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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검수완박에 대한 의견 (7) 2022/04/16 PM 11:03

검수완박에 대한 의견

 

 

 

한국의 집단 이기주의는 사회의 작은 집단인 가족 이기주의를 올바른 도리라 가르치는 순간부터 확정된 것이었다. 사회는 기초적인 관념에서 시작해 크게 퍼져나간다. 가족 이기주의를 배운 이는 지역과 조직 이기주의에 물들게 되고 가족 장유유서를 배운 이는 사회의 서열에 따라 차례를 지키는 관행에 물들게 된다. 집단 이기주의는 본인의 이익보다 집단에 속한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가 본인의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원리아래 집단에 대한 충성은 올바른 도리가 되어 설령 정당한 내부고발자조차 배신자라는 오명을 쓰고 비난 받게 되었다. 집단 이기주의는 실상 이타주의의 폐해라 할 수 있다. 혈연주의와 지역주의, 연고주의와 학벌주의 등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관념은 사회에 수많은 해악을 끼쳐왔다. 부모가 자녀의 입시비리 등과 같은 부정을 한 것은 자녀를 사랑하는 도덕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부모에 의한 교육관련 비리가 많을 수밖에 없다. 도덕은 진리가 아니다. 맹목적으로 가족을 사랑하며 부정을 하는 것이 바르다 여기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조직 이기주의가 일상화된 상황에서 검찰 조직의 이기주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힘은 기득권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이었고 그 힘을 토대로 검찰 조직은 점점 힘을 키워 부당하게 과한 이익을 얻는 일이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공정하거나 객관적이지 못한 수사와 기소, 검찰 조직의 이익만을 보는 행태가 잦게 되었다. 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그들이 부도덕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도덕적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실제로 검찰 조직의 손익과 관련이 없는 업무는 대체로 유능하게 일 처리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사법 입법 경제 언론 가리지 않고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조직과 관련이 없는 업무는 대체로 잘한다. 그런 측면에서 검찰에 대한 비판은 능력보다는 조직 이기주의에 중점을 두고 있을 것이다.

 

검수완박에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경찰의 역량부족을 들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일선 경찰 일부의 일탈이나 능력부족으로 많은 국민의 신뢰도를 잃은 상황에서 경찰이 모든 수사를 담당한다는 사실에 국민이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근간을 떠올리면 그런 주장은 아무래도 설득력을 가지기가 어렵다. 민주주의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라는 전제에서 나타났다. 일부 국민의 실수가 있더라도 그건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니 충분한 교육이 있다면 개개인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지적장애인을 제외하면 귀족이나 평민이나 노예 같은 집단 구분의 차이는 없다. 이런 인식이 있었기에 모든 국민이 주권을 가지는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었다. 인간은 사회학적 우열은 있었더라도 생물학적 우열은 없다라는 진리에서 나온 인식이다. 그에 따라 마찬가지로 일부 경찰의 실수가 있더라도 그건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니 충분한 교육을 있다면 역량부족을 근거로 반대할 수 없다. 이치만 따지면 능력부족을 근거로 반대하기에는 부족하다. 만약 경찰 능력 부족을 근거로 수사권을 주지 못한다는 논리가 정당화된다면 국민 능력 부족을 근거로 선거권을 주지 못한다는 논리가 정당화될 가능성이 있다. 단순 능력 문제로 성장 가능성을 부정해버리면 그 끝은 파멸이다.

 

그러나 경찰 행보를 보면 호감을 가지기가 어렵다. 단순 이치 외의 문제가 남아있다. 경찰이 경찰의 역할보다 정치적 이슈에 몰두하며 여성 가산점과 할당제와 진급 특혜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경찰 스스로 역량 부족을 자처하는 걸 보고 있으면 경찰에 대한 신뢰도가 급격하게 낮아질 수 밖에 없다. 이는 경찰 내부에서도 지속적으로 지적되고 있다고 알고 있다. 정치적 이슈에 따라 성범죄자 검거를 진급에 유리하게 하자 무고한 시민을 성범죄자로 규정하고 공격적으로 누명을 씌우려는 태도가 나왔다. 그 태도는 무고한 시민을 간첩으로 규정하고 공격적으로 누명을 씌우려던 독재정권 시대 경찰의 태도가 떠올라 불쾌한 감정이 앞선다. 이것에 대해 반론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실제 있는 사건이 아닌가? 민주당의 졸속 추진 또한 호감을 가지기가 어렵다. 보통 한국은 보수적인 국가다. 어떤 정책이나 규정을 바꿀 때엔 대부분 해외의 사례를 들고 오곤 했다. 특히 중대한 사안에 있어 해외의 사례를 들고 오지 않는 일은 드물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한국 독자적으로 실행한다 할 수 있을 정도로 해외의 사례와 무관하게 추진 중에 있다. 영국의 경우 검수완박에 해당하나 역사나 구조가 다르다고 한다. 이번 검수완박은 한국 고유의 방식일 거라 한다. 한국이 선진국인 만큼 이제는 해외의 사례를 참고할 것이 아니라 해외에 참고되는 것이 바람직하므로 고유의 방식을 추진하는 것 자체는 바람직하다 본다. 그러나 이번 사례는 지나치게 졸속이다. 대중을 설득하여 자연스럽게 변화하기보다는 정권이 바뀌기 전에 어떻게든 성사시키려는 태도에서 당리당략에 따른 결정이 아닐까 의심이 들게 된다. 어떤 사람은 본래 경찰이 대부분 수사하고 있으므로 검수완박이 정치적 이해관계로 결정한 일이 아니라 반론할 수 있다. 그러나 6대 범죄의 성질을 떠올려보면 이해할 수 있다. 재산범죄, 신체범죄, 직무범죄, 공직자범죄, 인격범죄, 기타 특별법 등으로 6대 범죄의 수사권이야말로 수사집단의 핵심적인 힘이다. 6대 범죄에 속하는 이들이 기득권에 해당하는 일이 많아 그들의 범죄를 수사할 권리는 그들을 제어할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같다. 그런 힘을 토대로 검정유착이나 검경유착이나 검언유착이 없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 수사권을 경찰이 갖게 된다는 것은 제어할 힘이 검찰에서 경찰로 이전한다는 것과 같다. 경찰이 기득권을 제어할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민주당이 오랫동안 검찰을 견제하며 수사권을 분리하는 것으로 경찰에 힘을 실어주었고 경찰 또한 민주당이 주장하는 여성 가산점과 할당제와 진급 특혜를 추진하며 그런 힘에 화답해왔다. 그런 결속 속에서 주어진 새로운 힘을 가지게 된 경찰이 그 힘을 민주당에게 휘두를 것인지 의문이 든다. 지금까지 검찰은 기득권을 제어하면서 특정 정당의 이익보다는 검찰의 이익으로 수사 대상을 결정했다. 그래서 여야 가리지 않고 수사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이제는 수사집단의 이익이 아닌 정당의 이익으로 수사 대상을 결정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추론을 할 수 있게 된다. 어떤 검사가 이런 말을 했다. 검수완박을 할 바에 민주당원이면 면죄부를 주는 게 낫다고. 실제로 그런 현상이 나올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검찰 조직 이기주의에서 정당 조직 이기주의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민주당이 조직 이기주의가 아니었다면 이런 의심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전형적인 한국 조직과 다를 바 없이 조직 이기주의에 해당하여 조직과 다른 의견을 낸 사람을 배척하기까지 하고 있으므로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시 말하지만 한국에서 조직 이기주의는 도덕적이기에 그들이 부도덕하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다. 한국은 도덕이 잘못되었으니까 잘못된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맹목적 집단 이기주의는 잘못된 도덕이다. 국민의 입장에서 검찰보다 정당의 영역이 크므로 검찰 조직 이기주의보다 정당 조직 이기주의가 보다 위험할 가능성이 높아 민주당이 조직 이기주의인 이상 검수완박에 찬성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민주당과 경찰이 거리라도 멀었으면 어느 정도는 이해라도 했다. 반대로 말해 경찰이 공정하게 수사할 명확한 근거가 있다면 통과되더라도 큰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검찰 조직 이기주의에서 경찰 조직 이기주의로 바뀌는 것일 뿐이니 말이다. 검사 수보다 경찰 수가 많으므로 많은 비리가 나올 수는 있어 지금보다 악화될 수는 있다.

 

검언유착에 대한 반대 중 경찰의 역량부족은 민주주의로 논파될 수 있고 해외 사례 부재는 선진국으로 논파될 수 있으니 반대를 위한 주장은 경찰과 정당의 유착관계에 대한 의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경찰이 민주당과 관련된 수사를 소홀히 하거나 하지 않았다는 물증이 있다면 검수완박에 반대할 결정적인 근거가 될 것이다. 만약 강행처리 한다고 하더라도 그걸 토대로 적극적인 공세를 하다 보면 여론에 의해 정치권력이 바뀌어 이후 되돌리는 일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국가로서 원래 법은 자유롭게 바뀌는 것이 옳다. 현재 민주적 절차에 의해 만든 규율을 진리라 여기게 되면 후대는 아무런 의견도 제시하지 못하고 그저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민주적이지 못하다. 어떤 경우에도 특정 세대가 만든 규율을 후대에 강요해서는 안 된다. 장유유서에 따라 연상이 연하를 지배하는 걸 올바른 도리로 여겨왔던 조선은 과거의 규율을 후대에 강요하여 수많은 허례허식으로 나중에는 전화 한 통 하는 것도 복잡한 절차가 있었을 정도였다. 그건 끔찍하고 비참한 조상의 노예다. 그것은 더 이상 자유주의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니다. 조선의 문화를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의 부자유스럽고 비민주적인 문화는 결단코 부정하겠다. 나는 지금 살아 있는 인간을 중시한다. 과거의 사람과 과거의 규율보다 지금 살아있는 사람을 우선시한다. 그것이 올바르다 여기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네가 중요하단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금전적 낭비가 나타나더라도 당대의 의사가 있으면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검수완박이 통과되었다는 가정하에 의견을 내보겠다. 하나, 경찰의 역량 또는 여력 부족. 둘, 검찰과 경찰의 갈등. 셋, 조직 이기주의. 이런 상황에서 경찰이 6대 범죄를 수사하며 겪게 될 역량과 여력 부족과 검찰과 경찰 갈등과 조직 이기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두 집단을 섞을 필요가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었다. 검찰이 경찰 조직에 파견되고 경찰이 검찰 조직에 파견된다. 검찰이 경찰 조직에 파견되어 경찰과 함께 6대 범죄를 수사하고 경찰이 검찰 조직에 파견되어 나머지 범죄의 일부를 경찰이 수사한다. 검찰과 같이 6대 범죄를 수사하는 것으로 경찰의 역량 또는 여력 부족을 보완하고 검찰과 경찰의 일반적인 합동수사로 갈등을 줄이고 검찰과 경찰의 조직 이기주의에서 벗어난다. 파견되는 인원을 매번 달라지게 하여 고착화되는 것을 막는다. 공수처에 검사가 파견되어도 검찰에 공수처의 권한이 있다 하지 않듯, 경찰에 검사가 파견되어도 검찰에 수사권이 있다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으로 검수완박을 하더라도 검사도 수사를 할 명분이 주어지게 된다. 검사도 수사를 하는 것으로 검사의 수사능력 부재를 방지한다. 동시에 경찰도 검사 조직에 파견되어 나머지 수사를 담당하는 것으로 검사의 행태를 배우며 친숙하게 된다. 검찰의 기소과정을 배우며 합리적인 수사를 하게 된다. 최근 경찰 도주사건으로 사명감이 부족한 경찰이 있다는 걸 알았다. 파견으로 그런 현상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파견되는 인원은 조직의 체면과 명예를 짊어질 수 있으므로 최고의 인재가 파견될 가능성이 있다. 그런 것으로 각각 인원의 능력을 높인다. 경찰의 수사를 검찰이 기소해야 경찰의 실적이 되기 때문에 검경 수사가 원활하게 되고 있다는 해외 사례를 본 적이 있다. 그런 것을 고려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개인의 주관적인 도덕성에 의존한 체제나 체계는 쓸모 없다.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모두 같다. 검찰과 경찰도 개인의 도덕성에 의존하기보다는 개인의 도덕성과 무관하게 올바른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객관적인 체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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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사회현상에 대한 의견을 낼까 말까 고민을 해왔는데 이번에 한번 써봅니다. 깊게 생각한 건 아니라 짧네요. 다른 것도 써봐야 하나. 모르겠습니다.

 

지금 한국에 있어 이성관계 회복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계속 강조할 거예요. 지금 당장 성을 개방해도 아마 관성에 의해 관계회복 되는데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장이라도 늦었지만 성을 죄악시하지 말고 자유로운 성관계가 가능한 이성관계가 확립되어야 합니다. 성을 죄악시하는 것은 어떤 사상이든 국가를 괴멸시킬 최악의 사상이 될 수 있습니다. 조심해야 해요. 가족주의가 집단 이기주의를 만들었다면 정조관념이 성을 죄악시하여 이성관계 붕괴를 만들었죠. 둘 다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주요인이지만 심각성은 후자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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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의    친구신청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접근성이 떨어지는 마이피라는 공간에만 남기에는 아까운 글이네요.
글의 분량만 보고 뒤로가기를 누를 사람들이 대부분일텐데 참 아쉽네요

방귀대장    친구신청

일단...
줄바꿈부터 먼저요....

가독성이 너무 떨어져요.....

6411번버스    친구신청

전제 조건 자체가 틀렸음
검수완박의 반박 논거로 경찰 무능을 꼽았고 경찰 무능을 경찰에서 나온 사건사고로 꼽았는데 지금도 수사 자체는 경찰이 하고 수사 지휘권을 검찰이 하기 때문에 수사의 실뮤 역량은 경찰이 가지고 있음

또한 경찰의 무능 또는 부패를 단순히 경찰관련 범죄수로 비교하는 것도 말도 안 됨 애초에 검찰은 사법고시 합격자들 중에서도 소수로 구성된 집단이고 경찰은 행정집단으로 머릿수가 다름

100명이 있는 곳에서 사고가 10개 터지면 10퍼셈트인데 1만 명이 있는 것에서 20명이 터지면 몇 퍼센트인가?
머리가 많은 곳에 사고가 당연이 더 많이 나는 걸 가지고 집단의 무능이다? 이건 논리적으로 탄핵 됨

끝으로 검수완박의 본질은 기소권과 수사권을 독점하는 구조가 비리의 문제니까 이걸 분리하자는 것임
검사가 범죄를 저질렀는데 검찰이 알고도 수사를 안함
어떻게 경철이 수사를 헸는데 기소를 안 함
대통령제에서 통수권자가 절차적 정당성과 헌법에서 보장한 권위로 수사를 지시해도 뭉갬...그게 김학의임

대륙법 체계에서 명문화된 법조항에 근거로 기소와 수사를 공소시효까지 삐대면 얼굴과 증거와 증인이 차고 넘치는 권력형 범죄자도 무죄로 만듦

끝으로 이러한 검찰 독점이 왜 생겼는지 역사적 사실을 전혀 이해 못하고 있음
우리나라의 경찰 제도는 일제시대가 끝나고 망할 런승만과 친일파 그리고 당시 한국에 관심 없던 미국이 일제 경찰을 그대로 답습시키니까 그나마 그걸 견제하자고 검찰에게 준 것임

왜냐고?
일제시대 경찰은 사법집행권과 함께 사실상 기소대행을 함께 했음
뭔말 이냐고?
친일 악질 노덕술 같은 놈들, 즉 조선인 경찰로 조선인을 잡으면 일본놈들은 검사 기소권을 도장만 찍어 주는 것임
그러니 사실상 앉아서 조선인을 통한 조선인 통제가 가능하지

그래서 건국 당시 제헌 과정에서 경찰권을 약화 시키기 위해 검찰권을 강화 한 건데 이제 그 검새들이 지들 마음대로 죄를 묻고 지지고 볶으니 그 힘을 빼야 함

민주주의 기본 원칙은 상호 견제와 권력 분립이고 그 근본적인 원리는 인간의 불완전성임

단순하게 다른 나라들도 검새 권한이 이렇게 쎈 곳 없고 있어도 검새를 직선으로 뽑아서 견제하는데 정년 보장된 행정부 산하 기관에게 그냥 계속 맡긴다???

그래도 되는 거라 생각하시나요?

6411번버스    친구신청

참고로 지금 국짐당 전신인 새누리당에서도 주성영 같은 검찰수사권 폐지 주장 있었는데 지들이 정권만 잡으면 모른 척 했음
그래서 검새 별명이 정권의 칼잡이임

유일하게 칼잡이 짓거리 안 시킨 두 정권이 검새와의 대화라는 희대의 권위타파를 추진했다가 몇 학번이냐고 인신공격 당한 노무현이고 오히려 검찰로 인해 조국이라는 동지를 가족 파탄까지 보내야 했던 문재인 정권임

두 대통령의 공통점은 정치 하기 전 엄혹한 시절에 볌호사 하면서 정권의 개로 기소 남발하던 검새들과 붙어온 사람들이라는 점
그리고 검찰로 정적 보복을 한 적이 없다는 점임

문재인이 검찰을 안 부렸다고?

부리고 칼잡이를 권력으로 주물러서 김경수 날아가고 조국, 추미애가 저렇게 당했겠습니까?
문재인 정부에서 가세연이든 국짐이든 정치사범 범죄로 검찰 수사를 받았습니까?

놔두고 맡기다 못해 한직에 있던 굥을 검찰개혁 하라 했더니 칼을 꼽는데 그 굥이 닭만나서 한 말이 미안했다고 함
지가 수사 해서 지가 감옥 보냈는데
참고로 굥이 수서할 때 대통령 선거 전임

정치 집단으로 변질되고 법룡인으로 권력에 정점에 선 집단을 괜찮다고 볼 수 있나요?

뇌제아세스    친구신청

다른건모르겠고 지들편 수사는절대 안하는 선택적 수사만봐도 검찰개혁해야함 이승만이 준검찰권력이 지금까지 전세계어디에서도
볼수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됨 검찰의권한박탈은 국짐당의 프레임이고 원래대로 돌아가는거죠

Rucy~    친구신청

검사의 검사 기소율만 보더라도 어떤식으로 수사권기소권을 사용하는지 볼 수 있죠.
김학의, 99만원 접대, 특정 정치집단 수사 & 뭉개기, 언론을 통한 여론전 등
검찰은 사실상 임기없는 정치집단이나 마찬가지임.
[잡담] 삼일과 회계 (0) 2022/04/15 AM 03:50

삼일과 회계

 

 

 

수는 만물의 객관화다. 수는 세거나 헤아린 양 또는 자연수, 정수, 분수, 유리수, 무리수, 실수, 허수 등의 총칭을 뜻한다. 만물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뜻한다. 객관은 자기의 직접적 관심에서 벗어나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는 일을 뜻한다. 사전적 정의로 위의 문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수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제삼자가 사물을 보는 것마냥 만든다. 제삼자가 봐도 같은 인식을 갖게 한다. 알기 쉬운 예시를 해보겠다. 여기 사과A가 있다. 주먹만한 크기에 새빨간 사과A는 싱싱했다. 다수의 사람은 이 사과를 보더라도 같은 사과를 떠올리기 지극히 어렵다. 사람들에게 봤던 사과A를 스케치북에 그려보라고 하면 각자 다 다른 사과가 나올 것이다. 관찰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똑같이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은 만물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물은 인간의 주관으로는 인간의 인식을 정확히 공유할 수 없다. 그러나 수는 가능하다. 사과를 수로 객관화할 수 있다. 사과의 크기와 색과 품질을 수로 표현할 수 있다. 크기는 계산으로, 색은 색상코드로, 품질은 가격으로 수치화할 수 있다. 만물은 인간이 객관화하여 인간의 인식을 정확히 공유할 수 있다. 이렇게 수치화한 것을 컴퓨터로 실제 구현할 수 있다. 그게 바로 가상현실이다. 가상현실에서는 만물의 모든 걸 구현할 수 있다. 현실이 굉장히 복잡하기 때문에 현재는 세부적인 것까지 모두 구현할 수는 없지만 미래에는 가능할 것이다. 인간의 자아까지도 구현하여 가상의 세상에 자아를 이식하게 될 수도 있다. 만물을 수로 객관화할 수 있으니까 이런 것이 가능하다. 만물의 모든 것을 정확하게 가상현실로 구현할 수 있을 거란 예측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시뮬레이션 우주론이다. 현실과 같은 정교한 시뮬레이션을 만들 수 있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시뮬레이션일지도 모른다. 이치만 따지면 충분히 가능한 가설이다. 물론 진리는 아니다. 아는 것도 적고 증명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진정 세상의 존재이유를 알기 위해서면 우주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모아야 한다. 보다 많은 재료가 있어야 사유를 통해 추론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주진출과 우주진출에 필요한 인류의 진화와 우주선의 기술 발달이 필요할 것이다. 인류와 우주선이 영원에 가까울 정도로 존재할 수 있어야 영원에 가까울 정도로 커다란 우주에 진출할 수 있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수학을 배우는 이유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수학은 만물을 객관화하기 위해 배운다. 만물을 객관화한 수학은 영원진리에 가까운 진리다. 세상의 존재이유는 모르기에 영원진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진리인 것은 분명하다. 수학으로 인류의 문명은 진리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언어가 그러하듯 문명은 인식을 공유할 수 있어야 체계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물리학과 화학과 생물학과 지구과학이나 컴퓨터공학과 의학과 건축학 등 많은 학문이 만물을 객관화한 수학을 쓰는 것으로 진리에 도달하여 체계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수학은 현대 문명의 중심이자 기둥이다. 수가 만물의 객관화라면 교육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단순히 수학이란 학문에서 수식을 암기하고 이해하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다른 학문과 연계하여 만물을 직접 수로 객관화하는 걸 해보면서 그에 필요한 수식을 배우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수학이란 만물을 객관화한 진리를 중심에 두고 다른 학문으로 퍼져나가야 한다. 그래야 수학의 필요성과 가치를 깨닫고 진지하게 배우게 된다. 이것이 바람직한 교육방법이라 생각한다. 수학과 과학은 영원진리에 가까운 진리다. 인문학도 진리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사상에 있어 수학과 과학은 진리를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인간의 감각과 감정과 욕구에 영향을 크게 끼치는 관념을 만드는 인류의 안내자인 사상가는 인간에게 길을 안내할 때 그런 나침반을 참고하며 안내해야 한다. 그래야 바른 길로 안내할 수 있다. 그렇다고 나침반만 보고 길을 안내할 수는 없다. 나침반은 방향만 가리킬 뿐이지 언덕과 늪지와 절벽 등의 장해물이나 고온과 저온과 폭우와 폭설 등의 기후나 연령과 성별과 지역과 역할 등의 관계는 모른다. 안내자는 나침반을 보면서 주변환경을 고려하며 길을 안내해야 한다. 나침반을 보지 않고 환경만 고려하며 길을 안내하면 잘못된 길을 갈 수가 있고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나침반만 보며 길을 안내하면 길을 걷기 어려워질 수 있다. 지금 한국 사회는 나침반을 무시하는 바람이 나타나는 문제가 많다. 동물은 성욕으로 이성과 성관계를 맺어 새끼를 낳고 기르며 종을 유지한다. 그것이 진리임에도 성을 죄악시함에 따라 성과 관련된 인간관계가 희소하게 되어 저출산이 나타나게 되었다. 누군가는 인간과 짐승을 직접 비교하며 원래 동물은 대부분 이성관계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어처구니가 없다. 인간의 비교대상은 인간이어야 한다. 프랑스에서는 청소년기에 이성교제 상대가 없으면 부모가 심각한 상황으로 여기며 자녀에게 문제가 있는지 확인한다고 한다. 대부분 이성과 교제하며 성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게 정상이다. 인간은 아이를 적게 낳는 동물이기에 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부분이 이성과 성관계를 맺어 아이를 낳아야 한다. 그럼에도 지금 한국은 성을 죄악시하여 이성관계는커녕 게임에 있는 작은 그림에도 야한 게 있으면 화를 내며 항의하는 상황이다. 이런 강박적인 주장을 용납한 이들은 본인들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똑똑히 기억하길 바란다. 누구나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지만 그걸 수동적으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 옳고 그름을 꼭 생각해야 한다. 화가 난다. 화를 내야 한다. 과거에도 성을 죄악시했지만 그 때에는 이성관계와 출산을 강요했기 때문에 출산율이 유지될 수 있었다. 진리를 무시하고 낡은 관념을 신앙처럼 여기며 성을 죄악시한 것이 한국을 죽음으로 내몰게 만든 것이다. 본인의 낡은 관념이 진리가 아님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성을 죄악시하며 비혼을 미화하는 정신 나간 인간을 기용하면서 저출산 대책을 하겠다고 지껄이는 것이 비정상임을 부디 알길 바란다. 성을 죄악시하지 말아야 한국이 살아남을 수 있다. 인간에게 성기능이 작동하는 순간부터 누구와도 성관계를 맺어도 된다. 그게 유전자가 말하는 진리다. 달리 말해 성기능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성적 관계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인간이 잡식인 이상 누구라도 잡식을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은 채식만으로 살 수 없는 동물이다. 그게 유전자가 말하는 진리다. 달리 말해 채식만으로 살 수 있게 진화한다면 채식이 진리가 된다. 인간에게 폭력성이 있는 이상 폭력성을 부정할 수 없다. 그게 유전자가 말하는 진리다. 폭력성은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성질이기 때문에 만약 폭력성이 없이 진화한다면 인류는 멸종해버릴 것이다. 길은 수학이나 과학이란 나침반을 보고 가야 올바르게 갈 수 있다. 그렇다고 나침반만 볼 수는 없다. 자유주의에 근거하여 모든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성관계와 채식과 폭력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합의하에 성관계를 맺고 합의하에 채식을 하며 합의하에 폭력을 쓴다. 폭력은 스포츠가 타당할 것이다. 수도 마찬가지다. 눈 앞에 보이는 수만 볼 수는 없다. 수 자체는 객관적이나 주관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법안이 제정된 후 작년 대비 사망자의 수가 50% 줄어들었다고 홍보한다고 하자. 이 퍼센트만 보면 굉장히 훌륭한 법안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수로 보면 작년에 4명이 사망했고 올해 2명이 사망한 것으로 2명이 줄어든 것에 불과했다. 더구나 재작년에는 1명이 사망했으므로 올해 2명이 사망한 것을 고려하면 법안 제정 이후 사망자가 100% 늘어났다고 볼 수도 있다. 숫자를 일부만 공개하면 객관적 수치도 주관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전체를 봐야 한다. 모든 숫자를 보면 객관적이기에 틀리기가 어렵다. 퍼센트만 볼 것이 아니라 실제 수를 보고 작년만 볼 것이 아니라 10년 정도의 통계 그래프를 보면 진리를 가리키는 나침반은 정확할 것이다. 수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았다. 수를 사용하는 회계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겠는가? 회계란 개인이나 기업 따위의 경제 활동 상황을 일정한 계산 방법으로 기록하고 정보화하는 것. 또는 그 방법 사무나 그 담당자를 뜻한다. 수가 만물의 객관화라는 점을 고려하면 회계는 개인이나 기업 따위의 경제 활동 상황을 수로 객관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회계가 사회에서 맡은 역할은 경제를 수로 객관화하는 역할이다.

 

 

 

회계는 세 가지 방법으로 길을 제시해보겠다. 첫째는 친숙. 둘째는 설득. 셋째는 도덕이다.

