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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2018년 7월 8일 (0) 2018/07/08 PM 08:06

이번주는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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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신고 겸 작성해요. 아마 다음주는 쓸 수 있을 거예요.

 

흔들리는 파도에 생각을 적은 쪽지가 담긴 병을 던지는 기분으로 몇가지 써볼게요.

누군가에게 닿는다면 기쁠 거라 생각해요.

 

주관과 객관

 

주관이야 다들 알다시피 자기의 생각이죠. 딱히 정리할 것은 없어요. 

사전으로는 [자기만의 견해나 관점]이라고 하네요.

 

객관은 조금 설명이 필요해요. 종종 객관적으로 본다고 말을 핸호고 정작 객관에 대한 설명은 부족했던 것 같네요. 

사전으로는 [자기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거나 생각함]이라고 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삼자'예요. [일정한 일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 왜 '제삼자'일까요?

그건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야 손익, 편견, 가치관 따위에서 보다 자유롭게 사물을 보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결국 객관적으로 본다는 말은 자신의 손익, 편견, 가치관 따위를 벗어던지고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그건 사물의 본질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저는 '객관'이란 단어를 이런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요.

 

객관적으로 보기 때문에 

선과 악과 능력유무를 분리해서 바라볼 수 있고, 

자신의 손익에서 벗어나 사물을 바라볼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주관에 흔들리지 쉽게 않아요.

 

진실과 진리는 그 무엇에 영향을 받아도 변하지 않기에 진실과 진리라고 불리니까요.

 

 

이상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이상을 추구할 때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이상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수단이 되기도 했더군요.

 

제가 세계평화를 바랬던 것은, 행복이란 결국 다른 이들이 행복해야 저도 행복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제가 접하는 상대가 다른 곳에서 불행한 경험을 겪었다면, 분명 저를 대할 때도 그 불행이 티가 날 거예요.

관계에 따라 다르지만 즐거울 때의 태도와 즐겁지 않을 때의 태도는 확실하게 다르겠지요.

그리고 즐겁지 않을 때의 태도에 저는 불쾌함을 느낄 가능성이 높아요. 보통 그래왔으니까요.

요컨대 제가 접하는 상대가 불행하지 않았다면 저 또한 불쾌함을 느끼지 않았겠지요.

크게 보면 그런거예요. 행복이든 불행이든 연쇄작용이 일어나게 되어있어요.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면 저 또한 행복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죠.

 

그런데 이 생각은 모든 사람들을 설득 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세계평화를 설득할 때엔 그 자체로 안될 것 같아요. 어렵네요. 하하

 

지금은 정리가 덜 되어 있어요. 나중에 언젠가 목적과 수단, 그리고 이상에 대해 써보고 싶네요.


 

예술

 

저번 글에서 설명이 조금 부족했지요. 

예술의 정체로 인해 수준 높은 작품들의 우열을 가리기 위해 작품 외의 것이 필요한 것이라 생각해요.

사실 누가 봐도 분명하게 우열이 가려진다면 굳이 작품 외의 것들이 필요하지 않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어느 일정 수준이 넘으면 다들 잘그리고 있어요.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화려하기도 하고 잔잔하기도 하죠.

이런 아름다움을 수치로 분명하게 표시하여 우열을 가릴 수 없자 작품 외의 것을 가져와서라도 우열을 가리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전자제품 같이 성능이 분명하다면 만든이의 철학이나 방식이 우선되지는 않겠지요. 뭐 그런거예요.

 

 

쓰고 싶은 것이 있지만 글솜씨가 부족해요. 그래서 글공부를 하고 싶은데... 사실 좀 답답해요. 혼자는 한계가 있네요. 슬프게도. 


그럼 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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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2018년 7월 1일 (0) 2018/07/01 PM 06:18

이번 달, 이번 주 글과 소재는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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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욕망의 한계 또는 자아를 작성할 예정이에요.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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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6. 예술 (1) 2018/06/24 PM 07:56

 

6. 예술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 그것을 가리켜 예술이라 부른다고 한다. 사실 나는 예술을 잘 모른다. 몇 가지 예술들의 일부를 접하고 감상하며 즐길 뿐이다. 게임이나 만화 소설, 약간의 음악, 영화, 미술 정도. 광대한 예술의 세계 속에서 그 일부를 즐기는 정도에 불과한 내가 예술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터무니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술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나 또한 사람이기에, 어쩌면 내가 바라보는 예술도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그래서 작성해본다.

 

그럼 내가 생각하는 예술에 대한 몇 가지를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일단 생각나는 것까지만 작성하고 나중에 더 정리할 예정이다.

 

 

첫째, 예술은 사랑

 

노동을 천시하는 자는 먹고 살 자격이 없고, 정치와 치안과 국방을 천시하는 자는 보호받을 자격이 없고, 문과를 천시하는 자는 생각할 자격이 없고, 이공과 상공을 천시하는 자는 문명의 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고, 예체능을 천시하는 자는 사랑을 하거나 받을 자격이 없다. (이것은 대략적인 구분이다.)

 

그렇다. 사랑이다. 예술은 사랑이다.

 

예술의 사전적 정의로는 [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 따위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및 그 작품.] 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아름다움을 표현하는가? 사람에게 사랑 받기 위해서다. 어떤 예술이든 동일하다. 대중을 위한 예술은 대중에게 사랑 받기 위해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스스로를 위한 예술은 스스로에게 사랑 받기 위해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예술의 본질은 사랑에 있다.

 

예술과 교훈에 대해 이야기를 함으로서 예술의 본질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다. 예술에 교훈은 필요한가? 이야기를 만드는 많은 사람들은 그 속에 교훈을 담는 것을 두려워한다. 진지하거나 어려운 예술은 곧잘 외면 당하기 때문이다. 교훈, 즉 가르침을 담은 예술은, 예술이 아닌 학문이 되어버리기도 하여 사람들이 즐기는 것이 아닌 공부를 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즐기기 위해 예술을 접한 사람은 그 예술을 외면하게 된다.

 

하나의 예시를 들어보겠다. 루이스 캐럴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동시대 다른 동화나 동시가 주로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려는 목적을 띠었던 데 반해 앨리스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순수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고 한다. 환상, 신비, 말장난, 오해, 착각, 실수 등의 순수한 즐거움으로 그 시대 아이들에게 사랑 받는 것은 물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아 재창작 되기도 한다. 이 동화가 교훈이 없었기에 사랑 받았다면, 예술에 교훈은 필요 없는 것일까?

