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Blind, 2007
세상이 그토록 아름답다면, 다시 말해 세상이 아름답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의미에서 진실이 아닐 것이다. 뭐, 반대로 온전한 거짓말도 아닐 수 있다. 우리의 감관으로 인식되는 세상은 항상 자기모순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완벽한’ 것이란 없다. 만약 진정한 아름다움, 사랑이 가능하다면 그곳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그곳을 정확히 집어내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조심스레 말 할 수 있겠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 수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드는 그 장소. 한계를 넘어 불가능한 곳에 위치한 그것을 우리는 찾는다. ‘진정한(완벽한)’ 아름다움 그리고 사랑. 이 모든 것들의 이름은 ‘환상’ 그 속에서 새어져 나온다.
영화 <Blind>는 날카로운 인상이 강하다. ‘날카롭다’라는 단어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인 감각일 것이다. 물론, 영화라는 매체가 기본적으로 시각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끝이 예리한 무언가를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을 구성하고 총체화 시키는 한 부분은 바로 ‘눈 멂’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청각적(오디오) 부분이 극대화 되어 있다. 영화 시작부터 우리는 알 수 있다. 귀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소리, 머릿속에 유리조각이 부유하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이 글에서 청각적인 부분을 표현할 수는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앞으로 살펴볼 <블라인드> 영화 분석은 영화 시간적 흐름에 맞춰 진행될 것이다. 글의 분량이 길어져 지루할 수도 있을 거란 염려도 들었지만, 너무나 인상 깊게 본 나머지 독자들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영화를 꼭 소개하고 싶었다. 어떤 식으로 소개하는 게 좋을지 가장 효과적일지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다. 부족한 글쓰기지만 최선을 다해 영화를 검토할 것이다. 조금은 긴 여정, 너그러이 봐주시길 바란다.
<시작은 시선이다>
이명이 들리듯, 아니 작은 유리파편이 신경을 건드리는 같은 오디오. 그리고 거울이 등장한다. 거울에 비친 누군가의 얼굴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알지 못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거울에 비친 이가 여자아이란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짐작하자면 이 ‘깨진’ 거울은 필경 이 아이에게 무슨 문제(도덕적 의미가 아닌)있다는 것이다.
보통 영화에서 거울이 가진 상징성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상상계를 포함한 라캉의 거울단계. 다른 하나는 ‘반영성’이다. 하지만 영화의 흐름으로 보아 상상계를 나타내는 이상적 자아와는 관련성이 적은 것으로 판단했다. 그렇기에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보았다. 그것은 타자의 시선이다.
흔히 우리가 라캉이론에서 상상계를 논의할 때는 이상적-자아를 얘기한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신체를 보고 환호하듯 자신이 되고 싶은 이미지를 구성하는 시기이다. 보통 거울에 비친 상은 자신이 되고 싶은 이미지를 구현하는 법이다. 그리고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거쳐 상징계로 진입하게 되면 자아-이상이란 것이 나타난다. 이 자아-이상은 시선으로 이뤄진 것이다. 즉, 자신을 타자화 시켜,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을 쉽게 표현하자면 타자의 시선에 비쳤으면 하는 자신이다. 이상적 자아와 다르게 여기에는 타자의 시선이 개입되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는 유명한 명제 또한 이것과 같은 궤를 그린다.
깨진 거울에 나타난 자아를 타자의 시선에 기인한 자아-이상으로 분석한 이유는 조금씩 설명해 나갈 것이다. 다만, 지금은 이 글의 시작이 ‘시선’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영화의 첫 장면인 ‘깨진 거울 씬’은 페이드-아웃된다. 그리고 책장 넘기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잘 들어보세요. 이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감정이 섞이지 않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전해진다. 흔히 알고 있는 “옛날 옛적에”라고 시작되는 동화들처럼, 영화 <Blind>는 누군가의 안내로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책) 속으로 들어간다. 이 여정의 끝은 무언가를 ‘알 수 있다’는 달콤한 선물을 약속받고 채 말이다.
영화의 배경인 그곳은 고전적 동화에 나오는 저주받은 성의 모습처럼 얼어붙고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곳에는 앞을 못 보는 청년 ‘루벤’과 옆에서 그를 지키는 어머니 ‘캐서린’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일을 도와주는 다른 이들도 있지만 존재감이 없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고 공포에 얼어붙었다.