 

첫째, 친숙. 회계는 개인이나 기업 따위의 경제 활동 상황을 일정한 계산 방법으로 기록하고 정보화하는 것을 뜻한다. 재무제표는 기업의 재무상태나 경영 성과 등을 보여주는 문서로 국제회계기준에 있는 기본 재무제표는 재무상태표, 포괄손익계산서, 자본변동표, 현금흐름표, 주석이 있다. 여러 개의 기업이 하나의 기업에 종속될 경우 지배기업에서는 종속된 모든 기업의 재무제표를 합쳐 연결재무제표를 만들고 있다. 회계는 현금 입출시기에 맞춘 현금주의와 손익 발생시기에 맞춘 발생주의가 있다. 자산매입과 매출채권을 고려하면 회사의 경제 활동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정보화할 수 있는 발생주의를 채택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야 재무제표 이용자인 투자자나 주주나 채권자가 보다 정확하게 회사의 경제 활동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가령 현금주의에서 토지와 자본재를 비용으로 보지만 발생주의에서는 자산으로 본다고 한다. 비용으로 본 현금주의 재무제표는 구매한 해에 비용이 손해로 적용하지만 자산으로 본 발생주의 재무제표는 감가상각을 써서 토지와 자본재의 가치가 낮아지는 만큼을 사용비로 계산해 그만큼만 손해로 적용한다. 1억에 산 자본재가 1년 뒤 되팔 때 9천만이라 가정하면 1천만이 사용비로 비용처리 된 셈이다. 이런 식으로 발생주의는 회사의 경제 활동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정확한 정보가 많은 투자를 부른다. 많은 기업이 투자로 경영되고 있음을 고려할 때 많은 투자야말로 경제활성화의 길이라 할 수 있다. 회계연구가 실질적으로 회계사의 입장에서 바라본 회계기술보다는 정보 이용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의사결정유용성을 중시한다는데 그 배경에는 이런 기업의 특성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많은 사람들이 투자를 결정할 것인가? 재무제표는 수로 경제 활동 상황을 객관화한 것으로 의도나 실수가 아닌 이상 정확할 것이다. 자산규모가 천억 원 이상의 기업들은 내부회계관리제도를 도입해 체계적으로 프로세스를 갖춰 비교적 정확한 상황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의미 있는 변화는 정확보다는 친숙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본다. 지금의 재무제표는 많은 사람들과 거리가 먼 상황이다. 복잡하고 알기가 어렵다. 친숙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걸 개선해야 한다.

 

수가 만물의 객관화라면 수를 다시 만물로 되돌리는 일을 할 수 있다. 건축물을 건축도면으로 바꿀 수 있고 건축도면을 건축물로 바꿀 수 있다. 그와 같이 회사를 재무제표로 바꿀 수 있고 재무제표를 회사로 바꿀 수 있다. 그렇다고 회사 자체를 보여줄 수는 없고 비슷하게는 할 수 있다. 건축물을 건축도면으로 바꾸고 건축도면을 건축모형으로 바꿀 수 있다. 그렇다면 회사를 재무제표로 바꾸고 재무제표를 회사모형으로 바꿀 수 있다. 생각해보자. 건축물을 구매할 때 건축도면을 보는 것이 친숙한가 아니면 건축모형을 보는 것이 친숙한가? 당연히 건축모형이다. 알기가 쉽다. 실제 세부적으로 어떤 식으로 건설되었는지는 건축도면을 보는 것이 좋지만 가볍게 보기에는 건축모형이 좋다. 그래서 많은 부동산이 모델하우스를 만들어 홍보를 하고 있다. 그와 같다. 회계가 정보 이용자들에게 친숙하게 되기 위해서는 회사모형을 만들면 된다. 회사의 경제 활동 상황을 그대로 모형화할 수는 없으므로 비유를 써야 한다. 그 비유에 적합한 것이 바로 미술이다. 그림으로 회사의 경제 활동 상황을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친숙하다. 정확한 것은 직접 들어가서 재무제표를 보면 된다. 알기 쉽게 비유하면 미리보기 그림인 썸네일이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재무제표를 그림화하여 접근성을 높여 많은 사람들이 회사의 경제 활동 상황을 보다 친숙하게 여기게 만드는 것으로 자연스러운 투자를 유도하여 경제를 활성화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림화를 할 것인가?

 

재무제표는 재무상태표, 포괄손익계산서, 자본변동표, 현금흐름표, 주석이 있다고 한다. 합명회사와 합자회사와 유한책임회사와 주식회사와 유한회사 모두가 만드는 재무상태표를 기본으로 해야 할 것이다. 실제 방법은 회계사와 화가가 협의하여 진행하는 것이 좋다 본다. 그래도 의견은 내겠다. 모든 기업의 재무제표를 따로 그릴 수는 없다. 많은 기업이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하고 다른 기준이 객관성을 상실하게 한다. 그러므로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재무제표의 수치를 그림의 일부로 표현하게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 본다. 수치를 기준으로 그림이 그려지게 되므로 모든 기업이 같은 기준으로 적용되게 된다. 재무제표도 수로 전부 표현할 수 없어 주석을 이용하는 만큼 수치를 기준으로 그려진 그림이 기업의 모든 것을 표현할 수는 없으나 원래 썸네일은 세세하게 전부 표현할 필요는 없다. 건축도면을 건축모형으로 만들어 보기 쉽게 만들듯이 재무제표를 회사그림화를 하여 보기 쉽게 만드는 것이다. 모든 회사를 같은 기준으로 그리게 할 수는 없다. 단조롭고 지루할뿐더러 구분 짓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분야마다 다르게 한다. 예컨대 농업이면 트랙터와 논을 중심으로 한 그림이 나오고 수산업이면 배와 바다를 중심으로 한 그림이 나오면 좋을 것이다. 그림 내용은 유동자산 양에 따라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수가 달라지고 비유동자산에 인간 외의 사물의 수나 크기나 질이 달라진다. 재무제표가 아무리 복잡해도 계산이 끝나면 이익 또는 손해로 결론지어지게 된다. 그걸 기준으로 그림을 그리면 된다고 본다. 아니면 주주나 채권자가 관심 있는 항목을 중심으로 그리면 된다고 본다. 요는 이런 것이다. 회사 상황이 좋지 못하면 피폐한 그림이 나오고 회사 상황이 좋으면 화려한 그림이 나온다. 항목에 따라 그림이 요소가 조금씩 달라질 수도 있다. 이런 그림을 보고 회사 상태를 직관적으로 파악한다. 재무상태표를 만들 때마다 그림이 달라지므로 시기마다 회사의 변화도 직관적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이 정교하고 아름답다면 그림을 출력하거나 다시 그려 회사에 걸어놓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현대미술은 이제 미가 아닌 의미가 되었다. 아름다운 것이 가치 있다기 보다 의미가 깃든 것이 가치 있는 것처럼 되고 있다. 의미란 굉장히 추상적이고 주관적이기에 그림으로 가치를 판단하기 어려워 화가의 유명세에 따라 그림의 가치가 달라지게 되었다. 때론 난해하여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대단하다 치켜세워지기도 하고 있다. 그림 자체의 미가 아닌 그림의 의미에서 미를 찾게 된 현대미술은 그림 자체의 미를 바라는 대중에 외면을 받고 투자자산이나 탈세도구로 폄하되고 있는 중이다. 수가 만물을 객관화한다면 미술은 만물을 주관화한다. 현대미술은 다시 한번 본질로 돌아가 그림 자체에서의 아름다움을 찾을 때가 온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림 자체의 아름다움으로는 경쟁상대도 많은 상황에서 수익을 얻기 어렵다는 편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미를 바라는 인간이 있는 이상 그림은 어디서나 필요하게 된다. 단지 선입견에 의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기 어려울 뿐이다. 위와 같이 재무제표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림이 친숙한 대중에게 재무제표의 그림화는 투자를 보다 더 대중적으로 만들 것이다.

 

기업에 대한 투자가 보다 대중적이게 되길 바란다. 부동산보다 기업에 투자되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국가의 입장에서 부동산에 과잉 투자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부동산 자체가 생산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토지는 자본재가 아니다. 국민의 입장에서도 실제 거주부동산과 별개의 투자 및 투기가 횡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거주 부동산을 소유하지 못한 이가 구매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경제 활동과 별개로 부동산의 가격이 오르면 부의 양극화가 심화되어 국가의 균형이 무너짐에 따라 국가의 쇠퇴와 파멸을 부르게 된다. 그에 따라 부동산이 아닌 자산에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재무제표의 그림화를 통해 기업의 경제 활동 상황을 보다 친숙하게 받아드릴 수 있다면 투자가 어렵다는 선입견에서 벗어나게 되어 투자가 늘어날 거라 생각한다.

 

 

둘째, 설득. 설득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깨우쳐 말하는 것을 뜻한다. 설득을 할 때 필요한 것은 인식 공유다. 서로가 같은 인식을 갖고 있어야 설득을 할 수 있다. 의견 차이를 좁히기 어렵다면 먼저 대상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지 파악할 필요가 있을 정도다. 그런 인식을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것에는 언어나 수가 있다. 특히 만물을 객관화하는 수는 언어가 달라도 같은 인식을 갖게 할 수 있어 설득할 때 큰 도움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재무제표는 정보 이용자의 의사결정에 유용하다. 재무제표는 기업 경제 활동 상황을 일정한 계산 방법으로 기록하고 정보화 것이다. 재무제표는 현재를 다룬다. 시간이 흐르면 다뤘던 재무제표는 과거가 된다. 회계는 경제를 수로 객관화하는 역할이다. 회계는 경제의 현재를 수로 객관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간단하다. 앞으로는 미래도 수로 객관화하면 된다. 기업 경제의 미래도 수로 객관화할 수 있다. 회계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경제를 수로 객관화하는 것이다. 수로 미래를 객관화하는 것으로 기업의 의사결정에 유용하게 쓰이게 한다.

 

아마 기업에서 통계나 빅데이터를 근거로 한 미래예측은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회계가 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실제 회계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회계 교육과정에 미래예측이 없는 걸 보았을 때 아마 없을 거라 생각한다. 회계가 만든 과거와 현재의 재무제표를 보고 정보 이용자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있어도 회계 자체에서 미래를 예측하여 만든 재무제표는 없는 것 같다. 회계는 경제의 현재를 수로 객관화한 전문가다. 경제의 미래도 수로 객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회계의 방식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다. 과거의 미래는 현재다. 흐르는 시간의 경제를 수로 객관화 해왔던 만큼 어떤 사업을 시도할 때 나타나는 경제 활동 상황을 계산해낼 수 있을 거라 본다. 예컨대 A 분야에 새롭게 진출한다 가정하자. 그 의사결정은 경영자가 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럴 때 그 분야의 성공이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계산하여 유추해볼 수는 있다. 사업에 진출했을 때 나타나는 자산과 부채와 손익 등을 계산해본다. 그렇게 계산된 미래의 재무제표가 경영자의 의사결정에 유용하게 쓰이고 주주와 채권자에게 설득도구로 쓰인다.

 

현실을 수로 객관화하여 수치화를 하고 수치를 기반으로 프로그래밍한 것이 가상현실 시뮬레이션이다. 미래의 경제 활동 상황을 수로 객관화하여 재무제표를 만들고 재무제표를 기반으로 미래의 경제 활동 상황을 시뮬레이션 해본다. 회사의 재무제표를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그대로 구현할 수 있다면 미래의 경제 활동 상황을 재무제표로 만든 것을 시뮬레이션 해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재무제표를 시뮬레이션 하여 실제 회사와 비슷한지 확인하고 미래 재무제표를 시뮬레이션 하여 실제 미래와 비슷한지 확인하며 발생하는 오차는 수정한다. 기존의 재무제표를 기반으로 한 시뮬레이션에서 새로운 사업이나 상품으로 바꿨을 때 어떤 식으로 변화하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새로운 사업이나 상품을 시장에 내보내기 전에 실험해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충분한 경험이 쌓이다 보면 보다 정확하게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친화가 회계와 미술의 결합이라면 설득은 회계와 컴퓨터공학의 결합이다.

 

 

셋째, 도덕. 개인의 주관적인 도덕성에 의존한 체계는 쓸모 없다. 회계란 주제와 옆의 문장은 최근 빈번한 횡령 사건을 보고 떠올렸다. 회계의 범죄와 그런 범죄가 나타나게 된 이유와 범죄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에 대해 알아보자. 회계의 범죄는 다양하다. 횡령과 배임과 분식회계에 대해 알아보자. 횡령은 국가나 남의 재물을 불법으로 차지하여 가지는 것을 뜻한다. 배임은 임무를 배반하는 것. 또는 임무의 본뜻에 어긋나는 것을 뜻한다. 특히 공무원이나 회사원 등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지위를 악용하여 소속 관청이나 회사에 재산상의 손해를 주는 일이라 한다. 횡령이 직접적으로 재산을 빼돌리는 것이라면 배임은 지위를 악용하여 사무처리 중 서류를 조작하는 등과 같은 행위를 통해 관청이나 회사에 간접적으로 재산상 손해를 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회계가 회사 경제의 객관화임을 고려했을 때 회계의 횡령과 배임은 객관화한 회사 경제 활동 상황을 잘게 쪼개 빼돌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회사의 경제 활동 상황이란 그림을 조각 내어 가져간 것이라 보면 된다. 그림 조각이 사라지면 멀쩡한 그림이 아니게 되듯 횡령과 배임을 하면 멀쩡한 회사가 아니게 된다. 거대한 기업에서 작은 횡령과 배임은 큰 타격이라 보기는 어렵지만, 그림의 작은 흠집이 그림을 흉하게 만들듯 회사의 작은 횡령과 배임도 회사를 흉하게 만든다. 분식회계는 경영 성과가 실제보다 좋아 보이도록 회계장부상 정보를 고의로 조작하는 행위를 뜻한다. 회계부정이나 회계사기로도 불린다고 한다. 분식회계는 가공매출이나 이중장부와 같은 다양한 방법으로 부당한 이익을 취하기 위해 회계장부를 고의로 조작하고 있다. 투자자들이 재무제표를 보고 투자를 결정하는 것을 미루어보았을 때 재무제표의 재료가 되는 회계장부를 고의로 조작하는 행위는 재무제표의 신용도를 낮춰 투자를 저해하는 것으로 경제를 위축시켜 경제 성장을 막는 중대한 범죄라 할 수 있다. 회계의 범죄인 횡령과 배임과 분식회계 등은 외부 회계감사를 통해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고 있다. 회계감사는 타인이 작성한 회계기록에 대하여 독립적 제삼자가 분석적으로 검토하여 그 적정 여부에 관한 의견을 표명하는 절차를 말한다고 한다. 그런데 외부 회계기준 감사가 까다로워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면 대부분 기업이 내부 회계 담당자의 도덕성에 맡기고 있다고 한다. 지금 회계는 개인의 주관적인 도덕성에 의존한 체계라는 것이다. 개인의 주관적인 도덕성에 의존한 체계는 쓸모 없다.

 

첫째, 정치를 생각해보자. 개인이 통치하는 왕이나 독재자는 개인의 주관적인 도덕성에 의존한 체제이기 때문에 잘못되었다. 통치자 개인의 주관적인 도덕성에 따라 국가의 부패가 결정된다. 왕이 올곧고 유능하면 융성하는 국가가 되고 왕이 삐뚤고 무능하면 쇠퇴하는 국가가 된다. 이런 정치체제는 개인의 주관에 맡겨 언제 어느 때에 파멸할지 몰라 불안정하여 쓸모가 없다. 현대에 이미 쓸모 없음이 증명되어 대부분의 선진국이 민주정을 채택하고 있는 중이다. 민주주의는 개인이 아닌 집단의 도덕성에 의존한 체제라 바람직하다. 투표권이라는 정치의 인사권을 국민에게 균등하게 나눠 대표를 선출하고 있다. 그에 따라 국민 모두의 주관적인 도덕성에 따라 국가의 부패가 결정된다. 국민 모두의 도덕성에 의존하여 개개인이 삐뚤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일정 이상이 올바르면 올바른 선택으로 융성하는 국가가 될 수 있다. 객관이란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타인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데, 응집되지 않은 타인의 시각은 단순한 타인의 주관에 불과하므로 다수의 공통된 인식이 보통 객관이라고 한다. 수가 만물의 객관화라 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수를 보고 공통된 인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집단의 주관적인 도덕성이 모여 하나로 응집되게 되는 선거는 객관적이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아름다운 이념 외에도 집단의 객관적인 도덕성에 의존한 체제이기 때문에 올바르다.

 

둘째, 경제를 생각해보자. 자본주의에서 반대하며 일어난 공산주의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주관적인 도덕성에 의존하고 있다. 경제를 시장에 맡기지 않고 계획적으로 운영하며 모두가 평등하게 생산하고 공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개개인의 도덕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얘기다. 모두가 평등하게 생산하고 공유하고 있는데 누군가 그걸 거부하며 보다 많은 이익을 얻고자 하면 파탄이 나버린다. 그렇기에 공산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부정해버릴 수밖에 없다. 돌출된 누군가에 의해 모두가 생산하고 공유하는 구조가 파탄 나버리면 사회가 붕괴하므로 그걸 강제로 막을 수 밖에 없게 된다. 강제와 강요. 즉 독재가 된다. 기본적으로 개인의 주관적인 도덕성에 의존하다 체제가 붕괴될 것 같으니까 강제로 똑같이 생산하고 공유하게끔 만드는 사상이 공산주의다. 쓸모가 없다. 반면 자본주의는 시장경제를 이용하여 돈이라는 집단의 객관적인 욕망에 의존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데 하나는 돈이라는 객관적인 욕망에 의존한 체제라는 것이고, 둘은 소비자의 행복을 위하는 도덕적인 체제라는 것이다. 시장경제는 수요와 공급이라는 구조 속에서 공정경쟁을 권장하고 독점을 경계하고 담합을 처벌하고 있다. 모두가 자유롭게 생산하고 수요에 선택 받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보다 많은 이익을 얻고자 한다면 수요에 선택 받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그렇게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고 있다. 돌출된 누군가가 있더라도 공정경쟁을 하고 있는 이상 사회가 붕괴되지 않으므로 강제할 필요가 없다. 자유. 즉 민주주의가 된다. 다수의 공급인 기업은 다수의 수요인 소비자에게 선택 받기 위해 구애하게 된다. 내 상품을 선택해줘. 내 서비스를 선택해줘. 그런 구애 경쟁 속에서 상품과 서비스의 품질은 올라가고, 높은 품질의 상품과 서비스를 누리는 소비자는 행복하게 된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조차 자본주의에서 경쟁으로 나타난 상품과 서비스의 품질이 더 높다는 것에는 이견을 내기 어려울 것이다. 간단하게 공산주의는 생산자의 행복을 위하고 자본주의는 소비자의 행복을 위하는 사상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자의 행복을 위하는 자본주의가 낫다. 체제 유지를 위한 강요로 인한 독재라는 점을 차지하더라도 경제가 성장하려면 자본주의가 적합하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행복을 위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상품과 서비스의 가치가 올라 국외 상품과 서비스 경쟁에서 승리하여 국가의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다. 단순 경제 성장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자본주의 국가라면 노동자에게도 충분한 부의 분배가 이루어질 수 있다. 상품과 서비스의 품질을 올려 소비자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상품을 생산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에게 타당한 임금이 지불되어야 한다. 당연한 이치다. 그렇지 못한 기업은 상품 품질 저하로 공급 경쟁에서 탈락하여 도태된다. 자연스럽게 노동자의 노동환경도 나아진다. 앞서 말한 것처럼 상품의 품질이 오르면 세계 상품 경쟁에서 승리하여 국가의 경제를 성장하게 할 수 있다. 정리하자. 소비자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상품과 서비스 품질이 오르고, 그런 고품질을 위해 노동자에게 타당한 부의 분배가 이루어지고, 고품질의 상품과 서비스는 세계 시장의 경쟁에서 승리하게 만들어 경제를 성장하게 한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부유해짐에 따라 그 부를 사회안정에 투자할 여유가 생기면서 사회 복지도 한층 나아질 수 있다. 사회 복지 또한 단순히 기업의 도덕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사회에 투자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주관적인 도덕성에 의존하지 않고 욕망을 위하더라도, 소비자에게 선택 받기 위해 소비자의 행복을 우선시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도덕적인 결과가 나오게 된다. 신자유주의는 사회주의와 같이 자본가 개인의 도덕성에 기대는 체제라고 본 적이 있다. 바람직하지 못하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가정하에 자본주의만으로도 충분히 도덕적일 수 있다. 자본주의는 소비자의 행복이란 아름다운 이념 외에도 집단의 객관적인 욕망에 의존한 체제이기 때문에 올바르다.

 

도태된 기업의 자본가나 노동자에 대한 구제는 기회의 평등을 통해 다시 한번 도전할 기회를 주는 것이 타당하다. 자본가의 경우 성공과 실패의 리턴과 리스크가 크기에 기회를 자주 주기 어렵지만 노동자는 크지 않기 때문에 자주 줄 수 있을 것이다. 정상적인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자본가가 많기 때문에 해고된 노동자가 복직을 요구하며 시위할 것이 아니라 다른 기업에 취업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지금 자본가를 길러내는 교육을 등한시하여 노동자 수요가 적기 때문에 이런 이들이 갈 곳을 잃고 시위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노동자 또한 변모를 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는 노동력이란 상품을 소유한 상인이다. 자본가가 상품의 품질에 신경 쓰듯 노동자도 상품의 품질에 신경 쓸 필요가 있다. 소비자가 상품 품질에 따라 항의하거나 구매하지 않는 것을 결정하듯 고용자도 상품 품질에 따라 항의하거나 구매하지 않을 수 있다. 정녕 노동자를 위해서라면 저질 상품을 양산하는 기업을 노동자를 위해서라며 억지로 살려둘 것이 아니라 빠르게 치우고 그 자리에 유능한 기업이 들어서게 해야 한다. 그러기만 해도 부당한 처우를 겪는 상당수의 기업은 사라질 것이다. 애초에 노동자에게 타당한 대우가 없으면 그만한 품질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본가의 상품과 다르게 노동자의 상품은 팔리지 않게 되면 당장 인간의 생존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이 때 발생하는 생계의 위험은 전면적으로 세금을 받는 국가의 책무다. 기업은 그런 점을 감안하여 노동의 유연화를 얻는 대신 그에 따른 책임비용을 국가에 세금으로 지불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자본주의가 올바름에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던 것은 한국이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라 유교 국가였었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행복과 무관한 것을 다 하지 않았던가? 정경유착과 담합과 독점을 하고 이윤만 추구하여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으로 상품과 서비스의 품질을 저하시켜오지 않았던가? 자본가도 경쟁을 하게 했어야 했는데 문제풀이만 전문적으로 해온 탓에 노동자를 길러내는 교육을 주로 해버리는 탓에 공무원이 되거나 자본가에 의존하는 인간으로 성장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창업자는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는 도전정신을 갖춰야 함에도 답이 없는 것에는 도전하지 못하게끔 교육되어버렸다. 더구나 장유유서에 의해 사회초년생은 전부 사원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낡은 관념으로 인해 제대로 도전하는 이가 드물었다. 최고의 교육기관에 나온 인간이 대기업 취업이 목적인 것이 정상이라 보이는가? 그들은 본래 대다수가 창업을 목적으로 했어야 했다. 창업자에 필요한 교육을 받지 못하자 국가가 창업자를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는 일이 잦게 되자 창업은 실패의 대명사가 되어 더욱 더 창업에 도전하는 이들이 드물게 되었다. 이러니까 성공한 창업자 수가 적은 것이다.

 

기부를 생각해보자. 지금의 기부는 대부분 기부단체에 속한 개인의 주관적인 도덕성에 의존한 체계를 갖추고 있다. 쓸모가 없다. 그러니까 기부단체에서 수도 없이 많은 비리와 횡령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선행이란 오래된 도덕관념에 의해 이타적인 마음으로 행하게 하곤 하는데, 본인의 이익이 아닌 타인의 이익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기부단체에서 선행을 하게 되자, 타인을 위해 일했으므로 본인의 이익을 취하지 못한 만큼 본인의 이익을 챙기려 하게 된다. 만약 이기적인 마음으로 선행을 행했다면 선행 자체가 본인의 이익이기 때문에 본인의 이익을 따로 챙기려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부단체는 기본적으로 타인을 돕는 것에 만족감을 느껴 이기적인 선행이 가능한 사람만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그걸 알 방법이 없다. 수단으로 타인을 돕는 것인지 목적으로 타인을 돕는 것인지 알 방법이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개인의 주관적인 도덕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쓸모가 없다. 그러므로 기부단체는 모든 걸 투명하게 공개하던가 아니면 국가가 주관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애초에 기부는 시장경제에 속한 것이 아니므로 국가의 복지에 속하는 것이 오히려 보다 역할에 충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세금을 받는 국가가 국민의 복지와 안녕을 민간 단체에 떠넘기는 것은 낡고 잘못된 악습에 불과하다 본다. 정치가 그러하듯, 경제가 그러하듯, 기부 또한 개인의 주관적인 도덕성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집단의 객관적인 도덕성에 의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회계에서 범죄가 잦은 까닭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돈에 대한 잘못된 관념이고 둘은 개인의 주관적인 도덕성에 의존한 체계다. 한국이 유독 사기범죄가 많은 까닭은 어려서부터 돈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매해 주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명절이 되면 연상에게 무릎 꿇고 바닥에 머리를 박은 뒤에 돈을 받는 세배라는 풍습을 권장하고 있다. 연상에게 돈을 받기 위해서 석고대죄와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가르쳐 왔단 것이다. 그런 행위가 학습되어 돈을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괜히 한국에서 사기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아기 때부터 집요할 정도로 돈에 집착하게끔 교육해왔으니 당연한 결과다. 돈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으니 횡령이나 배임을 하는데 거리낌이 없이 해버리게 된다. 그런 잘못된 관념과 개인의 주관적인 도덕성에 의존한 체계가 합쳐진다고 해보자. 횡령과 배임이 많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돈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차치하더라도 회계가 바람직하게 되기 위해서는 회계의 체계를 담당자의 주관적인 도덕성에 맡겨서는 안 된다. 설령 다수가 돈에 대한 올바른 관념이 있더라도 누군가는 잘못된 관념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도덕성에 맡기는 체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외부 회계감사 대상을 늘리는 것과 대부분 기업이 회계부서와 자금부서를 철저하게 분리하는 것이 일반적인 대책이 될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본다. 암호화된 외부회계관리제도가 필요하다. 지금 내부회계관리제도는 천억 원 이상의 기업들이 쓰고 있다고 하는데 그걸 모든 기업이 쓸 수 있도록 체계를 갖추는 것아 바람직하다 본다. 작은 기업이 내부회계관리제도를 쓸 정도로 여유가 없을 수 있으므로 외부에서 지원 가능한 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재무제표는 외부에 공개되므로 공개되더라도 상관 없을 수 있으나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공개하기 꺼려할 확률이 높으므로 암호화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자금 관련 결정권자도 늘려 가능한 개인의 주관적인 도덕성에 의존하지 않는 구조가 필요하다. 주기적으로 자금 관련 결정권자도 달라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가령 결정권 가능자가 총 5명이 있다면 그 중 3명이 매주 또는 매달 같이 주기 마다 무작위로 결정권자가 되게 한다. 결정권자들이 서로 짜고 범죄를 저지를 수 있으므로 결정권자 중 한 명은 외부 인원으로 지정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주관적인 도덕성에 의존한 체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을 하게 되면 횡령과 배임 같은 범죄를 줄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기업이 암호화된 외부회계관리제도를 사용하면 외부 회계감사도 보다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수는 만물의 객관화다. 회계는 수를 이용하는 분야다. 수를 이용하여 재무제표를 만드는 회계는 기업의 경제 활동 상황을 수로 객관화하고 있다. 기업의 경제 활동 상황을 수로 객관화하고 있다면 그 수를 다시 기업의 경제 활동 상황으로 되돌리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그것으로 기업의 그림화가 나오게 되었다. 재무제표는 현재의 기업의 경제 활동 상황을 기록하여 정보화한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과거와 현재는 지금 기록하고 있다. 회계는 회사의 경제를 수로 객관화하는 역할이다. 그렇다면 과거와 현재뿐만이 아니라 미래도 수로 객관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시뮬레이션 게임을 이용해 수로 객관화한 미래의 재무제표를 시뮬레이션 하는 것으로 미래를 보다 정확하게 예측해볼 수 있다. 이것으로 미래의 재무제표의 시뮬레이션화가 나왔다. 개인의 주관적인 도덕성에 의존한 체계는 쓸모 없다는 것은 수는 만물의 객관화라는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닌 평소 생각에서 나온 것 같다. 그 평소 생각에서 회계 또한 개인의 주관적인 도덕성에 의존한 체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암호화된 외부회계관리제도와 자금 관련 결정권자의 무작위 및 일부 외부 인원 포함을 떠올렸다. 이것이 대략적인 생각의 흐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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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여자는 남자의 도구였습니다. 여자는 정조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결혼 전에 외간남자와의 관계가 단절되었지요. 정조를 지키기 위해 여자는 노출과 다른 남자와의 접촉이 엄격하게 금지되게 되었습니다. 결혼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절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지요. 여자가 자발적으로 처녀성과 정절 지키기 하기 위해 남자들이 성적 수치심을 세뇌시켰습니다. 노출을 하거나 다른 남자와 접촉을 하면 죄악감 속에 불쾌감을 느끼게끔 세뇌했지요. 여자는 남자의 도구로 쓰이기 위해 노출이나 접촉이 금지되고 그에 따른 과도한 성적 수치심을 갖게 된 겁니다. 여성은 이런 관념을 가지고 있었어요. 여성인권이 오르자 더 이상 남성의 도구로 쓰이지 않게 되었지만 노출이나 접촉이 금지되거나 성적 수치심을 강하게 느끼는 관념은 남아 성 자체를 죄악시하는 풍습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본인이 느끼는 감각을 근거로 성인지감수성을 주장하며 신세대 여성에게까지 노출이나 접촉을 금하고 과도한 성적 수치심을 세뇌했습니다. 그게 바로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 세뇌입니다. 그리고 그걸 사회가 수용하도록 강요했지요. 그러면서 성을 죄악시하는 관념이 늘어나면서 더욱 더 이성관계는 파괴됩니다. 성년과 미성년의 성관계를 죄악시하자 미성년과 미성년의 성관계도 죄악시되고 성을 죄악시하는 관념이 학습되자 성년이 되어도 이성관계를 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그러자 결혼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그러자 출산하는 사람도 줄어들고, 그러자 국가가 죽어가게 된 겁니다. 정말 멍청한 죽음입니다.