 

다른 예시를 통해 교훈의 필요성을 살펴보겠다. ‘피그말리온’의 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서문을 통해 예술에 대한 시각을 드러냈다. [이 작품은 고의적으로 교훈적이며, 주제 또한 매우 무미건조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기 때문에, 나는 예술은 결코 교훈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소리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현명한 척하는 자들의 머리 위에 기쁘게 이 극을 던지겠다. 이 극은 위대한 예술은 교훈적인 것이라는 나의 주장을 증명할 것이다.]

 

실제로 ‘피그말리온’은 지극히 교훈적이다. (이후 약간의 내용 누설이 있다.) 길거리에서 꽃을 파는 소녀인 일라이자는 9년간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음에도 영어발음이 엉망이다. (여기서 공교육과 음성학에 대한 비판이 있다.) 그 소녀를 음성학 교수인 히긴스 교수가 6개월간 영어발음을 가르쳐 한 파티에서 공주로 인정받게 한다. 길거리에서 꽃을 파는 소녀를 6개월만에 공주로 만든 것이다. (여기서 신분제도에 대한 비판이 있다.) 정작 일라이자가 공주로 보일 만큼의 숙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히긴스 교수의 영어발음 교정보다는 피커링 대령의 신사적인 태도 덕분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예의범절이나 품위는 모범을 보여야 본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 도덕, 존중, 경제 등 수많은 교훈들이 있음에도 ‘피그말리온’은 대성공하게 된다. 연극뿐만 아니라 뮤지컬이나 영화로도 제작되어 수많은 사랑을 받았다. 영화에 관심이 있다면 ‘마이 페어 레이디’를 한번쯤 들어봤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아 재창작 되기도 한다.

 

이로서 알 수 있듯이 예술에 교훈의 유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사람을 매료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예술이 된다. 교훈을 담은 예술들이 인정받지 못했던 까닭은 교훈이 있어서가 아니다. 사람들을 매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피그말리온’이 그랬듯이, 교훈을 담았더라도, 즐거운 재미를 주어 사람들을 매료할 수 있다면 위대한 예술이 될 수 있다. 달리 말해 예술로 포장하면 어떤 학문도 사랑 받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많은 철학, 사상가들은 자신의 철학이나 사상을 사랑 받게 하기 위해 예술의 틀을 가져다 쓰기도 하였다. 볼테르의 철학적 콩트인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같이 말이다.

 

사랑, 그래 사랑이다. 예술의 본질은 사랑에 있다. 누구를 대상으로 하였는지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대중을 매료할 수 없어 인정받지 못했던 예술이더라도, 만약 그 예술이 자기자신 또는 특정 대상에게 사랑 받기 위했다면, 그리고 사랑 받았다면, 그것은 예술이다. 단지 대중 예술이 아닐 뿐이다. 문학은 연애편지며 무용은 구애의 춤이다. 예술가들이야말로 (특히 대중예술) 이세상에서 가장 합법적인 하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도대체 몇 명에게 사랑 받는 건가?

 

 

학문으로 지식을 배운다면 예술로는 감정을 배운다. 사람을 매료할 준비가 되어있는 예술은 사람의 감정을 뒤흔들어 감정을 학습하게 만든다. 이것도 기쁘다가 될 수 있구나, 이것도 슬프다가 될 수 있구나. 단순한 경험뿐만이 아닌, 예술을 통해 다양한 감정들을 느끼면서 풍부한 감성을 얻게 한다.

 

단순히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감정들도 예술을 통해 깨어나 정말로 알게 된다.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느끼는 감정, 아름다운 노래를 듣고 느끼는 감정,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고 느끼는 감정 등 수많은 감정을 느끼게 되면서 마음의 영역이 보다 더 넓어지게 된다. 넓어진 마음은 공감능력을 증대시켜 타인의 감정을 아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알게 됨으로써 다양한 방법으로 사랑을 하거나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예술을 천시하는 자는 사랑을 하거나 받을 자격이 없다. (뭐 사실 특정 예술을 천시할 수는 있어도, 예술 자체를 천시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예술은 먹고 사는 것 이상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게 만드는, 우리가 좀 더 고상한 사람이 될 수 있게 만드는, 마음의 재료 중 하나다.

 

 

둘째, 예술은 정체

 

예술은 정체되어있다. 무궁무진한 발전가능성을 지닌 다른 학문들과는 다르게 예술은 발전이 매우 더디거나 멈춰있다. 왜? 예술은 사람의 마음을 다루기 때문이다. 세상은 변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온 수많은 예술들이, 사람의 마음을 자극할 수 있는 영역을 거의 모두 차지해버렸다. 남은 영역이 거의 없단 이야기다. 그래서 새로운 예술이 등장하기가 어렵다. 아직도 극에서는 셰익스피어가 공연되고, 아직도 클래식에서는 베토벤이나 모차르트가 연주되고, 아직도 미술에서는 피카소가 언급되고 있다. 마음의 근본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 시대에 정점을 찍은 예술들을 현대에서도 뛰어넘기 힘들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예술가에게는 괴로운 일일 것이다.

 

예술의 본질로는 이미 선조의 작품을 뛰어넘기 어려워졌다. 기술의 발달로 형태는 바뀌어가고 있지만, 종합 예술인 게임을 보라, 형태조차도 정체되어가고 있다. PC방 점유율이 몇 년째 비슷비슷하다는 것이 그걸 증명한다. 가끔 뛰어난 게임이 등장하여 판도를 바뀌기도 하지만 그 바뀐 판도가 계속 유지되고 있다. 급격한 기술의 발달로 사람 수준의 자아를 지닌 NPC가 등장하는 게임이나 VR게임이 등장할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이 판도가 크게 뒤집히게 될 것이다. 물론 그조차도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정체될 전망이다.

