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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컬쳐] [단편 로맨스] [새벽 별빛] 01 미팅 (0) 2014/08/25 PM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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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팅














어디를 바라보는지도 알 수 없는 사람을 혼자 좋아하기는 어려웠다. 난 지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이유일까, 내가 지금 이 곳에 있는 것은.


신촌으로 향하는 지하철은 너무도 붐비고 있었고, 사람들 어깨 너머로 보이는 창문 밖으로는 희미하게 밝혀진 형광등 불빛이 하얀 선을 그으며 내 망막에 잔상을 남기고 사라져갔다. 형광등 빛이 앞에서 다가오고 뒤로 사라져가는 그 잠시 동안, 자꾸만 그 사람의 영상이 떠올랐다. 가만히 한숨을 내쉬고는 내 모습을 돌아보았다. 혼자 사는 자취방에서 스팀다리미로 어색하게 다린 흰색 재킷, 그리고 푸른색 남방. 옷깃 사이로 스미는 초봄의 한기를 막기 위해 걸친 크림색 머플러까지. 자취 생활을 시작한 지 만 1개월 만에 나는 내가 입을 수 있는 최대한의 복장을 하고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난, 왜 지금 여기 있을까. 뭘 기대하는 것일까.’


3:3 미팅. 내 옆에는 같은 대학 동기 두 명이 나와 나란히 서 있다. 둘이 열심히 얘기하다가 한 녀석이 나를 돌아보더니 물어왔다.


“오늘 나온 애들… 폭탄이면 어떡하지? 우리 오늘 만나는 애들은 어떻대?”
“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내가 주선했냐?”
“그래도.”
“시끄러. 그런 소리 하려면 일단 니 면상부터 좀 고쳐놓고 와.”


같이 가는 친구 녀석의 기대 섞인 물음을 나는 차갑게 내치고 말았다. 내가 너무 일찍 늙어버린 것일까. 왜 상대의 외모를 그렇게까지 신경 쓰냐고 묻고 싶었다. 그렇게 상대방의 용모를 신경 쓰는 너는 과연 그 쪽에서 봤을 때 얼마나 잘 생겼다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하고 싶었다.


한 명의 자리가 빈다기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나오게 된 자리지만, 사실 기대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 혼자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그 사람을, 그 사람의 그림자를 떨쳐버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 혹시 모를 일이다. 그녀를 잊을 수 있을 만큼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최소한 하나쯤은 나와 주기를, 그리고 그런 사람이 나의 파트너가 되기를 나는 바라 마지않고 있었다.


“다음 역은 신촌, 신촌 역입니다. 이번 역은 열차와 승강장의 사이가 넓으니…….”


잠시 후, 가볍게 앞으로 쏠리는 느낌과 함께 열차는 정지했고, 우리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리고 굳이 알 필요도 없는 무언가를 성취하러 간다는 느낌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신촌역 역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역시 금요일 저녁. 아마 내 옆의 두 녀석은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Thanks, God. It’s Friday!’


-우우웅~ 우우우웅~


‘정소연’. 이번 미팅 주선자인, 친구가 알려준 상대측 한 사람의 이름.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만히 목소리를 가다듬고 휴대폰을 귀에 갖다댔다.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오늘 만나기로 한…….”
“아,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그래요? 어딘데요?”
“신촌역 1번 출구 앞이요.”
“아, 빨리 오셨네요. 금방 갈게요.”


잠시 후 나타난 세 명의 여자들. 밝은 분위기의 한 명,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활발하고 유쾌한 한 명, 그리고 수줍어 제일 뒤에서 따라오는 한 명. 서로를 약간 어색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나와 함께 나온 녀석들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멀뚱멀뚱 여자 측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최민기라고 합니다. 지금 P대 심리학과 재학중이고요.”
“아, 아까 전화받은 분이시구나. 저는 D여대 교육학과 1학년 다니는 정소연이예요.”


나와 소연을 필두로, 모두의 어색한 자기소개가 끝났다.


“뭐라도 먹으러 가죠. 뭘로 할까요?”
“글쎄요, 저희는 딱히 먹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그럼, 맥주나 한 잔 할까요? 앞장서세요. 아무래도 저희보다는 그쪽 세 분이 괜찮은 데를 많이 알 것 같은데…….”
“… 네.”


소연은 짤막하게 대답하고 앞장을 섰다. 여자 셋이 앞서 가고, 나를 비롯한 남자들은 뒤에 약간 쳐져서 따라갔다.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내가 준 인상도, 내가 받은 인상도. 아니, 최소한 내가 받은 인상만큼은 그랬다. 기대만큼은 아니지만 함께 나온 친구 녀석들의 불안감만큼은 아니었다.






잠시 후, 조용한 호프집에 자리를 잡고 앉아, 우리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설이든 영화든 로맨스를 즐겨 본다는 내 얘기에 다들 의외라는 눈빛. 숫기 없는 내 친구들은 가만히 나의 이야기를 듣고 맞장구만 쳤다. 내 앞에는 세 명의 여자가 앉아 있었지만, 그리고 당연하게도 내 시선은 셋을 번갈아 봐야 했겠지만, 나의 눈은 소연을 향해 있었다. 열심히 농담을 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세 여자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 내 앞에서 나를 열심히 바라보는 그녀. 그 사람도 그랬다면, 아니 그렇다면……. 잠깐만, 현기증이 난다.


“아, 잠깐만요.”


