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퍼필로우 MYPI

템퍼필로우
접속 : 2245   Lv. 52

Category

Profile

Counter

  • 오늘 : 9 명
  • 전체 : 126042 명
  • Mypi Ver. 0.3.1 β
[잡담] 현대와 자동차 (0) 2021/12/31 PM 11:24

현대와 자동차

 

 

 

현시대를 관통하는 가치 중 하나가 바로 다양성이다. 다양성은 명분과 실리를 둘 다 잡았다. 명분을 보자. 다양성은 지극히 인본주의적이다. 다양한 인류를 위하기 위해서는 다양성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실리를 보자. 다양성은 지극히 민주주의적이며 자본주의적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에게 주권이 있기에 국민이 가진 다양성을 수용할수록 권력을 얻기가 수월하다. 자본주의는 상품을 소비할 소비자가 있어야 되기에 인류가 가진 다양성을 수용할수록 재력을 얻기 수월하다. 다양성은 도덕적이고 실용적이다. 다양성은 사회가 개방되고 발달될수록 가치가 높아진다. 개방되고 발달된 미국에서는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취지로PC(Political correctness)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세련된 도덕성을 얻길 바라는 일부 신세대와 권력을 얻길 바라는 일부 정치가와 재력을 얻길 바라는 일부 자본가가 PC주의를 지지하고 있는 중이다. 그 지지로 미국 전체가 들썩이고 있다. 미국을 넘어 세계의 문화에까지 침투 중이다.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만큼 PC주의를 지지하는 이들도 많지만, 올바름을 근거로 타인에게 PC주의를 강요하는 일로 인해 염증과 피로감을 느끼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확실히 말하겠다. 다양성은 올바르나 PC주의는 올바르지 않다. 목적은 찬성하나 수단은 찬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PC주의는 객관적 기준이 없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고 다양성과 자동차의 새로운 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PC주의는 사회주의적이며 종교적이며 무질서하다. 종교적이며 무질서하다는 말은 굉장히 모순되는 말이지만 차근차근 알아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자유주의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할 정도로 사회의 규율보다는 개인의 의지를 우선시한다. 사회주의는 사회가 도덕성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을 할 정도로 개인의 의지보다는 사회의 규율을 우선시한다. 이런 차이에 의해 자유주의는 개인의 의지에 따라 사회의 규율이 바뀌는 일이 잦지만, 사회주의는 사회의 규율에 따라 개인의 의지가 바뀌는 일이 잦다. 사회주의가 사회의 규율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도덕을 명분으로 곧잘 자유주의를 비판하고는 한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볼 것이 있다. 사회주의의 도덕성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보자. 대부분 인간은 전통적인 도덕관념에 의해 도덕성이 길러진다. 유교의 세계관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유교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고 기독교의 세계관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기독교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대 종교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 도덕성을 기반으로 사회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 탓에 대부분 종교가 교인의 의지보다 종교의 교리를 우선시했던 것처럼 사회주의 또한 개인의 의지보다 사회의 규율을 우선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민중이 사회주의를 상대적으로 쉽게 받아드릴 수 있었던 것은 민중을 위한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종교에 길들여진 민중에게 있어 그 방식 자체가 너무나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에서도 사회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은 한국 또한 국민의 의지보다 유교의 가르침을 우선시하던 국가였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도덕성이 부족하고 사회주의는 도덕성이 낡았다. 이에 따라 인류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가 고유한 도덕성을 갖추는 진보를 해야 할 것이다.

 

PC주의 또한 개인의 의지보다 PC주의의 규율을 우선시한다. 가령 PC주의의 규율과 어긋나는 걸 보게 되면 잘못되었다고 화를 내며 PC주의를 따를 것을 강요한다. 지극히 사회주의적이고 종교적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여기에 무질서가 추가되었다. PC주의가 주장하는 도덕성이 다양성이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인종과 민족, 종교, 성별 등을 차별이나 편견 없이 바라보자 주장했고, 그걸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이들이 주장하는 가지각색의 규율을 올바르다 해버렸다. 공통된 기준이 없이 각자의 집단의 주관에 옳고 그름을 맡겨버린 것이다. 각자 주관에 맡겨버린 탓에 질서가 사라졌고, 질서가 사라진 탓에 목소리가 큰 이들의 주장이 주로 수용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세력이 많거나 감성적인 이들의 주장이 주로 수용되고 세력이 적거나 이성적인 이들의 주장은 배척되게 되었다. 미국에서 흑인과 아시아인의 차이를 떠올려보면 된다. 흑인이 당하는 인종차별에는 PC주의가 크게 반응하는 반면, 아시아인이 당하는 인종차별에는 PC주의가 적게 반응하고 있다. 약자에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에만 주목하지, 그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난폭한 행동을 하며 강도질하는 것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이처럼 PC주의는 공통된 기준이 없어 세력이 크고 감성적인 이들의 무질서를 용인하게 되었다. PC주의는 객관적인 기준이 없는 이상 무질서하고 비이성적인 평등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가령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인종과 민족, 종교, 성별 등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PC주의의 이름으로 다양성을 존중하게 되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발생한다. 미국에서는 12 25일을 크리스마스라 부를 것인지 아니면 홀리데이라 부를 것인지에 대해 치열한 논쟁 중에 있다고 한다. 자유주의자라면 그 날을 크리스마스라 부르던 홀리데이라 부르던 본인과 타인의 자유에 맡긴다. 하나 PC주의자는 모든 인간에게 그 날을 홀리데이라 부를 것을 강요하며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

 

주관으로 인권을 결정하다 보니 질서가 사라져 이런 황당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성적 지향을 존중하기 위해 남성의 몸을 가진 사람이 여성 화장실에 출입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출입한 남성은 화장실에서 여성을 성추행 했다고 한다. 신체적 특성이라는 객관적 기준이 아닌 정신적 성적 지향이라는 주관적 기준에 특정 성별의 공간 출입여부를 결정해버리니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자 입장에서 자유라는 기준으로 질서 있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게 아닌 각자 주관에 맡긴 질서 없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걸 추구하는 PC주의는 용납할 수가 없다. 진정 다양성을 원한다면 객관적 기준을 가지고 추구하길 바라겠다.

 

 

한국은 세력이 크고 감성적인 여성주의의 목소리가 크다. 여성주의 또한 PC주의와 같이 인간의 의지보다 여성주의의 규율을 우선시하고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을 결정하고 있다. 가부장제 세계관에 있는 여성주의자는 다른 여성들에게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을 여성인권을 명분으로 강요하고 있다. 가부장제 세계관은 유교와 기독교에 영향을 받아 여성에게 혼전순결과 정절을 지킬 것을 강요하고 있다. 대부분 인간의 도덕성은 당대의 전통적인 도덕관념에 의해 형성되는 만큼 많은 여성주의자가 이런 걸 도덕적이라 받아드리고 있었다. 여성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여성 성 상품화를 죄악시했던 것이다. 그 결과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게 되었는데, 그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남성의 성욕 탓을 하게 되었다. 그런 탓에 정상적인 이성에 대한 성욕조차도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한국사회는 전통적인 도덕관념에 의해 그걸 수용해버렸던 것이다. 이성애의 결핍은 정조관념에서 시작되었고, 그 정조관념을 인권으로 여긴 여성주의에 의해 더욱 결핍되게 되어버렸다. 한국의 저출산은 이성애 결핍으로 인한 이성관계 붕괴로 인한 것이다. 이해가 어렵다면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떠올려보자. 여성 성 상품화가 자유롭지 못한 까닭은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이고, 남성 성 상품화가 자유로운 까닭은 남성이 성적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성 문화를 자유롭게 즐긴 것은 남성이 성적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고, 남성이 성 문화를 자유롭게 즐기지 못하는 것은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주의의 성 상품화 비판은 그야말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무시하는 여성 자유권 침해이며, 정상적인 이성애의 발달을 막아 출산율을 낮춰 사회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인문학적 고찰이 부족한 실수다.

 

성인지감수성은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의지가 약하고 성적 수치심이 강한)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을 말하며, 그런 여성상을 지금 여성인권을 명분으로 신세대 여성에게 강요 및 세뇌하고, 사회에 그런 여성상을 수용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여성주의자는 그 누구보다 가부장제를 비판하면서 그 누구보다 가부장제의 여성상을 여성과 사회에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하는 여성에게 지원금을 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것 또한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을 떠올려보면 된다.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은 남성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기 때문에 모든 성매매는 남성의 강요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인식하여 그런 짓을 저질렀던 것이다. 성 상품화나 성매매가 여성의 자유의지로 이루어진다면 자유국가는 그 자유권을 존중해야 한다. 성 상품화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다른 형태의 성 상품화도 문제가 없게 된다. 성적 문화의 탄압이 가부장제 여성상에서 왔다는 걸 인식하길 바란다.

 

어떤 여성이 학교나 직장에서 힘든 일이 있으면 나서지 않는 것은 첫째로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은 의지가 약하고 성적 수치심이 강하기 때문에 힘든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며 둘째로 여성주의는 주관적 손익을 인권으로 결정하기 때문에 손해에 해당하는 힘든 걸 인권침해라 받아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로 여성주의자가 아님에도 힘든 일에 나서는 여성이 드물고 두 번째 이유로 여성주의자들은 더욱 더 힘든 일을 외면하고 있다. 진정한 여성인권을 말한다면 평등한 관점에서 힘든 것도 같이하고 특혜를 거부했어야 했다. 학교나 직장에서 힘든 일이 발생하면 성별 관계 없이 할 수 있는 만큼은 같이 하고, 파견 또한 오지라고 해도 평등하게 받아드리고, 징병의 의무 또한 같이 했어야 했다. 평등한 관점에서 여성전용 특혜 거부나 여학교 폐지를 주장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도구로 여기고 여성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여성주의는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지 않고 여성 성 상품화를 죄악시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여성의 자유권 침해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열등하게 보고 힘든 일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여성주의는 여성이 힘든 일을 하는 것 자체를 여성혐오라 말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여성에 대한 멸시다. 한국 여성주의는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해 여성의 자유권을 침해하고 여성의 능력을 무시하는 여성차별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내가 주장하는 역할주의적으로 보자. 가령 역할주의의 관점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면 모두가 평등하게 역할수행유무로만 존중이 결정되게 된다. 역할주의의 이름으로 인종과 민족과 종교와 성별 등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주의로 접근하면 여성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여성혐오라 주장하게 된다. 여성의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이 결정되다 보니까 제 역할을 못한 것에 대한 비판조차도 혐오로 받아드리고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자이며 역할주의를 주장하는 입장에서 이런 수준 낮은 사상을 어떻게 반대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사실 여성주의라 자칭하는 자체가 이상하다. 대놓고 나는 한쪽 입장만을 대변하는 편향적인 인간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그게 올바르다 말하고 있다. 같은 잣대로 남성주의를 주장하는 남성을 비판하는 것처럼 여성주의를 주장하는 여성을 비판하겠다.

 

최근 단어의 정의도 주관에 맡기는 일이 많은 바람에 연상의 언행에 심적 불편함을 느끼면 근거 없이 꼰대라며 공격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꼰대의 어원과 별개로 그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은 연상이란 이유로 타인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인간을 말한다. 이런 강요는 사회적으로 보면 꼰대가 있고 경제적으로 보면 갑질이 있다. 반대로 강요하지 않는 이상 꼰대가 아니라 그냥 자기의사표현이다. 무지 또한 예외가 아니다. 주관에 맡겨버리다 보니 무지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들까지 생겨버렸다. 모르는 걸 알려주면 되려 화를 낸다. 정상이 아니다. 이런 비이성은 기준이 없는 사상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겠다. 어떤 규율보다 인간의 의지를 우선해야 자유가 보장되고, 객관적 기준이 있어야 질서가 생기고 질서가 있어야 이성이 생긴다. 이런 형편없는 사상에 선동되거나 세뇌되지 않기를 바라고,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하루라도 빨리 개인의 의지를 우선시하고 질서 있는 다양성을 추구하길 간곡히 바라겠다.

 

 

 

다양성

 

현대 광고가 눈에 띄어서 상대적으로 유명한 현대자동차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현대자동차가 노조나 차내 결함 따위로 논란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해선 주제와 관련이 적으므로 논점이탈을 막기 위해 언급하지 않겠다. 현대가 로봇회사를 운영하는 걸 보았을 때 미래지향적인 것 같다. 그건 확실히 의미 있는 일이다.

 

자동차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자동차. 이동수단. 인간을 태우고 이동하는 수단. 인간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동하는데 쓰이는 수단. 자동차는 인간에 맞춰 환경, 지형, 날씨, 온도 등을 고려하며 만든다. 자동차는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각의 용도에 맞춰 소형, 대형, 산악용, 사막용, 운반용, 공사용 등으로 만든다. 자동차는 인간의 사정에 따라 가격을 다르게 만든다. 자동차는 인간의 취향에 따라 디자인이 다르게 만든다. 생각하다가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바로 대상이다. 모든 자동차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인간이 탑승할 것을 전제하고 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하는 게 이해되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러나 자동차는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동하는데 쓰이는 수단이다. 만약 인간이 탑승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목적이 달성될 수 있으면 된다. 가령 출장이 필요할 때가 있다. 요즘은 컴퓨터관련은 원격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출장이 필요하지 않지만, 인간이 직접 작업을 해야 할 때에는 출장이 필요할 수가 있다. 그럴 때 만약 인간형 로봇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인공지능 차량에 인간형 로봇을 탑승시킨 후 출장시키면 된다. 그러면 인간의 목적은 달성된다. 간단한 얘기다. 많은 인간의 기술이 인간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 발전되었다. 걸어서 출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동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자동차나 지하철 따위의 이동수단을 이용한다. 식사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인스턴트 식품을 먹는다. 욕구해소 시간을 줄이기 위해 성상품을 소비한다. 필기입력 시간을 줄이기 위해 녹화나 녹음을 한다. 가사노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 가전제품을 이용한다. 이런 기술발달의 흐름이라면 분명 나중에는 인간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인간이 출장 가는 게 아닌 인간형 로봇이 출장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만이 차량에 탑승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인간 외의 대상을 고려하여 자동차를 만드는 것. 이게 바로 대상의 다양성이 된다.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몇 가지 확정사항이 있다. 인간형 로봇이 등장하는 것은 확정사항이다. 완전운전자동화 자동차가 등장하는 것은 확정사항이다. 부의 편중화에 따른 일부의 과잉자산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세가지를 고려하면서 새로운 길을 알아봐야 한다.

 

 

첫째, 대상의 다양성. 인간형 로봇이 등장한다면, 자동차에 인간이 아닌 로봇이 탑승할 수 있다. 기술이 부족한 지금은 로봇이 아니더라도 좋다. 애완동물을 반려동물이라 부르며 인간에게 쏟을 애정을 동물에게 쏟는 이들이 많다. 그들에게 동물은 인간과 동격에 가까운 존재이므로 그런 동물에 맞춘 차량을 개발하면 충분히 관심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말해두는데 특정 동물이나 반려동물에 대한 애호는 도덕이 아니라 취미다. 도덕이라면 그런 애호 자체를 타인에게 요구할 수 있지만 취미라면 타인에게 애호가 아닌 존중을 요구할 수 있다. 그 차이를 명확하게 인지하길 바란다.

 

인간형 로봇은 등장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반드시 등장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없으므로 그걸 대상으로 하여 자동차를 만들기가 어렵다. 하지만 인간형 로봇이 없더라도 지금 당장 로봇은 존재한다. 그런 로봇들과 결합한 자동차를 만들어 로봇자동차라는 이미지를 선점하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한다. 가령 드론을 자동차 어딘가에 부속할 수 있다고 해보자. 그걸 이동을 멈추고 정찰하는데 이용하거나 조수석에 있는 이가 가지고 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개념은 과거 매를 날려 정찰하던 것과 같은 것이다. 지금 당장 드론의 속도가 빠른 것이 아니므로 적절하게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로봇과 자동차의 결합이라는 개념을 선도할 수 있을 것이다. 로봇 개를 활용할 수도 있다. 미래에 인간형 로봇이 만들어지면 인간을 수행하는 비서와 같은 일을 할 수도 있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짐을 운반하고 위협으로부터 주인을 보호하는 일을 로봇이 할 수 있다. 지금 당장 기술이 부족하여 그걸 할 수는 없지만 로봇 개가 짐을 운반하는 것은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그 로봇 개를 장착할 수 있는 차량이 등장한다면 짐을 운반하는 로봇과 자동차의 결합이라는 개념을 선도할 수 있을 것이다.

 

파워태권도라는 것이 있다. 게임의 철권과 같이 체력 게이지의 감소를 관객이 명확하게 볼 수 있게끔 해둬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도입한 태권도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아무래도 인기가 적은 편이다. 다른 격투기에 비해 폭력성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기술과의 연계는 분명 이미지를 선점하는데 충분히 효과가 있다. 미래에는 어쩌면 안전보호구의 발달과 중력을 낮추는 기술의 등장으로 종래의 격투기보다 훨씬 화려한 싸움을 하는 태권도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중력을 낮추면 일시적으로 강해지고 이후 적응한다는데, 격투하는 동안에만 강해지면 되기 때문에 그건 괜찮을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미지 선점이다. 태권도가 전세계 보육원이 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훌륭하다.

 

다양성을 명목으로 로봇과 결합한 자동차 개발. 반려동물에 최적화한 자동차 개발. 동물은 소수에 속하므로 채산성이 맞을지 걱정할 수 있다. 하지만 전세계를 대상으로 만든다면 충분한 수요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미국 반려동물 수가 고양이는 9500만 마리, 개는 9000만 마리로 추정된다고 하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고양이나 개가 인간에 맞춘 좌석에 앉아 불안정하게 창 밖을 바라보는 일을 본 적이 있다. 이제 동물에 맞춘 좌석을 만들어도 그에 따른 충분한 수요가 있을 것이다.

 

자동차는 혁명을 상징하는 산업이다. 산업혁명의 변화를 마차에서 자동차로 바뀌는 걸로 설명할 때가 많다. 지금 기술혁명 또한 인간이 운전하는 자동차에서 인공지능이 운전하는 자동차로 바뀌는 걸로 설명할 때가 많다. 언젠가 미래에는 인공지능이 운전하는 자동차에서 인간형 로봇이 운전하는 자동차로 바뀌는 걸로 설명할지도 모른다. 그런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고 본다.

 

 

둘째, 차내의 다양성. 완전운전자동화 자동차가 등장한다면, 자동차 내에서 운전 외의 것을 할 수 있다. 이동하는 동안 식사를 할 수 있고 수면을 취할 수도 있다. 가령 미래에는 캡슐호텔에 동력기구를 달아 출발할 때 누어서 자다 도착하고 나서 깰 수 있는 캡슐차량이 등장할 수도 있다고 본다. 완전운전자동화가 대중화가 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당장 차내를 다양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자동차가 인간의 목적을 위해 이동하는 수단인 만큼 이동하는 동안 다른 걸 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다. 캠핑카 등이 있지만 그건 일상적인 자동차의 목적과 거리가 있다고 본다. 일상 속에서 차내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대상의 다양성이 인간 외의 존재에 맞춘 차량이라면 차내의 다양성은 인간에 맞춘 다양한 차량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건 아무래도 인간을 대상으로 한 자동차가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새로운 개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완전운전자동화에 최적화한 차량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야 완전운전자동화가 등장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완전운전자동화에 따른 차내의 다양성은 새로운 개념에 가까우므로 거기에 최적화한 차량을 계획하고 비슷한 걸 개발하여 이미지를 선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지금 인공지능 자율주행은 인공지능 기술발달이 더뎌 언제 개발될지 확정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인공지능의 발달은 지금과 같이 단순 계산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인간과 같이 알고리즘 자체 생성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정해진 알고리즘을 통해 계산하여 결론을 도출하여 학습하는 것으로 알고리즘을 성장시키는 게 아니라 최초 만들어진 알고리즘을 통해 계산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학습하는 것으로 아예 또 다른 알고리즘을 생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 유전자, 행동, 학습, 생각, 다른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이 말이다. 요컨대 알고리즘 겹치기다. 알고리즘을 하나 만들고 거기에 또 다른 알고리즘을 겹친다. 겹치고 겹치고 겹치면서 인공지능이 어떤 알고리즘을 이용해 계산할 것인지 판단하게 하면 된다. 하나의 알고리즘 내에서 수많은 계산의 결과를 인공지능이 선택하는 게 아니라 셀 수도 없이 많은 계산하는 알고리즘들을 선택하게 하면 된다. 그 선택과정 속에서 알고리즘을 조합하여 또 다른 알고리즘을 만든 것으로 행동한다. 그런 식으로 반복하며 자아가 형성된다. 인공자아다. 인간은 매일 세포를 바꾼다. 세포의 신호를 통해 인간의 자아가 형성되는 걸 고려하면, 매일 매시간 매초 다른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보면 된다. 다른 인간임에도 하나의 자아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알고리즘이 담긴 기억 자체가 인간의 자아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같이 알고리즘과 알고리즘에 전달되는 신호가 계속 바뀌며 알고리즘 자체도 계속 바뀌는 기능을 도입하면 인간과 비슷한 자아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차내의 다양성은 인공지능의 성장이 필수적일 것이다. 일단 개념적으로 정리해두겠다.

 

 

셋째, 차량의 다양성. 일부의 과잉자산이 현재진행형이므로, 그들을 위한 차량개발이 가능할 수 있다. 차량 또한 컬렉터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자본주의의 특성상 돈이 계속 늘어나기 때문에 일부는 상상이상의 돈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현대미술이나 코인이나 NFT에 돈이 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이들의 니즈를 만족시키기 위해 컬렉션화를 할 수 있는 컨셉카를 만드는 것이 좋다고 본다. 스마트폰 같은 기기와 다르게 자동차는 외형을 바꾸기가 매우 수월한 편이다. 이동만 가능하면 되기 때문이다. 자동설비에 적합하지는 않지만 애초에 고가의 컨셉카를 지향하는 만큼 수작업을 늘리면 되기 때문에 괜찮을 것 같다고 본다. 자동화 설비의 증가로 노동자 고용이 줄어들어 정계와 노동계의 불편한 시선을 감당해야 하는 시대에, 수작업의 컨셉카로 노동자의 일거리를 만드는 것은 시대변화의 흐름에 적응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컨셉카의 노동자와 자동화 설비의 노동자가 같은 일은 하는 건 아니지만 보통 사회는 인원 수와 급여의 수와 같이 숫자에 주로 초점을 맞추지 어떤 일을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기 때문에 괜찮다. 이렇게 수작업이 필요한 일거리를 늘린다면 완전자동화를 대비한 연착륙이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 있다. 토토로의 고양이 버스 같은 걸 만들 수 있는 게 아닌가? 외형적인 디자인만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것 같지는 않다. 실제 고양이처럼 안과 겉에 부들부들한 털과 지하철 의자처럼 내부에 열이 흐르도록 만든다면 만질 때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다른 산업과 연계하여 컨셉카를 만든다면 다른 산업을 좋아하던 이들을 끌어들일 수가 있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콜라보다. 같은 산업과 연계하면 산업에 관심이 있는 인간의 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크게 효과를 보기 어렵지만, 다른 산업과 연계하면 상대적으로 크게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본다.

