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교육, 무엇이 우리를 약하게 했는가
만능열쇠
사물의 본질은 만능열쇠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세 가지 예시를 들어보도록 하지요.
첫째, 불평등한 가치관. 많은 사람들이 불평등한 가치관인 서열존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꼰대나 갑질 외에 다양한 서열화 현상이 나타났던 겁니다. 이러한 현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역할존중이란 가치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둘째, 불균형한 힘과 책임. 자유와 평등을 무책임의 변명거리로 삼은 사람이 힘을 가질 경우 그 집단은 크기에 관계없이
불행을 맞이하게 됩니다. 가정에서 가장이 가족을 책임지지 않으면 그 가정은 불행합니다. 학교에서 교사가 학생을 책임지지 않으면 그 학교는 불행합니다. 회사에서 사장이 직원을 책임지지 않으면 그 회사는
불행합니다. 사회에서 힘을 가진 사람이 힘이 없는 사람을 책임지지
않으면 그 사회는 불행합니다. 세계에서 힘을 가진 나라가 힘이 없는 나라를 책임지지 않으면 세계가 불행합니다. 이처럼 어떤 경우에도 힘이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그 집단은 불행하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힘과 책임이 균형을 이루어야 행복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균형이 맞지 않게 된다면 책임에게 힘을 줘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셋째, 자아. 인간의 자아의 근원이 세포라는 것을 알게 되면 후천적 언어를 습득한 뇌가 있는 생물(인간), 뇌가 있는 생물(개나 고양이 등), 뇌가 없는 생물(해파리 등) 같이 생물들의 자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자아의 근원이 세포이므로 인공적인 존재가 자아를 가지기 위해서는 세포를 가진 인공생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를 알면 나머지도 알 수 있습니다. 만능열쇠와 같이 말이죠. 이번에 다룰 주제도 그러합니다. 논리가 없는 불합리한 교육으로 약해져 버린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볼 예정인데, 이 또한 하나를 알면 나머지도 알 수 있으므로 작은 것부터 시작할 예정입니다. 이 주제는 제 약함을 관찰한 끝에 나온 것이라 개인적으로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읽어주시면 기쁠 거예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약한 사람들
우리는 약한 사람들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약해져 버린 사람들입니다. 힘이 많건 적건, 나이가 많건 적건, 성별이 어떠하건, 우린 모두 불합리한 교육에 의해 약해져 버린 사람들입니다. 본래 모든 인간은 일부 약한 부분을 안고 태어나기
마련입니다만, 그와 별개로 환경에 의해 약해져 버렸다는 겁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런 불필요한 약함으로 고통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걸 누구에게 탓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약함은 오랜 세월 내려온 교육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글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기 위한 글이 아닙니다. 그저 지금 우리들이 어떤 약함이란 짐을 짊어지고
있는지를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짐을 우리 아이들에게는 물려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그럼 알기 쉽고 가벼운 예시부터 시작해 무엇이 우리를 약하게 했는지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음식을 남기면 안 된다.]라는 도덕에 약해진 사람은 음식이 남았을 때, 배가 불렀더라도 꾸역꾸역 전부 다 먹게 됩니다. 그러다 배탈이 날 것을 알더라도 말이죠. 그리고 정말 배탈이 나면 이런 식으로 자기합리화를
하게 됩니다. ‘남기면 아까우니까
별 수 없었어.’
아, 이 얼마나 슬픈 광경인가요! 자기자신보다 남은 음식을 더 귀하게 여기게 된, 인간의 가치가 바닥으로 떨어진 순간입니다. 너무 과장하는 것 아니냐고 하실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사건의 본질은 크기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도덕에 약해진 사람은 도덕을 지키지 않으면 괴롭기
때문에 도덕에 얽매여서 더 중요한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나중에 문제가 발생하면 불합리했던 자신의 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자기합리화를 하게 됩니다. 이 구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니 기억해주세요.
