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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 (Some like it hot, 1959) (3)
2014/06/28 AM 04:17 |
뜨거운 것이 좋아(Some like it hot, 1959)
밴드 연주자인 두 남자가 갱단의 살인사건에 휘말려 여장을 하게 되고, 여성밴드에서 일으키는 소동을 보여주는 스크루볼 코미디.
이런 류의 변장물. 그러니까 다른 성을 연기 한다는 것, 여장을 한다는 것은 결국 여성의 입장에서 남성을 바라보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건데, 여장을 하고 있는 자신의 본래 성은 남성이므로 일종의 아이러니가 끊임없이 생산되기 마련이다. 이런 미묘한 포인트를 비틀어서 유머를 끌어내는 빌리 와일더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인다.
특히 슈거를 유혹하기 위해 (물론 보호본능, 모성본능, 또는 여성의 정체성을 자극하기 위해서지만) 성적 욕구가 없는 남성을 연기하는 조의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다. 영화 내에서 가장 남성적인 행동인 갱스터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가장 극단의 반대편에 있는 여성으로 변장하는 모습과 잘 매치된다.
또 재밌는 장면이라면, 제리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장면이다. 조와 다르게 여장을 하는 과정에서 제리는 스스로 자신에게 다프네라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해버리기 때문에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실제로 이게 해결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마지막까지 의문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더해서 백만장자인 필딩과 약혼까지 하는 이야기는 플로리다에서 안경 쓴 백만장자를 만나고 싶다던 슈가가 조와의 사랑을 택하는데에서 오는 충격을 줄여준다. 남자라도 상관없다는데 가난한 색소폰 주자인 것이 문제이겠는가.
주된 이야기를 이끄는 데 있어서 보조하는 이야기들이 잘 어울려 주기 때문에 다소 개연성이 떨어지고 빠르게 진행되는 이야기도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게 된다.
마릴린 먼로의 영화는 처음 보았는데 우리가 늘 떠올리는 백치미가 있는 육감적이면서 발랄한 여성으로서의 연기가 정말 매력적.
영화 마지막의 대사는 여러번 곱씹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때로 정반대의 본성을 연기하거나 드러내야 하는 것이 인생의 본질이고, 누구도 완벽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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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거울(Zerkalo, 1975) (2)
2014/06/16 AM 01:25 |
리뷰는 난해하게 쓰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하는데....
솔라리스와 거울 두 영화를 모두 보신 분이라면 함께 이야기 해보고 싶네요.
솔라리스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라는 감독을 만난 후 두 번째로 보게 된 그의 영화 거울.
거울은 그의 기억 그 자체의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에야 솔라리스를 더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부재,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별이라는 것이 얼마나 타르코프스키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거울에서는 시인인 아버지가 자신의 시를 낭송한다.'
나는 그저 전율하게 만들었던 온기의 비가 내리는 집 안, 아버지를 바라보고 화해하는 솔라리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무로 만들어진 '집'이라는 형태가 인간 내면을 상징한다고 생각했으며, 온기의 비가 내리는 집안을 들여다보는 캘빈의 모습을 서로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아들과 아버지. 그리고 서로의 관계가 무너진 것에 대해 가슴 아파하는 아버지의 내면을 상징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아들이 아버지의 발치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이제는 말이 아닌 마음과 마음으로 당신과 소통하겠다는 자기 고백이요, 그렇게 하리라는 다짐이었을 것이다. 내게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자신의 내면과의 화해요, 극복이고, 완성인 것으로 보인다. 거울 역시도 그런 의미의 연장선상에 있다.
영화는 주인공의 아들인(주인공이라고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이그나트가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리며 시작한다. 마침내 나온 채널에는 말을 더듬는 타르코프 출신의 청년 자라 유리가 나오고, 최면술사는 그의 증상을 치료한다. 마침내 그는 똑똑히 말한다. "나는 말할 수 있다."
영화는 마치 꿈처럼 시간을 유영한다. 주인공의 어머니와 아내는 동일인물이 연기하여 같은 사람처럼 보이고, 흑백과 컬러로 나누어진 장면들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관객을 혼란시키며 등장인물들 역시 계속해서 시간을 흐트려놓는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보다는 시간을 관통하는 '무엇'일 것이다.
'거울에서는 어머니가 실제로 영화에 등장한다.'