 

수집을 목적으로 한 컨셉카는 매년 또는 매월 한정적으로 제작하고 상대적으로 고가에 팔면 될 것 같다. 에르메스라는 명품은 단순히 비싼 걸 넘어서 구매자격이 필요하다고 한다. 어떤 매장의 제품을 많이 사야 구매할 자격이 부여된다고 한다. 과잉자산이 명품에 대한 욕구를 크게 늘려 공급자가 우선되는 상황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수집욕을 만족시킬 수 있는 명품 컨셉카의 등장은 분명 채산성을 물론이고 브랜드 가치를 올리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개인적인 바람이기도 하다. 길거리에 비슷한 차량만 보이는 건 다소 심심하기 때문이다. 게임이나 영화 또는 만화나 소설에서 보던 것과 같은 차량이 현실에 등장하는 걸 본다면 보는 것만으로도 꽤나 자극적이고 재미있을 것이다. 대중에 친숙한 브랜드를 만드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자동차의 새로운 길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았다. 다양성은 분명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다. 그것의 수단이 잘못되었기는 했지만 그 방향은 옳다. 지금 당장 자동차만 다루기는 했지만 다양성은 다른 산업에도 적용될 수 있는 가치일 것이다. 개념적으로만 접근했기 때문에 이 다양성이 어떤 식으로 나아가게 될지는 모른다. 규제나 저작권 등이 어떤 식으로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새로운 개념은 충분히 가치 있다고 본다.

 

 

 

---

 

다음은 국민과 은행입니다. 원스토어와 앱 플랫폼, LG전자, 롯데제과 등 아무거나 씁니다. 사실 은행은 답이 없을 것 같았는데 나오긴 하네요. 인문학은 사실 취업은 물론이고 창업을 목적으로도 배워야 하는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지금 당장 사회에 필요한 수많은 산업들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언인가에 대한 고찰로 나타난 게 아니었나 싶어요. 거기에 필요한 게 바로 인간을 배우는 학문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이 인문학을 발달시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파악할 수 있다면 한국의 상품이 전세계에 사랑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인문주의 인본주의 인간주의 다양하더군요. 굳이 인본주의라 한 것은 그것이 본래 뜻에 가장 적절하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위(판단이나 행동에서 중심이 되는 기준)

 

민족의 자유, 국가의 자유, 국민의 자유, 모두의 자유를 위해. 한국은 물론이고 동맹국이나 자유진영이 보다 인간의 보편적인 자유를 위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인류가 자유롭기를 바라지만 그건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요. 한국이 자유국가라면 인류의 자유를 위했으면 좋겠습니다. 당장 경제나 안보로 자유를 위하지 않는 국가와 협력하는 일이 있더라도 한국 자체는 자유를 위한 길을 걷길 바랍니다. 부디 자유를 위하는 국가와 협력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은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인 자유와 생존을 지키기 위해 자유적응과 기술적응을 해야 합니다. 자유 없는 생존은 무가치하고, 생존 없는 자유는 무의미합니다. 둘 다 갖출 수 있는 수준 높은 자유국가가 되길 바랍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대선 후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한국 국민의 눈높이가 높아졌다는 걸 의미합니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정계가 성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위해 정치개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개혁은 분야의 대표에 입법권을 주는 일이 필요하다 주장하겠습니다. 양당정치가 고착되다 보니 경쟁이 줄어들어 아무래도 한국 정치의 발전이 더디는 일이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정당에 갇혀 정당의 당리당략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당에서 벗어나 분야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이들 또한 필요하다 주장하겠습니다. 정당의 대표와 분야의 대표가 둘 다 입법권을 쥐고 정당은 국가의 방향을 결정하고 분야는 분야의 방향을 결정하는 역할분담이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내년에는 역할주의를 작성할 겁니다.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는 산업의 새로운 길을 떠올리는 것이 역할주의를 작성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본질과 가치를 통해 개념을 만들고 그런 과정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작성하는데 필요한 생각을 키워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고

 
[잡담] 네이버와 포털 (0) 2021/12/19 PM 10:24

네이버와 포털

 

 

 

네이버가 포털인 이상 인터넷 검열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검열사태를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고 시작하겠다.

 

 

첫째, 국내 기업 죽이기

 

메타로 사명을 변경한 페이스북이 미국에서 이런 지적을 받았다고 한다. 편향된 알고리즘으로 인해 정보 불균형으로 가짜뉴스에 속는 사람들이 많다. 알고리즘을 편향되지 않도록 바꿔야 한다. 얼핏 들으면 바른 말 같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자. 지금 유튜브에 관심이 없는 영상이 추천 목록으로 계속 올라온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무종교인에게 종교영상이 계속 뜨고, 잡식인 사람에게 채식 영상이 계속 뜬다. 원치 않는 정보를 계속 접해야 하는 소비자는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아, 다른 영상 플랫폼을 이용해야겠다. 당연한 결과다. 소비자가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하게 되면 시장에 외면 받는다. 페이스북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가짜뉴스 걱정으로 원하지 않는 정보를 접할 수 있도록 알고리즘을 짜면 시장에 외면 받을 것이다. 그런 결과가 예측이 가능한데 그 누가 알고리즘을 바꾸려 하겠는가? 자유국가에서 가짜뉴스는 기본적으로 개인이 교차검증을 통해 판별해야 한다. 진짜와 가짜의 판별을 위해 개인의 정보선택에 간섭하다 보면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수의 개인이 가짜뉴스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공교육으로 판별능력을 높여야 한다. 공교육을 살리지 않고 기업의 알고리즘에 간섭하는 것은 첫째로 책임회피고 둘째로 기업 죽이기다. 페이스북이 미국기업이므로 미국정계에 간섭을 받아 시장에 외면 받게 된다면 그게 바로 국내 기업 죽이기가 된다.

 

이번 검열사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네이버와 카카오 같은 국내 기업에 주로 적용되는 이번 검열은 실질적으로 그냥 책임회피 및 국내 기업 죽이기다. 과거 다음이 이메일을 전송할 때 우표값을 받겠다고 선언하여 시장에 외면 받은 적이 있다. 그것과 같이 지금 당장 국민이 국내 기업의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버리고 다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국외 기업이 국내 사정을 파악한 뒤, 국내 사정에 맞는 서비스를 공급하면 지금 국내 기업은 도태될 수도 있다. 답답하다. 세계시장을 공략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시장조차 도태되도록 압박하고 있다. 정말 감성적인 문제해결은 다방면에 피해만 준다. 단호히 말하겠다. 기본적으로 자유국가에서 개인의 인성은 공교육에서 형성해 나가야 한다. 기업에 검열이란 규제를 강요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단순한 책임전가에 불과하다.

 

타당한 규제라면 이해한다. 그러나 이번 검열사태는 말 그대로 자유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매카시즘 광풍으로 공산주의자 색출을 위해 사상 검증했던 것과 같이 페미니즘 광풍으로 성범죄자 색출을 위해 대화 검열을 하고 있는 것과 같다. 말 그대로 이성을 잃은 짓이다. 과거 한국에서도 간첩을 잡기 위해 국민을 예비 간첩으로 상정하고 검열과 검증으로 점철된 시대가 있었다. 불온전단지가 있을지 모른다며 불심검문으로 소지품 검사를 하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이걸 이번 사태에 맞춰보자. 오픈채팅에서 이미지에 공산주의 관련 용어나 공산당 찬양이 나오면 알고리즘에 의해 자동 검열이 되며 이걸 근거로 국가에 잡혀 들어간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에 반대하는 건 간첩이라며 공격한다. 똑같다. 과거 매카시즘 광풍으로 나타나는 자유침해나 지금 페미니즘 광풍으로 나타나는 자유침해나 동일한 논리로 작동한다. 간첩과 성범죄자가 같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맞다. 다르다. 간첩이 더 심각한 문제다. 페미니즘 광풍에 휘둘리지 않고 객관적으로 사물을 볼 수 있다면 국가 분열과 전복을 노리는 간첩과 일개 범죄자를 같은 잣대에 세우지 않을 것이다. 간첩이 있을 수 있음에도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위해 그 위험부담을 감수하기로 약속했다. 이웃이 간첩일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개인의 자유를 위해 그걸 의심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것이 민주주의자가 독재정권과 싸워 얻어낸 결과 중 하나다. 그럼에도 간첩보다 중요도가 낮은 일개 범죄자 따위를 색출하기 위해 전 국민을 예비 범죄자로 상정하고 대화를 사전 검열하는 이 사태는 정말이지 끔찍하기 짝이 없는 자유침해며 국민능멸이다. 이런 걸 고려하면 이번 검열은 독재와 맞서 싸운 이들이 찬성했다는 점에서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는 추태다. 최소한의 이성이 남아있다면 독재보다는 검열이 낫다는 식으로 반응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건 겨 묻은 개가 똥 묻는 개를 나무라는 것이다. 독재에 맞선 자유의 상징과도 같던 이들의 퇴보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둘째, 국가 이념 죽이기

 

자유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로서 나는 일관된 태도를 취하겠다.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것처럼 검열정권을 비판하겠다. 인간이 일관적인 원칙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네가 간첩일 수 있으니 국가의 안녕을 위해 네 자유를 침해하겠다. 네가 범죄자일수 있으니 국민의 안전을 위해 네 자유를 침해하겠다. 동일하다. 오히려 간첩수색이 더 타당하다. 그 방법의 잔혹성은 차치하고 명분만 보았을 때에는 그렇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위해 그런 자유침해를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보다 더 약한 수준의 것을 명분으로 인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가? 사상이 변하고 기술이 변하는 시대, 불변가치를 훼손하고 객관성도 갖추지 못한 수준 낮은 사상들이 정의라 떠들며 세계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 시대, 많은 이들이 옳고 그름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라 이 사태에 대해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답할 수 있는 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말해두겠다. 일제침략에 맞서 민족의 자유를 위해 독립을 외쳤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공산침공에 맞서 국가의 자유를 위해 피를 흘렸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군사독재에 맞서 국민의 자유를 위해 투쟁을 했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자유국가의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자유야말로 한국의 정체성임이 분명하다면, 이 검열사태는 이번 정권의 그 어떤 실책보다 더 분노해야 할 사안임이 분명하다. 자유를 침해하는 검열을 향한 네 순수한 분노는 어느 때보다 정당하다. 자유주의자에게 있어 실로 비참한 시대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의사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공산주의자의 의견이라도 막으면 안 된다. 여성주의자의 의견이라도 막으면 안 된다. 나는 그 사상들을 반대하는 입장임에도 의사표현의 자유를 막는 것에 반대하겠다. 세 살 버릇 여든 살 간다는 속담에 빌어 말하자면, 세 살이든 여든 살이든 누구나 다 자유롭게 의사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성별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이 성 상품화를 하고 싶으면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은 지금 남성이 성 상품화를 하는 건 자유롭고 여성이 성 상품화를 하는 건 부자유스럽다. 이건 멋대로 여성의 성을 억압하는 걸 여성인권이라 포장하며 여성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여성인권이 아니라 여성억압이다. 과거 유교와 기독교를 근간으로 한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의 정조관념을 근거로 한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이다. 지금 한국에서 남성이 즐기는 성 문화가 억압받는 것은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이고, 여성이 즐기는 성 문화가 자유로운 것은 남성이 성적 자유를 누리기 때문이다. 한국 남성이 성 문화를 자유롭게 즐기고 싶다면 여성의 성적 자유를 주장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성 문화 억압이 있어야 성관계를 맺어 출산율이 올라갈 거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는 성 문화 억압은 성 터부시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억압한다고 성관계가 늘어나지는 않는다. 성 문화 억압으로 출산율을 높이는 효과를 노리자는 주장은 애초에 성이 자유로운 국가에서나 해당된다. 한국은 유교의 남녀유별과 여성의 정조관념으로 이성애결핍이 발생하여 출산율이 낮아졌고,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성주의가 그걸 여성인권이라 주장하여 이성애가 더욱 결핍되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출산율이 낮아졌다. 이 출산율 저하는 한국의 인간관계붕괴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 천박한 사상을 막지 않으면 앞으로 더욱더 심각해질 일만 남았다.

 

그럼에도 지금 사회를 혼란케 하는 건 여성주의의 주장 자체가 아니다. 일부 입법과 사법과 행정이 별다른 여과 없이 그들의 주장을 감성적으로 판단하고 정책에 반영하여 사회를 혼란케 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여성주의의 주장을 이성적으로 받아드려 꼭 필요한 것만 반영했다면 이토록 사회가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말 괴롭다. 본래 삼권 중 어떤 권력이 잘못하면 다른 권력이 견제를 해야 함이 마땅한데 입법의 잘못에는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고 있다. 행정의 수장인 대통령은 입법과 같은 정당이고 관료는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사법 또한 종종 여론에 휘말려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일부 정상적인 삼권은 존재하나 안타깝게도 그 힘이 미약하다. 과거 매카시즘 광풍으로 나타나는 광기를 막기 어려웠던 것처럼 페미니즘 광풍으로 나타나고 있는 입법의 자유이념 붕괴나 사법의 법치주의 파괴나 행정의 권력에 고개 숙이기 따위를 막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이제는 변해야 한다. 판사와 관료가 목소리를 키우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나 그 어떤 이의 주장도 막으면 안 되는 것처럼 판사와 관료의 주장 또한 막아서는 안 된다. 입법 또한 모든 정치가 개개인이 분명하게 의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삼권에 요구하겠다. 광기의 흐름에 파묻히지 말고 냉철한 이성으로 올바른 주장을 하길 바라겠다. 지금 한국 사회는 과거 매카시즘의 사상검증 명분과 페미니즘의 대화검열 명분이 논리적으로 다를 바가 없음에도 그걸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이성을 잃은 상태다. 그야말로 페미니즘 광풍의 시대다. 우리는 역사를 알고 있다. 매카시즘 광풍이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페미니즘 광풍이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을지 예상할 수 있다. 이성을 잃어버린 광기의 시대. 후대에 광인으로 평가 받고 싶지 않다면 최소한 이 광기와 선을 긋길 권하겠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자유에는 위험부담 감수라는 책임이 따른다. 이런 당연한 걸 이해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정부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통금을 걸고 지역 이동의 자유를 막는다고 가정해보자. 황당할 것이다. 어떻게 그런 자유 억압을 할 수 있는가? 그런데 그게 자유와 안전과의 관계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안전하지 못하고 안전하기 위해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밤의 이동을 막으면 분명 국민은 보다 안전하다. 위험한 지역으로의 이동을 막으면 분명 국민은 보다 안전하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는 것은 자유롭기 위해서 그런 위험부담을 감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는 온라인도 마찬가지다. 댓글 자체를 막으면 악플을 겪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면 인간의 자유가 침해되고 만다. 온라인에서는 악플이란 위험부담을 감수하고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자유국가라면 온라인에서 어떤 위험이 있을 걸 감수하고 자유를 누려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어떤 잘못이 나타날 걸 방지하기 위해 인간의 대화를 사전 검열을 하는 것은 지극히 자유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짓이다. 그야말로 국가 이념 죽이기다. 자유국가의 입법이 자유 이념을 죽이고 있다. 이보다 끔찍한 일이 얼마나 더 있겠는가? 통탄스럽다. 이러한 위험부담에 대한 약속은 대량생산도 동일하다. 대량생산을 하면 분명 불량품이 나타나 국민에 피해를 입힐 수 있다. 국민이 일절 피해를 입지 않으려면 모든 생산을 수공업으로 하면 된다. 그런데 그러면 많은 국민들에게 생산품을 공급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국민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그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대량생산을 하고 있다. 자유국가의 국민들은 자유와 풍요를 위해 위험부담을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어떤 사건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사건을 처리하는 절차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셋째, 국민 성장 죽이기

 

성장에는 자유가 필요하고 자유에는 위험부담 감수가 필요하다. 당장의 안전을 위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면 인간은 성장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중국의 강력한 통제로 질서가 유지되는 걸 보며 중국의 사회주의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질서를 유지해버리면 인간은 성장할 수 없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제까지나 강요하지 않으면 질서가 유지되지 않는다. 국민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질서를 지키는 수준까지 도달하려면, 다소 질서가 흔들리는 한이 있더라도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그 질서가 흔들리는 실수가 발생해도 보장을 해야 그 실수를 통해 성장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인류는 위험부담을 감수할 수 있어야 자유로울 수 있고, 자유로울 수 있어야 성장할 수 있다. 안전을 명목으로 국민의 자유를 침해한 것은 국민의 성장을 죽이는 일과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겠다. 이는 아동교육도 마찬가지다.

 

자녀를 강력한 통제로 키우면 분명 자녀는 안전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미숙아로 자라게 된다. 이는 사회가 발전하여 아동의 인권이 높아질수록 심해진다. 사회에서 아동의 인권을 중요시하여 보호자에게 아동보호를 강압한다. 그러면 보호자는 아동이 사고 치거나 당하지 않도록 보호자 및 어른의 말을 잘 듣게끔 의지를 약하게 만든다. 의지가 약화된 아동은 스스로 성장하는 방법을 잃고 어른에게 의존하며 어른의 말을 잘 듣게끔 되어버린다. 특히 유교권 국가는 장유유서를 성립시키기 위해 아동의 의지를 약화하는 일이 잦다. 아동의 의지가 약해야 어른의 말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보통 유교권 국가에서 교육실패는 보통 안전을 위해 자유를 억압하다 성장하지 못하는 것으로 발생한다. 사회초년생의 황당한 실수는 교육단계에서 제대로 성장할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정말 웃기는 일이다. 학생을 위해서라면 사회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려줘야 함이 마땅한데 안전을 핑계로 많은 정보를 차단하고 무지한 상태에서 사회에 내던져 버린다. 다른 나라에서는 미성년 때 이미 운전도 하고 술도 마시고 성관계도 맺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16세에 운전이 가능하고 덴마크에서는 학교에서 성관계까지 허용하고 있다. 스웨덴은 부모가 자녀의 성교육을 반대할 수 없다는 법조항도 있다고 한다. 이런 게 진짜 성장에 도움이 되는 길이다. 인간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줘야지 암기만 달달 시키면 어떻게 하나. 진짜 슬프다. 인본주의적 불변가치는 유지하고 만변가치는 인간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환경에 적응 실패한 동물이 도태되는 것과 같이 자유와 기술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류는 앞으로 도태될 것이다. 나는 한국이 도태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럼에도 미성년에게 성교육은 이르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하나 그러면 안 된다. 출산율 0.6을 찍고도 모르겠는가? 이제 변하지 않으면 멸망한단 말이다!

 

중학생의 범죄가 나날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중학생을 의제강간의 대상으로 지정해놔 그들의 범죄에 논리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상황이다. 중학생을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을 정도로 미숙하고 열등하다 해놨는데 어떻게 성인과 비슷한 처벌을 행할 수 있겠는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정보양이 늘어나게 되었다. 높은 정보양을 고려하여 그것에 맞춰 인간의 지적 능력과 정신연령을 높여야 하는데 중학생은 미숙하다라는 낡은 관념에 사로잡혀 학생을 성장시키기 보다는 보호를 명목으로 억압하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버렸다. 그야말로 시대를 역행하는 우행이다. 중학생에게 성 강요를 하거나 노리개로 삼은 것에 대한 대처는 중학생의 자유를 억압할 것이 아니라, 중학생에게 그 강요에 맞서 싸울 정도의 강한 의지를 갖출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함이 마땅했다. 만약 피해자가 바로 신고할 수 있었다면 그런 끔찍한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새를 위험하다는 이유로 새장에 가두는 쪽이 현명한가, 새가 사냥하거나 위험에 도망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현명한가, 답답하구나. 지금 중학생이 범죄를 저질러도 이것 때문에 제대로 대처가 불가능하다. 중학생이 모텔에서 경찰을 조롱해도 어떤 대책이 없다. 그냥 조롱 당하는 수밖에 없다. 중학생은 열등한 존재기 때문에 성인과 동등한 처벌을 할 수 없다는 논리적인 결론이 나오기 때문에 이보다 더 심각한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대응할 수 없다. 정말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 정보양이 늘면서 중학생의 범죄 수위는 나날이 높아질 것이 분명한데 그걸 막을 방법을 원천 차단시켰으니 참 할말이 없다. 정보양이 늘면 정보양에 맞춰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게 아니면 질서가 흔들린다. 정보를 차단하면 된다고? 범죄를 저지르는 학생이 얌전이 정보를 차단당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얌전한 애들만 정보 차단으로 미숙하게 성장할 뿐이다. 범죄를 저지를 법한 학생은 얌전한 학생을 괴롭히며 놀 것이고 말이다. 정보 불균형 현상만 가속화된다. 참 진짜 문제해결 방식 따위가 너무 낡았다. 페미니즘 광풍이 끝나야 법도 바뀌고 세상도 바뀌어 모든 국민이 보다 자유롭고 평등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자유억압은 여성의 성장도 방해한다.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힘든 일은 여성이 아닌 남성의 몫이다. 그 세계관에서 여성은 힘든 일을 피했지만 성장할 수 없었고 남성은 힘든 일을 했지만 성장할 수 있었다. 여성은 힘든 일을 할 수 없다는 편견이 여성의 성장 기회를 빼앗은 것이다. 한국은 가부장제 세계관으로 지금까지 교육이 이런 식이었기 때문에 여성의 의지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 여성의 의지약화는 여성에 대한 선입견으로 제대로 된 기회를 준 적이 없기 때문에 나타난다. 여성주의는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이 결정되기 때문에 가부장제 세계관에 있는 여성주의자는 힘든 일을 주지 않는 근거가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는 차별적인 인식으로 나타난 결과임에도 힘든 일을 피했다는 것만으로 여성인권이라 주장하고 있다. 반대로 힘든 일을 주는 것이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지 않는 평등한 인식으로 나타난 결과임에도 힘든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여성차별과 혐오라 주장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군복무가 그러하다. 가부장제 세계관에 있는 이는 여성이 열등하다 생각하기 때문에 여성에게 군복무는 힘들다고 생각하고 그 의무를 맡기지 않는다. 어떤 여성은 힘든 일을 피했으니까 여성인권이라 말한다. 그런데 여성은 힘든 일을 피했지만 개인의 성장도 하지 못하고 사회적 입지도 갖추지 못했다. 의무를 행하지 않고 어찌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지금 비정상적인 혜택은 페미니즘 광풍의 여파로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정녕 여성을 위한다면 여성이 의무를 행함으로써 확고부동한 사회적 입지를 갖출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어떤 여성은 군복무를 걱정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군복무에 필요한 체력측정을 남성과 동일하게 하면 일부 여성만 군복무를 하고 대부분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하게 될 것이다. 출산으로 병역면제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정권을 비판하고 있음을 안다.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나 부동산 참패나 페미니즘 광풍 따위를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건 사실 사소한 문제로 여겨질 정도로 큰 실패가 있다. 중국과의 관계는 경제를 생각해 이해할 수 있다. 북한과의 관계는 역사와 영토를 생각해 이해할 수 있다. 부동산 가격 폭등은 정책의 실패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이해와 수용이 불가능한 실패가 있다. 바로 인간관계 유지 실패다. 한국이 수직사회에서 수평사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성립시키기 위해 사상과 제도를 재정비했어야 했음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의 인간관계가 붕괴하고 있다. 그 붕괴의 여파로 출산율이 낮아지고 자살률이 높아지고 있다. 이성관계가 붕괴하니까 출산율이 낮아진 것이다. 가족관계가 붕괴하니까 학생자살과 노인자살이 늘어난 것이다. 이 모든 현상이 인간관계 붕괴의 징조라 해석하면 답이 나온다. 수직에서 수평으로의 전환 실패, 다른 말로 자유에 대한 적응 실패다. 하나의 질서가 붕괴하면서 분열하는 관계를 잇는 일을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페미니즘 광풍에 휩쓸려 이보다 더 인간관계를 붕괴시켰기 때문에 출산율이 더욱 낮아지고 자살률은 큰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어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인간관계다. 위기가 발생해도 인간관계가 튼튼하면 합심하여 맞설 수 있지만, 인간관계가 붕괴하면 대응할 수가 없다. 이런 인간관계 붕괴를 방치하는 걸 넘어 보다 더 빠르게 붕괴시키고 있으니 이보다 더 심각한 실패가 어디 있겠는가? 앞으로 온라인 산업 발달이 부르는 오프라인 관계희소를 해결하기 위해 기술적응을 하지 못하면 더욱 더 심각해질 것이다. 관계붕괴로 보다 빠르게 국가를 소멸시키고 있으며 사전검열로 국내 기업과 국가 이념과 국민 성장을 죽이고 독재정권의 사상검증에 정당성까지 내줘버렸다. 관계붕괴와 사전검열은 이번 정권의 씻을 수 없는 실패임이 분명하다. 한국을 사랑한다면 부디 지금이라도 그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고개 숙여 부탁한다.