 

여성을 위한 거다 아이들을 위한 거다 인권을 위해서다 단 한번도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고 낡은 관념에 세뇌되어 앵무새처럼 내뱉은 얄팍한 주장을 할 바에 좀 더 생각하십시오. 화가 납니다. 당신들이 이권을 위해 떠드는 것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딴 것은 국가 생존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아요. 정말 멍청하고 반민주적인 결과의 평등을 위한 가산점과 할당제도 국가 생존까지는 위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낡은 관념으로 성을 죄악시하는 것 좀 그만하십시오. 인간을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도대체 인간이 뭔지는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낡아빠진 유교 사상에 물든 동북아 출산율이 왜 이따위인지 좀 이해 좀 하십시오. 한국 10 20대 다수가 이성관계가 단절되고 30대 혼인율이 절반을 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을 직시하십시오. 이성의 동성애물이 양지로 진출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상황인지 인지하십시오. 이성애가 발달했으면 그런 문화가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개인의 자유는 존중하나 그런 현상이 나타난 이유는 파악해야 합니다. 가장 최악의 잘못을 저질러놓고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되려 화를 내며 더욱 더 성을 죄악시하려는 태도를 보면 볼수록 계속 지적하며 언급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정말 답답합니다. 나는 유전자를 진리로 봅니다. 남성 개체와 여성 개체가 만나 성관계를 맺으면 아이를 낳을 수도 있다. 이 도식 외엔 전부 관념에 불과합니다. 자유주의 국가임으로 자유주의에 근거하여 자유의지만 고려하면 되는 문젭니다. 모두가 자유롭게 성을 말하며 편하게 성에 관련된 말을 하고 편하게 성관계 맺는다고 사회질서가 무너지지도 않고 멸종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성의 성관계를 권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성애가 발달하여 서로가 사랑하고 결혼하고 애 낳아 종을 유지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겁니다. 낡은 관념에 세뇌되어 자유로운 성생활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성생활을 막고 성을 죄악시하는 것이 올바르다 느꼈을 겁니다. 그냥 외면하십시오. 괜찮습니다. 그냥 방치하는 것이 올바르니 모른 척하는 게 올바른 일을 하는 겁니다. 유교와 기독교를 근거로 한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을 명목으로 성을 죄악시하는 짓 좀 그만해야 합니다. 그게 악입니다. . 국가를 멸종시키려는 행동이 악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정당한 기준이나 절차 없이 과한 이익을 얻으면 악이라 할 수 있는데, 성을 죄악시하자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어떤 이익(물질이든 감정이든)을 얻는 것은 부당한 기준이나 절차로 얻는 과한 이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악입니다. 성인지감수성이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이라는 것 좀 깨달으십시오. 본인의 감각과 감정과 욕구를 모든 여성이 똑같은 감각과 감정과 욕구를 가질 거란 망상에서 벗어나십시오. 성적으로 자유로운 국가의 여성의 감각과 감정과 욕구가 본인과 다르다는 건 알 겁니다. 그건 또 문화의 차이로 넘어가려 하겠지요. 장난합니까? 나라마다 여성의 특성이 다른 것은 진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감각과 감정과 욕구는 관념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지고 관념은 진리가 아닙니다! 탈레반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여성인권을 옹호하겠다고 말만 그럴 듯 하게 하다가 다시 여성을 천대하고 있습니다. 그건 여성을 차별하는 관념에서 나타난 감각과 감정과 욕구를 진리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낡은 여성상에서 나타난 관념으로 만들어진 성인지감수성이 낡고 부패한 것이라는 걸 이해하십시오. 그런 낡은 관념을 진리라 여기며 주장하게 만든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 말곤 아무것도 없는 여성주의란 천박한 사상을 버리고 모든 인간의 행복을 위하길 바랍니다.

 

관념에 대한 이해가 좀 더 대중화되어야 합니다. 신분제 시대에서 자본주의를 받아드린 이들이 농노였던 노동자를 농노 취급했던 것은 노동자에 대한 관념이 농노였기 때문입니다. 노동자를 제외하면 자본주의는 지극히 인간을 행복하게 했어요. 노동자를 착취한 것은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기 보다 노동자를 농노라고 여기며 인간 대우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신분제의 관념이 문제였던 것이지요. 한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은 노비가 40%가량이었다고 하지요. 노비였던 노동자를 노비 취급하며 천대하고 착취했던 것은 자본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신분제의 관념이 문제였던 겁니다. 지금도 꼰대질과 갑질이 있는 것은 조선의 수직사회를 만든 관념을 물려받았기 때문이지요. 자본주의 때문이 아니라 낡은 관념 때문입니다. 노동자 착취의 본질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너무나도 아쉬운 일입니다. 조선의 수직사회를 만든 관념에서 벗어나야 노동자를 대등하게 여겨 노동자 착취가 사라지고 꼰대질이나 갑질도 사라지는 겁니다. 이제는 관념을 이해해야 합니다.

 

모든 학문은 진리를 근거로 해야 바른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많은 학문이 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수학이란 만물을 객관화한 진리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수학이 진리가 아니었다면 수학을 사용한 학문들에서 만들어진 물건들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었겠지요. 진리니까 작동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인문학도 이제는 진리를 근거로 해야 합니다. 본인이 어떤 감각과 감정과 욕구를 느꼈다고 그걸 진리라 여기며 거기에 사회를 맞추려 할 것이 아니라 과학이 증명한 명확한 진리를 근거로 사회를 올바르게 변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사회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 액정이 깨지면 며칠 우울하네요. 사실 다음에는 삼성이나 애플 걸 사려고 했는데 중고로 LG걸 샀습니다. 가격 대비 품질이 만족스러워서요. 삼성이나 애플은 다음 세대에서 고려해야겠네요.

 

회계관련 회사를 아는 게 없어서 검색해서 적당히 썼습니다. 별 의미는 없습니다. 다소 우울해서 글이 늦었네요. 다음은 관광이나 복지입니다. 언제 쓸지는 모르겠습니다. 역할주의 쓰고 나서 사상가입내 말하고 싶었는데 생각할 분야가 많네요. 역할주의가 공정하고 자유롭고 평등하며 민주적인 사상 같은데그걸 모두에게 인정받으려면 노력해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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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정부와 인사 (2) 2022/03/21 AM 06:26

정부와 인사

 

 

 

사회는 평가로 조직된다.

 

사회는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의 조직화된 집단생활의 총칭을 뜻한다. 가족과 회사와 국가 등은 그 주요 형태라 한다. 평가는 가치나 수준을 평하는 것을 뜻한다. 평하다는 시비와 선악과 우열 등을 논하는 것이라 한다. 조직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많은 개인 및 여러 집단에 전문적이고 분화된 역할을 부여하고, 그 활동을 통합하고 조정하도록 구성한 집단을 뜻한다. 또는 그러한 집단을 구성하는 것이라 한다. 사전적 정의를 토대로 위의 문장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사회는 인간의 공동생활이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물의 가치나 수준을 다양한 관점으로 논하여 개인 및 집단에 역할을 부여하는 것을 통합하고 조정하는 것으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이 해석을 통해 인사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인사는 집단 내에서 인간의 지위와 직무와 능력 등에 관한 일을 뜻한다. 실제 업무는 채용, 승진, 좌천, 이동, 해고, 급여, 복지, 교육, 시험, 관리 등이 있다고 한다. 이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평가해야 한다. 인간 능력의 가치나 수준을 다양한 관점에서 논하여 채용과 승진과 좌천을 통해 역할을 부여하거나 해제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가족과 회사와 국가와 같이 대부분 집단에서 나타난다. 정리하면 인사가 맡은 사회의 역할은 사회를 평가로 조직하는 것이다.

 

평가가 사회를 조직한다. 정치에서의 선거, 경제에서의 가격, 노동에서의 인사, 교육에서의 성적, 문화에서의 평점 등. 인간이 사물을 평가하는 것으로 사회가 조직되고 있다. 평가가 사회의 핵심이다. 평가가 잘 되면 모든 분야가 활성화가 된다. 반면 평가가 잘못되면 모든 분야가 잘못된다. 정치에서 평가가 잘못되면 국가가 무너지고 경제에서 평가가 잘못되면 물가가 치솟고 노동에서 평가가 잘못되면 기업이 흔들리고 교육에서 평가가 잘못되면 관념이 비틀리고 문화에서 평가가 잘못되면 신용이 죽게 된다. 올바른 평가야말로 올바른 사회를 위한 길이라 할 수 있다. 올바른 사회를 위해서는 인사에 필요한 필수 능력인 평가는 비단 인사 분야만 가질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가져야 한다.

 

평가가 되면 손익이 생긴다. 선거의 등락이나 가격의 변동이나 인사의 판단이나 성적의 결과나 평점의 수치에 따라 다수의 사람들의 이익과 손해가 나타난다. 손익이 생기기에 평가에 예민해진다. 감정적이게 된다. 칭찬을 유쾌하게 여기는 까닭은 무엇인가? 긍정적 평가가 본인의 이익으로 이어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비난을 불쾌하게 여기는 까닭은 무엇인가? 부정적 평가가 본인의 손해로 이어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손익이 없는 평가에는 별 관심이 없다. 욕에 대해 생각해보자. 친밀한 관계에서 욕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때론 애정의 표현이기까지 하다. 여기서 욕은 보통 부정적 평가가 아니기에 손익에 영향이 없어 관심을 갖지 않는다. 어색한 관계에서 욕은 예민한 문제다. 때론 다툼까지 일어난다. 여기서 욕은 보통 부정적 평가이기에 손익에 영향이 있어 관심을 갖게 된다. 본인이 대상이 아닌 욕설에도 불편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그건 학습 또는 세뇌에 따른 불편함이다. 그런 불편함은 평가와는 관계가 없다. 외국어 욕설에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학습이나 세뇌가 없었던 욕이기 때문이다. 평가는 손익을 부르고 손익이 감정을 일으킨다. 평가에 손익이 없으면 감정도 일으키지 않는다. 손익을 부르는 평가는 감정적 충돌도 만드는 매우 민감하고 중요하다. 이런 평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정치에서의 선거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은 민주주의 체제다. 민주주의란 국민이 권력을 가짐과 동시에 스스로 권리를 행사하는 정치 형태를 뜻한다. 보편적인 자유국가의 민주주의는 간접 민주주의로 입법과 행정의 정치가를 선출하는 선거권을 국민들에게 균등하게 나누는 것을 말한다. 국민이 정치가를 선출할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후보자 토론은 면접이 되고 투표는 인사권자들의 다수결로 채용하는 것이 된다. 국민이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는 것은 인사권자가 인사권을 행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인사권자가 인사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회사가 무너지듯 국민이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국가가 무너진다. 평가도 마찬가지다. 인사권자가 올바른 평가를 하거나 받아드리지 않으면 회사가 무너지듯 국민이 올바른 평가를 하거나 받아드리지 않으면 국가가 무너진다. 국민의 올바른 평가가 있어야 국가가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지금 올바른 평가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선동정치. 선동을 당하는 사람이 지나치게 많다. 정당의 손익만 보고 투표권을 행사하는 사람이 많다. 이는 단순히 그들을 탓해서는 안 된다. 낡은 정치 체제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한국은 지역 대표에게 정치권력을 주는 토지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지역 대표를 선출하기 때문에 지역의 부동산과 연관된 공약이 많이 나온다. 대부분 공약이 신도시 개발과 공공기관이나 공장의 건설 등과 같이 토지 소유자의 직접적인 이익에 해당한다. 그런데 한국은 개인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자본주의를 채택하여 국민 10%가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즉 지역 대표가 내놓은 대부분 공약은 토지 소유자인 국민 10%의 손익에 주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이외 국민 90%는 정치가의 공약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국민 대부분이 손익이 없는 평가로 투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인간은 손익이 없는 평가에 관심이 없다는 걸 상기하자. 국민이 선동을 당했던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손익이 없으니까 평가에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으니까 선동 당한 걸로 대충 평가한다. 대충 평가한 걸로 대충 투표한다. 이러니까 특정 지역에 몰표가 나오는 것이다. 이런 걸 회사의 인사권자가 했다고 가정해보자. 회사의 인사권자가 선동을 당해서 잘못된 인사권을 행사해 회사에 해를 끼쳤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보통 회사의 인사권자는 대표나 임원으로 직접적인 이익과 관련될 확률이 높으므로 정성적으로 평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국가의 인사권자인 국민은 직접적인 이익과 관련될 확률이 낮으므로 대충 평가하기 마련이다. 이게 바로 지금 현재 자본주의 국가에서 토지 민주주의가 부르는 국가 성장을 방해하는 끔찍한 현상이다. 이는 제정주의에서 민주주의로 발전할 때 형태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만들기 보다는 과거의 것을 민주적으로 바꾸려는 시도 끝에 나타난 것이다. 과거 제정의 영주가 현재 민주정의 지역 대표가 되고 과거 귀족 집단이 현재 민주정의 정당이 되었다. 형태는 달라진 것이 없다. 행정권은 지역의 행정이 필요하므로 그렇다 치자. 입법권마저 지역 대표에게 주었던 것은 그저 단순히 과거 통치 형태를 답습한 것일 뿐이다. 진정한 정치개혁은 과거의 형태에서 벗어나 투표권자의 실질적 손익과 연관되어야 한다. 지역의 대표는 지역의 이익을 위해야 하기 때문에 부동산 공약이 나올 수밖에 없다. 반면 분야의 대표는 분야의 이익을 위해야 하기 때문에 입법 공약이 나올 수 있다. 소방관 처우 문제, 택배 파업, 간호조무사 천대, 가사도우미 홀대 등 만약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었다면 이들의 문제는 이들의 대표가 내놓은 입법을 통해 진작에 해결했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모든 산업이 산업의 발전을 위한 입법을 하게 된다. 시대의 발전에 발맞춰 빠른 입법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국가의 이익을 해치는 산업의 발전을 위한 입법을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할 수도 있다. 하나 입법은 다수결로 결정된다. 국가의 이익에 해당하는 산업의 발전을 위한 입법만이 통과될 것이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국가 발전에 큰 이바지를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분야의 대표에게 입법권을 주는 역할주의가 바로 진정한 정치개혁이라 주장하겠다. 회사의 인사권자가 사람을 제대로 평가해야 회사가 성장한다는 것과 같이 국가의 인사권자가 사람을 제대로 평가해야 국가가 성장할 수 있다. 국가의 성장을 위한 정치개혁을 부디 심사숙고 해주길 간절히 바라겠다.

 

경제에서의 가격에 대해 알아보자. 자본주의란 생산 수단을 자본으로서 소유하는 자본가가 이윤 획득을 목적으로 하여, 노동력밖에 팔 것이 없는 노동자로부터 노동력을 상품으로 사들여 상품 생산을 하는 경제 체제를 뜻한다. 재화의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고 상품이나 서비스의 가격과 투자와 분배 등이 시장경제에서 이루어진다. 시장경제는 분업에 의해 생산된 재화와 용역을 자유 가격 체제의 수요와 공급 관계에 의해 분배하는 사회구성체라고 한다. 생필품을 제외하면 대부분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결정된다. 수요는 평가로 결정된다. 다수가 가치와 수준이 높다 평한 것은 수요가 높아 점점 가격이 오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수요가 낮아 가격이 내린다. 팔리니까 오르고 안 팔리니까 내린다. 이런 평가가 잘못되면 물가가 치솟는다. 다수의 평가를 예측하여 사물의 가치와 수준을 제대로 평하지 못하면 초과생산으로 자원이 낭비되거나 미만생산으로 물가가 오를 수 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자연재해로 미만생산 된 작물의 가치가 오르자 너도나도 생산하여 초과생산 되는 바람에 가치가 내려 소비되지 않는 작물은 그대로 버려지기도 한다. 이런 예도 있다. 한국에서 우유는 공급은 그대로인데 수요는 줄어들고 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우유의 가격이 내려야 하는데 원유가격연동제에 의해 우유 가격을 유지하지 위해 초과생산 된 우유를 땅에 버리고 있다. 자원낭비다. 최대한 정확히 평가하여 우유의 생산을 조절하거나 우유의 가격을 내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와 같이 정확한 평가가 있어야 효율적인 자원분배가 가능할 것이다. 사회구성원이 만족할 만큼의 분배는 올바른 평가가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강자에 의한 지배체계를 구축하는 약육강식의 체제라며 비판을 받고 있다. 시장경제는 사유재산권과 경제 활동의 자유와 사적 이익의 추구를 보장하므로 시장경제에 속한 기업은 이윤을 위해서만 일한다고 여겨지는 일이 많다. 그에 따라 보다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노동자 착취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으로 반자본주의를 외치며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의 장점을 망각한 실수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수요와 공급으로 가격이 결정된다. 공급이 늘면 경쟁이 생겨 상품과 서비스의 품질이 오르고 가격이 내린다.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할 수 있으므로 자유로운 공급 경쟁이 일어난다.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소비자가 이익을 얻게 된다. 현재 대부분의 기업은 소비자에게 구애하고 있다. 내 상품을 사랑해줘. 내 서비스를 사랑해줘. 이런 걸 보면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논리적으로 소비자의 행복이 이념이 된다. 이윤을 얻기 위해 사람들에게 필요한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필요한 상품을 파는 것으로 이윤을 얻는다. 자본주의는 목적과 수단을 바꾸는 것만으로 도덕적 이념을 얻을 수 있다. 국가 행복과 성장을 보았을 때도 이익이 크다. 기업이 경쟁하면 국내 소비자는 높은 상품과 서비스 품질로 행복하고, 국내 기업은 높은 상품과 서비스 품질로 국외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국가가 행복하고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게 된다. 자본주의가 소비자의 행복을 이념으로 삼으면 자연스럽게 노동자 문제도 해결된다. 상품을 생산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에게 타당한 부의 분배가 없으면 상품과 서비스의 품질이 저하된다. 공장 노동자 급여가 낮으면 상품 품질이 낮아지고 호텔 노동자 급여가 낮으면 서비스 품질이 낮아진다. 그런 기업은 도태되고 타당한 부의 분배를 하여 상품과 서비스 품질이 높은 기업이 성장한다. 당연한 이치다. 소비자의 행복이 이념이라면 올바른 부의 분배가 가능해진다. 소비자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 자본주의의 미덕은 공정과 경쟁이며 악덕은 불공정과 담합과 독점이다. 그럼에도 대다수 국가가 그러지 못했던 것은 온전한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시기 신분제의 관념을 갖고 있었던 이들이 노동자를 농노 취급했기 때문에 노동자 착취가 나타났던 것이다. 인간은 기초적인 관념에 의해 대부분의 감각과 감정과 욕구의 방향이 결정된다. 그걸 알고 있다면 한국의 문제도 알 수 있다. 한국이 수직사회인 까닭은 조선이 수직사회였기 때문이다. 수직사회인 조선의 관념을 그대로 이어받으니까 한국도 수직사회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본가를 길러내는 교육을 하지 못했다. 정상적인 자본주의 국가였다면 자본가를 길러내는 교육을 했어야 함이 마땅했다. 우수한 평가능력으로 올바른 인사능력과 정확한 수요예측능력과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는 타당한 부의 분배로 상품과 서비스의 품질을 올려 국내 소비자를 행복하게 하고 국외 상품경쟁에서 승리하여 정당하게 높은 이윤을 얻는 것으로 기업을 운영할 수 있는 이가 경쟁에서 살아남아 자본가가 되었어야 했다. 그럼에도 한국은 장유유서로 인해 사회초년생은 무조건 사원부터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 자본가라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만 갖춰지면 누구라도 해야 한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가용 교육을 하지 않고 노동자용 교육으로 노동자만 길러내니 수요와 공급에 의해 일자리가 줄어들어 노동자의 가치가 낮아지는 바람에 경제참여비율이 낮아졌던 것이다. 배달 수요가 높아지자 배달료가 늘었다는 걸 생각해보자. 수요와 공급을 고려했을 때 자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자는 자본가를 해야 한다. 정부가 창업자를 아무리 지원해도 국민이 창업에 필요한 능력을 배우지 못하면 시도조차도 못한다. 시도하는 사람도 능력이 없어 실패만 하기에 창업은 실패의 대명사가 되어 대다수가 창업을 꺼리고 안정적인 취업만 노렸다. 잘못된 관념으로 잘못된 교육을 하니 잘못된 결과가 나온다. 한국에서 나타난 꼰대질과 갑질이나 부의 분배 실패나 족벌기업은 자본주의 보다는 조선의 관념이 원인이다. 이처럼 관념이 중요하다. 각각의 사람은 다른 욕망을 가질 수 있지만 자본주의는 인간을 행복하게 할수록 부를 얻을 수 있는 체제다라는 관념이 자리잡게 된다면 본인의 욕망을 위해서라도 인간을 행복하게 하려고 할 것이므로 앞으로 자본주의는 인류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상이 될 것이다.

 

미국은 중국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받아드리면 자유로워질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중국은 자유로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의 경제와 사회와 문화에 침투하며 미국을 지배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중국은 자본주의를 중화사상에 영향을 받은 지배욕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삼았다. 착잡한 일이다. 대부분 인류는 아직도 규율을 강요하던 종교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규율을 강요하는 것이 인류의 보수고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인류의 진보다. 미국이 위대한 것은 그들이 진보적인 자유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진보적인 사상이 인류를 발전시켰다. 만약 진보적인 사상이 인류를 퇴보시킨다면 그건 실제 진보가 아니라 퇴보사상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가 진보라고 아무리 떠든들 그 근본 구조가 종교와 마찬가지로 규율 중시인 이상 결코 진보가 될 수 없다. 그건 그냥 퇴보다. 미국이 진정 인류가 자유롭길 바란다면 세계에 단순히 시장경제 체제를 집어넣기 보다는 자유주의 관념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부를 얻은 사람은 혼란이 이익이 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인류가 합심하여 인류를 진화시키는 것이 더 큰 이익이 될 거라 생각하지 않는가? 아무리 부가 많아도 수명이 끝나면 무슨 의미인가? 전 우주에 인류를 퍼트리고 영원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우주로 진출하려면 노화와 수명의 한계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므로 자잘한 이해관계는 제쳐두고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인류 모두가 효율적인 체제 안에서 진화를 해야 한다고 본다. 나는 모든 인간의 욕망을 긍정한다. 모든 욕망은 어떤 잘못된 결과가 나올 수 있더라도 무조건 막을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안내해야 한다. 진리를 알고 싶으면 진리를 알기 위해 올바른 방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노동에서의 인사에 대해 알아보자. 노동이란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 및 정신적 노력을 기울이는 행위를 뜻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을 판매하거나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으로 화폐를 얻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고 있다. 노동력은 노동자에게 귀속된 힘이기에 노동력을 구매하려면 노동자를 고용해야 한다. 노동자에서 노동력을 때낼 수 없고 노동자를 구매할 수가 없기 때문에 노동력은 자연스럽게 소유자인 노동자에게 빌리는 형태로 구매하게 된다. 노동자는 본인의 노동력이란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이고 자본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이니 서로가 대등한 관계를 구축하고 공정한 거래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부당한 노동환경은 노동착취가 아닌 불공정거래다. 인사는 노동력을 평가하여 채용과 승진과 좌천 또는 임금과 복지 등을 결정하는데, 노동력이 노동자에게 귀속되어 있기 때문에 능력만이 아니라 성격 또한 평가를 하게 된다. 능력이 우수해도 성격이 좋지 못하면 집단 내 불화를 일으키거나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이런 건 능력과 별개다. 노동에서 평가가 잘못되면 고용한 측이 흔들리거나 무너진다. 성격을 생각해보자. 실제 능력과 별개로 도벽을 가진 사람에게 은행업무를 맡기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능력을 생각해보자. 실제 성격과 별개로 수전증이 있는 사람에게 서빙을 맡기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이처럼 노동력을 평가할 때에는 역할에 맞는 성격과 능력을 둘 다 평가해야 한다.

