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미래, 무의식은 알고 있다
0. 운명
오랫동안 운명을 생각했다. 콧물이 흘러나와 훌쩍이던 시절부터 시작된 의문 하나, ‘이 세상 모든 것이 이미 정해진 것이라면 뭘 해도
바뀌는 것이 없는 걸까?’ 그래서 이상한 짓을 해봤다. 그 때문에 세상의 눈은 싸늘해져도 내겐 바뀌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 행동조차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닐까?’ 아, 모든 것이 의미가 없었다.
그 생각은 모든 의지를 앗아가는 무력감을 만들어주었다. 이 모든 것이 정해진 것이라면, 미래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미래를 포기한 내 삶은 그렇게 의미를 잃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굉장히– 편안했다. 괴롭고 힘든 시절 기댈 곳이 없는 내게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어리고 연약한 마음이 조금씩 조각나 흩어지는 것을
꿰매주는 실이 되어주었다.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내 마음은 형태를 갖춰 성장할 수 있었다. 그 대신에 언제나 마음은 답답했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란 이름의 감옥에 갇혀 자유를 갈구하게 되었다. 자유, 자유, 그리고 또 자유.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정해진 삶이라는 편안함에 기대는 것은 둘째치고, 반박할 수 있는 논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운명을 다룬 수많은 이야기들, 읽어도 보아도 들어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운명이란 감옥의 열쇠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해왔던 걸까. 그것은 시간이 흘러 흘러 현재에 이르러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까지는 말이다.
그래, 얼마 전까지다. 인공지능 편을 쓰고 나서 자아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자 이것저것 검색해봤다. 그 때 본 영상 속에 소개 된 하나의 실험은 나의
운명을 박살내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 마음을 이어주던 실이 사라져 다시금 조각나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천천히– 억지로 이어놓았던 마음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기억들. 실수, 실패, 민폐, 어리석음, 어리광, 유치함, 한심함, 불쌍함, 아! 정말이지 상쾌할 정도로 비참했다. 구역질이 나온다거나 하는 식의 극적인 반응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식은땀이 나고 심장박동수가
빨라지는 걸 느꼈다. 시간이 갈수록 기억에 짓눌리는 감각이 괴로웠지만, 드디어 나는 나의 첫 번째 실수를(상징적인 의미) 찾아냈다.
이번에는 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부디 여러분들의 삶에 의미가 있기를.
1. 자유의지
무의식. 사실 잘 모르는 영역이었다. 별로 관심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나를 움직인다고 생각했던 의식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영상에서 소개된 하나의 실험은 무의식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자유의지는 있는가?
Libet팀은 의식적 의도와 뇌 활동간의 관련성을 알아보았다. 이 연구는 두피에 여러 개의 전극을 붙여서 그 전기적 활동을 기록하는 뇌전도 기법으로 얻은 준비전위(자발적 움직임 전의 뇌의 운동피질 활동을 측정한
값)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준비전위, 6명의 피험자, 오실로스코프라는 시계판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했다. 이 시계판은 밝은 광점이 2.56초동안 시계바늘처럼 한 바퀴 도는데, 피험자는 그것을 보고 손가락을 움직임과 동시에 자신이
반응하고 싶었던 시간이 언제였는지를 체크한다. 10초 방향이나 20초 방향이나 그렇게 말이다.
그렇게 체크한 시간과 준비전위 시간과 실제로 움직인
시간과의 관계성을 관찰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1)체크한 시간(의식적 의도) 이후 (2)준비전위(움직임 전의 뇌 활동) 나타나고, 그 이후에 (3)실제로 움직인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피험자들이 체크한 시간 이전에 준비전위가 나타난
것이다.