 

 

 

새로운 개념

 

검열에 대한 강력한 비판은 지금부터 주장할 새로운 개념을 적용할 때 방해가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기도 하다. 온라인의 오픈 채팅 및 오픈 커뮤니티 사전 검열이라는 걸 오프라인으로 적용하면 소모임 대화의 사전 검열일 정도로 심각한 만큼 어떤 형태의 발전이든 이 검열이 방해가 될 확률이 높다. 서글픈 일이다. 새로운 개념을 설명하기 전에 네이버의 현재 상황에 대해 알아보자. 네이버는 구글에 맞서 검색으로 경쟁하면서 다각도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것 같다. 금융이나 쇼핑이나 커뮤니티 등에 힘을 기울이는 것 같다. 그런데 냉정히 말해 네이버는 검색으로 구글과 경쟁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구글이 구글링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낼 정도로 검색의 이미지를 선점했기 때문이다. 네이버의 기술이 발전해 검색능력이 뛰어나게 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구글을 이용해 검색할 것이다. 이미지 선점이 이래서 중요하다. 이런 이유로 네이버는 구글과 검색으로 경쟁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여기서 만약 검색을 새로운 개념으로 접근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검색의 개념을 다른 각도로 해석하여 접근할 수가 있다. 만약 그것이 정착되면 구글과 검색으로 경쟁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구글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경쟁상대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경쟁상대가 한국기업이길 바란다.

 

우선 검색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검색이란 포털에서 키워드나 이미지 입력으로 정보를 출력해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다. 자 그럼 이 행위가 오프라인에서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도서관 같은 정보보관소에서 특정 목적을 가지고 책이나 자료를 훑어보며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효율과 편리와 용량의 차이가 압도적으로 크다. 온라인에서는 간단한 키워드나 이미지 입력으로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반면 오프라인에서는 직접 수작업으로 일일이 찾아야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어떤 단어의 정의를 찾을 때 국어사전과 포털 검색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간단히 이해가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검색을 할 때 오프라인의 정보 수집을 떠올리는 일이 많지 않다. 하지만 본질은 새로운 길을 안내해준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차이는 하나 더 있다. 바로 관계다.

 

통상 온라인에서 검색은 혼자서 한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때에도 실명의 지인에게 묻거나 익명의 커뮤니티에 찾아가 질문을 해야 한다. 묻는 이는 정보 수집이란 목적이 있지만 답하는 이는 정보 제공이란 목적이 없기 때문에 대답해줄 확률도 낮다. 이걸 오프라인으로 바꿔보자. 이는 도서관에 가서 정보를 수집하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것이 생겨 친구 집에 가거나 동아리 모임에 찾아가는 것과 같다.(오프라인으로만 접근하여 스마트폰 등의 기기는 제외했다.) 굉장히 번거로운 일이다. 반면 오프라인에서 도서관에서 정보 찾기는 여럿이서 하는 일이 있다. 온라인과 달리 오프라인은 정보를 찾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협동하여 정보를 수집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같은 목적을 가지고 정보 수집을 행했기 때문에 묻는 이나 답하는 이나 정보 수집이란 목적이 같기에 답하는 이가 성실하게 정보를 제공할 확률이 높다. 이걸 온라인으로 바꿔보자. 검색을 하는 순간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보자. 이러면 온라인의 편리와 효율과 용량과 함께 오프라인의 관계까지 잡을 수 있다. 이게 검색의 새로운 개념이다.

 

가령 포털에서 어떤 키워드로 검색을 한다고 해보자. 특정 이슈가 발생할 때 그 이슈를 검색한다. 검색하는 순간 검색어를 기반으로 한 오픈채팅을 개설하거나 참여할 수 있게 만든다. 이러면 어떤 특정 이슈에 관심이 있었던 이들이 검색하는 순간부터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게 된다. 같은 목적을 지닌 이들과 아주 쉽게 익명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 이것으로 종래의 검색과 커뮤니티의 단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지금까지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메신저의 오픈채팅을 개설해도 그걸 홍보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돌아다녀야 한다. 그러나 포털 자체에서 검색어를 기반으로 한 오픈채팅 개설 또는 참여가 가능해지면 굳이 돌아다니지 않고도 같은 목적을 지닌 이들과 만날 확률이 높다. 같은 목적을 지닌 사람과 대화를 통해 수준 높은 정보 수집하게 된다. 이걸 오프라인으로 바꿔보자. 어떤 도서관에서 특정 키워드가 담긴 푯말을 들고 돌아다닌다. 같은 키워드가 담긴 푯말을 든 사람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정보에 관련된 질답을 통해 정보를 교류하여 수준 높은 정보를 수집하게 된다.

 

지금까지 수집되는 정보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인공지능 기술을 발전시키는 방법으로만 접근했다. 그러나 인간과 소통하며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하면 수집되는 정보의 질을 보다 더 높일 수 있게 된다. 도서관에서 혼자서 정보를 찾는 것보다 여럿이서 정보를 찾는 것이 효율적이고 수준 높은 정보를 얻게 되듯이 말이다. 검색과 오픈채팅의 결합은 매우 단순했지만 새로운 개념을 만들 수가 있다. 지금까지 검색은 혼자서 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걸 부수고 여럿이서 검색하는 것을 확립하며 이미지를 선점할 수 있다면 구글과 경쟁이 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세계에서 인기적인 LOL의 기초 개념은 과거 워크래프트3의 유저가 만든 게임일 뿐이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았지만 그 게임의 개념이 굉장히 재미있어서 그걸 기반으로 한 게임들이 굉장히 흥행하게 되었다. 검색과 오픈채팅의 결합은 실제 단순하다. 그러나 그 개념은 지금까지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에서 혼자가 아닌 여럿이서 검색한다는 개념은 분명 훌륭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검색과 오픈채팅의 결합은 같은 시간에 같은 키워드를 검색하는 사람이 있어야 된다는 점이 있다. 이건 두 가지 대처방안이 있다. 비슷한 키워드를 묶어서 채팅에 포함시키는 방법과 검색 인구수 자체를 늘리는 방법이다. 어떤 사람은 양념치킨을 검색하고 어떤 사람은 후라이드치킨을 검색했을 때, 해당 오픈채팅이 없을 경우 치킨이란 키워드로 서로를 만날 수 있도록 알고리즘을 설계한다. 이러면 웬만해서는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인구가 많으면 대중적이거나 유행하는 키워드로는 쉽게 사람과 만날 수 있게 된다.  

 

온라인에서조차 의견을 내지 않는 이들이 많다. 커뮤니티에 게시물을 올리면 통상 조회수의 십 분의 일 이하로 의견이 달린다. 대부분은 의견을 내지 않는다. 그런데 검색과 오픈채팅의 결합은 애초에 목적 자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게 된다. 더구나 익명이며 검색이 끝나면 헤어질 관계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또한 정보 수집이라는 당장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목적 달성 이전까지는 서로 정중하게 대화를 나눌 확률이 높다. 처음부터 악의적인 채팅을 하기 위해 검색 오픈채팅에 참여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이건 주류 오픈채팅과 비주류 오픈채팅으로 대응방식이 달라진다. 참여자가 많은 주류 오픈채팅에서는 신고와 제재를 통해 관리를 하면 되고 참여자가 적은 비주류 오픈채팅은 참여자가 그냥 무시하면 된다. 인구수가 적은 곳은 어차피 사람의 관심이 없기 때문에 악의적인 채팅을 하는 사람이 적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자유를 위해서 어느 정도는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온라인의 발달로 온라인에서의 인간관계로 자아를 유지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온라인 커뮤니티의 폐쇄화가 진행되는 곳이 있다. 만약 포털 자체에서 검색을 통해 오픈채팅이 나타나게 되면 활동 커뮤니티나 SNS와 관계없이 대등하게 만날 수 있는 공론화의 장이 마련되게 된다.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붕괴되고 있는 중에 온라인 인간관계도 커뮤니티의 폐쇄화로 점점 붕괴되고 있는 중이므로 이런 만남의 장소는 분명 관계 개선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검색 오픈채팅에서 주고 받은 대화는 검색창을 끄면 사라지게 된다. 그걸 블로그나 카페 등으로 스크랩할 수 있는 기능을 마련하면 대화를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설령 보관하더라도 익명이기 때문에 대부분 괜찮다.

 

검색 오픈채팅으로 온라인 익명 유저의 통합의 장을 마련할 수 있으면 단순히 검색의 주도권을 쥐는 것을 넘어 온라인의 주도권 자체를 쥐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고 생산자가 소비자가 되는 것처럼 질문자가 답변자가 되고 답변자가 질문자가 될 수 있는 검색이 될 수 있다. 그 생태계를 유지하고 거기서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이 나오게 될 것이다.

 

 

자유와 풍요에는 위험부담 감수라는 책임이 따른다. 이런 자유에 대한 이해 없이 페미니즘 광풍에 휩쓸려 매카시즘의 사상검증과도 같은 사전 검열을 해버리는 바람에 검색 오픈채팅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게 될지 모르겠다. 앞으로 포털이 어떻게 발전할지도 모르겠다. 길이 막혔다. 괴롭다. 하루라도 빨리 이성을 잃은 광기가 끝나길 바라며 마치겠다.

 

 

 

---

 

네이버에 초점을 맞춘 건 그냥 상대적으로 자주 써서입니다. 별 이유는 없어요. 다음 글은 현대와 자동차입니다. 그 다음은 글쎄요. 국민은행이나 LG전자나 바이오산업이나 병원 등 아무거나 씁니다. 생각하는 건 익숙해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아마 정상적인 사상가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관련 일에 종사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일을 맡겨줄 지는 모르겠군요. 나는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착잡하네요.

 

사법은 사회질서를 위한 것이지 사회정의를 위한 게 아닙니다. 이 점을 착각하는 이들이 주로 감성적인 판결을 요구하지요. 가령 사전검열 따위와 달리 좀비 바이러스 같은 게 발생하여 질서가 무너질 우려가 생기면 개개인의 인권은 무시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다수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백신패스에는 반대하지만 일시적이기 때문에 사전검열과는 다르게 접근해야겠죠. 백신패스와 사전검열을 음주운전 측정으로 비교하면 잠깐 일부에게 하는 것과 매일 모두에게 하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온라인이라서 체감하기 힘든데, 후자가 훨씬 심각한 겁니다. 사회질서에 초점을 맞춰야 사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흉악한 범죄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건 그 범죄자를 위해서가 아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유한 이의 부패를 평등하게 판결해야 하는 것도 사회정의가 아닌 사회질서를 위해서 그러는 겁니다. 사리사욕 따위로 불평등하게 판결하게 되면 질서가 흔들리게 되겠지요. 아, 아! 인문학! 눈물 나게 슬프군요.

 

 

답답하군요. 어째서 인간이 만든 현상을 해석할 때 인간의 사상을 간과하는 건가요. 인간의 행동은 대부분 인간의 사상을 근거로 합니다. 동북아가 빠른 발전과 저출산과 중산층 파괴가 발생한 건 유교사상에 근거한 겁니다.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보통 사상이 큰 영향을 끼칩니다. 중국이 시장경제를 도입해 경제적 사상을 바꾸어 빈곤에서 벗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상명하복 사상으로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으나, 수직사회에서 수평사회로의 전환을 실패, 즉 자유에 적응에 실패하여 사회가 혼란스러운 거죠. 거기에 한국은 페미니즘 광풍으로 이성관계붕괴 및 성 터부시가 증가되어 출산율도 유지 못하는 상황까지 도달했던 겁니다. 그걸 몰라서 동물의 생리활동이나 경제적 원인으로 추측하고 있으니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거죠. 일본도 경제적 성장의 멈춤을 사상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뭐더라 일본은 태어났을 때부터 역할이 정해져 있다는 인식이 있다고 하죠. 그래서 정치권의 세습이 용인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것이 인간의 성장에 큰 방해가 되고 있다고 봅니다. 경제 또한 인간이 성장시키는 겁니다. 인간이 성장하지 않으면 경제도 성장하지 못합니다. 일본 정계는 일본 국민의 순응으로 지금까지 편하게 정치했겠지만 그 때문에 일본 경제도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대부분의 국민이 정치권도 위협할 정도로 날카로운 도전정신을 갖추지 못하는 이상 일반적으로 일본이 이 이상 성장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건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국민이 자유롭게 최대한 성장할 수 있을 만큼 사상적 제도적 지원을 해야 국가가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아동의 성장을 막는 장유유서나 여성의 성장을 막는 가부장제 세계관 따위는 이제 역사서에 남겨야 할 낡은 관념입니다. 모든 국민이 자유롭게 욕망을 추구하며 최대한 성장하여 사회를 이롭게 하는 것이 자유주의의 이념입니다.

신고

 
[잡담] 신세계와 오프라인 유통 (5) 2021/12/06 PM 01:03

신세계와 오프라인 유통

 

 

 

시대의 변화로 새로운 역할을 맡아야 할 분야가 바로 오프라인 유통업계다. 누구나 다 안다. 오프라인 유통업에 미래가 없다는 걸 말이다. 통계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올해 산업통상자원부에서 내놓은 통계에 따르면 2020년 유통업체 매출이 전년 대비 오프라인은 3.6% 감소하고 온라인은 18.4% 증가하였다. 이런 현상은 매우 당연하다. 왜냐하면 온라인으로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편하기 때문이다. 온라인은 유통과정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가격경쟁에서 유리하다. 온라인은 스마트폰으로 상품을 고르기만 해도 집까지 배송되기 때문에 편리경쟁에서 유리하다. 오프라인 유통업은 가격과 편리에서 온라인 유통업을 이길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오프라인 유통업계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다. 이제 역할이 달라질 뿐이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교육은 단순한 지식주입이 아닌 자아형성 후 지식 검색 및 활용으로 바뀌어야 하고, 언론은 단순한 정보공급이 아닌 정보의 연결로 인간사이의 괴리를 줄여나가는 정보관리로 바뀌어야 하는 것과 같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오프라인 유통업계는 이제 단순한 수요에 공급하는 것이 아닌 수요를 창출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있는 수요에 생산품을 유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수요를 만들어서 유통을 해야 한다. 인간이 모여 수요가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그 수요에 상품을 유통해야 한다. 온라인이 가격과 편리를 담당한다면 오프라인은 이제 인간관계를 담당해야 한다. 수요에 맞춘 유통과 수요를 만든 유통은 전혀 다르다.

 

이번 글에서 신세계에 초점을 맞춘 것은 단지 신세계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알아보니까 신세계가 유통업에 전념하는 것 같고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야구단을 운영하는 것을 보았을 때 수요공급이 아닌 수요창출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관점에서 초점을 맞춘 의미는 있다고 본다. 앞으로 이런 종류의 글은 하나씩 어떤 기업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오프라인 유통업계가 인간관계를 담당해야 할 이유는 기술의 발달로 오프라인 인간관계의 희소가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애정결핍

 

한국은 애정결핍국가다. 장유유서로 인해 세대간의 애정이 결핍되었다. 대등한 관계가 아니기에 가정과 학교와 기업에서 나이차이가 나면 인간관계에 선이 그려져 깊은 관계로 나아가기가 어렵다. 그 결과 가족여행이나 회식자리를 꺼려하는 사람이 늘었다. 장유유서는 연상과 연하의 차별을 올바른 도리로 만들었기에 다수의 연상이 연하와의 평등을 불편해하기에 연하와의 좋은 관계가 이루어지지가 어렵다. 불평등을 바라는 연상과 평등을 바라는 연하가 사이 좋게 지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남녀유별이나 정조관념 따위로 인해 성별간의 애정이 결핍되었다. 어린 시기부터 이성과 가까이 지내며 이성애를 키워나가야 함에도, 연상의 권위로 남녀를 갈라놓아 이성관계를 줄이고 여성의 정조를 중시하여 성관계를 막은 탓에 정상적인 이성애로 성장치 못했다. 그 결과 남성은 여성을 성욕해소도구로 여기거나 여성은 남성을 ATM기기로 여기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최근 핵가족과 1인가구 증가, 저출산이나 가족애 결핍 따위는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교를 바탕으로 한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성주의가 여성인권을 빌미로 남녀의 관계와 성관계를 더욱 줄이고 막으면서 한국의 이성애는 심각할 정도로 결핍되어 출산율이 폭락하고 말았다. 이는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을 결정하는 여성주의의 특성이 야기한 것이다. 가부장제 세계관을 주관으로 여기는 여성의 손익으로 여성의 인권을 주장하다 보니 이런 괴상한 결과가 나와버렸다. 통상 인권이라 함은 개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함에도 여성주의는 성 상품화나 성매매를 하는 여성의 의지를 무시하고 여성의 권리를 빼앗고 있다. 성 상품과 매매는 그 상품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따라 인권이 결정되는 거지, 그 자체로 인권침해가 발생하는 게 아니다. 노동 상품과 매매가 상품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따라 인권이 결정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것은 한국 여성 인권이 아닌 가부장제 세계관 속의 여성 인권을 추구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들에게 있어 가부장제 세계관에 있지 않은 여성은 보호대상이 아니다.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여성은 의지가 약하고 성적 수치심이 강한 존재기 때문에 약한 의지에 맞춘 할당제와 강한 수치심에 맞춘 성적 억압이 나타나게 된다. 유교적 여성주의 또는 기독교적 여성주의가 보통 이렇다. 한국 여성주의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여성의 주관적인 손익으로 인권을 결정하는 사상.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이들이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남성의 독선을 비판하던 이들이 여성의 독선을 주장하고 있다. 대다수의 신세대와 일부 기성세대는 가부장제에서 벗어났음에도 일부 신세대와 대다수 기성세대가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인권이라 주장하는 바람에 사회가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가부장제 세계관 속 있는 사람은 가산점이나 할당제 따위의 여성특혜나 성적 억압을 주장하지만,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난 사람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갈등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이는 극단 여성주의나 온건 여성주의나 차이가 없다. 근본 구조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여성주의는 가부장제의 마지막 발악이라 보면 될 것이다. 정녕 여성의 인권을 바란다면 여성을 억압하던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진지하게 말하겠다. 나는 여성을 객관적으로 우수하다 생각하고 있다. 학교성적 따위의 다양한 지표가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부장제를 비판하면서도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의 주장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란다.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주장하는 여성특혜나 여성 성 억압은 여성을 열등하게 보기 때문임을 인지하길 바란다. 여성은 열등하지 않다. 현명한 여성을 응원한다. 우자와 현자는 성별로 구분되는 게 아니다.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여성인권은 인간의 인권 안에서 추구해야 한다.

 

한국은 애정결핍국가였음에도 과거에는 강요를 통해 관계를 유지했다. 세대간에 애정이 없어도 강요로 형태를 유지했다. 이성간의 애정이 없어도 강요로 형태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강요가 사라지자 관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핵가족, 1인가구, 저출산 따위는 인간관계 감소로 인한 현상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 감소한 관계는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온라인에서 관계를 맺고 자아를 유지하는 늘어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학업이나 생계유지를 위해 오프라인 인간관계는 그나마 살아남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메타버스와 NFT의 등장으로 생계유지조차 온라인으로 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고 있다. 또한 앞으로 기존 산업은 대부분 로봇과 인공지능이 할 예정이다. 온라인 일자리가 늘고 오프라인 일자리가 줄어든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희소하게 된다.

 

다른 국가는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국만큼 애정이 결핍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그렇지 않아도 애정결핍 된 상황에서 메타버스와 NFT의 등장은 대다수의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소멸시킬 기폭제가 될 확률이 높다. 현재 한국은 정치, 경제, 사회, 안보, 환경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당장 오프라인 관계 소멸의 위기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메타버스와 NFT를 막자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건 기술발전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교통의 발달로 인간의 체력이 저하된 것과 스마트폰의 발달로 인간의 문해력이 저하된 것과 같이 온라인의 발달로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희소된 것일 뿐이다. 발전은 발전대로 하게 두고, 그 발전으로 인해 나타나는 부작용은 부작용대로 해결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한국의 저출산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땅의 크기를 고려했을 때 인구수가 줄어들게 되는 저출산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출산이 애정결핍으로 인한 인간관계의 감소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라면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애정결핍을 만든 사상은 불변가치가 아니라 만변가치기 때문이다. 사상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므로 사상의 변화로 애정결핍을 해결할 수 있다면 출산율은 자연스럽게 올라갈 것이다.

 

지금 기성세대는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더 익숙하기 때문에 오프라인 인간관계 희소의 심각성을 인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미래를 보기 위해서는 시선을 신세대에 맞춰야 한다. 지금 신세대는 미래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메타버스와 NFT가 성장한 시대를 살아가는 신세대의 오프라인 인간관계는 자연스럽게 희소될 확률이 높다. 저출산이 과거서부터 수많은 징조 속에서 현재 결과가 나타난 것처럼, 인간관계 희소 또한 수많은 징조 속에서 미래에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과거와 현재는 사회의 변화로 저출산이라는 현상이 나타났다면, 현재와 미래는 기술의 변화로 오프라인 인간관계 희소라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한국은 수직사회에서 수평사회로의 변화로 자유적응이 필요한 것처럼 인터넷 이전에서 이후로의 변화로 기술적응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오프라인 인간관계는 자유적응과 기술적응이 동시에 필요한 국가존립을 위해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 할 수 있겠다. 자유적응과 기술적응. 한국은 이 두 가지 난제를 해결해야 한다.

