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질
절대중립은 가능한가?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봐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가치관, 편견, 손익 등의 이유로 중립과 객관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예컨대 사건을 주사위 면으로 바꿔 바라본다고 가정해보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각자 보고 싶은 면을 보고
그것이 답이라고 말할 것이다. 확증편향이라고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보공급자(언론, 교사 등) 아무리 노력해도 중립적인 정보를 전달하기 어렵다. 정보는 수요자(시민, 학생 등)가 어떻게 받아드리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정보공급자는 중립과 객관을 지켜야
하는 것은 맞다. 그렇지만 그것 또한 정보와 지식의 한계로 인해 불가능에
가깝다. 다시 한번 사건을 주사위 면으로 바꿔보자. 정보공급자 입장에서 바라볼 때, 모든 면을 보더라도 본 것이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다. 또한 그 모든 것이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건이 사실 6면 주사위가 아닌 12면 주사위일지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전달하지 못한 6면으로 인해 사건의 방향성이 완전 달라지는 것을
종종 목격했을 것이다. (사건의 예시는 특별히 들지는 않겠다.) 선악이 바뀌고 옳고 그름이 바뀌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바뀌기도 한다. 설령 ‘현재’ 모든 면을 보더라도 ‘미래’엔 어떻게 달라질지 모른다. 지식은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보와 지식의 한계는 정보공급자의 절대중립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다만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소개할 본질을 보는 방법으로
본 본질이 반드시 정답이라는 보장은 없다. 더구나 이 세상엔 뛰어난 이들이 무수히 많다. 이 글을 보는 여러분들도 뛰어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여러분들에게 나의 방법이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 동안 써왔던 나의 글에 담긴 생각이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된 적이 있었다면, 그 생각에 도달할 수 있었던 방법 또한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런 소박한 희망을 안고 나의 경험과 그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방법에 대해 작성하겠다. 아무래도 나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방법이기 때문에 나의 이야기가 많이 나올 예정이다. 그 점 감안해주었으면 좋겠다.
방법을 소개하기 앞서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은
확고한 ‘목적’이다. 가치관, 편견, 손익 등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시각에서 중립과 객관을
통해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다양한 것을 버리거나 받아드려야 한다. 그것은 어쩌면 사람에게 괴로운 일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사실조차 괴롭기 때문에 받아드릴 수 없어 적당한 자기합리화로 외면하곤 만다. 그렇게 때문에 그걸 견뎌낼 이유가 되어줄 ‘목적’이 먼저 필요한 것이다.
그 목적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나 같은 경우엔 단순히 가상세계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방법을 떠올리다가 그 목적을 발견했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좋지 못한 커뮤니티 여론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가, 등을 생각했다. 그 결과 본질을 보고 정론을 기반으로 둬야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본질을 보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몹시 즐거웠다. 인터넷 커뮤니티다 보니 상대방을 몰라 선입견이나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상대방 의견만 바라볼 수 있었다. 물론 유추할 수 있는 방법(커뮤니티 성향이나 연령대 등)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현실보다는 나았다. 유저들의 의견들을 종합하고, 각각의 시선을 살펴보고, 방향과 흐름을 관찰한다. 그런 상황을 하나의 사건으로 바라봐 그 사건의 본질을
보고, 내가 생각하는 바를 정리해 작성한다. 그렇게 하면 대게 여론의 흐름이 바뀌었다. 나의 의견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가슴이
뛰는 일이었다. 그렇게 즐겁기 때문에 시작했고, 현재는 필요도 하기 때문에 유지하고 있다.