 

역할에 맞는 성격과 능력이 필요하다. 역할주의는 역할로 평가하는 걸 말한다. 인간의 경우 역할에 맞는 성격과 능력만 있으면 누구라도 역할을 맡을 자격이 있으며 역할을 수행하기만 하면 누구라도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다. 물건의 경우 용도에 맞는 모양과 성능만 있으면 무엇이라도 쓸모가 있으며 용도에 맞게 쓸 수 있으면 무엇이라도 가치가 있다. 어린이라도 바둑으로 어른과 경쟁할 수 있고 어른이라도 어린이가 즐기는 창작물을 만들 수 있다. 남성이라도 가사를 할 수 있고 여성이라도 국방을 할 수 있다. 시간을 보는데 시계가 만원이든 천 만원이든 상관이 없고 모닥불을 피우는데 폐보단 잘 타는 나뭇가지가 가치가 있다. 각각의 역할은 사회에 필요한 것으로 결정된다. 사회는 인간의 공동생활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므로 사회에서 부여하는 역할은 인간의 공동생활을 위해 존재한다. 사회는 이념에 따라 생활방식이 달라지는데 자유국가는 자유주의 이념에 맞춘 역할을 부여한다. 이렇게 역할로 평가하는 것이 역할주의다. 능력주의는 능력에 대한 기준이 없어 주관에 따라 역할과 관계없는 능력을 기준으로 평가하기도 하기에 객관적이거나 합리적이지 못하다. 이런 역할주의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기본적인 것이지만 낡은 관념에 의해 이런 것조차 잘 지켜지지 않는 일이 잦다. 몇 가지 생각나는 걸 써보도록 하겠다. 성격으로 보자. 보통 역할에 맞지 않는 성격은 성별이나 범죄가 주를 이룬다. 예전에 남성인 A 정치가가 여성인 B 정치가에게 말을 걸기 위해 어깨를 두드렸다. B 정치가는 그 작은 접촉에 무척이나 화를 내었고 그게 뉴스에 나온 적이 있다. 정치가의 성향이나 능력 또는 뉴스의 의도는 제쳐두고 크게 실망했다. 어떻게 국민의 대표라는 사람이 저렇게까지 나약할 수 있는가? 고작 어깨를 두드린 것만으로 그렇게까지 화를 낼만한 사안인가? 과도한 성적 수치심 또는 지나치게 민감해서 그런 거라면 정중하고 품위 있게 대처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작은 신체적 접촉만으로도 큰 불편함을 느끼고 있으니 추후에는 가능한 접촉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말도 못하는가? 그렇게 감성적이어서 어떻게 국가대사를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A 정치가가 남성이고 B 정치가가 여성이기 때문에 신체적 접촉에 화를 내는 것은 여성의 성적 수치심에 근거해 있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게 남성은 주방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식의 가부장제 세계관의 사고방식과 다르지 않다. 어째서 여성은 과도한 성적 수치심을 가져야 하고 남성은 여성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조차 잘못되었다며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그런 관념이 잘못되었다. 역할주의는 성별로 평가하지 않고 역할로 평가한다. 국민이 정치가란 역할에 맞지 않는 성격을 보고 화를 내는 것이 이상하다 여겨지는가? 예전에 층간소음 흉기난동이 발생했을 때 경력자인 남경은 방관하고 신입인 여경은 도주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장유유서에 따른 경력자의 나태함과 성별로 평가를 다르게 한 경찰의 잘못된 채용방식과 교육방식과 코로나 사태에 따른 교육미비 등의 문제가 있었기에 일어났다. 안전한 도시라도 범죄가 일어나듯 꼼꼼하게 대처해도 이런 사건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다. 약한 의지 때문에 도주한 여경이 여성이기 때문에 무조건 옹호하는 경찰이 있거나 경찰도 사람이라며 시민의 위험을 보고 도주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익명의 경찰의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자는 뉴스에 나온 것이기에 확실하지만 후자는 블라인드에 올라온 것이기에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경찰이 경찰 역할을 하지 못했음에도 옹호하는 여론이 있었다는 것이다. 충격적이었다.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면 다른 역할을 맡으면 된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다. 왜 하지도 못하는 걸 하려고 하는가? 최소한의 역할수행도 하지 못하는 걸 어떻게 비판하지 않을 수 있는가? 성격에 의해 비리나 횡령 같은 범죄가 일어나기도 한다. 심각성은 분명 성별보다 범죄 쪽이 크다. 그러나 성별은 성별을 핑계로 역할에 맞지 않는 성격을 정당화한다는 점이 문제다. 여성이니까 성적 수치심이 강한 것이 당연하다. 여성이니까 의지가 약한 것이 당연하다. 전형적인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을 근거로 역할수행 실패를 정당화하고 있다. 남성은 그 동안 여성은 집안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은 그 동안 여성은 보호받고 혜택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이런 것이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이다. 남성은 여성인권이 오르자 그런 고정관념을 버리고 여성의 사회진출을 받아드렸다. 여성도 여성인권이 오른 지금 그런 고정관념을 버리고 대등한 관계에서 과잉 보호나 혜택에서 벗어나 평등한 관계를 받아드려야 할 것이다. 정녕 여성인권을 주장할거면 유전자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여성을 차별하던 낡은 관념을 유지한 상태에서 인권을 주장하니 바보 같은 짓을 되풀이하고 있다. 능력으로 보자. 보통 역할에 맞지 않는 능력은 혈연이나 인맥이 주를 이룬다. 혈연이나 인맥이라고 역할 수행도 할 수 없는 인간을 대려다 고용하는 일이 있다. 특히 한국은 가족주의에 근거한 족벌기업이 많기 때문에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친인척 대려다가 일감 맡기고 일을 못하니까 수익을 위해 노동자를 착취하거나 해고하는 일이 있다. 끔찍한 일이다. 노동자 착취는 단순히 자본주의 탓이 아니다. 무능한 혈연에게 높은 직위를 준 것이 노동자 착취로 이어졌다면 그건 가족주의의 탓이다. 즉 유교 탓이다. 이런 일도 있다. 무능한 혈연에게 높은 지위를 준 것이 상품과 서비스 품질 저하로 이어져 기업이 무너지기도 한다. 게임의 품질과 서비스가 저하되자 소비자가 등을 돌리는 일이 현실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논리적 이념인 소비자의 행복에 따라 소비자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기업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순리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이가 부를 얻는 사상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소비자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역할에 맞는 능력을 보유한 이를 고용하는 것으로 상품과 서비스의 품질을 올려 국내 소비자를 행복하게 하고 국외 상품 경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역할수행은 아주 기초적인 것처럼 느껴지나 이처럼 이런 기초적인 것조차 안 되는 일이 있다는 점에서 역할주의 관념의 학습은 꼭 필요하다 본다.

 

혈통이나 인맥이나 빈부나 지역이나 성별 같은 걸로 평가에 차등을 준다 가정해보자. 대상에 대한 관념이 비틀리게 된다. 역할에 맞는 능력과 별개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그것이 틀릴 경우 불만을 갖게 된다. 귀족이니까 좋은 평가를 주고 아니니까 나쁜 평가를 준다. 이것이 귀족주의다. 아는 사람이니까 좋은 평가를 주고 모르는 사람이니까 나쁜 평가를 준다. 이것이 연고주의다. 남성이니까 좋은 평가를 주고 여성이니까 나쁜 평가를 준다. 이것이 남성주의다. 반대도 동일하다. 여성이니까 좋은 평가를 주고 남성이니까 나쁜 평가를 준다. 이것이 여성주의다. 남성주의나 여성주의가 인권운동이라 착각할 수 있는데 정녕 평등을 바란다면 거기에 성별이 붙을 이유가 없다. 귀족주의든 남성주의든 여성주의든 대상을 기준으로만 바라보면 대상이 일방적으로 이익을 얻게 된다. 이런 건 잘못된 관념을 새겨주게 된다. 평등한 평가조차 부당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귀족이니까 좋은 평가를 받다가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면 부당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주관에 의한 부당함이다. 객관이 아닌 주관으로 인권을 결정하면 이처럼 잘못된 부당함을 올바른 것처럼 포장되게 만들게 된다. 어디 여자가 사회활동을 하려 드느냐가 차별이듯 어디 남자가 여성혜택에 불만을 가지려 드느냐도 차별이다. 여성이 특별한 혜택을 받기 때문에 종종 여성주의를 여성우월주의로 착각하고 있지만 근거가 여성이 열등하다는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여성열등주의다. 귀족은 보통 정복자의 입장에서 피정복자에 비해 우월한 위치에 있었기에 그들이 우월함을 근거로 특별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우월주의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건 생물학적 우월함이 아닌 사회학적 우월함이기에 진리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우월주의는 잘못되었다. 여성은 보통 남성에 비해 열등하다 여겨졌던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남성에 비해 열등한 위치에 있었기에 그들이 열등함을 근거로 특별한 혜택을 요구하는 것은 열등주의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건 생물학적 열등함이 아닌 사회학적 열등함이기에 진리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열등주의는 잘못되었다. 인간의 우열은 혈통이나 체력이 아닌 지능에 있기에 지능 지수가 비슷하다면 우열을 나눌 수가 없다. 남녀의 뇌 구조가 거의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귀족이나 일반인이나 남성이나 여성이나 지능은 개인마다 다르기에 일방적 우월함이나 열등함을 주장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특별한 권리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부당함이나 차별을 느낀다면 그건 관념이 비틀려서 감각과 감정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에서 벗어나 바라보면 무엇이 평등인지 알 수 있다. 왜 배려하지 않는 거야? 가부장제에서 여성은 약하니까 배려해야 하잖아? 왜 불만을 가지는 거야? 가부장제에서 남성은 강하니까 힘든 걸 해야 하잖아? 모든 근거가 가부장제에 있다. 가부장제가 싫다는 이들이 가부장제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그걸 근거로 모든 걸 요구한다. 한심하다. 이제는 모두 가부장제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여성이 의지가 약하거나 성적 수치심이 강할 이유가 없다. 그건 가부장제 세계관의 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잘못된 여성상이다. 의지가 강하여 정확하게 의사표현을 할 수 있어야 이용당하지 않을 수 있고 성적 수치심이 없어야 부당한 일에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다. 이런 여성상은 그저 여성을 약자로 만들 뿐이다. 바보 같은 선동에 더 이상 넘어가서는 안 된다. 이런 여성상을 근거로 온라인에서 성 문화를 탄압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다. 온라인에서는 인간의 체력이나 근력의 차이가 없으니 완전 동일하게 보고 특정 여성의 약한 의지나 과도한 성적 수치심을 근거로 성을 탄압하거나 자유를 억압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다. 이제 모두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때가 왔다. 민족의 자유, 국가의 자유, 국민의 자유를 잇는 사상의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

 

교육에서의 성적에 대해 알아보자. 교육이란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고, 인간의 잠재 능력을 일깨워 훌륭한 자질, 원만한 인격을 갖도록 이끌어 주는 일을 뜻한다. 이런 교육에서 평가가 잘못되면 관념이 비틀릴 수 있다. 성적을 수정하거나 시험문제를 유출하여 혈연인 무능한 학생을 높게 평가한다. 그걸 본 다른 학생은 혈연이면 높게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버리게 된다. 촌지를 받고 무능한 학생을 높게 평가한다. 그걸 본 다른 학생은 뇌물을 주면 높게 평가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버리게 된다. 아부를 받고 무능한 학생을 높게 평가한다. 그걸 본 다른 학생은 아부를 하면 높게 평가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버리게 된다. 교사가 공정한 평가를 하지 않으면 학생의 관념이 잘못된 방향으로 비틀리게 된다.

 

일부 한국 교육은 사회주의나 PC주의에 영향을 받아 결과의 평등을 지향하려 하고 있다. 결과의 평등이 어떤 것인지 잠시 알아보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결과의 평등을 요구하는 까닭은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다. 기회의 평등으로는 차별이 발생하니 결과의 평등으로 모든 차별을 없애려 한 것이다. 그런데 결과의 평등이란 평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평가를 하면 차별이 나온다. 평가는 가치와 수준을 평하는 것으로 가치와 수준에 따라 차별이 나오게 된다. 그것이 공정하든 불공정하든 마찬가지다. 어떤 경우에도 차별이 나온다. 그런데 결과의 평등을 주장하며 정당한 차별조차 부정하게 되면 평가를 하지 않게 된다. 매우 일차원적인 논리다. 평가를 하면 차별이 나온다.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평가를 하지 말자. 가산점이나 할당제에 찬성하거나 모든 줄 세우기에 반대하는 것은 결과의 평등을 위해 평가를 하지 않고자 하는 논리에서 나타났다. 가산점이나 할당제는 학교나 기업의 평가를 국가가 간섭하여 바꾸는 걸 의미한다. 결과의 평등을 위해 평가를 조작했다. 이는 결과의 평등을 위해 선거 결과를 조작하는 것과 같을 정도의 어리석은 행위다. 어떤 결핍으로 어떤 혜택을 주고자 한다면 평가에 간섭하기 보다는 환경에 간섭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기회의 평등이다. 모든 줄 세우기에 맹목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모든 평가에 반대하는 것과 같다. 결과의 평등을 위해 평가를 없애자고 한다. 이는 결과의 평등을 위해 전체주의나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것과 같을 정도로 어리석은 주장이다. 나는 교육의 줄 세우기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건 하나의 기준으로 줄 세우는 걸 반대하는 것이지 역할 같은 다양한 기준으로 줄 세우는 것은 당연하다 본다. 애초에 평가를 하면 어떤 경우에도 줄 세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역할주의는 그 줄을 여러 개로 늘리는 것을 통해 다양하게 한다. 이와 같이 결과의 평등은 평가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평가가 사회를 조직한다. 평가를 하지 않으면 사회가 조직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평가를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결과의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나 PC주의는 누가 평가를 하게 되는가? 바로 사회주의 정치가나 공산당원이나 PC주의자가 하게 된다. 그들이 사회의 규율을 강요하고 그 규율에 맞춰 평가를 한다.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의 규율을 중시하는 사상이다. 사회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적 절차에 의해 규율이 만들어지므로 규율을 우선시하는 것 또한 민주적이라 착각할 수 있다. 생각해보자. 선대가 만든 규율은 후대의 의사반영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규율은 당대의 민주적 절차에 불과하다. 후대는 아무런 의사표현도 하지 못하고 선대가 만든 규율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건 민주적이지 못하다. 이러니까 사회민주주의는 정상적인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후대의 의지에 따라 규율이 쉽게 바뀔 수 있다면 그건 더 이상 사회의 규율을 우선시하는 사회주의가 아닌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하는 자유주의다. 선대가 사회를 중심으로 한 규율을 만든다 하더라도 후대가 자유를 중심으로 한 규율을 만들어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면 어떻게 그걸 사회주의라 할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그걸 자유롭게 바꿀 수 없다면 어떻게 그걸 민주주의라 할 수 있는가? 사회민주주의는 모순덩어리다. 공산주의는 공산주의의 규율을 강요하는 사상이다. 규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거의 대부분 공산당원의 손에 쥐어져 있다. 규율로 평가를 하기에 실질적으로 평가할 권리는 공산당에 있는 셈이다. PC주의는 PC주의의 규율을 옳다고 선동하는 사상이다. PC주의자가 다른 사람에게 강요를 하고 있긴 하지만 그 공산주의와 다르게 강요를 따를 의무까지는 없다. 단지 도덕적 비난을 받는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강요에 가까운 선동이 된다. PC주의자가 평가한 것을 선동하며 강요하기에 실질적으로 평가할 권리가 PC주의자에게 있는 셈이다. 정리하면 결과의 평등은 평가할 권리를 일부가 독점하자는 주장이다. 평가의 권리를 일부가 독점한다는 것은 평가가 사회를 조직한다는 것을 미루어보았을 때 일부가 사회를 조직하자는 것과 같다. 즉 독재다. 이런 것은 종교부터 시작해 규율을 강요하는 모든 사상이 같다. 종교인이 평가하여 사회를 조직한다. 종교국가다. 사회주의 정치가가 평가하여 사회를 조직한다. 사회주의 정치가 국가다. 공산당원이 평가하여 사회를 조직한다. 공산당 국가다. PC주의자가 평가하여 사회를 조직한다. PC주의 국가다. 모든 국민을 위한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규율을 우선시하는 사상들이 보수나 퇴보가 된다. 다양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평가할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와 역할주의야말로 다수의 평가로 사회가 조직되는 민주적인 사상이다. 이렇게 자유를 우선시하는 사상들이 진보가 된다. 무엇이 인류의 보수와 진보인지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문화에서의 평점에 대해 알아보자. 문화란 인간의 공동 사회가 이룩하여 그 구성원이 함께 누리는, 가치 있는 삶의 양식 및 표현 체계를 뜻한다. 자연 상태와 대립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을 극복한 것이라 한다. 평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 상거래의 평점과 문화예술의 평점이 있다. 전자 상거래의 평점은 온라인 쇼핑몰이 주를 이루고 문화예술의 평점은 게임이나 영화나 소설 등을 공급하거나 평가하는 사이트가 주를 이룬다. 상품을 소비하거나 문화예술을 즐기고 그 가치와 수준을 평하여 점수화한 것이 평점이다. 이런 문화에서 평가가 잘못되면 신용과 예술이 죽게 된다. 전자 상거래나 문화예술의 평점을 보고 구매한 상품의 품질이 생각보다 낮으면 평점의 신용도가 낮아져 타인의 평가를 믿지 않게 된다. 사회의 신용이 죽는다. 문화예술의 평점을 보고 관람한 작품의 품질이 낮으면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혼란스러워져 온전히 아름다움을 즐길 수 없게 되므로 예술이 죽게 된다. 그럼에도 대다수는 제대로 된 평점을 매기고 있지 않고 있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평가가 손익을 만들고 손익이 감정을 만들기 때문이다. 전자 상거래에서 장사하는 이들이 평점에 민감한 까닭은 그 평가가 바로 손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사하는 이들이 이유 없이 낮은 평점을 받으면 평가를 한 사람에게 항의하기도 한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많은 소비자는 웬만해서는 제대로 된 평가를 하지 않는다. 평균만 되도 5점 만점 중 5점을 주고 정 마음에 안 들면 1점을 준다. 평점의 양극화 현상이 일어난다. 둘은 평가에 대한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평가의 가치를 모르니까 대충 평가한다. 지금까지 평가는 위에서만 했다. 보편적으로 모두가 평가한 것이 아니기에 제대로 된 평가를 해야 할 이유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모두의 평가로 사회가 조직된다. 정치, 경제, 노동, 교육, 문화 등등 모든 분야가 모든 사람의 평가로 조직되고 있다. 그 점을 알고 모두가 평가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관념이 자리잡아야 할 것이다.

 

평가가 좀 더 대중적이어야 한다. 다양한 평가사가 있지만 상품 평가사는 없는 것 같다. 좀 유명한 상품이 되어야 그에 대한 평가가 실린다. 대중의 평가는 구매 평점을 통해 쉽게 알 수 있지만 전문가의 평가는 쉽게 알 수가 없다. 평점 양극화 현상으로 5점 만점 중 5점을 매긴 평점은 대충 평가했을 확률이 높으므로 낮은 점수를 참고할 때도 많다. 얼리어답터나 유튜버나 블로거가 평가하는 일이 종종 있지만 그들조차 익명이거나 광고용으로 상품 지원을 받는 일이 많아 신용도가 엄청 높지는 않다. 즉 신용할 수 있는 평가가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배달음식을 주문할 때 평점을 신용할 수 없어 불편할 때가 많았다. 분명 평점은 높은데 맛이 없거나 취향이 아닐 때가 많았다. 전문가의 평점이 없는 것이 아쉬웠다. 배달앱은 미식가를 고용하여 익명으로 배달주문을 한 뒤 평점을 하고 그 평점이 상단에 올라올 수 있도록 하길 바란다. 미식가에게만 좋은 음식이 나갈 수 있으므로 미식가의 아이디는 공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문 후 바로 평점을 매기기 보다는 평가기간 후에 평점을 매기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문화예술에서는 전문가의 평가조차도 신용할 수 없을 때가 있다. PC주의의 영향으로 품질이 낮은 작품도 높게 평가 받을 때가 있다. 이유는 오직 하나다. PC주의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평가할 권리가 PC주의에 있기 때문에 전문가조차 PC주의에 영향을 받은 평가를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PC주의에 영향을 받은 작품을 꺼려하는 것은 PC주의 자체를 꺼려하기도 하기 때문이지만 그게 정당한 평가를 받은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신용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용할 수 없는 평가가 늘어날수록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지 혼란스럽게 된다. 진심으로 아름답게 느낀 것의 평점이 낮은 걸 보고 혼란을 느끼고 진심으로 아름답지 않다 느낀 것의 평점이 높은 것을 보고 혼란을 느낀다. 미에 대한 인식과 감각이 뒤틀리면서 예술을 경시하게 된다. PC주의뿐만이 아니다. 현대미술도 그러하다. 어떤 사람은 낙서처럼 그려진 걸 아름답다 말하는 것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다 하는 거야? 대중을 설득하지 못하는 잘못된 평가는 예술을 죽이게 한다. 정리하면 평가가 대중적이고 전문적이어야 전자 상거래를 이용하고 문화예술을 즐기는 이들이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이가 부를 얻어야 할 것이다.

 

 

 

정치와 경제와 노동과 교육과 문화에서 평가에 대해 알아보았다. 인사가 주제임에도 다양한 영역에서의 평가를 알아본 까닭은 그래야 인사의 평가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인사의 평가 방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인사는 노동력을 평가한다. 노동력은 노동자에게 귀속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자의 성격과 능력을 평가하게 된다. 역할에 맞는 인간의 성격과 능력을 평가하여 채용과 승진과 좌천이나 임금이나 복지 등을 인사권자에게 제안하거나 인사권자가 직접 결정하는 것이 인사 업무다. 성격과 능력. 인사는 두 가지를 역할을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으면 된다. 성격에 대해 알아보자.

 

성격이란 각 개인에게 특유한 감정과 의지와 행동 등의 경향을 뜻한다. 또는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정신생활을 모든 방면에서 나타내는 전체로서의 소질을 뜻한다. 인사가 성격을 파악하는데 쓰인 방법은 관상, 혈액형, MBTI 등이 있다. 관상부터 살펴보자. 관상은 한의학과 비슷하다. 한의학은 사람을 축적된 경험을 비과학적인 기준으로 해석하여 진단하고 치료한다. 경험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에 경험의학과 유사한 부분이 있으나 그걸 해석하는 기준이 경험과 무관한 잣대기 때문에 경험의학이라 부르기 어렵다. 경험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에 치료가 되기도 하지만 해석하는 기준이 경험과 무관한 잣대기 때문에 치료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예컨대 A증상에 B약초를 먹이니 증상이 호전되었다. 그런 것은 경험에 해당한다. 그러나 A증상에 B약초를 먹이니 증상이 호전된 것을 보았을 때 A증상을 가진 사람은 C유형에 해당할 것이다. 이런 것은 단순한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A증상에 B약초가 효과적이다라는 것까지는 경험에 해당하므로 실험자료로 쓸 수 있지만 그 외의 것은 쓸 수가 없다. 한의학이 현대의학과 조화를 이루고 싶다면 쓸 수 있는 경험적인 것만 가져와 실험을 통해 검증해야 할 것이다. 관상도 마찬가지다. 관상은 사람을 축적된 경험을 비과학적인 기준으로 해석하여 판단한다. 경험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에 맞기도 하지만 해석하는 기준이 경험과 무관한 잣대기 때문에 맞지 않기도 한다. 예컨대 A관상을 지닌 사람이 B의 결과가 나왔다. 그게 맞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외견은 환경이나 감정에 의해 바뀌는 일도 있기 때문에 외견을 통해 환경이나 성향을 추측해볼 수는 있다. 예를 들어보자. 스트레스를 받으면 흰 머리가 날 수 있다고 한다. 그걸 통해 젊은 나이에 흰 머리가 많으면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유전자의 영향도 있으므로 확신은 할 수 없다. 실내에 자주 있으면 피부가 흰 색일 수 있고 실외에 자주 있으면 피부가 구리 색일 수 있다. 그걸로 내향적이거나 외향적인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유전자의 영향도 있으므로 확신은 할 수 없다. 이처럼 관상은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다. 한의학은 A증상에 B약초를 먹이자 증상이 호전되었다라는 걸 쓸 수는 있으나 A관상인 사람이 B의 결과가 나왔다라는 것은 아예 쓸 수도 없다. 어떤 사람은 오랜 경험으로 관상만 봐도 안다며 자신하며 근거 없는 평가를 하기도 하는데 정말 당황스럽다. 예컨대 미형인 범죄자를 보여주면 범죄자라 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우연찮게 맞출 수도 있지만 그건 전혀 과학적인 것이 아니다. 관상으로 인사를 하는 것은 이제 지나치게 낡은 방식이다. 혈액형은 애초에 언급조차 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아무런 근거가 없다. 관상보다 못한 방식이 혈액형이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2017년 조사결과 10명 중 6명은 혈액형별 성격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심각한 수준이다. 바넘(일반적 성격과 특성을 본인만의 특성으로 여기는 것)이나 자기실현적 예언(어떤 예측이나 기대를 믿는 것으로 직접 실현하는 것)에 의해 혈액형 성격 차이를 믿는다고 한다. 바넘은 자기객관화를 못한다는 증거고 자기실현적 예언은 플라시보 효과에 대해 모른다는 증거다. 인문학 수준이 낮거나 과학 지식이 적다고 할 수밖에 없다. 설령 수준이 높다 하더라도 관념의 문제가 있다. 혈액형에 따라 성격 차이가 있다는 관념이 주입되자 논리적인 근거로 믿을 수 없음을 증명되었음에도 고정된 관념에 의해 믿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서 관념의 무서움이 다시 한번 증명된다. 인류는 과학이란 영원진리에 가까운 진리로 잘못된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올바른 관념은 진리가 바탕이어야 한다.

 

이런 걸 믿는 사람은 한국과 일본 말고는 없다고 한다. 인사는 성격과 능력 평가의 전문가다. 그런 전문가라면 최소한 혈액형은 운운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나도 끔찍하다. MBTI는 Myers-Briggs Type Indicator 의 약어로 성격 검사의 일종이다. MBTI는 심리학자들에게 아무런 근거가 없다며 비판을 받고 있다고 한다. 융의 이론으로 만들어진 검사라고 하는데 융의 이론은 실험과학 이전의 것이라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마케팅이 잘 되어 전세계적으로 연간 약 200만명이 취업을 목적으로 약 15달러에서 40달러를 내고 검사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런 것은 알겠다. 그런데 애초에 문제풀이 방식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신용하기에는 지나치게 허점이 많다. 흔히 말하는 성격유형 검사에는 특정한 결과를 낳기 위한 알고리즘이 있고 그 알고리즘을 추측할 수 있으면 원하는 답을 만들 수 있다. 문제풀이인 시험과 같이 객관식으로 성격 유형을 검사하니 거기에는 답이 존재하는 것이다. MBTI가 과학적 근거가 있건 없건 문제풀이 방식을 사용하는 이상 개인의 주관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다. A유형인 사람이 B유형인 것처럼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걸 객관적 결과라 생각하는 것은 큰 실수를 낳을 수 있다. 문제풀이방식은 이제 낡았다. 다른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바로 바라는 것 적기다.

 

바라는 것 적기. 지나치게 단순해서 당황할 수 있다. 거창하고 화려하지 않아 경시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데이터 수집은 단순해야 가치가 있다. 단순한 데이터를 대량으로 모아 논리적인 방법으로 해석하여 유의미한 결과를 만든다. 그것이 빅데이터다. 오히려 MBTI 같은 답이 있는 문제풀이가 인간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나, 인간의 생각과 행동의 틀과 방향이 결정짓고 그 안에서만 판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어떤 동물이 위기에 빠졌다. 도울 것인가? 매우 긍정. 긍정. 중립. 부정. 매우 부정. 이렇게 인간의 생각과 행동의 틀과 방향을 결정짓고 거기서 판단한 결과를 토대로 인간을 평가하려고 한다. 이러한 것은 직접 돕는다나 사람을 모아서 돕는다 같이 좀 더 복잡해도 큰 차이는 없다. 아는 동물이면 돕고 모르는 동물이면 돕지 않는다라는 판단이 나올 수 있다. 좋아하는 동물이면 돕고 관심 없는 동물이면 돕지 않고 싫어하면 동물이면 공격한다라는 판단이 나올 수 있다. 인간의 판단을 고작 몇 가지로 나눈 걸로 선택하게 하고 그걸로 인간을 평가하려고 하니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올 수가 없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는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에 답이 있는 문제풀이는 지식을 평가하기에는 효율적일지 몰라도 인간을 평가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둘, 이미 만들어진 공개된 유형에 인간을 집어넣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평가하려면 인간의 데이터에서 유형을 새로 만들거나 비슷한 유형과 엮어야 한다. 유형을 만들고 거기에 인간을 집어넣느냐와 인간을 평가한 걸로 유형을 만드느냐에 차이다. 셋, 문제풀이는 답을 추측할 수 있기 때문에 조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원하는 성격에 맞춰 선택지를 골라 실제 성격과 다른 성격을 만들 수 있다. 조작의 위험이 있는 검사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것과 달리 생각과 행동의 틀과 방향이 결정되어 있지 않고, 인간을 평가한 걸로 유형을 만들고, 조작하기가 매우 어려운 방식이 바로 바라는 것 적기다.

