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훈 MYPI

서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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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눈물-다시 읽기] [우상의 눈물] 다시 읽기-part02-무사안일. (0) 2023/01/18 PM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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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이란 단어로 그럴 듯하게 포장했지만, 결국 담임이 말하는 것은 전체주의입니다. (이런 그의 모습은 민주주의와 정의를 내세우며 등장했던 전두환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그리고 이유대는 그 사실을 간파하고 도전해 보지만, 노련한 담임에 의해 오히려 역습을 당합니다.


이 장면에서 담임의 위선을 눈치챈 사람은 두 명이 있습니다. 한 명은 이유대고, 다른 한 명은 임형우입니다. 여기서 이유대는 도전하기로, 임형우는 가담하기로 결정하면서, 각각 최기표와 담임의 대리인으로서 갈등을 벌이게 됩니다.

또한 이 작품에서는 '무사안일'이 중요한 가치로 등장합니다. 담임이 추구하는 것도 결국은 1년 동안의 무사안일이고, 이후의 컨닝 사건에서도 사건을 흐지부지 덮어버린 영어선생이 '인자하다'는 평가를 받고, 최기표에게 폭행을 당하고도 끝내 문제를 덮어버린 임형우가 학교 전체의 영웅이 되어 추앙을 받습니다. 여기에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작가의 비판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이어서 담임은 이유대의 집을 가정방문하는데, 이는 후반부를 위한 설정입니다. '가정방문을 당하면 꼼짝을 못한다'라는 설정이 다소 어색하긴 하지만, 단편소설답게 빠르게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설정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지식인인 이유대의 욕망입니다. 그는 번거롭게 권력자가 되는 것보다, 드러나지 않는 조력자로서 권력자를 통해 자신이 꿈꾸는 이상을 실현하려고 합니다. (임형우 역시 동일한 욕망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회에 설명했던 것과 같이, 이런 나약하고 조금은 비뚤어진 지식인 유형은 70 ~ 80년대 소설에서 특히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이유대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켜 줄 대상으로 최기표를 선택하는데,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엄석대-한병태의 관계와 유사합니다. 때문에 한병태가 그랬듯이 이유대 역시 최기표를 숭배하게 되고, 오히려 그에게 당한 담배빵의 흉터를 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일종의 훈장처럼 인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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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눈물-다시 읽기] [우상의 눈물] 다시 읽기-part01-반영론적 접근. (0) 2023/01/18 AM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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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진정한 악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아래는 작가의 인터뷰의 일부분입니다.


학생: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작품 [우상의 눈물]을 창작하신 의도를 알 수 있을까요?


전상국: 먼저 창작의 의도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과 연관해서 작품의 발상을 말해 보겠습니다. 이 작품을 창작할 당시 나는 정치꾼들이 벌이는 갖가지 위선적인 행태에 막연한 불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위선이야말로 가장 질 나쁜 악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이러한 발상에서 출발해 '잘못 쓰이는 힘' 또는 '나쁜 힘'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인 이야기로 형상화한 작품이 [우상의 눈물]입니다.


작품이 시작되자마자 등장하는 것은 최기표가 행사하는 '강렬한 폭력'입니다. 이를 통해 작가는 그가 가진 원시적인 폭력성을 독자들에게 각인시킵니다. 또한 이를 계기로 화자인 이유대는 최기표가 담임보다 훨씬 더 강하다고 믿게 되고, 그를 추종하게 됩니다. (화자의 이런 착각은 결말에서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된 착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설 속 중요한 등장인물들은 아래와 같이 당시의 현실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담임: 전두환 -> 새롭게 등장한 반의 지배자이자 위선적인 인물(큰 위선자)

최기표: 조폭 -> 오래 전부터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인물(원시적인 폭력성)

임형우(반장): 지식인1-> 담임의 의지를 실행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인물(작은 위선자)

이유대(화자): 지식인2 ->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의 인식을 대표하는 인물(작은 위선자) -> 인식의 변화를 통해 독자들을 설득하는 존재


박정희 군사독재가 갑작스럽게 종료되고, 대한민국 국민들이 민주화에 대한 기대로 한껏 들떠 있을 때, 갑작스럽게 '정의사회구현'을 내세우며 전두환 씨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당시 대중은 그에 대해 크게 경계를 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때문에 작가는 대중들의 이런 잘못된 인식을 지적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느끼고 이 소설을 쓰게 된 것 같습니다.


