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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권선징악, 네 선은 당연한가 (0) 2017/10/03 PM 05:01

권선징악, 네 선은 당연한가

 


0. 권선징악


여러분들은 최초의 불신을 기억하는가? 나는 까먹었다. 하지만 언제, 그리고 어떻게 해서 가지게 되었는지는 알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배운 것과 세상의 불일치를 경험할 때다.


분명 거짓말 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이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빤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목격했을 때. 분명 욕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욕하는 것을 목격했을 때. 분명 싸우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귀보다는 마음이 아플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싸우는 것을 목격했을 때. 그 모습이 망막에 새겨져 뇌로 전달돼 이미 있던 정보와 충돌한다.


충돌로 박살이 난 믿음은 잿빛 불신으로 변해 마음 속에 가라앉아 차곡차곡 쌓여간다. 특히 직접 그 불일치를 당했을 때엔 세상이 바뀌고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의 충격을 받는다. 흉할 정도로 입을 벌리며 감정을 잃은 눈으로 쳐다본다. 왜...?


일반적으로는 부모의 실수로 그 씁쓸한 경험을 하게 된다. 부모도 사람인 이상 실수를 하기 마련인데 아이가 그것을 이해하기엔 정보가 부족하다. 경험을 통해 정보가 쌓여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데, 보통은 그전에 불신을 가지기 마련이다.


부모가 아이 앞에서 올바르게 행동하려 애쓴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상처를 받는다. 세상은 부모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장하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되고,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이 배운 것과 세상의 불일치를 경험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아이들은 조금씩 어른들을 닮아간다. (단순히 옳고 그름만이 아닌, 말의 번복이나 불신을 가질만한 다양한 요소들 등)


시간이 흘러 차곡차곡 쌓여진 불신은 사라지지 않은 채, 권선징악을 비웃게 만드는 잣대가 된다. 특히 인터넷이 발달된 요즈음엔 보다 더 빠르게 세상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되고, 세상의 더러운 면모를 보게 된다. 알고 있지 않나. 착한 행동이 복이 되어 돌아오리라는 보장도 없고, 나쁜 행동이 해가 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오히려 나쁜 놈이 더 잘사는 경우가 많은 이 세상. 권선징악을 비웃게 되는 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더러움을 접하고 성장한 아이들은 그것으로 세상을 다 안 것 마냥 교만에 빠진다. 사춘기의 시작이자 반항기의 시작이다. 사람마다 그 시기는 다르고 어쩌면 없을 수도 있지만, 대체로는 위의 흐름에 따라 시작되기 마련이다. 만약 아이가 반항하지 않는다면 유심히 지켜보길 바란다. 주변에 올바른 사람만 있거나, 지나치게 성숙했을 수도 있지만, 반항할 힘도 없을 정도로 망가졌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문에 빠진다. 왜 어른들은 자신이 지키지도 못하는 말을 가르치는 걸까? 왜 어른들은 세상과 다른 권선징악을 가르치는 걸까? 그리고 이 의문이 해소될 때쯤 반항기도 점차적으로 끝나게 된다.


다양한 일을 겪게 되면서 사람은 완벽하지 않기에 언제나 올바르기 어렵다는 것을 직접 깨닫는 순간 어른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다.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져 세상에는 더러운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면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교만했던 과거를 부끄러워하게 된다.


그렇게 넓어진 시야는 권선징악의 필요성을 깨닫게 만든다. 사람이 선한 것이 아니라 선해지길 바라는 것임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어른들의 행동을 이해하게 된다. 아, 올바른 말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지키고 싶었던 것이구나. 아, 세상이 깨끗한 것이 아니라 깨끗하길 바라는 것이었구나.