그럼 좀 더 심각한 예시를 통해 한번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전에 어떤 어린이집 교사가 반찬투정 하는 아이를
폭행하는 장면이 CCTV에 촬영되어 뉴스에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반찬투정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도덕에 약해진 교사가 아이를 폭행하면서까지 그 도덕을 관철하려고 했던 겁니다. 그리고 나서 이런 식으로 자기합리화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반찬 투정을 한 아이가 잘못한 거야.’
이것이 도덕에 약해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도덕에 약해진 사람은 뭐가 더 중요한지를 몰라요. 자신의 도덕을 관철하지 않으면 괴롭기 때문에 도덕을
우선시하고 보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불합리한 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자기합리화를 하게 되어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슬픈 광경인가요. 직무간 스트레스가 도덕에 약해진 부분을 찌르자 폭발하여 폭행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이것은 자신을 제어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
죄에 약해진 상태에서 논리가 없는 불합리한 도덕교육에 약해진 것이 더해져 발생한 사건입니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아시겠나요? 교사가 처음부터 도덕에 약했을 리는 없어요. 교사의 어린 시절 받은 교육의 문제일 겁니다. 아마 그 시절, ‘왜 반찬을 다 먹어야 하나요?’ 라는 물음에 논리적인 대답을 듣지 못했거나 그저
무조건 다 먹는 게 옳다고 말하는 불합리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겠죠. 반찬투정 하지 말라는 단순한 도덕교육조차 강압적으로 주입하여 가르친 결과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애를 폭행하면서까지 자기가 교육받은 도덕을
관철하려고 했던 거죠! 이유를 모르니까 더 중요한 것을 알 수가 없었던 겁니다. 이유를 모르니까 반찬투정 하지 않는 것이 무조건 옳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이유를 모르니까 폭행을 해서라도 먹게 만들려고 했던
겁니다. 아시겠나요! 우리는, 우리 모두는(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어른들의 일방적인 편의성으로 빚어진 불합리한 교육으로
인해, 자신의 행동에 자기합리화를 해야 할 정도로 도덕에
약해져 버렸다는 겁니다!
오늘의 주제는 이러한 약함을 다룰 것입니다. 도덕에 약해진 사람은 주입된 도덕을 행하지 않으면
괴롭기 때문에 더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불합리하게 행동하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자기합리화를 하게 됩니다. 이런 약함은 도덕뿐만이 아닙니다. 죄에 약한 사람은 자신의 욕구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여 사회의 규칙을 깰 확률이 높아집니다. 깨고 나면 그 행동에 대한 자기합리화를 하겠죠. 감정도 있습니다. 사랑에 약한 사람은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졌다가 실패하면 모든 것에 절망하게 됩니다. 절망하고 나면 불합리하게 행동했던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자기합리화를 하게 될 겁니다. 어쩔 수 없었어.
이 모든 것은, 이 모든 것은 불합리한 교육 때문에 자기자신을 논리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게 된 끝에 발생한 약함입니다. 세상에 발생하는 사건들을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전부 관찰해보면 그 근원에는 이러한 불합리한 약함이 존재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똑똑한 사람이 멍청한 짓을 하는 것은
멍청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우수한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악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현명한 사람이 감정에 치우쳐 실수를 하는 건 어리석기 때문이 아닙니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불합리한 교육으로 약해져 버린 사람들입니다.
죄
그럼 죄와 도덕에 약하다는 것을 좀 더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죄부터 시작하지요.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죄에 약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구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사회의
규칙을 깨는 것을 사회에서는 죄라고 규정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죄가 무엇인지 알고, 그 죄를 짓지 않기 위한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참고, 참고 또 참아야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는 유전자에 의해 죄에 약한 상태인 사이코패스나 죄에 강한 상태인 욕구가 적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내심의 필요치가 다를 뿐이지요. 그러니 죄를 지은 인간은 악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죄를 보고 부유할수록 죄를
짓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할 수 있어 말해둘게요. 가난한 이가 욕구의 죄를 짓는다면, 부유한 이는 욕망의 죄를 짓습니다. 극빈을 제외하면 부유할수록 죄에 더 약해질 겁니다. 왜냐하면 불가능가 가능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시도해볼 수도 없는 범죄를 부유한 사람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유한 사람이 죄를 짓지 않을 경우엔 남들 보다 더 강한 인내를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이 사회를 책임지면 사회적 존경을 받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는 나이나 성별이나 힘과 관계없이 죄에
약합니다. 그러므로 교육은 받지 않거나 잘못된 교육을 받게
되면 죄를 지을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보통은 교육을 통해 죄에 강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은 앞서 이야기한 반찬투정의 사례와 같이 대체로 불합리합니다. 우리들의 교육은 그저 죄에 강해지기 위해 도덕에 약하게 만든 것일 뿐입니다.
