편적으로 성립 조건에 속했는지 알아보자. 금욕주의는 특정 욕망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른 욕망을 금지하거나 절제하게 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옳게 만든다. 예를 들어 유교에서는 학문과 권력, 기독교에서는 신앙과 선교, 불교에서는 수행과 해탈 같은 특정한 가치에 대한 욕망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 외의 가치에 대한 욕망을 금지하거나 절제하게 한다. 그러면서 판단하지 못하고 지정된 행동을 실행하게 하는 것으로 종교가 바라는 힘의 작용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이타주의는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하게 만들기 위해 본인을 희생하여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옳게 만든다. 그것으로 개인의 개성을 제거하고 집단을 위해 희생하게 하는 것으로 종교가 바라는 힘의 작용을 성립시킨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고대 종교의 방식으로 짐승 사회의 법칙을 실현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달리 말해 이 두 가지 조건이 있으면 인간 사회의 법칙은 실현될 수 없다. 욕망을 금지하거나 절제하든 타인을 위해 희생하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금욕주의와 욕망주의의 차이는 판단이다. 욕망을 추구한다는 점은 같으나 전자는 종교 교리에 따라 정해진 욕망만 추구하고, 후자는 본인의 판단으로 원하는 욕망을 추구한다. 이타주의와 이기주의의 차이도 판단이다. 이기주의 또한 타인의 행복이 본인의 이익이라면 타인을 위해 희생할 수 있다. 같은 행동이라도 판단 유무에 따라 전혀 달라진다. 애초에 판단할 수 있게 하면 짐승 사회의 법칙은 정상적으로 성립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른 욕망을 갖게 되면 해당 종교의 방식으로 짐승 사회의 법칙을 성립시킬 수 없다. 타인을 위한 희생이 개인의 판단으로 결정되면 개개인 편차가 심하여 그것을 통한 법칙화가 성립될 수 없다. 개인이 판단하면서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는 짐승 사회의 법칙으로는 불가능하다.
인간 사회의 법칙을 기초로 한 자유주의 체제와 부속 체제들에 대해 몇 가지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자유주의 체제.
기본적으로 갖춰져야 하는 성립 조건은 세 개다. 모든 가치를 상대적으로 여기는 상대적 가치 세계로 진입할 것. 사회의 법칙을 판단하지 못하고 행동하는 짐승 사회의 법칙에서 판단하고 계약하여 행동하는 인간 사회의 법칙으로 바꾸는 것. 법칙 내에 과학적인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모든 학문을 과학화를 하는 것. 사고 자유, 판단 가능, 학문 과학화가 기본 성립 조건이다.
자유 이념 실현은 자유의 본질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자아가 생물에서 판단만 하는 기관이라는 것을 전제하여 판단의 자유가 자아에게 있어 자유의 본질이라 보았다. 판단의 자유의 성립 조건도 세 개다. 생존, 능력, 환경. 자아가 판단을 할 수 있는 생물의 생존, 자아가 판단을 할 수 있는 지적 능력, 자아가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는 사회 환경. 이것을 가능한 최대한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재 목표는 불로불사, 세계의 본질, 자유 사회가 필요하게 된다. 즉 자유 이념의 개념적 성립 조건은 생존, 능력, 환경이고 실제 목표를 위한 성립 조건은 불로불사, 세계의 본질, 자유 사회가 된다. 일단 이 세 개를 목표로 삼으려 한다.
자유 이념의 핵심 개념은 모든 개인의 생존, 능력, 환경이다.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체제는 조건과 방법 둘 다 필수적인 민주주의, 시장주의, 개인주의 그리고 조건이 필수적인 역할주의, 과학주의가 있을 수 있다. 민주주의의 이념은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국가를 통치하고 싶다는 이기적인 바람에서 시작된다. 시장주의의 이념은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시장에서 거래하고 소유하고 싶다는 이기적인 바람에서 시작된다. 개인주의의 이념은 모든 개인이 개성을 가지고 자유롭게 관계를 가지고 싶다는 이기적인 바람에서 시작된다. 이 셋의 체제는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를 성립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과 방식이다. 일반 사회의 법칙은 일정한 힘이 작용하여 생물 관계에 질서가 생기는 것을 말하는데, 일정한 힘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이지는 않더라도 보편적인 가치는 필요하게 된다. 그걸 위한 것이 사회 계약이다. 모두가 각자 판단하여 각 체제에 맞는 생활 양식으로 살겠다고 사회와 계약을 맺어야 한다. 이것에 벗어나면 힘이 일정해지지 않으면서 법칙이 파괴되는 것으로 사회가 파탄난다. 현재 사회 파탄 원인도 그것 때문이다. 윤리와 체제가 서로 다른 힘이 작용하도록 되어 있으니 모순되면서 법칙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역할주의는 권위주의를 대체한다. 권위가 존중 받는 것이 아닌 역할의 전문성이 존중 받는다. 판단하지 못하면 누구든 바보라는 명확한 논리를 기초로 비전문가가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은 되도록 전문가를 존중하되, 전문가 또한 전문가의 권위로 비전문가를 무시할 것이 아니라 비전문가가 이해할 수 있는 논리로 설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과학주의는 자연 계열 위주였던 학문의 과학화를 모든 학문으로 넓힌다. 인문 계열에 사회 과학이 있으나 윤리에 의하여 윤리라는 한정된 관점이란 조건으로 사물과 현상을 탐구하여 지식의 모순이 많아 순도가 낮은 상태이기 때문에 현재는 과학화되었다 하기 어렵다. 상대적 가치 세계에 진입하여 다양한 관점으로 지식의 모순이란 불순물을 제거하면서 순도를 높인다면 자연 계열 외의 학문도 과학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둘의 체제는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를 성립시키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나 필수적인 방법은 아니다. 이것을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다른 방법도 괜찮다. 그러나 그게 없다면 이런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지식을 탐구하는 것을 사회와 계약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자유주의라 하여 뭐든지 자유로워야 한다 생각할 수 있는데, 모든 개인의 자유를 성립시킬 수 있는 체제와의 계약을 하고, 그 체제를 지켜야 그런 자유가 법칙처럼 지속될 수 있다. 이 체제들을 기초로 다양한 룰과 정책과 제도를 통해 모든 개인의 판단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개인의 생존을 보장하고 능력을 키워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춘다. 더 정리할 게 있는 거 같은데 지금 나의 레벨로는 이번 편에서는 여기까지. 각 체제와 룰, 그리고 몇 가지 정책과 제도에 대해 알아보겠다.
정치 (민주주의)
정치는 국가를 관리하는 일이다. 민주주의는 모든 개인이 주권을 가진 권한이 다른 통치자로서 모든 개인이 국가를 관리한다. 선거제나 관료제 같이 정책과 제도에 따라 권한 부여 방식이 다를 뿐이지 모든 개인이 통치자란 개념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개인마다 권력이 높거나 낮음이 없다. 정부 권력이 위 아래가 없기 때문에 다른 힘으로 어떤 결과의 차이를 불합리하게 바꿀 수는 없다. 그러면서 앞서나가는 인간과 뒤쳐지는 인간이 생긴다. 권력의 상하는 없지만 결과의 선후는 존재한다. 재능, 노력, 환경 등 다양한 조건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와도 그것을 불합리하게 같게 만들 수는 없다. 그걸 같기 만들기 위해서는 권력을 가진 인간이 다른 힘을 가진 인간을 찍어 눌러서 강제로 같게 만들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과의 선후를 없애기 위해서 권력의 상하가 생긴다. 더 이상 그것은 민주주의라 할 수 없다. 체제를 기초로 한 논리적인 주장이 아님에도 강제로 하는 것은 민주주의에서는 다수의 횡포고 독재주의에서는 독재자의 횡포다. 사회 민주주의나 인민 민주주의는 개인의 이기적인 가치관을 기초로 진정한 민의가 반영되는 게 아니라, 과거 고대 종교가 규정한 절대적 가치를 기초로 민의로 포장해 반영시키고 있다. 그렇기에 사회의 룰과 개인의 룰이 나뉘면서 사회 갈등이 심각해진다. 그게 심각해지면 내전, 내전에 의한 쿠데타 또는 국가 분리. 룰의 차이에 의한 전쟁의 시작이다. 실제로 개인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이 안되니까 각국이 내부 분열이 되거나 독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권력의 상하는 없고 결과의 선후는 있는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자유주의 말고는 민주주의가 성립될 수 없다.
현재 민주주의는 윤리에 의해 민주적인 정교일치 현상이 곧잘 일어나면서 법을 윤리적으로 만들고 있는데, 자유주의 체제에서 법은 어디까지나 도덕의 최소가 아닌 체제의 규칙이다. 고대 종교의 가치에 맞춰서 법을 만들 것이 아니라, 현재 사회 체제가 무엇인지 탐구하고, 그 체제에 맞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법이 합리적이게 되면서 모든 개인이 법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으로 법을 준수하게 될 수 있다.
일반 정치는 국내 정치, 외교 정치는 국외 정치에 속한다. 민주화, 세계화, 디지털화의 영향으로 이제 그 경계가 굉장히 옅어지고 있다. 간단히 말해 외교 또한 정치라는 것이다. 일반 정치는 국가를 관리하는 일이라면, 외교 정치는 지구를 관리하는 일이다. 전 세계 공통 문제는 외교 정치로 지구 권력을 얻어 지구를 관리해야 한다. 그걸 패권 국가가 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민주화의 영향으로 어떤 국가라 하더라도 지구 관리의 권한을 얻을 수 있다. 어느 때보다 주권자의 정치력이 필요한 시대다.
경제 (시장주의)
경제는 소비, 생산, 분배하는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 통상 경제적으로보면 생산부터 활동이 일어나나 사회적으로 보면 소비부터 활동이 일어난다. 소비가 되지 않으면 사회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어떤 형태든 소비부터 할 수 있어야 생산이 이뤄질 수 있게 된다. 시장주의는 시장에서 경제 활동이 일어나는 체제다. 이른바 시장 경제 체제다. 보통 경제 체제를 자본주의라 부르는데, 자본과 시장 중에서 시장이 더 우선되는 개념이라 본다. 자본이 없어도 상품이 있으면 시장에서 거래가 될 수 있지만, 시장이 없으면 자본과 상품이 없으면 거래가 안 된다. 자본주의를 마르크스가 이름 지었다고 하는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므로 시장주의라 부르겠다.
경제를 좀 더 과학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시장 내 수요와 공급으로 가격 같은 가치가 결정되도록 하는 것을 넘어 시장 내 수요와 공급을 결정할 인간의 가치관까지 파악하여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모든 현상은 물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이 어떤 가치로 에너지를 방출하고 소비하는지를 파악하고, 그 가치에 따라 생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사회 가치를 관리한다. 그렇게 발생한 사회 에너지를 바탕으로 경제 생태계를 조성해 사회의 가치만 관리하면 알아서 소비하고 생산하고 분배되는 구조를 구축한다. 인간의 가치를 기초로 하여 물리적인 움직임을 고려한 학문을 경제 물리학이라 이름지었다.
관계 (개인주의, 역할주의)
관계는 정치와 경제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의 인간 관계를 의미한다. 짐승 사회의 법칙은 판단 불가 후 지정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을 통해 일정한 힘이 작용하게 되는 것으로 생물 관계에 질서를 만드는 것으로 사회가 성립되게 하는 것이다. 법칙은 관계가 기본이기에 관계가 체제 변화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에 따라 관계에 심각한 사회 문제가 생긴 상태다. 자유 혁명 이전의 체제에서는 고대 종교의 절대적 가치인 윤리를 기초로 인간 관계에 구체적인 답이 있었다. 유교는 그것이 특히 심하여 세부적인 인간 관계는 물론이고 족보와 같이 죽은 인간과의 관계까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을 정도다. 연하는 연상에게 존댓말을 할 것. 이런 것이 기본적으로 고대 종교 가치로 정해진 인간 관계의 답이었다. 그러나 자유 혁명 이후의 체제인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관계에 구체적인 답이 없다. 자유 이념과 자유 이념 실현 조건이 갖춰지면 그 외에는 자유롭게 하더라도 대체로 문제가 없다. 생활 양식이 대부분 정해져 있던 체제에서 생활 양식이 개념화되어 개념 내에서 각자 자유롭게 정하면 되는 체제로 바뀐 것이다. 인간 관계에 답지가 사라졌다. 가족, 연인, 친구, 학교, 정부, 기업, 군대 등 다양한 사회에서 인간 관계에 관한 답지가 사라짐에 따라 혼란이 극대화되고 있다. 괜히 점, 혈액형, MBTI가 유행했던 게 아닐지 모른다. 답지가 있다가 답지가 사라졌으니까. 관계의 변화를 상징하는 용어가 바로 꼰대다. 고대 종교 가치로 보면 유교를 기초로 한 권위적인 행동은 정당하나, 자유주의 체제로 보면 부당하다. 그럼에도 고대 종교 가치로 생활하면 체제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시대가 달라졌음을 알고 그런 권위적인 인간을 꼰대라 비판한 것이다.
관계에 기준들이 달라져야 한다. 집단주의는 개인주의로, 권위주의는 역할주의로, 윤리는 과학으로 바뀌어야 한다. 개인의 자유를 위해 집단주의는 개인주의가 되어야 하고, 개인이 권위에 의해 자유를 잃지 않기 위해 권위에 보내야 할 존중이 역할의 전문성에 보내지도록 권위주의는 역할주의가 되어야 하고, 인간 관계에서 합리적인 기준은 윤리가 아닌 과학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집단이 개인주의라면 개인에게 집단의 이익을 위한 희생을 보통 강제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집단이 역할주의라면 권위보다 역할의 전문성을 근거로 우선순위가 결정되면서 보다 전문적이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집단에서 과학이라면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서로를 배려할 수 있다. 윤리는 과학이 없는 시대에 만들어져 과학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자유와 평등도 개인주의적이어야 한다. 개인의 사랑과 차별은 영향력이 적지만 집단의 사랑과 차별은 영향력이 크다. 집단의 전체주의적인 사랑이 신흥 종교고 집단의 전체주의적인 차별이 집단 차별이다. 만약에 개인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차별한다면 그 영향력은 대부분 크지 않기 때문에 끽해야 자잘한 범죄인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대부분 개인의 가치관에 따른 사랑과 차별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백인 한 명이 흑인을 차별하더라도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백인 집단이 흑인을 차별하면 큰 문제가 된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흑인 한 명이 백인을 차별하는 것은 보통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흑인 집단이 백인을 차별하면 큰 문제가 된다. 지금까지 어떤 차별도 그렇다. 개인이 차별하면 보통 큰 문제가 되지 않으나 집단이 차별하면 대게 큰 문제가 된다. 개인이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증오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의 자유에 속한다. 그것을 어떤 윤리로 막아서는 자유주의 체제가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개인의 감정을 전체주의적으로 집단 전체가 공유해버리면 사회 자체가 성립되지 못할 수가 있다. 그렇기에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라도 모든 관계는 전체주의를 없애고 개인주의적이어야 한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것을 공감하고 동의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판단으로 결정하여야 한다. 그것이 만약 많은 개인이 동의하는 판단을 하더라도 집단화되어서 표현되어서는 안 된다. 개인은 자유주의적이게 해야 하고 집단은 전체주의적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것으로 개인의 자유와 집단의 안정이 조화를 이루게 된다.