 

다른 관점으로 가보자. 어째서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가? 온라인 인간관계로 충분하지 않는가? 어쩌면 먼 미래에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현재는 아니다. 왜냐하면 불변가치에 해당하는 종의 존속을 위해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재 인류는 이성의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있어야 출산이 가능하다. 자유로운 국가에서는 이성이 서로 사랑을 해야 종이 존속된다. 종의 존속을 위해 오프라인 인간관계는 유지되어야 한다. 통상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사상과 기술의 발전은 인본주의를 근거로 한 불변가치를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인본주의

 

인본주의란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을 위한 사상이다. 인본주의적 불변가치란 인간이 인간인 이상 변하지 않는 가치를 말한다. 본래 보수와 진보가 논쟁을 벌어야 할 사안은 불변가치와 만변가치다. 인간을 위해서 변하지 않는 가치와 변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싸워야 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선동과 이권 다툼으로 점철된 정치를 보면 몹시 슬퍼 삶의 허망함을 느낄 정도다. 인권이 정쟁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것에 참담함을 금치 못한다. 무엇이 정녕 인간을 위한 길인지 고찰하길 간곡히 바란다. 내가 자유주의를 추구하고 자본주의가 옳다 말하고 역할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수는 과거에 지나치게 얽매이고 진보는 지나치게 과거의 것을 지우려 한다. 내가 가고 싶은 미래는 인간을 위한 미래다. 내가 비판하는 대상은 전부 그것이 인간을 위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해서다. 이런 것은 나 개인의 손익과 관련이 없는 일도 많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어쩔 수 없다. 내게 손해가 되는 일이라도 그것이 옳다면 옳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인류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로 향하길 바란다. 그럼에도 최근 가상자산이나 메타버스 등에서 논의 중인 탈중앙화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탈중앙화는 불변가치인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는 국가라는 존재를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탈중앙화로 세금을 걷지 못하게 되면 국가는 더 이상 존립할 수 없다. 국가가 존립할 수 없으면 인간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줄 곳을 잃게 된다. 인간이 인간인 이상 결코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줄 어떤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탈중앙화는 탈국가와 다를 바가 없다. 아나키즘 수준으로 저급하다. 만약 진정 탈중앙화를 원한다면 탈국가를 하고 나서 탈중앙화를 원하는 이들끼리 살아가길 바란다. 탈중앙화는 사상적 관점이 아니라 기술적 관점에서 나타난 것일 것으로 보인다. 탈중앙화는 부디 인문학적 고찰을 좀 더 하고 나서 하길 주장해야 한다.

 

공산주의는 개인의 욕망이라는 기본적인 불변가치를 부정하였다. 분명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승패는 상품화 능력으로 결정된 것은 맞다. 자본주의는 소비자를 생각하며 경쟁을 통해 상품가치를 높여 그걸 소비하는 국내 국민을 행복하게 하고 국외 상품 경쟁에서 승리하여 경제를 발전하게 하였다. 공산주의는 생산자를 생각하는 바람에 경쟁을 없애 상품가치를 높일 이유가 없어 상품 품질 저하로 국내 국민을 불행하게 하고 국외 상품 경쟁에서 패배하여 경제를 쇠퇴하게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경쟁 없이 만든 상품이 경쟁 속에 만들어진 상품을 이길 수가 없다. 이런 이유로 공산주의는 몰락했다. 러시아는 자본주의로 돌아섰고 중국은 흑묘백묘론을 주장하며 공산주의 정치체제 안에서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상품가치를 올리는 방안을 사용했다. 시장을 개방하지 않은 북한은 아직까지도 고난의 행군을 할 정도로 빈곤한 처지에 놓여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어떤 방법을 통해 공산주의가 상품가치를 높였다고 하더라도 그 사상에는 미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인 욕망이란 불변가치를 부정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현재 공산주의 국가는 기득권층은 마음대로 욕망을 추구하고 있고 그 외는 살기 괴로울 정도로 절제시키고 있다. 이런 차별로 인해 불만이 쌓이게 되고 언젠가 그 불만으로 국가가 붕괴될 것이다. 어떤 사상도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의 본성을 부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을 바른 길로 안내해야 한다.

 

한국은 지금 사법 언론 은행 등에 대한 불만이 치솟고 있다. 이는 특별히 한국이 무능하기 보다는 한국 국민이 접하는 정보량이 늘어나면서 사회를 보다 엄격하게 평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한국 국민의 눈높이가 높아졌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내가 이런 것을 옹호하기도 했다. 사법을 옹호하고 언론을 옹호했다. 그 이유는 이들의 역할이 인본주의적 불변가치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들을 비판하는 이들은 불변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따로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법을 비판하며 사법의 인공지능화를 주장하면서 삼권분립의 파괴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맹목적으로 원하는 판결이 아니면 화부터 내며 법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들어버리는 걸 보면서 어떻게 사법을 옹호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물론 일부 판사가 성인지감수성이 법치주의 기본인 법 앞의 평등을 훼손하고 있음을 인지하지 않고 차별적인 판결을 내리는 것을 행함을 보면 국민들의 비판은 지극히 정당하다 할 수 있다고 본다. 성인지감수성이 얼마나 천박하냐면 돈인지감수성 따위를 생각해보면 된다. 약자이기 때문에 그에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라면 빈민 또한 약자기 때문에 그에 맞춰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성인지감수성은 돈이 적은 빈민은 약자기 때문에 부자와 다르게 판결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여성주의 자체가 주관으로 인권을 결정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법치주의를 훼손하더라도 여성이 이익을 보면 여성인권이란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 여성주의가 법 앞의 평등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모든 사법을 비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겠다. 사리사욕 또는 전관예우 따위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는 올바른 판결을 하는 일이 많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법에 대한 비판은 타당한 논리로 해야 할 것이다. 언론의 신뢰도가 매우 낮음에도 언론 자체의 필요성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인터넷에 많은 정보생산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론만큼 공익을 위해 일하는 역할이 아직까지 없다. 얼마나 많은 개인방송이 수익이 안 되는 일에 집중하겠는가? 이런 측면에서 언론의 쇠퇴가 아닌 언론의 새로운 길을 주장했던 것이다. 은행을 비판하며 가상자산의 탈중앙화를 주장하는 이들에 맞서 탈중앙화를 비판하는 까닭도, 탈중앙화가 국가 내에서 은행의 역할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금을 걷지 못하는 이상 탈중앙화는 결코 은행이나 경제를 대체할 수 없다.

 

많은 사상이 불변가치에 대해 무지하다. 채식주의는 인간의 본성인 잡식을 부정한다. 비폭력주의는 인간의 본성인 폭력성을 부정한다. PC주의는 인간의 본성인 비웃음을 부정한다. 인간의 본성을 훼손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 채식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인공육이 바람직할 것이고 비폭력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게임이나 격투기가 바람직할 것이며 PC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그가 바람직할 것이다. 실제 인간에게 피해를 입하지 않은 상황에서 욕망을 해소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인본주의적 방법이다. PC주의를 잠시 말해보자. PC주의는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와 같은 길을 가고 있다.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를 생각했던 공산주의처럼 타인이 아닌 본인을 생각하자 주장한다. 여성주의의 주관적 이익의 인권화가 바로 이런 흐름에서 나타난 것이다. 본인을 생각하며 발전하지 않고 정체되게 만드는, 인간의 향상심을 부숴버리는 무시무시한 사상이다. 만변가치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보통 사상이 그러하다.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고 힌두교가 자리잡은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상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장유유서나 정조관념 따위가 한국인을 불행하게 한다면 그걸 바꿔야 한다. 그럼에도 불변가치는 훼손하면서 만변가치는 굳게 지키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인간의 애정은 아무렇지도 않게 파괴하면서 특정 사상에 매달리는 꼴을 보면 속이 터진다. 유교의 연령차별을 부정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상에 대한 존중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이제 연상이 아닌 인간에 대한 존중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다. 가령 어떤 노인이 피해를 입으면 노인공경할 줄 모르냐고 말할 게 아니라 인간을 존중하지 않았다고 비판해야 한다. 그건 나이 성별 관계 없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불변가치고 특정 인간에게만 공경하는 건 만변가치다. 많은 이들이 불변가치와 만변가치를 구분 짓지 못하기 때문에 요즘 시대는 논쟁이 쉬운 측면이 있다. 어떤 주장에서 불변가치를 훼손 또는 부정하는 일이 발생하면 그걸 지적하는 순간부터 논쟁이 끝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논쟁이 불변가치만 파악하고 있어도 그렇게 어렵지가 않다.

 

정말 인문학적 수준이 낮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불변가치와 만변가치를 구분 짓지 못한다. 주관과 객관을 구분 짓지 못한다. 취향과 도덕을 구분 짓지 못한다. 인권과 독선을 구분 짓지 못한다. 허용과 권장을 구분 짓지 못한다. 권장과 강요를 구분 짓지 못한다. 자유와 방임을 구분 짓지 못한다. 재력과 전능을 구분 짓지 못한다. 개인과 집단을 구분 짓지 못한다. 의지와 세뇌를 구분 짓지 못한다. 어떤 인문학자는 우수하다 생각한다. 나는 인문학자와 교수가 작성이나 번역 또는 해제한 사상서로 생각을 키워나갔다.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그들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를 보면 인문학적 수준이 낮다 하지 않기가 너무나도 어렵다. 그게 몹시 괴롭다. 어린애도 논파할 수 있는 저급한 논리를 가지고 선동하고 있는 꼴을 보면 환장하겠다. 평등하다면서 한쪽에 특혜를 주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거나, 성 상품화는 잘못되었다고 말하면서 남성 성 상품화는 아무 문제 없다는 식으로 한다거나 말이다. 이런 것은 가부장제 세계관에 익숙한 인간들이 저지를법한 인문학적 고찰이 부족한 실수다.

 

많은 이들이 인문학을 무시하고 있음을 안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은 단순히 인문학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한국이 지금 기초인문학 수준이 낮은 편임을 인식하고 제대로 된 인문학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보통 낮은 수준의 인문학 때문에 발생하는 폐해에 대한 책임은 개개인에게 묻고 싶지 않다.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정상적인 사상가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기에 굳이 책임을 묻자면 사상가 또는 인문학이다. 그러나 과거의 것은 물을 수 없어도 현재의 것은 물을 수 있을 거라 본다. 책임져야 할 일을 더 이상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은 그렇지 않아도 낡고 어리석은 사상으로 애정결핍으로 인한 저출산이라는 회생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다. 그만 문제를 악화시키길 간곡히 바란다. 어떤 종의 씨를 말리는 행위를 저지르는 이들이 악이라면 한국인의 씨를 말리는 행위를 저지르는 이들도 악이다. 도대체가, 사회에 그렇게나 영향을 끼치는 이들에게 애국심이 없단 말인가? 작디 작은 나라가 열강 속에서 버티기 위해서는 낭비할 힘 따위 없단 말이다. 유교의 장유유서를 성립시키기 위해 자행되고 있는 아동과 여성 약화교육과 정조관념을 성립시키기 위해 자행되고 있는 성적 억압과 한국 여성주의의 가부장제 세계관을 성립시키기 위해 그것들을 인권화하고 있는 무지한 작태는 하루라도 빨리 막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겠다.

 

오프라인 인간관계는 인류라는 종의 존속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 중 하나다. 오프라인 인간관계에서 성립되는 이성애는 인류가 단성생식 따위 같이 이성관계 외의 방법으로 종을 유지하는 방법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변하지 않는 가치가 된다. 인본주의적으로 오프라인 인간관계는 불변가치에 해당한다. 따라서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오프라인 유통업계의 새로운 역할이다.

 

 

 

유통업계

 

온라인 유통업계에 대해서는 특별히 할말이 없다. 세부적으로 개선하거나 발전해야 하는 방향은 알아서 해도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오프라인 유통업계는 이제 전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오프라인은 온라인과 가격경쟁과 편리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없다. 하지만 오프라인이 우위에 설 수 있는 영역이 있다. 바로 여가다. 아이쇼핑 또는 쇼핑데이트 따위가 보통 소비와 여가가 합쳐진 형태다. 이런 여가는 온라인이 오프라인을 이길 수가 없다. 이후 온라인 또한 어떤 형태를 통해 여가까지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하나 아직까지는 어렵다. 오프라인은 이 점을 공략해야 한다. 물론 단순히 공략만으로 끝날 것이 아니다. 그것뿐이면 앞서 장황한 말을 꺼내지 않는다. 오프라인 유통업계는 한국의 자유적응과 기술적응을 위해 오프라인 인간관계의 생성과 유지를 담당해야 한다. 온라인은 실질적인 상품의 수요에 유통하는 걸 담당하고 오프라인은 수요를 만들어서 상품을 유통하는 걸 담당해야 한다. 이런 사회적 문제는 보통 정부에서 해결해야 하나 그러다 보면 시장경제에 지나치게 간섭하게 될 우려가 있다. 그러다 보니 경제가 그 역할을 하길 바라게 되었을 뿐이다. 역할의 영역은 만변가치에 해당한다. 딱 부러지게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해진 것이 아니다. 할 수 있는 인간이 해야 한다. 지금 당장 한국에서 오프라인 인간관계 희소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로 문제인식이 미비하기에 이 역할은 과거 빈 땅을 점령하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선착순으로 주어지게 될 것이다. 그 역할을 수행하면서 사회적 공헌을 하는 것이 명백해지면 정부에서는 그런 이들에 대한 어떤 특정한 혜택이 주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세금감면이라던가 말이다. 그럼 오프라인 인간관계의 생성과 유지의 방법에 대해 몇 가지 알아보자.

 

우선 종래의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가령 술집이나 PC방은 술과 서비스가 아닌 안주와 부식으로 수익을 얻고 있다고 한다. 이런 것이 보통 수요를 만든 다음 상품을 유통하는 것이다. 술과 게임이라는 라는 여가를 제공하는 것으로 안주와 부식이라는 수요를 만들어 수익을 얻는다. 그러나 이런 것은 특별히 인간관계 개선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수요와 수익을 고려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이런 형태가 나온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예시로는 충분하다. 이런 형태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 이상 이런 방법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프라인 유통업계는 이런 걸 보다 더 확장된 형태로 적극적으로 접근하면 된다. 신세계의 야구단 운영은 그런 측면에서 새로운 길에 대한 이해가 빠르다. 여가와 유통을 연결 지어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이미 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까지 고려해야 한다. 가령 메타버스와 NFT에 익숙해진 미래세대는 오프라인 인간관계 자체가 어색하여 야구장에 갈 일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그걸 위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방법까지 필요하다.

 

 

 

오프라인 플랫폼화

 

온라인 유통업은 현실을 가상으로 연결하여 유통과 소비과정을 생략하는 것으로 가격과 편리를 잡은 것이라면, 온라인 플랫폼은 가상과 가상을 연결하여 시공간을 생략하는 것으로 거리와 관계를 잡았다. 관계, 온라인 인간관계다.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형성해야 할 오프라인 유통업은 온라인 플랫폼을 참고할 가치가 있음을 주장하겠다.

 

온라인 플랫폼 몇 가지를 살펴보자. 유튜브나 로블록스 등의 특징은 어떤 생태계를 구축한 뒤에 생산과 소비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수수료로 수익을 얻고 있다. 목적이 영상이나 게임 따위로 다를 뿐이다. 이는 국가가 세금으로 운영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사회를 구축한 뒤에 생산과 소비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세금으로 국가를 운영한다. 목적이 인간이라는 것으로 다를 뿐이다. 즉 플랫폼 경제란 국가 안의 작은 국가들이라 생각하면 된다. 플랫폼 생태계에서 생산과 소비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수수료로 플랫폼을 운영하고, 플랫폼에서 생기는 세금으로 국가가 운영된다. 이런 구조를 오프라인 유통업 또한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 온라인의 경우 법적인 규제가 아직 들어서기 전이기 때문에 큰 제약 없이 성장하고 있지만 오프라인의 경우에는 어떤 제약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나 만약 온라인에서는 허용되나 오프라인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면 통상 법이 낡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잠깐 정리해보자. 오프라인 유통업이 가야 할 길은 있는 수요에 상품을 유통하는 게 아닌 창출한 수요에 상품을 유통하는 것이다. 어떻게 창출하느냐? 여가를 제공하는 것으로 수요가 창출된다. 창출된 수요에 상품을 유통하여 수익을 얻는다. 이 기본 구조에서 여가를 오프라인 플랫폼으로 제공하면 된다. 그리하면 플랫폼 내에서 생산과 소비에서 나타나는 수요에 대한 상품 유통하는 것으로 수익을 얻고, 생산과 소비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수수료로도 수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온라인 플랫폼과 다른 점은 수수료뿐만이 아니라 현실 상품 수요에 유통하는 것으로도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유튜브가 최근 상품광고를 하는 것을 볼 때 유사하게 수익을 얻는 것으로 보이지만, 직접 유통과 간접 유통은 엄연히 다른 법이다.

 

몇 가지 예시를 들어보자. 한국 전통인 김치 담그기를 할 필요가 있다. 그 때 오프라인 플랫폼에서 김치 담그기를 할 수 있는 공간과 재료를 제공한다. 본래 생산하지 않는 소비자인 사람이 혼자 또는 집단이 가서 김치를 담근 다음, 소비해야 할 것 외의 남는 김치는 다른 소비자에게 판매한다. 김치를 담근 사람은 남는 김치로 수익을 얻었다. 오프라인 플랫폼은 그 생산과 판매 과정 속에서 김치재료 유통수익과 김치생산 수수료수익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특이할 만한 점은 본래 오프라인 유통업체에서 소비를 하던 사람이 생산을 하여 수익을 얻었다. 소비자가 곧 생산자가 된 것이다. 오프라인 유통업체도 온라인 플랫폼과 비슷하게 생산과 소비에서 나타나는 수수료로 수익을 얻었다. 차이점은 추가로 재료 유통이라는 것으로도 수익을 얻었다. 이런 기본적인 구조가 바로 오프라인 플랫폼화다. 물론 이게 쉬운 것은 아니다. 이렇게 생산자의 인성, 생산된 김치의 품질이나 가격, 수요가 결정되지 않은 점 따위가 그렇다. 그런데 이런 건 온라인 플랫폼도 원래 처음에는 힘들어하는 문제다. 유튜브의 경우 우수한 품질의 영상이 나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생태계를 형성한다는 것이 쉬운 점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겠다. 그나마 나은 점은 오프라인 플랫폼은 온라인 플랫폼의 방식을 참고할 수 있기 때문에 온라인이 거쳐온 시기보다는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가령 담근 김치를 플랫폼 관리자가 시식해보고 맛을 품평하여 판매 허용을 결정하는 것으로 최저품질을 보장한다. 생산자의 판매기록이나 맛의 평점 따위를 온라인 앱에 기록하는 것으로 생산자의 인성이나 가격 따위가 결정될 수 있다. 이런 문제는 해결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사람은 식사를 해야 한다. 그 때 오프라인 플랫폼에서 요리를 할 수 있는 공간과 재료를 제공한다. 어차피 요리할 것이라면 오프라인 플랫폼에서 요리를 잔뜩 한 뒤에 남는 요리를 저렴한 가격에 판다. 어떤 일가가 있다. 오프라인 플랫폼에서 여가를 보내기로 한다. 그 때 일가가 자신들이 먹을 요리를 만든 다음 남은 요리를 저렴하게 판다. 그리고 그 수익으로 다른 생산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소비를 한다. 어떤 DIY를 하는 이들이 직접 취미로 만든 걸 구매하는 것으로 소비를 한다. 어떤 이들과 같이 노는 것으로 소비를 한다. 이렇게 여가와 생산과 소비가 연결되었다. 점심시간에 생산하고 이후 시간에 소비를 한다. 이 과정이 전부 즐거운 여가다. 가족과 합심하여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그걸 나누는 것으로 여가에 필요한 수익을 얻고 그 수익으로 다른 생산자의 상품을 소비한다. 다른 생산자도 비슷하다. 여가 시간의 일부는 생산하고 일부는 소비한다. 그 과정 전체가 여가다. 이런 것이 여가와 생산과 소비가 합쳐진 오프라인 플랫폼, 오프라인 생태계다. 이것으로 오프라인 인간관계 유지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온라인은 놀아주는 것으로도 비용이 지불되고 있다. 오프라인도 그런 식으로 충분히 접근할 수 있다. 온라인 게임을 예로 들어보자. 게임사 입장에서 온라인 게임 무료 이용자는 다른 유료 이용자를 즐겁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무료 이용자를 위해 들어가는 고용이나 서버 유지 비용은 실질적으로 무료 이용자에게 지불되는 것과 같다. 온라인 게임은 이미 놀아주는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셈이다. 무료 이용자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소비자를 즐겁게 하고 있다. 즉 어떤 측면에서 그건 생산활동이다. 이걸 오프라인 플랫폼도 쓸 수 있다. 아니 이미 쓰고 있다. 예컨대 어떤 대회를 열고 상금을 준다고 해보자. 그때 주최측은 광고효과 따위를 목적으로 상금을 지급한다. 여기서 관점을 바꿔보자. 상금을 얻을 정도의 우수한 인간이 대회에 참가하게끔 하는 것은 다른 대회에 참가하거나 관람하는 이들을 즐겁게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된다. 요는 간단히 말해 놀아주는 비용이다. 주최측은 상금 수여자에게 놀아주는 비용을 지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콘서트에서 떼창이란 관객이 함께 노래를 부르는 행위를 뜻한다고 한다. 그게 만약 다른 관객을 즐겁게 하여 콘서트 티켓 구매에 영향을 끼쳤다면 충분히 생산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생산활동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지금까지는 이런 생산활동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게 생산활동이라는 걸 몰랐을 뿐이다. 어떤 소비에 영향을 끼치는 광고가 생산활동이라면 이런 것 또한 생산활동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소비자의 소비 이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이 떼창이라면, 그런 떼창을 하는 소비자에게 어떤 혜택을 준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조사한 결과 떼창으로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어 다른 소비자를 즐겁게 했다는 근거가 명확하다면, 그 근거로 티켓 할인이나 또는 적당한 금액을 환급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소비자 입장에서 생각지 못한 생산활동을 통해 수익을 얻었다는 느낌을 받아 다시 한번 콘서트에 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여가 속에서 생산과 소비가 되어야 한다. 생산과 소비가 여가가 되어야 한다. 앞으로 인공지능의 발달로 사라지는 직업들이 있다. 계산하는 직업이나 서빙하는 직업이나 홍보하는 직업이 사라질 수 있다. 여기서 관점을 바꾸자. 이 직업을 사라지지 않게 할 수 있다. 사라지는 걸 굳이 사라지지 않게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게 바로 여가를 목적으로 하였을 때다. 어떤 사람이 여가를 즐길 때 2시간 정도 계산이나 서빙이나 인형탈을 쓰고 홍보를 하고 나머지 시간을 놀이를 즐긴다고 가정해보자. 여가 동안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진다. 생산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 시간이 지나치게 길기 때문이다. 시간이 짧다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여기서 계산이나 서빙에 지불되는 비용은 실질적으로 소비촉진 비용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에 광고비로 인식하면 된다. 계산이나 서빙에서 지불된 비용을 다른 유통상품으로 지불된 비용보다 더 크게 회수한다. 그런 개념으로 접근하면 된다. 설령 회수가 어렵다고 하더라도 괜찮다. 놀아주는 비용과 같이 오프라인 플랫폼 내에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 다른 소비자의 소비를 촉진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플랫폼 내에서 소비자가 요구하는 것을 어떤 다른 소비자가 들어주는 것으로 생산이 이루어지게끔 만들 수도 있다. 어떤 소비자가 아이 돌보기를 원한다면 다른 소비자가 그걸 들어줄 수 있다. 물론 아이 돌보기는 예민한 문제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 돌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 외 심부름이나 상품 구매 고민상담 또는 디지털 문맹자가 구매하기 어려운 상품을 구매하는 걸 잠시 도와주는 걸로도 소비와 생산이 동시에 이루어질 것이다.

 

여가를 목적으로 한 오프라인 경제 플랫폼이란 생태계를 형성하는 것. 거기서 발생하는 수요에 대한 재료 유통 수익과 생산과 소비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수수료 수익으로 생태계를 유지하고, 그 생태계에서 발생하는 세금으로 국가를 유지한다. 자유적응과 기술적응의 결과가 바로 이것이라 생각한다.