다른 예시를 들어볼게요. 미성년자는 술, 담배를 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의 하고 싶다는 욕구를 죄로 규정한 것이죠. 그런데 저는 이걸 논리적으로 설명해준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요. 보통은 어릴 때 술, 담배를 하면 건강에 좋지 못하다는 논리로 접근합니다. 하지만 건강보다는 자유를 원하는 아이들은 설득할
수 없는 논리예요. 오히려 웃기는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죠. 어른들에게는 뭐 건강에 좋나? 이러한 논리에 대답하지 못한 어른들은 그냥 하지 말라고만 합니다. 생각해보면 엄청 웃겨요. 담배를 뻑뻑 피워대면서 담배 핀 아이를 체벌하는 걸 생각해보면요. 보세요. 결국 논리가 없는 불합리한 교육으로 끝납니다. 이런 것이 일상이라는 거예요. 대부분의 죄를 짓게 하지 않기 위한 도덕교육은 불합리하게
끝납니다.
잠시 미성년자의 술, 담배에 대한 제 생각을 적고 넘어갈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보호자가 피보호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면, 피보호자는 그 보호에 따를 의무가 있습니다.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밤 늦은 시간엔 돌아다니지
말라고 할 때, 아이들이 그 말을 듣지 않고 돌아다니다 사고가 났다고
가정해보죠. 무슨 이야기인지 알게 되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보시다시피 피보호자가 보호에 따르지 않으면 보호자의
보호도 무용지물이 됩니다. 어떤 집단이든 피보호자는 자신의 자유를 보호자에게 일부 의탁하여 안전을 영위하는 거지요. 이 논리라면 술, 담배도 설득할 수 있게 됩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술, 담배를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리고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보호받고 싶다면 이러한 보호도 따를 의무가 있는 겁니다. 보호에 따르기 싫다면 사회에서 벗어나거나 성인이
되는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저는 이제껏 이런 논리로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건강을 위해서, 또는 그냥 하지 말라고만 들었지요.
이건 그래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다만, 성적 충동을 제어하기 위한 자위는 도대체 논리적인
이유가 없이 하지 말라고만 해요. 그냥 그래왔으니까 나쁘데요. 왜? 왜 사춘기의 아이들을 모두 죄인으로 만들려고 하는
건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물론 그냥 그래왔으니까 그러는 거겠지만요. 인간의 죄는 자신의 욕구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사회의 규칙을 깰 때 발생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욕구가 깨어나는 사춘기 시점부터 자신의 욕구를 제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냥 불합리하게 하지 말라고만 하죠. 왜? 그냥 그래왔으니까. 별다른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논리가 없어요, 논리가. 그냥 어른들이 아이들을 편하게 관리하기 위해서 불합리한 교육을 해왔던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약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거지요.
도덕에 약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하는 행동도
불합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냥 방치해요. 예를 들어보지요. 노키즈존을 아시나요? 보호자가 아이들을 방치하자 아이들이 욕구나 욕망을 통제하지 않고 멋대로 행동했어요. 시끄럽게 떠들고, 난장을 피우고 난리도 아니어서 가게의 주인이 극단적인 조치를 행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출입금지. 그게 노키즈존이에요. 뭐 아이들 기 죽이기 싫어서 그렇게 한다고는 들었습니다만, 그건 자신을 통제하는 법을 모르게 되어 죄에 약해지게
만드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죄에 약해진 상태로 성장하면, 나중에 커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해 필요한 인내심이 매우- 많을 겁니다. 기 죽이기 싫어서 죄에 약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만든 거지요.