준비전위1(계획) -> (2)준비전위2(의도 전) -> (1)체크한 시간(의도) -> (3)실제 움직임
정리하자면, 우리가 의식적으로 움직이겠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뇌는 움직이겠다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Libet 팀은 우리의 행동은 물론이고 그 행동을 하겠다는
의식적 의도도 무의식적 뇌 활동으로 비롯된 것이다, 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니 우리의 자유의지는 그저 뇌 활동의 부산물이다, 라고 그들은 그렇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거부권에 대한 의심, 시계를 바꿨을 때 결과가 달라지는 점, 내성보고의 신뢰도, 준비전위2가 필요조건인가에 대한 물음 등(이하 자세한 내용은 맨 밑단 논문 참조) 이 연구는 반박할 여지를 많이 남겨두었다. 때문에 이 연구만을 가지고 자유의지의 존재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이르다, 라고 결론을 내린다고 한다.
새로운 정보를 받아드리는 순간, 여느 때처럼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감각적으로 느낀다. ‘나(의식)’는 모르는데, ‘나(무의식)’는 알고 있다.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왜 그런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러다 보면 나름대로의 답이 나오곤 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겠다. 나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Libet 팀의 연구도 맞는다고 생각한다.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연구를 긍정한다는 게 이상하겠지만, 해석을 달리하면 둘 다 맞을 수도 있는 법이다.
앞서 소개했던 연구결과가 맞는다고 가정해보았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럴듯한 답이 나왔다.
사람은 살면서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게 되는 걸까? 천 번? 만 번? 십만 번? 아마 셀 수도 없이 많이 움직일 것이다. 그 패턴을 뇌는 기억하고 있다. 조건은 피험자가 마음에 드는 시간에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피험자가 좋아하는 시간도 뇌는 기억하고 있다. 뇌는 어떻게(손가락), 언제(시간)가 저장된 패턴과 새로 들어오는 정보(마음에 드는 시간에 움직일 것)을 계산하고 예측한다. 그 예측이 사람에겐 가장 편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그것을 갑작스럽게 거부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뇌의
예측대로 움직이게 되어있다.
Libet 팀은 거부권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다. (2)체크한 시간과 (3)실제 움직임 사이에는 약 0.1초에서 0.2초가량의 시간이 존재하는데, 그 사이에 거부할 수 있다고 했다. Libet 팀은 피험자들에게 (2)를 한 뒤 (3)을 하기 전, 약 0.1초에서 0.2초 사이에 (2)를 취소하여 거부하라고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약 0.15초에서 0.25초 사이에 뇌파의
변형이 일어났다고 보고하였다. 이를 근거로 해서 Libet팀은 사람의 거부마저도 무의식적 활동으로 시작된다고 주장하였다.
참고한 논문에 따르면, 이렇게 짧은 시간에 반응하는 게 가능하냐며 의심스럽다고
한다. 그리고 Libet 팀이 이 의심스러운 거부권에 대해 재검증 하려는
시도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내가 봐도 솔직히 이상하긴 하다.
하지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조건은 피험자가 마음에 드는 시간에 손가락을 움직이길
결정한 다음, 바로 취소하는 것이었다. 뇌는 언제 움직이고 취소할 것인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이야기다. 뇌는 저장된 패턴과 새로운 정보로 사람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계산해 예측한다. 그 예측대로 움직인다면 뇌파의 변형이 먼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미리 요구 받는 행동으로 한 거부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거부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정리하자면, 우리가 의지를 갖기 전에 뇌는 저장된 패턴과 새로운
정보를 가지고 실시간으로 계산하고 예측한다. 우리가 의식이 없는 상태라면 그 예측대로 움직이고(무의식적 움직임), 의식이 있더라도 갑작스럽게 의지를 가지고 거부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움직이게 된다.(가장 편하고 자연스러운 움직임)
Libet 팀이 했던 연구는 의지 전에 준비전위가 나타났으므로 자유의지가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뇌가 저장된 패턴과 새로운 정보를 계산하여
예측하느라 발생한 것이다. 그러니 예측에 벗어난 움직임을 한다면 사람은 언제든지 자유의지를 가지고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 그러므로 Libet 팀의 연구도 맞고, 자유의지도 있다.
아주 쉽게 무의식은 자동모드, 의식은 반자동모드, 자유의지는 수동모드 정도로 축약해서 이해해도 되겠다.
