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우리를 약하게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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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약함에 대해서
인간교육
오늘은 다른 사례들을 조금 정리해볼까 합니다. 남성부터 시작할 건데 어디까지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시작해봅니다.
가장 기본적인 약함이 무엇인가만 작성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약함
사람의 약함은 ‘타고난 약함’과 ‘만들어진 약함’약함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첫째, 타고난 약함
사람은 감정, 욕구, 욕망 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사회에 속한 모든 사람은 죄의 약함을 타고납니다. 그 외 눈이 잘 안보이거나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
같은 신체적 또는 정신적 결함을 타고 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본래부터 가지고 태어난 약함을 타고난 약함이라 정의하겠습니다.
둘째, 만들어진 약함
불합리한 교육으로 주입되거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어떤 제약을 의미합니다. 이런 약함에 약해진 사람은 내제된 제약에 어긋나는 것을 보게 되면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불합리한 행동을 하게 되는데, 그때 문제가 발생하면 그걸 합리화하기 위해 자기합리화를
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으로 만들어지는 약함을 만들어진
약함이라 정의하겠습니다.
이하, 편견과 트라우마, 약하게 만든 이유, 물려받은 감정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세한 것은 ‘우리의 약함에 대해서’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남성
남성의 진정한 억압, 그것은 허세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은 조신함 같은 여성스러움을 강요하기 위해 수치심을
주입했다면, 남성은 강인함 같은 남성스러움을 강요하기 위해 허세를
주입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시절부터 그래왔어요. 남자아이가 아파서 울면 남자답지 못하다며 혼내죠. 아파도 울면 안돼, 슬퍼도 울면 안돼, 보세요. 남성다움을 강요하기 위해 강한 척이라는 허세를 주입하고
있지요? 아파도 안 아픈 척, 슬퍼도 안 슬픈 척, 허세 부리게 만들었어요.
사회 전체가 이런 허세를 교육받았기 때문에 스스로
허세를 부리는 것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이 허세를 부리지 않으면 비웃기까지 해요. 어떤 스포츠에서 남성 선수가 경기에서 지고 난 뒤 울분에 가득 차 눈물을 흘리면 그걸
가지고 비웃더라고요. 남자가 질질 짠다고요.
여성의 수치심과 같이 남성에 허세를 불평등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너무 자연스럽게 내제된 약함이니까요.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수치심이나 허세가 남성중심사회가 만든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드문 것 같아요. 사실 저는 본적이 없어요. 허세로 인한 결과물을 불평등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본적이 있는데, 허세 자체가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은 본적이 없는
것 같아요.
이외 남성의 부당함을 살펴보면 대부분 허세로부터
시작된다는 걸 알 수 있게 됩니다. 불편해서 항의해도 ‘남자잖아, 참아’라는 결론이 나와요.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이에요. 그럼에도 남성은 이걸 받아드릴 수 밖에 없답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웃음을 당하거든요. 약하다고요. 참 웃기죠? 강한 척하는 허세를 강하다고 여기고, 그러한 허세에 약해지지 않은 사람을 약하다고 여겨요. 그래서 남성들은 허세를 쉽게 버릴 수가 없어요. 여성들이 수치심을 버리면 만만한 여자라고 여겨질
위험이 있는 것처럼, 남성들이 허세를 버리면 약한 남자라고 비웃음을 당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에요.
여성들은 여성인권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남성들은 저조하죠. 그것을 보고 비웃을지도 모르겠어요. 남성은 단합이 되지 않는다고요. 하지만 이건 단순히 단합이 되고 안되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부당함을 느껴 남성인권운동을 한다고 가정해보죠. 예를 들어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높은 가산점을 부여 받는 건 부당하다고 주장한다고 해보죠. 그러면 사회반응은 어떨까요? 소소하게 이슈가 있어도 결국 잠잠해지죠. ‘남자잖아, 참아’ 이거예요. 결국. 보세요. 결국 남자들도 불합리한 교육의 희생자일뿐이에요.