이 외에 다양한 환경으로 인해 죄에 약해진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그리고 그들은 어쩌면 자기합리화를 할지도 모릅니다. ‘환경이 이러니 별 수 없었어’ 하지만 죄에 약해진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자신의
짐을 내던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누구나 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어요. 어떤 형태든 간에요. 몸이 약하든, 죄에 약하든, 도덕에 약하든, 감정에 약하든 간에요. 단지 힘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짐을 조금 가볍게 해줄 수 있을 뿐입니다.
도덕
보통은 죄에 강해지기 위해 불합리한 도덕교육을 하고
있습니다만, 단순히 어른들의 편의성을 위해 도덕교육을 하기도
합니다.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죄가 되지는 않지요. 그런데 하기 싫어도 꿋꿋하게 다니다 결국 자살하기까지
합니다. 도대체 왜? 정 힘들면 그냥 가지 않아도 됩니다. 그건 죄가 아니에요. 다른 것으로 대체해도 됩니다. 학교는 사회성을 기르기 위한 기관으로 다니면 좋습니다만, 자살할 바에는 그냥 안가는 게 낫습니다. 그런데도 가게 만들고, 그런데도 가서 자살을 해요. 이건 [학교에 가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된다.]라는 도덕교육을 불합리하게 받은 끝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그 외에, 수험에 실패하면 자살을 합니다. 회사에 적응을 못하면 자살을 합니다. 둘 다 실제로 있는 사건이에요. 이 얼마나 슬픈 광경인가요? 불합리한 교육으로 더 중요한 것을 알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자기자신보다 만들어진 도덕을 더 중요하게 여겨 죽음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어른의 일방적인 편의성으로 빚어진 불합리한 도덕교육에 약해진 사람의 끝 중 하나입니다.
이런 것이 아니더라도, 자잘한 것 하나하나가 전부가 그래요. 어른이 어른 대접을 받지 못하면 불쾌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그냥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어른을 공경할 것]이라는 도덕에 약해져 있기 때문에 공경 받지 못하면 불쾌감이 생겨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그 불쾌감을 해소하기 위해 불평등한 가치관을
내세우며 불합리한 짓을 하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야근이 많았지요. 그 야근만 봐도 그래요.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정해진 시간에 효율적으로 일하는
것이 훨씬 낫지요. 그런데 [오랫동안 성실하게 일하는 것이 유능하다]는 도덕에 약해진 관리직들은 그걸 알면서도 효율과
관계없이 야근을 하는 사람을 유능하다고 여기게 돼요. 그래서 만들어진 참사가 낮에 놀고 밤에 일하는 현상이겠죠. 이 얼마나 우습고 슬픈 광경인가요?
왜 남성들은 음주운전을 많이 하는 걸까요? 그냥 단순해요. [남자는 강해야 된다.]라는 도덕교육에 약해져 허세를 부리는 탓에 나타나는
현상이죠. 나는 취해도 운전을 잘할 수 있어- 같이 말이죠. 남성의 허세를 생각하니 떠오르는 과거가 하나 있네요. 어렸을 때 어떤 어른 남성이 여자친구를 곁에 두고
저를 가지고 논 기억이 있습니다. 그건 잊을 수가 없어요 개자식아. 단순히 여자친구 옆에서 강한 척하며 허세를 부리기 위해서였겠죠. 애를 가지고 노는 것으로 강한 척하려는 심리는 이해하고 싶지 않지만요. 어쨌든 그러합니다.