2. 무의식
첫 번째 패턴, 본능
우리들의 조상부터 시작된 과거의 의지는 유전자에
저장되어 대대로 변화하며 이어져 내려왔다. 그것을 사람의 첫 번째 패턴인 본능이라 일컫고 있다
본능으로 움직이는 시기인 아기의 뇌는 유전자에 저장된
패턴과 몸에서 요구하는 욕구와 오감으로 수집하는 정보를 계산하여 예측한다. 그 예측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기에게는 가장 편하다. 그러니 아기가 먹고 싶을 때 먹게 해주고, 자고 싶을 때 자게 해주고, 싸고 싶을 때 싸게 해주는 것이 아기에겐 가장 이롭다. 아직 정보가 부족한 아기의 뇌가 예측하는 자연스러움을
방해하면 아기에겐 큰 스트레스로 작용할 것이다.
이 첫 번째 패턴인 본능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대게
유전자에 맞게 성장하게 되어있다. 종종 어릴 때 이별한 쌍둥이가 만나서 보니 취미가 같다더라, 그런 것이 바로 유전자에 순응한 결과다.
두 번째 패턴, 학습
아기가 성장하면서
정보를 수집한다. 아이가 호기심이 많은 까닭은 좀 더 많이 정보를
수집해야 살아남는데 유리하기 때문에다. 그러므로 본능적으로 호기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이의 호기심은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이에겐 가장 이롭다. 호기심이 없는 아이는 뭔가 다른 요인으로 억제된 것이니 유심히 관찰하길 권한다. 그렇게 새로운 정보를 학습하면서 새로운 패턴이 만들어진다. 그것을 사람의 두 번째 패턴인 학습이라 하겠다.
학습에는 정보를 그대로 수용하는 수동적 학습과 스스로
생각해서 새로운 정보를 만드는 능동적 학습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학습은 수동적 학습에 해당된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이 있다. 한번 뇌에 학습된 패턴은 쉽게 바꾸기 어려워진다. 성장해 바꿀 수는 있지만 그것이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에 본인이 싫어서 바꾸질 않게 된다. 그래서 세 살 버릇이 여든 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버릇을 들이게 하는 교육은 유전자에 저장된 패턴과의 싸움이다. 최대한 본능에 거스르지 않으면서(거스르면 아이가 힘들어해 교육이 어렵게 된다) 필요한 버릇을 들이게 하는 것. 그것이 아이를 위한 교육이다.
그렇게 해서 패턴이 학습되면 뇌는 본능과 학습과
새로운 정보를 계산하여 우리의 행동을 예측한다. 오랫동안 패턴이 학습되면 본능을 넘어선 자연스러운 행동이 나타난다. 이를 가리켜 만들어지는 자연스러움이라 하겠다. 일 중독자들은 보통 하기 힘든 일조차 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학습으로 만들어진 자연스러움이 편안함을 바라는 본능을 넘어선 것이다.
이것이 종종 본능으로 착각되기도 하지만 이 둘은
엄격하게 분리해서 봐야 한다. 가능과 불가능은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못 먹는 음식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때 유전자가 거부하는 음식이 때론 있다. 그런 것은 거스를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학습을 통해 못 먹게 된 음식도 있다. 그런 것은 의식적으로 바꿔 먹을 수도 있다. 물론 굳이 먹지 않아도 된다면 안 먹어도 된다.
세 번째 패턴, 의지
본능은 내부 정보, 학습은 외부 정보다. 그 정보들을 가지고 스스로 생각해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 행동한다. 그걸 가리켜 세 번째 패턴인 의지라고 하겠다.
뇌에 저장된 패턴에 순응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해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가는 것, 그것을 가리켜 자유의지라고 말한다.
새로운 의지는 시간이 지나면 뇌에 저장돼 패턴화된다. 이런 저장된 패턴들을 가리켜 중첩된 과거의 의지라고
하겠다. 이것과 새로운 정보를 계산하고 예측하여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가리켜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의식이 있을 때도 무의식적 움직임이 존재하므로 의식이 없을 때만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의식적 움직임도 저장된 패턴에 순응한다면
뇌가 예측한 대로 움직이게 된다. 그러니까 의식적으로 저항하지 않는 한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는 무의식이 알고 있다는 이야기다.