 

 

 

오프라인의 온라인화

 

온라인 인간관계와 오프라인 인간관계의 가장 큰 차이는 익명이다. 온라인 인간관계는 오프라인과 달리 인간관계에 있어 익명이라는 영 번째 관계가 존재한다. 오프라인은 인간관계가 성립되는 순간부터 통성명을 하는 일이 잦기 때문에 이 익명관계가 성립되기가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에 지쳐 좀 더 가벼운 익명의 관계가 성립되는 온라인 인간관계에 익숙해지고 있다. 굳이 인간관계에 지치지 않더라도 편하고 쉬운 곳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특성상 그렇게 되게 된다. 특히 한국은 수직적인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많아 수평적인 온라인 인간관계를 보다 선호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온라인과 같이 수평적인 관계성립이 필요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간의 사상은 변하기가 쉽지 않다. 장유유서에 세뇌된 인간은 연령차별을 올바른 도리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니 당분간은 온라인과 같이 익명의 장점을 살리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어떤 특정 플랫폼 내에서는 모두가 익명의 닉네임으로만 교류할 것. 이것을 지정해두면 된다. 가령 혼자서 플랫폼에 출입한 후에, 테니스를 치고 싶다면 플랫폼 내에 있는 사람 중에 테니스를 치고 싶은 사람을 찾아 같이 치며 논다. 오프라인 플랫폼 어플리케이션의 도움을 받으면 될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서로 통성명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다. 혹시 따로 실명으로 만나고 싶다면 플랫폼 외의 지역에서 만나 통성명을 하면 된다. 온라인 플랫폼에서는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대부분 수용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술을 마시더라도 같이 술만 마시면 되고, 게임을 하더라도 게임만 같이 하면 된다. 이런 방식을 써서라도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유지시켜놔야 앞으로 있을 메타버스나 NFT 시대를 대비할 수 있다.

 

익명 오프라인인 만큼 출입자의 인성에 따라 소비자의 만족도가 달라지는데, 그에 따라 2가지 필터를 적용한다. 첫째, 성년은 신용등급으로 미성년은 보호자의 신용등급으로 출입여부를 결정한다. 둘째, 익명 오프라인 진영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반말을 사용한다. 직원조차 반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 반말이 불편한 인간은 출입하지 못한다. 기본적인 평등개념이 박힌 사람만 출입할 수 있게 된다. 영역을 구분 짓기 위해 출입구 밖의 직원은 존댓말을 쓰고 출입구 안의 직원은 반말을 쓴다. 출입구 밖의 직원은 안에 들어갈 때 주의사항을 설명한다.

 

온라인은 지극히 편향적이다. 원하는 정보만 얻을 수 있도록 해두었다. 오프라인도 그걸 참고할 필요가 있다. 어떤 글을 본 적이 있다. 출처는 불분명하다는 점을 말해두겠다. 어떤 사람이 어린 시절 즐기던 문화를 접하자, 신체 나이 또한 어려졌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어린 시절 문화를 접함으로써 뇌가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착각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런 결과가 있기 때문에 온라인과 같이 구역을 만들어서 특정 세대에 최적화한 상품선별을 하는 것도 좋다고 본다.

 

 

 

오프라인의 역할극

 

오프라인 유통업의 변화의 목적 중 하나가 바로 완전자동화 시대를 대비하여 일이 없어도 오프라인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다. 직업이 없어도 역할이 있어야 인간은 오프라인 사회활동을 하게 된다. 동호회 따위의 간사나 협회의 참여자 또는 무상봉사자 따위의 역할. 연금을 타거나 주식 또는 코인 또는 부동산 또는 상속 따위로 수익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인간 또한 사회에 속하여 살아갈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사회적 역할이 있어야 한다. 나는 분야의 대표에게 입법권을 주자는 역할주의를 통해 그것에 대응하고자 한다. 오프라인 유통업도 그것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오프라인 유통업이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역할 판매다. 각 역할을 판매하고 인기 있는 역할은 +가격이 높고 인기 없는 역할은 가격이 높다. 인기가 높은 역할은 돈을 지불하고 인기가 없는 역할은 돈을 지불 받는다. 어떤 역할극을 꾸미고 거기에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주도할 수 있는 전문 배우를 섭외하고, 그 외의 배역들은 판매하는 것으로 소비자가 생산을 하며 즐길 수 있도록 한다. 또한 그 소비자의 생산을 다른 소비자가 보면서 즐길 수 있도록 한다. 어떤 역할을 구매한 사람이 아마추어일 때에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걸 어려워할 수 있다. 그걸 다른 전문 배우가 거기에 맞춰 이야기를 전개하게끔 유도한다. 인기가 없는 배역은 비용을 지불해서라도 충원할 수 있도록 한다. 이 역할 판매의 특이할 점은 오프라인 플랫폼 내에서는 다른 곳에서도 해당 역할에 맞춰 대우를 해준다는 것이다. 만약 기사 같은 배역을 하고 있으면 역할을 구매한 동안에는 기사 대우를 해준다. 가상의 공간에서 가상의 역할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처럼, 현실의 공간에서 가상의 역할을 즐길 수 있도록 한다. 이런 특별 대우가 특정 역할의 가격을 높여줄 것이다. 해당 구역에서만 적용되는 놀이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평등을 훼손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단순히 역할극이 아니더라도 상황에 따라 플랫폼 내의 역할을 판매 또는 역할에 대한 비용 지불이 이루어져도 좋을 것이다.

 

국가 안의 작은 국가. 이미 온라인은 그걸 해냈다. 오프라인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온라인은 상품을 유통하고 오프라인은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연결한다. 사회의 변화와 기술의 발달로 이제 오프라인 유통업은 단순한 유통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유지하는 중추의 역할을 맡을 때가 왔다고 주장하겠다.

 

 

---

 

가볍게 쓸 생각이었는데 자꾸 과거의 생각이 정리되면서 새로운 생각으로 나아가는 바람에 시간이 걸렸네요. 솔직히 우울하군요.

 

다음 글은 네이버와 포탈 또는 현대와 자동차 또는 국민과 은행 또는 병원과 간호사 등 살아있으면 아무거나 씁니다.

 

군 급식 개선을 하겠다고 했다고 하죠. 그런데 만약 개선이 되지 않는다면, 국군의 최고에 있는 이가 말한 걸 허언으로 만들어버린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그 사태를 쉬이 넘기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낙태를 허용한다고 해서 낙태를 권장하는 건 아니잖아요. 포르노를 허용한다고 해서 포르노를 권장하는 건 아니잖아요.

성매매를 허용한다고 해서 성매매를 권장하는 건 아니잖아요.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개인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는 것뿐이지 그것이 반드시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포르노나 성매매의 경우 범죄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지 그것이 반드시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허용과 권장의 차이도 모릅니다. 취향과 도덕의 차이도 모릅니다. 답답하군요. 성적 대상화나 성 상품화가 인간을 도구로 만든다는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 도구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성 상품을 당사자가 소유하고 있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노동 상품을 당사자가 소유하고 있다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말이죠.

 

산업혁명 시대 농지를 팔고 도시로 나갔던 일이 있었다고 하죠. 시골의 고령화가 되고 있는 만큼 이제 농지를 사들여 식량의 대량생산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 봅니다. 미국식 대량 생산이 되어야 국민들이 식재료를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은 지나치게 비싸요. 생산자를 생각하다 소비자가 불행한 것으로 공산주의가 몰락했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시대가 흘러 농사를 지을 사람이 줄어들면 대량생산계획을 시도하는 것이 국민을 위한 길이라 생각합니다.

 

문제풀이능력을 가르치는 노동자용 교육을 해놓고 취업이 안 된다. 학벌사회다. 노동자 인권이 낮다. 이런 말 하면 안됩니다. 시장원리에 따라 자본가 수가 줄고 노동자 수가 늘면 당연히 자본가가 희소해짐에 따라 노동자 수요가 줄어들어 자연스럽게 노동자의 가치가 낮아지게 되는 거죠. 자본가끼리 경쟁을 해야 하는데 담합하게끔 유도했으니 참.


신고

 

Level.1    친구신청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tta    친구신청

좋은글 감사합니다

루리웹-5344056515    친구신청

오프라인의 플랫폼화에 대해 말씀 하시는데, 본문에서 어렵지 않다고 말씀하시는데 글쎄요.

우선 플랫폼이라고 해서 새로운건 없습니다.

유튜브는 예전 방송사에서 하던걸 그대로 이어 받은 것이죠.. 무한도전 볼 때 돈 내고 봤습니까? 앞뒤 광고 끼고 봤죠.

배달 라이더는, 화물차 지입제랑 동일하고

가사도우미나 아이 돌보미는 이전에도 인력소개소가 있었죠. 대리운전도 플랫폼이죠.

지금들어 플랫폼이 각광 받은 것은 기업 입장에서 기존의 노동법의 규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버나 라이더 같은 플랫폼 기업에서는 서비스 제공자들에게 파트너니 뭐니 하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즉, 둘의 관계가 노사관계가 아니라는거죠.

이렇게 되면 기업은 파트너가 사고가 나든 문제가 생기든 책임질 이유가 없어집니다. 주몇시간 근무, 수당, 연차, 퇴직금.. 이런 것에서 해방되는거죠.

즉, 제가 말하고 싶은 것 플랫폼 이란게 무언가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기업이 노동법을 비껴갈 꼼수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일부주에서 우버가 노동자라는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고, 우리나라에서도 타다 직원이 노동자라는 것에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여튼 말이 길었는데 플랫폼 기업이라는 건 기업이 유리하기 때문에 성립하는 겁니다.

예시로 김장을 들으셨는데, 제가 기업가라면 일일이 김장김치 평가하고 관리할 담당자 고용할바에 그냥 일정한 맛 보장되는 공장 김치 유통하는게 더 낫습니다.
거기다, 대량생산하는 공장보다 단가도 비쌀건데, 경쟁력이 있을려면 가격도 많이 높이지 못할겁니다..

인풋에 비해 아웃풋이 적거나 없을 확률이 큽니다.

또한 플랫폼 업체에서 품질관리 담당자를 둔다는 거 자제가 플랫폼으로서 자신의 이점을 버리는거에요.

배민에서 입점식당들 맛 관리합니까? 오픈마켓에서 판매상품이 가품인지 확인합니까?

일일이 자기 상품 다 확인하고 품질관리 하는건 이미 플랫폼이 아닌 기존 유통업체랑 다를게 없죠.

트랜지션앤트랜지션    친구신청

신세계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유통 업체라고 생각 하셔서 제목을 이리 다신거 같습니다.
유통업은 온라인 + 오프라인도 되고 오프라인 + 오프라인으로도 되는 양방향이라고 보는 시각이 유통업계 경영자들에겐 더 크다고 보셔야 할듯합니다. 아마존의 성장이 엄청났기 때문에 빛을 잃었지만 코스트코와 월마트의 성장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죠.

온라인 쇼핑, 이커머스가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유행이나 흐름이었다가 끝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를 일이지요. 인류에게 소개된 새로운 물품거래방식으로 아직 그 역사가 30년 남짓 밖에 안된것이니까요. 반면에 물건을 산지에서 가져와 수요지에 파는 것은 수백년이 된 비즈니스 모델이니 오히려 지속가능성의 비교는 오프라인 시장 유통이 역사적으로만 놓고보면 앞선다고 볼수도 있습니다.

오프라인이나 온라인 거래방식의 채택의 펀드멘탈을 그럼 들여다 봐야하는데 수요지-산지-소비자에게 직접 영향을 미칠수 있는 전통의 유통업계의 영향력을 무시할수도 없으니 신세계나 롯데는 어찌보면 대박은 없지만 쪽박도 없는 시장을 원할수도 있습니다. 그게 치킨게임이고 창고와 운송에 돈을 집어넣어야 하는 온라인 유통업체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지는 것이지요.

유통업계의 흥망은 사실 판매량 보다는 구독경제 방식의 회원권 판매와 배송비 절감, 그리고 물건의 매입 금액에서 남기는 차익을 투명하고 안정적으로 경영하는 마케팅과 재무관리,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수요에 맞춘 재고 관리등 업체의 내재가치에 달려있다고 생각해서 한자 적어봅니다.

격리해제자    친구신청

요즘은 정책적으로 온라인 보다 오프라인이 가격이 비슷하게 해놔서
오프라인 가서 인터넷 가격 비교해보고 삽니다.
직접 만지고 보고 입어보고 하니 구매율이 올라가죠
[잡담] KBS 수신료와 방송매체 (2) 2021/11/08 PM 02:01

KBS 수신료와 방송매체

 

 

 

최근 KBS에 대한 여론이 좋지 못해 TV수신료 인상이 어렵다는 소식을 접했다. 평소와 같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PC주의와 여성주의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문제해결방법에 대해 써보도록 하겠다. KBS 수신료를 보고 발상을 시작하여 KBS를 기준으로 하지만, 방송매체인 만큼 해결방법은 다른 방송국도 비슷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TV 수신료 인상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시간낭비다. 왜냐하면 오래지 않아 TV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TV는 이제 인터넷으로 세대가 교체될 것이다. 그러면 TV 수신료 인상을 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분명 TV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을 때에는 수신료 인상에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의 등장으로 이제는 의미가 없다. 오히려 수신료 인상은 TV의 소멸 시기를 앞당길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수신료 인상으로 납부부담이 늘면 국민들 사이에서 TV를 버리고 모니터를 대체하여 수신료를 내지 말자라는 흐름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KBS는 딜레마에 빠졌다. 수신료를 인상하지 않으면 물가상승에 의해 운영비 부족을 겪을 것이고, 수신료를 인상하면 납부자 수 자체가 줄어들어 결과적으로 인상 전과 비용이 같아져 운영비 부족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KBS TV 수신료 인상을 위한 노력을 하기보다는 다른 재원을 찾을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미래지향적일 것이다. 공영방송은 공정성과 독립성을 위해 세금으로 운영되는 것이 바람직하나, 새로운 형태의 세금은 국민의 반발이 심할 것이다. 그러므로 방송국이 자체적으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냉정하게 말해 이제 방송국이란 형태로 언론과 창작과 플랫폼을 한 곳에 묶을 필요는 없다. 과거 방송매체의 특성상 방송국이란 형태로 묶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방송국이란 형태로 묶을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언론과 수익성과 공영성이다. 언론은 분명 정상적인 역할을 수행할 때에 사회공헌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언론 자체로는 수익을 얻기가 어렵다.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잇는 언론은 정언유착이나 경언유착일 확률이 높다. 수익을 위해 권력이나 재력의 마이크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언론 외의 안정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창작과 플랫폼이다. 간단히 말해 언론이 사회공헌을 하고 창작과 플랫폼이 수익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고품질 창작물을 생산하고 정보플랫폼을 통해 새로운 수익창출이 가능해야 할 것이다. 잠시 언론으로 가보자. 정보플랫폼은 공영방송뿐만이 아니라 정보를 다루는 모든 언론이 공동으로 소유하여 기여도에 따라 분배를 받을 수 있는 구조를 구축해둬야, 언론이 공정성과 독립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방송국으로 돌아오자. 창작과 플랫폼도 수익성이 없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일을 할 필요가 있을 때가 있다. 공영방송이란 공영성을 가지고 있어야 그런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새로운 세금을 걷기 어려운 이상, 수익성이 높은 문화창작물의 성장과 안정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정보플랫폼의 소유가 필요할 것이다.

 

누군가 저널리즘을 말하며 정보 생산자 특성(성별 또는 장애)의 다양화가 필요하다 말하는데, 그것은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부터 생각하는 지극히 공산주의적인 발상이다. 생각해보자. 소비하는 정보의 생산자의 특성을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누가 정보를 생산했든 그 정보에 가치가 있으면 된다. 지금 기성방송매체가 외면 받는 일이 발생하는 것은 간단히 말해 정보의 품질이 인터넷의 접근성보다 높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성방송매체와 인터넷의 차이는 편리성과 편향성이다. 인터넷방송은 접근이 편리하고 원하는 정보만 수집할 수 있을 정도로 편향적이다. 그 때문에 중립성을 중시해야 하는 기성방송매체가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그런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편리성과 편향성을 넘어서는 고품질 정보를 생산할 필요가 있다. 그 품질에는 개인의 특성이 아닌 역할에 맞는 능력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성별유무나 장애유무와 관계없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면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 없으면 결과적 비율이 맞지 않더라도 수행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생산자를 생각하다 상품경쟁력이 낮아져 국내의 소비자를 불행하게 하고 국외 상품경쟁에서 뒤쳐지게 만든 공산주의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될 것이다. 차별이란 능력이 없는데 역할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있는데 역할을 얻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걸 강조하겠다. 본래 지금 하는 블라인드 채용이 이런 역할에 맞는 능력만 보는 걸 의미한다. 거기에는 성별이나 장애의 유무는 관계가 없다. 부디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줘야 한다는 궤변에 선동되어 국가 전체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길 바란다.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맡은 귀족들,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맡은 공산당원들,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맡은 권력자들,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맡은 인맥,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맡은 소수자들. 어떤 사상이든 관계가 없다. 어떤 이유든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맡는 순간부터 국가가 몰락하게 된다. 우수한 한국인이라면 이런 어리석은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될 것이다. 화가 난다. 귀족이나 권력자 또는 인맥으로 부당한 이익을 얻던 걸 욕하던 이들이 똑같은 짓을 저지르면서도 잘못된 걸 모른다. 그런 건 단순한 권력투쟁이다. 인권은 권력의 도구가 아니다. 그 누구든 역할에 맞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 역할을 맡도록 해야 한다. 물론 사리사욕에 힘을 남용하는 것 또한 역할에 맞지 않는 것 중 하나다. 사리사욕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 커다란 욕망을 지닌 이가 올바른 일을 할 수 있어야 국가가 발전할 것이다. 한국에는 힘이 필요하다. 국력이 낮아 국가적 치욕을 겪은 것이 백 년밖에 되지 않았음을 강조하겠다.

 

 

 

시청자 의견 영향 축소

 

새로운 수익을 위해 필요한 첫 번째가 바로 시청자 의견의 영향력 축소다. 시청자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은 올바르나, 그것은 대부분 소수에 불과하다. 지금 의견을 제시하는 과정이나 방법 또는 의지의 차이에 따라 소수의 시청자가 공영방송에 지나치게 높은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는 분명 비민주적인 결과다. 민주적인 제도라 하더라도 투표율이 10%도 되지 않는다면, 그걸 민주적이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다. 소수가 다수의 의견인 것처럼 포장되는 현상을 만드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고객평가를 중시한다. 실제 상품을 구매한 사람인지 파악하기 위해 영수증을 첨부해야 한다는 조건까지 붙을 정도다. 진실된 의견이 신뢰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편적인 상품이나 서비스와 달리 방송은 지나치게 많은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된다. 시청률이 1%에 보통 약 30만명 정도라고 하는데, 인터넷의 발달로 인터넷 시청률을 포함하면 좀 더 많은 사람이 보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정말 적은 수의 사람이 시청자 의견을 낸다. 보통 인터넷에서 상품을 구매한 뒤 평가를 하는 비율이 약 10%에서 많으면 30% 적으면 1% 정도라고 한다. 여기서 100명 중 1명이 평가를 한다 치자. 그렇다면 TV는 시청률 1%의 방송에 의견을 내는 사람이 과연 3000이 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터넷과 달리 TV는 의견을 내기가 너무나도 번거롭기 때문이다. 인터넷 개인방송은 영상을 보자마자 바로 의견을 달 수 있지만, TV는 따로 인터넷에 접속을 하여 가입한 뒤 의견을 내거나 전화나 엽서나 메일 따위라는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하기 의견을 내는 사람이 매우 적을 수밖에 없다. 방송국이 전부 인터넷 플랫폼을 이용하는 시점 이전에는 이런 시청자 의견은 그리 중요시 할 필요가 없다. 지금의 시청자 의견은 단순한 참고자료다. 그걸로 언론이나 창작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본래의 방향과 달라지게 되면, 본래 방향을 원했던 나머지 시청자들에게 외면 받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고 아예 의견을 받지 않으면 불통의 이미지를 뒤집어 쓸 우려가 있다. 따라서 시청자 의견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한 방법을 써야 한다.

 

생각해보자. 어떻게 하면 그 영향력을 축소시킬 수 있을 것인가? 앞서 말한 것처럼 진실된 의견이 신뢰도도 높다. 신뢰도가 높기에 영향력이 높다. 자 답은 나왔다.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서는 신뢰도를 낮춰야 하고, 신뢰도를 낮추기 위해서는 진실된 의견이 아니어야 한다. 발상의 전환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진실된 의견이 아닐 수 있는가? 그건 아무나 의견표현을 할 수 있게 되면 된다. 지금처럼 가입을 하고, 실명을 써서 의견을 내고, 그런 절차를 해서는 안 된다. 익명과 접근성을 높여 아무나 익명으로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면 된다. 분명 이러면 지저분해진다. 진실된 의견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 그러면 다수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그런 조치를 한 것이므로 이해를 구한다는 식으로 나가면 된다. 그것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실제 그렇기 때문에 적절한 대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의견의 신뢰도가 낮아지면 소수의 시청자 의견에 지나치게 휘둘리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러면 소수의 시청자 의견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재미가 없어지는 바람에 그 외의 시청자에게 외면 받은 무한도전 등의 코미디 같은 프로그램의 전철을 밟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자유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주관적 이익을 인권이라 주장하는 몰상식한 일부 단체가 불편함을 토로하며 되도 않는 간섭을 할 수 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다양한 단체의 수를 늘려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다양한 시청자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성별이나 세대가 다른 이들이 특정 단체를 만들 수 있도록 유도하면 될 것이다. 이외 인터넷 플랫폼에 달린 댓글 또한 시청자 의견으로 수렴한다고 주장하며 그것에도 맞추기 때문에 일부 시청자 의견에만 귀를 기울일 수 없다는 표명을 하면 될 것이다. 유행하는 빅데이터 수집을 표방해도 될 것이다. 이런 다양한 방법으로 영향력을 낮춰야 온전한 언론의 자유와 창작의 자유로 고품질 정보와 영상을 생산하여 국민의 호의를 얻어 높은 수익을 통해 수신료 인상이 없더라도 방송국을 유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인터넷 플랫폼에서 생산되는 정보와 영상은 제약이 적은 반면, 방송 매체에서 생산되는 정보와 영상은 제약이 많다. 창작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결코 방송 매체의 정보와 영상이 인터넷 플랫폼에서 생산되는 정보와 영상과 경쟁할 수가 없을 것이다.

 

 

 

창작의 자유

 

창작에 자유에 대해 잠시 다루겠다. 공영방송이기에 보다 신중하게 방영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공영은 공공의 이익을 의미하는 것이지, 보수적인 것의 이익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수적인 시각으로 성적 컨텐츠를 억압하는 것이 공공의 이익이라 할 수 없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영상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가령 성적으로 자유로운 영상이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며 국가의 이미지 상승으로 국익을 얻게 된다면, 그것이 공공이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지금 유교적 가치관과 여성주의에 의해 폐쇄적인 성 관념을 근거로 한 성적 억압으로 인해 이성애가 결핍되어 출산율이 폭락하고 있는 중이므로 공영방송이야말로 자유로운 성 관념을 널리 알려 국민이 온전한 이성애를 획득해 충만한 애정을 통해 출산율을 올리는 걸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대를 선도하여 공공에 이익을 줄 수 있는 것이야 말로 공영방송의 의무라 주장하겠다.