요새 이슈가 되는 여성문제. 그건 전부 불합리한 도덕교육이 만들어낸 현상입니다. 심하면 시선만 마주쳐도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도덕에
약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아시겠어요? 지금 여성분들이 그러는 건 정말 불평등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물론 정말 불평등 한 것도 있어요. 그런데 그 외에 평등한 것마저 불평등하게 느끼고, 불쾌하게 느끼는 건 그냥, 불합리한 교육으로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입니다. 살면서 내내 여성의 부당함에 대해 주입적으로 교육받아왔으니
불쾌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겠죠. 이 얼마나 슬픈 광경일까요? 또, 이러한 현상으로 남성들도 약해져 버립니다. 여성우월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머리스타일을 보기만
해도 화를 내게 될 정도가 되어버렸어요. 약함이 약함을 부릅니다.
특정 종교에 약해진 사람은 다른 종교만 봐도 불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제가 어렸을 때 잠시 그런 적이 있었거든요. 불합리한 교육은 어떤 것이든 사람을 약하게 만듭니다.
이외 사회에서 일어나는 불합리한 행동의 출처는 대부분
불합리한 교육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걸 아시고 나면 어쩌면 끔찍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어요. 전부, 전부, 결국 그냥 약한 것뿐이거든요. 죄에 약하거나, 도덕에 약하거나, 감정에 약하거나, 어쨌든 약해지는 바람에 자기통제를 못하여 발생하는
겁니다.
배려
한번 약해진 사람은 약한 부분들 바꾸지 않는 이상, 그 짐을 계속해서 짊어지고 가야 합니다. 아무리 무겁더라도요. 그 짐을 내던지는 순간 죄인이 되거나 죽음으로 향할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가엾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약한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배려는
필요합니다. 어느 정도는요.
예를 들어볼게요. 특정 집단이 특정 정치인을 비꼬며 놀리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사투리가 하나 있지요. ‘노’로 끝나는 거요. 뭐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그걸 듣고 생리적인 불쾌감을
느낄 이유는 없습니다. 생각한 끝에 고인모독은 좋지 못하다거나, 비꼬는 건 바르지 못하다고 여기는 게 맞겠지요. 그렇지만 도덕에 약해진 사람들은 ‘노’만 봐도 불쾌감을 느끼게 되었어요. 심지어 진짜 사투리를 봐도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약해졌지요. 그렇다고 불쾌감을 느끼지 말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미 약해져 버렸거든요. 그러니 그걸 불쾌해 하는 사람 앞에서는 ‘노’로 끝나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배려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배려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노’로 끝나는 것이 불쾌하다고 사투리 자체를 없애버리라고는 할 수 없어요. 그러니 약해진 사람은 자신의 약함을 알고 어느 정도까지는
타협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건 어떤 것이든 적용이 돼요.
그럼 보통의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슬픈 역사로 인해
약해진 것 중 하나인 욱일기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요.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현대의 일본인이 욱일기를 사용하는 것이 군국주의를 지지해서가 아니라, 그냥 몰라서 그랬던 것이 대다수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설마 이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이 전쟁 따위를 바라고
있겠어요? 있더라도 적겠죠. 그럼에도 슬픈 역사 속에서 트라우마를 겪게 된 우리나라
사람들은 욱일기만 봐도 불쾌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쾌감을 느끼지 말라고 하기도 어려워요. 역사를 바꿀 수도 잊을 수도 없으니까요. 그러니 욱일기의 사용은 배려의 차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역사에 대한 트라우마로 욱일기를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으니 군국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용하지 말아야 하며, 설령 사용하더라도 최소한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 앞에서는 사용해서는 안되겠지요.
