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상처를 주는 어머니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지
물은 북한에서 온 질문자에게 스님은 고문당한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별일 아니라는 얘길 해드리고 싶어요. 질문자는 ‘스님은 이런 일 안 겪어봤으니까 그런 소리 하지’ 싶겠죠.”
“네, 그런 생각이 드네요.”
“그럼 저도 얼마나 어려웠는지 한번 얘기해볼까요? 질문자는 어느 날 갑자기 잡혀가서 고문당한 적 있어요?”
“없습니다.”
“저는 고문당한 적이 있어요. 저를 고문한 사람을 어떻게 용서하게 됐는지 아세요?
고문당할 때는 ‘어떻게 세상에 저런 인간이 있나?’ 싶었어요.
그때는 손가락이 총이면 쏴 죽여 버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고통은 내가 당하지만 고문하는 사람도 사실 힘들어요.
사람을 반 죽여 놓으려면 그것도 보통 힘든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자기들도 하다가 놔두고 쉬는 시간이 있어요.
고문당한 나는 옆에서 덜덜덜 떨고 있는데,
휴식 시간에 장정 셋이 담배를 피우면서 자기들끼리 앉아서 하는 얘기가 이래요.
날짜도 안 잊혀져요. 그 날이 11월 15일이었어요...”
우연찮게도 이 글이 발행된 오늘이 11월 15일입니다. 스님은 당시 기억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옛날에 예비고사라는 게 있었어요. 예비고사를 치는 날이 11월 15일이어서 날짜를 기억합니다.
한 사람이 말하기를, 오늘이 시험날이라 자기 딸이 시험 치러 갔대요. 그러면서 이러는 거예요.
‘우리 애가 시험을 좀 잘 쳐야 할 텐데.
그래서 서울 근교에 있는 대학이라도 가야 내가 애를 대학이라도 보내지.
성적이 나빠서 지방에 가게 되면 내가 이 박봉에 어떻게 애 공부를 시키겠냐?’
저를 고문할 때는 그 인간이 완전히 악마 같았는데,
그 얘기하는 걸 들을 때는 악마가 아니라 여느 부모와 똑같은 사람이었어요.
그때 제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 사람이 집에 가서 어머니를 만나면 사랑하는 아들이겠구나.
아내를 만나면 사랑하는 남편이겠구나.
아이를 만나면 사랑하는 아버지이겠구나.
지금 직장에 와서 자기 나름대로 직장생활 잘한다고 하고 있는 거겠구나.’
이런 생각이 마음에 탁 다가오는 순간 제 속에 있던 증오가 사르르 눈 녹듯이 내려앉으면서 미움이 사라졌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고문당하고 나와서도 이를 악물고 괴로워하지 않았어요.
대신에 그 이후의 제 삶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나만 착실하면 감옥 갈 일이 뭐가 있고, 경찰서 갈 일이 뭐가 있나’
이렇게 생각하고 살았는데, 전혀 아니었어요.
내가 사는 것하고 관계없이 이렇게 고문이 있는 사회에는 누구나 다 고문당할 위험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그 한 인간을 미워하기보다는 고문을 철폐하고 이 사회를 민주화하는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고문하는 제도가 없어지면 내가 고문당할 일이 없는데,
고문하는 제도가 있는 가운데 나만 안 걸리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면 오히려 재수 없이 걸릴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일은 개인의 원한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사회적으로 해결하는 게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억울하고 분했지만 오히려 그 경험은 저를 세상에 눈뜨게 만들었어요.
그런 까닭에 스님이 지금 이렇게 건강하게 사는 거예요.
지금도 술만 먹으면 그 생각을 해서 ‘그 자식 잡히면 죽여 버린다!’ 그러면 스님의 인격이 참 문제잖아요.” (모두 웃음)
“신은 인간에게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을 준다고 했는데, 제가 견딜 수 있는 고통은 어디까지입니까?”
“신은 우리들에게 고통을 안 줘요. 당신에게 신이 지금 고통을 주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서 괴로워하고 사는 거예요. 어머니는 자기 산다고 몸부림쳐서 산 거예요.
그래도 나를 낳아주신 분이잖아요.