 

 

왜 피카소가 기묘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걸까? 그 시대의 예술조차 새로운 영역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이미 훌륭한 그림을 그렸던 그에게 새로운 영역은 차원을 넘는 그림 외엔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피카소의 고민은 현대 미술가들의 고민이기도 하다. 새로운 영역이 거의 없다. 그래서 좀더 기묘한 작품들을 도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대중이 현대미술을 외면하게 되었다.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와 대단해”라고는 해도 그걸 진정 즐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기묘하니까. (많은 사람이 즐기면 기묘하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종종 돈세탁으로 쓰이는 것처럼 보이는, 붓으로 한 줄 그어둔 것(그림이라고는 못하겠다.)이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것을 보며 현대미술을 비판하는데, 그것은 애초에 예술이 아니다. 어떤 감정도 일으킬 수 없는 그것에는 어떠한 예술적 가치가 없다. (어쩌면 외적인 요인으로 분노나 슬픔은 일으킬 수도 있겠다.) 그저 금전적 가치만 있을 뿐이다. 아무 가치가 없는 가상화폐에 금전적 가치를 부여하여 거래하는 것처럼, 아무 예술적 가치가 없는 것에 금전적 가치를 부여하여 거래하는 것뿐이다. 그걸 예술로 바라본다면 모든 예술에 대한 모독이다. 그러니 그걸 빌미로 현대미술을 비판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현대미술이 비판 받아야 될 점은 그 점이 아니다. 미술의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려고 하다 보니 예술의 본질을 잊어버린 것을 비판해야 한다. 예술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사랑을 받는 것이다.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기 위해 괴상한 작품을 그리고, 그걸로 사람들에게 사랑 받을 수 있다고 진정으로 생각하는가? 대중의 사랑에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스스로가 사랑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만약 새로운 것을 위해 스스로가 사랑할 수도 없는 작품을 만들었다면, 그것을 예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학문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 사람은 예술가가 아닌 학자가 된다.  

 

또한 수단과 목적을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붓 터치가 어떻고, 색감이 어떻고, 그린 사람의 철학이 어떻고 하는 것은 수단에 불과하다. 예술의 목적은 사람을 매료하여 사랑 받는 것이다. 위대한 작가의 작품A와 평범한 작가의 작품B를 예술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 공개하여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지 선택하게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때 작품B가 더 많은 선택을 받았다면 그 작품이 사람의 마음을 매료시키는 능력은 더 뛰어나다고 봐야 한다. 그걸 보고 미술전문가가 식견이 없어서 그런 것뿐이라며 조롱한다면 나는 웃을 수밖에 없다. 그 미술전문가는 예술의 본질을 잃은, 수단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거나 금전적 가치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일 뿐이다.

 

이런 현상들은 대체로 예술의 발전이 정체되어있기 때문이 발생한다. 새로운 것을 도전하기 위해, 또는 비슷비슷한 것 중에 좀 더 우수한 것을 고르기 위해,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셋째, 예술은 과학

 

그럼에도 예술에 대한 새로운 시도는 지향되어야 한다. 설령 아무에게도 사랑 받지 못하는, 그래서 예술이 아닌 학문이 되어버린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시도는 필요하다. 그런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어야만 간신히 새로운 예술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패션쇼를 보면 일반 사람들은 이해 못할 괴상한 패션들이 나오곤 한다. 왜 그런 괴상한 패션이 필요할까? 그런 새로운 시도들이 있어야 일반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패션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그런 새로운 시도는 과학에서 신기술을 발견하기 위해 시도하는 수많은 실험과도 같다. 과학의 발전이 수많은 실험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예술의 발전 또한 수많은 시도 끝에 이루어지게 되어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사랑 받지 못하는 괴상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짝에 쓸모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언젠가 새로운 예술로 대접받을 수도 있고, 설령 대접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예술의 토대가 될 수는 있기 때문이다.

 

이제 예술은 과학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미 하고 있겠지만…) 어떤 색이 어떤 감정을 일으키고, 어떤 선이 어떤 감정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연구를 하여 체계적인 지식을 쌓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경험뿐만이 아닌 실험을 통해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의학 같은 다른 학문과 연계하여 사람의 감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예술을 과학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이런 생각은 에밀 졸라의 ‘실험소설’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요즘 현대미술은 다양한 볼거리 속에서 관심을 잃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들었다. 냉정하게 말하겠다. 현대미술이 예술 그 자체로 사랑 받는 것으로 수입을 얻을 수 없어 말라 죽을 처지에 놓여있다면, 국가적 지원을 요구할 때 예술에 대한 지원이 아닌 미학이란 기초 학문에 대한 지원을 요구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예술 또한 과학과 마찬가지로 토대가 마련되어야 더 수준 높은 예술이 가능하니까 말이다.

 

 

예술의 영역이 워낙 광범위하다 보니 요점만 잡아 나의 생각을 정리했다. 요점에 대해 설명할 때 특정 예술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으나, 다른 예술에도 충분이 적용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이라도 예술이라면 사랑 받는 것이 목적이고, 어떤 예술도 변하지 않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 정체되어있으며, 어떤 예술이라도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여기까지 쓰겠다. 나중에 예술에 대한 생각이 늘어나면 추가로 정리하거나 작성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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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대체로 오래된 작품을 예시로 들려고 해요. 현대의 작품보다는 편견에서 좀 더 자유로운 측면이 있거든요. 그리고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야 다양한 요소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어서 되도록 해외의 것을 사용해요. 우리나라에서 예민한 주제도 다른 나라의 것을 가지고 설명하면 조금 더 편하게 전달할 수 있게 되지요. 그래서 보통은 특별한 예시 없이 전개하거나 해외 고전을 예시로 들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에요. 뭐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요. ///

 

저는 저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드물어요. 대화를 할 때 종종 그걸 느껴요. 저는 저를 배제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상대방은 저를 포함시키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하고 있더군요.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객관이 필요하고, 객관을 위해서는 주관을 분리시켜놔야 해요. 본질을 보고 싶어하는 제가 저만을 포함시켜 생각할 리가 없지요. 역할존중에 대해 쓸 때도 그걸 고심했어요. 예민한 주제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 생각들이 “너만을 위한 생각이지 않느냐” 라고 생각될 수도 있으니까요. 어떻게 받아드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분명한 의도는 우리 모두를 생각하여 작성했음을 말해두고 싶어요. 부족한 부분이 많은 생각이지만, 저는 괜찮다고 생각해요. 정리하면 더 나아지겠지요. 저 스스로가 부족한 부분이 많아 글에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이 부끄럽네요. 빨리 발전하여 좀 더 잘 쓸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저는 B사의 W게임에서 유저가 만든 ‘캐슬파이트’라는 게임을 몹시 좋아했어요. W게임이 생산과 전투를 동시에 한다면, ‘캐슬파이트’는 생산에만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지요. 굉장히 재미있게 했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마이너한지 수많은 장르의 모바일게임이 등장하고 있음에도 이 게임의 형식을 본 따 만든 작품은 보이지 않네요. 그저 제가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요. 유저는 적절한 생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모바일에서 상대와 대전할 때 드는 문제점 (Ping이라던가) 이 적어 의외로 괜찮을 거 같은데 만드는 곳이 없어요. 재미가 없거나 수익이 안돼서 그런 걸까요? 언젠가는 개발되어 해봤으면 좋겠네요.

 

 

몇 분이나 읽어주실지는 모르겠지만, 읽어줘서 고마워요.