이렇듯, 별로 대단찮은 목적이라도 분명하게 준비해야 본질을
볼 때 생기는 괴로움을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방법은 시기에 따라 순서대로 세가지 방법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당연함을 버리는 것이고 둘째는 특별함을 버리는
것이며 셋째는 현상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우선 첫째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첫째, 당연함을 버리는 것
내가 당연함을 버렸다고 추측되는 시기는 자기자신을
믿지 못하겠다고 생각했을 때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나는 부모, 학교, 종교의 가르침과 실제 세상과의 불일치로 인해 내적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어른들을 믿지 못하고 반항하기도 했다. 그럴듯한 표현을 하긴 했지만 그냥 어린애의 흔한 반항기였다. 그런 와중에 한 교사가 공개된 식당에서 싫어하는
음식을 강요하여 먹일 때, 그 강요가 싫어 내뱉었다가 주위 아이들에게 한동안 고립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런 사과도 없었고 오히려 이상한 아이로 취급 받았던 게 아닐까 싶다. 슬프게도.
그렇게 중학생이 되어 점점 내적 갈등과 어른에 대한
불신이 심해지고 있었을 무렵,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 자체는 그리 특별하지 않다. (시기는 불명확하다.) 어린 동생이 내 나이 또래에게 협박당해 돈을 갈취 당한 사건이다. 사건은 어른들의 손에 넘어가 경찰과 보호자들이 만나 해결되었다. 그 나이 대 아이가 그렇듯, 나는 동생에 대한 책임감과 가해자에 대한 분노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한 상점 앞에서 그 가해자와 마주쳤다. 싸움이야 아이일 때 종종 했었다지만, 머리에 열이 올라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나갔던 적은 그 때가 처음이자 현재까지는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치고 박고 싸우고 있을 때 상점 주인이 나와 중재를 했다. 그리고 평범하게 설교를 시작했다. 뻔하디 뻔한 재미없는 설교였다. 어처구니 없게도 싸움과 관련이 없었던 자기자식 자랑에
들어갔다는 것까지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지금 생각해보면, ‘훌륭한 자식을 길렀으니 자신 또한 훌륭한 어른이다. 그러니 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따위의 생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아니면 뭐 그냥 자랑하고 싶어서 그랬다던가. 어쨌든 그런 재미없는 설교 앞에 나는 무력했다. 어째서? 그 당시 나는 나의 분노가 정당하고 싸움 또한 나의
권리이지 의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어른에게 대들었어야 했다. 분노하고 화를 내며 감정표출을 했어야 했다. 얘는 내 적이라고 이야기 했어야 했다! 그러나 나의 몸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목구멍에서 말이 빠져 나오지 않았다. 말을 못해 감정표현을 웃고 우는 것으로 하는 아기처럼, 말이 나오지 않자 분노와 절망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 끝에 엉엉 울어버렸다. 엉엉 우는 나를 보고 그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자신의 훌륭한 설교로 반성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하, 그 당시의 감정이 아직까지도 또렷하게 남아있는 이유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너무 컸기
때문이리라. ‘어른을 공경할 것’ 그것이 나를 가로막은 주입식 교육의 효과였다. 그 때문에 나는 어른들에게 소극적 반항은 할 수
있었어도, 적극적으로 반항할 수는 없었다. 어른을 공경하라는 교육과 현실 속의 한심한 어른들의
차이로 인해 갈등을 겪고 있었던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어른과 어른이 가르치는 교육에 대한 신뢰를 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나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실망으로 인한 불신으로 피폐해지고 있던 마음은 기댈
곳을 찾게 되었다. 그것이 종교에서 배운 운명이었다. 이 세상은 신이 정한대로 움직인다. 뭐 그런 것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수년간 다녔던 그곳에서 배운 것들은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학교 올라갈 때 바쁘다는 핑계로 가지 않게 되었다. (어떤 핑계였는지는 사실 잘 기억 안 난다) 다만 내 성격을 고려할 때, 내가 납득할 수 있었다면 그 종교의 독실한 신자가
되었으리라. 그렇게 납득할 수 없어서 가지 않게 되었지만 운명은
반박할 수 있는 논리를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시간여행이니 타임패러독스니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헷갈리고 있었다. 그렇게 어른들을 믿지 못하고 자기자신조차 믿지 못하고 있을 때 ‘모든 게 정해져 있다면 어떻게든 되겠지’ 라며 자포자기하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세 가지로 나눠서 이야기 할 수 있겠다.