과거의 행동을 후회하며 바뀌려고는 하는데 무의식적으로
후회했던 행동을 반복하는 사람이 있다. 그럴 때 자신에 대해 절망하며 포기하기도 한다. 내가 뭐 그렇지, 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무의식은 자신의 현재 의지와 무관하게 뇌에 저장된 패턴대로 움직인다. 그냥 과거의 흔적에 불과하단 말이다. 그러니 현재 자신이 바뀌었다면 자유의지를 가지고 꾸준하게 의식해서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
뇌에 저장해야 한다. 그래야 무의식이 바뀌고 스스로도 바뀐다.
다양한 곳에서 이 가설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있었다.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감
감이라고 하면 대게 근거가 없기 때문에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감이 잘 맞는다고 하기도 한다. 왜 그럴까? 주사위를 던질 때 6만 나오면 엄청나게 운이 좋거나, 뭔가 수작을 부린 것이 틀림없다. 그처럼 근거가 없어 보이더라도 감이 계속 맞는다면 무언가 이유는 있는 것이다.
뇌는 저장된 패턴과 새로운 정보를 가지고 자동적으로
계산하여 예측한다. 그 활동은 무의식적인 활동으로, ‘나(의식)’는 몰라도 ‘나(무의식)’는 알고 있다. 의식적 근거는 없어도 무의식적 근거는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맞을 때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감을 맹신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감은 무의식이 저장된 패턴을 가지고 계산하는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패턴이 나타나면 대응할 수가 없다. 잘못된 감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유전자에 저장된 패턴이라고 하면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는 감각이라던가, 많은 경험으로 저장된 패턴이라고 하면 형사의 감으로 범인을 예측한다거나, 뭐 이런 것이다.
둘째, 징크스
왜 사람들은 징크스를 믿는 걸까? 그건 실제로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무시하기에는 현상 그 자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무언가 이유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세상, 이유 없는 현상은 없다.
왜 그런 현상이 발생했을까? 그건 스스로 징크스를 믿었기 때문이다. 뇌는 저장된 패턴과 새로운 정보를 가지고 자동적으로
계산하여 예측한다. 그 계산에 사람이 믿는 징크스가 들어가 본래의 예측과 달라지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A를 하면 잘되고, B를 하면 잘 안 된다, 라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 상태에서 B를 하게 되면 스스로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 정보가 뇌의 계산에 포함되어 실제로 안되게 되어버린다.
물론 전부 그런 것은 아니다. 징크스를 뛰어넘을 정도로 오랫동안 저장된 패턴이라면
관계없이 잘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기에, 사람들은 징크스가 있다고 믿게 된다.
의학적으로 플라보시 효과라는 것이 있다. 진짜 약이라고 말하며 효과가 없는 가짜 약을 처방했음에도
실제로 증상이 호전되는 예가 있다. 스스로의 믿음이 뇌의 계산에 포함되어 작용했기 때문이다. 물론 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거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지는 않다.
셋째, 고전적 조건형성
파블로프는 개에게 먹이를 주기 전에 종을 울리는
것을 반복해봤다고 한다. 그랬더니 개가 종만 울려도 먹이가 오는 것으로 착각해 침을 흘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가리켜 파블로프의 개라고 부르기도 한다.
개 또한 뇌가 저장된 패턴(종이 울리면 먹이가 온다)과 새로운 정보(종이 울렸다)를 가지고 무의식이 자동적으로 계산하여 예측했다. 그 예측에 순응하면 자동적으로 침이 흘러 나오는
것이다.
넷째,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
뇌는 모든 글자를 하나하나 읽는 것이 아니라 단어
하나를 전체로 인식한다고 한다. 그래서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만 맞으면 문장이 해석이 된다. 이 연구가 ‘캠릿브지 대학의 연결구과’로 유명하지만 실제론 아니라고 한다. 뭐, 그건 좋다.