앞을 못 보는 루벤은 나날이 폭력적이게 변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으레 그렇듯이 폭력을 일삼는 사람에게는 만성적인 두려움이 있다. 그에게 두려움이란 ‘어둠’이다. 그에게 어둠이란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어릴 적에는 분명 시력이 있었다. 그는 빨강이 무슨 색인지 알 수 있으며 기린의 모습도 알고 있다. 즉, 이 말은 그에게 있어 어둠은 내재적인 요소가 아니란 것이다. 외부에서 다가온 피할 수 없었던 외적 요소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 어둠은 두려움 자체이기도 하지만 무기력함이기도 하다. 옷을 갈아입을 때도 씻을 때도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참기 어려운 수치심으로 다가왔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신을 보는 것,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묵직하고 소름끼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시선(시력)은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 선망의 대상이란 부분은 여자주인공 ‘마리’를 만나면서 비로소 알 수 있다.
마리가 등장하는 장면 또한 인상적이다. 이 장면에서는 마리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이슬람권 국가의 차도르를 연상케 하는 이 모습을 보아 마리는 철저하게 자신을 가리고자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모습 조차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마리의 첫 등장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사실상의 첫 등장은 이미 있었다. 아마 몇몇 눈치 빠른 분들께서는 짐작하셨겠지만 처음에 보았던 깨진 거울에 비친 어린아이의 모습은 바로 마리(마리아)의 어릴 적 모습이다. 그녀의 트라우마를 구성하고 있는 거울, 그리고 어릴 적 모습이 영화의 포문을 여는 데 사용된다.
이미 잠깐 논의했듯이 거울의 의미를 타자의 시선으로 위치시켰다. 타자의 시선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전신을 가리고 있는 마리의 옷에서는 단순히 자신의 얼굴(영화에서 마리는 상당히 못생긴, 어떠한 의미에서 혐오스러운 얼굴을 가졌다고 설정되어 있다)을 가리기 위한 용도가 아니다. 그것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서로 다른 이유에서 타자의 시선과 싸우고 있다. 루벤은 ‘눈 멂’이라는 상처와, 마리는 외상적 기억인 트라우마와 싸운다. 정확히 말하자면 초기의 그들은 싸움을 회피하고 자신을 숨기기 급급했다. 자신을 드러내고 투쟁하는 것이 아닌, 꼭꼭 숨기는 행위로 말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첫 시작이자 중요한 상징적 단어가 ‘시선’인 것이다.
<블라인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침입하기>
마리의 역할은 루벤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이다. 심리적으로 불안한 루벤을 위해 그의 어머니가 마리를 부른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루벤과 마리의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뒤틀린 성격은 루벤 뿐만 아니라 마리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평생 타자의 시선에서 도망친, 모멸감 섞인 시선을 받으며 살아온 그녀 또한 루벤에게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그를 제압해 눕히는 상황이나 책을 집어 던졌다고 뺨따귀를 때리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녀가 읽어주는 ‘책’때문인데, 우연찮게도(인과 관계는 항상 소급적으로 적용되기에 우연은 반드시 필연이다) 마리가 낭독하는 안데르센 동화는 루벤이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단순히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소리 내어 내용을 읊을 수 있을 정도로 외우고 있었다. 이 장면으로 보아 루벤은 시력이 있었을 때(어린 시절) 그 동화를 즐겨보았다는 것을 예상해 볼 수 있다. 루벤은 동화의 결말, 심지어 모든 내용을 외우고 있지만 마리의 낭독을 멈추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책을 읽으려는 마리를 제지하기까지 한다. 이것으로 봤을 때 루벤은 그 동화로 인해 어떠한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영향은 마리(타자)의 목소리에서 흘러 들어오는 세계, 또 다른 세계에서 시작된다. 시력을 잃으면서 루벤은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배타성이 생겨났다. 이런 상황에서 타자의 촉각과 목소리는 두려움 자체이다. 누군가가 옷을 갈아입히며 자신(루벤)의 음밀한 부분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걱정과 수치심, 다른 누군가는 자신을 제압해 차가운 주삿바늘로 진정제를 투여하는 그 감촉, 모든 것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리의 차분한 목소리로 전해지는 친근한 이야기. 어릴 적 자신의 눈으로 직접 읽었던 그 책. 하지만 지금은 타자의 목소리를 매개로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익숙한 낯섦(역설적이지만), 기존의 세계를 흔들 수 있는 자극이다.
