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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 디버 <본 컬렉터> (1997)
살인사건 (특히 연속살인사건)이 발생하면 탐정은 이를 추적한다.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서 필요한 여러 가지 요소들 중에서, 탐정이나 수사관이 가진 육체적인 능력은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할까?
고전추리소설의 탐정들은 거의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면서 범인을 추적해갔다. 응접실에 앉아서 추리하고, 필요하다면 거리로 뛰쳐나가서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수사방식은 점점 사라져간다. 살인이 보다 지능적이 되어가고, 범죄가 대형화되면서 거기에 대응하는 수사진들도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수사진들 전체가 거리를 뛰어다닐 필요는 없다. 그중 두뇌역할을 하는 사람은 보고를 받고 추리하고 지시를 내린다. 그 부하직원들은 손발이 되어서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전신마비탐정 링컨 라임 시리즈
미국작가 제프리 디버는 여기에 딱 적합한 인물을 창조해냈다. 1997년에 발표한 <본 컬렉터>의 주인공 링컨 라임이 바로 그 인물이다. 링컨 라임은 사고로 전신이 마비된 채 침대에 누워서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한다. 라임은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데는 지장이 없지만 스스로 움직이지 못한다. 그가 움직일 수 있는 부위는 오직 왼손 약지 하나뿐이다. 뺨이 가려워도 직접 긁을 수 없다.
라임은 예전에 뉴욕시경 과학수사국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현장감식 도중에 사고를 당해서 척추뼈 중에서 제4경추가 박살나는 중상을 입으며 전신마비환자가 된다. 그는 수사관이기 이전에 뛰어난 과학자이기도 했다. 특히 각종 첨단장비를 활용한 증거물 분석에 있어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이 정도면 전신이 마비되더라도 충분히 ‘두뇌’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라임은 사고 이후에 뉴욕시경에서 은퇴하고 뉴욕의 고급맨션 침대에 누워서 주로 생각을 하면서 보낸다. 가끔씩은 자살을 꿈꾼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죽일 권리가 있다’라고 말하면서.
그러던 어느날 뉴욕에서 잔인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비즈니스를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온 남녀가 실종되었는데 그 중 남자가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남자는 땅 속에 생매장되었고 땅 밖으로는 손목과 손이 노출되어 있다. 특이한 점은 손가락 하나의 살점을 모두 발라내서 뼈를 드러나게 한 후에 거기에 여자의 반지를 끼워두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하자 라임의 예전 동료였던 담당 수사관은 부하들과 함께 라임을 찾아온다. 현장감식과 증거물에 대한 조언을 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처음 시체를 발견한 순찰계 여경 아멜리아 색스도 합류한다.
이제 링컨 라임은 두뇌가 된 것이다. 지시를 내릴 손발들도 갖추어졌다. 라임은 수사관들이 가져오는 증거물과 정보를, 자신의 두뇌를 이용해서 분석하며 연쇄살인범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원작과 영화의 공통점과 차이점
이 작품은 이후에 덴젤 워싱턴(링컨 라임), 안젤리나 졸리(아멜리아 색스) 주연의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진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캐스팅은 상당히 적절했다고 본다. 덴젤 워싱턴은 침대에 누워서 무기력하지만 정신만은 살아있는 캐릭터의 역할을 눈빛과 말투로 해냈다.
안젤리나 졸리 역시 수사과정 중에 링컨 라임에게 때로는 반항하면서도 연민을 느끼는 역할을 한다. <양들의 침묵>의 조디 포스터를 제외하면, 여형사역으로 안젤리나 졸리 만큼 적절한 여배우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연쇄살인범을 다루었다는 면에서 <양들의 침묵>과 <본 컬렉터> 사이에는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두 작품에서 두 명의 여형사는 모두 과거의 상처를 가지고 있고 그 상처를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 또다른 공통점은 중년의 남성과 젊은 여성이 일종의 콤비를 이루어서 연쇄살인범을 추적한다는 것이다. <양들의 침묵>에서도 한니발 렉터가 두뇌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한니발 렉터는 구속복을 입은 채로 정신병동에 수감되어 있다. 그 역시 신체의 자유를 제한 받고 있는 상태에서 외부에서 가져오는 정보를 듣고 두뇌만으로 조언해주는 입장이다.
차이점도 있다. 한니발 렉터는 분석심리학자로서 범인의 심리를 꿰뚫어보려 한다. 반면에 링컨 라임은 과학자이기 때문에 증거물에만 관심을 갖는다.
“범인의 동기가 무엇일까요?”
“동기? 난 동기에는 관심없어.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오직 증거물 뿐이야”
한 수사관의 질문에 링컨 라임은 이런 대답을 던진다. 두 영화 모두 탄탄한 스토리와 구성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캐스팅도 적절했지만, 그 이후의 흥행이나 비평에서는 다소 다른 길을 걸어갔다. <본 컬렉터>의 경우 원작의 설정을 비교적 많이 바꾸어놓은 것이 그 원인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한다.
라임-색스 콤비가 벌이는 활약 그리고 미래
다시 원작으로 돌아오자. <본 컬렉터>에서 데뷔한 링컨 라임은 이후로도 시리즈 내에서 아멜리아 색스와 손을 잡고 수많은 사건들을 해결한다. 뉴욕시경은 난해한 사건이 발생하면 어김없이 라임을 찾아온다. 중국에서 건너온 범죄자가 밀입국자들의 배를 폭파시키고(<돌원숭이>), 냉혈한 살인청부업자가 희생자의 뒤를 쫓는다(<코핀댄서>). 희대의 마술사는 마술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다(<사라진 마술사>).
이렇게 엽기적인 사건도 사건이지만 독자들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다. 시리즈가 진행되다 보면, 링컨 라임은 전신마비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쩌면 이것은 양날의 칼과 같다.
링컨 라임의 존재의의는 그의 ‘전신마비상태’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라임에게 추적당하는 범죄자들은 라임이 전신마비환자라는 것을 알고서도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 라임에게 육체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정신만이 존재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라임이 마비상태를 치료해서 일반인처럼 걸어다니고 행동하는 것을 보고도 싶지만, 만일 그런 사건이 일어나면 링컨 라임은 더 이상 링컨 라임이 아닐 것만 같다. 라임이 침대 밖으로 걸어나올 때, 어쩌면 그 때가 이 시리즈가 끝나는 때 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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