이 영화는 타르코프스키의 유년 기억 그 자체이므로 주인공 역시 아버지는 떠나간 상태이다. 상태가 좋지 않을 때만 남편이 보인다는 대사처럼 따라서 아버지의 이야기는 파편적이고, 교정일을 하던 이야기처럼 어머니의 이야기는 좀 더 구체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부재는 더욱 더 두드러진다. 주인공은 어머니 의존적인 인간이며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주었던 모든 희생은 너무도 감사한 일이고 보답하고 싶지만, 이 모든 것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도망치고 싶어지기 때문에 어머니와의 사이도 좋지 않다. 그 것은 아내와 어머니가 닮아 있다는 것으로도 설명된다. 얼마 전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어머니 의존적인 아들은 감성적인 인간으로 자라난다. 이런 경우 대개 아내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주인공 역시 아내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 것은 타르코프스키 본인의 아버지와 어머니, 솔라리스에서 죄책감을 느끼는 남자 캘빈과 그의 아내 하리, 영화 속에서 떠나버린 아버지와 어머니와의 관계와도 닮아있다. 영화는 동일인인 아내와 어머니 두 사람을 매개로 하여 삼대의 남자들이 실제로 서로 같은 것을 보아왔고 똑같이 행동하고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삼대의 남자들이 모두 고통의 가학자이며 피학자 즉, 같은 인간이므로, 시간은 영화 속에서 무시되고 서로 혼합된듯이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거울은 다양한 의미로 존재하지만, 주인공 자신이 거울이라면 떠나버린 아버지와 홀로 남은 어머니, 그리고 어린 자신이 한 쪽, 반대편에는 떠나가는 아버지(자신), 홀로 남은 아내, 그리고 아들. 마치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데칼코마니가 되어 존재한다. 이 것은 어떻게 보면 또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적인 양상에서, 아들에게서 또 그의 아들에게로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게 되고마는 아버지란 이름의 불멸성이기도 하다. 타르코프스키가 잉마르 베리만을 가장 위대한 감독으로 생각했다는 것에는 영화 산딸기에서 보이는 이런 불멸성과 화해의 제스쳐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타르코프스키는 이 개인의 기억과 되풀이 되어 나타나는 불멸성을 개인의 것으로만 남겨두려 하지 않고 세계에 확대시키려고 한다. 그 것은 아들과 그 아들에게로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기억이, 세계로 보면 세대가 그 다음 세대에 남겨주는 역사와 같으며 잘못된 것은 극복되어야 하고 그 것은 마음과 마음의 소통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믿음이다. 세계 안에서 고통스러운 결과를 되풀이 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가학자이며 다시 피학자이므로 자신에게 가하는 형벌과 다름없다.
거울이라는 것은 언제나 자신의 내면, 그리고 성찰을 상징해왔다. 타르코프 출신 자라 유리라는 청년은 주인공의 아들 이그나트와 생김새가 닮아있다. 첫 장면, 다양한 거울을 대신하여 브라운관 안쪽에 보이는 것이 이그나트이자 타르코프스키의 또다른 자아라면 이제는 개인의 가장 중요한 기억이 주었던 무력감(말더듬이 상태), 또는 방황하는 인류의 역사에 대한 무력감을 극복하여 이제는 말할 수 있음을 선언한 것은 아닐까.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 아버지란 존재의 불멸성, 대항할 수 없었던(말할 수 없었던) 무력감의 극복. 개인의 내밀한 기억을 통해 보는 우리가 역사를 위해 남겨주어야 할 소통과 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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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녀 (Her, 2013) 스포 多 (12)
2014/06/03 PM 03:56 |
그녀라는 영화는 로맨스 영화의 형태를 띄지만, 아날로그와 디지털, 원본과 복제가 뒤섞여 있는 세계에서 어떻게 감정을 교류하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그 경계선에 걸쳐 있는 인물이죠.
이혼을 앞두고 아내와 별거 중인 테오도르는 대필작가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기념일에 쓰일 편지를 대신 써주는데 묘하게도 컴퓨터의 화면 안에서 써내려가지는 편지는 우리가 늘 프린터에서 뽑아내는, 같은 폰트로 정리된 문서의 형태가 아니라 손글씨처럼 보입니다. 이건 실제 손으로 쓰인 것도 아니고, 언제고 프린트 키만 누르면 다시 뽑을 수 있는 복제에 가깝지만 아날로그 형태의 원본처럼 보입니다. 편지에 깃든 감정도 마찬가지로 실제가 아니라 전달 받은 것, 복제된 것입니다. 편지를 받을 대상이 될 사람에게 가야할 '진짜 감정'(원본)은 어디로 날아가버렸거나 다른 형태로 존재하겠죠. 테오도르는 언제나 복제된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그의 상태는 영화의 대사에서도 드러나는데 폴에게 "그건 그냥 편지야."라고 말하는 것 같은 것이겠죠.