불신. 어른과 어른이 가르치는 교육에 대한 불신으로 내가 자각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반발하고
있었다. 보통 이런 반항기는 자기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수용하지만 나는 나조차 믿지 못했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을 의문시했다. 아주 당연한 것조차 한번쯤은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 이유는 유치한 반항심리였지만 어쨌든, 그렇게 하여 나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물론 내가 자각하고 있는 것만. 당연하다 여기는 것을 자각하고 있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이를 먹고 어른들을 이해했을 무렵에 반항기는 점점
사라지게 되었지만, 자기자신에 대한 불신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이 습관만은 남아 수많은 생각을 하여 사고의 영역이 조금씩 넓어지고 있었다.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진지하다라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운명. 처음에는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편해졌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답답해져 갔다. 모든 것이 정해진 거라면 도대체 나의 의지와 행동은 무슨 의미가 있나, 왜 나는 살고 있는가, 등 어린아이의 유치한 고민은 끝도 없이 이어졌지만 도저히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답을 찾기 위해 이상한 짓을 많이 해봤지만 세상의 눈만 싸늘해져 갈 뿐이었다. 답을 찾지 못해 결국 기대게 된 이 생각은 결정적으로 나의 의욕을 꺾어버렸다. 모든 것에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극복하려고 마음을 먹어도 이 세상에 어른이 없는 곳은 없었다. 어른을 보면 나의 무력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주눅이 들었다. 그리고 자기불신으로 인한 자기혐오로 마음이 꺾어버렸고 자연스럽게 다시금 운명에 기대게 되었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며 자포자기 한 나는 그렇게 미래를 포기하게 되었다. 어디에서나 그렇듯, 학교에서 안 좋은 의미로 튀는 아이는 표적이 되곤 한다. 그걸 알았기 때문에 적당히 남의 흉내를 내며 살았다. 그것은 편안한 일이었다. 물론 그 흉내는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 이상한 아이라는 이야기는 듣게 되었지만 어쨌든 그럭저럭 보통으로 보내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적당히 살아도 레일에 탑승해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별다른 문제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가다 종착역에 도달할 때쯤 내 주변에 있던 비슷한 나이 대 이성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의 대한 의미를 찾지 못해 절망한 나는 삶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 사람은 그렇게 죽는 것이 운명이었나 도대체 그 사람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었나, 절망에 빠져 그 이후 한동안 망가진 채 살아가게 된다. 이 당시 모든 인간관계가 끝을 맺었지만 놀라운 우연으로(그 당시엔 운명이라 생각될 정도로) 인해 생각지 못했던 장소에서 마주친 사람과 그 그룹, 딱 하나의 인간관계만 남게 되었다. 제멋대로인 나와 어울려주었었던 사람들과 다시 한번 어울려준 그들과 곁에서 지켜봐 준 가족에겐 고맙고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가상세계. 어른에 대한 불신, 나에 대한 불신, 운명에 기대는 것 그 전부가 대등하지 못했던 사회로
인해 발생했던 것이었다. 상대를 모르기 때문에 대등했던 가상세계인 인터넷에 빠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이런 도피 행각으로 마음은 편해졌지만 상하관계에 따라 상대하는 방법이 다른 현실에서의
적응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남을 흉내내면서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지만 무의식적으로 종종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다. 어차피 남의 흉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어른을 믿지 못했었기 때문에 기댈 어른도 없었고, 나를 믿지 못했었기 때문에 자기합리화도 할 수 없었다. 운명도 더 이상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 줄 수 없었다. 나의 마음의 안식처는 대등한 사람들이나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되는 게임, 만화, 소설 등. 그리고 가상세계인 인터넷뿐이었다. 그 중 정말 마음이 편안했던 곳은 인터넷이었다. 아무래도 흉내를 내며 살아가던 현실은 아무리 대등하더라도
마음 한편은 답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인터넷에 더욱 빠지게 되었다. 그 결과, 현실의 상하관계와 가상의 대등함의 괴리로 인해 점점
나의 내부는 분리되고 있었다. 어느 정도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가상과 달리 현실은 호의와 적의조차 제대로 마주볼 수 없었다.