나는 싱긋 웃으며 자리를 비우는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쏴아


신경질적으로 물을 틀어, 얼굴을 적셨다. 순간, 소연이 날 보는 눈빛에, 그 사람이 떠올랐다. 소연이 바라보는 그 시선으로 그 사람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도 다르게 생긴 두 사람인데, 나의 희망사항이 반영된 것일까. 거울 속에는 머리에 왁스를 발라 이리저리 멋을 낸 내가 있었다. 웃어 보았다.


“가식덩어리.”


나지막이 내뱉었다. 진실일지 모른다. 내가 웃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지금 내 안에는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누가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일단 돌아가자. 내가 있던 자리로.


“아, 미안. 어제 밤늦게까지 과제를 했더니, 좀 피곤해서.”


어느 새인가 우리는 말을 놓고 있었고, 내 옆의 친구들도 분위기에 적응을 하기 시작했다. 술이 몇 순배씩 돌고, 각자 대학 생활 이야기,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여자 측에서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근데, 우리 좀 섞어 앉으면 안 돼?”


남자 셋, 여자 셋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나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웠고, 딱히 이상한 점도 느끼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그래.”
“그럼, 좀 고전적이기는 하지만 소지품 고르기로 하자. 이거 은근 스릴있거든. 남자들은 눈 감고 있어.”


눈을 감았다. 주변의 테이블이 시끄러웠지만, 바로 앞에서 들리는 부스럭 소리는 세 여자가 주섬주섬 자신의 소지품을 하나씩 꺼내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됐어, 하나씩 집어 가.”


립밤 두 개, 껌 한 통. 셋 다 묘하게 입술에 닿는 물건들이다. 왜 하필이면. 또 현기증이 일었다. 순간적으로, 그 사람은 어떤 껌을 씹을까, 어떤 향의 립밤을 쓸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너네 먼저 뽑아라. 난 남는 걸로 가져갈게.”


관자놀이에 손을 짚은 채로 친구들에게 말했다. 선택하고 싶지 않다. 미안하지만, 이들 중 누구도 내 안을 채워줄 수는 없다. 만난 지 겨우 한 시간 반이 지나 두 시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짧은 시간, 사람의 모든 면을 알 수는 없는 시간이고, 어쩌면 호감을 갖기에도 너무 짧은 시간인지도 모른다.


“야, 최민기. 하나 남았다.”


관자놀이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서, 소연은 날 보고 방긋 웃고 있었다.


“내 거네.”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붕 뜬 느낌이었지만, 나에게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그냥 빙긋이 웃어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나는 멍하니 그런 그녀를 보고 있었다.


-우우웅


문자메시지. 소연에게서 온 것이다. 바로 앞에서 문자를 보내다니, 이런 황당할 데가.


「미안, 나 오늘 일찍 들어가 봐야 돼. 할 얘기도 있는데 일단 다들 각자 파트너랑 놀라고 하고 우리 나가자.」


난 잠시 망설이다가 소연의 의견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다들 이 자리에 오래 있어봤자 서로의 눈치를 보느라 헛소리만 지껄여댈 것이 뻔했다. 아니, 그것보다도 소연이 마치 그 때를 기다렸던 것처럼 얘기를 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자, 그럼 일어나서 파트너랑 놀까? 이따가 만나든지 하자고.”


모두들 동의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나 그쪽이나 잘 생기고 예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성격들이 다 좋아서 파트너끼리도 잘 어울리는 듯했다. 남자들이 돈을 내고 밖으로 나왔다. 호프집에 들어갈 때와는 달리 3:3이 아니라, 2:2:2가 되어 있었다.


“자, 그럼 다들 놀고… 알아서 들어가자. 하핫.”
“그래. 자, 그럼 잘들 해보라고.”


네 명이 나의 시야에서 멀어져, 인파 속으로 묻혀버렸다.


“아, 저기…….”
“응?”
“미안, 기분 나빠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소연은 잠시 뜸을 들였다.


“너 싫어서 그냥 가려고 하거나 이런 거 아냐. 진짜야. 우리 내일 만나자. 그리고 놀자. 응?”
“음, 뭐……. 난 사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정말 미안. 내일은 안 이럴게.”


거짓말 같지는 않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들어가 볼까.”
“지하철 타고 가? 어디 사는데?”
“그냥, 좀 올라가야 돼. 너는?”
“나는 이 동네라서. 연희동 살거든. 아, 그럼 가봐야겠다. 내일 봐.”
“응, 잘 가.”


소연도 사람들 사이에 묻혀 사라져간다. 나는 혼자 지하철을 탔다. 그 사람이 보고 싶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이렇게 갑자기 만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무작정 누군가를 잊고 싶다고 좋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창밖으로 형광등 불빛이 보인다. 그리고 그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내가 지친다고, 힘들다고 포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가보다. 무작정 그 사람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내일, 시간 있어? 영화 보고 싶은데 같이 볼 사람이 없다.」


답장이 없다. 아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올 것이다. 웃음이 난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미팅 얘기를 들었을 때와는 다른 두근거림. 미묘한 감정이 이리저리 섞여 있는, 그런 느낌. 가슴이 벅차오른다. 좋아한다는 감정을 분산시키지 않겠노라고, 그 사람이 어느 곳을 보든 나는 그 사람을 바라보겠노라고, 그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겠노라고 다짐하면서. 아직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내 사람이기를 바라면서. 짝사랑이어도 아직은 좋았다. 잠깐 힘들다고 해서 금방 다른 사람으로 잊으려 했던 것은 실패로 돌아갔던 셈이다. 다시 휴대폰을 들고 문자메시지를 꾹꾹 눌러 쓴다.


「미안. 나 내일 못 나갈 것 같다. 그래도 오늘 만나서 즐거웠어.」


수신자는……


정. 소.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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