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정보
세상은 변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후천적 언어와 문자를 통해 문명을 이룩한 동물인 인류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가르침으로서 우리의 문명은 발전해왔지만 우리의 유전자는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렇게 물어볼지도 모른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인간의 평균 수명이 늘어났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활환경 개선 등을 통해 유전적으로 가능한 수명에 도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네이처’에 실린 논문에 의하면 인간의 수명은 보통 115세가 한계라고 한다. 그러한 주장에 맞서 150세가 한계라고 하거나, 애초에 수명의 한계가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제껏 인류가 살아온 흔적을 보면 보통은 115세가 맞긴 했다. 모든 본질은 세상에 나타나는 현상을 제쳐두고 볼 수 없는 법이다. 그런 관점에서 수명이 아무리 늘어난다 하더라도 120세에서 150세가 한계일 것이다. 만약 수명에 한계가 없다면 장수하는 인간의 수명이 비슷할 리가 없다. 우리가 수명의 한계를 넘기 위해서는 변하지 않는 유전자를 변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즉, 유전자 변형을 통한 진화다.
이렇게 기술이 발전해도 유전자는 바뀌지 않아 수명은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발전하는 문명과 변하지 않는 유전자의 괴리는 우리
사회 속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문명은 달에 갈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지만, 사람의 마음은 달에 토끼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세상에, 믿을 수 있는가? 우리는 수천 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에 매료될 수 있다. 만약 과거의 인물이 현대에 온다면 그들 또한 우리의 이야기에 어렵지 않게 매료될 것이다. (학습을 통해 자아가 발달된 현생 인류는 어떤 언어라도
배울 수 있고, 어느 시대에도 적응할 수 있다.)
이러한 가변과 불변의 괴리는 정보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기술의 발달로 인해 정보의 형태는 바뀌었지만 사람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보의 활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까지 정보는 보통 수직적으로 전달되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가르치는 형태였다. 때로 현명한 사람은 아랫사람에게도 가르침을 청하곤 했지만 일반적으로 그 구조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세상의 수많은 물줄기(자료)들이 바다로 모여 구름(정보)을 형성하면 태풍이 되어 육지에 빗물(가르침)을 퍼부었다. 그 빗물들은 다시금 물줄기로 변해 바다로 모여 구름을 형성하게 된다. 그런 과정 속에서 땅(아랫사람)은 빗물을 내려주는 하늘을 우러러 볼 수 밖에 없었다. 그 구조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은 채 이어져 내려왔다가 익명의 상호작용이 가능한 인터넷의
등장으로 급격하게 바뀌게 되었다. 일방적으로 빗물을 받던 땅에서 물이 솟아올라 하늘에 닿는 세상이 되었다. 익명인 가상세계에선 어린이가 어른을 가르치고(곤충을 관찰한 어린이는 그것에 관심 없는 어른보다
곤충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배우기도 한다. 익명이라 상대가 누군지 모르니까 그게 가능하다. 그것을 가리켜 천지가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정보의 형태는 천지가 바뀌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바뀌었지만, 정보의 활용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보를 활용하는 사람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해를 돕기 위해 인간의 본성과 행동원리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보겠다.
첫째, 인간의 본성은 우열을 가리고 싶어하는 동물과 큰 차이가 없다.
인간은 동물이니까 말이다. 분명한 사실조차 받아드리기 괴로워 본질을 보지 못하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 우리 사회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이러한 우열을 가리고 싶어하는 본성으로 나타난 ‘윗사람을 존중하고 아랫사람을 천대하는 상하존중’이었다. 이것이 왕을 만들고, 이것이 귀족을 만들고, 이것이 노예를(아테네 민주주의에서조차)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상하존중이 현대의 평등한 사회와 부딪치며 다양한 문제를 야기했다. 이것 또한 발전하는 문명과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의 괴리로 일어난 문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열을 가리고 싶어하는 본성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니 우리는 위아래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우열을 가려야 한다. 그것이 위아래 관계없이 ‘역할수행여부로 존중을 주는 역할존중’이다. 그래야 평등한 사회와 인간의 본성이 어우러질 수 있다고 본다. 그에 관해서는 차후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다. 이렇듯 우리는 우열을 가리고 싶어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정보 또한 우열을 가리고 있다.
