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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롯데와 제과 (0) 2022/01/23 AM 08:02

롯데와 제과

 

 

 

오늘날 인권운동이란 인간상 강요를 말한다. 본인이 생각하는 주관적인 인간상(전통적인 도덕관념 등)을 각 대상(인종, 노동, 아동, 여성 등)에게 세뇌하고, 사회에 그 인간상에 맞춰 배려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인종은 언제까지나 제국주의 시기의 인종이어야 하고, 노동자는 언제까지나 산업혁명 시기의 노동자여야 하고, 아동은 언제까지나 유교적 가치관의 아동이어야 하고, 여성은 언제까지나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이어야 한다. 그들은 이 인간상 내에서만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이 인간상에서 벗어나는 건 부도덕하다 여기고 있다. 보호대상이 부도덕하지 않다 말하는 행위조차 부도덕하다 말한다. 왜냐하면 보호대상의 자유의지보다 주관적인 인간상이 더 중요하다 여기기 때문이다. 독선. 이것은 본인의 도덕성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자아성찰조차 하지 않은 인문학적 고찰이 부족한 이들이 할법한 실수다. 사상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자로서 이런 어리석은 작태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 이제 그들이 차별 받던 시기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겠다. 그들에게 새로운 길을 안내하겠다. 그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을 위한 길을 안내하겠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도록 하겠다. 인간의 행복을 위하도록 하겠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예술이다. 그 예술에 대해 알아보며 시작하겠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을 뜻한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보거나 느끼기에 즐겁거나 상쾌하거나 기쁨을 주는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한다. 정리하면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은 인간을 즐겁거나 상쾌하거나 기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그것이 예술의 목적이다. 그런데 예술에는 괴롭거나 불쾌하거나 슬픔을 주는 상태에 있는 것도 있다. 비극을 예술이라 말하지 않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어떤 경우에는 더러운 것조차 예술이라 말한다. 이렇듯 아름답지 못한 것 또한 예술이라 부른다. 왜 그게 예술이 되는 걸까? 예술작품의 관점에서 벗어나 인간의 관점인 인본주의적으로 바라보자. 인간의 본위로 바라보면 비극 또한 인간의 세계를 넓히는 일을 하고 있다. 세계의 확장이라는 점으로 접근하자. 인간은 희극과 비극, 아름다움과 더러움, 기쁨과 슬픔 등 다양한 상태에 있는 것을 간접 체험하면서 인간이 알고 있는 세계가 넓어진다. 예술에서 접한 다양한 것들에 영향을 받아 단순한 단어나 식상하고 지루한 일상의 풍경조차 신선하고 재미있는 것이 된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어떤 동화를 떠올리고 저녁놀을 바라보며 어떤 영화를 떠올린다. 예술은 단색의 평면적인 세계를 살아오던 사람에게 다양한 색을 알려주어 복색의 입체적인 세계를 살 수 있도록 한다. 예술은 인간의 세계를 다채롭게 만든다. 다채로움 속에서 즐겁거나 상쾌하거나 기쁨을 느낀다. 세계의 확장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니까 아름답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 또한 예술로 분류되게 된다. 하나의 인간상을 강요 받는 시대에 인간의 세계를 넓히는 예술은 인간을 보다 행복하게 하고 있다.

 

세계의 확장은 두 가지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언론이고 둘이 예술이다. 둘 다 인간에게 다양한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세계를 넓히고 다른 인간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차이는 이성과 감성이다. 정보를 전달해 세계를 넓힌다는 점은 같지만 이성이냐 감성이냐에 따라 언론과 예술이 달라진다. 통상 언론은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인간의 세계를 넓히고 예술은 주관적이고 감성적으로 인간의 세계를 넓힌다. 이런 역할의 차이가 발생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현실과 가상의 차이고 둘째는 독자의 수용태도 차이다. 언론은 현실이기에 객관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 현실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주관적이고 감성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관점이 한정되어 인간 사이에 과도한 괴리가 발생해 불필요한 다툼을 일으킬 수 있다. 대표적으로 법이 그러하다. 법에 관련된 것을 감성적으로 접근하면 그 감성에 호소된 대중에 의해 법치가 파괴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특히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중우정치를 유발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다. 언론이 사건을 감성적으로 바라보면 이성을 놓치고 이성을 놓치면 전체를 놓치며 전체를 놓치면 질서를 놓친다. 정치는 정의를 추구해야 하고 사법은 질서를 추구해야 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이 올바른 정의를 추구해야 입법이 올바른 정의를 추구하고, 올바른 정의가 있어야 사법이 올바른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 보통 사법이 정의를 추구한다 생각할 수 있는데 정의보단 질서다. 국민정서법과 사법의 판단이 다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아무리 보편적인 도덕관념을 바탕으로 법이 제정된다 하더라도, 사법 자체는 정의보다는 질서를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정의 위주로 판단하면 질서가 흔들려 국가가 무너진다. 양형에는 형평성과 사회적 비용도 고려된다. 살인과 강간을 동일시 할 수 없고 교도소의 수용 인구수와 재원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개개인의 정의보단 사회의 질서가 우선시되고 있다.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을 말하는 성인지감수성이 법치를 파괴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사법을 객관적 질서가 아닌 주관적 정의로 바꾸려 했기 때문이다. 국민 각각은 다양한 정의를 추구하더라도 사법은 질서를 추구한다는 것을 알아야 국민과 사법의 괴리가 줄어들 수 있다.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의사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유주의의 이념에 따라 언론도 주관적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객관과 주관을 분리할 수 있는 사람만 그래야 한다고 본다. 객관과 주관을 분리할 수 있으면 객관적 서술과 주관적 의견을 둘 다 쓰면 되기 때문이다. 그게 안되면 일반적으로 그냥 객관적 서술만 해야 한다. 물론 우수한 언론인이라면 누구나 객관과 주관의 분리가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언론이 어떤 사건에 있어 여론에 호소하기 위해 감성적으로만 접근하는 일이 있다. 그건 바람직하지 못하다. 언론은 언론의 위치와 가치를 좀 더 자각하길 바란다.

 

예술은 가상이기에 주관적이고 감성적이어야 한다. 가상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감정이입이 어려워 재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관심을 사기가 어렵다. 현실의 정보를 전달하는 언론과 달리 가상의 정보를 전달하는 예술은 재미를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보고 그래야 의미를 갖게 된다. 논픽션도 예외는 아니다. 현실에 있던 사건이라 할지라도 결국 그건 감독의 눈으로 바라본 재창작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세계를 넓히고 다른 인간과 연결하는데 감성이 작용하게 되면 그 인간은 풍부한 감성을 얻게 된다. 빈자는 부자의 세계를 모르고 부자는 빈자의 세계를 모른다. 그걸 언론이 알리면 이성적으로 바라보기에 이성적인 이해는 되도 감성적인 공감은 하기 어렵지만, 그걸 예술이 알리면 감성적으로 바라보기에 이해가 어려워도 공감은 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감성적인 자극이 보는 이로 하여금 진심을 갖게 만든다. 진심으로 어떤 변화가 바라게 되게 된다. 변화를 바라는 마음에 감정이 실리게 된다. 같은 주제, 같은 주장을 하더라도 여기서 언론과 예술에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예술이 사건을 이성적으로 바라보면 재미를 놓치고, 재미를 놓치면 관심을 놓치고, 관심을 놓치면 의미를 놓친다. 대중을 위한 예술을 위해 최소한의 독자는 필요하다. 모든 예술작품이 모든 사람에게 인기를 끌 수는 없다.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예술이 그럴 수가 없다. 대중을 위한 예술이라는 것은 수많은 각각의 여러 사람이 각각의 예술을 즐길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다양한 예술이 있어야 인간의 세계도 넓어지게 된다. 어떤 예술은 예술성을 명목으로 독자를 아예 외면하는 일이 있다. 예술은 예술의 위치와 가치를 좀 더 자각하길 바란다. 독자의 수용태도에도 차이가 발생한다. 언론이 주관적이고 감성적으로 접근해도 독자가 언론 역할 자체가 객관적이고 이성적일 거라 받아드리게 된다. 예술이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접근해도 독자가 예술 역할 자체가 주관적이고 감성적일 거라 받아드리게 된다. 언론은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걸 예술에 맡기고 예술은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걸 언론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예술은 대중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모든 예술이 그러해야 하고 그러했었다. 지금 현대미술이나 클래식 같은 순수예술을 가리켜 대중적이라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 현대미술과 클래식은 과거의 대중예술이었다. 과거 예술은 종류와 대상이 한정적이었다. 종류는 그림, 소설, 음악, 연극 등과 대상은 부유한 자에 한정되어 있었다. 과거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사람 자체가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현대미술과 같은 그림과 클래식과 같은 음악이 대중예술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현대미술과 클래식과 같은 순수예술은 과거의 대중예술이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대중예술이란 무엇인가? 대중이 즐기는 예술인 게임과 영화와 만화와 소설 등등이다. 간단히 말해 상업예술을 말한다. 순수와 상업, 어느 것이 더 예술적인가? 미술로 바라보자. 지금의 현대미술은 대부분 예술이 아닌 단순한 자산으로 전락했다. 코인에 그림을 입히면 그게 현대미술이다. 현대미술과 코인에 투자하는 이유가 비슷한 시점에서 둘은 차이가 없어졌다. 대부분 현재 현대미술은 금전적 가치를 보고 예술적 가치를 평가하고 상업미술은 예술적 가치를 보고 금전적 가치를 평가하고 있다. 다수의 사람이 현대미술은 비싸니까 예술적일 거라 생각하고 상업미술은 예술적이니까 비쌀 거라 생각한다. 이러니 상업미술이 더 예술적이라 하게 된다. 현대미술을 예술로 즐기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안다. 그러나 그들조차 그게 다수가 아님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음악으로 바라보자. 클래식은 투자자산이 되기가 어렵기 때문에 아직도 예술적 가치를 보고 금전적 가치를 평가 받고 있다. 그래서 순수와 상업 둘 다 예술적이다. 그러나 순수는 낡았기 때문에 하향세에 있다. 클래식이 살아남고자 한다면 상업예술과의 연계를 꺼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생존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현대미술이 클래식보다는 나은 상황이지만 예술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클래식이 현대미술보다 나은 상황이다. 정리하면 순수예술은 과거의 대중예술이고 상업예술은 현재의 대중예술이다.

 

이런 관점에서 상업예술인 게임과 영화와 만화를 검열하는 것은 순수예술을 검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상업예술 중 하나인 게임에서 등장하는 인간의 나체에 검열을 하는 것은 순수예술 중 하나인 동상으로 표현한 인간의 나체에 검열을 하는 것과 같다. 주관적인 도덕관념으로 야한 걸 가리는 검열은 나체상에 페인트칠을 하는 것과 같단 말이다.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에 세뇌되어 여성의 성을 다룬 예술을 천박하게 바라보는 이들이 상업예술의 검열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도구로 여기고 여성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지 않았다. 여성의 성을 결정하는 권리는 보호자와 남편과 국가가 가지고 있었다. 여성에게 보호자가 순결을 지킬 것을 강요하고 여성에게 남편이 정절을 지킬 것을 강요하고 여성에게 도덕이 정조를 지킬 것을 강요했다. 그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에 세뇌된 한국 여성주의는 똑같이 여성 성 상품화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한국 여성들에게서 성적 자기결정권을 빼앗고 있다. 정말 어처구니 없다. 아름다운 여성의 성을 다룬 예술을 낡은 도덕관념으로 폄하하며 파괴하려는 수작을 당장이라도 그만둬야 한다. 남성이 여성의 성을 다룬 예술을 보고 성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여성이 남성의 성을 다룬 예술을 보고 성욕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듯 말이다. 예술은 인간의 세계를 넓히는 것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느끼게 만드는 것. 새로운 세계에서 욕구를 해소하여 행복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 인간의 성은 예술이다. 거기에 검열을 하는 것은 예술에 대한 모독이다.

 

나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어떤 이는 가벼운 성형조차 비판하고 있다. 그런 이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즐길 자격이 없다. 과도한 성형은 건강에 해가 될뿐더러 본연의 미조차 해치지만, 적절한 성형은 인간을 아름답게 만들어 인간 스스로 자존감을 얻기가 좋다. 나는 인본주의자로서 자잘한 도덕관념보다 인간의 행복을 우선시한다. 나는 인간의 성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어떤 이는 성 상품화를 비판을 하고 있다. 그런 이는 인간의 성의 아름다움을 즐길 자격이 없다. 현실 인간의 성 상품화가 잘못되는 경우는 노동 상품화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했을 때에 발생하고, 가상에서는 애초에 성이나 노동 상품화가 잘못될 일이 없다. 무엇이 인간을 도구화하고 있는지 인지해야 한다. 나는 자유주의자로서 자잘한 도덕관념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우선시한다. 솔직히 머리가 아프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나? 어쩌자고 낡은 성 관념을 바꾸지 않고 있는 건가. 인간을 성적인 대상으로 본다 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안보는 게 이상하다. 도대체 인간이 인간을 성적 대상으로 안보면 어떻게 하나. 강요할 수 없는 이상 인간이 인간에게 성욕을 느끼는 것이 당연해야 서로 자연스럽게 성관계를 맺고 출산을 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이 자유국가라는 걸 깨닫고 변화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다.

 

모든 인간은 각자 예술가를 가지고 있다. 본인이 즐기고 있는 예술이 곧 본인의 예술가다. 내가 즐기는 게임과 영화와 만화와 소설은 나의 예술이고 그걸 만든 사람이 나의 예술가다. 내가 즐기는 예술에 검열이 들어가는 것은 고가의 예술에 페인트칠 당한 것과 같을 정도로, 아니 그보다 훨씬 화가 나는 일이다. 나의 예술과 나의 예술가를 모독하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화를 내야 하는 일이다. 본인의 예술가를 모독하는 일에 참지 않길 바란다. 특히 예술가들이 더욱 분노해야 한다. 같은 예술인데 누구는 예술이라고 검열되지 않고 누구는 예술 대우도 못 받고 검열되어야 하는가? 대량생산되면서 예술의 영역은 넓어지게 되었다. 스마트폰의 디자인이 예술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자동차의 디자인이 예술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예술가의 작품을 대량생산했을 뿐이지 거기에 예술적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양산품 또한 예술이다. 주변에 있는 모든 상품에 예술적 가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과자 또한 마찬가지다. 양산과자도 예술이 될 수 있다.

 

 

 

처방전

 

과자는 무엇인가? 단맛 위주로 만드는 간식을 뜻한다. 간식은 무엇인가? 끼니 외에 먹는 음식을 뜻한다. 끼니는 무엇인가? 아침, 점심, 저녁 같이 일정한 시간에 먹는 밥을 뜻한다. 정리하면 일정 시간 외에 단맛 위주의 간식을 과자라 부른다. 이 과자는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어떤 길이 바람직할 것인가? 우선 과자의 역할에 대해 알아보자. 하나, 심심풀이. 둘, 배 채우기. 셋, 맛 즐기기. 심심할 때 먹거나 끼니 전에 간단히 배 채울 때 먹거나 오로지 맛을 즐기기 위해 먹는다. 음식에 있어 과자는 어디까지나 조연이다. 하지만 조연이기 때문에 시간과 건강으로부터 제약이 적다. 시간과 건강은 주연인 끼니가 책임지고 있다. 조연인 과자는 미식에 집중할 수 있다. 건강보다 맛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조연인 과자는 주연인 끼니를 돋보이게 할 수 있다. 전채처럼 끼니 전에 과자를 먹는 것으로 끼니를 보다 맛있게 만들 수 있다. 조연인 과자는 음식의 양을 조절하기가 쉽다. 포만감이 높은 과자를 먹으면 폭식을 멈출 수 있고 소화가 빠른 과자를 먹으면 소식하지 않을 수 있다. 체중 조절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간단히 정리하면 미식과 미용이다. 둘 다 아름다움을 다룬다. 즉 예술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서 의학을 가져왔다. 보통 의학은 인간의 건강을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고정관념에 빠져 있었다. 의학이 굳이 건강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된다. 의학의 목적이 미식과 미용이라 할지라도 달성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수단이 인간의 몸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학이 인간의 건강을 위하는 것과 같이 인간의 미식과 미용을 위할 수 있다. 인간이 어떤 맛에 가장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가? 인간이 끼니 전에 어떤 과자를 먹어야 끼니에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가? 인간이 체중을 조절하기 위해 어떤 과자를 먹어야 하는가? 이 모두 의학적으로 분석해서 결과를 내놓을 수 있다. 보편적 인간의 특징을 진단하고 그 진단에 맞춰 처방을 하면 된다. 어떤 과자 브랜드는 과자와 의학의 건강을 더해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면 나는 과자와 예술과 의학을 더해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 의학의 진단과 처방을 통해 예술의 미식과 미용을 도입한 과자로 인간을 보다 행복하게 만든다.

 

 

미식. 음식의 맛이 좋은 걸 뜻한다. 아름다움으로 접근하면 즐겁거나 상쾌하거나 기쁨을 주는 상태에 있는 음식을 뜻한다. 미식 자체가 예술이다. 예술이 세계의 확장으로 인간의 세계 자체를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이라면, 다양한 맛을 통해 세계를 확장시키는 것으로 인간 세계 자체를 아름답게 만들어줄 수 있다. 특정 맛만이 미식이 아니라 다양한 맛이 고유한 색채를 띠게 되면 그게 미식이 된다. 과자가 다양한 맛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미식이며 예술이다. 그 맛을 의학적으로 알아낼 수 있다. 최근 노벨상을 수상한 연구가 바로 매운 맛의 감각이 무엇인가라고 한다. 매운 맛은 통각이 아니라 온도 감각이었다고 한다. 매운 맛이 아픈 게 아니라 뜨거운 것이었다고 한다. 그와 같이 인간이 느끼는 맛의 감각을 의학으로 연구하고 그 맛을 과자에 적용할 수 있다. 어떤 맛이 가장 인간에게 만족을 줄 수 있을 것인가? 보편적인 인간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것으로 과자를 미식으로 만든다. 이 처방을 맹신할 수는 없어도 보편적인 가이드라인이 있다면 다수의 사람이 과자의 맛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전채. 식사 전에 식욕을 돋우기 위해 나오는 요리다. 그런데 이런 전채요리는 번거롭고 비싸다. 대중적이지 못하다. 예술은 대중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미식도 대중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모든 인간의 끼니가 아름다워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양산되는 과자가 전채의 역할을 맡으면 된다. 어떤 과자를 먹으면 식사가 더 맛있다. 그런 개념이 도입되면 된다. 이러면 대중이 전채를 즐길 수 있게 된다. 대중을 위한 미식이 가능해진다. 이게 바로 대중을 위한 예술이다. 가령 식욕을 돋우는 식욕증진 성분을 과자에 넣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과자를 먹으면서도 맛있게 식사를 할 수 있다. 보통 아이들이 과자 먹고 끼니를 거르는 일이 많다. 그걸 방지할 수 있다. 밥 먹기 전에 먹기 좋은 과자가 나올 수 있다. 단순히 전채만이 아니라 식사 후에 먹어야 더 맛있는 과자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식전과 식후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끼니의 성질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끼니가 달거나 맵거나 쓰거나 짜거나 한다면 그것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과자가 나올 수 있다. 개인적으로 매운 것을 먹고 속이 뜨거울 때에 퍽퍽한 과자를 먹으면 다소 속이 편해졌다. 그런 것에 전문적인 과자가 나오길 바란다. 매운 거 먹고 먹게 좀 사두려고 한다. 그런 것과 같이 식사에 맞춰 진단을 하고 처방하는 것으로 식사를 보다 더 맛있게 할 수 있다.