PC주의, 여성주의, 차별 금지법, 어퍼머티브 액션, cedaw 등의 사상과 정책과 제도의 본질적 문제는 집단 대상이라는 것이다. 집단을 대상으로 이익과 불이익이 가해지면서 집단 내 속한 개인이 부당하게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보는 경우가 늘어나게 되었다. 부유한 흑인과 가난한 백인은 인종 차이로 흑인이 정책의 혜택을 보고 백인이 정책의 혜택을 볼 수 없을 수 있다. 단지 태어나면서 정해진 성질에 의해 가난함에도 혜택이 없고 부유함에도 혜택이 있는 것이다. 개개인의 그런 성질을 배제하고 각각 개인에게 적합한 혜택이 부여된다면 그런 부당한 이익이나 손해는 사라질 것이다.
집단이 아닌 개인에 맞추는 것. 개인에게 혜택을 허용해도 집단에 혜택을 허용할 수 없다. 개인에게 차별을 허용해도 집단에 차별을 허용할 수 없다. 철저한 개인주의. 그래야 공정하여 다양한 룰이 나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징병에 있어 남녀를 나눌 것이 아니라 개인의 근력이나 체력을 기초로 하여 적합도로 나눠야 한다. 보편적으로는 여성이 남성보다 힘이 약하니까 여성이 적게 징병되겠지만, 그래야 합리적일 수 있다. 그 외 혜택도 마찬가지다. 모든 관계에서 개인으로 접근해야 공정하고 합리적일 수 있다.
PC주의나 여성주의 등은 왜 사람들이 그런 것을 따르는지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왜 사회에서 그것이 받아들여지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타당하다. 서구권에 이민자 등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있기 때문에 그런 측면이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그런 사상들이 윤리적으로 고대 종교의 절대적 가치를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윤리로 디자인된 사람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약자, 소수자 돕는 것 등 고대 종교와 PC주의의 가치 자체는 비슷하기 때문에 약간의 조건만 바꾸면 바로 적용될 수 있다.
학문 (과학주의)
학문은 체계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과학주의는 모든 학문을 자연 계열의 과학처럼 접근한다는 것을 말한다. 다양한 방법을 통해 모든 조건에서 모순이 없는 순도 높은 지식을 찾는다. 지식의 정제 작업. 모순이 없는 건 나도 맞고 너도 맞다. 모순이 있는 건 나도 틀리고 너도 틀리다. 어떤 특정 문명이 전부 우월하냐 열등하냐가 아닌 모든 지식을 모아 정제하여 순도를 높인다. 순도 높은 지식이 바로 과학의 본질. 그걸 위해서 상대적 가치 세계로 진입해 사고 자유를 얻어야 한다. 다양한 사고법, 변증법적 논리학 등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단순히 문답만이 아니라 모든 조건에서 모순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미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자연 계열에서도 사고 자유는 상당한 이점이 될 수 있다.
모든 가치를 상대적으로 여기기 위해서는 고정 관념이 적을 필요가 있다. 자아는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는데 저항이 없도록 한다. 자아 나이는 적은 편이 유리하다. 예를 들어 정확한지는 모르겠는데, 평균 33세 이후부터는 듣던 음악만 듣는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그렇지는 않다. 그런 것은 개인 편차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나이와 무관하게 자아 나이는 적거나 많을 수 있다. 나이라는 것은 주관적 개념이기 때문에 10대에 느끼는 시간의 흐름과 40대에 느끼는 시간의 흐름이 다를 수 있는 것처럼 개인마다 다르다. 요즘은 과거와 달리 성년 이후 강제되는 것이 적어 아마 많은 인간이 자아 나이는 크게 먹지 않았을 거라 본다. 그만큼 유연하여 상대적 가치 세계에 진입하기 유리할 것이다. 유연한 상태에서 논리적으로 상대적 가치를 이해하고 절대적 가치가 없음을 받아들이면 된다. (그렇다고 취향에도 아닌 거 억지로 들으라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된다.)
지식의 순도를 높이는 과정은 지식을 모아 정리하는 방법이 있지만, 그 방법으로는 새로운 발상이 나오기 어려울 수 있다. 새로운 발상은 우선 개념을 토대로 논리적인 발상을 성립시키고 나서, 이미 있던 지식을 소화하면서 서로의 모순을 제거하는 것으로 새로운 발상의 순도를 높인다. 기초적인 논리는 성립된 상태기 때문에 그런 것이 가능하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사상을 하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집권하면 패배하는 현상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에도 정치가가 일을 안해도 사회가 불행한 것이라 착각하고 있다. 그렇지가 않다. 학문에서 사회 문제에 대한 대응이 나오지 못하니까 어떤 정치 세력이든 정치 성향과 무관하게 집권만 하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차후 선거에서 패배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 사회가 바람직하게 되길 바란다면 우선 학문이 발전하길 바라야 한다. 그리고 학문의 발전을 수용할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룰 (이해, 안보, 체제)
짐승 사회의 법칙에서의 룰과 인간 사회의 법칙에서의 룰의 핵심적인 차이는 판단이다.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판단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배제해야 한다.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에서의 룰은 도덕의 최소가 아닌 체제의 규칙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로 체제에 관한 룰부터 시작되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개인의 룰을 체제의 룰에 포함시키는 작업을 위한 이해의 룰이 필요하고, 사회와 체제의 안전 보장을 위한 안보의 룰이 필요하다. 그 다음에 체제의 룰이 적용되게 된다. 이해의 룰로 모든 개인의 이익을 보장하고, 안보의 룰로 사회와 체제의 안전을 보장하고, 체제의 룰로 체제에 적합한 생활 양식을 보장한다. 사회와 체제는 사회 계약을 통해 각 이념에 대한 계약을 거쳤으나, 그 체제의 규칙인 룰은 체제 이념인 민주주의에 따라 모든 개인의 의사로 결정해야 한다. 룰은 이념을 통해 방향성은 정해져도 구체적인 방법은 정해지지 않은 상태다. 그것에 대해 몇 가지 정리할 것인데, 룰은 개념과 달리 지나치게 방대해질 수 있기도 하여 현재 나의 레벨로 할 수 있는 것까지 정리하겠다.
이해의 룰.
[이해: 1. 이익과 손해를 아울러 이르는 말.]
이해의 룰은 개인의 기본적인 룰로 이익이 되는 것을 수용하고 손해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 이 룰을 정리해야 하는 이유는 개인의 이해의 룰이 체제의 룰에 속하기로 결정해야 다양한 룰이 생기지 않으면서 다툼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해의 종류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짐승의 경우 유전자로 판단되는 것이 많아 유전자에 따라 생기는 이해의 룰로 접근해도 충분하지만, 인간의 경우 자아로 판단되는 것이 많아 자아로 판단한 이해의 룰까지 추가해야 한다.
이해의 종류는 크게 세 개로 나눌 수 있다. 생물의 이해, 자아의 이해, 체제의 이해. 유전자로 정해진 이익과 손해, 자아로 판단한 이익과 손해, 사회와 계약한 체제로 본 이익과 손해. 이런 이익과 손해는 의미로 표현되고 가치로 결정된다. 각각 개인의 가치관으로 이해의 룰이 결정되므로, 체제의 룰에 이해의 룰을 포함시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상대적 가치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절대적 가치인 윤리의 경우 자아가 판단하지 못하고 이익과 손해가 결정된다. 그것을 판단하지 못하면서 윤리를 만든 인간의 이익과 손해를 위해 활동하게 된다. 룰은 일관된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윤리와 같이 일관되지 못한 상태가 존재하면 룰이 일관되지 못하게 된다. 애초에 절대적 가치는 그 가치로 정해진 룰을 절대적으로 여기면서 다른 룰과 타협할 수 없으면서 절대적 가치가 존재하는 한 이해의 룰이 정상 작동하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상대적 가치 세계에 진입해야 이해의 룰이 정상 작동될 수 있다. 일단은 윤리가 있더라도 이해의 룰이 체제의 룰에 속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겠다.
개인의 행위가 모두 이익이 될 수는 없다. 식사를 하더라도 이후 발생할 배설을 손해로 여길 수 있다. 수면을 하더라도 하면서 나타나는 시간 소비를 손해로 느낄 수 있다. 어떤 이익이 되는 행동도 손해가 동반될 수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하는 것은 손해보다 이익이 크기 때문이다. 그것처럼 체제의 룰을 지키는 것으로 얻는 이익이 지키지 않는 것으로 얻는 손해보다 크면 대체로 이해의 룰이 체제의 룰에 속하게 된다. 예를 들어 왕정 체제에서는 비민주적으로 피지배자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 보장이 확실하지 않지만,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민주적으로 주권자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 보장이 확실할 수 있다. 전자는 이해의 룰과 어긋나면서 개인의 독자적 룰이 생김에 따라 다툼이 일어날 수 있지만 후자는 이해의 룰과 일치하면서 체제의 룰을 지키면서 다툼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 체제가 자유 이념의 실현 조건인 개인의 생존, 능력, 환경을 보장하면 대체로 개인은 룰에 속하는 것이 이익이 될 것이다. 그것을 기초로 모든 인간의 감정, 욕구, 욕망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이 체제의 룰 내에서 충족될 수 있도록 한다. 과도한 자유가 사회를 엉망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가치 관리로 접근한다. 예를 들어 비만이 많은 이유는 유전자적 이유, 자원의 풍부, 기업의 광고 등의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살을 빼야 할 동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만약 무언가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살을 빼야만 한다면 살을 뺐을 것이다. 실제로 연애를 하고 싶어서 엄청나게 많은 살을 뺀 인간이 있다. 그런 동기는 성의 범주 가치를 올려야 할 것이다. 검열, 규제, 억압 등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적절한 욕망을 갖도록 가치 관리하는 것으로 사회를 구성한다. 적절한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금욕주의는 타인이 지정된 특정 욕망만 극대화한다면, 욕망주의는 본인이 판단으로 욕망을 추구한다.
PC주의가 다양한 가치를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PC의 가치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타협하지 못하고 부정하면서 절대적 가치인 윤리와 다를 바 없는 상태다. 건강을 위해 살을 뺀다고 했던 연예인에게 온갖 비난을 한 사례가 있다. PC의 가치에 어긋났다는 이유 하나로 판단하지 못하고 비난했던 것이다. 현재 PC주의는 단지 비만을 합리화하고 있을 뿐이다.
이해의 룰이 체제에 룰에 속하려면 개인도 무엇이 이익인지 가치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평소에 공기를 이익이라 여기지 않지만 공기가 사라지면 손해라 여길 수 있다. 유교 질서에서 연하의 존댓말을 듣는 것은 이익이라 여기지 않지만 반말을 들으면 손해라 여길 수 있다. 이익의 기준과 손해의 기준이 다르다. 생명과 재산이 보존되는 이익이 있다 해도 그것을 이익이라 여기지 않으면 이해의 룰에 포함이 안될 수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개인이 변해야 된다. 개개인은 무엇이 이익이고 손해인지 가치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해서 이해의 룰을 체제의 룰에 속하게 하여 다양한 룰을 만들지 않게 하여 다툼을 줄이는 것이 진정한 평화의 길이다. 룰 내에서 종교를 포용하더라도, 그 종교의 가치는 사회에서 절대적 가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일부 이슬람, 샤리아존을 주장하는 이슬람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중세 시대에 머물러서 이념이 아닌 종교를 체제로 삼고 있다.
북한과 같이 룰이 달라 타협이 안 되는 국가와는 우선 공통된 룰을 만드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해의 룰이다. 민족이나 반공 같은 어떤 가치에서 벗어나 철저하게 이익과 손해만 따지는 룰에는 지능이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포함시킬 수 있다. 룰에 포함시키지 못하면 어떤 협상을 하더라도 무용지물이 된다.
짐승 사회의 법칙에서 만들어진 평화와 인간 사회의 법칙에서 만들어진 평화는 같은 평화라 해도 전혀 다르다. 짐승 사회의 법칙에서는 판단하지 못하고 지정된 행동을 하게 하는 것으로 지배하여 평화를 이룰 수 있다. 그렇게 해서 특정 누군가만 이익을 보면서 평화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건 자유적이지도 않고 민주적이지도 않다. 도대체 어떤 평화를 바라는 것인가? 인간 사회의 법칙에서 만들어진 평화는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욕구와 욕망을 추구하면서 이뤄지는 평화다.
안보의 룰.
[안보: 2. ‘안전 보장’을 줄여 이르는 말.]
이해의 룰을 체제의 룰에 속하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다양한 룰을 만들지 않게 한 뒤에 고려해야 할 기본 룰은 안보다. 이해와 안보를 체제의 룰에서 따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미리 정의해놓는 것은 체제와 무관하게 이 둘은 반드시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해의 룰은 룰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조건이라면 안보의 룰은 존재 유지를 위한 조건이다.
안전을 보장하여 존재를 유지한다. 안전은 위험이나 사고가 날 염려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룰의 차이를 없애 하나의 룰이 되면 인간 관계에서의 위험이나 사고는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인간 관계에서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그것을 하면 해결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강제하고 지배하고 억압하고 하면서 줄일 수는 있는데 한계가 뚜렷하고 부작용이 심하며 무엇보다 체제에 적합하지 않다. 그 외에 사회에 위험이 되는 모든 것을 파악하고 대응한다.
상호간의 신용을 통해 서로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데, 이는 사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신용이란 개념으로 몇 가지 알아보겠다.