 

 

2018년 6월 24일 작성

 

 

참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인물소개

피그말리온 서장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소개

실험소설 초반부

인터넷 검색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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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티하티호    친구신청

마이페어 레이디 학교에서 틀어줬을 때 다들 자는 동안 제대로 본 영화였죠
처음으로 오드리 헵번의 연기를 본 작품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피카소의 예술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현대에 와서 누군가의 주관적인 에세이 그리고 재해석으로 들어서 알게 된 그 사람의 생애나 연애관 가치관 등에 대해 알게 되니
그제야 조금 그림이 이해되더군요 개인적으론 그림에 마음을 담다 라는 책이 참 좋았더랬지요
[소식] 2018년 6월 17일 (0) 2018/06/17 PM 08:46

이번주 소재는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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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5. 역할존중 (0) 2018/06/10 PM 09:32

5. 역할존중

 

 

보다 더 행복한 세상이 되길 바라며-

 

사실 이 소재는 예전에 한번 쓴 글을 다시 정리하는 것뿐이다. 당시에는 꽤 괜찮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그저 나의 생각일 뿐이다. 어쩌면 형편없을지도 모른다. 그걸 각오하겠다.

 

 

우리는 왜 불행한가? 출생률이 최저를 찍는 이시대, 우리의 불행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는 처음에 신분제 시절의 경험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불행은 높은 것을 귀하게 여기고 낮은 것을 천하게 여기는 상하존중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이 강제되던 시절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그보다 더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바로 진화다.

 

 

어떤 유인원이 돌연변이로 유전자 변이가 일어나 인간이 되었을 때, 모든 유인원이 동시에 인간이 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 된 개체를 개체A라고 하고 나머지 유인원들을 개체B라고 가정해보자. 개체A와 개체B가 교잡했을 때, 개체A의 유전자가 더 많이 유전된다면 그들의 아이는 인간이 된다. 인간이 된 그들이 다른 유인원들과 교잡하는 것을 반복하여 인간의 유전자를 퍼트려 갔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인간은 교잡을 통한 유전자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아 종으로 확립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수한 지능을 지닌 인간과 그렇지 않은 유인원의 차이가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다른 무리를 이루는 동물들에게 우두머리가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가 지성을 갖기 전에도 분명 우두머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우두머리를 우수한 지능을 가지게 된 인간이 차지했을 거란 예상을 해본다. 힘이나 체력으로 우두머리가 정해지던 때와 다르게 유전자부터 다른 존재가 위에서 군림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왕처럼 행세하며 그것이 자연스럽게 신분이 되었으리란 예상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언어관습이 후천적 언어를 사용했을 때, 그리고 문자를 사용했을 때 같이 단계별로 심화된 것처럼, 상하존중 또한 우리가 무리를 이루었을 때, 그리고 진화하였을 때 같이 단계별로 심화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상하존중은 대를 거치며 피가 섞여 모두가 인간이 되었음에도 남게 되었다. 이것이 왕을 만들고, 이것이 귀족을 만들고, 이것이 노예를 만들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인간은 적자생존을 경험하게 된다. 세가지를 언급하겠다. 첫째, 지능과 체력이 높은 개체가 살아남는다. 둘째, 사회성이 있는 개체가 살아남는다. 셋째, 상하존중을 받아드리는 개체가 살아남는다. 사회성이 없어 고립된 개체는 자연 속에서 죽어나가고, 상하존중을 받아드리지 못하는 개체는 사회 속에서 죽어나갔다. “왕이 명하니, 저 건방진 자를 처단하라!” 물론 예외는 있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으니까. 이렇게 우리는 오랜 세월에 걸쳐 개량되어 현대에 이르렀다. 그런 과정 속에서 사회성과 우열을 매기는 본성을 가진 개체가 상하존중에 적응하여 주로 살아남았다. 물론 이것은 인간만의 특성은 아니다.

 

문자의 등장으로 학습이 쉬워지면서 인간의 문명은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였다. 현대에 이르러 평등을 지향하는 제도가 등장했음에도 이런 상하존중은 관습마냥 남아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겠다.

 

 

우선 상하존중에 대해 정리하도록 하겠다. 상하존중이란 높은 것을 귀하게 여기고 낮은 것을 천하게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대표적으로 나이, 지위 따위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하존중은 오랜 세월 사회 질서로 자리잡아 관습화되어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는 높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라는 사상으로도 존재해왔기 때문에 도덕으로서 좀 더 극명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충효같이 말이다. 이러한 사상은 충성과 효도가 같이 엮기면서 현대에 이르러도 감히 지적하기 어려워졌다. “낳아준 이를 공경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 식으로 말이다. 더구나 내가 겪었으니 너도 겪어야 한다식의 굴레에 갇혀 지금까지도 그 잔재가 남아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른이면 무조건 공경하라는 것이 나쁘다는 이야기다. 모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사람을 존중해야 된다. 어른이면 무조건 공경하라는 것은 높은 신분이면 무조건 공경하라는 신분제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다. 경험이나 지식이 높기 때문에 어른을 공경해야 된다면, 우수한 교육을 받기 쉬운 높은 신분 또한 동일하게 적용이 가능하다. 한마디로 헛소리란 이야기다. 어떤 계층, 집단이건 무조건 존중 받는 것은 불공정하다. 정의를 의미하는 Justice가 공평, 공정이니 그것을 가리켜 정의롭지 못하다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상하존중이 평등한 사회와 맞물리면서 다양한 문제와 갈등을 빚어내게 되었다. 금전만능주의, 우월주의, 갑질, 꼰대질, 왕따, 과도한 경쟁, 불신, 불안, 경계, 공포 등. 높아야만 존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수많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높아지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면서 수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갑질이나 꼰대질이 우리나라만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 말해두겠다. 이것은 전세계적인 문제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사회는 평등해졌는데 사상은 평등하지 않으니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몇 가지를 집어보겠다.

 

 

첫째, 갑질과 꼰대질

 

갑질과 꼰대질, 이 두 가지의 요점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불합리한 말을 강요한다는 점이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도 상대적으로 높다는 이유로 강요할 수 있다. 그걸 상대적으로 낮은 사람이 받아드릴 수 없다며 하소연하면 건방지다며 윽박지른다. “네까짓 게 뭔데 그러느냐!” “감히!” “버릇없이!” 이것에 대해서는 하나씩 사례를 들어가면 길게 쓸 수도 있으나, 여기까지만 하겠다. 다 알고 있을 테니까. 재미있는 점은 이것이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불합리한 강요를 하는 것은 어디에나 있다. 좀 더 건전한 곳이 인식이나 대처가 나을 뿐이다.

