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훈 MY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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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론과 돼지-다시 읽기] [필론과 돼지] 다시 읽기-part02-외적 갈등과 내적 갈등. (0) 2023/01/23 PM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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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각반이 등장합니다. 이처럼 서울의 봄을 깨고 다시 군사독재로 되돌아가려는 이들은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이 소설의 외적 갈등이 시작됩니다.

처음에 이들은 술값을 보태달라고 정중하게 제대병들에게 부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곧 강요와 폭력으로 바뀝니다. 이러한 제대병들의 폭력은 이문열 씨의 인터뷰에서 드러나듯 광주민주화운동을 상징합니다.

이문열 씨는 1980년 5월 대한민국의 상황을 한 군용열차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소설가로서 이문열 씨를 높게 평가하는 점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그는 복잡한 현실의 양상을 소설 속에서 단순하고 명쾌하게 재설정하는 데 매우 뛰어난 작가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주인공의 부끄러움, 즉 내적 갈등도 시작됩니다.

그는 이 열차에서 최고의 학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따라서 지식인인 자신이 대중을 이끌고 폭력에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반면에 홍동덕은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그는 그런 사회적 책임을 요구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이문열 씨의 위상이 이런 사회적 역할을 요구 받을 정도였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7년 후에 쓰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상업적 성공과 함께 대중적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고, 80년의 이문열 씨는 문단 내에서 주목 받는 수준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이문열 씨 개인은 자신이 이런 시기에 지식인으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했고, 거기에 큰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 부끄러움은 민주주의가 '선'이고 군사독재가 '악'이라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16페이지에서 주인공이 헌병이나 공안원이 나타나 주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17페이지에서 홍동덕 역시 주인공과 똑같은 생각을 합니다.
그는 처음에는 놀라다가 이내 홍동덕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잠시 그가 홍동덕을 미워하는 이유를 분석해 보죠.

주인공은 이 열차에서 최고의 학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반면에 홍동덕은 최저의 학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또한 주인공은 엘리트 의식에 가득 찬 인물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하는 생각은 지식인들만 할 수 있는 철학적 고민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홍동덕도 같은 생각을 한다면, 자신의 특별함을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홍동덕으로 인해 그의 좌절감과 부끄러움은 심화되어 갑니다. (이것은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필론의 에피소드에서도 반복됩니다.)

19페이지에서 첫 번째 영웅이 등장합니다. 그는 힘을 상징합니다.
이문열 씨는 이 소설 속에서 전두환 세력에 맞설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고 있는데, 첫 번째로 힘으로 전두환 세력을 꺾을 수 있을 것인지 시도해 보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는 다음 화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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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론과 돼지-다시 읽기] [필론과 돼지] 다시 읽기-part01-사회적 배경. (0) 2023/01/23 AM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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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론과 돼지>는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 직후에 발표되었고, <우일영>은 1987년의 '6월항쟁' 직후에 발표되었습니다. 즉, 하나는 전두환 정권이 출발하던 즈음에, 다른 하나는 끝날 즈음에 발표되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특히 주목한 것은 '전두환 군사독재'에 대한 작가의 인식의 변화입니다.

<필론과 돼지>의 '검은 각반'과 <우일영>의 '엄석대'는 모두 전두환 씨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각각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모습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필론과 돼지>에서 검은 각반은 속된 말로 '양아치'입니다. 하지만 <우일영>에서 엄석대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비범한 인물'입니다. 비록 그가 후반부에 갑작스레 몰락하기는 하지만, 한병태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가 지배하던 질서를 간절히 그리워합니다. 이처럼 이 7년 동안 전두환 군사독재를 바라보는 작가의 인식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또한 이 소설은 이문열 씨가 왜 민주주의를 혐오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해줍니다. 이문열 씨의 작품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가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1996년작인 <선택>이라는 소설을 보면 아래와 같은 언급이 나옵니다.

개인이 비대해져 개인의 평안, 개인의 행복 위에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회가 되면 제도는 비웃음 속에 소멸될 수밖에 없다. (p.71)

라마인(로마인)들은 가장 먼저 민주주의의 맛을 본 사람들이지만 치욕스런 제정(帝政)으로 끝장을 보고 말았다. (p.78)

두 문장을 종합해 보면, 이문열 씨는 민주주의란 결국 왕정이나 독재에 의해 소멸할 수밖에 없는 열등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문열 씨의 인식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필론과 돼지>의 초반부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광주민주화운동에서 독재에 맞서지 않고 침묵했다는 이문열 씨의 부끄러움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의 부끄러움을 해소하려 합니다. 따지고 보면 이 부끄러움은 민주주의가 선이고 군사독재가 악이라는 전제 때문에 발생합니다. 따라서 만약 민주주의가 악이고 군사독재가 선이라면, 부끄러워할 이유가 사라집니다. 즉, 이문열 씨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악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인공인 '그'는 초반부에는 군사독재를 혐오하지만, 후반부에서 제대병들의 광기를 보고 나서는 민주주의를 더 혐오하게 됩니다.