‘내가 원하는 수준의 엄마는 아니지만 그래도 날 낳아줬고 여기 와서 우리 아이도 봐주는 고마운 분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내가 좋아요.
그건 신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아니면 계속 미워하면서 괴롭게 사시던가요.
엄마 원망했다가 이제 신까지 원망하네요.
‘주여, 나에게 어디까지 시련을 주시겠습니까?’ 이러면서 원망하고 살 거예요?
예수님을 믿으려면 제대로 믿어야죠.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형수 두 명을 두고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이랬어요.
내일부터 교회 가서 크리스천이 되어서 ‘주여, 우리 어머니를 용서하소서’ 이렇게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모두 박수)
불교는 ‘죄인이라는 건 본래 없다’ 이런 사상이에요.
그러니 용서해줄 것도 없어요.
질문자가 어머니에 대해서 자기 어릴 때의 생각과 경험에 기초해서 계속 매여 있는 거예요.
그런데 질문자도 애 낳고 키워보니까 엄마 심정이 좀 이해가 되죠?
어릴 때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는 건 이해가 돼요.
그런데 어머니가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딸은 엄마를 닮게 마련인데 엄마가 나쁜 사람이면 질문자도 나쁜 사람이에요.
그런데 질문하는 것이나 얼굴을 봐서 질문자가 별로 나쁜 사람같이 안 보이니까 엄마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사는 게 힘들다 보니 돈이라 그러면 눈이 뒤집어지고 조금 영악하게 사셨을 뿐이에요.
그런 분이니까 안 굶어 죽고 잘 살 거예요.
‘내 것까지 빼앗아서 살려는 거 보니까 우리 어머니는 굶어 죽을 일은 없겠다.’
이렇게 좋게 생각하세요. 알았죠?”
“네. 감사합니다.” (모두 박수)
“이렇게 제가 답변을 드리긴 했지만, 이건 사실 가슴 아픈 사연이에요.
북한에서 식량난으로 수백만 명이 굶어 죽으면서 일어났던 일과 그 비참함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딸을 2천 원에 파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악조건 속에서는 인간의 생존을 위한 어떤 몸부림도 다 있어요.
그걸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평가할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 남한에서는 그런 식량난이 있을 때 북한을 미워한다는 이유로 식량을 지원해 줄 생각을 안 했어요.
‘저런 인간들한테 왜 식량을 주느냐?’, ‘북한에 쌀을 보내면 총알 되어 돌아온다!’
이런 식으로 반대를 했는데, 그런 우리들의 악독함을 봐야 합니다.
사람이 죽어 가는데도 그런 이념을 더 앞세우는 것은 좋은 자세가 아닙니다.
그가 아무리 나쁜 짓을 했다 하더라도, 종교가 다르다 하더라도, 민족이 다르다 하더라도,
사람이 병들거나 굶어 죽으면 그를 돌봐야 해요.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모두 박수)
질문자는 흘리던 눈물을 닦고 웃음을 보였습니다.
청중들도 격려의 박수로 질문자를 위로했습니다.
굶주리는 동포들을 외면한 우리의 악독함을 돌아봐야 한다는 말씀이 가슴에 오래 남았습니다.
다음 질문에서는 아주 짧고 가볍지만 감동적인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한 청년이 손을 번쩍 들고 일어서서 질문했습니다.
과거에 지은 잘못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나요?
“저는 스물다섯 살 청년입니다. 과거에 지은 업을 이겨내고자 노력하고 있는 중인데 쉽지가 않습니다.
과거 학창 시절부터 무단결석, 지각, 흡연, 음주, 폭식, 인터넷 중독, 게임 중독 등 많은 업을 지었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고자 담배도 끊고 금주도 하고 다이어트도 했지만
얼마 전 우울증에 걸려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음식도 다시 먹고 담배도 다시 피우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업을 이겨내는 현명한 방법과 함께 따뜻한 조언이 듣고 싶습니다.”
“그런데 ‘따뜻한’이라는 수식어는 빼세요. 저는 따뜻한 조언은 할 줄 몰라요. 송곳 같은 조언은 할 수 있지만요.”
“냉철한 조언 부탁드립니다!” (모두 웃음)
“아무 잘못도 없어요. 앞으로 잘 살면 돼요.