서로에 대한 불신의 벽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순간, 그것은 현실을 초월한 또 다른 세계에 다다름이다. 마리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세계, 너무나도 익숙하지만 낯선 그 세계가 루벤에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살아있는 현실과 같이 생생한, 어둠에서 자신을 구원할 세계인 것이다.
루벤의 변화는 이렇게 시작 되었다. 그녀가 읽어주는 동화세계와 상상력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환상의 공간은 루벤에게 생기를 불어 넣는다. 그리고 이 어둠 너머에서, 자신에게 또 하나의 세계를 전달하고 있는 그녀를 상상하게 된다. 이 보이지 않는 혹은 어렴풋 보이는 불가능한 지점에서 그는 세계를 깨트릴 역동성(힘)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마리에겐 어떤 변화가 시작 됐을까. 마리는 루벤과 다른 세계와 조우한다. 그것은 너무나 실재적인, 감추고 싶었던 진실이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 타자의 시선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다.
마리가 낭독하는 동화는 또 하나의 이야기 전개이다. 루벤과 마리를 매개하는 이 동화는 영화와 교묘하게 같은 포물선을 그린다. 동화 속 인물인 카이는 거울 조각에 눈과 심장이 찔려 세상 모든 것들이 흉측해보이고 따뜻했던 마음은 차가워진다. 그리고 게르다에게 “정말 못생겼군, 게르다”라고 말한다. 루벤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순간, 즉 발화되는 순간 동화세계와 마리의 기억은 뒤섞인다. 마리는 계속해서 책을 읊어 내려가고 있고, 트라우마적 기억 또한 진행된다. 이중의 세계가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장면이 매우 혼란스럽다. 특히 어린 마리가 나오는 부분에서는 다시 귀를 찌르는 듯한 소리, 날선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첫 장면의 거울에 비친 얼굴이 마리라는 것을 예상해 볼 수 있다.
마리에게 그 동화는 자신의 기억을 되짚어보는 계기인 것이다. 마주하기 싫었던 잊고 싶었던 기억인 것이다. 하지만 침입해오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빠른 속도로 그녀의 깊은 곳으로 침입해 오는 것은 루벤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루벤의 환상이다. 마리가 안내하는 환상적 세계에 감화 받은 루벤은 마리에게 흥미를 느끼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루벤 스스로가 그려낸 이미지. 시각을 제외하고 그녀의 순전히 목소리를 통해 만들어진 마리의 이미지인 것이다. 하지만 마리는 부정하지 않는다. 루벤이 만들어낸 이미지 즉, 그의 시선에 대해 긍정한다. 머리는 빨간색, 눈동자는 초록색이라고 한다. 앞서 얘기한 자아-이상에 대한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부분이다. 그녀는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거울단계의 이상적-자아라는 이미지가 아닌, 타자의 시선에서 재단된 이미지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트라우마적 상처, 그 근본에는 자신의 얼굴이 흉측하다고 멸시의 시선을 던지는 타자의 시선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년기 시절 얼굴을 비추고 있는 거울은 무참히 깨져있는 것이다(물론, 깨진 거울과 관련된 사건이 그녀에게 존재한다). 그녀에게 부재된, 분열을 일으키고 있던 자아-이상은 루벤으로 하여금 회귀한다. 그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이미지, 타자인 루벤의 이미지가 그녀에게 주입되는 것이다.
마리가 책을 읽는 사이에 그는 상상한다. 눈으로 뒤덮인 이곳과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장소에서 빨간 머리한 그녀를 생각한다. 그녀의 얼굴은 알 수 없지만, 아름다울 것이라는 루벤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루벤은 확신을 가지기 위해 어머니에게 물어본다. “어떻게 생겼어요?” “빨강머리랬어요” “눈은 초록색이죠?” “굉장히 예쁘고요?” 아들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는 어머니의 입장에선 그의 환상을 깨트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모호한 말투지만 결국 단정 짓는 말을 하였다. “그래, 굉장히 예뻐”
이제 루벤이 만들어낸 이미지는 실체성을 가진다. 물론 루벤에게만 한정되어 있다. 빨간 머리와 초록색 눈을 가진 아름다운 마리, 그것은 어머니의 긍정으로부터 확실성을 가지게 된다.
확신이 선 순간, 루벤에게 변화는 빠르게 찾아온다. 마리에게 다가가기 위해 냄새는 카펫을 바꾸기도 한다. 그리고 마리에게 더욱 다가선다.