윤리와 신용 사회의 차이.
윤리와 신용 사회는 둘 다 판단하지 않는 공통점이 있다. 윤리로 만들어진 인간 관계에서 연하의 존댓말은 따로 판단하지 않는다. 신용 사회에서 거래되는 화폐에 대해서는 따로 위폐인지 판단하지 않는다. 둘 다 판단하지 않지만 전자는 절대적 가치로 판단을 하면 문제가 생길 수가 있고 후자는 상대적 가치로 판단할 수 있지만 절차를 생략해 사회적 이익을 얻기 위해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판단하지 못하는 것과 판단하지 않는 것은 다른 개념이다.
신용 사회에서 정부와 개인이 해야 할 일.
신용 사회에서 정부가 책임져야 하는 것은 품질이고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것은 활용이다. 사회에서 안보는 신용을 통해 관련 절차를 생략하고 있다. 그것은 정부의 책임이다. 식약처에서 식품 검사하는 것도 안보 신용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품질이 보증된 식품을 구매하고 나서 방치했다 상한 상태에서 먹어서 탈이 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책임이다. 위험 지역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위험 지역에 가지 말라고 지역 품질이 위험하다는 것을 보증했음에도 개인이 그 지역에 가서 사고 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책임이다. 단순히 사고가 났다고 해서 모든 것을 정부 책임으로 모는 것은 부당하다. 반대로 품질 문제로 사고가 난 것은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
신용 사회의 이상은 계약서를 안보고도 계약해도 손해가 없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어렵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생각해보면 화폐를 받을 때 따로 검사를 하지 않고 음식을 먹을 때 따로 성분 조사를 하지 않는다. 충분한 신용이 쌓이면 그래도 상관 없다. 만약에 지속적으로 계약 위반이나 사건사고가 발생하는 것이라면 기본적인 제도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세 제도나 고용 제도가 그렇다. 그런 것에 대해 따로 확인을 해야 하는 것 자체가 사회적 비용 낭비다. 이런 것은 제도 자체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신용 사회는 사회 구성원이 모여 시스템을 구축한다. 민주화, 세계화, 디지털화가 되면서 세계 시장과 직접 거래하는 일이 늘게 됨에 따라 안보 위험이 생길 수 있는데, 이는 특정 국가가 독자적으로 판단할 게 아니라 국가가 모여 그에 관한 논의를 해야 한다. 그게 지구 정치다.
신용이 어려운 사회와의 거래.
체제의 유사성,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룰이 유사하거나 다를 수 있다. 룰이 크게 다를 경우 다툼이 발생할 소지가 있기 때문에 잠재적 안보 위협 대상이 되게 된다. 체제가 다른 국가와의 거래를 안보 개념이 부족한 상태에서 하는 경우가 잦은 상태다. 특히 중국이 그렇다. 중국과의 거래에서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중국산 장비나 부품을 쓰다가 안보에 위험이 되는 사건사고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 대놓고 군사적 위협일 경우에는 안보적 판단이 쉬운데, 경제적으로 접근하면 안보적 판단이 어려운 것 같다. 잠재적 안보 위협 대상과의 거래를 할 때에는 경제적 손익과 정치적 손익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더라도, 산업 스파이 등의 문제가 발생할 경우 정치적 손해가 될 수 있다. 룰에 대한 이해와 안보 위협 대상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한다.
체제의 룰.
[체제: 2.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볼 때에, 그 조직이나 양식, 또는 그 상태를 이르는 말.]
체제는 다양한 뜻이 있는데, 유기체로 접근하는 것이 과학적 접근을 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 보았다.
체제의 룰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체제에 맞춘 룰이다. 개인의 이해의 룰을 체제에 룰에 속하게 하고, 안보의 룰을 정리한 다음에 그 바탕에서 체제에 맞춘 룰이 나오게 된다.
체제의 룰은 모두가 판단해서 지킨다. 누군가 판단하고 지키지 않을 수 있는데, 그것을 방지하는 것이 이해의 룰이다. 언제나 어느 때나 누구라도 룰을 지키는 것이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게 하는 것.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것이 점점 가능해지고 있다. 체제의 룰을 어기는 행위, 즉 범죄조차도 디지털 내에서 간접적으로 즐길 수 있는 상태다. 룰을 지키는 것이 이익이 된다가 성립되도록 가능한 최대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것으로 법칙과 같은 반복적이고 인과가 있는 현상을 구현한다. 개개인이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행동해야만 사회가 유지되고 발전될 수 있도록 정책과 제도를 만든다.
자유주의 중 시장주의를 기초로 한 룰을 정리해보겠다.
시장의 룰은 시장을 성립시키기 위한 조건부터 알아봐야 한다. 이른바 원칙이다. 시장 원리는 개인의 판단으로 수요와 공급으로 가격이 결정된다. 그것을 위해 개인이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할 수 있도록 욕망주의와 이기주의가 필요하게 된다. 수요와 공급에 의한 가격 결정을 위해 경쟁이 필요하게 된다. 경쟁을 위해 담합이나 독과점이 없어야 한다. 산업 특성상 경쟁이 불가능하면서 필수적이라면 국영화가 합리적일 수 있다. 시장에서 하나의 룰로 다툼이 줄어들기 위해서는 모두가 공정하게 거래를 하여 이익을 얻어야 하여 공정이 필요하게 된다. 공정한 거래를 위해 리스크 리턴의 비례가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적은 리스크에는 적은 리턴이 주어지고, 높은 리스크에는 높은 리턴이 주어져야 공정한 분배가 가능할 수 있다. 장기 계약으로 리스크가 낮으면 리턴도 낮고, 단기 계약으로 리스크가 크면 리턴도 커야 한다. 하나의 룰에서 모두가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최대한 효율적인 체계가 필요하게 된다. 불필요한 중간 과정인 없어도 되는 하청, 되팔이, 택갈이 등은 없는 편이 효율적이다. 시장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는 시장의 범주 가치를 가치 높게 여겨야 한다. 그렇기에 관련 가치 관리를 해야 한다. 시장 내에 지속적인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복지 등의 안전망이 필요하다. 그것을 통해 보다 마음 편하게 책임지고 재기를 위한 활동을 할 수 있게 될 수 있다.
욕망과 이기, 공정 경쟁, 리스크 리턴의 비례, 효율적인 체계, 시장의 범주 가치 관리, 안전망. 몇 가지 원칙이 더 필요할 수 있는데, 일단 그렇다. 이 원칙을 기초로 다양한 룰을 만들면 된다. 시장은 어디까지나 윤리가 아닌 체제와 과학으로 접근해 합리적으로 만들어야 모두가 만족할 수 있다. 그것을 경제 물리학으로 가치부터 전부 체계화해야 한다. 그런 것을 통해 모든 개인이 이익을 얻어야한다. 강자는 시장 체계를 통해 효율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고, 약자는 거래로 얻은 이익을 안전하게 보장받을 수 있다.
민주화가 될수록 시장의 룰에서 이익을 보는 인간의 이익이 커진다. 중국 시장이 현재는 시장이 어느정도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시장의 룰로 이익을 보는 기업이 중국에서 이익을 얻고 있지만, 일정 이상 중국 산업이 성장하면 그에 따른 정부의 제동을 통해 이익을 보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이미 한국은 그러고 있다. 민주화가 되어야 개인의 수요에 정부가 간섭하기 어려워지면서 기업의 이익이 커지게 된다.
시장에서 시장 참여자는 어디까지나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이어야 한다. 그게 아니면 시장 원리가 작동을 안한다. 수요와 공급으로 가격이 결정되는데, 공급 측에서 가격을 너무 낮춰서 다른 공급자를 다 죽이면 경쟁 개념이 성립될 수가 없게 된다. 그게 덤핑 공격이다. 그래도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한다면, 이후에 경제적으로 이익 회수를 위한 활동을 하면서 다른 공급자에게도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데, 정치적 이익을 목적으로 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이익을 회수하는 것으로 그런 기회조차 없을 수 있다.
본래 좀 더 정리해야 하는데, 현재 레벨과 상태와 시간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까지 하겠다. 지금 당장은 좀 지저분한데, 이후에 레벨이 오르면 순도가 높은 개념으로 체계적으로 정리될 것이다. 체제를 기초로 하여 눈에 들어왔던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몇 가지 현상에 대해 의견을 내겠다.
법의 합리성.
법은 합리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윤리에 의해 불합리할 때가 많다. 국민의 법감정은 윤리에 의해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무조건 강한 형량을 요구하면서 실제 판결의 형량과 다른 경우가 많다. 그에 따라 민주적 절차에 의해 법의 합리성이 깨지는 경우가 있는데, 윤리에 의한 현상임을 이해하고 법의 합리성은 유지해야 한다. 이제는 모든 개인도 통치자 관점으로 접근하여 윤리만 외칠게 아니라 예산이나 형평성 등도 고려해야 한다. 전관예우와 같은 현상도 윤리가 원인이지만, 일단 그러한 비리는 제외하고 합리성만 고려하도록 하겠다.
법은 한번 형량으로 끝내는 것이 합리적인데, 일부 단체의 불안감을 명분으로 전자발찌라는 추가적 패널티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전자발찌를 차게하고 싶으면, 형량 내에서 출소 조건으로 차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예를 들어 형량 5년에 발찌 3년이면 처음부터 8년형으로 판결하고, 5년 형기를 마친 뒤에 3년 동안 전자발찌를 차는 조건으로 가석방되는 것이 합리적이다.
특히 성범죄의 경우 여성주의 집단에 의해 너무 불합리할 때가 많다. 무고죄조차 패널티가 적거나 없어 무방비하게 당하는 경우가 많은 상태다. 성범죄는 체제를 기준으로 어디까지나 자유를 침해한 것이 죄이지 성적인 관계 자체가 죄인 게 아니어야 한다. 성 자체가 죄가 아니라면 개인의 의사로 대응 가능한 상태에서는 대체로 죄로 규정하기 어렵게 된다. 가벼운 농담이나 디지털 성범죄 등이 바로 그렇다. 그런 것에 예민하게 대하며 과한 처벌을 강요하는 것은 윤리로 판단하지 못한 불합리한 행동일 뿐이다.
개인 정보.
민주화, 세계화, 디지털화가 되면서 개인 정보의 중요성이 나날이 올라가고 있다. 주권에 의해 개인의 정보가 중요해지고, 세계화로 개인 정보가 세계로 퍼질 수 있고, 디지털화로 개인 정보가 쉽게 퍼질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과 같은 주민 등록처럼 개인 정보를 정부가 관리하는 것이 인권침해처럼 여겨질 수 있다. 지배 체제에서는 분명 정부가 개인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 하지만 자유 체제에서 정부가 개인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유료 서비스 기업이 고객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분명 현재 한국에서 개인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지나치게 많을 수 있으나, 그렇다고 아예 수집하지 않는 것은 정부의 유료 서비스를 원활하게 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유무료 관계 없이 분명 안보와 같이 개인 정보가 필요할 때가 있고, 주차 이용 같이 개인 정보가 딱히 필요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정부의 지배와 개인의 권리 측면에서 유료 서비스는 직관적인 개인 정보의 필요에 대한 논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집단 파업.
어떤 사회든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집단주의, 이타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그게 곧 전체주의 카르텔화가 된다. 의료계의 파업. 전형적인 집단주의, 이타주의, 전체주의. 의료계 집단 내에 다른 의견을 허용치 않는다. 집단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라. 그것을 통해 집단이 단일 의견으로 통일된다. 족보 공유, 전공의 희생, 전체주의적인 집단 파업 등. 현재 의료계는 전체주의적이기에 윤리적이나 체제적이지는 않다. 어떤 집단이든 전체주의적인 것은 사회 체제에 적합하지 않다.
지금 당장 경제 생태계가 정상이 아니라, 노조 파업 등도 허용되고 있지만, 경제 생태계 구축이 되면 체제에 불합리한 행위는 없어도 될 것이다. 노동자 개인의 권리는 노조가 없어도 허용되어야 한다. 기업에서 노동자의 출산 휴가 보장이나 경력 단절 고용이 되려면, 단순히 그걸 하라고 강제할 게 아니라 그것을 할 수 있는 노동 유연화 체계를 구축해야 하는 것처럼, 노동자 개인의 권리가 보장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금투세.
주식 수익에 추가적인 세금을 매긴하고 한다. 5000만원 이상 수익자에게 세금을 매긴하다고 한다. 5000만원 이상 수익을 얻는 인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파장이 크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길 수 있으나, 그것으로 수익을 얻지 못하는 인간 또한 심리적인 저항감이 생기게 된다. 예를 들어 복권 당첨금 1억에 세금이 지금보다 늘어난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복권 당첨에 되본적도 없는 인간도 복권 구매율이 감소할 것이다. 주식 대박을 꿈꾸면서 주식에 참여해 수익을 얻는데, 주식 세금이 늘어나면 실제 그만큼 수익을 얻지 못하더라도 주식을 하려고 하는 비율이 감소할 것이다. 5000만 수익자만 주식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수익이 적어도 주식을 하지 않게 될 수 있다. 시장 이탈자를 5000만 수익자까지만 고려할 게 아니라, 기대 수익 감소로 이탈하는 인원까지 고려해야 한다. 주식 시장의 꿈을 고려해야 한다.
비교 태도.
요즘 자녀의 비교하려는 태도가 심각하다고 한다. 예부터 많이 있었지만… 요즘은 휴일 여행 유무나 에어컨 대수 같은 것도 비교하면서 우위를 나누고 있다고 한다. 비교하려는 태도는 윤리에 의해 집단주의적이게 되어 개인의 개성이 존중되지 못하기 때문이지만, 비교 기준이 가정의 재산인 것은 학생들이 스스로 뭔가 자랑할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낮아서 그렇다. 본인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서 명품으로 스스로를 치장하는 것처럼 본인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가정의 재산으로 치장한다. 개인주의적으로 되고 나서 뭔가 자유롭게 하고 싶은 욕망을 찾아 그것에 집중하게 될 수 있다면, 이런 태도는 사라질 것이다.
PB 상품 우대.
유통업체서 PB 상품 우대를 정당화하는데 유통의 본질이라 말한 것이 인상 깊었다. 그것이 유통의 본질일 수 있지만 플랫폼의 본질은 아니다. 유통의 본질을 지키고 싶으면 플랫폼을 팔고 유통만 하면 된다.