 

미용. 용모를 아름답게 매만지는 일을 뜻한다. 최근에는 몸도 포함되었다. 이 몸을 관리하는데 과자가 도움이 될 수 있다. 주관으로 인권을 결정하는 사상이 유행하자 자기평가를 주관에 맡겨버려 노력할 이유를 잃고 자기관리에 실패하여 과체중이 되거나 저체중이 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객관적 기준이 없으니까 뚱뚱하거나 말라도 그냥 그대로 발전 없이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건 외모뿐만이 아니라 건강에도 도움이 안 된다. 정말 인간의 발전을 막는 최악의 사상이다. 그대로 만족하고 살라는 것은 인간의 능력 자체가 낮아지는 것뿐이다. 멍청해도 멍청한 대로 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가 않다. 인간은 본인과 타인을 위해 똑똑해져야 하는 것과 같이 아름답고 건강해져야 한다. 우리 스스로를 사랑하며 변하지 말자고? 그러면 무엇 하러 교육을 받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며 자연으로 돌아가 동물처럼 살면 된다. 인간이라면 인간답게 살기 위해 발전해야 한다. 인간이라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정상체중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과자가 그걸 도울 수 있다. 인간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과자가 높은 포만감을 줄 수 있다면 식사량이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과자가 소화가 빠르고 식욕을 높인다면 식사량이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걸로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는 체중조절도 가능할 것이다. 의학으로 체중에 맞춰 진단을 하고 처방을 하는 것으로 보다 전문적으로 다수의 사람을 정상체중으로 유도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건강용품과의 차이는 맛이다. 과자는 맛이 있기 때문에 먹고 평소에 자주 먹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미식과 미용이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냥 홍보 자체를 이런 식으로 하면 된다. 식전이나 식후에 먹기 좋은 과자, 매운 음식이나 짠 음식에 어울리는 과자, 과체중이나 저체중에 효과적인 과자 등등이 같이 말이다. 의학적 처방을 통해 단순한 심심풀이였던 과자를 예술로 끌어올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다양성을 명목으로 특정한 인간상을 강요하는 것으로 다양성을 해치고 인간을 위한다는 말로 인간의 발전을 막아 인간을 불행케 하는 이 시대. 과자는 다양한 맛을 통해 다양한 세계로 안내하여 다양성을 만들고 인간을 위해 자연스럽게 미식과 미용을 할 수 있게 하여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과자가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길 바라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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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 아니에요. 한국 인간관계 붕괴는 유교와 여성주의가 만든 결과물입니다. 유교의 장유유서가 가족관계와 사회관계를 수직적으로 만들었죠. 가부장제와 중앙집권체제를 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자유롭게 되자 관계가 수평적으로 변하면서 붕괴하게 되었습니다. 높은 자살률은 인간관계 붕괴가 만든 현상입니다. 유교의 남녀유별이나 남녀칠세부동석이 이성관계를 멀리하게 만들었죠. 그럼에도 연상의 강요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성관계가 멀었음에도 출산율이 높았던 것은 연상의 강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자유롭게 되자 관계에 강요가 사라지면서 붕괴하게 되었습니다. 낮은 출산율은 인간관계 붕괴가 만든 현상입니다. 그러던 중 관계를 붕괴시킨 가부장제 세계관에서의 의지가 약하고 성적 수치심이 강한 여성상을 여성의 본성이라 착각한 기성 여성주의자가 그 여성상을 신세대 여성에게 세뇌하고 사회에 강요하는 바람에 이성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붕괴하여 출산율을 0.6까지 떨어트리게 만들었죠. 이는 PC주의와 마찬가지로 여성주의 사상이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이 결정되는 사상이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입니다. 주관에 의해 인권이 결정되니까 가부장제 세계관에 살고 있던 여성은 그 세계관에서 인권이 결정되었던 겁니다. 이러니 지금 한국 여성주의가 가부장제의 마지막 발악이라 말하고 있는 거죠. 대놓고 말하죠. 유교와 여성주의는 지금 자유롭고 평등한 한국에 있어 인간관계를 붕괴시켜 국가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최악의 사상입니다. 지금 당장은 연구가 부족하니까 실감이 안 날 수 있는데 미래에는 반드시 한 국가를 위기로 내몬 또는 국가를 소멸시킨 사상으로 기록될 겁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과거 국가를 망친 이들이 현재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상기하십시오. 사리사욕이나 정치적 손익계산으로 국가를 멸망시키지 말길 바랍니다.

 

여성이 가진 성적 수치심이나 정조관념은 가부장제 세계관의 남성이 여성에게 주입한 악의적인 감각과 관념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걸 소중히 하는 것 자체가 남성의 노예를 자청하고 있는 겁니다. 요즘 유행하는 용어를 쓰면 가스라이팅이죠. 네 몸을 노출하는 건 수치스러운 거야. 야한 건 나쁜 거야. 가부장제는 여성에게 성적 수치심을 강하게 느끼게 만들어 죄책감을 유도해 정조를 지키게 만들었습니다. 그 감각과 관념에 세뇌된 여성주의자는 그걸 정당화하기 위해 남성의 자연스러운 성욕 탓으로 해버린 것일 뿐입니다. 여성주의의 성 문화 탄압이 서양에서 왔다고 하는데, 기독교도 똑같이 여성의 정조를 중시하지 않았습니까. 기독교 사회에서 성장한 여성주의자는 당연히 같은 감각과 관념에 세뇌되어 있었겠지요. 그러니까 서양과 한국이 같은 관념을 공유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 여성이 성 상품화를 비판하는 건 그야말로 여성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으로 바라보니까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무시하고 억압하고, 여성 성 상품화를 탄압하고 있는 겁니다. 여성은 여성의 자유를 위해 이제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여자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성 억압을 하고 성의 결정권을 부모와 남편과 또는 국가가 가지고 있는 겁니다. 여성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야 합니다.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에 세뇌 당한 이들의 주장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여성이 자유주의적 관점으로 자유권을 쟁취하길 바랍니다. 성을 상품화하더라도 그것이 여성의 의지라면 괜찮습니다. 성 상품화가 괜찮다면 다른 형태도 괜찮습니다. 성 문화 탄압이 여성이 가진 자유권을 침해하는 것에서 왔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너무 수준이 낮은 사상이니까 지성인이라면 부디 다시 생각해주세요.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과 별개로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을 결정하게 되는 것 자체로도 정말 엉망진창입니다. 기분 나쁘다고 신고하거나, 피해자를 가해자로 가해자를 피해자로 만들거나, 죄를 지어도 옹호하거나, 이성적인 의견을 혐오로 받아드리거나 등등 제멋대로에요. 이런 사상에 세뇌 당하면 누구든 바보가 됩니다. 본인의 주관이 뭐든 옳다고 말하자 폭군이 되어버린 이들이 많죠. 본인의 정의가 무조건 옳은 게 되자 이성을 잃은 군중이 되어 마녀사냥이나 홍위병이 되어버린 적이 있죠. 기본 능력과 별개로 어떤 사상에 영향을 받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천지차이로 달라집니다. 아무리 똑똑해도 바보 같은 사상에 영향을 받으면 바보가 돼요. 인간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인류를 이롭게 해야 한다는 이념을 가진 자유주의자로서 이런 사상은 한 톨만큼도 옹호할 수 없습니다.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수준이 낮아요.

 

세배에 대해서는 참. 한국 전통의 풍습이지만 그게 돈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주입하고 있다는 건 말해두겠습니다. 연상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박은 뒤에 돈을 받는 풍습이 돈을 위해서라면 무릎 꿇고 머리 박는 것도 할 수 있다는 관념을 주입한다고 주장하는 게 이상하게 보입니까? 돈을 위해서라면 감옥도 갈 수 있다, 돈을 위해서라면 맞는 것도 할 수 있다. 라는 의견이 나오는 게 학습효과에 의한 결과물이라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만약 이게 한국 풍습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요? 객관적으로 보길 권합니다. 차라리 그냥 선물을 주고 받아야 합니다. 각자 경제사정에 맞게 선물을 준비해서 주고 받는 것이 보다 긍정적이겠지요. 한국이나 서양이 자본주의를 받아드렸던 때의 사회문제는 당대 종교가 만든 겁니다. 한국은 유교겠지요. 유교로 인한 수직사회가 노동자와 아동과 여성 등등을 괴롭게 만든 겁니다. 이제는 우리를 위해 전통적인 도덕관념이 반드시 옳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블리자드를 인수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블리자드라. 중국의 잘못된 행위를 옹호 또는 방관하는 것 보고 정떨어져서 그 회사 게임 안 한지 오래되었지요. 인수되면 어떻게 될까요? 어쩌면 다시 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월드오브워크래프트는 내게 있어 꽤 의미 있는 게임이죠. 역할주의가 와우나 롤 같은 역할수행게임에서 떠올린 거니까요. 메타버스. 근본적으로 스타나 와우의 유즈맵이 메타버스와 다를 바가 없죠. 거기에 금전거래가 도입되면 메타버스입니다. 메타버스가 새로운 것 같지만 그냥 유즈맵의 연장이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뭐 그런 의미에서 마소는 메타버스 전문기업을 인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수십 년간 유즈맵을 운영해왔을 테니까요. 히오스 부활 가능?

 

롯데인 이유는 별 이유 없습니다. 광고가 눈에 띄었어요. 그래서 써볼까 생각해봤습니다. 다음은 LG와 전자입니다. 그 다음은 눈에 띄는 걸 골라 씁니다. 수백 년간 기술은 꾸준히 발달했는데 사상들은 제자리 걸음을 걸었죠. 새로운 사상이라곤 불변가치를 훼손하거나 객관적 기준도 없는 천박한 사상들밖에 없었습니다. 해체주의는 반대를 위한 반대에 불과하고 PC주의와 여성주의는 객관적 기준도 없고 채식주의나 비폭력주의는 인본주의적 불변가치마저 훼손했습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 본래 사상이란 기존 질서와 다른 길을 제시하기 위해 나타납니다. 자유주의는 사회의 규율 강요를 반대하기 위해 나타났고, 사회주의는 인간의 방종을 반대하기 위해 나타났죠. 정상적인 사상은 새로운 질서를 안내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인 사상은 과거의 질서에서 반대만 합니다. 해체주의나 PC주의나 여성주의 등등이 같은 세계관에서 반대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다르죠. 인간에게 규율을 강요하던 질서에서 벗어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새로운 질서로 나아갔습니다. 무언가 반대를 위한 반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다시 다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주장하는 역할주의는 존중 척도가 수직인 것을 수평으로 만들고자 주장했던 것이지만 지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며 새로운 질서로 안내하려고 하고 있어요. 정치적으로 보면 분야의 대표에게 정치권력을 주는 제도를 구상하고 있고, 경제적으로 보면 역할중심으로 체계를 유기적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죠.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결구도가 아닌 각 역할끼리 뭉쳐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보면 역할로 가치를 판단하기 때문에 다양성을 존중할 수 있게 되죠. 네가 누구든 역할만 수행하면 존중하겠다가 가능하거든요. 이외 다양한 관점을 제시합니다. 도구의 가치판단도 용도에 따라 달라지게 만듭니다. 물질적 가치가 높더라도 필요한 용도가 아니면 그 순간에는 가치가 낮게 되죠. 모닥불을 피울 때엔 지폐보단 잘 타는 나뭇가지가 더 가치 있을 겁니다. 역할주의를 떠올린 게 약 6년전이었죠. 6살 정도 먹은 사상입니다. 아마 가장 어린 사상이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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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국민과 은행 (0) 2022/01/10 PM 06:09

국민과 은행

 

 

 

오프라인 은행은 온라인 은행에 밀려 점차 사라지고 있다. 왜냐하면 온라인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오프라인에서만 가능한 일이 있을 때만 오프라인 은행에 직접 방문한다. 그런데 그마저도 온라인에서 모든 은행업무가 가능한 인터넷전문은행의 등장으로 오프라인 은행에 직접 방문하는 사람의 수가 더욱 줄어들고 있다. 시간이 흘러 대다수가 온라인 은행에 익숙해지면 오프라인 은행은 일부 지점과 ATM 기기를 제외하면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많은 기성은행이 은행원의 수를 줄이고 있다. 신규채용을 줄이고 희망퇴직을 유도한다. 이런 상황에서 오프라인 은행이 꼭 사라져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만약 사라지지 않아도 된다면 오프라인 은행은 이제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하는가?

 

 

감시사회

 

인류는 기술발달로 과거보다 편의를 누리고 있지만 그만큼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는 일이 늘어나게 되었다. 보통 사생활 자유 침해, 통신의 자유 침해가 있다. 사생활 자유 침해는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국가와 부모와 같은 보호자의 역할을 맡은 이가 안전이나 보호를 명목으로 과도하게 피보호자의 사생활을 파악 및 간섭하는 것. 둘째, 기업이나 개인이 영리목적을 위해 개인의 사생활을 익명으로 정보수집을 하여 빅데이터로 활용하거나 해킹을 통해 부당한 정보수집을 하는 것. 셋째, 개인의 사적인 용무로 SNS등을 통해 이용하는 걸 알려지고 싶지 않은 대상에게 알려지는 것.

 

첫째에서 국가는 보통 국가이념에 따라 방침이 달라진다.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하고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개인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 학원 등의 방역패스에 제동을 건 법원의 판단 또한 이런 이념을 근거로 했다고 본다. 타당한 공익이 없는 이상 개인의 자유권을 우선시한다는 원칙아래 내린 판단이라는 것이다. 의료붕괴는 코로나 백신 접종률이 99%가 되도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방역패스를 추진하면서까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해야 하는가? 방역당국의 고충은 알겠다. 방역당국이 방역패스를 추진하는 까닭은 국민의 최대한 자유를 보장하면서 의료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찾다 나온 결론일 것이다. 모든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기 보다는 백신을 맞은 국민에 한에서는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다. 접종률을 늘리기 위한 수단일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나 미성년에게 바이러스는 큰 위험이 되지 않고 백신의 부작용이 더 큰 위험이 되는 시점에서 그들에게 백신의 선택을 강요하게끔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할 수 있겠는가? 모든 연령을 대상으로 백신을 접종케 한 것은 최초 백신을 통한 집단면역을 시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돌파감염이 일상화된 시점에서 그 논리는 파괴된 지 오래다. 돌파감염 비율이 낮다고 하는데, 모든 접종 완료자 중 돌파감염 사례를 찾으면 어떻게 하나. 이게 정상적인 통계인가? (2021.12.27) 4,115 5,260명 중 147,918 명이 돌파감염으로 추정된다고 돌파감염 비율이 0.359%라고 말하면 어떻게 하나. 당장 감염자 중 돌파감염 비율을 찾아야 정상 아닌가? (2021.12.8.) 일일 신규 확진자 2901명 가운데 1355명이 돌파감염으로 64%가 돌파감염 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연령을 대상으로 백신을 맞추게 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다. (2021.7.11.) 18세 이하 코로나 생존율이 99.995%라고 하는데, 미성년은 보통 그냥 감염되고 치료하는 것이 더욱 안전하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연령을 대상으로 백신접종 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집단면역이 불가능해진 시점에서 백신은 전염을 막는 역할이 아닌 병세의 악화를 막는 역할로 바뀌었다. 방역패스는 집단면역이 가능한 백신이 나오고 나서야 논리적이게 된다고 말하고 싶다. 나올 수가 없다면 방역패스는 아무래도 찬성하기가 어렵다.

 

보호자는 보통 개인사상에 따라 방침이 달라진다. 한국은 유교사상에 영향을 받아 보통 피보호자의 자유보다 안전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유교적 가치관의 아동상을 지금까지 강요하는 세태가 보인다. 그러다 보니 한국 미성년은 성장할 기회를 빼앗겼다. 위험을 부담할 감수를 하지 않는 이상 자유가 없고 자유가 없는 이상 성장도 없다. 위험, 자유, 성장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국가와 국민의 자유와 성장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위험은 부담할 감수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기술발달은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하는데 최적화 되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을 통해 사생활을 침해하기가 쉽다. 국가는 스마트폰을 통해 이동경로를 감시할 수 있고 보호자는 스마트폰 감시프로그램을 통해 모든 걸 감시할 수 있다. 보호자의 감시에 대해 잠시 말해보자. 많은 이들이 스마트폰이 없던 미성년 시절에도 부모의 감시와 억압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요즘 미성년은 그보다 훨씬 심한 감시와 억압으로 자유권을 침해 당하고 있음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건 정말 괴로운 일이다.

 

둘째에서 기업은 보통 익명으로 개인정보를 수집한 걸 빅데이터로 만들어 고객을 만족시키고 있다. 흔히 말해 알고리즘이라고도 한다. 개인방송 플랫폼은 알고리즘에 의해 원하는 영상이 목록에 뜨고 있다. 이와 같은 걸 거의 모든 온라인 서비스가 이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대다수 이런 사생활 자유 침해에는 이해하고 넘어가고 있다. 고객이 이용하고 남은 기록을 고객만족을 목적으로 재활용하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인터넷 사전검열과 전혀 다르다. 어떤 상품 구매로 비유하면 빅데이터는 영수증을 익명으로 재활용하는 것이고, 개인간 중고거래를 할 때 일일이 거래목록을 검열하고 나서 허용된 것만 거래하게끔 하는 것과 같다. 페미니즘 광풍으로 모든 국민을 범죄자로 상정하고 사전검열한 것은 매카시즘 광풍으로 모든 국민을 간첩으로 상정하고 사상검증한 것과 같은 논리로 인간의 자유권을 침해하고 있다. 끔찍하다. 이 검열은 국내 기업을 죽이고 국가 이념을 죽이고 국민 성장을 죽인 악이다. N번방은 사건과 방지법 둘 다 악이다. 둘 다 인간의 자유권을 침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은 보통 개인정보를 범죄에 활용하기 위해 해킹을 통해 수집하는 일이 많다. 보이스피싱이나 대포통장이나 주민등록이나 여권 위조로 활용한다.

 

셋째의 사생활 자유 침해는 보통 공개된 SNS를 개인공간으로 착각하여 나타난다. 미국 CIA의 인사가 다수의 사람이 SNS에 개인정보를 올려 정보수집이 편하다는 말을 했다. SNS에 개인정보를 올린 사람은 그 정보를 CIA가 활용하길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생활 자유 침해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공개 SNS는 개인공간이 아니다. 누구나 출입할 수가 있다. 원치 않는 상대가 개인정보를 보게 될 거란 위험부담은 감수해야 SNS를 자유롭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비공개 SNS는 기업이 보호해야 할 것이다.

 

 

통신의 자유 침해는 사생활 자유 침해와 겹치는 부분이 많으므로 경험담 하나만 작성해보도록 하자. 언젠가 사설 메신저 서버를 운영한 적이 있다. 그 때 개인과 개인의 대화 내용이 기록되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기본설정으로 대화 내용이 기록되게 되어 있었다. 원치 않게 대화 내용을 잠깐 본 적이 있는데 공개하기 어려운 예민한 인간관계가 담겨있어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 이후 바로 설정에서 로그가 기록되지 않도록 설정했다. 부당정보취득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게 올바른 일이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국내 메신저도 어떤 안전이나 보호를 목적으로 감시하는 일이 있다. 대놓고 통신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 황당하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전화나 메신저나 대화라는 관점에서 크게 다를 바 없음에도 전화 감청은 안되고 메신저 감시는 된단 말인가? 정말 예외적으로 간첩이나 산업스파이를 조사할 때에는 감청이나 감시가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개개인의 부도덕은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야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말해두겠다.

 

 

사생활 자유 침해에 둔감한 탓인지 자유개념이 없는 건지 모르겠으나 인권위와 이화여대 소속의 어떤 여성주의자는 대놓고 국민을 온라인 감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의견을 내겠다. 나는 자유주의자다. 나는 반페미도 반공도 아니다. 자유주의자이기 때문에 여성주의와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자유침해를 주장하는 여성주의는 자유의 적이고 나의 적이다. 여성주의는 객관적 기준이 없는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을 결정하는 사상이기에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여성주의도 있는 걸로 안다. 취향은 주관적을 편향되어도 되지만 도덕은 객관적으로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어떤 여성주의든 기본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 이상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에 대한 최소한의 경의도 표하지 않는 여성주의는 적극적으로 반대할 것이다. 지금 한국 여성주의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대부분 자유 억압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주의는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의지가 약하고 성적 수치심이 강한 여성)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인 성인지감수성을 주장하며 여성인권을 명목으로 신세대 여성과 사회에 강요하는 것으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고, 여성이 힘든 일을 할 자유를 혐오로 둔갑시켜 하지 못하게끔 유도하고 있다. 그 여파로 남성이 즐기는 성 문화를 탄압하고, 여성특혜로 인한 남성차별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는 한국 여성주의가 남성차별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명백하게 여성차별이다. 한국 여성주의의 주장은 결과는 남성차별이되 원인은 여성차별이었다. 그런 차별주의자들이 국민의 자유권을 침해한다면 자유주의자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인터넷 검열과 문화 검열 또한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앞으로 한국이 그런 검열에서 해방될 날이 오길 바라겠다. 홍콩은 이제 영화검열까지 하겠다고 한다. 정말 검열은 보기만 해도 불쾌하다.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그 누구의 발언권도 빼앗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건 발언권이지 절대권이 아님을 강조하겠다.