허세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복잡하게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이해되셨을 거라 생각해요. 뭐 이해되셨어도 허세가 문제라고 말하고 다니긴 어렵겠지요. 약하다고 비웃음 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참, 어려운 문제죠? 하하
허세가 만들어진 이유야 뭐 … 당연하게 책임을 지게 만들기 위해서죠. 국가와 가족을 책임을 지게 만들기 위해서 강한 것을
강요했어요. 총칼이 무서운 건 성별과 관계가 없죠. 하지만 그 옛날 남성중심사회에선 남자가 보호를 했어야
했어요. 무서워도 보호하게 만들기 위해서 무섭지 않은 척
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허세가 필요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런 허세는 쉽게 버릴
수가 없지요. 허세 부리지 않는 남성은 약하다고 비웃음 당할 위험이
있으니까요. 언제까지 허세부리고, 부리게 만들 건지-
남성에게 강함이 필요하다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강한 척할 필요까지 있을까요? 필요에 의해 강한 척 할 수도 있는데, 필요하지 않는 때에도 강한 척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술 마시고 운전 못해도 약한 게 아니에요. 현명한 거죠.
그럼 허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 몇 가지를 살펴볼게요.
남성 성추행, 성폭행 피해자
남성은 성추행 당하거나 성폭행 당하면 쉽게 말하고
다니지 못해요. 여성과는 다른 이유에요. 거기서 쌘척하지 않으면 비웃음 당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든 쌘 척하고 있어요. 여성에게 당하면 오히려 ‘좋았겠다’라고 말하는 사람조차도 있을 정도예요. 이런 상황에서 쉽게 말하고 다니긴 어렵겠지요. 이 또한 남성중심사회에서 주입해온 강한 척 허세
부리는 것에 영향을 받은 끝에 나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남성의 음주운전
음주운전은 크나큰 죄입니다. 저는 그 죄를 정당화하는 게 아니에요. 왜 그런 죄를 짓는 것인지 알아보려고 하는 겁니다.
남성이 주로 음주운전을 하는 건 ‘술에 취해도 운전을 잘할 수 있다’ 라는 강한 척 허세를 부리다 보니 나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기사의 통계를 참고할게요. 한 외국에서 남성과 여성의 주행거리를 동일하게 설정한
후 사고 발생비율을 계산해본 결과 남성이 여성보다 2배가 많은 사망사고를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가리켜 남성의 음주운전 버릇을 꼽았다고 해요. 남성이 여성보다 음주운전 비율이 높아서 그런 것 같다고 하더군요. 왜 남성이 더 높겠어요. 강한 척 허세를 부리다 보니 그런 것이겠지요. 슬프게도 말이죠.
남성에게 강요된 보호
타이타닉이 침몰했을 때, 성인 남성이 노약자와 여성을 보호하다가 희생되었어요. 그걸 보고 어떤 사람은 부당하다고 주장을 해요. 하지만 그때엔 그게 맞았던 것 같아요. 그때엔 남성중심사회였기 때문에 힘을 가진 남성이
노약자와 여성을 보호했던 거지요. 그걸 어리석다고 말하는 건 시대상을 고려하지 않은 거예요.
그러나 지금은 다르지요. 이제는 남성중심사회가 아니잖아요? 남성이 노약자와 여성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노약자를 보호해야겠지요. 하지만 허세 때문에 그게 실현되기가 어려워요. 우리나라에서 근본적인 성별평등이 이루어지려면 군복무에 관련된 사항을 해결해야겠지요. 하지만 이런 남성이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벗어나기도 어려워요. 쌘 척 해야 하거든요. 젊은 세대는 아무래도 덜 물들었으니까 그에 관해
항의를 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은 우리사회 전체가 허세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에요. 페이스북 같은 SNS를 통해 군복을 입으며 쌘 척하는 남성들이 이슈가 되기도 했지요. 아직도, 아직도 그러한 허세가 남아있고, 그걸 올바르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러니까 바뀌지 않는 거죠.