행동의 기준이 있어야 사람은 그것을 보고 선악을 나누고 행동하는 방향을 정하는 법. 설령 못 지킬 말이라도 지향하는 바를 위해 하게 되고, 설령 세상이 더럽더라도 지향하는 바를 위해 선을 권하게 된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 아이를 가르칠 때가 되면 똑같이 올바른 행동을 가르치고, 똑같이 권선징악을 가르친다.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야, 부디 네가 사는 세상은 권선징악이 이루어지길…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아이가 겪을 불신으로 인한 슬픔이 안타까워 몇몇은 모든 것을 알려주려 하지만 미성숙한 아이가 받아드리기엔 정보량이 너무나도 많다. 그렇다고 나쁜 것을 가르치고, 세상이 더럽다고 이야기하면 삐뚤어진 아이로 성장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결국 올바른 것을 가르치고, 권선징악을 가르친다.(부모가 아니더라도 주변 사람, 교육, 매체 등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 불신의 순환, 아이의 반항기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 순환은 시작되었을까? 하하.. 이 오랜 순환 속에서 권선징악은 당연함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선은 당연히 옳고 악은 당연하게 그르다. 선은 당연히 해야 하고 악은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한다. 선은 모두가 당연히 가까이 해야 하고 악은 모두가 당연히 멀리 해야 한다.


이 당연함, 자신은 아니라며 부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새겨진 가르침은 무의식 속에 자리 잡아 사람의 사고를 결정한다. 의식적으로 부정하는 사람조차도 무의식적으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당연함이 이 세상의 선을 패배하게 만들었다.




1. 당연함


누구나 살면서 불쾌한 기억 하나 둘쯤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선의의 강요다. 


“내가 널 위해서 하는 건데 왜 받아드리지 못하느냐”


듣는 사람 입장에선 황당하다. 남을 위한다고 하지만 상대가 원하지 않는대도 강요하는 거라면 결국 자기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것 아니겠는가? 재미있게도 말하는 사람 입장에선 진짜 남을 위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선, 올바름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는 이야기다.


예로부터 많은 갈등을 초래해왔던 사유 중 하나가 바로 잔소리다. 명절날 가기 싫은 이유 중 하나로 꼽히는 이것은 트집을 잡는 등의 더러운 이유로 일어나는 일도 있지만 정말로 남을 위해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잔소리가 세상에서 말하는 선의라고 불리는 일도 많다. 


하지만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본다거나 하는 등의 노력이 부족했다. 내가 하는 말이 당연하게 옳으니 설득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혹시 몰라 말하건대, 잔소리의 경우 대체로 위가 아래에게 하는 경우가 많으나, 동격이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으므로 꼭 상하관계 때문에 일어난다고 하기는 어렵다.


부모의 잔소리, 친구의 조언, 충신의 충언 등 남을 위하는 말은 위아래 가리지 않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올바른 말을 당연하게 여겨 설득하는데 노력을 게을리 했다면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변화를 일으키는 일은 많지 않다. 듣는 사람에게도 자신만의 선이 있기 때문이다.


선교활동도 마찬가지다. 종교를 단순히 돈벌이 수단으로 보는 자도 있겠지만 선교하는 사람 중엔 정말로 상대를 위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종교가 절대적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왜 이런 좋은 것을 받아드리지 못하는 건지 이해를 못한다. (이해하는 사람은 종교를 강요하지 않는다.) 듣는 사람도 자신만의 선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해를 못한다. 서로가 이해를 못하니 빈번하게 충돌이 빚어지곤 한다.


진정 누군가를 위한다면, 그 사람의 눈을 보고 마음을 보고 입장에 서서 자신이 바라는 것과 상대가 바라는 것을 생각해 설득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하고 보답을 바라지 않는 선의를 주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뭐 이러나 저러나 결국 상대가 친절을 기쁘게 받아드린다면 좋다. 



선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의 부작용은 이뿐만이 아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선이 존재하지만 대체로 애국이 선이고 매국이 악일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세상에 많은 불만과 갈등을 낳았다.


