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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가짜 평등 시대, 자유인가 지배인가 (0) 2019/06/02 PM 11:25

가짜 평등 시대, 자유인가 지배인가

 

 

 

자유와 평등을 사랑하십니까?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대부분 사랑한다고는 말할 것 같지만, 사랑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유와 평등이 가져다 주는 이익만을 사랑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뭐 특별히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불평등한 체제를 바꾸기 위해 일어난 혁명들도 결국 결과적으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자리만 바꿨으니 말입니다. 자본주의의 끝은 제국주의의 도구로 전락했고, 공산주의의 끝은 독재자의 독재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했을 뿐입니다. 그나마 끝을 보고 반성한 자본주의가 평등한 세상이 되었으니, 자본주의의 끝에 의해 희생된 한국으로서는 격세지감입니다.

 

평등, 평등, 평등,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평등이 과연 평등한 것입니까? 누군가가 부자유를 느끼게 된다면 온전한 자유를 가진 사람과 불평등한 관계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니 자유와 평등은 땔래야 땔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관계라 생각됩니다.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은 모두가 자유로운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독재자의 독재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한 공산주의는 독재자의 지배아래 모두가 평등한 구역질 나는 가짜 평등이라는 겁니다.

 

이 가짜 평등은 우리 사회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불평등한가?”에 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 물음에 10명 중 8명은 불평등하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불평등한 사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평등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불평등을 바꿀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 평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이 가져다 주는 이익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상 불평등을 사랑하기 때문에 바꿀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겁니다.

 

참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몇 가지 그럴듯한 변명거리로 불평등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언젠가 나이든 사람과 어린 사람과 반말로 대화하는 것에 대한 기사를 봤습니다. 그 기사의 덧글은 거부감이 느껴진다며 불평을 터트리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단순했습니다. “너의 부모가 어린 애들한테 반말을 듣는다고 해도 괜찮겠느냐?” ? 그럼 당연히 괜찮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평등이 뭔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위계질서를 핑계로 불평등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는 것 같았습니다. 도대체 뭐 어쩌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평등이 좋다면서 실제로는 불평등을 좋아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러니 평등이 삐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불평등에 대한 애정은 자연스럽게 사회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어린 연예인이 나이든 택시기사를 폭행한 것에 대한 기사를 봤습니다. 여기서도 위계질서라는 불평등에 대한 애정이 나타납니다. 도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중점이 사람이 사람을 폭행했다는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건방지게 어린 사람이 나이든 사람을 폭행했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분명 폭행은 나쁜 짓이지만, 거기에 연령이 왜 작용되어야 하는지, 얼마나 불평등을 사랑하는지, 답답했습니다.

 

기자와 대통령과의 대담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기자와 대통령과의 대담에서 기자가 무례했다고 합니다. 표정이 안 좋다거나 말을 끊는다거나 다소 무례한 질문을 한다거나 했답니다. 그런데 거기서 슬펐던 것은, 감히 기자 따위가 대통령에게 무례하게 대하다니, 라는 비판을 보았을 때입니다.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얼마나 불평등을 사랑하는 겁니까? 평등을 사랑했다면 비판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나타난 무례함을 지적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거기서 기자 따위가 감히 대통령에게 무례하게 행동했다는 비판이 나오다니. , .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불평등에 대한 애정공세는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가능한 여성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남성들이 많은 커뮤니티를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남성이 많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성을 불평등하게 대할 때가 있었습니다. 중립적이고 평등하길 희망했던 저는 그래서 여성의 편을 들어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들어주기 어려워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기주의에 평등이란 이름을 붙여 이용하는 것까지 편을 들어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평등을 주장하면서 평등이 가져다 주는 이익만을 사랑하니 어찌 제가 편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조금은 이성적으로 행동했으면 좋겠습니다. 최근엔 심지어 법치 위에 서려고 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겁니까.. 부디 평등이 주는 이익만이 아니라 평등 자체를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인종차별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입니다. 어떤 특정 흑인이 눈을 찢으며 동양인을 놀렸다고 모든 흑인을 인종차별 해도 된다는 논리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평등을 사랑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돕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누가 봐도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른 동태복수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음에도 차별을 즐겨 합니다. 최근 미세먼지가 심해지면서 이런 인종차별에 대한 애정은 더더욱 커졌습니다. 미세먼지와 프레온가스를 배출한 중국인은 인종차별을 받아 마땅하다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건 인종차별이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인류의 생존에 해를 끼친 행동에 대한 비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인종차별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차별하는 것을 뜻하지, 잘못한 것을 지적하는 것을 뜻하진 않습니다. 미세먼지를 가지고 인종차별이란 불평등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진 말아야 됩니다.

