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달마 토크가 다 끝나갈 즈음, 옆에 있던 금발의 여자가 큰스님께 질문을 했다.
내 기억으로 그 여자는 하버드 대학 박사반에 재학중인 30세 전후의 학생이었다.
그녀가 물었다.
"왓 이즈 러브(What is love)?"
큰스님은 내처 그 여학생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이었다.
"아이 애스크 유, 왓 이즈 라부(I ask you, what is love)?"
그러니까 그 학생은 대답을 잃어버리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 다음 큰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디스 이즈 라부(This is love)."
그래도 그 여학생은 뭐라 할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학생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동안의 큰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을 잇는 것이었다.
"유 애스크 미, 아이 애스크 유. 디스 이즈 라부 (You ask me, I ask you. This is love)."
재미있는 일화라서 가져와 봤습니다.
현각스님의 '만행'이라는 책 끝부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밑에 있습니다.
... (생략) 내가 숭산 스님을 만나 뵈었을 때만 하더라도 그분은
그리 널리 알려진 분이 아니었다.
선교 개척의 초창기는 이미 지난 시점이었다 하더라도 그리 융성한 시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분의 명성은 뉴잉글랜드 지역,
특히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권 내에서는 좀 시끌시끌한 것이었다.
내가 숭산의 이름을 들은 것은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들의 대강(代講)을 하고 있을 때
내 학생 중에 한국 불교 전공을 지망하는 어느 참하고 예쁘장한 미국 여학생으로부터였다.
내 기억으로 그 여학생의 이름은 베키라 했고,
그녀는 하버드 대학 학부를 졸업할 때 하버드 대학 통틀어 전체 수석을 했으니까
무지하게 머리가 좋은 학생이었다.
그런데 베키는 당시 한국불교사를 가르치고 있던 나를 만날 때마다 ‘쑹싼쓰님’ 운운하는 것이었다.
베키의 ‘쑹싼쓰님’에 대한 존경은 가히 절대적인 그 무엇이었다.
그러면서 베키는 나보고 자기가 존경하는 학자인 당신이야말로
꼭 한번 ‘쑹싼쓰님’을 만나보라고 조르는 것이었다.
당신과 같은 훌륭한 한국의 학인이 쑹싼스님을 안 뵙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베키가 아무리 나에게 쑹싼스님을 만나보라고 권고했어도 나는 그를 만날 생각이 없었다.
주기적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는데 어느 날
케임브리지 젠센터(하버드대와 MIT 사이에 숭산스님이 세운 절)에 오셔서
달마 토크(Dharma talk, 법문을 이렇게 영역)를 하시니깐
그때 꼭 한번 만나보라는 것이었다.
‘쑹싼쓰님’의 달마 토크 때는 하버드 주변의 학·박사들이 수백명 줄줄이 모여든다는 것이다.
내가 사실 불교계의 인맥을 파악한 것은 최근의 일이므로 그때만 해도 누가 누군지를 전혀 몰랐다.
실상 속마음을 고백하자면 나는 ‘쑹싼쓰님’을 순 사기꾼 땡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인즉슨 나에겐 다음의 명료한 두 가지 생각이 있었다.
하나는 저 베키를 쳐다보건대, 저 계집아이를 저토록 미치게 만든 놈,
즉 저 계집아이가 숭산이라는 개인에게 저토록 절대적 신앙심을 갖게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무슨 사교(邪敎)적 권위의식을 좋아하는 절대론자일 것이고 따라서
해탈한 인간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자기는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타인에게 절대적 복속과 부자유를 안겨주는 놈은 분명 사기꾼일 것이다.
또 하나는 '달마 토크'의 사기성에 있었다.
숭산이 다 늙어서 미국엘 건너온 사람인데 무슨 영어를 할 것이냐?
도대체 기껏 지껄여봐야 콩글리시 몇 마딜 텐데,
영어로 말할 것 같으면 천하에 무적인 도사 김용옥도 하버드에 와선 벌벌 기고 있는데,
지가 무슨 달마토크냐 달마토크는?(ㅋㅋㅋㅋ;;;)
하버드 양코배기 학박사들을 놓고 달마 토크를 한다니 아마도 그놈은 분명 뭔가
언어 외적 사술(邪術)을 부리는 어떤 사기성이 농후한 인물일 것이다.
정도(正道)는 언어(言語) 속에 내재할 뿐이다.