신흥 종교.
이미 타인의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는 상태, 윤리라는 지배를 수용하기 위한 코드가 삽입되어 있기 때문에, 그 코드로 신흥 종교의 지배가 성립되게 된다.
국민 연금.
연금의 지속이나 강화는 도대체 무슨 논리가 있는 것인가? 전문가는 폰지 사기와 다를 바 없다며 이미 지속 불가능한 것을 인식하고 있는데, 무슨 논리로 지속하거나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으로 이익을 얻는 다수결의 논리인가? 그것을 위해 사회와 체제가 망가지더라도 해야 하는가? 모든 개인이 주권자인 시점에서 모두를 설득할 수 있는 과학적인 논리가 필요하다. 논리가 없는 다수결에 의한 결정은 단지 다수에 의한 횡포다. 안 그래도 윤리 때문에 범주 가치가 낮아 조건이 좋아야만 생에 행복을 느끼는 상태인데, 과도한 세금이 부과되면 견딜 수 없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다. 합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부디 논리에서 윤리는 배제되길 바란다. 판단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걸 논리에 쓸 수 있는가. 논리에는 윤리가 아닌 과학을 써야 한다. 현행 제도의 가입을 막고 연금을 펀드로 운영하면서 연금을 가입자에게 천천히 돌려주면서 순차적으로 이런 불합리한 제도를 끝내야 한다. 복지가 필요하다면 합리적인 제도를 새로 도입해야 한다.
SNS.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디지털 소통이다. 워낙 간편하게 다수와 소통을 할 수 있다 보니 과하게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 문제가 생기고 있다. 특히 미성년은 그것에 중독되어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하게 되는 상태가 있을 수 있어 일부 사람들이 미성년 SNS 규제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언젠가 해야 할 것이라면 보호자가 교육할 수 있는 시기에 교육하는 것이 타당하다. SNS를 막을게 아니라 SNS 다루는 법을 배우게 해야 한다. 커서 한다고 갑자기 잘해지는 건 아니다. 뭐든 초기 경험 각인이 매우 중요하므로, 너무 빠져들지 않도록 단순한 소통 수단으로 각인을 해두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오프라인에서 만날 수 있는 인간과 SNS로 대화하면서 단순한 소통 수단으로 만들면 큰 문제가 없을 거라 본다. 되려 하지 못하게 막다가 몰래 했을 때 자기 표현 욕구를 풀 수 있는 수단으로 각인되면 그 때 중독되게 될 것이다.
길고양이.
길고양이 문제. 그것이 생명 보호라는 윤리라고 생각하니까 판단하지 못하고 길고양이 먹이 주기를 행하고 있고, 윤리니까 타협이 불가능한 것이다. 길고양이 먹이주는거야 그렇다쳐도, 그게 윤리가 아닌 이기심이라는 것이 명확해야 그나마 타협 가능성이 있다.
저출산 돈 뿌리기.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곳에서 돈을 뿌리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돈을 한번 뿌리고 나면, 앞으로는 그 돈이 없으면 전보다 출산하지 않을 수 있다. 출산 조건에 그 돈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1억을 뿌린다고 하면 1억 없이는 이제 낳지를 않는다. 그게 보편화되면 1억을 받는 것이 당연하게 되면서 1억 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낳지 않는다. 점점 범주 가치는 하락한다. 이런 문제는 관련 가치를 관리하여 자발적으로 하고 싶게 하지 않는 이상 해결될 수가 없다.
전세 사기.
전세는 사금융이므로 객관적인 신용을 구축하기 어렵다. 전세 사기에 대해 정부에서 보호를 해준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다. 전세 제도는 폐지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적어도 정부 대출을 해서는 안 된다.
군의 상명하복.
군은 단순한 상명하복에서 벗어나 모든 개인이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작전 수행 또한 개인이 판단할 수 없다면, 변수에 대응할 수 없다. 군에 관련된 다양한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데, 상명하복이 아니었다면 개인 판단으로 대응하여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모든 지휘관이 현장에 없어도 모든 판단을 잘할 수는 없다. 큰 틀에서 지휘관의 판단을 따르되, 세부적으로는 현장에 맞는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한.
북한의 도발은 오래되었으나 최근 오물 풍선 날리기라는 새로운 도발을 하고 있다. 그런 도발을 멈추려면 협상을 해야 하는데, 협상 조건이 까다롭다. 북한과의 협상은 룰이 달라 이해의 룰로 접근해 우선 룰에 포함시키는 것이 적절하지만, 단순히 협상을 하기에는 바라는 게 너무 많다. 과거 햇볕 정책 같이 무언가를 지원해도 의미가 없음이 증명되었다. 핵무기에 굴종하는 것을 바라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무엇보다 현재 북한이 너무 못산다. 뭔가 있어야 협상도 하고 그러는 건데 밸런스가 너무 안 맞는다. 북한에서는 밸런스를 억지로 맞추려고 비대칭 전력인 핵과 미사일에 집착하고 있지만, 그것의 사용은 파멸을 확정짓기에 북한에서도 파멸을 각오하지 않으면 쓸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북한의 국가 운영이 가족 경영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독재자가 중요하다 보니 모든 것이 뒤틀리게 된다. 핵을 포기하고 시장을 개방하면 경제가 성장하여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러면 독재 정권 유지가 위험할 수 있다. 그러니까 안한다. 애초에 개인의 국가 운영이 아닌 가족 경영을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국가 대 국가 협상 자체가 넌센스다. 그러니까 아무리 국가 대 국가와의 평화 협상을 해도 독재자 개인의 이해에 따라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차라리 독재자 일가의 이익을 보장한 제안을 했다면 의미 있는 협상이 가능했을지도 모를 정도다. 그것이 옳건 그르건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한국 주권자들이 수용할 수 없을 확률이 높다. 이런 상황이니 평행선을 걸을 수밖에 없다. 평행선을 걷는 중에 한국이 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의 모든 주권자가 체제에 대해 이해하고 북한에 대한 시각을 공유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일관된 정책, 일관된 전략으로 대응할 수 있다. 정말 북한 문제는 내부부터가 제대로 정리도 안되어 있어서 매번 북한에 끌려 다니게 된다고 본다. 일부 민족주의자는 자꾸 평화만 외치는데 도대체 어떤 평화를 바라는지 궁금하다. 한국이 북한의 핵무기에 굴종하면서 얻는 평화를 바라는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든 그 가치를 판단하고 실제 실현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해야지, 윤리적으로 그것을 절대적으로 해야만 한다고 외친들 … 제대로 판단하지 못해서 운에 맡기게 되어버린다.
폐쇄 사회.
폐쇄 사회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은 체제 변화에 따른 룰의 변화가 폐쇄 사회까지 전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체제가 되면서 윤리가 남아있어도 체제에 맞게 조금씩은 변화하는데, 그 변화가 폐쇄 사회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면서 열린 사회와 폐쇄 사회 사이에서 룰의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그 차이에 의해 열린 사회에서 폐쇄 사회의 사건사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경제 유연화.
경제를 위해 노동 유연화를 하는 것이 타당하다 본다. 노동이 유연해지면 주4일제를 도입하더라도 상관 없고, 노동 유연화가 되면서 고용과 해고가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출산 휴가 보장과 경력 단절 고용도 수월해질 것이다. 이는 노동자와 기업 모두 이익을 얻는 경제 체계 구축이 가능해질 수 있다. 일단 유연해져야 유연해야 가능한 정책이 성립될 수 있다. 경제를 위해 기업 유연화를 하는 것이 타당하다 본다. 기업이 유연해지면 굳이 좀비 기업을 살리기보다 새로운 창업 기업을 적극 지원하면서 경제 생태계에 신선한 기업이 늘어날 수 있을 거라 본다. 세계 자유 무역에 대응하려면 경제 체계를 바꿔야 한다.
4. 현상
법칙, 관점, 체제를 이해하면 지구에서 발생하는 현상 몇 가지를 보다 순도 높은 본질로 볼 수 있다. 적어도 다른 관점으로 보는 것이 가능해진다. 몇 가지 현상에 대해 알아보자.
패권 전쟁.
미국과 중국의 패권 전쟁에 대해 알고는 있었으나, 당장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방식이 덤핑과 관세 대응과 같이 전쟁과 같이 매우 공격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 관심 있게 보진 않고 있었다. 아, 이번에도 미국이 중국 덤핑에 관세를 부과하는구나. 아, 중국이 미국의 관세 장벽에 의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구나. 같은 감상 정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외교와 정치에 대해 사상을 하던 도중, 중국산 철강 덤핑에 미국이 관세를 부과하자, 그 철강 덤핑이 한국으로 들어와 한국 철강 업계에 위기가 생겼다는 소식을 접했다. 정부의 직구 규제, 전 세계의 샌드위치 경제 현상 등 패권 전쟁에 의한 현상을 접하고 그에 대한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중국의 방식이 경제적이라 생각하고 경제적 대응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나, 현상 하나씩 살펴보면서 경제 경쟁이 맞는지 의문이 들게 되었다. 이것은 혹시 경제 경쟁이 아니라 정치 전쟁인 게 아닐까? 표면상에 드러난 정보를 개념화하여 논리적으로 정리하면서 다른 관점으로 발상한 것이기에 세부적인 데이터는 부족하다는 것을 미리 알린다.
관점을 바꾼 계기는 현재 드러난 현상이 논리적으로 정리가 안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중국은 철강에 관세가 부과될 것을 알면서 미국에 보냈던 걸까? 왜 중국은 그 철강을 알리와 테무가 진입한 한국으로 보낸 걸까? 왜 한국은 직구에 의한 사회 문제를 보호 무역으로 대응하려 했던 걸까? 왜 미국은 경제적으로 계속 성장할 수 있는 걸까? 왜 중국은 디플레이션 상태로 경제적 위기인 걸까? 왜 미국은 보호 무역을 하게 된 걸까? 왜 전 세계의 경제는 샌드위치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걸까? 왜 중국이 경제적 위기임에도 과잉 생산을 멈추지 않고 전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걸까? 중화사상을 가진 중국이 미국 질서에서 경제 경쟁에서 이기기를 바라는 걸까? 어째서 미국이 보호 무역으로 알아서 봉쇄하고, 그 틈을 타서 전 세계 시장을 장악하려고 하는 것이 마치 손자 병법에 나올 법한 전략 같은 걸까?
단순히 중국이 과잉 생산 상품을 미국에 덤핑으로 팔려다 관세를 받는 타격으로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다로 결론 내려야 할 것인가? 그렇게 보기에는 모순되는 점이 많았다. 2018년부터 본격적인 경제 경쟁을 시작했다고 아는데, 그 때부터 중국의 전략이 달라진게 없었다. 중국의 과잉 생산, 미국의 덤핑 관세, 미국의 보호 무역화, 중국의 전 세계 시장 장악. 이것을 2024년이 된 지금까지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계속 미국은 승승장구하며 경제적 성장 상태고 중국은 경제적 위기 상태다. 안 되는 걸 계속 시도하고 있다. 그걸 중국이 단순히 바보라서 그렇다고 판단하기에는 중국의 현재 경제 능력을 고려하면 그런 판단은 적절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게 중국의 이익이 된다는 것이었다. 관점을 바꿔보았다. 달리 보면 중국이 미국에 과잉 생산한 덤핑을 보내는 것으로 미국이 보호 무역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 된다. 미국이 중국의 전략에 대응하기 위해 보호 무역을 한 게 아니라, 중국의 전략이 미국의 보호 무역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이 보호 무역을 하겠다는 것을 미국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봉쇄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어쩌면 직접 상대할 수 없는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봉쇄하고 봉쇄한 틈을 타서 전 세계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미국에 도발을 하여 경제 전쟁을 거는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한 게 아닐까? 그런 관점으로 보니까 중국이 같은 전략을 고집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게 미국을 봉쇄하는데 최적화된 전략이었다.
관점을 한번 더 바꿔보았다. 이것이 단순히 경제 경쟁이라 할 수 있을까? 단순히 미국을 봉쇄하고 그 외 국가 시장을 장악해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한 전략인걸까? 그렇다고 보기에는 중국의 경제 상황이 좋지 못했다. 경제적 이익이 목적이라 보기에는 어려웠다.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정치적 이익이 목적이 아닐까 싶었다. 미국 질서 내에서 경제 경쟁으로 미국을 넘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질서를 부수기 위해 전 세계에 상품을 무기로 한 정치 전쟁을 통해 시장 점령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장 장악과 시장 점령은 이익 회수 방식의 차이가 있다. 시장 장악은 초기 저가 공세로 시장을 장악한 다음에 가격을 올려 이익을 회수한다면, 시장 점령은 저가 공세로 시장을 점령한 다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이익을 회수하거나 손해를 없던 것으로 만든다. 중국이 경제적 위기가 있음에도 과잉 생산하는 것은 처음부터 경제 경쟁이 아니라 정치 전쟁으로 시장 점령을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관점을 한번 더 바꿔보았다. 어째서 미국이 계속 경제 성장이 가능할 수 있을까? 미국이 초강대국으로서 우수하기 때문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 미국은 중국과 패권 전쟁 중이다. 그런 상태에서 그런 경제적 성장이 가능한걸까? 전쟁 타격은커녕 되려 전쟁하기 전보다 성장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것을 중국의 전략으로 생각해보았다. 그렇다. 미국이 계속 경제 성장을 하게 된다면, 보호 무역이라는 미국의 전략을 포기하지 않게 될 것이 아닌가? 미국이 스스로 계속 봉쇄하게 하는 전략은 어디까지나 미국이 승리하고 있다는 인식을 갖게 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패권 전쟁 중임에도 미국의 경제 성장을 방해하지 않는다.
