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교육
인간
인간을 교육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르면 교육이 어렵겠지요. 하지만 많은 분들이 자신의 특별함을 버리지 못하여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아주 본질적인 부분을 외면하고 있다고 봅니다. 자신을 좀 더 고상한 존재로 여기고 싶어하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보이는 현실을 외면하고 보이지 않는 이상 속을 헤매고 있지요. 분명하게 존재하는 인간 본연의 욕구나 욕망을 수준 낮은 것으로 치부하고 오로지 드높은 이성을 통해서만
인간이 빛을 발할 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간의 가치와 행복을 찾기 위해 헤매고 있지요. 꿈꾸듯, 취한듯, 존재하지 않는 허상 속에서 끊임없는 자기만족이 빚어내는
우월감에 깊숙하게 파묻혀 실제 현상을 보지 않은 채 공상 속의 진리를 설파합니다.
인간은 동물입니다. 진화론, 돌고래, 수화하는 침팬지, 언어를 모르는 인간의 무지 등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둘의 차이는 오로지 지능뿐입니다. 그 어떤 현상에서도 그 이상의 차이를 알려주는 흔적은 없습니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자지 않고 살 수 있는 인간도 없습니다. 싸지 않고 살 수 있는 인간도 없습니다. 이러한 아주 당연한 진실이 인간은 동물이라는 진리를 벗어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진리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본연의
모습을 알려주게 됩니다. 욕구나 욕망을 저급한 것으로 취급하며 그저 억제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욕구와 욕망과 마주보고 인내하고 제어하여 세상이나 사회의 질서를 깨지 않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가는 것이 지고의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욕구나 욕망의 목소리를 아예 듣지 않는 것을 고고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보다는 사회 질서에 맞춰 그들과
타협해 가는 사람들이 보다 더 현명합니다. 그리고 고상합니다. 이성이란 독재자보다는 이성과 감성, 욕구와 욕망 등의 목소리를 들어가며 자신의 균형을 맞추는 민주주의가 더 우수합니다.
지능 외엔 차이가 없다는 진실은 인간의 격을 동물과
나란히 하게 만듭니다. 객관적으로 인간의 가치는 다른 생명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겁니다. 어떤 특별한 존재가 인간만을 우선시하며 재난에서 구해주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과 동물의 가치는
객관적으로 차이가 없다.’ 따라서 인간은 종의 최고선인 종의 생존과 번영을 추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저는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인간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있고,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최고선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동물을 보호하는 것도, 자연을 보호하는 것도 전부 인간을 위해서 보호하고
있고 보호해야 위선과 오만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될 겁니다. 뭐 인간이 자연을 보호하지 않아서 생기는 현상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은 자연보호의 중요성을 여실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악이 무엇인지도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의 생존과 번영에 해가 되는 일들은 악으로 판단해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을 겁니다.