 

 

 

개인정보

 

감시사회이기 때문에 개인정보는 보다 중요시되고 있다. 개인이 공개한 개인정보는 쉽게 얻을 수 있지만 공개하지 않은 개인정보는 되려 얻기 어려워졌다. 기술발달로 개인의 정보를 얻기가 쉬워졌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이 예민할 정도로 개인정보 노출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정보를 얻기 어려워짐에 따라 개인의 정보를 신용하기 어려운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다. 누군가 말하기를 자기소개서는 대부분 거짓일 거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신용할 수 없다는 얘기다. 정보와 신용. 여기에 초점을 맞추자. 기술이 발달하면서 정보가 포화되어 정보양은 많아졌지만 신용할 수 있는 정보의 수는 줄어들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감시사회가 되면서 개인정보의 중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개인정보를 신용할 수 있지 않게 되었다. 사회 전체에 특정 정보에 대한 신용이 낮아졌다는 것이다.

 

현상 A. 유명인의 학력을 불신하여 진실을 요구하는 집단이 나타난 적이 있다.

현상 B. 유명인의 논문을 불신하여 표절유무 검증을 요구한 이들이 나타난 적이 있다.

현상 C. 유명인의 경험(학교폭력 등)을 불신하여 직접 조사한 이들이 나타난 적이 있다.

 

이외에 수많은 사건들이 개인정보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을 신용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매번 근거를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사회에 떠도는 정보의 신용을 올리기 위한 역할이 필요하다. 그걸 누가 해야 하겠는가? 은행이다.

 

은행은 은행에 들어온 통화에 은행의 신용을 새기고, 새긴 통화를 시장에 내보내 순환시키는 것으로 시장의 신용도를 높이고 있다. 가령 위조화폐가 있다 하더라도 시장을 떠돌다 은행에 도달하게 되면 위조여부를 분간하고 은행의 신용을 새긴 뒤에 다시 시장에 유통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은행은 시장의 신용도를 높여왔다. 그렇다면 정보는 어떻게 되겠는가? 은행에 들어온 정보에 은행의 신용을 새기고, 새긴 정보를 사회에 내보내어 순환시키는 것으로 사회의 신용도를 높인다.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다른 점은 유형 자산과 무형 자산의 차이다. 그런데 이제 정보라는 무형자산은 이미 금과 은의 가치를 넘은 것이 많다. 은행이 정보라는 무형자산을 취급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자산은 다양하지만 은행이 보증하는 자산은 한정되어 있다. 정보는 다양하지만 은행이 보증하는 정보는 한정되어 있다. 기술발달과 정보의 가치변화와 은행의 신용을 결합하여 새로운 개념이 탄생했다. 정보 보관 및 대여다.

 

정보를 보관하는 역할은 보통 대학과 도서관이 맡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다루는 정보는 지식에 한정되어 있다. 개인정보는 거의 없다. 정보의 수집과 확산과 연결의 역할을 맡고 있는 언론은 보통 공적인 정보를 다룬다. 개인정보를 다루는 일이 적다.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은 정보는 많지만 신용도는 낮다. 탐정은 타인의 정보를 수집하여 그 정보의 신용을 높이지 본인의 정보를 수집하여 그 정보의 신용을 높이지 않는다. 신용평가는 보통 금융에 관련되어 있다. 지금까지 개인정보의 신용을 높이기 위한 역할을 맡고 있는 곳이 없었다. 정보양이 적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었고, 감시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개인정보노출을 그렇게 꺼려하지 않아 진실여부를 가리는데 어려움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개인정보의 신용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언론이나 인터넷에서 떠도는 가짜뉴스로 사회의 신용이 낮아지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 언론이 신용에 초점을 맞추면 언론의 자유가 침해될 우려가 있다. 높은 신용도를 우선시하면 지나치게 깐깐하게 기사를 검증해야 하기 때문에 정보공급에 차질이 발생한다. 그러면서 신용도가 조금이라도 낮은 정보는 뉴스로 싣기가 어렵게 된다. 그러면서 자유가 침해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은행은 다르다. 은행은 처음부터 신용이 최우선이다. 은행은 신용을 위해 직원의 경제권에 간섭까지 하고 있다고 한다. 도박, 보증, 사업, 대차 등 은행의 신용에 해가 될 것은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신용최우선인 집단이 정보에 신용을 새겨 사회에 떠도는 정보의 신용을 높이는 역할을 맡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앞서 오프라인 은행의 새로운 역할에 대해 말하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정보 보관은 어째서 오프라인 은행에 방문할 필요가 있는가? 그건 돈과 정보의 차이에 있다. 돈은 돈 자체로 객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디지털화하여 온라인으로 거래한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개인정보는 주관적인 경우가 많다. 직접 만나서 진위여부를 가리는 것이 효과적이다. 직접 대면하여 눈을 마주보고 거짓을 판단한다. 거짓말탐지기를 이용해도 괜찮을 것이다. 정보의 신용을 높일 수 있는 근거를 조사하여 제공하거나 은행과 연결된 탐정에 맡겨 진위여부를 판단하게끔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정리하면 온라인 은행은 돈을 보관하고 오프라인 은행은 정보를 보관하는 것을 담당하면 된다.

 

 

은행이 정보를 보관하면서 얻을 수 있는 수익에 대해 알아보자. 일단 수요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사회에 떠도는 정보나 개인정보를 신용하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 누군가 신용을 새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업투자나 기업취업에 필요한 개인정보에 신용을 새길 필요가 있을 때가 있다. 자기소개서를 써도, 경력기술서를 써도, 믿지 않는다는 게 정상인지 묻고 싶다. 개인정보보호 때문에 투자자나 기업이 진위여부를 가리기도 어려울 것이다. 오로지 면접만으로 개인정보의 진위여부를 판단할 때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정보에 신용을 새길 수 있게 되면 내세우고 싶은 정보가 있는 이는 그 정보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신용을 중시하는 집단의 신용을 새기게 된다면 그 정보의 신용도는 높게 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수요는 적을 수가 없다고 본다. 단지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적응시간은 필요할 것이다.

 

은행은 개인정보에 신용을 새기고자 하는 이들이 내는 정보등록료와 보관료를 통해 수익을 얻으면 된다. 은행이 돈을 대출하여 수익을 얻은 것으로 돈을 보관하는 이에게 이자를 지불하는 것과 같이, 은행이 정보를 대여하여 수익을 얻는 것으로 정보를 보관하는 이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경험이나 추억에 신용이 새겨지면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업이나 프로젝트를 시작한 사람이라면 비슷한 사업이나 프로젝트의 경험이 담긴 정보를 필요로 할 것이다. 지도가 있는 길을 걷는 것과 없는 길을 걷는 것은 천지차이다.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라면 신선하고 재미있는 추억이 담긴 정보를 필요로 할 것이다. 예전 어떤 소설가가 어떤 사건의 기록을 보고 거기에서 착안하여 소설을 썼다고 한다. 경험이나 추억에 은행의 신용이 새겨지면 그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믿고 대여할 것이다.

 

기타 인간관계에 있어 개인정보의 신용이 필요할 때가 많다. 가족, 연인, 친척, 친구, 이웃 등의 사적인 인간관계를 비롯해 학교, 직장, 동아리 등의 공적인 인간관계에서도 개인정보에는 신용이 필요하다. 보통 인간의 신용을 빌려 개인정보의 신용도를 평가한다. 그러나 중요할 때에는 주관적으로 본 인간의 신용만으로 개인정보를 평가하기가 어렵다. 그걸 이용하는 사기꾼도 많기 때문이다. 신뢰를 쌓고 나서 결정적일 때 속인다. 그게 사기꾼이다. 그래서 중요한 개인정보에는 신용이 필요하다.

 

단순히 개인정보에만 신용을 새길 것은 아니다. 만약 사회에 떠도는 정보의 진위여부를 알고 싶다면 은행에 의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언론에 팩트체크를 맡기는 것도 한 방편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돈을 받고 정보를 팩트체크 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다. 의뢰를 통해 진위여부가 확실해지면 보관기간과 대여기관을 정한 뒤 사회에 퍼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사회의 신용을 높인다. 위조화폐 박멸을 위해 은행이 나선 것과 같이 위조정보의 박멸을 위해 은행이 나서야 한다.

 

정보는 돈과 달리 주관적 요소가 개입될 수 있어 신용도의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 그 차이는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 온라인 서류로 정보를 접수했을 때엔 보통 신용도 낮음으로 평가한 뒤 보관하고, 오프라인 서류로 정보를 접수했을 때엔 보통 신용도 중간으로 보관하고, 오프라인 서류로 정보를 접수한 뒤 직접 조사에 나서서 진위여부를 가리면 신용도 높음으로 보관한다. 물론 서류에 따라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 명백할 때에는 온라인 접수도 신용도를 높게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신뢰도가 높은 기관의 보증이 있다면 그걸 근거로 신용도를 높게 책정할 수 있다. 은행의 신용이 걸린 문제기 때문에 쉽게 책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없던 개념이기 때문에 어색할 수 있다. 하지만 인류는 대부분 필요가 발생하여 새로운 것을 시도했다. 지금까지 한국은 슬픈 역사가 있어 후발주자였다. 선진국의 많은 문물을 그대로 수용했다. 이제 한국도 선발주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새로움에 익숙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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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보다 노동자가 자유주의에 적합하다 봅니다. 근로는 이미 노동자의 행동을 결정지어버려요. 기업 입장에서 노동자가 부지런히 일하지 않아도 생산성만 높으면 됩니다. 1시간 일하고 생산성 10인 사람과 10시간 일하고 생산성 10인 사람이 있으면 누가 더 기업에 이익이 되는 사람입니까? 그런데 근로로 해버리면 생산성과 별개로 그냥 열심히 한 사람이 잘한 거라 착각하게 됩니다. 이러니 아무 생산성 없이 야근하고 있는 거죠. 자유주의의 관점으로 보면 부지런함은 노동자의 자유에 맞기는 것이 맞다 봅니다. 그에 대한 평가도 노동자가 직접 감수해야 하는 거고요. 역할주의의 관점으로 봐도 역할수행이 중요한 거지 부지런함 같은 주관적 해석이 깃든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노동자란 단어를 씁니다.

 

공산주의는 기술적응에 실패한 수준 낮은 사상입니다. 어떻게 상품가치와 소비자의 권리에 대한 서술이 보이질 않나요. 산업혁명으로 시대가 변하면서 저렴하고 품질이 높은 상품을 양산할 수 있는 수단이 나타나고, 그 수단을 소유한 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가치 있는 상품을 공급하면서 얻는 부를 단순한 계급투쟁으로만 해석하다니. 관점이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투쟁 말곤 거의 없습니다. 사회와 기술의 변화로 나타나는 각가지 현상을 맞아 인간 본위의 행복을 위해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상품가치와 소비자의 권리에 대한 이해도 없고, 세계화가 되면서 나타나는 다양성에 대한 예측도 없고, 종교를 비판하면서 종교의 도덕성을 이어받았다는 것에 대한 인식도 없고, 국민과 국가의 성장과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도 없고, 오직 주관의 도덕성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유재산을 해체하고 가족을 해체하고 집단을 해체하고 다 해체하고 나서 종교 교리의 지배 아래 살아가자는 주장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사상의 지배 아래 살아가자는 주장 따위에 세계가 현혹되었다는 사실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종교의 도덕성의 DNA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종교에 익숙한 사람들은 현혹되기가 쉬웠겠지요.

 

인간의 도덕성은 당대의 도덕관념에 의해 형성됩니다. 자본주의가 막 들어섰을 당시 자본주의의 폐해는 실질적으로 자본주의의 문제기보다는 인간의 도덕성을 결정하던 당대의 도덕관념이 문제인 겁니다. 종교를 믿던 인간이 자본주의를 받아드리면 그 인간의 도덕성이 완전히 바뀌는 일이 얼마나 있습니까? 종교국가에 자본주의가 들어서니 도덕성이 바뀌었습니까? 중국에 시장경제를 도입하니 사상이 바뀌었습니까? 인간의 사상은 일반적으로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 사람이 변하기 어렵다고 하는 겁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의 폐해가 아닌 유교의 폐해입니다. 유교의 가르침 중 상명하복을 정당화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전체주의적인 자본주의 국가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독재국가의 시장경제에도 쉽게 적응했던 것이고요. 본래 사상이란, 그 사상으로 야기되는 모든 현상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유교가 국가 사상이었고, 그 사상으로 연령차별이나 성차별 현상이 나타났다면 유교가 책임져야 하는 거죠. 그래야 사상의 변화가 있을 거 아닙니까. 공산주의 사상은 처음부터 수준 낮긴 했지만 도덕성을 명분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변질되었는데, 그러면 공산주의는 그 변질에 대한 책임이 없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유교가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는데 굉장한 공헌을 했다는 것에는 의문사항이 없습니다. 왕을 중심으로, 가장을 중심으로 한 상명하복이 중앙집권체제를 확고히 했습니다. 그걸로 국가가 성장하고 사회의 질서가 확립되어 오랫동안 유지되었지요. 그런데 그게 현대의 국민의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명하복의 수직사회에서 국민이 얻는 행복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수평사회에서 국민이 얻는 행복은 비견할 수 없습니다. 후자가 국민의 행복을 위한 사회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 사상을 바꾸어야 합니다.

 

아직도 출산율을 경제적 관점으로만 보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비참함을 느낍니다. 금전만능주의 따위 같이 하나의 관점인 사상은 인간을 너무 멍청하게 만듭니다. 특정 종교가 다산을 강조하고 피임을 부정해서 출산율이 높은 곳이 있죠. 특정 종교의 사상이 출산율을 올린 겁니다. 유교와 기독교는 여성의 정조를 지키게끔 만들었죠. 그럼에도 조선과 과거 한국은 강요를 통해 강제 결혼과 출산을 시켜 출산율을 유지했었습니다. 그러다 강요가 사라지자 출산율이 낮아졌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사상 때문에 출산율이 낮아진 겁니다. 사상이 원인으로 출산율이 높아지는 건 이해되고 사상이 원인으로 출산율이 낮아지는 건 이해가 안됩니까?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경제적 문제는 전세계가 공유하는 문젭니다. 그럼에도 어째서 한국만 출산율이 이토록 낮은 것인가? 거기에 초점을 맞춰보십시오. 한국이 유독 출산율이 낮은 것은 결혼 전 성관계를 부정하고 결혼 후 과부가 되어도 새로운 만남을 갖지 못하게끔 한 정조관념으로 기본적으로 출산율이 낮은 상황에서 그런 여성상을 도덕적이라 여긴 여성주의자로 인해 더욱 더 성을 터부시하게 되어 출산율이 폭락한 겁니다. 거기에 유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장유유서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정조관념을 강요해도 연하는 무시할 수 있지만 유교는 정조관념을 강요하면 장유유서 때문에 무시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위해 사상을 바꾸어야 합니다.

 

 

국민은행인 이유는 별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내가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아마 롯데와 제과입니다. 그 다음은 글쎄 아무거나 씁니다. 지금 뭐든 다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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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현대와 자동차 (0) 2021/12/31 PM 11:24

현대와 자동차

 

 

 

현시대를 관통하는 가치 중 하나가 바로 다양성이다. 다양성은 명분과 실리를 둘 다 잡았다. 명분을 보자. 다양성은 지극히 인본주의적이다. 다양한 인류를 위하기 위해서는 다양성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실리를 보자. 다양성은 지극히 민주주의적이며 자본주의적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에게 주권이 있기에 국민이 가진 다양성을 수용할수록 권력을 얻기가 수월하다. 자본주의는 상품을 소비할 소비자가 있어야 되기에 인류가 가진 다양성을 수용할수록 재력을 얻기 수월하다. 다양성은 도덕적이고 실용적이다. 다양성은 사회가 개방되고 발달될수록 가치가 높아진다. 개방되고 발달된 미국에서는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취지로PC(Political correctness)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세련된 도덕성을 얻길 바라는 일부 신세대와 권력을 얻길 바라는 일부 정치가와 재력을 얻길 바라는 일부 자본가가 PC주의를 지지하고 있는 중이다. 그 지지로 미국 전체가 들썩이고 있다. 미국을 넘어 세계의 문화에까지 침투 중이다.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만큼 PC주의를 지지하는 이들도 많지만, 올바름을 근거로 타인에게 PC주의를 강요하는 일로 인해 염증과 피로감을 느끼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확실히 말하겠다. 다양성은 올바르나 PC주의는 올바르지 않다. 목적은 찬성하나 수단은 찬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PC주의는 객관적 기준이 없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고 다양성과 자동차의 새로운 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PC주의는 사회주의적이며 종교적이며 무질서하다. 종교적이며 무질서하다는 말은 굉장히 모순되는 말이지만 차근차근 알아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자유주의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할 정도로 사회의 규율보다는 개인의 의지를 우선시한다. 사회주의는 사회가 도덕성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을 할 정도로 개인의 의지보다는 사회의 규율을 우선시한다. 이런 차이에 의해 자유주의는 개인의 의지에 따라 사회의 규율이 바뀌는 일이 잦지만, 사회주의는 사회의 규율에 따라 개인의 의지가 바뀌는 일이 잦다. 사회주의가 사회의 규율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도덕을 명분으로 곧잘 자유주의를 비판하고는 한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볼 것이 있다. 사회주의의 도덕성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보자. 대부분 인간은 전통적인 도덕관념에 의해 도덕성이 길러진다. 유교의 세계관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유교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고 기독교의 세계관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기독교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대 종교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 도덕성을 기반으로 사회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 탓에 대부분 종교가 교인의 의지보다 종교의 교리를 우선시했던 것처럼 사회주의 또한 개인의 의지보다 사회의 규율을 우선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민중이 사회주의를 상대적으로 쉽게 받아드릴 수 있었던 것은 민중을 위한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종교에 길들여진 민중에게 있어 그 방식 자체가 너무나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에서도 사회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은 한국 또한 국민의 의지보다 유교의 가르침을 우선시하던 국가였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도덕성이 부족하고 사회주의는 도덕성이 낡았다. 이에 따라 인류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가 고유한 도덕성을 갖추는 진보를 해야 할 것이다.

 

PC주의 또한 개인의 의지보다 PC주의의 규율을 우선시한다. 가령 PC주의의 규율과 어긋나는 걸 보게 되면 잘못되었다고 화를 내며 PC주의를 따를 것을 강요한다. 지극히 사회주의적이고 종교적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여기에 무질서가 추가되었다. PC주의가 주장하는 도덕성이 다양성이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인종과 민족, 종교, 성별 등을 차별이나 편견 없이 바라보자 주장했고, 그걸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이들이 주장하는 가지각색의 규율을 올바르다 해버렸다. 공통된 기준이 없이 각자의 집단의 주관에 옳고 그름을 맡겨버린 것이다. 각자 주관에 맡겨버린 탓에 질서가 사라졌고, 질서가 사라진 탓에 목소리가 큰 이들의 주장이 주로 수용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세력이 많거나 감성적인 이들의 주장이 주로 수용되고 세력이 적거나 이성적인 이들의 주장은 배척되게 되었다. 미국에서 흑인과 아시아인의 차이를 떠올려보면 된다. 흑인이 당하는 인종차별에는 PC주의가 크게 반응하는 반면, 아시아인이 당하는 인종차별에는 PC주의가 적게 반응하고 있다. 약자에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에만 주목하지, 그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난폭한 행동을 하며 강도질하는 것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이처럼 PC주의는 공통된 기준이 없어 세력이 크고 감성적인 이들의 무질서를 용인하게 되었다. PC주의는 객관적인 기준이 없는 이상 무질서하고 비이성적인 평등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가령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인종과 민족, 종교, 성별 등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PC주의의 이름으로 다양성을 존중하게 되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발생한다. 미국에서는 12 25일을 크리스마스라 부를 것인지 아니면 홀리데이라 부를 것인지에 대해 치열한 논쟁 중에 있다고 한다. 자유주의자라면 그 날을 크리스마스라 부르던 홀리데이라 부르던 본인과 타인의 자유에 맡긴다. 하나 PC주의자는 모든 인간에게 그 날을 홀리데이라 부를 것을 강요하며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

 

주관으로 인권을 결정하다 보니 질서가 사라져 이런 황당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성적 지향을 존중하기 위해 남성의 몸을 가진 사람이 여성 화장실에 출입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출입한 남성은 화장실에서 여성을 성추행 했다고 한다. 신체적 특성이라는 객관적 기준이 아닌 정신적 성적 지향이라는 주관적 기준에 특정 성별의 공간 출입여부를 결정해버리니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자 입장에서 자유라는 기준으로 질서 있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게 아닌 각자 주관에 맡긴 질서 없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걸 추구하는 PC주의는 용납할 수가 없다. 진정 다양성을 원한다면 객관적 기준을 가지고 추구하길 바라겠다.