물론 여기서도 배려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트라우마 때문에 일본 국기마저 사용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여성의 문제도 이러한 배려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된다고
봅니다만, 한계는 있어요. 남성들은 여성들의 약함을 알고 어느정도는 배려를 해야 하며 여성들은 불합리한 교육으로 약해진 자신을 알고 어느 정도까지는
타협을 봐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남자들도 좀 불합리한 교육으로 [남자는 강해야 된다]는 도덕에 약해져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여성들도 남성들의 약함을 알고 어느 정도는
배려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
우리나라 역사에서 죄에 약한 지도자가 벌인 만행은
널리 인식되어 있지만 도덕에 약한 지도자가 벌인 만행은 두루뭉실하게 인식되어 있다고 봅니다. 죄에 약한 지도자가 펑펑 써댄 세금으로 국력이 약해진 상태에서, [우리 것이 좋은 것이다] 라거나 [서양의 것은 나쁘다] 라는 도덕에 약해져 버린 탓에 멍청한 고집으로 세계에
고립되어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기술 발달에 뒤쳐지는 바람에 굴욕을 겪었던 역사가 있지요. 그 영향으로 도덕이나 선비가 비꼬임의 대상이 된다거나 하지만 도덕 자체가 문제가 아니에요. 불합리한 도덕 교육으로 약하게 만든 게 문제죠.
이러한 역사를 본보기 삼아 전 정권과 현 정권을
비판해보도록 하지요.
전 정권은 주로 죄에 약한 정권이었어요. 욕구나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난장판을
만들었죠. 국정농단이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에요? 그건 악하기 때문이 아니에요. 약하니까 죄를 지은 거죠. 딱히 할말이 없네요. 단지 죄에 약한 것은 기본조차 안되어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반면 이번 정권은 주로 도덕에 약한 정권으로 보여요. 자잘한 죄는 짓지 않으며 국정을 운영하고 있는 것
같지만, 도덕에 약해지는 바람에 불합리한 운영을 하게 되었어요. 여성 문제라거나 HTTPS의 문제들이 불합리하게 전개되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는 까닭은 도덕에 약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층이 [과거에 겪은 여성의 부당함]에 대한 도덕에 약해져 버린 까닭에 역차별을 낳는 한이 있더라도 여성을 중심으로 평등하게 만든 거죠. 그리고 이러한 것은 저의 역할존중의 사상에 맞지
않습니다. 역할존중이란, 누가 되었건 역할에 맞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역할을
맡고, 역할에 대한 수행여부에 따라 존중을 주며, 기여도에 따라 대우를 달리해야 하는 거지요. 한마디도 동일한 자격에 동일한 노동에 동일한 대우를
받도록 해야 돼요. 그런데 그게 안되고 있어요. 도덕에 약해졌으니까요. 그리고 문제가 발생하면 자기합리화를 하게 될 겁니다. ‘여성이 불평등했던 건 사실이었어.’ 그야 그렇죠. 주로 옛날에.
원자력 발전소에 관련된 것도 이러한 도덕에 약해져
있다고 봅니다. 이웃나라가 원자력 발전소에서 벌어진 참사를 제대로
책임지지 않는 바람에 [원자력 발전소 자체가 나쁘다] 라는 도덕에 약해져 버렸지요. 그래서 원자력 발전소를 원하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가 나오지 않은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저라면 잠정적으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중지하되, 사고를 방지할 수 있는 원자력 기술이 나타나면 다시
건설하도록 하겠다고 했을 겁니다.
뭐 어쨌든 죄에 약한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래도 약한 건 약한 거예요. 그 불합리한 약함이 심해지면 굴욕의 역사를 반복할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사람들을 약하게 만들 셈인가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더 이상, 죄든, 도덕이든, 감정이든, 약한 사람이 지도층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이번 정권이 부디 강해지거나, 다음 정권은 강한 사람이 책임감을 가지고 나라를 운영하길 희망해 봅니다.