 

F20에 대해 잠시 얘길 해보겠다. KBS에서 조현병을 주제로 영화를 제작한 듯 하다. 그런데 그걸 보고 조현병 관련 단체에서 조현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혐오를 그대로 담아 조현병 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부추길 수 있으므로 TV 방영 중단 요청에 의해 TV 방영이 보류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사회문제를 다룬 영화는 보통 문제해결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직시로만 끝났다. 아마 이 영화도 조현병에 대한 현실직시를 했을 것이다. 사회의 편견과 혐오를 있는 그대로 표현했으니까 그런 반발이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저 불편하다고 현실과 다른 왜곡된 진실을 공개하게 되면 실질적인 문제해결조차 못한다. 그저 불편하다고 다루지 말라 하게 되면 사회문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사회문제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다. 예전에 영화 기생충이 현실직시만 하고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고 평가한 적이 있는데, 최소한 현실직시라도 해야 한다. 만약 기생충이 저소득층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조장한다고 방영 중단의 요청을 받아 영화상영을 하지 못했다면 어땠을 것 같나? 전세계가 황당해했을 것이다. 진정 빈자를 위한다면 왜곡된 영상은 필요가 없다. 빈자가 행복하게만 표현된다면 그 누가 빈곤함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하겠는가? 진정 조현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다면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다수가 문제해결의 필요성을 깨닫고 공적인 논의를 통해 문제해결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외에 무언가 등장하는 것만으로 불편해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악당이 등장한다고 등장 자체를 불편해하면 어떻게 악당의 악행이 잘못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겠는가? 어떤 걸 혐오를 하는 인간이 있어야 혐오가 나쁘다고 표현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혐오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차원적으로만 생각하며 그런 혐오를 하는 인간이 등장하는 것만으로 불편해한다. 어쩌자는 건가. 전쟁이나 재해의 희생자를 놀리는 인물이 나올 수 있는 거고, 특정 직업을 깔보는 인물이 나올 수 있는 거고, 민족이나 국민, 그리고 대중을 바보로 보는 인물이 나올 수 있는 거다. 그런 인물이 등장해야 그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세상에 알릴 수가 있는 것이다. 어떤 인물 자체가 불편한 인간은 그냥 특정 도덕에 세뇌된 것에 불과하다. EBS가 국정감사에서 포텐독이라는 컨텐츠가 폭력성으로 지적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나쁜 것이 등장했다는 이유 하나로 반발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보는 컨텐츠라고 하더라도 폭력성은 있어야 한다. 폭력성이 등장해야 잘못되었다는 걸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닌가? 그저 폭력성이 나쁘다고 무조건 등장조차 못하게 해서는 한국 아이들이 미숙에서 성숙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한국 아이를 미숙아로 키우는 건 바로 도덕에 세뇌되어 맹목적 비난과 반대를 하는 이들이다. 나는 그것에 분노한다. 단호하게 말하겠다. EBS는 폭력성에 대한 경계와 아이의 성숙한 시각을 길러주는 지극히 올바른 일을 했다. EBS는 일차원적인 지적을 받았다고 올바른 태도를 바꾸는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기를 간곡히 바란다.

 

주관적인 이익을 인권이라 주장하며 도덕을 명분으로 타인의 위에 서려는 선민의식을 가진 이들이 불편하다 싶은 것은 전부 인권침해라 주장하며 창작에 간섭하는 것으로 창작의 자유가 침해되고 있다. 보통 이런 부류들이 취미와 도덕을 구분 짓지를 못한다. 개나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은 취미인데, 거기에 도덕성을 붙여서 동물보호라는 식으로 몰고가 사회를 혼란케 만든다. 개나 고양이 보호를 주장하면 취미인 게 명확히 보이므로 의도적으로 동물보호를 붙인다. 특정 종에 대한 애호에 동물보호라는 도덕성을 붙이는 것으로 취미를 도덕으로 탈바꿈해버리며 사회의 도덕적 판단저하를 일으키고 있다. 명확하게 말하겠다. 특정 종을 좋아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건 취미다. 단순 취미를 맹목적으로 올바르다 주장해서는 안될 것이다. 과거 마녀사냥이나 홍위병 때도 그랬다. 시야가 좁은 인간이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올바름이 반드시 옳다는 보장이 없다. 제정신이 아닌 걸 옳다고 말하는 인간의 의견 따위는 들어줘서는 안 된다. 지금 한국에서 도덕적 명분으로 검열하는 것은 과거 공산주의 척결을 명분으로 사상서 검열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올바름을 명분으로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 자유국가에서 올바른지 부디 심사숙고하길 바라겠다. 도덕은 이제 인간의 위에서 명령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앞에서 길을 안내해야 한다.

 

여성주의에 대해 잠시 얘길 해보겠다. 이들이 최근 가장 많은 불편함을 호소하기 때문에 언급할 필요가 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특혜에 반발이 심한 까닭이 무엇인가? 신세대 남성이 여성특혜를 수용할 수 없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성평등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에 익숙한 다수 기성세대는 여성이 열등하다 생각하기에 여성에게 장애인과 같은 혜택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성평등에 익숙한 다수 신세대는 여성이 열등하다 생각하지 않기에 여성특혜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여성주의자들이 성평등을 교육하자 주장했기 때문에 여성주의자가 주장한 여성특혜를 신세대 남성이 수용할 수 없었단 것이다. 여성주의가 교육한 것으로 여성주의가 공격받고 있다. 이 얼마나 웃기는 상황인가? 이 사상은 이 정도로 어설프다.

 

여성주의는 객관적 이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적, 기독교적 등 그냥 여성이 이익을 보면 여성인권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손해를 보면 어떤 경우에도 여성차별이나 혐오가 된다. 간단히 말해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 여부가 결정되는 사상이다. 굉장히 조잡하고 천박하다.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 여부를 결정해버리면 황당한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세뇌된 여성의 손익으로도 인권 여부가 결정되어버린다. 유교 또는 기독교적 가치관에 세뇌된 여성에겐 가부장적인 가치관인 여성의 약한 의지와 강한 수치심이 인권이 된다. 그러니까 그걸 인권이라 주장하며 다른 여성에게 똑같이 세뇌해버렸다. 마치 사이비종교에 세뇌된 인간이 종교의 교리를 인권이라 주장하며 다른 인간에게 세뇌하듯이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 신세대 여성이 의지가 약하고 수치심이 강한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 여부가 결정되기에 감사지수가 낮아지고 피해의식 지수가 높아지게 되었다. 보통 부당한 이익은 잘못되었다 생각하고 정당한 손해는 인정하고 감수해야 하는데,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여부를 결정하다 보니 부당한 이익을 인권이라 생각하고 정당한 손해를 차별이나 혐오로 생각하게 되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당시 유럽 여성이 실수를 저지르는 까닭이 여성의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교육에 의한 것이므로 이성을 계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여성이 의지가 약하고 수치심이 강하고 감사지수가 낮고 피해의식 지수가 높은 것은 여성의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교육에 의한 것이다. 바로 여성주의자의 교육에 의한 것이다. 학교기관에 여성의 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여성주의의 주관적 이익의 인권화가 남학생에게도 주입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이들 또한 의지가 약하고 수치심이 강하고 감사지수가 낮고 피해의식 지수가 높아지고 있다. 인간을 열등하게 만드는 사상이 전파되고 있다. 정말 인간을 퇴락시키는 사상이다. 그래도 보통은 성별 관계 없이 건전한 사상을 가진 정상적인 교사가 있어 아마 괜찮을 것이다.

 

도덕은 본래 주관적 이익이 객관화를 거쳐 명확한 논리를 구축한 다음에야 도덕성을 갖추게 되어 사회를 올바른 길로 안내할 수 있는데, 여성주의는 그냥 모든 여성의 주관적 이익을 전부 인권이라 주장하고 주관적 손해를 전부 차별과 혐오라 주장하는 천박한 사상이기에 사회를 혼란과 고통과 갈등의 길로 안내하고 있다. 이제는 이런 이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 객관화가 된 명확한 논리를 구축한 도덕을 근거로 한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자유라던가 말이다. 여성도 이제는 그런 천박한 사상에서 벗어나 자유주의에서 여성의 인권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자유국가에서 자유를 도덕으로 삼자고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생각한다. 건전한 자유주의를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방송매체 또한 자유주의를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창작의 자유가 있어야 고품질 창작물이 나올 수 있다는 걸 강조하겠다.

 

 

 

경쟁원리

 

방송 매체 특성상 경쟁이 어렵다. 채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보는 황금시간대가 따로 있을 정도다. 그런 탓에 생산되는 창작물의 수가 적어 경쟁원리가 작동하기 어렵다. 경쟁원리가 작동하기 어려우니 아무래도 고품질 창작물이 양산되기가 인터넷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려운 점이 있다. 이것이 방송매체가 넷플릭스에 추월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이 점을 보완해야 한다.

 

우선 생산(창작자)과 유통(플랫폼)의 관계에 대해 정리하자. 일반적으로 생산보다 유통이 유리한 상황이지만, 생산자가 다양한 유통경로를 확보하고, 우수한 상품을 양산하여 수요가 높으면 대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 전제에서 창작물은 생산과 유통이 대등한 관계가 가능한 환경이다. 왜냐하면 문화 창작물의 수요는 전세계로 퍼지기가 매우 쉽기 때문이다. 다른 상품의 경우, 생산품이 세계로 유통되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그래서 쉽게 퍼지기가 어려운 반면, 창작물은 인터넷을 통해 너무나도 쉽게 유통될 수 있다. 문화는 다양한 유통경로와 높은 수요가 존재하기 때문에 고품질 상품만 양산하면 생산이 유통에 비해 불리할 수가 없다. 지금 방송 매체가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비판하는 태도를 견지할 때가 있음을 기사를 통해 종종 목격하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다양한 온라인 플랫폼이야말로 다양한 유통경로와 다름이 없다. 굳이 적대적 관계를 성립할 필요가 없다. 이런 온라인 플랫폼이 있기 때문에 대량생산이 가능해진다는 점도 좋다. 지금까지 창작은 보통 가장 우수한 일부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약간 부족하더라도 가능성이 높은 창작자는 기회를 얻기 어려웠다. 가령 지금 창작물 품질이 70이지만 성장 가능성은 80인 것과 창작물 품질이 50이지만 성장 가능성은 90인 것이 있다면, 전자가 선택되어 후자의 무궁한 가능성은 깨어나지 못한 채 잠들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다양한 유통경로와 수요가 있으므로 무조건 많이 생산하면 되기 때문에, 약간 부족한 창작자도 기회를 주는 것이 큰 틀에서 이익이 된다. 이는 배우도 마찬가지다. 창작물을 보면 매번 보는 배우만 나오는 것 같다. 창작물이 많아져야 재야에 붙인 유능한 배우들도 빛을 발할 수 있게 된다. 보통 양산의 경우 품질이 저하될 우려가 있지만, 개인이 대량의 창작물을 만드는 것이 아닌 다수가 각각의 창작물을 대량으로 만드는 것이므로 품질 자체는 유지될 것이다. 넷플릭스가 그런 방식으로 지금 성장하고 있다. 방송매체는 온라인 플랫폼을 이용하여 수많은 창작자로부터 다양한 창작물을 평가 받을 수 있도록 한 뒤에, 그 중 가치 있는 것을 TV 편성표에 편성하여 송출하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존 셀러를 사들이는 것으로 덩치를 키워 7조원대의 기업으로 성장한 스라시오라는 기업이 있다. M&A 또는 MCN과 같은 방식이라고 한다. 방송매체도 이와 비슷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학교의 영화동아리나 아마추어 영상제작팀을 대량으로 모집하여 간단한 교육과 함께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고, 생산된 창작물을 다듬어서 온라인 플랫폼에 올려 시청자 평가를 받도록 한 뒤에 평가가 높은 것을 방송국에 내보내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공영방송에 목적에도 부합한다. 한국의 창작자를 지원하는 것으로 한국문화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된다. 자동화 시대가 되면서 각국은 산업의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한국은 문화적 영향력이 높아지고 있으므로, 본격적으로 문화도 미래 먹거리로 삼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한다. 관광지를 먹거리로 삼는 국가처럼 말이다. 물론 이미 그런 계획은 있을 것이다. 그걸 이루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다수의 창작자가 창작물을 대량 생산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공모전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예전에는 소수의 창작자가 만든 창작물이 공모전에 당선되어 평가 받는다면, 이제는 다수의 창작자가 만든 창작물이 시청자에게 평가를 받게 된다. 이익은 넷플릭스가 오징어 게임에 200억원을 투자하여 1조원의 가치를 창출했던 것과 같다. 40 팀에 1억씩 투자했을 때, 40억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창작물 하나만 건져도 본전을 얻고 두 개를 건지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양산을 통해 어떤 형태의 경쟁이 발생하고, 그 경쟁을 통해 고품질 창작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창작의 자유는 보장하되, 기술의 전수는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촬영이나 연기는 창작과 무관하게 능력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기술전수는 대상을 까다롭게 고르는 경우가 많지만, 공영방송인만큼 공공의 이익을 위해 대상을 고르지 않고 불특정 다수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건 바람직하다 본다. 창작에서 높은 수익을 얻게 되면 언론 또한 권력과 재력으로부터 자유롭게 정보를 생산하여 공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당장 초반에는 이익을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구조가 형성되면 작은 영상제작팀조차 많은 경험을 통해 우수한 창작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되어 국가의 문화 수준이 한층 높아지는 것으로 추후에는 이익을 얻을 확률이 높게 될 거라 생각한다.

 

 

 

해외

 

국내에서 인정 받는 것보다 해외에서 인정 받는 것에 더 가치를 두는 이들이 많다. 흔히 말해 국뽕이다. 이런 걸 고려해서 처음부터 세계에 초점을 맞춘 창작물을 만드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평범해도 세계에서 성공하면 한국에서도 관심을 갖고 성공하게 된다. 그 성공이 여론의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것이다. 여론악화로 인해 TV수신료 인상이 어려웠던 점을 생각해보면 그런 점은 고무적이다. 또한 그 성공이 방송국 자체의 성장으로 이어져 수신료가 없어도 될 정도의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TV가 사라질 시대를 대비할 필요가 있다.

 

5천만명이 70억명을 만족시킬 컨텐츠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창작자가 필요하다. 이러니까 무조건 많이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아주 작은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도 끌어올려서 고품질 창작물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량생산에 자원이 소모되는 다른 산업과 달리 한번 만들면 자원소모가 거의 없이 복제가 가능한 문화 산업은 고품질 창작물을 많이 만들수록 대체로 이익이다.

 

본래 외국의 상품은 내국의 견제를 받기 쉽다. 그러나 문화는 다르다. 즐거움을 줄 수 있으면 검열이나 규제를 해도 어떻게든 보게 되어 있다. 중국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 창작물 수준만 높으면 별다른 제약이 없이 수익을 얻을 확률이 높으므로 해외공략이 수월해지게 된다. 또한 문화의 영향이 커지면 그 나라에서 생산한 상품에 대한 호감도도 높아져 다른 산업의 진출도 돕게 된다. 어찌되었건 무조건 많이 만든다. 고품질의 창작물을 많이 만들면 70억명 중 누군가는 좋아하겠지.

 

 

 

논쟁

 

스마트폰 세대의 결점 중 하나가 바로 문해력이라고 한다. 스마트폰에 길들여져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졌다고 한다. 보통 그걸 개선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쉽지 않다. 사람은 점점 쉽고 편하고 간단하고 재미있는 걸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라는 도구는 이런 인간의 본성으로 나타난 것이다. 문화만 봐도 그렇다. 소설, 만화, 게임 같이 점점 편하고 재미있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렇다고 이런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본성이 인류의 발전의 원인 중 하나기 때문이다. 쉽고 빠른 이동, 쉽고 빠른 식사, 쉽고 빠른 기억, 쉽고 빠른 기록, 쉽고 빠른 교류 등 이런 경향은 사회의 발전을 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기 때문에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런 경향에 따른 발전은 그대로 두고, 개개인의 능력이 향상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잠깐 생각해보았다. 바로 배움의 인지를 정상화하는 것이다. 본래 배움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일이고, 무지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그러나 최근 배움은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이고, 무지는 지적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괴상하게 변했다. 이는 주관적인 손익으로 인권을 결정하는 사상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시험 평가를 높게 받는 것이 주관적으로 이익이기 때문에 시험 평가로만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 인권이라 인지하고, 모르는 것을 지적 당하는 것은 주관적으로 보았을 때 손해기 때문에 차별이나 혐오로 인지하고 있다. 이 천박한 사상이 한국 사회에 독소처럼 퍼져 온갖 것을 갉아먹으며 인간을 퇴락시키고 있다. 슬픈 일이다. 애초에 스마트폰은 단순한 도구다. 단순히 스마트폰으로 문해력이 낮아졌다고 해석하는 것은 교통수단으로 체력이 낮아졌다고 해석하는 것과 같을 정도다. 편리한 도구와 별개로 인간의 능력은 인간 개개인이 알아서 키워야 한다. 그걸 권장하는 풍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배움의 인지를 정상화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토론과 논쟁의 발달이다. 어떤 주제로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인지를 바꿔나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어떤 주제로 사람과 말싸움을 하면서 배움의 폭을 넓히는 필요를 느끼게 해야 한다. 현재 인터넷의 발달로 어디서든 토론과 논쟁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제대로 된 토론과 논쟁을 하는 일이 많지가 않다. 하도 인신공격이나 일반화가 궤변이나 왜곡이나 논점이탈 따위로 지친 나머지 아예 토론과 논쟁 자체를 거부하며 네 말이 옳으니까 그냥 반론하지 말라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까지 생겼다. 이는 정말 좋지 못한 현상이다. 일상에서 토론과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정도로 발달해야 시험 외의 배움의 필요성을 깨닫고, 무지에 자존심을 상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논쟁의 예능화다. 토론이 아닌 논쟁을 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토론보다 논쟁이 보다 깊게 대화를 하게 된다. 둘째, 논쟁이 예능에 보다 적합하다. 얌전히 토론만 하는 건 주제를 겉 핥기 식으로만 접근할 가능성이 높다. 논쟁을 해야 좀 더 깊게 파고든다. 얌전히 토론만 하는 건 재미가 없어 흥미를 끌기 어렵다. 예능이 되려면 논쟁으로 발전하여 승패가 갈려야 한다. 예능화를 한 이유는 논쟁의 단계별 학습을 위해서이다. 본래 지적 수준에 따라 즐길 수 있는 문화가 다르다. 동화부터 시작해 어려운 인문학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논쟁 같은 걸 주제로 한 프로그램은 처음부터 어려운 단계에서 시작한다. 이것이 잘못되었다. 대체로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기초부터 알아가야 한다. 무력, 지력, 매력, 권력, 재력 따위의 힘을 갖추기 위한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힘든 운동을 하는 것이 잘못된 것처럼 처음부터 어려운 논쟁을 보는 것은 잘못되었다. 예능을 통해 논쟁의 접근성을 높여야 할 것이다. 초등학생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논쟁의 예능화를 주장하겠다.

 

논쟁이란 무엇인가? 사리를 따져 말이나 글로 다투는 것이라 한다. 간단히 말해 말싸움이다. 본래 이런 말싸움은 인간관계를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다. 하지만 결투에도 일종의 예절이 있었던 것처럼, 논쟁에도 예절이 있으면 괜찮을 것이다. 결투와 달리 신체적 상해를 입을 확률이 낮으므로 예절만 잘 지키면 관계를 해칠 이유는 없다고 본다. 관계를 해칠 우려가 있다는 것 하나로 제대로 된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는 것이 더 좋지 못하다. 논쟁의 예능화는 바람직한 논쟁의 방법론을 알려 건전한 논쟁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지금의 논쟁은 논쟁에 필요한 예의가 바로잡히지 못해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많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예능화를 할 수 있는가? 결투의 예능화가 바로 격투 프로그램이다. 몸싸움을 예능화한 것이 이미 존재하므로 말싸움을 예능화하는 것은 그걸 참고하면 된다. 우선 선수와 팀을 만든다. 방송국이나 대학 또는 기업으로 나눠 선수를 모집하고 팀을 만들면 좋을 것이다. 이런 것은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홍보효과가 있을 것이다. 몸싸움에 필요한 것이 경기장이라면 말싸움에 필요한 것은 주제일 것이다. 논쟁의 주제는 예능인만큼 쉬워야 한다. 일상에서 갈등을 빚는 것을 주제로 하면 된다. 재활용 문제나 학교폭력이나 성별갈등 등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걸 주제로 해야 논쟁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 몸싸움은 승패가 갈리는 것처럼 말싸움도 승패가 갈리게 해야 한다. 일목요연하게 승패가 갈려야 쉽게 접하고 즐길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심판의 결정으로 승패를 갈리게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만약 인터넷에 방영하면 실시간 투표가 가능하므로 시청자 의견을 참고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TV의 시청자 의견은 비율이 낮아 귀담아들을 필요가 적지만, 인터넷의 시청자 의견은 비율이 높아 귀담아들을 필요가 높은 편이다. 물론 이래도 참고자료에 머물러야 한다. 논쟁에 승패가 있으면 위험한 결론이 승리할 수 있다는 위험요소가 있다. 지금 범죄의 양형이나 촉법소년 등의 문제를 많은 사람들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는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이런 예민한 문제에 승패가 나오면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줄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예능의 좋은 점이 나온다. 첫째, 예능이기 때문에 무겁게 접근할 확률이 낮은 편이다. 둘째, 예능이기 때문에 같은 주제로 다시 도전하면 된다. 한번 승패가 나온 주제라 하더라도 괜찮다. 승리한 결론에 도전할 다른 도전자가 나오면 된다. 본래 논쟁의 주제는 많은 편이나 쉬운 주제는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계속 도전할 수 있으면 분량의 걱정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이외 세세한 부분은 몸싸움을 예능화한 격투 프로그램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선수선발의 어려움에 대해 말해보자. 격투의 경우 선수의 능력과 승패를 알기가 쉽다. 그러나 논쟁은 선수의 능력을 알기 어렵고 승패도 알기가 어렵다. 단순히 지식이 많다고 논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논쟁은 해당 주제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람이 유리할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이 적더라도 관점이나 태도나 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유리할 수 있다. 옳고 그름도 중요하지 않다. 과거 하루는 정의를 말하고 하루는 불의를 말했던 인간도 있었다. 논쟁의 기술에 따라 옳고 그름을 뒤바꾸는 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식의 대결이 아닌 한정된 시간 내에서 논리로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므로 단순 지식으로 선수를 선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얼마나 문장을 간결하게 정리할 수 있는가? 얼마나 영리하게 주제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가? 얼마나 알기 쉽게 주장하는 바를 전달할 수 있는가? 또한 예능이기 때문에 시청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와 문장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도 있다. 제삼자가 있는 논쟁은 대체로 대화상대만 고려할 것이 아니라 제삼자에게 끼치는 영향까지 고려해야 한다. 시청자가 있는 이상 시청자를 고려하면서 논쟁해야 할 것이다. 이는 통상의 논쟁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유명하다는 이유로 연예인이나 유명인사를 기용할 것이 아니라 실제 논쟁기술이 높은 인간을 기용해야 할 것이다. 격투기가 그러하듯, 능력이 뛰어나면 알아서 유명해진다.

 

논쟁의 예능화는 퇴락하고 있는 한국 인문학을 되살릴 불씨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단순 수익을 위한 일이 아니라 지극히 공공의 이익을 위한 일이므로 공영방송에 적합한 프로그램이라 생각한다.