뇌에 저장된 패턴(언어)를 가지고 새로운 정보(문장)을 접하면 의식적으로 읽기 전에 무의식이 자동적으로 계산해 해석한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하나하나 읽지 않으면 문장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달리 말해 뇌에 저장된 패턴이 없는 경우(모르는 단어) 하나하나 의식해서 읽어야 하기 때문에 읽기가 힘들어
쉽게 지치게 된다. 그러니 어려운 단어가 나오는 책부터 읽는 것은 책 자체를 싫어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독서량을 늘리게 하고 싶다면 쉬운 단어를 사용한 책부터 읽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섯째, 뒷담화, 선입견, 편견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뒷담화를 한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자연스러운 행위였음을 알았어야 했다. 내가 싫어한다고 하여 그것이 필요 없지는 않았다. 정보를 모아(뒷담화) 빠르게(선입견) 상대를 파악한다.
뒷담화엔 분명 문제가 존재한다. 대상의 의지와 관계없는 공간에서 없는 말 지어내기, 험담하기, 앞과 뒤가 다르기 등으로 사람들과의 사이를 나쁘게
하기도 하지만, 일종의 정보수집이기도 했다. 그러니 뒷담화 자체를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를 나쁘게 만드는 뒷담화를 경계해야 한다.
선입견은 뇌에 저장된 패턴(상대 정보)과 새로 들어오는 정보(실제 상대 모습)를 보고 무의식이 자동적으로 계산하여 예측하는 것이었다. 그 예측에 순응하면 선입견으로 상대를 보게 된다.
이런 선입견은 빠르고 편하지만 감과 같이 매번 맞는
것은 아니다. 뇌에 저장된 패턴이 없을 경우 선입견이 맞기가 어렵다. 그래서 선입견 없이 바라보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러나 매번 의식적으로 자연스러운 예측에 저항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쉽지가 않다. 편견 또한 이런 과정 중에 발생한 부작용이다.
3. 실험
사람이 공을 던질 때 의식적으로 좌표 값을 계산해서
던지지는 않는다. 그냥 감으로 던지지. 어느 각도로, 어느 힘으로 던져야 되는지는 ‘내(의식)’가 계산하지 않고 ‘내(무의식)’가 자동적으로 계산해주는 것이다. 던질 때 빗나가도 그 정보 또한 자동적으로 추가되어
계산해준다. 다시 던질 때 의식적으로 좌표 값을 계산해서 던지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이 정도면 되겠지, 라며 던지지 않나? 선수 수준이라면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던지고 있다.
‘내(의식)’가 계산하는 것이 아니다. ‘내(무의식)’가 자동적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의식)’가 해야 할 일은 정확한 정보수집과 강력한 의지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것을 바탕으로 몇 가지 실험을 해봤다.
첫째, 리듬게임
나는 리듬게임에서 어려운 난이도가 자신이 없었다. 노트가 마구 내려오면 제대로 반응하질 못했다. 그걸 달리 생각해보았다. 의식적으로 노트 하나하나에 반응할 게 아니라 정확한
정보(노래,노트)와 강력한 의지(노트에 손가락 반응)로 시작해봤다. 그랬더니 그 빠른 노트들을 손이 자동적으로 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순간 섬찟했지만 재미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피곤해지면 손의 반응이 느려져 힘들어졌다. 또한 너무 어려운 것은 잘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능한 것은 가능해졌다.
둘째, 날벌레
방안에 날벌레들이 있었던 적이 있었다. 예전에는 그 날벌레들을 손으로 잡기가 매우 어려웠다. 양손으로 손바닥 쳐도 잽싸게 피하는데 도통 잡을
수가 없었다. 그걸 달리 생각해보았다. 의식적으로 계산해서 잡으려고 하지 않고 정확한 정보(날벌레위치)와 강력한 의지(잡겠다)만 가지고 손을 뻗어보았다. 그러자 날벌레를 잡을 수 있었다. 그것도 한 손으로 주먹 줘서 잡았다. 우연인가 싶었는데 이후 계속 잡을 수 있었다. 아, 이게 되는 거였구나. 매번 잡을 수 있던 것은 아니지만 잡을 수 있었던 것이 몹시 신기했다. 물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너무 빠른 벌레는 못 잡는다.