인간만 특별하다는 오만한 사고에서 벗어나게 되면
자아의 근원도 알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들어가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당연했다, 하지만 인간만을 특별하게 여겼기 때문에 놓치고 있었던 진실, 자아의 근원은 모든 생물이 가지고 있는 세포입니다. 모든 생명이 제각기 의지를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세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뇌를 가진 동물은 뇌를 통해 세포를 여론화하여 체계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 인간은 높은 지능과 후천적 언어를 가지고 있어 지성까지 갖출 수 있을 뿐입니다. 세포 자체가 자아의 근원이라는 사실은 많은 이들이
저급하게 여겨왔던 욕구나 욕망이야말로 자아의 원천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만듭니다. 먹고 싶다, 자고 싶다, 싸고 싶다, 라는 욕구 하나하나가 전부 다 나의 일부였던 겁니다. 그러한 욕구를 부정하는 건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른 동물들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천시되어왔던
단순한 감정, 욕구, 욕망 등이야말로 이성을 구성하는 요소라는 것도 알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이 형성되는 배아시절부터 시작한 세포의 움직임은
뇌로 저장되어 이성을 형성하게 됩니다. 밥을 먹고 싶다는 욕구, 그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떠올리는 생각, 그 생각을 통해 움직이는 행동, 이러한 일련의 동작이 중첩되고 중첩되고 또 중첩된 것이야말로 이성! 반복된 감정, 욕구, 욕망 등이 빚어내는 체계화된 이성은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세포의 여론입니다. 반면 현재 지금 몸이 빚어내는 감정, 욕구, 욕망 등이야말로 본능! 지금 당장의 충동이 뇌로 전달되어 중첩된 무의식에 접근해 유전자의 본능뿐만 아니라 경험의 본능까지
도달하게 만드는 현재 지금의 세포의 여론입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중첩된 세포의 여론으로 현재의 세포의 여론을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이 통일된 존재가 아님을 알게
만듭니다. 조 단위가 넘어가는 인간의 세포 각각이 전부 자아를
구성하는 요소라는 겁니다.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모순된 행동을 하는 까닭은 이 때문입니다. 배고팠을 때의 마음과 배부르고 나서의 마음이 다르거나, 누군가를 사랑과 동시에 증오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을
구성하는 세포들이 각각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공포도 정확히 구분하기 어려워서 흔들다리 효과가 있었던 겁니다. 세포 자체가 자아의 근원이기 때문에 인간은 매분
매초 계속 달라지게 됩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다르게 여기는 건 아주 당연한 현상입니다. 매분 매초 달라지는 우리들이 하나의 자아로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우리들이 기억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을 잃게 되면 사람이 달라지게 되는 겁니다. (이건 최근 실제 경험해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중인격도 존재할 수 있는 겁니다. 인격을 유지하는 기억만 날라가면 인격도 바뀔 수
있으니까요.
이 모든 것은 인간이 동물이라는 아주 당연한 것을
이해해야만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걸 알아야 자신을 제어할 수 있게 됩니다. 사춘기 시절 자신의 변화를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은 자신이 하나라는 인식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2차성징을 통해 성에 눈을 뜨면서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충동을 받아드리기 버거웠던 것이지요. 누군가 그걸 제대로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도 아닙니다. 주먹구구식으로 몰래 몰래 죄책감을 느껴가며 충동을 스스로 제어했어야 했어요. 그게 과연 올바른 교육인지 의문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사춘기 아이들의 성에 대한 충동을
무조건 막는 것을 반대합니다. 모든 감정과 욕구와 욕망 등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전부 자신의 일부입니다. 그와 마주보고 최대한 사이 좋게 지내는 거야 말로 인간에게 있어 지고의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인간교육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이 무엇인지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인간은 동물입니다.
필요성
우선 인간교육의 필요성을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필요성을 인식해야 중요함도 인식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럼 왜 인간교육이 필요한 걸까요? 그건 인간의 약함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약함을 타고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약함은 신체적 또는 정신적 결함을
의미합니다. 눈이 잘 안보이거나 공감능력이 떨어진다거나 말이죠. 하지만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회에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도 약함을 타고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감정과 욕구나
욕망 등으로 사회의 규칙을 깨는 것을 사회에선 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걸 죄로 규정하는 것은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돕는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모두 죄의 약함을
타고 납니다. 이러한 약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러한 죄에서 강해지기 위해 인간은 교육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는 도덕을 통해 죄로부터 강해져 왔습니다. 하지만 보호자의 편의를 위해 행해진 불합리한 교육으로
도덕에 약해지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아이들이 죄를 짓지 않게 만들기 위해 이치에 맞는 논리적인 설명이란 귀찮음을 감수하기 보다는 무조건 내 말이 옳다며 도덕을 강요하거나 폭력으로
강제하며 다스렸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도덕에 약해지게 되었습니다. 논리적으로 죄를 짓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왜인지 모르게 꺼려져서, 괴로워서 죄를 짓지 말아야 된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괴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을 죄로
떠미는 결과도 낳게 되었습니다. 보호자의 편의를 위해 행해진 불합리한 교육은 때로는 도덕에 약하게 만들고, 때로는 죄에 약하게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보호자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보호자들은 단지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쳤을 뿐입니다. 가치관이나 감정, 감정이나 욕구나 욕망제어방법 등을 물려줬던 것도
그냥 그렇게 배웠을 뿐입니다.