 

 

 

지역 영상 플랫폼

 

예전에 인터넷 영상 플랫폼은 세 가지로 나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유튜브는 취향이나 분야, 틱톡과 숏이 유행, 지역 영상 플랫폼이 지역으로 말이다. 본래 지역 영상은 방송매체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직 인터넷 영상 플랫폼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만들면 좋을 것이라 말한 바 있다. 유튜브는 취향이나 분야로 묶어 분류하지만 지역 영상 플랫폼은 부동산으로 묶어 분류한다. 영상을 주소로 묶을 수 있으면 지역의 정보를 한눈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방송매체가 지역 영상 플랫폼을 소유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본래 방송매체가 지역의 영상을 생산했기 때문이다. 지역 정보의 전문가가 지역 영상 플랫폼을 소유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생각했다. 또한 방송매체는 언론과 창작과 플랫폼이 합쳐져 있기 때문에 플랫폼을 소유한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생각했다. 넷플릭스도 생산과 플랫폼을 둘 다 하고 있지 않나. 둘째, 이제 방송매체는 국가의 세금이나 기업의 광고나 후원 없이도 정보와 창작물을 생산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석탄산업 사양화로 인해 지역경제가 무너질 것을 우려하여 강원랜드를 설립한 것처럼, TV의 사양화로 인해 수신료 수입에 차질이 빚어지게 될 것을 우려하여 어떤 산업의 주도권을 주게 하는 것은 타당하다 생각한다. 지금 나는 이것이 적합하다 생각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공영방송의 공정성이나 독립성을 보장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다. 셋째, 지역 영상 플랫폼이 나와 지역 영상이 생산되어 지역의 교류가 활성화되는 것은 지극히 공공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 생각한다. 공영방송에 적합한 일이다.

 

지금 국가에서 공공 플랫폼을 통해 빅데이터에 의한 통계를 국민에게 제공하고 있으나, 그것은 소비자의 수요에 맞춘 정보가 아니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영상은 철저하게 소비자에게 맞춰질 것이기 때문에 공공 플랫폼과 역할이 다르다.

 

 

 

언론

 

언론 자체로 수익이 보장되기는 어렵다. 언론은 가루받이를 통해 자연의 생태계를 지키는 것과 같이 정보를 잇는 것을 통해 사회의 생태계를 지키는 사회공헌을 하는 역할이다. 이제 언론의 독립성을 위해 모든 언론은 자체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구조를 갖춰야 한다. 창작물이나 플랫폼으로 자체 수익을 얻게 되면 정보를 악용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지금이 더 위험하다. 언론이 수익을 얻기 위해 정언유착이나 경언유착을 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 생각한다.

 

대체로 한국 언론은 우수한 편이라 생각한다. 단지 특정 사상에 휘둘리거나 수익을 위해 정치와 경제 등과 유착하는 것과 같이 정보를 악용하는 것이 문제다. 언론의 폭거로 언론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다. 언론이 자성을 해야 하지만 언론 자체적으로 공정성과 독립성을 얻을 수 있는 환경 또한 마련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널리즘을 위해 배를 곯는 것을 언제까지 요구해야 하는가? 이제 거대 언론만이 아닌 모든 언론이 안정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이러면 경쟁원리가 작동하지 못해 정보의 질이 낮아질 우려가 있다. 따라서 고품질 정보를 생산하거나 잇는 언론에 대한 대중의 특별한 관심과 대우가 필요할 것이다.

 

인터넷 영상 플랫폼에서도 정보를 생산하여 공급하고 있는 만큼, 이제 언론은 단순한 정보에서 벗어나 보다 전문화될 필요가 있다. 방송국으로 분류될 것이 아니라, 언론계 자체적으로 특정 분야의 정보전문가를 양성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사람들이 인터넷의 정보보다 언론의 정보를 신뢰할 것이다.

 

 

---

 

이런 종류의 글은 잡담 글로 올릴게요. 잡담 글은 종종 올릴 것 같네요. 다음 잡담 글은 아마 신세계와 오프라인 유통입니다.

 

역할주의 사상 정리가 끝나면 아마 그건 제대로 관리할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오타나 오류 있어도 사상의 양식이니 그냥 방치했는데, 그거부터는 관리할 것 같습니다. 이건 언제 쓸지 모르겠습니다. 사는 게 힘드네요.

 

예나 지금이나 한국은 외세에 지나치게 휘둘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논란이 일어나면 외세의 개입이 있는지 없는지 한번쯤은 되새길 필요가 있음을 말해두겠습니다.

 

누가 정치권력을 쥐든 나는 나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이제는 낡은 관념을 부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한국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세습은 유교적 가치관에 근거하는 가족주의입니다. 이제는 혈통이 아닌 이념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자유라는 이념을 공유하는 이들이 같은 이상을 위해 힘내야 합니다. 보통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와 함께 있어야 빛을 발하는데, 각국의 낡은 관습과 자본주의가 결합하자, 그릇된 자본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고 봅니다. 자본주의는 소비자를 생각하는 사상이죠. 그런데 그러다 보면 필연적으로 생산자가 힘들게 됩니다. 생산자가 노력을 해서 품질이 높은 상품을 생산해야 그걸 소비하는 소비자가 행복하게 되는 구조죠. 공무원이 힘들어야 국민이 행복한 구조와 다를 바 없습니다. 과거 왕조시대 칭송 받는 왕들이 신하를 힘들게 할수록 백성이 행복하다 말했지요. 이런 상황에서 모든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생산을 로봇과 인공지능이 하면 됩니다. 과학이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상이 그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무분별한 검열을 자행하는 무리들과 거기에 찬성하는 부류들은 중국과도 같은 자유의 적입니다. 이것은 달라지지 않아요. 남성이 즐기는 컨텐츠가 검열되는 일이 많아 착각할 수 있는데, 여성이 즐기는 컨텐츠를 검열해도 반대할 것입니다. 이것은 자유에 관한 일이지, 성별과 관계가 없습니다. 성별 국적 취미 세대 전부 관계없이. 예전에는 적성국의 사상이라고 공산주의 저서가 금지되었지요. 그것에 반대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나는 공산주의 사상잊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검열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과거 검열하던 시대에 자유와 민주를 부르짖던 사람들이 검열에 찬성하는 것은 그 외침이 거짓말이었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진실을 요구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이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규정짓습니까? 사상서를 검열했다는 것으로 분노하던 이들은 도대체 무엇에 분노했던 겁니까? 자유의 개념과 가치를 이제는 알아야 합니다.

 

한국의 이성애 결핍으로 야기되는 모든 현상의 근원은 여성의 정조관념에 따른 성 터부시에 오는 겁니다. 미성년 때 자아가 형성되므로 그때 인생에 필요한 것을 전부 교육해야 합니다. 무력, 지력, 매력, 권력, 재력 따위를 말이죠. 학생이 야한 걸 봤다고 화내고 혼내는 것이야말로 한국의 이성애 결핍을 만드는 것입니다. 음란물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을 죽음으로 몰고 있는 원인 중 하나란 말입니다! 도대체! 이성애에 성욕이 빠지면 어떻게 이성애가 성립될 수 있습니까? 성욕이 없는 애정은 그냥 친애입니다! 신체적 본능으로 시작된 애정으로 관계를 맺고 그 관계에서 나타난 아이에 대한 애정은 인간의 DNA에 새겨진 본능입니다. 이후 성욕이 떨어져도 시작은 성욕으로 시작해야 대를 이어나가는 거란 말입니다! 그걸 부정해서 어떻게 합니까! 야한 걸 보면 잘못되었다, 이성의 매력을 칭찬하면 혐오다, 이러면 도대체 어떻게 정상적인 이성애가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성애가 결핍된 겁니다. 성을 터부시하여 음란물을 악으로 몰고 있는 이들이 이 국가의 소멸을 주도하고 있는 겁니다. 성 억압이 이성애 결핍을 부르고, 이성애 결핍이 남성이 여성을 성욕해소도구로 여기게 하고, 여성이 남성을 ATM기기로 여기게 만든 겁니다. 인간을 도구로 여기는 것과 성 상품화나 수익 공유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애정이 결핍되어있기 때문에 단순 도구로 격하된 것입니다. 서로를 온전하게 사랑하게 하려면 성을 억압해서는 안됩니다! 이건 그냥 단순한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이럼에도 음란물을 악으로 모는 이들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느끼지도 못하고 계속 성을 억압하며 국가를 소멸로 이끌고 가겠지요. 몹시 슬픕니다. 연령에 맞는 등급을 말할 수도 있겠지요. 등급 따위가 인간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나는 미성년 때 등급에 맞지 않는 컨텐츠를 즐겼습니다. 그리고 대다수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이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악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래서 한국 치안이 세계적 순위입니까? 그러면 성적 억압을 자행하여 검열이 일상인 이슬람은 치안이 높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음란물 검열은 단순한 성적 억압에 불과합니다. 거기에 도덕성을 부여하는 것은 억압에 도덕성을 부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상서를 검열하는 것에 도덕성을 부여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묵묵히 주장할 겁니다. 무엇 때문에 잘못된 건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풍습에 의거해 아무 생각 없이 음란물을 막는 걸 올바른 일이라 착각하는 이들이 국가를 소멸로 이끈 거라고. 조소할 가치도 없습니다. 무표정으로 그게 잘못된 거라고 묵묵히 주장할 겁니다. 사회현상 이해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하는 방식으로 출산율 폭락되고도 똑같은 방식을 사용하는 건 학습능력이 부족한 겁니다. 단순한 일이면 학습능력이 부족한 걸로 끝나는데, 출산율 같은 문제는 국가소멸로 이끄는 죄가 됩니다. 공산주의 척결을 운운하며 사상서 검열하는 거나 성 감수성 운운하며 성 컨텐츠 검열하는 건 똑같은 겁니다. 성 감수성 운운하면서 성 억압하는 이들은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를 인지하십시오. 그 손에 놓여진 출산율 지표를 직시하십시오. 국가와 민족이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걸 깨달으십시오. 성 검열을 운운할 때마다 이성애 결핍으로 인한 관계의 종말이 부를 종의 마지막을 떠올리길 바랍니다.

 

꾸밈노동에서 벗어나 남성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은 그것이 뜻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겁니다. 시선을 받지 않는 것은 남성이 사랑할 정도의 매력이 전혀 없어졌다는 걸 의미합니다. 간단히 말해 그냥 그건 이성에게 사랑 받기를 포기한 것일 뿐입니다. 거기에 멋대로 도덕성을 부여한들 본질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학력사회의 끝은 학업의 목적이 취업이 아닌 창업이 되면 바뀔 것입니다. 창업의 성공에 학력은 그리 크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하자 마자 사업해서 성공하는 유능한 자본가 수의 증가가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걸 위해 이제는 교육이 학생의 문제해결능력을 키워야 하겠지요.

 

정의란 무엇인가? 인간의 객관적인 이기심입니다. 어떤 주관적인 이기심을 사회적 공감대를 사는 객관화를 통해 다수의 이익이 되면 정의가 되는 것이죠. 어떤 단순한 주관적인 이기심도 객관화가 되면 정의가 됩니다. 그런데 일부 천박한 사상들은 객관화를 하지 않고 주관적 이익 그 자체를 인권이라 주장하여 사회를 혼란케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정의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사회는 어떤 암묵적인 약속을 전제하고 교류합니다. 특정 풍습이나 관념 따위는 이미 사회에 속한 사람 내면에 새겨져 그 외의 영역에서 개성이 두드러지죠. 인간의 자아로 비유하면 무의식의 영역이죠. 그런 관점에서 풍습이나 관념은 사회의 무의식이라 해도 다를 것은 없을 것입니다. 연하는 연상에게 존댓말을 해야 한다라는 규칙은 한국사회에서 당연한 약속이지만, 어떤 나라에서는 당연하지 않습니다. 이런 존댓말 같은 것이 한국 사회에서는 암묵적인 약속, 사회의 무의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상을 하는데 있어 기초 중 하나가 바로 이 고정된 무의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유적응실패로 인해 애정결핍현상을 해결하지 못하여 발생하는 현상 하나에 이 정도로 파장이 발생한다는 사실에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인문학 수준이 낮군요. 인문학에 있는 사람이 설거지 운운하는 건 우울하네요. 본인의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파악도 못해서 남성이 주입한 여성열등주의를 여성의 본성으로 착각하고 그거에 맞춘 걸 여성인권이라 주장했던 사람들이 수두룩했으니 참. 솔직히 머리가 아파요. 한국이 자유적응에 실패해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요? 답답하네요. 조선이 에 중점을 두었던 유교국가라고 해서 인문학 수준이 높다 할 수 없습니다. 유교의 가르침 내에서만 사고할 수 있었으므로 실상 인문학 수준이 종교국가 수준이었죠. 이제 한국 인문학은 조선의 유교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사상가가 수준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겠습니다.

신고

 

내사랑미나    친구신청

읽다가 눈 아파서 포기….

루리웹-6010739633    친구신청

논문급이네요 우와
[잡담] 지역 영상 플랫폼 (0) 2021/09/20 AM 08:21

지역 영상 플랫폼

 

 

 

간단한 발상 하나 적어보도록 하겠다. 발상방식은 다음과 같다. 구글의 독과점으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다. 그 부작용을 해소하려면 규제 또는 경쟁상대의 등장이 필요하다. 경쟁상대를 등장시키는 것으로 초점을 맞춰보자. 구글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나는 유튜브를 종종 보므로 유튜브부터 시작해봐야겠다. 우선 유튜브의 부족한 부분을 생각해보자. , 유튜브는 분야나 취미의 접근도는 높은데 지역의 접근도가 낮구나. 그래, 당근마켓처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영상 플랫폼이 등장하면 괜찮은 경쟁상대가 될지도 몰라. 그렇구나. 기존 지역 영상 매체는 방송국이었어. 각 지역의 방송국이 따로 있지. 그러다 분야나 취미를 중심으로 한 영상 플랫폼인 유튜브가 등장했지. 유튜브가 성장하고 있는 중에 짧고 강렬한 인상을 주는 틱톡이 등장했어. 중국산이어서 반중감정이나 개인정보유출 우려가 있음에도 가벼운 접근성으로 젊은 세대 입장에서 유행타기가 쉬워 많은 이들이 이용했어. 돈을 미끼로 한 호객행위도 한 몫 했지. 유튜브는 그걸 보고 숏이란 컨텐츠로 비슷한 서비스를 시작했고. . 영상 매체와 플랫폼은 지금까지 크게 지역과 분야와 유행으로 세 가지가 나뉘었는데 큰 차이가 하나 있어. 유튜브와 틱톡과 달리 방송국은 단방향 영상공급매체라는 거야. 지역과 분야와 유행 세 가지 중 분야와 유행은 영상 공유 플랫폼이 존재하지만 아직 지역은 존재하지 않았어. 만약 지역 중심의 양방향 영상 공유 플랫폼이 등장한다면 유튜브와 틱톡을 이을 세계적 영상 플랫폼이 나타날 수 있을지도 몰라. 여기까지 발상에 1분이 소요되었다. 1. 구글 뉴스를 접한 것이 문뜩 떠오름. 2. 유튜브에 대한 생각을 함. 3. 지역영상 플랫폼. 4. 당근마켓. 5. 방송국, 유튜브, 틱톡. 내가 아는 지식 안에서 생각해서 떠오르지 못할 것이 없다라는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다. 사상은 발상도 어렵고 정리도 어렵지만 사상의 결과물은 발상은 쉽되 정리는 어렵다.

 

정리하기 전에 간단한 입장표명을 하겠다. 경쟁. 처음에는 구글의 서비스에 만족하는 편이라 경쟁상대의 필요성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경쟁이야말로 소비자에게 사랑 받기 위한 노력을 만드는 길이었다. 생산자는 소비자에게 경쟁상대보다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고, 노력하기에 생산자가 생산하는 상품의 가치가 올라간다. 높은 상품 가치는 국내의 소비자를 행복하게 하고, 국외의 상품 경쟁에서 승리하여 국가 경제를 성장시키게 한다. 자본주의는 생산자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체제였다. 그러니까 소비자를 생각한 자본주의가 생산자를 생각한 공산주의의 대결에서 승리한 것이다. 물론 생산자를 소홀히 대하여 착취하게 되는 문제는 자본주의의 결함으로 남아있다. 원래 생산자를 생각하면 소비자가 불행하고 소비자를 생각하면 생산자가 불행하게 된다. 이 부분은 올바른 부의 분배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를 승리하게 한 원동력인 소비자를 생각하는 마음이야 말로 자본주의의 미덕이다. 그런데 독과점은 경쟁이 없기에 소비자보다는 생산자를 먼저 생각할 확률이 높다. 굳이 소비자에게 구애하지 않아도 사랑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레 상품 가치가 낮아져 소비자를 불행하게 만들 확률이 높다. 그러니 독과점에 있는 구글도 경쟁상대가 필요하다 생각했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개인과 소비자를 생각하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집단과 생산자를 생각한다. 어느 쪽이 우선되어야 하겠는가? 분명 자유주의나 자본주의도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 집단에 개인이 묻혀 개성을 잃어버리고 한낱 부품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생산자를 생각하느라 상품가치도 없는 걸 생산하여 그걸 소비하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것보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낫다. 따라서 결함을 해결하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진보를 해야 할 것이다. 지역주의. 분명히 말하건대 폐쇄적인 지역주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지역주의는 이제 낡은 갈등유발요소다. 그러나 나는 생각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지역과 연계되는 발상을 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지역 중고거래를 활성화시킨 당근마켓의 출현이 폐쇄적인 지역주의를 유발 또는 심화시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므로 지역 영상플랫폼도 큰 부작용이 없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아직 지역 영상 플랫폼이 마땅히 없는 듯 하다. 아마 방송국이 있기에 따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 누군가는 이걸 떠올리고 언제가 만들지도 모른다. 어차피 만들어질 거라면 한국에서 하는 게 낫다. 설령 부작용이 나타나더라도 국외에서 만들어진 걸 국내로 받아드리는 것보다 낫다. 물론 이걸 쓴다고 꼭 한국에서 할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어디에서 시작하든 가능하면 플랫폼 이름을 순수 한국어로 정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일상어를 순수 한국어로 바꾸는 것은 부자연스럽지만 새로운 것을 순수 한국어로 이름 짓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본다.

 

새로운 상품화를 하는 방법을 몇 가지 알아보자. 첫째, 국내에 있는 것을 본질은 같되 형태는 다르게 하여 상품화하는 것. 둘째, 국내에 없고 국외에 있는 것을 본질은 같되 형태는 다르게 하여 상품화하는 것. 셋째, 아직 세상에는 없지만 인간이 필요로 하는 걸 상품화하는 것. 지역 영상 플랫폼은 첫째에 가까우므로 첫째를 설명하겠다. 첫째는 둘째와 셋째에 비해 상대적으로 쉬운 편임을 말해두겠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김치의 식감과 맛을 다른 형태로 구현해본다. 김치로 느끼는 감각만 뽑아다가 다른 형태로 구현하면 된다. 이러면 새로운 상품이어도 김치가 연상되어서 접근하기 좋을 것이다. 이게 김치맛 과자 같은 게 아님을 말해두겠다. 재료도 다르고 제조과정도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김치로 느끼는 만족감을 다른 형태로 제공하는 것일 뿐이다. 공감각을 활용한 연상법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이 김치를 선호하지 않기에 김치로 어떤 만족감을 느끼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그걸로 만족감을 느끼는 한국인이 많기에, 그 만족감을 다른 형태로 구현한 상품이 등장하면 한국인에게 선호될 것이다. 또는 김치의 제조과정만 따서 다른 형태로 구현해본다. 김치는 재료를 굵은 소금에 절여 씻은 다음 양념과 젓갈을 넣어 버무려 발효시켜 만든다. 여기서 김치 재료가 아닌 다른 재료를 사용하면 된다. 예컨대 빵이나 치즈를 넣어본다고 해보자. 나도 결과를 예상하기 어려운데, 이러면 과정은 같되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김치를 연상하지도 못할 것이다. 반대로 치즈의 제조에 김치 재료를 써도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맛은 보증할 수 없어도 말이다. 이렇게 감각을 남기고 나머지를 바꾸거나 과정을 남기고 나머지를 바꾸거나 하는 식으로 상품화를 하는 방법이 있다. 감각을 예로 들면 도박을 뽑기 게임으로 바꾼 것이 있다. 도박이나 뽑기 게임이나 낮은 확률로 높은 이익을 얻을 때 느끼는 쾌락은 같지만 형태가 달라져 새롭다는 느낌을 준다. 감각은 목적이 같아 연상이 쉬워 새롭다는 느낌이 상대적으로 적다. 과정을 예로 들면 고문기구를 운동기구로 바꾼 것이 있다. 러닝머신은 원래 죄수를 고문하는 고문기구였는데 대상과 목적을 일반인과 운동기구로 바꾸자 과정은 같아도 감각이나 결과가 달라지는 새로운 것이 되었다. 고문 받는다고 생각하며 러닝하는 것과 운동한다고 생각하며 러닝하는 것은 느끼는 감각과 결과가 다를 것이다. 과정은 목적이 달라 연상이 어려워 새롭다는 느낌이 상대적으로 많다. 대부분 이런 식으로 감각과 과정을 바꾸면 새로운 것이라 인식한다. 어떤 것은 과거의 것을 떠올리지도 못하고 떠올리는 것을 어려워하기까지 한다. 그걸 간단히 알아보겠다.