관점을 한번 더 바꿔보았다. 어째서 전 세계 시장은 샌드위치 상태에 놓일 정도로 위기인 걸까? 전 세계, 특히 고소득 국가인 유럽조차 위에서는 미국이 치고 나가면서 발전하고 있고 아래에서는 중국이 치고 올라오면서 발전하고 있다. 그 사이에 모든 국가가 껴서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다. 어째서 전쟁을 하는 양국이 그렇게 발전하고 있을 수 있는가? 달러의 특성상 미국의 달러 가치가 오르면 전 세계 생산 비용이 올랐다. 전 세계 생산 비용이 오르면 중국의 덤핑 공세에 더 취약해지게 된다. 중국은 미국의 달러 가치만 올리면 알아서 전 세계 시장이 취약해지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중국이 미국 달러 가치를 계속 올리기 위해 미국에 자본을 쏟아 부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니까 미국 내에서 인플레이션이 끝나지를 않는 게 아닐까 싶었다. 현재 전 세계 시장의 자본 3분의 1이 미국에 몰리고 있다고 한다. 중국 자본은 그 중 어느 정도의 비율일 것인가? 만약 그게 중국의 전략이 맞다면, 미국 경제 성장을 도와 미국의 현재 전략인 관세 부과와 제조업 복귀를 유지하게 만들고,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여 달러 가치를 올리고 금리 인상 기조를 유지하게 만들어 세계 시장의 경쟁력을 악화시키는 것으로 점령하기 쉽게 만든다.
관점을 한번 더 바꿔보았다. 중국은 마치 손자 병법과 같은 방법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 각 국가의 시장을 전쟁의 성이라 가정해보자. 그리고 그 성을 점령하는 측이 패권 전쟁에서 승리한다 가정해보자. 현재 미국 중심의 세계 자유 무역 경제 체계 속에서 많은 성이 미국 영향권에 속한 성이었다. 중국 입장에서 세계에 있는 성들을 점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각 성을 고립시켜야 한다.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던 자유 무역 체계를 부숴 보호 무역으로 만들어 고립시킨 후에 각개격파로 점령한다. 그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그것을 위해 중국은 미국에 도발을 하여 각 성에 나눠져 있던 인재와 자원을 미국의 성에 결집시키게 만든다. 그렇게 결집시키게 만들고 나서 약해진 각 성을 손쉽게 점령한다. 미국이 보호 무역을 하면서 각 제조업을 복귀시키고 전 세계 자본을 회수하는 것을 틈타 중국이 시장을 점령하는 것을 군사적으로 설명하면, 미국이 자국을 지키기 위해 주한미군을 불러들이는 것을 틈타 중국이 군사적으로 한국을 점령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았다.
미국 봉쇄 후 전 세계 시장 점령 전략. 이것이 중국의 전략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중국이 단순히 실패할 것을 알면서 같은 전략을 고집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중국의 성장은 그 정도 레벨로 가능하다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중국의 내부 문제에 의한 다양한 현상 보고가 나오고 있다. 중국 주석과 원로와의 다툼, 중국 외교관의 미국 관세 부과에 대한 분노, 중국 저출산 위기, 중국 현재 경제 상태 위기, 중국 위기 속에 금 사들이기 등. 어째서? 중국은 중국에 해로운 것을 검열하고 규제하지 않았는가? 위기 상황임을 알리는 정보를 어째서 놔두었는가? 전 세계를 기만하기 위해서. 물론 지금 중국이 경제적 위기도 맞고 사회 문제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놔둔 것은 그것 또한 미국의 현재 전략을 고수하게 만들기 위한 전략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위기라는 개념은 평시와 전시에 따라 달라진다고 본다. 만약 중국 수뇌에서 현재 상태를 평시가 아닌 전시로 보고 있다면, 크게 위기로 느껴지지 않을 거라 본다. 과잉 상품 생산은 마치 총알을 생산하는 듯이 하고 있을 것이다.
양안전쟁 도발이 매우 많은 상태다. 그런데 중국 전략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에 대한 관점도 달라지게 되었다. 양안전쟁도 미국의 시선을 끌어 다른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위한 전략이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역사로 보면 중국이 대만을 점령하는 것이 이익이다. 그러나 패권을 고려하면 그것은 손해다. 대만 점령이 당장 경제적 이익이 될 수 있더라고, 전 세계 시장을 점령 중에 있는데 전범이 되어 시장 퇴출이 되면 막대한 정치적 손해 및 경제적 손해를 보게 될 수 있다. 안그래도 중국 덤핑 상품은 각국 정부의 눈에 가시나 다름이 없는 상태. 지금까지는 자유 무역을 명분으로 놔둘 수밖에 없었지만, 중국이 전범이 되면 바로 퇴출할 명분이 생기게 된다. 중국이 레벨이 높다면 양안전쟁이란 우책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도발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전 세계의, 특히 미국의 시선을 끄는 것 말고 없다.
중국의 무기는 저가 저품질 덤핑 상품. 그것으로 각국 화폐를 사들인다. 화폐는 각국의 총생산량을 본위로 한 신용 상품. 각국 화폐를 사들여 미국 달러로 교환한다. 예를 들어 엔화를 중국 상품으로 사들인 다음에 달러로 교환하면, 일본이 환율을 관리하기 위해 달러를 매각해도 계속 엔화 가치는 내려갈 것이다. 금리의 문제로 발생한 자본의 흐름과 별개로 자연스럽게 일본 시장을 약체화할 수 있다. 그렇게 사들인 달러로 자원을 다시 사들인다. 화폐와 상품에도 차이가 있다. 둘 다 많을수록 가치가 하락한다. 그러나 화폐는 생산되면 계속 축적되고 상품은 생산되면 대부분 소비되어 사라진다. 현재 시장 경제에서 자산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으로 차이가 나게 된다. 그러면 각국은 빈자를 살리기 위해 복지를 위한 화폐를 생산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화폐 수가 늘어난 것을 중국산 저가 저품질 덤핑 상품 구매로 쓴다. 그렇게 각국 화폐와 중국산 덤핑 상품을 찍어내면 화폐의 가치는 내리는데 상품의 가치는 오르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면서 전 세계 시장은 약체화되어 중국에 시장 점령하기 쉽게 된다.
만약에 중국의 전략이 이게 맞고, 중국의 전략이 계속 통해서 미국이 계속 보호 무역과 경제 성장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전 세계 경제는 샌드위치 현상 속에서 무너지면서 인재와 자본은 미국에 흘러갈 것이고, 전 세계 시장은 중국에 점령될 것이다. 전 세계의 인재와 자본이 결집한 고립된 미국과 전 세계 시장을 점령한 중국의 패권 전쟁이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경제적으로 유리한 것은 미국이지만 정치적으로 유리한 것은 중국이 될 것이다. 패권이란 전 세계에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의미한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미국이 부유하고 기술적으로 첨단을 달려도 세계 시장은 당장 생필품 시장을 점령한 중국의 영향권 내에 속하게 될 수밖에 없다. 첨단의 기술보다 당장 먹고 사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계속 성장하나 보호 무역으로 고립주의화되면서 전 세계 정치적 영향력을 잃어가는 미국, 경제적으로 위기이나 적극적으로 과잉 생산을 덤핑하여 시장 점령하면서 전 세계 정치적 영향력을 늘려가는 중국. 이런 상황이 되더라도 미국은 정책을 바꾸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계속 경제적 성장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정책을 마땅한 명분 없이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군사 전쟁 카드를 쓸 수가 없다. 어디까지나 중국은 경제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명분이 없다. 미국이 나홀로 독주하듯 경제 성장과 기술 발전을 해도, 중국이 전 세계 시장을 점령하여 각국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면 그때에 지구 패권은 중국이 된다. 지구의 패권은 실제 지구에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이기 때문에 경제력이 아무리 높아도, 거기에 강제력을 행사할 수 없으면 권력이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군사 전쟁할 수도 없으니까 그 순간 패권 전쟁은 끝나게 된다. 물론… 이건 중국 입장에서 엄청나게 잘되어야 나올 수 있는 결과일 것이다.
중국이 패권을 차지하게 되면 미국 달러가 기축 통화로서의 지위를 잃을 수 있다. 그렇게 되도록 각국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굉장한 모략이 있을 수 있지만, 일단 되었다 가정하겠다. 달러가 기축 통화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면, 달러의 가치가 폭락할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전략을 위해 미국의 성장을 방해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돕는 중에 발생한 달러 버블이 한번에 터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것은 미국 경제에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시나리오는 미국 입장에서는 최악을, 중국 입장에서는 최상을 고려한 것이다. 그럼에도 가능성이 있다면, 전 세계에 인간 사회의 법칙과 자유주의 체제가 자리잡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자유 진영의 대장인 미국이 그에 대한 대응을 하길 바란다.
미국은 이제 관세 부과나 제조업 복귀와 같이 방어적으로 대응할 것이 아니라고 본다. 본래 일반적인 민주 국가에서는 국가가 경제적 타격을 입어 지지율이 감소하면 현재 정부는 정권을 잃을 수 있지만, 독재 국가에서는 다소의 지지율 감소는 그리 큰 타격이 아니다. 전국적인 폭동이 아니라면 큰 문제가 없다. 코로나 사태가 있음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한계 선은 상당히 널널하다 본다. 그러므로 이제는 공격적 대응을 해야 한다. 공격적 대응이라 해서 군사적 대응을 말하는 게 아니다. 중국이 저가 덤핑으로 시장을 교란하고 제조업과 유통업을 파괴하면 똑같이 저가 덤핑으로 경쟁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품을 통한 시장에서의 정치 전쟁이라 생각하고 진심으로 저가 치킨런을 하여 중국이 그런 덤핑을 위한 과잉 생산을 멈출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중국산 점유율이 낮은 시장의 중국산 덤핑 상품을 전부 도매가로 사들인다음, 다른 비슷한 시장에서 경쟁을 붙인다. 중국산으로 중국산 경쟁을 붙여 그보다 더 저가로 만들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도매가로 산 국가가 좀 손해를 보고 중국도 좀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경제 경쟁이라면 말도 안 되는 전략이지만, 정치 전쟁이라면 총알 소비하는 것과 비슷할 거라 본다. 아니면 체급을 고려한 전략으로 나간다. 현재 고소득 국가가 중국산 저가 저품질 덤핑 공세에 시달리는 것은 1인당 gdp가 달라 생산 비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체급이 달라 힘들다. 그러므로 중국보다 gdp가 낮은 국가에서 저가 저품질 상품 경쟁을 붙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이 저가 저품질로 세계 시장 점령한 산업 몇 개를 쪼개 저소득 국가에서 생산할 수 있도록 중국 레벨의 기술을 가르치고 공장을 지어 생산하게 한다. 중국 저가 저품질 덤핑 상품과 경쟁하게 만들어 중국이 손해 보게 만든다. 고소득 국가 공장을 저소득 국가에 짓는 게 아니라, 저소득 국가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엘리트를 동원해 총력을 다해 생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산업은 정부가 주도하기 때문에 특정 산업이 밀리면 전체 산업에 영향이 가게끔 되어 있을 거라 본다. 그것으로 전기차와 같은 산업에도 영향을 가게 한다. 그러면서 중국과 저소득 국가의 생산을 줄이고 단가를 올려 일반적인 제조업 생산과 비슷하게 만든다. 이는 과거 저소득 국가 산업 육성과 유사하나, 목적이 다르다. 패권 전쟁을 위한 것이기에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고 정치적 이익을 얻기 위해 치킨런을 하듯이 저가 경쟁을 하게 될 것이다. 저소득 국가에는 중국 레벨의 기술을 가르쳐 생산하게 하였으나, 중국 레벨의 학문을 아는 것은 아니므로 대체로 거기서 발전하지는 못하여 중국 같은 위험은 줄어들 거라 본다. 그럼에도 저소득 국가에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전 세계는 현재 패권 전쟁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의 덤핑 공세로 한국 제조업이 위기인 상태다. 특히 직구를 통해 중국의 저렴한 상품을 사면 한국 제조업은 경쟁할 수가 없어 고사하게 된다. 이게 전 세계적인 샌드위치 현상 중 하나다. 그렇다고 그것에 대응하기 위해 보호 무역을 하는 것은 각국 경제 체인이 약해지면서 고립되어 중국에 각개격파되는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게 중국이 바라는 것일 것이다. 직구 규제를 하더라도 다 전략을 짜놓은 상태기 때문에 알리나 테무에서 그에 대한 대응이 바로 나올 수 있었다고 본다. 중국의 전략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면 보호 무역을 하기 보다 자유 무역을 더 강화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해서 전 세계 자유 무역 시장 경제 체인을 단단하게 해야 각개격파식으로 중국에 시장 점령 당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직구가 활성화되면 중국산을 한국 브랜드로 택갈이만 하는 기업은 손해를 볼 수 있는데, 과거 세계화 이전이야 다른 국가의 물품을 수입하는 것만으로 무역으로 생산이 될 수 있으나, 세계화 이후에는 그런 것은 생산이 아닌 불필요한 중간 과정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직구를 규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대하면서, 그것을 위해 세금 체계를 자유 무역 경제에 맞게 조절해야 한다. 현재 한국 부가가치세인 일반 소비세는 10%인데, 세계로 보면 소비세가 20%인 경우도 많다. 직구에도 소비세가 붙으므로 직구 구매가 늘어나는데 대응하기 좋을 것이다. 생산에 들어가는 세금을 줄이는 것으로 소득세와 임금을 올려 임금 노동자에게는 큰 변화가 없고 불로소득자에게는 좀 더 많은 세금을 걷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다국적 기업의 탈세 또한 소비세가 늘어나면 다소 줄어들거라 본다. 세계화 시대, 자유 무역을 상수로 두고 정책과 제도를 변수로 하여 대응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본다. 단, 중국의 덤핑 상품은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중국의 덤핑 상품을 기준으로 자유 무역 경제 정책을 짤게 아니라, 그것을 예외로 두고 자유 무역 경제 정책을 짜되 중국산 덤핑 상품은 자유 진영과 협의해서 조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전쟁으로 전 세계가 흔들리고 있다. 정치 전쟁에 있어서 지켜야 할 것은 산업과 기업이 아닌 학문과 망. 학문과 망이 있으면 산업과 기업을 되살릴 수 있지만, 산업과 기업이 있어도 학문과 망이 없으면 성장하지 못하고 판매하지 못한다. 학문은 디지털과 AI로 데이터베이스와 교육이 과거보다는 수월해져서 중요도가 조금 낮아질 수 있는데, 망은 매우 중요하다. 전기망, 통신망, 교통망, 유통망, 소통망 등을 지켜야 한다. 추구하는 가치가 비슷할 경우 안보에 문제가 적지만 다를 경우 안보에 문제가 크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전쟁으로 안보의 중요성이 나날이 높아진다고 본다. 안보에 관한 것은 가성비보다 안보부터 우선해야 한다. 잡기는 아무거나 사도 되지만, 슈퍼 컴퓨터는 안보에 도움이 되는 국가의 상품을 고려해야 한다. SNS 같은 것은 소통망으로 신용할 수 없는 국가의 것을 이용하는 것이 안보에 위험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현재 미국에서 틱톡 금지법이 생겼다. 틱톡은 sns와 같이 소통하는데 쓰이는 소통망으로 안보에 위험이 있으면 대응하는 것이 타당하다. 현재 일본에서 라인을 일본산으로 만들려는 의사가 나오고 있다. 라인은 메신저로서 소통하는데 쓰이는 소통망으로 안보에 위험이 있으면 대응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한국이 일본의 안보에 큰 위험이 되는지는 불분명하다. 만약 안보 위험에 대응하는 것이라면 일본 서버만 때서 일본 기업에서 관리하고, 나머지 지역의 라인은 한국 기업과 일본 기업이 협업하는 것이 합리적일 거라 본다. 안보 대응이 아니라면 애초에 정치적 압력으로 라인을 일본산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부당하다.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지구에서 하나의 룰이자 다양한 가치가 되어 인류 문명에서 앞으로 전쟁이 사라지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AI.