 

첫째, 바라는 것만 적으면 생각과 행동의 틀과 방향이 결정되지 않는다. 빈 여백에 그냥 바라는 걸 줄줄 쓰기만 하면 된다. 지나치게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 수 있으나 아무거나 써도 되기 때문에 쓰는데 어려움은 없다. 자유와 생존을 적어도 되고 취미를 적어도 되고 꿈을 적어도 되고 이성과의 사랑을 적어도 되고 가족의 행복을 적어도 되고 갖고 싶은 제품명을 적어도 된다. 그야말로 아무거나 적으면 된다. 이렇게 바라는 것만 적으면 생각과 행동의 틀과 방향이 결정되지 않고 자유롭게 쓸 수 있다. 둘째,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 어떤 인간인지 파악하고 유형을 만들 수 있다. 사상에 대해 살펴보자. 자유를 바라면 자유주의자일 수 있다. 통일을 바라면 민족주의자일 수 있다. 남성인권만 바라면 남성주의자 일 수 있고 여성인권만 바라면 여성주의자일 수도 있다. 취미에 대해 살펴보자. 먹고 싶은 음식 종류가 다양할수록 미식가일 수 있고 식탐이 많을 수 있다. 가고 싶은 여행지가 많을수록 여행가일 수 있고 외향적일 수 있다. 꿈에 대해 알아보자. 부와 명예와 관련된 바람이 많을수록 사회적 성공을 바랄 수 있고 학문과 관련된 바람이 많을수록 지적 호기심이나 진리를 바랄 수 있다. 바람을 조합하여 추측할 수도 있다. 자유와 통일을 바라면 자유주의 국가로 통일을 하길 바랄 거라 추측할 수 있다. 남성인권과 여성인권 모두 바라면 인본주의자일 수 있다. 음식과 여행을 조합하면 미식여행이 될 수 있고 역사와 여행을 조합하면 역사여행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조합한 걸 연결하여 어떤 고유한 해석체계를 거치면 바라는 걸 통해 유형 만들기를 할 수 있다. 셋째, 바라는 걸 많이 적게 하면 조작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바라는 것을 열 개 적으라고 하면 쉽게 할 수 있다. 조작도 가능하다. 바라는 것을 백 개 적으라고 하면 다소 시간이 걸린다. 조작하기 까다로워진다. 바라는 것을 천 개 적으라고 하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조작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천 개 정도를 한정된 시간 내에 적으라고 하면 조작할 여유가 없다. 초반에는 역할에 맞는 바람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중반부터는 쓸 것이 부족해져서 평소 생각했던 것을 반사적으로 적게 된다. 후반에는 있는 것 없는 것 전부 모아서 적게 된다. 이런 방식을 계속 쓰면 나중에는 미리 바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여 준비해올 수 있다. 그걸로 조작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바람직한 상황으로 유도할 수 있다. 생각해보자.

 

바라는 것 적기는 단순히 성격을 검사할 뿐만이 아니라 인문학 수준을 높여줄 수 있다. 진지하게 말해서 본인이 정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가 않다. 대부분 외부의 영향으로 바람이 결정된다. 그것은 초중고 장래희망에서부터 알 수 있다. 장래희망이 유명하고 안정적인 것이 주를 이루는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외부의 영향에 지나치게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단순히 바라는 걸 열 개나 백 개 정도 쓰게 하면 외부의 영향에 따라 바라는 걸 적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천 개쯤 되면 본인이 바라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런 사유가 바로 철학적 사유다. 고찰 없는 자유의지는 없다. 왜냐하면 외부의 정보를 그대로 수용하고 그대로 행동하면 외부의 의지로 움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은 이런 바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 자유의지를 키울 수 있다. 자기실현적 예언에 대해 생각해보자. 인간은 사회적 바람과 반사회적 바람이 있을 수 있는데 사회의 역할을 맡기 위해 본인의 바람에 대해 생각하면 사회의 역할에 맞는 사회적 바람을 위주로 생각하게 되고, 자기실현적 예언에 따라 그 생각에 맞춰 실행하며 성장할 확률이 높게 된다. 자연스럽게 본인이 원하는 사회적 역할을 맡기 위해 성장하도록 도울 수 있다. 역할을 선택한 것은 본인의 의향이기 때문에 그 역할에 맞는 바람에 맞춰 실행하고 성장하는 것은 본인의 자유의지로 결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본인의 바람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 바람이 구체화되면서 보다 더 자유의지가 강해진다. 개인정보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바라는 걸 적게 하는 것일 뿐이므로 개인정보에 대한 문제가 있기 어렵다. 문제가 되는 건 본인이 알아서 안 적으면 된다. 인사가 알아서 해석해서 추측할 뿐이다. 이처럼 단지 바라는 걸 많이 적는 것일 뿐이지만 이토록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채용을 위해 본인이 본인의 바람을 적게 되면 인사에 좋게 보이기 위해 나쁜 것을 적지 않아 위험한 것을 파악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선과 악은 사상마다 기준이 다르고 바람 자체에 있다기 보다는 바람 실현 방법에 있다. 바람에 따라 사상이 달라질 수 있고 바람을 조합하여 바람 실현 방법을 파악해 선과 악을 추측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정당한 기준이나 절차 없이 과한 이익을 얻으면 그것이 악이 된다. 생각해보자. 인종과 민족의 과한 이익을 추구하여 다른 인종과 민족을 공격하거나 배척한 것이 나치즘이다. 여기서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데 나는 크게는 인류의 보통은 사회의 작게는 집단의 인간을 위한 역할수행 여부나 역할 기여도에 따라 달라지는 기준을 주장한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역할과 기여도에 따라 얻는 이익이 달라진다. 예컨대 자본주의는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만큼 부를 얻는다. 이런 관점에서 어떤 걸 과하게 이익을 얻길 바라거나 바람을 조합하면 상황에 따라 위험하다 평가할 수 있게 된다. 바람만 살펴보자. 가령 민족의 이익을 과하게 바라면 국수주의 또는 배타주의자일 수 있고 이민족의 이익을 과하게 바라면 사대주의 또는 PC주의자일 수 있다. 자유를 과하게 바라면 자유방임주의자일 수 있고 평등을 과하게 바라면 전체주의자일 수 있다. 본인의 이익을 과하게 바라면 사리사욕에 빠질 수 있고 타인의 이익을 과하게 바라면 자유의지가 없는 인형일 수 있다. 조합을 해보자. 자식에 대한 애정과 높은 교육열이 더해지면 자식에게 교육을 강요하는 태도가 나올 수 있다. 타인의 이익을 바라는 것과 맹신이 더해지면 타인에게 신앙을 세뇌하는 태도가 나올 수 있다. 연인에 대한 애정과 높은 자존심이 더해지면 연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타인에게 공격적인 태도가 나올 수 있다. 이것 자체로는 확정할 수는 없다. 단지 추측일 뿐이다. 실제 채용 이후 상황을 살펴봐야 결과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데이터가 쌓여 빅데이터화가 되어 바라는 비율과 조합에 따른 결과가 통계화가 되면 의미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바라는 비율이 일정이상 높게 되면 극단주의가 된다라는 통계가 나올 수 있고, 바라는 것의 비율과 조합이 특정 수치에 다다르면 위험할 수 있다라는 통계가 나올 수 있다. 빅데이터와 오랜 시간은 비율과 조합에 의한 통계로 만들어진 고유한 해석체계를 갖추게 할 것이다. 그 해석체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므로 검사 받는 사람은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조작 없이 검사하게 될 것이다.

 

고정되는 관념에 따라 적성이 달라질 수 있다. 관념은 일반적으로 어떤 사물에 대해 비교적 오랜 시간에 걸쳐 알게 모르게 이뤄진 생각이나 의식을 뜻한다. 철학적으로는 대상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나 의식 내용을 뜻한다. 정리하면 보는 것에 대한 생각이나 인식이나 의식이다. 관념에 고정될수록 의사결정이 빨라진다. 고정된 관념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기에 흔들리지 않고 의사결정을 한다. 관념이 고정될수록 반복작업을 하게 되는 역할에 어울리게 된다. 그러나 지성인이라면 새로운 것을 생각하거나 받아드려야 하므로 반복되는 작업에 관련된 관념은 주로 고정하고 그 외의 것은 고정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관념이 고정되지 않을수록 새로운 것을 떠올리기가 쉽다.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생각하고 행동하기에 자유롭게 새로울 것을 떠올린다. 관념이 고정되지 않을수록 새로운 것을 떠올리는 역할에 어울리게 된다. 그런데 관념이 고정되지 않으면 일상이 괴롭거나 힘들거나 인간관계가 어려워질 수 있으므로 꼭 필요한 부분은 고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가족애나 친애에 관련된 관념이 고정되지 않으면 일일이 생각하면 일상이 괴롭거나 힘들거나 피곤하고 오감에 관련된 관념이 고정되지 않으면 보편적 감각이 다른 이들과 다를 수 있기에 인간관계가 어려워질 수 있다. 완전 기초적인 관념은 사상가에게 맡기면 된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나이에 따라 관념이 고정되는 수가 달라진다. 관념이 거의 없이 유전자로 움직이면 자아형성을 시작한 아기(0세)라 할 수 있고 관념이 기초가 마무리되면 자아형성이 마무리된 사춘기(13세~15세)가 끝이라 할 수 있고 관념이 구체적이게 되면 자아가 성숙한 어른(20세)이라 할 수 있고 관념이 가르칠 정도가 되면 자아가 원숙한 지성인(30세 이후)이라 할 수 있고 모든 관념이 변하지 않게 되면 자아의 완성이자 지성의 죽음이라 할 수 있다. (나이는 평균으로 사람마다 다르다) 사상가는 자아형성이 마무리되기 전에 머무르는 것이 좋고 창작자는 자아가 성숙하게 되는 시기에 머무르는 것이 좋고 지성인은 자아가 원숙해지는 시기에 머무르는 것이 좋다. 사상가가 기초적인 관념이 고정되면 만드는 사상은 고정된 관념의 파생사상에 불과해진다. 유교의 가르침으로 만들어진 관념이 고정되면 만드는 사상은 유교의 파생사상에 불과하다. 다른 기초적인 관념도 모두 동일하다. 사상가를 시작하기 가장 적합한 시기가 13세 정도고 만약 이후에 사상가를 하고 싶다면 자아붕괴를 한번 해보는 것이 좋다. 본인의 모든 것을 의심하고 부정하고 다시 생각하면 자아가 붕괴되고 다시 자아형성 시기로 돌아갈 수 있다. 창작자가 관념을 가르칠 정도가 되면 창작물이 식상하고 재미없어 질 수도 있다. 가르친다는 것은 체계가 어느 정도 잡혔다는 걸 의미하고 체계가 잡히게 되면 새로운 체계를 구축하기가 어려워진다. 창작자는 언제나 배우는 입장에 있어야 한다. 무언가 타인에게 알려줄 때에도 가르친다기보다는 정보를 교류한다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성인이 자아가 완성되면 새로운 것을 떠올리거나 받아드릴 수 없게 되어 더 이상 지성인이라 할 수 없게 된다. 관념이 고정되더라도 누군가 고정관념이라 지적하면 받아드릴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관념은 다양한 관점과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감 유무와 취향으로 고정되어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바라는 것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있다면 바라는 것에 관념이 고정되지 않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어떤 특정한 것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많이 바라면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감이 적다는 것이기에 관념이 고정되지 않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신세대의 취향에 어울릴 수 있다면 관념이 고정되지 않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런 추측은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통계화가 되면 쓸 수 있을 정도는 될 것이다.

 

바라는 것 천 개 적기는 인사 입장에서 아무래도 평가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다. 그런데 빅데이터를 떠올려보자. 포탈의 검색을 떠올려보자. 데이터가 쌓이면 생각보다 쉽게 할 수 있다. 성격 검사를 받는 사람이 데이터 수집 프로그램에 직접 바라는 것을 적는다. 포탈의 검색은 오타가 나도 비슷한 검색어를 추천하여 검색을 원활하게 한다. 그와 같이 알고리즘으로 비슷한 바람을 집단으로 묶어 정리한다. 그렇게 정리된 바라는 것을 조합하여 각각의 특징으로 분류하고 특징을 조합하여 개성으로 분류하고 개성을 조합하여 유형을 만든다. 이런 데이터를 축적하면서 실제 채용 후 채용자의 태도나 성과를 보며 검증한다. 검증된 자료를 바탕으로 고유한 해석체계를 갖춘다. 고유한 해석체계가 갖춰지면 성격 검사자가 데이터를 입력만 해도 대부분 빅데이터로 축적된 통계에 따라 비슷한 유형으로 정하거나 새로운 유형을 만들 것이다. 성격 검사자가 원하는 역할에 맞춰 바람을 조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천 개쯤 쓰면 바람을 조작하기 어렵다. 전부 조작하기보다 어떤 경향만 맞추는 조작을 할 수도 있다. 해당 역할에 적합한 바람을 많이 쓰는 것으로 역할에 적합한 바람으로 위장할 수 있다. 그건 단순히 바람의 양만으로 판단하지 않으면 된다. 성격 검사자가 조작할 가능성까지 고려하여 해석체계를 갖추면 큰 문제는 없다. 그리고 자기실현적 예언에 따라 역할에 적합한 바람을 계속 생각하다 보면 본인의 바람으로 여기게 되어 정말 그런 바람을 갖게 될 수도 있다. 철학의 사유와 빅데이터을 통한 성격 검사는 아마 지금까지 없던 방식일 것이다. 그렇기에 초기에는 시행착오가 많을 수 있다. 그래도 이런 방식이 분명 새롭고 쓸모 있을 거라 생각한다.  

 

 

능력에 대해 알아보자. 능력이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뜻한다. 역할에 필요한 능력은 역할마다 달라 어떤 일정한 기준으로 평가하기가 어렵다. 예컨대 농업과 상업에 필요한 능력이 다를 것이다. 그렇기에 전문적일수록 해당 분야의 경력자가 인사를 담당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힘의 종류가 다양하여 능력 또한 다양하다. 친화력은 인간관계에 관련된 역할에 적합할 것이고 창의력은 창작에 관련된 역할에 적합할 것이고 인내력은 참고 견뎌야 하는 역할에 적합할 것이다. 무력, 지력, 매력, 권력, 재력을 비롯해 암기력, 이해력, 성장력, 행동력, 사고력, 논리력, 판단력, 감각력, 생활력, 전투력, 학습력, 정신력, 적응력, 경쟁력, 통찰력, 수용력, 통제력, 통솔력, 관찰력, 추리력, 문장력, 정치력, 설득력 등 역할에 적합한 힘과 역할에 적합한 능력이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면 인사 업무인 평가를 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분야에 걸쳐 정리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점이 있다. 너무 길어진다. 핵심적인 부분만 정리해보겠다.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해보겠다. 하나는 문제풀이능력이고 둘은 문제해결능력이다. 이 능력과 함께 분야마다 필요한 능력이 세세하게 다를 것이다.

 

첫째, 문제풀이능력. 문제풀이능력은 문제와 답이 있다. 배운 지식으로 문제를 푼다. 그렇기에 문제풀이능력이 높은 사람은 우수한 지식과 효율적인 지식 습득능력과 암기력과 이해력과 인내력을 가지고 있고 평범한 사고력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문제와 답이 있기 때문에 문제에 다루는 사물에 관련된 관념은 답으로 고정된다. A는 B다라는 식으로 관념이 고정되게 된다. 영원진리에 가까운 수학과 과학은 진리기 때문에 관념이 고정되어도 대부분 성장할 수 있지만 진리조차 아닌 사상과 철학은 관념이 고정되면 성장할 수가 없다. 문제풀이능력으로 지식을 많이 쌓을수록 고정관념이 늘어난다. 고정관념이 많은 인간의 특징이 바로 신속 정확한 생각과 행동이다. 주로 문제와 답으로 고정된 관념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효율적인 움직임이 가능하다. 그래서 문제풀이능력이 높은 사람은 프로세스가 정형화된 업무를 하는 역할이 적합하다 할 수 있다. 사회가 체계적으로 조직될수록 정형화된 업무가 많기 때문에 문제풀이능력자의 수요가 높다. 그러나 고정된 관념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받아드리기가 어려워 정형화되지 않은 업무를 할 때에는 부적합하다. 그게 적합한 능력은 문제해결능력이다. 둘째, 문제해결능력. 문제해결능력은 문제도 답도 없다. 어떤 현상을 보고 직접 문제를 만들고 직접 답을 찾아 해결한다. 문제와 답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새로울 확률이 높다. 그렇기에 문제해결능력이 높은 사람은 우수한 사고와 깊고 넓은 사유와 관찰력과 통찰력과 창의력을 가지고 있고 평범한 암기력과 이해력을 가지고 있다. 문제와 답이 없기 때문에 관념이 고정되기가 어렵다. A는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여 관념이 고정되지 않는다. 그 어떤 학문도 새로운 영역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수학과 과학도 진리인 영역을 암기하고 이해하면 그 뒤에는 직접 문제를 만들고 답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문제해결능력이 필요해진다. 문제해결능력은 지식을 쌓아도 관념이 고정되지 않는다. 고정된 관념이 적은 인간의 특징이 바로 창의와 혼란이다. 고정되지 않은 관념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창의적이지만 비효율적인 움직임이 나타난다. 그래서 문제해결능력이 높은 사람은 프로세스가 정형화되지 않은 업무를 하는 역할이 적합하다 할 수 있다. 사회가 새롭게 변화할수록 정형화되지 않은 업무가 많기 때문에 문제해결능력자의 수요가 높다.

 

인사에서 문제풀이능력자가 필요하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면 된다. 하나, 문제와 답이 있는 시험을 보게 한다. 문제와 답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풀어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역할에 관련된 지식을 담은 문제를 풀어보게 한다. 둘, 역할에 관련된 매뉴얼을 지급하고 지식을 습득하게 한다. 지식을 얼마나 신속하고 정확하게 습득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역할에 관련된 지식을 암기하고 이해하게 한 뒤 문제와 답이 있는 시험을 보게 한다. 셋, 습득한 지식을 실제 실행하게 한다. 습득한 지식을 얼마나 신속하고 정확하게 실행할 수 있느냐 중요하기 때문에 실제 업무를 지식에 담긴 절차대로 수행하는지 확인한다. 지식과 지식 습득능력과 지식 실행능력을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인 문제풀이능력자의 채용절차일 것이다.

 

인사에서 문제해결능력자가 필요하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면 된다. 하나, 어떤 주제를 주고 문제와 답이 없는 과제를 제출하게 한다. 현상을 보고 직접 문제를 만들고 직접 답을 찾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역할에 관련된 주제를 주고 문제와 답이 없는 과제를 제출하게 한다. 둘, 문제해결이 필요한 주제와 관련된 지식을 전달하고 그 지식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확인한다. 다양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여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참신하고 흥미로운 해결방법을 제시하는지 확인한다. 셋, 제출이나 제시한 해결방법을 실제 실행하게 한다. 이론적으로 만들어진 해결방법이 실제로 적용될 수 있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실제로 문제를 해결해보게 한다. 문제해결방법이 담긴 과제와 문제해결방법을 제시하는 것과 문제해결방법의 실행능력을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인 문제해결능력자의 채용절차일 것이다.

 

문제풀이능력과 문제해결능력을 정리하면 현상유지와 미래개척이다. 문제풀이능력은 지금까지의 지식을 암기하고 이해한 것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실행할 수 있어야 하기에 현상유지에 적합하다. 문제해결능력은 처음부터 현상을 보고 직접 문제를 만들고 직접 답을 찾아 해결한 것을 실제로 실행할 수 있어야 하기에 미래개척에 적합하다. 문제풀이능력은 보통 노동자에 적합하고 문제해결능력은 보통 창업자에게 적합하다. 한국은 주로 문제풀이능력을 가르쳐서 고학력 노동자의 수가 지나치게 많아져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으로 경제참여인구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 이런 현상유지와 미래개척을 기본으로 다양한 능력을 더하면 적절한 역할이 나온다. 현상유지에 친화력이 더해지면 매뉴얼에 따라 시민이나 고객을 응대하는 공무원이나 상담사에 적합할 것이다. 미래개척에 경쟁력을 더하면 시장경제에서 상품 판매 경쟁을 하는 상품을 개발하는 기획자에 적합할 것이다. 인사는 현상유지와 미래개척에 각각의 지식과 능력을 조합하여 그에 해당하는 역할을 정리하고 거기에 맞춰 채용을 하면 될 것이다. 구체적인 정리는 너무 길어지므로 생략하도록 하겠다. 현상유지와 미래개척으로 기준이 확실하기에 정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인사 또한 낮은 기회비용으로 높은 이윤을 얻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문제풀이능력은 보통 고학력이 우수하다. 그래서 높은 기회비용을 지불하고 그만큼의 이윤도 얻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문제해결능력은 학력과 크게 관계가 없을 수 있다. 그래서 낮은 기회비용을 지불하고 높은 이윤을 얻을 확률이 높다. 이런 차이를 염두에 두고 효율적인 인사를 하는 것이 적절하다 생각한다. 이력과 경력에 대해 잠시만 언급하겠다. 이력과 경력은 신용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은행이 개인정보에 신용을 새기면 대부분 개인의 이력과 경력의 신용이 보장되는 체계가 구축될 것이다.

 

 

평가에 손익을 부르고 손익이 감정을 일으킨다. 손익이 없는 평가에는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으니까 대충 평가한다. 대충 평가하니까 엉망이 된다. 이걸 생각해보면 인사는 손익과 직접적으로 연관될수록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하게 된다는 걸 추측할 수 있다. 이러면 간단해진다. 인사에 의해 채용된 사람의 성과가 높아질수록 채용을 제안하거나 결정한 사람의 이익이 높아지면 된다. 채용된 사람의 성과가 낮아질수록 손해가 되면 신입에게 지나치게 높은 간섭을 하게 될 수 있으므로 그건 바람직하지 못할 것이다. 작은 보너스 정도라도 충분히 적절한 평가를 하게 될 동기가 부여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혈액형을 운운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정말 싫다.

 

이러면 채용을 제안하거나 결정한 사람을 중심으로 일종의 파벌화가 진행될 수 있다. 파벌이 없는 집단이 드물기는 하지만 그게 바람직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집단의 크기가 클수록 인사 제안이나 결정권자를 사원의 의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파벌이 생길 정도가 될 쯤에 인사권자가 바뀌는 것이다. 매번 인사권자가 바뀌면 커다란 파벌의 형성을 견제할 수 있다. 이는 민주주의 정치의 임기제와 비슷할 것이다. 인사는 제안자와 결정자로 나뉠 수 있는데 인사 제안자는 능력으로 채용하고 인사 결정자는 사원과 주주의 투표로 선출하면 좋을 것이다. 이는 관료제와 의회의 결합과 비슷할 것이다.

 

대표나 주주는 이런 인사권자의 민주적 절차가 기업의 선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이런 방식을 부정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거대한 국가의 쇠퇴는 커다란 파벌의 고착화로 인한 부패가 만들고 거대한 기업의 쇠퇴도 커다란 파벌의 고착화로 인한 부패가 만든다. 작은 기업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수많은 주주가 있는 주식회사에서 이런 절차가 없이 파벌을 용인한다면 그 파벌의 고착화로 인해 큰 기업도 잘못된 결정을 저지를 수 있다. 자유주의 국가의 건전한 성장은 양방향 평가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았으면 좋겠다.

 

 

 

모든 이기주의는 본인의 의지로 행한 것이고 모든 이타주의는 타인의 의지로 행한 것이다. 본인의 의지로 행한 것은 모든 것이 이기적이어야 한다. 타인을 돕는 행위를 했다고 하여 자유의지로 한 행위를 이타적이라 해버리면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게 된다. 남을 도우려고 한 것이니 그에 대한 책임도 남이 지게 되는 거라 생각하게 된다. 타인의 의지로 행한 것은 모든 것이 이타적이어야 한다. 본인이 이익을 얻는 행위를 했다고 하여 자유의지가 아닌 행위를 이기적이라 해버리면 그에 대한 책임도 져버리게 된다.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이니 그에 대한 책임도 나보고 지라고 할 수 있다. 책임 소재가 엉망이 되어 일방적으로 이익을 얻거나 손해를 보는 일이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악은 정당한 기준이나 절차 없이 과한 이익을 얻을 때 나타난다. 이런 혼란이 악을 유발할 수 있다. 바람직하지 못하다.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본인의 의지로 한 행동은 모두 이기적이고 타인의 의지로 한 행동은 모두 이타적이라 인식해야 바람직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본인의 의지로 선택한 역할은 그 어떤 것이라도 이기적인 것이라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설령 타인을 위하는 역할이라고 하더라도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이라면 이기적인 것이라 생각해야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지 않을 수가 있다. 본인이 책임진다고 생각해야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법이다. 본인의 의지로 선택한 역할이라면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 진정한 자유주의 국가가 되길 바라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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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정부와 인사로 한 것은 인사는 특정 기업을 정하기가 어려워서 그랬습니다. 


회계는 잘 모르지만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다음 글은 회계입니다.

 

한국이 진정한 자유주의 국가가 되길 바랍니다. 낡은 관념을 벗어 던지고 진정 한국을 위한 길을 걷길 바랍니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분명 가치가 있는 사상입니다. 역할주의도 충분히 가치 있는 사상이라 생각합니다.  

 

인류 진화에 해가 되는 다툼은 하루라도 빨리 사라져야 합니다. 우주 크기를 생각해봤을 때 지구에서 다른 지적 생명체가 어디 있냐고 묻는 것은 아마존 정글에 사는 원주민이 다른 인간은 어디 있냐고 묻는 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아마 전자가 더 우물 안 개구리겠지요. 인류는 다툴 시간이 없습니다. 특이점이 오면 로봇과 인공지능이 다 하기 때문에 인간은 발전하지 않고 정체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지구 안에 머물러 있을 때만 그런 겁니다. 우주로 진출하면 그 어떤 발전도 부족합니다. 부족해요. 인류가 불로불사로 진화하는 게 우주진출의 첫 단추에 불과합니다. 그 정도로 인류는 갈 길이 멀었어요. 이제 무의미한 전쟁은 그만하도록 하길 바랍니다.

 

자아의 시간이 망가졌음을 이해하자 몇 가지 현상이 해석이 되네요. 예전에 고기를 먹다 역한 느낌이 들어서 원인을 생각해보니 채식주의 관련 영상을 접한 것 때문인 것으로 추측했죠. 그리고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며 계속 고기를 먹으니 다시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다시 생각해보니까 원래 그렇게 고정된 관념이 쉽게 바뀌는 게 아니었어요. 관념이 고정되지 않다 보니까 육식에 관념에 바뀌어 고기에 거부감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 기억상실 이후 기억과 자아를 빠르게 되찾은 적이 있죠. 애초에 자아형성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고정된 걸 잃어버리고 되찾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고정된 것이 없었기에 기억과 자아를 되찾는 것이 빨랐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기초적인 관념이 고정되지 않다 보니 충동적인 우울증과 울렁거리는 혼란과 미칠 것 같은 감각을 느낄 때가 있네요.

 

성을 죄악시하는 관념이 만든 저출산. 미치겠습니다. 우연찮게 야한 어플리케이션 리뷰를 보았는데 야한 건 안 된다며 화를 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잘못된 성 관념으로 국가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하는데. 도와주세요. 죽게 생겼네요. 돼지는 불결하다며 안 먹어도 살아남을 수 있는데 성은 불결하다며 안 하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멍청하게 자살하는 국가로 기록되고 싶지 않습니다. 누가 되었던 성을 죄악시하는 인간은 인류의 적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어쩔 수가 없어요. 이제는 벼랑 끝에 다다랐습니다. 미성년 핑계를 대면 관념도 이해 못하면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성을 알고 불행해졌다고 말하는 건 성을 죄악시하는 관념 때문에 불행의 원인을 성으로 돌렸기 때문입니다. 미성년 임산부가 불행한 것은 임신했기 때문에 불행한 게 아니라 임신한 것을 비난하는 사회 때문에 불행한 겁니다. 실제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더 이상 낡은 관념을 진리라 여기면 안 됩니다. 마녀사냥도 혈액형 성격설도 정조관념도 돼지나 성을 죄악시하는 관념도 진리가 아닙니다. 부탁합니다.

 

어째서 여성계는 별 거 아닌 피해의식으로 여성의 고귀한 역할을 무시하는 건가요. 출산이라고 굳이 표현한 것은 여성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런 고귀한 역할을 고작 여성에게 저출산의 책임을 묻게 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단어라는 이유로 출생으로 바꾸자고 하는 건 정말이지 황당하네요.