 

왜 우리나라는 공무원에 인재들이 몰리는가? 우리나라보다 하급공무원 수준이 높은 곳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한참을 공부해서 하급공무원이 된다. ? 중소기업에 가서 천대받느니, 정해진 시간에 퇴근할 수 있고 월급도 꼬박꼬박 밀리지 않고 나오는 하급공무원이 낫다는 이야기다. 어느 정도 수준이 되어야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은 드문 편이니 대부분 공무원이 되길 희망한다. 급여는 중소기업보다 낮더라도 사람대접 받고 싶은 사람들의 열망이 그런 결과를 빚어내게 되었다. 이건 명백한 인재낭비다. 물론 시간이 지나 자동화 체계가 완성될 무렵엔 공무원 숫자를 늘리거나 무상으로 돈을 줘야 국민들이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큰 그림으로 보았을 때엔 그다지 틀리지는 않다. 그러므로 인재낭비란 현재를 의미한다.

 

 

둘째, 금전만능주의

 

미리 말해두겠다. 나는 돈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돈이 왜 나쁘겠는가, 돈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돈을 나쁘게 다루는 것뿐이다. 돈은 수단으로서 우리사회에 꼭 필요한 요소 중 하나다. 단지 사람이 돈 위에 있어야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라는 변명아래 금전만능주의에 빠져 자신의 것을 나누기 꺼려하고 사람보다 돈을 우선시한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몰지각한 부류들을 생각해보라. 비정규직을 챙기지 않는 노조, 비싼 하숙비를 받기 위해 대학교 기숙사 건설을 반대하는 건물주, 불이 난 아파트에서 구해준 소방관에게 피해보상을 받으려는 아파트 주민들. 맙소사. 이건 빙산의 일각이다. 자기자신조차 돈 아래로 둔다. 큰 돈을 벌기 위해 빚을 져서라도 투자하고, 투자에 실패하면 자살한다. 또는 돈을 위해 자신의 몸을 헐값에 팔아버리기도 한다. 돈을 벌기 위해 어떤 노동도 정당화될 수 있다면 성희롱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몸을 파는 행위는 부끄러운 일이다. 이런 행위는 극빈 또는 자신을 돈 아래로 생각할 때나 가능하다. 극빈으로 몸을 파는 것은 그 나라의 체계가 문제고, 자신을 돈 아래로 생각하여 몸을 파는 것은 그 나라의 사상이 문제다. ‘파는‘(한강에 몸을)던지는으로 바꿔도 된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사람 위에 돈이 있다는 사상이 팽배하여 이런 행위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인터넷에 글을 올리며 깔깔거린다. 슬픈 일이다.

 

우습게도 자기일 아니라면 욕을 하고 자기 일이라면 적당한 합리화로 진실을 외면한다. 노조가 건물주를 욕하지 않았을까? 건물주가 아파트 주민을 욕하지 않았을까? 아파트 주민이 노조를 욕하지 않았을까? 하하. 쓰게 웃게 된다. 도덕이란, 사회 구성원들의 양심, 사회적 여론, 관습 따위에 비추어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 준칙이나 규범의 총체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금전만능주의는 이미 도덕이나 마찬가지다. 슬프게도.

 

또한 모든 행위가 돈으로 직결되기 때문에 돈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돈이 안 되는 취미에 열정적인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 사람은 보통 돈으로부터 자유롭다.) 모든 일이 돈과 연관되어있다. 언젠가 뉴스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저렴한 인건비로 사람을 굴리는 것이 효율적이란다. 효율적이란다! 맙소사. 나는 처음에 어째서 효율적인지 이해를 못했다. 그런데 관점을 달리하니 이해가 되었다. 돈을 사람 위로 두니까 그것은 몹시 효율적인 일이었다.

 

그렇다면 왜 사람 위에 돈을 두는가? 돈도 결국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텐데 왜 자신의 목숨보다 가치 있게 여기는가? 그건 돈이 있어야 윗사람이 될 수 있고, 윗사람이 되어야 존중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상하존중이다. 존중 받지 못하는 삶을 사느니 죽어버리겠다는 것이다. 경멸 받으며, 천대받으며 살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다. 과거엔 천대받아도 잘만 살지 않았느냐? 그건 그 시대엔 계급이 고착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회가 평등에 대한 열망을 가지려면 우선 평등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로부터 평등에 대한 제도를 배웠고, 우리는 인터넷에서 상대를 모르기 때문에 가능한 진정한 평등을 배우게 되었다. 평등을 알게 되니 사회의 불평등한 부분을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되어버렸다. 상하존중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의 표면화되는 까닭도 대게 이런 이유 때문이다. 평등한 사회 속에서 불평등이란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렇다고 돈을 가볍게 취급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선은 생존과 번영이다. 생존과 번영에 도움이 되는 돈이 나쁠 리가 없지 않는가? 단지 돈을 사람 위로 두지 말라는 이야기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그리고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사회는 생각 이상으로 건전하다. 교육 수준이 높고, 치안이 다른 나라에 비해 우수한 편이며, 변화에 익숙하다. 관점만 바꾼다면 보다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셋째, 저출산

 

우리나라의 저출산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상하존중이 만연한 세상 속에서 돈이 없으면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니, 돈이 없는 사람들이 불행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다. 이는 어떤 제도로도 분명하게 해결할 수 없다. 상하존중은 어디까지나 상대비교기 때문에 돈을 공정하게 뿌려도 상대적으로는 돈이 부족하다 여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상의 변화가 없으면 궁극적으로 이런 저출산을 해결할 수 없다. 회사에서 출산휴가를 요구하는 사원을 꺼려하는 까닭도 결국 회사에 금전적인 이익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넓게 보면 출산율이 늘어나 나라에 이익이 되고, 그 나라에 속한 회사 또한 이익이 될 터인데, 상하존중으로 나타난 금전만능주의를 추구하니 당장의 이익이 안 되는 출산휴가사원을 꺼려하게 된다. 휴가를 보내준다고 하더라도 사상이 그대로면 그들이 눈칫밥을 얼마나 먹겠는가? 그러니 본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상의 변화로 스스로 생각하여 필요성을 느끼고 행동하게끔 해야 한다.  