“너무 아름다워요” 그녀가 들어볼 수가 없었던 그 말. ‘아름다움’ 그것은 그녀에게 두려움을 주는 단어이다. 그녀의 트라우마의 중심에는 자신이 못생겼기 때문이라는, 죄책감이 자리 잡고 있다. 못생긴 죄, 흉측한 죄로 인해 스스로를 감추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루벤의 그 말은 깊숙이 숨겨져 있던 마리의 트라우마를 마주하게 한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특별하다. 그것은 그가 앞을 보지 못 한다는 사실이다. ‘블라인드’, 이 눈-멂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 글의 논의가 시선에서 시작했다면, 조금 더 깊숙이 확장하여 시선은 역설적으로 해석해야한다. 영화의 모든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드는 총체성이 있다. 그것은 주인-기표(S1)인 ‘블라인드(시선의 부재)’인 것이다.
<누빈점, 블라인드(시선의 부재)-1 : 의미의 고정점>
루벤과 마리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시선의 부재이다. 이 시선의 부재로 이들의 사랑은 성립된다. 루벤은 자신만의 이미지로 마리를 그리고 그녀는 태어나 처음으로 타자의 사랑을 받게 된다. 그 중심에는 루벤이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 시선의 부재로 루벤이 마리를 사랑할 수 있다고 여긴다(이것은 영화를 극단으로 몰고 가는 오해이다).
계속해서 영화를 지켜보자. 마리에게 마음을 연 루벤은 그녀를 위해(그녀와 더욱 가까이 하기 위해) 몸을 씻는다. 영화 초반, 이 문제로 소동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 장면은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자신의 음밀한 부분, 타자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마리보다 먼저 마음의 문을 연 루벤의 행동에 마리 또한 영향을 받는다. 이런 부분에서 ‘플라시보 효과’ ‘피그말리온 효과’에 대해서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다.
이들의 사랑이야기에 있어 의미를 부여하고 고정시키는 누빈점은 바로 ‘블라인드(시선의 부재)’이다. 이들의 사랑 혹은 만남까지도 블라인드라는 주제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루벤과 마리의 관계는 더욱 깊어져 간다. 루벤은 마리에게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블라인드’를 중심으로 성립된다.
이들의 관계는 영화가 반쯤 진행되었을 때 절정에 다다른다. 자신에게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루벤으로 인해 마리 또한 뚜렷한 변화가 생긴다. 그것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행동이다. 조심스럽게 거울을 보는 그녀의 행동에는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마리의 능동성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거울에 비친 루벤과 마리의 얼굴 또한 인상적이다. 자신의 외상적 실재와 조우하기 시작한 그녀는 루벤과 함께 거울을 바라본다. 그녀에게 있어서 루벤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 볼 수 있게 한다. 결국 이들은 서로를 사랑하며 성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그들의 사이는 가까워졌다.
하지만 영화는 중반으로 흘러갈수록 새로운 요소가 개입된다. 그것은 시선의 개입이다. 기표의 환유적-미끄러짐을 방지하는 누빈점으로서의 ‘블라인드’는 영화의 중심에서 그들의 이야기에 성립된다. 하지만 영화(극)의 특성, 그리고 누빈점의 역설적 본질로 인해 영화는 전혀 다른 국면에 치닫는다.
누빈점은 ‘기의 없는 기표’ 순수한 형식의 텅 빈 기표인 것이다. 이 텅 빈 기표란 결여를 가지고 있는 즉 ‘팔루스’를 상징하고 있다. 이 말은 상징계를 구성하는 주인-기표(S1)은 필연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이런 증후적 독해는 “자본의 한계는 자본 자체”이다. 즉 영화에 총체성을 구현하는 누빈점으로서 ‘블라인드’는 필연적으로 상징화에 실패한다.
<누빈점, 블라인드(시선의 부재)-2 : 누빈점의 역설>
그 시작은 조금씩 그리고 아주 천천히 다가온다. 영화 중간 중간에 볼 수 있는 루벤의 어머니의 시선이 누빈점의 실패를 예견한다. 처음에는 조금씩, 관계가 깊어진 이후에는 노골적으로 루벤과 마리 사이에 자신의 시선을 던진다. 노골적인 시선은 목욕 씬으로부터 시작된다(위에 장면 참고). 문 너머로 몰래 엿듣다 넘어지는 장면 그리고 성관계를 맺던 그 날 밤, 루벤의 어머니는 잠 못 이루며 이들이 내는 소리를 말없이 듣는다. 결국, 그녀는 마리에게 접근한다.