인간교육
인간의 약함은 자신을 제어할 수 없음에서 나타납니다. 이는 우리의 교육이 ‘나’가 아닌 ‘남’을 위주로 교육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국어를 통해 우리의 문학을 익히고 영어단어를 외우고 수학을 이해하는 것, 중요해요. 그런데 그건 결국 ‘남’을 배우는 것뿐이에요. 그 어떤 것도 마찬가지예요. 사소한 것 하나하나 ‘남’을 통해 ‘나’를 배우게끔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정확히 몰라요. 내가 어떤 것에 강하고 어떤 것에 약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 적성교육 같은 걸 하지만
그건 ‘나’를 아는 게 아니에요. 그냥 적당히 나에게 어울리는 일을 알아봤을 뿐이죠. 왜 내가 밥을 먹고 싶은 건지, 왜 내가 잠을 자고 싶은 건지, 왜 내가 자위를 하고 싶은 건지 그러한 고찰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개인에만 맡기고 있어요. 그러한 체계적인 교육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나’라는 중심이 잡혀있지 않으니까 선동에도 쉽게 휘말리고
다른 사람 말에 지나치게 약해져 버렸습니다. ‘나’라는 중심이 잡혀있지 않으니까 죄에 약하다는 것도
모르고 죄를 짓습니다. ‘나’라는 중심이 잡혀있지 않으니까 도덕에 약하다는 것도
모르고 도덕을 추구하며 도덕에 어긋나면 괴로움을 느낍니다. ‘나’라는 중심이 잡혀있지 않으니까 감정에 약하다는 것도
모르고 감정으로 인해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 전부가 ‘나’를 모르기 때문인 겁니다.
천차만별로 다른 인간을 어떤 몇 가지의 틀로 규정하여
가르치고 있으니 어긋나는 것은 당연하지요. 인간교육의 모든 시작은 ‘나’를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됩니다. 그 어떤 것도 논리적으로 접근하여 이해하도록 하여
공포가 아닌 필요를 통해 규칙을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를 가르칠 때마다 그 모든 것에
논리가 깃들어야 합리적인 교육이라 할 수 있는 겁니다. 인간은 무엇이고, 나는 무엇이고, 세상은 무엇인지 아는 것으로 시작했어야 했습니다. ‘나’를 모르니 내가 약해질 수 밖에 없지요! 왜 내가 괴롭히고 싶은 건지, 왜 내가 학교에 가고 싶지 않은 건지, 그걸 정확히 모르니까 학교에서 사건사고가 발생하는
겁니다. 인간의 밝은 면도 어두운 면도 전부 알아서 ‘나’를 알게 되어야 사람은 강해질 수 있는 겁니다. 그냥 귀찮아서 대충 가르치는 것으로는 약한 인간을
양성하는 것뿐이라는 겁니다. 어른 입장에서 아이들을 일일이 설득하는 것은 귀찮고 번거로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 끝은 결국 약한 인간을 낳게 만들 뿐입니다! 어른의 일방적인 편의를 위해서 불합리한 교육을 하는
것은 이제 그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나’를 알게 되어 주관이 구축되면 다음은 주관과 객관을 분리해 주관적인 객관을 구축하여 어떤
일에도 구축한 객관을 통해 중심을 잡아 흔들리지 않고 사물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알아야 주관과 객관을 분리할 수 있어요. ‘내 주관적으로는 이게 올바르다고 느끼지만, 내 주관적인 객관으로는 올바르지 않다고 느낀다’ 이게 가능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자신의 약한 부분을 직시하고 대처할 수 있겠지요.
나를 알고 나와 남을 분리하여,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여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인간교육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약한 사람이 아닌, 강한 사람을 육성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강한 사람이 강한 나라를 만들어갈 거라 생각합니다. 아이는 우리의 미래, 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우리가 불합리한 교육으로 겪은 슬픔을 더 이상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약함은 괴로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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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는 꼭 다시 정리할 생각입니다. 오랜 세월 절 괴롭게 만들었던 주제라 개인적으로
마음이 아파요. 어린 시절의 괴로움 때문에 웬만해서는 아이들의 편을
들어주고 싶네요. 아이들은 제가 겪은 괴로움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상냥한 겨울을 바랬었죠. 그 뒤에 상냥한 기온이 오긴 했는데, 상냥하지 않은 공기도 찾아오고 말았네요. 그래서 생각해보니까 상냥한 공기가 낫겠습니다. 추워도 참아야겠어요.
능력이란 뭘까요? 저는 생각하는 방법이 좀 더 남다르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증명할 수 있는 시험 같은 건 없으니… 뭐 좀 더 공부할 수 밖에 없네요.
그럼 또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