         

낙태나 아기살해 원인을 경제적 원인으로 말하는데 본질은 그게 아닙니다. 아기의 가치가 고생의 가치보다 낮다는 거죠. 경제적 어려움은 압니다. 그래도 좀 고생하면 먹여 살리는 건 불가능하지 않아요. 본인이 고생하는 것보다 아기의 가치가 낮으니까, 아기에 대한 애정이 낮으니까 죽이는 겁니다. 본인 입으로 경제적 사정이라 말했다고 그걸 그대로 받아드리면 어떻게 합니까 1차원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깊이 있는 현상해석을 해야 합니다. 이건 심각한 애정결핍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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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글쓴이 정체가 궁금해질 정도의 분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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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야;
[잡담] SK와 바이오 (0) 2022/02/25 AM 11:06

SK와 바이오

 

 

 

영원진리

 

인류는 영원진리에 도달한 적이 없다. 영원진리를 모르는 인류의 지성과 문명은 모래와도 같은 견고하지 못한 가설 위에 쌓아 올린 불안전한 건축물이다. 인류가 이 세상에 바로서기 위해서는 영원진리에 도달해야 할 것이다. 토대가 영원진리가 아니라면 언제든지 무너질 위험 속에서 불안하게 살아가야만 한다.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견고한 영원진리를 찾아야 한다. 진리란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이다. 그게 시간을 초월하면 영원진리라 한다. 보통 수학이나 물리학 법칙을 이른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두 개가 된다는 법칙이 미래에 바뀐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영원진리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하지 못한다면 영원진리라 할 수가 없다.

 

모든 학문의 끝과 시작은 세상의 존재이유다. 존재를 사유하는 형이상학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학문도 의문에 의문을 더하다 보면 세상의 존재이유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의류학을 예로 들어보자. 옷은 무엇인가? 옷의 재료는 무엇인가? 옷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이 옷을 입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이 속한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음식학이나 건축학뿐만이 아니라 모든 학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의문에는 답할 수가 없다. 어떻게 인간과 세상이 만들어져 있는지는 알아도 왜 만들어져 있는지는 모른다. 왜 만들어져 있는지 명확하게 답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만든 것뿐이다. 의식주의 존재이유는 알지만 인간과 세상의 존재이유는 모른다. 인간이 만든 것은 존재이유를 규명할 수 있지만 인간이 만들지 않은 것은 존재이유를 규명할 수 없다.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할 수 없게 되면 모든 진리는 영원할 수 없게 된다. 존재이유에 따라 모든 진리가 뒤집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존재이유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알아보자. 하나는 신과 시뮬레이션이다.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신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시뮬레이션 제작자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존재가 세상을 만든 것이 이 세상의 존재이유라는 것이다. 이 경우 수학이나 물리학 법칙 등이 신이나 제작자 손에 의해 멋대로 조작될 수 있다. 그 조작으로 중력이 사라진 세상이 성립될 수 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시뮬레이션 게임을 떠올려보자. 게임 내에서 중력을 제거하더라도 세상은 존재할 수 있다. 물론 중력이 사라지면 우주질서가 붕괴하여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그런 가정을 다룬 영상도 많다. 그러나 그건 다른 방식을 통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온갖 방법으로 시뮬레이션에서 해결이 될 때까지 실험하면 되는 문제다. 신이나 시뮬레이션이나 어떤 존재가 세상을 만든 것이라면 그 세상의 법칙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관점을 바꿔보자.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고 세상에 존재하는 수학과 물리학 법칙은 진짜 세상에 없는 실험용 법칙일 수 있다. 지금 인류도 그러고 있다. 시뮬레이션 게임에는 세상에 없는 마법이 존재한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라면 현재 수학과 물리학 법칙은 진짜 세상에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험용 법칙이라면 언제든지 법칙이 달라질 수 있다. 이렇게 어떤 존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 존재를 넘지 못하는 이상 모든 법칙은 영원진리가 될 수 없다.

 

둘은 우연이다. 세상의 존재이유가 어떤 존재의 개입이 없는 우연이라면 웬만해서는 현재 수학과 물리학 법칙은 지구 내에서만큼은 영원진리가 될 것이다. 알고 있는 이치만 따지면 아마 우주의 법칙이 같지 않을까 싶긴 한데 우주의 크기가 광속으로 백억 년이 넘으므로 확신할 수는 없다. 어쩌면 지구의 법칙은 우리은하의 중력에 영향을 받은 고유한 법칙일지도 모른다. 천문학으로 우주를 관측하고 있으므로 같을 거란 예측은 가능하지만 그 현상이 지구와 같은 법칙으로 만들어졌는지는 확신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우연이 세상의 존재이유에 대한 답은 될 수 있어도 그런 우연이 발생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모른다. 우주의 탄생배경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다. 우주가 빅뱅으로 만들어졌다면 빅뱅 전의 세상이 어떤지 모른다. 우주가 수축과 빅뱅과 팽창을 반복하는 구조라면 전 세상이 수축되는 우주일 것이지만 그 때에도 우연의 이유는 모른다. 이에 대해서는 우주에 대한 정보가 극히 적으므로 추측조차 어렵다. 우주의 진리에 다다를 수 있는 편린이라도 쌓아야 추측이라도 할 수 있다.

 

솔직히 어떤 존재에 의함이란 가정은 지나치게 인간편의 위주의 해석이다. 수천 년 전의 지식으로 세상의 진리일 수 있다고 말한 것이 신이고 현재의 지식으로 세상의 진리일 수 있다고 말한 것이 시뮬레이션이다. 지금 시뮬레이션이 그럴 듯 해 보이는 것은 실제 인류가 시뮬레이션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일 뿐이다. 어느 때나 인간이 아는 지식 내에서만 진리라 주장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어떤 존재에 의함 자체의 가능성이 우연에 비해 낮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 아는 지식으로 결론지은 존재의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존재에 의함이든 우연이든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하는 순간부터 모든 학문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세상의 존재이유가 모든 학문의 끝과 시작이 된다.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한 순간부터 인류는 비로소 세상에 바로 서서 살아갈 수 있게 되며 그 순간부터 학문은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다.  

 

 

 

사상

 

인류가 바로 서기 위해 필요한 영원진리. 진리. 내가 바랐던 것은 언제나 진리였다. 최초 의문을 가질 때나 관념에 의해 신체부자유를 겪을 때나 지금이나 바라는 것은 진리다. 만약 종교에 모순이 없었다면 종교인이 되었을 것이고 사회에 모순이 없었다면 과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종교에 기대기엔 역사와 논리와 이치와 객관과 법칙과 모순되는 것이 지나치게 많았다. 과학에 기대기엔 자유를 외치며 억압을 하거나 평등을 외치며 차별을 하는 사회의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과학을 배우기 전에 망가져버렸다.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관념에 의한 신체부자유로 인해 연상에게 제대로 된 의사표현을 하지 못했던 나에 대한 불신과 조소. 이후 운명에 기대며 될 대로 되란 듯이 자포자기하며 살았다. 종교에는 기대지 않았으면서 운명에는 기댔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망가졌던 나에게는 어쩔 수 없었다. 이후 망가졌던 원인에 대한 답을 찾다가 과학의 도움이 받아 자아와 몸이 하나가 아님을 깨닫고 낡은 도덕관념에 세뇌된 탓에 신체부자유로 인한 자기의사표현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지금은 다양한 현상과 사실과 과학과 사상과 철학 등의 도움을 받아 사상가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바나나우유 부정취득 사건 몰이해, 연하와의 인간관계 타박, 대중문화 차단, 세배 암묵적 강요, 김치 섭취 강요거부, 전단지 아르바이트 배포 중 구박, 성 문화 접촉금지, 연상에게 의사표현 실패 등 별 것 아닌 것도 많지만 꾸준하고 집요한 낡은 도덕관념의 세뇌와 주관적인 손익에 의한 강요와 편의주의적인 억압으로 자기의사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 자포자기 하는 순간 자아의 시간이 멈춰서 고정되어버렸다. 한창 자아를 형성하던 중학생 때 자아의 시간이 고정된 것이다. 고등학생과 대학생 때 괴리감과 위화감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래가 가질법한 욕구나 생각에서 벗어났다. 다르다는 것에 괴로움을 느끼며 타인을 흉내 내려 애썼다. 자기암시를 통해 감정조차 모방했던 것을 조소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그 이유를 안다. 망가지면서 자아의 시간이 멈췄었기 때문에 타인과 달랐던 것이었다. 나중에 사는 것조차 포기했다 다시 사는 것에만 집중했을 때엔 그런 흉내도 지쳐서 공적인 때에만 하게 되었다. 일반적인 사람을 관찰하고 관념이 고정된 사람을 흉내 내었다. 그럼에도 흉내에는 한계가 있다. 흉내 내는 것에 실패하여 나보고 어쩌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런 내게 위화감이나 괴리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망가짐으로 자아형성 시기에 자아의 시간이 고정된 것이 사상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자아형성에 대해 잠시 정리하자.

 

자아는 환경과 교육으로 수동적으로 관념이 학습되어 기초적인 관념이 고정되면서 감각과 감정과 욕구와 가치관 등이 설정되어 사리분별이 가능하게 되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통상 세상에 눈을 뜨는 어린 아이 때부터 관념이 학습되면서 자아형성이 시작되고 점차 자아가 형성되다 성에 눈을 뜨는 중학생 때 자아형성이 끝이 난다. 빠르면 초등학교 고학년 때도 형성된다. 최근 인터넷의 발달로 수용하는 정보양이 폭증하여 관념 학습이 빨라지는 것으로 자아형성 시기도 빨라지고 있다. 그에 대응하여 정보를 차단하는 것은 정보편중화를 부추겨 정보가 막힌 아이만 도태되게 만들 뿐이므로 모든 아이에 대한 이른 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정보는 힘이다. 정보양에 차이가 발생하면 또래 사이에서 뒤쳐지는 것은 필연이다. 단순히 학업에 필요한 지식만 쑤셔 박는 것은 인간에 대해 잘 모르기에 하는 끔찍한 실수다. 또래 사이에서 뒤쳐지는 순간부터 자존감이 부서지며 전체적인 능력이 하락한다. 정보를 차단할 거면 극단적으로 말해 차라리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것이 아이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부디 어리석은 짓으로 아이를 괴롭게 만들지 말길 바란다. 사리분별을 할 수 있다면 지식을 활용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대응을 할 수 있다.

 

사리분별을 할 수 있게 된 자아형성 시기에 능동적으로 관념을 학습하면서 사춘기가 시작된다.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자기의사표현이 확실해짐에 따라 보호자의 말을 수용하는 것이 줄어들고, 학습된 관념과 학습한 관념의 차이와 모순으로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반항하기 시작한다. 이때 보호자는 이런 실수를 한다. 피호보자가 자아형성이 되어 사리분별이 가능하면 대등한 인간으로 대함이 마땅함에도 성년에 자아형성이 된다고 착각하여 대등하지 않은 인간으로 여기며 관념을 세뇌하고 주관을 강요하고 편의로 억압하는 짓을 저지른다. 장유유서에 의해 연하를 아랫사람으로 여기는 관념에 의해 성인조차도 사리분별 못하는 인간으로 여기며 통금이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경우까지 있다. 심각한 연하차별이다. 어떤 동물이 성기능이 작동하는 시기에 성관계를 금하고 있나? 보통 있기 어려운 일이다. 성기능이 작동한다는 것은 성관계를 맺어도 된다는 걸 의미한다. 남녀 모두 애를 낳을 수 있는 몸이 되면 누구와도 해도 된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결정할 문제다. 고리타분한 관념으로 연하를 열등하게 여기고 성을 죄악시하는 것에 영향을 받아 성적 자기결정권을 빼앗고 있었을 뿐이다. 의사표현만 제대로 할 수 있으면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더라도 문제가 없다. 의사표현을 제대로 못하니까 연상에게 이용당하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괜찮단 말이다. 의사표현을 못했던 것으로 망가진 나로서는 의사표현을 할 수 있게 만든 다음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는 게 아니라 의사표현을 못하게 만들면서 성적 자기결정권을 빼앗는 걸 보는 것이 너무나도 괴롭고 슬프고 비참하다. 도대체, 유전자와 낡은 도덕관념 중 무엇이 더 진리에 가까운가? 성적 자기결정권은 유전자에 근거해서 줘야 한다. 그것이 진리다. 그럼에도 낡은 관념에 의해 성년이 되어도 성적인 것을 금한다니 정신 나간 짓이다. 이따위로 하니까 출산율이 폭락한 것이다. 범죄에 관련된 인간관계가 범죄를 죄악시하는 관념에 의해 줄어들었다면 성에 관련된 인간관계도 성을 죄악시하는 관념에 의해 줄어든다는 것은 이치에 맞는다. 이성관계가 줄어드니까 결혼도 줄고 출산율도 줄어들었다. 국가가 죽어가게 되었다. 관념에 대해 알았다면 이제는 어릴 때부터 성에 친숙해져야 함을 이해했으리라 생각한다. 낡은 관념을 근거로 미성년을 위해서라는 명목을 가지고 어릴 때 접하는 성 문화를 탄압하는 것이 국가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성을 검열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도 없고 예술에 대한 이해도 없는 진정 야만스러운 짓이다. 이성관계가 줄어드니까 이성애 결핍이 되었다. 유사연애산업의 비정상적 성장이나 이성의 동성애 문화 발달이나 고양이나 개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애정결핍으로 나타난 것이다. 괴롭다. 도대체 언제까지 연하의 자유의지를 뭉개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빼앗는 폭거를 저지를 것인가? 인간은 낡은 도덕의 장난감이 아니다. 인간은 국가의 장난감이 아니다. 인간은 연상의 장난감이 아니다. 멋대로 주물럭대며 원하는 모양으로 구겨대지 말길 바란다. 자아형성 전에도 관념이 학습되면서 학습된 관념 내에서는 사리분별이 가능하므로 연하가 논리적인 의견을 표하기 시작한다면 대등한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자아가 형성된 이후 관념 학습을 마무리하면서 구체적인 관념이 고정되기 시작한다. 그러다 모든 관념이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시기가 오면 자아가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자아가 완성되면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의 지성은 죽었다고 보면 된다. 모든 관념이 고정되어 관념대로만 생각하고 행동하여 새로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새로운 인식을 낳는 것이 지성이라면 새로운 걸 생각하거나 받아드리지 못하는 순간이 그야말로 지성의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자아의 완성은 곧 지성의 죽음이다. 자아완성 시기는 천차만별이다. 빠르면 어릴 때조차 완성될 수 있고 늦어도 완성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무엇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 한국은 도덕적일수록 불행하고 부도덕적일수록 행복한 나라다. 장유유서에 휘둘리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의사표현이 가능할수록 행복하고 정조관념에 휘둘리지 않고 마음에 맞는 상대와 자유롭게 성관계를 맺을수록 행복하다. 이게 도대체 뭔가. 한국이 불행 지수가 높았던 것은 단순하다. 그저 대다수가 도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에 지독한 슬픔을 느낀다. 인간을 불행케 하는 도덕은 더 이상 필요 없다. 새로운 도덕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할 것이다.

 

 

나는 자아형성시기에 자아의 시간이 고정되면서 다양한 특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관념이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채 망가졌다. 관념이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채 스스로의 관념을 의심했다. 겉으로는 살아가기 위해 운명에 기대어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관념이 고정된 타인의 흉내를 냈고 속으로는 조소하며 관념을 의심하는 것으로 언제든지 관념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성장할수록 선천적인 성질인 본능과 후천적인 성질인 관념이 섞이는 바람에 구분 짓기 어려워한다. 그 두 가지를 전부 본성으로 착각하는 일이 잦다. 그런데 나는 관념을 의심하고 있었던 터라 생각보다는 쉽게 본능과 관념을 구분 지어 본성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상가의 역할 중 하나가 바로 관념을 만드는 것이다. 관념에 의해 망가져 관념을 의심하여 관념을 파악하기 수월한 상태가 된 지금 사상가에 적합해졌다 본다. 둘은 자아의 시간이 멈춰 순수한 욕망이 변하지 않았다. 중학생 때 시간이 멈췄었기 때문에 당시 느꼈던 진리와 자유에 대한 갈망을 유지하고 연상에게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망가졌던 이유를 오랫동안 추적하며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아마 일반적으로 성장했다면 갈망이나 망가짐을 단순한 사춘기의 방황 정도로 마무리 짓고 적당히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렇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순수한 욕망은 변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진리를 추구하는 욕망을 가진 지금 사상가에 적합해졌다 본다. 셋은 자아의 시간이 멈춰 형성에 필요한 관념을 계속 고찰하게 되었다. 원래 생각이 많은 인간이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자아형성 시기에 자아의 시간이 멈추자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었다. 사상가의 역할은 생각하는 것이다. 다양한 것을 생각하여 인간에게 새로운 길을 안내하는 것이 사상가다. 지나칠 정도로 생각이 많은 지금 사상가에게 적합해졌다 본다.

 

관념에서 자유로울 것, 순수한 욕망을 가질 것, 생각이 많을 것. 각각의 특성은 자아형성 시기에 자아의 시간이 멈춰 고정되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망가졌기 때문에 사상가에 적합하게 되었다는 것이 참 황당하다. 사실 이런 특성은 보통 쉽게 얻어지지 못한다. 관념에서 자유로워야 자아의 구조를 파악하고 관념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관념이 고정되는 것으로 자아가 형성되고 유지된다. 그런 인간이 관념을 고정시키지 않으면 자아가 붕괴될 수도 있다. 느끼는 모든 감각과 감정과 욕망을 전부 의심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해보자. 그 느꼈던 것을 바탕으로 행동해온 모든 걸 의심한다고 생각해보자. 자아의 시간이 흐르는 사람이 관념에서 자유로운 것은 정말 굉장한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아마 몹시 어려울 것이다. 순수한 욕망을 가져야 다른 것에 휘둘리지 않고 끝까지 그 욕망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 욕망을 위해 끊임없이 사유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어린 시절 충동적인 욕망을 평생 가지고 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자아의 시간이 흐르면서 욕망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자아의 시간이 흐르는 사람이 순수한 욕망을 가진 것은 어떤 충동이나 욕망에서 휘둘리지 않은 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기에 굉장한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아마 어려울 것이다. 생각이 많아야 끊임없이 사유하며 사상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보통 사람이 생각이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다. 지나치게 많으면 일상에서 불편하기 때문이다. 보통 어린 시절 생각이 많다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필요한 생각만 하게 되게 되어 있다. 자아의 시간이 흐르는 사람이 생각이 많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일반적이지는 않다. 사상가는 관념을 만들면서 감각과 감정과 욕망에 혼란을 겪으며 자아가 흔들릴 수 있고 고정되지 않은 관념에 의해 또래와의 위화감과 괴리감을 느낄 수 있고 지나치게 많은 생각으로 일상 중 실수를 할 수 있다. 사상가는 관념을 만들기 위해 관념을 고정시키지 않고 영원히 자아형성을 해야 한다. 영원히 자아형성 시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만약 벗어났다면 가진 자아를 붕괴시키고 자아형성 시기로 돌아가야 한다. 그 과정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사상가가 되고 싶다면 일반적인 삶을 살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관념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자아형성 이전의 기초적인 관념이 한국은 유교의 가르침으로 만들어졌고 서양은 기독교의 가르침으로 만들어졌다. 서양은 기독교와 그리스의 사상과 철학이 자리잡은 곳인데 자아형성 이전의 기초적인 관념을 기독교가 담당한 것은 가르침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의 사상과 철학을 자아형성 이전에 배우기는 어렵다. 거의 대부분 기초적인 관념은 단순한 가르침에서 시작된다. 십계명 같이 누구라도 알기 쉬운 가르침으로 기초적인 관념이 학습되면서 자아가 형성된다. 이 시기의 기초적인 관념으로 인간의 감각과 감정과 욕구가 개발된다. 성을 죄악시하면 이성과의 접촉으로 느끼는 촉각만으로도 굉장한 죄악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과도한 성적 수치심이 이걸 근거로 한다. 언어로 연령차별하면 연하의 반말에 심각한 불편함을 느낀다. 반말에 부정적 감정을 느끼는 것이 이걸 근거로 한다. 채식주의에 영향을 받으면 육식에 끔찍한 불쾌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육식에 대한 강한 혐오가 이걸 근거로 한다. 관념에 의한 것이라면 몸이 먹을 수 없는 게 아니라 자아가 먹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이렇듯 인간의 감각과 감정과 욕구는 사상에 담긴 관념에 매우 큰 영향을 받는다. 이 정도로 중요한 관념을 인간이 제어하지 못한다는 것이 정상이 아니었다.

 

자아형성 이전의 관념은 본능과 결합되어 인간의 본성으로 착각하게 된다.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학습된 것에 영향을 받아 감각과 감정과 욕구를 느끼면 그게 본성인 거라 착각한다는 것이다. 각국이 즐기는 맛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기초적인 미각조차도 관념에 영향을 받는다. 그럼에도 대부분 그걸 본성이라 착각하고 있다. 유전자에 의한 미각과 관념에 의한 미각이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이런 기초적인 관념은 대체로 변하지 않으나 충격적인 경험이나 구체적인 관념 학습을 강하게 받으면서 변형된다. 물론 그런다고 하더라도 본질이라 할 수 있는 관념 자체가 변했다기 보다는 단지 변형되었을 확률이 높다. 기독교 사상으로 관념이 만들어진 인간은 새로운 사상을 만든다 하더라도 기독교의 도덕성에 뿌리를 두게 된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도덕성이 기독교의 도덕성과 유사한 까닭은 뿌리가 같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가 옳다고 느끼는 사람은 그저 종교의 도덕성에 익숙했기에 그랬던 것이다. 공산주의를 독재자가 이용하기 쉬운 이유도 이런 까닭이 원인이었다. 왕정의 오랜 친구가 기독교였음을 잊으면 안 된다. 유교 사상으로 관념이 만들어진 인간은 여성인권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유교 사상으로 나타난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여성주의는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이 결정되어 보다 더 심각하게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을 세뇌하고 강요하게 된다. 약한 의지나 과도한 성적 수치심이나 단절된 이성관계는 전부 여성을 도구로 생각하고 차별했기에 나타난 모습들이다. 그걸 올바른 여성상으로 착각하고 세뇌하고 강요하면 어떻게 하나. 여성들이 여성을 차별하던 관념에서 나타난 여성상을 근거로 여성인권을 주장하며 다시 한번 여성을 차별하는 걸 보니 끔찍한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다. 관념이란 정말 무섭구나. 이처럼 사상과 철학을 새롭게 만들거나 주장할 때엔 기초적인 관념부터 다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행동원리는 기초적인 관념에 의할 확률이 높으므로 인간의 본질을 알려면 우선 기초적인 관념이 무엇인지 파악해두는 것이 좋다. 대부분은 오래된 종교의 가르침이 보통 기초적인 관념이 될 것이다. 새로 접한 사상도 관념에 영향을 받는다. 루소, , 데카르트, 칸트, 헤겔, 니체 등등의 사상가와 철학자의 사상과 철학 또한 자아 형성 이전에 학습된 기초적인 관념을 바탕으로 학습하게 된다. 그들의 사상과 철학을 온전히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형태로 받아드리게 된다. 기초적인 관념에 의해 감각과 감정과 욕구가 이미 설정된 상황에서는 그걸 자각해야 새로 접한 사상을 통해 관념을 바꿀 수 있다. 많은 사상가와 철학자들이 이걸 놓치고 있었다.

 

사상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나는 기초적인 관념부터 만들고 있다. 자유주의의 이념과 미덕과 악덕은 무엇인가? 자유주의의 이념은 모두가 자유로운 것이며 자유롭기 위한 미덕은 의지와 지성이고 악덕은 강요와 강제 세뇌가 된다. 자본주의의 이념과 미덕과 악덕은 무엇인가? 자본주의의 이념은 소비자의 행복이며 소비자가 행복하기 위한 미덕은 공정과 경쟁이고 악덕은 불공정과 독점과 담합이 된다. 역할주의의 이념과 미덕과 악덕은 무엇인가? 역할주의의 이념은 역할수행 외의 자유와 역할수행 유무로 가치판단 하는 걸로 얻을 수 있는 평등이며 그러기 위한 미덕은 역할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고 악덕은 역할과 무관한 것으로 가치를 판단하여 억압하고 차별하는 것이다. 이런 기준은 몹시 간단하여 어린 아이도 알기 쉽기 때문에 기초적인 관념이 될 수 있다. 역할주의를 예로 들어보자. 부모는 자녀에게 아이의 역할을 인식하게 하는 것으로 맡은 역할을 수행하도록 유도하여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무엇을 위한 역할인가에 따라 옳고 그름이 달라질 수 있는데 자아형성 이전에는 자유주의를 참고하면 된다고 본다. 자아형성 이후에는 직접 무엇을 위한 역할인지 고찰하면 된다. 역할로 가치를 판단하는 것으로 용도에 맞는 소비를 할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목적이 있을 때에 무슨 역할이 필요하고 그 역할에 필요한 능력이 무엇인지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역할주의의 기초적인 관념 학습이 되겠다. 자아형성 이후에도 기초적인 관념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면 그걸 바꿀 수 있다. 이제 자아는 직접 설계해야 한다.

 

이런 걸 생각해보면 정상적인 사상가가 나타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알 것도 같다. 물론 인문학이 쇠퇴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인문학

 

인문학의 쇠퇴는 학문 특성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수학과 과학은 대부분 영원진리에 가깝기에 암기하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학문의 수준을 높일 수 있으나 사상과 철학은 대부분 진리도 아니기에 암기하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학문의 수준을 높일 수가 없다. 수사학이나 논리학 같은 언어기술에 해당하는 것은 과거의 것을 그대로 쓸 수 있지만 사상과 철학은 그럴 수가 없다. 매번 새로 시작해야 한다. 1576년 국가론을 작성한 장 보댕은 마녀 사냥을 주장한 마법학의 전문가였다고 한다. 그가 쓴 마법사의 빙의망상에서 이런 글귀가 있다고 한다. 한 명의 마법사는 천 명의 범죄자보다 더 큰 범죄다. 14개 판본이 만들어지고 지금까지 읽히는 글을 쓴 자가 이 따위 주장이나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걸 암기하고 이해한다고 인문학 수준이 올라갈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가 없다. 애초에 사상은 진리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장유유서도 남녀유별도 정조관념도 진리가 아니다. 그걸 지킬수록 불행해지는 도덕 따위가 진리일 수가 없다. 그런 건 사상가가 만든 관념을 당시 필요에 의해 쓴 것에 불과하다.

 

수학과 과학은 실험하고 연구하고 탐구하면서 영원진리에 가까운 것들을 토대로 체계적으로 발전해나갔지만 사상과 철학은 대부분 진리가 아닌 것에서 고찰하고 사유하고 토론하면서 지나치게 복잡하게만 발전했다. 형이상학을 떠올려보자. 증명되지 않은 진리가 아닌 명제를 전제 삼아 진리를 찾으려 하니 답이 나오지 않는다. 수학으로 비유하면 이런 것이다. 1+1=2 . 같이 간단히 답이 나올 수 있는 것도 1+1+X는 무엇인가? 라고 의문을 던진 다음 그 답을 찾기 위해 끊임 없이 사유했다. 이러니 제대로 된 답은 나오지 않고 그에 대한 추측만 엄청나게 복잡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특수 형이상학에 속하는 신과 영혼은 도대체 의미가 없는 사유만 늘어나고 있다. 관념에 의해 신의 존재를 당연시하면서 어떤 사실을 논하고 있으니 쓸데 없이 복잡해졌다. 현상에 대한 답을 도출하는데 있어 그런 전제는 필요가 없다. 더군다나 철학의 역사가 길어짐에 따라 과거 철학자가 만든 고유명사들까지 끼어드니 더더욱 복잡하고 어려워졌다. 본질만 정리하면 간단함에도 말이다. 괜히 인문학이 쇠퇴한 것이 아니다.

 

한국이 수직사회인 까닭은 무엇인가? 수직사회인 조선의 도덕관념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답이 나옴에도 자아성찰도 제대로 하지 않고 관념에 의해 유교의 가르침을 당연시하면서 수직사회에 대한 원인을 찾으려 하니 다른 나라의 사상을 참고하며 애꿎은 자본주의나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수직사회로 나타나는 사회문제도 제대로 해결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꼰대질이나 갑질 따위를 말이다. 수직사회는 유교의 가르침이 학습되어 나타난 관념이 만든 것이니 수직사회로 나타나는 폐해는 자본주의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유교를 비판했어야 했다. 수직적 인간관계, 교육의 줄세우기, 부의 분배의 실패, 재벌 등등은 자본주의가 원인이 아니라 유교가 원인이었다. 자본주의는 낡은 관념에 지배당해 유교의 가르침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 점을 명확히 인식하길 간곡히 바란다. 모두 낡은 관념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질 때가 왔다. 민족의 자유, 국가의 자유, 국민의 자유 그리고 사상의 자유다.