거울을 보고 있는 그녀의 프레임 안으로 루벤의 어머니는 들어온다. 이 모습은 아주 은밀히 그리고 섬뜩하게 침입해오는 유령과 같은 모습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마리의 눈썹을 그려주겠다며 자연스럽게 접근한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무섭기까지 하다.
루벤의 어머니는 마리에게 그녀의 역할에 대해 확실하게 말한다. 역할을 한정지으며 마리의 존재를 경계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 마리에 대한 단순한 질투라고 본다면 조금은 어폐가 있을 수 있다.
루벤의 어머니는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데,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그녀의 건강상의 문제가 뚜렷이 보인다. 그녀의 불편한 다리를 도와주던 지팡이가 하나에서 둘로 늘어난다던지, 휠체어를 타는 모습 등에서 그녀의 병세가 영화의 흐름과 함께 즉, 결말에 다다름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루벤의 어머니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앞을 못 보는 루벤을 지극정성으로 아꼈고 그리고 지켰던 것이다. 하지만 루벤의 시력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자 그녀 또한 두렵기 시작한다. 그것은 ‘진실’이라는 것이다. 의학의 발달로 인해 루벤의 시력이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은 곧, 마리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녀의 어머니 또한 마리에 대한 루벤의 상상에 일조한 책임이 있다. 그렇기에 어머니는 빨간 머리색, 초록빛의 눈동자, 그리고 아름다운 마리의 이미지를 반드시 지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루벤이 눈을 뜨기 전에 마리를 보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는 마리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그리고 역할을 제한하며 그녀스스로가 떠나길 원했다.
루벤 어머니의 침입. 정확히 말하자면 타자의 시선이 다시금 개입된다. 이것은 아름답게 굳어져 가는 영화의 총체성에 금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금이 가기 시작한 성채는 빠른 속도로, 그리고 처참히 무너져 내린다.
총체성을 상징하는 ‘블라인드’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누빈점의 역설, 그것은 결여의 기표로 반드시 상징화에 실패한다고 앞서 말했다. 저지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시선이 다시금 침입해 오고 있다. 마리는 그것을 목도 한다.
그녀는 실재의 침입이 두렵기만 하다. 빨강이 어떤 색인지 정확히 알고 있으며 아름다운 마리를 확신하는 루벤의 모습에 그녀는 절망한다. 지금까지 한 번도 찾지 못했던 행복, 자신을 사랑해주는 루벤과 함께 머물고 있던 그들만의 성은 마치 모래성처럼 흩어져간다. 결국 그 모래성은 아무리 견고해도 파도에 휩쓸려, 바람에 날려 무너져 내릴 운명이다.
그녀는 루벤과 함께 도망치고자 한다. 하지만 모든 선택은 항상 빠르거나 늦다. 루벤과 함께 도망치고자 했던 그녀의 선택 또한 너무 늦은 선택이었다. 결국 루벤은 수술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좋은 일, 반가운 소식은 루벤이 수술을 통해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때 시력은 자신에게 좌절과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단어였지만, 마리를 통해 그리고 발전된 의학을 통해 희망의 대상이 된 것이다. 어둡기만 하고 길고 길었던 고독의 시간을 마리로 인해 버텼고 아름다운 마리의 얼굴을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그는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시력’은 다른 의미이다. 루벤이 시력을 회복한다면 자신이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이 아닌 볼품없고 나이 든 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누빈점으로서 ‘블라인드’는 정확히 영화를 구성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루벤은 ‘블라인드’라는 주인-기표가 해제됨으로써 어떤 반향을 일으킬 것인지 전혀 모른다. 그에게 있어도 아름다운 세상, 완벽한 사랑은 ‘블라인드’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누빈점, 블라인드(시선의 부재)-3 : 붕괴>
글의 진행을 조금 빠르게 하기 위해 이 장면에 있어서는 요약정도만 하고 넘어가겠다.
끝내 마리는 편지 한 통을 남긴 채 사라진다. 그녀의 편지는 어머니에게 전달되었고 루벤은 수술실로 향한다. 수술이 끝난 뒤, 루벤은 끊임없이 마리를 찾는다. 곁에 어머니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의 이름를 애타게 부른다. 불안을 머금은 자신의 곁에, 그리고 세상과 조우할 때 그녀가 함께 하길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떠나버린 마리는 그의 곁에 없다. 그러는 사이 계속해서 쇠약해져가던 어머니 또한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제 그의 곁에 남은 이는 없다. 그를 평생토록 지켜주었던 어머니 ‘캐서린’, 자신을 어둠에서 구원했던 아름다운 그녀 ‘마리’, 블라인드라는 눈-멂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모든 것들을 상실하게 된다.