인터넷 많이 본 게 뭐가 잘못이고, 담배 피운 게 뭐가 잘못이고, 술 먹은 게 뭐가 잘못이고,
밥 많이 먹고 살찐 게 뭐가 잘못이고, 학교 안 간 게 뭐가 잘못이에요? 제가 얘기 들어보니까 아무 잘못도 없어요.
다만 부모님이 속이 좀 상했겠네요. (모두 웃음)
제가 볼 때는 특별히 법률적으로도 잘못된 거 없고, 도덕적으로도 별 잘못된 게 없어요.
남을 때려서 죽였다든지, 남을 성추행했다든지, 남의 물건을 훔치고 빼앗았다든지,
사기를 쳤다든지 이런 일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자기가 바보 같아서 자기 몸 살찌웠을 뿐이고, 학교 안 가서 자기에게 손해 났을 뿐이고,
술 먹고 자기 건강 해쳤을 뿐이고, 게임에 중독돼서 공부 안 했을 뿐이에요.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해치는 건 ‘나쁘다’라고 안 그러고 ‘어리석다’라고 해요.
질문자는 어리석은 사람이지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그러니 아무 잘못이 없어요.
어리석게 계속 살고 싶으면 그렇게 살면 됩니다.
어리석게 살기 싫으면 앞으로 잘 살면 돼요.
‘바보같이 내가 무엇 때문에 내 입으로 술을 마셔서 내 몸 건강 해치고,
내가 내 입으로 음식 많이 먹어서 내 몸 살찌워가지고 건강 해치고,
내 입으로 담배 피워서 내 건강 해치고, 내가 왜 바보같이 이럴까? 아, 이제 바보같이 안 살아야지!’
이렇게 생각이 들면 앞으로 잘 살면 돼요. 더 할 말 있으면 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모두 박수)
“결과적으로 따뜻한 조언이 됐어요?”
“네. 그렇습니다.”
송곳 같은 조언이 가장 따뜻한 조언이었습니다.
질문자는 크게 위로받은 느낌이었습니다.
청중석에는 눈시울을 붉히는 분들도 몇몇 보였습니다.
오늘은 짧고 가벼운 대화가 재미도 있으면서 감동도 참 깊습니다.
다음 질문자는 질문부터 대중들을 웃음바다에 빠트렸습니다.
모태솔로, 이제 연애하고 싶어요.
“저는 모르는 사람들과 말도 잘 못하고 표현도 잘 못 합니다.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 말도 잘 못 붙여서 현재 모태솔로입니다.
장가도 가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자신감을 갖고 당당하게 내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혼자 사는 게 좋겠어요. 여자하고 살면 여자도 고생시키고 질문자도 고생해요.
그러니 그런 꿈을 버리세요. 너무해요?”
“예!” (대중들 다 함께 대답)
“왜 너무해요? 똑바로 말해주는 건데 너무하다고 하네요. (모두 웃음)
저런 분이 장가가면 상대편 여자가 안 답답할까요?
너무하다고 말한 사람이 저분에게 시집을 가세요.
자기는 안 가면서 어떤 여자를 갖다 넣어서 고생시키려고 너무하다 그래요? (모두 웃음)
저 분과 결혼하면 상대편 여자가 답답해요.
질문자 같이 말은 안 하고 꿍하니 있다가 성질이나 버럭 내고 이러면 아내가 죽을 노릇이에요.
그러면 질문자도 답답해져요.
상대 비위를 맞추려면 힘들기 때문에요.
그러니 결혼은 꿈도 꾸지 마세요.
저도 안 가는데 질문자가 뭐 잘났다고 가려고 해요? (모두 웃음)
내가 바라는 것이 다 이루어질 수 없어요.
장가를 나만 가고 싶다 한다고 가지나요? 상대도 원해야 하는 거예요.
나 혼자 10리를 걷고 싶다면 이건 자기 일이니까 가면 되는데,
‘어떤 여자하고 연애하고 싶다’ 이거는 내가 원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에요.
질문자처럼 원하는 게 이뤄져야 한다고 너무 집착하면 성추행범이 되기 쉬워요.