둘째, 인간의 행동원리 또한 뇌를 가진 동물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많은 과학자들이 지적하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기능이 차이가 아닌 지능의 차이다. 물론 지능에 따라 그 기능도 약간씩 차이 날 수는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같다. 파블로프의 개를 생각해보자.) 뇌가 있는 동물은 뇌가 자동적으로 기억(본능과 학습), 욕구, 오감을 계산하여 동물의 행동을 예측하는데, 그러한 예측을 보통 자신의 마음으로 생각하여 그걸 그대로 받아드린다. 그 바람에 사람들은 선입견이나 편견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한 철학자가 말하길, 학력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동일한 말을 하는데
청중은 다르게 받아드린다며 한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열을 가리는 본성과 그런 본성을 바탕으로 뇌가 자동적으로 계산하여 나타난 선입견이나 편견 때문에 그랬던 것이니 온전하게
그들의 의지라고는 할 수 없다. 그들을 탓하기보다는 우열을 가리는 기준을 바꾸거나 인간의 행동원리를 알려주어 자유의지를 통해 그것에 저항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렇듯 우리는 정보를 온전하게 받아드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인간의 본성과 행동원리로 인해 정보의 형태가
천지가 바뀌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바뀌어도 그 정보의 활용은 그전과 비슷했던 것이다.
우리시대는 기술의 발달로 정보의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게 되었다.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다. 이런 형태에 따라 정보의 활용도 약간씩 달라지는데 우선 현실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한다. 다들 알다시피 현실에서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상에 영향을 받다 보니 조금씩 달라지고 있긴 하지만 본질은 같다. 정보의 우열을 나누고, 그 기준이 선입견이나 편견이 되어 정보를 온전하게 받아드리지 않고 있다. 과거와 동일하게 높은 것을 먼저 존중하고 받아드리고 낮은 것을 천대하고 거부한다. 권위나, 지위, 학력, 나이 등을 기준으로 우열을 나누는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다. 요즘 아이들은 어른들의 의견(정보)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 어른의 권위가 실추되어 낮아졌기 때문이지, 위아래로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것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위아래로 정보를 취사선택하여 활용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물어볼지도 모른다. 대답하겠다. 중요하니까 또 얘기한다. 그런 기준으로 나누어 보게 되면 정보를 온전하게 받아드릴 수 없다. 어떤 사건을 주사위로 바꿔 바라보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모든 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몇몇의 면만 보게 된다. 또한 그렇게 높은 것에만 기대게 되면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이 기대게 되고 만다. 사람이 맹목적이게 된단 말이다! 어떤 높은 자의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 되도록(가능하면 반드시) 한번은, 그 어떤 것이라도 한번은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가상에선 어떻게 정보가 활용되고 있는 걸까? 놀랍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방식이 약간 달라졌을 뿐이다. 기본적으로 실명이나 현실세계를 기준으로 한 정보 출처의 경우엔 현실과 거의 다를 바 없이 활용된다. 같은 말이라도 권위나 지위 등이 높은 정보를 받아드리기 마련이다. 정보 자체를 스스로 생각해 판단하지 않고 그냥 주어 삼킨다. ‘높은 사람이 한 말이니 맞겠지’ 하고 말이다. 익명에서는 조금 다르게 전개되는데, 위아래로 우열을 가리는 것은 동일하다. 익명일 경우엔 특정한 사람의 권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다수의 의견에 휩쓸린다. ‘많은 사람이 맞는다고 하니 맞겠지’ 하고 말이다. 이 경우엔 다수가 높고 소수가 낮다고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친목이 권장되는 커뮤니티는 그런 것이 더 심할 때가 있는데, 친목의 중심이 되는 사람의 주장은 아무런 생각 없이 그대로 받아 드려진다. 이 경우엔 중심이 되는 사람이 높고 외부인이 낮다고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외 다양한 문제들로 인해 많은 커뮤니티는 친목을 권장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저런 문제가 있음에도 사실 현실보다는 가상이 낫다. 왜냐하면 가상에선 익명일 수가 있어 자신만의 의견을 개진하거나 소수의 의견에 찬성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소수의 의견이 다수에게 몰려 핍박당해도 현실에서 당하는 그것보다는 훨씬 낫다. 정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정도의 의견이나 욕설 따위가 아니라면 한 번쯤은 소수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나타나게 된다. 누구 의견인지 모르니까 말이다. 이렇게 낫긴 하지만 가상과 현실의 차이는 이것 정도뿐이다. 상대를 모르기 때문에 의견을 개진하거나 소수의 의견에 찬성하기가 현실보다 ‘쉬울’ 뿐이지, 일반적인 정보의 활용은 별반 차이가 없다.