 

 

한국은 세력이 크고 감성적인 여성주의의 목소리가 크다. 여성주의 또한 PC주의와 같이 인간의 의지보다 여성주의의 규율을 우선시하고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을 결정하고 있다. 가부장제 세계관에 있는 여성주의자는 다른 여성들에게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을 여성인권을 명분으로 강요하고 있다. 가부장제 세계관은 유교와 기독교에 영향을 받아 여성에게 혼전순결과 정절을 지킬 것을 강요하고 있다. 대부분 인간의 도덕성은 당대의 전통적인 도덕관념에 의해 형성되는 만큼 많은 여성주의자가 이런 걸 도덕적이라 받아드리고 있었다. 여성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여성 성 상품화를 죄악시했던 것이다. 그 결과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게 되었는데, 그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남성의 성욕 탓을 하게 되었다. 그런 탓에 정상적인 이성에 대한 성욕조차도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한국사회는 전통적인 도덕관념에 의해 그걸 수용해버렸던 것이다. 이성애의 결핍은 정조관념에서 시작되었고, 그 정조관념을 인권으로 여긴 여성주의에 의해 더욱 결핍되게 되어버렸다. 한국의 저출산은 이성애 결핍으로 인한 이성관계 붕괴로 인한 것이다. 이해가 어렵다면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떠올려보자. 여성 성 상품화가 자유롭지 못한 까닭은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이고, 남성 성 상품화가 자유로운 까닭은 남성이 성적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성 문화를 자유롭게 즐긴 것은 남성이 성적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고, 남성이 성 문화를 자유롭게 즐기지 못하는 것은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주의의 성 상품화 비판은 그야말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무시하는 여성 자유권 침해이며, 정상적인 이성애의 발달을 막아 출산율을 낮춰 사회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인문학적 고찰이 부족한 실수다.

 

성인지감수성은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의지가 약하고 성적 수치심이 강한)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을 말하며, 그런 여성상을 지금 여성인권을 명분으로 신세대 여성에게 강요 및 세뇌하고, 사회에 그런 여성상을 수용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여성주의자는 그 누구보다 가부장제를 비판하면서 그 누구보다 가부장제의 여성상을 여성과 사회에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하는 여성에게 지원금을 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것 또한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을 떠올려보면 된다.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은 남성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기 때문에 모든 성매매는 남성의 강요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인식하여 그런 짓을 저질렀던 것이다. 성 상품화나 성매매가 여성의 자유의지로 이루어진다면 자유국가는 그 자유권을 존중해야 한다. 성 상품화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다른 형태의 성 상품화도 문제가 없게 된다. 성적 문화의 탄압이 가부장제 여성상에서 왔다는 걸 인식하길 바란다.

 

어떤 여성이 학교나 직장에서 힘든 일이 있으면 나서지 않는 것은 첫째로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은 의지가 약하고 성적 수치심이 강하기 때문에 힘든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며 둘째로 여성주의는 주관적 손익을 인권으로 결정하기 때문에 손해에 해당하는 힘든 걸 인권침해라 받아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로 여성주의자가 아님에도 힘든 일에 나서는 여성이 드물고 두 번째 이유로 여성주의자들은 더욱 더 힘든 일을 외면하고 있다. 진정한 여성인권을 말한다면 평등한 관점에서 힘든 것도 같이하고 특혜를 거부했어야 했다. 학교나 직장에서 힘든 일이 발생하면 성별 관계 없이 할 수 있는 만큼은 같이 하고, 파견 또한 오지라고 해도 평등하게 받아드리고, 징병의 의무 또한 같이 했어야 했다. 평등한 관점에서 여성전용 특혜 거부나 여학교 폐지를 주장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도구로 여기고 여성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여성주의는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지 않고 여성 성 상품화를 죄악시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여성의 자유권 침해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열등하게 보고 힘든 일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여성주의는 여성이 힘든 일을 하는 것 자체를 여성혐오라 말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여성에 대한 멸시다. 한국 여성주의는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해 여성의 자유권을 침해하고 여성의 능력을 무시하는 여성차별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내가 주장하는 역할주의적으로 보자. 가령 역할주의의 관점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면 모두가 평등하게 역할수행유무로만 존중이 결정되게 된다. 역할주의의 이름으로 인종과 민족과 종교와 성별 등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주의로 접근하면 여성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여성혐오라 주장하게 된다. 여성의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이 결정되다 보니까 제 역할을 못한 것에 대한 비판조차도 혐오로 받아드리고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자이며 역할주의를 주장하는 입장에서 이런 수준 낮은 사상을 어떻게 반대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사실 여성주의라 자칭하는 자체가 이상하다. 대놓고 나는 한쪽 입장만을 대변하는 편향적인 인간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그게 올바르다 말하고 있다. 같은 잣대로 남성주의를 주장하는 남성을 비판하는 것처럼 여성주의를 주장하는 여성을 비판하겠다.

 

최근 단어의 정의도 주관에 맡기는 일이 많은 바람에 연상의 언행에 심적 불편함을 느끼면 근거 없이 꼰대라며 공격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꼰대의 어원과 별개로 그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은 연상이란 이유로 타인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인간을 말한다. 이런 강요는 사회적으로 보면 꼰대가 있고 경제적으로 보면 갑질이 있다. 반대로 강요하지 않는 이상 꼰대가 아니라 그냥 자기의사표현이다. 무지 또한 예외가 아니다. 주관에 맡겨버리다 보니 무지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들까지 생겨버렸다. 모르는 걸 알려주면 되려 화를 낸다. 정상이 아니다. 이런 비이성은 기준이 없는 사상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겠다. 어떤 규율보다 인간의 의지를 우선해야 자유가 보장되고, 객관적 기준이 있어야 질서가 생기고 질서가 있어야 이성이 생긴다. 이런 형편없는 사상에 선동되거나 세뇌되지 않기를 바라고,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하루라도 빨리 개인의 의지를 우선시하고 질서 있는 다양성을 추구하길 간곡히 바라겠다.

 

 

 

다양성

 

현대 광고가 눈에 띄어서 상대적으로 유명한 현대자동차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현대자동차가 노조나 차내 결함 따위로 논란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해선 주제와 관련이 적으므로 논점이탈을 막기 위해 언급하지 않겠다. 현대가 로봇회사를 운영하는 걸 보았을 때 미래지향적인 것 같다. 그건 확실히 의미 있는 일이다.

 

자동차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자동차. 이동수단. 인간을 태우고 이동하는 수단. 인간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동하는데 쓰이는 수단. 자동차는 인간에 맞춰 환경, 지형, 날씨, 온도 등을 고려하며 만든다. 자동차는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각의 용도에 맞춰 소형, 대형, 산악용, 사막용, 운반용, 공사용 등으로 만든다. 자동차는 인간의 사정에 따라 가격을 다르게 만든다. 자동차는 인간의 취향에 따라 디자인이 다르게 만든다. 생각하다가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바로 대상이다. 모든 자동차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인간이 탑승할 것을 전제하고 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하는 게 이해되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러나 자동차는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동하는데 쓰이는 수단이다. 만약 인간이 탑승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목적이 달성될 수 있으면 된다. 가령 출장이 필요할 때가 있다. 요즘은 컴퓨터관련은 원격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출장이 필요하지 않지만, 인간이 직접 작업을 해야 할 때에는 출장이 필요할 수가 있다. 그럴 때 만약 인간형 로봇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인공지능 차량에 인간형 로봇을 탑승시킨 후 출장시키면 된다. 그러면 인간의 목적은 달성된다. 간단한 얘기다. 많은 인간의 기술이 인간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 발전되었다. 걸어서 출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동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자동차나 지하철 따위의 이동수단을 이용한다. 식사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인스턴트 식품을 먹는다. 욕구해소 시간을 줄이기 위해 성상품을 소비한다. 필기입력 시간을 줄이기 위해 녹화나 녹음을 한다. 가사노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 가전제품을 이용한다. 이런 기술발달의 흐름이라면 분명 나중에는 인간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인간이 출장 가는 게 아닌 인간형 로봇이 출장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만이 차량에 탑승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인간 외의 대상을 고려하여 자동차를 만드는 것. 이게 바로 대상의 다양성이 된다.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몇 가지 확정사항이 있다. 인간형 로봇이 등장하는 것은 확정사항이다. 완전운전자동화 자동차가 등장하는 것은 확정사항이다. 부의 편중화에 따른 일부의 과잉자산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세가지를 고려하면서 새로운 길을 알아봐야 한다.

 

 

첫째, 대상의 다양성. 인간형 로봇이 등장한다면, 자동차에 인간이 아닌 로봇이 탑승할 수 있다. 기술이 부족한 지금은 로봇이 아니더라도 좋다. 애완동물을 반려동물이라 부르며 인간에게 쏟을 애정을 동물에게 쏟는 이들이 많다. 그들에게 동물은 인간과 동격에 가까운 존재이므로 그런 동물에 맞춘 차량을 개발하면 충분히 관심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말해두는데 특정 동물이나 반려동물에 대한 애호는 도덕이 아니라 취미다. 도덕이라면 그런 애호 자체를 타인에게 요구할 수 있지만 취미라면 타인에게 애호가 아닌 존중을 요구할 수 있다. 그 차이를 명확하게 인지하길 바란다.

 

인간형 로봇은 등장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반드시 등장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없으므로 그걸 대상으로 하여 자동차를 만들기가 어렵다. 하지만 인간형 로봇이 없더라도 지금 당장 로봇은 존재한다. 그런 로봇들과 결합한 자동차를 만들어 로봇자동차라는 이미지를 선점하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한다. 가령 드론을 자동차 어딘가에 부속할 수 있다고 해보자. 그걸 이동을 멈추고 정찰하는데 이용하거나 조수석에 있는 이가 가지고 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개념은 과거 매를 날려 정찰하던 것과 같은 것이다. 지금 당장 드론의 속도가 빠른 것이 아니므로 적절하게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로봇과 자동차의 결합이라는 개념을 선도할 수 있을 것이다. 로봇 개를 활용할 수도 있다. 미래에 인간형 로봇이 만들어지면 인간을 수행하는 비서와 같은 일을 할 수도 있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짐을 운반하고 위협으로부터 주인을 보호하는 일을 로봇이 할 수 있다. 지금 당장 기술이 부족하여 그걸 할 수는 없지만 로봇 개가 짐을 운반하는 것은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그 로봇 개를 장착할 수 있는 차량이 등장한다면 짐을 운반하는 로봇과 자동차의 결합이라는 개념을 선도할 수 있을 것이다.

 

파워태권도라는 것이 있다. 게임의 철권과 같이 체력 게이지의 감소를 관객이 명확하게 볼 수 있게끔 해둬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도입한 태권도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아무래도 인기가 적은 편이다. 다른 격투기에 비해 폭력성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기술과의 연계는 분명 이미지를 선점하는데 충분히 효과가 있다. 미래에는 어쩌면 안전보호구의 발달과 중력을 낮추는 기술의 등장으로 종래의 격투기보다 훨씬 화려한 싸움을 하는 태권도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중력을 낮추면 일시적으로 강해지고 이후 적응한다는데, 격투하는 동안에만 강해지면 되기 때문에 그건 괜찮을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미지 선점이다. 태권도가 전세계 보육원이 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훌륭하다.

 

다양성을 명목으로 로봇과 결합한 자동차 개발. 반려동물에 최적화한 자동차 개발. 동물은 소수에 속하므로 채산성이 맞을지 걱정할 수 있다. 하지만 전세계를 대상으로 만든다면 충분한 수요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미국 반려동물 수가 고양이는 9500만 마리, 개는 9000만 마리로 추정된다고 하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고양이나 개가 인간에 맞춘 좌석에 앉아 불안정하게 창 밖을 바라보는 일을 본 적이 있다. 이제 동물에 맞춘 좌석을 만들어도 그에 따른 충분한 수요가 있을 것이다.

 

자동차는 혁명을 상징하는 산업이다. 산업혁명의 변화를 마차에서 자동차로 바뀌는 걸로 설명할 때가 많다. 지금 기술혁명 또한 인간이 운전하는 자동차에서 인공지능이 운전하는 자동차로 바뀌는 걸로 설명할 때가 많다. 언젠가 미래에는 인공지능이 운전하는 자동차에서 인간형 로봇이 운전하는 자동차로 바뀌는 걸로 설명할지도 모른다. 그런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고 본다.

 

 

둘째, 차내의 다양성. 완전운전자동화 자동차가 등장한다면, 자동차 내에서 운전 외의 것을 할 수 있다. 이동하는 동안 식사를 할 수 있고 수면을 취할 수도 있다. 가령 미래에는 캡슐호텔에 동력기구를 달아 출발할 때 누어서 자다 도착하고 나서 깰 수 있는 캡슐차량이 등장할 수도 있다고 본다. 완전운전자동화가 대중화가 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당장 차내를 다양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자동차가 인간의 목적을 위해 이동하는 수단인 만큼 이동하는 동안 다른 걸 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다. 캠핑카 등이 있지만 그건 일상적인 자동차의 목적과 거리가 있다고 본다. 일상 속에서 차내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대상의 다양성이 인간 외의 존재에 맞춘 차량이라면 차내의 다양성은 인간에 맞춘 다양한 차량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건 아무래도 인간을 대상으로 한 자동차가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새로운 개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완전운전자동화에 최적화한 차량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야 완전운전자동화가 등장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완전운전자동화에 따른 차내의 다양성은 새로운 개념에 가까우므로 거기에 최적화한 차량을 계획하고 비슷한 걸 개발하여 이미지를 선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지금 인공지능 자율주행은 인공지능 기술발달이 더뎌 언제 개발될지 확정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인공지능의 발달은 지금과 같이 단순 계산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인간과 같이 알고리즘 자체 생성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정해진 알고리즘을 통해 계산하여 결론을 도출하여 학습하는 것으로 알고리즘을 성장시키는 게 아니라 최초 만들어진 알고리즘을 통해 계산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학습하는 것으로 아예 또 다른 알고리즘을 생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 유전자, 행동, 학습, 생각, 다른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이 말이다. 요컨대 알고리즘 겹치기다. 알고리즘을 하나 만들고 거기에 또 다른 알고리즘을 겹친다. 겹치고 겹치고 겹치면서 인공지능이 어떤 알고리즘을 이용해 계산할 것인지 판단하게 하면 된다. 하나의 알고리즘 내에서 수많은 계산의 결과를 인공지능이 선택하는 게 아니라 셀 수도 없이 많은 계산하는 알고리즘들을 선택하게 하면 된다. 그 선택과정 속에서 알고리즘을 조합하여 또 다른 알고리즘을 만든 것으로 행동한다. 그런 식으로 반복하며 자아가 형성된다. 인공자아다. 인간은 매일 세포를 바꾼다. 세포의 신호를 통해 인간의 자아가 형성되는 걸 고려하면, 매일 매시간 매초 다른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보면 된다. 다른 인간임에도 하나의 자아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알고리즘이 담긴 기억 자체가 인간의 자아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같이 알고리즘과 알고리즘에 전달되는 신호가 계속 바뀌며 알고리즘 자체도 계속 바뀌는 기능을 도입하면 인간과 비슷한 자아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차내의 다양성은 인공지능의 성장이 필수적일 것이다. 일단 개념적으로 정리해두겠다.

 

 

셋째, 차량의 다양성. 일부의 과잉자산이 현재진행형이므로, 그들을 위한 차량개발이 가능할 수 있다. 차량 또한 컬렉터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자본주의의 특성상 돈이 계속 늘어나기 때문에 일부는 상상이상의 돈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현대미술이나 코인이나 NFT에 돈이 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이들의 니즈를 만족시키기 위해 컬렉션화를 할 수 있는 컨셉카를 만드는 것이 좋다고 본다. 스마트폰 같은 기기와 다르게 자동차는 외형을 바꾸기가 매우 수월한 편이다. 이동만 가능하면 되기 때문이다. 자동설비에 적합하지는 않지만 애초에 고가의 컨셉카를 지향하는 만큼 수작업을 늘리면 되기 때문에 괜찮을 것 같다고 본다. 자동화 설비의 증가로 노동자 고용이 줄어들어 정계와 노동계의 불편한 시선을 감당해야 하는 시대에, 수작업의 컨셉카로 노동자의 일거리를 만드는 것은 시대변화의 흐름에 적응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컨셉카의 노동자와 자동화 설비의 노동자가 같은 일은 하는 건 아니지만 보통 사회는 인원 수와 급여의 수와 같이 숫자에 주로 초점을 맞추지 어떤 일을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기 때문에 괜찮다. 이렇게 수작업이 필요한 일거리를 늘린다면 완전자동화를 대비한 연착륙이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 있다. 토토로의 고양이 버스 같은 걸 만들 수 있는 게 아닌가? 외형적인 디자인만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것 같지는 않다. 실제 고양이처럼 안과 겉에 부들부들한 털과 지하철 의자처럼 내부에 열이 흐르도록 만든다면 만질 때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다른 산업과 연계하여 컨셉카를 만든다면 다른 산업을 좋아하던 이들을 끌어들일 수가 있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콜라보다. 같은 산업과 연계하면 산업에 관심이 있는 인간의 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크게 효과를 보기 어렵지만, 다른 산업과 연계하면 상대적으로 크게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본다.