결혼이나 연애는 상대도 원해야 하는 거예요.
지금 자기 속에 있는 말도 못 하고 꿍해가지고 이렇게 있는데 어떤 여자가 질문자 같은 남자를 좋아하겠어요?
생각해보세요. 질문자나 저나 뭐 비슷하게 평범하게 생겼잖아요. (모두 웃음)
질문자가 재산이 엄청나게 많다든지 하면 말을 좀 못 해도 상대가 그 재산 보고 좋아할 수도 있고,
인물 보고 좋아할 수도 있고, 지위가 특별히 높다든지 하면 그 지위 보고 좋아할 수는 있을 거예요.
하지만 질문자가 재산이 특별히 많은 것도 아니고, 특별히 유명인사도 아니고,
특별히 지위가 높은 것도 아니고, 여자들이 홀릴 만큼 특별히 잘생긴 것도 아닌데,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찾아와서 ‘여보, 당신 사랑해’ 이런 여자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러니 꿈도 꾸지 말라는 거예요.” (모두 웃음)
“연애하겠다는 생각이 있으니까 부담스러운 거예요.
마음속에서 ‘아이고, 저 여자가 나 안 좋아하면 어쩌지’ 이런 부담이 되니까 말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 연애하겠다는 생각을 딱 끊어요.
‘나는장가 안 간다!’ 이렇게 딱 정리하면 상대 여자를 만날 때 부담이 하나도 안 돼요.
‘나는 너하고 아무 관계없는 사람이야’ 이렇게 생각하면 말도 아무렇게나 해도 되고, 잘 보일 이유도 없어져요.
이래야 우선 대화가 됩니다.
여자를 보면서 ‘연애를 할까, 결혼을 할까’ 이러면 상대가 얼마나 부담되겠어요?
그리고 ‘거절당하면 어떡할까’ 이런 부담도 되니까 말이 입에서 잘 안 나오는 겁니다.
연애나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오늘 이 자리에서 딱 끊어버리세요.
‘아, 나는 연애도 안 하고, 장가도 안 갈 거야. 나는 부처님 법을 열심히 공부하고 출가해서 스님이 될 거야.’
(영상에선 불교대학다닌다고 이야기함)
이렇게 마음을 딱 먹으면 여자들이나 다른 사람들하고 얘기할 때 내가 눈치 볼 필요가 없어요.
상대하고 연애할 것도 아니고, 상대한테 장가갈 것도 아니고, 그냥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는 거니까요.
이럴 때는 나이 많은 여자든 나이 젊은 여자든 따질 필요도 없고, 남자 여자도 따질 필요도 없어요.
그냥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얘기하고, 상대가 나를 미워하든 좋아하든 상관하지 마세요.
그런데 어떤 여자가 눈이 삐어가지고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경우가 생기면 그때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때도 장가가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장가가고, 연애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연애하면 돼요.
그러면 나중에 관계가 나빠져도 그건 자기가 눈이 삐어서 그렇게 한 것이니까 내 책임으로 여길 수 있어요.
그러니 오늘부로 딱 끊어야 해요.
말을 못 하는 이유는 연애하겠다는 생각으로 접근하기 때문이에요.
거절당할까 싶어서 입에서 말이 안 나오는 겁니다.
그걸 딱 끊어야 입에서 말이 나와요. 잘 보이려는 생각을 딱 끊어야 아무렇게나 말할 수 있어요.
욕을 하라는 게 아니라 속마음을 얘기할 수 있다는 거예요.
스님은 지금 여러분들한테 잘 보일 생각이 없으니까 말을 막 하는 겁니다.
욕 빼곤 다 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질문자에게도 이렇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저 사람이 마음 상하면 어쩌지’ 이렇게 눈치 보고 조언하면 조언이 안 돼요.
또 제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돈을 안 받기 때문이에요.
돈을 받고 심리 상담을 한다면 손님 떨어질까 봐 겁이 나서 조심해야 하잖아요. (모두 웃음)
“감사합니다.” (모두 박수)
오늘 법당가서 영상으로 봤는데 너무 재밌게 봤습니다
마침 글이 있길래 퍼왔습니다 글로봐도 재밌네요
대단한 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