셋째, 언어
그 동안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하나 있다. 왜 모국어는 하기 쉬운데 외국어는 하기 어려운가? 여러 가지 이유는 있겠지만 아이들도 익히는 언어를
쉽게 배울 수 없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이젠 이유를 안다. 외국어를 의식적으로 배우려고 하니 어려운 것이었다. 언어의 해석은 ‘내(의식)’가 하는 것이 아니다. ‘내(무의식)’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외국어는 배운 단어와 문법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하나하나 해석해 알아들으려고 하니까 힘들고 짜증날 수밖에 없다.
나 또한 그 동안은 의식적으로 해석해 알아들으려고
했었다. 그걸 달리 생각해보았다. 내가 해야 할 것은 정확한 정보수집(듣기)과 강력한 의지(의미 알기)만 있으면 되었다. 준비를 마친 뒤 외국어가 나오는 게임을 해보았다. 그러자 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전부다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들렸다. 한국어로 해석해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자체를 알아듣게 되었다. 이 순간 왜 귀가 좋은 사람이 언어를 잘한다는 건지를
알게 되었다. 외국어와 번역된 자막을 매칭해 반복해서 듣다 보니
자막을 보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해석되는 구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의역과 직역이 구분되기 시작되었다. 아, 언어는 이렇게 습득하는 게 편하구나. 재미있었다. 그래서 그 게임을 반복해서 플레이 해도 질리지가 않았다. 알던 단어가 나오면 알아듣기 편하긴 했지만 몰라도 알아듣기 시작했다. 게임 내 장면과 대사 전체를 무의식적으로 기억해
의미 자체를 알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니 단어는 어떤 사물을 의미하는 키워드에 불과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 단어를 알기 위해서라면 단어와 사물을 둘 다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Forest 하면 한글 숲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숲의 이미지가
떠오르도록. 그래야 무의식이 그 전부를 기억해 문장 해석을 해줄
수 있다.
넷째, 모험게임
위에서 예시로 든 게임인 모험게임을 하는데 이상하게
사격이 잘 안되었다. 타겟의 바로 옆을 계속 쏜다거나 등 잘 맞지를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FPS 게임을 못하는지 알았다. 그걸 달리 생각해보았다. 의식적으로 타겟을 계산해서 맞추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냥 정확한 정보수집(타겟위치)과 강력한 의지(맞추겠다)만 가지고 포인트를 이동시켜 맞춰보았다. 바로 맞는 것은 아니지만 맞기 시작했다. 뭐 곧바로 익숙한 예전 패턴(의식해서 쏘는)으로 돌아가 안 맞기도 했지만 방법을 알아냈다. 아마도 예전의 나는 무의식적으로 포인트를 맞췄는데
거기에 추가의 의지가 더해져서 약간씩 포인트가 엇나간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이 게임의 3편 극악 난이도를 클리어 할 수 있었다. 예전이라면 아마 어려웠을 것이다.
다섯째, 풍경
그간 하나의 의문이 있었다. 나는 의식하지도 않았는데 시야에 약간의 변화만 있어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왜 그런지는 몰랐는데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건 ‘내(의식)’가 알아낸 게 아니라 ‘내(무의식)’가 알아낸 것이었다. 그걸 알고 나니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길거리에 나가 풍경을 바라보았다. 풍경을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바람을 느끼고
공기를 맛보았다.
그 모든 것을 ‘나(무의식)’는 기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식하지 않고 지나친 모든 정보들을 ‘나(무의식)’는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꿈으로 형태를 갖춰 마주치게 된다. 전혀 모르는 장소가 꿈에 나타나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 기억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괴로운 와중에도 재미를 느꼈다. 새로운 장난감을 가진 아이가 된 기분으로 이것저것
실험하였다. 인체 사용설명서를 손에 쥐게 된 기분이었다. 무의식은 자동모드, 의식은 반자동모드, 자유의지는 수동모드였다.
음, 이건 그저 내 개인적인 실험이니 다른 사람들이 동일하게 경험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또한 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꼭 명심하기 바란다.
