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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놈일 수록 잘 잔다>
사실 제목을 짓는게 창작행위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부분임을 생각해보면, 제목에서부터 이렇게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명확히 드러내면서도 내포하고 있기는 쉽지 않다. 정경유착의 단순한 소재 뒤에 깔린 복잡한 인간 군상들과 이야기의 결말은 현대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관통하는 동시에, 나쁜 놈들이 더 잘 자는 세상을 작품 안에 작게나마라도 충실히 찔릴만큼이나 고스란히 담아놓았다.
뺏어간 사람들, 때린 사람들 즉, 나쁜 사람들이 더 잘 사는건 비단 어제 오늘일은 아니지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바라 본 전후의 일본도 별반 다르진 않았던 모양이다. 1960년에 발표된 이 스릴러 영화는 정경유착에 의한 비리와 그로 인한 피해자들의 복수를 줄거리로 하고 있는데, 아주 흥미진진한 느와르를 보여주는 동시에 발전의 이면에 가리워진 끊을 수 없는 사회의 구조적 병폐를 섬뜩하리만치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감독은 모든것이 올바르게 되돌아가는 동화적 결말대신 비릿한 조소로 마무리함으로써 스크린 밖에서 활개치는 진짜 나쁜 놈들을 겨냥한 것임을 다시 한번 강조 하고 있다.
이처럼 시사성 짙은 작품을 만들면서 메시지에만 신경쓰다보면 자칫 간과하기 쉬운 것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캐릭터에게 동기를 만들어주고 관객들이 감정을 이입할 수 있도록 설득을 구하는 과정이 다분히 강요하듯이 전개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다행히 이 작품에서 감독은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영화를 읽는 과정에서 관객의 심리가 작용하는 범위를 잘 이해하고, 과히 침범하지 않으며 오히려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해 몰입감을 높히고 있다. 각본이 치밀해 동시에 여러사건들이 톱니바퀴처럼 얽혀 돌아가면서도, 장면마다 꼭 필요한것만 보여주고는 군더더기를 덧붙이지 않고 깔끔하게 이야기가 전환된다. 극단적인 캐릭터를 도입, 등장인물들의 인감됨을 밑바닥까지 파헤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아버지의 자살을 살해로 규정하고 복수를 진행하나 원수의 딸을 사랑하는 주인공, 딸까지도 철저하게 이용하는 권력욕에 눈이 먼 개발공단 부총재, 친구의 복수를 위해 본인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주인공의 친구 등 극단적인 캐릭터들을 활용해서 메시지 전달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고전적이면서 전형적인 캐릭터들의 적절한 조합, 활용 및 시너지의 극대화라고 할까.
거기에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 없는 강렬한 감정표현등은 적극적인 핀 조명의 활용과 인물들의 눈앞에 바짝 드리워진 카메라 연출을 통해 표정과 몸짓만으로도 온전히 전달하고 있다.
과연 그 다운 솜씨다.
특정 장면의 경우엔 긴 설명 없이도 대번에 관객들의 이해와 동의를 이끌어내 주는 이 영화속 연출의 특징을 보여주기도 한다. 화면으로만 보면 두 사람이 어느 남자의 장례식에 와서 조문을 하고 있는 모습일 뿐인데, 이를 지켜보는 주인공들은 차 속에서 이 두 사람이 지난 밤, 영정사진 속의 남자를 죽음으로 내몰기 위해 작당을 하던 이야기가 녹음된 음성을 듣고 있다.
두 사람이 자못 침통한 표정으로 절을하고 돌아설 때에 녹음기에선 일이 잘 해결되었다며 서로 축하하며 부어라 마셔라 희희낙락 하는 지난 밤의 대화가 흘러나온다.
참 기발한 연출인데, 느슨해지지 않도록 아주 경제적으로 알뜰하게 보여주고 지나가면서도 감정은 오히려 실제 두사람의 지난 밤일을 눈앞에서 재연해내는것보다 훨씬 강렬하게 전달한다.
그 밖에도 일부 사건의 결말을 임의적으로 감추어서 궁금증을 유발한다던가, 사건을 먼저 터뜨리고 난다음 흘러가는 양상속에서 인물들의 반응을 보며 사건의 동기와 전말에 대해 짐작해보게끔 한다던지 하는 식으로 잠시라도 느슨해질 틈을 주지 않는다.
배신, 이중스파이, 정략결혼, 죄수의 딜레마, 이간질, 오해로 인한 의심.
고전 스릴러물의 집대성이라고 할만큼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는데도 피로하거나 짜증스럽지 않고 즐겁기만 하다. 위에 말한대로 감독의 관객 심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면 느껴보지 못했을 종류의 즐거움이다.
이 영화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시스템의 껍질 뒤에 숨겨진 탐욕이라는 괴물과 싸우는 한 영웅의 전기이다. 신화와 영웅담 속에서 작은 영웅이 몇배는 강한 적들을 쓰러뜨리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했지만, 대를 물려 악당의 술수를 더욱 치밀하게 갈고 닦아온 현대 사회의 괴물들은 그처럼 녹록치가 않다. 목숨이 하나밖에 남지 않은 오락실 게임마냥, 단 하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것. 영화 자체로는 아키라가 걸작들을 대량생산하던 시절에 만들어낸 상대적인 범작이기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구로자와 아키라의 작품들 중 일본사회에 대해서 가장 노골적으로 비판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흥미로운 논의가 이끌어질 수 있기도 한 작품인 것 같다.
이와부치가 마지막 어디에선가 걸려온 전활 잔뜩 긴장한채 그야말로 받들어 모신다. 진짜 싸움은 사실 시작도 못해봤다는 씁쓸한 패배감이 올라온다. 최종 보스마저 전화 한통에 목숨을 바쳐서라도 윗쪽에 피해가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벌벌떠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제일 처음에 했던 '맞은 놈은 펴고 자도 때린 놈은 오그리고 잔다.'는 말이 일견 맞아 보이기는 하나, 정작 보면 아마도 '때린 놈이 오그리고 잔다 치더라도 맞은 놈 말고 시킨 놈이야 말로 펴고 자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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