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모 주간지에서 어떤 칼럼을 본적이 있다. 칼럼의 내용은 이런 것인데, <응답하라1994>라는 케이블방송 드라마가 높은 시청률과 인터넷 담론을 지배하는 이유이다. 칼럼 저자는 그 이유를 단순히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정취라는 개념으로 보지 않았다. 저자는 “‘현재의 결핍’을 자양분”삼아 과거로 회귀하고자 한다고 했다. 좋았던 그 시절, 혹은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아, 옛날이여”라고 부를 그런 과거를 말이다.
과거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보다 잿빛으로 뒤덮일 미래를 걱정하는 시대가 찾아 온 듯하다. 응답하라 시리즈를 위시한 복고물은 그런 우리의 불안을 자극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하나를 던질 수 있겠다. 우리는 과거에 무엇을 놓아두고 왔던가. 혹은 무엇을 놓쳤는가, 잃어버렸는가.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물었을 때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그래 내가 바라고 있는 것, 그것은 무엇이다”라고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있는가 말이다.
사실 우리는 과거의 ‘유물’을 정확하게 지목하지 못 한다. 과거의 유물은 항상 그것이라는 비인칭 대명사로 남는다. 불분명한 그것,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거나 향수에 젖게 만든다. 모호한 형상을 하고 선 말이다.
과거로 회귀해 잃어버린 무엇을 찾는 여정, 이것이 우리의 필생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가 가지고 있는 대중성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상실의 시대는>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러 작품 중에서도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이 소설의 작품성은 간혹 가볍게 취급당하고는 한다. 혹은 무라카미의 대부분의 작품이 섹슈얼리티를 가미한 대중소설이란 평가를 받기도 한다. 물론 잘못된 평가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의 주요흐름은 앞서 얘기했던 ‘잃어버린 유물’을 찾는, 우리의 필생의 과정과 소설 <상실의 시대>를 같은 궤로 놓고 볼 것이다. 글쓴이는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보편성을 보았고 이것이 하루키 작품(상실의 시대)의 대중성을 설명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상실의 시대라는 작품은 애도의 글이다. 애도란, ‘사람의 죽음을 슬퍼함’이라는 단순한 사전적 정의가 아니다. 애도의 함의는 ‘애도는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애도를 통해 즉 소급적 상징화를 통해 기억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리워하고 결여를 채워나가는 것이다. 하루키 작품은 바로 상실의 아픔, 죽음, 부재가 뒤섞인 젊은 날의 ‘나’에 대한 애도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 글로써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역동성을 얻는다.
기억의 본질이 망각이라 한다면 웃기는 소리일까.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망각의 늪에서 소중한 것들을 하나하나 건져 올리는 행위로 인해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고 미래의 내가 만들어진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고 변해간다면, 꿈 많은 청년에서 현실 감각 있는 중년의 남자로 변해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것은 지난날의 기억을 소급적으로 상징화(의미)하며 변화를 주는 것이다. 의미는 항상 소급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변하는 시점은 과거를 소급적용하는 곳에서 시작된다. “내가 왜 그랬지?” 혹은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는 하지 않겠어”라는 다짐들 속에 우리는 변화한다. 그것은 항상 과거로부터 시작된다.
<상실의 시대>의 시작은 정확히 그런 것이다. 기억의‘소급적 상징화’라는 여정의 끝은 항상 미래의 내가 위치한다. 왜냐하면 다시 뒤돌아 봤을 때에는 항상 이미 지난 후이기 때문이다.