제가 이 소설에서 집중적으로 설명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작품의 '시점'과 '홍동덕'이라는 조연의 존재입니다.

이 소설은 전지적 작가 시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소설에서 흔히 사용되는 시점이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조금 이상합니다.

소설 속에서는 검은 각반들과 제대병들이 충돌합니다. 이것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은유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기만 하는 관찰자이자 주인공인 '그'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를 관찰하는 전지적 시점의 '화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도 '화자'도 결국 이문열 씨의 대리인입니다. 즉, 이 작품에는 이문열 씨가 두 명 등장합니다. 이건 매우 이상합니다. 왜 '그'의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사용하거나, '그'를 생략하고 전지적 시점을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그게 작품을 훨씬 간결하게 만들었을 텐데 말입니다.

홍동덕 역시 주인공인 그와 마찬가지로 사건에 전혀 개입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인공의 옆에서 끊임없이 그의 부끄러움을 자극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두 가지 설정은 모두 작가인 이문열 씨가 당시에 느꼈던 '부끄러움'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음 회부터 이 이야기를 본격적인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사건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열차칸은 대한민국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을 상징하는 100명의 제대병들이 타고 있습니다. 제대병들은 이 열차가 자신들을 고향으로 데려다 줄 것이란 기대에 들떠 있습니다. 즉, 갑작스레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군사독재가 끝나면서 전국이 민주화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던, ‘서울의 봄’ 당시의 대한민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인공인 ‘그’는 등장하자마자 ‘지난 삼 년의 병역생활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라고 언급합니다. 이 문장은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지난 18년간의 박정희 군사독재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지금 이문열 씨의 정치적 스탠스를 생각해 보면 매우 이상한 일이지만, 이때에는 그 역시 군사독재를 지독히 싫어했던 모양입니다. 당연히 그는 검은 각반(전두환 군사독재)이 등장하자 처음에는 그들에게 반감을 가집니다.

‘대구에서 고향까지 이백 리 길’이란 언급과 주인공이 ‘이 형’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봐서 그는 ‘안동 이 씨’인 것 같습니다. 즉, 주인공은 이문열 씨와 매우 닮은 인물입니다.

이 작품의 시점은 조금 이상합니다. 사건을 관찰하는 주인공이 있고, 그런 주인공을 관찰하는 화자가 있습니다.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사용해도 별 차이가 없는데, 왜 이렇게 복잡하게 설정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이 소설 속의 '그'를 '나'로 고쳐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건 아마도 이런 이유인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은 이문열 씨가 느꼈던 ‘부끄러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1인칭 시점을 사용하면, 독자들은 당연히 주인공과 작가를 연결시키려 할 것입니다. 때문에 굳이 3인칭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꺼낼 때, 괜히 ‘이건 내 친구 이야긴데…’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인물의 첫 사건은 그 인물의 성격을 보여줘야 합니다. 주인공인 '그'는 열차 가운데와 출입구는 귀찮은 사건에 말려들기 쉽기 때문에 1/4 정도에 앉는 것이 안심이 된다고 합니다. 작가는 이렇게 남의 일에 말려들기 싫어하는 주인공의 성격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앉자마자 ‘홍동덕’이 나타납니다. 참고로 이 열차칸에서 주인공은 최고의 학력(대졸)을 가진, 그리고 홍동덕은 최저의 학력(초등 중퇴)을 가진 인물입니다. 작가는 홍동덕을 통해 주인공이 더 큰 좌절감과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설정하고 있습니다.

9페이지에서 중요한 언급이 나옵니다.

‘형태나 방식이 다를 뿐, 삼 년간에 바쳐야 할 봉사의 양은 동일하다는 것을’

주인공이 군대를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젊은이들이 동일한 양의 봉사를 해야 한다는 것. 즉,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같은 양의 고생을 해야 한다는, 이 평등이 싫은 겁니다. 그는 최고의 학력을 가진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것이 그가 매번 홍동덕에게 분노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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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눈물-다시 읽기] [우상의 눈물] 다시 읽기-part10-이미지 조작. (0) 2023/01/22 PM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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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회에서 임형우가 하는 것은 최기표에 대한 '이미지 조작'입니다.

비록 최기표 자체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대중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최기표 본인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 장면은 현대 사회에서 왜 언론의 역할 중요한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언론은 이렇게 자신의 가정을 현실로 바꿔놓을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담임과 임형우가 나서서 모금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반 아이들의 동참을 유도합니다. 이 일련의 과정이 아주 매끄럽게 진행되기 때문에, 반 아이들은 자신들이 선동 당하는 지도 모른 채 앞다투어 모금에 동참합니다.

그러자 담임은 곧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한껏 천사로 포장해 놓은 자신의 이미지를 신문을 통해 퍼뜨리는 것입니다.
당연히 여기에 임형우도 끼워줘야 합니다. 혹시라도 그가 배신하면 안 되니까요.

이제 수많은 사람들이 신문을 통해 최기표의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읽은 이야기는 62명의 반 아이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이야기와는 많이 다를 겁니다.
이렇게 최기표에 대한 두 개의 이야기가 동시에 존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회에서 어떤 이야기가 '진짜 이야기'로 유통될까요?