나는 약하고 어리석었다. 내가 당연함을 버리게 된 것은 그저 세상에 대한
유치한 반항심리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원인이 뭐가 되었든 나는 그렇게 당연함을 버리게 되었고, 본질을 볼 수 있는 최초 기반이 마련되었다. 내 생각에 의문을 품고 내 행동에 의문을 품고 내가 배우는 것에 의문을 품었다. 내 경험에 의문을 품고 다른 사람의 경험에 의문을
품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실습 온 교생에게 ‘왜 교사가 되려고 하세요?’ 라고 물어본다거나 말이다. 이 외에 모든 것에 의문을 품었다. 물론 그럴듯한 표현을 쓰긴 했지만 실상은 사실 많이
유치하고 어리석은 시행착오를 반복했다. 실수도 많이 하고 실패도 많이 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나는 당연함을 버리게 되었다.
둘째, 특별함을 버리는 것
주변 인물의 죽음으로 한동안 틀어박혀 망가진 채
살아가다 어쨌든 살아있으니까 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죽는 것도 용서할 수 없었다. 그것조차 운명으로 정해진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자 반발하게 되었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의미를 찾지 못했다. 그래도 어쨌든 살아있으니까 살아보고자 결심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내가 살아갈 이유를 찾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어떻게든 되겠지’ 라고 자신을 다독이며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만 있어보자고 마음을 먹게 된다. 운명에 반발하면서 운명에 기대는 모순적인 행동이 나타났지만, 어쨌든 사는 것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바로 생존이다.
몸과 마음이 망가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교류가
어려웠다. 특히 상하관계가 어려웠는데, 나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사람에게 무의식적으로 대등한
친구처럼 대했다가 깜짝 놀라 자기자신의 스위치를 만들게 되었다. 일부로 말투를 딱딱하게 하여 상하관계에 적응하려고 애썼다. 그러지 않으면 다시 또 실수할 것 같았다. 아마 그 당시 주변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겠지만, 나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불신과 절망의 어린 시절을 경험했던 곳에서 벗어나자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천천히- 천천히- 어째서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가 금방 치유 될 거라
생각하는 걸까..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노는 것에 집중했다. 생계에 필요한 일은 최선을 다했지만 그 외엔 전부 놀았다. 생존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유치하고 치사한 방법도 사용했었다. 솔직하게 말한다는 변명아래 내 불행함을 어필하면
불쌍히 여기거나 역겨워하며 멀어져 갔다. 그렇게 해서 나는 스트레스를 주는 인간관계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지금에야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다른 방도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만약 이런 나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진심으로
대하자고. 그래서 몇 명의 사람들에겐 어느 정도 마음을 열기도
했었다. 물론 그 이상의 관계는 진전되지 않았다. 내가 날 믿지 못하고 싫어하는데 어떻게 내게 그런
자격이 있겠는가? 그런 자신이 비참해져 술김에 엉엉 울어버린 적이
있는데, 그게 너무 부끄러워 술을 끊게 되었다. (이건 좀 나중에 일이다) 애초에 나의 의지에 간섭하던 알코올은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렵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렇게 나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면서 어느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 게임을 즐기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정책에 반발하기
위해 한 게임 커뮤니티 게시판에 글을 쓰게 되었다. 그것이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된 계기였다. 그 계기는 단순했지만, 한번 나의 생각을 표출하기 시작하자 강물이 범람하듯 생각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주로 나의 경험으로 나타난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교육을 거부하고 게임과 만화와 책을 읽으며 사고영역을 넓혀왔기 때문에