 

나는 사상가를 목표로 하고 있음으로 사상으로 접근해보겠다. 한국에서 여성주의가 빠르게 확산한 까닭은 무엇인가? 미국에서 PC주의가 빠르게 확산한 까닭은 무엇인가? 여성주의나 PC주의의 본질이 과거 종교와 흡사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주의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한국식 여성주의는 과거 유교의 여성열등주의를 닮았다. 유교는 여성을 남성의 아랫사람으로 가르쳤다. 남성이 여성을 아랫사람으로 다루기 위해 여성의 의지를 약화하고 성적 수치심을 강화했다. 의지 약화가 여성의 사회진출을 막고 성적 수치심 강화가 여성의 정조를 지켰다. 남성이 여성을 편하게 다루기 위해 여성을 의도적으로 열등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 식으로 교육받은 여성들이 여성은 열등하기에 배려해야 한다를 사회에 강요하고 있다. 일반 남성과 비슷한 체력을 가진 여성이 있음에도 여성은 열등하기에 징병에 적합하지 않다 주장한다. 남성보다 우수한 여성이 있음에도 여성은 열등하기에 장애인 수준의 여성할당제가 필요하다 주장한다. 남성보다 성적 자유나 주도권이 있는 여성이 있음에도 여성은 열등하기에 남성에게 일방적으로 성적 노리개가 되므로 남성 성 상품화는 괜찮으나 여성 성 상품화가 잘못되었다 주장한다. 여성은 열등하니 장애인과 같은 배려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주의의 일련의 주장은 전부 여성열등주의로 이어진다. 여성이 장애인과 같은 혜택을 받는다고 하여 여성우월주의로 착각하는 일이 있는데 실상은 정반대다. 여성주의에 관련된 현상은 여성열등주의로 해석하면 대체로 답이 나온다. 유교의 영향을 받은 보수적인 기성세대가 진보적이라 주장하는 여성주의를 쉽게 수용했던 것은 이와 같이 본질이 같았기 때문이다. 여성은 열등하니 천대해야 한다. 여성은 열등하니 배려해야 한다. 본질은 같다. 이는 사회주의도 동일하다. 보수적인 유교사상을 가진 기성세대가 진보적이라 주장하는 사회주의를 쉽게 수용했던 것은 두 사상의 본질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여기가 굉장히 중요하다. 사회가 수용하지 않았다면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수용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이 부분을 꼭 한번 고찰하길 바란다. 이럼에도 대부분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 유교의 여성 억압과 이슬람의 여성 억압과 여성주의의 여성 억압이 결과적으로 같음에도 그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유교가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을 보고 어딜 여자가 문란하게 그런 차림을 하느냐 화를 내는 것이나 이슬람이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을 체포한다거나 여성주의가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을 비난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여성을 성적 억압하는 것은 같음에도 이걸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고문기구를 운동기구로 목적을 바꾸자 좋은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처럼 여성 억압의 목적을 여성인권으로 바꾸자 좋은 것처럼 착각하게 되었다. 한국 여성주의자야말로 배려만 늘린 유교 근본주의자다. 여성은 열등하지 않다. 이제는 그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 PC주의는 과거 기독교의 평등주의를 닮았다. 기독교는 신 아래 모두가 평등하다고 가르쳤다. 모두가 신의 어린 양이다. 성에 대한 터부도 비슷하다. 그런 식으로 배우고 성장한 이들이 결과적 평등을 지향하는 PC주의에 세뇌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기독교가 평화 평등을 외치는 것이나 PC주의자가 평화 평등을 외치는 것이나 비슷하다는 걸 알아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PC주의를 비판하는 사람조차 기독교 사상을 비판하기는커녕 근간이라는 걸 떠올리지도 못한다는 점이다. 유교에 세뇌된 사람이 한국 여성주의에서 유교를 떠올리지 못하는 것처럼 기독교에 세뇌된 사람이 미국 PC주의에서 기독교를 떠올리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영혼의 존재를 배운 사람이 과학이 발달해도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지 못하는 것과 과거 종교를 배운 사람이 시대가 변해도 과거 종교의 도덕을 부정하지 못하는 것은 같다. 이미 유교와 기독교의 가르침이 자아의 일부로 자리잡은 사람은 문제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한다. 본질적으로 한국과 미국의 여성주의와 PC주의로 인한 사회갈등은 과거 종교와 현대 사상인 자유주의와의 마찰로 보면 된다. 여성주의나 PC주의가 사상적으로 조잡한 면이 있음에도 그토록 퍼져나갔던 것은 근간이 수천 년간 체계를 쌓아온 과거 종교에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근간에 과거 종교가 있기에 이들의 극단적인 행위를 도덕적이라 포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질은 같되 형태만 달라져도 새로운 것이라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상품화를 하면 본질은 같아도 많은 사람들은 그걸 새로운 상품으로 인식할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사람에게 필요한 상품을 만들어 판다. 사람을 위해 필요한 상품을 만들어 팔고 그에 대한 대가로 돈을 번다. 상품을 팔아 돈을 번다는 과정 같지만 목적이 다르다. 결과적으로 돈을 번다는 것은 같으므로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물어볼 수 있다. 대답하겠다. 전자와 달리 후자에는 도덕성이 있다. 유교와 기독교와 불교 같은 과거 종교와 그 종교에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사회주의와 PC주의와 여성주의 같은 사상이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이 사상들에게 도덕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도덕성을 자본주의도 갖춰야 한다. 현대 사상이 도덕성을 갖추지 못하니까 과거 종교의 도덕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연하가 연상에게 복종하는 걸 올바른 도리로 만들어 연하를 지배하려는 꼰대를 양산한 유교에 언제까지 의존해야 하는가? 인류가 죄를 지니고 태어난다거나 모든 인류가 구세주의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류열등주의에 언제까지 의존해야 하는가? 육식이나 욕망 같이 인간의 선천적인 성질을 잘못된 것이라 말하며 인간을 현혹시키는 것으로 배를 불리는 이들에게 언제까지 의존해야 하는가? 이제 현대 사상으로 넘어가야 한다. 현대 사상도 이제 도덕성을 갖춰야 한다. 현대 사상이 인류의 자아형성을 도와야 한다. 현대 사상의 미덕과 악덕을 몇 가지 알아보자. 자유주의의 미덕은 의지와 지성이고 악덕은 강요와 강제 세뇌다. 역할주의의 미덕은 전문가가 역할을 수행하는 것과 역할 수행자에 대한 존중이고 악덕은 전문가의 역할 수행을 근거 없이 방해하는 것과 역할 수행자에 대한 천대다. 자본주의의 미덕은 소비자에게 필요한 걸 제공하여 행복하게 하는 것과 행복하게 하는 이에게 정당한 부를 분배하는 것이고 악덕은 소비자에게 필요한 걸 제공하지 않아 행복하지 않게 하는 것과 행복하게 하지 않는 이에게 부당한 부를 분배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독과점과 담합이나 부동산으로 부를 불려나가는 것은 자본주의의 악덕이 된다.

 

지금 한국이나 미국 같은 곳에서 사상으로 인해 심각한 사회갈등이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 그게 그 나라의 사회 수준이 높다는 걸 증명한다. 과거 종교와 현대 사상이 마찰은 현대 사상으로 넘어가기 위해 필요한 진통이기 때문이다. 마찰이 없는 곳은 아마 아직 과거 종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 종교, 과거 종교와 현대 사상의 마찰, 현대 사상으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한국과 미국은 중간 단계에 있다. 아마 대부분의 선진국이 이 단계에 있을 것이다. 이 단계를 넘으면 사상 초격차를 만들 수 있을 거라 본다.

 

 

 

지역 영상 플랫폼을 정리해보자. 이것을 발상하게 된 계기는 구글의 인앱결제 뉴스다. 그걸 보고 경쟁상대의 필요성을 느껴 발상하였다. 그런데 그게 지역에 뿌리내린 역사 깊은 방송국의 단방향에서 양방향으로 나아가는 진보가 되었다 본다. 지금 방송매체는 영상 플랫폼에 흡수되고 있다. 뉴스를 텔레비전으로 보기보다 유튜브로 보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 방송매체가 영상 플랫폼 내에 있는 수많은 영상 중 하나로 전락했다. 이대로 가면 지역을 거점으로 둔 기성방송매체는 아마 존재가치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기성방송매체가 독자적인 길을 걷기 위해서는 방송매체에 맞는 영상 플랫폼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게 바로 지역 영상 플랫폼이다. 이것은 지역을 거점으로 둔 만큼 방송국보다 적합한 곳은 없다. 저번에 정보의 확산과 포화로 이제 언론의 역할은 정보공급보다는 정보의 괴리를 줄이는 모든 걸 잇는 것이라 말한 적이 있다. 지역 영상 플랫폼이 그 역할을 수행하는데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우선 지역 영상 플랫폼의 형태를 알아보자. 첫째, 지도. 둘째, 주소. 셋째, 메타버스. 첫째, 지도. 유튜브는 일반적인 영상 플랫폼이고 틱톡은 짧은 영상 플랫폼이고 지역 영상 플랫폼은 지도 영상 플랫폼이다. 지역을 기반으로 한 만큼 기본적으로 지도의 형태를 띤 플랫폼이 된다. 지도의 형태이므로 지도에 있는 부동산에 영상을 업로드한다. 일반인이 업로드 할 때 개인정보노출이 싫다면 거주지가 아닌 동, , 시 단위의 지역에 영상을 업로드 하면 된다. 홍보를 바라는 기업이나 공공기관은 해당 부동산 바로 업로드 하면 된다. 음식점이라면 그 음식점에서 촬영한 요리 영상이 올라올 수 있고, 소방서라면 그 소방서에서 촬영한 화재진압 영상이 올라올 수 있다. 여기서 방송국의 힘이 나온다. 지금까지 방송국이 지역에서 촬영한 영상을 지도에 뿌리면 수도 없이 많은 영상을 업로드 할 수 있다. 둘째, 주소. 주소는 일반적인 영상 플랫폼과 비슷하되, 영상 범위를 주소로 하는 걸 의미한다. 해당 지역 영상을 보고 싶을 때 주소를 선택하여 보면 된다. 조회수나 추천수로 정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지역으로 나눈 지역 영상 플랫폼은 관광하기 전 관광지 답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셋째, 메타버스. 가상의 세계라고 하는데, 현실을 구현한 가상의 세계에서 돌아다니며 현실의 영상을 보는 것도 상당히 이상해서 재미있을 것이다. 메타버스는 아무래도 접근성이 낮아 아직은 꼭 구현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다음은 지역 영상 플랫폼의 특징을 알아보자. 지역은 지역인만큼 오프라인의 성질이 강하다. 유튜브나 틱톡은 오프라인으로 묶을 대상이 없어 온라인의 성질이 강해 분야나 취미나 유행 같은 범주에서 조회수가 높은 것을 제외한 나머지 영상은 필요한 이들에게 공급되기가 어렵다. 조회수가 낮은 영상은 알고리즘의 의존도가 매우 높은 편이다. 살아남는 영상이 적다. 반면 지역 영상 플랫폼은 지역에 영상이 묶여있어 그 지역의 영상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는 조회수와 관계 없이 영상이 공급되게 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산에 대한 영상을 접하고 싶다면 유튜브에서는 단순히 산을 검색해서 영상을 보게 된다. 반면 지역 영상 플랫폼에서는 지도에서 특정 산을 선택해야 그 산에 대한 영상이 나오므로 조회수와 관계 없이 영상을 접하게 된다. 물론 유튜브에서 검색을 통해 특정 산의 영상을 골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지역 영상 플랫폼은 처음부터 그 범주가 결정되어있다는 점이 다르다. 유명하지 않는 산에서 올라온 영상은 유튜브에서는 철저하게 외면 받지만, 지역 영상 플랫폼에서는 그 지역 주민이나 관광객이 찾아보게 된다. 지역은 오프라인, 유튜브와 틱톡은 온라인이라는 큰 차이가 있음을 말해두겠다. 다음 특징으로는 놀이성과 상업성의 차이다. 유튜브나 틱톡은 놀이성이 강하다. 반면 지역 영상 플랫폼은 상업성이 강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음은 지역 영상 플랫폼의 목적을 알아보자. 첫째, 상업 광고. 둘째, 지역 홍보. 셋째, 지역 정보 공유. 첫째, 상업 광고. 보통 상업 광고는 환영 받지 못하기 마련이다. 유튜브에서 나오는 지속적인 상업 광고를 불쾌하게 여기는 이용자들이 많다. 그걸 이용해 광고가 없는 프리미엄 서비스를 운영 중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사람들이 상업 광고를 필요로 할 때가 있다. 그건 상품을 구매하려고 할 때다. 상품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상품 판매 측에서 하는 상업 광고를 보고 싶어 한다. 소비자는 상품의 구체적인 스펙이나 활용법 따위의 정보를 얻고 싶어 한다. 그와 같다. 특정 지역의 서비스를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에 관련된 정보를 얻고 싶어 한다. A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이 지역 영상 플랫폼을 실행시킨 뒤 해당 지역에서 제공하는 서비스 영상을 두루두루 살핀 후에 원하는 서비스를 이용한다. 예컨대 헬스장이나 노래방이나 도장이나 학원 같은 서비스를 이용한다. 집 주변에 있는 서비스에 관심이 없던 사람도 그럴듯한 홍보 영상을 자연스럽게 접하는 것으로 이용충동을 느끼게 된다. 지역 영상 플랫폼이 오프라인의 성질이 강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둘째, 지역 홍보. 관광지를 방문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홍보 영상의 플랫폼을 제공한다. 관광지를 방문하고 싶어도 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세세한 키워드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처음부터 지역에 영상이 묶이게 되면 그 지역만 선택해도 관련 영상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특정 지역에서는 홍보를 위해 실시간 영상을 제공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유튜브와 다르게 영상이 지역의 부동산에 묶이기 때문에 아무런 영상이 없는 부동산은 첫 번째 영상을 올리고 싶어하는 이들에 의해 영상이 업로드 될 확률이 높다. 셋째, 지역 정보 공유. A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도 A지역의 모든 걸 알기가 어렵다. 지역에 대한 정보는 개인정보노출의 우려로 유튜브에 업로드 되기가 어렵다. 상업적인 측면의 영상은 조회수가 낮아 접근도가 낮다. 하지만 지역 영상 플랫폼이 있으면 해당 지역에 있는 영상을 접하기가 쉽다. 일반인이나 자영업자가 올린 영상뿐만이 아니라 해당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뉴스 또는 공공기관의 영상이나 역사 자료 따위도 취급하기 수월할 것이다. 이런 것은 오랫동안 지역에 뿌리 내린 방송국이 전문이다. 지금까지 촬영한 영상을 체계적으로 지역에 분배해도 충분히 많은 영상정보를 공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지역의 정보가 공유되면 그 지역이 자체적으로 활성화 될 확률이 있음을 말해두고 싶다. 같은 지역에서 축제가 있어도 뉴스가 아니면 알기 어려울 때도 있다. 지역 영상 플랫폼이 있다면 그 지역에 관련된 총체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축제가 아니더라도 그 지역의 사람이 특정 지역의 위험을 영상 업로드를 통해 공유할 수도 있고, 특정 지역의 이슈를 영상 업로드를 통해 공유할 수 있다. 사고 다발지역을 영상으로 공유할 수도 있고 길거리 연주회도 영상으로 공유할 수 있다. 특정 지역에 영상을 업로드하면 특전이 제공되는 방식도 가능할 것이다. 지도를 기반으로 한 영상 플랫폼은 이런 강점을 지니고 있다. 물론 분별 없는 업로드가 미관에 좋지 못할 수도 있으므로 그에 대한 대처도 필요할 것이다. 업로드 제한 지역이 있다거나 선택에 따라 필요한 영상을 위주로 볼 수 있도록 한다거나 말이다. 폐쇄적인 지역주의를 용납할 수 없고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이 도덕적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거리를 좁힐 수 있게 도와준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프라인의 모든 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오프라인에도 오프라인의 강점이 있다.

 

다음은 지역 영상 플랫폼의 수익을 알아보자. 방안에 대해 말하기 전에 우선 말해두고 싶은 게 있다. 이용자가 늘기 전까지는 수익을 얻는 걸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산이 세계화가 되지 못한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성급한 수익회수였다. 어느 정도 자리잡고 나서 수익을 회수할 생각을 해야 하는데 시장 장악도 못해놓고 빠르게 회수하려다 시장에 외면 받고 뒤쳐진 게 하나 둘이 아니다. 당장의 수익성보다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영상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았으면 좋겠다. 기존에 유튜브가 분야, 취미 + 유행 + 지역을 통틀어서 영상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면 거기서 유행을 틱톡이 가져가고 지역을 지역 영상 플랫폼이 가져간다는 느낌으로 가야 한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틱톡보다는 유튜브 숏이 크길 바라고 있지만 틱톡에 많은 이용자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첫째, 연계. 둘째, 개인방송 수수료. 셋째, 관광지 홍보. 첫째, 연계. 지역 영상 플랫폼에 올라온 영상과 연계되는 상품이 팔릴 경우 일정금액을 수수료로 받는다. 아마 이게 기본적인 수익구조일 것이다. 지역을 기반으로 한 만큼 오프라인 사업과 연계가 수월할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음식배달이 있다. 각 음식점에서 요리영상을 올리면 배달이용고객이 그 영상을 참고하여 배달주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음식배달을 주문할 때 어떤 음식인지 구체적인 정보를 알고 싶을 때가 있다. 리뷰나 사진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해당 음식점의 요리영상에 대한 수요는 높을 거라 본다. 특정 페이와 연계하여 수익을 올릴 수도 있을 것이고, 특정 포털과 연계하여 수익을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오프라인과 관련된 것은 대부분 연계가 가능할 거라 본다. 둘째, 개인방송 수수료. 지역 영상 플랫폼인만큼 개인방송은 유튜브에 비해 약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명을 알리고 싶은 예능인 지망자는 오프라인에 강점이 있는 만큼 의외로 수요가 높을지도 모르겠다. 익명의 개인방송은 유튜브가 강할 것이고 실명의 개인방송은 어쩌면 지역 영상 플랫폼이 강할지도 모르겠다. 유튜브 후원 같이 후원금의 수수료를 받는 것으로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관광지 홍보. 온라인의 성질이 강한 유튜브나 틱톡과 달리 오프라인 성질이 강한 지역 영상 플랫폼은 지역별로 관광지를 홍보하기가 쉬운 편이다. 유튜브에서는 외면 받는 영상이 지역 영상 플랫폼에서는 관광목적으로 선호 되는 영상이 될 수도 있다. 사람의 발길이 적은 곳은 지자체의 지원을 통해 영상을 제작하여 홍보하는 것으로 수익을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지역 영상 플랫폼이라는 플랫폼을 제대로 개발하여 이용자 수를 늘리면 수익은 사실 큰 걱정이 없을 거라 생각한다.

 

이처럼 지역에 기반을 둔 방송국은 유튜브에 흡수될 것이 아니라 지역의 강점을 살려 새로운 영상 플랫폼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이는 어느 특정 방송국이 혼자서 할 것이 아니라 유튜브에 맞서 대부분의 기성방송매체가 연계하여 제작해야 한다고 본다. 유튜브가 분야의 특기나 취미의 영역, 틱톡과 숏이 유행의 영역, 지역 영상 플랫폼은 지역의 영역으로 유튜브의 독주를 견제해야 할 것이다. 지도 기술, 영상 공유 기술, 스트리밍 기술 등이 이미 있으므로 만드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라 본다. 지역 영상 플랫폼이라는 형식을 만들고 그 형식이 세계에 통하면 세계적인 영상 플랫폼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냉정히 말해 이것은 감시사회의 가속화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건 앞서 말한 것처럼 흐름에 따라 누군가는 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차피 하게 될 거라면 한국이 시작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고 나서 부작용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는 편이 좋을 거라 본다. 지역이 활성화되면 수도를 비롯한 모든 부동산의 가격이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수도 집중화가 풀릴 수도 있다고 본다. 수도 집중화의 원인은 서비스 이용과 거주자의 수준 때문이다. 교육열이 높은 학생이 모인 학교로 진학시키기 위해 이사 가는 이들이 많은 상황이다. 따라서 수도 집중화를 풀기 위해서는 모든 서비스의 질적 향상과 한국인 전원의 지성과 품위를 올려야 한다. 지역의 활성화가 그걸 도울 수도 있을 거라 본다.

 

나는 이런 종류의 글의 전문은 아니다. 나의 전문은 사고방식, 행동원리, 자아형성, 가치관, 도덕 같은 사상이다. 결과물 자체가 아니라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 사상이 전문이다. 길을 안내하는 사상이 전문이다. 이 글도 단순히 구글 관련 뉴스를 보고 쓴 충동적인 변덕의 결과물이다. 그러니 결과가 중요하지만 결과를 낳게 하는 그 발상 과정도 주목했으면 좋겠다. 구글 독과점이라는 사회현상을 보고 경쟁상대 필요라는 문제를 하나 만든다. 경쟁상대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자주 이용하던 유튜브의 독과점을 해소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영상 플랫폼의 특징과 결핍을 찾아 지역 영상 플랫폼이란 답을 내놓는다. 그걸 통해 경쟁상대 늘리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여 사회를 바꾼다. 없는 문제를 만들고 없는 답을 찾아 문제를 해결한다. 보통 이런 것이 문제해결능력이다. 문제해결능력에 대해서는 이후 좀 더 다뤄보겠다.

 

 

---

 

이 나라는 출산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죠. 출산율을 떨어트리는 사상이 도덕으로 자리잡고 있으니까.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 자신이 불편하게 여기는 것. 대부분 사상이 간섭한 감각을 느끼고 있는 겁니다. 연령차별을 언급하면 이에 대한 반론 자체를 할 수가 없어요. 연하가 연상에게 반말하는 걸 보고 불편해하는 게 인간의 선천적인 성질입니까? 아니잖아요. 만들어진 겁니다. 야한 여자를 보고 불편해하는 거나, 창작물 보고 불편해하는 거나, 그런 거 전부 만들어진 감각입니다. 유교 근본주의자인 여성주의자들이 여성의 의지를 약화하고 성적 수치심을 강화하는 교육을 하고 그걸 다른 유교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 수용하는 바람에 지금 어떤 여성은 지나치게 약해졌어요. 끔찍하군요.

 

다음 글은 한국 페미니즘 현상 해석 또는 문제해결능력입니다. 멍청한 사상은 좀 빨리 치워야 할 것 같아요. 그러지 않으면 이 나라는 멸종할 겁니다. 단순한 농담이 아니에요. 마땅한 자원 없이 인간의 능력으로 성장한 나라에서 출산율 저하와 상품화 능력 저하는 그야말로 몰락의 신호탄이죠. 이대로 두면 끝내 한국인은 멸종할 겁니다. 민족주의가 야기한 지역주의는 사실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토록 사회갈등을 일으켰는데 아니라고 하는 까닭은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좀 갈등 일어난다고 해서 멸종할 정도의 타격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올바르다 여기던 것이 문제의 원인이면 상황이 해결되기는커녕 계속 악화되어 끝내는 멸종까지 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습니다. 본래 문제가 발생하면 도덕이 올바른 길로 안내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잘못된 길을 안내하면 점점 악화되게 됩니다. 출산율과 같이 말이죠. 수백 조를 쏟아 부었는데 점점 떨어진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멍청한 도덕이 있으면 돈을 쏟아 부어도 더 악화됩니다. 솔직히 좀 많이 큰일 났어요. 원인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악화일로만 걷고 있으니 뭐 답이 없죠. 언제쯤 깨닫게 될까요? 멸종 직전에? 여성이 장애인 혜택을 받는 걸 보고 이익을 보고 있는 거라며 어떤 남성은 그걸 가리켜 여성우월주의라 말하죠. 그렇게 우월한 거라 말하니 여성 측에서는 그런 장애인 혜택이 여성을 우월하게 하는 거라고 느껴버립니다. 그리고 더욱더 여성을 열등하게 만들어 혜택을 받는 것에 주력하겠지요. 이걸 더 이상 방치하면 안됩니다. 여성이 장애인 혜택을 받는 것은 여성이 열등하단 시각 때문임을 알려야 합니다. 이제 여성은 열등하지 않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본질을 봐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겁니다. 어디는 우주개척을 하고 어디는 하늘에 광고판을 띄울 생각을 하는데 여기는 생존을 걱정해야 할 판이니. 유교로 몰락했던 국가의 후예가 유교로 다시 망가지고 있는 걸 보면 참 서글프네요. 멸종 직전까지 과거 종교의 도덕을 운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네요.

 

국회의원 수를 늘려야 합니다. 정치가에 대한 불신으로 국회의원 감축을 주장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길입니다. 국회의원은 본래 성격이 국민의 참여입니다. 지역을 대표하여 의견을 내는 것이 국회의원이었지요. 그런데 지역 대표는 부동산에 영향을 많이 받아 부동산을 소유하지 않는 국민은 지역 대표의 공약보다는 정당의 선동으로 선거를 하죠. 그러다 보니 선동정치가 되어 정치수준이 저하됩니다. 가능한 빨리 지역 대표뿐만이 아니라 분야 대표가 입법권을 쥐어야 선동정치에서 해방될 수 있을 거라 봅니다.

 

사회주의는 퇴보사상입니다. 과거 강요사회를 다른 형태로 답습하는 것일 뿐입니다. 보수주의는 정체사상입니다. 기득권이 아무것도 변하지 말자고 하자 사회주의가 진보라고 떠들었던 것이지요. 이제는 자본주의의 진보가 필요합니다. 그 외 자유주의 등의 현대 사상이 도덕성을 갖추는 진보가 필요합니다. 역할주의의 방향성이 어느 정도 잡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좀 더 노력해야겠네요.

 

신고

 
1 2 현재페이지3 4 5 다음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