“나라를 위해서인데 네가 희생해야지”


대표적으로 군대가 있다.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올바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설득의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나라를 지키겠다며 나설 정도로 노력을 해야지 그저 ‘나라를 지키는 게 올바르니까 강요해도 되겠지’ 라는 마인드라면 군역을 기쁘게 받아드리는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그 당연함은 나라의 인재를 놓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해외에서 공부한 유능한 인재를 초빙하는데 우리나라사람이라는 이유로 저임금으로 착취하려고 드니 누가 우리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겠는가!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인재들을 놓쳤는지 생각해보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외에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선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생기는 불만과 갈등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남녀갈등 노사갈등 고부갈등 부부갈등 등 대부분의 사람과의 관계)




2. 정보수집


선의의 강요는 사회적 갈등을 초래하지만 그것만으로 선이 패배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물론 다른 이유가 있다. 모름지기 승리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은 필수조건이다. 정확한 정보수집이 승리의 지름길. 하지만 악이라는 이유로, 당연히 나쁘다는 이유로 사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일도 생기곤 한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6.25의 문제로 좋게 볼 수가 없는 중국의 마오쩌둥이 남긴 유명한 말 중 하나가 바로 ‘참새는 해로운 새’다 그 말 이후 제사해 운동으로 중국 대륙 전역에 있는 참새가 2억 1천마리 가량 학살당해 생태계가 파괴되어 공식발표 1000만명에서 최대 4000만명 가량의 아사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의도가 어떻게 되었든 독재자의 말 한마디로 이루어진 이 정책은 참새를 학살하여 생태계를 파괴해 수많은 인명 앗아간 최악의 실패로 악임이 분명하다. 실제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가 예민한 중국에서조차 실패한 정책이라고 평하며 과로 인정하고 있다.


이 사건에서 선악을 벗겨내 보자. 의도가 어떻게 되든 실패한 정책으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악이지만, 동시에 말 한마디, 한 사람의 의지로 대륙에서 종 하나가 자취를 감춘 무시무시한 사건이다.


다음에는 역할을 벗겨내 보자. 실패한 정책으로 인해 일시 사퇴까지 되었지만, 마오쩌뚱 개인에게는 말 한마디로 대륙에서 종 하나를 없앤 강대한 힘의 상징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라, 어떤 과학적 근거도, 연구도 없이 그저 독재자의 말 한마디에 2억 1천마리 가량의 참새가 학살당하고 1000만명에서 4000만명 가량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그런 죄를 짓고도 일시 사퇴로 끝이 났다! 소름 끼치도록 강대한 힘. 그야말로 절대자의 권력이다. 


그의 정책은 중국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지만 그 자신은 죽을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만약 마오쩌둥이 자신의 권력 유지가 최우선이라고 했다면 결과적으로 그가 바라는 흐름으로 된 것이다. (이후 행보를 보면 무엇이 최우선이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선과 악, 정책의 성공여부에만 관심을 가지다 보면 그 사건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파장을 놓치게 된다. 또한 그것으로 인해 본래 목적을 달성하였는지를 놓치게 된다.


이렇게 사건의 본질과 무관한 부분을 하나씩 벗겨내 보면 당연했기 때문에 놓치는 부분이 선명해진다. 정말 무시무시한 힘. 그런 자를 상대로 선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저 나쁘다며 비판만 할 게 아니다. 무언가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그런 강대한 힘을 만들어내는 요인을 조사해 하나하나씩 공략방법을 강구해야 비로소 상대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 기반은 물질적인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의 말, 사상, 등의 허점 등) 


이세상엔 무능한 정책, 무능한 지도자는 있을 수 있어도 무능한 인간은 있기 어렵다. 능력이 없다면 지도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혈통, 꼭두각시 허수아비 제외) 


그렇다면 어째서 무능한 정책이나 무능한 지도자가 되는 걸까? 그건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목적과 다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지도자는 나라를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나쁜 지도자는 그렇지 않다. 겉으로는 나라를 위한다고 해도 자신의 이익과 나라의 이익을 저울질해 자신의 이익이 된다면 나라를 망치는 정책이라도 주저 없이 실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를 망치는 무능한 정책과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만든 유능한 인간은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를 뽑을 때엔 개인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그의 생을 관찰해 무엇이 진정한 목적인지 알아내는 것이 선결과제가 될 것이다. 아무리 유능한 자라도 목적에 따라 나라를 망칠 수 있는 법이니까.