루벤이 병원에서 회복하는 동안 마리는 그를 찾아온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를 만나고자 했다. 하지만 빅터 박사가 그녀를 가로 막는다.
그녀는 루벤을 만나기 위해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에게 있어 마지막 용기였던 것이다. 시선으로부터 투쟁하기 위한 마지막 용기, 하지만 결국 루벤을 만나지 못 한다. 빅터 박사는 그녀에게 친절을 빙자한 말을 건넨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확실한 오만이 자리 잡고 있다. 루벤과 마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어떠한 판단도 오로지 그들의 몫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관점에서 마음대로 재단하고 판단한다. 물론, 빅터 박사의 행동은 전이된 캐서린의 입장이다. 루벤의 어머니인 캐서린은 죽기 전 빅터에게 자신의 아들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기에 빅터의 행동은 전이된 캐서린의 행동에 가깝다.
결국 타자의 시선에 다시금 재단 된 마리는 루벤을 만나지 못한다. 그리고 어설픈 빅터의 위안은 잔인하다. 그가 말한, 결코 지울 수 없는 상처. 빅터의 의도에 따르면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갈 사람은 루벤이다. 빅터는 전이된 캐서린의 입장으로 보아야 한다. 캐서린이 걱정했던 것처럼 빅터 또한 마리의 얼굴을 보고 난 후 루벤이 크게 상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루벤에게 전해줄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뒤에 이어지는 말에 주목하고 다음 장면을 보아야 한다.
그녀 얼굴에 난 흉터는 지워질 수 있는, 의학이 발달됨으로써 치유할 수 있는 상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안”삼아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얼굴에 난 상처는 결코 치유할 수 없는 상처이다. 곧이어 어릴 적 캐서린이 등장한다. 이야기는 다시 영화의 처음 장면인 깨진 거울과 연결된다.
루벤과의 만남이 좌절되는 순간, 얼굴에 난 상처가 치유될 수 있다고 말하는 빅터의 말이 끝나는 순간 트라우마는 다시 돌아온다. 마리의 어머니는 무슨 문제였는지 그녀를 지독히 싫어했다. 그녀가 겨울을 보는 것을 극히 싫어했던 그녀의 어머니는 거울로 향해 마리의 얼굴을 밀어 붙인다. 영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의 어릴 적 모습은 ‘흉측’이란 단어와 거리가 멀다. 하지만 거울파편이 그녀의 살을 찢고 상처를 남기면서 그녀의 얼굴 또한 망가져 버렸다. 영화에 나오는 안데르센의 동화의 카인은 거울조각이 심장에 박히면서 차갑게 변했다. 그녀는 거울조각이 얼굴에 박히면서, 그리고 그 상흔인 흉터가 남음으로써 세상과 등을 진다.
그것은 빅터의 말처럼 지울 수 있는 상처가 아니다. 심장에 박힌 얼음조각은 발달된 의학으로 치유할 수가 없다. 루벤의 입장에서 마리를 재단하며 그가 받을 상처를 걱정한 빅터는 그와 동시에 마리의 상처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영상에서는 깨진 유리소리와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영상은 페이드-아웃되고 루벤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한 것이다. 처음에는 마리의 목소리가 우리를 안내했다. 이제는 무너진 총체성 앞을 직면할, 잔인할 정도로 현실적인 세계를 목도할 루벤의 목소리가 우리를 안내한다. 그리고 전해지는 말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영원이란 단어”이다. 이것은 영화의 마지막과 연결되는 고리이다. 마지막 논의에서 다시금 설명하겠다.
<눈을 뜨다, 현실적인 너무나 현실적인>
루벤이 고대했던 시간이 찾아온다. 그것은 세상의 빛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 놓아진 것들은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들, 인간적이라면 너무도 인간적인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앞에 놓아진 것들은 형체가 일그러진 혹은 너무나 밝은 세상이다. 그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이 세상은 어쩐지 괴기스럽다. 그가 도수에 맞는 렌즈를 쓰고 주위를 바로 보는 순간, 자신의 두 눈으로 사물을 알아보는 순간 찾아온 것은 어머니 ‘캐서린’의 죽음이다. 그는 눈을 뜸과 동시에 어머니의 죽음을 확인한다. 잔인하지만 이것이 바로 현실적인 세상이 아니겠는가.