그런데 담임의 욕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최기표의 이야기로 포장한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까지 만들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담임은 정말 거대한 욕망을 감추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잠시 최기표의 입장이 되어 봅시다.
영화 속에서 담임과 최기표는 어떤 모습으로 연출될까요?
어쨌거나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볼 것이고, 그들은 영화 속의 담임이 진짜 담임이고, 영화 속의 최기표가 진짜 최기표라고 믿을 겁니다.
만약 그들이 어쩌다 최기표를 만난다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나는 진짜 너를 알아."

이렇게 최기표는 담임에 의해 뜯어고쳐지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그는 공포를 느끼고 집을 뛰쳐나갑니다.

이 과정을 지켜보던 이유대는 자신이 그 동안 착각해 왔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유대와 비슷한 착각을 하고 있던 1980년 봄의 대중들에 대한 경고일 것이며, 이렇게 작가는 '위선적인 악이 가장 위험하다'라는 주제를 완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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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눈물-다시 읽기] [우상의 눈물] 다시 읽기-part09-구원 (0) 2023/01/22 PM 12:07


이전 회에서 이유대와 아는 형이 나눴던 대화가 이번 회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1. 신은 악마를 매우 거북하게 생각한다.

2. 하지만 악마만이 신을 돋보이게 만들수 있기 때문에 신은 괴롭다.

3. 결국 신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일에 악마를 이용한다.


처음에 담임은 최기표를 막연히 골칫거리로 생각하고 길들여보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임형우가 테러를 당하고, 최기표가 끝내 길들여지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자 고민에 빠집니다. 그러다가 담임은 전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차피 길들여지지 않을 악마라면 자신을 신으로 포장하는데 철저하게 이용하자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 동안 자신의 아바타 역할을 충실히 해 왔던 임형우도 끼워줍니다. 임형우 역시 언젠가 이런 보상을 기대하고 그 동안 담임의 명령을 실행해 왔던 것일 겁니다.)

여기서 담임이 왜 반장으로 이유대보다 임형우를 더 선호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자신과 더 많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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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페이지에서 임형우는 '선생님은 기표를 구원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두 번째 페이지에서는 '그것(구원)은 기표가 생각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그들이 진정한 구원에는 관심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앞으로 있을 담임과 자신의 행위를 구원이란 단어로 포장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당신들의 천국>에서 원생들을 구원하겠다는 조백헌 원장의 태도와도 비슷합니다.)


이어서 담임은 자신을 구원자이자 헌신적인 교육자로 포장하기 위해 최기표를 '구원 받아 마땅한 한 마리의 벌레'로 포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런 담임의 계획을 반 아이들에게 전달하여 여론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임형우는 지식인들 중에서도 특히 언론인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이유대는 최기표가 담임보다 강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말을 반전처럼 만들어 주제를 더욱 강조하려는 장치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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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눈물-다시 읽기] [우상의 눈물] 다시 읽기-part08-플랜B. (0) 2023/01/21 PM 07:45


지금까지 담임의 행동을 정리해 보면, 그의 목표는 오직 교사로서 자신의 평판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1년 동안의 무사안일이 필요했고, 그래서 임형우를 통해 최기표에게 적절히 당근을 던져주며 관리해 왔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아바타인 임형우가 테러를 당하게 되자 담임은 전략을 완전히 수정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 소설의 주제이기도 한, 담임의 본성이 비로소 폭로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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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페이지에서 이유대는 임형우의 집 전화번호를 알면서도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시치미를 뗍니다. 그리고 네 번째 페이지의 담임의 대사를 들어보면, 그가 컨닝 사건의 배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유대는 최기표를 미워하는 담임에게 분노합니다. 이처럼 임형우가 담임의 입장을 대변하듯이, 이유대는 철저하게 최기표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임형우는 학교 전체의 영웅이 됩니다. 왜냐하면 학교 밖으로 알려질 수도 있었던 큰 사건을, 자기 한 사람을 희생시켜 '덮었기' 때문입니다. 즉, '무사안일'이라는 공동체의 목표를 위해 복무했기 때문입니다.

일곱 번째 페이지를 보면 담임은 이틀 동안 오로지 최기표의 집을 찾아 헤맵니다. 소설 초반에 잠시 언급되었던 것처럼, 이 소설에서는 가정방문을 당한 학생은 담임에게 힘을 쓰지 못합니다. 담임은 결국 최기표의 집을 찾아내게 되는데, 이것이 이야기의 분기점이 됩니다.

이렇게 다시 학교에 나타난 기표의 약해진 모습에 이유대는 심한 불안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의 섬뜩한 시선을 확인하고는 안심합니다. 이처럼 이 소설 속의 두 지식인(이유대와 임형우)은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철저하게 지배하는 대신 권력을 나눠주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페이지의 '담임선생님과 함께 남모르게 애써 온 그 숨은 이야기'에는 담임의 새로운 전략이 어떤 것인지 드러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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