3. 선의 패배


“설마 그렇게 나쁜 놈인데 뽑아주겠어?”


선이 패배한 보다 더 직접적인 요인은 바로 방심이다. 선은 당연히 승리할거라 생각해 노력을 게을리하며 방심했다. 당연하게 패배할 악에 대한 관심도, 조사도, 부족했다. 한마디로 깔보았다. 하지만 악은 그대로 있으면 패배하는 것이 당연했다. 사람의 심리상 기본적으로는 선을 지향한다. 그렇기에 그대로 있으면 악이 패배하는 것은 당연했다.


스스로(또는 세상이) 악이라고 평가하는 자들은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필사적으로 행동했다. 악인들끼리 모여 힘을 키우고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악의 꼬리표를 때내려고 애를 썼다. 꼬리표를 때어내지 못하는 이상 언젠간 사회적 격리조치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안되면 또 다른 악을 지칭하여 표적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올바르기 때문에 승리를 확신한 선과 가만히 있으면 패배가 확실하기에 필사적으로 움직인 악. 선악을 벗겨내면 노력의 차이가 확연하다. 당연한 선악이 선의 패배를 불렀던 것은 이러한 방심으로 낳은 결과가 커다랬다.



이것에 대한 좋은 예시가 최근 미 대통령 선거다.


딱 부러지게 누가 선이다 하기 어려울 정도로 조금 후보가 애매하긴 했지만 그 당시 여론이나 언론은 상대적으로 힐러리가 선이라고 평했다. 트럼프가 되느니 힐러리가 되는 게 낫다는 것이다.


그걸 힐러리도 알았고 트럼프도 알았다. 분명 힐러리도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족했다. 그녀의 행보를 살펴보면 승리를 장담했다는 것이 눈에 띈다. 연예인마냥 행동하고 좋은 곳만 돌아다니며 두루뭉실한 공약을 내세웠다.


반면 트럼프는 자기 지지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공약을 통해 확고한 지지기반을 마련했고 그 외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당시 전세계적 테러로 인해 민심이 흉흉했고 다양성 때문에 크리스마스도 제대로 즐기지 못했던 것에 대한 불만이 쌓여있던 시기였다. 그걸 그는 이용했다.


트럼프가 다른 지지자를 패라는 등의 황당한 발언까지 했던 것을 기억하는데 솔직히 꽤 오래 전 일이라 구체적인 내용은 까먹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상대적으로 선이라 불렸던 힐러리의 승리를 여론, 언론은 확신했다. 그러나 구글은 당연한 선의 승리를 확신하기보단 구체적인 통계를 통해 트럼프의 승리를 예측했다. 


그리고 그 결과 상대적 선은 패배했다.



승패는 선과 악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누가 더 강한가(무력,지력,자금력,영향력 등등) 로 겨루는 것이다. 선과 악은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다. 선이 승리하고 싶다면, 선을 행하고 싶다면! 다양한 방법으로 힘을 키우고 사람들을 설득해 사람 수를 불리는 등 악 보다 더 필사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미 대선 이후 인터넷에서 트럼프를 바라보는 여론의 흐름은 위험했다. 그가 나쁘다는 말을 듣는다고 해서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정보수집에 차질을 빚거나, 깔봐 방심할 확률이 높았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머지않아 분명 한국과 미국간 만남이 있을 예정인데 이대로라면 어쩌면 그 흐름에 영향을 받아 좋지 못한 결과를 낳을까 걱정이 되었다. 물론 뭐 실제로 협상할 사람들이 방심할 리는 없겠지만, 위처럼 이미 비슷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걱정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 뭐 그건 이미 지났으니 앞으로도 방심하지 말고 승리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길 바라겠다.  