<기억의 소급적 적용>
소설의 첫 머리는 이렇다. “그때 서른일곱 살이던 나는 보잉 747기의 한 좌석에 앉아 있었다.” 함부르크 공황으로 향하는 비행기는 와타나베가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함부르크 공황으로 보아 독일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여행’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비행기창 밖으로 보이는 북해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보며 와타나베는 생각한다.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는 여러 길목에서 잃어버린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잃어버린 시간, 죽었거나 또는 사라져 간 사람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추억들, 그리고 그 모든 상실의 아픔들.(14)
지난 과거를 생각하고 있으며 왠지 모를 ‘서글픈’ 감정은 누구나 겪어봤을 것이다. 돌이킬 수 없기에, 과거이기에 더욱 그렇다. 가끔 그런 감정을 못이길 때면 와타나베처럼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괜찮아요, 고마워요. 왠지 좀 서글퍼졌을 뿐인데, 이해하겠어요?”(14)
현기증이 일 듯한 그런 생각에 우리는 입술을 깨문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으며 하나하나 곱씹어 본다. 이미 지난 기억이고 몇 번이고 곱씹어도 항상 다르게 다가온다. 이번에는 그 기억은 와타나베를‘서글프게’만들었을 뿐이다.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계속 미끄러진다. 와타나베 또한 그 미끄러짐을 통해 계속해서 회상한다.
기억을 더듬는 행위는 미끄러짐의 연속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하여금 우리는 뜻밖의 풍경을 찾게 된다. 그것에 대한(기억에 대한) 대한 벤야민의 묘사를 인상적이다.
“이때 우리들이 침잠하는 무의지적 기억의 심층에서는, 기억의 여러 계기들은 우리들에게 더 이상 개별적 이미지로서가 아니라, 마치 그물의 무게를 보고 고기가 얼마나 잡혔는가를 아는 어부처럼, 무정형적이고 이미지가 없는 상태로 또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도 무게의 어림짐작으로 떠오르는 전체적 이미지로서 부각되는 것이다.”(발터벤야민의 문예이론, 117)
망각이라는 바다에 원하는 기억을 건지기 위해 그물을 던진다고 생각해보자. 하지만 그물에 걸리어 올라오는 것들은 내가 원했던 ‘그’ 기억은 물론이고 미처 의식하지 못한 다른 기억들까지 올라온다. 아니면 원하는 기억은 없이 다른 것들만 올라올 때도 있다. 이렇듯 기억이라는 것은 원하는 대상만을 찾을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무엇을 회상할 때에는 그것과 관련된 다른 것들도 포함되어 올라온다. 가끔은 원하는 기억을 찾을 수 없어 이것저것 생각해보다 미처 의식하지 못한 행복한 기억(혹은 불행한)이 그물에 걸려 올라오곤 한다. 와타나베 또한 마찬가지이다.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버린 지금에 와서도 나는 그 초원의 풍경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가 있었다. …… 10월의 바람에 억새풀 이삭이 한들거리고 있었으며, …… 그녀의 머리카락은 잔잔히 흔들고는 잡목 숲으로 빠져나갔다. (15)
지금의 나로선 그녀의 얼굴을 바로 떠올릴 수조차 없게 됐다. 내가 지금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는 건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배경뿐이다. (16)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기 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17)
나오코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면서 정작 그녀의 얼굴은 기억나질 않는다. 그녀와 함께 했었던, 그 당시에는 무신경하게 보았던 초원의 풍경만이 선명히 남아있다. 벤야민의 말처럼 망각의 바다에는 내가 원했던 것 이외에 수많은 것들도 함께 포함되는 법이다. 그리고 그게 기억의 본질일지 모른다.
그렇기에 침잠해 있는 기억을 꺼내어 올리는 일이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고통과 인내를 요하고 때론 강한 힘이 필요하다. 벤야민은 그것을 “사유하는 육체의 전 근육에 의한 활동”이라고 표현했다면, 우리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잃어버린 무엇을 찾는 여정’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나는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무슨 일이든 글로 써보지 않고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17)
와타나베 또한 그 여정을 향해 사유의 근육을 움직인다. 그것은 기록하는 일, 글로 남기는 것이다. <상실의 시대>는 기억을 찾는 사유의 운동, 혹은 ‘나’에게 바치는 애도의 행위이다.