권력자에 빌붙어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려 한다는 점에서 임형우와 이유대는 닮았지만, 임형우는 담임을, 이유대는 기표를 선택합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엄석대를 통해 자신의 합리를 실현하려는 한병태와도 닮았습니다.)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의 표절 시비입니다. 분명히 두 작품은 여러 면에서 많이 닮았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전두환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닮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자에 빌붙는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 역시 당시 소설에서는 흔하게 등장하는 장치이기 때문에 표절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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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다시 읽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다시 읽기-마지막 회. (1) 2023/01/17 PM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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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화는 원작 소설을 먼저 읽으시고 보시면 더욱 재미 있습니다. 


민음사 판에 수록된 '또 다른 결말'에서는 엄석대가 성공한 모습으로 한병태 앞에 다시 등장합니다.

엄석대가 형사들에게 잡혀가는 기존의 결말은 여러 면에서 어색합니다.
생각을 하게 만드는 어색함이 아니라 그냥 모호합니다.
30년 후에 초라한 모습으로 다시 등장할 거라면 엄석대는 왜 반에서 도망쳐야 했는지, 그리고 과거의 초인적인 능력들은 다 어디로 가고 무능하게 변했는지...

그에 비해 '또 다른 결말'에서는 모든 것이 충실히 설명됩니다.
그래서 저는 '또 다른 결말' 쪽이 소설의 결말로서 더욱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합니다.
한병태 아버지의 평가도 유효하고, 한병태의 무효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무엇보다 '열한 시에는 일어서지'라고 말하고는 시간이 되자 칼같이 일어서는 엄석대의 모습은 '유리창 사건' 때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럼 왜 작가는 기존의 결말로 끝을 맺어야 했을까요?
저는 이런 질문을 해 봅니다.
만약 '또 다른 결말'로 끝을 맺었더라면, '6월항쟁'이 끝나고 4개월 후에 출간된 이 소설이 과연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지금처럼 독재를 비판한 작품으로 평가 받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잠시 한병태도 살펴 보죠. '자율과 합리'라는 단어는 한병태를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번 회에서 그 단어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정신적인 능력과 학문에 대한 천착의 깊이로 모든 서열이 정해지고 자율과 합리에 의해 지배되는 곳'

저 말을 좀 쉽게 바꿔보면 '대학의 서열에 따라 행복과 풍요의 서열이 결정되는 것' 쯤 될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한병태가 생각하는 '자율과 합리'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30년 전에 한병태가 엄석대에게 도전한 것도 설명이 됩니다.

처음 전학 온 날, 반 아이들은 한병태를 무시하고 시골 아이인 엄석대에게 복종합니다.
심지어 엄석대는 자기도 지배하려고 합니다.
이는 한병태의 입장에서는 '불합리한' 일입니다.
당연히 서울에서 온 엘리트인 자신이 반을 지배해야 하는데 말이죠.
그래서 반을 합리적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즉, 자신이 급장이 되는 것과 반이 '자율과 합리'를 되찾는 것은 한병태에게는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한병태의 질문에 아버지가 '네가 급장이 되어 봐'라고 답했던 거지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한병태는 엄석대가 자기보다 더 뛰어난 엘리트임을 발견합니다.
때문에 저항할 명분은 사라지고 엄석대에게 항복하게 되지요.
그러자 엄석대는 한병태를 반의 넘버2로 끌어올려 주는데, 이렇게 반은 한병태의 입장에서 완벽하게 합리적인 상태가 됩니다.
따라서 한병태도 행복해지죠.
마찬가지로 새로운 급장을 뽑을 때 한병태는 무효표를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급장이 되든 그가 자신과 엄석대를 지배한다는 것은 '불합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40대가 된 한병태는 '따라지' 대학을 졸업한 동창들이 자기보다 더 잘 사는, 새로운 '불합리'와 마주하게 되고, 자기 대신에 불합리한 사회를 바로잡아 줄 존재로 엄석대의 부활을 염원합니다.

또한 궁지에 몰린 한병태는 '한마디로 말해 나도 어서 빨리 그들의 풍성한 식탁 모퉁이에 끼어들고 싶었다'며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전학 첫 날에 반 아이들이 엄석대에게 땅콩과 계란 등을 바치는 걸 보며 한병태가 분노한 것은 과연 민주주의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엄석대의 '풍성한 식탁' 때문이었을까요?