 

수집을 목적으로 한 컨셉카는 매년 또는 매월 한정적으로 제작하고 상대적으로 고가에 팔면 될 것 같다. 에르메스라는 명품은 단순히 비싼 걸 넘어서 구매자격이 필요하다고 한다. 어떤 매장의 제품을 많이 사야 구매할 자격이 부여된다고 한다. 과잉자산이 명품에 대한 욕구를 크게 늘려 공급자가 우선되는 상황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수집욕을 만족시킬 수 있는 명품 컨셉카의 등장은 분명 채산성을 물론이고 브랜드 가치를 올리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개인적인 바람이기도 하다. 길거리에 비슷한 차량만 보이는 건 다소 심심하기 때문이다. 게임이나 영화 또는 만화나 소설에서 보던 것과 같은 차량이 현실에 등장하는 걸 본다면 보는 것만으로도 꽤나 자극적이고 재미있을 것이다. 대중에 친숙한 브랜드를 만드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자동차의 새로운 길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았다. 다양성은 분명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다. 그것의 수단이 잘못되었기는 했지만 그 방향은 옳다. 지금 당장 자동차만 다루기는 했지만 다양성은 다른 산업에도 적용될 수 있는 가치일 것이다. 개념적으로만 접근했기 때문에 이 다양성이 어떤 식으로 나아가게 될지는 모른다. 규제나 저작권 등이 어떤 식으로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새로운 개념은 충분히 가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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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국민과 은행입니다. 원스토어와 앱 플랫폼, LG전자, 롯데제과 등 아무거나 씁니다. 사실 은행은 답이 없을 것 같았는데 나오긴 하네요. 인문학은 사실 취업은 물론이고 창업을 목적으로도 배워야 하는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지금 당장 사회에 필요한 수많은 산업들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언인가에 대한 고찰로 나타난 게 아니었나 싶어요. 거기에 필요한 게 바로 인간을 배우는 학문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이 인문학을 발달시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파악할 수 있다면 한국의 상품이 전세계에 사랑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인문주의 인본주의 인간주의 다양하더군요. 굳이 인본주의라 한 것은 그것이 본래 뜻에 가장 적절하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위(판단이나 행동에서 중심이 되는 기준)

 

민족의 자유, 국가의 자유, 국민의 자유, 모두의 자유를 위해. 한국은 물론이고 동맹국이나 자유진영이 보다 인간의 보편적인 자유를 위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인류가 자유롭기를 바라지만 그건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요. 한국이 자유국가라면 인류의 자유를 위했으면 좋겠습니다. 당장 경제나 안보로 자유를 위하지 않는 국가와 협력하는 일이 있더라도 한국 자체는 자유를 위한 길을 걷길 바랍니다. 부디 자유를 위하는 국가와 협력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은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인 자유와 생존을 지키기 위해 자유적응과 기술적응을 해야 합니다. 자유 없는 생존은 무가치하고, 생존 없는 자유는 무의미합니다. 둘 다 갖출 수 있는 수준 높은 자유국가가 되길 바랍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대선 후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한국 국민의 눈높이가 높아졌다는 걸 의미합니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정계가 성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위해 정치개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개혁은 분야의 대표에 입법권을 주는 일이 필요하다 주장하겠습니다. 양당정치가 고착되다 보니 경쟁이 줄어들어 아무래도 한국 정치의 발전이 더디는 일이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정당에 갇혀 정당의 당리당략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당에서 벗어나 분야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이들 또한 필요하다 주장하겠습니다. 정당의 대표와 분야의 대표가 둘 다 입법권을 쥐고 정당은 국가의 방향을 결정하고 분야는 분야의 방향을 결정하는 역할분담이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내년에는 역할주의를 작성할 겁니다.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는 산업의 새로운 길을 떠올리는 것이 역할주의를 작성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본질과 가치를 통해 개념을 만들고 그런 과정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작성하는데 필요한 생각을 키워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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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네이버와 포털 (0) 2021/12/19 PM 10:24

네이버와 포털

 

 

 

네이버가 포털인 이상 인터넷 검열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검열사태를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고 시작하겠다.

 

 

첫째, 국내 기업 죽이기

 

메타로 사명을 변경한 페이스북이 미국에서 이런 지적을 받았다고 한다. 편향된 알고리즘으로 인해 정보 불균형으로 가짜뉴스에 속는 사람들이 많다. 알고리즘을 편향되지 않도록 바꿔야 한다. 얼핏 들으면 바른 말 같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자. 지금 유튜브에 관심이 없는 영상이 추천 목록으로 계속 올라온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무종교인에게 종교영상이 계속 뜨고, 잡식인 사람에게 채식 영상이 계속 뜬다. 원치 않는 정보를 계속 접해야 하는 소비자는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아, 다른 영상 플랫폼을 이용해야겠다. 당연한 결과다. 소비자가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하게 되면 시장에 외면 받는다. 페이스북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가짜뉴스 걱정으로 원하지 않는 정보를 접할 수 있도록 알고리즘을 짜면 시장에 외면 받을 것이다. 그런 결과가 예측이 가능한데 그 누가 알고리즘을 바꾸려 하겠는가? 자유국가에서 가짜뉴스는 기본적으로 개인이 교차검증을 통해 판별해야 한다. 진짜와 가짜의 판별을 위해 개인의 정보선택에 간섭하다 보면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수의 개인이 가짜뉴스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공교육으로 판별능력을 높여야 한다. 공교육을 살리지 않고 기업의 알고리즘에 간섭하는 것은 첫째로 책임회피고 둘째로 기업 죽이기다. 페이스북이 미국기업이므로 미국정계에 간섭을 받아 시장에 외면 받게 된다면 그게 바로 국내 기업 죽이기가 된다.

 

이번 검열사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네이버와 카카오 같은 국내 기업에 주로 적용되는 이번 검열은 실질적으로 그냥 책임회피 및 국내 기업 죽이기다. 과거 다음이 이메일을 전송할 때 우표값을 받겠다고 선언하여 시장에 외면 받은 적이 있다. 그것과 같이 지금 당장 국민이 국내 기업의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버리고 다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국외 기업이 국내 사정을 파악한 뒤, 국내 사정에 맞는 서비스를 공급하면 지금 국내 기업은 도태될 수도 있다. 답답하다. 세계시장을 공략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시장조차 도태되도록 압박하고 있다. 정말 감성적인 문제해결은 다방면에 피해만 준다. 단호히 말하겠다. 기본적으로 자유국가에서 개인의 인성은 공교육에서 형성해 나가야 한다. 기업에 검열이란 규제를 강요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단순한 책임전가에 불과하다.

 

타당한 규제라면 이해한다. 그러나 이번 검열사태는 말 그대로 자유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매카시즘 광풍으로 공산주의자 색출을 위해 사상 검증했던 것과 같이 페미니즘 광풍으로 성범죄자 색출을 위해 대화 검열을 하고 있는 것과 같다. 말 그대로 이성을 잃은 짓이다. 과거 한국에서도 간첩을 잡기 위해 국민을 예비 간첩으로 상정하고 검열과 검증으로 점철된 시대가 있었다. 불온전단지가 있을지 모른다며 불심검문으로 소지품 검사를 하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이걸 이번 사태에 맞춰보자. 오픈채팅에서 이미지에 공산주의 관련 용어나 공산당 찬양이 나오면 알고리즘에 의해 자동 검열이 되며 이걸 근거로 국가에 잡혀 들어간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에 반대하는 건 간첩이라며 공격한다. 똑같다. 과거 매카시즘 광풍으로 나타나는 자유침해나 지금 페미니즘 광풍으로 나타나는 자유침해나 동일한 논리로 작동한다. 간첩과 성범죄자가 같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맞다. 다르다. 간첩이 더 심각한 문제다. 페미니즘 광풍에 휘둘리지 않고 객관적으로 사물을 볼 수 있다면 국가 분열과 전복을 노리는 간첩과 일개 범죄자를 같은 잣대에 세우지 않을 것이다. 간첩이 있을 수 있음에도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위해 그 위험부담을 감수하기로 약속했다. 이웃이 간첩일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개인의 자유를 위해 그걸 의심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것이 민주주의자가 독재정권과 싸워 얻어낸 결과 중 하나다. 그럼에도 간첩보다 중요도가 낮은 일개 범죄자 따위를 색출하기 위해 전 국민을 예비 범죄자로 상정하고 대화를 사전 검열하는 이 사태는 정말이지 끔찍하기 짝이 없는 자유침해며 국민능멸이다. 이런 걸 고려하면 이번 검열은 독재와 맞서 싸운 이들이 찬성했다는 점에서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는 추태다. 최소한의 이성이 남아있다면 독재보다는 검열이 낫다는 식으로 반응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건 겨 묻은 개가 똥 묻는 개를 나무라는 것이다. 독재에 맞선 자유의 상징과도 같던 이들의 퇴보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둘째, 국가 이념 죽이기

 

자유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로서 나는 일관된 태도를 취하겠다.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것처럼 검열정권을 비판하겠다. 인간이 일관적인 원칙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네가 간첩일 수 있으니 국가의 안녕을 위해 네 자유를 침해하겠다. 네가 범죄자일수 있으니 국민의 안전을 위해 네 자유를 침해하겠다. 동일하다. 오히려 간첩수색이 더 타당하다. 그 방법의 잔혹성은 차치하고 명분만 보았을 때에는 그렇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위해 그런 자유침해를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보다 더 약한 수준의 것을 명분으로 인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가? 사상이 변하고 기술이 변하는 시대, 불변가치를 훼손하고 객관성도 갖추지 못한 수준 낮은 사상들이 정의라 떠들며 세계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 시대, 많은 이들이 옳고 그름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라 이 사태에 대해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답할 수 있는 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말해두겠다. 일제침략에 맞서 민족의 자유를 위해 독립을 외쳤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공산침공에 맞서 국가의 자유를 위해 피를 흘렸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군사독재에 맞서 국민의 자유를 위해 투쟁을 했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자유국가의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자유야말로 한국의 정체성임이 분명하다면, 이 검열사태는 이번 정권의 그 어떤 실책보다 더 분노해야 할 사안임이 분명하다. 자유를 침해하는 검열을 향한 네 순수한 분노는 어느 때보다 정당하다. 자유주의자에게 있어 실로 비참한 시대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의사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공산주의자의 의견이라도 막으면 안 된다. 여성주의자의 의견이라도 막으면 안 된다. 나는 그 사상들을 반대하는 입장임에도 의사표현의 자유를 막는 것에 반대하겠다. 세 살 버릇 여든 살 간다는 속담에 빌어 말하자면, 세 살이든 여든 살이든 누구나 다 자유롭게 의사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성별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이 성 상품화를 하고 싶으면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은 지금 남성이 성 상품화를 하는 건 자유롭고 여성이 성 상품화를 하는 건 부자유스럽다. 이건 멋대로 여성의 성을 억압하는 걸 여성인권이라 포장하며 여성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여성인권이 아니라 여성억압이다. 과거 유교와 기독교를 근간으로 한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의 정조관념을 근거로 한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이다. 지금 한국에서 남성이 즐기는 성 문화가 억압받는 것은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이고, 여성이 즐기는 성 문화가 자유로운 것은 남성이 성적 자유를 누리기 때문이다. 한국 남성이 성 문화를 자유롭게 즐기고 싶다면 여성의 성적 자유를 주장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성 문화 억압이 있어야 성관계를 맺어 출산율이 올라갈 거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는 성 문화 억압은 성 터부시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억압한다고 성관계가 늘어나지는 않는다. 성 문화 억압으로 출산율을 높이는 효과를 노리자는 주장은 애초에 성이 자유로운 국가에서나 해당된다. 한국은 유교의 남녀유별과 여성의 정조관념으로 이성애결핍이 발생하여 출산율이 낮아졌고,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성주의가 그걸 여성인권이라 주장하여 이성애가 더욱 결핍되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출산율이 낮아졌다. 이 출산율 저하는 한국의 인간관계붕괴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 천박한 사상을 막지 않으면 앞으로 더욱더 심각해질 일만 남았다.

 

그럼에도 지금 사회를 혼란케 하는 건 여성주의의 주장 자체가 아니다. 일부 입법과 사법과 행정이 별다른 여과 없이 그들의 주장을 감성적으로 판단하고 정책에 반영하여 사회를 혼란케 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여성주의의 주장을 이성적으로 받아드려 꼭 필요한 것만 반영했다면 이토록 사회가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말 괴롭다. 본래 삼권 중 어떤 권력이 잘못하면 다른 권력이 견제를 해야 함이 마땅한데 입법의 잘못에는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고 있다. 행정의 수장인 대통령은 입법과 같은 정당이고 관료는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사법 또한 종종 여론에 휘말려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일부 정상적인 삼권은 존재하나 안타깝게도 그 힘이 미약하다. 과거 매카시즘 광풍으로 나타나는 광기를 막기 어려웠던 것처럼 페미니즘 광풍으로 나타나고 있는 입법의 자유이념 붕괴나 사법의 법치주의 파괴나 행정의 권력에 고개 숙이기 따위를 막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이제는 변해야 한다. 판사와 관료가 목소리를 키우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나 그 어떤 이의 주장도 막으면 안 되는 것처럼 판사와 관료의 주장 또한 막아서는 안 된다. 입법 또한 모든 정치가 개개인이 분명하게 의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삼권에 요구하겠다. 광기의 흐름에 파묻히지 말고 냉철한 이성으로 올바른 주장을 하길 바라겠다. 지금 한국 사회는 과거 매카시즘의 사상검증 명분과 페미니즘의 대화검열 명분이 논리적으로 다를 바가 없음에도 그걸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이성을 잃은 상태다. 그야말로 페미니즘 광풍의 시대다. 우리는 역사를 알고 있다. 매카시즘 광풍이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페미니즘 광풍이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을지 예상할 수 있다. 이성을 잃어버린 광기의 시대. 후대에 광인으로 평가 받고 싶지 않다면 최소한 이 광기와 선을 긋길 권하겠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자유에는 위험부담 감수라는 책임이 따른다. 이런 당연한 걸 이해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정부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통금을 걸고 지역 이동의 자유를 막는다고 가정해보자. 황당할 것이다. 어떻게 그런 자유 억압을 할 수 있는가? 그런데 그게 자유와 안전과의 관계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안전하지 못하고 안전하기 위해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밤의 이동을 막으면 분명 국민은 보다 안전하다. 위험한 지역으로의 이동을 막으면 분명 국민은 보다 안전하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는 것은 자유롭기 위해서 그런 위험부담을 감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는 온라인도 마찬가지다. 댓글 자체를 막으면 악플을 겪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면 인간의 자유가 침해되고 만다. 온라인에서는 악플이란 위험부담을 감수하고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자유국가라면 온라인에서 어떤 위험이 있을 걸 감수하고 자유를 누려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어떤 잘못이 나타날 걸 방지하기 위해 인간의 대화를 사전 검열을 하는 것은 지극히 자유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짓이다. 그야말로 국가 이념 죽이기다. 자유국가의 입법이 자유 이념을 죽이고 있다. 이보다 끔찍한 일이 얼마나 더 있겠는가? 통탄스럽다. 이러한 위험부담에 대한 약속은 대량생산도 동일하다. 대량생산을 하면 분명 불량품이 나타나 국민에 피해를 입힐 수 있다. 국민이 일절 피해를 입지 않으려면 모든 생산을 수공업으로 하면 된다. 그런데 그러면 많은 국민들에게 생산품을 공급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국민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그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대량생산을 하고 있다. 자유국가의 국민들은 자유와 풍요를 위해 위험부담을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어떤 사건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사건을 처리하는 절차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셋째, 국민 성장 죽이기

 

성장에는 자유가 필요하고 자유에는 위험부담 감수가 필요하다. 당장의 안전을 위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면 인간은 성장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중국의 강력한 통제로 질서가 유지되는 걸 보며 중국의 사회주의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질서를 유지해버리면 인간은 성장할 수 없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제까지나 강요하지 않으면 질서가 유지되지 않는다. 국민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질서를 지키는 수준까지 도달하려면, 다소 질서가 흔들리는 한이 있더라도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그 질서가 흔들리는 실수가 발생해도 보장을 해야 그 실수를 통해 성장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인류는 위험부담을 감수할 수 있어야 자유로울 수 있고, 자유로울 수 있어야 성장할 수 있다. 안전을 명목으로 국민의 자유를 침해한 것은 국민의 성장을 죽이는 일과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겠다. 이는 아동교육도 마찬가지다.

 

자녀를 강력한 통제로 키우면 분명 자녀는 안전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미숙아로 자라게 된다. 이는 사회가 발전하여 아동의 인권이 높아질수록 심해진다. 사회에서 아동의 인권을 중요시하여 보호자에게 아동보호를 강압한다. 그러면 보호자는 아동이 사고 치거나 당하지 않도록 보호자 및 어른의 말을 잘 듣게끔 의지를 약하게 만든다. 의지가 약화된 아동은 스스로 성장하는 방법을 잃고 어른에게 의존하며 어른의 말을 잘 듣게끔 되어버린다. 특히 유교권 국가는 장유유서를 성립시키기 위해 아동의 의지를 약화하는 일이 잦다. 아동의 의지가 약해야 어른의 말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보통 유교권 국가에서 교육실패는 보통 안전을 위해 자유를 억압하다 성장하지 못하는 것으로 발생한다. 사회초년생의 황당한 실수는 교육단계에서 제대로 성장할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정말 웃기는 일이다. 학생을 위해서라면 사회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려줘야 함이 마땅한데 안전을 핑계로 많은 정보를 차단하고 무지한 상태에서 사회에 내던져 버린다. 다른 나라에서는 미성년 때 이미 운전도 하고 술도 마시고 성관계도 맺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16세에 운전이 가능하고 덴마크에서는 학교에서 성관계까지 허용하고 있다. 스웨덴은 부모가 자녀의 성교육을 반대할 수 없다는 법조항도 있다고 한다. 이런 게 진짜 성장에 도움이 되는 길이다. 인간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줘야지 암기만 달달 시키면 어떻게 하나. 진짜 슬프다. 인본주의적 불변가치는 유지하고 만변가치는 인간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환경에 적응 실패한 동물이 도태되는 것과 같이 자유와 기술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류는 앞으로 도태될 것이다. 나는 한국이 도태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럼에도 미성년에게 성교육은 이르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하나 그러면 안 된다. 출산율 0.6을 찍고도 모르겠는가? 이제 변하지 않으면 멸망한단 말이다!

 

중학생의 범죄가 나날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중학생을 의제강간의 대상으로 지정해놔 그들의 범죄에 논리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상황이다. 중학생을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을 정도로 미숙하고 열등하다 해놨는데 어떻게 성인과 비슷한 처벌을 행할 수 있겠는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정보양이 늘어나게 되었다. 높은 정보양을 고려하여 그것에 맞춰 인간의 지적 능력과 정신연령을 높여야 하는데 중학생은 미숙하다라는 낡은 관념에 사로잡혀 학생을 성장시키기 보다는 보호를 명목으로 억압하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버렸다. 그야말로 시대를 역행하는 우행이다. 중학생에게 성 강요를 하거나 노리개로 삼은 것에 대한 대처는 중학생의 자유를 억압할 것이 아니라, 중학생에게 그 강요에 맞서 싸울 정도의 강한 의지를 갖출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함이 마땅했다. 만약 피해자가 바로 신고할 수 있었다면 그런 끔찍한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새를 위험하다는 이유로 새장에 가두는 쪽이 현명한가, 새가 사냥하거나 위험에 도망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현명한가, 답답하구나. 지금 중학생이 범죄를 저질러도 이것 때문에 제대로 대처가 불가능하다. 중학생이 모텔에서 경찰을 조롱해도 어떤 대책이 없다. 그냥 조롱 당하는 수밖에 없다. 중학생은 열등한 존재기 때문에 성인과 동등한 처벌을 할 수 없다는 논리적인 결론이 나오기 때문에 이보다 더 심각한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대응할 수 없다. 정말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 정보양이 늘면서 중학생의 범죄 수위는 나날이 높아질 것이 분명한데 그걸 막을 방법을 원천 차단시켰으니 참 할말이 없다. 정보양이 늘면 정보양에 맞춰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게 아니면 질서가 흔들린다. 정보를 차단하면 된다고? 범죄를 저지르는 학생이 얌전이 정보를 차단당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얌전한 애들만 정보 차단으로 미숙하게 성장할 뿐이다. 범죄를 저지를 법한 학생은 얌전한 학생을 괴롭히며 놀 것이고 말이다. 정보 불균형 현상만 가속화된다. 참 진짜 문제해결 방식 따위가 너무 낡았다. 페미니즘 광풍이 끝나야 법도 바뀌고 세상도 바뀌어 모든 국민이 보다 자유롭고 평등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자유억압은 여성의 성장도 방해한다.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힘든 일은 여성이 아닌 남성의 몫이다. 그 세계관에서 여성은 힘든 일을 피했지만 성장할 수 없었고 남성은 힘든 일을 했지만 성장할 수 있었다. 여성은 힘든 일을 할 수 없다는 편견이 여성의 성장 기회를 빼앗은 것이다. 한국은 가부장제 세계관으로 지금까지 교육이 이런 식이었기 때문에 여성의 의지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 여성의 의지약화는 여성에 대한 선입견으로 제대로 된 기회를 준 적이 없기 때문에 나타난다. 여성주의는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이 결정되기 때문에 가부장제 세계관에 있는 여성주의자는 힘든 일을 주지 않는 근거가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는 차별적인 인식으로 나타난 결과임에도 힘든 일을 피했다는 것만으로 여성인권이라 주장하고 있다. 반대로 힘든 일을 주는 것이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지 않는 평등한 인식으로 나타난 결과임에도 힘든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여성차별과 혐오라 주장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군복무가 그러하다. 가부장제 세계관에 있는 이는 여성이 열등하다 생각하기 때문에 여성에게 군복무는 힘들다고 생각하고 그 의무를 맡기지 않는다. 어떤 여성은 힘든 일을 피했으니까 여성인권이라 말한다. 그런데 여성은 힘든 일을 피했지만 개인의 성장도 하지 못하고 사회적 입지도 갖추지 못했다. 의무를 행하지 않고 어찌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지금 비정상적인 혜택은 페미니즘 광풍의 여파로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정녕 여성을 위한다면 여성이 의무를 행함으로써 확고부동한 사회적 입지를 갖출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어떤 여성은 군복무를 걱정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군복무에 필요한 체력측정을 남성과 동일하게 하면 일부 여성만 군복무를 하고 대부분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하게 될 것이다. 출산으로 병역면제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정권을 비판하고 있음을 안다.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나 부동산 참패나 페미니즘 광풍 따위를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건 사실 사소한 문제로 여겨질 정도로 큰 실패가 있다. 중국과의 관계는 경제를 생각해 이해할 수 있다. 북한과의 관계는 역사와 영토를 생각해 이해할 수 있다. 부동산 가격 폭등은 정책의 실패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이해와 수용이 불가능한 실패가 있다. 바로 인간관계 유지 실패다. 한국이 수직사회에서 수평사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성립시키기 위해 사상과 제도를 재정비했어야 했음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의 인간관계가 붕괴하고 있다. 그 붕괴의 여파로 출산율이 낮아지고 자살률이 높아지고 있다. 이성관계가 붕괴하니까 출산율이 낮아진 것이다. 가족관계가 붕괴하니까 학생자살과 노인자살이 늘어난 것이다. 이 모든 현상이 인간관계 붕괴의 징조라 해석하면 답이 나온다. 수직에서 수평으로의 전환 실패, 다른 말로 자유에 대한 적응 실패다. 하나의 질서가 붕괴하면서 분열하는 관계를 잇는 일을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페미니즘 광풍에 휩쓸려 이보다 더 인간관계를 붕괴시켰기 때문에 출산율이 더욱 낮아지고 자살률은 큰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어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인간관계다. 위기가 발생해도 인간관계가 튼튼하면 합심하여 맞설 수 있지만, 인간관계가 붕괴하면 대응할 수가 없다. 이런 인간관계 붕괴를 방치하는 걸 넘어 보다 더 빠르게 붕괴시키고 있으니 이보다 더 심각한 실패가 어디 있겠는가? 앞으로 온라인 산업 발달이 부르는 오프라인 관계희소를 해결하기 위해 기술적응을 하지 못하면 더욱 더 심각해질 것이다. 관계붕괴로 보다 빠르게 국가를 소멸시키고 있으며 사전검열로 국내 기업과 국가 이념과 국민 성장을 죽이고 독재정권의 사상검증에 정당성까지 내줘버렸다. 관계붕괴와 사전검열은 이번 정권의 씻을 수 없는 실패임이 분명하다. 한국을 사랑한다면 부디 지금이라도 그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고개 숙여 부탁한다.