상실의 시대의 첫 흐름을 이렇게 해석한다면 와타나베와 스튜어디스가 나눴던 대화는 인상적이다. 그녀는 마치 함부르크 공황에 내리는 와타나베의 끝없는 여정, 상실을 받아들이고 상징화하는 애도의 여정을 예견한 듯하다.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를 빌겠어요. 안녕”
“안녕”하고 나도 인사했다. (14)
<죽음>
이 여정이 시작됨과 동시에 마주하는 것은 죽임이다. 이미 ‘1장 : 18년 전 아련한 추억 속의 나오코’마지막에 어렴풋이 <상실의 시대> 전체를 뒤덮는 ‘죽음’의 손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내 안에 그녀에 관한 기억이 언젠가는 희미해져 가리라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나를 향해 자기를 잊지 말아 달라고 간절히 호소하지 않았던가.
“나를 언제까지라도 잊지 말아줘. 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걸 기억해 줘”하고. (25)
그리고 1장이 지나고 숨 돌릴 틈 없이 죽음은 자신의 형상을 드러낸다. 실질적으로 이 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2장 : 죽음과 마주했던 열입곱 살의 봄남’에는 와타나베와 나오코 사이의 결정적인 사건이 있다. 그것은 키즈키의 죽음이다.
와타나베와 나오코 양자에게 소중했던 인물이었던 키즈키의 자살은 소설 마지막까지 따라붙는다. 언제나 싱그러운 열일곱의 나이로서의 그로 말이다. 죽은 자는 변하지 않고 삶을 살아가는 자만이 변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 그려지고 있는 게 이 소설이다.
나오코는 키즈키의 죽음으로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고 그것을 계기로 깊은 수렁에 빠진다. 아마 그곳은 딛을 곳이 없는 낭떠러지와 같은 곳일 게다. 와타나베 또한 키즈키의 모든 자극에 무감각적으로 관조하는 관찰자로 살아간다.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주인공의 특징이다. 흔히 ‘모던보이’라고 불리는 인물들은 특별한 기호성을 가지지 않은 채 살아간다.
키즈키가 죽고 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한 10개월 동안,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 속에서 나 자신의 위치를 분명하게 정할 수 없었다. (48)
나는 특별히 공부를 하지 않아도 들어갈 듯싶은 도쿄의 사립대학을 택해 시험을 보았고 특별히 어떤 기쁨도 없이 입학했다. (같은 쪽)
모든 사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 그것뿐이었다. (같은 쪽)
키즈키의 죽음으로 와타나베는 또한 어떠한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정신분석에서 흔히 상징계적 죽음이라 부르는 것이다.
열일곱 살의 5월 어느 날 밤에 키즈키를 잡아간 죽음은, 그때 동시에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같은 쪽)
흔히 죽음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죽음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실제죽음과 같은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두 번째 죽음이다.
‘두번째 죽음’, 즉 자연의 순환 운동의 근본적 무화는 오직 이 순환 운동이 이미 상징적 그물망에 사로잡혀 그 속에 새겨지고 상징화되어/역사화 되어 있다는 한에서만 생각해볼 수 있다. 절대적 죽음 곧 ‘세계의 파괴’는 항상 상징적 세계의 파괴이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220)
와타나베의 의미의 그물망을 찢어놓은, 그에게 상징성을 부여하던 대타자로 불리는 세계의 붕괴는 그를 ‘모던보이’로 만들어 놓았다. 특히 이 절대적 죽음, 세계의 파괴는 나오코에게서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나오코에게 두 번의 상실이 찾아온다. 키즈키의 죽음이 두 번의 상실 중 하나라는 것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키즈키의 죽음이 도래하기 전, 나오코는 이미 소중한 한 사람을 이미 잃은 뒤였다.
“(……)그 언니가 왜 자살했는지 누구도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지. 키즈키의 경우도 마찬가지야. 나이도 열일곱밖에 안 되었고, 그 직전까지도 자살할 것 같은 눈치는 전혀 없었고, 유서도 없었고…… 똑같지?”(228)
언니의 자살과 키즈키의 자살이 서로 연결되면서 나오코는 스스로를 세상과 격리시키는 극단적인 방법을 취한다.
“‘난 다만 이제 누구도 내 안으로 들어오길 원치 않을 뿐이에요. 이젠 누구에 의해서도 어지럽혀지기 싫을 뿐이에요.’”(428)
누군가가 자신의 곁을 떠나간다는 것, 그것은 때론 견딜 수 없는 고통과도 같다. 그리고 떠나간 이가 나의 세상에 있어 의미를 부여하는 대타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의 부재의 빈자리는 더더욱 클 것이다.