그리고 112페이지에서 한병태의 아내도 매우 재미있는 대사를 합니다.

"왜 엄석대란 친구 얘기는 하지 않았어요? 보니 대단한 분 같은데......"

그러니까 앞으로 친하게 지내라는 듯한 뉘앙스입니다.
호텔 지배인과 룸살롱 사장의 태도를 종합해 보면 엄석대는 거물급 조폭으로 성장한 것 같습니다.
자신의 남편이 조폭과 절친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아내의 첫 대사로는 좀 이상합니다.
보통 '그 사람 좀 위험해 보이던데...'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예전에 이 소설 속의 모든 인물들은 권력에 굶주려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심지어 이 아내조차 예외가 아닙니다.

제가 지난 7년간 국제학교에서 문학교사로 일하면서 느낀 점은 한국의 문학 교육이 다소 경직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소설이 더욱 그렇습니다.
어떤 소설 속에서 'A는 선이다'라는 언급이 나오면 A를 선이라고 간주하고 그의 행동과 대사를 해석합니다.
그래서 기존의 해석에서는 '6학년 담임선생님은 민주주의를 가르친 영웅'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독자는 수동적인 입장에서 작가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과연 6학년 담임선생님은 선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그를 평가해 봤습니다.
그러자 '6학년 담임선생님은 악일 수도 있다'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러자 새로운 의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한병태를 통해 6학년 담임을 선이라고 정의해야 했을까?'

저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이 작품과 6월항쟁을 연결시켜 해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라는 수박의 속살을 조금이나마 핥은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저의 부족한 해석을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해석이 한국문학이 낳은 걸작들 중 하나인 이 작품을 더욱 재미있게 즐기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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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짱    친구신청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다시 읽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다시 읽기-part10. (0) 2023/01/17 AM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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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화는 원작 소설을 먼저 읽으시고 보시면 더욱 재미 있습니다.


반 아이들에 대한 한병태의 이중적인 평가는 이번 회에도 계속됩니다.
한병태의 평가에 따르자면 반 아이들은 변혁을 향해 어렵사리 용기를 짜낸 용감한 사람들이면서 동시에 교활하고도 비열한 변절자들이기도 합니다.
서로 모순되는 이 두 개의 평가 중에서 작가의 본심은 어느 쪽일까요?

그리고 6학년 담임선생님은 반 아이들을 때린 후에 앞으로는 지켜보기만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가 과연 이 약속을 지키는지 지켜 봅시다.

이 장면에서 6학년 담임선생님이 엄석대를 20대, 친위대를 각 10대, 반 아이들을 각 5대씩 때렸다고 본다면 담임은 20 + 60 + 270 = 총 350대를 때렸습니다.
실로 엄청난 열정입니다.
그런데 매질이 끝나자마자 '이제는 너희들끼리 의논해서 훌륭한 반을 만들어 봐라. 나는 지켜보기만 하겠다'며 갑자기 태도를 바꿉니다.
여기에 대해 한병태는 '담임선생님의 심지 깊은 배려'라고 해석합니다.
한병태의 해석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어떨까요?
6학년 담임선생님은 처음부터 민주화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다만 엄석대의 권력을 빼앗기 위한 핑계가 필요했던 거지요.
처음에 한병태가 엄석대에게 도전하면서 민주화를 내세웠던 것처럼 말입니다.
6학년 담임의 폭력은 미국의 이라크 폭격과 매우 닮았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단 한 번도 석유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엄석대가 도망가고 담임이 쫓아 갑니다.
즉, 엄석대는 패배가 확실한 상황에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 놓습니다.
영화로 치자면 적들에게 쫓기던 주인공이 총을 맞기 직전에 절벽에서 뛰어내린 것과 같습니다.
만약 저 장면에서 6학년 담임선생님이 엄석대를 붙잡았더라면 어떤 말을 했을까요?

1번. 내가 좀 심했던 것 같구나. 그렇지만 학생의 본분은 공부다. 교실로 돌아가라.
2번. 네가 아직 반항할 힘이 남았구나. 다시 엎드려.