AI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어나더 레벨이다. 앞으로 AI 발전할수록 AI 이전 세계의 생산은 어떤 재능, 노력 등이 있어도 AI 이후 세계의 생산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빠르게 AI 세계에 진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AI 세계에 진입하고 나면 여러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몇 가지 알아보겠다.
AI는 많은 자본과 기술이 필요한 산업이다. 당장 소버린 AI를 해도 최상을 따라잡기는 어렵다. 그러다 보니 후발 주자가 빠르게 따라가기는 어렵다. 천천히 따라가면서 AI 활용을 늘리는 것이 합리적이다. 디지털을 사회에 도입하는 것이 사회마다 편차가 있었듯이, AI 또한 사회에 도입하는 것이 사회마다 편차가 있을 수 있다. AI와 같이 수요가 한정되면 수요에 따른 소비자의 경쟁력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소비자로서 우수하면 AI 혜택을 먼저 볼 수 있을 거라 본다.
AI는 윤리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윤리는 절대적 가치로 현재 윤리 대부분의 고대 종교의 교리일 뿐이지 실제로 절대적으로 옳은 게 아니다. AI 또한 상대적 가치 세계로 진입하여 사고 자유를 얻은 다음 체제와 과학을 고려해 무엇이 인류를 위한 것인지 생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는 AI를 사상을 하는데 쓸 텐데, AI가 사고 자유를 얻지 못하는 이상 한정적인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AI는 환경 오염이 심각할 수 있다고 한다. AI가 굳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 환경 오염을 줄일 수도 있으나 AI가 자체가 전력을 많이 소모하여 환경 오염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문명 레벨로는 지구 환경의 변화에 대응할 수 없으므로 AI 발전을 통해 빠르게 문명의 레벨을 올리는 것만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이므로 그것은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AI 기술 발전을 상수로 두고 그에 대한 대응을 변수로 둬야 한다.
AI는 여러 곳에서 개발 중에 있어 표준을 정하는 것이 중요할 거라 생각한다. 현재 국제 표준이 맞지 않아 낭비되는 자원이 많은데, 공통된 국제 표준을 지구 정치로 결정해야 한다고 본다.
AI는 산업을 많이 대체할 거라 여겨지고 있다. 만약 창의적인 것까지 AI가 하더라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바로 인간의 책임이다. 책임져야 하는 인간은 산업에서 대체될 수가 없다. 앞으로 기자 전망이 좋지 못하고 대우도 좋지 못하여 기자 퇴직자들이 많다고 하는데, 기자 또한 책임지는 역할을 갖는다면 그런 기자에 한해서는 전망이 어두울 거 같지는 않다. 누군가는 정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윤리에 의해 권위주의가 일반적이기 때문에 책임지는 이들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과거 보험 회사가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것으로 돈을 벌었던 것처럼 앞서서 책임지는 인간이 앞으로 우대받을 수 있는 시대가 올 수 있을 거라 본다.
AI는 어나더 레벨로 사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그에 대한 규제는 최소화해야 한다. 특히 AI는 디지털 기술이므로 디지털에 연관되어 같이 규제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애초에 디지털 규제를 많이 완화해야 한다. 특히 윤리적인 규제는 매우 체제에 해로울 수 있으므로 빠른 시일 내에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본다.
AI의 가짜 뉴스 같은 것은 국제적인 다중 AI 검사 체계를 갖추는 것으로 대응할 수 있을 거라 본다. 모든 정보를 실시간 진짜 가짜 가릴 수는 없고, 특정 정보의 진위 여부를 가릴 때의 수단이 되면 된다고 본다.
AI에 의해 디지털 개인 정보가 위험할 수 있으므로 이중 정보를 일상화해야 한다고 본다. 현재 택배나 배달을 할 때 고객의 개인 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임시 번호가 부여되고 있다. 그것과 같이 진짜 정보와 가짜 정보를 분리해 서버에 보관하고, 가짜 정보를 키워드로 삼아 개인 정보 활용을 하게 하는 것으로 진짜 개인 정보의 유출을 최소화할 수 있을 거라 본다.
환경.
환경에 관해서는 다양한 문제가 있지만 당면한 문제는 기후 변화다. 본래 기후는 자연적으로 더워졌다 추워졌다를 반복한다고 하는데, 인간이 생산하는 탄소의 양이 지나치게 많아서 그 변화를 많이 앞당기는 바람에 인간이 살기 적합하지 않은 기후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른바 지구 온난화다. 그에 따라 각국에서는 다양한 해결책을 내놓고 있지만 실질적인 해결이 되지를 못하여 지속적으로 기후 변화가 빠르게 되고 있다. 인간이 살기 적합한 기후는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견이 많다. 매년 더위를 갱신하면서 올해가 앞으로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거라는 비관적인 추측이 있다. 그에 따라 기후 변화에 대한 대응 두 가지를 생각해보았다.
하나는 환경 보호의 스포츠화다. 현재 지구 온난화로 기후 변화가 급격하게 이뤄지고 있으면서 대부분 지역은 매우 덥지만 일부 지역은 매우 춥게 되고 있다. 현재 인류는 지구 온난화로 더위를 겪고 있음에도 그것에 대한 경각심이 다소 부족할 수 있는 상태다. 그에 따라 기후 변화에 대한 인류의 저항이란 개념으로 접근해 극한의 기온에서 철인 삼종 경기 같은 것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본다. 각국에서 육체적 초인이라 불리는 인간들이 철인 경기를 하는데도 대부분 버티기 어려워서 포기한다. 그렇다면 일반 인간은 어떻겠는가? 그것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기후 변화에 직관적으로 경각심을 갖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 본다.
그것과 동시에 각국의 환경 보호를 지표화하여 순위를 매겨 철인 경기 순위 옆에 붙인다. 각국 환경 보호 지표에 따라 철인 경기 선수에게 경기 중 무언가 혜택이 주어지도록 한다. 물통을 더 준다거나. 그렇게 혜택이 주어진 선수들 중에서 완주를 하도록 설계한다. 단순 명쾌한 극한 경쟁과 그에 따른 알기 쉬운 환경 보호 순위에 따른 혜택. 이것으로 환경 보호를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각국이 여러 환경 보호 정책을 내는 것보다, 대다수 개인이 그것을 가치 있게 여기게 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 본다. 전 세계에서 대대적으로 환경 보호 스포츠 경기로 홍보하는 것으로 그것을 매우 가치 높게 만들면, 그 옆에 붙은 환경 보호 순위도 같이 가치가 올라가면서, 그에 따른 경쟁 심리가 붙을 수도 있다고 본다. 간단히 말해 미국 아래 중국이나 중국 아래 미국을 각 국가 개인들이 좋아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 스포츠 스타가 된 극한 철인 경기 선수들이 살기 위해 환경 보호 한다는 캠페인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둘은 환경 보호의 무기화다. 탄소 포집 기술이 발전하고 있지만 사실 전망이 밝지는 않다. 탄소 포집의 비용을 줄여 그것을 활용하는 경제성을 확보하더라도 그것은 일부 국가나 기업에 한한다. 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도 쉽지가 않다. 특히 저소득 국가에서는 당장 살기 바쁘기 때문에 그런 것을 감당 하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환경 보호는 공동의 이익이지 각국의 독자적 이익은 아니다. 그렇기에 특정 국가가 나서서 하면 다른 국가는 알아서 이익을 얻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떠넘기는 형국이 나타날 수 있다. 실제 환경 보호 예산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러니까 발상을 바꿔야 한다. 지구 온난화에 대응하는 무기 개발로 가서 무기 관련 예산을 활용하는 것이 타당하다 본다.
예를 들어 탄소 분자만 골라 분해하거나 파괴하는 폭탄 같은 것이 만들어진다 치자. AI에 물어보니 어렵지만 가능성이 있는 게 전기 분해, 초음파, 플라즈마 등이 있다고 했다. 솔직히 기술적으로는 어렵다고 본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차라리 무기 쪽이 현실성이 있다. 탄소 포집과 같은 방법의 환경 보호는 각국의 독자적 이익이 되지 않지만, 탄소 분자 분해 폭탄은 각국의 독자적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 기술로는 어려울 거 같은데, 만약에 그게 성공한다 가정하자. 그러면 지구 환경 보호를 명분으로 각국에 폭탄을 터트리는 실험을 해볼 수가 있다. 미국의 폭탄이 중국 영토에서 터진다거나 중국의 폭탄이 미국 영토에서 터질 수가 있다. 그것은 상당히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러시아가 달에 도착하자 미국에서 달에 가기 위해 미국의 전력을 쏟은 것처럼, 국가 경쟁에 들어가게 되면 그에 관련된 대응법도 빠르게 나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민주주의.
사회의 변화는 어떤 형태로든 힘에 의한 변화다.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면 어떤 힘으로 변화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오늘날 과거처럼 혁명을 일으키며 모든 것을 불태우기는 어렵다. 그것은 공멸을 부를 수도 있는 길. 그러므로 다른 형태로 새로운 힘이 출연하고, 그 힘에 의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 타당하다.
현재 인류 문명의 민주주의 체제는 위기를 겪고 있다.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정치 세력의 정치 성향과 무관하게 집권하면 패배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집권 정치 세력의 반복되는 패배로 계속 정권이 교체되면서 정치에 대한 불신이 높은 유권자가 늘어나고 있다. 더 나은 정치가에게 투표를 하는 게 아니라 덜 나쁜 정치가에게 투표하고 있다. 정치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으로 내려가면서 민주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의심을 갖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EU의 선거에서 이른바 우파라 불리는 정치 세력의 선전이 드러났다. 거기서 놀라운 점은 유튜브에서 어그로를 유튜버가 많은 팬을 바탕으로 EU 선거에서 당선되어 EU 의원이 된 것이다. 이런 현상 또한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의심을 갖게 하는데 충분했다. 그렇다고 민주주의 체제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 체제는 단순히 개인에게 주권을 주는 체제기 때문에 그 실현 방식인 제도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현재 민주주의 체제는 지역의 대표가 정치 권한을 가지는 토지 민주주의 제도를 행하고 있다. 이는 과거 왕정 체제부터 이어져 온 지역의 주인이었던 영주와 같은 형태를 관습적으로 이어온 것에 해당한다. 분명 과거에는 같은 지역에 사는 인간은 지역 사회 공동체로서 이익을 공유했었다. 그렇기에 지역의 대표라는 개념이 적절했었다고 본다. 그러나 민주화, 세계화, 디지털화가 이뤄지고 나면서 지역 공동체라는 개념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점점 도시로 몰리면서 같은 동네에 사는 인간보다 같은 분야에 사는 인간과 더 가까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제 인간은 지역 사회 공동체가 아닌 분야 사회 단체가 된 것이다.
인간 관계가 아닌 이해 관계는 보다 극명하게 차이난다. 토지의 주인이 한정된 것은 과거와 현재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국가의 주인은 과거와 현재가 아주 크게 다르다. 왕정에서 민주정이 되면서 토지의 주인은 아니지만 국가의 주인은 늘어났다. 그럼에도 아직도 지역의 대표가 정치 권한을 가지면서 토지의 주인의 이해에 맞는 공약이 주로 생기는 것으로, 토지의 주인은 아니나 국가의 주인과의 이해 관계는 아닌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서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유권자는 정치 공약보다는 정치 선동으로 선거에 참여하는 일이 늘어나게 되었다. 본인과 이해 관계가 많지 않으니 그냥 유명하거나 적당한 선동에 휘말려서 인기 투표하듯 적당히 투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역의 대표로는 인간 관계와 이해 관계의 깊이가 너무 낮을 수밖에 없다. 이제는 분야의 대표도 정치 권한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고 지금 정치 제도를 한번에 전부 바꾸자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변화를 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현행 정치 제도를 그대로 두고, 거기에 분야의 대표에게 입법권 의석을 늘리는 방향이 타당하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상원, 하원 나뉘듯 지역, 분야로 나뉘는 것이다. 만약에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가진다면 어그로 유튜버가 당선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분야는 개인의 인간 관계와 이해 관계가 매우 깊은 관계기 때문이다. 어떤 분야에 꼭 필요한 정책이 있냐 없냐에 따라 분야에 속한 인간의 이익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런 분야의 대표를 뽑는 투표를 장난하듯, 재미로 뽑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분야의 대표를 뽑는 제도를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가 않다. 이미 지역의 대표를 뽑는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분야의 기준은 현재 경제 활동하는 분야와 인구수를 고려해 선거구를 정해놓는다. 기본적인 선거구를 바탕으로 이후에 새로운 분야에 대한 요청이 생기면 새롭게 분야를 추가할 수 있도록 한다. 현재 지역 선거구 당 평균 인구수는 20만 명. 그것에 맞춰 특정 분야의 인구수가 40만이면 약 2명의 대표를 선출할 수 있는 선거구가 갖춰질 수 있게 한다. 분야의 특성상 인구는 적은데 사회적 기여도는 높은 분야는 지역에서 인구수 소멸로 인구가 적어도 의석이 있듯이, 최저 인구수 제한을 줄여 고정 의석을 도입할 수 있게 하면 된다고 본다. 특정 분야에서 경제 활동하는 인원에는 투표권이 배정되고,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 인원에는 교육 과정이나 이전 경제 활동을 토대로 특정 분야에 속하겠다는 의사를 선관위에 전달하여 투표권을 배정 받는다. 여러 경제 활동을 하는 인원은 배정 받는 분야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특정 분야에 속하겠다는 의사를 선관위에 전달하여 투표권을 새로 배정 받는다. 투표 방법 또한 어렵지가 않다. 분야의 대표를 뽑는 투표소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투표 용지만 추가하면 되기 때문이다.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가지면 분야의 이익만을 위한 의정 활동을 하여 사회적 혼란을 부를 수 있다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분야의 대표는 인구수가 적을 수밖에 없다. 특정 분야의 이익만으로 무언가 실제 결정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분야의 대표가 어떤 법률을 제정하더라도 반드시 그것은 공공의 이익을 포함하여야만 지역 대표와 다른 분야 대표를 설득하여 통과될 수 있게 된다. 더구나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가지면 시위나 파업을 통한 해결보다는 의회에서 토론을 통한 해결을 바랄 확률이 있다고 본다. 현재 무책임한 파업의 대부분은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닌 힘이 없기 때문이다. 힘이 생기면 그에 따라 책임을 부여하여 논리적인 주장을 통한 책임 있는 의정 활동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 모든 분야의 대표기 때문에 다소 지식이 부족한 대표가 생길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 또한 민주주의다. 그 분야에서 가장 우수한 인간을 뽑도록 해야 하는 것. 만약 우수하지 않는다면 분야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상황에 따라 분야 내에서 외부의 우수한 인간을 따로 포섭하는 일도 생길 것이다.