4. 우연
사람의 삶은 생각 외로 단순했다. 대부분 무의식의 계산대로 살아간다. 처음에는 의지를 갖고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패턴화
되어 쌓이기 시작하면 점점 무의식에 의존하게 되어 종국에는 무의식에만 기대는 일도 발생하게 된다. 왜 나이를 먹을수록 변하지가 않는 것인가, 그것은 중첩된 과거의 의지가 현재의 의지를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죽을 때까지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고 싶다면, 언제까지나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변화가 죽었을 때, 그 사람의 자유의지도 죽는다. 만약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고 싶다면 죽을 때까지
호기심을 가지고 살길 권하겠다. 호기심이 있는 한, 사람은 언제까지고 변할 수 있다.
이른바 운명이란, 사람의 힘을 넘어선 초월적인 무언가로 인해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것. 그러나 개인의 삶은 그런 초월적인 무언가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본능, 학습, 의지로 결정된다. 종종 음주, 흡연을 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하든 안 하든 수명이 같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한다. 해도 오래 사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안 해도 짧게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다. 개인의 삶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 명이라면? 천 명이라면? 만 명이라면? 만 명을 대상으로 금주와 금연을 해보았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의 수명에 변화가 없을까? 없다면 음주와 흡연이 몸에 해롭다는 근거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아니지 않나. 누군가는 분명 수명이 변한다. 그렇게 간단하게 죽음의 운명이 바뀌는 것이었다.
정말 운명이 정해진 것 같은 삶도 있다. 그러나 그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집단에
초점을 맞추면 그것은 그저 우연의 결과였다. 이 세상엔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 이 세상에는 마치 운명과도 같은 특별한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운명 같은 만남, 운명 같은 인연, 운명 같은 사건.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세상에서 1%의 확률로 그런 일들이 벌어진다 가정해도 7천만명이 넘게 경험하게 된다. 오 이런, 제기랄!
운명이라 불리는 그 모든 것이 우연이라 가정해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개체수가 그렇게나 많은데 특별한 일이 없을 리가 없다. 그 확률이 0.0000001%라고 해도 이 세상에는 있을 수가 있다! 오 이런! 오 이런!
내가 생각했던 운명은 나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 순간 박살 나버렸다. 개인의 삶과 집단의 삶과 이 세상의 흐름. 그것을 지켜보니 알 것 같았다. 아, 나의 첫 번째 실수는 나 자신을 객관화해서 바라보지
않았던 것이었다. 내 자신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였기 때문에 특별했다!!
5. 개혁
개인이든 집단이든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이 모인 것이 집단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대부분 무의식의 계산대로 살아간다. 중첩된 과거의 의지, 그러니까 옛날에 했던 그대로 행동한다. 신분제 시절의 존중의 척도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던
까닭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세대가 바뀌고 세상이 바뀌어도 오래 전부터 사람들에게 전해 내려온 중첩된 과거의 의지는 의식해서 바꾸지 않는 한 그대로 이어진다.
그러나 행태를 띤 것은 생각보다 쉽게 바뀌기도 한다. 실내 금연같이 의식적으로 금지 표시를 계속 보고
인식할 수 있는 제도라면 집단의 무의식이 바뀌어 실제로 바뀌게 된다. 반복된 인식이 패턴으로 변해 뇌에 자리잡게 된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계속 인식할 수 없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 같은 생각이라면 바꾸기가 어려워진다. 형태를 띤 것이 계속 인식할 수 있어 바뀌었던 것처럼, 본질을 꿰뚫어 대다수 사람들에게 공감을 살 수 있는 생각을 스스로가 생각해 의식적으로 계속 인식하게
만들어야 바꿀 수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돌출된 의지는 집단의 무의식에 묻혀
언제까지고 변화할 수 없다. 집단의 자유의지가 죽게 되는 것이다.