죽음이란 요소는 <상실의 시대> 전체를 뒤덮는다. 나오코와 와타나베는 물론, 그들 주위에 관계 맺고 있는 주변인물 또한 그렇다. 미도리의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소설이 전개에 맞춰 죽음을 맞이한다. 나가사와 선배의 애인이었던 하츠미 또한 자살을 선택한다. 하츠미의 자살은 와타나베와 나가사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레이코는 조금 다른 성격의 죽음과 결부되어 있다. 정신요양원에서 나오코의 룸메이트였던 그녀는 앞서 말한 두 번째 죽음으로 인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일련의 사건들로 자신의 꿈과 가정 모두 잃은 그로서 세상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이렇듯 소설 <상실의 시대>는 죽음의 시대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죽음이 도처에 깔려있다. 하지만 소설의 핵심을 죽음이라고 표현한다면 의미의 범위가 좁아 질 수 있다. 소설의 제목이 <상실의 시대>인 것은 매우 적확해 보이는데, 그 이유는 이 상실(喪失)이 가진 넓은 의미 폭 때문이다.
喪失상실 (喪 잃을 상, 失 잃을 실, 놓을 일)
종래(從來) 가지고 있던 기억(記憶), 자신(自身), 권리(權利), 신분(身分), 능력(能力), 자격(資格) 등(等)을 잃어버림 (네이버 사전)
우리는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많은 것들을 상실한다. 그것은 어느 것 하나에 국한되어 있는 게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아니 내가 의식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상실이라는 자기부정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죽음은 삶의 이면이 아닌 삶 자체인 것이다. 변증법적 사고처럼 ‘그것은 이미 그것인 것이다’
“삶의 한복판에서 모든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던 것이다”(50)라는 와타나베의 말은 소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즉, 자신이 관계 맺고 있는 누군가(나오코, 키즈키, 레이코, 나가사와, 하츠미)는 반드시 상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상실을 중심으로 그들의 관계는 구축되는 것이다.
상징계의 견고한 총체성은 그 결여(구멍)을 중심으로 세워진다. 그리고 그 구멍은 필연적으로 총체성을 무너뜨린다. 결여를 내포하지 않은 주체란 없고 그런 대타자 또한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상실을 통해서 모든 것이 구축되는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
그리고 난 지금보다 더 강해질 거야. 그리고 성숙해질 거야. 어른이 되는 거야. 그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지.
난 지금까지 그럴 수만 있다면 열일곱, 열여덟인 채로 있고 싶었어.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는 십대 소년이 아니니까. 난 책임을 느낀다. 아아, 기즈키, 난 너와 함께 있었을 때의 내가 아냐. 난 이미 스무 살이 된 거라구. 그래서 난 계속 살아가기 위한 대가를 치러야만 해. (379)
와타나베는 어른이 된다는 것은 책임을 느끼는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책임을 느끼는 건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와타나베가 말한 대가는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견디고 받아들여야 어른이 되고 성장할 수 있는 것일까. 그 해답은 소설 말미, 와타나베와 레이코의 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와타나베가 만일 나오코의 죽음에 대해서 뭔가 아픔 같은 걸 느끼고 있다면, 와타나베는 그 아픔을 앞으로 인생을 꾸려 가는 동안 계속 간직하면 되는 거야. 그래서 만일 배울 게 있다면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면 돼. (……) 그러니 괴롭겠지만 좀 강해져야 해. 좀더 성장해서 어른이 돼야 하는 거야. 난 와타나베에게 그 말을 하려고 그곳을 나와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야. 그 먼 길을 그 관 같은 전철을 타고서.”(433)
레이코는 와타나베에게 강해져야 한다고, 그리고 어른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상실을 받아들이고 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상실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고 깨닫는다. 마치 그녀를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는 단순한 연애소설의 이치와 같은 것이다.