4. 선의 승리


우리나라 정치도 지금까지 선과 악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 사람 나쁜 사람이에요” 라고 말하면 당연히 응원해 줄거라 생각했다. 또한 스스로 선이라 승리를 당연하게 여겨 다소 노력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저 나쁘다고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힘을 키우고 숫자를 불렸어야 했다. 선과 악은 어디까지나 목적이지 수단이 될 수 없다. 물론 수단도 가능하긴 하지만 그걸로 설득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같은 선을(또는 비슷한)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만 가능하다.


설령 세계평화 같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선을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세계평화는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다. 세계평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물질만이 아니다.)을 말하며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런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수를 늘리고 힘을 키워 평화를 이끌어내야지, 선이기 때문에 당연히 참여하길 바라는 것은 실패를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세계평화는 특정 행동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자체를 설득할 때엔 목적으로 가정하여 설득해야 한다. ) 


물론 선이 악보다 강하는 것은 조금 어렵다. 선마다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선은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고 악은 사적인 이익을 추구한다. 그 상태에서 선과 악을 벗겨내 살펴보자. 사익을 추구한 쪽이 개인의 부는 더 많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악의 입장에서 금전을 뿌리는데 거리낌이 없다. 그들은 금전을 통해 손쉽게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선은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 개인의 부가 많을 수가 없다. 물론 많다고 해도 선의 입장에서 금전을 뿌릴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므로 강해지기 위해서는 대중을 말로 하나하나 설득해야 했다. 그게 쉬운 일이면 진작에 승리했겠지만, 자신들의 선을 당연시 여겼던 과거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국정농단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통해 진정 위기감을 느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촛불시위를 했다. 스스로의 선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상대적 악의 약점을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조사하고, 상대가 악이라고 한다고 해도 결코 방심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했다. 우리나라의 상대적 선을 응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되어 힘을 모아 흐름을 바꿔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결과 상대적 선은 승리했다.



우리나라의 상대적 선은 정말 필사적으로 움직여서 간신히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 승리는 변화의 끝이 아니다. 이제야 변화의 시작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세상의 승패는 선과 악으로만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진정 이 세상이 권선징악이 이루어지길 바란다면 악이 노력하는 것 이상으로 선이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노력이 결과를 만들어낼 때 비로소 권선징악은 이루어질 것이다.




5. 예시 – 최저임금


선과 악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흐름을 만들기 위해 어떻게 보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한다. 이 예시는 예시일 뿐, 방법이야 아무래도 좋다.



최저임금은 다수의 노동자와 소수의 경영자와의 협상으로 결론을 내린다. 일반적으로 선은 공공의 이익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상대적 선은 다수의 노동자들을 위한 최저임금 상승이다. (물가는 유지 이하 반복)


이 상대적 선의 승리를 위해서는 우선 선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요컨대 최저임금 상승이 다수의 행복을 부른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경영자들을 설득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상대방이 나쁘다고 하여 나쁜 부분을 보고 비난만 할 것이 아니다. 사건의 본질을 보기 위해 필요 없는 것을 양파껍질 벗기듯 하나씩 벗겨보도록 한다.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들은 부도덕한 방법을 통해 성장했다.(미리 말해두건대, 아닌 기업도 있음을 분명히 한다.) 탈세, 상속세 회피, 횡령, 정경유착, 페이퍼컴퍼니, 폐기물 무단 방류, 인명경시, 장시간 저임금 노동, 무노조, 갑질, 허위과장광고, 주가조작 등 쓰다 보니 질릴 정도로 많다. 