집단의 개혁도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된다. 형태를 띤 것은 생각보다 빠르게 바뀐다. 그것을 의식적으로 계속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기 어려운 생각은 쉽게 바뀌질 않는다. 형태를 띤 것을 보고 바뀔 때에는 의지를 가지고
바꾼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바꾼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내 금연 표지가 없는 곳이라면 실내 흡연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해당 법안 마련되었다고 하는데, 이처럼 형태를 띤 것은 쉽게 바뀌지만 본질적으로는 바꿀 수 없다.
물론 형태를 띤 것도 계속해서 인식하게 만들 수
있다면 점층적으로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개혁이다. 그러나 본질을 꿰뚫는 생각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면 언제고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을 꼭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경험하지 않았나?
본질적인 변화는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생각해 바뀌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니 나는 내 모든 것을 부정하더라도 상대가 스스로 생각한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긍정하겠다. 그것이 나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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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부정당하면 설득하려고 노력을 하겠죠. 긍정은 그 생각을 존중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받아드릴 수 없는 논리를 맞닿게 되면 우선 반박을
합니다. 논리적인 반박이 불가능하면 그 논리를 이야기한 상대를
깎아 내릴 방도를 찾지요. 나이, 직업, 경력, 학력, 지위, 등 논리와 무관한 부분을 가지고 반박합니다. 물론 경험입니다만, 대체로 그렇더군요.(예외는 있습니다.) 특히 현실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을 정도로. 가진 것이 없는 자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임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를 버렸습니다. 스스로를 투명하게 만들어서 생각만 남도록. 저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저 자신을 수단으로 쓰는데 거리낌이 없는 모양이더군요. 생각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저는 별로 상관없었던 모양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이 정답이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최선이었다고는 생각합니다만… 아아,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젠 모르겠습니다. 살아만 있으면 그 앞에 무언가는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젠 그것마저도 없어졌군요.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너무- 늦게 알았어요. 슬프네요.
아이는 언제 어른이 되고 싶어하는 걸까요? 어른이 만만하게 보였을 때입니다. 어른이랑 자신이랑 별 차이가 없는데 동등하지가 않죠. 그러니 동등하게 되기 위해, 동격이 되기 위해 어른이 되고 싶어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불신이 반항을 만든다고 이야기 했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불신이 어른의 격을 낮게 만들어 반항하게
되는 거죠. 어른이랑 자신이랑 별 차이도 없는데 윗사람 행세를
하는 것이 못마땅해지거든요. 비슷한 연령의 형제남매자매들이 싸우는 이유도 대게는 이런 이유입니다. 별 차이도 없는데 윗사람 행세하는 게 못마땅하니까요. 그러니 훌륭한 어른 행세하기가 어렵다면 차라리 대등하게
상대하는 것이 사이 좋게 지낼 수 있는 방도일지도 모릅니다.
이 닉네임은 아즈망가대왕의 냐모선생님이 쓰던 베개
메이커입니다. 정말 편해 보여서 큰맘 먹고 산적이 있었죠. 그래서 지었는데 뭔가 바꾸기가 뭐해서 그냥 쓰고
있네요.
해소하지 않는 욕구는 괴롭지요. 그래서 최대한 정보를 차단했는데 아무리 차단해도
쓰고 싶은 글 감은 쌓여가네요. 사실 예전에 쓴 글도 정리하려고 했는데, 지금 쓰고 싶은 것도 쌓여있는 터라 언제 할지는 모르겠어요.
무의식 편은 개인적으로 괴로워서 좀 늦은 것 같네요.
다음 글은 삶의 의미 혹은 바둑의 미래입니다. 그 다음은 아마 인공생명
그 뒤엔 개그, 감정, 정보 더 쓸 예정입니다.
착각이 아니라면 좋으련만 뭐 어쨌든, 덕분에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어디서 읽던 어떻게 읽던 읽기만 해주신다면 기쁠
따름입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 … (눈을 내리 깐다) 어쨌든 다들 잘되었으면 좋겠어요.
참고
영상: 2016 카오스[Brain] 5강 자아의 탄생: 나를 의식하는 나 – 2
논문: 자유의지에 대한 Libet의 연구와 후속 연구들
서울대학교 法學 제52권 제3호 2011년 9월 477∼51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