홀로 집에 돌아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부재’이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마리는 사라졌다. 그는 눈만 뜨면 모든 것이 행복해질 것이라 믿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블라인드’에서 벗어나 세상을 직시 할 때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사라졌다.
루벤은 마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시도는 매번 실패로 돌아간다. 자신을 마리라고 말하는 많은 여자들 사이에서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시력이 아닌 촉각과 청각, 후각이다. 그가 사랑한 마리는 코끝의 향, 귀를 간질이던 그녀의 목소리 그리고 손에 머문 촉감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난 동화 같은 거 믿지 않아”>
이 글의 첫 물음은 ‘완벽한’이란 것은 어디에 있냐는 질문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영화 마지막 부분에 적용한다면 “아름다운 그녀, 나의 사랑 마리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은 흘러 루벤은 여행을 다녔다. 그곳을 벗어나 이스탄불(마리와 함께 가고자 했던)에 갔으며 사위가 푸르른 초원, 키보다 높게 자란 갈대가 무성한 들판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다.
돌아온 그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아니 아직까지 사랑하고 있는 그녀의 자취가 스며든 책을 찾아 나선다. 그것은 그와 그녀의 첫 매개인 ‘안데르센 동화’이다. 그는 도서관에서 책을 찾는다.
항상 사건은 우연찮게 발생한다(이 우연은 영화의 귀결에 필연적인 요소로 자리 잡는다). 그가 찾아간 도서관에 마리가 근무하고 있었다. 물론 먼저 발견한 사람은 마리다.
그녀는 고민한다. 시력이 회복된 그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앞에 서성인다. 루벤이 그녀를 알아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
“안드르센 동화집이 어느 쪽에 있죠?”라고 물어온다. 이는 분명 마리와의 기억을 더듬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루벤을 안내하고 안데르센 동화를 집어준다. 그리고 루벤을 향해 뒤돌아본다.
하지만 자신을 알아봐 주었으면 하는 기대와는 달리 루벤은 마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것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적막이 흐리고 루벤의 형식적인 인사만 있을 뿐이다.
대화는 종결되고 마리가 루벤 옆으로 스쳐지나가는 순간, 그는 무엇인가 느꼈다. 시각적 감각으로는 잡을 수 없었던, 오직 시력을 제외한 다른 곳에 머물고 있던 그녀를 느낀 것이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음성을 듣고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이 행동들은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방법, 그녀를 찾기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수단이다. 결국 그녀가 자신이 사랑한, 그렇게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던 마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과 함께 돌아가자는 루벤의 말에 마리는 다시금 물어본다. “내가 아직도 예뻐?” “예쁘요”라는 루벤의 대답에도 마리의 마음은 움직이질 않는다. 그 이유로 마리는 더 이상 ‘동화 같은 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루벤이 수술하고 회복하는 사이에 마리가 겪었던, 그리고 마리를 처음으로 보자 놀랐던 그의 모습에서 그녀는 자신이 동화 속 주인공이 될 수 없다고 확신한다. 분명 동화 속 이야기 전개(참고 장면)는 해피엔딩이다. 거울조각으로 얼어붙은 카이의 심장을 게르다의 입맞춤으로 따스하게 녹인다. 그리고 게르다로 인해 심장에 박혀있던 거울조각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루벤과 마리와의 관계는 다르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얼어붙은 마리의 마음은 루벤의 포옹에도 녹지 않는다. 그녀를 조심히 어루만지는 그의 온기로도 그녀의 마음을 녹이지는 못한다. 결국 현실인 것이다.
마리는 “난 동화 같은 거 믿지 않아”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우리는 앞서 ‘<누빈점, 블라인드(시선의 부재)-3 : 붕괴>’에서 보았던 두 장면을 기억해야 한다.
카이가 찾을 수 없었던 영원이란 단어는 마리는 물론 루벤도 찾지 못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마리가 말한 그대로인 것이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것은 루벤이 사랑하는 마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성관계는 없다”>
라캉의 유명한 명제인 “성관계는 없다”는 영화 <Blind>를 정확히 관통한다. 지금까지 보았던 시선, 누빈점(블라인드), 동화와 같은 모든 것들은 저 날카로운 것으로 인해 꿰뚫린다.