 

자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유와 평등을 위해 나타난 혁명으로 가장 큰 혜택을 본 자본가들이 자본으로 계급화되는 현상을 방치하고 신분제가 되어가는 세습을 옹호합니다. 자본가들이야말로 자유와 평등을 사랑해야 함이 마땅한데, 불평등을 사랑하고 있다는 이야깁니다. 입 발린 말로 평등에게 애정표현을 하던 자본가들이 불평등과 바람이 났으니 참 재미있는 세상입니다. 자본가들이 자신만의 자유와 평등이 아닌 모두의 자유와 평등을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노조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자의 자유와 평등을 외치는 사람들이 협력업체나 비정규직은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들의 응원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평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평등이 가져다 주는 이익만을 사랑하는 노조를 어떻게 응원하겠습니까? 노조는 투쟁, 투쟁만 외칠 것이 아니라 회사와 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대의를 주장했어야 합니다. 대의가 없는 투쟁은 집단이기주의일 뿐입니다.

 

위계질서로 변명거리로 삼고, 사회적 지위를 변명거리로 삼고, 성별적 특성을 변명거리로 삼고, 일반화의 오류를 무시한 동태복수법을 변명거리로 삼고, 자본주의를 변명거리로 삼으며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누가 자유와 평등을 사랑했던 겁니까? 지금까지 자유와 평등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대부분은 자유와 평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자유와 평등이 가져다 주는 이익만을 사랑해왔던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만큼, 이 시대를 가짜 평등 시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이러한 가짜 평등 시대는 자유와 지배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번 조명하게 만듭니다. 가짜 평등 시대기 때문에 혼란을 겪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자유와 지배, 이 세상은 미국의 자유와 중국의 지배로 크게 분류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일방주의를 비판하며 미국을 멀리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압니다. 여러 나라에 간섭하고 전쟁을 벌이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일방주의적 성격을 지녔습니다. 아니 그걸 모를 리는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대놓고 자신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기본적인 사상은 중화사상이고 나타나는 행동은 예전에는 동북공정, 요즘에는 일대일로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은 자유를 강요하고 중국은 지배를 강요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유와 지배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 자체가 자유와 평등을 사랑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게 됩니다. 정말로 자유와 평등을 사랑했다면 애초에 선택지 자체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지배에게 힘을 실어줄 수가 없습니다. 그 개 같은 미세먼지와 프레온 가스는 둘째 치고서라도 말입니다.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건 지배해달라고 애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지배하겠다고 천명한 자들에게 힘을 실어줘서 미래엔 어쩔 겁니까? 지금도 다른 나라 신경 안 쓰고 미세먼지나 프레온가스를 배출하는데, 패권국가로 거듭나게 되면 어떻게 될지 뻔하지 않습니까?