그의 정체성은 아마 이 편지들과 같을 겁니다. 그는 진짜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믿고 있고, 그 이유는 전처와의 이별입니다. 그가 이별에서 잃어버린 것은 그의 원본성입니다. 진짜 자신은 과거에 두고 왔고, 현재의 자신은 하루하루 그저 과거에 두고 온 감정을 그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복제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아날로그의 형태를 띄고 있으면서 원본은 아닌, 그의 편지들과 같으며 그래서 현실 세계의 인간들과 교류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게 사만다입니다. 사만다는 디지털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실체가 있는 세계(현실 세계)를 갈망합니다. 현실 세계에서 도피하고픈, 이미 도피하고 있는 테오도르와는 대척점에 있습니다. 둘은 서로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끌립니다. 테오도르는 그녀가 디지털 그리고 복제이기 때문에 자신의 현재 상태와 같다고 느끼고 그래서 현실 세계의 인간들보다 더 쉬운 방식으로 그녀를 대할 수 있습니다. 둘 사이에 섹스가 가능한 것도 두 사람 모두가, 아니 한 사람과 하나의 OS가 결국엔 경계선(같은 공간) 안에 있기 때문일 겁니다. 둘은 결국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 것이 이 영화의 목표라고 할 수 있겠죠. 실제로 영화에서는 서로가 그 경계선에서 벗어날 때 갈등이 일어납니다.
처음은 테오도르가 전 부인을 만나고 돌아와 자신이 아날로그 즉 원본의 인간이며, 실체가 있는 세계에 속해야 함을 강하게 깨닫는 장면이고, 두 번째는 사만다가 다른 여인을 통해서 실체의 세계로 넘어들어오려고 하는 장면입니다. 세번째를 꼽는다면 사만다가 철학자와 대화를 하고 있는 장면이겠죠. 그 장면은 이번엔 테오도르가 아닌 사만다가 자신이 디지털의 세계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장면일겁니다.
즉, 이별은 예비되어 있습니다.
테오도르가 자신을 깨닫는다 - 경계선을 넘으려 한다(실패) - 사만다가 자신을 깨닫는다 - 세계의 분리, 예비된 이별
사만다가 "당신은 아날로그적인걸 아직 좋아하잖아."라면서 그의 책을 출판하도록 돕는 것. 테오도르가 그녀가 복제된 것(OS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에게만 속하지 않는다는 현실에 분노하는 것은 그가 그녀로 인해 점점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며, 또 돌아갔음을 보여주는 것이겠죠. 테오도르의 입장에서 그녀는 섹시한 목소리를 가진 최고의 상처치료제입니다. 다시 원본인 자신이 되자 현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과거와도 작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전에 현실세계에서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게 되겠지만, 언제고 세상이 더 진화하면 테오도르도 경계를 넘어 사만다가 사는 세계에 도달할지도 모르는 일이겠지요.
음악도 그렇고 감각적인 화면 구성과 연출이 환상적입니다. 영화 전체를 이루고 있는 붉은 색의 색감도 아주 좋았고요.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폰을 꺼내놓는 세상에서 가끔은 실제로 만나고 있는 사람들과도 제대로 감정의 교류를 하고 있는 것인가 고민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SNS를 통해 얻는 친분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연구결과를 어디서 봤었는데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나가야할지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또, 테오도르처럼 상실감에 빠져있던 시기에, 사만다가 아니라 다른 이름이 붙어있던 많은 사람들이 내가 과거에 거짓없는 행복을 빌어주는 사람으로 다시 탄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치료제 역할을 해주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었네요.
개인적으로는 연인이 보기보다는 이별 후 혼자 과거에 살고 있는 남자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습니다.
영화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전부 올라갈 때까지 저와 함께 남아 있던 세 분의 혼자 오신 남성분들도 저와 비슷한 마음으로 가슴 한 켠이 먹먹해졌겠죠.
영화를 다 보고는 다른 로맨스 영화들보다 매트릭스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시뮬라시옹을 다시 읽고 영화평을 써보려고 했는데, 도서관에 상호대차 신청한 책이 안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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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파이더맨(Spider-Man 2, 2004) (12)
2014/05/11 PM 07:36 |
스파이더맨 2를 다시 보았습니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가 상영중이라서 채널 CGV에서 방영해줬나 봅니다.