그런데 베키의 간청에 못 이겨 케임브리지 젠센터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숭산의 달마 토크를 듣는 순간, 나는 언어를 잃어버렸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동안 나의 식(識)의 작용 속에서 집적해 왔던
'객기'(客氣)가 얼마나 무상한 것인가를 깨달았던 것이다.
한 인간이 수도를 통해 쌓아올린 경지는 말과 말로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몸과 몸으로 전달될 뿐이다.
몸과 몸의 만남은 언어가 없는 것이기에 거짓이 끼여들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그가 해탈인이었음을 직감했다.
그의 얼굴에는 위압적인 석굴암의 부처님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동네 골목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땅꼬마’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몸의 해탈의 최상의 경지는 바로 어린애 마음이요, 어린애 얼굴이다.
동안(童顔)의 밝은 미소, 그 이상의 해탈, 그 이상의 하느님은 없는 것이다.
숭산은 거구는 아니라 해도 결코 작은 덩치도 아니다.
당시 오순 중반에 접어든 그의 얼굴은 어린아이 얼굴 그대로였다.
그의 달마 토크는 정말 가관이었다.
방망이를 하나 들고 앉아서 가끔 톡톡 치며 내뱉는 꼬부랑 혀 끝에 매달리는 말들은
주어 동사 주어 술부가 마구 도치되는가 하면
형용사 명사 구분이 없고 전치사란 전치사는 다 빼먹는 정말 희한한 콩글리쉬였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영어의 도사인 이 도올이 앉아 들으면서
그 콩글리시가 너무 재미있어 딴전 볼 새 없이 빨려 들어갔던 것이다.
그의 콩글리쉬는 어떤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언어의 파워를 과시하고 있었다.
주부 술부가 제대로 틀어박힌,
유려한 접속사로 연결되는 어떠한 언어 형태도 모방할 수 없는 원초적인 마력을 발하고 있었다.
그의 달마 토크가 다 끝나갈 즈음, 옆에 있던 금발의 여자가 큰스님께 질문을 했다.
내 기억으로 그 여자는 하버드 대학 박사반에 재학중인 30세 전후의 학생이었다.
그녀가 물었다.
"왓 이즈 러브(What is love)?"
큰스님은 내처 그 여학생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이었다.
"아이 애스크 유, 왓 이즈 라부(I ask you, what is love)?"
그러니까 그 학생은 대답을 잃어버리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 다음 큰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디스 이즈 라부(This is love)."
그래도 그 여학생은 뭐라 할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학생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동안의 큰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을 잇는 것이었다.
"유 애스크 미, 아이 애스크 유. 디스 이즈 라부 (You ask me, I ask you. This is love)."
인간에게 있어서 과연 이 이상의 언어가 있을 수 있는가?
아마 사랑 철학의 도사인 예수도 이 짧은 시간에 이 짧은 몇 마디 속에
이렇게 많은 말을 담기에는 재치가 부족했을 것이다.
나는 숭산 큰스님의 비범함을 직감했다.
그의 달마 토크는 이미 언어를 뛰어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국경도 초월하고 있었다.
오로지 인간, 그것뿐이었다.
나는 베키와 같이 이층 선사가 머무는 방으로 올라갔다.
케임브리지 젠센터라고 해봐야 뉴잉글랜드 전형의 목조 주택건물 좀 큰 놈을 개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층 한 방은 한국 온돌 안방처럼 꾸며져 있었다.
나는 그에게 그냥 한식으로 넙죽 절을 했다.
그런데 그는 나에게 맞절을 했다.
나를 하대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때 나는 매우 신비롭게 생각했다
그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하버드 대학 박사고,
이 도올 김용옥이래봐야 당시에는 매우 보잘것없는 초라한 박사반 학생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그가 나를 사전에 알았던 것도 아니다.
난 밝은 동안의 미소를 머금고 앉아 있는 그 앞에서 멋쩍게 방안을 빙 둘러봤다.
이것이 바로 1981년 3월19일 밤 열 시 반경의 일이다…… (중략) …… 어느 날이었다.
나는 숭산 행원스님과 함께 앉아 이 얘기 저 얘기를 주고받다가,
도대체 어떻게 이 미국땅에 와서 보시를 하게 되었는가?
어떻게 불법을 전파하여 이 방대한 조직을 그것도 미국의 지적 심장부인
동부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정착시킬 수가 있었는가? 하는 이야기로 화제를 옮기게 되었다.