 

뭐 우리나라는 좀 특수한 경우기는 합니다. 침략으로 피폐해진 나라기 때문입니다. 침략 때문에 민족주의가 격화되어버렸습니다. 민족주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침략의 원인이었던 자본주의를 멀리하고, 침략을 했던 일본을 멀리하고, 침략을 같이 당했던 북한을 가까이 합니다. 자유와 지배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건 이런 이유도 크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민족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를 정체성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를 갖춘 민족주의자가 아닌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이은 민주주의자입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민족의 언어와 문화가 소중하지 않다는 건 아닙니다. 당연히 소중합니다만 우선순위가 다르다는 겁니다. 민주주의는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민주주의를 우선순위로 둔다면 아무리 일방적이라고 하더라도 자유를 가까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자유를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보통 자유가 비난을 받는 것은 자유를 강요했기 때문입니다. 자유의 강요는 갈등을 만들게 되고, 갈등은 곧 일방주의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그러니까 자유를 강요하지 않아도 나타날 수 있는 무책임, 부도덕 따위들은 자유의 강요에 대한 비난을 가속화시켰을 겁니다. 더구나 이들은 조작을 해서라도 자유를 강요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있습니다. 통킹만 사건처럼 말입니다. 이런 사건은 자유에 대한 거부감을 증대시켰습니다.

 

그럼에도 자유를 가까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를 강요한다고 하더라도 지배를 가까이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애초에 선택지 따윈 없었던 겁니다. 그렇지만 대놓고 공개하기는 또 어렵습니다. 우리나라는 위치, 크기, 경제 등의 이유 때문에 대놓고 멀리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방향성은 고를 수 있습니다. 어느 방향으로 향할 지 분명해지면, 명분이나 타이밍 등을 설계하기가 편하기 때문입니다.

 

자유와 지배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건 이념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진영논리나 경제적인 이유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친미, 친일, 친중, 친북 따위의 진영논리나, 미국이나 중국에 공장을 세우거나 투자한 사람들의 경제적인 이유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자유와 평등을 사랑하는 민주주의자라면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자유와 평등이 없는 정치와 경제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가짜 평등 시대라고 부를 만큼 불평등한 사회임에도 우리(자본주의)는 저들(공산주의)보다는 자유와 평등을 누리고 있습니다. 독재자의 독재 도구로 전락한 공산주의보다는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진정한 평등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정치논리고 경제논리고간에 민주주의자라면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사랑하십니까?

 

 

 

---

(내가 뭐라고 쓴 거야…)

 

유람선 참사 희생자 분들께 애도를 표합니다.

 

한일관계 악화, 이거 감정문제죠. 몇 가지 사실 나열만 해봐도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지요. 한국 대통령이 일본 총리에게 청구권 이야기 했을 때 일본 총리 얼굴이 빨갛게 되었죠. 그리고 일본 외교에서 최근 한국 대통령이 나서야 된다는 다소 무례한 발언을 연거푸 했다는 점.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다고 발언한 점. 의원 방문 냉대. 이례적일 정도로 적대적인 태도. 감정 말곤 없죠. 간단히 말해, 공석에서 청구권 이야기를 해 정치적 입지 타격을 줘서 일본 총리가 한국 대통령한테 삐쳤다는 거예요. 뭐 다 아시겠지요. 그렇지만 알면서도 해결 힘든 게 감정 문제니곤란하겠어요.

 

이미지로 먹고 사는 정치인의 개념으로 바라보면 삐친 이유를 알 수 있지요. 체면 구기게 만들었으니까, 그리고 같은 정치인으로서 배려가 없었으니까 삐쳤다고 봅니다. 그런 예민한 사안은 공개되지 않는 곳에서 협의해도 되는 문제니까요. 국민들은 정치적인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만, 정치인은 정치인이고, 그런 사정은 다른 나라가 알 바가 아니지요.

 

그러니 이건 청구권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체면 구겨서 발생한 감정문제지요. 뭐라고 해야 할까, 자세한 건 모르는데 일본 문화 자체가 체면 구기면 푹 하고 죽어나가던 나라니까, 우리가 생각하던 체면과는 좀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체면 구긴걸 풀어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따로 이야기해서 체면 구긴 게 해결 되면 좋겠습니다만뭐 아무튼 우리나라 국익을 위해서라도 여러모로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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