 

 

 

새로운 개념

 

검열에 대한 강력한 비판은 지금부터 주장할 새로운 개념을 적용할 때 방해가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기도 하다. 온라인의 오픈 채팅 및 오픈 커뮤니티 사전 검열이라는 걸 오프라인으로 적용하면 소모임 대화의 사전 검열일 정도로 심각한 만큼 어떤 형태의 발전이든 이 검열이 방해가 될 확률이 높다. 서글픈 일이다. 새로운 개념을 설명하기 전에 네이버의 현재 상황에 대해 알아보자. 네이버는 구글에 맞서 검색으로 경쟁하면서 다각도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것 같다. 금융이나 쇼핑이나 커뮤니티 등에 힘을 기울이는 것 같다. 그런데 냉정히 말해 네이버는 검색으로 구글과 경쟁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구글이 구글링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낼 정도로 검색의 이미지를 선점했기 때문이다. 네이버의 기술이 발전해 검색능력이 뛰어나게 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구글을 이용해 검색할 것이다. 이미지 선점이 이래서 중요하다. 이런 이유로 네이버는 구글과 검색으로 경쟁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여기서 만약 검색을 새로운 개념으로 접근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검색의 개념을 다른 각도로 해석하여 접근할 수가 있다. 만약 그것이 정착되면 구글과 검색으로 경쟁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구글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경쟁상대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경쟁상대가 한국기업이길 바란다.

 

우선 검색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검색이란 포털에서 키워드나 이미지 입력으로 정보를 출력해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다. 자 그럼 이 행위가 오프라인에서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도서관 같은 정보보관소에서 특정 목적을 가지고 책이나 자료를 훑어보며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효율과 편리와 용량의 차이가 압도적으로 크다. 온라인에서는 간단한 키워드나 이미지 입력으로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반면 오프라인에서는 직접 수작업으로 일일이 찾아야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어떤 단어의 정의를 찾을 때 국어사전과 포털 검색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간단히 이해가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검색을 할 때 오프라인의 정보 수집을 떠올리는 일이 많지 않다. 하지만 본질은 새로운 길을 안내해준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차이는 하나 더 있다. 바로 관계다.

 

통상 온라인에서 검색은 혼자서 한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때에도 실명의 지인에게 묻거나 익명의 커뮤니티에 찾아가 질문을 해야 한다. 묻는 이는 정보 수집이란 목적이 있지만 답하는 이는 정보 제공이란 목적이 없기 때문에 대답해줄 확률도 낮다. 이걸 오프라인으로 바꿔보자. 이는 도서관에 가서 정보를 수집하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것이 생겨 친구 집에 가거나 동아리 모임에 찾아가는 것과 같다.(오프라인으로만 접근하여 스마트폰 등의 기기는 제외했다.) 굉장히 번거로운 일이다. 반면 오프라인에서 도서관에서 정보 찾기는 여럿이서 하는 일이 있다. 온라인과 달리 오프라인은 정보를 찾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협동하여 정보를 수집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같은 목적을 가지고 정보 수집을 행했기 때문에 묻는 이나 답하는 이나 정보 수집이란 목적이 같기에 답하는 이가 성실하게 정보를 제공할 확률이 높다. 이걸 온라인으로 바꿔보자. 검색을 하는 순간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보자. 이러면 온라인의 편리와 효율과 용량과 함께 오프라인의 관계까지 잡을 수 있다. 이게 검색의 새로운 개념이다.

 

가령 포털에서 어떤 키워드로 검색을 한다고 해보자. 특정 이슈가 발생할 때 그 이슈를 검색한다. 검색하는 순간 검색어를 기반으로 한 오픈채팅을 개설하거나 참여할 수 있게 만든다. 이러면 어떤 특정 이슈에 관심이 있었던 이들이 검색하는 순간부터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게 된다. 같은 목적을 지닌 이들과 아주 쉽게 익명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 이것으로 종래의 검색과 커뮤니티의 단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지금까지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메신저의 오픈채팅을 개설해도 그걸 홍보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돌아다녀야 한다. 그러나 포털 자체에서 검색어를 기반으로 한 오픈채팅 개설 또는 참여가 가능해지면 굳이 돌아다니지 않고도 같은 목적을 지닌 이들과 만날 확률이 높다. 같은 목적을 지닌 사람과 대화를 통해 수준 높은 정보 수집하게 된다. 이걸 오프라인으로 바꿔보자. 어떤 도서관에서 특정 키워드가 담긴 푯말을 들고 돌아다닌다. 같은 키워드가 담긴 푯말을 든 사람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정보에 관련된 질답을 통해 정보를 교류하여 수준 높은 정보를 수집하게 된다.

 

지금까지 수집되는 정보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인공지능 기술을 발전시키는 방법으로만 접근했다. 그러나 인간과 소통하며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하면 수집되는 정보의 질을 보다 더 높일 수 있게 된다. 도서관에서 혼자서 정보를 찾는 것보다 여럿이서 정보를 찾는 것이 효율적이고 수준 높은 정보를 얻게 되듯이 말이다. 검색과 오픈채팅의 결합은 매우 단순했지만 새로운 개념을 만들 수가 있다. 지금까지 검색은 혼자서 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걸 부수고 여럿이서 검색하는 것을 확립하며 이미지를 선점할 수 있다면 구글과 경쟁이 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세계에서 인기적인 LOL의 기초 개념은 과거 워크래프트3의 유저가 만든 게임일 뿐이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았지만 그 게임의 개념이 굉장히 재미있어서 그걸 기반으로 한 게임들이 굉장히 흥행하게 되었다. 검색과 오픈채팅의 결합은 실제 단순하다. 그러나 그 개념은 지금까지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에서 혼자가 아닌 여럿이서 검색한다는 개념은 분명 훌륭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검색과 오픈채팅의 결합은 같은 시간에 같은 키워드를 검색하는 사람이 있어야 된다는 점이 있다. 이건 두 가지 대처방안이 있다. 비슷한 키워드를 묶어서 채팅에 포함시키는 방법과 검색 인구수 자체를 늘리는 방법이다. 어떤 사람은 양념치킨을 검색하고 어떤 사람은 후라이드치킨을 검색했을 때, 해당 오픈채팅이 없을 경우 치킨이란 키워드로 서로를 만날 수 있도록 알고리즘을 설계한다. 이러면 웬만해서는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인구가 많으면 대중적이거나 유행하는 키워드로는 쉽게 사람과 만날 수 있게 된다.  

 

온라인에서조차 의견을 내지 않는 이들이 많다. 커뮤니티에 게시물을 올리면 통상 조회수의 십 분의 일 이하로 의견이 달린다. 대부분은 의견을 내지 않는다. 그런데 검색과 오픈채팅의 결합은 애초에 목적 자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게 된다. 더구나 익명이며 검색이 끝나면 헤어질 관계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또한 정보 수집이라는 당장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목적 달성 이전까지는 서로 정중하게 대화를 나눌 확률이 높다. 처음부터 악의적인 채팅을 하기 위해 검색 오픈채팅에 참여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이건 주류 오픈채팅과 비주류 오픈채팅으로 대응방식이 달라진다. 참여자가 많은 주류 오픈채팅에서는 신고와 제재를 통해 관리를 하면 되고 참여자가 적은 비주류 오픈채팅은 참여자가 그냥 무시하면 된다. 인구수가 적은 곳은 어차피 사람의 관심이 없기 때문에 악의적인 채팅을 하는 사람이 적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자유를 위해서 어느 정도는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온라인의 발달로 온라인에서의 인간관계로 자아를 유지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온라인 커뮤니티의 폐쇄화가 진행되는 곳이 있다. 만약 포털 자체에서 검색을 통해 오픈채팅이 나타나게 되면 활동 커뮤니티나 SNS와 관계없이 대등하게 만날 수 있는 공론화의 장이 마련되게 된다.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붕괴되고 있는 중에 온라인 인간관계도 커뮤니티의 폐쇄화로 점점 붕괴되고 있는 중이므로 이런 만남의 장소는 분명 관계 개선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검색 오픈채팅에서 주고 받은 대화는 검색창을 끄면 사라지게 된다. 그걸 블로그나 카페 등으로 스크랩할 수 있는 기능을 마련하면 대화를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설령 보관하더라도 익명이기 때문에 대부분 괜찮다.

 

검색 오픈채팅으로 온라인 익명 유저의 통합의 장을 마련할 수 있으면 단순히 검색의 주도권을 쥐는 것을 넘어 온라인의 주도권 자체를 쥐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고 생산자가 소비자가 되는 것처럼 질문자가 답변자가 되고 답변자가 질문자가 될 수 있는 검색이 될 수 있다. 그 생태계를 유지하고 거기서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이 나오게 될 것이다.

 

 

자유와 풍요에는 위험부담 감수라는 책임이 따른다. 이런 자유에 대한 이해 없이 페미니즘 광풍에 휩쓸려 매카시즘의 사상검증과도 같은 사전 검열을 해버리는 바람에 검색 오픈채팅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게 될지 모르겠다. 앞으로 포털이 어떻게 발전할지도 모르겠다. 길이 막혔다. 괴롭다. 하루라도 빨리 이성을 잃은 광기가 끝나길 바라며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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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에 초점을 맞춘 건 그냥 상대적으로 자주 써서입니다. 별 이유는 없어요. 다음 글은 현대와 자동차입니다. 그 다음은 글쎄요. 국민은행이나 LG전자나 바이오산업이나 병원 등 아무거나 씁니다. 생각하는 건 익숙해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아마 정상적인 사상가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관련 일에 종사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일을 맡겨줄 지는 모르겠군요. 나는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착잡하네요.

 

사법은 사회질서를 위한 것이지 사회정의를 위한 게 아닙니다. 이 점을 착각하는 이들이 주로 감성적인 판결을 요구하지요. 가령 사전검열 따위와 달리 좀비 바이러스 같은 게 발생하여 질서가 무너질 우려가 생기면 개개인의 인권은 무시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다수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백신패스에는 반대하지만 일시적이기 때문에 사전검열과는 다르게 접근해야겠죠. 백신패스와 사전검열을 음주운전 측정으로 비교하면 잠깐 일부에게 하는 것과 매일 모두에게 하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온라인이라서 체감하기 힘든데, 후자가 훨씬 심각한 겁니다. 사회질서에 초점을 맞춰야 사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흉악한 범죄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건 그 범죄자를 위해서가 아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유한 이의 부패를 평등하게 판결해야 하는 것도 사회정의가 아닌 사회질서를 위해서 그러는 겁니다. 사리사욕 따위로 불평등하게 판결하게 되면 질서가 흔들리게 되겠지요. 아, 아! 인문학! 눈물 나게 슬프군요.

 

 

답답하군요. 어째서 인간이 만든 현상을 해석할 때 인간의 사상을 간과하는 건가요. 인간의 행동은 대부분 인간의 사상을 근거로 합니다. 동북아가 빠른 발전과 저출산과 중산층 파괴가 발생한 건 유교사상에 근거한 겁니다.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보통 사상이 큰 영향을 끼칩니다. 중국이 시장경제를 도입해 경제적 사상을 바꾸어 빈곤에서 벗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상명하복 사상으로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으나, 수직사회에서 수평사회로의 전환을 실패, 즉 자유에 적응에 실패하여 사회가 혼란스러운 거죠. 거기에 한국은 페미니즘 광풍으로 이성관계붕괴 및 성 터부시가 증가되어 출산율도 유지 못하는 상황까지 도달했던 겁니다. 그걸 몰라서 동물의 생리활동이나 경제적 원인으로 추측하고 있으니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거죠. 일본도 경제적 성장의 멈춤을 사상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뭐더라 일본은 태어났을 때부터 역할이 정해져 있다는 인식이 있다고 하죠. 그래서 정치권의 세습이 용인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것이 인간의 성장에 큰 방해가 되고 있다고 봅니다. 경제 또한 인간이 성장시키는 겁니다. 인간이 성장하지 않으면 경제도 성장하지 못합니다. 일본 정계는 일본 국민의 순응으로 지금까지 편하게 정치했겠지만 그 때문에 일본 경제도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대부분의 국민이 정치권도 위협할 정도로 날카로운 도전정신을 갖추지 못하는 이상 일반적으로 일본이 이 이상 성장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건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국민이 자유롭게 최대한 성장할 수 있을 만큼 사상적 제도적 지원을 해야 국가가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아동의 성장을 막는 장유유서나 여성의 성장을 막는 가부장제 세계관 따위는 이제 역사서에 남겨야 할 낡은 관념입니다. 모든 국민이 자유롭게 욕망을 추구하며 최대한 성장하여 사회를 이롭게 하는 것이 자유주의의 이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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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신세계와 오프라인 유통 (5) 2021/12/06 PM 01:03

신세계와 오프라인 유통

 

 

 

시대의 변화로 새로운 역할을 맡아야 할 분야가 바로 오프라인 유통업계다. 누구나 다 안다. 오프라인 유통업에 미래가 없다는 걸 말이다. 통계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올해 산업통상자원부에서 내놓은 통계에 따르면 2020년 유통업체 매출이 전년 대비 오프라인은 3.6% 감소하고 온라인은 18.4% 증가하였다. 이런 현상은 매우 당연하다. 왜냐하면 온라인으로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편하기 때문이다. 온라인은 유통과정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가격경쟁에서 유리하다. 온라인은 스마트폰으로 상품을 고르기만 해도 집까지 배송되기 때문에 편리경쟁에서 유리하다. 오프라인 유통업은 가격과 편리에서 온라인 유통업을 이길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오프라인 유통업계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다. 이제 역할이 달라질 뿐이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교육은 단순한 지식주입이 아닌 자아형성 후 지식 검색 및 활용으로 바뀌어야 하고, 언론은 단순한 정보공급이 아닌 정보의 연결로 인간사이의 괴리를 줄여나가는 정보관리로 바뀌어야 하는 것과 같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오프라인 유통업계는 이제 단순한 수요에 공급하는 것이 아닌 수요를 창출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있는 수요에 생산품을 유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수요를 만들어서 유통을 해야 한다. 인간이 모여 수요가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그 수요에 상품을 유통해야 한다. 온라인이 가격과 편리를 담당한다면 오프라인은 이제 인간관계를 담당해야 한다. 수요에 맞춘 유통과 수요를 만든 유통은 전혀 다르다.

 

이번 글에서 신세계에 초점을 맞춘 것은 단지 신세계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알아보니까 신세계가 유통업에 전념하는 것 같고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야구단을 운영하는 것을 보았을 때 수요공급이 아닌 수요창출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관점에서 초점을 맞춘 의미는 있다고 본다. 앞으로 이런 종류의 글은 하나씩 어떤 기업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오프라인 유통업계가 인간관계를 담당해야 할 이유는 기술의 발달로 오프라인 인간관계의 희소가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애정결핍

 

한국은 애정결핍국가다. 장유유서로 인해 세대간의 애정이 결핍되었다. 대등한 관계가 아니기에 가정과 학교와 기업에서 나이차이가 나면 인간관계에 선이 그려져 깊은 관계로 나아가기가 어렵다. 그 결과 가족여행이나 회식자리를 꺼려하는 사람이 늘었다. 장유유서는 연상과 연하의 차별을 올바른 도리로 만들었기에 다수의 연상이 연하와의 평등을 불편해하기에 연하와의 좋은 관계가 이루어지지가 어렵다. 불평등을 바라는 연상과 평등을 바라는 연하가 사이 좋게 지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남녀유별이나 정조관념 따위로 인해 성별간의 애정이 결핍되었다. 어린 시기부터 이성과 가까이 지내며 이성애를 키워나가야 함에도, 연상의 권위로 남녀를 갈라놓아 이성관계를 줄이고 여성의 정조를 중시하여 성관계를 막은 탓에 정상적인 이성애로 성장치 못했다. 그 결과 남성은 여성을 성욕해소도구로 여기거나 여성은 남성을 ATM기기로 여기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최근 핵가족과 1인가구 증가, 저출산이나 가족애 결핍 따위는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교를 바탕으로 한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성주의가 여성인권을 빌미로 남녀의 관계와 성관계를 더욱 줄이고 막으면서 한국의 이성애는 심각할 정도로 결핍되어 출산율이 폭락하고 말았다. 이는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을 결정하는 여성주의의 특성이 야기한 것이다. 가부장제 세계관을 주관으로 여기는 여성의 손익으로 여성의 인권을 주장하다 보니 이런 괴상한 결과가 나와버렸다. 통상 인권이라 함은 개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함에도 여성주의는 성 상품화나 성매매를 하는 여성의 의지를 무시하고 여성의 권리를 빼앗고 있다. 성 상품과 매매는 그 상품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따라 인권이 결정되는 거지, 그 자체로 인권침해가 발생하는 게 아니다. 노동 상품과 매매가 상품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따라 인권이 결정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것은 한국 여성 인권이 아닌 가부장제 세계관 속의 여성 인권을 추구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들에게 있어 가부장제 세계관에 있지 않은 여성은 보호대상이 아니다.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여성은 의지가 약하고 성적 수치심이 강한 존재기 때문에 약한 의지에 맞춘 할당제와 강한 수치심에 맞춘 성적 억압이 나타나게 된다. 유교적 여성주의 또는 기독교적 여성주의가 보통 이렇다. 한국 여성주의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여성의 주관적인 손익으로 인권을 결정하는 사상.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이들이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남성의 독선을 비판하던 이들이 여성의 독선을 주장하고 있다. 대다수의 신세대와 일부 기성세대는 가부장제에서 벗어났음에도 일부 신세대와 대다수 기성세대가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인권이라 주장하는 바람에 사회가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가부장제 세계관 속 있는 사람은 가산점이나 할당제 따위의 여성특혜나 성적 억압을 주장하지만,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난 사람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갈등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이는 극단 여성주의나 온건 여성주의나 차이가 없다. 근본 구조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여성주의는 가부장제의 마지막 발악이라 보면 될 것이다. 정녕 여성의 인권을 바란다면 여성을 억압하던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진지하게 말하겠다. 나는 여성을 객관적으로 우수하다 생각하고 있다. 학교성적 따위의 다양한 지표가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부장제를 비판하면서도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의 주장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란다.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주장하는 여성특혜나 여성 성 억압은 여성을 열등하게 보기 때문임을 인지하길 바란다. 여성은 열등하지 않다. 현명한 여성을 응원한다. 우자와 현자는 성별로 구분되는 게 아니다.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여성인권은 인간의 인권 안에서 추구해야 한다.