 

과거에 잘만 낳다가 낳지 않는 까닭 또한 마찬가지로 우리가 평등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평등하지 못한 세상을 불행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왜 가난하고 불평등한 나라가 출산율이 높은 것인가? 그건 그들의 계급이 고착화되어 불평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도적으로는 평등한데, 사상적으로는 불평등한 나라가 대체로 출생률이 낮다. 출생률을 높이기 위해서 제도적으로 불평등하게 만들 수는 없으니, 사상적으로 평등하게 만들어야 우리나라의 출생률이 근본적으로 높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넷째, 우월주의

 

우열을 가리는 본성을 가진 인간이 이런 우월주의를 갖는 것은 그렇게 특이하진 않다. 그러나 우리는 문명을 이룩한 사람으로서 이런 본성을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감정이나 욕구, 욕망을 제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열을 가리는 본성은 제어할 수 없는가? 그건 다른 방법을 달리 모르기 때문이다. 대체로 우월주의는 상대방보다 높아야 우월하고, 우월해야 존중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높아지려고 한다. 이성에게 존중 받기 위해 상대보다 높아지려 하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존중 받기 위해 높아지려 한다. 뭐 결국 상하존중이다.

 

 

다섯째, 왕따

 

어째서 왕따는 해결될 수 없는가? 그건 우리가 우열을 가리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람을 사람답게 해주는 사회성을 제대로 익히기 전인 학교에선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약육강식이 되어 얕보이게 되면 따돌림이나 괴롭힘을 당한다. 학교에선 사회성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요즘은 모른다) 사회에 나가서 사회성을 강제로 체득하게 되더라도 왕따는 남게 된다. 바로 사내왕따다. 스스로 필요하다고 느껴서 익힌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시선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방을 따돌리거나 괴롭힌다. 슬픈 일이다.

 

물론 이런 왕따에도 예외는 있다. 너무 이상한 사람과도 친하게 지내라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괴롭히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괴롭힘을 통해 상대를 깎아 내리면서 자신을 높이는 것은 약육강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짐승수준의 행동이다. 문명을 이룩해 지성을 가지게 된 지성인으로서 자존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종류가 많아 일일이 언급하긴 어려우니 여기까지만 하겠다. 이런 특수한 예외도 있지만, 이 예외를 모든 것에 적용하여 합리화 하지는 말기 바란다.

 

왕따를 없애기 위해서는 이런 우열을 가리는 본성을 제어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앞으로 이야기할 역할존중이다. 이건 이후 자세히 다루겠다.

 

 

한번 지금 소개한 것 외에 우리 사회에서 문제되는 현상을 곰곰이 생각해보라, 대부분 상하존중이다. 취미가 존중 받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나의 취미가 존중 받기 위해서는 다른 취미보다 상대적으로 높아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취미를 존중하지 못한다. 다양한 생각이 존중 받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마찬가지다.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인 통설이 존중 받기 위해서는 소수 이설보다 상대적으로 높아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소수 이설을 존중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생각도 쉽게 표출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애써 스스로 생각해서 의견을 내면, 각종 멸칭 또는 비난으로 그 의견을 꺾어 버린다. 통설을 위협할 이설의 등장 자체를 막아버리는 것이다. 끔찍한 일이다. 정말. 그래도 익명인 인터넷은 그나마 낫다. 이외에도 상하존중이 끼치는 영향은 막대하지만 일단 여기까지만 하겠다.

 

 

이런 상하존중으로 나타나는 문제에 대한 해결방법으로 내세우는 것 또한 결국 상하존중이다. 상대보다 낮기 때문에 천대받는 것으로 생각하여 상대보다 높아지길 바라는 것이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무섭게 하여 존중을 받아내면, 아랫사람은 그걸 배워 다시 윗사람을 무섭게 하여 존중을 받아내려고 한다. 그러면 다시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무섭게 하여 존중을 받아낸다. 끝이 없는 굴레,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갑질이나 꼰대질을 당하면 욕을 하면서도 똑같이 갑질이나 꼰대질을 한다. 존중 받는 방법을 그거 말고 배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교사에게 억압받아온 학생들은 다시 교사를 억압하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 남성에게 억압받아온 여성들은 다시 남성을 억압하려고 한다. 그래야 존중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성별을 나누는 일을 그다지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만은 몇 가지 이야기를 하겠다. 아니 이성애자로서 다른 성별을 본심으로 싫어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럼에도 우월주의를 내세우며 서로를 싫어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존중을 받기 위해서 말이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우월주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똑같다. 억압에 지친 여성이 평등을 바라며 우월주의를 내세우면, 다시 한번 남성은 평등을 바라며 우월주의를 내세운다. 정말 끝이 없는 굴레다. 평등한 세상을 바란다면서 과거 남성처럼 행동하는 여성들이 간혹 있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인가? 과거 남성은 여성을 억압했다. 그걸 따라 한다는 것은 결국 여성이 남성을 억압하겠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진정한 평등을 바란다면, 여성 그 자체로 존중 받는 길을 모색해야 하지 않나 싶다. 존중 받기 위해 사회적 진출을 하며, 특정직업(좋은 인식)에만 여성할당을 요구하는 것은 결국 다른 특정직업(나쁜 인식)이나 가사노동을 천대하는 상하존중의 관점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진정 존중 받고 싶다면, 어떤 역할(사회에 긍정적인)도 수행여부에 따라 존중을 받을 수 있는 역할존중적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 역할존중이다. 그럼 본 주제인 역할존중에 대해 시작해보자.

 

, 그전에 능력존중과 역할존중의 차이를 집고 넘어가겠다. 능력존중은 기준이 애매하기 때문에 결국 상하존중과 별다를 바 없게 된다. 무엇을 기준으로 능력이 있다고 평가하는가? 돈이 많다고? 나이가 많다고? 학력이 높다고? 지위가 높다고? 어떤 특정한 기준이 없으니 해당 언어를 쓰지 않는 직업에서조차, 그 언어의 숙달여부를 판단기준으로 내세운다. 그것이 정상인가? 또한 동일한 일을 하는데도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급여가 천지차이로 벌어진다. 실제 하는 일과 무관한 기준이 능력의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고용의 기준이 제멋대로고, 대우의 기준도 제멋대로니 노동할 맛이 날 리가 없다. 그러니 더욱더 상대적으로 공정한 공무원에 구직자들이 몰리게 되었다. 이것이 정상인가? 능력이 높다는 기준이 제멋대로니 직업간의 차이도 격심해진다. 인문계와 이공계가 급여가 다른 이유가 무엇일까? 일에 대한 기여도가 높은 곳 역할을 맡은 쪽이 더 급여가 높아야 되는데, 그게 아니다. 그냥 직위만 높으면 급여가 높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개발한 개발자가 대우를 받지 못하니 다른 나라에 기술을 팔아먹지 않는가? 물론 이는 금전만능주의에 빠져 기술을 팔아먹은 기술자의 잘못도 있다. 그러나 애초에 정당한 대우를 해주었다면 이런 일이 적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능력존중은 상하존중과 별다를 바 없는 사상이다. 그러니 능력위주로 뽑겠다고 이야기를 하더라도 사회는 바뀌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기준을 확실하게 제시해줄 역할존중이 필요하다. 역할존중은 간단하다. 역할의 수행여부에 따라 존중여부를 결정하고, 역할의 수행수준에 따라 능력을 평가한다. 아무리 높은 지위라고 하더라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존중을 줄 필요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낮은 지위라고 하더라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면 존중을 줘야 한다. 그리고 역할수행수준에 따라 대우를 해주면 된다.