정보의 출처에 따라 우열을 가리는 현상을 보면 보다 더 쉽게 이해가 가능하다. ‘똑같은’ 정보라고 하더라도 익명이 작성한 위키와 전문가의
의견은 다르게 받아드린다. 심지어 전문가의 출처를 달아도 그렇게 받아드린다. 그게 뭐가 문제라고 묻는다면 다시 말해주겠다. 그것은 정보를 정보자체로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라, 위아래로 우열을 가려 선입견이나 편견을 통해 정보를 받아드리는 것이다. 그 때문에 생기는 문제도 다시 말해주겠다. 그렇게 정보를 받아드리게 되면 정보를 온전하게 받아드릴 수 없을뿐더러, 높은 것에만 기대게 되어 스스로 생각할 수 없게
된다. 맹목적이게 된다.
현실의 세계에 있는 맹목적인 집단들은 이미 알고 있을 테니 굳이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가상의 세계에서도 맹목적인 집단들이 있는데 쉽게 접할 수 있는 부류들이 흔히 말하는 성별우월주의자들이다. 커뮤니티 중심인물의 의견이라고, 다수의 의견이라고, 아무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그 의견을 받아드려 그것과 동화되었다. 그리고는 옳고 그름도 생각하지 않고 똑같이 행동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커뮤니티 내 지위상승을 위해 보다 더 과격한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수면 위로 올라와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만약 그들이 스스로 생각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했었더라면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본 교육을 충실하게 받아왔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우수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보다 문맹자가 적은 나라도 그리 많지 않다. 뭐 우스개 소리로 언어가 같다고 말이 통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들 하지만, 현실적으로 똑똑한 사람이 많은 나라일수록 잘 굴러가는 것은 확실하다. 베네수엘라의 몰락을 보면 더 쉽게 받아드릴 수 있을
것이다. 풍부한 자원으로 교육을 방치한 나라는 자원의 가치가
낮아지면 그렇게 되게 되어있다.
맹목적으로 받아드리는 사람 중에서 어쩌면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고 여길지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한다.’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하겠다. 스스로 생각한다라는 것은 어떤 정보를 접했을 때, 그 정보를 다양한 방법으로 고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뢰도를 고려하고, 옳고 그름을 따져보고, 공익과 사익을 따져보고,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지 생각해보고, 그것이 목적인지 수단인지 생각해보고, 논리적인지 생각해보고, 필요와 불필요를 생각해보고, 가능과 불가능을 생각해보고, 감성과 이성을 생각해보고, 형평성에 대해 생각해보고,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특별하게 여기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시점을 달리 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해보고, 다른 이들의 시각에서 관찰해보고, 다른 이들의 다양한 생각들을 차별 없이 관찰해보고, 그 정보가 실제 현상이 나타나는지 알아보고, 과거의 비슷한 정보를 관찰하여 그 흐름을 파악하여 미래를 예측해보고, 교차검증을 해보고, 자신의 자연스러운 선입견이나 편견에 순응하는지 스스로를 성찰해보는 것 등을 가리켜 스스로 생각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본질을 보는 것과 일맥상통하다 할 수 있다. 이렇게 스스로 생각하여 자신의 가치관이나 손익 등을 고려해 그 정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정하면 된다. 너무 많은 것이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의사소통을 할 때 생각해보면 그건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의사소통을 할 때, 거기에 쓰이는 모든 단어와 문법을 의식적으로 기억하여 말하지 않는다. 어떤 의사를 전달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게 되면 뇌가 알아서 계산하여 그에 해당되는 단어나 문장을 알려주는데, 그게 적절하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말하면 되는 것이고, 아니면 한번 더 생각해 다른 것을 떠올려보면 된다.