개인적으로 군복무의 성별평등이 이루어지려면 현실적인
군복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전문병과를 제외한 병사들은 굳이 오래 복무할 필요가 없어요. 소총수가 배울게 얼마나 있나요. 진지구축이나 총 쏘는 법, 화생방교육, 등등은 정말 몇 개월 내에 전부 배울 수 있어요. 6개월에서 9개월이면 시간이 남아돈다고요. 그래서 할 거 없어서 매일 예초나 돌리거나 삽질이나 하고 있죠. 그리고 사실 특기병조차도 예비군으로 들어가면 소총수가
되잖아요. 굉장히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차라리 말이죠, 모든 전문병과를 (국경경계 포함)직업군인으로 돌리고, 나머지 의무복무는 전부 소총수로 돌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 소총수는 기본적인 교육을 한 6개월 정도 받고, 나머지 3개월에서 6개월정도를 예비군에서 훈련 받는 겁니다. 차라리 이게 더 오랫동안 군에 관련된 감각을 잊지
않을 수가 있다고 생각해요. 약 3년에서 6년간 분기별로 1주일씩 혹한기나 유격 같은 훈련을 받은 거죠. 이러면 기간은 줄더라도 훈련의 질은 높아질 거라
생각해요. 뭐 예비군을 고용하는 회사가 부담이 될 수는 있는데
그건 국가에서 지원해야겠지요. 어쨌든 기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게 훨씬 낫다 이겁니다.
이걸 통해 손해를 보는 건 아마 군 고위직이겠지요. 병력이 줄면 고위직도 줄어들게 되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그런 이유 때문에 비효율적인 군복무제도를
나둘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언제까지 소수의 이익을 위해 국민들이 불필요한 낭비를 해야 하나요?
이렇게 불필요한 기간을 줄이면 여성에게도 국가에
대한 시간 투자를 유도하는데 보다 더 쉬울 거라 생각해요. 여성이 군복무를 할 필요는 없어요. 남성도 신체적으로 적합하지 않으면 군복무를 하지 않는걸요. 그저 평등하게 국가에 대한 시간투자를 하기만 하면 됩니다. 타이트하게 줄이면 9개월, 6개월 정도 국가에 대한 시간 투자를 하고 3개월 정도 예비군 형식으로 응급처치나 재해대피요령을 받으면 괜찮을 거라 생각해요.
뭐 어찌되었건 여성도 같이 국가에 대한 시간을 투자할
때 비로소 진정한 성별평등이 시작되겠지요. 언젠가 어떤 여성강사가 성별평등을 위해 같은 의무를 져야 한다는 의무와 권리의 상관관계라는 논리적인 이야기를 했다가 비판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참 슬프죠. 남성이 여성의 수치심에 길들여진 것처럼, 여성도 남성의 허세에 길들여져 있어요. 손익관계를 떠나서라도 이렇게 불합리하게 행동하는 건 남성이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박혀 있기 때문이에요.
이런 허세를 타고난 것으로 생각하니 허세로 발생하는
부당함에 대해서는 항의하면서 패배에 대한 울분으로 슬퍼서 눈물 흘리는 것조차 질질 짠다고 비웃는 모순이 발생하죠. 불합리한 교육은 그 어떤 것도 불합리한 행동을 낳습니다. 이외에도 하나하나 살펴보세요. 남성이 느끼는 부당함은 대체로 허세 때문에 발생했거나
해결할 수 없는 거예요. 참 허세 때문에 괴로운 것도 괴롭지 않은 척 해야 하고, 슬픈 것도 슬프지 않은 척 해야 하고, 사소한 것 하나하나 쌘 척하는 건 너무 가여워요.
그러니 여성들은 허세에 찌들은 남성들을 보고 비웃지만
말고 어느 정도는 배려를 할 생각을 해야 해요. 남성들의 약함을 배려해서 허세를 권장하거나 유도하지는 말아야 해요. 그리고 남성들도 자신들이 허세에 약해져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더 이상 약함을 나누거나
물려주지는 말아야겠지요. 약해지면 괴로우니까요.