글은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즐거웠다. 그리고 그렇게 쓰면서 나의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연한 것을 버리고 본질을 생각해 작성했기 때문에 조금 이상한 편이었고, 그 결과 반발을 사게 되었다. 그 당시 게임 커뮤니티 게시판은 휴대폰 인증을 하지
않으면 댓글을 달 수 없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아마도 악플이 많았기 때문에 그랬으리라. 이 때 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된다. 글은 쓸 수 있는데 댓글을 달 수 없다는 사실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어처구니 없어 보이지만, 정말로 그랬다. ‘뭐 별 수 없지’ 라며 댓글을 달지 않고 계속 써나가니 이 게시물 작성자는 댓글을 보지도 않는 게 분명하다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글을 쓸 때 ‘휴대폰 인증하지 않아 댓글을 달 수 없습니다.’ 라고 썼지만 사실상 이해를 구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럼 인증하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게 뻔했다. 그래서 이해를 구하는 것을 포기했다. 어떻게 운명에 대해 설명하겠는가 하하.. 그렇게 취미로 틈틈이 쓰게 되었고, 쓰게 된 원동력은 넘쳐나는 생각과 더불어 게시판
자체가 그리 수준이 높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 두줄 쓰고 글이 올라오는 경우도 많았다) ‘뭐 괜찮겠지’ 라고 생각했다. 내 대응이 어처구니 없다는 것을 알았었기 때문에 어떤 반응이라도 읽어만 주면 고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매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했다. 처음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 또한 왜 그런 반응이 나타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
되었다. 그게 촉매가 되어 나중에는 ‘역할존중’이란 생각까지 닿게 되었다. 어쨌든, 그렇게 쓰다가 부정적인 반응에 지쳐 ‘도대체 뭐 하러 이걸 쓰는 거지’, 라며 회의감이 들었다. 그래서 ‘애정의 뿌리’ 편을 쓰고 그만 쓰기로 결심했다.
‘뭐 어쩔 수 없지’, 라고 자신을 다독이며 넘어 갈려다가 eSports(게임) 대회 경기에서 좋아하는 팀의 부진을 보자 뭐라도 쓰고 싶어졌다. 믿기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그냥 그 때문에 다시 쓰게 되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아무거나 쓰자, 그리고 쪽지로 항의가 오면 미련 없이 그만두자. 정말로 게임과 관계없어 보이는 것까지 다 엮어가며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종의 광기에 가까웠다. 소재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애초에 쓰고 싶어지면 쓰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게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이 소재가 되어주었다. 한 때는 새로운 생각이 담긴 책을 수 페이지 읽다가 생각하고, 수 페이지 읽다가 생각하는 것을 반복하다 집어 던지고
하루 종일 생각에 빠진 적도 있었다.
사실 선후가 헷갈리긴 하는데, 이쯤에서 나는 특별함을 버리게 되는 글을 쓰게 되었다. 바로 선과 악에 대해 생각하고 쓸 때였다. 선과 악의 본질을 보려고 하다 보니 내게 있던 특별함을
하나씩 벗겨내기 시작했다. 선과 악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람은 동물이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 외엔 다른 동물들과 별차이가 없다, 문명이 없는 동물의 선은 그들의 생존과 번영이다, 동물과 사람이 별 차이가 없다면 사람의 선 또한 생존과 번영이다, 뭐 이런 식의 사고전개가 이루어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 내가 특별함을 버렸던 것은 사람은 동물이라는 생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렇게 한번 특별함을 버리자 다양한 것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아, 사람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람이니까 사람이
특별한 것이구나’ 이 생각은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었다. ‘내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니까 특별한 것이구나’ ‘우리나라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우리나라에 속해있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구나’ 등등.