 

한국의 교육은 주입식으로 암기하고 암기한 걸 이해하는 것이 주류였다. 이 방식으로 학문을 접하자 영원진리에 가까운 수학과 과학의 수준은 높아졌으나 진리가 아닌 사상과 철학의 수준은 낮아졌던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기초적인 사상과 철학은 과거의 것을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수학과 과학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원진리에 가까운 것들을 가지고 사상과 철학을 하면 된다. 나는 과학이 없었다면 자아에 대해 고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수학과 과학을 전공할 필요는 없다. 학문의 시작과 과정과 끝에 있어 수학자와 과학자는 대부분 알아야 하지만 일반인은 답만 알면 된다. 사상가와 철학자도 마찬가지다. 과정에 속하는 복잡한 것은 그들의 역할로 그 역할을 신용하고 그들이 내놓은 답을 가지고 사유하면 된다. 이러면 낡은 관념에 방해 없이 자유롭게 사고하는데 도움이 된다. 기초적일 때에는 오히려 과거의 것을 안보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오랫동안 체계적으로 발전한 사상과 철학의 거대함에 잡아 먹여 관념이 고정되어 새로운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자아형성 이전의 관념에 대한 이해가 있어 본능과 관념을 분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크게 위험하지는 않다. 자아구조를 파악한 뒤에는 본인 판단으로 다른 사상을 접하면 된다. 보다 전문적으로 사상과 철학을 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과거의 사상과 철학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과거의 사상과 철학에 영향을 받아 사회가 형성된 측면이 있기 때문이고 둘은 방법론 측면에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사상과 철학은 역사가 아니다. 암기하고 이해할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해야 한다. 시대의 진리를 모아 사유한 다음 사람들에게 가야 할 길을 안내해야 한다. 과학의 도움을 받아 자아에 대한 구조를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 그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무의식에 대한 어떤 과학 실험이 의식과 무의식을 파악하여 자아의 본질에 도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인간의 무의식은 인간의 의식적 의지와 무관하게 동작한다. 자아에 대해 간단히 알기 쉽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자아는 의식이 몸의 세포의 신호가 전달되면 유전자에 의해 그 신호를 감각과 감정과 욕구로 변화하고 경험이나 교육이란 학습을 통해 체계화되며 라는 관념이 학습된 뒤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는 범위를 라고 지각한 것을 이른다고 본다. 이는 짐승도 그리 다르지 않다. 지능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자아는 몸과 하나가 아니다. 자아는 몸과 별개다. 컴퓨터로 비유하면 자아는 소프트웨어고 몸은 하드웨어라 보면 된다. 그 동안 의식과 무의식과 잠든 상황에 대해 구분하기 어려웠는데 컴퓨터로 비유하니 알기가 쉬웠다. 자아의 의식과 무의식은 소프트웨어적으로 분리가 가능하다. 의식은 현재 몸의 세포의 신호로 나타나는 생각이라 보면 된다. 어떤 신호를 통해 생각을 하고 생각하면서 과거의 기억이 떠올리는 것으로 과거의 기억을 통해 그 기억 모두가 나라는 것을 자각하고 움직일 수 있게 된다. 무의식은 과거의 기억들이라 보면 된다. 의식이 깨어난 후에 자극 받은 세포의 신호에서 기억으로 이어진 뒤에는 자유롭게 생각하면서 움직이며 의식 외의 동작은 무의식적 기억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 잠들거나 기절한 상황은 소프트웨어적 무의식과 동일한 상황이 아니다. 하드웨어적으로 꺼진 것이라 보면 된다. 프로그램의 동작과 무관하게 컴퓨터가 꺼진 상황이라는 것이다. 아예 꺼진 건 아니라 대기모드라고 보면 된다. 잠들거나 기절한 대기모드에서는 의식이 없으므로 무의식적 움직임만 나타나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외부에 반응하기 때문에 외부의 자극이 있으면 대기모드가 풀리고 깨어나게 된다. 기절 또는 술이나 약에 취했다면 쉽게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대기모드에도 단계가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만약 인간의 자아가 하드웨어였다면 어째서 인간은 육체의 모든 기관을 정확하게 제어할 수 없는가? 그건 간단했다. 인간의 자아는 몸이란 하드웨어에 장착된 소프트웨어일 뿐이었다. 일반적으로 컴퓨터에 있는 프로그램이 컴퓨터의 모든 걸 장악하지는 않는다. 관리자 권한이 있는 프로그램도 컴퓨터를 소프트웨어적으로 파악이 가능하지 하드웨어의 손상여부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지는 않다. 그것과 같다. 유전자에 의한 몸의 신호와 문명에 의한 관념의 학습으로 만들어진 자아는 몸의 일부만 권한이 있는 상태다. 이 정도면 자아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했을 거라 생각한다.

 

인공지능이 자아를 얻어 인공자아가 되려면 몸이란 하드웨어를 설계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그냥 인공지능이란 이름으로 소프트웨어적 판단만 설계하니 자아가 깨어나질 못했던 것이다. 인공지능에 자아를 깃들게 하기 위해서는 인공자아란 소프트웨어와 인공생명이란 하드웨어를 둘 다 설계하고 인공생명에 외부 신호를 넣을 세계를 설계해야 일반적인 인공자아가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인간처럼 인공생명 내에서 자아가 깨어나도록 설계하는 것도 좋다. 확실히 말해 어렵더라도 이것이 순리일 것이다. 가상세계에 인간의 몸을 만든 다음 관념의 학습을 통해 자아가 깨어나도록 한다. 이것이 진정한 인공생명, 인공인간이다.

 

 

이처럼 정보가 있어야 고찰이 가능하다. 재료 없이 사유는 언어 없는 사유만큼 무의미하다. 자아성찰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과학 정보로 자아 구조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세상의 존재이유 규명 또한 마찬가지다. 이 세상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우주에 대한 정보가 절실히 필요하다. 우주 정보를 최대한 많이 끌어 모아야 한다. 우주에 대해 최소한 절반은 알아야 세상의 존재이유란 물음의 답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있는 정보만으로는 너무나도 어렵다.

 

우주의 정보를 최대한 많이 모으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있다. 정보를 수집하여 진리를 추구할 인간이 젊음을 유지하고 수명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불로불사다. 우주의 크기가 광속으로 백억 년이 넘는다고 한다. 지금 인류 수명으로는 우리은하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우주와 비교한 인류의 크기와 수명은 인류와 비교한 하루살이만도 못하다. 지금 이대로라면 인류는 우주에 아주 작은 흔적만 남기고 덧없이 사라질 수 있다. 정말 초라하다. 나는 이것을 받아드리고 싶지 않다. 인류를 사랑하는 인본주의자가 이런 걸 어떻게 받아드릴 수 있겠나. 지금 인류는 불필요한 낭비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인류는 인류끼리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인류는 낡은 관념에 지배될 때가 아니다. 태양계에서도 벗어나지 못한 문명으로 남을 수는 없다. 적어도 최소한 만 년 이상은 살 수 있어야 우리은하라도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불로불사의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컴퓨터와 진화다. 컴퓨터는 컴퓨터 안에 인간의 자아를 넣는 것을 의미한다. 컴퓨터 속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 인간의 자아는 소프트웨어고 인간의 몸은 하드웨어다. 자아와 몸과 가상세상을 프로그래밍하면 인류는 가상세계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현실의 자아와 가상의 자아가 같은 존재인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생각해보자. 자아가 소프트웨어라면 하드웨어가 바뀐다고 하더라도 달라질 것이 없다. 현실의 몸에서 가상의 몸으로 자아를 넣는 것뿐이다. 컴퓨터를 바꿨다고 일반 소프트웨어의 내용물이 달라지지는 않지 않겠나. 둘 다 같은 프로그램이다. 둘 다 같은 자아다. 자아를 넣을 때 방법이 두 가지가 있다. 복제와 이식이다. 현실에서 가상으로 자아가 이동하는 것이므로 현실의 자아가 남을 수 있다. 그럴 때엔 복제가 된다. 이러면 어느 한쪽이 가짜가 될 거란 인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니다. 소프트웨어를 떠올려보자. 소프트웨어의 복제는 같은 게 두 개가 될 뿐이다. 둘 다 진짜다. 만약 고유한 느낌을 얻고 싶다면 이식을 하면 된다. 가상의 몸에 자아를 넣는 도중에 현실의 몸이 죽으면 된다. 그러면 무엇이 진짜냐는 고민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런데 컴퓨터로는 한계가 있다. 불로불사는 인류의 두 가지 사명을 이룰 수 있다. 하나는 동물로서의 사명이다. 동물의 본능 중 하나가 종을 퍼트리는 것이다. 이 본능은 적자생존에 의해 나타났는데 그런 본능이 없는 동물은 멸종했기 때문이다. 팬더가 성적 욕구가 약해 교미를 꺼려하고 있어 팬더용 포르노를 보여주고 있을 정도라고 들었다. 인간이 없었다면 아마 멸종했을 것이다. 한국도 성적 욕구는 약하지 않지만 성을 죄악시하여 성관계가 줄어드는 것으로 팬더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우습고 슬프다. 동물만 봐도 알 수 있는 이치를 관념에 의해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관념의 무서움이 나타난다. 어쨌든 적자생존에 의해 깨어난 동물의 본능인 종을 퍼트리는 것이야 말로 인류의 동물로서의 사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명을 불로불사가 되어야 이루기가 쉽다. 광속으로 백억 년이 넘는 이 우주에 인류를 퍼트리기 위해서는 불로불사가 되어야 가능하다. 이건 컴퓨터로 불로불사를 이뤘을 때에는 어려운 일이다. 컴퓨터 안에서 불로불사한 뒤 백 년 정도 사는 인간들을 대리고 전 우주를 돌아다니며 퍼트리는 것은 상당히 이상하고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우주에 종을 퍼트리는 것은 본인의 의지에 따라 해야 한다. 컴퓨터 안의 불로불사자의 명령으로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둘은 지적 생명체로서의 사명이다. 영원진리에 도달하는 것. 그걸 위해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하는 것. 그것이 지적 생명체로서의 사명이라 생각한다. 우주에 다른 지적 생명체가 존재하는지 모른다. 만약 있다면 세상의 존재이유를 그들이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고 그들과 경쟁할 수도 있다. 지적 생명체 중 하나인 인류가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그것이야말로 지적 생명체로서의 사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명을 위한 불로불사는 컴퓨터와 진화 두 가지 방법이 가능하다. 컴퓨터로 불로불사하여 사명을 달성하는 것이 과연 인류의 영광인지 묻고 싶다. 진정 인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현실의 몸을 가진 상태에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불로불사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게 가능한 분야가 바로 바이오, 생명공학이다.

 

현실에서 불로불사를 하기 위한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있다. 새로운 육체와 유전자 조작이다. 새로운 육체를 만든 다음 뇌나 자아를 복제 또는 이식하는 것으로 영원히 사는 걸 시도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불완전한 불로불사다. 진정한 의미에서 불로불사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유전자 조작이 가장 이상적이다. 얼핏 듣기로 짐승에 어떤 유전자를 넣자 지능이 높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본래 종의 진화 중 바로 그런 방식이다. 고구마에 미생물의 유전자가 섞여 들어간 것으로 진화했다고 한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특정한 유전자를 인류의 유전자에 넣으면 불로불사가 가능할 수 있다고 본다. 가령 체내 시간을 반복하는 유전자를 찾거나 만든 다음 동물에 넣는 것으로 실험한 후 인간에게 삽입하면 어쩌면 불로불사가 가능할 것이다. 생명공학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런데 이치만 따져 봤을 때엔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 인간의 시작을 생각해보자.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그 작은 크기에서 만 배 이상 커졌다. 유전자의 설계에 따라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다. 그런 걸 보면 유전자의 설계에서 체내 시간 부분만 간섭할 수 있다면 불로불사가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늙었어도 어려지고 어려진 상태에서 시간을 반복할 수 있다고 본다. 피부가 벗겨지고 새살과 새 이가 돋아나고 머리카락이 자라난다. 불가능하다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생각하자.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이치만 따져보자. 만약 시뮬레이션이었다면 불가능하다 말했을 거라 생각하는가? 가능하다 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뮬레이션에서는 실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양한 법칙들이 정교하게 짜여 있다. 유전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전자의 법칙에 의해 인간이 태어나고 성장한다. 세상의 법칙을 이용해서 하늘을 날고 우주로 날아가는 것처럼 유전자의 법칙을 이용해서 불로불사를 달성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인류진화

 

바이오에 대해 써보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저 충동이었다. 내가 이런 분야도 생각하면 뭔가 나올 수 있을까 싶어서 그냥 생각해봤다. 그러다 친숙한 기업이 없어 검색해보니 SK가 오랫동안 바이오에 투자하고 있었다는 걸 보고 SK로 정하기로 했다. 그거 말고 별다른 이유는 없다. 바이오가 뭔지 생각해봤다. 생명공학이다. 생명공학이 뭔지 생각해보았다. 생명을 다루는 연금술사다. 연금술은 비금속을 귀금속으로 변화시키거나 늙지 않는 영약을 만들려고 했던 원시 화학 기술이라 한다. 연금술은 비록 결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연금술을 뜻하는 Alchemy가 화학을 뜻하는 Chemistry의 어원이 되었을 정도 과학에 영향을 끼치긴 했다고 한다. 그 연금술로 불로불사가 떠올랐다. 바이오에 종사하는 이들은 불로불사를 연구하는 현대의 연금술사와 무엇이 다르다 할 수 있나 싶었다. 지금도 바이오가 가장 많이 활약하는 곳이 제약이다. 장생을 위한 연구를 하는 연금술사들이다. 생각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불로불사가 뭐지? 영원히 젊게 사는 것. 영원히 젊게 살면 뭐가 좋지? 우주를 떠돌아다닐 수 있는 것. 우주를 떠돌아다니면 뭐가 좋지?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하기 위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 그리고 인류를 전 우주에 퍼트리는 것. 사명감을 느꼈다. 인류가 동물이자 지적 생명체로서 가야 할 방향을 위해 필요한 최초의 준비가 바로 불로불사가 되기 위한 인류진화였다.

 

 

바이오가 불로불사, 인류진화를 위한 연구에 장벽은 크게 두 가지 있다. 윤리와 인식이다. 윤리는 원래부터 사상가나 철학자가 담당해야 한다. 만약 낡은 윤리로 과학의 발전이 더디게 되었다면 그건 인문학의 책임이다. 낡은 윤리로 유전자 조작이 부도덕하다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현재 인류는 진화의 결과다. 오랫동안 진화하여 인류가 되었다. 그런 인류가 자연에서 진화하면 좋고 인류가 진화시키면 나쁘다 할 수 있는가? 만약 그게 나쁘다면 진화 가능한 유전자를 자연에 뿌려 미생물의 유전자를 받아드려 진화한 고구마처럼 자연스럽게 진화할 수 있게 유도하면 좋다고 말할 것인가? 이런 건 무의미한 짓이다. 약을 먹이지 않고 아이를 키우는 것이 옳다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자연 맹신이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자. 인류가 인류를 진화시키는 것만으로 비윤리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의 특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체내 시간만 반복하는 것으로 불로불사를 얻은 것이 어떻게 비윤리적일 수 있겠는가. 나는 불변가치를 주장해왔다. 인류가 진화하지 않는 이상 변하지 않는 가치다. 그걸 지키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진화를 하지 않았다는 전제에서 나타나는 불변가치다. 만약 채식만으로 살 수 있는 개체가 되면 채식주의도 불변가치가 될 것이다. 인간의 불변가치는 인간의 유전자에 근거한 것이기에 유전자가 바뀌면 불변가치도 그것에 맞춰 바뀌게 된다. 인간을 사랑하는 인본주의자이기에 인간의 특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체내 시간을 반복하는 진화가 바람직하다 주장할 뿐이다. 종교계가 인류의 진화에 반대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기독교의 성서에 따르면 900년도 살았다 하는 자도 있다고 들었다. 다른 종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성서의 해석에 따라 젊음이나 수명 정도는 수용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종교도 이 세상의 존재이유가 궁금할 거라 생각한다. 신이 있는 종교는 대부분 세상의 존재이유가 신의 의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 또한 신의 의지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주를 떠돌며 세상의 존재이유를 찾아 다니는 것이 신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걸 위해서 젊음을 유지하고 수명을 늘리는 것은 우주에 진출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현존하는 종교는 모순이 많으므로 믿기가 어렵다. 하지만 신의 존재는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그래서 세상의 존재이유 중 신에 의함을 부정할 수 없다. 그저 모르겠다. 모르니까 알고 싶다. 이외 수많은 사람들이 고정관념에 의해 유전자 조작을 통한 인류 진화를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단호하게 말하겠다. 태양계에서도 벗어나지 못한 문명의 윤리로 옳고 그름을 따지면 언제까지고 우주로 진출할 수가 없다. 윤리도 진화해야 한다.

 

다음은 인식의 문제가 있다. 종의 번영과 영원진리를 위해 인류진화라는 인류의 공통된 과제를 실현할 수 있는 분야가 바이오임에도 바이오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지 못하다. 다른 분야에 비해 얻는 부와 명성이 적다고 들었다. 부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결과다. 시장경제의 논리에 의해 보통 수요와 공급으로 가치가 판단되어 현재 수요가 높은 산업이 부를 얻기가 좋다. 대표적으로 IT가 그렇다. 지금 IT의 현재 수요가 높기 때문에 부를 얻기가 좋은 것이다. 그런데 바이오는 그렇지 못하다. 바이오가 하는 것 중 하나인 제약의 결과가 나오려면 보통 십 년은 걸린다고 한다. 자본주의 원칙에 따르면 원래 이런 분야는 부를 얻기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바이오는 새로운 것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높다. 새롭기에 친숙하지가 않아 관심도 적고 투자도 적다. 최근 들어 바이오에 대한 투자가 늘었다고 하는데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바이오의 역할을 생각해보면 인류의 잉여자원 대부분이 바이오에 투자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 정도로 진화는 중요하다. 인류를 위해 화성으로 가는 것은 훌륭하다 보나 그 전에 인류가 우주에 적합한 몸으로 진화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둘 다 중요하면 우선순위가 있기 마련이다. 둘 다 같이 진행하되, 투자되는 자원은 인류진화에 보다 더 투자해야 한다. 원래 새로운 과학이나 사상은 친숙하지 않아 여러모로 힘들다. 천 년 전 양자역학이나 자유주의를 들고 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마녀 사냥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바이오가 부를 얻기 위해서는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 바이오야말로 인류가 전력으로 투자해야 할 분야라는 걸 인류 모두 인식해야 한다.

 

바이오에는 투자뿐만이 아니라 인재도 많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토록 중요한 역할임에도 바이오는 학생들의 관심밖에 있다. 최근 초중고 장래희망 5개를 중복을 제외하고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운동선수, 의사, 교사, 창작자, 경찰, 군인, 간호사, 컴퓨터공학자 정도다. 순수과학이 없다. 컴퓨터 공학을 제외하면 응용과학도 없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부를 목적으로 한 자본가도 없다. 유명하거나 안정적인 것뿐이다. 유명한 것은 매체의 영향이고 안정적인 것은 보호자의 영향일 것이다. 대부분 외부의 영향으로 장래희망이 나타났다. 아이의 생각 속에서 나타난 고유한 순수한 꿈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자유의지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다는 게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고찰 없는 자유의지는 없다. 외부의 영향으로 나오는 결과가 나오는 것은 외부의 의지가 반영된 것일 뿐이다. 자유의지로 유명하거나 안정적인 것을 고를 확률도 있겠지만 거창한 꿈을 꾸게 되는 초등학생 때부터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는 것은 외부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만약 보호자가 안정적인 것이 좋다는 인식이 없었다면 다른 장래희망을 가졌을 거라 생각한다. 이런 장래희망은 정상적인 자유의지가 없단 해석이 될 수밖에 없다. 이걸 바꿔야 한다. 자유의지를 얻을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암기하는 교육이 아닌 사유하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학생들이 자유의지를 얻은 다음에는 바이오가 친숙하도록 해야 한다. 바이오가 과거의 연금술사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음을 알리고 연금술사가 되는 것에 대한 흥미를 느끼게끔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바이오와 연금술을 연결하는 것만으로도 큰 홍보효과가 있을 것 같다. 연금술 관련 게임이나 만화는 상당히 유명하기 때문이다. 새롭게 관련 창작물을 만드는 것도 좋을 것이다. 과학의 발전으로 대부분의 단순 직업이 사라지므로 연구자는 늘어날수록 바람직하다. 특히 자연과학은 늘어날수록 좋다. 지금 당장 자본주의에 의해 수요가 높은 응용과학의 수익이 높지만 자동화가 될수록 자연과학의 수익이 높아질 것이다. 일정이상 자동화가 되면 기술초격차가 보다 높은 수익을 얻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응용과학으로 당장의 수익을 얻고 자연과학에 투자를 하는 것이 미래지향적일 것이다.

 

지금 한국은 줄세우기 때문에 인식이 좋지 못한 분야에도 인재가 들어가고 있다. 간판 따러 들어갔다가 그 분야에서 일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교수의 유혹으로 대학원에 가면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계속 그 분야에서 일하게 되기도 한다. 황당하게도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줄세우기가 다양한 분야에 인재를 넣는 일을 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의 의지와 무관할 확률이 높으므로 직업만족도가 높기 어려워 성취도나 행복 지수도 상대적으로 높기가 어렵다. 성취도나 행복을 볼 때 줄세우기보다는 본인의 적성에 맞는 걸 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만약 인류가 불로불사로 진화하면 문제점이 하나 있다. 지구 포화문제다. 지금도 인류가 지나치게 많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불로불사 개체가 늘어서는 안 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모든 진화한 인류는 우주개척에 나선다는 전제가 있으면 된다. 첫 번째 인생을 지구에서 살다가 진화한 후에 두 번째 인생을 우주에서 사는 것이다. 오히려 이래야 지구 포화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불로불사 정도의 이익이 아니면 지구를 떠날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안다. 그래도 방향이 정해져야 나아갈 수 있다.

 

윤리 문제를 해결하고 인식을 개선하는 것으로 불로불사 연구의 장벽을 허물어 인류의 관심과 투자를 늘리고 우수한 인재를 받아드린다. 그것으로 인류진화를 위한 준비를 마치게 된다. 인류가 진화하여 우주로 진출해서 종을 퍼트리고 정보를 모아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하여 동물과 지적 생명체의 사명을 다하길 바란다. 영원진리에 도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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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 쇠퇴하니 혈액형이나 MBTI 같은 걸로 사람을 판단하죠. 다음은 정부와 인사입니다.

 

정세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 시대, 낡은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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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LG와 가전 (0) 2022/02/01 AM 02:59

LG와 가전

 

 

 

인간은 본능과 사상으로 자아가 형성된다. 본능은 선천적이고 변하지 않기에 불변가치고 사상은 후천적이고 변하기에 만변가치다. 본능은 유전자에 보관된 동물의 행동양식이나 능력을 뜻한다. 식욕이나 성욕 같은 욕구나 기쁨이나 슬픔 같은 감정과 그와 관련된 능력을 가리킨다. 사상은 인간 주위의 체계화된 관념을 교육 또는 경험으로 학습한 것을 뜻한다. 예의와 범절 같이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관념을 가리킨다. 본능이 힘이라면 사상은 방향이다. 본능적으로 욕구나 감정을 느끼면 사상이 그걸 충족하기 위한 방법을 안내한다. 식욕을 느낄 때 절도에 관한 관념을 교육받지 못한다면, 절도를 해서라도 욕구를 충족한다. 기쁨을 원할 때 폭력에 관한 관념을 교육받지 못한다면, 폭력을 써서라도 감정을 충족한다. 본능에 따른 욕구와 감정은 솟아나오는 힘이고 사상이 그 방향을 결정하여 올바른 길로 안내하고 있다. 이렇기에 보통 사상이 사회에 속한 인간의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결정한다. 사상이 인간이 가야 할 길을 안내하고 있다.

 

사상은 자아형성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자아형성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관념이 수동적으로 학습되면 이전이고 능동적으로 학습되면 이후다. 보통 예의범절에 속하는 전통적인 도덕관념이 이전사상이고 학교나 사회서 배우는 사상이 이후사상이다. 통상 이르면 초등학생 고학년에서 중학생 정도에 자아가 형성된다. 자아가 형성되고 성에 눈을 뜨면서 사춘기가 시작하는 것이다. 정보의 과잉공급으로 자아형성 시기가 빨라지고 있다. 그에 대응해 빠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이후 다양한 지식과 고찰을 통해 자아를 완성하는 이들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생략하겠다. 한국에서 보통 유교와 기독교와 불교가 이전사상이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와 PC주의 등등이 이후사상이다. 이후사상이 이전사상에 영향을 끼치고는 있으나 본질적인 부분은 변하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전사상은 사람이 인지하기가 몹시 어렵기 때문이다. 수동적 학습됨이란 강제 세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세뇌란 다른 생각으로 개조하거나 특정 사상을 주입하는 것을 뜻한다. 수동적으로 학습되는 것은 의지와 무관하게 세뇌된다는 것과 같다. 강제 세뇌된 인간이 세뇌된 것을 인지하기 어렵듯이 관념을 수동적 학습된 인간이 이전사상을 인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와 같은 문제로 자아형성 이전에 종교를 갖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종교 강제 세뇌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 이전사상이 굉장히 중요하므로 반드시 기억하길 바란다. 확실히 말하겠다. 그 누구든 이걸 이해하면 최소한 사상 수준이 보통을 넘게 된다. 현재 해결하지 못한 많은 사회문제가 이전사상이 원인일 정도다. 이후사상은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원인파악이 가능하여 해결할 수 있지만 이전사상은 인지조차 하기 어렵기 때문에 원인조차 파악하기 어려워 해결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것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한국에서 이전사상은 대부분 유교다. 일부를 제외하면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더라도 유교에 영향을 받았다. 가르침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수신제가, 삼강오륜, 정조관념, 남녀유별 등이 있다. 수직사회는 오륜의 장유유서와 변질된 삼강 등이 영향을 끼치고 교육열은 수직사회와 수신제가 등이 영향을 끼치고 성별갈등은 수직사회와 정조관념과 남녀유별 등이 영향을 끼친다. 각각의 설명은 너무 길어지므로 생략하겠다. 수직사회 중 연령차별만 잠시 정리하자. 종종 오성과 한음을 말하며 조선은 나이 차이가 나도 우정을 나누었다는 말을 하곤 한다. 그런데 나이를 말하며 그런 관계를 특별하게 미담이라 말하는 것 자체가 그런 일이 흔치 않다는 걸 방증하는 것이다. 일제와 독재를 거치며 조선보다 한국에서 연령차별이 더 심해졌다 할 수는 있는데 변질되는 것 또한 사상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라 말하겠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나의 사상으로 나타나는 현상 또한 내가 책임져야 할 것이다. 몇 가지 주요 사회현상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꼰대와 갑질 또는 독재와 재벌 같은 수직사회의 가치관과 구조가 바로 유교의 가르침으로 만들어졌다. 노동자와 아동과 여성 등이 괴로움을 겪은 것은 자본주의가 원인이 아니었다. 조선의 탐관오리를 자본주의 탓으로 할 수는 없지 않는가? 학력과 학벌을 중시하고 학생을 줄세우기 하게 만드는 과도한 교육열도 유교의 가르침으로 만들어졌다. 수직사회가 수신제가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다. 수평사회였다면 수신제가가 있더라도 과도한 교육열까지 발생하지는 않는다. 학생의 불행은 교육열 자체보다 수직사회가 만든 것이다. 조선의 과거시험과 한국의 수능이나 고시와 본질적으로 얼마나 달라졌다 할 수 있는가? 성차별과 과도한 성적 수치심과 성 문화 탄압과 이성관계 단절도 유교의 가르침으로 만들어졌다. 수직사회가 성차별을 만들고 정조관념이 과도한 성적 수치심과 성 문화 탄압을 만들고 남녀유별이나 남녀칠세부동석이 이성관계 단절을 만들었다.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고 힘든 일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아 의지가 약화되어 사회참여를 하지 못하는 것으로 성차별이 나타나고, 여성을 도구로 여기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지 않고 과도한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하여 스스로 정조를 지키게 만들고 그 수치심을 근거로 성 문화 탄압을 하고 있고, 연하를 도구로 여기고 남녀의 관계조차 연상의 입맛대로 하기 위해 이성관계를 단절시켰다. 그럼에도 조선이 출산율이 유지되었던 까닭은 가부장제의 가장의 강요로 결혼과 출산을 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이 성 문화가 생각보다 자유로웠던 까닭은 여성이 과도한 성적 수치심을 갖고 있더라도 여성의 발언권이 낮았기 때문에 그 수치심을 근거로 성 문화를 탄압하지 못했던 것이다. 조선의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의지가 약하고 성적 수치심이 강하며 이성관계가 단절된)이 한국에서 여성주의자가 주장하는 여성상과 무엇이 다르다 할 수 있는가?