몇몇의 보호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정확히는 몰라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서 아이들에게 강요를 하지 않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방관하여 아이들이 스스로를 제어할 줄 모르게 되어 죄에 약해진 상태로 성장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들로 하여금 지금까지의 교육은 인간을
약하게 만들어왔습니다. 그 약함이 우리 사회의 불합리한 현상들을 만들어왔던 거지요.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지금과는 다른 인간교육이 필요합니다.
도덕에 약해지지 않는 합리적인 인간교육을 한다고
해서 단순히 죄에 강해지기만 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편의를 위해서 약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다루기 쉽게 하기 위해 약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잘 교육해도 다른 곳에서 악영향을 받으면 무용지물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약하게 만들어 자신의 의도대로 만들려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것이 새로운 인간교육, 남이 아닌 나를 중심으로 한 교육입니다.
인간교육
일반적인 교육은 남을 통해 나를 알아갑니다. 남이 어떤지를 보고 거기에 나를 맞춰가는 거지요. 굉장히 편하고 효율적인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건 비슷한 사람들을 양성하게 됩니다. 사회에서 정한 어떤 답에 나를 맞춰가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 답이 자신과 맞지 않는 옷이라고 하더라도
그 답을 입는 것을 사회에선 우수하다고 평가 하기 때문에 그 답을 억지로라도 끼어 입게 됩니다. 그 답을 입지 못하거나 입지 않는 걸 선택한 사람들은 설령 우수하더라도 사회에선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됩니다. 답에 근접하게 태어난 사람들을 제외하면 가엾게도 무능하다는 꼬리표를 달고 살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입시미술이 좋은 예가 될 겁니다. 우수한 예술적 감각을 지니고 있더라도 입시미술에
맞는 그림을 그려내지 못하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을 잃게 되어 다른 것에 영향을
심하게 받는다는 겁니다. 남을 중심으로 한 교육은 남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자신의 주관을 정립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남이 정한 답을 자신의 답으로 받아드리게 되는데 어찌 자신만의 주관을 정립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남의 생각을 자신의 주관으로
여기게 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쉽게 흔들리고 쉽게 영향을 받았던 겁니다. 만들어진 약함에 약해지고 감정들을 쉽게 물려받았던 것도 이렇게 자신만의 주관이 정립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을 통해 나를 알아가는 건 가르치고 평가하는 입장에서
굉장히 편하고 효율적이지만 이렇게 비슷한 사람을 양성하거나 우수한 사람을 놓치거나 주관이 정립되지 않아 무언가에 약한 사람을 만들게 됩니다.
