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스 샌더스 <제 1의 대죄 >(1973) 1 - 수사관의 내면
통계에 의하면 살인사건의 절반 이상은 가족이나 친지, 친구들에 의해서 발생한다. 그러니까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우선 피해자의 신원을 파악하고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탐문수사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절차일 것이다.
이런 과정은 어디까지나 금전이나 개인적인 원한, 또는 치정에 얽힌 살인사건의 경우에 적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별다른 동기도 없이 거리에서 마주치는 낯선 사람을 '그냥' 죽이고 달아나는 살인자는 어떻게 추적할까. 설상가상으로 이런 살인자가 연쇄적으로 살인행각을 벌이고 다닌다면 어떻게 추적할까.
'대죄 시리즈'로 유명한 미국의 작가 로렌스 샌더스는 '미스터 베스트셀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로렌스 샌더스가 창조한 탐정 ‘에드워드 X. 델러니’는 바로 이런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데 뛰어난 재능과 집념을 가진 인물이다. 델러니의 가운데 이름 약자는 특이하게도 'X'다. <제 2의 대죄>에서 이를 궁금하게 여긴 한 여인이 델러니에게 묻는다.
"이름 속에 들어 있는 X는 뭐의 약자에요?
"더러운 것을 막기 위해서 빗장을 친 겁니다."
농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은 농담이 아니다. 델러니는 농담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는 언제나 진지하고 엄격하고 깐깐한 인물이다.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철권 델러니'일까. <제 1의 대죄>에서 델러니는 뉴욕시의 251 관할 구역을 지휘하는 서장으로 등장한다.
순찰경관부터 서장까지의 경력을 가진 델러니
델러니가 경찰이 된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강직한 사고방식 때문이다. 델러니는 언제나 '질서'를 중요시하게 생각한다. 세상을 아름답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질서가 필요하다. 범죄자는 그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델러니는 어떤 일이 있어도 범죄자를 검거하고 그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제 1의 대죄>에서도 질서를 어지럽히는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델러니의 관할구역에서 유명한 정치인이 머리에 흉기를 맞고 살해당한다. 피해자가 정치인이기 때문에 언뜻 보면 정치권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사건이라고 짐작된다. 하지만 델러니는 여러 정황을 검토한 결과, 이 사건은 별다른 동기가 없는 살인범이 우연히 피해자를 고른 것이라고 확신한다.
델러니의 이런 생각을 뒷받침하듯이 얼마 후에 다시 살인사건이 같은 방식으로 발생한다. 성인 남자라는 것을 제외하면 피해자 사이에 공통점은 없다. 이것도 이상한 점이다. 거리에서 사람을 죽이려면 상대적으로 연약한 여자나 어린아이를 고르는 것이 좋다. 범인은 왜 자신이 반격당할 가능성을 무릅쓰고 성인남성을 목표로 정했는지 의문이다. 델러니는 어떻게 이런 살인행진을 막을 수 있을까?
델러니는 가장 단순하면서 고전적인 방법을 택한다. 우선 살인에 사용된 무기가 어떤 것인지 알아낸다. 이것도 쉬운 것은 아니다. 피해자를 죽음으로 이끈 상처부위를 검사해서 범행에 사용된 무기를 정확하게 알아낸다는 것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요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다.
사용된 무기를 알아낸 다음에는 지루할 정도로 단순한 작업을 반복한다. 시내에서 그 무기를 파는 모든 상점을 돌아다니면서 고객의 명단을 얻는다. 당연히 그 명단에 오르는 이름은 수천 수만에 육박한다. 그들 중에서 사람을 죽일만한 완력을 가진 사람은 누구인지, 전과를 가진 사람은 누구인지, 전과는 없더라도 폭행경력을 가진 사람은 누구인지 지루한 문서작업을 통해서 일일이 확인하고 검토하는 작업을 계속한다. '노가다'에 가까운 이런 일이 끝없이 반복된다.
용의자의 범위를 좁혀나간 후에는 탐문수사를 시작한다. 용의자의 주변인물들을 만나고, 용의자의 재산관계를 조사한다. 불법으로 그의 집에 몰래 들어가서 방과 거실을 수색하고, 기묘한 전화를 걸어서 용의자를 압박한다. 이런 단계에 이르면 델러니는 범인의 정체에 대한 확신을 갖는다. 다만 수색영장 또는 체포영장을 발부받거나, 기소할만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할 뿐이다.
사실 델러니의 이런 수사방식은 최근의 과학수사와는 거리가 멀다. 요즘에는 용의자의 신분확인을 위해서 일일이 문서를 찾아볼 필요도 없다. 컴퓨터로 신원을 조회하면 그 사람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다. <제1의 대죄>가 발표된 것은 1973년. 당시는 과학수사라는 것에 대한 개념도 없던 때였다. 휴대폰이나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기에 수사관들은 발품을 팔며 거리를 돌아다니고 수많은 서류를 뒤적여서 용의자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수 밖에 없었다.
범죄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강철같은 델러니
당연히 엄청난 업무량이 자신과 부하들에게 떨어지지만 델러니는 망설이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사람을 죽이고 뻔뻔스럽게 돌아다녀서는 안돼!”라고 말한다. 부인과 자식들에게는 다정한 남편이고 아버지지만, 범인의 앞에서는 강철 같은 법의 대리인으로 변한다. 이런 만큼 그에게 '철권'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당연할지 모른다.
아무리 확신이 있더라도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사람을 체포할 수는 없다. 체포하더라도 곧 변호사를 통해서 풀려날 것이 뻔하다. 델러니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그는 교묘한 심리전을 통해서 범인을 자멸하게 만든다. 범인을 24시간 감시하고, 희생자의 가족에게 범인과 전화통화하도록 강요한다. 범인에게 큰소리로 협박하고 호통치면서 그를 압박한다. 그러면서 부하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나는 그를 낭떠러지 끝까지 밀어붙여서 그가 곤두박질치면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고 말겠어!"
결과는 언제나 델러니의 승리다. 교묘한 범죄를 행하는 범인의 머리도 뛰어나지만 그래서 별다른 증거를 남기지 않지만, 델러니는 항상 그보다 한수 앞선다. 이런 심리전 때문인지 '대죄 시리즈'에서 델러니의 범인들은 법정에 서는 경우가 없다. 그의 범인들은 모두 스스로 몰락한다.
절망적으로 달아나다가 죽음을 맞는가 하면, 건물에서 투신자살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 수면제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자살하기도 하고, 구치소에서 풀려나지만 언론의 공세를 받고 무너지는 경우도 있다.
범인을 법정에 세워서 법의 심판을 받게 하지는 못하지만, 어찌보면 그보다 더 잔혹한 방식으로 델러니가 스스로 죄인을 심판한 것이다. 작품 속에서 델러니의 부인도 델러니에게 '신의 대리인처럼 행동한다'라는 말을 한다. 델러니는 그래도 흔들리지 않는다. 사람을 파괴하는 자에게는 처벌을 가해야만 한다. 그것이 그가 세상의 질서를 바로 잡는 방법이다. 동시에 자신만의 정의감과 사명감에 사로잡힌 인간의 내면이기도 하다.
원본출처 :
http://www.fountainwz.com/index.php?mid=board_ssZA22&act=dispBoardWr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