 

정리하자면, 역할존중은 역할수행여부에 따라 존중여부를 결정하는 사상이다. 상하존중이 수직이라면, 역할존중은 수평이라 할 수 있다. 위아래 관계없이 역할수행여부에 따라서 우열을 가려 존중을 준다. 이것이야말로 우열을 가리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평등이라 생각한다.

 

 

자 본격적으로 역할존중에 대해 말해보겠다. 우선 역할이란 단순히 직업으로의 역할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둔다. 국민으로서의 역할, 직업으로서의 역할, 가족으로서의 역할 등 다양한 역할들이 많이 존재한다. 우선 국민과 직업 두 가지만 다뤄보겠다.

 

첫째, 국민

 

국민의 역할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국민의 의무를 다하고, 법을 지키는 것.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맞다. 그것이 기본이다. 그걸 지키면 어떤 국민이라도 존중해야 한다. 설령 외국인이라도 우리나라 국민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면 존중해야 한다. 또한 외국인이더라도 우리나라 국민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굳이 우리나라 국민으로 존중할 필요는 없다. 그냥 외국인일 뿐이다. 프랑스 최초 아시아 장관이 우리나라 핏줄이란 이유 하나로 과장되게 난리 피운 적이 있었다. 그 행태를 보고 장관은 나는 프랑스인이다.”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그게 올바른 행동이다. 반대로 우리나라에 외국인 출신 장관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사람이 나는 한국인이다.”라고 대답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핏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국가는 기계가 아닌 생명이라는 점을 집어보겠다. 물론 이것은 비유이니 너무 직접적으로 받아드리지는 말길 바란다. 기계는 고장 나면 부품을 바꾸면 된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꿀 수가 없다. 끝까지 끌고 가야 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와 같이 국가 또한 약해진 부위를 바꿀 수가 없다. 끝까지 끌고 가야 한다. 그러니 국가는 기계라기보다 사람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 그런 기준에서 국민의 역할은 보다 더 정밀하게 파악될 수 있다. 어떤 국민이 아파 제 역할을 하기 어렵다고 가정해보자. 그 국민의 역할은 무엇일까? 빨리 건강해지는 것뿐이다. 사람이 아프면 아픈 부위를 빨리 낫게 하도록 하는 것처럼, 국민이 아프면 빨리 낫기만 하면 된다.

 

사람의 피가 온몸에 제대로 순환되어야 건강한 것처럼, 국가의 돈 또한 전국민에게 제대로 분배되어야 건강해질 수 있다. 그러니 국민의 역할에는 부의 분배를 제대로 해야 하는 것 또한 포함되어있을 것이다. , 국민의 역할은 모든 국민이 행복해질 수 있는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도 포함되어있다. 물론 공공의 이익에는 사익도 포함되어있다. 스스로를 버리면서까지 공익을 추구하는 것은 선의 허들을 높여 선행의 참여율을 낮추게 되기 때문에 오히려 좋지 못하다.

(, 좀 더 정리해봐야 할 것 같다)

 

 

둘째, 직업

 

역할존중이 좀 더 직접적으로 와 닿을 수 있는 직업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다. 직업에 설명하기 전에 우선 계급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다. 보통 계급이 만들어내는 문제점 때문에 계급 자체를 문제시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는데, 그건 계급이 문제라기 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높은 계급을 받던 옛날 신분제도나, 계급이 높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조건 존중을 받던 사상의 문제다. 계급은 어디까지나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어떤 집단이든 사람들이 모이는 이상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줄 리더가 필요한데,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간에 결국 리더와 나머지로 계급이 나뉘게 되어있다. 이해가 어렵다면 보호자와 피보호자를 생각해보자. 보호자와 피보호자는 역할로서 계급이 나뉜다. 보호자는 피보호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고, 피보호자는 보호해주는 보호자를 따를 의무가 있다. 이 관계에서 위아래가 없을 거라 생각하는가? 문제는 보호자의 의무를 팽개치면서 보호자의 권리만 휘두르면서도 높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존중을 받으려는 태도지, 계급이 문제가 아니다. 종종 정치인도 이런 것을 착각하고 평등하다는 식으로, 또는 자신들이 낮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정치인의 의무와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표명이나 마찬가지로 보여 당황스럽다. 정치인은 그 역할로서 우리 사회의 리더들이지 않나? 사람이 아닌 정치인의 역할로서 계급이 높은 것은 맞다. 맞으니까 그 계급에 맞는 의무와 책임을 다하길 바라겠다. 그걸 통한 권리(급여, 명예, 존중)는 제 역할만 다한다면 충분히 정당한 보상이다.

 

역할존중의 관점에서 계급을 바라보면 보다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계급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아닌 역할에 속해있다. 회사에 있을 때엔 사장이라고 하더라도 역할을 벗어난 밖에서는 더 이상 사장의 계급으로 사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면 안 된다. (물론 개인적인 부탁은 가능하지만, 이것 또한 사장의 권위를 이용한 부탁, 즉 부탁을 받지 않으면 후환이 두려울 것이다라는 암중의 의사전달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종종 계급이 사람에 속해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원들을 개인용무로도 부려먹어 사회적으로 논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건 부당한 행위다. 회사의 사유화 또는 대물림 또한 이렇게 계급이 사람에 속해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럼 본격적으로 직업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다. 역할존중이란 역할수행여부에 따라 존중을 주기 때문에 어떤 직업이든 상관없이 제 역할만 다하면 존중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사회에 긍정적인 직업만을 이야기한다. 범죄자의 역할을 다한다고 존중을 주자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사기꾼이 사기 잘 친다고 존중해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애초에 범죄자는 국민의 역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존중 받을 수 없기도 하다.