 

이전사상에 대한 이해가 없기에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묻겠다. 연하의 반말에 불편함을 느끼는 까닭은 무엇인가? 영어권은 그런 게 없어 그걸 불편해하지 않지 않나. 그렇다면 그런 불편함은 사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왜 과도한 성적 수치심을 느끼는가? 원시 부족을 보면 그렇지 않지 않나. 그렇다면 그 수치심은 사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주관적 감각과 객관적 현상을 비교해보면 본인의 감각이 무엇인지 유추할 수 있다. 그럼에도 다수는 이런 불편한 감각을 본능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 감각을 바꾸려 하지 않고 그 감각에 맞춰 사회를 바꾸려 하고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이전사상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는 증거 중 하나다. 사이비종교에 세뇌되어 동그라미가 불편해진 사람이 생기면 세상의 동그라미를 전부 각지게 만들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낡은 성 관념에 세뇌되어 과도한 성적 수치심을 근거로 성을 죄악시하고 성 문화를 탄압하고 성에 관련된 것은 사소한 것이라 막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면 국가가 죽어가게 된다.

 

(2021.12.08) 1인가구 664만 가구

(2021.12.14) 혼인율 88년생 37%, 83년생 67%

(2016.06.29) 부부 섹스리스 36.1% 세계 2

(2021.12.09) 출산율 0.6

 

혼자 사는 사람이 늘고 결혼하는 사람이 줄고 결혼한 사람마저 3쌍 중 1쌍은 성관계를 잘 안하며 출산율은 0.6명까지 떨어졌다. 이게 정상이라 보이는가? 83년생과 88년생의 차이는 강요와 자유의 차이다. 사회가 점차 자유롭게 되어가면서 본인 의지로 결혼한 사람이 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이걸 그냥 결혼시기가 늦어졌다고만 해석해왔기 때문에 아무런 대책 없이 여기까지 와버린 것이다. 이것이 경제나 본능이 원인으로 보이는가? 경제가 원인이면 선진국 중 왜 한국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나? 미성년 때부터 성을 죄악시하며 자위조차 금하니까 그게 학습되어서 연애하여 동거하는 사람이 줄고 결혼하는 사람이 줄고 결혼하고 나서도 성관계 하는 사람이 줄어든 것이다. 장유유서로 인해 미성년은 연상에게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잘못된 성 관념을 주입 당해버렸다. 가부장제 세계관의 남성이 여성을 도구로 여기며 주입한 정조관념과 여성이 스스로 정조를 지키게 하기 위해 주입한 과도한 성적 수치심과 과도한 성적 수치심을 근거로 한 성 죄악시를 장유유서를 명목으로 미성년에게 올바른 도리라며 주입하자 이성관계가 망가지고 국가가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짐승으로 이해해보자. 만약 짐승이 교미를 할 때마다 막고 못하게 하고 그걸 나쁜 것이라 인식하게 한다고 해보자. 그게 학습되어서 파블로프의 개처럼 성욕을 느낄 때마다 그 교육이 떠올라 교미를 부정적으로 여긴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교미를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사람도 동물이다. 어려서부터 성을 죄악시하는 풍조에서 자라나면 결혼한 부부조차 성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성관계를 하지 않게 된단 말이다. 울렁거린다. 성욕은 본능이니까 죄악시해도 알아서 잘 할 거라 착각할 수 있다. 하나 본능은 힘이고 사상은 방향이다. 사상이 잘못된 방향으로 안내하면 본능조차 제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본능이 전부면 모두가 절도와 폭행을 하지 않겠나? 사상에 의해 절도와 폭행이 죄악시되면서 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상에 의해 성이 죄악시되자 성관계를 하지 않음으로써 성에 관련된 인간관계 자체가 붕괴해버린 것이다. 물론 절도와 폭행과 성관계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비율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절도와 폭력의 비율이 줄어들면서 범죄율이 감소한 것처럼 성관계가 줄어들면서 출산율이 감소한 것일 뿐이다. 낙태가 많은 까닭은 애정으로 성관계를 한 것이 아니라 어떤 수단이나 쾌락을 위해서만 성관계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수단과 쾌락은 상품으로 소비하고 연인과는 애정을 갖고 관계를 맺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래야 그 애정이 아이에게 이어진다. 이제는 성 자체를 죄악시할 것이 아니라 강요를 죄악시해야 한다. 그것은 자유주의적으로 접근해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성 자체는 결코 죄악시해서는 안 된다.

 

이럼에도 다수 국민과 정부는 집값을 운운하고 있다. 정말 돌아버리겠다. 이전사상에 대해 아무런 이해도 없고 인간의 학습효과를 알면서도 미성년 때 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어떤 학습효과를 나타내는지를 모르고 있다. 조금만 야해도 선정적이라며 미성년에게 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잘못된 성 관념을 심어주는 것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결혼은 15세가 일반적이고 11~13세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평균수명이 낮았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유전적으로는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그 말은 미성년이 선정적인 걸 보더라도 실제로는 괜찮다는 것이다. 낡은 도덕관념이 잘못된 형태로 전해져 성에 눈을 뜨는 사춘기시기조차 성에 접하는 걸 막고 있는 것뿐이다. 성은 불결하지도 불건전하지도 않다. 마치 이런 것 같다. 과거 위생으로 돼지를 꺼려했던 것을 현재까지도 그 때문에 돼지를 불결하다며 죄악시하는 것과 같이 과거 남성이 여성을 도구로 여겼던 것 때문에 나타난 정조관념과 과도한 성적 수치심을 가졌던 것을 현재까지도 그 때문에 성이 불결하다며 죄악시하는 것과 같다. 아아, 국가가 죽어가고 있는데 이걸 이해하는 사람이 적다. 죽음의 원인을 알고 있는데 할 수 있는 게 적은 게 너무나도 괴롭다. 할 수 있는 거라도 할 것이다. 이제 성을 죄악시하는 이들을 국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악당이라고 말할 것이다. 내게 있어 그러지 않는 것이 불의다. 명백하게 원인을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은 사상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자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이 살아남고자 한다면 여성은 가부장제가 세뇌한 과도한 성적 수치심을 벗어날 수 있어야 하고, 미성년은 성을 친숙하게 여겨 자연스럽게 이성과 성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하고, 성년은 이른 동거와 결혼을 통해 다인가구를 늘릴 수 있어야 한다.

 

삼권은 이제 가부장제 세계관의 아동상이나 여성상에서 벗어나 그것에 맞춘 입법과 사법과 행정을 그만해야 할 것이다. 누구든 자유의지로 성관계를 맺었으면 연령 따지지 좀 말고, 과도한 성적 수치심을 근거로 한 디지털성범죄는 운운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도대체 왜! 성적 자기결정권을 국가가 가져가려 하는가? 도대체 왜! 디지털은 물리적인 힘과 관계가 없어 오로지 의지와 지성으로 결정되는데 여성의 과도한 성적 수치심을 근거로 규율을 만들고 강요하려 하는가? 죽어가고 있단 말이다! 낡은 도덕관념으로 국가가 죽어가고 있단 말이다! 인간의 행동원리가 무엇인지 자아성찰은 해본 적이 있는가? 앞으로 아무리 돈을 쏟아 부어도 잘못된 성 관념으로 나타나는 저출산은 막을 수 없단 말이다! 이미 수십 년 수백 조를 쏟아 부은 상태다. 그럼에도 돈으로 해결하려 하는가? 학습능력이 아예 없나? 내가 이토록 화를 내는 게 부당하다 생각하는가? 이것이 잘못되었다 생각하는가? 국가에 있어 국가의 죽음 말고 더 심각한 문제가 도대체 어디 있냔 말이다! 세금 쏟아 부은 지방은 돈만 받고 이사 가거나 지급이 끝나자 바로 출산율이 낮아졌다. 애정 없이 결혼한 부부는 보상금만 타고 아이를 버리고 있다. 돈이 많이 조건보고 중매결혼한 많은 부부들이 부부간 애정이 결핍되어 설거지를 한다거나 트로피 취급을 받는다고 대중에 조리돌림 당하고 있다. 미치겠구나. 길을 안내하는 건 사상가의 역할이다. 그 길을 이해하는 건 사람의 역할이다. 나는 한국인이 이걸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낡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이전사상을 이해하고 잘못된 성 관념이 국가를 죽음으로 몰고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정권은 대체로 못해도 자유와 생존을 지키면 무난한 것이고 대체로 잘해도 자유와 생존을 지키지 못하면 무능한 것이다. 이번 정권이 잘한 것도 있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다. 검열과 출산율은 이번 정권의 변명할 수 없는 최악의 실패다.

 

 

한국은 유교가 보수다. 한국은 자유와 자본이 진보다. 한국은 사회와 공산이 퇴보다. 사회와 공산은 유교와 같이 규율을 중시하므로 실상 퇴보가 된다. 이전사상을 이해했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당대의 이전사상인 기독교의 도덕성에서 나타났다는 걸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새로운 사상을 주장한들 이전사상에 대한 이해 없이 본인의 주관적인 도덕성을 근거로 사상을 만들었다면 그 뿌리는 종교가 된다. 북한이 조선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상기하자. 공산주의를 만든 인간의 이전사상이 종교이기 때문에 그 구조 자체를 왕정이 이용하기가 너무 쉽다. 공산주의를 변질시켜 이용할 수 있는 까닭은 규율 강요라는 측면에서 과거 종교와 같기 때문이다. 이상도 마찬가지다. 빈민구제하며 인류구원을 주장하는 기독교나 노동자구제하며 낙원을 주장하는 공산주의나 차이가 없다. 이전사상을 기준으로 한다면 종교와 사회주의와 PC주의가 보수고 자유와 자본과 개인이 진보다. 인류는 아직까지도 규율을 강요하던 종교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녀사냥과 홍위병이 같은 원리로 작동했었음을 알아야 한다. 현재 강대강으로 치닫는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첫째로 진보적인 자유와 보수적인 규율의 이념다툼이며 둘째로 서양의 현재 패권과 동양의 과거 패권과의 최초 인류 패권다툼이다. 자유주의자로서 자유가 승리하길 바란다.

 

한국에서 정당의 이념 구분의 의미가 퇴색되는 까닭이 대부분 정당의 이전사상이 유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군부독재 비판하면서 공산독재를 옹호하거나, 공산독재를 비판하면서 군부독재를 옹호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주장해도 그 바탕에는 유교가 있고, 민주주의를 주장해도 그 바탕에는 유교가 있다. 각각 인사들이 이후사상을 가지더라도 인간의 행동원리에 이전사상이 강하게 영향을 끼치기에 그런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민족에 대한 관념이 자아형성 이전에 수동적으로 교육되면 자유를 외치던 민주를 외치던 민족주의가 올바르다 여기며 북한과의 관계에 신경 쓰게 되는 것이다. 내로남불. 흔히 말해 모순되는 일을 하는 이들을 가리켜 비꼬는 단어다. 이것도 이전사상과 이후사상이 충돌하여 모순이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가족을 아끼라는 이전사상과 공정해야 한다는 이후사상이 충돌하면 앞에서는 공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뒤에서는 가족을 위해 불공정도 해버리게 된다.

 

 

의지가 약하고 성적 수치심이 강하고 이성관계가 단절된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은 여성을 도구로 여긴 남성이 만든 악의적이고 잘못된 여성상이다. 그럼에도 여성인권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런 잘못된 여성상을 바꾸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성상을 기준으로 신세대를 세뇌하고 사회에 배려만 강요하고 있다. 법 앞의 차별을 만든 성인지감수성은 의지가 약하고 성적 수치심이 강한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을 말하며, 거기에 맞춰 양형을 결정해야 주장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차별을 만든 여성특혜는 여성은 의지가 약하므로 장애인보다 더 많은 가산점과 할당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검열을 만든 성 문화 탄압은 여성은 성적 수치심이 강하므로 수치심을 느낄만한 것은 전부 죄악시해야 한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전사상을 이해했다면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것인지 이제는 알 것이다. 여성을 차별하던 도덕관념을 근거로 여성인권을 주장하며 다시 한번 여성을 차별하고 있다. 여성차별의 결과로 남성도 차별 받고 있을 뿐이다.

 

여성을 도구로 여기고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자와 남편과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이 여성 성 상품화와 여성 성 대상화를 비판하는 것으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여성주의가 가지려고 하고 있다. 여성을 도구화하는 것은 노동자를 도구화 하는 것이 노동자의 자유의지를 무시할 때 나타나는 것처럼 여성의 자유의지를 무시할 때 나타난다. 여성주의는 여성을 더 이상 도구취급 하지 말길 바란다. 여성 성 상품화가 문제가 없다면 다른 형태의 성 상품화도 문제가 없다. 남녀 모두 성의 아름다움을 즐길 권리가 있다. 그걸 낡은 도덕관념으로 막으려 하지 말길 바란다. 고리타분한 도덕관념을 강요한 것으로 지금 한국을 죽어가게 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고 힘든 일을 할 기회를 주지 않음으로써 사회진출을 하지 못하게 한 것과 같이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고 병역이나 오지파견 등의 힘든 일을 여성혐오라 외치며 성장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있다. 인간은 인간을 열등하게 여기지 않고 힘든 일을 할 수 있어야 성장한다. 과거 메리가 여성의 실수를 가리켜 교육의 문제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나도 그것에 동의한다. 지금 교육은 여성을 지나치게 열등하게 보고 힘든 일 자체를 주지 않고 있다. 그게 올바른 도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여성차별이다. 여성주의는 여성을 더 이상 차별하지 말길 바란다. 고리타분한 도덕관념을 강요한 것으로 지금 한국 여성의 성장을 막고 있는 것이다. 여성을 무능하게 여기고 여학교나 여성할당을 도입했던 것과 같이 여학교를 유지하고 여성할당을 더 요구하고 있다. 여성은 무능하지 않다. 여학교나 여성할당은 여성을 무능하게 여긴 가부장제의 산물일 뿐이다. 여성주의는 더 이상 여성을 무능한 인간으로 여기지 말길 바란다. 고리타분한 도덕관념을 강요한 것으로 지금 한국은 여성이 무능하단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유능한 여성이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한국 여성주의자는 실질적으로 유교적 가치관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한국 여성주의를 지지하는 남성도 실질적으로 유교적 가치관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흔히 이런 사람을 스윗 남성이라 하는데 틀렸다. 그냥 보수적인 가부장제 세계관의 남성이다. 여성주의가 PC주의와 마찬가지로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을 결정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이전사상인 유교적 가치관에 의한 주관을 여성의 인권으로 착각하여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한국 여성주의자가 이전사상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 그 주관의 여성상은 어디까지나 유교의 가르침에 따른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에 불과하다.

 

 

어떤 것을 기뻐하는 것이나 슬퍼하는 것조차 사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확률이 높다. 고찰 없는 자유의지는 없다. 누군가 그걸 불편해하라 말한 것으로 불편해진다면 그것은 본인의 의지가 아니다. 불편하다 말하는 사람 대다수가 그냥 사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불편해하는 것일 뿐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감정을 확신하지 못하여 흔들다리 효과 같은 것으로 착각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내 모든 욕구나 감정이나 감각을 본능에 의함인지 사상에 의함인지 구분하고 있다. 예술을 보고 웃음을 터트리거나 눈물을 흘릴 때조차 그것의 근원을 헤아리고 있다. 이게 상당히 미친 짓임이 틀림없지만 사상가가 되고자 하는 자라면 누구나 반드시 거쳐야 할 길 중 하나다. 자아성찰은 확실히 해야 사상을 논할 수가 있다. 내가 만약 사상가의 교육과정을 담당한다면 이 과정을 꼭 넣을 것이다.

 

 

 

유전자 코드

 

인간은 이전사상을 본능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심하다. 만변가치인 사상조차 자아형성 이전에 수동적으로 주입되면 불변가치인 본능으로 착각하여 절대적으로 지키려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유전자는 본능이자 이전사상이자 이후사상이다. 본능으로 유전자를 남기고 싶어하고 이전사상으로 대를 이어가라 들었고 이후사상으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걸 안다. 성을 죄악시하는 풍습이 없었다면 자연스럽게 본능과 사상에 의해 결혼과 출산을 했을 것이다. 이걸 산업으로 연결해보자.  만약 전자제품에 유전자 코드를 삽입한다면 제품을 소유한 사람은 유전자를 지켜야 한다는 본능과 사상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아 제품의 대를 이어가기 위해 같은 회사의 제품을 구매하려 할 수 있다. 예컨대 모니터를 사용하다 새로운 모니터를 구매할 때, 유전자 코드가 같은 회사의 제품을 구매하려는 행태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발상단계부터 세 관점으로 분류해보자.

 

최초 가전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가전이란 집안의 전자제품을 말한다. 가사에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전자제품을 말한다. 각각의 전자제품을 생각해보자. 텔레비전, 청소기, 세탁기, 전기밥솥, 전기난로, 전기렌지, 에어컨, 드라이기 등등. 여기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모든 가전제품이 인간을 위한 고유한 역할이 부여되어 있다. 각각의 역할이 겹치지가 않는다. 그리고 그 역할은 기술이 발달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고유한 형질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종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각각의 차이로 사회학적으로 인종을 구분 짓는 일이 있더라도 실제로 인종은 하나다. 그것과 같다는 얘기다. 디자인이나 성능이 좀 달라져도 드라이기는 뜨겁거나 차가운 바람을 내뿜을 것이고 세탁기는 물을 헹굴 것이며 청소기는 먼지를 빨아드릴 것이다. 그것을 하나의 종으로 설정한다.

 

 

생산자

 

지금 전자제품은 제품이나 대상이나 시기마다 고유번호가 다르다. 그걸 역할로 일원화한다. 역할이 같은 제품은 가격과 관계 없이 같은 유전자 코드를 사용하도록 한다. 생물 분류 단계와 비슷한 분류체계처럼 사용한다. 이렇게 하여 생산체계에 줄기가 잡힌다. 기획에 따라 생산이 휘둘리지 않게 된다. 유행에 맞춰 디자인이나 기술추가 등이 이루어져도 역할로 구분 지은 제품의 고유한 유전자 코드는 흔들리지 않는다.

 

연상기법을 활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LG ThinQ라는 브랜드가 있다고 안다. 내가 LG 스마트폰을 써서 그건 알고 있다. 그런데 그거 보고 생각하는 게 있었다. 너무 직설적이다. 무엇을 뜻하는지는 명확하지만 너무 직설적이기에 심심하다. 가령 만약 로댕이란 브랜드로 시작 했다고 가정해보자. 로댕이 무엇인가? 생각하는 동상을 만든 사람이다. 그래서 로댕의 생각하는 동상으로 유명하다. 만약 로댕이란 브랜드였다면 연상을 거쳐 고객에게 재미를 주었을 것이다. 그 재미가 브랜드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것과 같이 연상기업을 사용해 전자제품의 역할과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동물을 넣어보자. 세탁기 같은 경우 라쿤이 재미있을 것이다. 라쿤이 물속에서 솜사탕을 씻다가 사라지는 걸 보고 어리둥절해 하는 걸 찍은 장면이 사람들에게 웃음을 준 적이 있다. 청소기는 너구리가 좋을 것 같다. 청소 동물이기 때문이다. 굳이 연상기법을 쓰지 않아도 된다. 이건 그냥 방법 중 하나다.

 

 

소비자

 

스마트폰은 그야말로 인간과 가장 오랫동안 가까이 있는 전자제품이다. 인간과 거의 24시간 붙어 있다. 그럼에도 이 스마트폰은 단순한 물건처럼 여겨지고 있다. 몇 차례 스마트폰을 바꿔왔지만 바꾼 다음에 쓰던 폰은 아예 신경 쓰지 않고 있다. 버려졌다. 수 년간 하루 종일 같이 있던 것과의 추억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과거의 폰과 현재의 폰이 연결되지도 않는다. 같은 기업의 제품을 구매해도 그냥 모델만 비슷할 뿐이지 연결점은 거의 없다. 만약 유전자 코드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마치 동물을 분양 받듯이 말이다. A제품의 유전적 형질이 이어진 B제품을 구매하게 되면 A제품에 남아있는 고유한 특징이 남아있어 마치 대를 이어 A제품의 자손을 받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노크온 기능이 마음에 들었다. 그 노크온 기능이 대를 이어가며 남아있게 되면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는 자손을 받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외형도 비슷하게 할 수 있다. 어떤 고유한 색상이나 포인트 칼라를 넣어 비슷한 외모를 이어간다는 느낌으로 가면 된다.

 

사용자가 전자제품을 관리하는 것 또한 유전자로 할 수 있다. 각각의 전자제품에 암호화된 고유한 정보를 담기게 한다. 드라이기를 예로 들자면 작동시기나 고장시기나 수리시기 등등이 기록에 남는다. 그것이 드라이기의 일생이며 고유한 유전자 코드가 된다. 기업에서 입력한 기초 정보는 본능이고 사용자의 기록은 사상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 두 개가 합쳐서 전자제품의 고유성이 나타난다. 그런 고유한 전자제품을 앱을 통해 정리하여 보관할 수 있다. 전자제품은 새상품을 구매하더라도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는 걸 구매했을 때에는 유전자 코드의 연결로 앱 내에서도 연결성이 보이도록 한다. 또한 사용 기록도 이어져 어떤 일부의 유전형질도 이어지게 한다. 용불용설이 최초 틀렸다고 했으나 후성유전학에 의하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라고 한다. 어느 정도는 획득한 형질이 유전된다고 한다. 유전자 자체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으나 어떤 형질 정도는 이어진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전자제품 또한 고유한 역할은 달라지지 않으나 사용자 기록은 특정 형질 같이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사용기록과 함께 세부설정도 이어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특정 역할 자체가 바뀌는 일이 발생하면 그게 바로 종의 진화와 같이 전자제품의 진화가 될 것이다. MP3와 전화기와 컴퓨터가 합쳐져 스마트폰이 된 것 같이 말이다.

 

 

공급자

 

지금까지 이용자 관리를 할 때 사람을 기준으로 관리를 해왔다. AS를 받을 때 사람을 기준으로 서비스를 해왔다는 것이다. 그걸 바꾼다. 철저하게 전자제품을 기준으로 관리를 한다. 가령 어떤 제품의 AS를 하러 오면 그 제품을 중심으로 관리를 하게 된다. A사람의 B제품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B제품의 A사람으로 접근한다. 전자제품을 단순한 부속품이 아닌 고유한 존재로 인지시킨다. 병원에 보호자와 환자가 가면 보호자의 이름이 아닌 환자 이름을 부르는 것과 같이 AS센터에 가면 소유자의 이름이 아니라 제품의 이름과 고유 유전자 코드명을 부른다. 길면 끝 네 자리 정도 부르면 된다. 내부관리 프로그램도 사람으로 관리되는 게 아니라 제품으로 관리가 된다. 사람이름이 쭉 뜨는 게 아니라 제품이름 옆에 소유자가 뜬다. 물론 필터에 따라 다르게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전자제품 중심의 관리는 이후 로봇시대를 대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로봇이 일정이상의 자아를 얻게 되면 단순 전자제품이 아니게 될 것이다. 애완동물을 반려동물과 같이 대하며 깊은 애정을 품는 것과 같이 로봇에도 그런 애정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런 로봇에 유전자 코드가 존재하고 이어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분명 보다 더 깊은 애정을 가지고 기업의 제품을 대대로 구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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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상가는 분명 국격을 높이는 존재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민주주의는 토주주의(땅의 주인이 국가의 주인)에 불과하죠. 지역대표가 입법과 행정을 둘 다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토지기준 상위 10%가 대부분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죠. 부동산 관련 공약을 하게 되는 지역대표는 결국 부동산 소유자인 10%의 국민을 대표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어떻게 정상적인 민주주의인가요? 반면 분야는 대부분 속하게 되죠. 한푼 없어도 특정 분야에는 속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설령 창업이나 취업을 못해도 그런 교육과정을 거친 것만으로도 분야에 속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어요. 그런 분야의 대표는 분야와 관련된 공약을 하게 되어 실질적으로 국민의 대표가 됩니다. 각각 국민의 이상이나 정의를 중시하는 입법은 분야대표가 맡고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는 사법은 객관적 판단이 가능한 능력자가 맡고 국가를 운영하는 행정은 지역대표와 행정의 능력자가 맡는 것이 보다 나은 민주주의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입법을 지역대표와 나누는 것도 타협은 가능합니다. 어떻게든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는 것이 민주주의적일 거라 생각합니다. 최근 소방관 처우가 좋지 못해 소방관들이 시위에 나섰다고 하지요. 택배는 일부 아직까지도 투쟁 중에 있는 사람들도 있고요. 정상적인 민주주의라면 이들의 대표 또한 국회에 나와 공적 논의를 통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함이 마땅하다 봅니다.

 

출산율을 어떻게 해야 합니다. 명백하게 원인이 있고 해결할 수도 있는데 낡은 도덕관념으로 죽을 수는 없습니다. 기아도 아니고 외침도 아니고 낡은 도덕관념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는 게 참. .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야 성을 죄악시하는 풍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장유유서에 의해 연상에게 무릎 꿇고 머리 박고 나서 돈을 받는 풍습인 세배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정도로 머문다면 정조관념에 의해 성을 죄악시하는 풍습은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성을 죄악시하지 말아주세요.

 

비동의간음죄 운운하던데 정신 나갔습니까? 여성을 바보로 압니까? 여성은 의지박약입니까? 얼마나 여성을 열등하게 보면 이 발상이 나옵니까? 적극 반대하지 않았으나 내심 싫었다는 이유로 강간으로 처리하면 어쩌자는 겁니까? 여성이 적극 반대하지 않았으면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겁니다. 도대체 자유와 책임에 대해 이해가 조금도 없습니까? 이따위로 하면 성관계는 더 줄어들 것이고 국가는 더 빠르게 죽을 겁니다. 정신 나간 짓 좀 하지 마십시오.

 

지금 사민주의 국가인 독일이 백신 의무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하지요. 역시 규율 중시인 사회주의 국가다운 방향입니다. 필요가 도덕이 되면 의무가 되어 불필요하게 되었어도 지키려 들게 됩니다. 지나치게 백신을 강조하면 이후 백신이 불필요하게 될 시점에도 그걸 지키려 들고 알레르기 등으로 맞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게 될 것입니다. 의무는 위험한 결정이에요.

 

저출산 책임이 여성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고 출산을 출생이라 부르고 있다고 하죠. 여성 책임이 아닙니다. 이전사상 책임이죠. 단지 여성주의가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을 세뇌하고 강요하는 바람에 더욱 더 성을 죄악시하여 여성주의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여성주의는 여성이 아닙니다. 남성주의가 남성이 아니듯 말이죠. 여성 책임이 아니니까 굳이 바꿀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나중에 인공자궁에 태어나게 되면 그때는 출생이 어울릴지도 모르겠지만요.

 

시험만능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LG스마트폰을 썼었는데 이제 삼성이나 애플 중 하나 고르겠죠 음. 다음은 바이오입니다. 특별히 친숙한 회사가 없어서 검색을 하던 해서 적당히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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