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의 대죄>, <제 3의 대죄>. 예전에 한길사에서 각각 <화가와 소녀>, <사랑의 종말>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적이 있었다.
로렌스 샌더스 <제 1의 대죄>(1973) 2 - 연쇄살인범의 내면
<제 1의 대죄>는 도서추리소설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작품의 도입부에서 범인의 정체를 알 수 있다. 범인이 누구인지 고민할 필요 없이 작가가 보여주는 범인의 모습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동시에 살인범의 시선에서도 작품이 진행되기 때문에 독자들은 살인범의 심리와 입장(?)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왜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지, 살인을 하면서 어떤 만족과 위안을 얻는지 등. <제 1의 대죄>의 연쇄살인범은 다니엘 블랭크 라는 이름의 백인 남성이다. 통계에 의하면 대부분의 연쇄살인은 20-30대의 백인 남성에 의해서 벌어진다.
36살인 다니엘 블랭크는 대형 출판사에 임원으로 근무 중이다. 젊은 나이지만 재능을 인정받아서 고속으로 승진할 수 있었고 그의 연봉은 5만 5천 달러에 이른다. 180cm가 넘는 장신의 다니엘은 학창시절 수영과 육상, 테니스 등 개인종목 스포츠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었다. 때문에 30이 넘은 나이에도 단단한 근육과 균형 잡힌 체형을 가지고 있다.
다니엘은 취미로 등산을 한다. 그의 등반 경험은 초급수준을 넘어섰기에 그는 다양한 등산 장비를 집에 구입해두고 계절에 관계없이 산을 탄다. 다니엘에게 등반은 도전이다. 살인도 도전이다. 그에게 살인하는 것은 등반 기술을 배우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책을 통해서 암벽등반 기술을 배울 수 없듯이, 사람을 죽이는 것도 독서를 통해서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을 배우려면 기술을 습득한 후에 자신의 능력과 용기, 무엇보다도 필요한 행운을 시험해봐야 하는 것이다.
등산을 거듭하다 보면 요령이 생기고 경험이 쌓이듯이 살인도 마찬가지다. 등산에 재미를 붙이면 자주 산에 가고 싶어지는 것처럼 살인도 그렇다. 험한 산에 오를 때 자신에게 꼭 맞는 장비를 챙겨가듯이 살인을 할 때도 자기에게 익숙한 도구를 택해야 한다. 등반도 살인도 모두 위험하다. 위험하다고 등반을 포기할 수 없듯이 어렵다고해서 살인을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성공한 엘리트처럼 보이는 연쇄살인범
다니엘은 그래서 거리로 나선다. 그는 특이하게도 성인 남성을 살해의 대상으로 찾는다. 많은 연쇄살인범들이 여성이나 어린 아이를 노리는 것과는 반대인 것이다.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뒤틀린 성취욕과 관계있다. 건장한 성인 남성에게 반격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살인을 행할 때, 그래서 그 시도가 성공했을 때, 그는 ‘해냈다’라는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험한 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 성취감을 느끼는 것처럼.
무엇이 그를 연쇄살인으로 이끌었는지는 알 수 없다. 대부분의 연쇄살인범은 어린 시절 부모에게 학대받았던 경험이 있다. 다니엘은 돈 많은 부모 밑에서 경제적으로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에 학대받은 적은 없지만 대신에 사랑을 받아보지도 못했다. 그의 부모는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해주지 않고 언제나 볼에만 키스를 해주었다. 어머니는 그를 부를 때 '다니엘' 또는 '우리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항상 성과 이름을 합쳐서 '다니엘 블랭크'라고 불렀다.
간단히 말해서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얘기다. 외로운 어린 시절은 다니엘의 정신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다니엘은 취직해서 승진가도를 달리고 일반인들의 눈에도 성공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아무도 그의 뒤틀린 내면을 알지 못한다. 그는 고전적인 세련미로 장식된 비싼 정장을 입고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쾌적한 아파트에서 혼자 산다. 부유한 몇몇 친구들과 함께 고급스러운 파티를 벌이기도 한다.
다니엘은 자신의 모든 물건을 깔끔하게 정리해 둔다. 옷장 속의 속옷은 똑같은 각도로 접혀서 차곡차곡 포개어져 있고, 주방에는 식기와 그릇이 항상 깨끗하게 설거지 된 상태다. 거실, 욕실, 침실 전부 방금 체크인해 들어간 고급호텔처럼 완벽한 정돈상태를 보여준다.
일반인들이 보기에 다니엘의 아파트는 수수께끼 그 자체다. 그의 집은 알아내기 힘든 인격의 분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깔끔함과 질서정연함이 있지만 인간미와 개성은 없다. 오직 황량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청결함이 있을 뿐이다.
이런 아파트 안에서 다니엘은 혼자 있을 때면 종종 나체가 된다. 자신의 몸에 사슬을 휘감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몸을 감상하며 감탄한다. 그도 가끔씩은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렇더라도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데.
연쇄살인범의 황량한 내면
다니엘은 동물 애호가이기도 하다. 애완견을 학대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를 정도다. 범죄소설 속에서 묘사하는 살인범들의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의 상당수가 동물 애호가라는 사실이다. <양들의 침묵>의 버팔로 빌은 자신의 애완견이 다칠까봐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지른다. 살인범들은 동물들을 사랑스러운 손길로 쓰다듬고 보듬어주면서, 태연하게 사람을 찔러죽이고 내장을 끄집어 내고 눈꺼풀과 귀를 도려낸다. 살인범의 분열된 인격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다.
그리고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제1의 대죄>에서 정신분석학자는 연쇄살인을 수사하는 형사 델러니에게 살인범들의 내면을 알려준다. 공통점 몇 가지는 이들이 사람을 사귀지 못하며,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깨끗하게 정리된 다니엘의 아파트처럼. 다니엘도 주변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길거리나 직장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치지만 도저히 내가 그들과 한 부류라고 생각되지가 않아. 그들이 인간이라면 나는 아냐, 내가 인간이라면 그들은 인간이 아니야."
다니엘은 그래서 사람을 죽이기로 마음 먹었는지도 모른다. 역설적이게도 다니엘은 죽이려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상대에게 애정을 느낀다. 그에게 살인행위는 궁극적인 사랑의 행위다. 상대에게 다가가며 "너를 사랑해"라고 중얼거리고, 상대의 육체에 흉기를 힘껏 꽂아 넣으면서 그와 한 몸이 되었다고 느낀다. 성적인 충동이 없더라도 살인을 통해서 상대방의 몸 속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형사 델러니는 연쇄살인범들의 이런 심리를 정신이상자들의 슬픈 연대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델러니는 자기 자신의 내면도 공허하다고 느낀다. 자신에게 최소한의 동정과 인간미가 남아있었다면 사건은 다른 방식으로 해결되었을 테고 그럼 범인들도 살아서 재판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럴 때면 델러니는 범인들처럼 자신의 인생도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다니엘이 길을 벗어난 것처럼 델러니도 어디선가 궤도를 이탈했기에 연민은 고갈되고 따뜻한 인간미마저 메말라 버렸다. 오랜 세월동안 범인을 뒤쫓다가 그들을 닮아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극과 극이 서로 통하는 것처럼, <제 1의 대죄>에서 묘사하는 연쇄살인범과 형사의 내면도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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