와타나베에게 진심어린 말을 전하는 레이코도 불완전한 사람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레이코 또한 상징적 죽음을 경험한 이다. 와타나베에게 어떠한 충고를 한다고 해서 그녀가 와타나베보다 완벽한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레이코 또한 이 계기로 인해 아미료(요양원)의 세계를 깰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 둘을 미래로 내모는 것은 나오코의 죽음(상실)이다.
와타나베와 레이코는 나오코의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것은 이 글 서문에서 밝힌 애도의 행위와 유사하다. 애도는 산 사람들을 위한 행위, 죽은 자를 상징화 시키는 행위이다. 소설에서 애도가 엿보이는 장면을 보자.
“쓸쓸한 장례식이었어요” 하고 나는 말했다. “너무 조용하고, 사람도 적었고, 그 집 사람들은 나오코가 죽은 걸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에만 신경 쓰고 있고. 아무도 주위 사람들에게 자살이란 건 알리고 싶지 않았던가 봐요. 사실 장례식엔 가지 말았어야 했던 것 같아요. (429)
나오코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런 나오코의 자살은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불순한 행동, 세계에서는 인정될 수 없는 행위였다. 나오코의 죽음 앞에서 그녀의 부모는 딸아이가 자살을 했다는 걸 애써 감추려고 했고,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지나갔으면 했다. 소설배경이 60~70년대 일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이런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통념은 그 시대의 일반적인 사고라고 볼 수 있다. 나오코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정확히 표현하면 자살을 상징화 하지 않고 은폐하기 급급한 상황에서 그녀라는 존재의 상실은 온전히 기록될 수가 없었다.
와타나베와 레이코에겐 나오코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필요했다. 그녀를 그 자체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애도의 작업이 말이다.
“지금부터 둘이서 나오코의 장례식을 치르는 거야”하고 레이코씨가 말했다. “쓸쓸하지 않은 장례식을”(434)
“레이코 씨는 이어서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을 연주하고, <예스터데이>를 치고, 다음엔 <미셸>과 <섬싱>을 치고, <히어 컴즈 더 선>과 <풀 온 더 힐>을 연주하였다.(434)
그리고 그녀는 기타용으로 편곡된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와 드뷔시의 <월광>을 정성스럽고 아름답게 연주했다.
“이 두 곡은 나오코가 죽은 뒤에 마스터한 거야”하고 레이코씨는 말했다. “나오코의 음악적 취향은 마지막까지 센티멘털리즘이란 지편을 떠나지 못했어.”(435)
그녀는 가끔 눈이 감기도 하고 가볍게 고개를 흔들기도 했으며, 멜로디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436)
“좋아, 와타나베. 이젠 쓸쓸한 장례식 같은 건 깨끗이 잊어버려”하고 그녀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장례식만을 기억해, 멋있었지?(436)
마치 아미료에서 그들이 기타 치며 즐겼던, 행복했던 그때로 돌아간 듯하다. 다만 나오코는 죽음으로 영원히 그들의 기억 속에서만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의 ‘쓸쓸하지 않은’ 장례식은 온전한 그녀(나오코)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제스처로 보인다. 하지만 엄밀히 보면 나오코를 위한 제스처가 아닌, 그들을 위한 것이다. 자살이라는 그녀의 극단적인 선택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녀,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이들에게 나오코에 대한 기억은 은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키즈키의 죽음이 나오코를 따라잡았던 것처럼, 나오코의 죽음도 그들을 항상 쫓아다닐 것이다. 만약 나오코가 키즈키의 죽음을 상징화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들도 계속해서 나오코의 자살을 은폐하려고 한다면, 영원히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상실을 수긍할 수 있는 단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성숙해지는 것이다. 어느 한 시점을 정점으로 성장이 멈추는 것이 아니다. 상실이 계속되는 한, 상실을 극복하고 삶을 지향할 수 있는 한에서 우리는 성장할 수밖에 없다. 성장 그것은 필연적으로 상실이 바탕 되어야 하는 것이다.
상실의 시대에서 와타나베의 분열적인 모습은 어른이 되어가는 그 혼란스러운 과정에 연유한다.