(숭산 큰스님 이야기)
아…… 내가 뭐 미국에 와서 포교하구 뭐 그런 생각 꿈에나 해봤나?
전혀 우연이여, 생각두 안 했든 거여.
내가 인연이 닿아 일본에 몇 년 있었는데 그때 뉴욕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차표를 보내주면서 한번 놀러 왔다 가라는 거여.
아 그때만 해도 미국 구경 한번 하기 힘드니께 얼씨구나 좋다 하고 동경에서 뉴욕 가는 비행기를 탔지.
그런데 그때만 해도 비행기 속에서 한국 사람 만나기가 참 힘들었거든.
내가 앞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내 뒤켠에 창가에 있는 어느 중년 신사가 한국말로
한국 스님 아니시냐구 말을 거는 거여.
나두 깜짝 놀라 비행기칸에서 참선만 하구 앉었기두 지루하길래
그 사람 옆 빈 자리에 가 앉어 이 얘기 저얘기 하면서 미국 사정도 듣고 하며 갔질 않았겠나?
알구 보니께 그 사람이 로드아일랜드 대학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던 교수였는데
거 동양 문화에 대한 향심이 보통이 아니더라구.
뉴욕에 가걸랑 로드아일랜드가 얼마 안 되니깐 꼭 놀러 오라면서
전화번호랑 주소를 적어 주는 거여.
뉴욕에 있는데 어느 날 그분 김교수님 생각이 나드라구.
그래서 전화하구 그 집엘 놀러 갔지.
그런데 그 집에 내가 온다 해서 김교수가 불러다 놨는지
불교에 관심 있는 미국 청년들이 서너 명 와 있더라구.
무슨 예일 대학 학생들이래나.
내가 그때만 해도 예일 대학이 뭔지나 알았어? 그런데 이 녀석들이 자꾸만 물어보는거여.
구찮게 자꾸만 불교에 대해서 물어오는 거여.
내가 뭘 불교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야지.
게다가 김교수 통역으로 어쩌구 저쩌구 얘기해봐야 개갈이 나야지.
그래서 내가 뭘 직접 보여줄 생각을 한 거여. 그런데 내가 최면술을 좀 하거든.
그래서 내가 너희들한테 최면을 걸겠다 하니깐,
이 예일 대학 학생 녀석들이 자기들은 그 따위 최면엔 절대 안 걸린다는 거여.
자기들은 이성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그런 덴 걸릴 수가 없다는 거여.
요시, 한번 맛 좀 봐라! 하구 내가 최면을 걸었지.
수리 수리 마수리 하고 주문을 외면서 이놈들 최면을 거니깐
아 이놈들이 최면이 어떻게 잘 걸리는지,
조금 있단 앉은 채로 천장까지 부웅붕 뜨는 거여.
이놈들이 번갈아 가면서 하늘 높이 붕붕 뜨는 거여,
아이 이 지랄을 하고 나니깐 이놈들이 엎드려 절하드라구,
그리구 내 소문이 쫘악 퍼진 거여.
그리군 계속 몰려들기 시작하는 거여.
그래서 그 길로 김교수도 붙잡구 그래서 미국을 뜨지 못하구 프라비던스에 절을 세우게 된 거여.
프라비던스엔 지금 아주 큰 절이 섰지.
그게 내 본터여. 그게 바루 최면에서부터 시작한 거라구…….
서기 1972년 빈털터리 숭산의 체험을 털어놓는 이 아주 진솔한 어구들은
인류 종교의 발달사 그리고 선교 역사의 가장 보편적 패턴을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고등·하등을 막론하고 고금을 통해서
이 숭산의 말은 가장 진실한 종교의 본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고구(考究)하고자 하는 '호국불교'의 본질도
바로 이 숭산의 체험 세계에서 내재하는 보편적 구조로부터 탐구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민중이나 이방의 대중에게 고등한 언어 체계나
고도의 사유 체계가 처음부터 먹혀 들어갈 수가 없다.
숭산스님에게는 언어(영어)가 없었고 재력이 없었으며
또 폭력(대사관 같은 것)의 뒷받침이 없었다.
그에게는 대중에게 과시할 일체의 권위라든가 위력이 없었다.
이러한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숭산은 처음에 괴력난신(怪力亂神)을 행하는 괴승으로밖에는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그는 영력을 소유한 선승으로 이미지가 순화되어갔고
지금은 '부처님 머리에 담뱃재를 터는' 것을 가르치는 젠 마스터 철인이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