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작가의 <작별인사>는 지도에 없었던 보물섬에 상륙한 것 같은 소설이다. 코로나 펜데믹을 거치는 사이에 예정보다 2년은 더해진 개작으로 단순히 분량만 놓고 보더라도 2배 가까이 늘어났다. 목적하지 않았던, 하지만 왔어야 할 그곳, 보물섬에 내린 선장이 말한다. "비로소 애초에 내가 쓰려고 했던 어떤 것이 제대로, 남김 없이 다 흘러나왔다." 작가는 무엇을 쓰려고 했던 것일까. 그리고 어떤 것이 흘러나온 것일까.
<작별인사>는 어느 날 갑자기 수용소로 끌려간 소년의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간과 휴머노이드 사이에 오가는 각자의 철학이 이야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소설을 조금 더 깊게 보기 위해 도움이 될만한 글을 곁들이면 더욱 좋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집 <나무> 중 '내겐 너무 좋은 세상'과 '완전한 은둔자', 그리고 진중권 교수의 철학 에세이 <이매진> 중 '폴라 익스프레스 편'을 추천하고 싶다. 진중권 교수가 '언캐니 밸리'를 주제로 쓴 다른 칼럼들도 찾아보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내겐 너무 좋은 세상'은 극도로 편리해진 세상을 배경으로 하고 '완전한 은둔자'는 생각이란 개념만을 남긴 인간의 이야기다. 언캐니 밸리라는 감각은 인간과 인간같음 사이에서 오는 일종의 본능에 가깝다. <작별인사>를 비롯한 인공지능을 주제로한 작품들은 '인간일 것'과 '인간이 아닌 것'의 흐릿한 경계에 대해 고민하며 읽을수록 깊어지는 맛이 있다.
기술이란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어떤 원리나 지식을 자연적 대상에 적용하여 인간 생활에 유용하도록 만드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수단.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유용'일 것이다. 청소기부터 아이언맨까지, 유용이라는 건 낮은 수준의 편함부터 고도의 능력 확장까지 아우른다. 인간에게 필요한 유용은 어디까지의 유용인가. 얼마나 편해지고, 얼마나 강화되는 걸까.
기술은 인간의 일을 덜어준다. 기계는 인간의 일을 대신 한다. 대신 하다보니 어느덧 기계는 인간의 일을 하게 된다. 이 세번째 시점에서 '인간의 일'이라는 표현은 뭔가 어색해 보인다. 그 일의 달성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인간이란 점에서 그나마 봐줄만 한가? 하지만 이런 현상이 계속된다면 어떤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그래서 무슨 색인가. 삶을 위해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쥐어진 '너무 좋은 세상'은 이미 존재하는 상상이다. 나 개인의 필요조차 시스템화 되어버린 사회가 다가온다. 인간의 꿈에서 정작 인간이 소외되고 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글쎄, 기계로 된 신에게 기도하며 구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예전에 이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간호로봇은 부족한 인간을 돌보기 위해 존재한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보장받기 위해서다. 하지만 너무나 완벽해진 세상이 도래해서, 돌봄을 받는 것 외에 할 일이 없어진다면 인간은 어디서 인간다움을 느낄 수 있을까. 남을 돕는다는 체험을 목적으로 하는 돌봄을 필요로 하는 부족한 로봇이 나오진 않을까? 여러모로 공허한 상상이 아닐 수 없다.
출판사 서평에선 <작별인사>의 출판이 예정보다 늦어지고 그만큼 작가의 작업량도 엄청났다는 부분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가르는 경계는 어디인가’를 묻던 소설은 ‘삶이란 과연 계속될 가치가 있는 것인가?’, ‘세상에 만연한 고통을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 것인가’, ‘어쩔 수 없이 태어났다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로 바뀌었다.
그렇다. 모든 질문은 돌고 돌아 인간으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