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her, 2013)를 보고
영화는 주인공 시어도어의 직업이 편지 대필가라는 점을 통해 감정이란 것이, 적어도 표현이란 측면에선, 반드시 특정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고양이 변태녀를 통해 실체 없는 욕망도 보여준다. 관계에 있어 큰 제한 두 가지를 푼 다음 등장하는 사만다. 감정 없는 기계이자 실체 없는 프로그램 사만다. 그런 사만다와 사랑에 빠지는 시어도어. 이러한 전개를 사랑의 관점에서 봤을 때 사만다는 당연히 사랑의 대상이다. 이 영화는 사랑 영화가 맞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편지 대필은 정작 본인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는 감정의 한계를, 자괴감으로 급하게 마무리 되는 고양이 변태녀 또한 해소되지 못한 욕망의 한계를 표현한 것이 아닌지. 그리고 사만다는 그 모든 것을 초월하고 싶은 주인공의 내면의 소리가 아닌지.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정확히는 더 좋은 사람을 알아보기 위해 만남을 많이 가져야 한다고. 반박하기엔 너무 상식적이라 나 역시 이 격언(?)에 동의하도록 학습되어 있긴 하다. 그럼에도 설명을 붙여보자면, 만남의 목적이란 그냥 시행착오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건 사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서 그 좋은 사람과 서로 이끌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사만다를 통해 변해가는 시어도어를 보면 어떨까. 시어도어와 사만다의 연애는 전적으로 사만다가 이끈다. 연애를 포함한 관계 전반은 물론이고 시어도어의 라이프 스타일 자체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시어도어 역시 사만다에게 적극적으로 반응하지만 사만다가 리드한다는 점은 여전하다. 하지만 그녀의 리드는 카리스마 가득한 추진력이나 지혜와 지식의 통찰력이 아니다. 마치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아는 것을 안다고 알 수 있게 이끄는 산파법과 같다. 다시 말해 이미 시어도어 속에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사만다와의 만남 이후 시어도어의 행동들은 원래 그가 하고 싶었던 일들이 아니었을까. 마치 마스크를 쓰고 얼굴을 가렸더니 용기가 나는 것처럼. 사만다가 떠나는 장면 속 시어도어는 너무도 애처롭지만 역으로 시어도어에게 더 이상 마스크가 필요 없어졌음을 보여준다. 내가 만약 영화의 부제를 지을 수 있다면 페르소나라 붙일 것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말, 그 말을 수정한다. 우리는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을 뿐이니까. 영화 엔딩의 시어도어는 오프닝의 시어도어보다 더 나은 사람일까?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훌륭하다거나 열등하다거나, 문자 그대로 더 나아졌는지를 따지고 싶지 않다. 다만 분명한 건 그것이 시어도어가 원하고 선택한 길이란 점이다. 그런 점에서 도시를 바라보는 뒷모습의 시어도어는 더 나은 시어도어다. 아니, 더 시어도어다운 시어도어. 나다운 나, 그것은 사만다의 꿈이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