“나는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인가?”(324)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확실치 않았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조차 없었다. 그저 어디론가 가지 않을 수가 없어서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362)
난 대체 앞으로 어떻게 되어 갈 것인가, 나를 둘러싼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404)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그곳이 어딘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랄 것도 없이 걸음을 재촉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다.(441)
우리가 늘 묻는 질문 아닌가. 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게 옳은 걸까. 내가 선택한 이것이 최선인가. 이 끝도 없는 자기-분열적 질문은 우리에게 내장된 프로그램처럼 계속해서 반복한다. 이 질문이 끝날 시점이란 게 있을까. 사실이 질문은 삶과 연관되어 있다.
인과관계, 원인-결과라는 것들이 소급적으로 적용되었을 때에만, 그 말은 즉 결과가 도출 되었을 때만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결국 그것들은 소급적 귀결인 것이다.
이상의 결론까지 도출했으면 <상실의 시대>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와타나베의 분열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현재 걷고 있는 이 길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의미를 부여하고 정오를 판단하는 것은 미래의 ‘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내가 하는 일이 옳은지 물어봐도 돌아오는 것은 메아리뿐이다. 레이코와 와타나베가 애도를 통해 나오코의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이 질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이제 나오코가 아닌 새로운 사람이 곁에 있고 계속해서 이어가야할 삶이 기다리고 있다. 그곳은 새로운 선택의 연속이다. 이 글에서는 분석하지 않았지만 미도리라는 존재의 의미, 세계와 세계를 잇는 커넥터와 같은 역할이다. 여기서 세계와 세계는 아미료가 대표하는 세계(상징계에서 배제된 세계)와 현실사회(제도적, 관습적 통념이 얽혀있는 흔히 우리가 말하는 규범적 사회)를 뜻한다. 와타나베는 키즈키의 죽음과 나오코가 있는 아미료를 갔다 온 뒤부터 혼란을 겪곤 한다. 모든 것이 정지한 듯한 세계와 모든 것이 과잉된 스펙터클 세계. 이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게 혹은 현실사회(상징계)와 연결해주는 인물이 미도리인 것이다.
그녀와 둘이서 윈도 쇼핑을 하며 걷고 있으려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자연스럽던 거리의 광경이 제법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미도리를 만난 덕분에 이 세계에 약간 정이 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하고 나는 말했다.(271)
‘우리는 과거에 무엇을 놓아두고 왔던가. 혹은 무엇을 놓쳤는가, 잃어버렸는가.’
우리는 다시금 이 질문으로 돌아간다. 이 질문이야 말로 ‘상실의 시대’를 구성하는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인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모두들 기억을 가지고 있으며, 그 속에는 미처 챙기지 못한 ‘대상a’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죽은 자의 기억으로 변하지 않을 무엇이다. 변하는 것은 산 자들의 몫이라는 건 이미 여러 번 강조했다.
우리가 때론 슬픔을 느끼기도, 행복을 느끼게 하는 이 기억의 숭고함은 바로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분명 과거에 있었던 어떤 것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의미는 계속해서 변화한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 상징화하는 것은 오로지 삶을 영위하는 이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상실의 시대>는 바로 그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숭고한 기억’은 우리로 하여금 역동하게 만드는 필연적인 부분이다.
그렇다면 나오코가 와타나베에게 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 그 대목을 다시금 생각해 봐야한다.
“나를 언제까지라도 잊지 말아줘. 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걸 기억해 줘”
기억에 대한 약속. 그것은 바로 존재에 대한 약속이기도 하다. 아마 나오코는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걸 어느 정도 예상한 듯하다. 그렇기에 자신의 기억에 대한 당부, 존재를 각인시키는 말을 한 것이다.
우리 또한 삶에서 그렇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길을 걸어가는 순간에도 누구인지 모를 타자와 조우한다. 그리고 우리는 존재조차 기억하지 못할 타자들 사이에서 삶을 영위한다. 그렇게 많은 만남 속에서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에게 반드시 전해야 하는 말이 있다면 바로, 나오코의 저 말이 아닐까.
훗날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 나의 존재로 하여금 당신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이자 사랑일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을 로맨스라고 말하는 것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로맨스, 기억에 대한 로맨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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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집 딸래미랑 한거 밖에 기억안나내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