아무튼 여기서 선악을 분리해보자. 분명 부도덕한 방법이긴 하나 성장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경영자들은 자신들의 방식이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내면엔 부도덕한 측면이 있으나 기업의 성장을 발판으로 나라의 성장에 이바지한 측면이 있으니 괜찮다며 합리화 하기 때문에, 부도덕한 방법으로 성장했더라도 그것은 올바른 방식, 즉 자신만의 선이다.


그들 또한 자신의 선이 당연하다 여기기 때문에 최저임금 상승을 바라는 여론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방법이 노동자들을 힘들게 만들고 자살하게까지 하더라도 수년에서 수십 년간 해온 (저임금으로 착취해서)성공하는 경영방식을 포기할 리가 없다. 되려 어떻게 사업을 하냐며 불만을 토로할 뿐이다.


똑같이. 노동자 입장에서는 최저임금 상승이 많은 국민들의 행복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상대적으로 옳다. 그렇게 자신의 선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경영자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다.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되려 가난한 이가 부자 생각할 필요가 있느냐며 불만을 토로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절충안을 내놓을 수가 없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데 제대로 된 결론이 나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여론의 눈치를 보며 물가상승과 비교하여 조금씩 올리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야 언제까지나 변화가 없다. 기업의 부도덕을 비판해도, 그것이 성공의 길임이 확실하면 어떤 자기합리화를 통해서라도 그 길을 걷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나라 기업의 성공방식이며 변화가 없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선은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다. 그러니 선의 승리를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해보자. 



첫째, 선의 요구


선을 수단으로 사용해 지금까지의 부도덕한 경영을 포기하고 건전하고 올바른 경영방식과 함께 노동자들의 업무환경개선 및 대우 상승(최저임금 상승 포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이게 가능했으면 진작에 가능했다.



둘째, 지금까지 방식의 실패


지금까지의 방식인 부도덕한 경영을 실패하게 만들면 된다. 노동자를 위한 법(최저임금 상승 포함)강화와 부정부패 처벌을 강화하는 등 부도덕한 경영을 아예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식은 경영자가 곱게 받아드릴 리가 없다. 이윤추구를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는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받아드릴 리는 없고 강제적으로 한다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회피할 확률이 높다. 


일례로 올해 최저임금16.4프로 올려 1060원 올렸다. 그것만으로도 경영자는 힘들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그들을 설득할 수 없다면 최저임금 상승으로 손해 본 만큼 다른 방법으로 이윤을 추구할 확률, 그러니까 부도덕한 방법을 사용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니 그들을 설득해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할 수 없다면 상책이라 보기는 어렵다.



셋째, 다른 방식으로의 성공


협상의 기본은 서로간의 신뢰를 쌓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노동자와 경영자는 자신들의 선을 당연하게 여겨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니 제대로 된 협상이 될 리가 없다. 이렇게 오랜 세월 악화된 관계 속에서 서로간의 신뢰를 위해 물꼬를 트는 것은 최저임금이 적합하다. 왜냐하면 특정 기업이 아닌 나라에 속한 모든 노동자와 경영자에게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을 올리는 것이 노동자와 경영자(노사) 서로에게 득이 된다’ 라는 인식을 만들 수가 있다면 그것을 통해 서로의 신뢰를 구축하고, 그것을 시작으로 부도덕한 경영방식을 하나하나씩 자발적으로 하지 않는 흐름을 만들 수 있다.


물론 이 방법은 그냥 내 생각일 뿐, 다른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걸로도 좋다. 


그럼 차근차근 설명해보겠다.


최저임금 상승은 대기업보단 중소자영업자들에게 영향이 큰 편이다. 그러니 그들 입장에서 시작한다.


기본적으로 최저임금 상승은 소비자의 소득증가 및 소비증가로 결국은 자영업자들에게 돌아올 돈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의 방식인 ‘적게 주고 조금 더 번다’ 로 성공했고, 성공하는 모습을 배우며 사업을 했다. 최저임금 상승이 언젠가 수입으로 돌아온다고 한다고 해도 그것은 확실한 미래가 아니기에 불투명한 미래보단 현재의 방식을 고집하게 된다.