 

한국은 애정결핍국가였음에도 과거에는 강요를 통해 관계를 유지했다. 세대간에 애정이 없어도 강요로 형태를 유지했다. 이성간의 애정이 없어도 강요로 형태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강요가 사라지자 관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핵가족, 1인가구, 저출산 따위는 인간관계 감소로 인한 현상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 감소한 관계는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온라인에서 관계를 맺고 자아를 유지하는 늘어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학업이나 생계유지를 위해 오프라인 인간관계는 그나마 살아남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메타버스와 NFT의 등장으로 생계유지조차 온라인으로 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고 있다. 또한 앞으로 기존 산업은 대부분 로봇과 인공지능이 할 예정이다. 온라인 일자리가 늘고 오프라인 일자리가 줄어든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희소하게 된다.

 

다른 국가는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국만큼 애정이 결핍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그렇지 않아도 애정결핍 된 상황에서 메타버스와 NFT의 등장은 대다수의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소멸시킬 기폭제가 될 확률이 높다. 현재 한국은 정치, 경제, 사회, 안보, 환경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당장 오프라인 관계 소멸의 위기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메타버스와 NFT를 막자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건 기술발전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교통의 발달로 인간의 체력이 저하된 것과 스마트폰의 발달로 인간의 문해력이 저하된 것과 같이 온라인의 발달로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희소된 것일 뿐이다. 발전은 발전대로 하게 두고, 그 발전으로 인해 나타나는 부작용은 부작용대로 해결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한국의 저출산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땅의 크기를 고려했을 때 인구수가 줄어들게 되는 저출산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출산이 애정결핍으로 인한 인간관계의 감소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라면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애정결핍을 만든 사상은 불변가치가 아니라 만변가치기 때문이다. 사상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므로 사상의 변화로 애정결핍을 해결할 수 있다면 출산율은 자연스럽게 올라갈 것이다.

 

지금 기성세대는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더 익숙하기 때문에 오프라인 인간관계 희소의 심각성을 인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미래를 보기 위해서는 시선을 신세대에 맞춰야 한다. 지금 신세대는 미래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메타버스와 NFT가 성장한 시대를 살아가는 신세대의 오프라인 인간관계는 자연스럽게 희소될 확률이 높다. 저출산이 과거서부터 수많은 징조 속에서 현재 결과가 나타난 것처럼, 인간관계 희소 또한 수많은 징조 속에서 미래에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과거와 현재는 사회의 변화로 저출산이라는 현상이 나타났다면, 현재와 미래는 기술의 변화로 오프라인 인간관계 희소라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한국은 수직사회에서 수평사회로의 변화로 자유적응이 필요한 것처럼 인터넷 이전에서 이후로의 변화로 기술적응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오프라인 인간관계는 자유적응과 기술적응이 동시에 필요한 국가존립을 위해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 할 수 있겠다. 자유적응과 기술적응. 한국은 이 두 가지 난제를 해결해야 한다.

 

다른 관점으로 가보자. 어째서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가? 온라인 인간관계로 충분하지 않는가? 어쩌면 먼 미래에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현재는 아니다. 왜냐하면 불변가치에 해당하는 종의 존속을 위해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재 인류는 이성의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있어야 출산이 가능하다. 자유로운 국가에서는 이성이 서로 사랑을 해야 종이 존속된다. 종의 존속을 위해 오프라인 인간관계는 유지되어야 한다. 통상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사상과 기술의 발전은 인본주의를 근거로 한 불변가치를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인본주의

 

인본주의란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을 위한 사상이다. 인본주의적 불변가치란 인간이 인간인 이상 변하지 않는 가치를 말한다. 본래 보수와 진보가 논쟁을 벌어야 할 사안은 불변가치와 만변가치다. 인간을 위해서 변하지 않는 가치와 변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싸워야 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선동과 이권 다툼으로 점철된 정치를 보면 몹시 슬퍼 삶의 허망함을 느낄 정도다. 인권이 정쟁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것에 참담함을 금치 못한다. 무엇이 정녕 인간을 위한 길인지 고찰하길 간곡히 바란다. 내가 자유주의를 추구하고 자본주의가 옳다 말하고 역할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수는 과거에 지나치게 얽매이고 진보는 지나치게 과거의 것을 지우려 한다. 내가 가고 싶은 미래는 인간을 위한 미래다. 내가 비판하는 대상은 전부 그것이 인간을 위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해서다. 이런 것은 나 개인의 손익과 관련이 없는 일도 많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어쩔 수 없다. 내게 손해가 되는 일이라도 그것이 옳다면 옳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인류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로 향하길 바란다. 그럼에도 최근 가상자산이나 메타버스 등에서 논의 중인 탈중앙화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탈중앙화는 불변가치인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는 국가라는 존재를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탈중앙화로 세금을 걷지 못하게 되면 국가는 더 이상 존립할 수 없다. 국가가 존립할 수 없으면 인간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줄 곳을 잃게 된다. 인간이 인간인 이상 결코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줄 어떤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탈중앙화는 탈국가와 다를 바가 없다. 아나키즘 수준으로 저급하다. 만약 진정 탈중앙화를 원한다면 탈국가를 하고 나서 탈중앙화를 원하는 이들끼리 살아가길 바란다. 탈중앙화는 사상적 관점이 아니라 기술적 관점에서 나타난 것일 것으로 보인다. 탈중앙화는 부디 인문학적 고찰을 좀 더 하고 나서 하길 주장해야 한다.

 

공산주의는 개인의 욕망이라는 기본적인 불변가치를 부정하였다. 분명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승패는 상품화 능력으로 결정된 것은 맞다. 자본주의는 소비자를 생각하며 경쟁을 통해 상품가치를 높여 그걸 소비하는 국내 국민을 행복하게 하고 국외 상품 경쟁에서 승리하여 경제를 발전하게 하였다. 공산주의는 생산자를 생각하는 바람에 경쟁을 없애 상품가치를 높일 이유가 없어 상품 품질 저하로 국내 국민을 불행하게 하고 국외 상품 경쟁에서 패배하여 경제를 쇠퇴하게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경쟁 없이 만든 상품이 경쟁 속에 만들어진 상품을 이길 수가 없다. 이런 이유로 공산주의는 몰락했다. 러시아는 자본주의로 돌아섰고 중국은 흑묘백묘론을 주장하며 공산주의 정치체제 안에서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상품가치를 올리는 방안을 사용했다. 시장을 개방하지 않은 북한은 아직까지도 고난의 행군을 할 정도로 빈곤한 처지에 놓여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어떤 방법을 통해 공산주의가 상품가치를 높였다고 하더라도 그 사상에는 미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인 욕망이란 불변가치를 부정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현재 공산주의 국가는 기득권층은 마음대로 욕망을 추구하고 있고 그 외는 살기 괴로울 정도로 절제시키고 있다. 이런 차별로 인해 불만이 쌓이게 되고 언젠가 그 불만으로 국가가 붕괴될 것이다. 어떤 사상도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의 본성을 부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을 바른 길로 안내해야 한다.

 

한국은 지금 사법 언론 은행 등에 대한 불만이 치솟고 있다. 이는 특별히 한국이 무능하기 보다는 한국 국민이 접하는 정보량이 늘어나면서 사회를 보다 엄격하게 평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한국 국민의 눈높이가 높아졌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내가 이런 것을 옹호하기도 했다. 사법을 옹호하고 언론을 옹호했다. 그 이유는 이들의 역할이 인본주의적 불변가치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들을 비판하는 이들은 불변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따로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법을 비판하며 사법의 인공지능화를 주장하면서 삼권분립의 파괴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맹목적으로 원하는 판결이 아니면 화부터 내며 법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들어버리는 걸 보면서 어떻게 사법을 옹호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물론 일부 판사가 성인지감수성이 법치주의 기본인 법 앞의 평등을 훼손하고 있음을 인지하지 않고 차별적인 판결을 내리는 것을 행함을 보면 국민들의 비판은 지극히 정당하다 할 수 있다고 본다. 성인지감수성이 얼마나 천박하냐면 돈인지감수성 따위를 생각해보면 된다. 약자이기 때문에 그에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라면 빈민 또한 약자기 때문에 그에 맞춰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성인지감수성은 돈이 적은 빈민은 약자기 때문에 부자와 다르게 판결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여성주의 자체가 주관으로 인권을 결정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법치주의를 훼손하더라도 여성이 이익을 보면 여성인권이란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 여성주의가 법 앞의 평등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모든 사법을 비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겠다. 사리사욕 또는 전관예우 따위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는 올바른 판결을 하는 일이 많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법에 대한 비판은 타당한 논리로 해야 할 것이다. 언론의 신뢰도가 매우 낮음에도 언론 자체의 필요성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인터넷에 많은 정보생산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론만큼 공익을 위해 일하는 역할이 아직까지 없다. 얼마나 많은 개인방송이 수익이 안 되는 일에 집중하겠는가? 이런 측면에서 언론의 쇠퇴가 아닌 언론의 새로운 길을 주장했던 것이다. 은행을 비판하며 가상자산의 탈중앙화를 주장하는 이들에 맞서 탈중앙화를 비판하는 까닭도, 탈중앙화가 국가 내에서 은행의 역할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금을 걷지 못하는 이상 탈중앙화는 결코 은행이나 경제를 대체할 수 없다.

 

많은 사상이 불변가치에 대해 무지하다. 채식주의는 인간의 본성인 잡식을 부정한다. 비폭력주의는 인간의 본성인 폭력성을 부정한다. PC주의는 인간의 본성인 비웃음을 부정한다. 인간의 본성을 훼손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 채식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인공육이 바람직할 것이고 비폭력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게임이나 격투기가 바람직할 것이며 PC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그가 바람직할 것이다. 실제 인간에게 피해를 입하지 않은 상황에서 욕망을 해소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인본주의적 방법이다. PC주의를 잠시 말해보자. PC주의는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와 같은 길을 가고 있다.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를 생각했던 공산주의처럼 타인이 아닌 본인을 생각하자 주장한다. 여성주의의 주관적 이익의 인권화가 바로 이런 흐름에서 나타난 것이다. 본인을 생각하며 발전하지 않고 정체되게 만드는, 인간의 향상심을 부숴버리는 무시무시한 사상이다. 만변가치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보통 사상이 그러하다.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고 힌두교가 자리잡은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상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장유유서나 정조관념 따위가 한국인을 불행하게 한다면 그걸 바꿔야 한다. 그럼에도 불변가치는 훼손하면서 만변가치는 굳게 지키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인간의 애정은 아무렇지도 않게 파괴하면서 특정 사상에 매달리는 꼴을 보면 속이 터진다. 유교의 연령차별을 부정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상에 대한 존중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이제 연상이 아닌 인간에 대한 존중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다. 가령 어떤 노인이 피해를 입으면 노인공경할 줄 모르냐고 말할 게 아니라 인간을 존중하지 않았다고 비판해야 한다. 그건 나이 성별 관계 없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불변가치고 특정 인간에게만 공경하는 건 만변가치다. 많은 이들이 불변가치와 만변가치를 구분 짓지 못하기 때문에 요즘 시대는 논쟁이 쉬운 측면이 있다. 어떤 주장에서 불변가치를 훼손 또는 부정하는 일이 발생하면 그걸 지적하는 순간부터 논쟁이 끝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논쟁이 불변가치만 파악하고 있어도 그렇게 어렵지가 않다.

 

정말 인문학적 수준이 낮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불변가치와 만변가치를 구분 짓지 못한다. 주관과 객관을 구분 짓지 못한다. 취향과 도덕을 구분 짓지 못한다. 인권과 독선을 구분 짓지 못한다. 허용과 권장을 구분 짓지 못한다. 권장과 강요를 구분 짓지 못한다. 자유와 방임을 구분 짓지 못한다. 재력과 전능을 구분 짓지 못한다. 개인과 집단을 구분 짓지 못한다. 의지와 세뇌를 구분 짓지 못한다. 어떤 인문학자는 우수하다 생각한다. 나는 인문학자와 교수가 작성이나 번역 또는 해제한 사상서로 생각을 키워나갔다.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그들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를 보면 인문학적 수준이 낮다 하지 않기가 너무나도 어렵다. 그게 몹시 괴롭다. 어린애도 논파할 수 있는 저급한 논리를 가지고 선동하고 있는 꼴을 보면 환장하겠다. 평등하다면서 한쪽에 특혜를 주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거나, 성 상품화는 잘못되었다고 말하면서 남성 성 상품화는 아무 문제 없다는 식으로 한다거나 말이다. 이런 것은 가부장제 세계관에 익숙한 인간들이 저지를법한 인문학적 고찰이 부족한 실수다.

 

많은 이들이 인문학을 무시하고 있음을 안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은 단순히 인문학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한국이 지금 기초인문학 수준이 낮은 편임을 인식하고 제대로 된 인문학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보통 낮은 수준의 인문학 때문에 발생하는 폐해에 대한 책임은 개개인에게 묻고 싶지 않다.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정상적인 사상가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기에 굳이 책임을 묻자면 사상가 또는 인문학이다. 그러나 과거의 것은 물을 수 없어도 현재의 것은 물을 수 있을 거라 본다. 책임져야 할 일을 더 이상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은 그렇지 않아도 낡고 어리석은 사상으로 애정결핍으로 인한 저출산이라는 회생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다. 그만 문제를 악화시키길 간곡히 바란다. 어떤 종의 씨를 말리는 행위를 저지르는 이들이 악이라면 한국인의 씨를 말리는 행위를 저지르는 이들도 악이다. 도대체가, 사회에 그렇게나 영향을 끼치는 이들에게 애국심이 없단 말인가? 작디 작은 나라가 열강 속에서 버티기 위해서는 낭비할 힘 따위 없단 말이다. 유교의 장유유서를 성립시키기 위해 자행되고 있는 아동과 여성 약화교육과 정조관념을 성립시키기 위해 자행되고 있는 성적 억압과 한국 여성주의의 가부장제 세계관을 성립시키기 위해 그것들을 인권화하고 있는 무지한 작태는 하루라도 빨리 막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겠다.

 

오프라인 인간관계는 인류라는 종의 존속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 중 하나다. 오프라인 인간관계에서 성립되는 이성애는 인류가 단성생식 따위 같이 이성관계 외의 방법으로 종을 유지하는 방법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변하지 않는 가치가 된다. 인본주의적으로 오프라인 인간관계는 불변가치에 해당한다. 따라서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오프라인 유통업계의 새로운 역할이다.

 

 

 

유통업계

 

온라인 유통업계에 대해서는 특별히 할말이 없다. 세부적으로 개선하거나 발전해야 하는 방향은 알아서 해도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오프라인 유통업계는 이제 전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오프라인은 온라인과 가격경쟁과 편리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없다. 하지만 오프라인이 우위에 설 수 있는 영역이 있다. 바로 여가다. 아이쇼핑 또는 쇼핑데이트 따위가 보통 소비와 여가가 합쳐진 형태다. 이런 여가는 온라인이 오프라인을 이길 수가 없다. 이후 온라인 또한 어떤 형태를 통해 여가까지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하나 아직까지는 어렵다. 오프라인은 이 점을 공략해야 한다. 물론 단순히 공략만으로 끝날 것이 아니다. 그것뿐이면 앞서 장황한 말을 꺼내지 않는다. 오프라인 유통업계는 한국의 자유적응과 기술적응을 위해 오프라인 인간관계의 생성과 유지를 담당해야 한다. 온라인은 실질적인 상품의 수요에 유통하는 걸 담당하고 오프라인은 수요를 만들어서 상품을 유통하는 걸 담당해야 한다. 이런 사회적 문제는 보통 정부에서 해결해야 하나 그러다 보면 시장경제에 지나치게 간섭하게 될 우려가 있다. 그러다 보니 경제가 그 역할을 하길 바라게 되었을 뿐이다. 역할의 영역은 만변가치에 해당한다. 딱 부러지게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해진 것이 아니다. 할 수 있는 인간이 해야 한다. 지금 당장 한국에서 오프라인 인간관계 희소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로 문제인식이 미비하기에 이 역할은 과거 빈 땅을 점령하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선착순으로 주어지게 될 것이다. 그 역할을 수행하면서 사회적 공헌을 하는 것이 명백해지면 정부에서는 그런 이들에 대한 어떤 특정한 혜택이 주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세금감면이라던가 말이다. 그럼 오프라인 인간관계의 생성과 유지의 방법에 대해 몇 가지 알아보자.

 

우선 종래의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가령 술집이나 PC방은 술과 서비스가 아닌 안주와 부식으로 수익을 얻고 있다고 한다. 이런 것이 보통 수요를 만든 다음 상품을 유통하는 것이다. 술과 게임이라는 라는 여가를 제공하는 것으로 안주와 부식이라는 수요를 만들어 수익을 얻는다. 그러나 이런 것은 특별히 인간관계 개선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수요와 수익을 고려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이런 형태가 나온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예시로는 충분하다. 이런 형태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 이상 이런 방법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프라인 유통업계는 이런 걸 보다 더 확장된 형태로 적극적으로 접근하면 된다. 신세계의 야구단 운영은 그런 측면에서 새로운 길에 대한 이해가 빠르다. 여가와 유통을 연결 지어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이미 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까지 고려해야 한다. 가령 메타버스와 NFT에 익숙해진 미래세대는 오프라인 인간관계 자체가 어색하여 야구장에 갈 일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그걸 위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방법까지 필요하다.

 

 

 

오프라인 플랫폼화

 

온라인 유통업은 현실을 가상으로 연결하여 유통과 소비과정을 생략하는 것으로 가격과 편리를 잡은 것이라면, 온라인 플랫폼은 가상과 가상을 연결하여 시공간을 생략하는 것으로 거리와 관계를 잡았다. 관계, 온라인 인간관계다.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형성해야 할 오프라인 유통업은 온라인 플랫폼을 참고할 가치가 있음을 주장하겠다.

 

온라인 플랫폼 몇 가지를 살펴보자. 유튜브나 로블록스 등의 특징은 어떤 생태계를 구축한 뒤에 생산과 소비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수수료로 수익을 얻고 있다. 목적이 영상이나 게임 따위로 다를 뿐이다. 이는 국가가 세금으로 운영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사회를 구축한 뒤에 생산과 소비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세금으로 국가를 운영한다. 목적이 인간이라는 것으로 다를 뿐이다. 즉 플랫폼 경제란 국가 안의 작은 국가들이라 생각하면 된다. 플랫폼 생태계에서 생산과 소비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수수료로 플랫폼을 운영하고, 플랫폼에서 생기는 세금으로 국가가 운영된다. 이런 구조를 오프라인 유통업 또한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 온라인의 경우 법적인 규제가 아직 들어서기 전이기 때문에 큰 제약 없이 성장하고 있지만 오프라인의 경우에는 어떤 제약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나 만약 온라인에서는 허용되나 오프라인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면 통상 법이 낡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잠깐 정리해보자. 오프라인 유통업이 가야 할 길은 있는 수요에 상품을 유통하는 게 아닌 창출한 수요에 상품을 유통하는 것이다. 어떻게 창출하느냐? 여가를 제공하는 것으로 수요가 창출된다. 창출된 수요에 상품을 유통하여 수익을 얻는다. 이 기본 구조에서 여가를 오프라인 플랫폼으로 제공하면 된다. 그리하면 플랫폼 내에서 생산과 소비에서 나타나는 수요에 대한 상품 유통하는 것으로 수익을 얻고, 생산과 소비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수수료로도 수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온라인 플랫폼과 다른 점은 수수료뿐만이 아니라 현실 상품 수요에 유통하는 것으로도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유튜브가 최근 상품광고를 하는 것을 볼 때 유사하게 수익을 얻는 것으로 보이지만, 직접 유통과 간접 유통은 엄연히 다른 법이다.