여성들이 과거 여성들이 겪은 부당함을 물려받았다면, 남성들도 남성들이 행하던 부당함을 물려받았어요. 그러니 우리 사회에 아직도 남성의 허세에서 벗어나오질
못하고 있는 거죠.
뭐 일단 여기까지 쓸게요. 중요한 건, 우리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것들, 너무 자연스러워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야말로 우리를
억압하던 제약이었음을 말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 제약은 악습이에요. 저는 우리나라 문화를 사랑하지만 이 악습마저 사랑하지는 않아요. 불필요한 걸 없애고 우리 손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대외관계
예민한 문제니까 몇 가지만 간단히 말할게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고 하지요. 저는 그것을 긍정해요. 하지만 관점이 조금 다른 것이 아닐까 생각될 때도
있어요. 저는 역사를 통해 반성을 하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해요.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어떤 분들은 반성보단 증오를 잊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일본에 대한 증오나 북한에 대한 증오나, 결국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닌 이상 물려받은 것일
텐데요. 증오를 물려받고, 또 물려주려고 하는 걸 보면 참 슬픕니다. 다른 사건들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역사를 통해 증오를 잊지 않기 보다는 반성을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것 또한 올바름을 물려받은 것이지요. 우리의 소원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소원이에요. 그리고 그 소원을 물려받은 사람도 있는 거죠. 지금 저는 그렇게 통일을 바라지 않아요. 뭐 어차피 이제는 전세계 사람이 하나의 민족화가
될 거라 생각하고 있기도 하니까요. 만년? 천년? 어쩌면 백년 안에 하나의 민족이란 인식이 당연해 질 거라 생각해요. 우리가 과거의 세계대전을 어리석다고 여기는 것처럼, 미래에는 지금 국가간의 신경전을 어리석다고 여길지도
모르죠.
이외 다양한 것을 전부 살펴보세요. 불합리한 건 전부 불합리한 교육에 영향을 받은 거랍니다.
어른과 아이는 나중에 쓰도록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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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
오래 전, 아마 학생일 때, 분노를 연기한 적이 있습니다. 누가 봐도 화가 날만한 상황에 화가 나지 않자 평범해지기
위해 화가 난 척을 한 것이죠. 내용은 좀 돌려 말해서, ‘너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인간이다.’ 라는 말을 가까운 사람에게 들었어요. 보통이면 화가 나거나 슬퍼하겠죠. 그런데 아무런 감정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순간적으로 그 말이 나오게 된 연유를 깨닫자 마자 화가 나지 않은 거예요. (물론 이해 못하는 건 화가 났어요.)
그걸 보고 저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여기게 됐어요. ‘다른 사람들이면 화가 나서 화를 낼 텐데 왜 나는
화가 나지 않는 거지’, 그래서 다른 사람처럼 평범해지기 위해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되었어요. 화가 나지 않아도 화를 나는 척을 하게 된 거죠. 분노를 연기하는 나와, 그 연기를 하는 걸 지켜보며 비웃는 나와, 그 둘을 전부 지켜보며 한심해하는 나, 그 순간 갈라짐을 동시에 느끼며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이건 생생해요. 큰 소리로 화를 내는 자신을 보며 ‘연기 잘하네’ 라고 조소한 것은 잊지 못해요. 끔찍했어요. 그럼에도 저는 그게 평범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 후에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평범에 맞춰 감정을 연기했고, 그 때마다 스스로를 자책해가며 절망했어요. 제가 지쳤다는 건 바로 이거예요. 만들어진 평범에 얽매이는 게 지쳤다는 거예요. 더 이상 못하겠어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또 그걸 할지도 몰라요. 습관이 되었으니까요. 지금은 그게 걱정이 돼요. 불안도 하고요. 어쨌든 제가 말한 평범을 포기한다는 건 그런 의미예요.
