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쪽 밭 너머의 작은 닭장에서 닭 네 마리를 기른다.
수컷인 짱이와 암컷인 그라, 데이, 션.
짱이는 검붉은 몸통에 깜장 꽁지가 있고
그라, 데이, 션은 순서대로 검붉은+깜장, 갈색, 베이지색이다.
암탉 세 마리가 서열도 덩치도 색상도 내림차순이라 그라데이션이라 이름붙였다.
이사오고 며칠간은 짱이가 그라를 그렇게 쪼사댔다.
덩치도 깃털 색도 비슷한데다 유독 사이가 나쁜 걸 보니
남매나 앙숙이나 대충 그쯤 되는 줄 알았다.
'니네도 유전자 단위에서 서로 죽여라라고 프로그래밍 된 거냐?' 하며 내심 키득댔다.
눈이 오고 날이 추워지니 롱패딩을 껴입었는지 그라의 덩치는 한달만에 1.5배로 불었고
이번엔 반대로 그라가 짱이를 그렇게 쪼사댔다.
'남녀성비 1:3 할렘엔딩인 줄 알았는데 여왕님 엔딩이구나ㅠㅠ' 하며 내심 짱이에게 위로를 보냈다.
그라는 갈수록 성질이 더러워졌다.
모이를 주려고 들어가면 내 손가락을 쪼아버리거나(장갑을 껴서 다행이었다. 손가락 대신 장갑이 찢어졌으니)
쌀겨를 퍼온 그릇에 점프 강킥을 날려서 그릇째 뒤엎어버린다거나
살짝 열린 닭장 문으로 뛰쳐나와서 날 뒤따라온 고양이 뚜기를 덮친다거나(러시아식 도치법에서는 닭이 고양이를 습격합니다).
어제의 일이었다.
아침에 모이를 주러 갔는데 짱이 혼자 계사 밖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왜 추운데 밖에 있냐' 하면서 모이를 주니
암탉들은 활개치며 모이를 쪼아먹는데
짱이는 도통 움직이지를 못했다.
종이컵에 모이를 담아 짱이 머리 앞에 갖다 대주니
그라가 짱이를 밀쳐내고는 지가 다 먹어버렸다.
외삼촌께 여쭤보니 짱이가 우두머리 자리에서 밀려나
계사 밖에서 외톨이로 밤을 보낸 것 같다며
짱이만 따로 격리해두고 지푸라기로 따듯한 자리를 마련해주라 하셨다.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그랬어야 했다.
오늘 아침, 짱이용 계사로 쓰려고 빈 개집을 들고 닭장에 가보니
짱이가 쓰러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라, 데이, 션은 모이 안 주냐며 평소처럼 꼭꼭대고 있고
짱이만 죽어 나자빠져 있었다.
짱이 목에는 깃털 뽑힌 땜빵이 오백원짜리 동전 두 개 만한 크기로 있었고
등에도 백원짜리만한 땜빵이 있었다.
오늘따라 날 바라보는 그라의 눈이 무섭다.
짱이의 시체를 닭장에서 떨어진 뒷동산 너머에 두고 나뭇잎으로 살짝 덮어뒀다.
길고양이들이 먹든 비료가 되든 하겠지.
내려오는 길에 닭장이 보인다.
암탉들만 있는 닭장이 보인다.
머릿수가 줄어들기만 할 닭장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