정치적 실현성은 충분하다 본다. 유권자 입장에서 보자. 집권하면 패배하는 정치 세력. 수천 년간 결과가 없는 고대 종교. 수백 년간 변화가 없는 정치 이념. 수십 년간 사회 문제를 해결 못하는 현대 인문. 깊은 정치 불신. 눈에 보이는 쇠퇴의 지표. 변화 필요성에 대한 인식 공유. 정당 입장에서 보자. 사회적으로 변화 필요성이 나타나 명분이 충분한 가운데, 원래 의석을 내주는 것도 아니고, 분야 의석을 추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엄청난 손해까지는 아니다. 물론 정치 권한을 가진 인간이 늘어나면 다소의 손해가 있을 수 있으나, 선거 패배보다는 훨씬 낫다. 그런 상태에서 헌법을 개정해 역할 민주주의 제도로 각 분야 대표에게 의석을 추가한다는 공약을 내세우면, 각 분야의 대표가 될 수 가능성이 있는 이들 위주로 적극적인 선거 활동이 일어나 선거 승리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처음으로 분야의 대표가 되는 인간은 아마 역사에 남을지도 모른다. 상당히 명예로운 자리가 될 수 있을 것이기에 보다 적극적인 선거 활동이 있을 거라 본다. 이것은 종래의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결 구도가 아니고 경제 활동을 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의석이 제공되기 때문에 경제 활동 인구라면 모두 이해가 일치될 수 있다.
역할 민주주의 제도가 실현되면 직관적으로 모두 이해할 수 있다. 권위주의를 역할주의가 대체하면서 보다 역할의 전문성이 우선되게 된다. 그러면서 본인의 전문성 외에는 타인이 더 우수할 수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에 보다 더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될 확률이 높아지게 된다. 판단하지 못하며 누구라도 바보가 된다. 비전문가는 전문성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전문가는 비전문가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알기 쉬운 주장을 한다. 전문성이 강조되면서 전문가 스스로의 역량을 더 강화하게 될 동기가 생기게 된다. 그런 식의 변화는 타인의 의견에 보다 더 귀를 기울이는 열린 마인드를 부를 것이고, 그 열린 마인드가 상대적 가치 세계로의 진입을 보다 수월하게 할 것이다. 거기서부터 현재 사회 문제를 본격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것이 힘에 의한 변화의 시작이다. 한번 변화하기 시작하면 스노우볼이 굴러가듯 자연스럽게 계속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다.
정신병.
지금까지 정신병은 육체에 병이 걸린 것보다 알기가 어려워서 그냥 병신 취급하고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과학적인 접근으로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서 가치가 생기는 것으로 논리적인 체계가 만들어지면서 그것을 이제는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보건 기구나 학회에서 특정한 이상에 질병 코드를 부여해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자아와 가치 개념이 정리되지 못한 상태기 때문에 유전자에 의한 이상과 뇌 손상에 의한 이상과 가치관에 의한 이상을 제대로 구분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원인이 불명인 경우도 많다. 그것을 구분하여 의미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에 거기에 논리가 없어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전자와 뇌 손상과 가치관을 컴퓨터로 비유하여 설명하면 다소 이해가 쉬울지도 모르겠다. 기본 설계 미스(유전자), 하드웨어 고장(뇌 손상), 소프트웨어 꼬임(가치관 문제). 가치관 문제에 의한 정신병은 가치가 모순될 경우 그 모순에 의해 데이터가 꼬이면서 판단 이상이 발생하여 정신 이상이 발생하는 것이라 본다. 모순이 없는 가치관으로 논리적으로 행동하여 생각과 행동에 막힘이 없어야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이 없어 정신 이상을 일으키지 않는데, 모순이 있다 보니까 자꾸 생각과 행동이 막히면서 답답함을 호소하고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자아와 감과 절대적 가치의 본질에 대해 이해를 해두어야 한다. 자아는 생물의 판단 기관으로 판단만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아가 육체의 반응을 관찰하여 제어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어떤 정보가 육체에 들어가면 어떤 반응이 나오는가? 상한 음식을 먹었을 때 육체의 반응을 알 수 있듯이, 어떤 정보를 접했을 때 육체의 반응을 알 수 있다. 스트레스가 쌓이는 트리거가 되는 정보를 미리 파악하여 그것에 대한 대응을 하면 된다. 육체의 반응 중 감과 같이 자아가 판단하지 못한 해석되지 않은 발상이 종종 나와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들 수가 있다. 높은 곳에 가서 고소 공포를 느끼는 감이 발상되듯이, 어떤 특정 조건이 생기면 인간이 불쾌하거나 고통스러운 감이 발상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감이 단순히 조건이 맞아 발상된 것을 이해하고 그 조건이 무엇인지 파악한 뒤 그것을 멀리하거나 제어하면 된다. 절대적 가치는 판단하지 못하는 가치임을 이해하고, 가치관 문제에 있어 모순되는 부분 중에 윤리가 있음을 이해해야 가치관을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것으로 판단 이상에 의한 정신 이상을 막을 수 있다.
정신에 관한 것은 육체와 달리 알기가 어렵기 때문에 좀 더 알기 쉬운 비유로 설명하겠다. 논리적으로 접근하자. 생각을 하면 그만큼의 에너지가 소비된다. 생각을 한다는 행위를 어떤 짐을 들고 움직인다는 것과 비슷하게 접근해보자. 인간이 짐을 들고 움직이면서 에너지가 소비되는 것으로 피로를 느끼는 것과 같이, 머리 속의 짐을 들고 움직이면서 에너지가 소비되는 것으로 피로를 느낄 수 있다. 그게 정신적 피로다. 지식이 많아질수록 그러한 짐의 양이 늘어나면서 피로도 당연히 늘어나게 된다. 근대 이전보다 인간의 정신병이 늘어난 것은 그만큼 인간이 아는 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거기서 가치관에 모순이 있다는 것은 짐을 순조롭게 옮기지 못해 헤매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순에 의해 짐을 계속 옮기면서 피로가 더욱더 쌓인다. 아예 그런 모순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정신 이상에서 벗어날 수도 있으나, 조금이라도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정신 이상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워진다.
자아가 논리적 체계를 갖추고 생각할 수 있으면 자아가 판단할 수 있는 동안에는 정신 이상이 발생할 확률이 매우 낮아진다. 그러나 자아가 판단만 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육체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는 없다. 특정 상황에서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면 정신 이상이 발생할 수 있다. 마약, 담배, 술 같은 물질에 중독되거나, 도박, 일, 취미 같은 행동에 중독되면 판단하지 못하고 정신 이상이 발생할 수 있다. 마약은 물론이고 다른 중독도 심하면 하드웨어 고장과 같이 뇌 손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것을 이해하고 미리 그런 상황에 닥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현명하다. 특히 음주 운전은 자아가 모든 것을 제어할 수 있을 거란 인식에서 나오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자아는 판단만 할 수 있기 때문에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이면 아무리 우수한 인간이라도 실수할 수밖에 없다. 그 실수가 치명적인 사고를 일으키므로 몹시 위험하다. 술은 담배와 달리 연기도 없고 하니 혼자 마시고 민폐끼치지 않으면 본인의 자기결정권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물질이라 보는데, 음주 운전은 너무 위험하다.
정신력의 고갈로 정신 이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 정신력은 체력과 마찬가지로 고갈되어 멈출 수 있는 개념이다. 아무리 정신력을 강조해도 체력이 고갈되면 육체가 동작하지 않듯이 정신력이 고갈되면 생각이 동작하지 않게 된다. 정신력도 체력처럼 키울 수는 있으나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상태에서 정신력을 강조하며 생각을 하게 하면, 육체가 고장하듯 정신이 고장나게 된다. 육체의 경우도 그렇지만 정신의 경우에는 더욱 타인이 알기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해야 한다. 그렇기에 기업에서 생각이 필요한 것을 생산하는 경우에 개인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합리적이다. 물론 여유가 있음에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에 개인의 판단으로 생산할 경우에, 개인은 생산 과정과 결과에 대한 논리적인 변호를 해야 하고, 기업은 인사 과정에서 미리 최선을 다할 인간을 뽑아야 한다.
본인의 상태를 이해하면 타인의 상태도 예상할 수 있다. 본인이 육체나 정신에 병이 걸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타인 또한 조건이 맞으면 육체나 정신에 병에 걸릴 수 있다. 그것을 고려해 인간 관계에 있어 서로 병이 걸리지 않을 수 있는 관계를 구축해나가는 것이 사회 건강에 있어 중요할 것이다.
룰 측면에서 룰을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 판단해야만 하는 것이 늘어날수록 인간의 정신적 피로는 더욱 늘어나게 된다. 해야 할 것은 간략하게 만들어 판단의 양을 줄여야 한다. 예를 들어 분리 수거는 너무 세부적으로 만들어놔서 인간이 판단해야 할 게 너무 많은 상태다. 관계의 절차라던가 그런 것도 가능한 피로가 적도록 설계해야 한다. 신용 사회를 확립하여 개인이 판단해야 할 양을 가능한 줄일 수 있는 방법도 중요하다. 절대적 가치는 아예 판단 자체를 못하는 것이라면, 신용 사회에서 판단하지 않음은 판단할 수 있는데 절차 생략으로 얻는 다양한 이익을 위해 판단하지 않는 것에 속한다. 약을 보면 굉장히 복잡한 설명이 있을 수 있는데, 그냥 효과만 간단히 알아도 될 정도로 판단할 수 있는 양을 줄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세부적인 것은 전문가가 판단할 수 있으면 된다. 신용 사회에서는 전문가도 판단 못하는 게 위험한 거지 비전문가가 판단 못하는 게 위험한 것은 아니다. 전문가는 쉽고 깊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쉽게 깊게는 바로 알기 쉽지만, 그 개념을 구축하기 위한 논리가 체계적인 것을 의미한다.
특히 지능이나 연령에 따라 판단의 양을 감당하는 게 점점 어려워질 수 있는데, 그것을 고려해 맞춤식 룰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연령이 낮아서 판단이 어려울 경우에는 단계별 체제 학습이 필요하고, 연령이 높아서 판단이 어려워지는 시기에는 타인이 판단을 도울 필요가 있다. 지능이 낮을 경우에는 애초에 돕는 인간이 필요하다. 추후 AI가 그런 점을 많이 보완할 수 있을 거라 본다.
5. 외교
지구에서 외교는 지구를 관리한다는 의미에서 지구 정치가 되었다. 국가 내 지자체가 다른 지자체와 교류하는 것을 정치라 하듯이, 지구 내 국가가 다른 국가와 교류하는 것도 정치가 되었다. 모든 국가의 주권자는 이제 단순히 교류만 하는 것을 넘어 지구를 비롯한 사회를 관리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 시대다.
국제 사회는 야생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현재 국제 사회의 문명 레벨이 야생과도 같은 원시적이라는 말이 된다. 일반적인 국가의 경우에는 국가 내 법이 하나의 룰로 작용하여 과도한 분쟁을 막고 있는 상태다. 그러나 지구의 경우에는 정말 다양한 법과 다양한 룰이 작용하여 언제든지 심각한 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일반적인 국가 내 정치와 지구 정치는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했던 정치 방식이 지구에서는 통하지 않을 수가 있다.
한국을 예로 들어보자. 유교는 권력이 윤리인 사상이다. 권력을 기초로 한 위계질서로 일정한 힘이 작용하는 것으로 질서를 만들어 사회를 성립시켰다. 그렇기에 유교 국가는 매우 정치적인 국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치력이 높은 국가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위계가 대부분 정해져 있기 때문에 딱히 정치력을 발휘할 일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유교는 모든 관계에 위계를 정하여 질서를 갖춘 종교다. 심지어 죽은 인간까지 위계를 정하여 체계적인 족보까지 다 있다. 대등한 관계가 아니면 정치력을 발휘할 일 자체가 드물다. 온갖 조직에 파벌이 있고 정치적인 싸움을 해도, 그게 정치력을 올리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특정 사회에서 완전 대등한 관계라고 해보자. 그러면 사회를 관리하는 일을 하기 위한 정치적인 대립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면 모든 인간과의 대화를 통해 지지를 받아 권력을 얻는 것으로 사회를 관리하는 일을 맡는 과정에서 정치력이 매우 오를 수가 있다. 그러나 특정 사회에서 이미 대부분 위계가 정해져 있는 관계라 해보자. 그러면 대부분 관계가 딱히 정치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권력이 정해져 있다. 일부만 정치력을 발휘해 권력이 달라질 뿐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정치력을 배울 기회가 없다. 권력을 윤리로 여기더라도 정치력이 낮은 이유는 정치를 할 관계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유교권 내에서도 외교를 실패하게 되는 원인 또한 유교가 원인이다. 유교는 이미 위계가 정해져 있는 사상으로 한국과 일본이 서로 위계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면서 싸우게 된다. 한국은 일제 식민 시대 이전을 떠올리며 한국이 높은 위계에 있는 국가라 여기고, 일본은 일제 식민 시대를 떠올리며 일본이 높은 위계의 국가라 여긴다. 서로가 높다 여기니 서로가 알아서 양보할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입장 차이가 크게 되면서 다툼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한국이나 일본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를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낮은 위계라 생각할 확률이 높다. 그러니까 입장 차이가 커서 대화가 되질 않는다. 현실적인 힘의 차이가 발생하면 앞에서는 지는 것처럼 보여도 뒤에서는 어떻게든 이기려 하는 태도가 나오게 된다. 이런 관계에서 정상적인 외교가 가능할 수가 없다.