따라서 나를 중심으로 한 교육을 해야 합니다. 그 어떤 것을 바라보더라도 ‘나’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럼 나를 중심으로 한 교육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불합리한 교육을 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에
이치에 맞는 논리가 필요합니다. 굳이 새로운 교육이 아니더라도 모든 것에 논리는 필요합니다. 왜 음식을 남기지 말아야 하나, 왜 시간을 준수해야 하나, 왜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나, 왜 도둑질은 하지 말아야 하나, 왜 폭력은 쓰지 말아야 하나, 등등 모든 것을 아이가 논리적으로 이해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남을 중심으로
한 교육이 아닌, 나를 중심으로 한 교육이 되게 될 겁니다.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기준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죄에 강해지기 위한 도덕을 가르칠 때 평범한 아이와
공감능력이 결핍된 아이를 똑같이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일일이 따로따로 모든 걸 교육하기엔 어려우니 아이 스스로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여 판단을
내린 것을 보호자나 교육자가 보고 교정해나가야겠지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남이 아닌 나를 중심으로 한 교육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한 교육, 이것은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아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 주관적인 답과 세상에
널리 알려진 객관적인 답. 이 둘을 전부 배우는 겁니다. 어떤 문학을 배울 때 화자의 마음이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객관적인 답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주관적인 답도 중요하게 여기라는
겁니다. 아마 최초엔 자신의 주관적인 답도 중요하게 여기겠지요. 감상문 같은 걸 쓰라고 하니까요. 하지만 객관적인 답만 평가로 들어가다 보니 나중엔
결국 객관적인 답만 중요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자신의 감상을 하찮게 여기게 됩니다. 인터넷을 보면 감상문을 대신 써주는 일조차 있지요. 어차피 평가로 이어지지 않는 감상문, 공부할 필요조차 없다고 느낀다는 겁니다.
수학 같은 답이 정해진 학문도 같습니다. 답은 정해져 있을지 몰라도 풀이는 다를 수 있습니다. 아이가 자신만의 풀이로 답을 내놓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정답이 되어야 합니다. 주관적으로 내린 답과 객관적인 답을 둘 다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도덕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덕을 지켜야 할 이유에 대한 답부터 알려주기 전에 스스로 생각하여 주관적인 답을 내리게
합니다. 그 뒤 교사가 객관적인 답을 알려주면 스스로 적절하게
교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나를 중심으로 하는 교육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객관에 흡수되지 않은 자신만의 주관이
정립되면 쉽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됩니다. 그리고 나서 스스로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여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겁니다. 어떤 사물을 바라볼 때 주관적인 판단이 내려질 겁니다. ‘이 사물은 이런 거구나’ 같이 말이죠. 그 다음에, 그 주관적인 판단을 잊고 객관적인 사실만을 나열하여
객관적인 판단을 내려보는 겁니다. 수치나 사회적 통념이나 언어의 약속 같이 객관적인 요소들만 나열해 사물의 본질을 보려고 해봅니다. 그렇게 하여 스스로 주관과 객관을 분리할 수 있게
된다면 ‘내가 주관적으로 올바르다고 여겼지만 객관적으로는
올바르지 않다고 여긴다.’ 가 가능해질 겁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취미라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취미면 인기 있는 이유가 있겠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주관적인 편견을 객관적인 나로 하여금 극복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자신의 약함을 직시할 수 있게 됩니다. 스스로, 주관적으로는 그 약함이 올바르다고 여기고 있더라도 객관적으로는 올바르지 않다고 여겨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약함이 괴로워서 바꾸기 힘들더라도 그 사실 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은 이러한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여 사고하는 겁니다. 그 어떤 약함도 흔들리지 않는 정립된 주관과 그걸 지켜주는 분리된 객관이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이것이 현재 제가 생각하는 인간교육입니다.
이 부분은 좀 더 생각이 필요하니 나중에 더 정리하겠습니다.
---
시간이 좀 많이 필요한 주제라 천천히 정리해나가겠습니다.
마음을 닫은 채 성장하다 보니 많을 걸 모르게 되네요. 친해지는 방법도 기대는 방법도 모르겠어요. 이론이야 알고 있어요. 그리고 거짓가면을 쓴 채로 하면 그래도 할 수야
있겠지만 그건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이제 와서 다시 시작하려고 하니 어렵네요. 무엇보다 자신을 설득하는 게 가장 어려워요.
다음엔 아마 약함 편을 보강하기 위해 남성, 어른, 아이 같은 사례를 좀 더 써서 정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례는.. 사실 정해진 일정한 법칙을 그대로 다른 사례에 적용해도
거의 대부분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굳이 써야 하나- 라는 생각도 드네요. 그래서 완전 새로운 걸 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