그렇게 의사소통을 할 때처럼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알고 난 뒤엔 스스로 생각하겠다는 의지만 갖고 있으면 뇌가 알아서 계산하여 그 정보가 어떤지에 대해 알려준다. 예컨대, ‘오늘 대기오염이 심각하다.’라는 정보를 받아드리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을 것이다. ‘미세먼지가 많겠군’, ‘오늘 갈 때 마스크를 써야겠군’, ‘뭐 때문에 심각한 걸까?’ 등등 떠오르게 된다. 이렇게 뇌가 자동적으로 계산하여 알려주는 것처럼,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에 습관을 들이면 받아드린 정보를 다양한 방법으로 고찰하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모든 것이 다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정보를 받아드리는 순간에 다양한 것이 떠오르면서 여러 가지가 판단된다. 그러나 그걸로는 부족할 때가 많고, 그렇게 떠오른 것이 선입견이나 편견일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판단이 될 때까지 하나하나 다시 생각할 때도 많다.
이렇게 정보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활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정보의 우열은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 물어볼 수도 있다. 대답하겠다. 기본적으로 정보의 우열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을 때엔 위아래로 나누고 있지만, 스스로 생각할 때엔 다양한 기준으로 나누게 된다. 옳고 그름, 가치, 영향력, 정합성 등 아주 다양한 기준으로 나눌 수 있는데, 사람마다 정보의 우열이 다를 수 있으므로 객관적인 지표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틀린’ 정보 조차도 가치 있게 활용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정보의 우열은 스스로 판단하여 나눌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정보 자체가 아닌 정보 출처의 우열은 가릴 수 있다. 우열이라고 하기엔 좀 이상한 표현인데, 적합도에 따른 구분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예컨대 익명이 작성한 위키는 쉽게 정보를 접할 수 있다. 그런 위키를 가지고 논문 수준의 신뢰도와 정확성을 기대하는 것은 인스턴트 식품을 먹으면서 건강을 챙기겠단 말과 비슷하다. 이렇듯, 익명이 작성하는 위키의 역할은 ‘쉽고 빠른 정보’다. 그 역할에 따라 적합도를 따지면 된다. 쉽고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위키에 논문 수준의 어려운 정보는 적합하지 않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정보 자체의 우열은 스스로 정해야 하는 것이지만, 정보 출처에 적합한 정보인지 아닌지는 이렇게 역할에 따라 객관적으로 판단이 가능하다. 그걸 기준으로 하여 각 정보들의 편의성, 신뢰도, 정확성 등의 점수를 매겨 그걸 감안하여 해당 출처의 정보를 받아드리면 된다. 무작정 위아래 우열을 가려 취사선택을 하다 보면 위에서 수 차례 설명한 부작용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정보의 출처는 매우 다양한데, 부모, 교사, 종교, 언론, 어른, 친구, 책, 잡지 등등 그 출처에 적합한 정보인지 판단한다. 그리고 그 출처에 대한 편의성, 신뢰도 정확성 등의 점수를 매기고, 그걸 감안하여 정보를 받아드리면 될 것이다. 예컨대 ‘여기 언론사 정보는 신뢰도가 이 정도니까 이만큼은
감안하고 받아드리자.’ 같이 말이다. 심지어 거짓정보를 유포하는 정보 출처조차 한번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왜 그런 거짓정보를 유포하는가? 그리고 그런 거짓정보를 유포하여 그들이 얻는 이익은 무엇인가?’ 등을 생각하다 보면 그에 맞는 정보를 수집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정보 출처에 따라 감안해야 할 부분을 감안한
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올바른 정보수집이 가능하고, 그 올바른 정보수집에서 올바른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정보활용이야말로 변화하는 문명과 변화하지
않는 유전자를 지낸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정보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앞으로 지식이 늘면 정리하거나 보충하겠다. 그리고 언젠가 이 소재를 가지고 정보 공유에