이런 특별함을 버리는 것은 영혼의 존재도 부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전까지도 과학적 증명이 없어 모순이 많았던 그
존재는 자신의 특별함을 버리게 되자 확실하게 부정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과 동물이 지구의 입장에선 아무런 차이가 없고, 과거의 고대 생명체들과도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면 그 모든 것에 영혼이 존재했어야 했다. 그러나 종교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사람만을 특별하게(또는 현시대의 동물) 여기는 종교의 가르침은 특별함을 버린 내겐 큰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존재를 믿고 있었고, 굳이 번거롭게 그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더구나 나는 게임과 만화와 소설 등의 이야기를 몹시
좋아하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 속에서 영혼의 존재는 종종 필수불가결했다. 그러니 부정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무의식’편을 쓰기 전까지의 나는 운명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의욕이 없었던 내겐 영혼의 존재는 있든 말든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영혼의 존재가 없다는
전제하에 생각해야만 했다. 그것은 현실에서 과학적 증명이 된 적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한은 없었다)
그렇게 특별함을 버리자 다양한 것을 다시 보게 되었고, 나의 사고의 영역은 좀 더 넓어지게 되었다. 그 이후 나의 생각은 좀 더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나의 글이 반응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현실의 나는 가진 게 없었다. 그렇다면 나의 글은 현실의 나 때문에 격하될 것이
분명했다. 본질을 보려 애쓰던 내가 그런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아예 반응을 신경 쓰지 않는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투명하게.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때쯤에 읽어만 주면 고맙다는 의미가 현재의 의미를 띠게 되었다. 읽고 스스로 생각만 할 수 있다면 그거로 만족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이런 것은 어디까지나 가상의 이야기였다. 그 당시까지도 나는 나를 믿지 못하고 좋아할 수가
없었다. 현실에선 호의도 적의도 마주볼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운명에 기대었기 때문에 운명의 존재여부를
반박하기 위해 이상한 짓도 많이 하게 되었다. 수많은 생각은 더 많은 내적 갈등과 혼란을 가져다 주었고, 더더욱 현실을 외면하게 되었다.
셋째, 현상을 받아드리는 것
아무거나 쓰던 나의 마지막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드디어 게임 커뮤니티 운영자의 경고 쪽지를 받게
되었다. 거기에 현실에서의 생활 또한 변화하기 시작했다. 마침 현실과 가상이 둘 다 끝을 맺어야 할 타이밍이
오자 운명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아무런 태도를 취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운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물론 어리석은 생각이었지만 당시엔 어쩔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의 트라우마나 마찬가지였다. 당시를 후회하는 것은 제대로 된 인사를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그냥 떠나버린 것에 대한 사과도 제대로 못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마주볼 면목도 없다는 점이었다. 그런 행동은 날 지켜봐 준 사람들에게 예가 아니었다. 지금도 어떻게 마주봐야 할지 모르겠다. 슬프게도.
그렇게 평범했던 생활을 마치고 제멋대로 살기 시작했다. 이것도 운명이겠거니 생각하며 자포자기를 했다. 그러다 불현듯 인공지능에 대해 쓰고 싶어졌고(어디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나도 잘 기억이 안 난다.) ‘인공지능’편을 쓰고 나서 자아에 대해 알아보다가 ‘자유의지에 관한 Libet의 실험’을 다룬 한 영상을 접하고 나서 내 삶을 지배해왔던
운명과 나의 대한 불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엔 미치는지 알았다.
처음엔 별로 심각하게 받아드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재미있다고만 생각했다. 사람의 의식적 의도조차 무의식적인 뇌활동으로 일어난다는
그 생각은 놀라웠고 신기했다. 새로운 정보를 접한 나는 자연스럽게 생각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사고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실험이 맞는다고 가정한다. 그런데 아직 그 실험에 대해 명확하게 나온 답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해봐도 괜찮을 것이다. (물론 답이 있다고 해도 생각했을 것이다) 자, 그럼 답은 무엇인가?