답은 6학년 담임선생님의 이후의 행동들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새로운 급장을 뽑는 데 한병태는 무효표를 던집니다.
무효표의 의미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저 선거는 엄석대보다 더 나은 급장을 뽑는 것이 아닙니다.
엄석대를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 중에서 가장 능력이 있는 사람을 뽑으면 되는 겁니다.
하지만 한병태는 굳이 무효표를 던집니다.
엄석대를 제외한 그 누구도 급장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거지요.
이렇게 엄석대의 권력이 무너지고 모든 아이들이 그를 배신한 상황에서 한병태는 비로소 그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고 반을 이끌 인물은 엄석대 밖에 없다는 각성에 도달합니다.
이처럼 엄석대의 몰락은 엄석대를 비판하기 위한 장치라기 보다는 반대로 그의 진정한 가치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엄마를 부탁해]에서 엄마의 실종처럼 말이죠.

반을 뛰쳐나간 엄석대는 테러를 통해 권력을 되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엄석대의 테러에 대처하는 6학년 담임선생님의 방법은 더 큰 폭력입니다.
반 아이들은 학교 밖에서는 엄석대에게, 안에서는 담임에게 두들겨 맞는 상황에 빠집니다.
앞서 6학년 담임선생님은 부당한 폭력에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 아이들을 때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6학년 담임선생님 자신이 부당한 폭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저항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세 가지 사실이 드러납니다.

1번. 6학년 담임선생님이 또 다시 약속을 어겼다는 것.
2번. 반이 민주화 되었다는 6학년 담임선생님의 선언은 거짓이었다는 것.
3번. 6학년 담임선생님은 엄석대가 도망쳤을 때 더 때리기 위해 쫓아 갔었다는 것.


한병태의 말처럼 '불가항력적' 인 일인데도 6학년 담임선생님은 엄석대에게 맞고 온 아이들에게 욕설과 폭력을 휘두릅니다.
그래서 반 아이들은 그야말로 살기 위해 엄석대를 찾아가 테러합니다.
이렇게 엄석대가 아이들을 테러하고, 담임은 맞고 온 아이들을 또 때리고, 다시 아이들은 엄석대를 찾아가 보복테러를 저지르고, 담임은 돌아온 아이들에게 상을 주며 추켜세웁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엄석대를 찾아가 테러합니다.

이런 아수라장을 지켜보면서도 한병태는 반이 민주화되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 30년간 한병태의 평가를 믿어 왔습니다.
이제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이 반은 과연 민주화된 것일까요?


아무튼 이렇게 6학년 담임선생님은 엄석대를 철저하게 추방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엄석대의 담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컨닝을 해서 성적을 조작한 것은 분명 큰 잘못입니다.
하지만 엄석대는 여전히 그의 학생입니다. 무척 능력 있는 학생이지요.
그런데도 6학년 담임선생님은 폭력을 사용해 그를 쫓아내려고만 합니다. 그리고 성공합니다.
저는 이런 6학년 담임선생님을 교사의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한병태는 '심지 깊은 배려로 반을 민주화로 이끈'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군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98페이지를 보면 엄석대는 반에서 별나고 당찬 아이들 무려 다섯과 싸우고서야 마침내 패배합니다.
아마 네 명만 되었어도 엄석대가 이겼겠지요.
이렇게 작가는 엄석대의 몰락조차도 영웅다운 면모를 잃지 않도록 배려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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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다시 읽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다시 읽기-part09. (0) 2023/01/16 PM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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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화는 원작 소설을 먼저 읽으시고 보시면 더욱 재미 있습니다. 


마침내 이 소설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장면이 나왔습니다.

81페이지에서 6학년 담임선생님은 엄석대에게 '교탁 위'로 올라가라고 명령합니다.
왜 하필 '교탁 위'일까요? 보통 복도나 교실 구석 아닌가요?
'교탁 위'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은 '전시'입니다.
6학년 담임선생님은 몰락한 엄석대의 모습이 반 아이들에게 잘 보이도록 전시합니다.
이어서 한 명씩 일어서서 엄석대의 비리를 고발하라고 시키는데, 이 때 고발자와 엄석대는 1대1로 마주보는 상황이 됩니다.
아마도 6학년 담임선생님은 엄석대가 다시는 부활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파괴하고 싶은가 봅니다.

이어지는 두 장면에서 작가는 반의 권력이 어디로 이동했는지 분명히 보여줍니다.
어른만해 보이던 엄석대가 갑자기 작아지고, 대신 6학년 담임선생님이 거인처럼 커집니다.
이렇게 작가는 엄석대가 가진 권력이 6학년 담임선생님에게로 이동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한병태는 말합니다.