관한 글을 쓸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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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발상법 중 하나를 공개하자면, 뇌가 알아서 계산해 주는 모양인지 놀고 자다 보면
뭔가가 떠오릅니다. 예를 들어 하나를 생각하고자 결정하면 그에 대해 좀 생각하다가 놀기 시작하죠. 게임도 하고 만화도 보고 독서도 보고 최근에 시작한 운동도 하다가 피곤하면 잡니다. 자던 도중에 갑자기 눈을 떠지더니 발상이 떠오릅니다. 그 떠오른 것을 적어둡니다. 그게 제 발상법 중 하나에요. 믿을지 안 믿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보통은 그냥 생각해서 떠오르지만 이렇게 떠오를 때도
있습니다. 사실 이 글을 쓸 때도 그렇게 시작했어요. 정보에 대해 쓰고 싶은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그걸 고민하다가 잤어요. 그리고 자던 도중이었지, 자기 직전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갑자기 눈이 떠지더니 발상이 떠올랐어요. 처음엔 ‘세계는 변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떠올랐다가 조금 바꾸고 시작했지요. 명확한 기준이 잡히니 술술 써지더군요. 뭐 아무튼, 읽어줘서 고마워요. ///
저는 eBook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읽기 편하고 관리하기 편하고 종이를 쓰지 않아도
되니 환경보호도 되나요? 아무튼 그래서 좋아해요. 그런데 걱정되는 건 회사가 망하면 남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에요. 예전에 온라인 인증방식의 게임을 구매해서 즐겼었는데 회사가 망하니까 그 권한도 사라져서
끝나더군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었답니다. eBook은 안 망했으면 좋겠지만 만약 망하더라도 그대로
사라지지 말고 부디 다른 회사에 인계했으면 좋겠어요. 그런 보장이 있다면 좀 더 마음 편하게 대여하거나 구매할 것 같네요. 회사가 사라져도 구매한 것은 남는다고 할지도 몰라 말해둘게요. 구매한 책을 보관한 것을 분실하면 다시 다운로드
받을 수가 없어요. 어쨌든, 지식을 공유하는 매체는 발전했으면 좋겠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져야 대화가 통하고 즐겁거든요.
저는 글을 쓸 때 꼬박꼬박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썼어요. 그런데 왜 ‘고맙습니다.’라고 써왔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 해볼게요. 첫째는 그 쓰임새가 특이한 것이 재미있어서 그랬어요. ‘고맙다.’나 ‘고마워.’는 보통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거나 대등한 사람 또는 친한 사람에게 쓰이더군요. ‘감사합니다.’는 보통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거나 거리감이 있는
사무적인 관계에 사람에게 쓰이더군요. 그런데 ‘고맙습니다.’는 그 어디에도 명확하게 쓰이는 곳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또는 대등하거나 친한 사람에게
쓰이는 ‘고맙다.’나 ‘고마워.’와 높임말인 ‘습니다’가 합쳐지니 어쩐지 대등한 관계에서만 쓰이는 말 같지 않나요? 그게 재미있다고 느껴져서 그렇게 쓰기 시작했어요. 더구나 예전에 저는 대등한 관계 아니면 상대하기 어려웠었거든요. 둘째는 초성이 어렵기 때문이었어요. ‘감사’와 달리 ‘고맙’은 초성으로 알아보기 힘들죠. 마찬가지로 ‘수고’와 달리 ‘고생’도 알아보기 힘들고요. 그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온전하게 다 쓸 수밖에 없어요. 저는 나름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에게 정성스럽게
인사하고 싶었어요. 셋째는 보던 만화나 소설에서 쓰였기 때문이었어요. 넷째는 사람들이 잘 안 써서 쓰면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다섯째는 평등한 사회, 대등한 관계를 추구하는 제게 어울리는 인사라고 생각했어요. 그저 재미있어서 쓰기 시작했던 것이 그런 이유로
그 인사말이 정착하게 되었죠. 뭐 사실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재미있는 부분이 큰 것 같아요.
2018년 4월 22일 작성
참고 인터넷 검색 (수명 한계에 관한 지식이 맞는지 확인, 사용한 단어가 맞는지 사전에서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