영상에선 버튼으로 비유를 했었는데, 그걸 보니 내가 얼마나 많은 버튼을 눌러 왔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무의식과 의식, 자유의지 등 생각해왔던 것들이 퍼즐이 맞춰지듯 하나의
답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를 떠올릴 수 있었다. ‘사람의 뇌는 사람이 의식적 의도를 행하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몸에서 요구하는 욕구와 오감으로 수집하는 정보와 뇌에 저장된 패턴을 가지고 자동적으로 계산하여 사람의 의도를 예측하며, 그 예측(갑자기 떠오르는 발상이나 잡념, 충동 등)에 그것에 기대면 무의식적 뇌활동에 의해 움직이게
되어있다’ 라는 발상까지 도달했다. 당연함을 버렸기 때문에 나의 행동을 내 의지가 결정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물론 과거의 경험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특별함을 버렸기 때문에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맞는지 아닌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다만 나는 내가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내가 그것을 받아드렸다. 그 당시 어른에게 아무런 말대꾸조차 못했던 것에
대한 이유를 아는 것으로 스스로를 이해하여 자기자신을 용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기대게 되었던 운명 또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니 그것은 자기본위적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나는 운명과 불신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그리고 현상을 받아드리게 되었다. 사람의 행동원리를 알 수 있게 되자 사고의 영역이
크게 확장되어 이 세상 모든 현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 전까지는 뒷담화를 싫어해서 그걸 마주보지 않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흉내 내며 거짓된 삶을 살아왔던 나는
거짓을 싫어하고 있었고, 뒷담화는 그런 거짓을 만들어내는 원흉 중 하나로 받아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마주보고 현상을 받아드렸더니 그 필요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뒷담화를 하는 것이라면, 그 현상에 대한 이유는 반드시 있었다. 그 외에도 이 세상 모든 현상에 대한 이유를 찾게
되었다.
그 동안 거부했던 많은 현상들을 살펴보고 그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사람의 바른 부분과 바르지 못한 부분들을 전부 받아드리게
되었다. 현상이 있다는 것은 그에 대한 마땅한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어렴풋이 생각했던 다양한 것들이 현상을 받아드리면서
구체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현상을 받아드릴수록 나의 사고영역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 뿐이었다. 그런다고 해서 내 삶이 딱히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비참했다. 아파서 끙끙대느라 한파 때 수도꼭지를 약하게 열어
물을 조금씩 흘려 내린다는 것을 깜빡 잊는 적이 있었다. 그 바람에 보일러가 꽁꽁 얼기도 했다. 한겨울에 보일러를 쓸 수 없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고장에 대한 걱정 때문에 마음이 몹시 심란했었다. 다행히 고장은 아니었다.
운명과 불신에서 벗어나자 미래를 생각하게 되었다. 도대체 나는 뭘 하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얼마 없는데.. 그리고 지식에 대한 욕구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eBook에서 책을 구매해 평소 읽지 않았던 다양한 것을
읽기 시작했다. 어려웠지만 재미있었다. 동시에 과거에 대한 후회도 했지만 당시에는 별 수
없었다며 자신을 다독일 수 밖에 없었다. 쓰면서 생각하는 건데 진짜 어쩌지.. 이럴 때가 아니긴 한데.. 글로 먹고 살고 싶긴 하지만 가능할까.. 그게 안 된다면 뭘 해야 하는 걸까.. 뭘 할 수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드는 현재까지. 지금까지가 나의 경험을 토대로 한 본질을 보는 방법이다. (나에 대한 이야기는 본질을 보는 법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빠진 부분이 많아 이해가 안 되는 구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감안해주길 바라겠다)
나는 불신으로 인한 반항으로 당연함을 버렸고, 글을 쓰면서 필요로 의해 특별함을 버렸고, 사람의 행동원리를 알게 되자 현상을 받아드리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의 본질을 보려고 하고 있다. 이런 것이 여러분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런 시각으로 글을 써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쓸 예정이며, 이후 또 다른 방법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그 동안 써왔던 내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나의 방법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아니, 되었으면 좋겠다. 긴 글 읽어줘서 고맙고, 지금까지 지켜봐 준 사람과 앞으로 지켜봐 줄 사람이 있다면 그에 대한 감정,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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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4월 06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