더구나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중소자영업자들도 많이 있는 상황에서 모든 경영자들을 설득을 하려면 확실한 이익을 보장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요컨대, 소득이 올라간 만큼 내수시장소비증가가 된다는 보증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 보증을 만드는 것, 그것이 서로의 신뢰를 구축하는 첫 길이다. 우선 노동자와 경영자의 중간에 서서 흐름을 주도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보통 정부관계자가 될 것이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이미 지난 이야기긴 한데 가정을 해보자. 정부관계자는 내수시장소비증가를 미끼로 경영자를 설득한다. 그 다음 이렇게 발표한다. “올해 최저임금을 원래 10%를 올리려고 했으나, 노동자들을 위해 16.4%로 올린다. 만약 이후 내수시장소비가 증가한다면 내년엔 더 올릴 계획이다.”


요컨대, Give and take 관계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그 다음 대중을 설득한다. 선동이나 조작이 아니다. 설득을 하라는 이야기다. 모두가 다 납득할 만한 정론과 상대방 입장을 고려한 이득을 통해 대중을 설득한다.


대중을 설득 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다수 국민들이 그 내용을 알아야 한다. 언론은 물론이고, 대중적으로 영향력이 높은 사람들을 설득한다. 정부관계자라면 커넥션 정도는 준비되어있을 것이다.


“노동자와 경영자의 Give and take 관계를 성립시킬 수 있다면, 서로가 이익이 되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 고 설득하면 된다고 본다. 방법이야 어떻게든 설득하면 되겠다.


그 뒤 언론 발표와 영향력을 가진 인사들의 말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 드리는지 면밀히 관찰하고 분석한다. 흐름을 주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유동적이어야 한다. 여론의 흐름을 보고 그 순간, 순간 적합한 행동을 하여 대중을 설득한다.


“경영자들이 손해를 각오하고 최저임금 상승에 찬성했다. 그러니 우리 노동자들도 그에 대한 보답으로 내수시장소비를 해야 한다.” 라고 여론이 생기기 시작하면 반쯤 성공했다고 봐도 되겠다. 


그 뒤 실제로 내수시장소비가 증가되었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노동자와 경영자의 신뢰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정말 막연한, 뚜렷한 보증이 없는 상황에서 서로간의 믿음만으로 시작된 일이 실제로 성공하게 된다면 이제는 믿을 수밖에 없게 된다. 


협상의 기본은 신뢰관계. 이렇게 해서 신뢰관계가 생겨야만 비로소 노동자와 경영자는 서로를 이해하고 협상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신뢰를 바탕으로 부도덕적인 경영 하나하나씩 바꿔나가기 시작한다면 분명 자발적으로 바꾸리라 생각한다. 이 흐름에서 벗어나려는 경영자가 있다면 아마 고립되지 않을까? 그야말로 전국민 프로젝트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벗어나면 진짜 나쁜 놈이 된다. 표적, 그러니까 불매운동이라던가 말이다.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기업은 도덕적인 경영을 하게 되었다. …  면 좋겠다.



뭐.. 이건 내 생각일 뿐, 실제로는 몹시 어려울 것이 분명하다. 이런 방법보다 중요한 것은 원인이다. ‘선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발생했다’ 라는 원인이 있다면 그것을 바꾸기 위한 방법은 다양하게 강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에게 말하오니, 자신의 선을 추구할 때 부디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노력을 아끼지 말아주길 바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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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월 전 쓰고 싶었던 글을 이제야 쓰게 됩니다. 그 때 하고 싶었던 말을 드디어 마무리 짓는군요. 하하.. 하. 장소를 바꾸니 의욕도 떨어져 늦어졌습니다만 뭐 제 사정이야 아무래도 상관없겠지요.


