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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렌들 <내 눈에는 악마가> (1976)
<나 홀로> - 에드거 앨런 포
내 어린 시절
험난한 인생의 새벽에
선과 악의 깊은 내막으로부터
길어올린 신비가 지금껏 나를 얽매었으니
(나머지 하늘은 천국처럼 파랗건만)
구름의 형상을 보니
내 눈에는 악마가
'연쇄살인범'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마치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신문과 방송에서 연쇄살인을 포함한 온갖 흉악한 범죄가 보도되지만, 그런 사건은 자신과는 관계없는 타인의 이야기처럼 생각되는 것이 사실이다.
연쇄살인범은 멀리 있지않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 일반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사이코>의 실제모델이었던 연쇄살인범 에드 게인은 주변 이웃들에게 '평범하고 소탈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연쇄살인자들의 이야기가 공포를 가져다주는 이유 중 하나는 주변에 살인범이 있더라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말이 나온 김에 이 바닥(?)을 한번 둘러보자. '여러 장소와 여러 시점에 일련의 쾌락살인을 범한 사람'을 가리켜서 연쇄살인범이라고 지칭한다. 이런 연쇄살인범들은 70-90년대에 많이 등장했다. 53명의 여성을 살해한 테드 번디, '요크샤이어 살인마' 피터 서트클리프, '나이트 스토커(Night Stalker)' 리처드 라미레즈, 100명 이상의 여성을 죽이고 그 중 몇 명을 '생선처럼 저민' 것을 자랑스러워 했던 헨리 리 루카스가 그런 연쇄살인범들이다.
끝내 잡히지 않은 연쇄살인범들도 있다. 19세기 말 런던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잭 더 리퍼(Jack The Reaper), 잠자는 사람들을 도끼로 찍어죽인 도끼남자, 젊은 커플을 대상으로 살인을 했던 조디악(Zodiac)이 대표적이다. 이중에서 조디악은 공개편지를 통해서 "나는 사람 죽이는 것을 좋아한다. 즐거움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라고 밝히지만, 몇 달 후의 다른 편지에서는 "제발 나를 멈추게 해주세요. 나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2년간 13명의 부녀자를 살해한 정남규, 20명을 죽인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 사건이 보도되면서 연쇄살인, 사이코패스 라는 단어가 우리나라에서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도 연쇄살인으로부터 안전한 곳이 아닌 셈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연쇄살인범들
루스 렌들의 <내 눈에는 악마가>에도 바로 그렇게 평범해보이는 연쇄살인범이 등장한다. 주인공 아서 존슨은 겉으로는 예의바르고 점잖은 50대의 남자다. 그는 20년이 넘도록 다세대 주택에 세들어 살면서 낮에는 건축업자 사무실에서 일을 한다.
아서 존슨이 살고 있는 곳은 말이 다세대 주택이지 어찌보면 일종의 고시원 같은 공간이다. 사람들은 욕실과 화장실을 함께 사용해야하고 거실도 공유해야 한다. 어려서 부모와 이별하고 이모 밑에서 성장한 아서는, 이모가 사망한 후에 이 다세대 주택에 틀어박히게 되었다.
아서는 주방에서 음식을 먹고나면 곧바로 설거지를 끝내고 욕실을 사용한 후에도 깨끗이 바닥을 청소한다. 쓰레기를 버리러 잠깐 마당에 나올때도 옷차림을 단정하게 한다. 세입자들에게 우편물이 오면 깔끔하게 분류해서 거실 식탁에 올려놓고 각종 할인쿠폰도 알뜰하게 챙겨둔다.
마치 결벽증환자처럼 보이는 아서의 이런 행동은 그의 이모 그레이시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레이시는 아서가 비뚤어지지 않도록 교육시키고 돌보아주었지만, 너무 엄격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레이시는 아서가 어렸을 때부터 집안과 바깥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싱크대에 더러운 그릇을 그대로 놔두는 사람은 단정치 못한 살림꾼이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면 안된다, 냉동 음식이나 쓰레기 같은 캔 음식은 절대로 먹지 말아라, 너를 고용한 사장님을 실망시켜서는 안된다 등.
평범하고 단정한 연쇄살인범의 이야기
어찌보면 다 맞는 이야기들이다. 하긴 대부분의 잔소리가 당연한 이야기들 아닌가. 그렇더라도 성인이 되서도 계속 이런 이야기를 매일 같이 듣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서는 이런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이모를 원망하지 않는다. 이모는 그에게 참 잘해주었고 죽는 날까지 노력하더라도 이모가 그에게 베푼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연쇄살인범들은 대부분 우울하고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어린 시절에 받았던 학대 등이 성장기의 뇌에 영향을 미쳐서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낸다는 학설도 있다. 잔소리도 일종의 소극적인 학대라고 한다면 아서는 성인이 되서도 계속해서 학대를 받아온 셈이다.
그런 잔소리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가 쌓이다보면 어디론가 배출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친구들과 어울려서 놀거나 운동을 하며 그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술을 마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된다. 반면에 아서는 폐쇄적이고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 이모는 그에게 술과 담배를 접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술집에도 가지 못한다.
그래서 아서는 무언가를 죽이는 걸로 그의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뭔가를 죽이고 싶은, 해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서 밤길을 걷는 여자를 한 명씩 살해한다. 같은 건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서의 정체를 모른다. 그들에게 아서는 예의바르고 점잖은 중년 신사일 뿐이다. 매일 얼굴을 마주치고 인사하는, 단정한 옷차림의 회사원이 연쇄살인범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심리학자가 분석하는 범죄자의 내면
살인사건이 발생하지만 <내 눈에는 악마가>에는 형사나 탐정이 추리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형사는 오직 단 한 장면에만 나타나서 아서에게 알리바이를 확인할 뿐이다. 그 형사는 아서에게 어떤 혐의도 두지 않는다. 작가는 사건을 추리하고 범인을 추적하는 형사의 모습보다도, 살인자의 일상생활과 내면, 그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의 풍경을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다.
아서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같은 세입자면서 심리학을 공부하는 학생 앤서니다. 앤서니는 아서의 지나치게 예의바른 언행을 보면서 아서가 심각한 불안감을 느끼는 신경증 환자라고 단정한다. 그러면서 아서같은 사람의 심리를 분석한다. 그런 사람은 편집증 증세를 보이고 보복을 두려워하며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아서는 자신이 한 살인을 회상하면서 향수 어린 쾌감과 사회에 대한 분노를 느낀다. 대부분의 범죄자가 그렇듯이, 그도 사회를 혐오한다. 이 사회는 그에게 범죄를 저지르도록 부추긴다. 그리고나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그를 비난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제목처럼 그들은 구름의 모습에서 악마의 형상을 발견한다. 연쇄살인범들은 멀리 있지도 않고 특별히 눈에 띄는 존재도 아니다. 그래서 더욱 두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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