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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시스 아일스 <살의> (1931)
추리 소설의 여러 장르 중에 '도서추리'라는 것이 있다. '도서'라는 단어는 도치서술(倒置敍述)의 줄인 말이다. 글자 그대로 일반적인 추리소설의 서술방식을 뒤집어서 전개하는 형태의 추리소설이다. 도서추리소설과 일반추리소설을 비교하면 몇 가지 차이가 나타난다. 그 차이점은 모두 일반추리소설의 전개방식을 뒤집음으로서 발생하는데, 이런 점들을 도서추리소설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작품의 주인공은 탐정이나 관찰자가 아닌 범인이다.
2. 작품의 흐름은 범인의 입장에서 전개된다.
3. 범인이 범죄를 구상하고 실행하는 과정, 이후에 형사와 공방전을 벌이는 모습이 기술된다.
4. 밀실이나 초자연 같은 불가능한 상황의 설정을 배제한다.
5. 범인은 완전범죄를 노리고 철벽같은 알리바이를 만들지만, 형사의 끈질긴 추적으로 결국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다.
6. 범인을 추적하는 형사의 입장이 아니라 형사에게 쫓기는 범인의 내면을 묘사한다.
요약하자면, 일반적인 추리소설은 대부분 범죄가 발견되는 시점을 시작으로 한다. 그리고 탐정 또는 주위의 관찰자를 주인공으로 범인을 추적해나간다. 반면에 도서추리소설은 범인이 범죄를 구상하는 단계에서 시작한다. 그러면서 범죄의 구상과 실행, 추적하는 형사와의 대결까지 각 장면마다 범인의 심리를 묘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범인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추리소설
이런 도서추리소설의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크로프츠의 <크로이든발 12시 30분>, 리처드 힐의 <백모살인사건>, 프랜시스 아일즈의 <살의>를 꼽을 수 있다. 흔히 이 세 작품을 가리켜서 '도서추리소설의 3대 명작'이라고 표현한다. 좀더 현대로 와서는 로렌스 샌더스의 <제 1의 대죄>도 도서추리의 형식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몇 가지 세부적인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들은 모두 위의 특징을 담고 있다. 이유없는 연쇄살인범을 다룬 작품인 <제1의 대죄>를 제외하면, 다른 세 작품의 범인들은 모두 친인척을 범행대상으로 삼는다는 것도 재미있는 공통점이다.
또 다른 공통점으로는 범인의 범행과정을 자세하게 서술한다는 점이다. <크로이든발 12시 30분>에서는 범인이 독약을 손에 넣기 까지의 과정을 세밀하게 다루고 있고, <백모살인사건>에서는 독을 가진 식물과 독약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펼쳐 놓는다. 하지만 이런 전문적인 이야기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마도 독자가 범인의 입장이 되어서 그의 내면을 따라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제 1의 대죄>를 제외한 다른 세 작품에서 살인의 수단으로 약물과 독약을 사용한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중에서 <살의>를 가장 흥미롭게 읽었다. <백모살인사건>이 약간 우스꽝스럽고 <크로이든발 12시 30분>이 너무 진지하다면, <살의>는 딱 그 중간 지점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살의>에는 30대 후반의 의사 에드먼드 비클리 박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개업의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사사건건 자신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부인 줄리아와 함께 살고 있다. 줄리아는 비클리보다 8살이 많다. 애초에 줄리아는 비클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결혼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친정생활을 견딜 수 없어서 도망치듯이 결혼한 것이다. 사랑만 가지고 결혼을 할 수는 없지만, 사랑이 없는 결혼생활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클리가 줄리아와 결혼한 것은 일종의 열등감 때문이었다. 비클리의 아버지는 작은 도시에서 약국을 운영했다. 비클리는 아버지 밑에서 약국일을 돕다가 의학에 흥미가 생겨서 의과대학에 진학한 것이다.
의사가 되었다고 해서 신분상승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보잘것 없었기 때문에 신분상승을 위해서는 그럴듯한 집안의 여자와 결혼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의 딸인 줄리아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이런 결혼생활이 제대로 유지될리가 없다. 줄리아는 마을 주민들이 모인 파티장소에서도 비클리에게 명령조로 말을 하고 비클리는 그것을 거역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속으로 '개한테도 저런 투로 말하지는 않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클리는 줄리아를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한다.
그는 조심스럽게 계획을 세운다. 절대로 발각되지 않는 방법을 발견할 때까지는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된다. 형사의 무능함에 의지해서도 안된다. 사고사 또는 자연사처럼 보여야지 절대로 타살로 보여서는 안된다. 이 살인이 성공적으로 끝나게 되면 자신은 행복해진다. 살인도 경우에 따라서는 살인이 아니라 자비로운 구원이 되는 것이다.
비클리는 희망과 함께 두려움도 느낀다. 그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크나큰 힘에 대한 두려움이다. 사람을 살리는 일도 죽이는 일도 모두 자신의 손안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매일 부인의 경멸 속에서 살아오던 그가 사실은 이렇게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는 사나이 였다니!
살인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사람의 심리
작품의 흐름을 범인의 입장에서 서술해서인지, 이런 작품을 읽다보면 범인의 입장을 자꾸 동정하게 된다. <살의>에서도 마찬가지다. 비클리는 공포에 사로잡혀 몸을 떨고 초조해하며 안절부절 못한다. 그런가하면 형사들의 날카로운 공격이 계속되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살아있는 한 희망도 있는 법이니까.
도서추리의 매력은 어디에 있을까. 이런 작품을 읽다보면 독자들은 범인이 누구인지 고민할 필요도 없고, 어떤 트릭을 사용하는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 도서추리의 매력은 범죄를 구상하고 실행하는 범인의 내면을 읽어가면서, 범인과 형사가 맞서서 교묘하게 벌이는 심리전을 바라보는 것에 있다.
또 한가지, 범인이 (거의) 완벽하게 만들어놓은 완전범죄를 형사가 어떻게 무너뜨리느냐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살의>, <크로이든발 12시 30분>등의 작품에는 이런 재미가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