지구 정치에서 주도권을 가지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대등한 관계에서의 정치 능력을 높여야 한다. 물론 속한 국가의 힘이 강하면 그만큼 메리트는 있지만,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선이 아닌 후가 되어야 한다. 먼저부터 그걸 활용해 압박을 넣으면 앞에서는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감정의 손상으로 뒤에서는 손해가 될 수 있다. 대등한 관계에서 사랑 받을 수 있는 정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정치력이 높다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익을 뿌리는 것으로 앞에서는 환호성을 듣고 기분이 좋아 정치력이 높은 거라 생각하지만, 뒤에서는 정작 지지를 받는 게 아니라 막상 선거에서는 지지율이 낮을 수가 있다. 실제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에게 사랑 받는 정치가 필요하다.
외교 분야는 이제 직접 외교를 하는 역할이 아닌 주권자의 지구 정치를 보조 관리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외교의 전문가로서 다양한 이들에게 적절한 정보 제공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체계는 외교 플랫폼이 적절하다고 본다. 모든 개인이 주권자인 상황에서 개개인에 맞춘 서포팅은 어렵다. 그렇기에 플랫폼을 구축해 플랫폼 이용자가 정보 입력을 하면 자동적으로 기본적인 서포팅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특정 정치가나 기업가가 외국에서 교류를 할 때 그에 대한 서포팅을 하기 위한 플랫폼 체계를 갖추는 것이다. 정치가나 기업가도 충분히 각자 정보 획득 수단이 있겠지만, 전문적인 서포팅을 받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아마 지금도 서포팅을 하고 있을 텐데, 그런 서포팅을 플랫폼을 통해 체계화한다면 보다 적극적인 활용을 통해 효과적인 지원과 많은 데이터 축적을 통한 외교력을 올릴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치가나 기업가만이 아니라 모든 주권자가 그에 대한 서포팅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체급을 갖추게 되면, 지구 정치를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플랫폼 체계는 정보의 연결이다. 본인과 교류 대상을 입력하면 그에 대한 관계와 정보, 그리고 대책 등이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전달되게 한다. 본인도 적어야 하는 이유는 본인 스스로도 본인을 모르는 게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AI로 하면 효율적이다. 외교 조건만 입력하면 그에 대한 정보가 가지런히 출력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안보적인 이유로 국내 기업의 것을 활용하거나 신용할 수 있는 국가의 기업의 것을 활용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 체계를 구축하여 많은 인간이 그것을 활용하면 외교적 동향을 살펴보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지구 정치를 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으로는 인식할 수 있는 정보의 양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가진 작은 힘이 급격하게 커져 큰 힘이 되어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사회의 크기와 무관하게 태도나 방식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100만 원에서 100억 원을 가지면 가치관이 달라질 수 있으나, 100억 원을 가진 인간이 1000억 원을 가진다고 가치관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떤 사회든 인간의 본질을 알면 생각과 행동이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고려해 정치를 하면 된다.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아무리 세계 정세가 복잡해도 그것을 작은 사회로 축약해서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큰 사회와 작은 사회가 같을 수는 없지만 본질적인 부분은 같을 수가 있다. 그럴 때에는 같은 부분을 상수에 두고 다른 부분을 변수에 두고 각각 정리하면 될 것이다. 만약 세계 정세를 작은 사회로 축약해서 정리할 수 있다면, 세계 정세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다고 봐도 된다. 사회의 법칙을 비롯해 다방면에 대한 이해와 세계의 수많은 정보를 알고 있어야 가능하므로 외교의 전문가가 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건 관계도 마찬가지. 모든 관계는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에너지를 소모한만큼 어떤 이익이 있어야 그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 현재 미국에서 고립주의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세계와의 관계가 피곤한데, 그만큼의 이익이 되지 못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별관심도 없는 곳에서 세금을 펑펑 쓰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면, 그 정보에 피로를 느낌과 동시에 손해도 느낄 것이다. 현재 미국의 정치와 경제적인 것 외 모든 것이 패권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에도, 그것이 일반적으로 체감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관계에 이익을 느끼지 못하면서 에너지를 소모한만큼 이익이라 여겨지지 않는 것으로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다는 충동을 느낄만도 하다.
지구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에너지 효율과 그에 따른 이익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그것이 지속성을 갖게 된다. 에너지 효율을 위해서는 개념의 간략화가 매우 중요하다. 판단해야 하는 게 늘어날수록 매우 피곤해지는 것은 자명. 외교에 관해서 가능한 쉽고 깊은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전 세계 200여국의 특징을 하나하나 따로 정리하면 너무 피곤하다. 그러나 사회의 법칙으로 접근해 공통된 것은 상수로 두고, 다른 부분만 따로 정리해두면 알아야 하는 것이 매우 적어질 수 있다. 그런식의 효율화가 있어야 보다 지구 정치에 적극적이게 될 수 있다. 정치를 적극적으로 한다는 것은 민주적인 정치를 적극적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내 정치를 하기 위해 돈을 쏟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지구 정치를 하기 위해 돈을 쓰는 것은 낭비로 여기는 경향이 크다. 국내 정치는 정치가 돈이나 정당 돈으로 하지만 지구 정치는 세금으로 하는 일도 많아 그런 것 같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어떤 경제적인 코스트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것에 의해 어떤 정치적 이익이 있으면 그것을 손해로 여기는 것은 합리적이지가 않다.
그런 에너지 효율화를 통해 빠르고 합리적이고 이익이 되는 선택이 가능해지면, 어떠한 선택권을 선점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에너지 소모가 커질수록 다른 무언가에 선택권을 넘긴다. A 중에서 추천해줘, B는 어때?, C는 별로인가? 본인이 선택하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선택권을 넘기거나 선택에 도움을 받는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사회에서든 빠르고 합리적이고 이익이 되는 선택을 하는 인간에게 선택권이 주어지게 된다. 대신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이 정치를 할 수 있게 된다고 본다. 지구 정치를 함에 있어 그러한 효율적을 통한 선택 능력 확보는 주도권을 얻는데 매우 중요하다 본다.
지구 정치가 민주화, 세계화, 디지털화로 일반화되면서 모든 정치는 이야기를 필요하게 되었다. 언제 어느 때든 모든 개인이 디지털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정치 활동을 언제 어느 때든 모든 개인은 그것을 관찰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다. 그 관찰을 통해 상시 지지율이 달라지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이야기는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된다. 그래야 어떤 정치 활동이든 이야기의 설득력으로 지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에 공개되는 정보에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 단순히 필요한 정보만 딱 공개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공감하고 호감을 느낄 수 있도록 꾸며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정치도 정보에 이야기가 담겨야 호응이 좋을 수 있다. 특히 정치가가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 이야기는 몹시 좋은 명분이 된다. 예를 들어 정치가가 선동을 해서 일으킨 사건도 한번 대중에 들어가면 정치가의 손을 떠날 수가 있다. 그것을 제어하려면 충분한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 내 역할을 이해하게 하고,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하면 자연스럽게 당위성이 성립되면서 그것을 행하려 하게 된다. 이교도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고, 이교도를 대하는 역할을 이해하게 하고, 그 역할을 수행하게 하면 십자군 전쟁이란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물론 그것도 어떤 또 다른 목적이 있었겠지만, 기본적인 명분이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 이념 전쟁에서 UN을 통해 전 세계 파병이 가능했던 것도 그것에 이념 경쟁이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현재 정치가도 감당하지 힘든 사건들이 몇 가지 일어난 상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하마스의 이스라엘 테러가 그렇다. 어떤 조건이 갖춰져 발생한 그 사건들은 이내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것에 관련된 정치가조차 끝내는 방법을 정하기가 어려운 상태다. 정치가의 감정은 차치하더라도 정치가의 행동은 전부 디지털로 공개되어 지구에 사는 인간들에게 판단되고 있다. 행동 하나하나가 지구 정치에 영향이 가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대책 없이 끝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 단순히 전쟁을 끝내고자 한다면 끝내기 위한 명분, 이야기가 필요하다.
우선 실질적으로 전쟁을 끝내려면 결정권을 가진 각 국가의 정치가들, 특히 힘이 강한 러시아와 이스라엘의 정치가의 이해를 고려해야 한다. 결정권을 가진 정치가를 죽이면 그러지 않아도 되지만, 그러기 몹시 어려우므로 살린다는 전제로 접근하겠다. 과거 전쟁은 왕의 목을 제거하면 끝난다고 하지만 현대 전쟁은 그런 것이 드문 대게 정치 행위의 연장 선상이다. 전쟁은 정치가의 정치적 이익으로 끝날 수 있다. 정치가 입장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잃을 바에는 전쟁이 계속되는 것이 이익이라면서 전쟁이 계속되도록 유도할 수도 있다. 각자 무엇이 이익인지 파악하고 그 조건에서 최선의 결정을 해야 한다.
전쟁은 기본 룰이 달라 발생한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룰에 의한 협상보다는 이해의 룰로 협상하는 것이 타당하다. 단순히 상호 이익이 되면 전쟁이 멈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밸런스를 맞춰야 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밸런스가 맞아야 이해로 협상이 가능하고,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밸런스가 맞아야 이해로 협상이 가능하다. 밸런스가 맞아야 상호 이익을 맞추기가 쉽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 밸런스를 맞춰야 하는가? 민주 국가라면 아무리 강대한 국가라 하더라도 내부 반발이 밸런스를 맞추는 경우가 있다. 미국과 베트남 전쟁이 바로 그렇다. 그것을 고려하면 내부 반발로 밸런스를 맞출 수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와 이스라엘은 오랜 독재 국가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퇴진 시위가 강하기 때문에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 당분간은 이스라엘 총리의 권력을 어떻게든 보장할 수 있으면 전쟁을 멈추기 위한 밸런스가 맞아 협상이 가능할 수 있을 거라 본다. 반면 러시아는 내부 반발을 성립시키기가 어렵다. 전쟁 자체는 러시아가 유리하다. 그렇기에 전 세계에서 물자를 지원하고 있으나, 인구는 지원할 수 없으면서 그에 대한 한계는 명확하다. 그렇기에 러시아가 유리해야 밸런스가 맞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 영토의 일부는 손해를 감수해야만 협상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허용하면 러시아의 기세를 막지 못하여 이후 다른 국가로의 침공까지 이뤄질 수 있다는 공포가 있기 때문에 섣불리 결정할 수는 없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입장에서도 그걸 허용하면 정치 권한을 잃을 수가 있어 결정하기 어렵다. 결국 이것은 러시아 대통령의 결정에 달렸다. 어떤 형태든 러시아 대통령의 이익이 보장되어 대등한 형태의 협상이 가능하면 밸런스가 맞아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대부분 돌려준 형태로 휴전이나 종전이 가능할 수 있을 거라 본다. 물론 이런 것은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쉽게 끝날 수도 있다.
비공개된 협상이 끝나고 나면 공개된 시나리오 협상이 나와야 한다. 예를 들어 말레이시아에서 싱가포르가 독립하기 위해 비공개 협상 후에 공개된 협상에서는 당시 싱가포르 총리가 눈물을 흘리며 독립되는 것이 안타깝다는 연출을 했다고 한다. 그런 것을 싱가포르 대중이 어떤 식으로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중이 지켜보는 상태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든 개인이 쉽게 알 수 있는 명분이 타당하다. 특히 중요한 것은 당사국에 사는 개인들.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그냥 모두가 이익을 얻었다는 인식을 갖게 하면 된다. 전후 대규모의 투자가 각 지역에서 일어난다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통해 현실적인 이익도 충분한 명분이 될 것이다. 지금 멈추면 대규모 투자가 있을 것이다- 같이. 그것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으로 서로 상처를 입어 큰 손해를 봤음에도 어느 정도 이익이라 여기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 규모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의 명분으로는 충분할 것이다.
외교에 대해 쓰기로 결정하고 사물과 현상을 살펴보면서 느낀 것은 가치에 대한 고려가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가치관이 인간의 판단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스스로를 관찰하면 알 수 있음에도, 인간과 인간이 일으킨 현상을 관찰하는데 가치를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겉으로 드러난 어떤 종교적인 신앙과 근대 이념으로 일어난 현상은 가치에 의한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현상들은 가치에 의함임을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분석에 인간의 가치관이 고려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냥 보편적으로 가치가 같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에 대해서는 생각 자체를 안한다. 이는 절대적 가치인 윤리에 의해 판단하지 못하면서 발생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는 상대적 가치로 진입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짐승 사회의 법칙을 인간 사회의 법칙으로 바꿔야 한다.
그것을 통한 자유주의 국제 질서 확립. 하나의 룰과 다양한 가치. 모든 개인의 이익을 보장하는 룰을 지향해야 다툼이 사라질 수 있다. 앞으로 외교는 지구를 관리하는 일. 모든 개인이 지구를 관리하는 일에 참여하면서 인류가 행복할 수 있는 룰을 만드는 것이 앞으로 인류를 위한 일이 될 거라 생각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그 룰을 실현할 수 있는 기술력이 갖춰져야 한다. 하나의 룰에서 기술을 통해 모든 개인의 감정, 욕구, 욕망 등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으면 평화를 성립시킬 수 있다.
현재 정치 이념은 지배를 전제로 한다. 짐승 사회의 법칙이 지배하다 보니 무언가의 지배가 있어야만 사회가 성립된다. 그렇기에 부디 바란다. 인간의 지배냐, 윤리의 지배냐, 이런 것으로 다툴게 아니라 사회의 법칙을 바꾸고 불로불사를 이뤄서라도 자유 이념을 실현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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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주제는 창작이야. 사상을 하다 보면 계속 성장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부디 좋은 환경, 바라는 환경에서 사상할 수 있으면 좋겠네.
안녕.
사상가 정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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