'어쩌면 담임선생님은 처음부터 그걸 노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어 6명의 우등생(편의상 '친위대'라고 부르겠습니다)을 불러낸 6학년 담임선생님은 먼저 그들에게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맞고 입을 열래? 좋게 물을 때 바로 댈래?"

솔직하게 대답하면 안 때리겠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런 6학년 담임선생님의 말을 믿고 친위대는 엄석대를 고발합니다.
그러자 6학년 담임선생님은 갑자기 표정을 일그러뜨리더니 약속을 깨고 친위대에게 몽둥이를 휘두릅니다.

"나는 되도록 너희들에게 손을 안 대려고 했다. 그러나 그동안 너희들의 느낌이 어떠했는가를 듣게 되자 그냥 참을 수가 없었다."

원래는 때릴 마음이 없었는데 학생이 잘못했다고 말하자 참을 수가 없어서 때렸다...
저는 6학년 담임선생님의 이 논리가 이해가 안 됩니다.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한 번 해석해 보죠.
지금 상황에서 6학년 담임선생님에게 필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1번. 친위대가 엄석대를 고발하게 만들어 엄석대의 부활을 막는 것.
2.번 친위대에게 자신이 더 강한 지배자임을 보여 주는 것.

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해 6학년 담임선생님은 '솔직히 말하면 안 때리겠다'는 거짓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친위대가 잘 믿지 않자 억지웃음까지 보이며 안심시킵니다.
그리고 꼬임에 넘어간 친위대가 엄석대를 배신하자마자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하고는 몽둥이를 휘두릅니다.
자기가 엄석대보다 더 강한 지배자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죠.

이렇게 친위대를 정리하고 난 6학년 담임선생님은 이제 나머지 반 아이들에게도 엄석대를 고발하라고 시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한병태의 태도를 한 번 살펴 보죠.

'나는 몸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그의 신음소리를 들은 듯했다.'

교실에 총 62명의 사람이 있는데, 그 중에서 한병태는 하필 엄석대의 마음 깊은 곳의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한병태가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지난 회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후반부에서 한병태는 철저하게 엄석대의 대리인으로서 행동합니다.
즉, 엄석대의 생각과 행동을 한병태가 대신해 줍니다.
그래서 반 아이들이 한 명씩 엄석대를 고발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한 가지 묘한 것은 아이들의 태도였다.'

라면서 고발의 '내용'이 아닌 '태도'를 문제 삼고, 마치 자신이 모욕 받은 것처럼 아이들에게 혐오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신의 차례가 되자 아무 것도 모른다고 잡아 땝니다.
이렇게 한병태는 '6학년 담임선생님 + 반 아이들 VS 엄석대'의 싸움에서 혼자 엄석대의 편에 서서 그를 옹호합니다.

이 사건에서 한병태는 반 아이들에 대해 모순되는 두 가지 평가를 내립니다.

1번. 더 강한 자가 나타나자 서슴없이 엄석대를 배신하는 비겁한 존재.
2번.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변혁을 열망하는 용기 있는 존재.

작가는 왜 두 개의 상반된 평가를 함께 보여주는 걸까요?
1번 평가는 평소 이문열 씨의 입장이므로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합니다.
문제는 2번인데, 이건 이 소설이 출판된 당시의 상황에서 답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은 1987년의 6월항쟁과 대통령 선거 사이에 출판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그 어느 때보다 군사독재의 종식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높았던 시기였지요.
그리고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이문열 씨도 대중들의 열망에 답을 해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입니다.
그런데 이문열 씨가 비판하는 그 대중이 바로 자신의 책을 구입할 독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작가는 자신의 자존심(1번)과 독자들의 열망(2번)을 모두 담고자 했고, 그 때문에 반 아이들에 대한 상반되는 두 개의 평가가 동시에 나타나게 된 것이 아닐까 추정해 봅니다.

이 소설은 여러 면에서 이연걸 주연의 영화 [영웅]과 비슷합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무명'은 중국대륙을 통일한다는 핑계로 계속 전쟁을 일으켜 학살을 일삼는 '진시황'을 암살하려고 접근합니다.
하지만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점점 그에게 감화되어 결국 암살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무명'이 변해가는 과정이 '한병태'의 모습과 겹칩니다.

이 소설에서 6학년 담임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친다며 폭력을 사용합니다.
정말 폭력으로 민주주의를 가르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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