 

몇 가지 예시를 들어보자. 한국 전통인 김치 담그기를 할 필요가 있다. 그 때 오프라인 플랫폼에서 김치 담그기를 할 수 있는 공간과 재료를 제공한다. 본래 생산하지 않는 소비자인 사람이 혼자 또는 집단이 가서 김치를 담근 다음, 소비해야 할 것 외의 남는 김치는 다른 소비자에게 판매한다. 김치를 담근 사람은 남는 김치로 수익을 얻었다. 오프라인 플랫폼은 그 생산과 판매 과정 속에서 김치재료 유통수익과 김치생산 수수료수익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특이할 만한 점은 본래 오프라인 유통업체에서 소비를 하던 사람이 생산을 하여 수익을 얻었다. 소비자가 곧 생산자가 된 것이다. 오프라인 유통업체도 온라인 플랫폼과 비슷하게 생산과 소비에서 나타나는 수수료로 수익을 얻었다. 차이점은 추가로 재료 유통이라는 것으로도 수익을 얻었다. 이런 기본적인 구조가 바로 오프라인 플랫폼화다. 물론 이게 쉬운 것은 아니다. 이렇게 생산자의 인성, 생산된 김치의 품질이나 가격, 수요가 결정되지 않은 점 따위가 그렇다. 그런데 이런 건 온라인 플랫폼도 원래 처음에는 힘들어하는 문제다. 유튜브의 경우 우수한 품질의 영상이 나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생태계를 형성한다는 것이 쉬운 점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겠다. 그나마 나은 점은 오프라인 플랫폼은 온라인 플랫폼의 방식을 참고할 수 있기 때문에 온라인이 거쳐온 시기보다는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가령 담근 김치를 플랫폼 관리자가 시식해보고 맛을 품평하여 판매 허용을 결정하는 것으로 최저품질을 보장한다. 생산자의 판매기록이나 맛의 평점 따위를 온라인 앱에 기록하는 것으로 생산자의 인성이나 가격 따위가 결정될 수 있다. 이런 문제는 해결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사람은 식사를 해야 한다. 그 때 오프라인 플랫폼에서 요리를 할 수 있는 공간과 재료를 제공한다. 어차피 요리할 것이라면 오프라인 플랫폼에서 요리를 잔뜩 한 뒤에 남는 요리를 저렴한 가격에 판다. 어떤 일가가 있다. 오프라인 플랫폼에서 여가를 보내기로 한다. 그 때 일가가 자신들이 먹을 요리를 만든 다음 남은 요리를 저렴하게 판다. 그리고 그 수익으로 다른 생산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소비를 한다. 어떤 DIY를 하는 이들이 직접 취미로 만든 걸 구매하는 것으로 소비를 한다. 어떤 이들과 같이 노는 것으로 소비를 한다. 이렇게 여가와 생산과 소비가 연결되었다. 점심시간에 생산하고 이후 시간에 소비를 한다. 이 과정이 전부 즐거운 여가다. 가족과 합심하여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그걸 나누는 것으로 여가에 필요한 수익을 얻고 그 수익으로 다른 생산자의 상품을 소비한다. 다른 생산자도 비슷하다. 여가 시간의 일부는 생산하고 일부는 소비한다. 그 과정 전체가 여가다. 이런 것이 여가와 생산과 소비가 합쳐진 오프라인 플랫폼, 오프라인 생태계다. 이것으로 오프라인 인간관계 유지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온라인은 놀아주는 것으로도 비용이 지불되고 있다. 오프라인도 그런 식으로 충분히 접근할 수 있다. 온라인 게임을 예로 들어보자. 게임사 입장에서 온라인 게임 무료 이용자는 다른 유료 이용자를 즐겁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무료 이용자를 위해 들어가는 고용이나 서버 유지 비용은 실질적으로 무료 이용자에게 지불되는 것과 같다. 온라인 게임은 이미 놀아주는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셈이다. 무료 이용자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소비자를 즐겁게 하고 있다. 즉 어떤 측면에서 그건 생산활동이다. 이걸 오프라인 플랫폼도 쓸 수 있다. 아니 이미 쓰고 있다. 예컨대 어떤 대회를 열고 상금을 준다고 해보자. 그때 주최측은 광고효과 따위를 목적으로 상금을 지급한다. 여기서 관점을 바꿔보자. 상금을 얻을 정도의 우수한 인간이 대회에 참가하게끔 하는 것은 다른 대회에 참가하거나 관람하는 이들을 즐겁게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된다. 요는 간단히 말해 놀아주는 비용이다. 주최측은 상금 수여자에게 놀아주는 비용을 지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콘서트에서 떼창이란 관객이 함께 노래를 부르는 행위를 뜻한다고 한다. 그게 만약 다른 관객을 즐겁게 하여 콘서트 티켓 구매에 영향을 끼쳤다면 충분히 생산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생산활동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지금까지는 이런 생산활동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게 생산활동이라는 걸 몰랐을 뿐이다. 어떤 소비에 영향을 끼치는 광고가 생산활동이라면 이런 것 또한 생산활동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소비자의 소비 이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이 떼창이라면, 그런 떼창을 하는 소비자에게 어떤 혜택을 준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조사한 결과 떼창으로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어 다른 소비자를 즐겁게 했다는 근거가 명확하다면, 그 근거로 티켓 할인이나 또는 적당한 금액을 환급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소비자 입장에서 생각지 못한 생산활동을 통해 수익을 얻었다는 느낌을 받아 다시 한번 콘서트에 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여가 속에서 생산과 소비가 되어야 한다. 생산과 소비가 여가가 되어야 한다. 앞으로 인공지능의 발달로 사라지는 직업들이 있다. 계산하는 직업이나 서빙하는 직업이나 홍보하는 직업이 사라질 수 있다. 여기서 관점을 바꾸자. 이 직업을 사라지지 않게 할 수 있다. 사라지는 걸 굳이 사라지지 않게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게 바로 여가를 목적으로 하였을 때다. 어떤 사람이 여가를 즐길 때 2시간 정도 계산이나 서빙이나 인형탈을 쓰고 홍보를 하고 나머지 시간을 놀이를 즐긴다고 가정해보자. 여가 동안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진다. 생산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 시간이 지나치게 길기 때문이다. 시간이 짧다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여기서 계산이나 서빙에 지불되는 비용은 실질적으로 소비촉진 비용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에 광고비로 인식하면 된다. 계산이나 서빙에서 지불된 비용을 다른 유통상품으로 지불된 비용보다 더 크게 회수한다. 그런 개념으로 접근하면 된다. 설령 회수가 어렵다고 하더라도 괜찮다. 놀아주는 비용과 같이 오프라인 플랫폼 내에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 다른 소비자의 소비를 촉진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플랫폼 내에서 소비자가 요구하는 것을 어떤 다른 소비자가 들어주는 것으로 생산이 이루어지게끔 만들 수도 있다. 어떤 소비자가 아이 돌보기를 원한다면 다른 소비자가 그걸 들어줄 수 있다. 물론 아이 돌보기는 예민한 문제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 돌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 외 심부름이나 상품 구매 고민상담 또는 디지털 문맹자가 구매하기 어려운 상품을 구매하는 걸 잠시 도와주는 걸로도 소비와 생산이 동시에 이루어질 것이다.

 

여가를 목적으로 한 오프라인 경제 플랫폼이란 생태계를 형성하는 것. 거기서 발생하는 수요에 대한 재료 유통 수익과 생산과 소비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수수료 수익으로 생태계를 유지하고, 그 생태계에서 발생하는 세금으로 국가를 유지한다. 자유적응과 기술적응의 결과가 바로 이것이라 생각한다.

 

 

 

오프라인의 온라인화

 

온라인 인간관계와 오프라인 인간관계의 가장 큰 차이는 익명이다. 온라인 인간관계는 오프라인과 달리 인간관계에 있어 익명이라는 영 번째 관계가 존재한다. 오프라인은 인간관계가 성립되는 순간부터 통성명을 하는 일이 잦기 때문에 이 익명관계가 성립되기가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에 지쳐 좀 더 가벼운 익명의 관계가 성립되는 온라인 인간관계에 익숙해지고 있다. 굳이 인간관계에 지치지 않더라도 편하고 쉬운 곳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특성상 그렇게 되게 된다. 특히 한국은 수직적인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많아 수평적인 온라인 인간관계를 보다 선호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온라인과 같이 수평적인 관계성립이 필요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간의 사상은 변하기가 쉽지 않다. 장유유서에 세뇌된 인간은 연령차별을 올바른 도리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니 당분간은 온라인과 같이 익명의 장점을 살리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어떤 특정 플랫폼 내에서는 모두가 익명의 닉네임으로만 교류할 것. 이것을 지정해두면 된다. 가령 혼자서 플랫폼에 출입한 후에, 테니스를 치고 싶다면 플랫폼 내에 있는 사람 중에 테니스를 치고 싶은 사람을 찾아 같이 치며 논다. 오프라인 플랫폼 어플리케이션의 도움을 받으면 될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서로 통성명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다. 혹시 따로 실명으로 만나고 싶다면 플랫폼 외의 지역에서 만나 통성명을 하면 된다. 온라인 플랫폼에서는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대부분 수용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술을 마시더라도 같이 술만 마시면 되고, 게임을 하더라도 게임만 같이 하면 된다. 이런 방식을 써서라도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유지시켜놔야 앞으로 있을 메타버스나 NFT 시대를 대비할 수 있다.

 

익명 오프라인인 만큼 출입자의 인성에 따라 소비자의 만족도가 달라지는데, 그에 따라 2가지 필터를 적용한다. 첫째, 성년은 신용등급으로 미성년은 보호자의 신용등급으로 출입여부를 결정한다. 둘째, 익명 오프라인 진영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반말을 사용한다. 직원조차 반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 반말이 불편한 인간은 출입하지 못한다. 기본적인 평등개념이 박힌 사람만 출입할 수 있게 된다. 영역을 구분 짓기 위해 출입구 밖의 직원은 존댓말을 쓰고 출입구 안의 직원은 반말을 쓴다. 출입구 밖의 직원은 안에 들어갈 때 주의사항을 설명한다.

 

온라인은 지극히 편향적이다. 원하는 정보만 얻을 수 있도록 해두었다. 오프라인도 그걸 참고할 필요가 있다. 어떤 글을 본 적이 있다. 출처는 불분명하다는 점을 말해두겠다. 어떤 사람이 어린 시절 즐기던 문화를 접하자, 신체 나이 또한 어려졌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어린 시절 문화를 접함으로써 뇌가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착각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런 결과가 있기 때문에 온라인과 같이 구역을 만들어서 특정 세대에 최적화한 상품선별을 하는 것도 좋다고 본다.

 

 

 

오프라인의 역할극

 

오프라인 유통업의 변화의 목적 중 하나가 바로 완전자동화 시대를 대비하여 일이 없어도 오프라인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다. 직업이 없어도 역할이 있어야 인간은 오프라인 사회활동을 하게 된다. 동호회 따위의 간사나 협회의 참여자 또는 무상봉사자 따위의 역할. 연금을 타거나 주식 또는 코인 또는 부동산 또는 상속 따위로 수익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인간 또한 사회에 속하여 살아갈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사회적 역할이 있어야 한다. 나는 분야의 대표에게 입법권을 주자는 역할주의를 통해 그것에 대응하고자 한다. 오프라인 유통업도 그것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오프라인 유통업이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역할 판매다. 각 역할을 판매하고 인기 있는 역할은 +가격이 높고 인기 없는 역할은 가격이 높다. 인기가 높은 역할은 돈을 지불하고 인기가 없는 역할은 돈을 지불 받는다. 어떤 역할극을 꾸미고 거기에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주도할 수 있는 전문 배우를 섭외하고, 그 외의 배역들은 판매하는 것으로 소비자가 생산을 하며 즐길 수 있도록 한다. 또한 그 소비자의 생산을 다른 소비자가 보면서 즐길 수 있도록 한다. 어떤 역할을 구매한 사람이 아마추어일 때에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걸 어려워할 수 있다. 그걸 다른 전문 배우가 거기에 맞춰 이야기를 전개하게끔 유도한다. 인기가 없는 배역은 비용을 지불해서라도 충원할 수 있도록 한다. 이 역할 판매의 특이할 점은 오프라인 플랫폼 내에서는 다른 곳에서도 해당 역할에 맞춰 대우를 해준다는 것이다. 만약 기사 같은 배역을 하고 있으면 역할을 구매한 동안에는 기사 대우를 해준다. 가상의 공간에서 가상의 역할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처럼, 현실의 공간에서 가상의 역할을 즐길 수 있도록 한다. 이런 특별 대우가 특정 역할의 가격을 높여줄 것이다. 해당 구역에서만 적용되는 놀이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평등을 훼손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단순히 역할극이 아니더라도 상황에 따라 플랫폼 내의 역할을 판매 또는 역할에 대한 비용 지불이 이루어져도 좋을 것이다.

 

국가 안의 작은 국가. 이미 온라인은 그걸 해냈다. 오프라인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온라인은 상품을 유통하고 오프라인은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연결한다. 사회의 변화와 기술의 발달로 이제 오프라인 유통업은 단순한 유통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유지하는 중추의 역할을 맡을 때가 왔다고 주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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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쓸 생각이었는데 자꾸 과거의 생각이 정리되면서 새로운 생각으로 나아가는 바람에 시간이 걸렸네요. 솔직히 우울하군요.

 

다음 글은 네이버와 포탈 또는 현대와 자동차 또는 국민과 은행 또는 병원과 간호사 등 살아있으면 아무거나 씁니다.

 

군 급식 개선을 하겠다고 했다고 하죠. 그런데 만약 개선이 되지 않는다면, 국군의 최고에 있는 이가 말한 걸 허언으로 만들어버린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그 사태를 쉬이 넘기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낙태를 허용한다고 해서 낙태를 권장하는 건 아니잖아요. 포르노를 허용한다고 해서 포르노를 권장하는 건 아니잖아요.

성매매를 허용한다고 해서 성매매를 권장하는 건 아니잖아요.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개인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는 것뿐이지 그것이 반드시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포르노나 성매매의 경우 범죄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지 그것이 반드시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허용과 권장의 차이도 모릅니다. 취향과 도덕의 차이도 모릅니다. 답답하군요. 성적 대상화나 성 상품화가 인간을 도구로 만든다는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 도구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성 상품을 당사자가 소유하고 있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노동 상품을 당사자가 소유하고 있다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말이죠.

 

산업혁명 시대 농지를 팔고 도시로 나갔던 일이 있었다고 하죠. 시골의 고령화가 되고 있는 만큼 이제 농지를 사들여 식량의 대량생산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 봅니다. 미국식 대량 생산이 되어야 국민들이 식재료를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은 지나치게 비싸요. 생산자를 생각하다 소비자가 불행한 것으로 공산주의가 몰락했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시대가 흘러 농사를 지을 사람이 줄어들면 대량생산계획을 시도하는 것이 국민을 위한 길이라 생각합니다.

 

문제풀이능력을 가르치는 노동자용 교육을 해놓고 취업이 안 된다. 학벌사회다. 노동자 인권이 낮다. 이런 말 하면 안됩니다. 시장원리에 따라 자본가 수가 줄고 노동자 수가 늘면 당연히 자본가가 희소해짐에 따라 노동자 수요가 줄어들어 자연스럽게 노동자의 가치가 낮아지게 되는 거죠. 자본가끼리 경쟁을 해야 하는데 담합하게끔 유도했으니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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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el.1    친구신청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tta    친구신청

좋은글 감사합니다

루리웹-5344056515    친구신청

오프라인의 플랫폼화에 대해 말씀 하시는데, 본문에서 어렵지 않다고 말씀하시는데 글쎄요.

우선 플랫폼이라고 해서 새로운건 없습니다.

유튜브는 예전 방송사에서 하던걸 그대로 이어 받은 것이죠.. 무한도전 볼 때 돈 내고 봤습니까? 앞뒤 광고 끼고 봤죠.

배달 라이더는, 화물차 지입제랑 동일하고

가사도우미나 아이 돌보미는 이전에도 인력소개소가 있었죠. 대리운전도 플랫폼이죠.

지금들어 플랫폼이 각광 받은 것은 기업 입장에서 기존의 노동법의 규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버나 라이더 같은 플랫폼 기업에서는 서비스 제공자들에게 파트너니 뭐니 하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즉, 둘의 관계가 노사관계가 아니라는거죠.

이렇게 되면 기업은 파트너가 사고가 나든 문제가 생기든 책임질 이유가 없어집니다. 주몇시간 근무, 수당, 연차, 퇴직금.. 이런 것에서 해방되는거죠.

즉, 제가 말하고 싶은 것 플랫폼 이란게 무언가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기업이 노동법을 비껴갈 꼼수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일부주에서 우버가 노동자라는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고, 우리나라에서도 타다 직원이 노동자라는 것에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여튼 말이 길었는데 플랫폼 기업이라는 건 기업이 유리하기 때문에 성립하는 겁니다.

예시로 김장을 들으셨는데, 제가 기업가라면 일일이 김장김치 평가하고 관리할 담당자 고용할바에 그냥 일정한 맛 보장되는 공장 김치 유통하는게 더 낫습니다.
거기다, 대량생산하는 공장보다 단가도 비쌀건데, 경쟁력이 있을려면 가격도 많이 높이지 못할겁니다..

인풋에 비해 아웃풋이 적거나 없을 확률이 큽니다.

또한 플랫폼 업체에서 품질관리 담당자를 둔다는 거 자제가 플랫폼으로서 자신의 이점을 버리는거에요.

배민에서 입점식당들 맛 관리합니까? 오픈마켓에서 판매상품이 가품인지 확인합니까?

일일이 자기 상품 다 확인하고 품질관리 하는건 이미 플랫폼이 아닌 기존 유통업체랑 다를게 없죠.

트랜지션앤트랜지션    친구신청

신세계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유통 업체라고 생각 하셔서 제목을 이리 다신거 같습니다.
유통업은 온라인 + 오프라인도 되고 오프라인 + 오프라인으로도 되는 양방향이라고 보는 시각이 유통업계 경영자들에겐 더 크다고 보셔야 할듯합니다. 아마존의 성장이 엄청났기 때문에 빛을 잃었지만 코스트코와 월마트의 성장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죠.

온라인 쇼핑, 이커머스가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유행이나 흐름이었다가 끝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를 일이지요. 인류에게 소개된 새로운 물품거래방식으로 아직 그 역사가 30년 남짓 밖에 안된것이니까요. 반면에 물건을 산지에서 가져와 수요지에 파는 것은 수백년이 된 비즈니스 모델이니 오히려 지속가능성의 비교는 오프라인 시장 유통이 역사적으로만 놓고보면 앞선다고 볼수도 있습니다.

오프라인이나 온라인 거래방식의 채택의 펀드멘탈을 그럼 들여다 봐야하는데 수요지-산지-소비자에게 직접 영향을 미칠수 있는 전통의 유통업계의 영향력을 무시할수도 없으니 신세계나 롯데는 어찌보면 대박은 없지만 쪽박도 없는 시장을 원할수도 있습니다. 그게 치킨게임이고 창고와 운송에 돈을 집어넣어야 하는 온라인 유통업체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지는 것이지요.

유통업계의 흥망은 사실 판매량 보다는 구독경제 방식의 회원권 판매와 배송비 절감, 그리고 물건의 매입 금액에서 남기는 차익을 투명하고 안정적으로 경영하는 마케팅과 재무관리,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수요에 맞춘 재고 관리등 업체의 내재가치에 달려있다고 생각해서 한자 적어봅니다.

격리해제자    친구신청

요즘은 정책적으로 온라인 보다 오프라인이 가격이 비슷하게 해놔서
오프라인 가서 인터넷 가격 비교해보고 삽니다.
직접 만지고 보고 입어보고 하니 구매율이 올라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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