가장 친한 친구와 새로운 적은 자신을 노리고, 사랑은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큰 힘을 얻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려하는 히어로의 삶과 평범한 인간 피터의 삶을 함께 수행해야 하는 피터 파커의 정체성, 그에 따른 혼란과 고뇌가 깊이있게 전개되는 수작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영화 속의 피터는 말을 별로 하지 않는데, 그런 피터의 현재 상태나 심리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화법이 인상적입니다. 뷔페에 가서 음식을 집어먹으려 하면 웨이터가 지나가버리고, 안경의 한쪽 다리는 여전히 부러져 있습니다. 꽃을 사려고 해도 한다발을 사지는 못하죠. 거기에 정체성에 혼란이 찾아오자 스파이더맨의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모습이 방점을 찍습니다.
적과 친구, 애정. 영화의 중심축이 되는 이 세가지 이야기를 후반부에 동시에 처리하는 유명한 지하철 장면부터 마지막 결말까지의 후반부는 그야말로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데, 다시 봐도 눈물이 나더군요. 피터 파커라는 캐릭터에 깊이 빠져들었다는 증거겠죠.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마지막 닥터 옥토퍼스와의 대결입니다. 액션씬은 짧고 볼거리는 대단해보이지 않지만요. 특히 닥터 옥토퍼스가 전기에 감전되어 잠깐 정신을 잃었을 때, 스파이더맨이 가면을 벗고 옥타비우스 박사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입니다. 가면을 벗고 이름을 부름으로써 히어로 스파이더맨과 빌런 닥터 옥토퍼스가 아니라 인간 피터 파커와 인간 옥타비우스 박사로 돌아와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과정은 정신분석학적 치료 방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더해 그 자리에 있던 메리 제인이 그동안 고민하던 스파이더맨의 정체까지 알게 되니 이 한 장면 자체가 밀도가 상당히 높아보입니다.
샘 레이미가 공포영화 감독을 많이 해서 그런지 비명을 지르는 여자를 클로즈업으로 잡는 장면이 많은데, 자주 나와서 그런지 상당히 거슬리기도 합니다. 지금 보니 어떤 장면은 상당히 유치해보이기도 하네요.
신문사의 조연 세 명은 씬스틸러로의 역할을 거의 완벽히 수행했더군요.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2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보다 훨씬 좋은 이유 중에는 엠마 스톤보다 키얼스틴 던스트의 졸린 눈을 더 좋아하는 제 취향도 한 몫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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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 7의 봉인(The Seventh Seal, 1957) (3)
2014/05/11 AM 08:42 |
"그리고 어린 양이 일곱 번째 봉인을 떼었을 때에 하늘에서는 반 시간 동안 침묵이 흘렀다"
- 요한 묵시록 8:1
산딸기에 이어 두번째로 감상한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젊은 시절을 십자군 원정에 다녀온 기사가 돌아와 죽음을 만나 체스대결을 통해 유예기간을 얻고 그 동안 페스트, 마녀사냥 등 타락하고 황폐해진 도시를 바라보며 신의 존재,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다.
산딸기를 봤을 때도 생각한거지만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는 상당히 문학적이다.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빠져있는 기사와 현실적인 이야기를 뱉는 유쾌한 성격의 종자는 돈키호테와 산초를 떠올리게 하고, 죽음과 체스를 두는 것은 어딘가 파우스트적이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죽음은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로 나타나는데 영화 초반부터 긴장감을 지속시키면서 흥미를 끄는 역할을 한다. 사진에 나타난 것처럼, 죽음이 나타난 첫 장면은 마치 연극처럼 보이는데 너풀거리는 옷을 입고 팔을 들어올리는 것만으로도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표현하는 장면은 소품을 잘 이용한 환상적인 장면으로 보였다.
해골이 장면의 귀퉁이에 배치되어 있는 장면이 많은데 바니타스 정물화처럼 보였다. 바니타스 정물화가 주는 Memento mori의 메시지는(죽음을 기억하라) 계속해서 등장하는 죽음의 모습과 함께 인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나온 안톤 쉬거가 떠올랐다. 예전 멋모르던 시절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고 안톤 쉬거를 죽음과 같다고 해석했었는데 이 영화의 죽음을 보니 거의 판박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똑같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다시 한번 봐야겠다.
개인적으로는 배우들의 목소리가 정말 좋아서 몰입이 잘되었다. 정말 재밌고 의미있게 보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감상은 영화를 보는 개인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글로 적기에는 모호한 것 같은 이 느낌은 혼자 곱씹을 때 완벽해질 것 같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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