 

 

구인, 대우, 존중 이 모든 것이 역할수행여부로 판단할 수 있다. 사람을 모집할 때에도 능력이라는 애매한 기준이 아닌, 모집하는 역할에 걸 맞는 능력이 있기만 하면 된다. 나이, 성별, 학력 아무것도 필요 없다. 기본적인 인성과 상식 그리고 역할에 대한 능력이 있으면 된다. 종종 우리사회에서 할당제 이야기가 나오고는 하는데, 할당제가 무슨 필요인가? 그 역할에 맞는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다 그 일을 할 자격이 있어야 한다. 그 역할에 맞는 능력도 없는데 할당제로 인해 그 역할을 맡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물론 이것은 역할에 맞는 능력을 공정하게 평가해줄 사람들이 있어야 되긴 하다. 그리고 학력을 쌓는 시간과 비용 때문이라도 학력에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소리가 있는데, 아니 학교를 간판 따러 갔나? 학교를 가서 배웠으면 당연히 다른 사람보다 능력이 높아야 한다. 그런 애매한 기준 따윈 필요 없다. 누구나 공정하게 그 역할에 대한 능력만을 평가 받아야 한다. 그것이 역할존중이다. 어떻게 평가하냐고? 회사에서 자체 테스트를 보거나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물론 알고 있겠지만 많은 회사가 이미 그러고 있다.

 

대우 또한 역할수행여부, 그리고 역할수행수준정도로 판단이 가능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동일한 일을 하고 동일한 결과를 낸다면 동일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우리사회는 아직도 이 당연한 것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 슬프게도. 또한 해당 역할에 대한 급여만 줄 것이면, 그 역할에 대한 일만 줘야 한다. 그 이상의 일을 줘놓고 급여는 그대로라면 그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그리고 계열이나 직위도 관계없이 어떤 일에 대한 역할의 기여도에 따라 대우를 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사회는 이제 역할에 따라 대우를 받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기술자가 산업스파이질을 하지 않을 것 아닌가? 또한 그래야 급여를 감당하기 어려워진 나이든 노동자를 해고하는 분위기가 사라질 것 아닌가? 물론 이런 것은 이권 때문에 쉽게 받아드리기 어렵다. 그러니 더욱더 사상적으로 역할존중을 받아드려야 이런 것을 받아드리기 쉽게 될 것이다.

 

존중 또한 역할수행여부로 받아야 한다. 어느 집단이든 동일하게 적용이 가능하다. 작은 집단인 회사 내를 살펴보자. 어떤 역할이든 그 사람이 제 역할 다하면 충분히 존중 받을 수 있다. 직업이 워낙 많아 제 역할이라는 것이 조금 애매하긴 한데, 평균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꼬박꼬박 출근하고 일 적당히 잘하고 그 정도면 충분히 존중 받을 자격이 있다. 그 이상은 대우의 차이로 구분하면 된다. 뭐 당연하게도 좀 더 열심히 하여 좋은 결과를 낸 쪽이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

 

큰 집단인 국가를 살펴보자. 국가에 이로운 직업이면 어떤 직업이든 제 역할만 다하면 존중 받을 자격이 있다. 나이고 성별이고 상관없다. 사장이라고 하더라도 제 역할을 못하면 비판 받아 마땅하고, 아르바이트 생이라고 하더라도 제 역할을 다하면 존중 받아 마땅하다. 교사가 교사의 역할을 다하면 존중을 주고 학생이 학생의 역할을 다하면 존중을 준다. 선생은 학생의 의견이라고 흘려 듣지 말고, 학생은 선생의 의견이라고 흘려 듣지 말아야 한다. 상호존중! 이런 것이 당연한 세상이 오길 바란다. 여기서 잠시 학생의 역할이 애매할 것 같아서 말해두지만, 학생의 역할은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다. 공부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수단으로 그 수단을 통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사회성을 배우는 것이 학생의 역할이다. 모든 직업을 열거할 수는 없는 일이니 여기까지만 하겠다. 그래도 충분히 이해했으리라 생각한다.

 

더 큰 집단인 인류를 떠올려도 그다지 다를 바 없다. 인류를 위한 국가의 역할을 다하는 국가는 충분히 존중 받을 자격이 있다.

 

 

실현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다. 내가 처음 역할존중을 떠올리게 된 것은 아마 인터넷과 온라인 게임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온라인 게임에서는 상대가 누군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가 해당 역할을 다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목을 당시 역할존중, 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썼었다. 네가 누군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네가 하는 역할의 수행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인터넷이나 온라인 게임을 통해 점점 익숙해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받아드려 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근본적인 가치관을 뒤흔들지도 모르는 이 역할존중이 자연스럽게 퍼져나갈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아마 수십 년 후에는 대부분이 역할존중을 받아드리게 될 것이다. 현실과 가상은 상호영향을 받기 때문에 가상의 평등함이 현실에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오래 걸린다. 우리나라는 앞으로도 매년 매년 격변의 시간을 보낼 확률이 높다. 국내외 정세를 살펴보면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러니 하루 빨리라도 정비를 하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퍼져나갈 것이라 생각되는 역할존중을 보다 빠르게 받아드려 제도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 평등한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본질적으로 해결하여 보다 더 행복한 나라가 되어 격변하는 이 세상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가능성의 이야기지만, 우리나라의 긍정적인 모습이 다른 나라에 영향을 끼쳐 인류가 행복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이하 손익, 관점, 예외, 모순 등은 나중에 다시 정리해보겠다.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생각이상으로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임을 깨닫고 있다. (어떻게 정리해야 읽기가 쉬운 거지? 더 공부를 해야 한다. 하고 싶다.) 예전에 이 소재에 대한 글을 쓸 때, 농담으로 책도 쓸 수 있을 거라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이 소재를 제대로 정리하면 정말로 책 한 권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 가능할지, 애초에 가능할지, 애초에 괜찮은 건지 의문이 들긴 하지만 언젠가 이 소재를 가지고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쓰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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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건전할수록 국제적 신용도가 높아지고, 신용도가 높아질수록 국가적 이익이 높아집니다. 높은 투표율은 사회의 건전성을 입증하는 것 중 하나이므로 여러분, 어떤 후보를 선택하든 상관없습니다. 투표 자체가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소재는 예술입니다.

 

저 자신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까닭은 대체로 무언가 특정되면 그것을 기반으로 선입견이 자리잡기 마련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선입견은 글의 의도를 왜곡할 때도 있지요. 뭐 일단은 그래서 그랬고 지금도 그러고 있긴 한데,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되네요.

 

읽어줘서 고마웠고, 그럼 또 봐요.

 

 

2018 6 10일 작성

 

참고

인터넷 검색 (사전 검색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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