라캉이 말한 “성관계는 없다”란 불가능한 진리 혹은 영화에서 보았던 ‘영원’ ‘완벽’이라는 것들의 불가능성이다. 남자와 여자의 합이라고 생각되는 성관계는 환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보았을 때 여성과 남성의 완벽한 동일성은 불가능하다. 만약 가질 수 있는 것이라면 ‘완벽하다’라는 동일성을 가질 수 있다는 환상뿐이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그녀)와 완벽한 합(사랑)을 이룰 수 있다고 상상한다. 기만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 불가능성으로 인해서 인간은 역동을 얻는다. 인간 자체가 기표-주체 즉, 기의 없는 기표로 표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 <Blind>에서 말하는 영원, 사랑하는 마리의 위치란 어디인가. 그것은 바로 환상이다.
마리가 떠난 뒤 루벤이 깨닫게 되는 사실은 바로 그 불가능성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영화 초반, 마리가 우리에게 했던 말이다.
“잘 들어보세요. 이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확히 말하면 실현불가능하다. 오직 환상에서만 ‘가능하다’라는 진실. 그것이 이 영화의 끝에 준비된 (치명적인)보물인 것이다. 우리가 보통 에로스라고 불리는 동일성의 원리는 유년기의 아이의 환상에서 기인한다. 자신의 어머니와 동일화된 그 완벽한 동일성의 기억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하지만 이미 상실해버린 팔루스는 결여의 기표로 그리고 인간이란 존재를 역동적으로 만드는 것으로 남는다.
편지를 통해 알려진 그녀의 아픔, 그것은 바로 ‘시선’이다. 마침내 그녀가 자신을 떠난 이유, 그녀와의 사랑이 불가능한 이유는 루벤은 찾은 것이다. 그토록 원했던, 아름다운 것들을 보기 위해서 노력한 루벤에게 있어 이처럼 역설적인 부분은 또 있을까. 마리의 편지에 적힌 것처럼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 하지만 그것은 미완의 아름다운, 불가능을 내포한 아름다운 것들이다. 완벽한 사랑은 그가 보지 못한 채 더듬은 “손끝으로 본 세상”에 마리는 존재한다.
여기서 새로운 질문이 필요하다. 루벤의 사랑은 무엇인가? 진정한 사랑을 좇는 결국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사랑을 맹렬히 좇는 그의 순수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루벤은 마리가 지닌 고통에 대해서 윤리적 책임을 진다. 마리가 떠나기 전까지 괴롭혔던 그 타자의 시선에는 자신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만다. 그녀가 떠나기 직전, 그는 그녀를 만났지만 결국 그녀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자신의 시선(시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될 수 있다. 하나는 완벽하고 충만한 세계에서 마리와 영원한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리의 아픔에 대한 (현실세계에서의)윤리적 책임인 것이다.
그는 현실세계(상상계)와 작별을 고한다. 그 행동은 고드름으로 자신의 눈을 찌르는 행위다. 이것으로 마리를 괴롭혔던 시선을 단죄하고 모든 것을 망친, 그리고 마리를 만나게 했던 시선의 부재(블라인드)로 다시금 돌아가려 한다.
이제 영화 마지막 시퀀스이다. 이 장면은 루벤이 마리에 대해 상상하는 장면으로 이 전 장면과 비교할 수 있다.
그 전에 상상했던(그림1)과 다르다. 그것은 마리의 머리색이다. 분명 이전에는 빨간색 여자가 그의 상상 속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고드름으로 눈을 찌른 뒤, 마지막 장면에 와서는 진짜 마리의 모습과 가까운 여자가 등장한다. 그렇다. 이제 빨강 머리와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허상의 마리가 아닌, 탈색된 금발에 가까운 마리가 등장한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평화로운(오디오가 주목할 만하다) 곳에서 루벤은 미소 짓고 있다. 비로소 그의 환상은 완성된 것이다.
“성관계는 없다”라는 라캉의 명제처럼 현실세계에서는 완벽한 사랑이란, 영원한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이 존재하는 곳은 자신이 상상한 허상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루벤이라는 청년이 그토록 순수하게 여겨지는 부분은 바로 이 비극성 뒤에 놓인 역설적인 부분인 것이다. 루벤은 순수하게 사랑했다. 루벤은 마리를 위해 자신의 두 눈을 포기 할 수 있었다. 그곳이 현실성이 없는 허상의 세계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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