저는 보통 사물을 볼 때 본질을 보기 위해 양파껍질 벗겨내듯이 사건의 본질과 무관한 부분을 벗겨냅니다. 선악을 벗기고 역할을 벗기고, 개성을 벗기고, 좀 더 다양한 것들을 벗겨내어 알맹이가 만들어내는 파장, 흐름, 영향력을 관찰하고 수집합니다. 그래야 본질을 보고, 그래야 제가 원하는 흐름으로 만드는데 쓸 수 있기 때문이지요. 잘못된 정보(편견이나 선입견 등)는 흐름을 주도하는데 큰 방해가 되거든요. 물론 이 이야기는 보통 가상에서의 이야기입니다. 현실을 소재로 하더라도 말이죠.


어쨌든 이건 제게 아주 자연스러운, 그러니까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도 압니다. 제게 당연한 것이 다른 사람에겐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에요. 하지만 자각하고 있지 않는 이상 그 부분을 보충하기는 어려웠어요. 대화를 통해(가상이든 현실이든) 나와 다른 사람의 다른 점을 느끼게 되고 나서야 제 실수를 깨닫기 마련이죠. 아 또 실수했구나.


제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과 실제로 벌어지는 현상을 분리하고, 착하고 나쁜 것과 능력 유무를 분리하고, 제 상황과 다른 사람을 분리합니다. 그렇게 하여 본질을 보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이젠 습관화가 되었지요.


그러다 보니 어쩐지 좋아하는 것이나 저와 연관된 것에는 좀 더 엄격해지는 경우가 많아지더군요. 객관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해야 할까, 아니 결국은 제멋대로였습니다만, …… 변명에 변명하며 도망쳤지만 설마 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조금 과격하거나 제멋대로라 미움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쩐지 제 글을 좋게 받아드린 분도 있다는 것을 말이죠. 하지만 그것을 받아드리면 편애할 거 같아 두렵더군요. 솔직히 편애한 적도 있긴 합니다. … 설마 했거든요.


그리고 실망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이상한일이지요. 처음과는 다르게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데 미움 받거나,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데 호의를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땐 ‘아, 또 누군가 내 뒷담을 한 걸까’ 하며 차분한 마음으로 응시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괴로웠습니다만 계속 겪다 보니 무뎌진 탓인지 차분해지더군요. 어쨌든 적의보단 호의가 기분은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걱정이 들었습니다. 언제 또 그 호의가 적의로 바뀔지 모르니까요. 뭔가 상대방에게 직접 영향을 끼친 기억은 없는데 말이죠. 그 경험 덕에 저는 되도록 남의 이야기나 소문 때문에 태도를 바꾸지는 않으려 했습니다. 그 괴로움 아니까요. 직접 경험하고 판단해야겠지요. 아, 앗. 참 이건 현실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이 경험 때문에 두려웠을 뿐이에요.


…… 뭐 결국은 변명입니다. 죄송합니다. 



다음 글은 무의식에 관한 글입니다.

그 다음은 삶의 의미, 인공생명, 바둑의 미래 셋 중 하나 써보고자 합니다.


아, 인공생명 하니까 생각나서 미리 이야기 합니다. 몸에 이로운 것이 사회에 이롭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 둘은 분리해서 생각해주세요. 배고파서 빵을 훔쳐 먹으면 몸에는 이롭지만 죄책감으로 마음이 상하고, 사회적으로 죄가 됩니다. 몸과 마음이 편하기 위해 시험 공부를 하지 않으면 성적이 떨어지겠지요. 마음이 상하게 될 겁니다. 그렇다고 시험 공부만 하면 몸과 마음이 지쳐 아프겠지요. 밸런스를 취하길 바랍니다.



자신의 선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보다 더 행복한 추석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행복하세요.


아, 음 (어쩐지 고개를 들기 어렵긴 하지만) LCK 힘내요.

선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과 승리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과는 다릅니다.


개천절과 추석이네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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