미세먼지, 무엇이 우리를 불안하게 했는가
미세먼지의 의견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지요. 그 중 과학계의 의견이 있어 귀담아 들었습니다. 겨울철에는 중국의 영향이 70프로 가량되지만 봄철에는 15프로 가량이다 라는 의견을 들었어요. (기사로만 접해서 그 의견이 전부인지는 모르겠어요.) 저는 그 의견을 의심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것과 별개로 최근에 연달아 발생한 미세먼지
저감조치를 경험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에요. 중국의 영향이 크지 않다면 그 정도의 먼지가 국내의 영향으로만 커져나갔다는 건데, 그건 좀 이상한 거 같아요. 외부의 요인이 적은 상태에서 그렇게 큰 차이로 먼지가 늘어났다가 줄어들 것 같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관점을 달리해야겠지요. 봄철에 중국의 영향이 15프로다, 최근 미세먼지 저감조치가 연달아 발생했다, 이 두 가지가 진실이 되려면, 봄철의 영향이 15프로라는 건 평균일 뿐이다, 라는 결론이 나오죠. 특정 날에는 15프로 이상이 될 수 있는 것 아니에요?
특정 날에는 15프로 이상이 될 수도 있다, 라는 결론이면 우리 국민들이 불안을 느끼는 건 매우
타당해요. 우리가 실질적으로 불편과 불안을 느끼는 건 평균이
아니라 고점입니다. 100~150정도가 되면 외출도 막을 정도로 실질적인 불편이 나타나죠. 그리고 그 불편이 일상화 될까 봐 불안을 느껴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국민들을 안심하게 만들 수 있는 건 특정
날에 대한 진실과 안심하게 만들 수 있는 대책을 내놓는 거겠죠. 다시 말하지만, 저는 과학계를 의심하지 않아요. 저는 앞으로 인간의 개성이 국적이 아닌 직업, 취미 등으로 분류될 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가 스스로 깨닫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하나의
민족화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선진국에 속한 사람이라면, 이제는 국적보다는 직업이나 취미가 개인의 개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우리나라 과학자여서 신뢰하기 보다는 과학자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자존심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맹신은 아니지만요. 객관적으로 보면 평균적으로는 신뢰할만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신뢰와는 별개로, 자연현상만 보고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국민들이 불안해 하는 현상도 관찰해서 국민들의 마음까지
다독여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뭐 의견 전체를 본 것은 아니어서 어쩌면 그 방법까지 있을지도 모르지만요.
미래
과거를 되돌아보며 스스로를 용서했고 현재를 관찰하여
약함을 알아냈고 미래를 바라보며 잠들었던 감정과 욕구와 욕망이 깨어났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래를 보니 현재가 너무 초라하네요. 할 게 너무 많아요. 그래도 지난날의 삶을 되풀이는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걸 위해 준비해온 기간이었으니까요.
글
제가 글을 쓸 때 머리 속에서 쓴 걸 그대로 옮겨
적는 것이 아니라, 쓰면서 정리되기 때문에 문장의 시작과 끝이 달라질 때가 있어요. 그러다 보니 조사나 접속사가 잘못 활용될 때가 많았어요. 처음부터 잘 쓰거나 한번은 퇴고를 해야 하는데, 나름대로 정해둔 시간 안에 작성하려고 하다 보니
오타나 비문이 넘쳐나더군요.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단 쓰고 본 것은, 완성에 집착하기 보다는 쓴다는 습관을 길들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뭐 쓰다 보면 더 늘겠죠. 아마도. 이런 경험 때문에 편집자는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 생각하는 법은 이제 나름대로 할 줄 안다고는 생각하는데 말하는 기술이나 쓰는 기술이 부족하네요. 마음이 약해질 때엔 누군가에게 이런 기술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 줄 사람이 있었으면 하기도 해요. 하지만 누가 도와주겠어요. 저 스스로 노력해야겠지요.
그럼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